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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11:35:32

일본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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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창기 일본군2. 전성기, 그러나 점점 드러나는 문제점들
2.1. 러일전쟁2.2. 칭다오의 교훈
3. 일본군의 전쟁 목적4. 군부의 폭주5. 전후의 일본군

1. 초창기 일본군

근대 일본군의 사상적 배경은 조슈 번의 오무라 마스지로(大村 益次郎)에서 나왔다. 네덜란드에서 유학하여 근대적 체제를 공부한 그는 신분의 차이에 상관없이 장교를 양성하는 체제와, 프랑스를 본뜬 육군, 영국을 본뜬 해군을 기초로 한 국민개병제를 일본군의 모델로 삼았다. 그가 조슈번의 장교로 취임하면서 그가 지휘한 군대가 무진전쟁에서 도쿠가와 막부군을 격파하면서 오무라의 구상이 옳음을 증명하였다.

물론 조슈 번군의 주력은 여전히 아시가루, 장교는 상급무사들이 차지했다. 농민들은 구식의 조총을 가지고 향토방위군 정도의 임무만 맡았다. 신분에 상관없이 편성된 기병대(奇兵隊)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원래부터 무사와 농민은 전투능력에 있어서 천지차이라는 인식을 가진 때에 이런 결과를 보인 것 자체가 혁신이었다. 덕분에 오무라는 사무라이의 특권을 박탈하고 전국민을 무장시키는 사상에 반감을 가진 초슈번 무사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지만 그의 동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다카요시 등은 그의 구상을 받아들여 일본군을 창설하는 데 힘을 바친다.

에도 막부가 쓰러진 1868년 말, 천황의 도쿄 행차를 호위하기 위해 각 번에서 차출했던 어친병(御親兵)을 1870년에 상설편제로 전환하였다. 이는 각 번들이 독자적으로 보유한 상비군을 해체하고 천황 직속의 무력을 조직하려는 정책이었고 총 병력은 8,000명에 달했다. 21세기의 기준으로 보면 소수지만 당시 일본의 번들은 독자적으로 이만한 병력을 원정에 내보낼 능력이 없었다.

서양식의 군복을 입고 막부에게 넘겨받은 최신형 샤스포 소총을 장비하였던 어친병의 무력을 기반으로 메이지 신정부는 폐번치현을 단행, 봉건제의 잔재였던 번을 해산시켜 현으로 만들어 중앙집권화시켰으며, 각 번들이 보유하던 소총 화포들이 중앙 정부로 넘어온다.

내전이 막 끝난 상태에서 다수의 신식무기와 훈련된 병력이 각 번의 손 안에 있었지만, 의외로 순순히 폐번치현이 이루어진 데에는 어친병의 존재 말고도 각 번들의 재정 상태가 전쟁과 흉작으로 크게 나빠진 점도 컸다. 특히 구 오우에쓰열번동맹 소속 번들은 신정부에 막대한 배상금을 바쳐야 했으므로 번정부의 운영이 힘들었다. 그래서 폐번치현 이전에 이미 신정부에 권한을 양도하는 번도 소수 있었다. 다만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츠마번의 시마즈 히사미츠만큼은 이 폐번치현에 크게 반발했으며 매일 불꽃놀이를 하는 형태로 항의를 표시했지만 끝내 굴복한다.

1871년에는 진대병(鎭臺兵)을 창설한다. 진대병은 이름 그대로 국내의 내란에 대비한 군대로 요새를 기반으로 주둔하며 수비 위주의 전략을 구사하는 프랑스식 사단 편제를 가졌으며 구 무사들이 생활고로 점차 여론이 나빠지던 시점에서 국체 수호를 위한 진압무력의 성격이 컸다. 초창기에는 도쿄, 오사카, 히로시마, 센다이의 4개 진대를 편제했고 징병령 발효 이후로는 병력이 늘어나게 된다. 진대병 창설에 따라 1872년 5월에 어친병은 폐지하고 근위사단으로 개편한다.

1872년 11월에는 1927년부터 병역법으로 바뀐 징병령을 발효하면서 무사 위주로 돌아가던 국군이 평민 병사로 충원되고, 서구 유럽의 전례를 따라 천황을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육군대장에 임명하여 근대적 군대의 체제를 갖춘다. 뒤이어 1873년에는 각 번에서 생활하던 무사들에게 신정부에서 주던 월급을 정지하는 질록 처분을 단행, 동원의무에서 해제시킨다.

