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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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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1980年代 日本 거품經濟
バブル景気 | Japanese asset price bubble
파일:9816A289-A709-4697-A1E8-6A5CE00C9A16.jpg
<colbgcolor=#bc002d> 발생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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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1986년 12월 ~ 1991년 2월
원인 플라자 합의로 인한 엔화 가치 상승
경기 둔화로 인한 일본 정부의 금리 인하,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

1. 개요2. 1980년대 ~ 1990년대의 일본 경제3. 배경4. 당시 생활상5. 각종 부정부패 사건
5.1. 오노우에 누이 사건5.2. 리크루트 코스모스 사건5.3. 허영중(이토만) 사건
6. 거품경제 이후의 일본7. 세계에 끼친 영향8. 서브컬처 관련
8.1. 버블 시대의 작화8.2. 이 시대의 작품 및 시대상의 작품
9. 참고/관련자료
9.1. 통계자료9.2. 기사9.3. 서적9.4. 방송자료9.5. 인터넷 글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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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6년부터 미국을 뒤쫓으며 폭등하는 일본의 GDP[1]
버블을 통해서 " 공짜 점심은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경제의 대원칙이 재확인됐다. 버블 안에 있을 때는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버블이 한 번 발생하면 경제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 1993년 일본 경제백서 中[2][3]
일본 거품경제(バブル景気[4], Japanese asset price bubble)는 1980년대 후반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 시장 전반에 나타났던 거품경제를 일컫는다. 이 당시 일본은 비정상적인 자산 가치 상승 현상과 과열된 경제 활동, 무분별한 통화의 공급 그리고 신용 팽창을 겪었으며, 일본인의 생활 수준도 매우 크게 상승하였다. 1980년대의 일본은 전세계 근현대사에서 미니국가나 도시국가가 아닌 국가들 중 가장 부유한 국가 중에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이후 거품이 붕괴되며 1,500조 엔의 자산이 공중분해됐다.[5] 시기는 대개 1986년 12월부터 1991년 2월까지[6], 즉 플라자 합의부터 제1차 헤이세이 불황이 터질 때까지로 보며 이후 일본은 인구 고령화, 금융시장 부실화, 정부의 미약한 대응, 디플레이션 등 여러 요인과 결합해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7] 장기 불황을 맞게 되었다.

그 여파를 요약하자면 일본의 1994년 GDP가 5조 달러였는데 2021년 일본 GDP도 5조 달러다.[8] 이는 1994년 기준으로 GDP 5조 달러 중 3조 달러 이상이 과다한 투자로 불어난 거품 돈이었고 순수한 돈은 2조 달러도 채 안 됐다는 의미로, 이 대량의 거품 돈이 순수한 돈으로 바뀌는 과정이 30년째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게다가 화폐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가피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단위가 올라간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더욱 막막하다. 거기다, 닛케이 225지수 역시 1989년 고점을 찍고 나서 하락하여 2024년 2월에 1989년 12월 31일의 기록을 갱신하기까지 34년이 걸렸다.

2. 1980년대 ~ 1990년대의 일본 경제

거품경제 말기인 1992년 도쿄 1080p[9] 촬영한 영상[10][11]

1960년대 이후 일본은 30여 년간 고도 경제성장을 이어갔다. 일본은 1960년대에는 10%, 1970년대에는 5%, 1980년대에는 4%에 달하는 경제 성장률 덕에 어느덧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12]
세계 50대 기업 시가총액 순위[출처](단위=백만 달러)
순위 기업 국적 시가총액 87년도 매출액
88년 87년
1 1 N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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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840 46,639
2 2 I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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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49 54,220
3 4 스미토모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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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335 300,933
4 3 엑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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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72 82,100
5 8 다이이치칸교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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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71 325,206
6 9 후지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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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6 도쿄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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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0 미쓰비시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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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 일본개발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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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7 노무라 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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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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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4 토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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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2 산와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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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3 마쓰시타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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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77 신일본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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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47 월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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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60 다우 케미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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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 순위. 세계 50위 기업 가운데 무려 33개가 일본 기업이고 더구나 20위 위로는 일본 기업이 자그마치 16개에 달하며 시가총액 1위 NTT의 시가총액은 2위 IBM 3배가 넘었다.[14][15] 심지어 일본 기업을 제외하면 최상위 6개 기업의 총합이 2847억 달러로, 1위 NTT의 기록인 2768억 달러를 턱걸이로 겨우 넘어서는 정도이다. 참고로 1988년 한국 국내총생산(GDP)은 2023억 달러로, NTT 시가총액의 70% 수준에 불과했다.[16] 1988년 당시 국가별 GDP 순위에 NTT의 시가총액을 대입하면 호주를 제치고 15위에 달하는 수준이다.[17][18] 이를 통해 당시 일본의 경제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19]

일본의 GDP를 미국과 비교해보면 1987년부터 1997년까지는 미국의 55% 이상을 기록했고, 1993년부터 1996년까지 미국의 60% 이상을, 1995년에는 미국의 72.6%를 기록했다.[20] 게다가 당시 일본 한 나라의 GDP가 나머지 아시아 국가 전체의 GDP를 합친 것보다 컸다.[21] 참고자료[22]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일본 GDP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를 넘겼는데, 이는 2010년대 초반 이후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심지어 1994년 일본 GDP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17.8%였는데, 어느 정도냐면 2020년대 초반의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며, 2024년 EU, 중국 GDP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높다. 참고자료

1인당 GDP도 경이로웠다. IMF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1인당 GDP는 1986년부터 2002년까지 빠짐없이 세계 Top 5안에 든 것은 물론이고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998년을 제외하곤 90년대 내내 1인당 GDP가.미국보다 훨씬높았다.[23][24] 그 기간 동안 5위를 1번(2001), 4위를 4번(1989, 1991, 1992, 1997), 3위를 5번(1993~1996, 1999), 심지어는 2위를 2번(1988, 2000)이나 기록할 정도로 높았다.[25][26] 게다가 당시 일본의 1인당 GDP는 미국보다 낮았던 적이 단 4년(1986, 1998, 2001~2002)밖에 없었을 정도였던 것은 물론이고(?) 북유럽 국가들도 능가하면서 스위스, 룩셈부르크에 비견되는 수준이었다. #

심지어, 이들은 모두 잃어버린 10년 시기까지 포함한 수치인데,[27] 한마디로 80년대 말~2000년대 초 일본의 경제력은 오늘날로 치면 과장 티끌만큼도 안 보태고 가히 싱가포르[28][29] 중국[30]을 합한 것에 버금가는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 파리 로마 일본의 지방도시보다 한결 빈곤하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상당수가 은행 증권회사 등의 금융 관련 기업들이라는 점이다. 더욱 유심히 봐야 할 것은 1987년 매출액이 1,000억 달러 이상이었던 기업은 일본의 은행들과 다이와증권을 제외하면 제너럴 모터스뿐이라는 것이다.[31] 또 흥미롭게도 도쿄전력, 도쿄가스, 간사이전력, 주부(中部)전력 등도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국가 규모도 아닌 일개 지역의 전력/가스 공급업체가 글로벌 기업들의 순위권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오늘날을 배경으로 한국으로 치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도 아니고 한국전력공사, 서울도시가스, 부산도시가스, 삼천리 같은 회사들이 엔비디아, 테슬라 등과 비슷한 규모의 기업으로 평가받았다고 보면 된다.

그저 대단하다고 단순히 생각하기 쉽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주식시장도 결국 수요와 공급에 의해 움직이는데 소비 시장이 일본 전체도 아닌 일부 지역으로 한정돼서 고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지방 에너지 공급업체까지 세계적인 시가총액을 자랑하는 것은 뭔가 정상적인 기업 성장과는 다른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즉, 주식시장에 유입된 어마어마한 자본이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거기까지 갔다는 얘기다.

또한 IMF 통계 기준 일본의 당시 1인당 PPP[32] 순위는 10위권 후반~20위권이었고 수치도 20000달러를 넘긴 게 1990년이고 30000달러룰 넘긴 것은 2004년이었다. 1인당 PPP가 1인당 GDP보다 더 낮은 매우 기이한 상황이었으니[33] 당시 일본의 GDP가 주식과 부동산 급등을 빼고 나면 거품이었다는 것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참고자료

참고로 당시 한국인과 일본인의 임금 차이를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3. 배경

<rowcolor=black> 1982년, 미국 시장을 침공한 일본 전자 제품 1982년, 일본산 자동차가 만든 말도 안 되는 두려움

요점만 정리하면 닉슨 쇼크(1971년) → 1차 석유 파동(1973년) → 미국의 급격한 스태그플레이션(1970년대) → 2차 석유 파동(1979년~1982년) - 이를 막기 위한 연준의 과감한 금리 인상(최대 21.5%)[39] → 달러 환율은 복귀, 그러나 박살나 버린 미국의 제조산업과 실업율(1980년대 초반) → 달러 환율이 오르자 반사이익을 본 일본이 제조업에서 두각, 미국 대외무역적자의 40%가 일본발.(1980년대 초반) - 이를 좌시하지 않은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플라자 합의(1985년) → 일본의 마이너스 경제 성장(1986년) → 일본 정부가 경제 성장을 위해 부동산 시장 활성화(1980년대 후반) → 부동산과 주식을 중심으로한 일본의 경제 부흥(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으로 설명할 수 있다.[40]

197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은 석유 파동으로 인해 침체기를 맞았지만 JVC, 소니, 파나소닉, 토요타, 혼다, 캐논과 같은 일본의 대기업들은 이를 극복하고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차근차근 쌓아올린 기술력으로 그간의 싸구려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미국・ 유럽의 경쟁사를 고사시키며 세계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41][42] 또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석유 파동을 역이용해서 기존 미국 차보다 기름을 덜 먹는다는 점을 널리 홍보하고 잔고장도 미국 차보다 적었기 때문에 미국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다.[43] 미국의 자동차 메카였던 디트로이트가 본격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한 게 이 때부터였다. 이 시기의 분석가들이 언젠가 히타치 소니 인텔이나 IBM을 인수해버릴 것이라고 전망했을 정도.[44] 이 과정에서 일본은 세계 1위의 무역흑자를 기록하며 막대한 자본을 비축해 놓았지만 동시에 타국 간의 무역마찰도 심해졌다.[45]

1980년대 석유 파동의 여파가 잦아들었고 석유 파동 이래 인위적인 엔저로 일본의 수출이 매년 급속하게 불어나면서 기업들의 매출이 크게 상승하자 1983년을 기점으로 자산시장이 급속하게 활성화되었다. 그러던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올라 일본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수출이 감소하며 성장률이 떨어졌다. 그 결과 1986년-0.5%(달러 기준. 엔화 기준은 +2.8%). 석유 파동이후 최악의 성장률이었으며 달러 기준 마이너스 성장이 기록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갑작스러운 무역환경 악화로 인한 경기둔화에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라는 정책을 폈다. 부동산 가격과 주식 가격은 이 때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고 특히 부동산 시장은 기존의 부동산 불패 신화도 있었기에 더욱 상승했고 이에 따라 기업과 개미들이 재테크로 거금을 벌었다는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다.

투기 열풍이 불자 이에 혹한 기업과 중장년층이 대박을 꿈꾸며 자산시장에 대거 진입했다. 또 정부가 나서서 부동산 거품을 조장하고 나서니 투자자들은 이에 호응해 광적으로 부동산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경제성장률은 다시 1987년 달러 기준 +1.6%(엔화 기준 4.1%), 1988년 엔화 기준 7.1%, 1989년 엔화 기준 5.4%, 1990년 엔화 기준 5.6%, 1991년 3.3%(엔화 기준)까지 성장하기는 했다.

문제는 내수경기 부양책이 부동산 주식시장으로 쏠린 결과물이었다는 것. 저금리로 시장에 풀린 자금은 부동산과 주식 투기에 쏟아졌고 안 그래도 올랐던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더 오르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다시 수많은 기업과 개미들이 주식과 부동산 시장으로 점점 더 몰려들었다. 집값이 너무 비싸진 나머지 주요 대도시 실수요자들은 집을 구하지 못 하고 근교 지역으로 계속 밀려나갔다. 부동산 폭등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이 좌절된 서민들은 자민당 정권에 반감을 드러냈다.[46]

경기부양책을 펼치던 일본 정부는 자산가격의 비정상적인 폭등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1989년 3%의 소비세(한국의 부가가치세)[47]를 신설하면서 동시에 전격적으로 금리를 인상했다. 물론 금리 인하가 자산 시장 버블의 요인이 되었으니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 한 것이겠지만, 문제는 천천히 올려야 할 금리를 너무 급격히 올려 버린 나머지 이전까지 크게 올랐던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으며, 소비 심리까지 덩달아 위축시켜서 경제 경착륙을 불러왔다.

일본은행 1988년 9월에 2.50%이던 기준금리를 1990년 12월 6.00%까지 올렸다. 즉 2년 3개월만에 3.50%p나 금리가 폭등한 것. 이로 인해 주식시장이 먼저 고꾸라지고 부동산 시장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1991년에는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즉, 신규대출 전면금지), 기존대출도 LTV(Loan-to-value, 부동산 감정가 대비 대출액) 200%→70%로 제한이라는 자폭을 하고 말았다. 부동산은 거래액수가 매우 큰 만큼 LTV의 변동은 구매자 성향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데, 담보가치를 130%p나 변동시키는 조치를 너무 쉽게 꺼냈다.[48]

당연히 담보가치 폭락으로 부동산 시장에는 매수세가 뚝 끊겼고, 일본의 부동산 시장은 한 방에 가버리고 말았다.[49]

왜 이렇게 강경한 정책을 펼쳤냐면 당시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집을 구하지 못하는 서민들의 아우성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NHK에서는 시민들의 참여로 부동산 관련 방송을 했는데 당시 패널로 참여한 한 샐러리맨은 "외국에서는 닭장같은 집이라고 일본의 집들을 비웃는데 정작 그런 집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즉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인한 사회 문제가 만연했다. 국민들은 정부에 강력한 정책을 요구했고 리크루트 사건으로 한 바탕 데인 정부와 여당은 그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추가적으로 일본 정부는 불량 채권 회수에 미흡하게 대처하면서 경기 침체를 악화시켰다. 사실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총리가 버블붕괴로 경기가 점차 악화되자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실채권을 조기에 정리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당시에는 세금으로 부실채권을 정리하자는 주장을 반대하는 여론이 강했고, 재계와 금융계도 이를 탐탁찮게 여겨 무산됐다. 결정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중심인 생산 가능 인구가 1992년 정점에 도달한 이후 감소하기 시작해 자산 거품 붕괴로 인한 단발적이며 일시적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었다. 게다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닥쳐오자 일본 기업들의 해외 자산이 대규모 손실을 기록하면서 견실한 기업들마저 줄도산하는 등 글로벌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해당 기간 동안 성장률이 쭈욱 감소세는 아니었고 1994년부터는 조금씩 회복세를 나타냈긴 했다. 1996년에는 경제성장률 3.1%를 기록하며 1997년부터는 경기침체에서 빠져나올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이를 그간의 재정적자를 벌충할 기회라고 판단해 성급하게 소비세율을 3%에서 5%로 인상했고, 거기에 더해서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까지 겹치며 은행들이 줄줄히 파산, 1998년부터 완전히 마이너스 성장과 0% 성장을 반복하는 고사 상태로 접어들었다. 1996년까지는 도산하는 기업이 부동산, 주식 리스크가 컸던 중소형 은행/증권사, 중소 건설업체, 부동산 회사 등에 집중됐으나 1998년부터는 대기업과 대형 금융사까지 쓰러지게 된다. 이른바 '눈물의 파산선언'[50]으로 유명한 일본 3대 증권사 야마이치 증권(1998년 파산), 일본 최대의 지방은행 홋카이도 타쿠쇼쿠 은행(1998년 말 파산), 일본장기신용은행(1999년 파산)은 전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아시아 사업 손실 때문에 파산했다.

