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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2-01 06:43:16

리지선


파일:중국 국장.png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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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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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제침.jpg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초대 부주석
본명 이제침(李濟琛)
정체 李濟深
간체 李济深
한국식 독음 이제심 [1]
영문 Li Jishen
임조(任潮)
출생 1885년 11월 5일 청나라 광서성 창오현
사망 1959년 10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바오딩군관학교 졸업
중화민국 육군대학 졸업
직업 군인, 정치가
부주석
재임기간
1대 1949년 10월 1일 ~ 1954년 9월 27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국민혁명2.3. 반장전쟁2.4. 반장 활동2.5. 국공내전과 중공 합류2.6. 말년
3. 주요경력4. 매체에서5.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정치가. 한때 월계군벌의 수장으로 장제스를 옹호했으나 반장전쟁을 계기로 반장파로 전향,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전향해 부주석을 지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파일:젊은이제침.jpg
젊은 리지선

1885년 광서성 창오현에서 태어났다. 오주중학에서 후한민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광서육군속성학당을 거쳐 바오딩 군관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때 리쭝런이 동기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혁명군 22사단 참모장으로 부임하여 청조에 맞섰고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육군대학에 입학하여 졸업 후 한동안 육군대학 교관으로 일했다. 1920년, 쑨원의 참모장인 등갱의 초청으로 월계군벌 천중밍이 지배하는 광저우로 오게 되어 건국월군 1사단 참모장을 거쳐 대리 사단장에 이르렀다. 1922년 천중밍이 영풍함 사건을 일으키자 쉬충즈의 밑에서 천중밍과 교전했다. 1923년, 천중밍이 타도되어 광동성 동부로 밀려나자 오주강 선후처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자신과 친분이 있던 광서군벌 리쭝런, 바이충시, 황샤오훙을 국민당으로 끌어들이는 공작에 참여했다.

2.2. 국민혁명

파일:국민혁명군이제침.jpg
국민혁명 시기의 리지선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고 황포군관학교가 설립을 준비하는 황포군관학교 준비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학교 건립 후 교련부 주임을 맡아 생도들을 가르쳤다. 1925년 국민정부와 국민혁명군이 수립되자 국민혁명군 4군 군장이 되어 기존의 월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장제스와 함께 월군 총사령관 겸 군정부장 쉬충즈가 군비 배분을 불평등하게 한다는 이유로 그를 타도하여 상하이로 축출했다. 1925년 국민당의 2차 동정에 2종대 사령관으로 참여하여 천중밍을 토벌하였으며 주페이더를 빌어내고 국민당의 남정 총사령관에 임명, 등본은을 토벌하고 하이난섬을 점령했다.

이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오르려는 장제스와 신경전을 벌였으나 1926년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자 왕징웨이의 군대 출동 요구를 불가능하다고 거부하면서 사태를 방조하였고 군인부가 설치되면서 국민혁명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국민혁명군 참모총장에 임명, 휘하의 4군을 거느려 호남 전선에서 싸웠는데 큰 전공을 세워 4군 전체가 철군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1926년 12월, 수도가 광저우에서 우한으로 옮겨지자 광동성 정부주석 겸 군사청장에 임명되어 광동성의 수비를 맡았다. 1927년 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군사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장제스의 반공 주장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경질되었다. 가뜩이나 군비 문제로 중앙과 마찰을 빚던 리지선은 4.15 광저우 쿠데타를 일으켜 광동성을 장악하고 광동에서의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 세력을 일소시킨다. 7월에 장제스가 쑨촨팡의 공격에 패배하여 하야하자 사태를 지켜보다가 9월에 성명을 발표하여 장왕합작을 주장하는 등 장제스를 지지했다.

1927년 10월, 정통성이 부정당한 것에 불만을 품고 우한에 잠적해버린 왕징웨이에게 난징에서 4중전회를 여는 것에 동의해달라고 설득하였고 왕징웨이의 후원자인 탕성즈의 행패가 심해지자 당계전쟁에 참여, 탕성즈를 토벌하였다. 이후 새로운 중앙당부를 설립하는 일을 논하기 위해 왕징웨이를 광저우에 초청했다. 1927년 11월 16일, 장제스 왕징웨이와 합작을 시도하자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 해체를 위해 왕징웨이와 함께 난징으로 떠났다. 이틈을 타서 왕징웨이의 측근 천궁보 장파쿠이와 황기상을 선동하여 11월 17일, 장황사변을 일으켜 리지선의 부대를 축출하고 광저우를 점령했다. 경악한 리지선은 장황사변에 연계된 위원들의 자격 정지를 요구하는 한편 즉각 병력을 이끌고 광저우로 돌아왔는데 12월에 광저우 폭동이 일어나는 등 광동은 개판이 되었다. 리지선은 일단 장파쿠이와 함께 공산당을 진압하고 광저우를 되찾았으나 장제스가 장황사변의 주모자들에 대해 관대한 처분을 내리자 이에 불만을 품고 장제스와 틀어지기 시작했다.

