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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족[ruby(華, ruby=か)][ruby(族,ruby=ぞく)]은 과거 일본에 존재했던 귀족 계급이다. 원래 뜻은 지체가 높은 사람이나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집안이나 자손을 뜻하는 보통명사였으나 전근대 일본에서 공가公家 중 두 번째로 가격家格이 높은 집단인 청화가淸華家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게 되면서 일본에서 귀족의 명칭으로 쓰이게 되었다.봉호 없이 작위만 썼고 또 작위 뒤에 반드시 爵작을 붙였는데 작위 앞에 영지 이름이 붙어 봉호를 이루고 작위 뒤에 爵작을 안 붙이는 한국, 중국, 월남 등의 동아시아 국가와는 다른 일본만의 특징으로 일본에서 봉호가 발달하지 못 해서 생긴 걸로 추정된다.
2. 설명
화족은 메이지 유신 이후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를 개편하면서 1884년에 생긴 새로운 신분이었다.기존의 사농공상 제도를 없애면서 모두를 같은 신분으로 내리고[1] 그 상태에서 당시 유력한 정치인들과 고위 계층 ( 다이묘들과 공경들), 그리고 부르주아를 묶어 새로운 귀족인 화족으로 분류했다. 화족에는 고대 중국 서주의 봉건제에서도 쓰였던 오등작의 다섯 계급인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이 있었는데 이는 이전부터 있던 신분질서를 서양식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해 제도화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화족을 5등작으로 나누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제출된 초안들을 보면 다음과 같이 변했다.
- 공(公), 경(卿), 대부(大夫), 사(士)의 4계급으로 나누고 공과 경을 2계급, 대부와 사를 3계급으로 나누어 9계급으로 하는 안 (1869년)
- 상공(上公), 공(公), 아공(亜公), 상경(上卿), 경(卿)의 5계급으로 나누는 안 (1871년 9월)
- 공(公), 경(卿), 사(士)의 3계급으로 나누는 안 (1871년 10월)
- 공(公), 백(伯), 사(士)의 3계급으로 나누는 안 (1876년)
공후백자남 5등작 안이 제출된 것은 1878년의 일로, 『 예기(禮記)』에 등장하는 『王者之制禄爵 公侯伯子男 凡五等』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작위명이기도 하다.
첫 서임은 1884년 7월 7일 거행되었는데 공작 11명, 후작 24명, 백작 76명, 자작 324명, 남작 74명으로 총원 509명이었다.
화족 대우를 받는 사람은 화족과 같은 호적에 있는 사람들 뿐으로, 화족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차남 이하로 태어나서 분가하면 평민 취급을 받았지만 화족들끼리 양자를 활발하게 주고받았고 양자 또는 서자에 의한 계승도 드물지 않았는데 친자+적자가 아니면 작위를 계승할 수 없었던 유럽 귀족들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고위 화족가문에서 작위가 낮은 분가가 파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예로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생 히데마로도 분가하면서 자작위를 받았다.[2]
일제강점기에 구 대한제국 황실도 이 체계에 편입되어서 이왕가(李王家)로 불렸다. 정확히는 왕공족(王公族)이라 하여 화족과는 별개의 규범으로 신분이 규정되었는데, 왕공족의 위치는 명목상으로는 "황족 이하, 화족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또한 한일합방 전후 일본에 협조한 공로로 조선귀족으로 서임된 조선인들도 근거 법령은 다르나[3] 화족과 같은 이름의 작위를 받고 같은 이름의 작위를 가진 화족과 동등한 지위로 규정되었다.
3. 작위 서임 기준
- 공작([ruby(公爵, ruby=こうしゃく)])
- 교토 조정의 오섭가五攝家[4]
- 도쿠가와 가문 종가[5]
- 공훈이 있는 다이묘 가문
- 무가나 공가 중 국가에 큰 공(偉功)이 있는 자를 배출한 가문
- 무가 중에서는 사츠마번의 실세였던 시마즈 가문의 방계 타마자토 시마즈가가 시마즈 히사미츠의 공으로 책봉[6]
- 공가 중에서는 세이가케인 산조가가 산조 사네토미의 공으로, 우린케인 이와쿠라가가 이와쿠라 토모미의 공으로 책봉.
-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경우 다른 가문들보다 늦은 1902년에 도쿠가와 종가와는 별도로 본인을 시조로 하는 분가인 요시노부가 자격으로 책봉.
