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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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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원3. 특성4. 역사5. 인터넷에서 떠도는 일본 관련 루머6. 국민성과 문화7. 대외적 이미지8. 한국과의 관계
8.1. 재조선 일본인8.2. 재한 일본인8.3. 재북 일본인
9. 일본인 캐릭터10. 관련 문서

1. 개요

[ruby(日, ruby=に)] [ruby(本, ruby=ほん)] [ruby(人, ruby=じん)] | Japanese people

일본인은 좁은 뜻으로는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 넓은 뜻으로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사회적, 정신적 문화와 정서를 공유하는 일체의 집단을 총칭한다.

2. 기원

파일:동아시아 계통수.png
일본의 국립유전학연구소와 도쿄대학이 만든 본토 일본인, 류큐인, 아이누와 동아시아 민족들의 계통수. 한국인과 본토 일본인이 유전적으로 서로 가장 가까웠다.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은 현대 일본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87~96.7%를 차지한다고 한다.[1]

세키네 히데유키 가천대 교수는 일본인의 기원이 한반도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기조가 일본 학계에 있다고 주장하며, 일본인의 기원의 다양한 갈래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도래인의 위상을 과소평가하거나 한반도 문화가 일본 열도에 전파된 것 정도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심지어 몇몇 일본 학자는 도래인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시베리아, 만주, 중국 대륙 남부에서 바로 건너왔다고 보기도 한다는데, 어떻게든 한국인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피하고자 만들어낸 정치적 의도가 담긴 주장이라고 보았다. 그는 현 일본 학계가 한일 간 명백한 문화적 연속성이 있음은 알고 있으면서도 혈연 관계는 인정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2]

또한 세키네 교수는 일본 제국 시절 유리할 때는 일선동조(日鮮同祖)론을 내세우고, "일본인은 조선을 조상의 나라로 생각했고,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였다."라고 주장했던 학자(도쿄제국대 인류학 주임교수 도리이 류조, 1919년)도 있었던 일본 학계가 패전 후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특별한 민족론'을 내세우려 한반도와의 관계를 억지로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3]

일본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이 주류가 되어 형성된 현대 일본인( 야마토 민족) 외에 일본 열도 선주민 조몬인의 직계 후손인 아이누족[4]이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에서는 그들을 일본인으로 인정하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또한 비교적 최근에 일본에 흡수되었거나 정착한 류큐인( 오키나와 사람들), 재일 조선인(근현대 이후의 한반도 출신)들도 일본에 살고 있다.

일본 열도를 시대 별로 살펴보면, 선사시대에 조몬인이 일본 열도에 정착하였으나( 조몬 문화)[5], 기원전부터 한반도에서 이주한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이 조몬인들과 이합집산을 거치며 현재의 일본인( 야요이 문화와 그 이후)이 되었다는 학설이 정설이다. 일본 내에서도 고고학적인 연구와 인류유전학적인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일본의 전신인 야마토(도래인 계통)가 백제와의 교류를 통해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발빠르게 도입해서 일본 내에 존재했던 수많은 연맹-부족국가들을 복속시켰고, 추가적으로 도래인들을 대거 유입시키면서 인구를 증가시켰다는 역사적 기록도 엄연히 존재한다.

본토 일본인들의 유전자 검사 결과, 한국인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민족으로 밝혀졌다.(2012년 11월 도쿄대 연구발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종종 일본인에 관한 생물학적인 연구를 할 때, 일본 내에 존재하는 오키나와인, 아이누인, 본토 일본인( 야마토 민족)을 각각 비슷한 숫자로 표본을 수집하여 연구 결과를 낼 때도 있다. 이렇게 되면 1억 2천만 명이 넘는 일본 인구 중 오키나와인과 아이누인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유전 형질 비중(조몬인 계통)이 심하게 과대평가된다. 학계에서 이런 식으로 표본을 편향되게 수집하여 의도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유도하는 행태가 아예 없는 게 아니므로 주의해야 한다. 의도한 부분은 아니었겠지만 암내 유전자 비율을 조사할 때도 유사한 경우가 있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42개 인구 집단 간의 유전적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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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enetic distance.png
동아시아인(해당 도표에서는 Northeast Asian, 즉 동북아시아인으로 표기되어 있다.)에 속하는 민족과 그 밖에 여러 민족의 대분류와 유전적 거리를 알 수 있다.[6]
아시아에 존재하는 39개 인구 집단 간의 유전적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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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enetic_tree_of_39_Asian_populations.png
연구진은 남중국(South Chinese) 인구 집단에서 한족 혈통과 소수민족 혈통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많은 표본을 확보하지는 못했기에 소수민족 혈통 쪽으로 더 치우친 결과가 나온 걸 수도 있다고 밝혔다.

간혹 일각에서 초기 도래인으로 추정되는 야요이인이 중국에서 일본을 향해 다이렉트로 왔으며 한반도와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주장은 이미 위의 제시된 유전적 유사성 학계 발표만으로도 깔끔히 반박되지만 더 디테일하게 반박하자면 중국계 야요이인의 주요 이동경로 세 가지인 1. 중국 화남지방에서 전파, 2. 화중지방에서 전파, 3. 산둥반도에서 전파 이 세 가지 모두 현재 학계에선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선 전파가 불가하다는 것이 학계 주류이다. 특히 산둥반도에서 전파된 경우는 지리상으로 한국의 황해와 바로 맞닿아있고 육로로도 한반도 북부와 직접 연결되어 있기에 한반도를 절대적으로 거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야요이 시대가 기원전 5~3세기 경에 시작한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항해술과 선박 제조술이 당대 기술력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고도로 발달하여 한반도를 수백년간 황해~남해~동해안을 쭉 거치며 절묘하게 계속 피해갔다는 지나치게 비약적인 주장을 하지 않는 이상, 한반도를 통해 이주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다. 참고로 일본이 그런 선박기술을 그 옛날 청동기 시대에 갖고 있었다는 사료는 전무하다. 즉, 한반도 토착민이 도래인으로서 일본 열도에 진출했다는 명확한 경로를 유전적 유사성을 넘어서 역사적, 지리적으로도 확실히 입증해준다.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현대 일본어는 류큐어를 포함하는 일본어족(Japonic languages)에 속한다. 현대 일본어족은 다른 어족과 연관성이 없으며, 고립어에 가까운 속성을 띄고 있다. 그래서 그 기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는데 대표적인 학설로는 부여계 어족 동계설, 한반도 중남부 기원설, 일본 열도 큐슈 기원설 등이 있다.

한국어 동계설은 일본에서도 에도 시대부터 있었던 유서 깊은 주장이며, 주로 한국어와 일본어의 매우 비슷한 문법에 그 근거를 둔다.

부여계 어족 동계설은 재레드 다이아몬드, 크리스토퍼 벡위스(Christopher Beckwith) 등이 주장하는 학설로 일본어의 일부 수사 백제어, 고구려어와 비슷한 것을 두고 부여- 고구려- 백제- 일본어를 하나로 묶어서 부여어족이라는 하나의 어족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유전적 유사성과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교류에 대한 고고학적 정황이 있다. 여기서 벡위스는 신라어와 그 후계 언어로 추정되는 현대 한국어는 부여어족과는 언어동조대 이상의 관련성을 띄지않는다고 주장한 반면,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한국어도 부여어족의 일부라고 주장했다는 차이가 있다.

한반도 중남부 기원설은 대표적으로 알렉산더 보빈이 주장하는 학설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고대 한반도 중남부에는 현대 일본어의 기원이 되는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북쪽에서 내려온 고대 한국어족 집단에 밀려 흡수되었거나 일본 열도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본 열도로 이주한 집단이 도래인이고, 이 도래인이 일본 열도에서 야요이 시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학설은 한국 신화인 단군 신화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고,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같은 언어(고대 한국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 자칫 오해할 수도 있지만,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설이다. 오히려 임나일본부설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학설로도 볼 수 있는데, 현대 일본인(야마토 민족)은 고대 한반도에서 이주한 민족이라는 학설을 더욱 탄탄하게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즉, 임나일본부설과 일본 극우사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주류 학설처럼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한 것이 옳다는 학설이다.

3. 특성

일본인들은 가 작다는 인상이 있는데 이는 한국인과 비교했을 때 사실이다. 일본인의 평균 키는 동아시아 전체로 놓고 보면 그렇게 작지는 않으며 오히려 평균 이상이다. 한국인이 동아시아인 중에서 평균키가 가장 크며, 아시아 전체로 확대해도 인종적으로 백인에 가까운 서아시아인과 함께 가장 크기 때문이다.[7]

2019년 국제적인 만 19세 남녀 평균 신장 조사로는 한국 남성 175.5cm, 한국 여성 163.2cm이었고, 일본 남성 172.1cm, 일본 여성 158.5cm이었다. # 또한 일본인은 상대적으로 작은 사람이 더 눈에 보인다. 예를 들어 181cm 이상이 기준일 때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더 많고, 165cm 이하가 기준일 때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더 많다. 그리고 한국은 본래 남한 지역보다 큰 평균 키를 가졌던 (지금은 영양상태 때문에 아니지만) 이북 지역과 단절된 걸 감안하면 한국과 북한이 통일하고 북한 주민들의 영양상태가 안정되면 더 차이가 날 가능성이 높다.[8]

일본인의 평균키가 한국인의 평균키보다 작은 이유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육식금지령을 천 년 넘게 시행했던지라 그 영향이 어느 정도 남아있어서 그런 것도 있고, 일본이 섬나라여서이기도 하다. 보통 섬나라는 대륙 국가에 비해 평균 키가 작은 편인데, 인간을 비롯한 중대형 포유류들은 섬 왜소화 현상이라고 해서 오랜 세월동안 대를 이어서 사방이 고립되고 좁은 지형을 가진 섬에 거주하면 키가 작아지는 유전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닌 동물의 사례지만 지금은 멸종한 일본늑대가 당장 일본 열도내에서 고립된 중대형 포유류가 섬 왜소화를 거친 실제 사례이다.

일본 열도의 크기가 섬나라치고는 상당히 크고 독일의 영토 면적보다 좀 더 큰 수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호주처럼 한 대륙을 통째로 차지하는 스케일은 아니다. 지형 자체도 중요한데, 일본 열도가 사방으로 촥 펼쳐진 형태보다는 가로폭이 매우 좁으면서 위아래로 긴 모양새에 열도 내부의 산지도 80퍼센트 이상이다보니 각 지역별로 고립되기도 더더욱 쉽다. 또한 현대에는 비행기 선박 등의 이동수단이 많이 발달하긴 했지만 전근대의 섬나라는 이런 이동수단이 없거나 발달이 미미했기 때문에, 한번 사람이 들어서면 다시 나오기가 쉽지 않고 전부 육로로 연결된 대륙 및 반도에 비해서 외부와의 인적 교류가 훅 적어지는 특성이 분명 존재한다.

