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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3:53:13

상나라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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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Shang Dynasty
파일:상나라_영토.jpg
붉은 색은 초기 청동기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유적의 영역,
녹색은 《 죽서기년》 연구에 따라 중국 학계에서 비정하는 영토이다.[2]
기원전 1600년?~기원전 1046년
별칭 (殷)[3], 은상(殷商), 대읍상(大邑商)[4]
위치 중국 화베이
수도 (亳), (殷) 등[5]
국가원수 왕(王), 제(帝)[6]
주요 군주 대을(기원전 16세기)
반경(기원전 13세기)
무정(기원전 13세기)
제신(기원전 11세기)
언어 상고한어
문자 갑골 문자
종교 중국 토속 종교[7]
종족 상족(商族)[8]
통화 조개 화폐
성립 전 황하 문명 이리두 문화(=하나라?)[9]
멸망 후 주나라, 송나라[10]
현재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1. 개요2. 명칭3. 계보4. 역사5. 국가 구조6. 하•상•주 3대의 관계7. 상나라의 기술과 문화8. 인신공양
8.1. 아즈텍 제국과의 비교
9. 창작물에서10. 기타11. 참고할 만한 사이트 및 문헌

[clearfix]

1. 개요

중국의 고대 국가.

기원전 1600년에서 기원전 1046년까지 존재했다.[11] 한자로는 (商)이며, 국성(子)였고 수도(殷)이었다. 수도의 이름에서 따와 은나라라고도 부르며 중국 고대국가의 '하 · 은 · 주'의 이 상나라를 뜻한다.

한때 전설상의 국가로 인식되었으나 은허 갑골문의 발견으로 실존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중국 최초의 국가로 인정 받고 있다. 청나라 시대에 고대 기록을 의심하는 의고학[12]이 득세하면서 한때 실존이 의심되기도 했으나 1899년에 갑골문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면서 학자들 대부분이 상나라는 실존했던 나라라고 인정한다고 한다. 좀 더 정확히는 갑골문이 처음 발견된 시점만 해도 약재로 인식한 사람도 많았고, 상나라의 실존이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 것은 1920년대 후반 이후 은허의 발굴이라고 할 수 있다.

2. 명칭

파일:은허-.png
상나라의 주요 도시이자 수도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은허의 위치.

'은'(殷)[13]이라고도 불리기에 합칭하여 은상(殷商)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은은 반경(盤庚)부터 제신(帝辛) 시기에 도읍했던 상나라 최후의 수도였는데, 당대에는 '의'(衣)[* 衣와 殷은 상고한어에서 끝소리가[[r] 또는 [l]로 추정되며, 나중에 이것이 [j]와 [n]으로 갈라진 듯 하다.] 혹은 '대읍 상'(大邑 商)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은을 도시 이름으로만 쓰고, 부족 이름은 '상'이라 했다. 갑골문에서도 은이라는 글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나라 이름이 은이라 불린 것은 서주의 성립부터로, 초기에는 상과 혼용하다가 후에 은으로만 부르게 되었다. 이를 주나라 사람들이 부른 폄칭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서구인들도 Shang이라고 하며(은은 한어 병음 표기에 따라 Yin), 요즘에는 중국인들도 상이라고 부르는 추세다.

은나라라는 명칭은 은(오늘날의 은허)에 도읍을 두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 상이 부족명으로 쓰였기 때문에 은보다는 상나라라는 명칭이 중국 고대사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쓰인다. 다만 갑골문은 주로 은에서 나왔기 때문에 갑골학사에서는 은이라는 용어가 자주 쓰인다.

이는 중동의 히타이트와 비슷하다. 히타이트도 네샤에서 하투샤로 수도를 옮겼는데, 그들 스스로는 계속 자기들을 네샤인이라 불렀으나 주변 국가들은 하투샤인이라는 뜻으로 하티라고 불렀다.

상인, 상업 등의 자가 이 나라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상나라의 유민들이 이곳저곳 장사하며 떠돌아 다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상추시 역시 같은 유래를 지니고 있다.

학계에서는 상나라를 건국하고 지배한 종족에 대해서 독립적인 표현을 쓸 때 상(商)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따 상족(商族)이라고 칭하고 있다.

상나라는 제후국이었던 주나라 즉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 신하였던 주나라의 역성혁명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에,[14] 화하족이 세운 주나라의 입장에서는 이민족인 상족(商族) 유민들을 안정시켜야 했으므로 무왕은 제신(주왕)의 아들이었던 무경(武庚)을 다시 은 지역에 봉해 제후로 삼았다. 하지만 무왕이 붕어한 후, 무경은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고 말았다. 관숙과 무경은 처형되었고 채숙은 추방되었지만 상족(商族)들과 이들에게 협력하는 동이(東夷)들의 저항이 계속되었기에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기까지는 수 년이 더 걸렸다.[15]

삼감의 난을 진압한 주나라는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상나라의 왕족인 미자 계 송(宋)나라에 봉해 상나라 유민인 상족(商族)들을 다스리도록 했다. 또한 상나라의 옛 수도인 조가(朝歌)에 무왕의 아우인 강숙 봉을 봉하니 그의 봉국이 위(衛)나라였다. 상나라의 옛 수도에 그대로 봉했던 무경 때와 달리 상나라 왕족인 미자 계는 상나라의 옛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 봉했고, 상족(商族)을 나누어 강숙 봉에게 봉했기 때문에 상족(商族)의 세력은 많이 약화되었다.

3. 계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상나라/계보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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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전설상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 걸왕을 물리친 성탕(成湯)이 건국했다. 성탕은 갑골문에서도 확인되는 왕으로 대을(大乙), 성당(成唐)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갑골문에서 탕왕은 상나라를 중흥시킨 왕일 뿐 창시자는 아니었다. 갑골문에서 상나라의 창시자는 삼황오제 중 한 명인 제곡 고신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상나라의 시조인 (卨, 契)이 제곡과 연결되는 것처럼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 역시 제곡과 연결된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이 상나라의 도읍이었던 하남성을 시작으로 수년간 수소문하여 자료를 수집해 기록한 상나라의 왕실 족보는 20세기에 중국에서 출토된 상나라의 갑골문자와 그 기록이 정확히 일치했는데 이를 보면 주나라의 제곡 고신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는 당시에 그저 상나라의 계보를 토대로 가탁하여 자신들의 조상 계보를 돋보이게 하고, 왕실의 권위를 미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에 불과할 수 있다. 그리고 후대 역사서에서야 당시의 중국이 통일된 국가인 양 묘사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측면의 주장에서는 주나라는 상나라의 왕실 지배층인 상족과는 민족부터 다른 성읍 수준의 부족이었는데 오랜 세월 문화적으로나 통치적으로나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국가인 상나라에 종속되어 있는 주종관계였다.

