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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14 13:06:39

장징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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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6-7대 총통
蔣經國
장징궈 | Chiang Ching-kuo
파일:attachment/cjg.jpg
이름 蔣經國
장징궈 | 장경국 | Jiǎng Jīngguó
러시아 이름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옐리자로프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Елизаров
건풍(建豐)
출생 1910년 4월 27일 청나라 저장성 봉화현
사망 1988년 1월 13일 (향년 77년 261일)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png 청나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대만)
학력 모스크바 중산대학[1] ( 학사) (1924-1927년)
레닌 군사정치 아카데미 ( 석사) (1927-1930년)
종교 감리회
직업 정치가, 군인, 관료
소속정당 [[중국 국민당|
중국 국민당
]]
총통
재임 기간
6대 1978년 5월 20일 1984년 5월 20일
7대 1984년 5월 20일 1988년 1월 13일 총 9년 238일
행정원장
재임 기간
9대 1972년 5월 29일 1978년 5월 19일
국방장관
재임 기간
9대 1965년 1월 25일 1969년 7월 1일

1. 개요2. 생애
2.1. 파란만장한 출생2.2. 소련 유학2.3. 귀국과 승진가도2.4. 대만에서의 통치2.5. 양안 관계 개선을 모색하다
3. 사후4. 가족관계5. 평가6. 주요 경력7. 매체에서

1. 개요

중국 국민당 중화민국의 정치인으로, 제6~ 7대 중화민국 총통을 역임했다.


장징궈 총통의 연설. 표준중국어로 했지만 아버지보다도 발음이 좋지 않았다.[2] 그럼에도 저장성 출신 대륙 사람들은 이 연설을 자막 안 보고도 알아듣는다고 한다.

추가적으로 이 연설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자면, 1973년 장징궈 총통이 행정원장으로 재임했던 때 했던 연설로, 산업 발전을 위해 투입한 공적 자금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써버린 당시 기업가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동영상 아래의 자막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신랄하게 비판한다...

2. 생애

2.1. 파란만장한 출생

장제스 총통의 장남으로, 장제스의 첫 아내인 마오푸메이 사이에서 저장성 펑화 현(奉化縣)에서 태어났다. 장제스는 14세 때 다섯살 연상인 마오푸메이와 결혼했는데 자신이 억지로 결혼해야 한다는 사실을 대단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래도 신혼 후 두 달 정도는 부부 사이가 좋았으나 장제스의 어머니인 왕차이위[3]가 아들에게 못된 영향을 준다고 며느리를 꾸짖었고 이후 마오푸메이는 남편과 감히 얘기조차 나누지 못했다. 결국 부부 관계는 파탄이 났고 장제스는 아내를 버리고 곳곳의 학당을 전전한다.

이후 장제스는 일본 군사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도일했다가 청나라 군기처의 추천서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돌아와선 아내를 구타하기도 했다. 장제스는 청나라 군기처의 추천서를 받기 위해 상하이시로 이동했는데 왕차이위가 마오푸메이를 데리고 아들의 뒤를 쫓아와서 점쟁이가 마오푸메이가 낳을 아들이 고관 대작에 오를 것이라는 점괘를 내렸다면서 며느리와 동침할 것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점쟁이 같은 미신을 믿냐고 그 말을 비웃었지만 왕차이위가 만약 며느리와 동침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마오푸메이와 동침했는데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장징궈다. 파란만장한 출생 과정은 둘째치고 점쟁이 말이 맞았다[4]