당시 일본 육군 대장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구 무사들이 평민보다 전투력에서 우월하다는 점을 들어 무사들 중심으로 군대를 꾸려나가는 이른바 강병(强兵)체제를 주장했지만 메이지 6년의 정변으로 사츠마번 출신이 대거 공직을 사퇴, 낙향하면서 국민개병제가 정착한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초슈번과 달리 사츠마번은 전군이 사무라이었고 이들이 큰 활약을 했기 때문에 평민의 자질을 무시하던 정서를 가졌던 것이 있었다. 이후 분노한 무사들로 인한 사족반란이 빈발했다. 진대병 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여 대부분의 반란은 진압당했지만 최대의 반란인 서남전쟁에서는 고전했다. 사츠마군의 발도 돌격에 정부군이 도주하는 추태를 여러 번 보였지만 결국 화력에서 앞서는 정부군이 승리하여 근대식 일본 국군의 체제가 비로소 완전히 정착한다.

농민을 비롯한 평민들 역시 처음에는 국민개병제를 환영하지 않았다. 1873년부터 1874년까지 관청이나 징병소를 습격하는 등의 폭동이 기록된 바로만 16회 일어었으며 대략 10만여 명의 인원이 이에 연루되어 처벌되었다.[1]

초창기에는 프랑스식 육군을 지향했지만 1870년에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참패하면서 프로이센군의 군사제도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교관으로 맥켈을 초청하고 프로이센으로 수뇌부가 유학을 떠나면서 일본육군은 1886년에는 완전히 독일식 체제로 개편한 반면 해군은 당시 대영제국이자 해군 강국이었던 영국으로부터 교관을 초빙하여 도쿄 츠키지에 해군사관학교를 만든 뒤 육성하다가 히로시마현 에타지마시 에타지마섬으로 해군병학교를 창설하여 그쪽에서 배우게 된다. 이렇게 젊고 유망한 청년들을 모아 해외초빙 교관으로부터 철저하게 서양식 전술을 업데이트하고 세금을 철저히 거두고 허리띠를 졸라 영국으로부터 최신식 함선 미카사 등을 구입하거나 장비 최신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힘을 쌓으면서 청일전쟁에 즈음해서는 내란의 우려가 사라지고 식민지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대외원정의 필요성이 늘면서 구 진대병을 독일식 사단편제로 바꾼다.

청일전쟁때는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위용을 드러냈다. 이미 청나라과의 일전을 대비하고 엄청난 양의 예산을 쏟아부은 일본군은 청나라가 막대한 국고를 이용해 여러나라에서 함선을 사서 모은 최신식이면서 화력도 뛰어난 북양함대를 만들었으나 엉망진창인 지휘체계가 이어질 정도로 지지부진한 개혁과 이로인한 지리멸렬한 전술로 인해 청군은 북양함대를 전부 잃어버리는 참패를 당하고 일본이 사실상 조선반도와 만주 일부를 차지하면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시아 제국이 태클을 걸었다. 패배한 중국은 요동반도를 돌려받기 위해 러시아에게 SOS를 쳤고 러시아가 으름장을 놓고 독일, 프랑스도 러시아에 동조하며 포기하라는 압박에 결국 요동반도를 포기한다. 그런데 청나라가 일본의 행보를 보고 러시아 제국에게 요동반도를 줘 아예 주둔시켜 완충지대로 만들기로 하고 러시아 제국은 부동항을 원했기에 수락하여 일대를 요새로 만들고 함대를 주둔시킨다. 당연히 일본 제국은 이런 러시아 행보가 달가울리가 없었으나 일단 참고 천천히 조선반도를 먹으려 한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비롯한 조선의 국왕 고종도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밀착하기 시작하고 러시아 제국도 조선을 잘 구슬리기만 하면 부동항을 대거 얻을수 있었기에 조선반도를 완전히 먹으려던 일본에게 사사건건 방해하기 시작한다. 일본 제국의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는 타협점을 찾으려 했으나 러시아 제국은 이를 무시하였고 되려 조선반도 노릴 생각 말라는 답변만 날라온다.

결국 일본 제국은 비협조적인 조선을 일단 손보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이후 조선 왕실에 개입하여 친일파로 가득 채우기 시작, 그렇게 조선을 훌륭한 보급기지 역할로 하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후방이 확보되자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결심한 일본 제국은 선전포고 없이 뤼순을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크나큰 피해를 입는 등의 고전 끝에 뤼순을 점령하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장거리 원정을 온 러시아 최강함대 발트해 함대를 맞이한다. 그렇게 하늘은 운을 일본에게 몰아줬는지 러시아 제국 내부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내부문제로 러일전쟁에 신경쓰기도 힘들었으며 발트해함대 접근을 미리 알고 포진한 쓰시마 해전에서는 T자의 ─선에 아군 함대를, │선에 적 함대를 위치시키는 전술로 화력을 집중시키며 러시아 발트 함대를 고기밥으로 만들면서 러일전쟁에서 세계의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규모의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위 일본군의 전술은, 보통 군함의 화력을 가장 많이 집중할 수 있는 방향이 측면이므로, 아군은 적 함대 선두에 전함대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지만, 적함은 선도함 한 척의 그나마도 절반의 화력만이 유효하게 만든다. 이 전술은 전열함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필살 전술이지만 각 함간 통신이 자유롭지 못하고 유효사거리가 짧았던 근대에는 완벽하게 성사시키기 어려운 전술이라 성공사례가 적었다.

