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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5:47:41

소련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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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
Распад СССР
Collapse of the USS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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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0070702472430003010-001.jpg
레닌 제르진스키의 동상 철거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러시아 연방의 등장
<colbgcolor=#cd0000><colcolor=#ffd700> 발생일시 1991년 12월 26일 오전 2시
(소련 해체로부터 [age(1991-12-26)]년 경과)
내용 소련의 공식 해체
러시아 등 소련 구성국 15개국의 독립
독립국가연합 창설
주권국가연맹 무력화
완전한 냉전 종결
관련 선언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연방 해체 연설
( 1991년 12월 25일 발표)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러시아어]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한국어]
관련 조약 벨라베자 조약[4]
( 1991년 12월 8일 체결)
알마아타 조약[5]
( 1991년 12월 21일 체결)
1. 개요2. 역사
2.1. 페레스트로이카2.2. 8월 쿠데타2.3. 우크라이나의 독립
2.3.1. 쿠데타 이후 우크라이나 상황2.3.2. 옐친-고르바초프의 우크라이나 독립 방해2.3.3.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2.3.4. 옐친 소련 유지 포기
2.4. 해체
3. 탈퇴 순서4. 분석
4.1. 유지 가능성4.2. 영향4.3. 붕괴로 인한 후유증4.4. 소련 부활?
5. 어록6. 여담7. 관련 자료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Совет Республик Верховного Совета СССР констатирует, что с созданием Содружества Независимых Государств Союз ССР как государство и субъект международного права прекращает свое существование.
소련 최고회의 공화국 평의회 독립국가연합 창설과 함께 소련이 국가로서 그리고 국제법의 주체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한다.
1991년 12월 26일 소련 최고회의 공화국회의 선언 142-N호.
1922년 12월 30일에 건국된 소련은 건국 69주년을 4일 앞둔 1991년 12월 26일 붕괴하였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들은 새롭게 국제 사회에 등장하였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공산진영 또한 막을 내리며 20세기 후반 자본주의 공산주의 세력이 이념적으로 대립하던 냉전 시대가 공식적으로 완전히 막을 내렸다.[6]

1985년 3월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1970년대부터 지속된 동구권의 경제 침체와 체제의 한계 속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페레스트로이카를 시행하였고 정치개혁을 통해 소련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는데 소련의 개혁은 소련의 잠재되어 있던 민족 문제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1989년 7월 분리독립을 원하는 발트 3국에서 주권 선언을 하게 되었으며 고르바초프는 연방 존속을 묻는 국민투표를 하여 연방 유지파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주권국가연합을 설립하여 연방 해체를 막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8월 쿠데타가 발발하여 무산되었으며 쿠데타를 진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옐친이 실권자가 되었고 옐친은 벨라베자 조약을 체결하여 소련을 탈퇴하였으며 마지막 구성원인 카자흐스탄이 탈퇴하고 결국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사임하면서 소련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역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소련/역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1. 페레스트로이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980년대 소련은 군비경쟁으로 인한 군비 부담, 계획경제의 비효율로 인한 경기 침체, 동유럽에서 증가하는 민주화 요구로 인하여 서서히 침체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1982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직후 소련 공산당은 당시 정치국 원로였던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를 각각 서기장으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 모두 2년과 1년 남짓한 기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3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3명의 서기장이 연속으로 사망하자 소련 공산당에서는 오랫동안 장기적으로 재임하면서 동시에 당시 소련이 겪고 있었던 내부적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지도자를 원하는 여론이 커졌다. 당시 정치국 간부들은 유리 안드로포프 서기장 시절 측근으로 일하면서 긍정적인 평판을 받았던 정치국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주목했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정치국에서 비교적 젊은 나이(50대)에 속했고 이 점에 주목한 정치국은 체르넨코 사후 소련을 이끌어 갈 신임 서기장으로써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선출했다.

1985년 3월 10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마주한 침체를 벗어나려면 정치적, 경제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개혁하기 위해 정치, 경제적 개혁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발표했다. 고르바초프는 개혁을 통해 당시 소련에 가해지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부담을 줄이고 장기적으로 소련을 민주적으로 개혁하여 소련 사회에 원동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당시 소련인들과 국제사회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냉전을 마무리하는 초석이 되었다.

당시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 사회로부터 환영받았지만 동시에 소련인들이 오랫동안 표출하지 못했던 정치적 의사를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소련인들은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공산당 일당체제 개혁, 지역자치 보장, 검열 철폐 등 그동안 억압되어 왔던 정치적 의사를 요구했고 이에 소련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정치적 변화와 개혁 요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급속도로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당시 소련 공산당에서는 고르바초프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지지하는 급진파, 현재 개혁을 보다 온건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온건파,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로 나뉘어 점차 대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80년대 후반 소련은 군비경쟁으로 인한 군비 출혈,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인한 복구비 소모, 중앙정부와 연방 내 공화국 간 정치적 대립으로 인한 계획경제 체제 마비, 저유가로 인한 세수 감소 등으로 인해 경제적 부담이 대폭 증가했다. 이로 인하여 소련 정부는 개혁을 이끌어 갈 경제적 원동력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소련 경제가 악화되면서 소련은 냉전 시기 동안 정치적, 군사적으로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대변되는 소련 중심 체제를 유지하는데 큰 부담을 느꼈다. 당시 소련은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겠다는 시네트라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는 동유럽 혁명으로 이어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하나둘씩 민주화 요구를 수용했다. 이러한 정치적 민주화에 정점을 찍은 사건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사건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소련은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진영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결론내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코메콘 등을 해체하면서 공산주의 진영의 맹주로써가 아니라 서방 국가들과 적극적 협력 및 경제적 지원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공산당 내 보수파는 고르바초프의 이런 개혁조치가 기존 소련 체제를 붕괴시킨다고 판단하여 반발했고 급진파는 오히려 기존 개혁이 유약하다고 판단하여 고르바초프에게 더욱 강력한 개혁을 주문했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처음에는 소련군을 동원해 발트 3국 독립운동을 강경하게 진압하거나 트빌리시, 바쿠 등지에서 군을 동원해 독립 움직임을 차단하고 보수파를 달래고자 했다. 그러나 오히려 군을 동원한 강경진압은 여러 공화국에서 반발이 거세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 갈등 속에서도 고르바초프는 중앙정부와 연방 내 공화국 사이 관계를 재정립하면서 소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1년 소련 존속 투표 주권국가연맹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당시 소련을 유지하고자 하는 소련인들의 의사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연방 내 공화국에 보다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신연방체제를 약속했다. 이에 연방 내 공화국 지도자들은 고르바초프와 함께 오랫동안 논의하면서 신연방체제 개편을 준비해나갔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발트 3국 조지아, 아르메니아, 몰도바를 제외한 나머지 연방 국가들이 참여하는 신연방조약을 이끌어낼 수 있다. 합의를 마친 지도자들은 잠시 휴식을 갖고 1991년 8월 20일 신연방조약에 서명하기로 했다. 만약 서명 전날인 8월 19일 소련군, KGB, 소련 공산당 내 주요 간부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고르바초프의 노력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7]

2.2. 8월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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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19일 당시 소련 부통령이었던 겐나디 야나예프와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KGB 주석이었던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등 소련 정부 내 요직에 있던 8명은 고르바초프가 크림 반도에서 휴가 중임을 틈타서 고르바초프를 별장에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ГКЧП, GKChP)를 조직해 소련 정부를 장악했다. 모스크바 근교에 주둔하던 타만 사단과 칸테미르 사단은 대규모 전차 부대를 이끌고 모스크바 전역을 장악했다. 소련 방송들은 고르바초프가 "건강 이상"으로 급작스럽게 그만두어 부통령인 야나예프 및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대신한다고 보도했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기자 회견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소속된 주요 간부들은 신연방조약이 소련을 "혼돈과 무정부"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국가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는 것을 막기 위해 행동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킨 쿠데타였다.

이미 소련에서는 1990년 말부터 쿠데타에 대한 징조가 보이고 있었다. 1990년 12월 소련 외무부 장관이었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는 보수파에 반발해 사임하면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고르바초프는 1989년 4월 트빌리시와 1991년 1월 빌뉴스 리가에서 소련군 및 경찰 특수부대를 동원해 독립운동을 유혈 진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군을 동원한 무력진압은 오히려 연방 내 공화국들로부터 반발이 극심해지면서 결국 실패했다. 1991년 6월 17일, 당시 모스크바 시장이었던 가브릴 포포프는 미 대사에게 쿠데타가 임박했다고 경고했다. 1991년 7월 소련 정부기관 내 주요 인사들은 당시 강경보수파 계열 신문이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 "인민들에게 고함"이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해당 선언문은 고르바초프를 강경하게 비판하면서, 소련 붕괴를 피하기 위해서는 고르바초프에 맞서는 새로운 야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8]

쿠데타 세력은 고르바초프를 과거 니키타 흐루쇼프와 같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의 생각과는 다르게 소련인들은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았다. 수도인 모스크바를 비롯해 레닌그라드, 키예프 등 소련 내 주요 도시에서 쿠데타에 반발하는 시위가 빗발쳤다. 당시 러시아 SFSR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생방송 기자회견을 통해 쿠데타에 맹렬히 맞설 것을 주문했다. 이에 주요 공화국 지도자들과 국제 사회는 옐친을 지지하면서 쿠데타 세력이 소련을 장악할 경우 경제 지원을 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황한 쿠데타 세력은 군을 동원해 러시아 최고회의가 위치한 백악관에 대한 무력진압을 명령했다. 하지만 대규모 사상자가 나올 것을 우려한 군 지휘관들은 쿠데타 세력의 명령을 거부했다. 당시 소련군 기갑부대가 모스크바에 위치한 최고회의 청사로 향하는 지하차도로 진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려던 3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제 쿠데타 세력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자신들에게 협조할 지 확실치 않은 군사력을 동원해 소련 전역에서 유혈사태를 감수하면서 정국을 장악할지, 아니면 실패를 인정하고 순순히 항복할지였다. 결국 쿠데타 세력은 소련인들의 반발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실상 항복했다. 쿠데타에 가담한 대부분의 간부들은 체포되거나 몇몇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는 3일 천하로 실패했다.

