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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31 22:53:46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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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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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ardo Alfredo Juan Bernardo Frei Ruiz–Tagle
1942년 6월 24일 ~ ([age(1942-06-24)]세)

1. 개요2. 생애3. 정치 경력4. 대통령 시절5. 의회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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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두아르도 알프레도 후안 베르나르도 프레이 루이스-타글레는 칠레의 정치인이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상원 의장을 지냈다. 그는 2009년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당인 콘체르타시온 연립여당 후보로 재기를 시도했지만 아슬아슬하게 패배했다. 그의 아버지는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였다.

2. 생애

프레이는 산티아고 데 칠레에서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와 마리아 루이즈-타글레 히메네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루이스 캄피노 연구소에서 모든 교육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칠레 대학교에 입학하여 유압학을 전공한 토목 공학자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이탈리아에서 고급 경영 과정을 밟았다.

3. 정치 경력

프레이는 그가 학생 지도자였던 대학에 있는 동안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1958년 기독교민주당에 입당했고, 1964년 아버지의 성공적인 대통령 선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9년부터 1988년까지 칠레에서 가장 큰 엔지니어링 회사인 시그도 코퍼스 S.A.의 파트너 중 한 명으로 자신의 직업에 집중했다.

1988년 자유선거추진위원회(Commité Pro Elecciones Libres)를 설립하고 추진하였다. 1989년, 그는 산티아고 데 칠레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상원에서 그는 재무 예산 위원회를 주재했고 주택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4. 대통령 시절

1992년 프레이는 리카르도 라고스를 꺾고 대통령 예비선거에 참여했고, 1993년 대통령 선거에서 58%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그는 1994년 3월 11일에 취임했고 2000년에 라고스가 뒤를 이었다. 프레이의 대통령직은 빈곤을 줄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건과 교육의 개선을 이루는 데 주목할 만했다.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타글레는 카를로스 메넴과 특히 좋은 관계를 가졌다. 프레이가 재임하는 동안 아르헨티나와의 영토 분쟁은 해결되었지만, 중재안은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선호했다.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 프레이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의회에서 종신 상원의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5. 의회로 돌아가다

2005년 헌법 개정으로 종신 상원의원이 2006년부터 폐지된 이후, 프레이는 2005년 12월 총선에서 안드레스 알라망과 함께 발디비아주와 오소르노주의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6년 3월 11일, 프레이는 그의 아버지처럼 상원의장이 되었다.

할아버지인 에두아르도 프레이 슐린츠가 스위스에서 칠레로 이민을 간 후 2009년 2월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2009~2010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좌파 성향의 콘체르타시온 중도연합 후보로 출마해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의 길을 계속 이어갈 것을 약속했다. 그의 대통령 선거 현수막과 광고판에는 그의 왼쪽 어깨 너머로 미첼 바첼레트와 동행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2009년 12월 13일에 실시된 1차 선거에서 프레이는 공식 투표에서 29.60%를 득표하여 44.05%를 얻은 세바스티안 피녜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2010년 1월 17일 결선투표가 실시되었다. 선거 당일 21:00 GMT에 내무부 차관이 발표한 첫 예비 선거 결과는 세바스티안 피녜라 51.87%, 프레이 48.12%였다. 프레이는 세바스티안 피녜라에게 21:44 GMT에 양보를 했다.

선거 운동에서 우아하게 퇴장하면서, 프레이는 말했다.

"선거는 끝났고 칠레 국민들은 시민으로서의 성숙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 민주주의의 견고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의 전통에 따라 깨끗하고 투명했다. 나는 대부분의 칠레인들이 앞으로 4년 동안 신뢰를 준 세바스티안 피녜라를 축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