2.2. 소련 유학

아직 장제스가 친소 성향이었을 때 아버지를 졸라서 소련에 유학간 경력이 있었다. 장제스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장제스의 두 번째 부인이자 장징궈보다 네살 연상인 천제루가 간청하여 유학을 허락해줬다. 거기서 장징궈는 잘 나갔고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 때 같은 중국인 유학생 한 명과 잠시 동거하기도 했는데 그 유학생이 다름아닌 군벌 펑위샹의 딸이었다. 여담으로 이 때 덩샤오핑을 만나서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덩샤오핑과 형 아우하며 지냈는데 훗날 그 둘의 위치와 지위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계기로 소련과 관계를 끊자 장제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맹비난하기도 하며 사실상 의절했다. 게다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장제스의 성향 때문에 부자 관계가 최악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전 남편 야만적인 방법으로 수십만의 형제와 동포들을 도살했습니다. 중국인의 적이며 당신 아들의 적입니다. 듣자 하니 장제스는 효와 예의와 염치를 선전한다고 합니다. 항상 이런 수법으로 인민들을 속이고 우롱했습니다.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2층에서 집어 던지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할머니에게 야단맞자 버릇없이 대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저는 군벌의 아들에서 한 사람의 공산당원으로 성장했습니다. 장제스는 다섯 차례에 걸쳐 중국의 소비에트 정권을 소멸시키려 했지만 홍군은 중국 인민의 힘을 상징합니다.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과 죄악의 근원은 장제스입니다. 저의 조국은 소련입니다. 어머니가 중국을 떠날 수만 있다면 계신 곳 어디라도 제가 달려가겠습니다.” - 프라우다[5]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장제스는 유일한 아들에게 이러한 욕설을 듣고도 "소련 놈들이 내 아들에게 내 욕을 시키는 걸 보니 내 아들을 죽이진 않겠구나, 조상님들 뵐 면목이 생겼다"라고 좋아했다는 것이다. 상하이 쿠데타를 통한 공산당 탄압은 자식이 소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중국에 해가 될 것이라며 자식을 잃을 각오로 일으킨 것이고, 장제스는 고자라 더 자식을 남길 수 없었다.

하지만 장징궈는 얼마 안 가서 대학에서 쫓겨나 수력 발전소에서 일해야 했으며 대숙청 당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혐의로 그 자리마저 잃어버려 보드카에 취하며 부인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소련은 1931년 쑹칭링을 통해서 장징궈와 상하이에서 체포된 폴란드 공산주의자 스파이를 교환하자고 제의했지만 장제스는 국가의 이익을 사사로운 정으로 망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동거하던 소련 여자[6] 1935년 결혼했다. 이 시기 이오시프 스탈린이 직접 강권하여 트로츠키주의를 부인하고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2.3. 귀국과 승진가도

장징궈는 이후 용기를 가지고 중국 대사관에 접촉해서 귀국을 요청했다. 안 그래도 쑹메이링을 필두로 국민당 내부에서는 장제스의 혈육인 장징궈를 소련에서 귀국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소련은 장징궈가 소련에 없다는 뻔한 거짓말까지 하면서 동시에 장징궈의 귀국을 종용했고, 장징궈는 중국 대사 장팅푸에게 자기는 집도 절도 없는 처지이니 귀국 비용을 대줄 것을 요청하면서 자신에게 소련인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 괜찮냐고 물었다. 장제스의 혈육을 귀국시키는 큰 공을 세울 기회를 잡은 중국 대사가 장징궈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할 리가 없었고, 그가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자결을 할 심정으로 일을 추진했다.

하지만 1937년 상하이를 통해 귀국한 장징궈는 들어오자마자 괜히 귀국했다고 겁을 먹었다. 소련에서 아버지를 비난한 것 때문에 장제스가 벌을 줄 것이라고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장제스는 장제스대로 12년 만에 아들이 돌아오자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12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반동 소리를 들을까봐 겁이 나서 아들을 만나지 않았다. 이것을 불안한 징조로 여긴 장징궈는 장제스의 비서 천리푸 등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천리푸는 장징궈에게 아버지에게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편지를 쓰라고 권했다.

장징궈의 편지를 받은 장제스는 천륜을 거스르면 안된다는 국민당 원로들의 충고에 따르는 척하면서 장징궈를 만나 절을 받았고 장징궈는 쑹메이링에게도 어머니라 부르며 절을 올렸다. 장제스가 장징궈에게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자 장징궈는 농업이나 공업 중 하나를 하고 싶다고 했고 장제스는 장징궈를 자신의 고향인 시커우 마을로 내려가게 했다. 이때 쑹메이링이 금일봉을 주어 그걸로 시커우 마을에서 잔치를 베풀고 아내와 다시 중국식 결혼식을 올렸다.

장징궈는 그 곳에서 다시 중국 고전을 공부하면서 소위 붉은 물 빼는 작업에 들어갔고, 장제스의 며느리와 손자들(소련인들이다)에게 중국어 강습도 행해졌다. 얼마 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장제스에게 가장 열악한 곳에 보내줄 것을 청했고, 장제스는 아들의 청에 크게 될 놈이구나 하고 기뻐했다. 1939년 생모 마오푸메이가 일본군의 공습에 죽자 피는 피로 씻을 것이라는 비문을 세웠다.

2.4. 대만에서의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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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마오쩌둥, 장제스, 미국 대사 패트릭 헐리와 충칭에서 사진을 찍은 장징궈.

