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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23:39:12

1997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연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 21세기 22세기
밀레니엄
제1천년기 제2천년기 제3천년기
세계 각 지역의 표기
서기 1997년
대한민국 79년
단기 4330년
불기 2541년
간지 병자년 ~ 정축
대만 민국 86년
일본 헤이세이 9년
( 황기 2657년)
이슬람력 1417년 ~ 1418년
히브리력 5757년 ~ 5758년
페르시아력 1375년 ~ 1376년
에티오피아력 1989년 ~ 1990년
인류세력 11997년
로마 숫자 MCMXCVII

1. 개요2. 설명3. 기후4. 주요 사건
4.1. 1997년 외환 위기 사태와 국가 부도4.2. 사상 최악으로 치닫던 97년 한미관계4.3. 청소년보호법 제정과 한국 성인만화의 몰락4.4. 한국에 몰아닥친 ' 세일러문 붐'4.5. 1세대 아이돌의 본격적인 등장4.6. " 인간의 역사가 바뀌기 시작한 해"4.7. 정보인권 침해의 해 시즌2, 1997년4.8. 1997년 외환 위기 시작의 예고, 한보그룹의 몰락과 총수 구속4.9. 문민정부의 지지율 하락과 위기
5. 사건
5.1. 실제
5.1.1. 1월5.1.2. 2월5.1.3. 3월5.1.4. 4월5.1.5. 5월5.1.6. 6월5.1.7. 7월5.1.8. 8월5.1.9. 9월5.1.10. 10월5.1.11. 11월5.1.12. 12월
5.2. 가상
6. 탄생7. 사망8. 데뷔
8.1. 가수
8.1.1. 한국8.1.2. 해외
8.2. 배우8.3. 만화계8.4. 스포츠
8.4.1. 야구8.4.2. 농구
8.5. 예능인8.6. 아나운서
9. 은퇴
9.1. 스포츠
10. 해체
10.1. 음악 그룹
11. 히트작
11.1. 드라마11.2. 영화11.3. 가요11.4. 개그 코너11.5. 애니메이션11.6. 히트상품11.7. 베스트셀러11.8. 비디오 게임
12. 유행어13. 최초
13.1. 방영 프로그램 및 코너13.2. 인터넷 웹사이트
14. 출시 상품
14.1. 자동차14.2. 식음료14.3. 생활용품14.4. 화장품
15. 관련 문헌16. 달력

1. 개요

1997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자 1990년대의 8번째 해다.

2. 설명

1997년 서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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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현대사 제일 최악의 해라고 불리는 해이며, 1990년대에서 가장 힘든 한 해였다.[2] 당년 초부터 전년도에 이은 레임덕과 노동법-안기부법 반대 총파업으로 초반 정국이 시끄럽던 차에 대기업 한보그룹의 파산을 시작으로 김현철 스캔들, 황장엽 탈북 등으로 정국이 뜨거웠고, 그 해 연말에는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져버렸다. 1996년까지 이른바 "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아시아의 네 마리 용" (한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이라며 "기초가 튼튼하다던" 한국이었지만, 태국, 말레이시아를 시작으로 북상하는 아시아 금융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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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조차지 홍콩 중국에게 반환되었다.

1996년까지는 비록 '사고공화국'이니 하는 등의 비판도 나왔지만 1인당 GDP가 역사상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돌파하는 등, 지속적인 사회 발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97과 같은 작품이 계속 나오는 것도 이 시기의 추억에 대한 나름의 향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97년은 남북한간 최악의 대치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경제는 1997년 외환 위기(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이 6480억원)를 맞으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존망마저 위태로운 시기였다. 심지어 학생 운동권도 전년도에 이어 한총련 5기 출범식 사태를 비롯해 이석 치사사건, 이종권 치사사건 등 프락치 오인 살해사건과 '동아대 자주대오 사건' 등 공안사건 발생 등에 따른 정부의 강경대응으로 쇠퇴했고, 한총련을 탈퇴하는 총학 수도 갈수록 늘어갔다.

1997년 12월, IMF 사태가 터지던 시기의 국내 실업률은 3.1%로 집계되었다.[3]

문민정부 초기인 1993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최악이다. 그동안 달성했던 치적들이 임기 말에 묻혀 싸그리 날아갔을 정도로 파장이 컸다는 걸 보여주는 셈이다.

물론 좋은 일도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정치권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김대중이 북풍공작 등 사상공세에도 불구하고 15대 대선에서 이회창을 누르고 당선해 헌정사상 최초로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를 달성했다. IT업계에선 1996년도의 CDMA에 이어 이 해에 PCS 이동전화 시대가 개막되었으며, 역사 및 한글학계에서도 '세종대왕 탄생 600주년'을 성대히 기념했다. 또 울산시가 경상남도에서 분리돼 비로소 광역시가 됐다.

