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0-02-06 19:21:46

호국전쟁


호국전쟁
護國戰爭
National Protection War
파일:호국전쟁.jpg
시기 1915년 12월 25일 ~ 1916년 7월 14일
장소 중화민국 남부
교전세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YuanFlag1.svg.png 중화제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북양군벌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호국군
지휘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YuanFlag1.svg.png 위안스카이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돤치루이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쉬스창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장쉰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펑궈장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리위안훙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차오쿤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리춘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진윈펑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우페이푸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장쭤린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차이어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탕지야오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리례쥔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량치차오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루룽팅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천춘쉬안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천중밍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쑨원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후한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랴오중카이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다이지타오
결과 제제 취소와 공화정의 복고

1. 소개2. 배경
2.1. 위안스카이의 독재와 홍헌제제2.2. 반원 세력의 합작
3. 전개
3.1. 호국군의 조직3.2. 반원세력의 확대3.3. 제제 철회3.4. 멈추지 않는 반원 봉기3.5. 군무원 성립3.6. 위안스카이의 죽음3.7. 전쟁의 끝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인물6.2. 사건

1. 소개

"우리가 쟁취하려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중화민국 4억 민중의 인격이다.
- 차이어

1915년 12월 25일부터 1916년 7월까지 이어진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 시도에 대한 전국적인 저항전쟁이다. 제3차 혁명이라고도 하며 실패로 돌아간 계축전쟁과 달리 위안스카이의 제제 취소를 이끌어내고 중국의 공화제를 사수하게 되었다.

2. 배경

2.1. 위안스카이의 독재와 홍헌제제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1913년 7월 제2차 혁명을 진압한 위안스카이는 1913년 10월 10일, 신해혁명 2주년을 맞이하여 자금성 태화전에서 마치 황제처럼 화려하게 정식 대총통에 취임했다. 위안스카이는 연일 독재를 강화하며 12월 29일 5년 중임제의 대총통선거법 개정하여 10년 무한 연임제로 바꾸어 사실상의 종신 집권과 세습까지 정당화했으며[1] 1914년 1월 10일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하고 1월 28일 각 성의 성의회도 해산시켰다. 1914년 3월 20일 위안스카이는 약법 수정대강 7조를 제출, 대총통에게 황제와 같은 막대한 권력을 부여하여 '초급총통제'를 실시했다. 5월 1일 초법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신약법이 발표되었고 중국의 민주정치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런 황제적인 권력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아예 황제에 즉위하는 것을 꿈꾸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되고 싶었던 위안스카이의 아들 위안커딩이 위안스카이를 부추겼고 위안스카이는 혁명파와 청나라의 복고를 주장하는 복벽파를 모두 탄압하며 군주제 복고의 여론을 조성, 급기야 1915년 12월 11일 국체를 논한다는 이유로 참정원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참정원 국민대표 1993명은 만장일치로 위안스카이를 황제에 추대했다. 위안스카이는 이를 짐짓 사양했으나 12월 12일 아침 다시 한번 추대를 받자 이를 받아들여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홍헌으로 정해 1916년 홍헌 원년으로 하였다. 이를 홍헌제제라 하고 중화민국 중화제국이 되었다.

2.2. 반원 세력의 합작

한편 2차 혁명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쑨원은 2차 혁명의 실패 이유가 통일된 영도력의 부재 때문이라 생각하고 1913년 9월 도쿄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여 왕통, 다이지타오, 천치메이, 장제스, 장런제 등 혁명가들을 입당시켰다. 1914년 6월 22일 쑨원은 도쿄에서 간부선거회를 통해 중화혁명당 총리로 선출되었고 7월 8일 200여명을 소집하여 중화혁명당 성립대회를 개최하였다. 9월 1일 중화혁명당 성립이 대외적으로 공표되었고 총무부장에 천치메이, 당무부장에 쥐정, 군무부장에 쉬충즈, 정치부장에 후한민, 재정부장에 장런제를 임명하고 각 성에 지부를 수립했다. 중화혁명당의 당원은 곧 1만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국내에서 중화혁명군을 조직하고 위안스카이의 부하들을 향한 테러를 감행함으로 토원운동을 전개했다.