중국 학계에서는 상나라가 하나라의 주변국가였다고 보지만 하나라는 역사적인 증거가 없는 가상의 국가일 뿐이고, 하나라는 역사적으로 그 존재가 명백히 증명된 중국 문명 최초의 문자이자 상나라의 문자인 갑골문을 토대로 소급해 유추한 것일 뿐이기에 탕왕이 무언가를 정벌하고 패권을 쟁취했다고 한들 하나라의 존재가 그저 허구라면 당시 시대상은 그걸 달리 여기거나 건국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 다만 일반적으로 중국 왕조사에서 "건국자" 내지는 "개국군주"[16] 같은 표현은 기존에 있었던 중원 왕조를 밀어내고, 새로운 왕조가 중원에서 패권을 잡도록 한 군주에게 사용한다. 따라서 성탕이 건국자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사실 갑골문에서도 읍을 건설한다는 서술은 있어도 건국이라는 표현 자체는 쓰지 않는다. (國)은 전근대에 States를 지칭하기보다는 도시에 사용했다. 《사기》에서도 상왕실의 시조인 설을 상에 봉한 것이 제순 유우씨 시절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상나라는 이때 건국되었으되, 하나라를 내쫓고 중원의 1인자인 천자가 된 건 탕왕이라는 것이 《사기》의 기록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은 기록상의 모순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상나라의 뒤를 잇는 주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삼황오제의 시대와 상나라 사이에 하나라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사기》에서는 하, 상, 주의 조상이 모두 황제 헌원씨로 나오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가장 이상한 경우는 주나라다. 상나라는 출토된 유물인 갑골문으로 나라의 존재와 왕들의 계보인 왕실 족보가 명백히 사마천의 기록과 일치함이 증명되었는데 황제 헌원씨에서 하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걸왕까지 총 20대, 황제 헌원씨에서 상나라 중흥의 군주인 탕왕까지 총 17대이며, 황제 헌원씨에서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제신(주왕)까지는 총 46대이다. 그런데 주나라의 기록에서는 황제 헌원씨에서 서주의 초대 군주인 무왕까지 총 19대에 불과하다. 밀양 박씨에서 약 1,000년 동안 약 20대가 벌어졌는데, 이를 적용하면 주나라는 직계에서 매우 먼 자손이 되어 버린다. 다시 말해서 주나라의 족보 기록은 상나라의 것을 바탕으로 가탁한 것으로써, 이것은 주나라 희성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했던 행위로 보여진다.[17]

갑골문에서 발견되는 상나라의 역대 왕명은 모두 십간을 따라 지었다. 상나라가 제정일치 성격이 강했던 면모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갑골문으로 확인한 왕명과 순서가 사마천의 《 사기》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물론 다 같은 것은 아니고 마지막 왕 '제신'(帝辛)의 기록은 다르다. 그동안 제신의 평가는 사마천의 《사기》에 의존했는데 갑골문이 발견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4. 역사

중시조인 탕왕 이후 상나라는 여러 번 천도를 하는데, 발굴되어 확인된 상나라의 도읍으로는 중기의 수도인 박(亳)으로 추정되는 허난성 옌스 유적, 그리고 최후의 수도인 허난성 안양시 샤오툰촌의 은허 유적지가 있다. 갑골문은 주로 이 안양 은허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다른 유적지에서는 갑골문 출토가 드물다. 사실상 갑골문은 상나라의 문자가 명확하며, 은허 이전의 갑골문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갑골문이 쓰이기 전 고고학적으로 드러나는 상나라 전기에 대해서는 관련 전공의 석사 과정 학생이 최근 중국 고중세사 분야 주요 학술지에 논문을 내기도 했다. #

기원전 13세기 무정(武丁)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주변 종족들을 대거 복속시키면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왕조 말기의 왕인 제을(帝乙)과 제신(帝辛) 부자의 과도한 동방 정책[18][19]으로 서방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 틈을 탄 산시성 지역의 주나라가 서방 부족을 모아 상나라를 공격했다.

결국 상나라는 기원전 1046년 목야의 대회전에서 대패하여 국가가 멸망하고 말았다. 마지막 왕이었던 제신에게는 주나라에 의해 불명예스러운 '주'(紂)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하나라의 걸왕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상나라 왕족인 미자(微子) 계(啓)에게 공작위를 수여하여 제후국인 송(宋)에 봉했고 나라의 근본인 상(商)의 제사(祭祀)를 계승하도록 했다. 송나라는 다른 제후국들과는 다르게 주나라 천자의 제례가 허락되었는데 이것은 전 왕조의 후예를 대우한 것이었다.

5. 국가 구조

상나라의 영역 바깥에 다른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최초의 중앙집권적인 왕조로 볼 수 있으며 다른 문명들도 존재했겠지만 아직 역사적인 증거가 없고, 있어도 소수의 부락 수준이었다. 주나라가 건국하고도 몇백년 뒤인 주나라 후기 동주시대 수도인 낙양 서쪽 산에 이민족 부락이 발견된 것이 최초의 기록이었으니 상나라를 가장 오래된 문명국가이자 중앙집권적인 최초의 왕조로 보는건 합당하다. 주나라의 봉건 통치 이후에 이렇게 각기 다른 문명들이 분열하여 생겨났고,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서로 교류하거나 규합하는 과정을 거쳐서 통일왕조인 한나라에 이르러서야 한족이라는 중화의 민족적 정체성이 생겨났다. 중화의 대표적인 민족이라 할 수 있는 한족이 확정된 것은 전체 역사로 보면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게 아니었다.
이와 더불어, 하나라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를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하가 일개 성읍 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 중원에는 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성읍 국가들이 수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하는 그 수많은 성읍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사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개 성읍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사기》의 사마천 등 후대의 중국인 역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 년 전의 하대에 투사하여 하를 마치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인양 묘사했던 것이다. 하를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하를 이었다는 상, 주 등 중원의 '왕조'들도 진, 한 등과 같은 후대의 왕조와는 달리 수많은 성읍국가군으로 구성된 중원 국제 사회의 대표적 성읍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김한규, 《천하국가》, 57쪽

국제사회라는 표현은 저자가 어떤 맥락에서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현대의 표현이기 때문에 고대사까지 소급해서 적용하기는 다소 곤란할 수 있다. 국제사회는 미국 위주로 돌아가긴 하나 명목상 대등한 관계이다. 그러나 상(商)나라는 갑골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대 최소한 주변 국가들에게 명목상으로도 상나라의 주도권을 인정할 것을 촉구한 듯 보인다.