이 쓰시마 해전은 함포 사거리의 중요성이 처음으로 드러난 해전이었으며 이 때의 전훈을 받아들인 결과로 자잘한 중소구경의 무장을 생략하고 대구경 주포에 올인한 드레드노트 전함이 등장하면서 거함거포주의 시대가 열린다. 이러한 일본군의 상승세는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지속되었다.

2. 전성기, 그러나 점점 드러나는 문제점들

일본 제국의 성장세에 세계 각국은 일본군의 높은 사기와 러일전쟁에서 보여준 신사적인 포로 대우로 보여준 태도, 절도 있는 자세를 높이 평가했고 러일전쟁 중 조선인들은 청군, 러시아군과 달리 민간에는 피해를 일체 안 주며 꼬박꼬박 대가를 내 식량을 사고 노역을 부리는 일본군에게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승기가 굳어진 러일전쟁 말기부터는 강제적인 식량 공출과 무임금 노역 강제동원을 저질러 본인들이 결코 신사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일본군을 높게 평가하던 세계 각국은 정작 203고지 전투에서 나타난 근성론에 의해 경직되어 있고 융통성 없는 사고 방식에 찌든 일본군의 추악한 실상에는 전혀 주목하지 못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청일전쟁 이전인 1873년의 대만 원정에서부터 일찍이 나타난 상태였다. 특히 이때 일본군은 정부의 방침을 무시하고 육군사령관이 독단으로 파병을 했고 청일전쟁 중 평양전투 때에는 이틀치 소총 탄약만 남은 상황인데도 추가 보급을 안 기다리고 닥치고 총검 돌격(!)을 해댔다. 문제는 그렇게 멍청하고 위험하고 무모한 짓을 했는데도 청군이 일본군보다도 워낙 더 형편없어서 이겼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까지는 근성론 드립이 그렇게 뒤떨어졌다 보기는 어렵다. 먼 훗날 1차대전 당시만 해도 당시 육군 최선진국 중 하나인 프랑스군이나 다른 나라들의 군대도 엘랑 비탈 등 비슷한 것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2.1. 러일전쟁

이런 일본의 승승장구는 할힌골 전투 혹은 시베리아 출병에서 소련에게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개별 전투로 따지면 203고지 전투가 일본군의 최초 삽질이긴 하지만, 러일전쟁은 이긴 전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군의 승리는 결국 일본군이 실패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러일전쟁은 러시아 견제를 위한 영국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청나라는 몰라도 러시아와 싸우기란 무리였다. 게다가 러일전쟁은 영국과 미국 양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 일본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싸우게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2] 실제로 종전 당시 러시아는 육군이든 해군이든 추가적인 병력충원이 가능했던 반면 일본은 겉으로는 크게 이겼지만 그 사이의 피해로 전력이 극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종전 협상 당시 러시아 쪽은 피의 일요일로 더 전쟁을 못할 상황이었음에도 강경한 태도로 나왔고, 일본 정부는 이겼다고 생각해서 전쟁 배상금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의 상태를 알고는 전쟁배상금을 포기하고 서둘러 종전을 선언했다. 당시 전비에 따른 부채는 한동안 식민지인 조선에도 돈이 없어 투자를 못할 정도로 확실히 문제였지만 이른바 아시안 게임 들어서야 다 갚을 정도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1차대전으로 대박이 터진 덕에 일본은 1차대전 전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의 일본은 이제 갓 열강으로 등극할락 말락한 상태였고, 러시아는 다소 나사빠진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건 영국과도 전세계적인 팽창경쟁을 벌일 정도 강국 대접을 받는 나라기는 했다. 오히려 그런 나라를 상대로 웬 동아시아의 듣보잡 국가가 나름대로 외교적, 정치적 머리를 굴려가면서 이긴 것은 어쨋건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승리로 일제강점기를 겪어야 하는 한국에게 좋은 건 아니었지만.