쑨원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던 황싱은 미국으로 외유하였다. 한편 일본에 있으면서 중화혁명당에 가입하지 않은 혁명가들이 통일공화당, 국민당 온화파들을 규합하여 일본에서 구사연구회를 조직했다. 정당의 이름이 아니라 연구회의 이름을 취한 것은 자신들이 중화혁명당에 대립적인 조직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미국에 있는 황싱에게 구사연구회 가입을 촉구했고 황싱이 수락하면서 황싱이 구사연구회를 지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언론을 통해 반 위안스카이 선전을 하고 위안스카이의 매국행위 폭로와 반원단체들의 규합을 호소하였다. 이 때문에 진보당, 서남의 반 위안스카이 실력자들, 중화혁명당을 비롯한 다른 반정부 세력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쑨원은 황싱에게 공동으로 위안스카이를 타도하자고 제안했고 황싱이 쑨원의 합작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구사연구회와 중화혁명당은 합작을 하게 되었다.

량치차오의 진보당은 처음에는 위안스카이를 지지했으나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즉위하려 하자 이에 반대했다. 1915년 9월에 들어 량치차오는 맹렬한 군주제 반대 운동을 전개했고 홍헌제제 이후에는 루룽팅의 초청으로 광서 지역으로 이동해 위안스카이에 대항하는 군사 행동을 촉구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리례쥔, 이근원, 여지 등 특정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구국민당 인물들도 토원을 주장하며 반 위안스카이 대열에 합류했고 신해혁명 때 운남에서 봉기했던 운남도독 차이어 등이 량치차오의 영향으로 강경히 토원을 주장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차이어의 세력을 위협적이라 여겨 차이어를 베이징에 불러 사실상 연금시켰으나 차이어는 자신의 부하 출신인 운남장군 탕지야오와 암호전보로 긴밀히 연계하며 궐기를 준비하게 했고 11월 11일 베이징을 탈출해 톈진의 일본인 병원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타이완, 홍콩, 하노이를 거쳐 12월 19일 운남성의 성도 쿤밍에 도착했다. 탕지야오 등 실력자들도 합류하여 위안스카이에게 제제 취소를 요구하고 위안스카이가 응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위안스카이를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3. 전개

3.1. 호국군의 조직

12월 23일 탕지야오, 차이어, 리례쥔 등이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운남장군 탕지야오와 순안사 임가징의 명의로 위안스카이에게 공화제를 지키고 군주제를 영원히 폐지할 것, 제제를 부추긴 양탁[2], 엄복, 호영, 주계검, 돤즈구이, 주자제, 량스이, 장진방, 뇌진춘, 원내관 등 13명의 측근의 처단을 요구했다. 그리고 24시간 이내에 만족할만한 대답이 없으면 무력으로 최종적 해결에 나서겠다는 통보를 했다. 위안스카이는 그간 각 지방의 장군들이 서로 즉위를 부추겼기 때문에 탕지야오 등이 왜 갑자기 제제 취소를 요구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정사당에게 상황을 알아볼 것을 지시하였다. 위안스카이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차이어 등은 호국군을 조직하여 탕지야오를 도독 겸 제3군 총사령관으로 삼고 차이어를 호국군 제1군 총사령관, 리례쥔을 호국군 제2군 총사령관으로 삼아 1915년 12월 25일 운남성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들은 위안스카이가 민국을 배반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하는 죄를 성토하고 국민이 합심협력하여 공화국을 옹호하며, 제제를 영구히 저지한다, 중앙과 지방의 권한을 정하고, 각 성 민력의 자유로운 발전을 도모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각 성의 봉기를 호소했다. 이에 계축전쟁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청첸 등이 귀국하여 호남성에서 봉기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호응이 뒤따랐다.