왕이 가지는 권력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다. 당시 중국에는 상나라를 섬기는 성읍국가와 상나라를 섬기지 않는 수많은 이민족이 공존했으며 이들이 어느 지점을 경계로 나뉜 것도 아니었다. 이민족 사이에 상나라 성읍이 있기도 했으며 상나라 성읍 사이에 이민족 부락이 있기도 했다는 것이다[20]. 이는 주나라 때도 마찬가지였으나 상, 주의 영향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으니 더 많은 성읍들이 복종해왔으며 시간이 갈수록 이민족은 토벌되거나 동화되어 사라졌다. 결국 한나라 시대가 되면 파촉, 형남, 강남에는 가야 이민족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동화되었다.

영토형 국가가 아니라 상나라가 주도하는 성읍국가 간의 네트워크였던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정치체제 발전이 덜 되었던 것도 이유지만 더 큰 이유는 당시 중원의 자연환경이다. 상고시대만 해도 황하 주변은 많은 지역이 습지 밀림이었다.[21] 이 때문에 몇몇 거점을 중심으로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 잦은 전쟁 때문에 황하 유역은 평지가 되었고, 교통이 발달했으며 거대한 국가가 등장했다. 반면 남쪽의 장강 유역은 여전히 밀림이 많아 인구 밀도가 낮았거니와 그마저도 몇몇 거점도시에 밀집되어 그 밖으로는 이민족이 여전히 많았다.

따라서 하나라의 존재 근거가 없는 상태이므로 하나라와 다른 실체가 있는 집단에서 상나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면 상나라 자체 내에서 문물과 제도를 대대적으로 새롭게 정비했거나 상나라가 생겨났다고 예측되는 시기보다 더 이전부터 점차적으로 영토를 확장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상나라의 왕인 성탕의 존재만 그간 갑골문 연구를 통해 추가 증명되었을 뿐이며, 하나라를 입증할 역사적인 증거는 전혀 없어서 입증이 불가한 전설속 국가지만 국책연구사업으로 인해 연표는 확정되어 있는 기묘한 상황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갑골문에서는 전설과는 다르게 탕왕이 하나라를 물리친 역사 기록이 없으며 하나라에 대한 흔적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6. 하•상•주 3대의 관계

중국 학계에서는 이리두 문화를 하나라의 유적으로 추정하긴 하나 아직 확실한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상나라 이전에도 중원에는 여러 성읍국가들이 병존했고, 하나라가 실존했더라도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성읍 또는 부족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하나라가 멸망하고 상나라가 건국되었으며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한 후 세워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와 다르다. 중국의 청동기시대에는 아직 후대의 진, 한과 같은 중앙집권국가는 등장하지 않았다. 하→상→주 교체는 가장 강한 성읍 또는 집단의 교체일 뿐 전 왕조가 외부의 침입으로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경쟁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후로 패권이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간 것처럼 명조대전과 목야대전 전후로 패권이 하→상, 상→주로 넘어간 것이다. 또 패권이 스파르타에 넘어갔다고 아테네가 멸망한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하, 상이 패권을 잃었다고 나라가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정리하자면 패권을 쥔 성읍은 하→상→주 순으로 바뀌었지만, 기타 여러 성읍의 지배계층과 주민들은 큰 변화없이 유지되었다. 부연하자면 춘추시대까지도 하나라의 후손은 기나라, 상나라의 후손은 송나라의 왕족으로 대우받았다.[22]

우선 하와 상의 관계를 보면 갑골문에는 탕왕을 칭송하는 내용은 많이 보이지만 하왕조 같은 강한 적을 물리쳤다는 언급은 없다. 더구나 갑골문에서 하(夏)라는 글자는 보이지도 않고, 1년을 춘하추동이 아니라 단순히 춘추로만 구별했다. 또한 하나라 후기 문화로 추정되는 문화와 상나라 초기 문화로 추정되는 문화가 연속적이라는 측면에서 하-상의 교체는 상-주의 교체와 달리 지배층 내부의 계승분쟁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반면 상과 주의 관계는 성격이 다르다. 위치가 낙수, 황하, 제수 사이로 비슷한 하-상과 달리 주의 근거지는 관중지방이었다. 또 주나라가 승리한 후 산동 지역에 친척을 분봉하고 강족을 이주시켜 토착 세력을 통제하려고 했다. 문화면에서도 제사 대상은 제→천으로 바뀌고 점을 치는 방법은 동물뼈→나뭇가지로 변화했는데 문화가 큰 변화가 없는 하-상과는 차이가 있다. 《사기》, 《시경》 등의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는 고공단보 대에 융적을 피해 기산 아래에 정착했다. 그후 서방에서 인심을 얻으며 세력이 점차 성장하여 초기에는 상나라와 대립했으나 점차 상나라의 패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주나라의 근거지인 기산, 풍경, 호경이 있는 관중 지방은 상나라의 영향력이 약한 지역이었고 주나라의 세력도 무시못할 만큼 강력했기 때문에 상나라의 복사를 보면 주나라를 정벌할까요? 같은 기록이 나올 정도로 주나라를 경계했다. 주문왕의 아버지인 왕계(계력)가 상왕 문정에게 감금되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문왕이 상나라 왕을 만나러 갔다는 기록도 있는데, 상나라는 주나라가 일단 지금은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언제 통수칠지 모른다고 여긴 것 같다.

전통적으로 주나라의 국성인 희성은 강성과 통혼하는 관계였다. 고공단보의 아내로 계력의 어머니였던 여성은 태강이었고, 주무왕의 아내는 읍강이었으며 훗날 주유왕이 포사를 총애하면서 내친 신나라 출신의 왕비 또한 신나라가 강성 제후였기 때문에 강성이었다. 그런데 주나라의 세력이 강력해지면서 다른 성이랑 통혼하는 경우도 생겼는데 주문왕의 어머니는 임(任)성이었고, 아내는 사(姒)성이었다. 《주역》의 <효사>를 보면 상나라 주왕의 아버지였던 제을이 주문왕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내용이 있다. 이는 상나라가 주나라와 결혼동맹을 맺어야 할 정도로 주나라의 세력이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왕(제신)이 문왕을 유리에 감금한 것도 주나라에 대한 견제정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상왕 문정이 계력을 감금해 죽였지만 계력의 아들인 서백 창, 즉 주문왕의 시대가 되면 상나라의 근거지와 가까운 우, 예, 숭 등을 정벌할 정도로 세력이 강력해졌다. 제신이 서백 창을 유리에 감금하면서 계속 견제는 했지만 결국 서백 창의 아들인 주무왕 희발의 치세때 주나라를 수장으로 강(羌), 용(庸), 촉(蜀), 무(髳), 노(盧), 팽(彭), 복(濮) 등 서쪽의 국가들이 연합하여 목야에서 상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패권을 쟁취했다.

주나라가 패권을 쟁취하긴 했지만 상나라의 유민인 상족(商族) 세력은 여전히 강했는데 주나라가 상족(商族)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주공단, 미자계, 송나라 문서 참조.