방송계에선 '한국방송 70주년'을 성대히 기념한 가운데 상반기부터 가요프로에 변화가 생겼는데, KBS2 가요톱10이 1월부터 립싱크 표시를 붙였고,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은 1997년 2월 15일부터 출연하는 모든 가수들은 필수 라이브를 해야 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아울러 경인, 충북, 전북, 울산 4개 지역에 민방이 생겼으며, 특히 경인지역을 뺀 3개 지역은 SBS 프로그램들을 볼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또한 부산, 대구 민방은 지역민방 중 최초로 라디오가 개국했다. 동시에 지상파 방송 3사가 VOD 서비스를 실시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문민정부 말기에 태어난 1997년생은 당시 기준, N세대의 끝자락 세대이면서 현재 기준, Z세대의 선두주자이기도 한 과도기 세대이다.[4]

금융계에선 조흥증권이 국내 최초로 인터넷 홈트레이딩 서비스를 실시해 객장 대신 안방에서 주식시세를 손쉽게 볼 수 있게 해 줬고, 국내 고령기업 동화약품 조흥은행이 창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법조계에선 1997년은 사형 집행가 실시된 마지막 해이다. 이후 사형제는 사실상 선고만 이루어지는 형식적인 처벌이 되었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1997년 올해의 한자는 '倒(넘어질 도)'였고, 문화체육부에서는 이 해를 문화유산의 해로 지정했다.

한국에서는 1997년 이후 광우병 발생지역 영국에서 3개월 이상 체류한 사람은 헌혈을 영구적으로 금지했다. 이것은 1980년부터 1996년까지의 1개월에 비해서는 상당히 완화되었으나 이 조항 때문에 영국으로 진출한 축구선수 박지성 손흥민은 평생 헌혈을 못 하게 되었다.

동방 프로젝트 최초의 게임 동방영이전 ~ The Highly Responsive to Prayers이 정식으로 출시되면서 동방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렸고, 두 번째 게임 동방봉마록 ~ the Story of Eastern Wonderland, 세 번째 게임 동방몽시공 ~ The Phantasmagoria of Dim.Dream이 출시된 해이기도 하다.

3. 기후

1월은 새해부터 큰 눈폭풍이 불었고 기온은 평년 수준이었으나 1990년대 1월 중 가장 낮았다. 2~4월은 평년보다 높았지만 꽃샘추위가 몇 차례 오기도 했다. 5월에는 잦은 비에 평년보다 낮은 기온이었지만 여름에는 1994년 여름만큼은 아니지만 평년보다 꽤 더웠고 9[5]~10월에는 평년보다 선선하다가 11~12월에는 슈퍼 엘니뇨로 폭우가 내렸다. 이러한 이상 고온은 1998년 여름을 제외하면 1999년 4월까지 강하게 이어졌다.

서울 기준 월별 평균기온은 다음과 같다.
월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서울 월평균기온(°C) -3.3 0.7 6.8 13.0 17.0 23.4 26.1 26.8 20.2 13.4 8.8 1.8 12.9
평년대비 편차(°C) 0.1 1.8 2.3 1.2 -0.4 1.9 1.5 1.4 -0.4 -0.9 2.2 2.2 1.1
연 최저기온 연 최고기온 연교차
-13.7 °C(0122) 36.1 °C(0726) 49.8 °C

4.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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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1997년 외환 위기 사태와 국가 부도

1997년 10월, 외환위기 직전 노동부에 신고된 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은 6480억원에 달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임금도 못 받는 상황에 직면해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해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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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 당시 임기말의 대통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권의 허위사실 유포에 엄히 대처하겠다며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다. 김영삼 대통령,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 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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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9일, 경제가 위기에 빠져들면서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물러나고 임창열 통상산업부 장관이 새 경제 부총리로 임명됐다.

환율 변동 폭을 현행 2.25% 범위 내에서 10% 범위내로 대폭 확대한다고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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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11월 21일, 정부가 결국 국제 통화기금 국제통화기금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로 했다.

구제금융 요청 경제 우등생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하고 국제기관의 품안에서 회생을 도모해야 하는 뼈아픈 처지가 된 것으로 임창열 부총리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3당 대통령 후보와의 청와대 만찬에 참석해 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에 불가피성을 설명한 뒤 밤 10시에 IMF 요청 사실을 공식 발표한다. 임창열 부총리는 그날 우리나라를 방문 중인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와 티모시 게이디너 美 재무부 차관보와의 잇단 접촉에서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창열 경제 부총리와 IMF부총리의 긴박했던 협상

IMF의 지원받은 나라들 경제주권 포기할 정도 아시다시피 IMF는 그냥 돈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며 IMF에 돈을 빌린 나라들은 IMF의 명령에 따라 경제운영을 해야 한다.