학자들은 자산 거품이 꺼지는 중에 시행된 금리 인상과 대출 총량 규제 등의 정책을 잃어버린 20년의 원인으로 봤다. 이런 사례를 바탕으로 벤 버냉키가 이끌었던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미국은 금리 인하와 강력한 부양 정책을 펼치는 등 일본과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3.1. 주식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재테크를 벌이고 있었는데 1984년에 일본 대장성은 "투금 계정"[51]이라는 불법 계정을 합법화함으로써 기업이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 때문에 기업은 자본이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고 증권사 투금 계정에 돈을 넣어두고 재테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 들어 성장세가 둔화되자 정부에선 일본은행을 윽박질러 기준금리를 5.00%에서 2.50%까지 떨어뜨린다.

이는 은행의 대출 폭풍을 유발해 엄청난 액수의 돈이 각종 자산에 쏟아졌다. 은행 고위 간부와 기업가, 그리고 이를 감시해야 할 관료가 인맥으로 뭉친 일본의 특성으로 무분별하고 부주의한 대출이 많았다. 이는 일본 기업의 재테크 수익을 높였고 다시 주가가 오르면서 더 큰 재테크 수익을 벌어 들이는 악순환이었다. 1985년 투금 계정의 잔액은 9조엔이었지만, 1989년에는 40조 엔까지 팽창했다. 당시 일본인은 기업의 현금흐름은 신경쓰지 않고 재테크로 불어나는 자산만 보고 달려들었다. 이것도 일본 기업을 부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언제든지 흑자도산이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PER이 67을 찍었고 전통적인 기업들이 성장주로 과대평가받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실제로 돈은 가지고 있지 않은데 수요가 곧 가치가 되는 증권시장이 거품처럼 불어터져나갔다는 뜻이다. 당시 증권이 얼마나 성장했냐면 1970년대 후반까지 뉴욕 증권거래소의 1/5이던 도쿄 증권거래소가 10년 사이 뉴욕 증권거래소보다 더 커질 정도였다.

증시가 이렇게 폭등하자 일본 정부는 1985년 일본전신전화공사 민영화 시작했는데 공모가와 공모 주식 수를 발표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공모청약에 몰려들었으며 1987년 2월 9일 상장당시 1차 판매가가 주당 119만 7천엔이었다. 그럼에도 단 이틀만에 25%가 추가상승했고 2주만에 정확히 2배인 240만엔까지 올랐으며 1989년 연말에는 400만엔 부근까지 치솟았다.[52] 당시 언젠가는 뜰 것이라는 예상이나 수백만엔을 호가하는 NTT보다 주가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주가가 폭등하는 등 막장 증시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당시 도쿄증권거래소의 상장주식 총시가도 가장 높았을 때가 611조 엔으로 뉴욕증권거래소의 1.5배, 영국이나 서독의 10배에 달했다고 한다.[53] [54]

3.2. 부동산

우주 한복판을 날고 있었던 주식 거품은 부동산 거품으로 합리화되었다. 일본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토지 가격이 50배 정도 뛰는 동안 소비자 물가 지수는 고작 2배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졌다.[55] 즉, 땅값의 실질 가치가 25배 급등한 것으로, 이 때문에 일본 사회 전반에 토지 불패 신화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오르기는 해도 절대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당시 일본 부동산 버블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지가가 상승하던 와중에 일본은행 기준금리를 6%에서 2.5%까지 떨어뜨리자 은행들은 대출 경쟁을 벌였다. A은행에서 8% 금리를 제시하면 옆 B은행에 가서 7.5% 대출을 제안받고 다시 그 옆 C은행에서 7% 대출을 받아 가며 토지 투기가 벌어졌다. 당시 LTV는 200%까지 치솟았다.[56][57] 이는 토지만 있으면 지가의 2배에 달하는 대출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과연 은행들이 그만큼의 돈을 실제로 가지고 있었을까?

이렇게 대량의 자금 수혈이 가능하다 보니 아직 저렴했던 땅에 돈이 풀리며 지가를 올리고, 이 토지를 담보로 또 지가보다 더 많은 자금을 끌어오고, 이 돈으로 다른 저렴한 땅을 사고, 사 놓은 땅의 지가도 계속 오르니 추가 대출이 가능하고... 이렇듯 터지기 전까지 화수분처럼 불어나는 게 자본 버블의 특성이다. 이렇게 점점 미나토구를 중심으로 시작된 부동산 광풍은 도내를 넘어 도쿄 광역권 전체에 휘몰아쳤다. 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 사이타마현, 치바현 등... 더 무서운 건 이 중 치바와 사이타마는 거품 붕괴 이후에도 지가가 요지부동이다. 이러다보니 도쿄도 이외도 무사할 수 없어 오사카시에서 케이한신권으로, 나고야시에서 인근 광역권으로 등등 일본 전역에서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58]

거품이 붙는 속도도 어마무시해서 도쿄 지가는 1981년부터 버블 붕괴 직전인 1990년까지 5배 이상 폭등했는데 이 중 대부분은 1987년~ 1988년 1년의 3배 상승분이다. 당시 "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고[59] 당시 도쿄 고쿄(황거) 지가가 캘리포니아[60], 캐나다 전체 지가와 맞먹었다.[61]

당시 토지 가격을 보자면 1989년 기준 미나토구는 평당 1,900만 엔[62], 스기나미구는 350만 엔[63]을 기록했다. 오사카시는 평당 200만 엔[64], 나고야시는 85만 엔[65], 후쿠오카시는 46만 엔[66]까지 치솟았다. 긴자는 평당 1억 엔[67]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68] 1980년대에![69] 미나토구 중에서도 아자부나 아오야마 같은 곳은 평당 5,000만 엔에 육박했다.[70]

그리고 1제곱미터를 채울 수 있는 1만엔권 지폐 82장 기준으로 도심으로의 통근거리가 1시간 이내 정도의 주택지라먼 그 지폐더미 두세장을 겹쳐야 1제곱미터를 살 수 있었고, 도심의 빌딩용지는 아예 100만엔 다발을 꼭 채워넣어야 겨우 1제곱미터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71] 그리고 1989년 기준 일본의 전국토 총지가는 미국의 2.5배인 1841조 엔에 도쿄는 미국 전토의 가격에 필적하는 491조 엔이었다.[72] 심지어 나중에는 더 심해져 일본에서 계산해본 결과 야마노테선 안쪽의 토지 가격만으로 미국 전 영토를 살 수 있다는 결과가 산출되었다고 하며, 일본 전 영토의 땅값은 미국 전 영토의 4배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 무렵 경제기획청 통계에 따르면 일본 전국 지가 총액은 1600조 엔이었으나 미국 전국 지가 총액은 엔화로 400조 엔이었다. 미국 면적이 일본의 25배였으니 일본의 평균지가는 미국의 100배인 셈인데, 심지어 도쿄의 평균지가는 그런 일본 평균의 7배에 당했다고 한다.[73]

그리고 유독 무시무시한 폭등을 이어간 지역이 있는데 도쿄메트로 긴자선 연선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특히 신바시, 아사쿠사 같은 동네는 무려 10배 이상, 아오야마는 15배나 폭등해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같은 시기에 민영화된 국철은 부채 청산을 위해 시오도메 화물역 부지[74] 매각 사전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지나치게 높은 토지 가격으로 인해 과열 경쟁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매각 보류되었다. 그런 이유로 화물역 기능이 철거된지 10여년이 지난 1997년에 들어서야 겨우 개발될 수 있었다. 땅값이 워낙 높아진 탓에 도쿄의 상업용지값은 거품이 터지기 이전인 80년대 말에 하락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건 역으로 따진다면 암만 월급이 올라도 집을 사기에는 택도 없다는 셈이므로 당시 내 집 마련을 꿈꾸던 당대 일본 월급쟁이들에게 상당한 재앙이었던지라 100년 만기 대출 같은 황당한 상품이 등장하기도 했고,[75] 이 때문에 치바현이나 사이타마현, 가나가와현, 도쿄 중서부 지역[76], 이바라키현 남서부 지역이나 신칸센 역세권 지역[77]의 인구가 급증하기도 했다.[78] 더군다나 공공 임대 아파트의 공급은 이에 훨씬 못 미쳤기에 청약 경쟁률이 턱없이 높았다.

당연히 난개발 지역도 땅값이 폭등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더 심각한 것은 버블이 꺼진 후에도 사이타마 치바의 땅값은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미 도쿄에서 한 번 유출된 인구가 복귀하지 않으면서 교외 지역 수요층으로 편입된 것이다. 1981년 대비 1991년(버블 붕괴 시작할 때)의 사이타마나 치바 땅값은 3~4배 정도 상승했는데 2020년대에도 그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다. 대기업 종사자는 보너스가 왕창 나오던 시절이었고 중소기업도 인력 부족으로 봉급이 올랐기 때문에 집을 사는 것만 포기하면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부동산 시장에 거품이 잔뜩 껴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실물경제가 성장을 하고는 있었으니까. 그래서 당대 일본 문화 산업이 전례없는 호황이었던 것도 이런 영향이 크다는 의견도 있는데 암만 월급 모아 봤자 집을 살 수는 없으니 포기하고 문화 생활이라도 즐기려는 욜로족이 많아서 그런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시티 팝과 같은 일본 대중음악의 발전이 있다.

오늘날 도쿄, 오사카 등 일본 대도시의 주요 거점 스카이라인은 대부분 이 시기에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주쿠, 시부야, 이케부쿠로, 롯폰기, 우에노, 오다이바(이상 도쿄), 우메다, 난바, 텐노지, 쿄바시(이상 오사카), 나카교(교토), 미나토미라이(요코하마) 등. 1990년대 이후에 완성된 일본 주요 대도시 상업 지구는 신주쿠, 시부야, 우메다, 난바 정도를 빼면 1981년까지만 해도 빈민가나 놀고 있는 공지였다.

땅값 폭등으로 이 동네에 주거 지구를 남겨두는 것보다 상업 지구로 철저하게 재개발하는 것이 몇 배나 남는 장사가 되면서 부동산개발 회사가 난립했고,[79] 이 회사들이 자체 도시계획을 짜고 부지를 지방자치단체나 소유주로부터 사들인 뒤 1986년부터 전부 오피스 지구로 재개발하게 된 것.[80] 한국의 건설사가 자체적인 도시 개발 능력이 뒤처지는 데 비해[81] 버블 붕괴에서 살아남은 일본 건설사는 자체적인 도시 개발 및 건축 기술을 축적하여 1990년대 이후에도 전세계적으로 신도시 개발 수주를 따내고 있다. 파산한 부동산 업계와 건설사의 미분양 물량까지 살아남은 회사들이 인수하여 완공한 것이 2000년대 이후의 일본의 스카이라인이다.

게임 용과 같이 제로의 전체 스토리 발단이 바로 한 평의 공터라고 나오고, 그를 둘러싼 야쿠자들이나 부동산 업자 등 땅을 가지고 수많은 인물들끼리 서로 주먹을 동원하며 전쟁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 당시에 부동산 투쟁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당시 일본인의 1인당 자산은 미국의 4배, 영국의 5배, 서독의 6배였다고 한다.[82]

3.3. 골프장, 호텔, 리조트, 스키장

1980년대에 갑자기 돈이 흘러넘치자 상류층끼리 친목을 다지기 위해 골프장과 골프회원권, 호텔 투기가 극성이었다. 특히 1986년 일본 경제성장률이 -0.5%를 찍어 금리를 낮춘 이후 유독 심해졌는데 이를 근거로 일본 버블경제의 시작을 이 골프 회원권과 호텔 투기 시점으로 보는 미국 경제 학계의 연구도 많다. [83]

특히 이쪽은 야쿠자, 정치인, 관료 이권개입까지 겹쳐 상황이 매우 심각했다. 유력 부자들이 돈을 모아 골프장이나 호텔을 짓자고 하면 그 지역의 정치인, 관료와 접촉하여 골프 회원권과 호텔 분양권을 담보로 허가를 받았다. 당연히 이렇게 허가를 받고 나면 해당 지역에 있는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야쿠자들이 '어깨'를 동원해 강제 철거를 집행했고 멀쩡한 집을 헐고 호텔이나 골프장, 리조트[84]가 우후죽순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반발하면 야쿠자들이 해당 주민들을 "뒷골목"으로 끌고 가서 폭행하거나 살인까지 하는 등 각종 범죄가 잇달았다. 경찰에 신고해도 경찰까지 해당 리조트/골프장/호텔 분양권을 담보로 이미 매수가 끝난 상황이니 도움이 전혀 안 됐다.

이런 골프회원권, 호텔 투기는 1991년 대출 총량규제가 발동되고 투자자와 야쿠자, 지역 정치인까지 한 번에 대형 손실을 보면서 서로 죽이는 사건으로 번지는 등 그 후유증이 심각했다. 대출 총량규제가 발동되기 전에 이런 리조트 개발 부패 스캔들이 터진 것이 리크루트 사건 허영중(이토만) 사건이다. 대표적으로 리크루트 사건이 꼽히는데 리크루트 사건은 리크루트[85]가 야쿠자와 짜고 부동산 개발회사인 리크루트 코스모스라는 회사를 세우고 이 회사의 주식과 개발 예정인 골프장 회원권을 정치인들한테 뇌물로 뿌린 사건이다.