차이어의 군대는 3천에 불과한 반면, 위안스카이의 군대는 압도적인 세력이었으므로 제1차 세계 대전에 바빴던 열강들은 대부분 운남에서의 반란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제제를 위해 많은 재정을 낭비한 상태라서 반란을 신속히 진압할 여력이 되지 못했다. 유럽과 미국은 위안스카이의 차관을 거절했고 위안스카이는 담배와 술의 전매수입을 담보로 2천만원의 국내공채를 발행해 전쟁비용을 마련했다.

차이어의 1군은 사천으로, 리례쥔의 2군은 호북, 호남으로 진출했으며 탕지야오는 후방에서 지원을 맡았다. 이들의 반란 때문에 각국 공사들이 국내 통일이 달성되지 않았다고 난색을 표하자 위안스카이는 홍헌원년 원월 원일인 1916년 1월 1일 즉위식을 거행한다는 계획을 2월로 연기하고 그저 총통부를 신화궁으로 개칭하고 국호를 중화제국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외교 공문에는 홍헌 원년을 쓰지 못해 민국과 제국이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1916년 1월 5일 위안스카이는 운남원정군을 조직하여 차오쿤을 파견했다. 차오쿤은 부대를 두개로 나눠 사천과 호남 서부 지역으로 진군했다. 위안스카이는 중난하이에 정벌을 총괄하는 임시 사무실을 설치하는 한편 일본의 지지를 얻기 위해 다이쇼 덴노의 즉위를 경하하기 위해 대훈장을 수여하겠다는 구실로 농상총장 주자제를 일본에 특사로 파견했다.

위안스카이는 길림, 봉천의 사법권, 지포철도의 북반부 관할권, 톈진, 산동 연해의 해안선을 일본에 양도하고 일본인 재정고문과 군사교관들을 초빙하며 중국의 병기창을 중일 공동으로 경영하는 대가로 일본의 제제 지지와 내란 진압을 요청했다. 이 밀약은 주중 프랑스 공사 콩티가 입수하여 미국 언론을 통해 폭로했고 위안스카이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1월 14일까지 주자제에게 특별연회를 베풀며 그를 친왕으로 대우하겠다고 약속하던 일본은 1월 15일, 1월 24일로 예정되어 있던 주자제의 일본 방문을 다이쇼 덴노가 피한여행을 떠났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더군다나 위안스카이의 제제를 묵인하던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외상 가토 다카아키가 사퇴하고 이시이 기쿠지로로 교체되면서 일본의 태도도 급변했다. 이시이 외상은 위안스카이의 제제에 반대하면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게 위안스카이의 제제를 제어하기 위한 공동행동을 주문했다. 위안스카이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조건으로 연합국들의 승인을 받으려 했지만 일본은 중국이 승전국이 될 경우, 산동반도의 독일 조차지를 회복하여 일본의 이익을 해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이 역시 반대했다. 1월 19일 일본은 즉위를 미룰 것을 요구하며 듣지 않는다면 무력간섭을 하겠다고 위협했고 위안스카이는 2월 초순으로 예정되어 있던 즉위식을 더욱 연기한다고 밝혔다.

3.2. 반원세력의 확대

한편 호국군이 사천군을 격파하고 호남성 귀양에 이르자 귀주호군사 유현세가 1916년 1월 27일 귀주성의 독립을 선포했고 2월 1일 1군 동로군이 사천성 납계를 점령했다. 사천군 유존후가 호국군에 합류했고 사천성 기강, 호남성 황현, 마양, 지강 등이 잇달아 호국군의 손에 들어갔다. 이 와중에 위안커딩이 위안스카이를 속이기 위해 순천시보를 날조해왔다는 사실까지 들통이 나면서 위안스카이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2월 23일 위안스카이는 황제에게 올리던 문건들을 받지 않겠으며 운남의 사건을 평정하기 전까진 즉위하지 않겠다고 각국 공사들에게 통지했다.