- 이후 이토 히로부미[7]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야마 이와오 등의 유력 유신지사의 가문이나 공가의 사이온지 가문, 무가의 미토 도쿠가와 가문처럼 최초에는 백작 또는 후작가였던 가문이 공작가로 승급하는 사례도 있었다.
- 황족 중 친왕이 신적강하하는 경우.
- 다만 실제 화족 제도 존속기간 중 이 규정으로 인해 공작 작위를 수여받은 사례는 없다.
화족 체계에서의 공작은 러시아 공작처럼 영어로는 Duke가 아닌 Prince로 번역했다.[8][9] 이 때문에 영어 위키백과를 비롯한 많은 영미권의 문서들은 일본 화족의 Prince는 Duke에 가깝다는 부연설명을 한다.[10] 실제로 영미권과 불어권 등에서는 고노에 후미마로를 황족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1]
- 후작([ruby(侯爵, ruby=こうしゃく)])
- 교토 조정의 청화가淸華家
- 도쿠가와 가문의 어삼가(御三家)[12][13]
- 실소출 15만 석 이상의 다이묘
- 히로시마 번주 아사노 가, 오카야마 번주 이케다 가, 돗토리 번주 이케다 가, 후쿠오카 번주 쿠로다 가, 쿠보타 번주 사타케 가, 사가 번주 나베시마 가, 도쿠시마 번주 하치스카 가, 구마모토 번주 호소카와 가, 카나자와 번주 마에다 가, 고치 번주 야마우치 가가 후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후쿠이 번주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 우와지마 번주 다테 가가 기존 백작위에서 승작되어 후작위를 받았다.
- 류큐 왕국의 종실 쇼(尙)씨 종가
- 미야케에서 처음으로 황족이 신적강하한 가문
- 기타 국가에 공훈이 있는 자
- 백작([ruby(伯爵, ruby=はくしゃく)])
- 자작([ruby(子爵, ruby=ししゃく)])
- 기타 당상가
- 기타 다이묘
-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들
-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가문들. 아시카가 오토마루(足利於菟丸)가 다스리던 시모츠케(下野)국의 키츠레가와(喜連川)번은 원래 5천 석밖에 안 되어 하타모토급이었지만 옛 쇼군 가문이라는 점 때문에 에도 막부에서도 예우를 받았는데 이 점을 신정부에서도 그대로 인정하여 자작위를 받았다.
- 유신 이전에 분가했거나 격이 높은 집안의 차남 이하의 아들
- 전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이복동생이자 옛 미토 번주를 지냈던 도쿠가와 아키타케(徳川昭武)가 일으킨 마츠도松戶 도쿠가와 가문과 후쿠이 번주를 지냈던 마츠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의 차남 마츠다이라 요시타미松平慶民 가문 등이 해당되고 후자는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생 히데마로秀麿 가문이 해당된다.
- 기타 국가에 공훈이 있는 자
- 남작([ruby(男爵, ruby=だんしゃく)])
- 메이지 유신 이후에 화족이 된 자
- 교토 조정의 일부 지하가[16]
- 오시코지(押小路)가는 지하가 치곤 격이 높았고 미부(壬生[17]) 가는 당주였던 미부 고후(壬生桄夫)의 공으로 남작위를 받았다.
- 공/후작가에서 분가한 차남 이하의 아들
- 나라화족(奈良華族) 26가문[18]
- 류큐 왕국 방계 왕족들
- 쇼타이 왕의 두 아들과 방계인 이에(伊江) 씨와 나키진今歸仁씨.
- 주요 신사의 세습 신직(神職) 14가문
- 이즈모타이샤: 기타시마(北島), 센게(千家)
- 우사 신궁: 이토우즈(到津), 미야나리(宮成)
- 이세 신궁: 가와베(川邊), 마츠키(松木)
- 스미요시타이샤: 츠모리(津守)
- 아소 신사: 아소(阿蘇)
- 히노쿠마(日前) 신사, 구니카가스(國懸) 신사[19]: 키이(紀)
- 히코산(英彦山) 신사[20]: 다카치호(高千穗)
- 히노미사키 신사(日御碕神社)[21]: 오노(小野)
- 모노노베 신사(物部神社)[22]: 가네코(金子)
- 다자이후텐만구: 나시다카츠지(西高辻家)
- 정토진종(淨土真宗)계 세습 주지 4가문
- 남조 조정 충신의 후손
- 닛타 요시사다의 후손 등이 이에 해당한다.