2.2. 칭다오의 교훈

극동의 동맹: 1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

그래서 일본군도 이때까지는 정상적인 면은 있어서 병신짓을 고치려는 노력을 어떻게든 하기는 했다. 대표적으로 1차 세계대전 때 칭다오 전투를 들 수 있다. 1914년 9월 벌어진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철저히 포병 위주의 전투를 벌인다. 즉, 당대의 최신 전술을 시험하는 공간으로 칭다오를 타깃으로 잡은 것이다.[3] 28센티 유탄포, 45년식 24센티 유탄포 같은 대구경의 포를 통한 전투를 철저히 준비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일본군은 만족했고, 적이었던 독일군도 "일본의 장점은 대포 사격이고 단점은 보병 소총 사격이다"라고 평가했다. 칭다오 전투를 통해 일본군은 미래전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현대전은 물량전, 과학전, 소모전이기 때문에 '많이 가진 국가가 닥치고 이긴다!'라는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 일본은 아무리 봐도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를 놓고 일본군은 두 개의 큰 계파로 나뉘어진다. 오바타 도시로로 대표되는 황도파는 "정신력으로 물질의 부족함을 극복하면 된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생각은 있어서 전제로 약한 놈들 상대로만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교리에 쓰면 쪽팔리니(...) '교리에는 정신력으로 포위 섬멸하면 된다!'만 적었다. 특히 탄넨베르크 전투를 보고 뽕을 맞은 일본군은 모든 전투를 탄넨베르크처럼 싸우면 된다고 단단히 착각했다. 물론 만만한 상대에게만! 특히 오바타는 힘을 가진 국가와는 싸우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통제파는 나라 힘을 길러서 일본 자체가 가진 국가가 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럴 경우 국력 기르기에 들인 시간만큼 나머지 국가들은 더더욱 힘을 가진 국가가 되기 때문에 결국 쓸모가 없고 외국 좋은 일만 시켜준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시와라 간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통제파의 해답은 ' 미국을 공격한다!'였다. 물론 미친놈 소리 들었지만, 이시와라 간지의 원래 주장은 "1966년까지 동서방간의 세계최종전쟁에서 이길 힘을 기르자"였다.

하지만 1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 월가에서 주가 대폭락으로 발생한 경제대공황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질 무렵 군부가 이때야 말로 강한 지도력이 필요하다며 폭주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주장은 한순간에 어그러지고 만다. 즉, 황도파의 교리의 바탕이던 강한 놈과는 싸우지 않는다를 깡그리 무시하고 그냥 우리를 방해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정신력만으로 극복하며 공격한다로 나아갔다. 그렇다고 통제파 제안대로 미국과 싸울만큼 힘을 기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방법론은 황도파가 면피용으로 적어놓은 대로 정신력으로 극복이 되었다.

3. 일본군의 전쟁 목적

일본군의 전쟁 목적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주창한 주권선이익선 개념에 따른다. 주권선은 절대로 침해당해서는 안 되는 주권영역, 즉 국경과 같은 개념이고, 이익선은 일본국의 이익을 위해 경제·군사적 동맹 또는 우방으로써 일본의 이익을 위해 유지할 권역이다. 청일전쟁 이전의 일본은 제2의 아시아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할 여지가 큰 청나라에 대항해 주권선으로 일본 본토를, 이익선으로 한반도를 설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독립 운운을 대외적 프로파간다용으로 활용했다. 물론 이렇게 한 것은 일제 식민지 시기만 상기해도 선의가 아니라 볼 수 있다.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주권선은 한반도와 대만, 이익선은 만주 및 중국으로 확장했다. 주권선의 수호는 이익선의 유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익선의 유지를 위해서는 주변 강국을 외교 및 전쟁으로 굴복시켜 이익선의 침해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에 따라 만주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워 통치했고, 중국을 침공했으며 종국에는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바 끝내 1945년까지의 일본의 표면적인 전쟁행동은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의 유지 및 확장에 따랐다. 청나라 러시아와 같은 일본 입장에서의 외세로부터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에 의거하여 국가를 유지하려면 군비를 증강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군대가 지나칠 정도로 비대해져 나중에는 아예 군부라는 정치 세력이 되어 정부를 대놓고 무시하며 위협할 수준에 올랐다는 건데, 이는 일본 군국주의의 효시가 되었다.

4. 군부의 폭주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대공황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니 일본 정계가 민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하자 일본 군부는 수없이 정치 테러를 벌였다. 당장 이 당시 일본은 한국과 대만 이외에 식민지는 거의 없는 상태였다. 거기에다 탄압과 을사늑약에 의한 강제합병이었던지라 조선도 역시 그들에게 절대로 나긋나긋하게 따를 상대가 아니었으며, 이때가 문화통치 시기로 인해 많은 친일파가 만들어졌어도 대다수는 일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과 대만은 보급기지로 쓰기 위해 정비를 하는 등 공사가 많았기에 재정적으로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 그렇게 일본은 영국, 프랑스처럼 식민지에 강매를 하는 블록경제가 불가능한 건 물론 두 식민지를 군사기지로 써먹기 위한 투자비용은 비용대로 나가니 결국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기에 이것도 다 군부가 저지른 짓이었다.