위안스카이가 파견한 북양군은 사천에서 물자가 부족했던 호국군을 격퇴하여 서부, 납계, 기강 등을 점령했다. 하지만 호남 전선에서는 여단장 당천희가 혁명군에 가담하고 사령관 마계증이 병환으로 사망하는 등 북양군이 밀렸다. 당천희의 배반 소식을 들은 위안스카이는 격노해서 날뛰었지만 주문병이 호국군을 강타하여 호남 서부에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곧 반란을 평정할 수 있겠다고 기뻐했지만 3월 15일 귀주선무사로 파견된 루룽팅이 호국군의 기세를 보고 량치차오의 설득을 받아 휘하의 천빙쿤, 탄하오밍을 이끌고 광서성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는 루룽팅이 위안스카이가 용제광, 용근광 형제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결과였다. 광서의 독립에 북양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펑궈장과 돤치루이 등 제제 반대파들은 계속 물자를 요구하며 태업을 일삼았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원충추를 서주에 파견해 장쉰에게 출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완고한 복벽파였던 장쉰은 선통제를 옹호하며 위안스카이의 즉위를 질타했다. 여기에 펑궈장, 리춘, 진윈펑, 주서, 탕향명 등도 제제에 반대한다는 보고를 받은 위안스카이는 절망하여 자신의 집안에서 59세를 넘은 사람이 없으니 58세인 자신도 곧 죽을 것이라고 부르짖었다.
"끝장이야! 모든 게 끝장이야! 어젯밤에 하늘에서 큰 별이 하나 떨어지는 걸 봤어. 이건 내 평생에 두번째로 본거야. 처음 봤을 때는 이홍장이 죽었어. 이번에는 아마 내 차례일 거야."

쉬스창이 편지를 보내 지금이라도 제제를 취소하면 돌이킬 수 있다고 조언하자 3월 17일 위안스카이는 양사기를 불러 대책을 논했다. 양사기는 군주제 취소만이 평화적인 해결이라고 밝혔고 위안스카이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황제에서 물러나서도 총통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 때문에 위안스카이는 쉬스창을 국무경으로 삼아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함께 중앙 정치를 맡기고 량스이를 시켜 차이어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이어 량치차오에게 운남과 광서를 설득해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캉유웨이에게도 량치차오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위안스카이는 그 사이에 입법회의를 통해 군주제 철회와 더불어 총통으로의 재선출을 노리고 있었다.