12월 3일, IMF와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발표되었다.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협상을 마치고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장으로 나와서 협상의 타결 소식을 전했는데 캉드쉬 총재는 이 자리에서 한국에 지원할 자금 규모는 모두 550억 달러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먼저, 550억 달러의 자금 조달 내역을 보게 되면 국제통화기금가 210억 달러,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 개발은행이 40억 달러 등 국제기구에서 350억 달러를 지원하는데 합의했다. 12월 3일을 시점으로 사실상 경제주권을 국제통화기금에 바친 셈(즉, 대한민국의 IMF 관리 체제 진입)으로 그 이후 2001년 8월까지 4년간 한국경제는 국제통화기금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 IMF, 긴급 자금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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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IMF에 돈을 빌리고 그들의 뜻에 따르는 조건으로 경제주권을 IMF의 손에 맡기는 처지가 되었다. IMF 협약 반드시 지켜야

당시 IMF 총재 미셸 캉드쉬는 한국이 국제통화기금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대한민국 정부를 위협했다.

4.2. 사상 최악으로 치닫던 97년 한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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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6월 24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한국 정치외교 사학회가 전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천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4대 강국 가운데 한국의 안보에 가장 위협을 줄 수 있는 나라로는 응답자의 10명중 4명이나 미국을 꼽아 이 조사에서 90년대 들어 심해진 혐미, 반미감정을 잘 나타내었다. 이 조사에선 미국다음으로 일본, 중국, 러시아를 꼽아 한국과 통상마찰이 잦은 미국과 일본에 더욱 반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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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사가 나온 1997년 6월 27일 캐나다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의 모습, 이 자리에서 클린턴은 김영삼대통령과 마지못해 악수를 하면서도 김영삼대통령의 눈길조차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사상 최악의 관계를 보였던 것은 김영삼대통령의 임기말인 97년 한미관계였다. 1997년 6월 27일 뉴욕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김영삼대통령과 클린턴은 서로의 얼굴조차 외면할정도로 매우 냉랭한 관계를 보였다.[8] 심지어 97년 1년 한해동안은 주한미국대사까지 공석이었다. 결국 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진 1997년 12월 15일 미국이 마지못해 스티븐 보스워스 대사를 임명하여 김영삼대통령이 그에게 신임장을 수여했지만[9] 1년 동안이나 주한미국대사의 공백이 발생한 97년은 그당시 얼어붙은 한미관계의 현실을 절실히 보여준 한해였다. 그 당시 1997년엔 국가안전기획부가 사상 최초로 미국인 간첩을 체포하여 구속하는 충격적인 사태까지 터졌다.[10] 1997년 11월 25일에 열린 정상회담에서 클린턴은 김영삼대통령과 마지못해 악수를 하면서도 애써 김영삼대통령을 외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11]

4.3. 청소년보호법 제정과 한국 성인만화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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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 소환되는 이현세 화백.

임기말 레임덕 상황을 겪던 김영삼 정부는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관한 문제를 거론해 표심을 잡기 위해 학교폭력 문제를 단속하자는 명분으로 1996년에 '청소년 보호를 위한 유해 매체물 규제에 대한 법률안’을 들고 일어났다. 발의 당시 청소년 보호를 빙자하여 위장된 검열을 행하는 데다가 그 검열 판단의 결정을 행정기관이 판단한다는 점에서 언론인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반발이 거셌고, 무엇보다 이미 존재하는 법인 형법 제243조(음화반포)와 미성년자보호법과 중복되는 입법인데다 법에 명시된 심의 기준이 애매모호해 죄형법정주의 5대 원칙 중 하나인 '명확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의견도 있지만, 결국 3월 7일부로 통과되고 말았다.

1997년 3월 7일부로 법명이 '청소년보호법'으로 결정되어 법이 공포됨과 동시에 동법 제45조에 의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를 사단법인에서 법정기구로 바꾸고 난 뒤 1961년 한국아동만화자율회 시절부터 실시한 만화 사전심의제도를 36년만에 사후심의로 바꾸는 한편 동법 제2장에 '청소년 유해매체 표시'라는 규정을 만들어 앞으로 유해매체 표시를 달지 않은 성인만화의 경우 이를 판매한 업자를 벌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4월 15일에는 '음란/폭력성조장매체공동대책협의회(이하 음대협)'가 국내 3대 스포츠신문 발행인과 편집국 책임자들을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을 적용하여 즉각 고발하는 바람에 5월 26일에는 배금택과 이두호 등 만화가와 소설가, 스포츠신문 편집자가 먼저 검찰에 소환되었다.

이보다 더 주목할 것은 7월 1일은 '만화사냥의 여름'이 시작되어 한국 만화계의 암흑기가 형성된 날이다. 마침 같은 시기에 '일진회 사건'이 터지자 언론들은 < 캠퍼스 블루스>등의 만화를 거론했고, 동월 2일부터 신한국당 대표 이회창이 '학교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공권력의 만화 단속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부터 검찰과 경찰은 전국의 만화소매상, 만화방, 도서대여점 등지를 상대로 일제 단속을 벌여 만화책을 마구잡이로 압수하여 9일에는 미등록 출판사 대표 및 만화방 업주 142명을 입건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바 있었다.