쿠데타의 실패는 이후 소련 정국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9] 쿠데타 실패를 계기로 소련 정부는 반신불수가 되었다. 고르바초프 정권을 지탱하던 소련의 정치인들이 죄다 쿠데타에 동참해버렸기 때문이다. 쿠데타의 최고 수혜자는 쿠데타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옐친이었다. 이미 고르바초프는 옐친에게 권력의 반은 넘겨줘야 할 것이라고 예측되었고 결국 그 해가 가기 전에 소련이 망해 그나마 반도 지키지 못했다. 반신불수가 된 소련 정부는 1991년 9월에 가장 독립 열망이 강했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2.3. 우크라이나의 독립

비록 소련은 8월 쿠데타 이후 반신불수가 되었지만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와 러시아 SFSR 대통령 옐친은 여전히 소련 체제의 유지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8월 쿠데타 이후 소련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가장 큰 구성국인 우크라이나의 여론은 독립으로 흘러갔고 우크라이나는 따로 독립투표를 치러 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다. 이에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소련 체제 유지를 포기하였다.

2.3.1. 쿠데타 이후 우크라이나 상황

고르바초프 시대 대부분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가들은 상대적으로 거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 유역과 체르보노흐라드의 광부들이 1989년 7월에 파업에 들어갔지만 고르바초프에게 반대하기보다는 함께 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파업했다. 1990년 10월 키이우에서 학생들이 2주간의 시위를 벌였지만 우크라이나 총리가 교체되자마자 시위가 끝났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소련의 다른 공화국과 비교하면 우크라이나는 전반전으로 "혼란의 바다에서 정말로 안정된 섬"이었다. 소련 정부가 1991년 3월에 연방 유지에 대한 지지도를 확인하기 위해 소련에 전국적인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이 국민투표는 어떤 종류던 간에 소련에서 유일하게 대중들에게 국민투표가 실시된 유일한 경우였다. 우크라이나의 대다수 유권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새로운 연방으로 유지" 찬성에 투표했다.[10]

1991년 3월 당시 우크라이나의 투표에는 두가지 질문이 있었다. 첫번째는 다른 소련 내 구성국에도 제기된 질문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평등한 주권 공화국을 재개하여 새로운 연방으로 보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으십니까? 그 안에서 모든 내셔널리티nationality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보장됩니다."였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최고 소비에트의 주도로 특별히 제기된 두번째 질문이 있었는데 "우크라이나가 국가 주권 선언의 원칙에 따라 주권 국가 연방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십니까?”이다.

우크라이나 유권자 70%이 첫번째 질문에 "찬성"을 골랐고 두번째 질문에는 80% 이상이 "찬성"을 골랐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3개 주에서만 "찬성"투표가 상대적으로 낮았고 이 중 한 곳(이바노-프란키우스크Ivano-Frankivs’k)에서는 두번째 질문이 여전히 다수결로 통과되었다. 우크라이나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두 질문에 투표는 "찬성"이 압도적이었다.[11] 이 목표가 달성되었다면 우크라이나는 독립운동 세력이 추구하는 지위에는 한참 못 미쳤을 것이다.[12]

쿠데타 실패 이후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공화국의 정치적 기회는 구조적으로 각계각층의 개인과 집단으로 확대됐다. 독립을 향한 열망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최고 소비에트의 의원들은 쿠데타가 실패한 지 3일 후인 1991년 8월 24일에 독립 선언을 우크라이나 최고 소비에트에서 압도적으로 채택하며 새로운 분위기에 빠르게 끼어들어갔다. 1991년 12월 1일에 우크라이나에서 공화국 전역에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을 때 투표자 중 92% 이상(유권자의 85% 이상)이 완전한 독립에 찬성했다. 러시아계가 주로 거주하는 우크라이나 지역, 특히 크림 반도와 돈바스에서도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지지하는 투표가 다수를 차지했다. 우크라이나의 이러한 결정적인 변화는 일주일 후 소련의 종말을 성문화한 벨라베자 조약으로 이어졌다.[13]

2.3.2. 옐친-고르바초프의 우크라이나 독립 방해

크라우추크는 실패한 쿠데타에 대한 대응에 약간은 망설인 후 결정적인 행동을 실행했다. 1991년 8월 24일 크라우추크는 우크라이나를 독립 국가로 선언하는 결의안을 주도했다. 선언문엔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발표도 들어있었다. 같은 날 대통령 선거도 실시하기로 했다.[14]

우크라이나 SSR 최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15] 독립 선언 이후 국민투표를 실시할 때까지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한 투쟁은 정말 치열했다. 소련 정부는 소련에서 우크라이나가 탈퇴해서 분리독립하려는 활동에 맞서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8월 24일(독립 선언)에서 12월 1일(독립에 관한 국민투표) 사이의 기간 동안 소련 최고 지도부(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모두)와 많은 러시아 공화주의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중앙 TV, 라디오, 인쇄 매체, 러시아 미디어는 우크라이나의 소수민족(특히 러시아인) 문제와 핵무기 문제에 관련하여 우크라이나 당국의 의도를 왜곡한 정보를 퍼뜨려 독립을 방해했다. 레오니드 크라우추크는 중앙 TV가 이러한 허위 사실을 유포한다면 지불을 보류하겠다고 위협했다.[16]

종이 공급을 줄이는 것과 동시에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인이 많이 정착한 지역에 반우크라이나 내용과 소련의 보존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긴 전단을 대량으로 배포했다. 모스코프스키에 노보스티와 같은 신문에서는 우크라이나 독립으로 인해 러시아와의 국경이 바뀌고 심지어 핵무기를 뺏길 수 있다는 소문을 널리 퍼트렸다. 소련 국방부도 이 투쟁에 뛰어들었다. 투표 전날 소련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배치된 군대의 전투 태세를 점검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마지막 순간에 시위 덕분에 점검은 현장의 대규모 군사 기동 훈련 없이 수행됐다.[17]

국민투표에 반대하는 운동은 크림 반도에서도 조직되었다. 그 조직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의 대표를 포함한 다양한 러시아인 집단과 독일의 일부 정치 단체까지 포함한 세력이었다. 반면 크림 타타르족은 독립과 선거 참여를 강력하게 지지하며 사람들에게 뱌체슬라우 초르노빌과 레우코 루키아넨코에게 투표하도록 지시했다.[18]

이러한 활동은 보수나 중도 강경파에 국한되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A. 소브차크와 모스크바 시장인 G. 포포브도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 반대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19] 고르바초프는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에게 '우크라이나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한 것'에 대해 짜증을 내며 '국민 투표에서 표현된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의지는 연방에서 탈퇴하는 행위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20]

옐친도 고르바초프와 함께 반독립 캠페인을 벌였다.[21] 1991년 8월 쿠데타가 실패로 끝났을 때만 해도 옐친은 여전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및 기타 중앙 아시아 공화국을 아우르는 연방을 유지하기를 희망하였다.[22][23] 고르바초프와 옐친 모두 우크라이나가 독립 국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옐친과 고르바초프가 실시한 반독립 캠페인은 우크라이나 내정에 대한 중대한 간섭으로 여겨졌다.[24]