1948년,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이 내려지자 상하이에서 부패 척결과 화폐개혁[7] 등을 통해서 중국 국민당을 살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방법 자체가 자본가들을 일방적으로 두들겨패는 강압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에 상하이 시장 우궈전을 비롯한 자유파 인사들의 큰 반발을 샀으며 장징궈를 견제하는 CC계열이나 4대가족의 일원인 쑹메이링, 쑹쯔원, 쿵샹시와의 권력투쟁에 휘말려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1930년대까지만 해도 쑹메이링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장징궈는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한다. 실제로 장징궈가 집권하자마자 쑹메이링은 미국으로 이주한다.

한편 장제스는 믿을 것은 혈육인 장징궈밖에 없다고 여겨 장징궈를 1946년 5월 국립정치대학 교육장에 임명하는 등 크게 중용하기 시작했고 장징궈는 천청과 함께 장제스의 눈밖에 난 쑹쯔원, 쿵샹시, 천궈푸, 천리푸 등 대륙 시절의 요인들을 차례로 숙청하였는데 특히 1954년 부총통에 출마하려던 쿵샹시를 낡은 사회의 권세있는 집안 사람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여 그를 정치판에서 완전히 제거한 것이 장징궈였다. 입법원장 천리푸 역시 천청에게 난타당하여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또한 대만성 정부 주석이자 민주파 지도자였던 우궈전과의 대립 끝에 우궈전 사건으로 그를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1954년 국가안전회의 부비서장에 임명됨에 따라 대만의 정보기관을 장악하여 국민당 독재를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집권 후의 유화적인 모습과 달리 이때 장징궈는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국민당 통치에 방해되는 인물을 닥치는대로 체포하고 불법으로 정치자금을 모으는 데 귀재였다.[8]

이후 중화민국 정부의 요직을 거쳤고, 아버지가 병석에 누운 1972년부터는 부총통 옌자간의 배려로 중화민국 행정원장을 맡았으며, 1975년 아버지의 사망 후에는 부총통 옌자간(嚴家淦)이 총통이 되었다가 1978년 간선제로 치러진 총통 선거에서 당선되어 마침내 대권을 잡았고 1984년에 재선에 성공했고, 1988년에 죽을 때까지 중화민국 총통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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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행정원장 시절. 젊었을 때의 깐죽이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중후한 인상으로 탈바꿈했다.

그가 행정원장에 오르기 직전인 1971년에는 UN에서 강퇴 당하고 올림픽에서는 중화 타이베이가 되는 등 중화민국의 국제적 지위가 점점 하락하고 중국 대륙 지배에 대한 정통성 역시 점점 하락해가고 있었다. 장제스는 대륙 출신의 인물이었고 중화민국이 지배하는 통일 중국을 정치적 목표로 해왔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에게 국부천대는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이며, 실제로 국부천대 이후 그는 중국 공산당을 몰아내고 대륙을 통일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렇기에 그는 정작 대만 내정은 방치하다시피 했으며, 1950년대부터 이미 대만이 경제적으로 빠른 성장을 달성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인프라는 일제 시대에서 발전하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본성인이 탄압받고 외성인이 우대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중국 대륙 지배에 대한 정통성이 점점 하락하게 되어 대륙 수복의 명분에 큰 타격을 받게 되자, 애초에 중화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지지해줄 외성인의 머릿수는 본성인에 비해 1/6 정도로 한참 밀렸기 때문에, 이대로는 중화민국이 대륙에서도, 대만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외면받아 소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화민국이 '대만 사람들( 본성인)의 지지를 받는 중화민국'이 되어야 했으며, 그렇기에 장징궈는 행정원장 취임 이후로 대만 내정과 본성인 차별 철폐에 전력을 다했다.