덤으로 당시 골프장이 얼마나 호화판으로 지어졌는지 헬리포트까지 갖추고는 대놓고 TV 광고에 "도쿄 헬리포트로부터 ~분"이라는 멘트를 붙일 정도였다. 덤으로 골프클럽 회원권 중 최고 명당자리 가격은 35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일본 수도권 지역의 골프 회원권 시세는 1990년 정점을 찍고 1999년 97% 폭락한 뒤 2018년 기준으로도 고점 대비 30% 수준에 머물렀다. 오히려 공급 과잉과 일본 상류층들의 취미 변화(골프→ 승마)로 골프장이나 호텔이 줄도산했다. 권리가 불분명하거나 땅주인이 증발한 경우도 있는데다 철거비용도 만만찮아서 재개발로 철거되는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고 을씨년스럽게 방치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지금도 일본의 시골 지역에는 버려진 골프장이나 호텔이 많은 편이다.

스키장 또한 골프장과 리조트와 함께 지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의 경우 홋카이도뿐 아니라 본토에도 호설지대가 많아(ex. 니가타현) 한때 일본 전역에 스키장이 1000여 개에 달했다는 통계가 있다. 물론 그냥 하나의 산에 여러 리프트를 세워 두고 운영주체가 다른 경우 서로 다른 스키장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지금도 산골 스키장과 지방 공항( 도야마 공항 등)은 해외 스키 투어가 지역사회의 큰 관광동력인 경우가 많다.

이런 투기 세태가 당대의 작품에도 반영된 케이스가 있는데 바로 소년탐정 김전일 시리즈. 몰락한 리조트나 골프 회원권을 사이에 두고 이권 다툼으로 살인사건을 벌이는 에피소드의 소재가 이것이다. 같은 만화에서 허구헌날 스키장 고립사건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투기 사태에도 불구하고 오이타현의 유후인 같은 몇몇 지역은 개발을 자제했는데 버블 붕괴 이후에는 이 때문에 오히려 관리가 쉬워서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버블시기 우후죽순으로 세워진 골프장은 현재 노후화 돼 한화로 수 억원의 돈을 들여 수리를 해야 하는 판이라고 한다. # 당시 우후죽순으로 지어졌던 시설들의 운명은 2012년 한국경제 기사를 참조.

3.4. 해외

Fuck all that, we've got to get on with these
그딴 건 좆이나 까, 우린 이걸 계속해야 해
Got to compete with the wily Japanese
교활한 일본인과 경쟁해야 해
핑크 플로이드, Not Now John[86]

일본의 부동산 광풍은 해외까지 뻗어나가 미국 록펠러 센터( 미쓰비시가 매입),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일본인, 미국인 투자자가 파트너십을 체결해 매입)이나 컬럼비아 픽처스( 소니가 매입), 유니버설 픽처스( 파나소닉이 매입) 등을 싹쓸이하기도 했다.[87] 당시 일본 자본의 해외 진출을 두고 치를 떨면서 록펠러 센터가 넘어갈 즈음 일본이 제2의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고 있다는 표현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특히 록펠러 센터가 미국에 있어 상징성이 큰 건물이었던 만큼 그 소식에 대해 착잡하게 여겼던 미국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도래하자 되려 미국에서 일본이 세계 경제를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황화론도 번지기 시작했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의 대부분이 미래에는 경제적으로 일본 미국을 능가할 것라는 예측과 함께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시기 유행한 사이버펑크 장르에도 미래 기술과 일본 문화가 융합하여 등장하는 것 역시 버블경제와 절대 무관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블레이드 러너( 1982년)에서는 2019년의 LA 길거리 음식으로 일본 음식이 팔리고 있으며 가게 주인도 일본인이고 전광판 광고로 기모노 입은 일본인이 나온다.[88] 영화 백 투 더 퓨쳐에서는 미래(2015년)에 기업은 일본 기업 외에는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다이 하드에서는 사건이 일어나는 빌딩이 일본인 소유의 나카토미 타워였고[89][90] 로보캅 3편에서는 일본 기업이 악역으로 나왔다.[91] 그리고 소설에서는 톰 클랜시의 적과 동지가 일본의 북마리아나 제도 침공을 다뤘다. 게임 사이버펑크 2020에서는 아라사카라는 일본의 초거대기업 항모를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땅에서 초법적인 권한을 휘두르는 등 사실상 미국을 점령하여 악명을 떨치는 모습을 보여준다.[92] 이는 후속작인 사이버펑크 2077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1989년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일본이 세계경제를 삼키고 있다!>는 책의 서문 '21세기의 시나리오'에서도 당시 미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가진 두려움이 나타나 있다. 동(同) 책 출판 15년 후인 2004년 기준으로 일본이 미래산업을 지배하고 독자적 핵개발을 시도하는 것은 상식적인 두려움이었으며, 일본 서민들의 생활수준[93]이 미국에서는 부유한 사람들[94]이나 누릴 수 있게 될 거라느니 엔화가 세계 기업활동의 대부분을 지배할 거라느니 전세계 패션, 대중문화, 기업 운영기법의 기반이 도쿄풍이 될 거라느니 미군 예산의 1/4가 일본의 원조가 될 거라느니 등.

그리고 2004년 당선된 미국의 새 대통령이 취임 직후 부채에 관해 일본 투자자들에게 대한 이자 지불의 모라토리움을 선포하고 취임사에서 '일본 제국의 마수'로부터 미국 경제를 해방시키기 위한 성전을 선포하게 될 것이며, 이와 함께 일본은 미국 국방성에 대한 원조 중단과 함께 소런과 중국과의 상호불가침조약 헙상, 핵무장 등 독자적 군사정책 발표 개시 등으로 국제 정세에 대격변을 불러오고, 그 충격에 미국 등 서방세계의 금융과 통화 체제가 붕괴되고 나라 전체의 모든 산업이 파산하며 세계 경제의 기본적인 지주가 무참히 파열, 도처에서 공황이 발생하고, 혼란이 수습된 후에는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로 떠오를 것이라는 내용이다. 심지어 책에서는 오늘날 사람들이 보기엔 너무나 황당하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이 이야기가 '오늘날의 현실문제, 사상 경향, 그리고 두러움 등에서 도출된'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가상'이라고 언급되었다.

하와이는 더 심각했다. 프랭크 패시(Frank Fasi, 1920~2010) 호놀룰루 시장이 "일본인들이 호놀룰루의 땅 일부를 떼어내 그것을 도쿄의 한 교외로 만들게 내버려 두지는 않겠다"고 단언하며 일본인에 의한 주거용 부동산 구입 제한을 위한 법률 제정까지 고려했을 정도였다. 하와이 고급주택가인 카할라 지역의 부동산 매입액 27%, 와이키키 지역의 부동산 매입액 40%를 일본인이 차지했으며, 특히 카와모토 겐시로(川本 源司郎, 1932~)라는 억만장자는 하와이에 113채, 3200만 달러 수준 부동산을 보유했을 정도. 물론 하와이에 간 일본인들이 즐겨 찾던 유흥시설들은 하와이 현지인과 본토의 미국인 여행자들에게는 너무 비싸 얼씬도 할 수 없던 곳이었다.[95] 심지어 카와모토는 캘리포니아에서도 부동산들 사들여 그가 보유했던 부동산은 전성기에는 170개를 기록했고, 최전성기 재산은 1000억 엔이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 전쟁했던 미국인들이 많이 살아 있었다.[96] 버블이 일어난 해인 1985년을 기준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된 지 40년 되었다.[97] 당장 1988년 미국 대선에서 당선(임기 1989~1993)됐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이 태평양 전쟁 참전용사였다.[98] 그러다 보니 참전용사들을 중심으로 1980년대에 미국내 자산들을 싹쓸이하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찔렀다. 당시 일본에서는 미국 언론들이 일본을 비난하는 기사가 늘어나니 "미국 언론사까지 인수하면 미국 애들이 좀 닥치지 않을까?" 라고 응수했다.[99]

예술품 투기도 이때 시작됐다. 시중에 풀리는 돈이 급증하자 넘쳐나는 돈을 쓰고자 일본인은 세계 명화(名畵)를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1987년 3월에 야스다 보험[100] 고흐 해바라기를 3629만 달러에 낙찰받는 등[101][102] 피카소 르누아르를 비롯하여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나온 미술품을 모조리 사들였다. 예술품은 경매가가 정해지면 다음 경매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거래가가 치솟을 수 있으며[103] 부를 과시하는 수단[104]이었기 때문이다.

거품이 꺼지고 은행이 담보로 압류한 미술품이 너무 많아서 일부는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은행 창고에 잠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미술품 특성상 보존 처리를 받지 못하면 아무래도 쉽게 손상되기 마련이고 이런 작품이 다시 세상에 나와도 옛 가치가 제대로 남아 있기 힘들다. 그래서 버블 이후 몇몇 명화는 압류하고 있던 은행까지 도산해 버려서 영영 찾을 수 없게 된 것이 있다. 이런 작품이 대략 백여점 쯤 된다. 보통 이렇게 소실된 미술품은 모조품 제작 등으로 전시회에 나오긴 하는데 전시회 큐레이터가 '이는 모조품이며 진품은 소실됐다‘고 말해준다.[105]

실제로 한국인이 유럽 유명 화가의 작품을 보고 싶으면 외국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초대전으로 작품이 한국에 왔을 때 보는 경우가 아니면 결국 외국에 나가서 봐야 한다. 이때 유럽이나 북미 소재 미술관이 너무 멀면 일본이 훌륭한 대안이다. 유럽이나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적인 명화가 매우 많이 있는 나라가 일본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전공자도 알 수 있을 만한 유명 화가의 대표작은 다 서양에 있지만 그런 최고 등급의 대표작을 제외한 바로 아래 등급의 작품은 일본에 매우 많다.[106] 다 거품경제 시절에 넘치는 돈으로 전 세계에서 미술 작품을 사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결과적으로 이 해외 투자가 완전한 헛짓은 아니었다. 이 투자 덕분에 일본은 지속적으로 상당한 수익을 거둘 수 있었는데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107] 오늘날에도 일본은 여전히 대외 순자산 및 외국 채권 보유 규모가 세계 1위로 2위인 독일의 2배에 육박하며, 매년 30~40조엔 가까이 되는 막대한 해외 수입(본원 소득수지)으로 수십 년 동안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 경제에 있어 이것이 외환 위기 같은 본격적인 붕괴를 막아주는 최후의 보루임을 감안하면 차라리 처음부터 국내의 버블에 미쳐 돌아가는 어리석은 짓 대신 해외 투자에만 전념했다면 지금 같은 꼴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108] 이후에도 숱한 대내외적 이슈가 있었으나 버블 붕괴에 비하면 그 충격은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반대로 말하면 버블 붕괴의 충격이 그만큼 거대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에도 해외 자산 투자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 결과 오히려 지속적으로 일본 기업들의 해외 자산 보유 건수는 증가 추세다. 비전펀드를 통해 전세계 IT 기업들을 실시간 쇼핑하는 소프트뱅크 그룹을 이끄는 손정의 회장, 2008년 세계금융위기 과정에서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한 노무라 증권[109], 모건 스탠리를 인수한 미쓰비시 UFJ 은행, 2015년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전액 현금 일시불[110]로 인수한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이 있다. 2019년 다케다제약은 아일랜드 제약사 샤이아를 니혼게이자이신문처럼 전액 현금 일시불로 인수했다. 물론 웨스팅하우스를 집어먹고 배탈이 난 도시바처럼 다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건 아니지만.

3.5. 일제히 폭발한 돈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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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2251960 ~ 2024년의 기록
빨간색 부분이 버블의 붕괴 후 잃어버린 20년으로 정점에서 약 80% 감소한 모습이다.[111]
'공짜 점심은 없다' 일본 거품경제의 시작과 끝 KBS 스페셜 “도쿄 1991” 부동산 밀착 다큐 시리즈 1탄
(KBS 2007년 2월 4일 방송)
미국 압살하던 일본 최고 전성기! 일본 버블 경제 총정리
버블 붕괴 직후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1993년 TV 뉴스 1990년 주가 폭락 당시 뉴스[112]
버블 당시 일본 국민들은 버블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 같은 공무원도 몰랐고, 언론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정치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 국민 전체가 버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니시무라 요시마사, 와세다대학 경제학부 교수, 전직 대장성 은행국장
거대 도시 도쿄의 부동산이 폭락하면 연이어 주식시장도 폭락 할 것이라는 생각ㅡ-도쿄의 가치에 대한 '숨겨진 자산' 논리를 우습게 여기는 외국인 분석가들이 예측한 대로ㅡ은 일부 전문가 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위험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수도권의 노른자위 부동산 공급량이 워낙 미미하기 때문에 주기적인 공급과잉으로 인한 총체 적인 가격폭락은 불가능하다.
다니엘 버스타인 저, 오기섭 옮김, 일본이 세계경제를 삼키고 있다![113], 1989, (주)시사영어사, 286쪽

1990년과 1991년 수치에 주목해 보자. 2010년대 아베노믹스를 기점으로 엄청난 회복세를 보이는 듯했지만 2만 초반에서 움직였으며 중앙은행이 엔화를 찍어내고, 그걸로 주식을 사서 억지로 유지하는 실정이다.[114] 닛케이 지수는 1991년 버블 경제 붕괴 이후 29년만인 2020년 11월 11일에야 25,000을 넘었다. 그마저도 코로나-19 백신 개발 진전에 따른 경제 활성화의 기대감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다. #
1980년대 일본의 거품경제가 과연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을까? 예상했다고 해도 그정도로 한꺼번에 붕괴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의외로 이걸 예상한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 암울한 예상은 그 과정이 뭔가 논리적으로 들어맞지가 않아 관심을 끌지를 못했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엔 분명히 모든 것이 좋게 흘러가고 있었고, 위험신호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면 오늘날에도 우리는 급격한 공황을 생각하면 미국 경제대공황을 가장 먼저 떠올리고, 그때 붕괴의 조짐이 오늘날에도 보이는지 확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대공황의 실제적인 위험조짐은 생산이 높게 지속됨에도 물건이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일본에서 심각한 거품경제가 발생하고 있고 이것이 곧 터진다면, 일본 역시 생산에 비해 소비가 확연히 감소하고 있고, 이 차이만큼 악성재고가 빠르게 쌓이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의 거품경제때는 물건주문이 꾸준히 증가했고, 이에 비례해 판매량도 판매대금도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라도 어느정도 조정은 들어갈 수 있어도 거품이 붕괴될거라고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섬뜩한 이면은 그 밑에 숨어 있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나라처럼 수출을 중요시하는 국가는 순이익이 감소한다고 해도 자국산 제품의 해외에서의 시장점유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익이야 다음에 회복하면 된다지만 한번 시장에서 밀려나가기 시작하면 다시 재입장하는 건 몇배나 더 힘들기 때문이다. 분명히 환율에서 엄청나게 손해를 보고 있던 일본 기업은 어떻게 미국같은 거대 소비시장에서 계속 점유율을 유지하며 장사를 하고 있었을까? 가격이 오르게 되니 분명 소비자에게 조금씩 외면을 받게 될텐데 말이다. 그 비밀은 간단했다. 처음에는 기술력으로 비싸진 가격에도 불구하고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데 성공했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환율로 인한 손해만큼 은행에서 돈을 그냥 꿔서 메꿔버리는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즉 판매량도 총매출도 증가추세였지만 순이익에서 급격한 감소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점이 폭탄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부동산 악성매물에 물린 은행은 이미 수익을 별로 내지 못하고 있는 기업에도 대출을 해줘 양쪽으로 물려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부동산이 붕괴되면 단순히 은행이 많은 피해를 입고 끝나는게 아니라 은행이 살기 위해 기업에 급작스럽게 대출환수를 요구하게 되고, 이미 한계기업화 되어 있었던 기업들은 상환능력이 없으니 한순간에 파산, 급격히 전체 경제가 얼어붙는 구조가 형성되어 버린것이다.