그러나 동월 23일에 천국의 신화에서 묘사된 음란성/폭력성을 문제삼아 원작자인 이현세 화백을 요청 4일만에 소환시켜 법정에 세웠고, 8월 1일에는 음대협의 고발을 받아들인 검찰은 스포츠신문 만화가들과 책임자들을 대거 소환하여 강철수, 방학기 등 스포츠신문 만화가 8명도 같이 불구속 기소되었다. 이중 조운학 등 세 명은 약식 기소, 이두호, 황재, 배금택, 오일룡 등은 기소 유예되었다. 그리고 7월 31일에는 성인 만화잡지 <미스터 블루( 세주문화사)>, <투엔티 세븐(대원)>, <빅 점프( 서울문화사)> 등이 발행을 중단했다. 이에 만화계가 일제히 반발해 7월 15일에 PC통신 '만화수호연합'이 첫 성명서를 낸 것을 시작으로 29일에는 한국만화가협회, 우리만화 발전을 위한 연대모임 등 9개 만화 관련 단체들이 모인 '표현의 자유 수호를 위한 범만화인 비상대책위원회'는 <정부의 '만화 탄압'에 대한 범만화인 성명서>를 냈다.

4.4. 한국에 몰아닥친 ' 세일러문 붐'

이 해는 4월경에 KBS 2TV를 통해서 1992년 일본에서 방영하였던 애니메이션 세일러문 달의 요정 세일러문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첫 방영하였던 해이기도 하다. 일본에 비해서 5년 늦게 국내방영을 하였는데 그 당시가 김영삼 문민정부 말엽이었고 해방 이후 50여년을 지켜온 철저한 대(對) 일본문화 봉인정책과 청소년보호법 제정의 여파로 일부 내용이 국내 심의상으로 대폭 수정, 개편되었던 영향이 있었다. 특히 히노 레이(국내명: 비키)가 나오는 일본식 신사가 나오는 장면이 통째로 삭제되었으며 미즈노 아미(국내명: 유리)가 남친인 우라와(국내명: 피터)와의 만남상에서 우라와가 세일러 머큐리를 공격하는 꿈의 내용 중 머큐리가 옷이 찢어져 나체가 되는 장면 등이 통째로 삭제되었고 또한 히노 레이가 첫 등장하는 장면마저도 편집수정되어서 그 당시 이러한 사정을 몰랐다가 뒤늦게서야 삭제편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시청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또한 이 때는 1998년 일본문화 대개방이 이뤄지기도 1년 전의 일이었고 김영삼 정부까지 역대 정권들의 정치사회적 노선상 일본문화에 대한 봉인책도 유지되었던 편이라 일부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1,2년만 늦게 방영했다면 좋았다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12] 후에 대원방송에서 KBS판에 비해 편집이 훨씬 줄어들고 전 에피소드가 삭제되지 않은 재더빙을 하였다.[13]

그리고 1년 먼저 투니버스 MBC에서 방영하였던 웨딩피치에 비해서 늦게 방영하였던 편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세일러문이 웨딩피치보다 3년 먼저 방영하여 선점하였던 편이지만 국내에서는 심의 등의 사정으로 웨딩피치보다 1년 늦게 방영을 하였던 영향으로 웨딩피치가 선점하였다는 점이 있다. 물론 그 당시는 지금에 비해서 다운로드도 받을 수 없었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이 TV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 국내에서 세일러문이 웨딩피치보다 먼저 나왔다고 알려주면 오히려 놀라거나 정반대였다는 사실에 믿기지 못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 때는 컴퓨터를 보유하는 가정도 드물고 인터넷도 할 수 없던 시절[14]이었고 당시엔 일본 만화를 제대로 접해보고 일본의 신작만화에 대한 정보를 알려면 직접 현지에 일정 기간 체류하거나, 지인이 재일동포 혹은 현지인이거나, 송락현 같은 일본애니 전문가가 아닌 이상 알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2010년대로 접어든 이후에는 국내에서 세일러문에 대한 인지도가 아주 낮아졌거나 소멸된 편이었지만[15] 이 때까지만 했어도 국내에서는 세일러문의 인기가 상당히 높았던 편이었으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완구와 팬시 등이 많이 출시되었던 편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당시 10대 시절을 보냈던 20대 이상 성인들 및 세일러문 매니아들을 위한 키덜트 용품이 인터넷 쇼핑상에서 나오는 편이고 리메이크작도 나와서 Fate 시리즈급의 인기는 아니지만 세일러문의 열기가 SNS를 통해 이들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편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이 시기에 방영한 애니메이션들은 전체적으로 주춤한 시기였는데 2년 전인 1995년에는 다양한 대작들이 나오면서 최고의 해를 누렸으나 이 해에 방영한 애니들은 대체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70년대 초반부터 명맥을 이어오면서 일본의 경제 호황을 함께 해온 세계명작극장이 점차 인기를 잃으며 명맥이 끊어지기도 하였다. 극장판이나 OVA로 나왔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신기동전기 건담 W은 상당한 호평을 받은 반면 이 당시 방영한 드래곤볼 GT는 소년점프의 아이콘에 걸맞지 않게 평가가 좋지 않았고 용자 시리즈의 최후의 작품인 용자왕 가오가이가는 역대 시리즈 중에서 가장 낮은 시청률을 남기고 말았다.[16] 그나마 지금도 계속 방영 중인 포켓몬스터 명탐정 코난은 방영 초기인만큼 많은 주목을 받았고 소녀혁명 우테나는 복합한 스토리와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에도 작품 자체는 호평을 받았다.