이를 종합해보자면 수천년 이상의 세월이 누적되면서 그 지역만의 왜소화 현상을 어느 정도 겪을 수 있다. 더불어 유럽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잉글랜드 지역 앵글로색슨 계열 영국 성인 남성 평균 신장은 국내 연구 기준 175.5cm, 세계 보건연구자 네트워크 기준 영국 전체 남성 평균신장은 176.4cm로 영국인의 평균 키는 게르만 백인들 중 가장 작은 편에 속하며[9], 라틴계 백인 중 가장 큰 편인[10] 프랑스인(175.6~177cm)과 비슷하다. 또한 다른 게르만계 민족인 독일인(178~180cm), 노르웨이인(182cm), 네덜란드인(184cm)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일본 서브컬쳐 캐릭터들의 키나 일본 아이돌들의 키도 한국인들 기준에서는 볼 때 꽤나 작은 편이다. 각종 서브컬처에서조차 여성 캐릭터들의 프로필만 봐도 한국과는 달리 170cm 이상의 캐릭터는 드물다. 현실에서는 평균 키 170cm 이상의 여성 아이돌 그룹이 한국에서는 종종 있는데[11] 반해 일본에서는 업계를 통틀어서도 보기 드물다. 남성도 서브컬처의 남성 캐릭터나 현실에서 남성 아이돌들의 신장을 살펴보면 172cm 내외가 다수로 티가 충분히 날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문화적인 부분의 영향도 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봤을때도 일본은 키나 체격이 있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아담하고 슬림한 체형을 가진 미소년/미소녀 계열의 연예인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실제로 일본 연예계 전역을 둘러봐도 근육질의 인기 남성 연예인이나 육감적이고 늘씬한 글래머 인기 여성 연예인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오히려 다소 근육질이거나 체격이 있는 연예인을 일본 방송에서 타 출연진들이 신기하게 바라보는 리액션이 종종 있다. 서구권에 비해서 좀 더 슬림한 미소년 계열 연예인을 선호하는 한국조차도 일본에 비하면 확실히 체격적으로 좀 더 두터운 편이다. 한 마디로 일본 전역에 깔린 상대적으로 아담한 인물들을 좋아하는 문화에 의해 다수 소비자인 일본인들의 취향이 연예계나 서브컬쳐 계통에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다만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이후 2011년까지는 한동안 일본인의 키가 한국인의 키보다 더 컸으며, 한국인의 키가 일본인의 키를 다시 역전한 것은 2012년으로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본이 한창 경제 발전하고 있던 시절에 태어난 일본인들과 6.25 전쟁 이후 배고픈 시절에 태어난 한국인들의 키를 비교해보면 동세대의 일본인들의 평균 신장이 더 크다. 이런 키의 역전 현상은 2020년대 현재 50대부터 90대까지 수십 년 넘게 지속되었다. 예를 들어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인 2008년 한국 산자부와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발표한 통계 기준으로 당시 일본인 남성의 40대 평균 키는 171.1cm이지만 한국인 남성의 40대 평균 키는 168.6cm이다. 50대는 일본은 168.8, 한국은 166.1. 사실 성인 50대 - 90대까지 인구 통틀어서 키 평균을 내보면 해방 이후 2011년까지 계속 꾸준히 일본 남성이 한국 남성보다 키가 컸다.[12] 이는 일본 제국이 패망한 이후 태어난 세대부터 1970년대 초반 출생자까지는 일본인의 평균 키가 한국인의 평균 키보다 더 컸기 때문.[13] 결국 경제 성장과 그에 따른 후천적 요인이 유전적 요인을 뛰어넘어 일정 기간 동안 일본인의 키가 한국인의 키를 앞서게 된 것이다.[14]

그렇지만 그 일제강점기조차도 한국인들의 신장이 더 크다는 자료는 많다.
파일:attachment/일본인/japanese_korean_height_1937_colored.jpg
1937년 한국인과 일본인의 지역별 평균 신장
자료의 1937년이면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쌀 수탈을 겪을 대로 겪었다는 것인데도 신장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의 자료 뿐만 아니라 구글링을 조금만 해보면 굶어서 야윈 조선인 징용자와 상대적으로 잘 먹었을게 뻔함에도 조선인 징용 노동자보다 키가 작은 일본군 조종사가 같이 서 있는 사진을 볼 수 있다.
파일:attachment/77_09_2584_ddody11.jpg
예시 사진. 왼쪽은 조선인 징용 노동자, 오른쪽은 일본군 조종사다.
그러니까 이를 해석해보자면 안 그래도 영양 상태가 나빴던 터에 6.25 전쟁 이후 한국인들은 경제적 문제로 신장의 상승이 뒤쳐졌던 데 비해 일본인의 영양 상태는 발 빠른 경제 성장 덕분에 풍족해져서 한 동안 평균 신장에서 앞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산업화 국가 중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160cm에서 172cm로) 가장 많이 자랐다고 하니까. 한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영양이 충분하다 못해 과잉이 된 지금에 와서는 한국인의 20~40대 평균 신장이 일본인의 20~40대 평균 신장보다 더 크다. 경제력으로 인한 후천적 격차가 사라지자 다시 한국과 일본 양측의 본래 신장이 제자리를 찾아간 셈이다.

여하튼 현재도 일본인의 평균 키는 동양인 전체 중에서는 평균이상이다. 한국인의 평균 키가 동양인 중에서 가장 크고, 그 다음은 일본인, 싱가포르인, 대만인이 차지한다. 참고로 한국 남성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의 통계는 전수 조사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는 점에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들은 치열이 고르지 못하거나 덧니가 난 사람에 대해 개의치 않으며 오히려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다. 최근에 들어서 미국, 한국과 같이 교정을 선호하는 쪽으로 바뀌는 추세이긴 하지만 몇년전만 하더라도 일반인뿐만 아니라 치열이 고르지 못한 연예인들조차 치아교정, 라미네이트와 같은 미용 목적의 치료를 대부분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런 취향이 방송매체, 영화등을 통해 전달되면서 한국에 비춰지는 일본인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덧니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덧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친근함, 귀여움 등이 있다. 덧니로 유명한 연예인은 이타노 토모미가 있다.

4. 역사

일본 열도가 야요이 시대에 이르러 고고학적으로 짧은 기간동안 문명의 급격한 발전이 있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조몬 시대엔 관개 농업조차 제대로 못 하고 석기만을 사용하다가 야요이 시대에 와서 농업은 물론 순식간에 철기까지 능숙하게 다룰 정도로 양 시대간의 기술력 격차가 눈에 띄게 동떨어져 있다. 애초에 야요이 시대가 고고학적으로 크게 주목받은 이유는 야요이 시대 초기에 나타난 발전 양상이 비정상적으로 급격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일본(야마토)이 헤이안 시대를 거치는 동안 원주민들인 조몬계 집단(에조)은 열도내에서 별개의 부족 사회인 채로 존재했으며, 반복되는 일본의 압박에 지쳐 투항하고 복속하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일본이 재정적인 문제로 에조 정복을 멈춘 시기에도 일본에 복속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한 에조 지역의 부족들(에미시)이 자발적으로 복속하는 일이 상당히 많아졌다.

조몬계(에미시)가 자발적으로 복속한 이후 사회 속으로 스며들어 그 권역내에서 후손을 낳고 살았다면 당연히 야마토측에선 쓸데없이 국력을 소모해가면서 싸울 필요가 없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몇 차례의 폭동이 있긴 했으나 야마토측이 강경책과 회유책을 동원하여 최종적으로 진압하였고 완전히 스며들었다.
파일:external/www.hk-curators.jp/c04040a43a7be876882b33489a2922df.jpg
고전후 시대 일본에서 그려진 그림으로 야마토계(야요이계)와 동북부의 에조계가 고대 이후에도 서로 다른 문화권이었음이 확인되는 미술 자료다. 오른쪽에 갑옷을 입은 장수가 야마토계고 왼쪽에 있는 3명이 에조계이다.

또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도래인이 중심이 된 야요이계가 문화적으로 동부의 조몬계를 완전히 흡수한 시점은 엄연히 석기시대나 먼 옛날인 기원 전의 고대가 아니다. 위에 언급된 것처럼 헤이안 시대까지만 해도 조몬인 계통 집단은 에조(에미시)라 불리며 열도 동북부 지역에 부족 사회로 존재했으며 시기적으로 따졌을 때 당시 한반도는 남북국 시대 말에서 고려 초기였다. '과거로 갈수록 부계가 전멸하고' 등의 의견은 아주 오래된 상고시대라면 몰라도 이미 고전후 시대에 들어서 당시 사건들을 기술하는데 익숙하고[15] 본인들의 왕국도 건설한지 오래인 그 시대의 일본과는 거리가 먼 이론이다.[16]

시대적인 착오도 그렇지만 상당수의 조몬계 세력(에미시)들이 자발적으로 귀화한 기록, 심지어 그림들까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많이 간과한다. 애초에 노동력은 공짜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명분이 있는 게 아니라면 학살은 필요한 비용과 노동력을 고려했을 때 비효율적이다.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복속했는데도 죽여버린다면 전혀 복속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흔히 쇼군이라 부르는 정이대장군은 동북부 지방의 오랑캐(에미시)를 정벌하기 위해 천황으로부터 군권을 이임받은 무가의 수장이었다. 정이대장군은 오랑캐 정벌을 위해 마련된 군사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데다, 서일본의 천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고, 이런 이유로 후에 둘의 권력 관계가 뒤집힌 것이라 보고 있다.

그리고 조몬인의 후예인 아이누[17] 은 일본인(야마토 민족)과 문화적으로 멀었고 일본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1869년 보신전쟁에서 아이누족이 주축이 되는 에조 공화국이 멸망하고 나서야 홋카이도가 완전히 일본 제국 치하에 들어갔으며 당시 일본 제국에서는 아이누를 구 토인(旧土人)이라고 본토인들과 완전히 구분해서 불렀다. 이게 불과 120~30여년 전인 19세기 중후반의 일이며 한참 이후인 20세기에도 아이누인들 사이에서 '우리는 일본인들과 다르다!'식의 아이누 민족운동이 열도 내부에서 성행하기도 하는 등, 대다수의 일본인과 아이누(조몬계)간의 서로에 대한 정체성 구분은 이처럼 사람들 생각 이상으로 확실했다. [18] 일본어와는 완전히 별개의 언어인 포합어 체계의 아이누어 원형을 유지한 채로 지금껏 사용한다는 것도 가장 큰 예시이다.[19]

참고로 도호쿠벤 등의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아이누어가 과거 조몬계 언어의 가까운 친족 언어란 것은 역사적으로 명확하다. 도래인의 진출이 비교적 늦어진 도호쿠 지역의 경우, 조몬계 언어가 시기상으로 중세 초까지 사용되었고 이들 언어에서 차용된 일본어의 몇몇 어휘들이 현대 아이누어 어휘와 비슷하다는 것이 확인 가능하다.[20] 더 나아가서 조몬계 언어와 아이누어의 직속 관계를 여러 학자들의 중론을 빌어 유네스코에서 공인한 바 있다.
세월을 거치며 일본어족이 열도 내에서 확장되는 과정

고사기 일본서기로 대표되는 육국사들의 내용을 현대 시각에 맞게 정리해보면 혼슈 서부와 규슈 북부 지방에서 퍼지기 시작한 도래계 야마토 민족이 늦어도 4세기경에는 자체적인 정체성을 정의내렸다는 것이 기록으로도 확인되는 공통적인 중론이다. 오히려 너무 경도되어 임나일본부설이란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할 정도로 일본인에게 있어서 야마토의 정체성이란 상당한 편이다. 한국인으로 치면 고조선 삼국시대에 필적할 정도.[21] 디테일한 접근과 특정적인 사료가 충분치 않다면 '다른 문화권에서도 이랬으니 대략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다'라는 추측에만 머물 수 밖에 없다.

혐한 성향이 짙은 인터넷 이용자 중에는 조몬인에 대해 집착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애초에 그들의 후손격인 에조, 아이누인을 토인[22]이고 오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며 차별화 했던 근대까지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이제 와서 부랴부랴 조몬인을 찬양하는 건 너무 속내가 보이는 모습이다.

5. 인터넷에서 떠도는 일본 관련 루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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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국민성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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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며, 마찬가지로 타인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상당히 싫어한다. 와(和)라고 하는, 일본 문화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복잡한 특유의 정신 세계 때문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와(和) 사상은 "사회생활에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가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인들은 사회생활에서 기분이 나쁘더라도 되도록 미소를 잃지 않으려 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만약 자신이 기분이 나쁘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거친 말을 내뱉는다면, 그 문제와 관련이 없는 타인에게도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피해를 주는 것이 된다. 또한 이러한 행동은 일본 사회에서 와(和)를 깨뜨리는 것이기도 한데, 일본인들은 질서를 어기는 것을 경멸하는 수준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와(和)를 깨뜨린 이는 그 일대에서 사회생활이 어려워질 수 있다.

일본어에는 '공기를 읽는다'(空気を読む)는 관용구가 있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눈치'나 '분위기'에 대응되는데, 일본에선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눈치 좀 챙겨라', '분위기 파악 좀 해라' 수준이 아니라 국가의 법률 다음가는 정도로 중히 여겨지며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강요가 존재한다.[23] 이러한 면이 가장 자주 드러나는 부분이 사과 문화다.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과라는 것은 내 자신이 전적으로 타인에게 실례를 범하거나 책임 소재가 확실히 자신에게 있을 때 정중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명백한 잘못뿐만 아니라 '공기를 읽지 못한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큰 폐를 끼쳤다 여기며 수시로 사과하는 습성이 있다. 내 자신이 더 피해를 봤거나 오히려 분명히 내가 사과를 받아야 할 상황에서도, 도리어 그 피해자가 "내가 피해봤지만 나 역시 좋지 않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으니까" 하는 생각에 먼저 사과하는 엉뚱한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외국인의 시각에선 '친절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얌전하지만 지나치게 소심한 사람' 등으로 비칠 수 있는, 장단점이 명확하게 갈리는 양날의 검 같은 성격이다. 하지만 반대로 일본인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일본에 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기 나라에서 하던 대로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술을 벌컥벌컥 마신다면, 명백히 와(和)를 깨는 행동이므로 이상한 눈초리를 받을만한 일이다. 심하면 다른 나라에선 별 것도 아닌 행동을 일본에서 무심결에 했다가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일본에 여행을 왔다가 작은 법적 문제에라도 연루된다면 다시는 일본에 올 수 없게 된다. 일본은 관광객이 문제를 일으키면 강제 추방 및 영구 입국 금지 조치를 취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국인도 일단 일본에 들어왔다면 와(和)를 지킬 것을 요구받는 사회다.