3.3. 제제 철회

위안스카이가 총통 자리를 사수하려는 사이에 호국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사천성 납계, 강안, 남천, 기강과 호남성 영상, 영순 등을 점령했다. 위안스카이는 국무경, 각부 총장, 참정원 참정, 숙정청 장관, 평정원 원장을 불러 군주제 철회 문제를 논했다. 군주제 철회에 사실상 이론이 없었으나 위안커딩이 군주제 철회 반대를 호소했다.
주안회가 성립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미 7개월이 되었습니다. 이 7개월간에 얼마나 많은 심혈을 쏟았고,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고,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까? 천신만고를 거쳐 군주제를 실시하는 목적에 도달하였습니다. 서남 몇 개 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하여 군주제를 철회한다면 군주제 반대자들의 목소리만 키우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황제가 되지 않는다 해도 총통은 반드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서남 각 성은 폐하께서 황제가 되는 데 대해서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독립을 선포하여 군주제를 철회하라고 협박하는데 이후에 총통이 되는데도 반대하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지금 폐하께서는 적극적으로 군주제를 실시하는 것이 오히려 상책입니다. 서남에서 반발한다 하지만 북방의 군민들은 잠잠하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이때 즉위하여 서남 각 성이 군사로 북방을 침범한다 해도 거리가 멀고 넓은 땅에서 오래 버티면 베이징까지 쳐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승부는 아직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들이 귀순하지 않는다 해도 장강이나 황하를 경계로 한 것에 불과합니다. 폐하께서 온 나라를 통일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강산이 절반은 남아있지 않습니까? 오늘 스스로 군주제를 철회하는 데 비하면 어느 것을 얻고 어느 것을 잃겠는지 폐하께서 잘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위안스카이는 이 상소문을 보고 또 흔들렸으나 3월 20일 강소성의 펑궈장, 장쉰, 강서성의 리춘, 절강성의 주서, 산동성의 진윈펑 등 5명의 장군이 연명으로 위안스카이에게 조속히 제제를 취소하고 운남, 귀주의 노여움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타전했다.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안 위안스카이는 다음날인 3월 21일 쉬스창, 돤치루이, 리위안훙 등을 정중히 초청하여 군주제 철회의 뜻을 밝혔다. 출석자들은 위안스카이의 뜻에 찬성했으나 량스이와 주계검이 군주제 철회를 반대하자 위안스카이는 펑궈장과 장쉰 등이 보내온 비밀전보를 보여주었다.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안 주계검 등도 제제 철회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3월 22일 위안스카이는 군주제 철회 명령서를 발표하고 3월 23일을 기해 홍헌 연호를 폐지하고 중화민국 5년으로 되돌릴 것을 밝혔다.
작년 12월 12일에 승인한 제제안을 즉시 취소한다. 모든 죄과는 나에게 있다. 그러나 제제안은 취소한 이상, 앞으로도 여전히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그 이유의 여하를 불문하고 나는 전국통치의 책임을 진 대총통으로서 그것을 좌시하지 않겠다.

1916년을 기준으로, 제제 83일만의 일이었고 12월 12일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103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제제를 추진한 개인과 기관에 대한 처벌을 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제제를 주장하였던 사람은 본래 국기를 튼튼히 하는데 있었으나 그 애국하는 방법이 도에 어긋나 나라를 해치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쉬스창을 국무경에, 돤치루이를 참모총장에 임명해 제제 반대파들을 포섭하려 했다. 또한 3월 25일 리위안훙, 쉬스창, 돤치루이의 명의로 루룽팅, 량치차오, 탕지야오, 차이어에게 군주제가 철회되어 목적이 달성되었으니 전쟁을 그만두고 뒷수습을 하자는 전보를 보냈으며 각 성에서 보낸 추대서를 일괄적으로 폐기하고 군주제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폐기된 민국 시대의 법령들을 복구했다. 3월 26일 군주제 관련 서류 800여건이 폐기되었고 4월 1일 리위안훙, 돤치루이, 쉬스창 명의로 6가지 평화회담 조건이 제시되었다.

이날 참정원이 "경솔한 행동으로 대총통에게 누가 미쳤다고 인정하고 의안의 결정을 중지한다"는 결의를 통과시켜 위안스카이는 구 국회를 복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4월 2일 참정원이 군주입헌 국체안과 참정원 총대표 명의를 취소했다.

3.4. 멈추지 않는 반원 봉기

호국군은 위안스카이의 6개 조항에 단호한 답변을 보냈다.

황제에서 물러나고도 총통 자리를 지키려는 위안스카이의 행태에 민심이 격앙되면서 오히려 반원 감정에 불이 붙었다. 4월 6일 광동독군 용제광이 혁명당원 주집신과 진보당 천중밍, 서근의 압력에 광동성의 독립을 선포했다. 4월 12일 중화혁명당의 영향을 받은 하급장교들이 봉기하여 절강장군 주서를 축출하고 절강성의 독립을 선포했다. 제재에 반대하던 강소장군 펑궈장은 4월 16일 위안스카이에게 제제 취소를 건의하는 전보를 보내고 절강성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국회의원들과 각계 명사들은 다시 살아난 황제는 있어도 절개를 잃고 재기하는 총통은 없다면서 위안스카이의 하야를 요구했다. 4월 18일 호국군은 1호와 2호 선언을 발표, 위안스카이는 제제 이후 대총통 자격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부총통인 리위안훙이 계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4월 21일 위안스카이는 책임내각제를 선포했으나 4월 22일 쉬스창은 국무경에서 하야해버렸고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를 국무경에 임명했다. 위안스카이는 원중추를 난징에 파견해 펑궈장이 독립하지 않은 성들을 규합하여 위안스카이 옹호 무력시위를 하게 하도록 지시했으나 펑궈장은 평화회담 기간에 그러는 것은 좋지 않다며 난징에서 시국 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위안스카이는 즉시 동의했다.