- 1만석 이상의 다이묘 가신
- 실측 석고 1만석 이상의 하타모토
- 기타 국가에 공훈이 있는 자
이토 히로부미처럼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작위가 승급되는 사례도 꽤 있었으며 여자는 화족 가문의 당주가 될 수 없어서 남자 계승자가 끊기면 작위는 반납되었지만 서양자(壻養子: 사위를 양자로 삼는 것)나 외손에게 계승할 수 있어서 후계 단절로 반납된 가문은 공작 가문은 없고 후작 가문이 각각 딱 하나 있었는데 후작 중 후계 단절로 작위가 반납된 가문은 당시 황족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의 둘째 아들이라 양자를 딱히 세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작 가문이 후계가 단절된 사례는 없고 작위 반납 사례는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아들인 마쓰카타 켄(松方嚴)이 금 해금으로 인한 쇼와 대공황의 책임으로 작위를 반납한 것이 유일하다. 화족 작위를 받은 본인이나 후계자가 1대화족주의자여서 습작 수속을 하지 않아 작위가 끊기는 사례도 있었다. 1928년 화족 가문은 공작 18개, 후작 40개, 백작 108개, 자작 379개, 남작 409개( 조선귀족 제외)로 총 954개였는데 1944년에는 1016개로 늘어났다. 1907년 이후에는 후계자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은거가 가능해졌다.
참고로 위의 다이묘의 작위 서임 고쿠다카 기준은 보신전쟁 이후에 새로 산출한 고쿠다카 기준이다. 따라서 에도 시대 중후반 기준으로 생각하면 대입이 안 되는 가문들이 있다.[27] 이것 때문에 고쿠다카를 새로 조사할 때 호리에 번(堀江藩)을 다스리던 하타모토 오사와 모토스미(大澤基壽)가 실제로는 5500석도 안 되고 유신에 공도 없었는데 메이지 정부에 1만 석 이상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남작 작위를 받았다가 적발되어 작위가 박탈된 사건도 있다.[28]
4. 특권
- 귀족원(貴族院) 의원이 될 자격. 30세 이상의 공작 및 후작은 자동으로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종신 재임할 수 있었으며, 백작, 자작, 남작 의원은 자기들끼리 치르는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고 임기는 7년이었다.
- 황족, 왕공족과의 결혼 자격이 주어짐.[29]
- 제국대학에 결원이 있으면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음. ( 1922년까지)
- 가쿠슈인에서 낙제를 해도 화족 집안의 자녀라면 고등과까지의 진학을 보증.
- 유작자는 궁내대신의 인허를 받아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신의 집안에서 통용되는 규칙인 "가범(家範)"을 정할 수 있었다. 표지 가범으로는 배우자 및 입양 자격[30], 재산 처분의 절차[31]를 정할 수 있었고 가범을 위반한 경우 궁내대신은 화족령의 규정에 따라서 징계 처분을 내릴 수 있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공작, 후작 항목에 역대 화족들 명단이, 백작 자작 남작 항목에 해당 가문 명단이 있으며 화족 작위를 받은 사람들의 명단(승계자 제외)은 여기를 참조.
5. 패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후 미군정 지도 아래 1947년 5월 3일에 신헌법이 제정되면서 화족 제도는 사라졌다. 참고로 이 해에 화족제 폐지로 인해 궁색해진 가문의 이야기를 다룬 「안조 가의 무도회」(安城家の舞踏会)라는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는데 몰락한 화족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전에 마지막 무도회를 연다는 내용이었다.같은 해 10월 14일 황적이탈한 구황족과 달리 화족들의 재산은 몰수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미군정 이후에도 대부분 명문가로 남았고 지금도 여전히 일본의 상류층으로 군림하고 있다. 물론 모두 그런 것도 아니어서 신직계 화족 가문들은 메이지 시대에 재산 관리 실패로 인해 연금 외의 재산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라 지위를 빼앗긴 뒤 진짜 몰락해 버렸고 공경계 화족들도 최상위 가문들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다이묘 집안으로서 작위를 받은 화족들은 재산이 많았지만 이마저도 후작 이상에서나 해당되는 이야기고 석고( 고쿠다카) 5만 석 이하 다이묘에서 시작된 화족들은 다이쇼 시대에 접어들면서 재정난에 시달리다가 결국 패망과 함께 지위를 잃고 평민으로 전락하면서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나마 석고 5~10만 석 이상 재산이 많았던 다이묘 출신 백/후작 이상 되는 집안조차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사기 등에 걸려서 몰락하거나 땅만 넓었지 수익이 낮은 부동산으로 인해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대신 사극에 나올 법한 유명 다이묘의 직계 후손들은 계속 세를 유지하며 현대에도 지역 의원 등 지역 유지로 사는 경우도 있다.