얼마 전까지 죽창을 들고 덤비던 일본군 병사가 전후 가이드를 맡아서 자신들을 친절하게 안내하자 한동안 불안해 했다는 주일미군 병사들의 일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외국인의 관점에선 꽤나 불가사의한 국민성이다. 일본인들의 이러한 국민성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미국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마자 '일본인론'(日本人論)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와 사람들에 대한 모든 것들(역사, 지리학, 사회학, 언어학 등)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정도다.[24]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양뿐만 아니라 한국 중화권 등 같은 동양 사람들이 봐도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국민성이다. 심지어 같은 일본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표현이 솔직하고 쾌활한 성격이라는 인식이 있는 오사카 후쿠오카 지역 주민들도 자기 나라 특유의 폐쇄성과 생각/감정을 숨기는 문화를 이해할 수 없어한다.[25]

* 2. 메이와쿠 문화
1번 문단에서 언급된 와(和) 문화의 일환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삼가는 일명 ' 메이와쿠'(めいわく, 迷惑) 문화가 있다. 일례로, 지하철이나 엘리베이터와 같이 낯선 사람들과 함께 이용하는 곳에서는 절대 큰 소리로 떠들지 않으며 통화조차 삼가는 것이 기본이다. 그래서 일본인 하면 우수한 질서 의식을 떠올리는 외국인도 많다.

특히 메이와쿠 문화 중에서도 다테마에(建前, 겉마음)혼네(本音, 속마음)가 잘 알려져 있다. 일본 특유의 와(和)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비롯된 전통 사회 규범 중 하나로, 한국을 포함한 외국에서는 일본인은 겉과 속이 다르다며 이해하기 어려워 하기도 한다. 원래 인간이라는 동물 자체가 표리부동한 면이 있지만, 일본인의 그것은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선 정도다. 일본의 전통 사회 규범은 개인적 주장을 최대한 자제해 집단 내 갈등을 피하고, 원만한 대인 관계를 형성해 궁극적으론 집단의 단결을 추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다테마에 문화가 이러한 사회적 가치를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일본인은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다테마에를 정면으로 거슬러서는 안 된다고 교육 받는다. '아이소와라이'(愛想笑い, 웃는 척)나 '샤코지레이'(社交辞令, 발림말)같은 표현도 다테마에 문화와 관련 있다.

이러한 의식 구조는 중세 근세 700여 년간 일본 열도 무사(武士) 정권인 막부의 지배 하에 있었던 것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사대부와 같은 유교 식자층이 지배했던 동시대 한국, 중국과 달리 중근세 일본에선 무력을 지닌 사무라이가 지배층이었고, 이들은 당대 일본 사회 곳곳을 장악하고 즉결처형권까지 갖춘 특권계급이었다.[26] 특히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였던 100여 년간의 센고쿠 시대에는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에 사무라이에 대한 일본 민중의 두려움이 상당했고, 이러한 현실에 유연하고 융통성 있게 대처해 살아 남으려 했던 민중의 처세술이 현대까지 흔적으로 잔존해 있다는 것이다.

다테마에와 혼네의 구분 때문에 상대방의 진정한 마음과 의도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만, 일본 내에서도 사람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른 경향이 있어서, 타인과 대접을 눈에 띄게 달리 한다든가 목소리를 낮춘다든가 하는 방식을 통해 다소 노골적으로 본심을 드러내는 이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일반적인 한국인 이상으로 곧이곧대로 말하는 이도 존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세간의 과장된 인식과는 달리 다테마에는 '쏘아 붙이는 공격적인 말을 하지 않는 것' 정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렇듯 일본인은 진심을 털어 놓아 상대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기보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강조하는 쪽을 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일본 사회가 오랫동안 강한 자기 주장을 삼가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상대의 부탁에 대해 속으론 거절할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는 딱 잘라서 '아니(No)'라고 분명하게 거절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따금 국제사회에선 '싫어도 싫다고 말하지 않는다'며 비난 받는다. 예를 들어, 외국에서는 일본 기업과 거래를 할 때 "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라는 대답(다테마에)을 듣고 계약 성사가 눈앞인 줄 알고 희희낙락했다가, 이후 확인 전화 시 "그런 대답은 한 적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좌절과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유교의 영향으로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는 한국이나 중화권 기업에선 그나마 이해할 만하지만, 'Yes or No'가 확실한 서양(특히 미국)에선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 방식이기도 하다.
또한, 와(和) 및 메이와쿠 문화 탓에 정치권이든 기업이든 회의와 토론 등 의사결정 과정은 사실상 형식적이고, 간부급에서 사전교섭을 통해 내부적으로 이미 결론을 내려놓기에 이의제기가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이를 네마와시(根回し, 뿌리 솎아내기)라 부른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혼네를 평소에는 마음 속에만 담아두다가 특정한 공간에서 특정한 사람들과 있을 때만 훌훌 털어버리는 경향도 있다. 단골 이자카야 등에서 친한 친구나 가게 주인과 뒷담화하는 일은 만화나 애니메이션 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흔히 보이는 풍경이다.
1, 2번 문단이 무색할 정도로 일본인들은 해외로의 전쟁과 약탈에서 상대국 혹은 상대민족에게 인류 역사상 손에 꼽힐 수준의 잔인한 면모들을 보였다. 중국 대륙 한반도에 대한 일본인들의 침략은 고대와 중세,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고 그 잔인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잔인한 행적은 지속되어 일본제국 수뇌부는 귀축영미로 일본 민간인들을 세뇌시켜 마치 미국과 영국이 침략한듯이 선동시켜 많은 민간인들을 전쟁에 동원해 수뇌부의 이득을 노려왔다. 거기에 강요와 통치로 여러 자살병기나 자살공격을 강요해 생명을 천하게 여겼었다. 한일병합에 이르기까지 남한 대토벌 작전 등을 통해 수많은 조선인들을 죽였고 제암리 학살사건 간도 참변, 관동대지진에서의 조선인 학살에서도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거나 다쳤고 고문을 당했다. 일본군 위안부, 조선인 강제 징용 문제 역시 간악함을 볼 수 있는 경우이다. 중화민국 역시 난징 대학살, 충칭 대공습 등 현세의 지옥들을 일본군을 통해 겪은 바 있고, 일본군을 상대한 미군 역시도 마닐라 대학살이나 바탄 죽음의 행진,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 등과 같은 잔혹함을 겪은 바 있다. 동남아시아 역시 일본군의 침략을 받으면서 상당한 수의 일본군 위안부와 침략피해를 당했다.
이는 고대 시절부터 전근대에 이르기까지 구축해온 일본인들만의 독특하고 치밀한 본인 집단중시와 '일본인'이 아닌 이외의 개인 혹은 집단(외부인 또는 외부 집단, 소토)에 대한 강한 경계심과 배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인권 의식과 글로벌 사회가 발달하기 이전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여타 문명권 역시 타 문명권을 배척하거나 경계하거나 침략하는 행위는 수두룩했다.
다만 유독 본인들 이외의 타 문명권, 국가를 상대로 도가 지나친 잔혹한 행위들을 반복한 것은 위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특정 집단 내에서의 집요할 정도로 '와'를 중시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말 그대로 이 '와'의 정신이 전근대의 일본에서는 일본인들 사회에서만 통용되었다는 말이다. 즉 다른 문화권과 국가의 사람들은 '일본인'이라는 특정 집단에 속하지 않았기에 '와' 정신을 지킬 필요가 없었으며 본인 집단 규격외의 것들은 따돌리고 배척하거나 기피하는 현상이 유독 극심하다보니 자연스레 공격성까지 비치게 된 것이다. 특히나 '일본인' 자신들이 상대에 비해 수적으로나 양질적으로나 우세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이 공격성은 지나칠 정도로 가열화되고 조직의 분위기나 암묵적인 룰을 닥치고 따르는 습성이 있어 '일본인'이라는 조직 내부의 어느 한 명도 이를 제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현재에도 잠재적으로 남아있는데 그것이 바로 일반적인 따돌림과는 궤를 달리하는 ' 이지메' 문화이다. 한 명 한 명의 일본인은 집단 내에서의 '와'를 무의식적으로 중시하기에 기본적으로 얌전하고 예를 갖추는듯 하지만 조직 내부 혹은 아예 본인들의 조직에 어울리지 못하고 튀는 상대적 약자, 소수세력에 대해 '내가 속한 조직에 반대되는 자이고 이런 자들은 우리 조직의 분위기와 룰을 흐트리기에 배척하고 공격해야 마땅하다'라는 무의식적인 인식으로 이지메가 시작되는 셈이다.
물론 전시에 돌입한 군인들의 정신상태는 대다수의 일반 민간인들과는 다르다고 할 수도 있다.[27] 간혹 731 부대 같은 2차 대전기의 전쟁학살행위에 빠져나오지 못해 일본내에서 연쇄 강간살인을 저지른 고다이라 요시오 같은 자도 있다지만 이는 일본인의 잔학성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PTSD같은 개인의 정신적 문제로 봐야함이 옳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일 뿐, 기본적으로 나 자신의 마인드와 감정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개인과 타인의 차이를 존중하는 문화가 일찍이 성립된 서구권의 시선에선 제일 심한 편인 일본을 제외하고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이와 비슷한 궤로 보인다고 한다. 동아시아 국가들 특유의 집단성과 조직의 룰을 중시하는 획일화된 분위기가 정도의 차이일 뿐, 어느정도는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당장 한국의 집단따돌림 문제와 특유의 눈치 분위기 문화, 튀거나 상대적으로 다른 행동을 보여주는 대상에 대한 경계심은 일본만큼은 아니더라도 꽤나 퍼져있는 사회분위기다.
근현대 들어서는 한국에서도 보여주기도 한다. 본래의 유교적 질서와 더불어 줄곧 이어져 내려온 징병제 시스템에서 비롯된 서열을 강하게 중시하는 문화가 서로 뒤섞여와서 소수를 향해 비교적 완곡하게 표현하거나 비꼬는 식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일본인과는 다르게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심하게는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기도 하는 경우가 상당수 존재한다.[28]
잔악함까지는 아니지만 겉으로 얌전한 모습과는 다르게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일제시대는 물론[29] 현대에도 한국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 #까지 가하면서 민도 및 청결을 강조하는 모습과 대조되게 일본에서 1970년대까지 시민 의식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을 때에는 포이스테(ポイ捨て)라 하여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마구 버리는 일이 매우 잦았다.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현재진행형으로도 시부야 밤거리나 오사카 골목길처럼 대도시권 기준으로 보면 더러운 곳이 많다. 사진 링크 첨부. 심지어 일본의 지저분한 거리를 한국의 거리처럼 조작한 사례도 있다. # 사실 다른 나라에서도 일본의 도시들 이상으로 지저분한 모습을 많이 보이지만,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도까지 내세우면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미나마타병, 카네미 유증사건같은 사람들의 무책임한 면모로 인해 발생한 각종 산업재해도 1950년대 - 1960년대에 꽤나 빈번하게 벌어졌던 일이다. 이 부분은 일본이 선진화되고 환경오염이 사회 논쟁거리가 되면서 개선되었지만 이게 해외로 불똥이 튀어서 1960년대 여행자유화 시기부터 1980년대까지는 일본인들이 어글리 재패니즈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세계에서 매너가 안 좋기로 유명했다.[30] 여하튼 어글리 재피니즈라는 이미지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에 대대적인 계도 캠페인으로 일본인 여행자들이 그런대로 좋은 평을 들을 정도로 개선되었으며 현재 일본 특유의 깨끗한 길거리나 도시 풍경의 이미지를 갖기 시작한 때도 이 시기부터이다. 이것을 1990년대에 한국인이 이어받다가(때마침 한국이 여행자유화 되었던 시점과 맞물린다.) 2000년대 와서는 중국인이 이어받았다. 시민 의식과는 별개로 2000년대 이후 현재, 세계에서 짝퉁이라며 악명이 높은 메이드 인 차이나처럼 1960년대까지는 메이드 인 재팬이 악명이 높았다.
한편 상기한 것과 같은 역사상의 잔악한 행적들 및 이중적인 면모나 역시 상술한 메이와쿠 문화의 존재로 인해서, 서양과 한국에서는 일본인에 대해서 남을 계략으로 속이는 데에 능한 민족이라고 보는 스테레오타입이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속된 말로 사기꾼 기질을 민족성으로 갖고 있다는 스테레오타입이 존재하는 것인데, 이는 남을 계략으로 속이는 것을 지혜로운 행위로 판단하는 기질로 인해서 역시 사기꾼 기질을 민족성으로 지니고 있다고 서양과 한국으로부터 비판받곤 하는 중국인과도 비슷한 부분이기도 하다. 차이가 있다면 이러한 스테레오타입에 대해서 일본인은 자기들을 사기꾼으로 몬다며 불쾌해하는 반면 중국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당연시한다는 것 정도.
개인주의 더치페이가 당연시되고 있다. 실제로도 일본인은 식당에서도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메뉴를 시켜서 먹는 경향이 강하며, 이 사람들의 식사 문화를 설명하는 단어가 이치닌마에(一人前, 각자의 몫. 히토리마에로 읽기도 한다.)일 정도이다. 심지어 회식조차 더치페이로 내기도 한다. 연인 사이에서도 무조건 더치페이를 한다카더라가 한국에 나돌아다니고 있지만 그쪽은 사바사다. 한국사람이 자기 나라 사람을 '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자주 부르는 것과는 달리, 일본인들은 자신의 나라 사람을 '일본인'이라 객관적으로 칭하는 경향이 있다. 외국에서도 이를테면 튀르키예 그리스 같은 남유럽계 국가나 중동 및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공동체 문화가 남아 있는 지역에서는 자신의 나라를 부를 때 우리나라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은 문화가 많이 개인주의로 변질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과 비교했을 때 개인주의라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오히려 서양인들은 일본이 아직도 공동체주의 사회라 여긴다. 개인이 뭘 하던 상관은 안 하지만, 공동체가 약속한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던지, 혹은 저항하는 순간 바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오타쿠 히키코모리 같은 사회 문제도 일본에서 가장 먼저 생겨났다. 이렇게 '고립될 자유'를 허용하는 예시는 캡슐호텔이나 외톨이 식당의 사례로도 나타난다.
즉, 유럽인의 개인주의는 공동체라는 개념이 없이 상대방을 개인으로서 서로가 동급으로 보는 시각의 개인주의이지만, 일본인의 개인주의는 공동체사회의 규율(서열 등)에 따르는 이상, 서로를 간섭하거나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보는 시각의 개인주의이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유럽식 개인주의는 커다란 집합 틀이 없는 상태에서 수많은 교집합을 만드는 식, 일본식 개인주의는 커다란 집합 안에[31] 온전히 들어가 있으면서 서로간은 교집합 없이 떨어져 있는 모습으로 그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사회적 계율이나 분위기, 유행에 철두철미할 정도로 충실한 것이 특징.
결국 이 역시 와 문화의 영향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개인주의 문화는 서구권의 개인주의와는 같은 것으로 보기에는 매우 어렵다. 설문을 해봐도 정작 한국인들 스스로가 더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
위생 관념이 보편화된 요즘은 그렇게 특이할 것도 없지만 목욕을 자주 하지 않는 게 당연시되던 옛날에는 목욕이 습관화된 일본인들이 상당히 특이하게 비쳤다는 말이 있다.
일본인은 집에 욕조(風呂)가 없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워 할 정도로 좋아한다. 그것도 반신욕 같은 것이 아닌 푹 담그는 것을 선호하기에 욕조의 깊이가 타국의 것보다 1.5~2배는 깊은 엄청난 모습이 일반적. 일본은 쓰시마 난류의 영향으로 연중 강수량이 고르므로 씻을 물이 매우 흔하고, 온천도 아주 많기에 일찍이 목욕문화가 많이 발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일본인들에게 목욕이란 단순히 씻는 실용적인 목적을 떠나 일종의 즐거움, 안정감을 느끼는 취미 의식에 가깝다. 변기와 욕조가 별개의 장소로 분리된 것은 기본이며 욕조의 목욕물을 계속 따뜻하게 유지해주는 특수한 덮개나 온도조절기 등 각종 독특한 욕실용 도구들에 한국인들이 문화충격을 느낄 정도.