4.5. 1세대 아이돌의 본격적인 등장

가요계에서는 H.O.T.의 신드롬을 기점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1세대 아이돌의 시대가 개막하였다. 1세대 아이돌의 시작점과 같은 그룹인 H.O.T.는 지난 해 연말에 이어 연초에도 캔디의 신드롬적인 인기로 본격적으로 한국 아이돌 시대를 만들어 냈고, 이후 정규 2집의 후속곡들인 행복 We are the Future의 연이은 홈런 히트곡을 만들어 내면서 그 해 임창정이 대상을 수상한 KBS 가요대상을 제외하고 MBC 10대 가수 가요제, SBS 가요대전, 골든디스크 시상식, 서울가요대상에서 모두 대상을 휩쓸면서 본격적으로 가요계에 신드롬을 일으킨다. 그리고 같은 해 4월에는 젝스키스가 데뷔를 하게 되고, 같은 해 11월에는 S.E.S.가 데뷔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가요계에서는 아이돌들의 시대가 개막한다.

4.6. " 인간의 역사가 바뀌기 시작한 해"[17]

1997년 mbc에서 보도된 국내 연도별 10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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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와 마찬가지로 1997년 한 해는 국외에서도 국제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던 한 해였다.
덩샤오핑 테레사 수녀, 다이애나 비가 세상을 떠났고 복제양 돌리가 탄생해서 생명 복제를 둘러싼 윤리와 과학의 논란이 제기됐다. 또, 아시아에서는 금융 위기가 휩쓸었다. 97년 하반기는 홍콩의 중국 반환으로 시작됐다. 한편, 유럽에서는 좌파 진영이 제2의 절정기를 맞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에서는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욕구가 이념의 대립을 넘어선다는 것을 입증했다. 동남아에서는 금융위기의 태풍이 몰아쳤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휩쓴 금융위기는 이제 한국에 상륙해 이른바 국제통화기금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는 청년실업 및 계층 간 양극화 심화, 비정규직 증가 등의 후유증으로 남아 현재까지 유효하다. 금융 재앙과 함께 엘니뇨의 자연 재앙이 닥쳤다. 엘니뇨가 몰고 온 기상 이변으로 호주와 인도네시아는 가뭄으로, 페루와 멕시코 그리고 아프리카 동북부에서는 폭우로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우주에 대한 사람의 호기심이 패스파인더라는 꽃을 키운 것도 바로 97년이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수백 년이 지난 뒤 1997년에 가장 큰 기록으로 남을 사건은 복제양 돌리의 탄생일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신의 작업으로만 남겨져온 사람 창조 작업이 사람의 손으로 넘어온 시점인, 그래서 사람의 역사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97년이라고 평했다. 1997년 세계 뉴스, 시련도 기쁨도 아듀

4.7. 정보인권 침해의 해 시즌2, 1997년

당시 PC통신/인터넷 이용자들은 전기통신사업법 시행령 제16조 개정 파동과 PC통신 상의 한총련 관련 게시글 및 아이디 무단 정지 및 삭제, 지오시티 전면 접속 차단, 수사기관에 의한 PC통신 무단감청 증가, 15대 대선 관련 통신 단속 등의 온라인상의 표현의 자유 침해로 1996년보다 못한 절망의 시기를 보냈다. 게다가 전자주민카드 도입이 빠르게 진전되면서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 프라이버시 침해와 정부의 빅브라더화에 대한 우려가 보였으나 전자주민카드 도입 건은 IMF로 인한 긴축 재정과 전자주민카드 제도에 반대한 김대중 후보의 당선으로 사실상 백지화되었다.

4.8. 1997년 외환 위기 시작의 예고, 한보그룹의 몰락과 총수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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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는 정초부터 재벌 중 하나인 한보그룹이 몰락을 하게 되었던 해로 IMF와 더불어 한국경제사의 쓰라리고 아픈 기억이 있는 대목이다. 90년대까지만 했어도 한보그룹은 상아제약 등을 인수하며 다방면에서 잘 나가려고 하였지만, 1997년 초반에 들어서 정태수 당시 한보 회장의 비리가 겹치고 국회 청문회 등에도 출석하면서 그룹 경영에 최대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결국 부도로 파산하면서 IMF 직전에 해체된 그룹이 되었다.

