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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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C8A032> 제신(祭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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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 246만 6천여 주 |
사격(社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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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계 예대제 (4월 22일) · 추계 예대제 (10월 18일) | |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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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마 축제 (7월 13일~16일) | |
부속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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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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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 |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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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 ( 화장실 폭파 사건 · 카야노 아이 참배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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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틀:국기| ]][[틀:국기| ]] 도쿄도 치요다구 구단키타 3-1-1 |
규모 | 약 10만㎡ (93,000~99,000㎡) |
제신 (祭神) |
일본군 전사자 246만 6천여 위 |
사격 (社格) |
구 별격관폐사 (別格官幣社) 칙제사 (勅祭社) |
창건 | 1869년 ( 메이지 2년) 6월 12일 |
예대제 |
4월 22일|춘계 10월 18일|추계 |
주요 행사 | 미타마마츠리|7월 13-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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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스쿠니 신사([ruby(靖, ruby=やす)][ruby(國, ruby=くに)][ruby(神, ruby=じん)][ruby(社, ruby=じゃ)])는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 구단키타에 위치한 신사이다. 정식 명칭은 구자체 표기인 “靖國神社”이며, 신자체로는 “靖国神社”이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현재 남녀노소 246만 6532위의 이름, 본관, 생일, 사망 장소를 적은 문서를 봉안하고 있고,[1] 보신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및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일본군 전사자의 신위를 가지고 있는 영묘의 성격을 띠고 있다.일본 우익들에게는 일본 제국주의와 국가신토를 상징하는 일종의 성지(聖地) 취급을 받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자가 합사된 관계로 후술되어있듯 비판인들에겐 전범 미화 공간이라고 까이는 등 국내외적으로 논란이 많은 장소이다.
2. 외교
야스쿠니 신사는 일단 표면적으로는 일본 정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단순 종교법인이다.[2] 참고로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 추모 시설은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불쾌감을 표한 바 있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주석을 비롯한 외국 정치인들도 과거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엔 방문하는 경우가 있었다.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일본 제국 전쟁 범죄자들이나 제국주의에 부역했던 이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기도 하며, 이를 알면서도 참배하는 일본 정치인들이 있어 한국이나 중국 등의 피해국들이 문제를 제기한다. #
특히 합사된 이 중에는 일본 제국에 의한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같은 합사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되어 논란을 빚고 있는데[3] 유족들은 이러한 종교행위에 거부 의사를 표해왔으나, 야스쿠니 신사는 종교적 이유로 이를 묵살해 왔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 신사는 종교 시설이고, 합사 문제는 종교의 자유와 연관되기 때문에 정부가 관여하기 어렵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허나 유족 측은 "야스쿠니 신사가 총리나 각료 등 정부 주요 인사들이 주기적으로 참배하는 사실상의 국가 시설 성격을 띄는 마당에, 일본 정부가 종교의 자유 문제를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 들이대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한다. #
사실 태평양 전쟁 전범자들을 미화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야스쿠니 신사는 미국 입장에서도 상당히 불쾌한 장소이다. 그런데 미일관계를 외교의 최우선으로 두는 일본 정부가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놀라운 일이다. 미국도 양국관계를 생각해 한국이나 중국만큼 강한 어필을 하진 않지만, 2014년에 한창 아베 정부가 깽판을 쳤을 때는 일본 정부에 우려를 표하며 경고하기도 했다. # 심지어 후술되어있듯 천황도 이곳을 참배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대놓고 표출하지 않을 뿐 일본 황실도 야스쿠니 신사를 종교를 앞세운 사실상의 정치화된 시설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정치인들이 참배를 강행하는 것을 보면, 이는 일본의 상당수 정치인들이 일본 황실과도 무관하게 국가신토와 정서적으로 연결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곳을 참배하는 것이 미국의 신경을 긁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라 일본 정부에서도 군사조직인 자위대와 관련된 자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는 것만큼은 금기시하고 있다. 정치인은 몰라도 자위대는 직접적으로 군사, 전쟁과 연관된 조직이고 구 일본군과도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는 만큼 과거 일본 제국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당사국에 대한 직접적인 도발로 비춰질 수 있어서 이것만큼은 일본 정부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한다. 그래서 2024년 1월 자위대원 수십 명이 참배 목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제재에 나선 것은 한국, 중국, 미국도 아닌 일본 방위성이었다. 전술한 미묘한 스탠스 때문에 참배가 올바른가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고 있는 점이 이목을 끈다. #
3. 역사
1869년 보신 전쟁에서 사망한 신정부군이나 유신지사들을 기리기 위해 창건되어 1879년 근대사격제도에 따라 별격관폐사(別格官幣社)로 지정되었다. 또한 칙제사(勅祭社), 즉 천황의 칙사가 예물을 바치는 신사로도 지정되었는데, 1945년 기준 칙제사 총 17곳 중에서 야스쿠니 신사를 제외한 나머지 16곳은 전부 관폐대사(官幣大社)였다.[4] 별격관폐사였던 야스쿠니 신사가 칙제사로 선정된 것 자체가 대단한 특혜라고 할 수 있다.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일본을 실질적으로 다스리게 되자, 1946년 기존에 일본제국 정부가 신사의 등급을 매겨 관리하던 근대사격제도를 폐지하였다. 따라서 이후로는 별격관폐사니 하는 구분도 사라지고 야스쿠니 신사는 법적으로는 정부와 관계 없는 민간 종교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권과 관련이 깊다.