정말 돈 걱정이 없던 화족들은 당대에 재산을 모아서 귀족원 의원이 되고 남작위를 받은 소수 부르주아들 뿐이다.[32] 그런데 이들은 화족 지위를 잃어도 자기 재산과 사업 수완으로 부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라 단지 상류층에 들어갔다는 상징으로 화족 자리를 얻었을 뿐이었으니 의미가 없다. 황족들조차 돈이 없어서 처가에 신세를 지는 판국이었다.[33] 그래서 이방자 비가 이왕가의 영친왕에게 시집갈 때 황족들이 부러워했다. 당시 이왕가는 합방 전 대한제국 황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거의 대부분 유지해서 관리하던 전답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고, 막대한 재산을 운용했다. 그리고 일본 황족들과 달리 궁내성 산하에 이왕가를 담당하는 이왕직이라는 기관이 있어 이곳을 통해 원하는 만큼 돈을 가져다 쓸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왕가도 일제 패망 후 전재산이 대한민국 국고로 환수되어 몰락했다.
화족의 사전적인 정의는 전근대의 귀족과 같이 법률로 규정한 특권 집단이지만 실제로 세간에 통용되고 인식되던 화족의 이미지는 전근대 유럽의 귀족보다는 근대의 부르주아, 정치인, 고위 관료, 군인 등의 기득권층 집합체에 가깝다. 특히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재벌이 가장 일반적이고 널리 알려진 이미지인데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 속하는 소설 이누가미 일족에 나오는 이누가미 가문의 모습이 바로 세간에 흔히 알려진 모습에 가깝다. 즉, 화족의 서열은 작위 순으로 정해져 있기는 했지만 단순히 작위만 높은 가문보다는 작위는 다소 낮더라도 재력이나 영향력이 컸던 가문이 세간에 알려진 화족의 이미지를 더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화족들의 친목 단체였던 화족회관은 1947년에 카스미 회관(霞會館)이라는 사단법인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34]
살아남은 화족 가문은 현재 일본의 정치, 경제, 사법체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본 정치인들이 자신의 혈족이나 측근들에게 자신의 선거구를 물려주는 관습도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은 총선이나 재보궐선거에서 한번 패배했더라도 다음 공천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을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선거 때 격전지에 속하는 일이 드문 지역의 경우는 아예 대를 이어 수성하기도 한다. 물론 평판 관리도 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여러가지 이권을 보장해주는 등 민심을 얻어서 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현대 화족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기득권층이기는 하지만 극우 세력과는 거리가 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시당초 제국주의 일본부터가 표면적으로나마 다민족을 표방했기도 했고, 일본이 지금처럼 단일민족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된 것은 패전 이후라는 맥락을 알아야 한다. 아키히토 상황, 나루히토 천황,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일본 총리[35] 등 오히려 화족 서열에서 최상위에 있는 이들은 극우 세력과 대립각을 세운다. 일본 국내외의 정치학계에서도 현재 일본의 우경화를 부추기는 세력으로 일본회의를 언급하는 반면, 카스미 회관이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경우는 드물다. 카스미 회관은 구 화족들의 친목 단체지, 정치적인 집단으로 보기 어려우며, 실제로 카스미 회관에서 소개하는 주요 활동이나 관련 인터뷰 등을 보면 일본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연구 및 계승 등 학술적인 면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회의 자체가 화족 구성원이 많은 준 혈족 집단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사실 일본 현지에서는 일본회의의 사상적 구심점은 생장의 집(生長の家)이라는 신흥종교가 담당했다. 때문에 전통적인 신토와도 동떨어졌다는 설이 주류다.
여담으로 우마무스메를 한다면 들어봤을 아리마 기념의 유래가 된 아리마 요리야스(有馬賴寧)[36]가 백작(伯爵)이다.