문화면에서 주나라와 상나라는 결과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고공단보 시절이면 몰라도 상나라와 한판 붙은 주무왕 시절의 유물을 보면 상나라와 대동소이하다. 꾸준히 상나라와 교류하면서 문화도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주나라 또한 상나라처럼 동물뼈로 점을 친 흔적이 있는데, 민족의 기원은 달랐을 수 있어도 상주교체기 무렵에는 문화가 비슷해진 모양이다.

7. 상나라의 기술과 문화

파일:attachment/vasefromShangdynasty.jpg
상대의 청동 항아리
상대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도철문[23]이 아로새겨진 청동기다. 즉 상나라는 청동기 문명권이었음을 알 수 있다.[24]

이 시기 청동기들은 조형 수준도 뛰어나지만, 도철문의 형태나 크기, 위협적인 형태의 장식 등이 상•주 이후의 중국 왕조 문화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아메리카 고대 문명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이다. 상나라 시대의 청동기들은 종류까지 참으로 자유분방해서, 고고학자들이 하나하나 특징을 잡고 명칭을 붙이느라 애를 먹는다.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케임브리지 중국고대사》 <선진>편에 따르면 대략 4~5개 정도의 구분이 존재한다.

당시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은 주나라 이후처럼 대량생산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인지 청동기들은 주로 제사에 쓰였다. 주나라 시대로 가면 장식이 다소 간략해져서 이전 시대보다도 오히려 청동기 주조기술이 퇴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단순히 주조기술이 후퇴해서가 아니라 청동기가 단순 제사용에서 확장되어 귀족의 기념물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나라의 청동기는 문양이 화려하지 않은 대신, 유물의 주인이 주 왕실로부터 받은 은사나 선조의 공덕, 자기 자랑을 구구절절하게 새겼음이 특징이다. 그래서 사료적인 가치는 오히려 주나라 것이 더 높다.

고도로 발전한 청동기 기술에 비해 상나라의 건축 기술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기와가 발명되지 않아[25] 자주 지붕을 갈아야 함은 둘째 치고, 한번 지은 건물의 공학적인 내구도가 낮아 자주 새로 지어야 했다. 건물이 붕괴되는 일도 잦아서 건물을 짓기 전 인간 제물을 땅에 묻어 건물이 튼튼해지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이런 풍습은 지진으로 건물이 자주 무너지던 일본이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시문명에도 있었던 풍습으로, 이때문에 상대의 건축물 기둥 유적 아래에서 사람의 인골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이때 건축물들이 어땠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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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링크 이게 건물터. 참고로 이 건물들의 정체는 바로 당시의 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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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허 박물관에서 복원한 상나라 시대의 궁전. 지붕은 짚으로 되어 있다.

이 시대에 상족이 숭배했던 신은 (帝)였다. 제는 조상신으로서 그들은 왕이 죽으면 제가 된다고 믿었다. 즉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받드는 고대 신정국가였다. 왕은 제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으로서 제에 대한 숭배 의식을 주도했다. 제는 혈통적인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제를 숭배하는 씨족끼리 연합하여 한 국가를 이루었다. 이를 통해 상나라가 씨족들이 모인 도시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帝) 신앙은 상나라의 멸망 후에도 불멸에 가까울 정도로 유지가 되었는데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영성 조씨의 진나라에서는 위대한(皇) 상제(上帝)라는 뜻의 황제(皇帝)가 등장했고, 진나라 멸망 후 전한과 후한 시기에 발흥한 도교 신앙과 결합이 되어 도교의 최고 신인 옥황상제가 등장했다. 그리고 16세기때는 외부 종교와 결합을 했는데 바로 기독교였다.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의 신을 중국어로 표현하기 위해 신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수집을 했고, 결국에는 상제라는 단어가 중국인들에게 잘 받아들여져 상제로 번역을 해 이후 천주 외에는 어떠한 단어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교황의 칙서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선교에서 폭넓게 쓰였다.

천제께 제사를 지내는 제례는 천자의 특권이었으며, 때문에 상나라가 멸망하고 나서도 주나라를 비롯한 당시의 인식이 아직은 모든 면에서 상나라 자성 왕실의 후예를 함부로 할 수 없어 그들을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후 송나라에서 상왕실의 후손인 공자의 부친이 자성 송씨에서 자성 공씨로 바꾸고, 노나라에 건너가 정착하게 되었는데 공자는 상나라 왕실의 종친이며 죽기 직전까지 상나라 왕족의 후예인 것을 밝히며 상왕실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장례할 것을 유언했다. 그 말대로 공자의 조상은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제신)의 둘째 형 미중(微仲) 연(衍)이었다. 공자는 미중 연의 15세손(=14대손)이었다.

8. 인신공양

정사일에 점을 친다. 장차 불로 지내는 제사를 하(河, 황하)에 지내려는데, 우리에서 기른 소와 첩을 강물에 빠뜨릴까?(丁巳卜:其燎于河, 牢沈妾?)
《갑골문합집》 32161[26]
병술일에 점을 치며 정인 대가 묻는다. 특정 사안을 고하며 포로를 바치는 제사를 하(河)에 지낼 때 불로 지내는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소 세 마리를 황하에 빠뜨릴까?(丙戌卜, 大貞: 告執于河燎, 沈三牛?)
《갑골문합집》 22594
갑자일에 점을 치면서 묻는다. 여자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에 주술사(巫)를 쓸까?(甲子卜,㱿貞:妥以巫)
《갑골문합집》 5658
묻는다. 오늘 병술일에 재라는 주술사를 불로 태우면 큰 비가 있을까?(貞: 今丙戌燎□[27], 有從雨?)
《갑골문합집》 9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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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쌓으면서 제물을 바치려는 상나라 사람들의 모습. 갑주를 입은 사람은 귀족 무사이고, 뒤쪽의 도끼를 든 사람은 제물로 바칠 사람의 목을 치는 부월수이다. 머리를 풀고 윗옷이 벗겨진 남자는 제물로 잡혀온 이(夷)족이다.

상나라는 인신공양으로 유명하지만, 상나라뿐만 아니라 고대에 인신공양은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청동기 시대 정복전쟁이 시작되면서 많은 포로들을 잡기 시작했고, 인신공양 풍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노예제도가 확대되고 포로들을 노동력으로 인식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28]. 상나라와 동시대였던 중동에서도 여러 인신공양 기록이 남아 있고[29], 유럽의 바이킹은 중세 중기까지 인신공양을 행했으며, 고대의 생산력에 머무르던 남미에서는 15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이 올 때까지도 이런 풍습이 남아 있었다.

