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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11:55:25

태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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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율령 시대2.2. 막부 시대2.3. 근대
3. 조직
3.1. 대신
3.1.1. 태정대신3.1.2. 좌대신3.1.3. 우대신
3.2. 전근대의 8성
3.2.1. 근대

1. 개요

태정관(太政官)은 일본의 중앙정치기구이다. 천신지기[1]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무를 담당하던 신기관(神祇官)과 함께 일본 율령제의 2관 8성을 구성했다. 율령제 실시 이후, 신기관 다음가는 행정기관[2]이었으나 율령제의 붕괴에 따라 권력이 섭관 원정으로 이양되어 형해화가 이루어졌고, 막부 시대에 이르러서는 명목상의 기구가 되어 천황의 의전이나, 무사들에게 위계를 내려주는 역할 정도만 담당했다. 이후 대정봉환에 따라 막부 조정이 일원화되고,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포고하며 다시 최고정치기구로 부활한다. 그리고 서양의 내각제가 도입되며 1885년에 해산한다.

2. 역사

2.1. 율령 시대

고대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율령제를 도입하며 국가행정을 담당하는 태정관을 설치했다. 산하에 납언 등을 두었으며, 689년 덴무 천황은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을 제정하여, 태정관에 천황을 보좌할 재상직으로 태정대신, 좌대신, 우대신을 규정했다. 704년, 다이호 율령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태정관의 틀과 관위 품계가 만들어졌다. 천황은 태정관을 통해 관료제를 성립하면서 아스카 시대 때부터 통제력이 닿지 않던 지방 세력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임명된 지방관들이 호족으로 변하고 후지와라 가문이 천황의 대리직인 섭관[3]으로 통치하며 율령제가 흔들리자 태정관 역시 후지와라 가문의 거수기로 변모한다. 율령제의 근간인 관료제는 과거 제도를 통해 유지되는데 과거제 역시도 사학(私學) 출신들이 장악하고 이들이 독과점집단으로 변모하였다. 또한 과거제가 있었음에도 실권은 후지와라 가문이 독점했기 때문에 문벌 가문과 최상위 가문만이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 학자 가문들마저 몰락하고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조정의 최상위 고위직부터 최말단 직까지 후지와라 가문과 황실 방계(겐지)가 장악한다.

이렇듯 태정관의 독립성은 설립 초기부터 위태로웠으나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말기까지 태정관이 최고행정기관으로 위상이 유지되었다. 후지와라 가문과 타이라, 겐지 가문들 역시 자신의 파벌과 친족을 태정관의 고위직으로 임명했으며 가격(家格)이 낮은 타이라 가문같은 경우 태정대신의 권위로 일본 열도를 통치했다.

태정관은 중국의 3성 6부제의 상서성 등의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별칭으로 상서성, 도성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2.2. 막부 시대

1185년, 겐페이 전쟁으로 헤이케( 타이라 가문) 정권이 몰락하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며 큰 변화를 맞는다. 왕조국가 시대나 인세이 그리고 헤이케 정권에 이르기까지 관료제와 별개로 정치와 권력의 중심지는 교토 조정과 태정관이었다. 그러나 무가 정권이 가마쿠라의 막부로 분리되며 무사 세력이 기존 귀족 세력과 독립적인 관계로 변해갔다. 막부 초기에는 천황의 지지를 기반으로 정변에 성공했고 헤이케 선례를 보며 막부는 간토 지방을 장악하고 에조 권역인 도호쿠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그런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죽고 고토바 천황은 가마쿠라 막부를 조적(朝敵)[4]으로 선언하며 토벌하려 했으나 호조 마사코를 중심으로 가마쿠라 세력은 역으로 천황 세력을 토벌하고 고토바 천황을 폐위시켰다. 이 시기부터 조정의 권역은 교토 근교로 완전히 축소된다. 에도 막부 시대에 이르면 막부가 전국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조정의 영향력은 교토 안으로 축소되며 행정기구로써 역할을 상실하고, 무가 정권에게 관위를 내려주는 기관으로 전락하고 만다.

2.3. 근대

파일:태정관도장.png 태정관 도장

1868년, 정체서(政体書)를 포고함에 따라, 태정관은 근대 일본의 최고행정기관으로 부활한다.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전부 가지고 있었으며, 전근대 율령제의 태정관과는 다른 조직이나, 율령제의 태정관에서 이름을 따왔다.