이는 비단 정치인 뿐만 아니라 군인도 결코 예외가 아니라서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도 테러로 올 암살 우려 때문에 그를 아낀 상부에서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바다로 잽싸게 피신시켰을 정도. 벌써부터 시망의 징조가 보이지 않는가?

나중에는 군부가 이것도 모자라 쿠데타를 기도하는 등 정권 장악 의도를 드러냈고 끝내 5.15 사건 2.26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2.26 사건은 1936년 2월 26일 22명의 천황 추종자 황도파의 전현직 청년 장교들이 1,400여 명의 사병을 이끌고 '국가의 전면적 개조와 군사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일으킨 쿠데타다. 그들은 내각을 습격해 전임 총리 두 명,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과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궁내부대신)[4], 와타나베 교육총감 등을 살해하고 수상관저와 국회의사당, 육군성을 포위했으나, 사흘 뒤의 진압으로 미수에 그쳤다. 끝내 황도파는 박살나고 총리대신을 지지하는 통제파가 군부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를 계기로 일본 군부는 그들에게 호의적인 몇몇 민간인 정치인, 관료들과 짜고서 아예 정부를 장악하고 의회를 무력화시켜[5] 본격적인 군부 독재에 돌입했다. 그리고선 그때까지도 어렵던 일본의 경제 사정을 " 식민지를 늘려 수탈하자!"라는 방침으로 풀려 한다. 처음에는 중국 침공으로 풀려고 했고 중국 영토의 1/3~1/2를 먹는데 성공하나 거대한 시장인 중화민국을 잃기 싫었던 미국은 을 시작으로 제재를 먹였으나 대체로 소련을 통해 철 수입을 하며 대처하고 계속 침공을 진행했으나 미국이 "너희들 당장 만주로 후퇴하지 않으면 석유 더 이상 안 팔 줄 알아!"라고 통보하며 의존율이 가장 높던 석유 등의 금수 조치를 취한다. 그렇게 군장비를 운용하기 위해 가장 필요하고 여러 원료로도 쓰이는 석유는 당시 이들 품목 소모량의 80~90%를 미국 수입에 기대던 일본은 한순간에 궁지에 몰렸다.[6]

당연히 중국 전역에 들인 그 거액의 돈을 고려하면 석유 하나 때문에 후퇴하기에는 일본만 손해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말을 들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일본 육해군은 머리를 싸매다가 나온게 이걸 타파한답시고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맛깔나게 쳐서 전멸시킨 뒤 필리핀 미군을 없애고 인도네시아 방면과 브루나이 방면의 원유지대를 차지한 뒤 전의를 상실한 미국과 재빨리 강화협상을 맺자!"라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해결안을 내놓으며 진주만 공습 결정을 내린다. 진주만 공습 이후 계획대로 남방작전을 펼치며 필리핀 동남아시아로 쳐들어갔고[7] 이로 인해 일본은 남방 작전, 진주만 공습 등을 통해 나치독일과 맞서던 영국 미국 등을 적으로 돌리는 정치적 무리수를 범하게 되었고, 당연히 일본은 나치독일과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와 동맹 조약을 맺으며 추축국 일원으로 정식 가입하는 악수를 둔다.

그래도 동남아 침략 행위를 점령지와 국내에서도 나름대로 포장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 일본은 "서양 열강의 식민지배에 맞서 벗어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국가들의 연합 대동아 공영권을 결성해야 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홍보했으나, 일본이 옛날에 그렇게나 줄창 외쳐댔던 탈아입구 등에 비추어 볼 때 그걸 곧이 곧대로 믿고 반길 사람이 얼마나 있을 지가 의문이다. 초반에는 그래도 나름 홍보가 먹혀서 동남아 식민지 민중들은 일본군을 초반에는 크게 환영했으나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내며 자원만 강탈해가는 모습에 대실망하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새로 점령한 국가는 치안을 비롯해 내정들을 전부 현지 사람에게 맡겼기에 2차대전 이후 이들은 네덜란드처럼 다시 주인 행세 하기 위해 돌아온 식민지 군대랑 맞서 싸울 수가 있어서 전후 우호적인 일부 여론도 생겨나기도 하였다.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의 번드르르한 포장 뒤에서 뭘 꾸몄는지에 대한 증거로 쇼와사라는 책에 기재돼 있는데, 쇼와 18년 (1943년) 5월 31일의 어전회의에서 결정한 '대동아정략지도대강(大東亜政略指導大綱)'이 있다. 당시에는 군부와 정부에서 꼭꼭 숨겨서 전후에야 드러난 이 계획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말레이, 수마트라, 자바섬, 셀레베스는 대일본제국의 영토로 만들어 중요 자원의 공급원으로 개발하고 민심을 파악하는 데 주목한다. (중략)... 이들 지역을 제국 영토로 삼는 방침은 당분간 공표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죄다 식민지로 삼겠다는 소리다.