3.5. 군무원 성립

4월 말에 일본을 떠났던 쑨원이 마침내 상하이를 통해 귀국했다. 다이지타오, 랴오중카이 등이 쑨원을 수행했다. 5월 4일 산동성에서 쑨원의 지시를 받고 쥐정이 지휘하는 1천명의 중화혁명군 동북군이 유현, 주촌 등지에서 거병했다. 5월 5일 중화혁명군은 주촌을 점령했다.

한편 독립을 선포한 각 성은 통일된 군사행동과 정식 교전단체로의 인정을 위해 광저우에서 군무원을 설치하려 했으나 용제광이 장소 제공을 거절하여 조경에 모여 군무원을 성립하였다. 원래 탕지야오는 위안스카이의 퇴위를 강요하고 부총통 리위안훙에게 대총통 자리를 잇게 하고 내각제를 실시해 량치차오를 총리로 삼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으나 량치차오는 강경히 군정부를 조직을 주장했다. 5월 8일 군무원이 정식으로 성립되어 탕지야오를 국무총리 격인 무군장으로, 천춘쉬안을 부무군장, 량치차오를 정무위원회 위원장에 추대했다. 천춘쉬안은 <출사포고>를 발표, 위안스카이의 퇴위만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입법원 격인 각성 대표회를 두려 했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실시되진 못했다. 군무원은 각국 공사와 영사들에게 상민교섭을 지방 군민장관과 외국 영사 사이에서 처리하고 중앙 외교사무는 군무원에서 처리하겠다고 통보하며 자신들이 중국의 정통정부임을 자처했다. 5월 9일에는 쑨원이 토원선언을 발표했다.
"위안스카이는 오늘 이미 그의 길이 막혔는데 아직도 사태를 관망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죽어도 변치 않을 그의 권력욕 때문이고, 둘째는 지금까지 혁명을 창도해온 사람들 중에 파벌이 존재하여 파당 사이에 분쟁이 그치지 아니하고 상호 간에 시기와 다툼이 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여 적을 치지 못했음에 원인이 있다. 주의가 일치된 사람들, 동일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애국 정신으로 다시금 상호 간에 제휴한다면 구적이 뜻을 펼치려는 요행은 감히 바라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오늘은 마땅히 일치하여 나라를 구할 때일 뿐, 결코 군웅이 천하를 다툴 때가 아니다. 오직 무력으로써 흉적을 제거하여 약법에 입각하여 사태의 해결을 도모해야 한다.