물 아끼는 것에도 정평이 나 있는데 손 씻는 물을 변기 물로 재활용하는 기술이 보편적이고[32] 목욕물은 가족들이 재사용한다. 목욕물을 타인이 재사용한다는 것이 이상할 수 있으나 워낙 자주 씻는데다 때를 미는 문화도 없고 실용적인 목적이 아닌 즐거움을 위해 목욕을 하는 경향도 있는 만큼 별 상관은 없는 듯. 입욕 전 미리 샤워를 하고 입욕하는 문화가 보편적이기에 물을 돌려 써도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오랜 기간 불교와 전통종교인 신토를 일상적인 신앙으로 유지하고 있기에 범신론 혹은 다신론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리고 언어도 전체적으로 불교의 색채가 매우 짙다. 한국이 조선 시대에 불교가 한동안 배척당했고 중국은 한족 왕조가 대개 유교를 강조한데다가 결정적으로 공산화되면서 상대적으로 불교 어휘가 덜 쓰이게 된 데 비해 일본은 불교 어휘가 더 자주 쓰이고 많이 쓰였다.
특히 범어는 더욱 그렇다. 일본어의 경우를 보면 칙쇼라는 욕도 기원이 불교 용어인 축생이다. 축생, 아수라, 사바, 왕생[33], 꼬맹이를 속되게 이르는 가키나 코조도 불교 용어인 아귀 동자승이라는 뜻이고, 여성을 속되게 이르는 아마라는 단어도 비구니를 일본식으로 훈독한 단어이다.
이렇듯 불교 용어가 일본어 곳곳에 있어 유교적 뉘앙스가 베어있는 한국어[34] 중국어와는 다르다고 한다.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 공휴일도 아닌데 불구하고 그냥 노는 날로 인식하는 정도이다. 심지어 할로윈이 무슨 의미로 있는 날[35]인 건 물론, 크리스마스가 누구의 탄신일인지조차 모르는 건 기본이며 서양과 한국에서는 비종교인들도 아는 부활절의 존재는 아예 모르는 경우가 많다.
기복신앙은 어떻게 보면 한국보다 더 심하다고 볼 수 있다. 신정에 신사나 절에 가서 참배하는 인파만 봐도 경이로운 수준.
허나 세속주의가 유독 강한 동아시아의 특성상 일본도 예외는 아닌지라 정교분리가 철저하고 극단적인 종교 광신도의 비율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랫동안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고 지금도 기독교의 교리가 정치 사회에 적잖게 영향을 주고 있는 유럽, 국교로 지정한 역사는 없다지만 오히려 독실한 교인의 비율로 치면 유럽보다도 더 한 경향이 있는 미국과 다르게 종교가 개인의 가치관과 국가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경우는 없는 편.
일본인의 개인주의가 서구인의 개인주의와 다르듯, 일본인들의 국가관이나 애국이라는 개념의 형태는 매우 특이하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국가관은 우리의 공동체 주의를 확대한 것과 같고, 중국인의 국가관은 중화 사상을 오래 유지해 온 만큼 때때로 자신과 국가를 일치시키기 까지 하며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자부심이 남다른데, 일본인은 이들과 엇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일본이 고대엔 섬이라서 주변국의 침략을 받지 않았고, 타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먼데다 남북 전쟁 시대에 제국주의 테크를 타서 식민지가 되는 것을 피했던 근대 제국주의 시절, 높은 경제력으로 타국의 경제력에 지나치게 좌지우지되는 것을 피한 현대에서까지 철저히 국내를 방어해오며 일본인들을 지켜주었기에, 일본인들의 국가관은 한국인이 민족주의 사상으로 물든 개발독재 시대를 지나기 전까지 유지해왔었고, 별종인 독일인을 제외한 유럽인들의 국가관에 가까운 국가관인 '우리 가족이랑 우리 이웃사촌들, 그리고 이들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재산과 땅은 우리가 지켜야지, 내가 안지키면 누가 나 대신 이들을 지켜주겠어?'와는 사뭇 다른 '이 열도가 아니면 우린 결국 침략에 항상 노출되고 말 거야. 우리가 계속 평화와 번영을 누리도록 이 곳을 지켜 내야 해!'에 가깝다. 일본 땅이 조국 땅이니까 지킨다기 보단, 자기들이 안전히 숨을 수 있는 성과 같은 땅덩어리니 잃기 전에 나서서 지킨다는 것. 일본인의 국가관은 개인과 국가, 그리고 역사를 별개로 생각해 어떤 정치적 사상이나 이념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경항이 있다. 군국주의 시절이 유독 튀는 시절이었다.
일본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직후 민주주의와 함께 평화주의를 강제로 이식받았는데[36], 이것이 반세기동안 현대 일본 사회에서 생각보다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기존의 일본군이 강제 해체되고 징병제가 금지되었으며, 문민통제도 상당히 철저하게 지켜지는 등 일본 사회는 제2차 세계 대전 전과 비교했을 때 그야말로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를 이루어 냈다. 사실 징병제로 대다수의 남성이 병역을 이행하고, 한민족인 북한과 반세기가 넘는 기간동안 체제대결을 벌이고 있는 한국인에 비해, 현대 일본인들은 전쟁, 과거사, 국가관에 대해서 큰 혼란에 빠진속에 서서히 잊혀져 무감각해졌다고 봐야한다.
물론 일본에서 극히 소수를 차지하는 신우익주의자들은 전후부터 현재까지 준동해오고 있으나 대중의 무관심과 일본 공안의 감시로 큰 사고는 못치고 있다. 미시마 사건이 그나마 한 예외라고 할 것이다.
2010년대 들어 일본의 우경화가 가속화되면서 정세 변화,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이랑 잦은 외교충돌이 일어나면서 우익세력이 점점 더 커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현대 일본인들 대다수는 20세기때 일본 제국와 달리 개인주의가 심화 되면서 상술한 이유로 국가적인 움직임에 진지한 관심이 적고, 한국 등과 달리 역사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민족정서를 가질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무리 골수 우익일지라 해도 2015년 일본 징병제 반대 시위를 보면 20세기 일본 제국과 달리 시각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크게 보도되는 극우시위 현장을 가보면 시위대들이 경찰들에게 고립되어있고 일반 시민들은 그들에게 눈길도 안주고 지나쳐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차별을 반대하는 시위가 더 동조를 받으면 받지... 하시모토 도루마저도 헤이트 스피치 금지, 반전을 내걸고 있는게 현실이다. 한국에서 크게 보도된 새역모 등의 역사왜곡 교과서 논란만 보면 일본의 과거사 부정이 점점 극으로 치닫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십상이나, 새역모 교과서의 채택률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일본은 2차대전과 전쟁범죄에 관한 역사교육을 안해왔는데, 탈구입아를 하는 판에 이러다보면 아시아 주변국들에게 외면받을 수 밖에 없는 추세에 따라 점점 중립적으로라도 교육을 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어가고 있다. 또한 일본은 단카이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강한 편이다. 위안부 문제가 이렇게 큰 국제적 이슈가 된 데에는 김학순 할머니의 용감한 증언과 우리나라 정부의 노력도 있지만, 일본 아사히 신문 등 일본의 양심있는 진보 지식인들의 기여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일반 일본인들과는 다르게 ' 일본회의' 등 일부 우익계열에서는 일본을 다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회복시키는 것이 '일본을 되찾는 길'이라고 주장하며 역사 수정주의적인 관점을 내비치고 있고 아베 내각도 그런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동시에 이 세력은 자민당 내에서도 우려가 나올 정도로 엄청난 친미 성향이면서도[37] 친이민, 친 경단련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본 우익의 이미지인 신우익과는 궤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020년대에 들어 자민당 내 온건파에 속하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집권한 이후로는 이러한 역사수정주의적 행태가 많이 줄어들었다. 물론 아직도 일본의 우익 세력들이 구설수에 오를 만한 행보를 종종 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과거사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행태는 일절 보이지 않고 있다.
정치에 관심이 심각할 정도로 없다. 이는 위의 과거사 무관심과 거의 연관되는 부분으로, 애시당초 사회과목을 안배우다보니[38]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자국민에게 우민화 정책을 성공한 국가이다. 예를들면 꽤 극단적인 경우로 한일무역분쟁이 터진줄도 모르는 젊은층도 많았는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점에 젊은층을 필두로 공차에서 발매한 버블티가 전례없는 히트를 치기도 했으니.. 입헌군주제 자유민주주의를 정치체계로 삼는 일본이지만, 우민화 정책으로 인해 이는 국가의 방향성을 정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민으로서 자각을 가지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니 안타까운 상황이다.
이는 단순히 젊은층의 문제뿐만 아니라 꽤 나이가 있는 30대, 심하면 중년까지 아예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2019년 총선의 투표율이 고작 48%다. 반대로 대한민국의 2022년 20대 대통령 선거가 무려 77%에 육박한 걸 보면 정말로 관심이 없다는 게 절실히 체감된다. 호사카 유지 교수의 인터뷰에 따르면 일본 국민들의 절반 가까이가 지지 정당이 없을 정도로 일본인들은 자국 정치를 남의 일로 취급한다.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 일본의 우경화를 부추긴 한 원인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에 비해 역사의식이 없다시피하고, 국가가 나서서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한국의 트라우마인 일제강점기조차 일본인들은 그 자체를 모르거나 한국 침략이 대강 있었다 수준으로만 안다. 국가적 수치를 가르치는 것에 자랑스러움까지 느끼는 독일과는 대조적. 괜히 소란 일으키지 말자거나 남에게 피해 입히지 말자는 일본 특유의 국민성도 이런 기현상에 한 몫 했을 것이다.
일본 문자 구조부터가 영어와 맞지 않을뿐더러 일본어의 음운 구조적 한계 때문에[39] 일본인들은 영어 단어를 상당히 특이하게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본은 무슨 말이든 두 음절에서 네 음절 이내로 축약해서 부르는 문화가 있다 보니 영어권 사람들은 물론 한국인조차도 이게 어느 나라 말인지 물음표를 띄울 정도로 일반적인 영어와는 괴리된 독자적인 발음을 구사한다. 공교육 또한 영어를 필수적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일본인들은 사실 영어가 없어도 서로 살아가는 데에 지장이 없는 수준이라 전체적으로 영어 구사력이 미흡하다. 일본 인구는 한국 인구의 2배가 훨씬 넘는 대규모 국가다. 맥도날드(믹도널즈)를 마구도나루도로 부르는 농담은 유명하다.[40] 또한 알파벳을 일본식으로 읽는 편이라, 예를 들어 Spike라는 단어가 있으면 한국인들은 스파이크라고 읽겠지만 일본인들은 수피케라고 읽거나 Apple을 아푸루라고 읽는 식이다. 서술했듯 일본 문자에는 으, 어 같은 모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유학파가 아니라면 그런 발음 자체를 낯설어한다. 커피라는 보편적인 단어조차 일본인들은 코오히라고 부르니 그 괴리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브라더(형제)를 부라자라고 읽는 촌극도 일어난다.