2.3.3.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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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시행했고 90%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을 확정지었다.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여부 국민투표의 유권자들의 투표 수
Oblast' 유권자수Eligible to vote 투표자 수Number who voted “찬성”에 투표 Voting "yes" “반대”에 투표 Voting "no" 무효표Spoiled ballots
빈니차Vinnytsia 1,424,110 1,301,765 1,242,244 39,387 20,134
볼린Volyn' 762,872 710,989 684,834 16,299 20,134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Dnipropetrovs'ke 2,877,974 2,354,169 2,127,089 181,529 104,058
도네츠크Donets'ke 3,854,440 2,957,372 2,481,157 372,157 104,058
지토미르Zhytomyr 1,105,023 1,000,425 950,976 35,798 13,651
자카르파탸Zakarpattia 856,687 710,286 657,678 31,891 20,717
자포리자Zaporizhzhia 1,553,858 1,252,225 1,135,271 91,929 25,025
이바노-프란키우스크Ivano-Frankivs'ke 1,019,145 975,655 960,281 10,028 5,346
키이우Kiev 1,430,507 1,259,129 1,202,773 36,086 20,270
키이우 시 Kiev City 1,913,378 1,537,278 1,427,715 81,234 28,329
키로보흐라드Kirovohrad 924,050 813,833 764,053 35,613 14,167
루한시크Luhans'ke 2,085,931 1,682,344 1,410,894 255,589 45,861
르비우L'viv 2,011,267 1,915,597 1,866,921 35,671 13,006
미콜라이우Mykolaiv 971,321 818,538 732,179 66,858 19,501
오데사Odesa [Odessa] 1,882,610 1,412,228 1,205,755 163,831 42,642
폴타바Poltava 1,313,588 1,206,801 1,145,639 44,368 16,854
리우네Rivne [Rovno] 814,246 757,151 726,575 19,369 11,207
수미Sumy 1,072,639 948,278 878,198 46,479 23,601
테르노필Ternopil' 861,647 836,667 825,526 6,565 4,576
하르키우Kharkiv 2,377,159 1,798,977 1,553,065 187,631 58,281
헤르손Kherson 903,891 753,843 679,451 54,248 26,144
흐멜니츠Khmel'nyts'kyi 1,133,350 1,059,021 1,019,813 27,743 11,465
체르카시Cherkasy 1,154,455 1,040,971 999,603 28,703 12,665
체르니우치Chernivtsi 668,781 586,377 544,022 24,226 18,129
체르니히우Chernihiv 1,068,152 969,638 908,904 39,776 20,960
세바스토폴 시Sevastopil' City 307,024 195,688 111 ,671 77,891 6,926
크림 반도Krym [the Crimea] 1,535,154 1,036,190 561,498 437,505 37,187
합계Total 31,891,435 28,803785 2,417,544 670,108
출처: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9, DOI: 10.1080/00085006.1991.11091956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여부 국민투표의 유권자들의 투표율
Oblast' 유권자 수Eligible to vote 투표율의 퍼센트Percent votillg “찬성”율의 퍼센트Percent "yes" “반대”율의 퍼센트Percent "no" 무효수의 퍼센트Percent spoiled
빈니차Vinnytsia 1,424,110 91.41 95.43 3.03 1.55
볼린Volyn' 762,872 93.20 96.32 2.29 1.39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Dnipropetrovs'ke 2,877,974 81.80 90.36 7.71 1.93
도네츠크Donets'ke 3,854,440 76.73 83.90 12.58 3.52
지토미르Zhytomyr 1,105,023 90.53 95.06 3.58 1.36
자카르파탸Zakarpattia 856,687 82.91 92.59 4.49 2.92
자포리자Zaporizhzhia 1,553,858 80.59 90.66 7.34 2.00
이바노-프란키우스크Ivano-Frankivs'ke 1,019,145 95.73 98.42 1.03 0.55
키이우Kiev 1,430,507 88.02 95.52 2.87 1.61
키이우 시 Kiev City 1,913,378 60.34 92.87 5.28 1.85
키로보흐라드Kirovohrad 924,050 88.07 93.88 4.38 1.74
루한시크Luhans'ke 2,085,931 80.65 63.86 13.41 2.73
리비우L'viv 2,011,267 95.24 97.45 1.86 0.68
미콜라이우Mykolaiv 971,321 84.27 89.45 8.17 2.38
오데사Odesa [Odessa] 1,882,610 75.01 85.38 11.60 3.02
폴타바Poltava 1,313,588 91.87 94.93 3.67 1.40
리우네Rivne 814,246 92.99 96.76 2.56 1.43
수미Sumy 1,072,639 88.41 92.81 4.90 2.49
테르노필Ternopil' 861,647 97.10 98.67 0.78 0.55
하르키우Kharkiv 2,377,159 75.68 86.33 10.43 3.24
헤르손Kherson 903,891 83.40 90.13 7.20 2.67
흐멜니치키Khmel'nyts'kyi 1,133,350 93.44 96.30 2.62 1.08
체르카시Cherkasy 1,154,455 90.17 96.03 2.76 1.22
체르니우치Chernivtsi 668,781 87.68 92.78 4.13 3.09
체르니히우Chernihiv 1,068,152 90.78 93.74 4.10 2.16
세바스토폴 시Sevastopil' City 307,024 63.74 57.07 39.39 3.54
크림 반도Krym 1,535,154 67.50 54.19 42.22 3.59
합계Total 84.15 90.32 7.58 2.10
Black Sea Aeet 75.00
출처: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30, DOI: 10.1080/00085006.1991.11091956
1991년 12월 1일 독립여부의 국민투표에서 우크라이나 에스닉ethnic 비율과 투표 비율 비교
Oblast' 총 인구Total population 우크라이나계 비율의 퍼센트 Percent Ukrainians 러시아계 비율의 퍼센트
Percent Russians
그 외 비율의 퍼센트 Percent Others “찬성”투표 수의 퍼센트Percent "yes" vote “반대”투표 수의 퍼센트Percent "no" vote
빈니차Vinnytsia 1,820,783 91.6 5.9 2.5 95.43 3.03
볼린Volyn' 1,058,438 94.6 4.4 1.0 96.32 2.29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Dnipropetrovs'ke 3,869,858 71.6 24.2 4.2 90.36 7.71
도네츠크Donets'ke 5,311,781 50.7 43.6 5.7 83.90 12.58
지토미르Zhytomyr 1,537,604 84.9 7.9 7.2 95.06 3.58
자카르파탸Zakarpattia 1,245,618 78.4 4.0 17.6 92.59 4.49
자포리자Zaporizhzhia 2,074,018 63.1 32.0 4.9 90.66 7.34
이바노-프란키우스크Ivano-Frankivs'ke 1,413,211 95.0 4.0 1.0 98.42 1.03
키이우 시 Kiev City 2,572,212 72.5 20.9 1.9 92.88 5.28
키이우Kiev 1,834,369 89.4 8.7 1.9 95.52 2.87
키로보흐라드Kirovohrad 1,228,093 85.3 12.0 3.0 93.88 4.38
크림 반도Krym 2,430,495 28.5 67.0 4.5 54.19 42.22
루한시크Luhans'ke 2,857,031 51.9 44.8 3.3 83.86 13.41
르비우 시L'viv City 97.50
르비우L'viv 2,727,410 90.4 7.1 2.5 97.46 1.86
미콜라이우Mykolaiv 1,328,306 75.6 19.4 5.0 89.45 8.17
오데사 Odesa 2,624,245 54.6 27.4 18.0 85.38 11.60
폴타바Poltava 1,748,716 87.8 10.2 2.0 94.93 3.67
리우네Rivne 1,164,241 93.3 4.6 2.1 95.96 2.56
세바스토폴 시Sevastopil' City 57.07 39.39
수미Sumy 1,417,498 85.5 13.3 1.2 92.61 4.90
테르노필Ternopil' 1,163,974 96.8 2.3 0.9 98.67 0.78
하르키우Kharkiv 3,174,675 62.8 33.2 4.0 86.33 10.43
헤르손Kherson 1,236,970 75.8 20.2 4.0 90.13 7.20
흐멜니치키Khmel'nyts'kyi 1,521,564 90.4 5.8 3.8 96.30 2.62
체르카시Cherkasy 1,527,353 90.5 8.0 1.5 96.03 2.76
체르니우치Chernivtsi 940,801 70.8 6.8 22.5 92.78 4.13
체르니히우Chernihiv 1,412,770 91.4 6.8 1.8 93.74 4.10
출처: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31, DOI: 10.1080/00085006.1991.11091956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그 결과는 가장 열렬하게 독립을 믿은 사람들한테도 놀라웠다.[25]

1991년 12월 1일에 우크라이나 유권자들은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가 선언한 독립에 대한 의사표명과 최초의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투표소에 갔다. 정치 전문가들은 독립 투표가 가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남부-동부, 부코비나, 자카르파탸에서 소수 집단이 많았기 때문에 독립 지지율이 어느 정도로 높을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정치 전문가들은 90% 이상이 독립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26]

2.3.4. 옐친 소련 유지 포기

1991년 가을에 우크라이나인들이 12월 1일에 완전한 독립을 위해 투표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옐친은 목표를 바꾸었다. 공식 투표 집계를 보기도 전에 옐친은 독립국 러시아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새로 선출된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우추크와 벨라루스 의장이자 사실상 벨라루스 국가원수인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와 합류하기로 결정했다.[27][28]
1985년 3월 이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를 측정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데이터를 조사했던 학자나 정부분석가는 소련이 엄청난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알았겠지만, 그들은 데이터에서 소련이 시스템을 위협하는 위기에 처했음을 시사하는 것도 어떤 것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1985년 3월 이전에는 어떤 신뢰할 만한 학자도 소련이 1991년말까지 존재가 소멸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소련 붕괴의 장기적인 전조 신호를 지적할 수 없다. 1985년 3월 현재 소련은 파국적인 분기점에 이르고 있지 않았다. 소련의 상황적 전환점은 고르바초프가 1991년까지 체제를 분열에 취약하게 만든 일련의 불안정한 쇼크를 시스템에 가했을 때 찾아왔다. 직접적인 전환점은 1991년 8월의 쿠데타와 우크라이나의 독립 국민투표와 함께 찾아왔다.

Scholars or government analysts who had pored over various sorts of data before March 1985 to try to gauge whether fundamental change was about to happen would have seen that the Soviet Union was facing daunting challenges, but they would not have found anything in the data to suggest that the Soviet Union was in a system-threatening crisis.