6. 화족이거나 관련 있는 인물
6.1. 실존 인물
- 이토 히로부미 (공작)[37]
- 구로다 기요타카 (백작)
-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 1882 ~ 1976) - 이방자 비의 어머니. 화족 나베시마 가문의 딸로 태어나 방계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왕에게 시집가서 황족이 되었으나 패전 후 구황족의 황적이탈로 인해 평민으로 떨어졌다.
- 아리마 요리야스(有馬頼寧, 백작) - 중의원 의원, 귀족원 의원, 농림대신, 일본중앙경마회(JRA) 이사장
- 야마가타 아리토모 (공작)
- 오야마 이와오(大山巌, 공작) - 원로, 원수육군대장, 러일전쟁 당시 만주군 총사령관, 육군대신(초대, 3대), 참모총장(4대, 6대), 내대신(4대)
- 마쓰카타 마사요시 (공작)
- 가쓰라 다로 (공작)
- 사이온지 긴모치 (공작)
- 야마모토 곤노효에 (백작)
- 도고 헤이하치로 (후작)
- 오쿠마 시게노부 (후작)
- 데라우치 마사타케 (백작)
- 데라우치 히사이치 (백작)
- 다카하시 고레키요 (자작)
- 가토 도모사부로 (자작)
- 기요우라 게이고 (자작)
- 가토 다카아키 (자작)
- 와카쓰키 레이지로 (남작)
- 다나카 기이치 (남작)
- 사이토 마코토 (자작)
- 소 다케유키 (백작) - 덕혜옹주의 남편이 되는 쓰시마(대마도) 출신 화족.
-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 - 제34, 38, 3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고노에가(近衛家)의 30대 가주
- 히라누마 기이치로 (남작)
- 스즈키 간타로 (남작)
- 시데하라 기주로 (남작)
- 하마오 시로(濱尾四郎, 자작) - 추리소설가이며 생몰은 1896 ~ 1935
- 하마오 후미오(濱尾文郞, 1930 ~ 2007)스테파노 - 하마오 시로의 3남. 2003년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2007년 사망했다.
- 호소카와 모리히로 - 후작 호소카와 모리타츠의 장손이므로, 만약 화족제도가 유지되었다면 현직 후작일 것이다.
- 야나기하라 뱌쿠렌 - 백작 야나기하라 사키미츠(1850 ~ 1894)의 딸
- 쇼다 후미코(正田富美子, 1909 ~ 1988) - 미치코 상황후의 친정어머니. 후미코의 친정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화족(백작)이었으나, 쇼다 가문은 대 재벌가이지만 신분은 평민이다. 때문에 후미코는 큰딸 쇼다 미치코를 황실에 시집보내면서 걱정했다고 한다.
-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작) - 에도 막부의 제15대 쇼군이자 일본사의 마지막 쇼군
- 도쿠가와 이에사토 (공작) - 제16대 도쿠가와가 당주, 제4대에서 제8대 귀족원 의장(약 30년간)
- 도쿠가와 이에마사 (공작) - 제17대 도쿠가와가 당주이자 제13대 귀족원 의장
- 모리 사다하루(毛利貞広,공작): 조슈 번의 마지막 번주
- 무샤노코우지 사네아츠(武者小路実篤) - 자작 무샤노코우지 킨토모(武者小路公共, 1882 ~ 1962)의 동생으로, 꽤 유명한 작가였다.
-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 공작): 생몰은 1840 ~ 1897으로 사쓰마 번 12대 번주
- 미즈노 카츠히루(水野忠弘,자작): 생몰은 1856 ~ 1905으로 데와국(出羽国) 야마가타 번(山形藩)의 마지막 번주
- 교고쿠 타카노리(京極高徳,자작): 생몰은 1858 ~ 1928으로 사누키국(讃岐国) 마루가메 번(丸亀藩)의 마지막 번주
- 히로하시 노리코(廣橋規子, 1907 ~ 1985) - 이방자 비의 여동생. 어머니와 반대로 황족으로 태어났으나 히로하시 타다미츠(廣橋眞光) 백작에게 시집가서, 화족으로 떨어졌다. 물론 패전 후에는 구황족의 황적이탈로 평민이 되었다.
- 히타치노미야 하나코 비 - 자작 츠가루 요시타카(津軽義孝, 1907 ~ 1994)의 딸.
- 가메이 아키코 - 백작 가메이 고레타케(亀井茲建)의 손녀
- 오타니 고즈이(백작)
- 쿠죠 다케코 - 오타니 백작가의 딸.