상나라가 인신공양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바로 상나라 시대부터 자세한 기록문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인데, 《상서》(尙書)에는
'오직 상나라의 선인들만이 전(典)이 있고, 책(冊)이 있었다.'
고 할 정도로 중국 최초의 역사 기록이 상나라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이는 갑골문의 형태로 갑골문자는 한자(漢字)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나라에서는 약해졌다지만 주나라 시기의 인신공양도 만만치 않았다. 인신공양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인신공양을 본격적으로 배척하기 시작한 건 춘추전국시대 유가(儒家)가 발흥하면서부터의 일이었다. 상나라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가 춘추전국시대 송(宋)나라이다. 그래서 주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송나라에서도 인신공양 풍습이 있었다. 다만 인신공양은 점차 사람이 아닌 소나 말로 대체되어 갔다. 상나라의 인신공양 제물로는 노예들이나 유목민들인 티베트계 강(羌)족이 주된 희생양이었다.

상나라에서의 인신공양 내용과 방법은 갑골문에 자주 나오며,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골 역시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갑골문의 기록을 볼 때 농사가 안 되거나 천재지변이 벌어지면 주술사를 제물로 썼다고 한다. 건축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도 인신공양을 했다. 이는 주로 건물의 기초에 제물이 된 사람의 시체를 파묻는 형태로 이루어졌다.[30]

신정일치(神政一治) 국가였던 상나라에서 인신공양은 주로 노예나 강족과 같은 다른 민족의 포로를 잡아다가 죽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형식으로 했다고 한다. 물론 적당한 제물이 없으면 자국민이라도 봐주는 건 없었다. 이렇게 제사로 쓸 인간을 죽이는 방법이 12가지나 되었다. 십이지의 하나인 '묘'()자가 형벌의 한 종류로 쓰이기도 했다. 한자의 모양에서 짐작이 가겠지만 제물로 삼기 위해 세로로 두 토막을 내는 방법으로, 소나 돼지 같은 동물을 정형할 때 모습을 상상하면 편할 것이다. 갑골문 기록 중에
'사로잡은 적국의 고위 여성을 이렇게 죽일까?'
라고 점치는 기록이 있다. 한자 피 '혈'(血) 역시 그 형상이 제기()에 담긴 사람의 피를 나타낸다.

사마천의 《사기》에 은나라(상나라)의 주왕 제신 포락지형 같은 혹형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사기》의 기록이 약간 잘못된 것이다. 제신의 대에 들어서 포악한 방법을 채택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상나라가 잔악무도한 짓을 많이 했다. 오히려 갑골문의 기록을 보면 제신은 어느 정도 인신공양을 줄이려고 했는데, 상나라의 잔학한 풍속이 제신의 전설로 변형되어 《사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포락 정도의 혹형은 실제 고고학과 갑골문을 통해 밝혀진 상나라의 많고 많은 잔악한 짓들의 일람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렇게 인신공양에 처해지는 노예는 눈을 멀게 하고 무릎 꿇린 뒤 밧줄로 묶었다.[31] 백성을 뜻하는 '민'(民)은 원래 툭하면 제물로 바치던 노예를 뜻하던 문자였는데 상형문자로 눈()에다가 칼을 쑤셔 박는 모양을 뜻한다고 한다. 즉 민()의 기원은 매우 잔인했다. 사실 춘추전국시대만 하더라도 인()은 지배층만을 향해 말하는 개념이었으니, 저 시대에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방식으로도 인신공양을 했는지 붉을 '적'()은 사람 모양 아래 불 모양이 있는 형태로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순장도 공공연히 벌어졌는데, 그냥 묻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잘라버리고 묻었다. 이를 두고 '죽어서도 생각을 못하고 명령에 순종하며 부림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서는 생각하는 기관은 심장이라고 봤지 머리라고 보지는 않았기에, 무덤 주인의 혼의 기력(?)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마치 실제 사람들이 건강을 챙긴다고 각종 보양식을 먹는 것처럼 영혼의 보양식 개념으로 순장한 것이라고. 어쨌든 이 잘린 머리들은 뼈 공장으로 보내져 뼈 그릇를 만드는 데 쓰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두개골들은 윗부분이 톱 같은 도구로 잘려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게다가 인신공양 제사의 흔적으로, 발굴된 청동솥 안에 삶긴 사람 머리가 있었다.[32] 결국 상나라가 멸망한 주요한 원인들 중에는 제후국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 행했던 이런 잔혹한 인신공양의 대상이었던 주변 제후국들이 같은 제후국인 주나라의 편을 들었던 것도 있는 듯하다.[33]

주나라는 상나라에 비해서 잔인성이 약해졌지만, 인신공양이나 순장 등의 악습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춘추전국시대에도 유가의 집중적인 비난[34]을 받는 가운데 차츰 줄어들다가[35] 통일 진나라에 접어들면서 대체로 사라지고, 청나라 중기에서야 완전히 사라졌다.

8.1. 아즈텍 제국과의 비교

도시국가 집단 + 주변의 이민족들 + 대규모의 인신공양이라는 특징을 놓고 볼 때 역사속에서 상나라와 가장 닮은 문명은 신대륙에 위치한 아즈텍 제국이다. 상나라의 식인 행위도 자주 사료[36]에 나오는데, 이 또한 아즈텍과 비슷하다. 또한 상나라가 있었던 시절에는 중국 대륙에 습지가 있는 밀림 지역이 많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고대 중국 기록에 나오는 식인은 아즈텍과 달리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할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아즈텍은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대규모적인 식인이 행해졌다. 또한 위의 주 문왕의 사례 및 춘추전국시대에 나오는 식인 일화는, 당대 서술에서도 극악한 죄라고 낙인이 찍힌 친지를 요리해 짐승 고기라고 속이고, 먹임으로써 씻을 수 없는 죄의식과 굴욕을 느끼게 하는 패륜이었지 제도적이고 일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아가 춘추시대 인물인 공자는 식인이 아닌 순장 대용 인형인 용(俑)[37]을 보고
"이걸 발명한 사람은 대가 끊어지리라!"
라며 저주를 퍼부었다. 실제 사람이 아닌 흙으로 빚은 '인형'이었지만 공자는 진짜 인신공양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 비슷한 물건으로 대리만족하려는 시도마저도 극히 비도덕적인 행위로 간주한 것이었다. 고대에는 인신공양을 일삼던 중국에서도 공자의 시대쯤에서는 이미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짓을 꽤나 부정적으로 봤음을 알 수 있다.[38]

그에 반해 아즈텍은 인육 자체가 사회적인 금기로 치부되기는 커녕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구대륙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식인은 단발성의 소규모라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아즈텍은 전쟁조차도 살해가 목적이 아닌 생포해서 먹는 방향으로 무기와 전술 자체가 기형적으로 변이될 만큼 인육이 군사, 사회, 정치를 잠식했다. 이 방식은 훗날 에르난 코르테스와의 전쟁 당시 아즈텍군에게 지장이 되었을 정도였다. 살상 목적이 아니라 잡아가서 먹으려고 생포하기 위한 전투를 하니 무기도 날카롭지 않고 적당히 상처를 입히는 식으로 발달했는데, 코르테스 휘하의 스페인 용병들은 당연히 그 자리에서 살해할 목적으로 최대한 위력이 강한 철제 무기들을 들고 있었으니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의식이나 국가 행사의 경우, 고대 중국에서는 대중의 참여보다는 귀족이나 주술사 같은 제의 당사자의 복잡한 예식과,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덜 자극적인 생매장과 수몰을 선호했다.