한보그룹의 파산과 몰락은 사실상 이 해가 한국경제 위기를 체감할 수 있었던 사건으로 이 사건 이후 1997년말 대한민국은 IMF 구제금융 신청을 하게 된다. 결국 이 한보비리와 파산은 훗날 IMF 구제금융의 예고가 되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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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문민정부의 지지율 하락과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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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5대 대선 당시 손을 맞잡은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대표의 모습

1993년 정부 출범 이후부터 온갖 대형사고와 비리사건으로 지지율이 내리막을 치닫고 있던 김영삼 문민정부에게도 마지막 해는 레임덕의 극치였다. 과거사 청산과 부정부패 사정, 하나회 해산, 1993년 금융실명제 등으로 집권 초반 지지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김영삼 정부였지만, 94년 3분기부터 50% 밑으로 내려간 뒤 지속적으로 지지율이 하락하더니[19] 1997년 정초에 들어서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파동으로 국민들의 여론이 악화되면서 재개정을 천명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도리어 한보 사태와 아들 김현철 스캔들로 김영삼의 국정 장악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또 노동법/안기부법 파동과 김현철 스캔들은 1차적으로 당시 당 대표인 이홍구를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중도 하차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민주계의 좌장격이던 최형우 의원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당 대표로 지명된 것이다. 이회창 대표는 유리한 입지를 활용해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함으로써 김영삼의 레임덕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또 퇴임을 약 3개월 앞둔 1997년 11월에 외환위기까지 찾아오면서 김영삼은 후계 구도에서까지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여 우울해하던 김영삼을 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끌어내리게 만들었다. 일찍이 찾아온 레임덕 때문에 15대 대선에 영향력을 별로 행사하지 못하였고, 숱한 문제들로 인해서 비난이 가중되어 있기는 하나, 문민정부의 개혁과 사정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외환위기가 싹 걷어가 버렸다.

외환위기는 이미 1996년 말 외채가 1천억 달러를 넘어서면서 그 조짐이 보였지만, 정부의 안이한 늑장대처와 기업의 계속된 차입, 금융권의 무분별한 대출로 1997년 11월에 이르러 결정적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오히려 김영삼은 "내부적으로 위기 대책을 진행하되 대외적으로 위기를 감추자는" 식의 구시대적 발상으로 외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런 전략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까지 지속되었는데, 여기에는 경제 정책을 직접적으로 담당한 재정경제원이나 한국은행 등 경제 관료들의 잘못이 크지만 김영삼 역시 국정 통솔자로서 비난을 면키가 힘들었다. 이로써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을 제공케 해 준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고 말았다. IMF 체제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그에 대한 원망과 비난은 고스란히 문민정부에 향해졌다.

이렇게 해서 집권 초기인 1993년에 90%대를 넘나들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도는 아예 통계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김영삼 퇴임 직후인 1998년 3월 당시 PC통신 유니텔이 네티즌 1,78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김영삼은 '역사상 가장 지탄받아야 할 인물' 1위에[20] 뽑히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시기는 우루과이라운드와 WTO 체제의 등장으로 직면되는 세계사적 전환기로서 한국은 대내외적으로 숱한 도전에 직면했던 시기이자 위기와 기회를 내포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김영삼은 그 위기를 기회로 살리지 못해 국가적 위기를 불러오고 자신은 파멸이란 구덩이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5. 사건

5.1. 실제

5.1.1. 1월

5.1.2. 2월

5.1.3. 3월

5.1.4. 4월

5.1.5. 5월

5.1.6. 6월

5.1.7. 7월

5.1.8. 8월

5.1.9. 9월

5.1.10. 10월

5.1.11. 11월

5.1.12. 12월

5.2. 가상

6.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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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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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데뷔

8.1. 가수

8.1.1. 한국

8.1.2. 해외

8.2. 배우

8.3. 만화계

8.4. 스포츠

8.4.1. 야구

8.4.2. 농구

8.5. 예능인

8.6. 아나운서

전설의 아나운서 황금기수 KBS 24기가 탄생한 해이다.