우선 그는 1972년 행정원장이 되고서는 국민대회 입법원의 증액선거(추가 의석에 대한 선거)를 실시했다. 물론 기존 대륙에서 온 국민대회 및 입법원의 의원들을 교체하는 것은 아니고 야당의 참가는 불허했지만, 이로서 본성인들을 어느 정도 국민당 일당체제 안에 들이는 데는 성공했다. 장징궈는 여기서 더 나아가 본성인들을 국민당에 입당시키거나 당 요직에 기용하는 데도 관심을 가졌으며, 자신의 총통 임기 시절 부총통이었던 셰둥민이나 리덩후이도 이 과정에서 출세할 수 있었다. 장징궈가 사망할 즈음 국민당에서는 비록 비주류일지언정 본성인들이 적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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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장징궈는 행정원장 시절에 주말이 되면 지방 시찰을 자주 나갔는데, 야구모자에 점퍼만 걸쳐 입고 조선 시대의 암행어사 마냥 시장, 건설 현장, 농촌 등에 가서 지역 주민들과 스스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대만 사회의 실상을 직접 익혀나갔다.[9] 더불어 장제스 시절부터 심각했던 부정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1960 ~ 1970년대에는 '10대 건설'(十大建設)[10] 사업의 주도면밀한 진행을 통해 고속도로, 철도, 항만, 에너지 시설 등의 사회 간접 자본과 중화학 기간 산업 확충에도 박차를 가하여 대만의 경제를 뒷받침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러한 장징궈의 대만 경제 정책은 좀더 고도화되기는 했지만, 부친 시절부터의 안정 제일주의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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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궈의 10대 건설 사업을 소재로 한 보드 게임. 표지에 당시 10대 건설 사업의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지금도 대만 경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문화 정책에서도 장제스가 중화 문명을 찬양하고, 중국과 다른 대만의 전통 문화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은 것과 달리, 국가가 설립한 문화 시설에서 대만 전통 문화 관련 공연이 개최되는 등 대만의 독자적 문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국가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통치 방식은 총통에 취임한 이후에도 이어진다.

이를 상징하듯이, 1987년에 본성인 지방 원로들을 총통부로 초청하여 가진 회담에서 그는 제가 대만에 살게 된 지 40년이 되었으니, 저도 대만인입니다. 물론 중국인이기도 합니다.(我在台灣住了四十年,是台灣人,當然也是中國人。)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승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권력 세습을 원치 않아서 1984년 제헌절 기념 축사에서 "내 후계자는 헌법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내 가족들 중에 어느 누구도 정권을 잡을 일은 없으며 군부 역시 마찬가지다."라는 선언을 했으며[11] 이는 사망 후에 그대로 실현되었다. 이 양반과는 진짜 다르군.

말년에 가서는 3당 훈정[12]의 3개 정당[13]을 제외한 새로운 정당의 창당이 오래 전부터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진보당의 창당을 사실상 묵인하였다. 중국 국민당의 몇몇 강경파 인사들은 강제로 해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반발했으나 장징궈가 이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고 하며,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중화민국 헌법 준수', '반공 정책 지지', '대만 독립 세력과의 연합 금지'를 지키기만 한다면 다른 정당도 허용할 방침임을 밝히기도 했다. 아울러 언론 자유에 대한 통제도 어느 정도 완화하고 1949년 선포된 계엄령을 무려 38년 만인 1987년 7월 전격적으로 해제했다.[14]

그렇기에 독재 2대 계승을 한 독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생전에도, 사후에도 나름대로 존경을 받았다. 대만 독립주의자들도 독재자 장제스는 힐난한다 치더라도 계엄령을 해제한 장징궈는 욕을 덜 하는 편이다.

그러나 총통이 되기 이전에는 특무 기관에서 근무하면서 정적 탄압에 앞장섬으로써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다가, 집권 초기에는 메이리다오 사건(1979년)과 같은 민주화 운동 진압과 더불어 천원청 살인 사건(1981년), 린이슝 일가 피살 사건(1982년)처럼 반정부 인사를 겨냥한 것으로 의심되는 의문사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당시 사건의 피해자들은 지금도 민주 진보당 등 대만 범록 연맹 진영에서 정계의 주역, 원로 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때문에 장징궈 역시 대만 내 진보 진영의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입장. 하긴 바로 위에서도 욕을 덜 하는 편이라고 했지 안 한다고는 안 했으니까 아울러 그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결국 중국의 통일을 목표로 하는 중국 국민당이 독재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그의 민주화 및 대만화 추진 역시 일정 부분의 한계를 가졌다.[15] 중화민국의 대만화는 양안관계와 맞물려 대만 최대의 정치적 논쟁거리가 되어 있어 일정하게 진전되지 않고 진전과 후퇴를 거듭하고 있으나, (절차적) 민주화는 리덩후이 시절에 상당부분 결실을 맺었다.

6년 재선 임기를 2년 정도 남겨둔 1988년 1월에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가 너무 오래 살긴 했지 당뇨병은 이미 총통이 되기 전에도 앓고 있었으며, 1980년대 중반부터 장징궈는 당뇨병으로 인해 쓰러졌다 회복되기를 반복했는데, 이를 노려 국민당 강경파가 장징궈의 의중을 무시하고 정적 등을 살해하며, 그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내정하려 하는 등 정치적으로 흉흉한 일이 잦았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살해 역시 장징궈가 건강이 안 좋을 당시 국민당 강경파에서 주도했다는 주장이 있다.