특히 The는 영어권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면서 그 발음은 '더'나 '디'에 가까운데 일본 어휘에선 뜬듬없이 '자'라고 부른다. 자 와루도!
탈아입구 문화의 잔재인지 서양 문화와 백인들을 대하는 호의가 지나치게 높다. 한국인도 아시아 계열 문화보다는 서양, 특히 백인 계열에 대한 문화의 동경이 있긴 하지만, 일본은 특히 파리 증후군이라는 기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서양 문화에 대한 동경심이 강하다. 프랑스 일본은 원래부터 상호 문화 교류를 하며 호의를 쌓고 서로 동경하던 관계였다는 이유도 있다.[41] 우스겟 소리로 "일본인들은 일본어를 잘하는 동양인보다 일본어를 아예 못하는 백인을 더 좋아한다." 라는 말이 있을정도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 대단해 오리엔탈리즘/일본 참고.
찌, 쯔, 토, 쨔, 하는 식으로 높고 찢는 소리를 내며 발음하는 치찰음이 많다. 한국어 일본어에 비하면 굉장히 점잖은 편으로, 나쁘게 말하면 애교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상호 더빙 중 귀여워야 하는 더빙에 어색함을 느끼는 이유가 이것이다.

7. 대외적 이미지

일반적인 외국에서 일본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적인 인상은 조용하다, 소심하다, 상냥하다, 성실하다, 유행이 빠르다, 바쁘게 살아간다 등의 인상이 강하다.

일본이 2차대전 이후 국제적인 외교발판을 마련하고 해외로 뻗어나간 시절에 생긴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있는 부분이다. 전반적인 한국을 포함한 범 동아시아권 사람들에 대한 서구권에서 느끼는 인상과 겹치는 부분이 많은데 이는 비슷한 문화권에 속해서 공통적으로 축적되어온 민족성에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위에 언급된 일본인만의 국민성을 나열한 내용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일본이 중국과 같이 해외에 가장 먼저 알려진 동아시아 국가이다 보니 이런 스테레오 타입적인 인식이 더 강하게 작용되는 듯 하다. 일종의 '조용하고 성실하지만 조금 소심한 아시아인' 이미지의 아이콘격인 셈.

이런 이미지와 일본 특유의 오모테나시 때문에 서양인들 중에는 일본인을 친절하고 착한 민족으로 짐작하는 고정관념을 가진 경우가 제법 많다.[42][43] 이 때문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착한 일본인' 이미지와 대조적인 부정적인 사건[44]이 보도되면 "일본인이 어떻게 저런짓을!(...)"이라고 놀라곤 한다. 이런 고정관념이 일본의 전쟁범죄를 상당수 서양인들이 잘 수긍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 '착한 일본인'들이 그런짓을 했다고?"라는 식이다.

타 국가 사람들보다 비교적 목소리 톤이 높다는 이미지가 있다. 물론 죄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보니 애니메이션 더빙에서도 귀엽고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많은데 한국인이나 서양인을 비롯한 타국사람들 입장에서는 이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는 '모에고에'(萌え声)라 해서 일본 여성들이 애교를 부릴 때 평소보다 과장되게 톤을 높여서 내는 경향도 한몫 한다. 다만 일본인들도 엄연히 개인차가 있어서 한국인이나 서양인 못지 않게 목소리 톤이 굵은 사람은 얼마든지 많다.

아무튼 이 때문에 톤의 높음이 좀 심해서 한국어 더빙판뿐 아니라 그 외 외국 더빙판들을 보면 '캐릭터들 목소리가 일본 원판보다 5살 많아보이는 건 기본이다.'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라별로 언어, 발성이 다 다른 탓이지 성우 목소리가 캐릭터 연령대에 아주 심각하게 벗어나지 않은 이상 단지 원판보다 비교적 성숙해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미스캐스팅으로 치부해버리는 건 좋지 않다.

매운맛(정확히는 캡사이신으로 대표되는 바닐린계 매운맛)에 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는 강한 향신료가 별로 없는[45] 일본 요리의 특성에서 유래한 점이라 카레도 상당히 부드럽고 달게 만드는 편이다. 향신료 사용을 최대한 꺼리고 소금과 설탕, 식초를 들이 붓는 요리 문화 탓에 일본인의 평균 나트륨 섭취량은 6000mg 이상에 달한다.[46] 한국도 과거에는 5000mg를 넘어갔으나 식생활이 급격하게 바뀌면서 3600mg대로 떨어진 것[47]과 대조적이다.

부정적인 인식도 있는데 일본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재일 외국인 72%가 일본인의 입냄새가 신경이 쓰인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48] 이러한 입냄새의 원인으로 높은 흡연율과 스케일링이 보편화되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49] 일본 여행을 다녀온 경험자나 일본인과 대화를 해 본 사람은 일본인의 입냄새를 커뮤니티에 작성하여 이러한 원인을 궁금해 하는 글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반응은 냄새가 심한편 쪽이 많은 편이다. 이는, 한국 커뮤니티와 해외 커뮤니티를 보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에 비해 암내가 많이 난다는 평도 있는데 실제로 데오드란트 등 액취제거제 시장 규모가 한국보다 8배 이상 크다. # 경제 규모, 인구 차이를 감안해도 상당한 차이다. 물론 이는 체취에 민감해하는 일본 사회의 경향도 어느정도 있지만 일본인의 암내 유전자 발현율이 한국인보다 높은것도 사실이고[50] 여름철 전철 등지에서 한국에서는 맡기 힘든 수준의 암내 때문에 당혹스러웠다는 경험담이 많다.

한국의 신문 만평 등에서는 일본인을 대머리나 빡빡머리에 뻐드렁니(+콧수염, 안경)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2차대전 시기 미국에서 도조 히데키를 희화화한 것이 원조다. 구글에서 'tokio kid'라고 검색하면 알 수 있다.

영어로 일본인을 비하하는 명칭은 Japs이며 이 단어는 공습하다, 몰래 공격하다라는 뜻도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주만 공습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 때문인지 나라 이름을 로마자 머릿글자로 쓸 때도 KOR, FRA, AUS, BRA처럼 웬만해선 앞의 3글자를 따서 쓰는 것과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은 JAP라고 안 쓰고 JPN이라고 쓰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Tojo[51]라는 명칭도 쓰였으나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덤으로 2차 세계대전 즈음의 여러 미국산 프로파간다에서는 일본인들이 말끝마다 Please, please를 연발하는 것으로 묘사되곤 했다.[52]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 일본인이 경어를 표현하기 위하여 please를 여기저기 집어넣어 말하던 버릇을 과장해서 비꼰 듯.[53]

고래를 잡아먹는 야만인이라는 인식이 환경보호단체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54] 멸종할 수 있으니 먹지마라고 그렇게 말해도 듣는 척도 안해서 그런 듯. 일단 고래를 잡아먹는 게 야만이라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고, 사회에 따라 먹는 음식과 안 먹는 음식이 다르기에 문화적으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맞다. 다만 일본에서는 포경할 때 "연구용"이라고 연막을 치고 실상 식용을 위한 포경행위를 반복하며, 무분별한 남획으로 인해 서태평양에 서식하는 많은 수의 고래들이 멸종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자행한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대량 포경 문제에 있어선 일본뿐만이 아닌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또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종종 '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 특성상 식량 자급자족이 어려워 고래를 사냥하여 주식으로 섭취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현 시대와는 전혀 맞지않는 비약이다. 이 지역에 속한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의 1인당 GDP는 5만 불을 훌쩍 넘기며 특히 이 중에서도 고래고기를 유독 즐기는 노르웨이의 경우, 7만 불에 달할 정도로 이들은 유럽내에서도 손꼽히는 부국이자 전 국민적으로 경제기반이 상당한 강소국들이다. 1인당 GDP로 따졌을 때, 당장 일본의 2배에 달할 정도고 그 유명한 '북유럽식 복지'를 이뤄낼 정도로 국가가 운용할 수 있는 자산이 썩어 넘치는 국가들이다.

당연히 이들에게 전 국민들을 먹여 살릴 양질의 식량을 수입해오는 정도쯤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이들이 당장의 기초 인프라도 구축되지 않은 후진국이라면 모를까 이런 주장은 시대상과 맞지 않는다. 게다가 식량의 경우 20세기 중엽부터 제네바 라운드를 시작으로 일찍이 국제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제3세계 빈곤국가나 과할 정도로 자급자족에 충실했던 일부 공산국가가 아닌 이상, 절대적인 식량난에는 대부분이 벗어나 있었다. 특히,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의 경우 유럽연합 회원국이며 노르웨이, 아이슬란드는 회원국은 아니지만 EFTA에 속해서 유럽연합 회원국과 동등하게 인적, 물적 교류를 하고있다. 이를 통해 프랑스,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한 거대 농업국가들의 생산품들을 자국 물품마냥 저렴하게 수입해올 수 있는 최적의 인프라도 조성된지 오래다.