반면 아즈텍 제국을 위시한 메소아메리카에서는 북적북적한 축제를 벌이며 사방에서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시 중심부의 높은 제단에 희생자를 눕힌 후 배나 가슴을 가르는 모습을 보며 군중이 환호하는 퍼포먼스가 하이라이트였던 자유분방함이 특징인 대중적인 오락거리였던 점이 다르다. 즉 아즈텍에서는 대놓고 타부족 사람들 죽이고 잡아먹는 게 일상이었고, 그걸 즐거운 행사로 삼았다.

일부 공통점을 가지고, < 이하동서설>에 기초한 《용봉문화원류》라는 중국 서적에서는 아즈텍을 중국과 같은 계통에서 갈라진 나라라고 주장했다. 물론 시간, 공간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다. 기술적으로 지배 능력의 한계와 부양 인구의 한계가 있는 고대 도시국가였던 만큼 비슷한 문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에게해의 고대 크레타 문명 또한 주변 국가들에게서 유력자들의 어린 자식들을 제물로 받아 잡아먹는 식인 문화가 있었는데,[39] 고대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상대로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식인 행위를 한 것은 심심치 않게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인신공양 외에도 아즈텍과의 공통점이라면 그들 스스로를 칭하는 명칭과 외부 민족들이 칭하는 명칭이 각기 달랐다는 점이다. 스스로 메시카(Mēxihcah)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이방인들에게 아즈텍이라 불렸고, 상나라 또한 주변 민족에 의해 은이라고 불렸던 점이 유사하다. 이 메시카가 멕시코의 어원이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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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정벌》의 일부 내용

2022년 중국 역사학자 '리숴(李碩)'가 상나라 유적과 갑골문들을 분석해 쓴 대중역사서 《전상(翦商)》에서는 기존 학계의 통설과 달리 상나라의 인신공양은 민간에까지 광범하게 퍼질 정도로 일상적이고 대중적이었으며, 주왕 제신때 오히려 귀족층까지 제물의 대상이 되면서 은주혁명의 기반이 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책이 2024년 한국에 《상나라 정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후 # 온라인 상에서 상나라와 아즈텍의 잔인성에 대해서 재고하는 의견들이 많이 늘어났다.

다만 저자의 전공은 상주시대가 아니라 위진남북조시대인데다 사료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부분[41]에서는 어느 정도 비약이 존재하는 등 지나치게 주관적인 주장도 담고 있어 중국 현지에서는 상주시대 전문가인 절강대학교 우쩡치앙(吴铮强) 교수가 "이 작품은 다량의 고고학 자료와 고전을 소재로 하고, 학술적 성과도 많이 흡수하고 있어 일반 독자들에게는 학문적으로 보이지만, 이 책의 혁신적 서술의 상당수는 역사적 자료와 논리를 바탕으로 추론한 학문적 결론이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등 많은 비판을 받고 있으므로 맹신은 금물이다.

전상, 즉 상나라 정벌에서 담고 있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 얼리타우 유적을 하나라 유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 상나라 유적의 전기-중기-후기 중 전기와 중기의 문화적 격변과 회귀를 (갑작스러운 인신공양의 폐지와 반동적인 인신공양의 증가) 고전에 서술된 상나라 내전기와 같은 기간으로 미루어 짐작하고 있다.
- 역경 원문을 주 문왕이 개인사와 과거사를 점치면서 일종의 종교적 신비에 빠져들었던 기록이라고 규정하며, 불분명한 기록을 중심으로 당대 문화사를 추측하고 있다.
- 은허의 은상 유적이 의도적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것을 포함, 주 문공이 공화시대 동안 의도적으로 은상의 인신공양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 자리에 천명으로 대표되는 중화문명 특유의 세속화된 신앙 문화를 개찬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 500년 뒤 인물인 공자가 이러한 주 문공의 기록말살을 어느정도 알아차렸으나, 오히려 이에 동조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9. 창작물에서

10. 기타

11. 참고할 만한 사이트 및 문헌

이 문서는 레퍼런스 표기없이 작성되었기 때문에, 전공자가 일부 교정을 봤지만, 실제 과제나 레포트에 참고하기에는 제법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신뢰할 수 있는 참고 사이트 및 문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고대문명연구소(IREC)의 상(商)나라 관련 강연들[42]

2. 《중국고대사》(리펑 저, 이청규 역, 사회평론):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 현재 미국의 중국고대사 학계를 주도하는 리펑 교수의 역작이다. 이청규가 번역했고 역자 후기에 따르면 심재훈 교수가 상당수 감수를 맡았다고 한다. 책 초반 고고학사 서술 관련 부분은 의고 사조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 있으며, 중국계이신 저자의 학술 지향이 반영된 부분이라 유의할 필요가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중국 고대사 입문서로서 필독서이다.

3. 《중국고고학》(류리 천싱찬 저, 김정열 역, 사회평론): 숭실대에서 중국 고고학을 가르치는 김정열 교수의 번역서이다. 여담이지만 김정열 교수는 숭실대에서 서주 문헌 연구로 박사를 한 후 중국사회과학원으로 넘어가 고고학 박사를 역임한, 박사 학위가 2개 있는 교수이다. 2, 3 두 개의 논저는 비교적 최근인 2000년대 후반까지의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다.

4. 《상 문명》(장광직 저, 윤내현 역, 민음사, 1988년): 이외에 재야사학계의 신(?)이라 불리는 단국대 윤내현이 번역한 《상 문명》이라는 책도 유명하다. 중국 고대사학계의 거장이셨던 장광직이 쓴 책인데 1970년대까지의 연구성과가 집약되어 현재로서는 다소 낡은 감이 있다. 윤내현이 한국 고대사 관련 논의로는 학계에서 수용받지 못하고 있으나 사실 중국 고대사 전공자로서는 손색이 없다. 그의 제자인 단국대 사학과의 심재훈 교수가 현재 한국의 동아시아 고대사 담론을 주도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 역시 해당 교수가 조교 시절에 초벌 번역에 참여, 중국 고대사 공부의 본격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2016, 푸른역사 참조)

5. 《갑골학 일백년》(왕우신 양승남 저, 하영삼 역): 갑골문을 공부하려는 사람의 필독서이지만, 사실 갑골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고급 수준의 현대 중국어와 한문(고문) 실력이 기본 베이스로 깔고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유념해야 한다. 전공 수준으로 들어갈 사람이 아니라면 섣불리 도전하기 쉬운 책은 아니다.