파일:external/img.epochtimes.com/901131958471616.jpg
사망하기 3개월 전인 1987년 10월 10일 신해 혁명 기념일(통칭 쌍십절)에서의 모습. 왼쪽으로 국민당 내의 차세대 지도자 경쟁을 벌이던 롄잔, 리덩후이 등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사후 헌법에 따라 부총통이었던 리덩후이가 총통 대행으로서 총통 직을 수행하였다.

2.5. 양안 관계 개선을 모색하다

1979년 중국이 신년 교서를 통해 무역, 우편, 여행 등의 3개 교류를 전면 실시하자는 이른바 '3통'(三通) 제의를 하자,[16] 공식적으로는 본토의 중국 공산 정부와는 정부 차원에서의 접촉, 담판, 타협을 거부한다는 '3불'(三不) 정책으로 응답했다.[17]

하지만 선친인 장제스의 무력 본토 수복 노선이 비현실적임을 반영하여 ' 삼민주의를 통한 중국 통일'이라는 일종의 평화적 통일 노선을 제시했다. 무력 통일 노선을 공식적으로 버리지는 않았으나, 무력 통일 노선을 주장하던 왕성(王昇) 장군을 파라과이 대사로 보내는 등 무력 통일을 사실상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구 국민당 군인들이 본토의 가족, 친척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이산 가족 상봉, 즉 '탐친'(探親)을 허가했고, 학문이나 예술 등 비정치 분야의 중국 인사들이 대만을 방문하는 것도 용인했다. 이 점에서 장징궈 시대는 초보적이나마 양안 관계의 개선이 모색되기 시작한 시기로 평가된다.

앞서 말했다시피 덩샤오핑과는 한 때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막역한 사이었기에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의 실권을 각각 잡았을 당시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를 통한 막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1979년 1월 전격적으로 양안 교류 확대를 선언하고 장징궈가 몇년 뒤 민주진보당 창당을 사실상 묵인한 것과 계엄령을 해제하여 대만의 정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한 것이 서로 연관성이 있었던 것.[18] 장징궈는 말년에 정말로 전향적인 양안 관계 개선 정책을 펼쳤고 그가 죽기 전에는 국민당, 공산당의 재합당과 통치 체제 통합 등이 진지하게 논의될 정도였다. 이에 중국도 전향적으로 나와 중화민국의 UN 복귀를 찬성하기도 했다. 이것 자체는 미국의 영향력 재확대를 경계한 소련의 반대로 엎어졌다.

그래서 1988년 1월 장징궈가 사망하자 이를 전해들은 덩샤오핑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장징궈가) 너무 일찍 죽었다. 계속 살아있었다면 3차 국공합작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 덩샤오핑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였는지 장징궈가 죽고 난 이후에 집권한 리덩후이가 조금씩 통일 담론을 엎어버리고, 천안문 6.4 항쟁으로 인해 대만에서 중국 공산당에 대한 경계가 강해져 양안 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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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타계한 후 부친인 장제스가 안치된 타오위안 시 츠후(慈湖)에서 1km 정도 떨어진 다시(大溪)에 안정되었다. 장제스처럼 지하 매장이 아닌 지상 토관묘 형식으로 안치되었고, 묘소 형태도 장제스의 것과 대동소이한데 이것은 장징궈가 장제스의 유지를 이어 통치했다는 것을 상징한다.[19]

2019년 현재 이 사진에 나온 장소는 대만 독립파들 등의 테러를 우려, 일반에게 개방하지 않고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다. 장제스의 묘도 마찬가지.

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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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궈 총통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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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처 파이나 이파티예브나 바흐레바(Фаина Ипатьевна Вахрева, Фаіна Іпацьеўна Вахрава), 일명 장팡량(蔣方良)[20]

가족 관계가 복잡하다.

본처 장팡량은 벨라루스 인으로 장징궈가 소련에 머물던 시절에 만나 결혼했고 훗날 남편이 총통이 되자 영부인이 되었다. 아들 장샤오원(蔣孝文)·장샤오우(蔣孝武)·장샤오융(蔣孝勇)과 딸 장샤오장(蔣孝章) 등 3남 1녀를 낳았다.