독립선언은 계속되어 5월 9일 섬북진수사 진수번이 삼원현에서 독립을 선포하여 섬서장군 육건장을 축출했고 5월 10일 중화혁명군이 고밀을 함락시켰다. 5월 12일에는 중국은행과 교통은행이 태환을 정지시켰고 위안스카이 정권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5월 17일 난징에서 장쉰 니쓰충이 중앙과 독립을 선포하지 않은 17개 성의 대표 33명을 난징에 소집하여 난징회의를 열었다. 펑궈장은 위안스카이를 잠시 대총통으로 인정하되 국회에서 곧 새 대총통을 뽑자는 타협안을 제안했으나 산동성에서 먼저 위안스카이의 하야를 요구했고 다른 성들도 잇달아 하야를 요구했다. 펑궈장은 놀라 회의를 종결시켰고 위안스카이는 호위대 3개 영을 보내 강제로 회의를 다시 열어 각 성의 대표들을 위협했으나 즉시 하야 요구 결의안만이 부결되었을 뿐 위안스카이에게 유리한 결과는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최후의 발악으로 5월 18일 상하이에서 천치메이를 암살했으나 5월 22일에는 사천장군 진환이 5월 3일과 12일 두차례 위안스카이에게 퇴위를 권고했으나 듣지 않자 사천성의 독립과 위안스카이와의 단절을 선포했다. 자신에게 무릎을 꿇으며 즉위를 촉구하던 진환의 배반에 위안스카이는 너무도 격노해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 한참만에 깨어난 위안스카이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곡했고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5월 27일 방광결석으로 몸져 눕게 되었다.위안스카이는 군주제 시말안을 발표하여 반대파에게 정치적 책임을 씌울 궁리를 하는 한편 군비 확충을 지시했다. 허나 군주제 시말안이 발표된 5월 29일 호남장군 탕향명도 호남성의 독립을 선포했다. 4월 29일과 5월 19일 산동장군 진윈펑도 위안스카이의 퇴위를 요구했으나 이로 인해 축출되고 장회지로 대체되었다.

군무원 성립 과정에서 배제된 중화혁명당은 불만이 없지는 않았으나 위안스카이 타도라는 대국적인 목표를 위해 군무원에 협조하기로 결정하고 5월 23일 각 지방의 혁명당원들에게 군무원과 협조하고 운남, 광서, 절강, 강서에서 사용하는 오색기의 사용을 허락했다. 5월 26일 중화혁명군이 유현을 함락시켰으며 5월 25일과 6월 4일 제남을 공격했으나 이는 실패했다. 하지만 제남을 제외한 산동 전역이 중화혁명당에게 장악되었다.

3.6. 위안스카이의 죽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Yan_shikai_funeral.jpg
위안스카이의 장례식
궁지에 몰린 위안스카이의 건강은 결석이 요독증으로 번지면서 급격히 악화되었고 한의사도 양의사도 손을 쓸 수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쉬스창과 돤치루이에게 후임 대총통은 리위안훙을 삼겠다고 밝히며 자신은 병이 나아도 퇴진하여 창덕으로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위안스카이는 쉬스창과 위안커딩을 불러 1914년 신약법 29조에 의거하여 리위안훙을 중화민국 대총통으로 삼겠다는 정치적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후에 너희들은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쉬스창에게 묻고 나서 행하라. 너는 쉬스창을 나를 섬기듯이 섬겨야 한다. 내 부탁을 어겨서는 안된다."

위안커딩이 통곡하며 그러겠다고 했고 6월 5일 밤부터 위안스카이는 위독해졌다. 6월 6일 새벽 위안스카이의 임종이 다가오자 쉬스창, 돤치루이, 돤즈구이, 왕스전, 장진방 등이 위안스카이의 침상으로 몰려들었다.
"모두들 잘 왔네, 난 이미 다 된 사람이야."

위안스카이의 힘없는 말에 쉬스창이 며칠만 치료하면 곧 나아질 것이라 위로했지만 그러면서도 하실 말씀이 있으면 일찍 기록해줄 것을 요청했다. 위안스카이는 약법이라는 말을 겨우 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위안커딩이 의사를 시켜 강심제 한방을 놓았다. 잠시 후 위안스카이는 의식을 회복하여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 놈[3]이 날 해쳤어!"

그리고 오전 10시에 사망했다. 6월 7일 리위안훙이 총통에 취임했고 돤치루이의 국무원에서 위안스카이의 장례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했다. 6월 8일 위안스카이의 시신이 황제의 차림을 한 채 입관되었고 6월 28일 북양정부의 실력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영구되었다.