Before March 1985, no credible scholar would have predicted that the Soviet Union would cease to exist by the end of 1991. In that sense, we cannot point to longer-term precursor signals of the Soviet collapse. The Soviet Union as of March 1985 was not approaching a catastrophic bifurcation. The contextual tipping point for the Soviet Union came only when Gorbachev dealt a rapid series of destabilizing shocks to the system that by 1991 left it vulnerable to fragmentation. The direct tipping points then came with the abortive August 1991 coup and the independence referendum in Ukraine, which in combination caused the union to unravel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16
옐친은 소련을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12월 1일에 실시한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에서 완전 독립 찬성에 90%라는 압도적인 결과가 나오게 되자 목표를 변경하고 소련 해체에 참여했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우크라이나가 독립 국가 될 수가 없다고 말하자 크라우추크가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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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avchuk criticized both Gorbachev and Yeltsin for saying that Ukraine could not be an independent state.}}}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7
옐친과 고르바초프에 의한 국민투표 전날의 반독립운동―내부 정치 문제에 대한 무례한 방해로 인식―또한 아마도 독립 찬성세력들에게 힘을 주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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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nti-independence campaign by Yeltsin and Gorbachev on the eve of the referendum-perceived as a gross interference in internal political affairs-also probably helped the pro-independence forces?}}}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8-129
8월 독립 선언과 1991년 12월 대통령 선거와 독립 국민 투표 사이에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우크라이나를 구 소련 내에서 유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국민 투표에서는 동부 우크라이나와 같이 러시아인이 많이 밀집한 지역에서조차 90%의 압도적인 찬성율로 독립에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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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the August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the December 1991 presidential elections and independence referendum both Gorbachev and Yeltsin continued to try and maintain Ukraine within the former USSR. But the referendum produced an overwhelming majority of 90 per cent in favour of independence, even in regions with large concentrations of Russians, such as Eastern Ukraine.}}}

Taras Kuzio (1994) Ukrainian nationalism, Journal of Area Studies, 2:4, 91
1991년 12월 7-8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민스크 정상 회담에서 옐친은 고르바초프로부터 제안을 받아 마침내 우크라이나를 소련내에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 주권 국가 연방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8월 쿠데타 이전의 크라우추크에게는 호소력이 있을지 모르지만(그러나 민족주의자에게는 그렇지 않음) 독립 국민 투표 결과 90% 이후에는 시작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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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he Minsk summit of Belarus, Ukraine and Russia on 7-8 December 1991 Yeltsin brought a proposal from Gorbachev where he finally accepted that the only way of keeping Ukraine within the Soviet Union was by its conversion into a confederation of sovereign states. Although this may have been appealing to Kravchuk prior to the August coup d'etat (but not to the nationalists) it was a non-starter after the ninety per cent independence referendum results.}}}

Taras Kuzio (1994) Ukrainian nationalism, Journal of Area Studies, 2:4, 92
8월 21일 이후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연방을 유지하기를 희망했지만, 등장해야 할 단체에 대한 개념은 양립할 수 없었다. 12월 투표 결과에 반영된 바와 같이 완전한 독립을 지지하는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여론 변화는 결국 옐친의 목표를 바꾸도록 강요했고 그리고 벨로베즈스카야 푸쉬차Belovezhskaya Pushcha협정과 알마-아타Alma-Ata 합의를 통해 소련의 종말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그렇게 극적으로 바뀌자 않더라도 옐친과 고르바초프 둘 다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실행 가능한 구조가 고안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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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hough both men after 21 August hoped to preserve a union headquartered in Moscow, their conceptions of the entity that should emerge were incompatible. The resounding shift of public opinion in Ukraine in support of outright independence, as reflected in the voting results on 1 December, is what ultimately forced Yeltsin to change his goals and precipitate the demise of the USSR through the Belovezhskaya Pushcha agreements and Alma-Ata accords. But even if the situation in Ukraine had not changed so dramatically, it is questionable whether a viable union structure could ever have been devised that would have satisfied both Yeltsin and Gorbachev.}}}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6
그 마지막 위기에서 또 다른 티핑 포인트는 독립 국가로 귀결되는 결정적인 투표인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와 함께 찾아왔다. 국민투표 캠페인과 투표 자체는 근본적인 정치 변화의 역학에 대한 게르슈프스키의 유형론에서 또 다른 내생적으로 주도된 파열(Type III Change)을 구성했다. 1991년 8월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에도 옐친은 처음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그리고 다른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을 연결시키는 연방을 보존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1991년 가을 우크라이나 주민 대다수가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12월 1일에 투표할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옐친은 국민투표가 되돌아 갈 수 없는 포인트가 될 것을 깨달았다. 공식적인 투표 집계를 보기 전에 그는 독립 러시아 국가(구 소련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구성 요소)에서 권력을 공고히 하고, 그리고 새로 선출된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우추크와 벨라루스 의장(사실상 국가 원수)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와 그 연방을 끝내는데 함께하기로 결정했다—1991년 12월 8일 벨로베즈스카야 푸쉬차에서 과업을 완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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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at final crisis, another direct tipping point came with the independence referendum in Ukraine on 1 December 1991, which resulted in a decisive vote for an independent state. The referendum campaign and the vote itself constituted another endogenously-driven rupture (Type III Change) in Gerschewski’s typology of the dynamics of fundamental political change. After the August 1991 coup ended in failure, Yeltsin had initially been hoping to preserve a union linking Russia with Ukraine, Belarus, Kazakhstan, and other Central Asian republics. But as it became clear in the fall of 1991 that the large majority of residents of Ukraine would be casting votes on 1 December for outright independence, Yeltsin realized that the referendum would be a point of no return. Even before seeing the official voting tally, he decided he would consolidate his power in an independent Russian state (by far the largest and strongest component of the former USSR) and join with the newly elected Ukrainian president, Leonid Kravchuk, and the chairman of the Belarusian parliament (and de facto head of state), Stanislau Shushkevich, in bringing an end to the union—a task they accomplished on 8 December 1991 in Belovezhskaya Pushcha}}}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14

2.4. 해체

파일:벨라베자조약.jpg
1991년 12월 8일에 열린 벨로베즈스카야 조약 서명식
이후 12월 8일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3국의 지도자들은 벨로베즈스카야 숲에 모여 벨라베자 조약을 통해 소련의 해체와 독립국가연합(CIS)의 창설을 결의했고, 대세를 막을 수 없게 되자 12월 25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했으며 다음날 소련 최고회의는 142-N호 선언을 통해 이를 인준하였다.[29] 이로써 1922년 12월 30일에 건국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68년 11개월 26일만에 해체되었다.

3. 탈퇴 순서

<rowcolor=#ffd700> 소련 구성국의 독립
국명 독립선언일 출처 잔류국
리투아니아 1990년 3월 11일 원문 (리투아니아어) 14
라트비아 1990년 5월 4일 원문 (라트비아어) 13
아르메니아 1990년 8월 23일 원문 (아르메니아어) 12
1991년 소련 존속 투표 (1991년 3월 17일)[30] 11
조지아 1991년 4월 9일 원문 (조지아어) 10
주권국가연맹 창설조약 서명예정일 (1991년 8월 20일)[31]
8월 쿠데타 (1991년 8월 19일 ~ 1991년 8월 22일)
10
에스토니아 1991년 8월 20일[32] 원문 (에스토니아어)[33] 9
우크라이나 1991년 8월 24일 원문 (우크라이나어) 8
벨라루스 1991년 8월 25일 출처 (러시아어) 7
몰도바 1991년 8월 27일 원문 (루마니아어) 6
아제르바이잔 1991년 8월 30일 출처 (러시아어) 5
우즈베키스탄 1991년 8월 31일 출처 (러시아어) 4
키르기스스탄 1991년 8월 31일 출처 (러시아어) 3
타지키스탄 1991년 9월 9일 출처 (러시아어) 2
투르크메니스탄 1991년 10월 27일 출처 (러시아어) 2
벨로베자 조약 (1991년 12월 8일)
(러시아 탈퇴)
출처 (러시아어) 1
카자흐스탄 1991년 12월 16일 출처 (러시아어) 0
알마아타 선언 (1991년 12월 21일) 출처 (러시아어) 0
소련 붕괴 (1991년 12월 26일) 출처 (러시아어) 0

실질적으로 독립한 날짜는 공화국마다 다르지만 발트 3국 1991년 9월 6일 소련 인민대표회의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고 나머지 공화국은 1991년 12월 26일 소련이 사라지고 소련 내 각 구성국이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는 형태로 독립하였다/[34]

4. 분석

4.1. 유지 가능성

소련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위기에 빠진 1990년 당시 소련이 해체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35] 당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같이 소련 창설기부터 소련에 소속되어 있던 공화국들은 소련 체제를 유지하는 데 찬성했으며 발트 3국이나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 같은 동유럽 지역에서 분리주의 열기가 강했다. 따라서 1991년 전까지만 해도 소련은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지만 완전히 분해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역사에서 소련이 유지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마지막 승부수였던 주권국가연맹이었다. 당시 소련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는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연방 내 구성국들과 연방정부의 정치적 갈등을 조율하면서 연방 내 공화국들에게 자치권 확대를 약속하면서 기존의 소련 체제를 유지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에 연방 구성국들은 고르바초프의 제안에 동의하면서 1922년 체결된 소련 창설조약을 대체하는 주권국가연맹 조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조약 준비 당시 발트 3국 몰도바, 아르메니아, 조지아는 소련에서 탈퇴했지만 그럼에도 나머지 9개 구성국들은 1991년 소련 존속 투표의 결과처럼 연방 잔류 의사를 표시했다. 당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과 주요 공화국 지도자들은 고르바초프의 제안에 호의적이었고 주권국가연맹 창설조약은 8월 20일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1991년 8월 19일 소련 정부 내 주요 공직자들은 주권국가연맹조약 서명계획을 입수하고 군을 동원하여 고르바초프를 실각시키고 기존 체제를 고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던 쿠데타 세력은 소련 전역에서 예상보다 격렬한 저항에 맞닥뜨렸다. 결국 8월 쿠데타는 3일만에 실패했다.