6. 《중국 청동기 시대》(장광직 저, 하영삼 역): 마찬가지로 중국 고대사의 대가인 하버드 故 장광직 교수의 명저이나 역시 현재 중국 고대사 학계 기준으로는 다소 옛날 담론들도 존재한다. 상•하 2권이다.

7. < 이리강 상 제국론의 허와 실>: 중국고중세사연구(KCI 등재지) 논문. 상나라 전기에 관련된 최근 연구로는 작년 출간된 해당 논문이 있다. 다만 한자가 많고 도판이 없으며, 고대 근동과의 비교문명적 접근도 있기 때문에 중국 고대사에 흥미가 있는 비전공자로서도 접근하기 쉬운 논문은 아니다. 중국고대사 블로그에 관련 논문이 요약되어 있다. 이리강(二里崗; 얼리강) 상(商) 문화 맛보기

이리강이라는 용어에 대해 부연하자면, 하나라를 고고학적으로 이리두(얼리터우)라 부르는 것처럼 상나라 전기는 고고학적으로 이리강(얼리강; Erligang 二里崗)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시기 역시도 문자 기록은 없기 때문에 고고문화적인 유사성만으로 막연히 이리강이 상나라라고 단정할 뿐이다. 여담이지만 중국 고고학 전공 모 교수에 따르면 중국에서 '이리'(二里)가 붙은 지명은 흔하다고. 한국으로 치면 왕십리 비스무리한 표현으로 보면 된다.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한어 발음은 staŋ, 현대 중국어로는 Shāng. 商은 현대의 한자이며 갑골 문자로는 다음과 같다. # [2] 녹색으로 칠해진 영역 모두가 실제 지배했던 영역은 아니며, 상고시대 국가의 특성상 간접적 영향력을 미친 지역을 포함해 작성된 것이다. 중국 역사학계의 국가주의적 색채 역시 감안해야 한다. 영어권의 상나라 연구자인 데이비드 키틀리는 상나라의 영역이 "스위스 치즈"와 같이 영역 내에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고 그 구멍 내에는 비상(非商) 정치체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리펑 저, 이청규 역 《중국고대사》 참조. 여담이지만 이 책은 역자후기에도 언급되어 있다시피 국내에 극소수인 미국 유학파 중국고대사 전공자인 단국대 심재훈 교수가 직접 교정에 참여했다. [3] 현대 중국어로는 Yīn. [4] 읍은 현대 한국에서는 면(面)보다 큰 행정단위의 의미가 있으나 중국 상고시대에는 도시를 뜻했다. [5] 은허는 '은의 터, 유적'이라는 뜻이고 당시 명칭은 그냥 은이었다. 은은 반경(盤庚) 시대부터의 수도였고, 상나라 전기에는 여러 곳을 옮겨다녔다. 막판에는 조가로 가기도 했다. [6] 당시 '帝'는 황제라기보다는 최고신(最高神; 영어로는 Supreme deity)의 의미가 있었고 상나라 군주들이 왕권을 드높이기 위해 帝를 자처했다고 하나, 왕권 강화 의도였는지는 추론의 영역으로 보이며 직접적인 갑골 증거가 있는지 검증이 필요하다. 물론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이 제신으로 불린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7] 중국 토속 종교라기 보다는 상족의 최고신으로 상제(上帝)를 섬겼다. 신탁(神託)을 받아 통치하는 상나라의 왕들 역시 제(帝)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했었는데 이것은 후에 황제(皇帝)의 어원이 된다. [8] 본래 상나라 자성 왕족의 후예인 공자는 공자의 부친이 자성(子姓) 송(宋)씨에서 자성 공(孔)씨로 바꾼 뒤 노나라에 정착하면서 공씨를 쓰게 되었는데 평소에 자신이 상나라 왕실의 종친임을 정체성으로 여겼으며 상나라 왕실의 풍습대로 장례를 지낼 것을 유언하기도 했다. 하나라와 주나라를 화하족이라고 보고, 상나라를 동이족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이 시기 동이족 산둥- 강소쪽 중국 동해안 일대의 부족만을 뜻하는 말이었고, 한나라 무렵부터 중국 동쪽의 모든 이민족( 예맥족, 삼한족, 여진족, 거란족, 야마토족 등)을 가리키는 말로 변한다. 한족이라는 정체성은 이런 여러 종족들이 진한시대의 통일기에 점차 융합되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라는 앙소문화를, 상나라는 용산문화를 배경으로 하며 상족이 산동반도 근처에서 문화를 일궜다가 소둔촌 부근으로 침입하여 원주민을 정복하고 상나라를 발전시켰다고 하는데[43], 사마천의 《사기》에서 하나라라고 명명되어 있는 하족의 문화가 이때 상족의 침입을 받고 무너졌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동양사개론》, 신채식 저) 물론 하나라는 고고학적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다. [9] 고고학적으로 말해서, 상나라 전 중국에 도시가 있었고, 국(國)이라 불릴만한 정치체들은 실재했다.(이리두 문화) 다만 이리두 문화를 문헌사학의 하나라와 '동일시'할 수 있는지는 입증되지 않았고 단지 개연적인 추정들만 가능할 뿐이다. 물론 문헌 속 하나라가 이리두 문화와 동일하든 말든, 이리두 문화 자체는 고고학적 실재가 입증되어있다. [10] 상나라 본토는 주나라에게 상실되었지만, 상나라 자성 왕실과 유민들이 송나라로 옮겨졌다. [11]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로 추정한 것이며, 정확한 건국 및 멸망 연도는 알기 어렵다. 멸망 시점은 기원전 1112년설이나 기원전 1046년설도 있다. [12] 당대에는 고대사를 의심 혹은 부정하는 의고(疑古; 의고체 할 때 擬古가 절대 아니다!) 사조가 유행했으며, 지금도 서구 학계에서는 의고 사조가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사실 극단적인 의고는 지양해야 하지만 고대사에 대한 사료 비판으로서 의고는 서구 학계 뿐 아니라 중국 학계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지지를 얻고 있다. [13] 이는 사마천이 중국 최고의 역사서로 손꼽히는 《사기》를 쓸때 상나라 부분의 제목을 "<상본기>"가 아니라 "<은본기>"로 써버렸고, 《사기》 자체가 워낙 대단한 책이라 1,000여 년 동안 중국 내에 널리 퍼지는 바람에, 후대에도 은나라라고 알려진 영향이 크다. 