과거 칙제사로 선정되었던 신사에는 현대에도 여전히 천황의 칙사가 정기적으로 찾아오는데, 야스쿠니 신사 또한 여전히 칙제사로 대우받는다. 칙제사라고 해도 어떤 신사에는 천황의 칙사가 몇 년에 한 번, 또는 1년에 한 번씩만 찾는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에는 1년에 두 번, 춘계/추계 예대제 때마다 칙사가 파견되므로 이 또한 특혜이다.
1867년 말 대정봉환과 왕정복고가 일어나 에도 막부가 끝나고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천황이 이끄는 조정은 1000여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실제 국정에는 손을 놓았기 때문에 나라를 운영할 능력이 결여되었으므로 거의 대부분 막부 시절의 인사와 조직이 실무행정을 맡았다. 또한, 막부는 형식상으로는 대권을 천황에게 반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외교권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실제적인 권력을 손에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막부 세력과 반(反)막부 세력의 갈등이 점점 커졌다.
결국 1868년 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년 5개월에 걸쳐 무진전쟁이 일어난다. 이때 메이지 천황은 반막부 세력을 간접적으로 지지했다. 결국 막부군이 패배하고 사쓰마 번 등 반막부 세력이 승리하여 새로이 조정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아직 무진전쟁 중이던 1868년 동정대총독(東征大総督)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親王)은 에도 성을 접수하고 (음)4월에 자군 전사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
그해 (음)5월에는 교토의 태정관 명의로 포고령(布告令)이 내렸는데, 1853년 흑선내항 이래 순난자(殉難者)의 영혼을 제사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포고령은 야스쿠니 신사 창건에도 영향을 끼쳤다.[5] 이 해에 메이지 정부는 신불분리령을 내려 불교와 신토가 습합된 기본 일본 종교계를 불교화 신토로 강제로 나누도록 했다. 이 시기에 일본 전역에서 많은 불상과 법구, 사찰이 파괴되었고 승려들이 강제 환속되었다.[6] 국가신토를 위한 사전포석이었다.
무진전쟁이 끝난 1869년 (음력)6월 12일, 메이지 천황은 나라를 위해 싸운 전사자들을 위해 위령시설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달 29일,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 자리에 임시시설을 만들어 군무관지사(軍務官知事)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이 신관이 되어 무진전쟁에서 전사한 관군 전사자 3588위를 위해 위령제를 지냈다. 이때부터 야스쿠니 신사가 시작했는데, 창건 당시에는 도쿄 초혼사(東京招魂社, 도쿄 쇼콘사)라 이름하였다. 도쿄 초혼사는 당시 전국에 세워진 초혼사 중 하나로, 혼을 불러[7] 진정케 하는 신사이다. 사실 초혼(招魂)이란 단어는 음양도 계통에서나 사용할 뿐, 다른 곳에서는 쓰이지 않았다. 굳이 초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에서 기존의 일본 종교시설과는 뭔가 다르게 하겠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본전(本殿) 건물은 1872년에야 완공했다.
일본의 기존 전통에서는 일단 전쟁에서 승리하여 위령제(慰靈祭)를 지낸다면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공양하였으나,[8] 초혼사는 명백히 막부 측 전사자를 배제하였다.