은행빚이 없이는 사는게 불가능해져 정상적인 매수자가 사라져버린 부동산시장, 사방팔방으로 어마어마한 대출을 해주고도 이 위험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 금융권, 자신이 이미 한계기업이 됐음에도 자신의 상태조차 모르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 있는 기업. 이 조합만 봐도 숨이 턱턱막힐 지경인데, 일본국민들은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온 부동산폭등에 극단적인 대책이라도 좋으니 어서 거품을 꺼뜨리기 원했다. 부동산시장이 급격히 위축되면 어떤일이 벌어질지 위험성을 파악조차 못한 관료나 정치권은 모두가 원치 않은 미래에 스스로를 밀어넣게 된다.

1990년 새해 첫날부터 주식에서 지나치게 높은 값으로 거래가 끊기자 가격이 하락하고 매물이 쏟아지는 거품경제 붕괴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연말에는 연초 최고치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고 1990년대 후반에 닷컴 버블로 잠깐 동안 주가가 상승하나 싶었지만 2000년대 들어 IT거품이 꺼지면서 그 절반으로 급하락했다. 물가 역시 계속해서 디플레이션을 거듭하고 있다.

부동산 시장은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구두개입과 토지구역 감시제도 마련 그리고 금리 인상[115]에도 불구하고 1991년까지 버텼지만 1990년 3월 27일에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대장대신이 발표한 대출 총량규제[116]로 고꾸라졌다. 대출 총량규제는 쉽게 말하면 총량규제 발표 시점부터 신규 부동산 대출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였다. 발표 시점부터 6개월간 전면 금지하고 이후에도 3년간 이전에 200%까지 막나가던 LTV를 감정평가액의 70%로 제한했다.[117]

이러다보니 대출이 없으면 매매가 끊기는 부동산 시장의 특성상 매매는 없이 호가만 대폭락했다. 이때 정부의 대책에는 연착륙이라는 생각이 없었는데 "부동산 가지고 아무것도 안 하고 돈만 버는 놈들은 그냥 망해도 싸다"는 생각을 지녔으며 하시모토 총리 본인부터 일본 전체 경제에 다소 영향이 있을 순 있으나 비정상적 경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선 감내할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했고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예상보다 싱겁게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하지만, 어쨌든 직장인들을 달래주어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118]

버블이 붕괴되자 투기업자들과 건설 업계가 무너졌다. 금융기관들이 부실채권을 떠맡게 되는 여파로 부실화된 금융기관들의 연쇄도산도 이어졌다. 부실채권이 막대해져서 일본 정부에서도 환수를 위한 관련 기구를 설치할 정도였다. 그리고 도미노의 붕괴처럼 자연스럽게 금융기관에 대출을 했던 일반인들까지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불황을 맞은 기업들은 임금삭감과 대량해고를 동반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일본 서민 대다수의 지갑문은 닫혔고, 소비도 당연히 얼어붙어 경제에 악순환이 가중되었다.

버블이 완전히 사라진 1992년부터 엔화 기준으로 경제성장률이 0.8%(1992), 0.2%(1993), 0.9%(1994), 2.7%(1995), 3.1%(1996)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나 싶더니 태국을 위시로 한 아시아의 1997년 외환 위기로 일본 기업의 동남아 및 한국 투자자산이 대거 파산하며 일본 기업도 다시 줄도산했고 1998년부터는 엔화 기준으로도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되었다. -1.1%(1998), -0.3%(1999), +2.8%(2000), 0.4%(2001), 0.1%(2002) 등. 이러다보니 일본에서 엔화 기준으로 완전히 경제성장률 통계를 바꾼 건 1998년부터다. 1997년까지만 달러 기준 성장률을 발표하다가 1998년부터 폐지했다. 일본인의 소득이 늘어나기는커녕 꾸준히 제자리걸음인데도 달러화 기준 GDP는 끝없이 성장하는 일본의 생활상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버블 붕괴는 당시 일본의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다. 일본 경제는 이후로도 수십년간 엔화 기준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당시를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는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이너스 성장은 아베노믹스를 위시한 강력한 양적완화 드라이브로 다소 나아지긴 했으나, 엄청난 후폭풍의 피해는 20년이 지나기까지 영향을 미쳐 2014년 기준으로 가처분 소득은 85년 수준 이하까지 떨어졌다. (자세한 것은 후술)

버블이 붕괴하면서 폐건물이 늘어났으며 시골이나 공터에 방치되는 자동차들도 늘어나게 되었고[119] 거리나 공원에는 홈리스가 속출했다.[120]
거품경제 당시에는 100만 엔 코트, 80만 엔 양복을 입고 다니고 예쁜 여자에게 모피코트를 입혀서 데리고 다니고 커다란 반지를 끼고 활보하던 분들이 지저분한 옷을 입고 술 취해 다니는 것을 보면 가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치즈키 아케미, 긴자 클럽 르 자르댕 사장

4. 당시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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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각종 부정부패 사건

5.1. 오노우에 누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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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우에 누이(尾上縫, 1930~2014)[126]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웨이트리스를 시작으로 레스토랑 사장으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산업은행으로부터 10억 엔 어치의 채권을 구매한 것을 계기로 증권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자신이 경영하던 레스토랑 가치의 1,500배에 달하는 3조 엔에 가까운 돈을 빌려 주식을 사들였고 그 과정에서 금융계의 큰손이 되면서 레스토랑에는 수 많은 금융계 인사가 드나들기 시작했다.

저택 앞에는 오후마다 금융계 인사가 서류가방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 다음날 새벽 2시~3시가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저택에 들어간 인물 중에는 일본산업은행 총재와 같은 거물도 있었으며 JP모건 일본 지사나 야마이치 증권 등과 같이 내로라하는 증권사에서도 직원을 파견했다.

이 사람들이 저택에 찾아온 이유는 다름아닌 두꺼비에게 매주 지내는 의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오노우에는 평범한 레스토랑 사장이나 자산가가 아니고 1970년에 고야산에서 준코(純耕)란 법명으로 승적을 취득한 여승이기도 했다.[127] 물론 실제로 승려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를 계기로 자신의 은사승이었던 히라오카 토호(平岡宕峯) 및 그 친척들과도 친분을 쌓으며 인도 여행을 한 적도 있었고 심지어 달라이 라마를 만나기도 했다. 아래의 해괴한 의식도 밀교 신앙이 이상한 방향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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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 의식이 왜 중요한고 하니 이 두꺼비 의식을 통해서 어떤 주식을 사고팔지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당한 액수가 말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누이는 두꺼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원에 세워진 불상 앞에서 불경을 왼다. 누이가 두꺼비 앞에 앉아 신내림을 받으면 그 순간 어떤 주식을 사고 팔지 신탁을 알려주는 의식이 진행된다. 이런 방식으로 사고팔린 주식이 전성기인 1990년에는 무려 100억 달러에 달했다.

사실 냉정하게 접근해도 아예 근거가 없는 짓거리는 아니다. 경제는 자연과학과 다르게 결국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헛소리라 할지라도 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면 시장은 움직이기 마련이다. 지금도 당장 주식시장에 루머등이 퍼져도 향후 주가가 어찌되건 이에 혹해서 일시적으로 주가가 등락하는 경우는 흔하다. 두꺼비가 A사의 주식을 매수하라고 신탁을 내렸다고 생각해 보자. 소규모의 신실한 집단이 그 말에 따라 A사 주식을 사기 시작한다. 다른 모든 변수가 동일하다면 자연스럽게 A사 주식의 가격은 오른다. 이를 목격한 다른 이들 역시 A사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를 반복하면 두꺼비가 A사의 주식이 오를거라고 한마디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시장에 기대가 형성되어 그 자산의 가격은 실제로 폭등한다(!).[128]

그러나 거품 붕괴 이후 오노우에 누이는 파산했으며 가짜 예금증서로 첫 대출을 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1991년 8월에 경찰에 체포돼 은행의 후원자들과 더불어 몇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파산으로 대출자는 2,700억 엔의 돈을 잃었고, 일본산업은행장은 사퇴했으며 은행 2곳이 도산했다.

출소 후 오노우에는 철저히 은둔 생활을 하다가 2014년 무렵 사망했다고 전해진다.[129]

2023년 2월 5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부분을 다루었다.

5.2. 리크루트 코스모스 사건

1988년 6월 가와사키의 하급 공무원 1명이 외부에 양심고백을 함으로서 세상에 내막이 드러났다. 내부정보를 활용해 리크루트 코스모스[130] 주식을 매입하여 이익을 챙겼다고 시인하고 사임한 것이다.

당시 리크루트 회장이었던 에조에 히로마사가 자사 관련 입법 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정치인, 공무원, 관료, 기업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자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선물했던 것.[131] 이 사건으로 당시 법무대신은 임명된 지 나흘 만에 사임했으며 대장대신도 물러났다.

거기다 다케시타 노보루 당시 일본 총리도 리크루트 주식으로 1억 5,000만엔의 부당이익을 챙긴 것이 몇 달 뒤 드러났다.[132] 이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사퇴했고 차기 총리주자였던 미야자와 기이치, 와타나베 미치오, 아베 신타로가 일보 후퇴해야 했다. 그래서 자민당은 당시 총리직과는 자리가 멀어 보였지만 청렴한 관료 이미지가 많이 부각됐던 우노 소스케를 후임 총리로 지명했는데 우노도 이후 불륜 혐의가 드러나며 취임 두 달 만에 사퇴했다. 이후 자민당의 지지율이 급감했고 소비세 신설문제와 함께 엮여 1989년 7월 23일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처참한 성적을 받았다.

이전에는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면 '자민당 참패!' 타이틀이 뜨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차에 개선의석의 1/3(126석/ 총의석 252석)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총의석에서도 과반에 18석씩 미달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자민당 입장에선 이보다 처참할 수 없는 선거결과였던 것. 오죽하면 다음 해 치러질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중심의 야당연합이 압승하여 55년 체제가 끝장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하면서 55년 체제 붕괴는 몇 년 더 늦춰졌지만...

우노의 사퇴 후 후임 총리로 선출된 가이후 도시키는 너무나도 커진 버블을 잡고자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를 실시했는데 이것이 결국 1992년 급격한 버블 붕괴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장기 불황을 낳아 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 사건이 간접적으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큰 사건의 단초를 제공해 버린 셈.

5.3. 허영중(이토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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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거품경제 이후의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eal_GDP_growth_rate_in_Japan_%281956-2008%29.png 파일:버블경제.jpg
일본의 1956년 ~ 2008년 실질 GDP 성장률 일본의 1985년 ~ 2013년 정부부채 증가율
파일:687e2560c69995d569ec8edc1318b28c.jpg 파일:maney.png
일본의 연평균 실질 소비지출지수 일본의 명목임금, 실질 임금 추이
파일:180221_02-01.jpg 파일:2016022101_03_1.jpg
주요 선진국과 비교한 일본의 실질임금지수 일본의 실질 가처분소득 추이
파일:닛케이평균주가.png
닛케이 225 지수 추이

1983~2023년 도쿄 23구 지가 - 1994년 이후 가장 지가가 높은 2023년 지가조차 역대 최고점인 1991년의 40% 수준이다.

2012년까지의 일본 샐러리맨 평균 월급 연봉 보이다시피 1990년대 초반부터 제대로 임금이 오르지도 않은 채 사실상 제자리걸음만 하는 수준이다.

아직도 거품경제 침체의 늪에서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일본인은 1992년부터 2001년까지를 '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133] 이 때 한국은 일본과의 경제적 격차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134] 1990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일본이 25,359달러였던 시절 한국은 6,516달러로 거의 4배 가량 차이가 났다. 2021년 한국의 1인당 GDP가 약 34,758달러로 추산되는데 일본은 39,285달러 수준으로 1.13배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며 33계단 차이나던 1인당 GDP 순위로는 2계단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의 1인당 GDP는 물가를 고려해 보면 사실상 제자리 걸음이다. 2020년 이후 실질적 PPP 또한 대부분 한국이 일본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잃어버린 10년 말기인 2001년만 해도 일본의 평균임금은 3만 7165달러로 1만 5736달러였던 한국의 2.4배였지만 2022년에는 실질 환율 기준으로 한국의 평균임금은 3만 2532달러로 3만 2503달러인 일본을 앞서게 되었다. 즉, 한국의 최저임금과 실질임금마저 전부 일본을 추월하게 되었다. # 최근 20년간 이코노미스트에선 일본 경제를 다룬 적이 아예 없었단 점에서 이미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본 경제에 대한 평가는 과거의 재산으로 버티고 있을 뿐 성장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취업시장도 버블 붕괴의 충격을 받았다. 1992년 무렵까지는 취업시장은 호황이었지만 1993년부터 버블붕괴의 여파가 취업시장까지 확산되었는데, 하필이면 당시 베이비붐 에코 세대(1971~1974년생)가 취직했을 시점이었다. 안 그래도 동년배들이 넘쳐났는데, 뽑는 사람은 줄었으니, 스펙이 아무리 좋아 봤자 취업문은 바늘 구멍이 되었다.[135] 이러한 상황은 2003년까지 지속되었고, 이 시기를 ' 취업빙하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것이 일본 사회의 출산율 급감의 원인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 빙하기 세대 중 상당수가 나이가 들어서도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하지 못하고 비정규직을 전전하거나 니트족으로 남는 경우가 상당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일본 경제에 큰 짐이 됐다. 청년 니트가 30년의 세월을 거쳐 중년내지 노년 니트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들 세대를 빙하기 세대라고도 불린다.