비서이자 내연녀 장야뤄(章亞若)는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이 쌍둥이는 본처 장팡량의 반대로 아버지의 호적에 오르지 못하고 외가의 성을 따랐기 때문에, 호적상으로는 외삼촌과 외숙모가 부모인 것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쌍둥이 중 동생인 장샤오츠(章孝慈)는 1996년에 사망하여 살아 생전에 아버지의 성을 회복하지 못했고, 쌍둥이 중 형인 장샤오옌(蔣孝嚴)은 장팡량이 사망한 후인 2005년에야 이미 죽은 동생 장샤오츠와 더불어 본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장징궈가 3대까지 세습을 하지 않고 그친 건 이런 가정 환경 탓도 있다는 말도 있다.

2019년 현재 장징궈의 자녀 중 생존자는 딸 장샤오장과 혼외자 장샤오옌 뿐이다. 장샤오옌은 행정원 부원장과 외교부 장관을 지내는 등 정계에서 활동한 적도 있다. 정실 부인 소생의 자녀보다 잘나간 셈인데, 아무래도 혈통을 중시하는 중국의 정서상 정실 자식들은 혼혈이고 내연녀 자식들은 순수 중국 혈통인 탓도 있었을 것이다. 장샤오옌의 아들 장완안(蔣萬安)이 2016년 입법위원 선거 2020년 입법위원 선거에서 내리 당선되어 현직 입법 위원이다.

장제스의 유일한 친자이지만 장제스의 친자가 아니라 마오푸메이가 주워온 자식이란 소문이 있는데, 이는 장제스의 양자로 알려져 있던 차남 장웨이궈의 증언을 기초로 한다. 장웨이궈는 말년에 장제스가 어릴 적에 고환에 화상을 입는 소동 끝에 고자가 되었다며 따라서 장징궈는 양자라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21] 장제스의 두 번째 부인 천제루의 회고록에 따르면, 장제스가 성기능을 상실한 것은 서른 살이 좀 넘었던 시점이라고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성병에 걸려서 고환에 염증이 생겼기 때문.

장웨이궈는 1975년까지는 공식적으로 장제스의 친자이며 장징궈의 이복동생으로 못박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장제스의 의형제이자 혁명 동지인 다이지타오(대계도)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사실 대륙 시절부터 장웨이궈가 다이지타오의 아들이라는건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이 소문을 듣고 충격받은 장웨이궈가 다이지타오에게 사실이냐고 따지기도 했다. 이에 다이지타오가 "네가 나를 닮았느냐, 장제스를 닮았느냐?"라고 묻고 장웨이궈가 장제스를 닮았다고 대답하자 "그럼 누가 네 아비인지는 확실하지 않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장웨이궈는 공식적으로 장제스의 차남으로 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출세운이 없었고[22], 장제스와 혈액형도 달랐으며, 실력자인 쑹메이링과의 연줄도 의도적으로 만들지 못하게 해서, 사실 장씨가 아니라 대씨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소문은 장제스 사망 이후에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결국 장웨이궈 본인이 장위국보도란 책을 내놓아 "자신 또한 다이지타오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나 장(蔣)씨 집안의 아들이던 다이(戴)씨 집안의 아들이던 상관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알려진 바로는 공처가 다이지타오가 일본에서 바람을 펴서 애를 얻자 아내에게 맞아죽을까봐 벌벌 떨었고 이에 장제스가 맡아주었단 건데… 소문의 당사자인 장제스와 다이지타오 본인들이 워낙 강하게 부정을 한데다가 이미 사망해서 확인할 길도 없고, 그 일본 여자와의 관계가 복잡해서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 유전자 검사하면 안 되나

5. 평가

장제스라는 철권 독재자의 아들로 태어나 정권을 세습했으나,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혼란이 야기되는 급격한 체제 변화를 지양하면서도 유연한 통치로 반대파들을 억누르지 않고, 자신에 대한 비판에도 관용을 베풀면서 조용히 체제의 통제를 풀어주었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은 중국 국민당의 일당 독재였고 본인도 독재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처럼 폭압적으로 운용하지는 않았다. 민주진보당도 그의 통치 당시에는 불법 정당이었지만, 장징궈는 민진당의 활동을 상당히 눈감아주었다. 말년에 들어 국민당을 설득해가며 1987년에 40년가까이 지속된 대만 계엄령도 해제했고, 각종 법률도 서구 민주주의에 걸맞게 개혁했다. 독재자임에도 국민들에게는 큰형님같은 친근한 이미지로 비쳤는데, 민생 현장에 자주 얼굴을 내비쳐서 서민들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고, 일반국민이 총통에게 쓴 편지에 직접 답장을 해주기도 하는 등, 실제로도 그러했지만 권위적인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서기 어려웠던 아버지와는 달리 서민적이고 소탈한 풍모가 있었다.