2.3. 반장전쟁

1928년, 후한민 쑨커로 대표되는 국민당 재조파가 조직되자 이들에게 재정적인 원조를 제공하였다. 1928년 7월, 탕산회의에 참석하였다. 1928년 국민당 2기 5중전회에서 각 지방의 정치분회를 폐지한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리쭝런과 함께 격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며 삼전대회에서 정치분회 존폐를 결정할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편견 문제 때문에 각 집단군 사령관들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항저우로 떠나버렸으나 1928년 9월의 국민정부 조직에 참여, 군사위원회 1대 참모총장 겸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 12월, 편견회의에 참가하여 편견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국방위원회 위원장, 편견회의 상무위원, 편견회의 집행부 주석, 육군군관학교 운영위원 등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929년 1월, 편견회의를 이탈하여 상하이로 떠나버렸다.

1929년 2월, 우한정치분회 주임 리쭝런이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무단으로 해임시키고 허젠을 후임으로 임명한 호남 사건이 일어나자 장제스의 요청을 받고 광서파와 난징 정부를 중재하기 위해 3월 12일, 난징으로 왔다. 하지만 3월 들어 리쭝런의 부하 섭기와 하위가 군사행동에 돌입, 1차 장계전쟁이 폭발하자 장제스는 3월 21일, 리지선을 우한과 내통한 혐의로 기습적으로 감금하고 3월 26일, 광동성 정부주석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해임시켰다. 이에 따라 천밍수가 신임 광동성 정부주석에, 천지탕이 광동성 군사령관이 됨에 따라 광동성의 지배자는 리지선에서 천밍수와 천지탕으로 바뀌었다. 천지탕은 8로군 사령관에 취임, 리쭝런, 바이충시, 장파쿠이 토벌에 나섬으로 난징 정부의 후방을 굳건히 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펑위샹 등은 자살행위라 부르면서 격렬히 반발하였으며 결국 중원대전이라는 중국 역사상 최대 내전으로 번졌으나 장제스는 봉천군벌의 수령인 장쉐량의 도움으로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의 연합군을 모두 격퇴했다. 이후 국민당 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영구제명 처분을 받았다.

2.4. 반장 활동

1931년 3기 5중전회의 결과 당적이 복구되어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여전히 감금된 상태였다가 1차 양광사변이 터지면서 석방되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터지자 장쉐량에게 항일을 나설 것을 설득하는 대표로 파견되었으나 큰 소득을 얻지 못했고 상하이 사변 이후 광동파가 뇌물 수뢰 혐의 등으로 실각함에 따라 반장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1933년, 천밍수, 차이팅카이, 장광나이와 함께 복건사변을 일으켜 중화공화국 주석 겸 총리 대리, 인민정부 위원에 취임했으나 50여일만에 진압당했다. 이 죄로 11월 23일, 국민당 상무위원회에서 당적 영구 제명 처분을 받았고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했다. 1935년 11월에는 천밍수와 함께 장제스 왕징웨이 암살을 사주하여 왕징웨이 저격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중화민족혁명동맹을 영도하며 반장항일을 주장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옹장항일로 입장을 전환하여 항전 기간 동안 장제스를 지지했다. 1938년 1월 15일,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 청첸, 천샤오콴과 함께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전쟁 말기가 되자 다시 반장활동에 돌입하여 1946년 4월 14일, 광저우에서 허샹닝, 차이팅카이와 함께 중국 국민당 민주촉진회를 수립하여 쑨원의 천하위공 정신 아래에 국민당 1당 독재를 종식하고 거국일치 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던 룽윈, 장파쿠이, 위한머우 등이 그의 반장활동을 지원하였다.