- 아오야마 타다시게(青山忠誠, 자작): 군인이자 사사야마(篠山藩)번의 아오야마 타다유키(青山忠敏) 양자으로서 육군 군인이다.
- 나카네 히로미: 새한그룹 이창희 창업주의 부인. 결혼 후 대한민국으로 귀화해 이영자로 개명.
6.2. 가상 인물
- 츠바키코지 가문, 카라쿠리 일족 - 장미와 동백 시리즈
- 도조 겐야 - 도조 겐야 시리즈[38]
- 모리 타카시 - 미스터 션샤인
- 사이온지 유우야 - 갬블링 1945[39]
- 아야노코지 후미마로 - 명탐정 코난
- 아야노코지 레오 - 용과 같이 5[40]
- 야오토메 시노 - 아득히 우러러본, 아름다운
- 오가사와라 사야코 -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
- 이쥬인 시게오, 도마 토시노부, 아키즈키 기이치 - 휴먼버그대학교
- 죠노우치 세츠카 - 무인도 이야기 3
- 쥬죠 시온 - 소녀는 언니를 사랑한다
- 칸로지 미츠리 - 귀멸의 칼날
- 쿠구이 마치 - 용왕이 하는 일!
- 쿠로사키 토코요 - 쇼와 소녀 전래동화[41]
- 하나부사 야나기 - DREAM!ing
- 하니노즈카 미츠쿠니 - 오란고교 호스트부
[1]
화족에 편입되지 못한
무사 계급은
사족으로 분류되었으나 현실적으로 호적에 사족(士族)이라고 기재되는 외에 아무 특전이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사실상 화족 이외의 특권계급은 사라진 것이다. 다만 많은
봉토를 갖고 있던 고위 사족이 아닌 대부분의 하급 무사들은 이미 이전부터 사실상 사회적 특권이 없다시피 했고 오히려 무사의 농업 종사 금지가 해제되어 전객이 되든지 상업에 종사하는 대신 농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사족 같은 경우는
메이지 유신 때 일시적으로 공채를 일괄 지급하고 나중에 유상몰수했는데 이 기간에
공채를 미리 처분하고 사업에 뛰어든 사족들만 개이득.
[2]
분가할 시에는 보통 3단계 아래의 작위를 받는다. 예를 들면 공작가에서는 자작가, 후작가에서는 남작가가 분가되는 게 표준이었다.
[3]
왜 다른 법을 들이댔냐면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끝까지 일본 국적법을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섭관직을 독점하던 다섯 최고위 공가를 이른다.
[5]
막부 항복 이후 종가 가주가 된
도쿠가와 이에사토와 그 가문
[6]
방계라고는 하지만 히사미츠는 번주의 친부이자 이전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동생으로서 실질적으로 다이묘나 마찬가지였다.
[7]
백작, 후작을 거쳐
1907년
공작으로 승급했다.
[8]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서양의 작위 체계에서 Prince가 Duke보다 절대적으로 높지는 않다. Prince는 유럽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위상이 다르다. Duke 작위가 없는
동유럽(
슬라브족)에서는 공작과 동격이며, Fürst로 불리는
독일어권에서는 공작(Herzog)보다 낮은 후작,
서유럽에서는
대공(Grand Duke)보다 낮지만 공작(Duke)보다는 높은 작위이다.
[9]
여담으로
일본인들은 직계 황족인
친왕(親王)이나 방계 황족인
왕(王)도 Prince로 번역했다. 가령
쇼토쿠 태자의 경우에도
영어로는 Prince Shotoku로 표기한다.
[10]
작위와는 상관없이 왕가 또는 통치가문의 후손들은 Prince를 관습적으로 쓴다. 진짜
왕자도 사용하고, 방계 혈족도 사용한다. 다만
서양에서는
동아시아와는 달리
첩의 자손들은 프린스 칭호를 쓸 자격이 없는데, 적법한 혼인에서 태어난 적자만 가능하다.
[11]
다만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의 12대손으로 황족의 피를 이어 받았다.
[12]
도쿠가와 막부 쇼군의 분가인 오와리 도쿠가와 가, 기이 도쿠가와 가, 미토 도쿠가와 가의 3개 가문을 말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9남(오와리 번), 10남(기이 번), 11남(미토 번)의 후손들이다. 이중 미토 도쿠가와 가는 2대 후작 도쿠가와 쿠니유키가
미토 고몬 시절부터 이어진 대일본사 편찬을 완료한 공적으로 공작가로 승작되었다.