심지어 이것은 어전회의, 그러니까 천황의 면전에서 결정한 사안이다. 이것은 "흑흑 우리 천황께서는 나쁜 군부놈들 거짓말에 속아서 그런거임. 징징징" 같은 변명이 얼마나 되도 않는 헛소리인지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거다. 그리고 쇼와 18년은 1943년인데, 이는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에 이어 비스마르크해 해전에서도 탈탈 털리고도 두 달된 시점에서 저딴 망상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얼마나 황당했는지 쇼와사의 저자는 이러한 계획을 너무나 터무니없는 망상이라고 엄청난 비판을 했을 정도다.

그렇다고 식민지를 착취해서 자국민을 살찌우는데 썼냐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운 좋게 식민지로 이주해서 대박친 사람들이야 있겠지만, 정작 대다수 자국민도 그다지 대접이 썩 좋은 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일본군한테 있어서 식민지는 그저 전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당시 일본의 1인당 GDP는 중국보다야 나았지만 실제론 이탈리아만도 못한 상황이었다. 사회적으로 볼 경우 당장 징병검사에 탈락해 군복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 주위 사람들은 비황국신민이자 비국민, 즉 "너는 일본인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만 봐도 군국주의의 폐해는 상당히 쩔어줬다.

이건 굳이 도조 히데키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20세기 초, 못해도 30년대부터 나타나거나 심각해진 병폐다. 사실 GDP 대비 국방비 지출, 역대 총리대신 중 군 출신 인사, 헌법에 따른 부실한 문민통제 등만 보더라도 일본은 이미 이 시기부터 그냥 군국주의 국가였다. 이들이 보기에는 지적장애가 있어 징병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은 화가 야마시타 기요시도 비황국신민이라는 것이다. 물론 식민지인과 달리 자국민들이 이렇게 시달리는 건 어린이, 판단력이 제로인 정신장애인, 소수의 반전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동정의 여지가 없다. 5.15 사건에서도 나타나듯 일본 국민들은 대체로 그 침략 전쟁에 환호하거나 그 주도 집단인 우익세력에 그 정도 차이는 제하더라도 어쨋건 동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본 제국군은 우월한 기술력과 가용 인력이 더 많은 미국 상대로 당연히 맞붙는다는 건 애초에 괭이 목에 방울 달기였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전황이 불리해져간다. 물론 일본 제국군도 과달카날까지만 해도 미국도 곰리 제독처럼 실전에서는 무능한 장군이 있었기에 비록 졸전이 있었으나 전투 경험이 갈수록 쌓여가면서 일본군을 압도해갔고 일본군 내부도 문제이나 여러 문제점으로 인해 미국에게 승전하기에는 무리였다. 물론 미군을 농락시킨 기무라 마사토미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등 유능한 장교들은 일본군의 병폐로 인해 진급을 못하거나 근위대에 박혀있다 보니 전황이 미국으로 완전히 기운 상황에야 간신히 등판하게 된다. 한편 일본 내부에서는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국에게 어떻게든 피해를 입히는 소모전을 하면서도 미국에게 접근해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말 배짱 넘치는 조건부 항복[8]을 내밀며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였으나, 미국이 들을 리가 만무했고 결국 핵폭탄을 2방이나 맞고 나서 옥음방송과 함께 미국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에서 비로소 항복 서명을 한다.

심지어 이것은 종전 때까지 계속되는데, 조선을 떠나며란 책을 읽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만주 작전으로 소련군 북한에 입성하자 당장 군인 가족들 외에는 모두 북한땅에 남겨둔 것이라든지[9], 귀향민들에 대한 재산 압류라든지, 잉여 집단으로 취급한 것이라든지...
하여간 말이 많다. 심지어 한 귀향 일본인은 인터뷰에서 본국민들이 자신들을 향해 "식민지에서 그렇게 착취해먹고 살았으니 당연히 받는 인과응보지 뭐."라고 하는 말들이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을 정도. 히키아게샤 항목 참조.