빙하기 세대의 출산율은 매우 낮았기에[136] 일본의 고령화 현상을 가속화하는 데 큰 영향을 줬다. 2010년대 들어 출생률이 낮아진 시기에 태어난 세대가 본격적으로 취업에 돌입할 시기가 되고 보니, 기업들은 버블경제 시기에 버금갈 정도로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졌다. 뒤늦게 신입사원 우대나 외국인 노동력 초청같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지만 이미 배는 예전에 떠난 셈이다.

다만 일본의 대졸자 취업구조는 한국과 많이 달라서 취업난의 개념도 다르다. 일본은 대학 4학년 1학기가 시작되는 4월부터 공식적인 리크루팅이 시작되어[137] 이르면 골든위크 전, 늦어도 졸업 전에 입사가 확정되는 시스템이다. 물론 취활(就活-취직활동)은 3학년 1학기부터 시작한다. 3학년 2학기가 되면 취직 세미나 등에 참석하고 빠르면 11월쯤부터 입사면접이 시작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정년이 보장되며 기업도 30년은 쓸 의도로 뽑기에 일단 입사하면 이직이나 경력자 전직 등의 형태로 회사를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간단히 말해 졸업식 전까지 결정된 회사가 이후 인생행로를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졸업식까지 취직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이런 경우 정상적인 취업은 사실상 불가능.[138]

한국처럼 휴학을 반복한다거나, 졸업하고도 계속 도서관 다니며 취업준비하는 경우는 없다기보다 불가능하다. 아주 작은 중소기업도 졸업=신입사원이라는 공식이 박혀 있다.[139] 이렇게 입사하는 사례를 '신졸(新卒)'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졸업예정인 4학년이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단 몇 개월에 불과한 취업시즌에 인생이 걸린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밀리거나 탈락하면 패자부활의 기회 따위는 없다.[140][141]

그러다 보니 누구나 채용오퍼를 서너 개씩 받아서 느긋하게 골라 가며 졸업 준비하던 거품경제 시기와 비교해서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 객관적인 수치로 일본의 고용시장은 다른 OECD 국가와 비교해도 상당히 안정적이다. 특히 청년실업률은 일부 유럽국가와 비교해보면 환상적으로 낮은 수준.[142] 물론 1980년대 호황기에 비해 비정규직이나 블랙기업이 늘어나는 등 일자리의 질은 확실히 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2011년 기준으로 일본의 대학 졸업 예정자의 취업내정률[143]은 90%를 넘었고 잃어버린 20년 동안에도 90% 선이 깨진 것은 미국 금융위기가 폭발한 직후인 2009년 정도다.[144]

버블경제 후 장기 불황까지 오면서 세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2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취업빙하기를 직접 겪은 세대는 경기 침체 시대에 힘들게 살고 있는 이유가 버블경제 때에 호황을 누리면서 고생도 안 해 본 기성세대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꽤 많다. 이런 세대 갈등은 한국도 비슷하지만 일본은 더욱 심하다.[145] 예시

다만 위의 장점은 뒤집어 말하면 고용유연성이 극단적으로 낮다는 뜻도 되며 직접 현장에서 일해 보지 않고는 정확히 깨우치기 어려운 본인의 적성과 맞지 않는 직업을 택해 버렸거나, 부주의나 실수로 중과실을 저질러 또는 무언가 밉보여 해고(권고사직 포함)당하거나, 사고, 질병 등으로 장기간 상병하게 된 상태로 휴직연한을 초과하거나, 조직문화가 맞지 않거나, 정년퇴직하였으나 퇴직금을 날려먹거나 빚을 갚는 데 전부 쓴 경우라면 그 즉시 나락으로 떨어져서 아예 평생 재기불능 상태가 되어 생활보호대상자(대한민국의 기초생활수급자)로 여생을 보낼 것을 강요당한다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일본 블랙기업에서 시달리다가 더 이상 못 버티는 경우 퇴사가 아니라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재취업이 어려운 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일본은 그 정도가 거의 전 사회적 낙인 수준으로 매우 극단적이라는 것. 과거 1회 이상 전직했거나, 졸업 이후 2년 안에 취직을 못 했거나, 입사한 지 2년이 지나서 전직을 시도하는 구직자가 일본 취업시장에서 받는 대우는 전과자가 받는 대우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나마 근래 완화되었다곤 하나 취직 후 1~2년 이내에 단 한 번의 기회(제2신졸)밖에 없고 여전히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7. 세계에 끼친 영향

플라자 합의로 인하여 세계의 경제 주도권은 다시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일본으로 넘어갈 듯하던 세계 경제의 패권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자 미국에서도 엄청난 거품경제가 발생했는데 빌 클린턴 시대의 닷컴 버블이 그것이다. 일본 거품경제와 달리 장기화되진 않았지만 IT버블 붕괴 이후 투기자본이 대거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부동산 거품이 생겼고 정부에서 이를 방관하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서 일본 못지 않게 힘들어졌다. 이 당시 벤 버냉키는 거품경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대책을 보고 꾸준히 적당량의 돈을 계속 푸는게 아니라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 수준의 양적완화를 해야된다는 교훈을 얻고 그대로 실행했다.

참고로 북유럽은 일본과 같은 시기인 1980년대 중반에 부동산 거품이 달아오르다가 1990년대 초반에 꺼지며 경제위기를 겪었는데 특히 스웨덴 핀란드의 타격이 가장 심했다.[146] 1994년에는 전 국민의 20%가 실업자였을 정도였다. 다행히 IT 산업 육성 등을 비롯해 체질 개선으로 일본만큼 '길게 잃어버리는' 일은 면했다. # 그러나 2008년에 아이슬란드 은행 연쇄부도를 시작하여 북유럽은 또다시 위기에 빠졌는데, 아이슬란드 정부에서 은행을 모두 국유화한 뒤 부채를 탕감해주는 식으로 경제위기를 해결해 일본처럼 길게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8. 서브컬처 관련

8.1. 버블 시대의 작화

버블시대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종종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도시전설화된 버블시절의 산물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회자되곤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버블 시대 애니메이션'이라며 대부분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애니메이션의 움짤들 몇 개가 올라오고 '일본에 돈이 넘쳐나던 시절에만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라며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고는 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당시 사회상을 모르는 대한민국에서만 쓰이는 엉터리 용어다.

물론 버블시대에 제작비가 어느정도 증가되어서 페이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건 일본의 임금수준이 1990년대 중반~201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체되기 이전이라 그런것이고, 전반적으로 보면 버블시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가 특별히 돈이 넘쳤던것은 아니었다. 물론 비디오 시장이 이때 크게 활성화된지라 OVA쪽으로도 파이가 넓어지던 시대라지만 암만 페이가 많아졌다고 해도 타업종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던것이다. 당시도 원화와 동화는 단가제였고 1980년대 업계에 들어온 애니메이터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첫 월급이 3만 엔이네, 2만 엔이네 하는 얘기가 수두룩하다. 오오히라 신야, 후쿠다 미츠오, 오오노 츠토무, 와카바야시 아츠시처럼 지금은 애니메이션으로 생계를 잇는 베테랑이어도 중간에 현타가 와서 잠깐 그만뒀던 사람들도 꽤 된다. 정말로 애니메이션이 버블의 혜택을 받았다면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은 매수와 스케일, 퀄리티로 제작되어야 했고 애니메이터 풀도 더 넓었어야 했다. 19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원화, 작화감독, 연출 등 핵심 공정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풀이 좁아서 결국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돈이 많이 돌았는데 기업들이 애니메이션에 투자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다.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하면 몇 배로 돈이 벌리는데 애니메이션에 돈을 투자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오히려 해외 OTT에서 투자가 들어오는 2020년대 애니메이션보다 버블경제 시대의 애니메이션이 작화 매수가 적다. 절반도 안 되는 작품이 허다하다. 이런 상황이라 1980년대의 애니메이터들은 카나다 요시노리식 작화를 하면서 작화 매수를 줄이는 궁리를 해야했다.

그 시절 작품이라고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것들도 대부분 버블 이전이나 버블 붕괴 이후에 나온 애니메이션이며 일본에서는 1991년부터 내려가기 시작해 1992년이면 바닥을 쳐서 버블이 끝난 것으로 본다.[147] 1990년대 중반은 일본 경제가 너무 심하게 몰락해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며 이 시대의 애니메이션 중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처럼 암울한 내용이 많았던 건 버블 붕괴로 인해 일본인들이 입은 상실감, 허탈감의 영향이 크다.[148] 그러나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그런 시대의 애니메이션도 버블 애니메이션이라고 하고 있다. # 당연히 1990년대 애니의 대부분은 버블 덕을 전혀 볼 수 없었다. 1990년대부터 퀄리티가 상승한 것은 그저 잘 그리는 사람들이 잘 그려서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전함 야마토, 기동전사 건담, 루팡 3세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1960년대 출생자들이 대거 업계에 들어와 절정의 기량을 가지게 된 시기가 딱 1980년대 후반이었으며 1980년대 말부터 우츠노미야 사토루 이소 미츠오류 작화가 등장하며 이전의 매수를 매우 적게 쓰는 스타일에서 매수를 많이 쓰며 더욱 복잡하고 리얼한 움직임과 디자인을 추구하는 조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업계 밖이나 한국에서는 지금까지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변화지만 당시 애니메이터들은 서로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이런 스타일이 다른 계열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지만 움직임이나 디자인에 있어서 사실적이기 때문에 현재의 한국 오타쿠들에게도 '좋은 작화'라고 다가오는 경향이 크다. 참고로 이 사람들이 그때만 하고 사라진게 아니고 대부분의 애니메이터가 2020년대까지 현역이며 이 사람들이 한 작품을 찾아서 보면 버블 시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 정도 수준의 작화가 나온다. 또 애니메이션의 제작 편수가 적었던 시절이라 이런 좋은 애니메이터가 한 작품에 여러 명이 모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작화가 좋은 건 결과론에 가깝다. 작화가 안 좋은데 돈이 많이 들어가는 애니도 많고, 돈 안 들였는데 작화가 좋게 나오는 애니도 많다. 한국에선 자꾸 작화가 안 좋은 애니를 두고 돈 안 들였다고 할 때가 많은데 의외로 작화붕괴가 난 애니도 돈이 많이 든다. 그림체가 단순하거나 무너진 작품도 작화 매수(프레임)을 많이 쓰면 제작비가 폭등해버리며[149], 반대로 예쁘게 그려도 작화 매수를 적게 쓰면 돈이 적게 든다. 또 스케줄이 무너진 애니는 작화감독을 많이 써서 어떻게든 기본 퀄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게 다 인건비다. 작화감독을 1명 쓸 걸 스케줄이 무너져서 10명 정도 썼다고 치면 인건비가 몇 배가 되어버린다. 심지어 이럴 때 부르는 작화감독, 연출가들은 무리한 스케줄 속에서 작업을 해주는 사람들, 스케줄 불문하고 들어가는 사람들이라 돈을 세게 부른다. 담당 에피소드는 작화붕괴가 터지기로 악명 높은 사사키 스미토(佐々木純人)라는 연출가, 애니 하청사 사장이 있는데 일부러 스케줄이 망가진 애니메이션에 들어가서 기본만 하는 에피소드를 만들어주는 대신 돈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150] 스케줄이 망가지면 이런 사람들을 여러 명 써야해서 결국 돈이 많이 든다. 반대로 적정한 스케줄을 짜고 사람을 잘 모아서 잘 만든 애니메이션은 작화는 좋은데 돈은 별로 안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사실 애니메이션의 제작비는 제작사 측에서 공개하지 않는 이상 시청자 입장에선 정확히 알 방법이 없다.[151][152][153]

결국 돈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1980년대 초중반의 애니메이션계는 실력 있는 애니메이터는 미국 하청 애니메이션을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리지 않아 일본 애니메이션 작화의 질이 좋지 못했다. 미국 하청 애니메이션이 1980년대 후반의 엔화가치 급상승으로 인해 한국 등으로 넘어가고 위에서 말한 변화가 생기며 상황이 1990년대에 바뀐 것이다. 이후 제작위원회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애니메이션 전체의 제작비가 올라갔다.[154]

이 제작위원회 시스템이 도입된 90년대 후반부터 심야 애니메이션 제작이 활성화되면서 매년 애니메이션의 제작 편수가 올라가다가 2006년을 정점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アニメバブル(애니메이션 버블)이라고 하는 것은 이 현상을 말한다. #

하지만 1990년대 애니메이션 중에도 투자 못 받고 지상파에서도 방영 못해서 케이블이나 OVA로 대충 만든 작품은 작화가 안 좋으므로 시대로 묶어서 그 시대의 작품은 전부 작화가 좋다 나쁘다고 논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 작품마다 만들어지는 환경이 다른데 그걸 시대로 묶어 버리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에 불과하다.

(데이터) 일본 버블경제 애니라고 올라오는 짤들 팩트...
일본의 버블 경제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제작비에 대한 오해

8.2. 이 시대의 작품 및 시대상의 작품

의외로 버블 시대에는 당시를 배경으로 한 일본 서브컬처가 많지 않았다. 자신들의 일상이 특별하다는 감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버블기에도 혜택이 골고루 돌아간 것은 아니라서 직장인들은 버블기의 혜택을 보기는커녕 집값, 월세 상승으로 도시 외곽이나 지방으로 밀려나는 게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버블 경제 시대에는 오히려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낸 SF가 유행했다. 그렇다고 나중에 와서 재현하려고 해도 기억과 일부 자료에만 의존해야 하니 제대로 재현이 힘들어 잘 나오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서양권에서 이 시대 일본의 경제성장을 두려워해서 일본을 의식한 작품이 많이 나온다. 대충 미래에는 미국 대신에 일본 문화에 점령당한다는 내용. 대표적으로 전격 Z 작전, 다이 하드.