종합하자면 현재 이들의 고래사냥은 식량 문제나 경제적 상황이 아닌, 일본과 마찬가지로 '선조들이 즐겼던 당대 주식, 별식이 고래고기이니 우리도 그냥 먹을 거다'라는 지역적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게 옳다. 여러 다큐멘터리를 보더라도 이들의 고래잡이가 당장 생존의 목적이 아닌, 마치 한국의 김장철이나 독일의 옥토버페스트처럼 이를 기념하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듯한 장면이 여러번 연출된 바 있다[55].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인 1970~80년대부터 보릿고개가 완전히 사그라들고 현재는 24시간 야식 배달과 편의점이 발달하여 식도락이 발에 치일 정도로 많은 한국에서도 여름철만 되면 보신탕찾는 문화가 잔재하는 것과 별 다를게 없는 것이다. 일본의 포경도 이것의 연장선인데, 여기도 역시 갖가지 다채로운 농수산물이 생산되는 나라인지라 고래를 식용으로 쓰는 건 순전한 관습에 불과하다.

일단은, 한국의 개고기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고래고기의 인기도가 세월이 흐를 수록 빠르게 하락하는 중이라, 나중에 가서는 자연스레 사라질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56]. 자세한 것은 포경 문서 참조.

일본이 144개국 중 세계 최악의 불친절한 나라 142위라는 조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단, 제목과는 달리 실제 설문 문항들을 보면 기부와 사회봉사시간 문화에 대한 조사라 개개인의 친절도와는 거리가 먼 데다가 내전, 극단주의등으로 위험한 국가로 톱을 달리는 리비아, 이라크등의 국가들과 치안 안좋기로 악명이 높은 남미 국가들이 상위권에 분포되는 등 신뢰성과 객관성이 의심되는 자료이므로 진지하게 믿지는 않는 편이 좋다. 위에서도 언급됐듯 오모테나시의 영향으로 오히려 서양을 중심으로 일본인은 친절한 민족이라는 스테레오 타입도 있다. 이 리스트에 나온대로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한국도 하위권인 92위에 랭크되어 있는 불친절한 나라로 분류된다.

세계인들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는 '이미지 메이킹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야만적이라고 욕 먹었던 초밥은 일본 문화를 접하는 첫 관문이자 고급스러운 미식이라는 평가로까지 반전되었고, 온갖 문화 매체를 통해 장인 정신, 무사도 등 세계인에게 일본에 대한 신비롭고도 긍정적인 이미지를 남겼다.

8.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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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국제적으로 이웃나라 국민끼리 사이가 좋은 경우가 적기도 하지만, 여러 의미에서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 정말 잘 맞는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일본 내지는 일본인에 대한 악감정은 일제강점기 또는 그 직후의 국가적 혼돈을 느껴본 노년층과 바로 그 아랫 세대인 중장년층일수록 강하다. 반면 10대 학생들과 20대~ 30대 정도의 젊은 세대들은 대일 문화 개방과 여행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일본색을 낯설지 않게 여겼던데다, 한국의 국력 성장에 따른 열등감 희석의 영향도 있어 상당히 완화되어 있다. 오히려 일본에 대해 지나친 사대주의를 보여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다만 국제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일본인을 사업 파트너로서는 높게 평가한다.[57]

한국에서의 일본 문화 개방이나 일본에서의 한류 붐으로 인해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일 국제커플들도 많아지기 시작했고, 특히 일본 여성과 결혼하는 한국 남성들의 수가 1995년경엔 2842건에 달해 최고치를 기록했다.[58] 다만 일본이나 한국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갖고 살고 있기 때문에 국제결혼으로 국민감정을 일반화하기는 힘들다.

일본 문화를 즐기면서도 수시로 일본인 또는 일본 연예인에 대한 우익 논란을 제기하기도 한다. 합리적으로 의심할 만해서 제기된 경우(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적 정책 및 일본군의 전범행위에 대한 옹호발언 등)도 있지만, 한국인 입장에서 단지 불쾌해서 제기되는 경우( 하시마 섬에서의 영화 제작발표회, 우익 논란이 있는 원작자와 관련 작품에 출연한 배우,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질의 시 묵묵부답 또는 답변 회피 등)도 있다. 또한 전후 맥락이 잘린 채 한국인을 자극할 만한 부분만 강조되어 의혹 제기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A에게는 우익이라고 주장하다가 B에게는 침묵하는 이중잣대인 경우도 제법 있다. 그러다 보니 일본 유명 연예인 중에는 한국에서 우익 논란이 한 번이라도 제기되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 우익 미디어물 논란도 수시로 벌어진다.

(주로 넷 우익의 경우) 한국인 또는 한국계에 대해서 일본인에 비해 허풍이 심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거나 툭하면 사죄 보상 타령하며 시비를 붙인다는 편견이 존재한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반감을 크게 갖게 된 것은,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 사죄발언이 결정타였다. 이때 친한 성향의 일본인들이 상당수 등을 돌리기도 했다. 또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둘러싼 불협화음도 상당한 타격을 줬다고 한다. 그 이후엔 한일 양국 모두 서로에 대한 배척을 대놓고 드러내는 한국의 문재인 정부, 일본의 아베 신조 정부가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갈등 양상이 훨씬 심해져 버리게 된다. 그 결과,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낳기도 했다.

다만 2020년대에 들어 신냉전 시대에 접어들며 중국 패권주의식 외교가 심해지고 북중러 3국이 밀착하는 모습을 보임에 따라 한국과 일본 양국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게 되었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상호 호감도 역시 높아져 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일단 한국의 경우, 2023년 2월에 전경련이 한국의 20대~30대 626명(20대 331명·30대 29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일관계 인식조사에서 응답자의 42.3%가 일본에 대한 인상을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부정적이라는 답변은 17.4%로, 긍정 답변이 부정보다 2.4배 높았다. 보통이라는 답변은 40.3%였다. 또한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과거(45.6%)보다 미래(54.4%)라고 보는 청년들이 많았다. 또한 일본 역시 2023년 10월 12일에 나온 자료에서 "한국이 좋다"며 한국에 호감을 보이는 일본인이 11년 만에 37%로 최고 수준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

일본인들 중에는 한국에 대해 위기의식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는 한국의 대일무역적자가 상당한데다[59], 소위 '일본 중소기업이 거래 끊으면 삼성은 망한다'라는 말과 같이 자신들보다는 한수 낮은 이류 국가로 보는 시각이 강했으나, 한국이 국제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2010년대 중반부터는 애써 그렇게 보고싶어하는 정신승리적인 양상이 강해지는 추세다. 나이 든 사람들은 재일교포에 대한 고정관념도 큰데다 자기들이 잘나가고 한국은 군사정권 하의 빈국일 때의 철 지난 감각이 아직도 있기 때문에 한국을 무시하는 편이나, 젊을 수록 한국에 대해서 보다 대등하면서도 긍정적인 인식이 많은 편이다.

양국 간 문화 교류가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로 한류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원래는 중년 여성을 중심으로 붐이 시작됐는데 2010년대 들어서 젊은 층으로 급속하게 퍼졌고 이 영향으로 일본 청소년들의 한국,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가 매우 높아졌다.

일본의 장년, 노년층 중에는 일본과 한국의 근대사를 비슷하게 보며 동질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디테일한 부분에서 살펴보면 상당히 일리있는 관점이다. 일단 일제강점기라고 해서 일본인이 다 잘 살았던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대다수의 일본인들 역시 당시 체제하에서 심하게 고생하기는 마찬가지였다.[60]

당장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은 한국의 군사정권 같은 힘든 시기였다. 카미카제같은 당시 일본 제국의 미친 짓만 봐도 그 시절의 일본 군부는 정상이 아니었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 젓가락이나 부엌칼을 포함해 철이란 철은 죄다 수탈해가고 자국의 식량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남자들은 군인, 노동자로 징용당해 끌려가 가정이 무너지곤했다는 묘사가 의외로 자주 등장한다. 그런 군부가 권력을 쥐고 있었으니 서민들 삶이야 좋을 수가 없었다.[61] 또한 각자 전쟁을 겪은 이후 비슷한 시기에 GHQ로 대표되는 외세의 영향권[62] 아래에 있었으며 시기는 비록 달랐지만 중노년층들이 젊은 시절 산업화를 이끌어 황폐화된 인프라를 재구축하고 자국의 고도성장을 지켜봐온 부분에서도 비슷한 동질감을 느끼는 듯 하다.

일본 제국 당시의 비참했던 대다수 일본 서민들의 삶을 덧대어 설명하자면 정치는 명목상 민주주의 체제였지만, 다이쇼 데모크라시 장식일 뿐, 치안유지법 때문에 사실상 귀족 중심의 독재와 지역연고 코드인사로 굴러가며 실질적으로는 전근대적 봉건체제나 다름없었다.[63] 그리고 1930년대 후반부터는 2.26 사건 이후 도조 히데키 등이 장악하는 군부 독재 체제로 바뀌면서 더욱 막장으로 흘러갔다. 이 와중에 전쟁을 일으켜 식민지를 수탈한 돈은 모조리 군부와 재벌 호주머니속으로만 들어가다 보니 서민들은 지속적으로 빈곤한 삶을 살았다.

특히 서민들은 만주, 몽골, 중국, 한국 등지의 개척단에 반강제로[64] 끌려나갔고[65], 태평양 전쟁에서는 결국 패망하게 된다. 일본 서민들, 특히 여자들은 내선일체를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인과 원치않는 강제 정략결혼을 한 경우도 흔하다. 그러다 패망하고 식민지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국적이 반강제로 박탈당하며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 많다. 현재도 생존자가 국내에 남아 있다. 그나마 한국은 국교 정상화가 빨라서 60년대, 중국은 국교 정상화가 된 80년대에야 이산가족 상봉을 할 수 있었지만, 북한에 있는 잔류 일본인들은 생사조차 불분명해졌다. 미군의 폭격 으로 본토는 폐허가 되었으며, 1945년 이후에는 GHQ 군정 하에서 1958년 전쟁 전 경제수준 회복선언을 할 때까지 반 식민지 상태를 13년 정도 경험한다. 미국이 일본을 농업 국가로 만드려다가 한국 전쟁 덕분에 계획을 취소했다.[66]

일제강점기 당시였던 1910년 이후부터는 식민지 및 속령지역이었던 한반도에 일부 일본인들이 이주를 해오며 살았던 적도 있었고 넓게는 중국 대륙까지 이주하여 '왜인촌(倭人村)' 이라는 집단촌까지 형성했다는 일설도 있었다.[67] 그리고 이들은 한반도의 지배계층으로 군경(軍警)까지 주둔했지만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해방이 되면서 거의 대부분이 본국으로 쫓겨났고 보복도 꽤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에 남아있을려고 했는데 결국에는 죄다 일본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어떤 일본인 가족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가 있는 것을 보고 한국인들이 식량을 나눠줘서 고마웠다고 수기에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부 일본으로 돌아가던 일본인은 높은 비율로 일본인이라는 신분을 속이고 에 움직이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했다고 한다. 당시 돌아가지 못한 일부 일본인은 아예 한국인으로 귀화하였던 적이 있었으며 한국인들의 눈치 때문에 아예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인 행세를 했던 경우도 있었다.( 망절씨 항목 참고) 이 역시도 케바케로 일본인 처 모임이 각 지역별로 있음. 이 할머니들은 일본국적을 유지한 채로 계속 한국에 살고 있다.