그렇게 일본 제국은 도조 히데키가 수상일 때 쯤에는 완벽한 군국주의 국가였다. 도조 이전에는 군대와 정부가 어느 정도의 균형과 견제를 이루었지만, 도조가 총리가 된 이후 말 그대로 정부가 군대에 먹혀버린 것으로써 군대가 모든 것을 관리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도조 히데키는 일본군을 이웃나라들을 침략하여 물자를 빼앗겠다는 강도짓을 하겠다는데 이용하겠다고 나섰고, 이는 태평양의 아시아 국가들에게 커다란 재앙이 되었다.

5. 전후의 일본군

5.1. 패전 이후

천황의 항복선언 이후 8월 28일부터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소련 제외) 병력들은 일본 본토로 진주하기 시작했고 이후 연말까지 50만명 이상의 미군이 주둔하게되고 일본 통치를 위해 맥아더 원수를 수장으로 하는 GHQ가 신설되어 1952년까지 실질적으로 일본 통치를 하게 된다. 그리고 GHQ의 명령으로 구 일본군은 무장해제 및 해체되었고 기존의 일본제국군의 육군성과 해군성은 각각 제1,제2 복원성이란 조직으로 축소개편되어 해외 주둔 일본군의 귀국과 그들의 무장해제를 GHQ의 감독하에 수행한다.

한편 만주일대를 관할하던 관동군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 참전한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150만이라는 규모에 T-34를 앞세운 기갑사단을 투입해 일본 관동군을 섬멸하거나 투항시켰고 투항한 일본군 포로들과 현지에서 잡힌 일본인 남성들 상당수는 전쟁으로 인해 여초이던 소련의 재건을 위해 수십만명이 포로로 끌려가 시베리아에서 노동형을 당하면서 6만명 이상이 추위와 굶주림 높은 강도의 노동으로 사망한다. 일본군 패잔병을 참고할 것. 그 밖에 일본 열도에 남은 좌관(영관)급 이하의 장교들은 1952년 이후 자위대에 입대가 가능해지면서 일부가 자위대로 흡수되었다.

5.2. 일본군 패잔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도 태평양 전선에 갔던 일본군들의 일부는 일본의 항복을 부정하거나 통신 두절로 일본의 패망을 통지받지 못하거나 하는 등의 까닭에 종전 뒤에도 계속 무장한 상태로 1970년대 중반까지 활동했다. 군대인지 산적떼인지 구분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물론 현지 군대나 경찰들과의 총격전 끝에 많은 수가 죽거나 항복하였고, 일부는 대동아공영권을 이루겠답시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도 참여했다.

김형배의 만화 황색탄환에서도 짤막하게 보이는데, 베트콩들의 전술이 구 일본군 전술과 비슷하다. 베트콩들을 훈련시키는 일본군 중령이 있다는 등 일본인 기자의 입을 빌어서 언급한다. 다만 이 때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참전하기 시작한 시기라... 또한 일본에서 하리마오라는 일반 마인어 명사를 널리 알린 데 영향을 끼쳤다고 추정받는 옛 일본 드라마 쾌걸 하리마오도 전후 동남아 독립투쟁에 숟가락 얹으려는 일본군 잔당들에서 딴 듯하다.

사실 통신 두절로 패망을 통보받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건 핑계일 뿐이고, 현실적으로는 일본이 이미 패망했다는 사실을 몇 개월 정도라면 모를까, 몇 년씩이나 모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철저하게 세뇌당한 상태라 도저히 패망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일본군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이미 끝나버린 전쟁에 낭비하는 얼간이 짓을 벌였을 뿐이다.

악질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세뇌된 상태라 차마 항복은 못하고 그저 숨어다니기만 한 일본군도 있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육군 오장 요코이 쇼이치(橫井庄一). 1972년 괌에서 발견될 당시 그는 무기를 제대로 손질하지 않아 여기저기 녹슬어 있는 등 전형적인 패잔병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패전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은 채 항복을 거부했지만, 동굴에서 지내면서 타인과의 접촉을 거부하는 형태로 숨는 등 오노다와 달리 최소한 사람으로써 지킬 선은 남겨서 그 때문에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10] 그 뒤 일반인 신분으로 살아가다가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도 많은 2차대전 종전 이후 일본군 생존자들이 잊을 만하면 발견되고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상당수가 필리핀 반군과 함께 활동하면서 그대로 정착한 경우도 많으며 혼란할 때 그냥 귀화해버린 이들도 있는 듯 하다.