9. 참고/관련자료

9.1. 통계자료

9.2. 기사

9.3. 서적

9.4. 방송자료

9.5. 인터넷 글

10. 관련 문서



[1] 데이터 출처: Our World in Data, 세계은행. 1995년 최고점에 달한 일본의 GDP는 미국 GDP의 70%까지 도달했다. 버블경제의 정점인 1988~1990년이 아닌 1995년인 이유는 당시 효고현 남부 지진으로 인해 환율이 1달러당 79엔까지 떨어져 엔화의 가치가 과대평가되었기 때문이다. [2] KBS 스페셜 '욕망과 혼돈의 도쿄, 1991년'의 마지막 내레이션. 일본 거품경제를 잘 표현했다고 평가받는 다큐다. [3] https://www5.cao.go.jp/keizai3/keizaiwp/wp-je93/wp-je93-00501.html 마지막 문장 바로 위에서 찾아볼수 있다. [4] '버블 경기'. 일본어 위키백과에도 이 제목으로 문서가 존재하며 일본의 거품경제와 관련한 다른 것들도 모두 버블 ○○라고 지칭하고 제각기 문서도 있다. 버블 붕괴(バブル崩壊), 버블 시대(バブル時代), 버블 세대(バブル世代) 등. 학술에서 간혹 사회상에 대한 비판적 표현으로 금전만능닛폰(金満ニッポン)이라고 칭하는 경우도 있는데 90년대 서적이나 방송을 보면 가끔 등장하는 표현이나 식자층의 표현으로 보편적인 명칭은 아닌 듯. 흥미롭게도 2010년대 중국 경제 호황기에도 산케이 등에서 "금만중국"이라면서 힐난조의 기사 제목으로 응용되기도 했다. [5] 한화로 무려 1경 6,500조원 가량. 1991년 일본 인구가 1억 2393만 명이었으니 1인당 1210만 3609엔의 자산이 공중분해된 셈이다. [6] 다만 실제로 1986~1987년도에는 호경기가 일반인들에게 체감될 정도는 아니었고, 구인배율 통계를 보면 일자리가 남아돌아서 기업들이 쩔절맬 정도의 호경기는 검은 월요일 직후인 1988년부터 시작되어 1992년 상반기까지 지속되었다. 주가폭락은 1990년, 부동산 폭락은 1991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경기에 반영될때까지는 1년 정도의 시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대해 흔히 추억되는 고용빙하기는 1993년부터 시작되어서 중국발 경제호황이 오기 이전인 2003년까지 지속되었다. [7] 버블이 꺼진 직후 1990년대에 가장 심각한 시기를 겪었으며, 2000년대까지 장기 불황이 이어졌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아베노믹스 영향으로 어느정도 불황에서 벗어난 이후 2024년 닛케이 225가 신고점을 경신한 시점을 기점으로는 잃어버린 40년 이상의 용어는 쓰이지 않고 있다. [8] 2023년 엔화 약세로 약 4조 2000억 달러, 독일에게 54년만에 추월을 허용하여 세계 4위로 내려왔다. [9] 실 해상도는 1440x1050i [10] 1992년이면 세계적으로 1280×720 HD 영상은커녕 DVD(480p)급 SD영상을 보던 시절이다. 선진국들도 VHS에 만족해야 했고, 수평 해상도 420픽셀인 레이저디스크는 부자나 매니아의 전유물이었으며, 개발도상국에는 그조차도 없었다. 그런데 1991년부터 일본은 시범적으로나마 MUSE 방식의 HDTV( 하이비전) 본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으며, 공개 HD 시험방송은 무려 1989년부터 시작했다. 심지어 HD 시범 녹화는 무려 1982년에 시작했다! [11] 이에 자극받은 유럽은 Eureka 95 프로젝트를 수립하고 이에 기반한 HD-MAC을 개발, 1992년 공개 HD 시험방송을 시작해 맞불을 놓았다. 미국에도 1993년에 찍은 HD 데모 영상이 있긴 하지만 미국이 (비공개로) 첫 HD 시험방송을 시작한 것도 일본이 HD 정규 방송 시작을 선언하기 직전인 1994년이었으며, 미국에서 공개 HD 시험방송은 1996년, 공개 HD 본방송도 1998년 시작하며 일본보다 7년 늦었다. 한국은 2000년 HD 시험 방송이 시작되었고 정규 HD 방송은 2002년에야 시작하여 11년이나 늦었다. [12] 사실 소련 붕괴 이전에는 소련이 국가 경제자료 일부를 공개하지 않기도 했고 환율 정책을 복잡하게 운영했기에 정확하게 판단하기 힘들어서 자본주의권 국가들끼리 GDP 순위를 매겨서 일본은 1968년부터 이미 2위(당시 기존 2위 서독의 경제규모를 넘었다.)로 표기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소련이 2위였다. 1980년대에 진짜로 소련보다 커져서 진짜 2위가 된 것. [출처] 매일경제신문 1988년 9월 24일 제4면 / (이미지) [14] 당시 NTT의 시가총액은 서독 주식시장 전체 시가총액과 맞먹었다. 참고로 당시 서독은 세계 3위 경제대국이었다. [15] 참고로 당시 NTT의 주가는 1주당 2만 달러로 2024년 가치로 5만 달러에 가까운 수준이다! 2022년 기준으로도 린트(기업) 버크셔 해서웨이 정도를 제외하면 버블 시기 NTT 1주의 현재 가치는커녕 당대 가치를 능가하는 회사가 없을 정도. # [16] 1987년 연말 한국 증시의 전체 시가총액이 26조 원으로 당시 환율로 4조엔 수준이었다. NTT의 시가총액 최고치는 87년 4월 22일의 49조 6천억엔. [17] # 해당 링크에는 소련의 자료가 누락되어 있다. [18] 2021년 기준으로 전세계 기업 시총 1위를 달린 애플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국가별 GDP와 단순비교했을 경우 이탈리아를 제치고 7위를 차지한다. 2020년 8월 기사 [19] 일본의 NTT는 한국의 한국통신(現 KT)에 대응하는 회사 [20] 참고로 중국의 GDP는 2012년 미국의 50%를 돌파했고, 2016년 미국의 60%를 돌파했으며, 2021년~2022년 미국의 70%를 넘기도 했다. 최고기록은 2021년 미국의 76%에 이른 것 그러나 2023년 70% 이하로 내려갔다. [21] 당시 석유붐이 끝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의 GDP가 대폭 하락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가령 사우디아라비아는 1981년의 고점 18,800달러에서 1988년 6,400달러까지 꺼졌다. 또 당시 중국이나 인도는 인구 대비 경제력이 미약한 후진 개발도상국이었다는 점도 한몫 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의 급여 수준은 미화로 월 수십달러 내외 수준인 시대인지라 평범한 일본인이 여행여비로 한두달치 급여에 해당되는 금액을 가져가면 중국에서 황제급으로 대접받으며 관광할 수 있었다는 회고도 있을 정도. 그만큼 소득차가 심하다 보니 당시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중국은 엄청나게 값싼 물가의 엘도라도(?)였다는 얘기다. 물론 이후 일본의 급여 수준이 버블 때로부터 크게 변하지 않고 중국의 급여와 물가가 엄청나게 오르면서 옛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중국도 코로나 팬데믹 이후부터는 디플레이션이 심화돼 일본이 밟았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중이다. [22] 링크의 연도를 원하는 연도로 변경하면 확인할 수 있다. [23] 물론 미니 국가 모나코 리히텐슈타인, 산마리노는 제외한 수치다. 단 산마리노는 2004년부터 IMF가 통계작성을 시작했다. [24] 참고로 일본의 1인당 GDP가 10위권 안에 들기 시작한 것은 1983년이다. [25] 1986~1987&1990년에는 8위, 1998년&2002년에는 6위를 기록했다. [26] 2002년 이후에도 일본의 1인당 GDP는 20위권이었던 2006~2008년을 제외하면 대체로 10위권 안에는 들어왔고, 2011~2012년에는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환율 상승으로 간만에 미국에 거의 근접했다. 이때 일시적이나마 5만 달러에 근접하기도 했으나, 아베 신조 집권 후인 2013년 이후 엔저로 달러 환산 가치가 급락하며 20위권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2022년에는 30위권으로 더 밀려났으며, 2024년에는 한국, 스페인, 슬로베니아에까지 1인당 GDP를 추월당했다. [27] 아이러니하게도 총/1인당 GDP 지표로 따지면 버블 붕괴 후가 버블 시기보다 더 좋았다. [28] 1인당 GDP 포지션 [29] 여담으로 싱가포르가 1인당 GDP Top 10에 처음으로 들어간 해는 2012년이고, Top 5에 처음으로 들어간 해는 2021년이다. 그리고 싱가포르는 1994~1997년/2009~2011년에도 10위권 안에 들어갔다. [30] GDP 규모 세계 2위, (9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GDP 50% 이상 차지 [31] 단, 위의 자료에서 은행은 매출액이 아닌 자산을 기입한 것으로 보인다. 통상 은행업은 예대차익이 사업의 본질이기 때문에 회계에 매출 개념을 인식하지 않는다. [32] PPP는 각국의 통화단위로 산출된 GDP를 단순히 달러로 환산해 비교한 것이 아니라, 각국의 물가 수준, 즉 각국의 구매력도 함께 반영한 거다. [33] 1인당 PPP는 1인당 GDP를 넘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버블시기 일본은 2000년까지도 1인당 PPP가 1인당 GDP의 60~70%대였으며, 심지어 1994~1995년에는 1인당 PPP가 1인당 GDP의 50%대였다! [34] 둘째 링크에는 반 년 정도 베이커리 아르바이트를 하면 시급이 2000엔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35] 계산해보면 3주지만 당시 일본이 주5일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 달이라 봐도 무방하다. [36] 참고로 1989년 일본의 최저시급이 492엔(약 2323원)이었던 반면, 한국의 최저시급은 600원이었다. 참고자료(1977~2022년 일본의 최저시급) [37] 1992년 한국 은행원 평균 연봉 [유의사항] 물론 급여는 일본에서 받고 생활은 한국에서 하는 형태가 아니라면, 이러한 식의 양자 비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기에, 어디까지나 어느 수준이었다 정도의 참고로만 삼는 것이 좋다. 당시 한국의 롯데 그룹 부장 급여 수준이 한국 내에서 낮았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없고, 일본 평균 근로자의 급여가 일본 내에서 높았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39] 2022년 기준으로 연준이 금리를 0.5% 인상하는 것도 엄청난 상승세라며 빅 스텝(big step)이라 불리는 걸 생각하면 실업률, 산업 성장 등등 다른 거 다 포기하고 스태그플레이션 하나만 잡겠다는 신념으로 밀어붙인 결과다. 당시 연준은 폴 볼커가 진두 지휘했으며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자신의 재선과 직결되는 사안임에도 폴 볼커의 금리 인상 정책엔 손대지 않았다. 이런 노력 끝에 미국 달러는 세계 최강의 패권을 쥐게 되었으며 소련이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관련 내용은 폴 볼커 항목 참고. [40] 한 디시 유저가 작성한 글을 보면 쉽게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 [41]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조차 기술과 품질로 무장하고 들어온 일본 제품에 의해 점령당했고 이로 인해 GE, RCA, 웨스팅하우스 같은 전자회사들은 가전제품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고사되는 등 후폭풍을 앓았다. [42] 사실 전술한 업체들은 가전도 하지만 전력사업 등 기업, 정부 대상 대규모 사업이 사실상 메인이며 이 쪽이 이윤도 더 많이 남는 분야다. 경제원리로 봐서도 슬슬 소비재 가전은 철수하고 B2B 사업에 집중하는게 맞으며, 그런 이유로 가전시장에서 철수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윤 폭은 적어도 일반인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사업이기 때문에 이들 사업이 철수하고 일본 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은 일반 미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아래 단락에 나오는 미국인들의 반응 또한 이런 사실에 기인한다. 삼성전자 등 주력 사업이 반도체 등 B2B에서 나오는 기업들도 소비재 가전, 그 중에서도 이윤폭이 거의 없다시피 한(AS망 유지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손해인) 주방가전, 소형가전 등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중소기업 OEM으로라도 유지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이미지 때문이다. [43] 이 시기 미국 업체들(주로 앞 엔진 후륜구동 레이아웃이 주류였으며 중형차로 분류되는 차종들도 전장이 5m대에 달했다)은 유럽, 일본의 가로배치 앞 엔진 전륜구동 레이아웃을 성급하게 벤치마킹하려다가 경력직 엔지니어 상당수의 은퇴, 제너럴 모터스 내 재무부서의 권력 독점으로 대표되는 숫자 중심의 회사경영, 엔지니어링 및 재무팀의 지나친 제품개발 간섭, 효율만 쫓다가 다른 경쟁력을 말아먹은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중반 배지 엔지니어링의 남발 등으로 경쟁력을 대거 상실했고 품질 및 신뢰성 문제도 속출해 고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반면 토요타와 협력업체를 비롯한 일본 기업들은 비용절감을 하면서도 품질을 유지하는 관습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미국 차 대비 고품질이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었다. # [44]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당시 일본 경제의 성공 요인을 주제로 하여 그 유명한 피터 드러커가 쓴 장문의 분석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 [45] 그리고 이때부터 일본에서도 "이제는 우리도 (미국에 대해) 우리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이른바 저자세에서 벗어나자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이시하라 신타로 모리타 아키오가 공저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란 책이다. [46]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도이 다카코 사회당 위원장이 주도한 야당연합(사회당+공명당+민사당)이 55년 체제 이후 처음으로 자민당을 넘어서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러자 1990년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던 자민당 정권은 정권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서 아래에 나오는 여러 경기둔화조치들을 다급하게 시행한다. [47] 일본의 경제학자들과 관료들은 이미 70년대부터 소비세 신설을 주장했지만 세금 인상에 따른 유권자들의 반발로 두 차례 정도 쓴맛을 본 자민당이 계속 막고 있었다. 하지만 부동산 폭등이 계속되자 이러다간 더 큰 민심이반이 올 것이라고 판단한 자민당이 전격적으로 소비세 신설을 밀여붙였다. 다만, 비슷한 세금 제도가 아예 없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서 1937년부터 ‘물품세’라는 이름으로 사치품이나 기호품에 판매가의 5%에서 30%까지 붙는 세금이 있었다. 다만, 사치나 기호를 판단하는 기준이 일본의 경제성장을 따라잡지 못하는 측면이 있어 내부의 비판이 컸고, 그 내용도 몇 차례 개정되었으나, 소비세 신설과 함께 폐지되었다. 여담이지만, 음반은 취미기호품에 해당해 15% 세율이 적용되었으나, 동요는 0%였기에 동요로 분류해 세금을 피할 수 있었던 애니메이션 OST(현재의 타이업 방식과는 다른, 마징가 Z 형식의 동요형 주제가)가 다량 출반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48] 단 일본의 LTV 규제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텍스트가 없어 확인이 필요하다. 