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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2 14:00:25

해리 찰스 화이팅

파일:해리 찰스 화이팅.png
성명 해리 찰스 화이팅(Harry Charles Whiting)
한국 이름 황호리(黃浩里)
생몰 1865년 7월 10일 ~ 1945년 8월 18일
출생지 미국 아이오와 헨리 카운티 마운트 플레전트
사망지 미국 아이오와 제퍼슨 카운티 페어필드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미국의 장로회 선교사.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해리 찰스 화이팅은 1865년 7월 10일 미국 아이오와주 헨리 카운티 마운트 플레전트에서 부친 존 H. 화이팅과 모친 줄리이 메이 화이팅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마운트 플레전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은행가 집안이었다. 그는 파슨스 대학 예비학교를 졸업한 뒤 장로회 목사로서 17년간 브라이튼, 크로스 레인즈, 리버티빌에서 목회 활동을 벌였다. 이후 의료 선교사로 발탁된 그는 1903년 11월 부인과 함께 한국에 내한하여 1903년부터 1906년까지 평양 제중병원에서 의료 선교를 했다. 1906년 5월 재령선교지부로 전임하여 재령병원을 세워 운영하며 6천 명의 환자를 진료했으며, 의료조수 유몽택을 비롯한 학생들을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의학서로 지도했다.

1918년 선교사를 사임하고 1919년 9월 귀국한 그는 미국인들이 한국의 상황을 모르고 일제의 언론 활동에 속고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해 한국친우회에 가입하여 자비로 인쇄한 호소문ㆍ통고문, 강연 등을 통해 일제의 만행과 한국의 실정을 알리기에 힘썼다. 또한 1920년 11월까지 로스앤젤레스ㆍ애틀랜타 등지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 통치의 잔학상을 알리는 강연 활동을 260여 차례 하였다. 그리고 1921년 10월 덴버에서 일주일 동안 주류하며 강연하여 덴버한국친우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목회활동에 전념하다 1945년 8월 18일 아이오와주 제퍼슨 카운티 페어필드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해리 찰스 화이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