9. 은퇴

9.1. 스포츠

10. 해체

10.1. 음악 그룹

11. 히트작

11.1. 드라마

11.2. 영화

11.3. 가요

11.4. 개그 코너

11.5. 애니메이션

11.6. 히트상품

11.7. 베스트셀러

11.8. 비디오 게임

12. 유행어

13. 최초

13.1. 방영 프로그램 및 코너

13.2. 인터넷 웹사이트

14. 출시 상품

14.1. 자동차

14.2. 식음료

14.3. 생활용품

14.4. 화장품

15. 관련 문헌

16. 달력

1월 2월 3월
1 2 3 4 1 1
5 6 7 8 9 10 11 2 3 4 5 6 7 8 2 3 4 5 6 7 8
12 13 14 15 16 17 18 9 10 11 12 13 14 15 9 10 11 12 13 14 15
19 20 21 22 23 24 25 16 17 18 19 20 21 22 16 17 18 19 20 21 22
26 27 28 29 30 31 23 24 25 26 27 28 23 24 25 26 27 28 29
30 31
4월 5월 6월
1 2 3 4 5 1 2 3 1 2 3 4 5 6 7
6 7 8 9 10 11 12 4 5 6 7 8 9 10 8 9 10 11 12 13 14
13 14 15 16 17 18 19 11 12 13 14 15 16 17 15 16 17 18 19 20 21
20 21 22 23 24 25 26 18 19 20 21 22 23 24 22 23 24 25 26 27 28
27 28 29 30 25 26 27 28 29 30 31 29 30
7월 8월 9월
1 2 3 4 5 1 2 1 2 3 4 5 6
6 7 8 9 10 11 12 3 4 5 6 7 8 9 7 8 9 10 11 12 13
13 14 15 16 17 18 19 10 11 12 13 14 15 16 14 15 16 17 18 19 20
20 21 22 23 24 25 26 17 18 19 20 21 22 23 21 22 23 24 25 26 27
27 28 29 30 31 24 25 26 27 28 29 30 28 29 30
31
10월 11월 12월
1 2 3 4 1 1 2 3 4 5 6
5 6 7 8 9 10 11 2 3 4 5 6 7 8 7 8 9 10 11 12 13
12 13 14 15 16 17 18 9 10 11 12 13 14 15 14 15 16 17 18 19 20
19 20 21 22 23 24 25 16 17 18 19 20 21 22 21 22 23 24 25 26 27
26 27 28 29 30 31 23 24 25 26 27 28 29 28 29 30 31
30