기껏해야 홋카이도타쿠쇼쿠은행에서 120%짜리 대출을 해줬다는 사례가 언급되는 정도. 현재 일본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적용하는 LTV 규제가 없는데 한국 텍스트에는 (아마도 정부의 간접 지도 또는 금융기관 자체 기준을 인용해서) 80% 혹은 100%로 쓰는 경우가 많다. 또 미즈호 은행 계열 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일본 기업용 부동산 대출의 LTV 비율은 이미 버블에 들어서기 전부터 감소하고 있었고 지가가 하락한 1992년 이후에는 오히려 상승했다. 더불어 1988~1990년 사이 부동산 대출 총량이 20~30%씩 급증하다가 브레이크가 걸려서 그렇지 어쨌든 대출 자체가 감소한 해는 없었다. [49] 일본 전체의 공시지가를 보면 1989~1991년 사이 상업용지는 40%, 주거용지는 36% 상승하는데, 1992년에 각각 -4%, -5.6% 떨어졌다. 특히 가장 등락이 심했던 오사카권은 동기간 주거용지가 95% 상승했다가 -23%로 급반전했다.( 관련 논문) [50] 기자회견에서 마지막 사장 노자와 쇼헤이(野澤正平)가 "회사가 쓰러진 건 어디까지나 제 책임입니다. 사원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재취직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십시오."라며 눈물로 호소한 게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파산 겨우 4개월 전에 전무에서 사장으로 승진해 전임자들의 실책과 위법행위를 설거지해야 했던 만큼 동정론도 컸고, 실직한 사원들이 다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몸소 취직처를 돌아다녔다고도 한다. [51] 투금계정이란 재무상태표에만 나타나고 손익계산서에는 기타포괄손익으로 처리할 수 있는 특별자산들을 모아놓은 펀드 투자자산 계정이다. 기업들이 펀드 투자할 수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싶겠지만 일본에서는 1984년 이전까지 비금융권 기업이 펀드에 투자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제해 왔다. 회사의 본업을 망각하고 돈놀이에만 올인하면 안 된다는 이유. 한국에서는 불법이었던 적이 없다. 대신 한국에서 펀드라는게 유행을 탄 것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였기에 1997년 이전에는 한국 기업회계에 투금계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업에서 활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52] 위 50대기업 시가총액 표에서 1위인 NTT 항목을 보라. 2위와는 아예 자릿수부터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53] 출처: 사카이야 타이치 지음, 이승홍 옮김, 분열하는 경제대국, 1992, 한국능률협회, 131쪽 [54] 이 정도로 자국 증시가 과열된 데는 2020년대 현재와는 달리, 일반인이 해외 주식을 쉽게 투자할 수 없었던 것도 한몫 한다는 시각이 있다. 일본에서 일반인의 해외 주식 투자가 가능해진 것은 1996년, 소위 ‘일본판 금융 빅뱅‘으로 불리는 금융 시스템 개혁 이후이며, 실제로 허들이 낮아진 것은 2003년 8월 이트레이드 증권(현 SBI 증권)이 1000주까지 거래 수수료 25달러 정책 *을 펼친 이후였다. ETF 거래 등등은 2007년부터였다. 즉, 소위 버블기 당시에는 시중에 넘치는 일반인의 자금이, 적어도 주식 측면에서는 해외로 흘러갈 구석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5] 이것을 부동산만 오르고 물가는 안정된 형태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1970년대에는‘광란물가‘라고 불릴 정도로 심각했었고, 오일쇼크기 이후로는 물가상승률이 어느정도 낮아졌지만, 절대적인 물가는 지속적으로 올랐기 때문이었다. 단적인 예로 1970년에 100엔이었던 택시 기본료는 1990년 즈음에 600엔대로 6배 이상 올랐다. 당시를 기억하는 평범한 서민들은 부동산은 차치하고 미친 물가 상승으로 고생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즉, 경제 성장이라는 내적 요인과 오일 쇼크 등의 외부 요인이 시너지를 일으켜 물가와 임금의 지속 상승으로 이어졌고, 부동산은 그 이상의 미친 가격 상승을 보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는다. 그나마 당시에는 임금상승률이 5%는 기본적으로 찍던 시대라 망정이었다. [56] 시장 가격 10억짜리 땅을 가지고 있으면 20억까지 대출해 준다는 소리. 물론 은행들이 '언젠간 2배가 될 거니까 그 정도 쯤 쳐줘도 된다'는 생각에 이런 담보율을 설정했다고 단순화시킬 수는 없다. 타 은행과의 경쟁, 실제 파산 비율 등도 고려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걸 감안해도 LTV 200%는 그만큼 은행이 자신이 있었다는 뜻이고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57] 2020년대 한국 LTV는 50% 내외다. [58] 다만 농촌은 제외. 도심에서 먼 지역을 보면 당시 소득 대비 큰 거품이 끼었다고 보기 어렵다. 산골은 말할 것도 없다. 아라카와 히로무 백성귀족 6권에서 이 당시 분위기를 전하는데 워낙 깊은 산골짝이라 땅값이 한 푼도 안 올랐다고 말하는 작가 아버지와 이놈의 땅을 긴자에 들고 가서 팔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하는 작가 어머니의 표정이 압권. [59] 심지어 후술하듯 이는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 [60] 일본 전체 면적은 캘리포니아 주보다도 작다. [61] 현재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약 한화 2조 2천억원 정도의 규모다. [62] 전체 땅값 약 117조 엔 [63] 전체 땅값 약 36조 엔 [64] 전체 땅값 약 135조 엔 [65] 전체 땅값 약 84조 엔 [66] 전체 땅값 약 48조 엔. [67] 전체 땅값 약 26조 엔. 참고로 긴자의 면적은 1제곱킬로미터 미만(87ha). [68] 1989년 기준 한국의 총 GDP가 166조 원(약 35조 엔)도 되지 않았으며, 미국 총 GDP는 5.642조 달러(약 812조 엔)였다. 적어도 도쿄의 한 구를 팔면 한국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사실에 가까웠던 셈.(...) [69] 그리고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20년 동안 지속적인 디플레이션을 겪었기 때문에 실질 가치는 명목상의 1,900만엔보다 훨씬 높았다. [70] 출처:상기한 KBS 스페셜 [71] 출처: 사카이야 타이치 지음, 이승홍 옮김, 분열하는 경제대국, 1992, 한국능률협회, 135~136쪽 [72] 출처: 동일 저서, 131쪽 [73] 출처: 마키노 노보루/미쓰비시 종합연구소 지음, 김태승 옮김, 전예측 1990년대의 일본, 1990, 청계연구소, 151/154쪽. 원서는 1989년 9월 일본에서 출판된 후 3개월 만에 28판 40만 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74] 현재의 시오도메 시오사이트 부지. [75] 그러나 부동산 거품이 최고조에 달한 2022년 한국에서도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상품이 등장하면서 일본의 버블경제를 떠오르게 했다. [76] 타마 지역. 이 지역은 한국으로 친다면 1970년대- 1980년대 강남구 노원구 비슷한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77] 일본의 교통비가 비싸다 보니 직장에서 교통비를 별도로 내 주는 게 관행인데 이를 이용해 직장에서 신칸센으로 출근해서 집세와 집값을 아끼는것이다. 다만 이런 게 없는 직장에 다닐 경우에는 비싼 신칸센비를 다 내야 해서 일반전철을 타야 했다. 일본에서 히키코모리 현상이 한국보다 두드러지게 심각한 이유 중 하나였다. [78] 하지만 버블 붕괴 후엔 상황이 반전되어서 상속을 받았다가 거액의 세금을 무는 바람에(이 경우에는 버블 시기에 재산 신고해서 서류상 재산은 빠방했는데 막상 상속받을 시기가 되자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애물단지가 되어 버리고 설사 부동산이 팔리더라도 엄청나게 손해를 보기 때문에 세금 감당도 못 할 지경이 되면서 결국 파산하게 되는 것) 파산하는 일이 잦아서 상속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고 한다. [79] 개중에는 '지아게야'라 해서 야쿠자가 운영하는 개발 회사들도 많았다. 이 경우 굉장히 폭력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억지로 땅을 사들였기 때문에 원주민 입장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 만화 드래곤볼에서 수하들을 동원해 행성들을 정복하는 악당 프리저는 이런 개발사들을 모티브로 삼았다. [80]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는 이런 상황이면 공공기관에서 토지 수용 후 전면 개발한다. 공공의 수용이므로 감정가의 2배 이내에서 수용가가 결정된다. 반면 일본에서는 공공의 수용이 아닌 민간이 토지를 다 사야 하므로 개중에 알박기 등으로 인해 토지가가 무한정 올라갈 수 있다. [81] 한국은 일개 건설사가 독자적으로 도시 개발을 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보통 한국토지주택공사나 지방 도시공사가 도시개발을 맡고 건설사는 개발된 토지를 분양받아 아파트 등을 시공만 한다. 다만 꽤 큰 땅에 건설사가 아파트를 짓겠다고 나서면 지자체에서는 난개발을 막고 늘어난 수요만큼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해 도로와 공원, 학교, 근린시설 등을 만들라고 기부채납을 단서로 들이밀기 때문에 작게 나마 건설사가 도시개발까지 맡는 경우도 종종 있다. [82] 출처: 사카이야 타이치 지음, 이승홍 옮김, 분열하는 경제대국, 1992, 한국능률협회, 135~131쪽 [83] 한국에서도 2010년대 들어서 골프장회원권 시세가 폭락하는 상황이 오자, 이게 일본같은 부동산버블 붕괴의 전조증상 아니냐는 우려섞인 예측이 한동안 나왔었다. 당시 우석훈, 선대인 등의 폭락론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다녔다. [84] '전예측 1990년대의 일본'에 따르면 도쿄 23개구와 같은 6만 헥타르 면적의 아와지 섬에만 33개의 리조트가 계획되었고, 일본 전국에서 400개의 리조트들이 구상, 계획 상태였으며, 도쿄로부터 가까운 편인 에치고유자와 주변에서는 1988년도에만 지난 해(1987년)에 전국에서 건설된 리조트 아파트의 총수를 훨씬 넘는 3000호가 팔렸다고 한다. [85] 일본 최대의 구직정보회사. 한국으로 치면 사람인이나 잡코리아, 인크루트 같은 회사다. [86] 물론 핑크 플로이드가 뼛속까지 붉은 좌익 밴드긴 하지만 당시 영국병으로 경제난이 극심한 상황에 냉전과 일본과의 경쟁을 힘겹게 치러야 했던 영국의 상황을 잘 나타낸 가사다. 거꾸로 말하자면 당시 일본의 거품이 냉전에 비교될 만큼 심각했단 것. [87] 뉴스위크의 1989년 10월 9일자 표지는 "JAPAN INVADES HOLLYWOOD(일본이 할리우드를 침공하다)"라는 표지로 컬럼비아 픽처스를 34억불에 매입하는 일본의 위세를 승리의 여신이 기모노를 입고 횃불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패러디했다. 버블 시대 일본의 해외 투자 광풍을 상징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링크 [88] 이 기모노 입은 일본인은 한국계 미국인 배우인 알렉시스 리(Alexis Rhee)로, 블레이드 러너로 데뷔하였다. 훗날 영화 블랙팬서에는 수산시장 아줌마로 출연해 “사고치기 좋아하는 애들이라고?”라는 명대사를 남긴다. [89] 빌런은 독일계인데 독일도 플라자 합의에 일본과 같이 불려나간 전적이 있다. [90] 심지어 극중 나카토미 사장을 건물에서 추락시켜 죽인다. [91] 이러한 것들의 영향으로 SF의 상류층 집은 일본적인 인테리어나 정원 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종종 묘사된다. 블랙 레인(1989년)은 아예 일본 본토까지 날아와 찍었고 데몰리션 맨에서도 지배층은 일본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 [92] 사이버펑크 2020은 아직 버블 시절이었던 1990년에 나온 게임이다. [93] 책에서는 '최신, 최고의 기술을 이용한 가정용품 및 국제적 사치품만 사용하며, 초음속 일본 항공기로 하와이와 기타 태평양제도의 휴양지를 안방처럼 드나든다.'고 언급된다. 심지어 그럼에도 2004년의 일본은 미국과는 정반대로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문제가 거의 없을 것처럼 예측되었다. [94] 이조차 2004년 미국 서민들이 1980년대 미국 서민들보다 더 풍요롭게 살 것을 상정하고 한 발언이다. 해당 예측에 따르면 미국 서민들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노동자들보다는 많이 벌지만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스위스, 북유럽, 캐나다, 서독보다는 적게 벌 것이라고 한다. [95] 출처: 다니엘 버스타인 저, 오기섭 옮김, 일본이 세계경제를 삼키고 있다!, 1989, (주)시사영어사, 72쪽 [96] 1980년대 미국 남성의 평균 수명은 만 70년 정도로 2차 대전 참전용사(대략 1917~ 1926년생) 중 대부분은 생존 중이었다. 19세기 출생자들도 살아 있던 시대인데 1910~20년대 생들이 살아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97] 멀리 갈 필요 없이 6.25 전쟁은 휴전한 지 당시 기준으론 32년밖에 안 되었다. 또한 냉전 시기 였으며 한국은 5공 시절이었다. 물론 1987년 6월 항쟁 이후 1988년 2월 현 체제인 6공으로 넘어갔으며 냉전은 버블 말기인 1991년 소련 붕괴로 완전 끝났다. [98] 그는 치치지마 식인 사건의 희생양이 될 뻔했다. 그래서 1989년 쇼와 덴노 사망 후에야 "겨우 일본을 용서할 마음이 들었다"고 술회했고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99] 이런 응수는 미국 언론사는 아니지만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2015년 니혼게이자이신문전액 현금 일시불로 질러 버리는 모습을 통해 일부 실현됐다. [100] 당시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손해보험회사였다. [101] 이게 왜 남아 있냐면 이 해바라기 최고가 낙찰 기록은 무려 17년이나 있다가 갈리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그리고 이는 당시까지 회화 매입에 지불된 최고 금액의 3배에 달했다고 한다. [102] 실제 매입비용은 수수료 등을 포함하여 정확히 $39,921,750이었다. [103] 물론 거품 꺼진 뒤에는 예술품 가격도 폭락했다. [104] 당시 돈 좀 있다 싶은 부동산 회사는 명화를 입구부터 사장실까지 걸어 놨다고 한다. [105] 만화 갤러리 페이크에서는 주인공 후지타 레이지가 이렇게 거품경제에 미친 졸부와 은행들의 농간에 휘말린 명화들을 거래하거나 복원하다가 진품은 자기가 챙기고 복제품을 파는 식으로 나름 복수를 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106] 실제로 한국의 미술 전공자가 유명 화가의 원화를 보러 일본에 가는 사례가 꽤 있다. 국립서양미술관, 브리지스톤미술관, 모리미술관, 국립 신미술관, 요코하마미술관, 손보저팬 도고 세이지 미술관 등 수도권 미술관뿐 아니라 야마자키마작미술관, 나고야시 미술관, 히로시마 미술관 등 지방 미술관조차 그 컬렉션의 양과 질에서 한국과 비교되지 않는다. [107] 일본은 1984년 743억 달러의 대외순자산을 보유하여 세계 제1의 채권국에 등극했다. [108] 실제로 일본은 1990년대 후반 잃어버린 10년에 들어갔는데도 아시아 외환위기에서 망하는 수준은 면했다. 