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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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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이정원李鼎源 |
자 | 낙인樂寅·樂仁 |
호 | 운강雲崗 |
본관 |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2] |
출생 | 1859년 2월 2일[3] |
경상도
문경현
가북면 도태리 (현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 도태마을)[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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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8년 10월 13일[5] (향년 49세) |
한성부 서대문형무소 | |
사인 | 교수형 |
가족 |
조부 이덕의李悳儀[6] 아버지 이기태李起台, 어머니 의령 남씨 |
종교 | 유교(성리학) |
묘소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산11 |
상훈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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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조선 말기의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59년 2월 2일 경상도 문경현 가북면 도태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 도태마을)에서 아버지 이기태李起台(1841. 12. 17 ~ 1865. 9. 3)[7]와 어머니 의령 남씨(1836. 9. 27 ~ ?)[8]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인근의 완장리, 죽문리 등지에서 거주하기도 했다.1879년(고종 16) 6월 정시庭試 무과에 병과 51위로 급제하여 내금위 부사용副司勇(종9품)에 올랐으나 갑신정변 이후 사직하고 향리에 은거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일어나자 안동부 문경군 가북면 도태리 장터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안동감찰사 김석중 등 3명을 죽이고 충주부 제천군으로 가서 유인석 휘하에 편입했다. 그는 유격장을 맡아 일본군 다수를 곳곳에서 습격하여 사살했으며, 이듬해인 1896년 유인석과 함께 잠시 만주로 건너가 3년간 체류하다가 귀국했다.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대한제국군이 해산하자 충청북도 영춘군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다.
그러나 1908년 6월 충청북도 청풍군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연신 곤욕을 겪었으며, 1908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에서 소위 내란 혐의로 교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1908년 10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이강년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