2.5. 국공내전과 중공 합류

1947년 11월 12일부터 1948년 1월 1일까지 홍콩에서 열린 중국 국민당 민주파 제1차 연합대표대회에 참여,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수립에 참여하여 혁명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1월 22일, 궈모뤄, 선쥔루, 담평산 등과 함께 연명으로 <시국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여 마오쩌둥 지지를 선언했으며 "인민민주주의 진영에는 반대파들이 발붙일 한 치의 여지도 없으며 중간노선의 존재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 중국 공산당의 지도 아래 중국 혁명을 밀고 나가며 신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바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1월에 장제스가 하야하고 리쭝런이 대리총통이 되자 리쭝런은 리지선에게 서한을 보내 평화협상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황샤오훙과 내통하여 정부에 압력을 가할 뿐이었다.
파일:정치협상회의.jpg
1949년, 신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한 리지선

1949년 2월 25일, 심균유, 마서륜, 곽말약, 담평산 등과 함께 베이핑으로 이동하여 신정치협상회의 소집문제를 논했고 4월 1일, 국민정부 대표단 자으중, 샤오리쯔, 황샤오훙, 장사조, 이증 등이 도착하자 이들과 평화담판을 벌였다. 1949년 6월 15일부터 6월 19일까지 개최된 신정치협상회의 준비위원회 1차 전원회의에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대표로 참여, 상무위원회 부주임에 선출되었으며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신민주주의 국가는 민의를 진정으로 반영하고 광범위한 인민을 위해 효과적으로 복무하며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공고히 하고 신민주주의 정치적, 경제적, 국방적, 문화교육적 대대적인 건설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것이기에 민주주의 중앙집권제의 원칙에 기초를 둔 정치제도는 우리가 마땅히 취해야 할 훌륭한 제도이다."

1949년 9월 21일에서 30일까지 열린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원회의 결과, 주더, 류사오치, 쑹칭링, 장란, 가오강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겸 중앙인민정부 정부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6.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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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담소하는 리지선

1954년 9월 15일, 베이징에서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 회의가 열리자 대회 주석단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회 결과 쑹칭링, 임백거, 장란, 나영환, 심균유, 곽말약, 펑전, 달라이 라마 14세 등과 함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4년 12월 정협 제1기 전국위원회 상무위원회 확대회의가 개최됨에 따라 정협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56년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여, "우리의 이 선물은 우리 여러 민주당파가 중국 공산당의 영도 아래 역경을 함께 헤쳐 나가면서 번영하고 행복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로 승리적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상징한다."라고 축사를 낭독했다.

1957년 백화제방 백가쟁명 운동이 벌어지자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3월 1일부터 인민 내부 모순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한 토론에 참여했다. 1958년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소집되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정협 제3기 전국위원회 부주석으로 재선출되었다.

1959년, 베이징에서 위암과 혈전 증상으로 사망하였다.

아들 리페이야오(1933년생)도 국민당 혁명위원회 소속으로 1990년대 주석에 올랐고, 중국 정협 부의장까지 오르는 등 중공정권하에서도 어느정도 대접을 받았으나, 1996년 자택을 지키던 인민 무장 경찰 소속 경호원이 강도로 돌변,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문에 무경 사령관을 비롯한 수뇌부는 줄줄이 옷을 벗었고, 장쩌민은 민심수습을 위해 엄타라는 범죄와의 전쟁을 개시한다.

3. 주요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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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대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개최
리지선
( 1949년 10월 1일 ~ 1954년 9월 27일)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참모총장
파일:대만 국장.png
참모총장직 신설 1대 2대
리지선
( 1928년 10월 10일 ~ 1929년 3월 26일)
허잉친
광동성 정부주석
파일:대만 국장.png
3대 4대 5대
쑨커 리지선
( 1926년 12월 7일 ~ 1929년 3월 26일)
천밍수

4.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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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국대업에서는 중국 배우 김흠(金鑫)이 분했다. 짤에서 대화하는 인물은 중화민국 해군총사령 천샤오콴.

5. 참고문헌


[1] 개명했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채로 이제침과 이제심으로 표기가 엇갈려서 혼동할 수 있는데 이제침(리지천)에서 이제심(리지선)으로 개명한 것이기 때문에 둘 다 맞다. 이제심은 깊을 심(深)자를 쓰지만 이제침은 보배 침(琛)자를 쓴다. 위키피디아는 심자로 표기하고 있다. 남아있는 그의 친필 대부분은 '李濟深'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