8월 쿠데타는 소련이 국가로써 유지될 수 있었던 마지막 가능성을 완전히 일소시켰다. 공화국들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쿠데타 과정을 통해 소련 공산당을 위시한 기득권 세력이 공화국들과 더 이상 타협할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더 이상 소련에 남 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8월 쿠데타 이후 12월 초까지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8개국이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이 상황에서 보리스 옐친을 비롯한 당시 공화국 지도자들은 소련 붕괴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결국 소련 구성국 지도자들은 기존에 비준하려고 했던 주권국가연맹을 좀 더 유럽연합이나 영연방과 비슷한 독립국가연합 체제로 개편하는데 동의했다. 과거 대영제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화를 거치면서 영연방으로 개편되었듯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소련은 독립국가연합이나 유라시아 연합 같은 국제기구로 개편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실제 소련을 식민제국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소련 해체를 20세기 마지막 식민제국의 해체로 바라보기도 한다.

오늘날 친소, 친러적인 시각에서는 8월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소련이 유지될 수도 있었다고 가정하지만 설령 고르바초프를 몰아낸 보수파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였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소련은 천안문 사태보다 훨씬 더 방대한 군사력 행사를 통해 중앙권력을 회복해야 했을 것이다.

더욱이 쿠데타가 일어날 1991년 당시 시점에서 소련은 막대한 정치적, 군사적 원조 없이 불가능했던 사회주의 진영의 종주국 역할에 부담을 느끼고 바르샤바 조약 기구 코메콘 등 냉전 시기 동안 유지해 오던 군사적, 경제적 동맹을 스스로 해체했다. 여기에 계획경제의 한계점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경제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상황이었다. 이렇게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겪던 상황에서 소련이 대규모 유혈사태까지 일으키며 분리독립하려는 공화국들을 강제로 진압했다면 최소 서방의 경제제재부터 최대 천안문 6.4 항쟁 이후의 중국 이상의 외교적 타격, 소수민족들과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같은 독립 전쟁이 벌어지는 등 소련 입장에서 결코 현실 역사 이상으로 순조롭게 흐르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4.2. 영향

사실 소련/러시아는 1인당 명목 GDP가 1983년 3,650달러를 기록한 이래 계속 감소 추세였으므로 소련 붕괴 이전에도 경제사정이 딱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1989년 소련의 1인당 명목 GDP는 2,748달러[36][37] 그러나 10년 후인 1999년 러시아의 1인당 명목 GDP는 절반인 1,330-1,343달러[38]로 줄어 버렸다. 물론 이후 다시 회복되긴 했지만 그 와중에 소련보다 복지 수준이 훨씬 나빠져 지금도 러시아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소련 시절보다 낫다고 장담할 수 없다.[39] 붕괴 이전까지 한국에서 소련이란 나라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공산권의 종주국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1990년대에는 뉴스에서 소련 경제가 위기라는 보도가 계속되고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심지어 여대생, 회사원 같은 엘리트 여성들마저 한국 매춘 등으로 일하러 오면서[40] 러시아는 소련 붕괴 후의 후폭풍이 널리 알려지면서 강대국이지만 후진국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혔고 이후 경제상황이 훨씬 나아진 후에도 이런 인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월 스트리트의 전설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는 소련의 붕괴 이후 공장을 관리하던 공무원들이 하루 아침에 공장의 주인이 되었으며 어느 누구도 무엇이 어떻게 변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큰 혼돈이 왔다고 회고했다.

게다가 군대도 물량이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며. 또 국가의 경쟁력도 잃어 소련 시절 세계 공업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던 막강한 중공업은 약화되었으며 사회적으로 무상의료 등이 사라지면서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속출하더니 평균 수명10세나 깎아먹었다.

이런 상황은 선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출산이 아니라 식량 부족과 복지 불안 등 진짜로 기본적인 생활 보장 자체가 안 되면서 출산을 기피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1990년대 말 바닥을 친 뒤 블라디미르 푸틴의 집권과 함께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면서 출산율이 1.7명까지 회복되었고 이에 따라 1993년부터 2008년까지 인구가 660만 명 감소하였으나 2009년부터는 다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 붕괴 후에도 아직까지 러시아에는 후폭풍이 남아 있는 상태다.

소련의 해체로 인한 혼란기때 총기, 심지어 탱크나 전투기 같은 중장비조차 자국을 포함한 전 세계 암시장에 팔아치웠으며 치안의 공백으로 레드 마피아와 자본주의의 법칙을 빨리 배워 그들과 결탁한 올리가르히- 실로비키가 들끓게 되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구 소련권 및 해외 러시아계 위주로 이민을 적극 수용하고 재산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인구 증가를 통해 내수 시장을 확충하고자 소련권이었던 국가들과의 연합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 경우 이민자가 비러시아계여서 러시아어를 못할 수 있지만 그 가족들 중 누군가는 소련 시대의 교육을 통해 러시아어를 할 줄 알고 1991년까지만 해도 같은 나라여서 러시아에 친척을 둔 이가 많으며 사고방식이 통하기 때문에 북미 유럽의 이민 수용보다 부작용이 적다. 다만 러시아 연방이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는 북미 유럽과 비슷한 방식의 이민 수용도 북미 유럽 본토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받아 주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때로는 무력 개입도 주저하지 않는다.

러시아 외에 소련을 구성하던 공화국의 해체 이후 상황은 천차만별이다. 사정이 제일 나은 것은 역시나 발트 3국으로 1990년대 초중반에 경제적 혼돈기를 겪으면서 인구가 급감하는 바람에 한동안 국가 존립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처했지만 그럼에도 발트 3국은 소련 시절에도 산업발달이 가장 잘 이루어진 지역이어서 기존에 쌓아놓은 것이 있었던 데다가 서방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에 비교적 빠르게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정치적으로도 친서구적인 외교 노선으로 갈아타 유럽연합, NATO에 가입하면서 안보를 보장받고 반러 국가로 탈바꿈했다. 다만 인구가 300만도 안 되는 소국들이라 국민소득을 상대적으로 빠르게 올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고 이들은 저출산 및 인구 감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의 경우 국가마다 차이가 나는데 사실 이 차이라는 것은 천연자원의 부존 여부에 따른 것이다. 5개국 모두 체제 전환 초기에는 극심한 혼란과 경기침체를 경험했으나 세계적인 자원 보유국이자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천연자원 덕분이었던 만큼 2015년 유가 폭락을 맞아 둘 다 타격을 입었다.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은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내륙국으로, 인구도 많지 않고 천연자원도 미미하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도 최빈국이고 전망도 밝지 않다. 근대 세계에서 내륙국이란 지리적 특성은 발전에 있어 말 그대로 쥐약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럽의 내륙국처럼 해안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고 교통망이 발달되어 있으며 주변국과 협력하는 상태라면 모를까 중앙아시아의 경우는 제대로 된 항구까지 닿으려면 그야말로 한 세기가 걸리고 교통 수준과 협력 수준도 높지 않다.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모두 러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외국에서 일하는 자국민들의 송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사실 이 동네는 워낙 입지가 형편없기 때문에 소련 시절부터 15개 공화국 중에서 가장 개발이 덜 된 지역이었고, 체제 전환 때문이라기보다는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중앙정부의 지원이 끊기고 노동 이주도 제한된 것이 더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은 중국 서부인 위구르, 티베트 지역과 인접해 있지만 위구르 티베트는 인구가 많은 지역이 아니고 산업 발전이 이루어진 지역도 아니다.

우즈베키스탄도 마찬가지로 내륙국이고,자원은 있지만 카자흐스탄에 비해 인구가 2배 많고 자원은 더 적기 때문에 수출은 고사하고 자국의 수요도 모두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인구가 3,000만명으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데다 소련 시절에 쌓아놓았던 산업기반도 어느 정도 유지는 되었으며 내수 시장이 어느 정도 있고 노동력도 풍부해서 1997년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한 이후 2000년대 초반 평균 5%, 중반 이후 8%를 넘는 고속 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물론 그래도 카자흐스탄을 따라잡으려면 (카자흐의 성장이 멈추더라도) 십 년은 족히 걸릴 것으로 보인다.

코카서스의 경우 카스피해 연안의 석유, 천연가스를 소유한 아제르바이잔의 소득이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지만 자원의 배분이 영 신통치 않은지 임금 수준만 놓고 보면 아르메니아, 조지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참고 캅카스 3국 모두 월 평균 임금이 4~50만원에 불과한 빈국이다.