8.1. 재조선 일본인

19세기 말에 한반도에 일본인은 수백명 수준이었으나 1945년 일제의 패망 직전에는 60만이었다. 일본이 패하자 이들은 미군정에 의해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고 이런 이들을 히키아게샤라고 불렀다. ' 조선을 떠나며'를 읽어보면 일본이 8.15 광복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반응을 묘사한 단원을 읽어보면 상당수가 한시바삐 조선을 떠나야한다는 심정이었지만 그들이 낳은 자녀들, 특히 조선에서 출생해서 터전을 잡고있던 다수 재조선 일본인 2세들은 자신들이 왜 떠나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원산지역에는 일본인 촌이 있어서 치안은 물론이거니와 학교등의 편의시설이 들어있어서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모여사는 지역이 있었는데. 광복이 되어 많은 조선인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보고 "조선인들이 이렇게나 많았나?"라고 할 정도로 분리된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게다가 미군정이 이들이 반출할 수 있는 재산을 제한했기 때문에 대부분 야반도주 하듯이 조선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일본에 돌아와서도 냉대를 받아야 했던 것이 전시동안의 궁핍한 생활과 공습에 대한 대피로 피폐해진 본국인들과는 달리 그래도 식민지에서 태어나 삶의 터전을 일구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던 재조선 일본인들은 눈에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고 그나마 갖고들어온 재물 상당수를 여러가지 명목으로 떼여야 했으며 특히 그들의 자녀들은 놀림감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녀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자며 보채는 것을 달래야 했었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본국의 경제상황이 막장이었는지라 구직도 불가능했고 이러다보니 임시거처였던 수용소가 영구거주지로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여기에 '인과응보'라고 빈정대는 본국인들의 경멸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망절씨처럼 소수나마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8.2. 재한 일본인

패망 후 대부분의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으나 일본인 아내와 자식 등이 일부 남았다. 한국 전쟁 당시 해상보안청 GHQ의 지시로 소해정을 파견했고 보안청 직원들이 상륙하기도 했고 노무자들이 항구 등에서 미국의 군사물자를 나르기 위해 들어왔다.

한일 수교 전에 양국은 대표부를 설치했고 일부 일본인들이 한국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1965년에 한일수교가 이뤄지면서 일본인 외교관과 상사 주재원 등이 들어왔고 관광 목적으로 들어오는 일본인도 생겼다. 2000년대 이전부터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은 통일교 소속으로 영주권을 얻은 경우가 많다.

2013년 8월 31일 대한민국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이민정보과 월보에 따르면 일본인 유학생은 2,781명(유학 1,714명/한국어 연수 1,067명)이며 한국인의 배우자(결혼이민자)[68]는 12,104명(남성 1,174명/여성 10,930명)이며 취업자격 체류자 1,782명( 불법체류자 2명 포함)이며 단기체류자 23,462명[69](불법체류자 499명 포함)이며 등록외국인[70] 23,194명(불법체류자 363명)이다. 체류 일본인의 숫자는 47,443명(불법체류자 875명)이다.

서울 용산구 이촌동이 대표적인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이촌로를 중심으로 1,000명 이상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다. 말하자면 재팬타운이기는 하지만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가 많다는 점 등을 제외하면 딱히 일본 문화가 특징적인 곳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용산구는 일본인 말고도 온갖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기 때문에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딱히 매스컴 등에서 '재팬 타운' 등으로 주목하는 곳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차이나타운이나 코리아타운 등과 다르게 딱히 이국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한국 내 일본풍 이미지 대한 시선이 큰 축을 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71] 이는 국내의 다른 차이나타운 등 이국인들을 위한 거리들은 여전히 이국적 풍경을 내려고 한다는 점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8.3. 재북 일본인

패망 후 한국과 상황이 비슷했으나 별 탈 없이 일본으로 돌아간 한국의 일본군과 달리 재북 일본군인은 소련군에 의해 끌려가 포로가 되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부 일본인 아내와 자식도 잔류했다. 이들은 잔류 일본인이라 부른다. 이들의 규모는 약 1400명 수준이었다.

그 외에 북한 공안 당국에 의한 납북 일본인[72]이 있고 재일교포 북송 당시에 한국인 남편이나 아내를 따라간 일본인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 국적을 지닌 사람 등이 북한에 있다. 일본인 배우자의 숫자는 약 1,800명으로 추정한다.

9. 일본인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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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관련 문서