[13]
다만 고산케는 모두 실소출이 15만석을 훨씬 넘는 다이묘였기 때문에 특별 취급을 받지 않아도 어차피 후작이 되었을 것이다.
[14]
어삼가처럼 도쿠가와 막부 계승권은 있으나 영지가 따로 없었던 가문.
[15]
쓰시마 번은 석고만으로 보면 본섬과 히젠의 월경지를 포함해도 2만 석 미만으로 자작급에 불과하나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아
에도 막부에서 10만석급 다이묘 격으로 대접받았으며 신정부에서도 이러한 특수성이 그대로 인정되어 백작이 되었다.
덕혜옹주의 전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 백작이 이에 포함된다.
[16]
기본적으로
천황을 알현할 수 없었던 지하가들은
사족으로 분류되었다.
[17]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차남이
양자로 들어간 미부(壬生) 백작가와는 다른 집안이다.
[18]
당상가문에서 가문을 이어 줄 아들을 제외한 아들들을
나라현에 위치한 고후쿠지에 승려로
출가시켰다가 메이지 유신에 의해 환속 후 분가한 집안들을 말한다.
[19]
와카야마시에 위치
[20]
소에다마치에 위치
[21]
이즈모타이샤의 오야가미(祖神)로 모시는 신사
[22]
시마네현
오다시에 위치
[23]
교토시
시모교구에 위치
[24]
교토시
시모교구에 위치
[25]
본산은
미에현
츠시이고 본사는
도치기현
모오카시에 위치
[26]
도치기현
야스시에 위치
[27]
예를 들어 요네자와 우에스기 가문도 중후반 기준으로 고쿠다가가 18만석이므로 후작위에 해당할 것 같지만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열번동맹의 맹주로써 신정부군에 대항한 것 때문에 감봉 처분을 받아 14만 7천석이 되었기 때문에 백작위를 받았다.
[28]
판적봉환 때 제출된 각 번의 고쿠다카를 보면 가관이다. 최소한 다이묘나 쇼군의 가신이 남작이 되려면 1만 석은 되어야하고 유신에 훈공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1만 석을 채우겠다는 훈공이 없는
하타모토들과 실제 고쿠다카가 1만 석에 미달되는 소규모 번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1만 석을 인정 받으려고 애를 썼다.
[29]
다만 직계 황족은 화족 중에서도
오섭가(五摂家)나 황족 또는
왕공족과 결혼해야 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귀천상혼으로
신적강하를 당했다.
[30]
화족 이상에 한한다 등
[31]
가문의 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등
[32]
에도 시대 중기부터 부를 쌓은 상인 집안인 미쓰이, 스미토모 가문이나
미쓰비시 재벌을 세운 이와사키 남작가,
세계 최초로
진주 인공양식에 성공한 후 진주 판매로
소득세 납세액 1위를 기록하면서 귀족원 의원이 된
미키모토 가문이 이에 해당된다.
[33]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는
사가 번주
나베시마 후작 가문의 딸인데 나베시마 가문에서는 매달 2천엔씩
화장품 값이라는 명목으로 시집간 이츠코에게 돈을 보내 왔다고 한다.
나베시마 가문이 다스리던 사가 번에는 오랫동안 일본 유일의 개항장이던
나가사키가 있었는데 여기서 무역을 해 많은 돈을 벌었다.
[34]
2017년
마이니치신문
기사(유료)에 따르면 '구 화족가의 남성
당주와
성인이 된 직계 자식을 회원으로 하여 650가문 740명의 회원'이 있다고 하며
천황 부부도 매년 1월에 1회 방문하여 교류한다고 한다.
[35]
고노에 후미마로의 외손자로, 제7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이었다.
[36]
전쟁 이전에
중의원 의원, 귀족원 의원,
제1차 고노에 내각의 농림대신을 역임한 바 있다.
[37]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이토를 언급할 때는 '이등(이토) 후작'이라고 표기하는데 이 때 이토는 공작으로 승작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38]
집안이 공작가지만
아버지가 가문을 잇지 않았기 때문에 겐야 본인은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이 화족 출신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39]
금전 마련 목적으로 신분을 팔았고 이를 야마다가 사서 선우진에게 주게 된다.
[40]
귀족가문의 후예라고 작중에서 언급한다.
[41]
작중 시점에서는 이미 몰락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