러시아를 제외한 동유럽 3개국 또한 사정이 영 안 좋기는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 몰도바는 1인당 GDP가 3,500-4,000달러 수준으로 탈유럽급의 최빈국인데 이것도 1990년대 초중반에 비하면 나은 수준이다. 두 나라 모두 지하경제의 비중이 큰지라 실질 경제력으로 따진다면 경제규모가 최소 2배-3배 이상으로 껑충 뛰어오른다. 물론 거꾸로 말하자면 부정부패가 심하다는 얘기도 된다. 게다가 정정 불안으로 인해 안 그래도 막장이었던 경제는 갈수록 파탄으로 치닫게 되었다. 의외로 벨라루스는 자원이 없는데도 발트 3국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양호한 소득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웃 러시아 1990년대 옐친의 급진적 경제 개혁의 부작용으로 나락으로 추락하는 동안 벨라루스 루카셴코 대통령은 그와 반대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소련은 중앙 권력으로 소련 공산당이 있었고 소속 공화국별로 휘하의 공산당이 존재하였다. 물론 당연히 연방중앙 공산당의 강력한 지도를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구성국들이 극과 극으로 나뉘는데 우크라이나,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발트 3국, 조지아, 아르메니아는 부분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41]인 반면 러시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권위주의 국가가 되는 양상을 보인다. 한때 철권통치로 악명 높았던 우즈베키스탄 독재자 2016년에 사망하면서 민주주의 요소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등 과도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발트 3국 소련에서 독립하면서 반러 국가가 된 후 소련식 중앙집권체제를 철폐하였고 몰도바는 유럽 최빈국이라 그런지 딱히 독재 권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조지아, 아르메니아 민중 시위로 권력자를 몰아낸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의원내각제 요소를 도입하여 국가원수 대통령의 권한을 총리와 나눠 가지는 등 권위주의를 방지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소련 해체 직전 각 해당 공화국의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이슬람 카리모프,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가 독립하자마자 최초 직선제 선거를 통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2019년에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에서 사퇴한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프를 제외하면 카자흐스탄과 인접한 두 나라의 카리모프 니야조프는 장기집권 중 노환으로 사망하여 그의 뒤를 승계한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가 현재 대통령직을 역임하고 있다. 미르지요예프는 현재 카리모프가 행해 오던 철권통치를 완화하고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베르디무하메도프는 전임자였던 니야조프를 능가할 정도로 억압적인 독재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3대 대통령인 헤이다르 알리예프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을 통해 권력을 획득한 후 훗날 아들인 일함 알리예프한테 대통령직을 세습하였고 일함 또한 아들한테 세습하려 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마찬가지로 타지키스탄 에모말리 라흐몬 대통령과 벨라루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 또한 장기집권을 하면서 세습 의혹을 받고 있다.

소련 붕괴 25주년인 2016년 12월에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첸트르'에 따르면 소련 붕괴를 애석해한다는 응답자는 78%, 그렇지 않다는 응답자는 22%였다. 애석해하는 이유로는 경제 붕괴(53%), 강대한 국력 상실(43%), 상호 불신 증가(31%), 친척·친구 관계 단절(28%), 자유로운 여행 불가(15%) 등을 들었다. 한편 다른 여론조사 전문기관 '브치옴'의 조사에선 소련 붕괴를 애석해한다는 응답자가 83%로 더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라시아 연합 등 푸틴 주도의 구소련 독립국가연합 재통합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스포츠(특히 축구)에도 적잖게 영향을 끼쳤다. 리그에서부터 전도유망한 선수들이 해외로 많이 빠져나갔는데 타지키스탄 출신의 발레리 사리체프(신의손)가 K리그로 떠나면서 2000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따거나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과 알렉산드르 포드쉬발로프(샤샤), 세르게이 부르딘 등이 부천 SK에서 활약한 게 그 반증이다.

소련 축구 대표팀은 소련 시절 월드컵 최저 기록 1982년 스페인 월드컵[42] 12강과 1986년 멕시코 월드컵 16강, 유로컵에서는 1960년부터 1972년까지 유로1968 4위가 최저기록일 정도로 강호였지만, 유로1988 준우승과 88올림픽 축구 금메달을 끝으로 소련 해체 후 약팀으로 떨어졌다. UEFA 유로에서는 1992년 지역예선 직후 소련이 해체되어 '독립국가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본선에 참가했지만, 사상 처음으로 유로1992 8강 조별리그에서 최하위로 광탈했다. 유로 2008에서 4강에 오른 것을 제외하고 1992, 1996, 2004, 2012, 2016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그 중 2000년에는 본선도 못 갔다. 월드컵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6강 진출 실패를 시작으로 1994년 미국 월드컵 16강 진출 실패,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43] 진출 실패,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 진출 실패, 2006년 2010년 대회는 본선 진출 실패, 그리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16강 실패로 암흑기의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개최국으로 참가한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 8강에 오르면서 제3의 전성기를 맞았으나 각종 도핑 논란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무대 출전이 정지되었다. 또 러시아를 제외하고 월드컵이나 유로컵 본선에 오른 팀은 라트비아[44] 우크라이나[45]뿐이다. AFC로 소속을 옮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46],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시안컵 본선에 오른 나라도 우즈베키스탄[47] 투르크메니스탄[48], 키르기스스탄[49]뿐이다.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소련의 15개국 중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를 제외한 12개국이 '올림픽 연합 선수단'이라는 이름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하지만 월드컵이나 유로컵과는 달리 동계올림픽에서는 메달 종합 2위, 하계올림픽 메달 종합 1위를 달성하며 체면치레를 했다.

조지프 나이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현 러시아가 이전의 소련보다 인구의 반, 경제의 반, 병력의 3분의 1이 줄어든 상태라고 한다. #

2021년 12월 12일 푸틴 대통령이 소련 붕괴를 비극으로 묘사하면서 경제난에 택시를 몰아야 했다고 회고했다. #

4.3. 붕괴로 인한 후유증

소련 붕괴로 인하여 소련 국가들의 모순이 폭발하며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체첸 전쟁, 남오세티야 전쟁, 유로마이단, 크림 반도의 독립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돈바스 전쟁,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022년 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국경분쟁 등 수많은 혼란과 문제를 초래하게 되었다. 또 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지에서도 기득권층의 사치와 부실한 소득 분배 및 복지 문제, 공산당이 집권하던 시절보다 더 악명높은 독재와 인권 탄압, 정쟁불안 등에 불만을 품고 차라리 소련 시절이 더 나았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다.

4.4. 소련 부활?

" 소련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소련을 재건하려는 사람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 블라디미르 푸틴
소련은 냉전 시절 미국과 함께 세계를 주물렀던 초강대국이었기에 대체역사에서는 소련 부활에 관련된 주제가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해당 문단은 만약 소련이 러시아를 중심으로 나머지 14개 혹은 대다수의 국가들을 합치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유지되던가 부활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고 부활한 소련은 어느 정도의 국력을 가지고 있을지 서술한다.

만약 소련이 다시 건국되게 된다면 대부분의 땅이 쓸 수 없는 동토지나 불모지이지만 캐나다, 인도, 중국을 합친 것보다도 크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거대한 국토를 가진 세계 1위 영토대국이 만들어진다. 소련의 국토는 무려 22,402,200km²에 달했고 만약 21세기에 이런 규모의 영토를 가진다면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지정학적 우세를 점하게 될 것이다. 인구 쪽으로 보면 2018년 기준으로 2억 9,600만 명 정도의 인민들을 거느리게 되며, 인도, 중국, 미국의 뒤를 잇는 세계 4위 인구대국이 된다. 다만 동유럽 국가들의 인구가 경제 저성장과 불황으로 인해 많이 줄어든 편이라서 1991년과 비교하면 겨우 300만 명 밖에 증가하지 않은 수치며 또한 전체 인구의 64%가 유럽 부분에 몰려 살게 된다.[50] 가장 많은 민족은 41%의 러시아인, 다음이 14%의 우크라이나인, 9%의 우즈베키스탄인과 카자흐스탄인 4%, 그리고 나머지 민족으로 구성된다.

수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가 될 가능성이 크다. 소련 시절 내내 수도였다는 점에서 정통성이 워낙 압도적이고 경제, 사회, 문화의 실질적인 중심지이기까지 하니 당연히 모스크바가 새로운 수도로 가장 유력하다. 게다가 부활한 소련에서 약 1,9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51] 소련 제1의 도시이니 수도가 아니라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다. 참고로 부활한 소련 체제 하에서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이우, 타슈켄트, 바쿠 순서대로 도시 규모가 커지게 된다.

경제는 전성기에 비하면 여전히 좋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소련 시절에도 경제가 그렇게 좋았던 것은 아니었고[52] 소련 붕괴 후 구성국들 상당수는 1990년대 혹독한 불황과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경제 성장을 기록했다. 1989년 소련 붕괴 직전 소련의 GDP는 세계 8위인 약 8,000억 달러였다.[53] 이것은 동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와 비슷한 수준이다. 따라서 2018년 기준으로 부활할 소련의 경제 규모는 영국, 인도, 브라질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2조 1,793억 달러를 기록하여 1989년에 비해 2.8배 증가한 세계 9위 경제대국이 되었을 것이다.

1인당 명목 GDP는 1990년보다 더 늘었다. 1990년 소련의 1인당 GDP는 2,748달러인데 2018년 부활한 소련의 1인당 GDP는 약 7,363달러다. 인플레이션을 계산해도 분명히 1990년보다 증가하긴 했지만[54] 이것은 세계적으로 보면 몬테네그로보다는 가난하고 리비아보다는 조금 더 나아서 1인당 GDP 순위는 77위밖에 안 된다. 게다가 구성국들 사이의 빈부격차도 엄청나다. 선진국에 해당하는 에스토니아는 평균 임금이 약 957유로, 라트비아는 738유로, 리투아니아는 690유로 정도 되지만, 빈곤한 벨라루스는 평균 임금이 357유로, 몰도바는 212유로, 가장 가난한 우크라이나는 고작 210유로밖에 안 된다.