3. 조직

3.1. 대신

3.1.1. 태정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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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의 율령제와는 다른 일본 율령제 특유의 관위로, 비상설 명예직이다.[5]

종1위 관직으로 조선의 영의정, 고려의 문하시중에 해당한다. 사실상 명예직으로 전직 관백이나 정이대장군 등이 받았고 마땅한 적임자가 없을 경우 공석으로 두었다.[6] 그렇기에 공식적으로 태정관의 수장이지만 실질적으로 거의 직무 활동을 하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태정대신은 한동안 공석이다. 유신지사 중 가장 높은 신분이었던 산조 사네토미가 맡았다. 그러나 내무경으로 오쿠보 도시미치가 임명되어 내정의 모든 사안을 도맡아 했기에 역시나 실권이 없었다. 이후에도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과 동시에 생긴 정한론 논쟁에서 국로로써 의견을 중재하는 역할만 하고 직접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3.1.2. 좌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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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2위 관직으로 실질적인 행정수반이다. 조선 초기의 좌의정이 이와 같은 역할이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좌대신직은 막말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사쓰마번의 국부(國父)[7]인 시마즈 히사미츠가 취임하며 분큐의 개혁을 시행. 막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공무합체의 노선을 확고히 했다. 막부의 실권자 히토츠바시 요시노부 역시 궁극적으로는 공무합체를 지향했기 때문이었기에 시마즈의 권위는 높아졌다. 시마즈는 정사총재에 임명되어 조정의 행정권을 장악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좌대신으로 임명되는 사람은 없었다. 율령제는 복구되었어도 과거제는 폐지된지 천년이 넘었고 사람들의 관념은 청화가 이상의 가문 출신만이 좌대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신 세력에 맡는 인물이 없었다.[8] 이후 다루히토 친왕이 좌대신을 맡으나 태정관이 폐지된 후였다.

3.1.3. 우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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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대신을 보좌하고 황실 관련 업무에 관여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좌대신은 대대로 정이대장군이 맡았다. 우선 가문의 자격 조건이 상대적으로 낮았고 명목상의 관직이라 해도 조정 내에서도 입지를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쿠라 도모미가 우대신을 맡았다.

3.2. 전근대의 8성

3.2.1. 근대



[1] 하늘과 땅의 신령. [2] 명목성으로는 관부 석차는 신기관이 태정관보다 더 앞섰지만, 권력 자체는 태정관이 더 강했다. 신기관의 장관직인 신기백은 픔계 자체도 종4위하로, 태정관 산하의 일개 성(省)의 장관인 경(卿)보다도 낮았다. [3] 천황이 미성년일 때 대리 통치를 위해 만든 것이 섭정, 천황이 성년일 때도 대리 통치하기 위해 만든 것이 관백이다. [4] 조정의 적. [5] 요로령의 직원령에서 태정대신을 "한 사람 사범으로서 사해의 모범이 된다. 나라를 다스리고 도를 논하며 음양을 섭리한다. 적당한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비워 둔다(師範一人、儀形四海、経邦論道、燮理陰陽、无其人則闕)."고 규정하였다. 이 구절에서 마지막 두 자를 따와서 태정대신을 측궐(則闕)이라고도 불렀다. [6] 이는 율령제가 무너진 일본에서 특히 나타나는 특징으로 중국과 한국의 왕조들은 관위가 인플레되어 정1품까지 실무직이 되었으나 일본은 역으로 조정을 후지와라 방계 가문이 장악하면서 인원이 대폭 감소하여 정1위는 사후에나 부여받는 훈장으로 종1위도 명예직으로 변하면서 실무직 중 최고 관위는 정2위가 되었다. [7] 번주의 친생부 [8] 유신 세력이 인정할만큼 공헌한 강경 도막파 공경은 산조 사네토미, 이와쿠라 도모미 2인 뿐이었다. [9] 사실 당태종 이세민의 이름을 피휘하여 민 대신 호를 쓰게 된 것으로 민부나 호부나 같은 말이다. [10] 국(局)으로 개칭, 총재국의 설립, 부총재직 설치 등의 변화가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