그의 사후 대만이 그다지 큰 유혈 사태나 혼란, 갈등 없이 급격히 서방식 민주화를 이룰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이런 면이 크게 작용했다. 또한 오일쇼크를 극복해낸 뒤로 대만 경제는 고성장으로 정점을 달려 1980년대 기준으로 대만의 경제력은 중국 전체 경제력의 40%에 달했으며[23] 경상수지도 매년 안정적으로 흑자를 기록하여[24] 외환보유고는 세계 수위권에 도달하여 1980년대 후반에는 대만이 선진국으로 진입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경제 상황이 대단히 좋았다.

대만에서는 물론이고[25] 대륙, 즉 중화인민공화국에서의 평가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한때 친 공산당 성향이 있던 데다가 이후 국공 내전 등으로 공산당과 대립할 때도 아버지인 장제스처럼 강경 일변도의 성향만 가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 또한 집권기에 양안관계 개선에도 꽤 노력을 기울인 편이다.

6. 주요 경력

중화민국 역대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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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6대 7대
옌자간 장징궈
( 1978년 5월 20일 ~ 1984년 5월 20일)
장징궈
6대 7대 대행
장징궈 장징궈
( 1984년 5월 20일 ~ 1988년 1월 13일)
리덩후이
중화민국 역대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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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9대 대행
옌자간 장징궈
( 1972년 5월 29일 ~ 1978년 5월 19일)
쉬칭중
중화민국 역대 행정원 부원장
파일:대만 국장.png
10대 11대 12대
황소곡 장징궈
( 1969년 7월 1일 ~ 1972년 6월 1일)
서경종
중화민국 역대 국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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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9대 10대
위훙준 장징궈
( 1965년 1월 25일 ~ 1969년 7월 1일)
황걸

7.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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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건국 60주년 기념 영화인 《 건국대업》에서는 중국의 유명한 배우인 진곤이 열연했는데, 상하이로 가서 마피아를 잡아 부패한 재정을 해결하여 막장 상황에 처한 중국 국민당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역사와 동일하게 현실은 시궁창. 상하이 삼합회의 보스인 두월생(杜月笙, 두웨성)에게 "저희 같은 잔챙이가 아니라 4대 가문 패거리들을 처바르는 것이 훨씬 이득일 것입니다."라고 충고를 빙자한 조롱까지 듣는다. 두월생이 단순히 암흑가의 보스라서 나타난 것은 물론 아니다. 두월생은 상하이 쿠데타 이후 장제스와 적극 협력하며 상하이 지역의 경제를 장악했다. '잔챙이' 발언도 ' 상하이를 장악한 나도 당신네 4대 가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사태가 심각한 걸 알기는 하는가?'의 의미에 가깝다.
호이4 1.5패치와 Waking the Tiger DLC 출시 이후 중화민국 정치고문으로 추가되었다. 정치력 획득 15% 버프를 주어서 무조건 채택해야 할 고문 중 하나. 장징궈가 국립정치대학 수립 등에 참여한 것을 감안한 듯.

여담으로 끄투에서 은근히 인기 있는 단어이다. [장징궈]->[궈모뤄]->[뤄창페이]