[1] 조몬인 혈통 비율 3.3% 3.3% (2020) 8% ~ 9.8% (2019) 9% ~ 13% (2019) (연구 모델을 조몬인과 야요이인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 [2] # [3] # [4] 정확히는 주류 민족인 야마토 민족(도래인 계통)의 인구비율이 열도 내에서 압도적인 것으로 보아 아이누인들은 이들에게 거의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실제로 현재 순혈 아이누 인구는 20만 명에 불과하며 앞으로 세월이 더 흐를 수록 인구풀에서 흡수될 것이 유력하다. [5] 시기상으로 현재 동아시아인들보다 먼저 아시아에 정착한 집단으로 추정되며, 완전히 동일 어족은 아니지만 언어동조대적인 요소로 봤을 때 동시베리아나 이누이트어, 더 넓게 보면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와 비슷한 포합어체계를 지니고 있다. 홋카이도에서 발굴된 조몬인 유골의 DNA를 분석한 결과 일본인 외에도 한국인, 울치인, 대만 원주민과도 유전적 구성이 유사하였다. #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빙하기가 해소되어 동아시아인의 아시아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현재 동아시아인의 직계 조상들이 조몬계 인종을 밀어낸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6] 참고로 왜 'South Chinese'가 동남아시아인으로 분류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데, 'South Chinese'에는 징족, 태족, 묘족 등 중국 최남부에 거주하는 여러 소수민족도 포함되고, 북중국과 남중국으로 나눈다고 중국 대륙을 딱 절반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유전학계에서 남방 한족이 있다고 보는 지역은 난링·우이 산맥 이남 지역으로, 중국 대륙 기준으로 매우 일부분이다. (혹은 중국과 인도차이나 반도 국경 근처의 소수민족 거주지까지 포함할 수도 있다.) 사실 이마저도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인원이 너무 많아서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적인 대도시는 전부 난링·우이 산맥 이북에 있다. 다만 난링·우이 산맥 이남에 거주하는 객가인은 북방 한족의 일파로서 전쟁 등으로 인해 중원에서 남쪽으로 피난 간 이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유전적으로 북방 한족에 가깝다고 한다. # [7] 참고로 서아시아에서도 한국인보다 평균키가 확실하게 큰 국가는 이스라엘인(남성 기준 평균 키 177cm)과 튀르키예인(175cm)뿐이다. 이쪽도 전수 조사가 아니라서 통계마다 평균 키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머지 서아시아 국가들은 남성의 평균 키가 170대 초반이다. 그 외 북아시아인, 중앙아시아인도 평균 키가 170대 초반으로 한국인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작은 수준이다. [8] 여담으로 일본을 가르키는 단어인 '왜'가 왜소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신빙성은 낮다. 원래 일본을 가리키는 말인 는 '키가 작다'는 뜻과는 상관없이 고대 일본어의 1인칭 대명사인 '와'를 음차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옛날 일본에서는 자국의 천황을 대외적으로 드높여서 호칭할 때 '대왜왕'이라는 칭호를 쓰기도 했고, 전통적으로 일본인들이 자국을 가리키는 말인 야마토 한자를 이 왜로 쓰기도 했다. 현재도 이 '와'라는 용어는 일본내에서 적잖게 쓰이는데 일본 요리(일식)를 일본인들이 스스로 부를때 '일식'이 아닌 '와식(와쇼쿠)'으로 부르거나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일본 토종 소 품종인 ' 와규'가 대표적이다. [9] 물론 그래도 유럽 내에서 중상위권이다.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남유럽인의 경우 동아시아 최장신국인 한국과 비슷하거나 되려 더 작은 수준. [10] 프랑스인은 기본적으로 라틴계 백인이지만 다른 라틴계 민족에 비해 켈트족과 게르만족과의 혼혈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11] 일본 출신 K-POP 아이돌 중에는 LE SSERAFIM 카즈하 IVE 레이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12] 일본은 20대 연령층 청년과 60세가 다 된 중년이 같이 서 있어도 차이가 없는 편이다. 링크에 따르면 일본 20~24세 남성의 평균 키는 172.0cm. 중년층은 171.1cm. [13] 1970년대 중후반 이후 출생자부터는 한국인의 평균 키가 일본인의 평균 키를 다시 역전하게 된다. [14] 하지만 전통적으로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작은 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때 신체 조사를 보면, 영양 상태가 더 안 좋았을 가능성이 높음에도 한국인 어린이가 가슴둘레는 더 적었지만 키가 5~7cm 더 컸다고 나온다. (출처 역사신문 6권, 사계절출판사.) 또한 구한말 조선과 일본을 여행했던 영국 여행작가 비숍 여사 역시 저서에서 '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과 비교해서 키가 크고 잘생겼다'라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일으켰던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한 술 더 떠 "조선인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피부가 희고 키가 큰 걸 보니 백인, 유대인의 후예다."라는 주장도 했다. 물론 일본인들이 유전적으로 한국인보다 키가 작으니 그 영향을 받았겠지만.. 다만 6.25 전쟁 이후에 일본 경제가 고성장을 기록했고, 한국은 상당한 기간동안 최빈국 신세로 전락하면서 영양과 의료혜택면에서 차이가 커지자 오히려 한국인들의 키를 앞서게 되었다는 얘기다. [15] 가나 문자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서기 5세기 경에 야마토측에서 한자를 받아들이고 7세기를 전후로 초기 형태의 가나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야요이와 조몬계의 열도 내 헤게모니 다툼이 완전히 종료되기 시작한 시점(대략 10~11세기)의 수백년 전부터 이미 문자를 쓰고 있었다. [16] 당장 지금도 쓰이는 일본이라는 국명 자체가 야마토를 대신하여 지어진 시점도 덴무 덴노의 치세인 서기 600년대 였다. 일본이라는 국가 정체성이 조몬계(에미시)를 완전 정벌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은 엄연히 사실이다. [17] 하지만 지금의 아이누 문화권이 일본 문화권과 다르다고 조몬 문화권도 무작정 일본 문화권과 달랐을거라고 생각을 하면 안되는 것이, 아이누의 경우 이들이 거주하는 홋카이도 부터 고대부터 고대 북유라시아인, 퉁구스인등 외지인들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 왔던 걸 감안해야한다. 인구가 넘쳐나던 중국이나 한반도와는 달리 조몬인들은 수렵 채집민들이었으며 수가 적었다. [18] 오키나와 지방은 일본어족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11세기 이전까지 패총시대로서 수렵 채집 위주의 원시생활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혈통적으론 에조의 조몬인 계통과 비슷했으나(정확히는 조몬인 계통과 오스트로네시아 혈통이 뒤섞인 사람들이 선주민이었다.) 오키나와 제도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워낙 고립된 외지여서 문명이 생기기는 힘들었다. [19] 이들 언어권은 러시아 사할린과 일본 홋카이도에 분포되어 있다. 다만 러시아와 일본의 탄압에 의해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화자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 일본에서만 10명의 모국어 화자가 확인된다. 다만 제2언어로서의 화자 수까지 포함되면 그 수는 확연히 증가한다. [20] 당시 조몬계 언어와 아이누어의 관계는 중세 한국어와 현대 한국어 관계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차이점이 더 적다고 보면 편하다. 주어-목적어-서술어가 기본인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완전한 포합어 성격을 띄는 고전 시기의 조몬어보다는 분석적 언어의 특성도 띄는 것이 차이점이다. [21] 고조선도 단군왕검을 비롯한 건국 신화나 '기원 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부분은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 민족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역할로서만 수긍하지 실제 사료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암묵적으론 다 알고 있다. 다만 고조선이란 고대 국가의 실체와 베이스가 되는 문명권(현재 학계에서는 기원전 5~4세기 경, 요동의 정가와자 문화를 고조선을 비롯한 한민족 문명의 근간으로 보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높게 봤을때는 기원전 9세기 경의 십이대영자 문화를 근간으로 보는 경우도 많다.)이 실재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22] 토인(土人)은 문명이 미치지 아니하는 곳에 토착하여 사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23] 눈치나 분위기를 살피는 경우도 한국인과 다소 다르다. 일본인의 경우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관계, 대부분의 상황에서 분위기를 조화롭게 지키는 것을 중시한다. 그래서 자기보다 연하이거나 직급이 낮더라도 일반적으로는 일정 거리를 두고 존중하는 편이다. 반면, 한국의 경우 동일한 연령대의 '친구'를 제외하곤 서열에 따라 예를 갖추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방식이다. 연상이거나 상급자의 경우 안면을 트면 아랫사람을 마치 친동생이나 자식, 직속 부하처럼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지만, 아랫사람은 항상 예를 갖춰서 윗사람을 대해야 하듯 말이다. 일본인이거나 일본 기업 문화에 익숙한 근로자가 한국 기업에 와서 당황하는 부분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일본에선 나이나 직급에 관계없이 상호 존중이 요구되지만, 한국에선 아랫사람을 하대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보니 이런 분위기를 낯설어 하는 것이다. 또한 반대로 한국인이 일본 기업에서 근무할 경우, 서로 어느 정도 안면도 트고 나이와 직급도 엇비슷해서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사이임에도 알게 모르게 거리감이 계속 유지되는 모습에 당황하기도 한다. 한일 모두 눈치가 중요한 문화인 것은 같으나 그 양상은 확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4] 이 당시 미국에서 출간된 < 국화와 칼>은 일본학의 입문서이자 필독서로 여겨진다. [25] 표현 방식에서 상인과 서민층 위주로 발전한 오사카와 귀족 문화 및 종교 문화의 중심지였던 교토의 문화 차이가 있다고 한다. 또한 도쿄에서도 전통적으로 '시타마치'라 불려온 동부 지역 주민들은(특히 '에돗코'라고 불리는 토박이들) 일본 내에서 직설적이고 성질이 급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도 에돗코인데, 전술한 이미지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26] 다만, 센고쿠 시대의 완전 종식 이후 에도 막부 치하에서 200년 이상 평화가 지속되면서 사무라이들도 사실상 칼을 찬 사대부가 되었고, 막부에 의해 즉결처형도 금지되었다. [27] ex) 일본군/인물 문서 참고 [28] 사실 현대 한국에서 보여지는 권위주의적이고 서열 중심의 문화, 부조리가 많은 징병시스템에 영향을 크게 끼친 원인요소 중 하나가 일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 기존의 전근대적인 잔재를 빠르게 청산하고 문민통제를 일찍이 실현하면서 상대적으로 이전에 비해 완화된 것이고 한국의 경우 뒤이은 군사독재와 고도 경제성장을 위해 국가적으로 오랫동안 강조된 집단주의,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징병제 때문에 일제강점기와 일본군에 영향받은 사회 전반적인 경직성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29] 일제시대 한국의 합병 및 주권 침탈을 옹호하기 위해 일부러 조선의 거리의 지저분하거나 초라한 모습들만을 강조했으나 본인들도 빈민가 부분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30] 한국에서도 알려졌는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언급되었을 정도. [31] 상위 집합은 있을 수 있다. 즉, A집합(나)과 B집합(너)이 서로 교집합이 없지만, U라는 집합(우리)으로 묶이고, 그 위에 W라는 집합(너희)과 교집합 없는 상태로 싸그리 Z(사회)라는 집합으로 묶이는 식. 유럽식에는 '우리'라는 개념이 굉장히 희박한 편. [32] 일부 공중화장실 등에는 변기 물을 내리면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온다. 공간 부족의 이유도 있을 수 있으나, 이러한 기술이 우선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33] 예를 들면 사소한 일에 집착하여 쉽게 체념하지 못하는 경우에 쓰는 말로 왕생할 때가 나쁘다(往生際が悪い)가 있다. 속세에 미련을 버려야 극락왕생 하는데, 그걸 못하고 미련을 가지니 얼른 포기하라는 뜻이다. [34] 심지어 ' 요단강 건넌다'는 관용구를 비종교인들까지 쓸 정도로 기독교적인 요소까지 첨가된 언어가 한국어이다. [35] 할로윈 다음날인 만성절(all saint's day)은 한국의 추석, 일본의 오봉처럼 조상의 영혼을 추모하는 날이다. [36] GHQ에서 신문, 방송 등 문화부문까지 검열한 결과다. [37] 원래는 이러지 않았는데 '일본을 되찾으려다 보니' 전후 일본을 안보, 경제, 정치적으로 꽉 쥐고 있는 미국에게 당분간 굽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대단한 친미파가 되어버렸다. 또한 일본의 소위 우경화문제에 있어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중국의 부상이라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일본에게 있어 미국은 동/남중국해에서 중국으로부터 자국 핵심이익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아군이 되어버렸다. [38] 일본은 초등학교까지 알아서 짜주지만, 중고등학교부터는 스스로 선택해서 듣는 수업중점이다보니 안듣는 과목은 잊혀진다. [39] 애, 으, 어 모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고 받침 발음은 /(한글의 받침에 대응)이 전부다. 예를 들어 일본인은 유학파가 아니면 "커터"라는 단어의 발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카타"라고 발음하게 된다. Hello my lover라는 문장이 있으면 한국인들은 헬로 마이 러버 라고 읽겠지만 일본인들은 하로 마이 라바 하고 읽게 된다. 만약 이런 문장이 보편화되면 줄여부르는 문화 특성상 하마라가 되어 일본인 빼고는 아무리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독자적인 영어가 되어버린다. 으, 어 모음이 들어가는 발음은 전부 오, 아 식으로 대체되며 때문에 아주 독특한 발음이 된다. [40] 이를 심지어 마쿠 하고 줄여 부르는데 이게 더 보편적이다.... 외국인들이 알아들을 리가 없다. 한국인들도 맥날이라 줄여 부르는 건 사실이나, 맥이란 말만 들으면 차라리 맥 OS을 연상하는 것이 말이 될 것이다. [41] 다만 아이러니 하게도 프랑스 기업인 르노를 상대로 일본 정부 차원에서 박해을 한 사건이 일어났다. [42] "일본인은 모두 친절하고 착할것."이라는 생각은 한국과 중국을 제외한 해외, 특히 서양에서 일본을 떠올릴 때 착각하는 대표적인 스테레오 타입으로 꼽힌다. # 일본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조차 "친절하고 착한을 한다." 일 정도로 착하다는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일본에 오기전에는, 혹은 일본에 온 지 얼마 안됐을 때는 일본인이 모두 친절하고 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본에도 나쁜 사람이 있구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 하는 식의 일본 체류 서양인의 토로가 주기적으로 나오는 편이다. # [43] 사실 서양의 경우 2차 세계 대전 참전자 세대가 영향력이 컸던 1980년대 까지는 2차 세계 대전 중 각인된 "일본인은 잔인하다."는 이미지가 있어 친절, 착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어느 순간 부터 잔인하다는 이미지는 희석됐다. [44] 예를 들어 와카시오 호 기름유출 사고가 일어났을때 해외 커뮤니티에서는 "일본인이 마냥 착할거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댓글들이 여럿 달리기도 했다. 일본의 외국인 노동자 처우와 학대 장면 영상에는 일본에서 직접 외국인 노동자로 근무한 외국인들의 비판 댓글 속에 서유럽 젊은이들이 일본을 너무 이상적으로 본다는 댓글과 간간이 "일본인들은 예의바르고 친절한 줄 알았는데."라며 놀라는 댓글들이 달려 있다. [45] 사실 고추나 후추의 재배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재배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주로 교역품으로 취급했던지라 잘 쓰이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고추냉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고급요리에만 쓰였던 상황이고 [46] 출처: 일본 후생노동성 《日本人の食事摂取基準》(일본인의 식사섭취기준) 2020년판 [47] 출처: 2019 국민건강통계 [48] # [49] 실제로 일본은 여전히 식당이나 술집, 카페, 심지어 맥도날드같은 패스트푸드점에서도 실내 흡연이 가능한 국가이다. 실내뿐만 아니라 실외에서도 금연 구역을 크게 지정해놓을 정도로 엄격한 한국은 물론이고, 한국에 비해 자유로운 서구권을 기준으로도 흡연에 대해서 상당히 너그러운 분위기다. [50] 액취증과 관련이 있는 ABCC11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한국인보다 더 많다. # [51] 당연히 도조 히데키 때문에 생긴 비하어이다. 콜 오브 듀티 : 윌드 앳 워에서도 일본인들을 Japs가 아닌 Tojo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52] 발음을 '플리즈'가 아닌 '프리즈'(prease)에 가깝게 하면 더욱 완벽. [53] 정작 please는 한국어나 일본어의 경어법과 100% 대응하는 표현이 아니다. 부탁을 목적으로만, 그것도 잘 안 들어줄 것 같은 내용을 부탁할 때 제한적으로 쓸 수 있는 표현. [54] 사우스 파크에선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떨군 게 돌고래라고 뻥쳐서 이걸 믿고 돌고래나 고래들을 죄다 학살하는 등신들이라고 묘사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근데 트레이 파커 부인은 일본인이다. [55] 다만, 영국 북부에 위치한 덴마크령 섬인 페로 제도는 정말로 식량 문제로 인해 고래고기의 섭식이 일반화된 곳이다. 여긴 너무나도 자연환경이 척박해서 농업대신 어업과 포경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곳이라서 그렇다. 물론 세계적인 선진국이자 복지천국인 덴마크의 속령이라서 식량을 수입해오면 그만이긴 하나, 본국을 거쳐서 운송되는지라 물가가 비싸서, 여지껏 대부분의 주민들이 고래고기로 연명해온 것이다. 다만, 현재는 고래고기가 중금속 오염이 심각한 식재료라는 사실때문에, 현지의 자치 정부에서 고래의 포획과 섭식을 완전히 중단시켰고, 덴마크 본국에서 수입한 농산물을 배급하고 있다. [56] 한국 사회에서 를 식육용이 아닌 애완용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게 되면서 개고기를 취급하는 점포가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음지에선 남의 애완견을 훔쳐서까지 식용하는 사람이 꽤 있는 것과 같다. [57] 그러나 일본 특유의 다테마에 문화 때문에 솔직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있어 사적으로까지 친밀한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한다. [58] 위키백과 일본어판에 일본의 한국인과 결혼통계를 참고하자. 일본인 여성과 남성의 한국인과의 연도별 혼인건수 비율이다 일본의 국적별 혼인통계이다. [59] 사실 이것은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 정부에서 일본 기업에 대해 한국 진출에 대한 편의를 상당히 많이 봐주었던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다. [60]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중산층이 자리잡은건 1960~70년대 고도성장기에 출현한 것이지, 패전 이전까지 일본 국민 대다수은 최저임금도 안되는 빈곤층이었다.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문화권에도 적용되는데 과거 18세기~ 19세기 유럽권과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의 미국만 보더라도 당장 산업화가 시작되던 시기의 대다수의 국민들은 노동자로서 심하게 착취당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61] 그러나 상대적으로 일제시기 시절 지배민족이었던 일본인이 식민지인보다 우대를 받았던 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일본인이 열악한 상황에 처한 군인이나 노동자 정도였다면 한국이나 중화권 식민지 출신들은 그냥 '노예'였다고 보면 편하다. [62] GHQ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를 뜻하며 딱히 미국만이 아니라 중일전쟁으로 지분이 있는 중화민국과 관동군과 싸운 소련 등 여러 국가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원래는 연합국 각국이 독일처럼 일본을 분할 점령하려고 했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미국은 중화민국에게 류큐 제도를 넘기려고 했으나, 장제스가 사양했다. # 결국 미국의 지분이 제일 크고 영향력이 강했으니 미국의 이미지가 강한 것일 뿐이다. [63] 주요 요직들은 구 사쓰마, 조슈 번 출신들이 독점했다. [64] 지역마다 인원을 할당해서 할당된 인원을 채우지 못할 경우 세금 감면을 안해주거나 자치단체 보조금을 깎았다. [65] 이 때 떡밥으로 내건 것이 세금 감면, 농토 지원(물론 식민지로 만든 조선이나 대만의 농민들에게서 빼앗은 것이다.), 군 면제였다. 하지만 패색이 짙어진 1943년 이후에는 농토 지원 없이 개척단이고 뭐고 얄짤없이 다 강제 징집해갔다. [66] 사실 냉전 당시 제 1세계 대부분의 공통점이 미국으로 인해서 부활한 것이다. 유럽 마셜 플랜으로 일본 6.25 전쟁으로 한국 베트남 전쟁으로 공교롭게도 이 모두 다 공산주의란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즉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위해 재건되었다는 공통점. [67] 일부는 일본 패망 후 잔류하여 일본계 중국인이 되었다. [68] 당연한 얘기지만 결혼 이민자들은 대부분 등록외국인이다. 일본인 결혼 이민자 가운데 600명 정도가 귀화했으나 이들은 외국인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69] 90일 미만 체류자. [70] 90일 이상 체류하는 외국인으로 지문 날인을 해야 한다. [71] 심지어 한국의 삼국시대 등 고대의 복식을 두고도 왜색 논란이 이는 판국이기 때문에 대놓고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일본의 이미지를 쓰는 것은 국민정서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는 게 옳다. 일본인들 역시 가급적 남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는 특성이 있기도 하니 더욱 일본풍 이미지는 설 자리를 잃는다. [72] 일본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미귀국 납치피해자는 12명이고 행방불명자는 470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