3.7. 전쟁의 끝

6월 8일 천춘쉔이 탕지야오를 비롯한 각 도독들에게 리위안훙이 대총통에 취임한 것은 임시약법에 따라 계임한 것임을 강조하면서 군무원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임시약법 체제 회복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6월 9일에는 쑨원이 민의기관을 존중할 것을 촉구하며 리위안훙에게 초급총통제 폐기를 요구했고 황싱도 위안스카이가 만든 모든 법률과 민국에 저촉되는 것을 폐기하며 국회를 소집하여 내각을 조직하고 제제파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6월 10일 군무원은 탕지야오의 명의로 리위안훙에게 구약법 회복, 쌍방의 정전, 구국회 회복, 군사특별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6월 13일에 리군무원은 리위안훙에게 구약법을 옹호하며 구국회를 회복할 것을 다시금 요청하며 루룽팅 등이 연명하여 4가지 시국 수습안을 제출했다.

이에 펑궈장 등도 동조하면서 돤치루이는 구약법의 회복과 국회 재소집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각성에서 3인의 대표가 베이징에 모여 회의를 통해 해결할 것을 주장하며 신약법 존속을 시도했지만 량치차오, 탕지야오, 쑨원, 황싱 등이 모두 반대했다. 량치차오는 시일을 끌면 유언비어가 나돌아 시국수습에 장애가 많아지고 대표도 선출하기 어렵다면서 정부가 신속히 신약법은 정식 개정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폐기할 것을 선언하면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돤치루이는 명령으로 법률을 폐지하는 것은 법리상으로 맞지 않다고 반박했으며 시행된지 오래된 신약법을 말 한마디로 폐기할 순 없다고 맞섰으나 6월 25일에 쑨원의 호소에 따라 해군총사령관 이정신이 1함대 사령관 임보역, 연습함대 사령관 증조린 등과 함께 함대를 상하이의 오송 앞바다에 집결시켜 정부가 민국 원년의 약법을 준수하여 국회를 개회하고 정식으로 내각을 성립시키지 않으면 더 이상 북양정부에 충성하지 않겠다고는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중화민국 해군의 주력인 1함대의 반란 위협에 펑궈장이 당황하여 돤치루이에게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 결국 돤치루이는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고 6월 29일 대총통 리위안훙의 명의로 국회 회복을 명했다. 리위안훙은 임시약법 53조에 의거하여 8월 1일에 국회를 소집할 것을 발표하고 돤치루이를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에 임명했다. 이에 호국군이 리위안훙의 조치를 환영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지금 약법, 국회가 점차 회복되고 대총통이 법에 의거 계임한 것은 독립한 각성의 최초의 선언과 서로 부합된다.

1916년 7월 14일 호국군이 군무원을 폐지하고 각 성이 독립을 취소하면서 호국전쟁은 끝났다.

4. 결과

"우리나라 최근의 혁명운동은 청국이 건국된 후 300년의 역사를 밑바닥부터 뒤집어 놓았다. 원씨가 반역해서 공화를 파괴하려 했지만 수개월이 못되어 의군의 봉기로 남쪽 하늘을 진동시켰고 일세의 간웅은 드디어 호국군의 압박에 죽어갔다. 지금 개혁사업이 성공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청춘대화의 창조는 실로 여기에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리다자오, 1916년 8월의 논평.
파일:국회개회.jpg
중화민국 의회 개회식

1916년 8월 1일 중화민국 의회가 다시 개막했지만 리위안훙을 괴뢰총통으로 삼은 돤치루이의 독재가 시작되면서 다시 북방과 남방의 충돌이 이어졌다. 또한 위안스카이라는 영수를 잃은 북양군벌 직계 환계로 분열되어 내분을 일삼았다. 결국 남방과 북방의 충돌로 1917년 호법전쟁이 발발했으며 1920년에는 직계와 환계 사이의 안직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1] 대총통에게 세 명의 후임자를 천거할 권리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위안커딩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한 술수라고 수근거렸다. [2] 양도라고 적은 곳도 확인된다. [3] 이 '그 놈'이 누구인지는 떡밥이 많은데 적어도 위안스카이의 일가는 가짜 신문을 바치며 자신을 부추긴 위안커딩을 의미한다고 여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