다만 그 이후 후유증이 심해 현재 잃어버린 30년 까지 온 거다. [109] 정확히는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 일부를 사들였고 본진이었던 북미 지역은 바클리스 캐피탈이 인수했다. [110] 파이낸셜 타임즈는 원래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 블룸버그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하고 경쟁했는데 인수의향서를 제출하지도 않았던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의 키타 츠네오(喜多恒雄) 회장이 파이낸셜 타임즈의 모회사 피어슨 그룹의 회장을 1:1로 만나 007 가방에 들어있는 현금 다발을 보여주고 그 자리에서 니혼게이자이의 FT 인수가 확정됐다. 사실 이런 인수과정은 인수의향서를 제출하고 정식으로 인수 경쟁을 하는 인수 후보 기업들한테는 엄청난 결례다. [111] 1989년 12월 29일의 신고점을 돌파하는데 무려 34년 2개월이 걸렸다. [112] 영상 초반에 나오는 아나운서가 현재 도쿄 도지사 고이케 유리코이다. [113] 상술한 2004년 시나리오를 제외하고 봐도 지금 보면 매우 허황된 미래 예측들이 많다. 달러화가 조만간 엔화에게 서서히 기축통화 자리를 내어 줄 것이라느니 일본이 미국을 경제적으로 종속시킬 거라느니 일본이 경제는 물론 (재무장이 성사된다면) 군사적으로도 초강대국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느니 팍스 니포니카가 도래할 거라느니 등... 물론 책 곳곳에 레이건과 플라자 합의를 까는 내용들이 들어가 있다. [114] 일본 엔화가 기축통화에 준하는 격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미국에서도 연준이 주가 부양을 위해 비슷한 일을 한다. 당연히 한국에서 하면 큰일난다. [115] 본래 일본은 플라자 합의로 인해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을 위해 금리 인하를 단행했으나 부동산 시장의 과도한 거품으로 금리 인상을 단행한 것이다. [116] 실시 기간 : 1990.03.27 ~ 1991.12.20 [117] 다만 규제의 기한이 지나고 불경기가 지속되자 다시 LTV를 올렸고 2021년 기준으로 90~110%까지 대출을 해 주고 있다. [118] 이는 곧 엄청난 오판이었음이 드러났고 나중에 아시아의 연쇄 IMF 사태나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등의 경제위기에서 정부의 빠른 대책이 필요하다는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119] 그래서 이 시기에 많은 수입차들이 한국, 중국, 동남아, 러시아, 인도 등지로 중고로 팔려나갔다. 현재도 구소련권에 가면 1980~90년대에 나온 우핸들 차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 시절에 팔려나간 차들이다. [120]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아이린 지구의 슬럼화가 진행되었다. [121] 당시 그의 아내는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했을 정도로 가정도 파탄났다. 〈욕망과 혼돈의 기록, 도쿄 1991〉 를 촬영할 당시 스즈키의 집이 나오는데 불과 촬영 8개월 전에도 자살시도를 했으며 아내가 머물고 있는 방의 문만 찍기만 할 뿐 스즈키가 방문을 두드려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우울증이 현재진행형임을 암시하고 있다. [122] 별빛의 왈츠, 북국의 봄 등으로 유명했던 엔카 가수. 향토적인 외모와 양 눈썹 사이의 커다란 검은 사마귀(현재는 없음)가 트레이드 마크였으며 노래 또한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분위기의 곡이 많았다. 당시 사람들은 '센()' 마사오가 아니라 '억()' 마사오라고 불렀고 전용 헬기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업을 했고 그를 풍자한 개그 프로그램 등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123] 본래 3천억엔에 달했지만 현재 은행으로의 공적 자금 투입으로 인해 최종적인 개인 부채액은 1,034억엔이 되었다. [124] 바로 위 유튜브 동영상의 주요 화자이며 썸네일에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고 '쉿' 제스쳐를 하는 노인이다. [125] 그가 진 100억엔의 빚을 다 갚기까지 소요될 기간을 직접 계산해서 보여줬는데 무려 8,333년이 걸릴 것이란 답이 나왔다. 한마디로 평생 못 갚는단 얘기. 당시 저 빚을 갚으라는 은행의 말에 코지마가 속으로 8,333년 동안 살지도 못하는데 그게 가능하냐고 어이없어 하는게 압권. [126] 오사카의 흑녀, 거품 부인(Bubble lady)이라는 이명이 있다. [127] 어머니는 독실한 밀교 신자였다. [128] 이는 실제로 문재인 정부 시절 부동산 상승 상황에서 일부 지방 부동산에서 발생했던 일이다. 과거에 비해 온라인 부동산 카페 등이 활성화되고 수많은 회원들이 있다 보니 어디 A가 유망하다 하는 말 하나에 회원들이 A를 집중 매수, 폭등하기도 했다. 지방 중,소도시 아파트들은 주변에 비교대상이 작고, 전체로도 매물 수가 많지 않아 한 단지에서 몇 개 매물만 집중 매수하면 당연 상승하며, 대도시의 투자자들이 단체로 와서 샀다는 소문이 돌면 원주민들도 '이거 사야되는거 아냐?' 해서 매수에 동참하게 되어 더 오른다. 부동산이라는게 사실상 정가가 존재하지 않는 데다가, 그래도 여전히 대도시보다 절대 가격이 저렴하다 보니 이게 거품인지도 알기 어려웠던 것. [129] 정확히는 2017년 3월 20일 한 방송에서 오노우에 누이의 행적을 추적했는데 이미 3년 전에 사망하였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사실 토리야마 아키라만 봐도 알 수 있듯 일본은 다테마에 때문에 조용히 장례식을 치른 후에야 사망 사실을 알리는 경우가 많지만, 사망 3년 후에야 사망 사실이 알려졌다는 것은 사실상 외부와 연락을 완전히 끊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30] 일본 굴지의 구인구직정보 회사인 리크루트의 자회사. 역시 부동산 사업을 하던 곳이다. [131] 당시 주식을 받았던 사람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NTT 회장,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회장 등 약 50명이었다. [132] 당시 총리를 대신해 현금을 받은 비서는 자살했다. [133] 다만 거품 붕괴 이후 바로 후유증이 나타난건 아니었고 1996년까지는 분위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위협론이 아직 힘을 얻던 시기였다. [134] 자세한 설명은 한국/경제, 일본/경제 문서로. [135] 한 명문대생이 취직하지 못한 것을 비관해서 전철역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일어나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린 적도 있다. [136] 실제로 빙하기 세대가 본격적으로 출산에 돌입할 시기가 출산율이 가장 낮은 시기이며 2003년에 한국에 이어 일본도 1년만에 초저출산 국가에 진입했다. [137] 대기업은 설명회 등의 비공식적인 리크루팅을 그해 1월부터 시작한다. [138] 물론 이것도 일본의 인구 감소 시작으로 이제는 과거의 일이라고 할 만큼 많이 달라졌다. 아직도 50년 이상 유지되는 중견기업 등은 이런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에서는 이직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고(특히 대기업의 경우에는 이직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다) 졸업 이후에 직장을 구하려는 사람도 많다. 현직 리크루팅 회사들도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하지 않는다면 '왜 바로 졸업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스토리가 충분하다면 면접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139] 대한민국의 중, 고등학교처럼 생각하면 편하다. 대한민국은 군대 때문에 대학 졸업시기가 제각각이라 다소 약하지만 병역의무가 없는 일본은 그렇지 않은 것. 입사담당자가 고등학교 1년 휴학한 학생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믿고 뽑을 수 있겠는가? [140] 물론 그 대신 일본은 다른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에 한국보다 비교적 관대한 편이긴 하다. 졸업 이후 예술을 하고 싶다거나 사회운동을 하고 싶어 취직을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고 나서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취업한 회사는 일반적인 이미지의 회사보다는 조금 크리에이티브한 일자리 혹은 그만큼 이직이 잦은 일자리다. 소위 말하는 '리크루트 수트' 입고 돌아다니는 회사원의 인생과는 많이 다른 것. [141] 다만 상술했다시피 이것도 대략 2010년대까지나 통용되던 상식이고 한국만큼은 아니더라도 화이트칼라 직종이라고 하더라도 이직이나 졸업 이후 취직도 많이 관대해졌다. 외자계 기업은 특히 그렇다. [142] 고용시장을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만 보더라도 고용률이 70%를 넘으며(평균 65% 수준. 그 이하도 수두룩하다) 비정규직 비중도 평균 수준이고(근데 이건 비정규직의 정의가 기관, 학자마다 차이가 크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청년 고용률도 정확히 평균. OECD/중위 가처분 소득 문서로. [143] 졸업 예정자 중 진학 등을 제외한 취업 희망자 대비 합격판정을 받은 비율 [144] 일본은 세계에서도 톱을 달리는 경직된 채용 시스템이 굴러가는 나라이기 때문에 특히 대졸자의 취업률을 다른 나라와 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반대로 한 번 입사했다가 1~2년 정도의 단기간에 퇴사한 자가 재취업을 하는 소위 '제2신졸' 바닥은 다른 나라에서 나름의 경력직 대접을 받는 것과 달리 근래 들어와 다소 개선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며 이직자에 대한 인식도 그다지 좋지 못하다. 다만 어쨌든 완전실업률을 포함한 일본의 고용 사정은 한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보다는 여전히 낫고 완전고용에 가깝다. 게다가 일본 고등학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은 2018년 기준 54.67%로 한국(69.7%)에 비해 낮으며 인구 변화 요인도 있기에 대졸자의 취업내정률은 아직까지 90% 이상으로 높은 편이다. [145] 한국은 그나마 IMF를 겪고 다시 옛날만큼은 아니더라도 꾸준하게 성장세를 이어 왔기에 그럴 수도 있다.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 당시 구제금융을 받아야 할 정도로 충격이 컸지만 보통 구제금융을 받는 나라는 진짜 돈 자체가 없어서 받는 반면 한국은 돈은 있는데 외화가 없었기에 받아야 했던 일종의 흑자도산에 가깝다. 그래서 극복이 비교적 쉬웠다. 적어도 일본처럼 마이너스 성장, 저성장은 많이 없었다. 무엇보다 IMF로 고생한 건 기성세대도 마찬가지였고 외환위기의 원인이 과소비에 있다는 남탓에 가까운 주장과는 달리 일반 대다수 국민은 외환위기에 책임이 없다. [146] 노르웨이는 거품이 몇 년 일찍 꺼져 저 두 국가만큼 심한 위기를 겪지는 않았다. 특히 핀란드는 경제교류가 많았던 소련 러시아로 바뀌면서 10년간 막장 상태에 접어드는 바람에 핀란드 경제도 불황을 겪었다. 여기에 핀란드는 1980년대 카지노 경제로 대표되는 투기가 만연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147] 정말 억지로 따지면 1995년 극초반까지는 버블 시기와 비슷한 사회 분위기를 유지했다. 물론 사회 분위기만 버블과 유사했지 돈을 쏟아부어 고품질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지는 않았다. [148] 그나마 GS 미카미, 세일러문은 이런 것은 거의 없고 배경이나 분위기는 버블시대에 가까웠다. [149] 그래서 도라에몽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같은 것도 돈을 꽤 많이 써서 만든다. [150] 실제로 그는 트위터에서 돈 자랑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151] 거기다 보통 제작사 측에서는 제작비를 잘 공개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제작비를 쓰는 제작사는 파산 리스크가 커서 투자자가 붙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많이 들여서 홍보로 자랑할 수 있는 작품이나, 아주 적게 써서 "나 이 금액으로 이런 애니를 만들었소." 라고 자랑할 수 있는 작품 정도나 말을 한다. 작화 매수를 많이 쓴 애니메이션은 티가 나므로 그걸로 유추한다거나, 제작 측의 작화 매수 사용량 언급을 통해 대략 유추할 수는 있다. 다만 이것도 줄이는 연출법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커뮤니티나 유튜브에서 근거 자료 없이 제작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애니메이션에 대해 잘 모르는데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이다. [152] 이래서 버블 시대 애니로 꼽히던 톱을 노려라!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직접 "나는 돈을 많이 쓰고 싶었는데 스폰서가 돈을 많이 안 줘서 저예산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라고 하기도 하고,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퍼펙트 블루는 공개된 제작비가 터무니 없이 저액이다. 이렇게 한국에서 알려진 것과 업계의 진실이 전혀 다른 것이 많다. [153] 업계의 평균 제작비는 통계가 나온다. 이 항목에서 "오히려 1980년대보다 나중에 나온 작품의 제작비가 더 높다고 한 건 그것이 근거. [154] 한국에서는 애니메이션 회사를 착취하는 시스템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부작용의 일부이고 원래는 리스크를 줄이면서 투자금액을 올리기 위해 도입한 시스템이다. [155]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지고 현재 상황을 반영하여 연재하기 시작했다. [156] 여기서는 이 시대를 기억하는 쇼와 세대(어른들)과 이 시대를 모르는 헤이세이 세대(아이들)의 세대차이를 극복한다. 또한 최종보스인 은 일본을 이 시대로 되돌리고자 하는 인물이다. [157] 원작은 미국계 석유회사다. [158] 진주만 공습이 아닌 태평양 전쟁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주만 공습에서는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159] 정확히는 오사카. [160] 그러나 헐리우드 진출작이었던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투병 중이었던 방광암으로 사망하면서 유작이 되고 말았다. [161] 전자는 초라한 지금과 달리 관객이 얼마나 됐든 무지막한 예산을 들이붓을 수 있었던 환경, 후자는 돈을 펑펑 쓰는 등 잘 나가던 은행원 시절. [162] 물장사의 캬바걸 에피소드에서도 마지마 고로가 접객 연습을 할 때 선택지에 따라 달라지는 대사 중 앞으로 일본이 최고의 나라가 될 거라는 대사와 어떻게 단물이 나오는지는 모르고 얻어먹기만 하니 그게 바닥나면 가라앉을 거란 대사도 나온다. [163] 현재 물가 기준으로 보면 대충 21억 엔 정도. [164] 웹 사이트에는 대체로 2010년대 중반까지의 자료밖에 없다 [165] 다만 1980년대 후반 절정을 이루었던 자산시장의 거품은 1990년대 초반 1기 신도시 건설로 땜빵했기 때문에 일본처럼 대규모 버블이 일어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