이는 후술될 내용대로 주나라때의 '은'이라는 표현의 유행을 한나라도 이어받아서 그런데, 상나라가 공식명칭이라는 당대 유물 등의 역사적인 물적 증거는 충분히 많고 은나라라는 증거는 없으므로, 은나라가 아니라 상나라가 맞는 건 틀림없다. [14] 전국시대때 7웅 중의 하나였던 전제의 선왕은 맹자에게,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의 주왕을 죽이며 상나라를 무너뜨린 것에 대하여 신하가 왕을 죽여도 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맹자는 인의(仁義)를 잃어버리면 왕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一夫)일 뿐이므로 왕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일부(一夫)를 죽인 것이라며 역성혁명을 정당화했다. [15] 유의할 점은 선진시대의 동이(東夷)는 우리가 생각하던 고조선이 아닌 산동 반도 지역의 이민족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애당초 동쪽 오랑캐라는 표현이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지칭 대상이 극히 유동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 점을 간과하고 비전공자나 재야사학계에서 선진 문헌의 기록을 고조선과 끊임없이 연관짓는데 유의해야 할 접근이다. [16] 중국 바이두 백과에서 성탕을 이와 같이 규정한다. [17] 오늘날 상당수의 중국 성씨들이 황제 헌원씨의 후예로 가탁하거나, 일부는 염제 신농씨 등 삼황오제의 후예로 가탁한 것인데 대표적으로 유명한 것이 전한의 태조 고황제 유방이 염제를 뜻하는 적제의 후손임을 사칭해 사람들에게 자신을 천자의 재목인 것처럼 현혹한 일이다. 이와 같은 맥락의 주나라 기록은 당시 상나라 기록의 정합성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명 수준 및 국가 체계의 권위를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18] 오거가 (걱정하며) 말했다. "(하나라) 걸왕은 유잉에서 회맹한 후 유민에게 배반당했고, (상나라) 주왕은 여산에서 회맹한 후 동이에게 배반당했으며, (주나라) 유왕은 태실에서 회맹한 후 융적에게 배반당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마지막이 중요하니 신중하시기 바랍니다." 伍舉曰 "桀為有仍之會 有緡叛之 紂為黎山之會 東夷叛之 幽王為太室之 戎 翟叛 君其慎終" - 《사기》 [19] 이러한 사실은 갑골문에서도 확인된다. [20] 소위 '스위스 치즈'와 같은 영역, 즉 상나라 영역 내에 다수의 비상(非商) 영역이 있었다는 데이비드 키틀리의 비유가 유명하다. [21] 상나라 유적에서 현재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는 열대 기후의 코끼리와 코뿔소 화석이 나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마크 엘빈은 《코끼리의 후퇴》라는 기후사 서적에서 이 점을 고찰한 바 있다. [22] 《논어》의 유명한 "하나라의 예법은 기나라가 증명해줄 수 없으며 송나라의 예법은 은나라가 증명해줄 수 없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가 유명한데, 중국의 고대사 학계에서도 자료가 부족한 고대사를 비유할 때 자주 사용한다. [23] 도철은 재물과 음식을 몹시 탐낸다는 사흉 중 하나인 상상의 동물이다. [24] 철기는 주나라 서아시아를 통해 유입되었다. [25] 기와 춘추전국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26] 이해 편의상, 갑골문 원문을 한자로 치환해서 적었으며, 해석은 상명대 중국어 문학과 김경일 교수의 것을 참조했다. 다른 인용문도 같다. [27] 女와 才가 붙은 글자인데, 일단은 임시로 '재'라 읽었다. [28] 다만 수년 전 작고한 미국의 갑골 연구자 키틀리에 따르면 상나라에는 유물론자들이 소위 고대 노예제 사회라고 하며 자주 쓰는 서구권의 노예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29] 《성경》에 나오는 바알 신은 유아 인신공양 풍습이 있었다. [30] 한국에서도 월성 성곽이나 김제 벽골제 터에서 인신공양된 인골이 발견된 사례가 있어 이런 행위가 고대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1] 이를 묘사한 인형도 발굴되고 있다. [32] 1999년에 발굴된 솥에 삶긴 사람의 두개골과 치아 등을 분석한 결과, 지금의 안후이성 루안시 지역에서 잡혀온 소녀의 것으로 판단되었다. 충치가 없는 것으로 보아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제법 지체 있는 집안의 딸이었을 것이라고. 루안시와 은허 사이의 거리는 500km가 넘는데, 당시 상나라가 실행한 정복전쟁의 범위를 엿볼 수 있다. [33] 이를 주도했다고 전해지는 사람이 바로 서주 무왕 희발의 동생인 주공 희단( 주공단)이다. 그래서 유가에서는 주공을 성인으로 모시고 있으며, 공자도 그를 본받아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상을 교화하려고 노력했다. [34] 공자와 유가의 제자들이 각지에서 인신공양의 풍습을 철폐했다는 기록은 상당히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유가에서 '괴력난신을 멀리해야 한다'란 말이 나온 이유이다. 바꿔 말하면 많은 지방에서 여전히 인신공양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35] 대표적으로 송양지인으로 유명한 송나라 양공. 그 외에 춘추오패에 버금가는 인물로 칭송받는 진나라 목공도 죽으면서 신하들을 같이 끌고 들어갔다. [36] 상나라의 주왕 제신 주문왕 희창의 장자인 희백읍고를 죽이고 요리해서 그것을 문왕에게 먹였다고 한다. [37] 병마용(兵馬俑)의 용도 이런 '순장 대용 인형'을 가리킨다. [38] 다만 공자는 상나라보다 최소 1,000년은 후대 사람이므로 상나라에서 행한 식인 풍습의 반례로 들기엔 다소 부적절하다. [39] 여기서 비롯된 것이 미노타우로스 전설이다. 미노타우로스의 3번 항목 참고. [40] 아즈테카란 명칭은, 국가가 존재했던 당시, 복속되거나 적대한 메소아메리카인들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고, 더군다나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도 아즈테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즈틀란 섬에서 남쪽 멕시코 고원지대로 이주했다는 설화는 메시카인들만이 아니라, 여러 나우아틀계 부족들이 공유하던 신화 체계였다. 즉 신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명칭인 것이다. 테노치티틀란을 위시한 멕시코 영향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한 것은 1843년 윌리엄 H. 프레스콧의 저서 《멕시코의 정복》에서 스페인화된 이후로도 수도와 국명으로 쓰이는 멕시코란 명칭이 직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스페인 점령 이전 멕시코를 "아즈텍"이라고 명명했던 것이 역사학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쳐 표현이 굳어진 사례이다. [41] 예를 들어 고대인의 기록되지 않은 감정 등 [42] 고대문명연구소는 2020년 심재훈 교수가 설립한 기관으로 중국 외에도 세계의 고대 문명 강연을 제공한다.( 홈페이지 고대중국 청동기 강연 및 중국고대사 재생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