5.2.1. 오노다 히로오

가장 유명한 구 일본군 잔당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29년 만인 1974년 필리핀에서 생환한 육군 소위 오노다 히로오다. 이 인간은 패전 소식을 들었는데도 패전을 부인하고 종전 뒤에도 계속 숨어 필리핀에서 자신만의 전쟁을 수행하다가, 이 사실을 알고 일본 정부에 이끌려 온 전 직속 상관의 투항명령서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투항했다. 이 사람은 숨어 지내는 동안 생존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주변 마을 사람들을 여럿 살해했지만 일본의 극우들은 이를 사소한 문제라며 무시해 버리고 " 충성스러운 일본군의 모습"이라고 미화만 했다.

참고로 이 양반은 음식을 훔치다 들키면 적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목격자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며[11] 이는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까지 저지른 짓이다. 필리핀의 일본차관 유입이 아니었으면 살인죄로 당연히 사형이나 최소 무기징역이 기다릴 정도의 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이 인간의 관점에서는 지금도 전쟁 중이었으니 그 관점에 동의한다면 필리핀군을 출동시켜서 그대로 사살해 버려도 무방하다. 실제로 필리핀군은 오노다 히로오를 사살하기 위해 수 차례 토벌군을 파견했고, 처음에 3명이서 활동하던 오노다의 부대는 2명이 차례로 죽어 마지막에는 그만 남았다. 더구나 아무리 전쟁중이라도 민간인에 대한 약탈이나 살인이 범죄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전쟁중이니 상대국 민간인을 죽여도 괜찮다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군식 사고이다.

참고로 오노다 히로오는 이후 전후 일본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며 브라질로 건너갔다가 일본에 돌아왔고 이후에도 일본 극우 세력과 밀접히 교류했다. 물론 그와중에도 간간히 인터뷰나 매체등에서 자위대를 까거나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헛소리를 하다가, 2014년 1월 16일 결국 천수를 누리고 91세로 사망. 젊은 시절을 쓰레기같이 보냈고, 전후에도 끝까지 살인과 약탈이나 하면서 인생을 낭비한 것 치고는 상당히 잘 살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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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ndrew Gordon, "A Modern History of Japan", 2002 [2] 양측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학자 등에 따라 통계가 갈리므로 정확한 판단은 어렵다. 다만, 동원 병력은 러시아군이 더 많았다. [3] 덕분에 전투 기간이 한 달 이상 길어졌고 전투를 지휘한 가미오 중장은 신중장군, 즉 겁쟁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4] 내무대신과는 다른 직책이다. 사이토 마코토는 유일하게 해군 대장 출신으로 조선 총독을 지냈는데, 하라 다카시 내각이 비육군 소속 인물인 사이토를 총독으로 보낸 이유가 조선의 무단통치를 (무늬뿐이라고는 해도 일단 명목상으로는) 문화통치로 바꾸는 일환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상에서도 군복을 입는 육군과 달리 해군은 영외에서는 양복을 입는 등 육군보다 훨씬 온건했다. 다만 조선에의 영향력에서 손 떼기 싫어한 강성 군부 때문에 문민 총독 임명은 실패했다. 사이토 총독은 강우규 의사를 위시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일본인, 그것도 같은 군인 집단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5] 당시 일본 의회는 예산 문제와 군부가 추진한 영토 확장에 반대하여 군부와 대립하였기에 군부와의 관계가 최악이었다. 그래서 군부는 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켜버렸다. [6] 당시 기준에서 중국에서 쓸만한 자원은 철, 석탄 등 몇가지를 빼면 의외로 보이지 않았다. 그 자원 역시 충분히 공급되었다 보기는 어렵고 말이다. [7] 비유하자면, 별장에 물건을 훔치러 간 셈이다. [8] 이 조건도 참으로 가관인 게 패전이 임박한 패전국 주제에 조건 중 천황제 유지, 중일전쟁 발발 이전 조선반도와 만주를 일본 영토로 인정, 전범들을 자국에서 재판이라는 승전국에 가까운 조건을 걸었다. [9] 이게 더 이를 갈게 만드는 이유는 이미 만주와 북한 지역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뇌부들과 또 당시 북한에 지사를 두고 있던 대기업 간부들은 이미 소련군이 북한으로 입성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미 첩보를 입수해 소련군이 만주와 북한으로 들어올 것을 미리 알아낸 이들은 즉시 자신들의 가족과 자신들만 야반도주격 피난을 한 것. [10] 사실 이는 오노다 히로는 장교출신으로 군국주의 사상으로 똘똘 무장한 상태였던 데에 반해 요코이 쇼이치는 평범한 징집병 출신이었던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1] 약탈, 살인 뿐 아니라 재미로 강간살인, 방화 같은 온갖 쓰레기 짓을 했다. 그래서인지 오노다 히로오에게 피해를 입은 필리핀 주민들은 오노다 히로오라는 말만 들어도 이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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