[1] 중국의 중산대학이나 대만의 국립중산대학과 철자가 같다. [2] 저장성 출신으로, 오어를 모어로 썼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장성 출신인건 함정. [3] 여기서 이름을 딴 차이위 훈장이 있다. 자국 또는 우방국 국가 원수에게만 줄 수 있는 훈장인데, 천수이볜 전 총통도 받은 적이 있다. 장제스의 어머니 이름을 딴 훈장이지만 천수이볜도 이름을 안 바꾸고 그대로 받았다. [4] 아버지 버프도 있었지만 아래 서술처럼 소련 거주시 잠시 장제스와 의절한 이력도 있는 등 집권하기 전까지 의외로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국부천대 이후에는 장웨이궈의 견제도 있었고. [5] 1955년도에 장징궈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은 소련에 있을 때부터 소련을 신뢰하지 않았다면서 해당 내용을 부정했다. 그러나 가족의 개인적인 일까지 알고 있는 걸로 봐서 본인의 의지로 서술한 게 맞는 것 같다. [6] 아래에서도 언급할 장팡량(蔣方良)이다. [7] 이 화폐개혁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실시된 것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국민당의 전비지출)을 다스리지 않은 채 단순히 화폐가치를 절상함으로써 위기를 넘기려고 했기 때문에 대실패는 예정되어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정부방침을 충실히 따라 화폐개혁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자기 재산을 신권으로 바꾼 사람들만 거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때문에 국민당 정부가 붕괴되었다고 할 만큼 국민당의 경제기반인 저장성-장쑤성-상하이의 민심이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8] 우궈전의 경우, 장징궈가 공산당을 잡겠다는 구실로 공산당의 방식을 사용한다고 비판했다. [9] 그는 이미 이 시절부터 당뇨병 증상을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싸돌아다니 주치의가 넌덜머리를 냈다고 한다. [10] 구체적으로는 중산고속공로, 중정 국제 공항(현재의 타오위안 국제공항), 타이중 항, 쑤아오 항, 북회선, 서부간선 전철화, 조선(造船) 공사, 석유 공사, 제1 원자력 발전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1] 사실 장징궈는 세습을 안 한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자녀가 다 혼혈 아니면 사생아라는 점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자신의 아들이 세습을 하거나 군부가 집권하게 된다면 대만에서 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고, 이래서는 날로 국제적 지위가 높아져가는 중화 인민 공화국을 제쳐두고 중화민국을 지지해야 할 명분도 낮아 미국의 지지를 계속 받기가 어려웠다. [12]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 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 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다. [13]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 [14] 대부분 알겠지만 1달 전인 1987년 6월 한국에선 6월 민주항쟁이 있었다. 당시까지는 그래도 몇 안 남은 동맹국이었던 나라의 민주화 여파도 계엄령을 해제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15] 메이리다오 사건이나 야당 허용의 조건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 국민 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은 1940년대에 중국 대륙에서 남녀노소 인민들의 직선제로 선출한 의원들이 종신직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민주 국가라면 당장 해산하고 재선했어야 하지만 이들이 이른바 '3당 훈정'을 지탱하는 구성 요소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장징궈 시절에는 끝내 재선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국민 대회와 입법원의 전국적인 총선거는 리덩후이 시절에 가서야 실현되었고, 감찰원은 이때부터 총통이 임명하고 국민 대회 동의를 얻도록 바뀌었다. [16] 이 제의는 29년 후 마잉주가 대만 총통으로 취임한 2008년 말에 실현되었다. [17] 당시 대만은 미국이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단교하면서 1971년 유엔에서의 축출 이후 악화일로에 있던 국제적 고립이 더욱 가중된 위기 상황이었고, 장징궈를 비롯한 대만 국민당의 지도층 대다수는 여전히 국공 내전 시절 공산당과의 대립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중국 공산 정권의 3통 제의는 과거 자신들이 중국 본토에서 밀려나는 단초가 되었던 제2차 국공 합작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고, 이를 단순한 선의로 받아들이기 곤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18] 즉 덩샤오핑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상호간의 교류를 강조하자 장징궈 역시 대만의 민주화를 통해 차후 통일 문제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자 했던 것이다. [19] 두 부자의 묘는 모두 '능침'(陵寢: 영어로는 영묘를 뜻하는 Mausoleum으로 번역)이라고 불린다. '릉'이 황제의 무덤에 붙여지는 것을 생각할 때, 장씨 부자 총통의 권력을 반영하는 대목. [20] 팡량이라는 중국식 이름은 장징궈의 생모인 마오푸메이가 지어줬다고 한다. 원래 장제스가 지어준 이름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바꿨다고 한다. [21] 마오푸메이의 사진을 보면 장징궈와 무척 닮았다. 마오푸메이(1982-1939)가 장제스와 결혼한 뒤에 28살에 얻은 아들이다. [22] 원로들이 장웨이궈를 위해 사퇴까지 하면서 자리를 마련해줘서 겨우 승진하기도 했다. [23] 인구수를 생각하면 대만의 생활수준이 중국보다 월등히 높다는 얘기이다. 물론 거꾸로 얘기하자면 그 만큼 중국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으로 까먹은 역량이 엄청났다는것을 보여준다. [24] 반면에 한국은 3저 호황 시기 정도(1986~1989)롤 제외하면 노태우~김영삼 정부에 적자로 돌아서 이는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으며 경상수지 흑자를 제대로 내게 된 것은 1998년이 되어서부터였다. [25] 역대 최고의 총통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장징궈를 꼽는 사람이 많다. 사실 실질적으로 민주화를 이룩해내고 금융위기도 돌파해낸 리덩후이도 평판이 좋을 수 있겠지만 강경한 대만 독립론자라 여러모로 호불호가 갈리는 상황. 장제스를 학살자이자 독재자로 보는 대만독립파들도 장징궈는 그다지 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