군사적인 측면을 보자면 부활 시 소련은 심지어 미국보다도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게 된다. 상비군 규모로만 따지면 약 140만~160만 명 정도로 220만 군대를 지닌 중국의 뒤를 잇는 세계 2위 규모의 군대를 가진다. 다만 소련이 다시 부활한다고 해도 구성국들이 예전만 못하기에 옛 소련군만큼의 규모를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국제 정치 지형도 매우 크게 뒤바뀔 것은 확실하다. 구도가 미중 패권경쟁에서 미국 VS 중국-소련, 혹은 미국 VS 중국 VS 소련의 천하삼분지계 재편될 수도 있다. 소련 부활은 예측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 될 것이기에 부활한 소련이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질지, 그리고 국력은 어느 정도일지는 전혀 예측하기 어렵지만, 일단 냉전 시절에 떨쳤던 국력 수준이 아님은 자명하다. 갑자기 기적같이 소련이 부활한다 해도 옛 시절처럼 세계의 초강대국 행세를 하고 다니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현재 중국의 국력을 고려했을 때, 중국과 소련이 별다른 마찰 없이 제2세계 국가로서 서로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기로 결정한다면, 미국 또한 현재와 같은 강력한 패권을 행사하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단 소련이 21세기에 부활한다 할지라도 일단 소련은 1990년대보다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불리하다. 1인당 GDP는 이미 러시아가 뭔 짓을 해도 미국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으며. 산업 분야도 미국은 산업 전환에 성공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제4차 산업혁명을 세계적으로 선도하여 반도체, 중공업, 소프트웨어, 인공지능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압도적으로 앞서나가는 와중에 러시아는 대개 석유 석탄 같은 자원중심 경제에 머무르고 있다. 항공우주 등 일부 분야에선 러시아가 구 소련 시절 쌓은 것을 바탕으로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이마저도 미국을 따라잡지는 못하기에 소련은 미국에게 냉전 시절만큼 무서운 존재가 되지 못한다.

둘째, 바로 동유럽 위성국가들의 부재다. 냉전 시절에는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여러 공산주의 위성국들이 동유럽에 버티면서 서구 세계에 대한 든든한 방파제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에 폴란드,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 등 소련의 옛 앞마당이었던 국가들이 모조리 나토에 들어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서방 국가들의 동맹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렸다. 심지어 해당 국가들은 소련 시절을 강점기 흑역사로 여기고 소련을 매우 싫어하는 편에 속하니 이전처럼 동유럽 국가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건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소련과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엄청난 발트 3국이 이미 소련에서 탈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토에 가입해 버렸기 때문이다. 발트 3국을 병합하려면 나토,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미국과 전쟁을 벌여야만 한다. 게다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도 친러 성향을 보이기는 하지만 묘하게 독자행보를 보이는 경우가 많고,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의 그늘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그래서 소련이 부활한다 해도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정도가 합쳐지는 건데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완전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병합의 꿈이 어려워졌다. 나라의 명운을 걸고 전쟁까지 치른 상황에서 반러 그 자체가 되어버린 우크라이나 정부가 내부분열로 친러 정권으로 바뀌지 않는 한 러시아와 통합을 선언하는 일은 없을 테니 소련이 다시 세상에 등장하는 일은 없을 거라 봐도 무방하다.[55]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러시아 패권주의적 외교에 있다. 2022년 러시아에 침략당한 우크라이나만 해도 처음부터 러시아에 적대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쿠치마 재임기 열병식에 푸틴이 참석할 만큼 초창기에는 우호적이었다. 원래부터 반러 기조가 강했던 발트 3국과 소련 해체 이후 먼 나라가 되버린 몰도바를 제외하면[56] 다들 러시아와 인접해 있는 만큼 정치적, 경제적으로 러시아와 마냥 척을 질 수 없었고 이런 지정학적 요건을 활용해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데 옛 연방의 일원들을 독립국가로 존중하는 대신 속국 내지는 아예 국가도 아닌 소비에트 공화국, 속령으로 취급하며 내정간섭하고 영토 분쟁을 부추겨대니 살기 위해서라도 러시아에 맞서게 된 것이다.

5. 어록

" 그들 중 심판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요! 그 망나니들은 존경받는 연금수령자들로 살다가 제명대로 죽었다고요. 제가 뭐라고 하고 싶은 줄 아세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하지 마세요. 인민들이, 우리 국민들이 선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만들어내지 마세요. 아무도 죄를 뉘우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요."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세컨드 핸드 타임>, 391쪽
" 누군가에게는 지금이 훨씬 좋겠죠. 하지만 우리에겐 아니에요. 그때는 저에게도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 표트르 트로피모[57], MBC 러시아 혁명 다큐멘터리 : 제5부 혁명의 유산 중
"우유값도 못 내던 그때가 기억나십니까? 우린 그 시대를 살았습니다."
- 파벨 그루지닌
"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연출된 역사적 비극의 결말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자본가 되려고 안달이었던 관료들에 의해서 현실사회주의가 자멸되고 그 영토 중심부 내지 준중심부 산업 자본을 위한 자원 공급지이자 상품 시장으로 전락했습니다. 혁명의 유산을 지켜내지 못한 과거의 ' 인민'들은 계급적 적 앞에서 너무나 약했던 죄로 새로운 과두재벌의 권리 없는 머슴이 되거나 저처럼 자기자신을 중심부에 팔아야 하는 망국노적 신세가 된 것입니다."
- 박노자
"무엇보다도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가 20세기의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연방 국회 연설, 2005년)

6. 여담

7. 관련 자료


===# 142-N호 선언문 #===
СОВЕТ РЕСПУБЛИК ВЕРХОВНОГО СОВЕТА СССР

ДЕКЛАРАЦИЯ В СВЯЗИ С СОЗДАНИЕМ СОДРУЖЕСТВА НЕЗАВИСИМЫХ ГОСУДАРСТВот 26 декабря 1991 года № 142-Н

Опираясь на волю, выраженную высшими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ми органами Азербайджанской Республики, Республики Армения, Республики Беларусь, Республики Казахстан, Республики Кыргызстан, Республики Молдов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Республики Таджикистан, Туркменистана, Республики Узбекистан и Украины о создании Содружества Независимых Государств, Совет Республик Верховного Совета СССР констатирует, что с созданием Содружества Независимых Государств Союз ССР как государство и субъект международного права прекращает свое существование.

Совет Республик Верховного Совета СССР обращается к главам Независимых Государств с предложением рассмотреть вопросы:

— о правопреемстве Союза ССР и союзных органов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власти и управления в связи с образованием Содружества Независимых Государств; — о создании межпарламентского органа Содружества с целью сохранения единого правового, экономического, гуманитарного и экологического пространства на территориях государств — участников Содружества; — о ратификации, исполнении и денонсации международных договоров, заключенных Союзом ССР до образования Содружества.

Совет Республик Верховного Совета СССР призывает высшие представительные органы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власти и глав государств — членов Содружества принять все зависящие от них меры для обеспечения прав и свобод граждан независимо от их национальности в соответствии с Декларацией прав и свобод человека, мирного сожительства народов Содружества, демократического развития их государственности, добрососедских отношений и сотрудничества с государствами и народами мирового сообщества, неуклонного выполнения международных обязательств, вытекающих из договоров и соглашений Союза ССР.

Председатель Совета Республик Верховного Совета СССР

А. Алимжанов
THE SOVIET OF REPUBLICS OF THE SUPREME SOVIET OF THE USSR

Declaration on the occasion of the creation of the Commonwealth of the Independent States.

December 26, 1991, no. 142-N

The Soviet of the Republics of the Supreme Soviet of the USSR, following the will of the supreme state organisations of the Republic of Azerbaijan, of the Republic of Armenia, of the Republic of Belarus, of the Republic of Kazakhstan, of the Republic of Kyrgyzstan, of the Republic of Moldova, of the Russian Federation, of the Republic of Tajikistan, of Turkmenistan, of the Republic of Uzbekistan and of Ukraine regarding the creation of the Commonwealth of the Independent States, stipulates that with the creation of Commonwealth of the Independent States, the USSR ceases to exist as a state and as a subject of international law.

The Soviet of the Republics of the Supreme Soviet of the USSR addresses the heads of the Independent States with a proposition to put the following questions under consideration:

- About the legal continuity of the Union of SSR and of the union-level power bodies and questions of power regarding the creation of the Commonwealth of the Independent States.

- About the creation of the inter-parliamentary body of the Commonwealth to preserve the united legal, economical, humanitarian and ecological space on territories of the member states of the Commonwealth.

- About the ratification, enforcement of and/or nullification of international treaties signed by the Union of SSR before the creation of the Commonwealth.

The Soviet of the Republics of the Supreme Soviet of the USSR calls to the highest representative organs and to the heads of the member states of the Commonwealth to do everything in their power to enforce the rights and freedoms of the citizens of all ethnicities according to 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peaceful coexistence of the peoples of the Commonwealth, democratic development of their statehood good-neighbourly, cooperation-based relations with other states and peoples of the world community, to unflinchingly enforce the international obligations as stipulated in treaties and agreements of the Union of SSR.