[1] 1997년의 흔한 뉴스들이다. 그것도 전부 MBC 뉴스다. 그 누구도 이 뉴스들이 IMF 사태가 올 거라는 걸 예고한다는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2] 2000년대 이후 해인 2014년, 2016년과 같이 현대 한국에서 제일 힘들었던 해로 여겨진다. 하지만 1997년보다는 약과이다. [3] 지난달 실업률 3.1% 4년 반만에 최고, 실업률 3.1% 최악 수준 [4] 인터넷(Internet)의 넷을 따와 N세대로 규정한 대상자는 X세대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1977년생부터 1997년생까지로 규정하며 Z세대는 1997년생부터 2010년생까지로 규정한다. 1997년생은 Z세대가 새로운 세대로 떠오르기 전에는 N세대의 끝자락 범주에 포함되었으나 현재는 Z세대의 선두주자로 편입되었기에 양쪽 모두 해당되는 셈이다. [5] 단 9월 초는 매우 더웠다. [6] 체불임금 6480억원 [7] 한반도 전쟁 발발시 청소년 3명중 1명 피난가겠다 [8] 김영삼대통령, 미국과 대북문제에 대한 공조방안 논의 1997.6.27 mbc뉴스 [9] 보스워스 주한 미국대사 김영삼대통령에게 신임장 제정 1997.12.15 mbc뉴스 [10] 1997년 7월 11일, 서울지방법원에서는 전.현직 한국군 장교들로부터 군사기밀을 빼내 수집해온 미국 방위산업체 중역인 도널드 래클리프씨(62)에 대한 한국검찰의 구형이 이뤄졌다. 구형량은 징역 5년. 리튼 가이던스 앤드 컨트롤시스템'社 극동아시아지역 사업담당 이사인 래클리프씨는 94년 7월부터 최근까지 수시로 한국을 드나들면서 2,3급 군사기밀 수십종을 탐지, 수집한 혐의로 4월 30일 안기부에 의해 구속됐다. 래클리프씨는 자신에 대한 한국 수사기관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美8군 영내로 도피했다가 결국 자진출두했고 美국무부는 그에 대해 영사적 지원조치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하는등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43][44][45][46][47][48][49][50][51] [11] 클린턴 미국 대통령, 한국에 최대한 협력 천명 19971125 mbc [12] 다만 2000년 이후 종합유선방송법이 방송법에 통합되면서 새로 출범한 방송위원회에 의해 케이블에서도 가차없이 심의가 이루어져 삭제는 여전할 것이다. 신의 괴도 잔느의 예를 봐도 그러하다. [13] 그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대원방송판 세일러문이 처음으로 방영된 2012년에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들이 세일러문의 신규 팬이 되기도 했다. [14] 물론 할수야 있었지만 PC통신따로 인터넷 따로 요금을 지불하고 겨우겨우 했어야 하고(코넷에 가입하면 인터넷 요금을 제외한 014XY요금만 할인 시간대 잘시켜서 납부하면 된다.) 당시 인터넷은 지금의 대학생이나 대기업, 공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공무원정도의 직군들이 아니면 접해보기도 힘든 시절이었지만 동년 4월 1일에 야간정액제가 실시되었다. [15] 물론 대원방송의 세일러문 재더빙으로 KBS판 방영 당시만큼은 아니어도 세일러문의 인지도가 다시 올라가긴 했다. 대원방송판의 더빙퀄리티에 대한 논란과 별개로 대원방송에서의 재더빙을 통해 세일러문 자체가 KBS판 세대들 사이에서 많이 재조명되었을뿐더러 대원방송판을 통해 신규 팬들이 유입되기도 했다. 대원방송판 1기가 방영된 2012년 기준으로 당시 청소년이었던 1990년대 후반생들과 당시 어린이였던 2000년대 초중반생들이 대원방송판으로 세일러문에 입문한 세대들이다. [16] 물론 시청률은 낮았지만 용자 시리즈의 정점인 만큼 팬덤에서의 평가나 지지는 높은 편이다. [17] 이런 의견은 당시 MBC 뉴스에서 그렇게 평가한 것이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1997년 12월 31일 97년의 마지막날 뉴스에서 1997년 한해를 돌아보며 그렇게 평을 했으니 참고해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1997년 세계 뉴스,시련도 기쁨도 아듀 [18] 물론, 이는 홀리필드의 고의적인 헤드버팅 탓이 크다. [19] 다만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는 1995년 8월 15일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일본놈들 버르장머리 고치겠다'는 얘기는 그 뒤인 11월 장쩌민 중국 주석의 방한 때 일본의 망언에 대해 한 발언이다. 그리고 이 해 지지율은 20%대로 떨어지는 바람에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했으며, 이후 다시 상승하여 1996년대 상반기에 40%대를 회복해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선전할 수 있었지만 곧 임기가 1년밖에 남지않은 시점이 되자 다시 20%대로 떨어졌다. [20] 2위는 전두환 전 대통령. 반면 '존경받아야 될 인물' 1위로는 백범 김구 선생, 2위는 박정희 전 대통령, 그 뒤는 충무공 이순신, 세종대왕이 뒤를 이었다. [21] 비바 및 스카티 브랜드는 유한킴벌리에서 계속 사용한다. [22] 사회당으로서는 4년만의 제1당 복귀였고, 반면 여당인 우파 정당 공화국 연합(RPR)과 중도 민주연맹(UDF)은 각각 200석대에서 100석대로 의석이 반토박이 났다. 자크 시라크로서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임기 말에 동거정부의 총리를 역임했기에 2년 만에 거꾸로가 된 격이었다. 극우 국민전선도 최초로 1석을 올렸다. 조스팽은 이미 1995년 대선에서도 1차투표 1위로 선전하는 등 인기가 좋았으나 정작 2002년 선거에서는 후보난립으로 3위로 낙선하게 되어 황당하게 정치인생을 마무리했다. [23] 당시 방영 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다시 보여달라는 시청자들의 요청도 쇄도하여 같은 해 재방송을 하게 된다. [24] 동방영이전은 1996년 11월 경 동경전기대학의 큐산마츠리에서 먼저 발표되었지만, 날짜를 알 수 없으므로 코믹마켓의 정보를 기입했다. [25] 물론 북한 외교관의 해외 망명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대사급 외교관의 망명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26] 1997.10.17 mbc [27] 당시 일본 증권사의 리더 중 하나였다. 증권사 빅4로 불릴 정도. [28] 단 집행은 하지 못했다. [29] 미국은 다음날인 19일에, 한국은 그 다음 해 2월 20일에 개봉하였다. [30] 하지만 본작에서의 T-800, 존 코너, 사라 코너의 활약으로 스카이넷이 파괴됨에 따라 1997년 8월 29일의 심판의 날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 [31] 영화가 개봉된 2012년으로부터 15년 전이 되도록 수정한 것이다. [32] 메이저 데뷔. 결성은 1992년 8월에 이뤄졌다. [33] < 보루토> 작화담당. [34] 가요톱10 사상 최연소 골든컵 수상 가수. [35] 가요톱10에서의 마지막 여성 가수의 1위 곡. [36] 1997년 KBS 가요대상 대상 수상곡 [37] 이 두 곡 모두 가요톱10에서 골든컵을 수상했다. [38] 발매는 1996년 11월, 첫 1위는 1997년 1월 초. [39] 1997년 MBC 최고인기가요상/SBS 가요대전 대상/골든디스크 대상/KMTV 대상 수상곡 [40] 1997년 서울가요대상 대상 수상곡 [41] Valentina - Wake Up Honey 표절. [42] MBC 오늘은 좋은 날 - 풍운의 별에서 아이스맨으로 분한 이정용이 "아이스맨~"으로 어레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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