Chairman of the Soviet of the Republics of the Supreme Soviet of the USSR

A. Alimzhanov
소련 최고회의 공화국 평의회[59]

1991년 12월 26일 독립국가연합 창설에 관한 선언 No. 142-N

독립국가연합의 창설과 관련하여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아르메니아 공화국, 벨라루스 공화국, 카자흐스탄 공화국, 키르기스스탄 공화국, 몰도바 공화국, 러시아 연방, 타지키스탄 공화국,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우크라이나의 최고 국가 기구들의 의지에 따라, 소련 최고회의 공화국 평회의는 독립국가연합의 창설과 함께 소련이 국가로서 그리고 국제법의 주체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한다.

소련 최고회의 공화국 평의회는 독립 국가원수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고려할 것을 제안한다:

- 소련과 연합 차원의 권력 기구의 법적 연속성과 독립국가연합의 창설과 관련한 권력의 문제에 관하여.

- 독립국가연합 회원국의 영토에 법적, 경제적, 인도적, 생태적으로 통합된 공간을 보존하기 위한 독립국가연합 의회간 기구의 창설에 관하여.

- 독립국가연합이 창설되기 전에 소련이 체결한 국제 조약의 비준, 집행 및/또는 무효화에 관하여.

소련 최고회의 공화국 평회의는 민족에 상관없이 세계 인권 선언에 따른 시민의 권리와 자유, 독립국가연합 시민들의 평화적 공존, 국가 선린우호의 민주적 발전, 다른 국가 및 세계 공동체와의 협력 기반 관계를 보장하기 위해 최고 대표 기관과 독립국가연합 회원국의 정상들에게 모든 힘을 다할 것과 소련의 조약 및 협정에 명시된 국제 의무를 거침없이 이행할 것을 촉구한다.

소련 최고회의 공화국 평의회 의장

A. 알림자노프
알림자노프의 1991년 12월 26일 142-N호 선언(소련 해체 선언)

8. 관련 문서



[1] 해석하면 "소련 붕괴"다. 다른 표현은 'Dissolution of the USSR'(소련 해체)이다. [러시아어] [한국어] [4] 영어로는 'Belovezh Accords', 러시아어로는 'Белове́жское соглаше́ние' [5] 영어로는 'Alma-Ata Protocol', 러시아어로는 'Алма-Атинская декларация' [6] 사실 이미 2년 전인 1989년 12월 2일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몰타 정상회담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하기는 했다. 하지만 데탕트 같은 사례처럼 당시 소련 지도부의 입장은 소련 정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유동적으로 변할 위험이 있었으며 이는 완전한 냉전 종식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7]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1 [8]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2 [9]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2-203 [10]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3-204 [11]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4 [12]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4 [13]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4 [14] Paul R. Magocsi (1996), A history of Ukrain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Incorporated, 673-674 [15] 우크라이나어의 라다는 러시아어의 소비에트와 동의어다. 우크라이나 SSR 최고 소비에트(우크라이나 SSR 최고 라다)는 독립 선언 직후 이름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로 변경했다. [16]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4-125 [17]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6 [18]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7 [19]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6 [20]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6-127 [21]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6-127 [22]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6, 214 [23] Taras Kuzio (1994) Ukrainian nationalism, Journal of Area Studies, 2:4, 91-92 [24]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8-129 [25] Paul R. Magocsi (1996), A history of Ukrain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Incorporated, 674 [26]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3-4 [27] Taras Kuzio (1994) Ukrainian nationalism, Journal of Area Studies, 2:4, 92-93 [28]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6,214 [29] 관련 기사: 최고회의 해산 결의 “이제 우리가 떠나야 할 때” [30] 당시 구성국 중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도바, 아르메니아, 에스토니아, 조지아 6개국이 불참했으며 이 중 발트 3국과 아르메니아 4개국은 투표 보이콧 및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31] 당시 주권국가연맹 창설조약에는 러시아, 벨라루스,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9개국이 참여 예정이었다. [32] 다른 발트 3국과 마찬가지로 1990년에 국명에서 SSR을 떼 버리고 국기에서 낫과 망치를 제거했으며 공산주의 헌법을 부정하고 옛날에 쓰던 헌법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주권 국가로써의 부활을 선언하면서 동시에 소련을 탈퇴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와 달리 에스토니아는 주권 국가의 부활을 선언했을 뿐 소련에서 탈퇴한 건 아니였다. 완전히 탈퇴 선언을 한 건 이듬해 8월 쿠데타가 발생한 이후다. [33] 국가 부활 선언문.(1990년 3월 29일) [34] 당장 발트 3국이 얼씨구나 하고 가장 먼저 독립을 한 것을 생각해 보자. 애초에 발트 3국은 소련에 대한 소속감도 단결력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독립의 때를 칼을 갈면서 가장 먼저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35]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소련이 붕괴할 것을 1970년대 말에 알고 있었다고 한다. [36] # 러시아 SFSR로 한정 시 3,428달러였다. # [37] 1989년 기준으로 9,211달러에 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당시 소련의 경제수준을 보면 턱없이 과장된 액수다. 상세한 설명은 후술. [38] # # [39] 조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90년대에 악화되었다가 2000년대에 회복되었는데 소련 말기와 비교해 보면 줄을 서는 일이 크게 줄었고 해외여행 자유화로 해외여행의 빈도가 크게 늘어나는 등 개선되는 점도 있으나 소련 시절에는 각 가정마다 수천~수만루블의 저축자금이 있었지만 현 러시아에서는 은행에 1루블도 저축하지 않거나 못하는 가구가 무려 2/3에 달하는 등 저축률은 소련 시대에 비해 크게 떨어지고 소련 시절에는 기다리면 받을 수 있었던 집이 소련 해체 후에는 직접 사는 것으로 변경되면서 월세와 집값이 크게 올라 각 가정에 주는 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등 개선된 점과 악화된 점이 공존한다. [40] 이러한 움직임은 이원복 교수의 < 현대문명진단> 3권 수록 에피소드 '외교관, 기자, 그리고 콜걸'에서도 다루어졌다. 해당 회차에 의하면 매춘 자체는 1980년대 후반 개혁개방 시기부터 도입됐는데 당시 반대 여론도 있었으나 소련 붕괴 이후 성행했다. [41] 프리덤 하우스 세계의 자유 구분에서 ' 자유' 혹은 '부분적 자유'로 분류된 나라들이다. 아래의 권위주의 독재 국가로 설명한 나라들은 '부자유'로 분류된 나라들. [42] 24개국 본선 [43] 첫 32개국 본선 대회 [44] 유로 2004. [45] 2006 독일 월드컵, 유로 2012( 폴란드와 공동개최), 유로 2016, 유로 2020 [46] 2002년부터 UEFA 소속으로 옮김. [47] 그나마 아시안컵에서는 연속으로 출전하며 강호로 인정받고 있다. [48] 2004년, 2019년 참가. [49] 2019년 참가. 한국과 같은 조에 걸려서 0-1로 석패했다. [50]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는 제외한다. [51] 교외 지역 포함. 시가지 부분만 셈하면 1,200만 명 정도다. [52] 상술했듯이 1983년 이후 소련의 경제력은 감소 추세에 있었다. [53] 1989년 기준 소련의 GDP는 2조 6,595억 달러, 1인당 GDP는 9,211달러에 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당시 소련의 경제수준을 보면 턱없이 과장된 액수다. 출처가 1990년 CIA 월드팩트북인데 CIA는 데이터 산정시 공산국가인 소련의 공식 가격을 이용하거나 PPP 방식을 사용하는 등 오류의 여지가 심각한 방법을 사용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공산권의 GDP 관련 수치를 뻥튀기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 자료를 믿는다면 1983년 이래 한창 고도성장 중인 한국의 1989년 1인당 GDP(4,600달러)가 경제 불황이 일어난 지 오래인 폴란드(4,565달러)와 동급이라는 것도 믿어야 한다. 소련 해체 이후 UN이나 IMF에서는 GDP를 산정하는 국제기준인 국민계정체계(SNA)에 따라 몇몇 공산권의 명목 GDP 등을 다시 계산했는데 이에 다르면 소련의 역대 1인당 GDP는 1983년에 3,658달러로 역대 정점을 찍고 1990년 2,748달러로 줄어들었다. 1989년 소련 인구 및 1인당 GDP로 계산하면 동년 소련의 GDP는 7,879억 달러다. [54] 1990년부터 2018년까지 달러의 누적 인플레이션은 92.1%이다. 1990년 2,748달러는 2018년 5,279달러에 달하니 분명히 실질적으로도 늘긴 늘었다. 하지만 소련의 경제력이 정점을 찍은 1983년에 비하면 실질적으로는 줄었다. [55] 참고로 우크라이나는 소련 구성국들 가운데 러시아의 뒤를 잇는 2인자 격의 나라였다. 즉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소련 부활은 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56] 몰도바는 몰다비아의 일부분이었던 곳이라 루마니아와 매우 동질감이 강했다. [57] 소련 집단농장에서 트랙터 운전기사를 했다. [58]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미국이 해채되어 50개의 주들이 모두 독립국이 된 상황에서 비백인,비흑인 소수민족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59] 당시 소련 최고회의는 하원인 연방평의회와 상원인 공화국 평의회(1991년 9월 이후부터 민족평의회에서 공화국 평의회로 명칭 변경)가 있었지만 소련이 해체되기 2주 전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일방적으로 연방평의회 의원들을 철수시키면서 정족수 미달로 사실상 해산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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