1870년, 메이지 천황은 대교선포(大教宣布) 칙령을 내렸다. 이는 국가신토를 일본의 사실상 국교로 삼겠다는 의사표명이었다.
1871년, 도쿄 초혼사가 일본 황실의 문장인 국화 문양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또한 이해부터 일본 정부는 일본 각지의 중요한 신사들을 관폐대사(官幣大社), 국폐대사(国幣大社), 관폐중사(官幣中社), 국폐중사(国幣中社), 관폐소사(官幣小社), 국폐소사(国幣小社) 순으로 나누어 관리했다.[9] 여기서 관폐사와 국폐사가 나뉘는데 천황가에서 유지비를 대고 신에게 폐백을 바치는 곳이 관폐사, 일본 정부 차원에서 유지비를 대고 폐백을 바치는 곳이 국폐사였다. 관국폐사 중에서 격은 격은 당연히 관폐대사가 가장 높고 국폐소사가 가장 낮았다.[10] 이렇게 일본 전역의 신사에 등급(격)을 매겨 관리하는 것을 근대사격제도라고 하였다.
1872년, 중요하긴 한데 기존의 사격제도에 잘 맞지 않는 신사가 있다는 이유로 별격관폐사(別格官幣社) 등급을 따로 만들어 관폐소사에 준하여 대우했다. 별격관폐사로 지정된 신사들은 '천황의 충신'을 제신(祭神)으로 모셨다. 별격관폐사 등급을 만든 뒤 처음으로 지정한 시설이 14세기 초 일본 남북조시대 사람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모시는 미나토가와(湊川) 신사[11]라는 점에서도 별격관폐사의 특성을 짐작할 수 있다.
1879년 6월, 메이지 천황의 명으로 도쿄 초혼사에서 야스쿠니(靖國, 정국), 즉 '나라를 평화롭게 한다'는 뜻으로 개칭했다. 신불분리령, 대교선포 칙령도 내렸는데, 불교스러운 이름을 사용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확실히 신사(神社)스러운 이름으로 바꾸었다. 야스쿠니(靖国)는 춘추좌씨전에서 유래한 단어로,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같은 뜻으로 야스쿠니(安国)를 사용했다. 하지만 安国이 사찰 이름로 자주 쓰이는 등 불교적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좌씨전에서 나온 야스쿠니(靖国)란 말을 사용한 것이다. 한편, 나머지 지방의 초혼사들은 1939년에 호국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879년, 야스쿠니 신사가 별격관폐사로 지정되어 정식으로 '중요신사'라는 공인을 받았다. 하필 '별격관폐사'라는 데에서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 신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1887년, 야스쿠니 신사의 관할주체가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바뀌었다. 그 전까지는 육해군성뿐만이 아니라 내무성까지 3자가 공동으로 관할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 1년이 지난 1946년 2월, 종교법인령이 공표되어 사격제도가 폐지되고 국가신토가 제도적으로 사라졌다. 그해 9월 야스쿠니 신사는 민간종교법인으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신사본청(神社本庁)의 관할을 받지 않는 특수한 신사로 남았다.[12] 1947년에 평화헌법이 공표되면서, 헌법의 종교자유 조항에 따라 일반 신사들은 압류된 재산 등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를 비롯하여 지방의 호국신사들은 제외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다시 주권을 되찾은 1952년 10월에 쇼와 천황이 종전 이후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일본 유족회는 패전 이전 야스쿠니 신사가 별격관폐사였을 시절처럼 정부에게 예산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13] 또한 일본 유족회는 오모토에서 갈라진 신흥종교 생장의 집(生長の家), 신사본청 등 관련 종교단체는 물론 우익단체까지 끌어모아 야스쿠니 국영화를 도모하기도 했다. 이들은 연합군 점령하 일본 시기에 철거된 충혼비 등을 복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야스쿠니 신사와 자위대가 서로 노골적으로 결탁하는 등의 분위기가 조성되자, 1967년 자유민주당에선 야스쿠니 신사의 종교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유는 헌법이다. 일본국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의 원칙 때문에 종교단체 야스쿠니를 국영화할 수 없으니, 야스쿠니 자체를 종교단체가 아니게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사본청이나 유족회가 극렬하게 반대하여 이 또한 무산되었다.
자민당은 방책을 조금 바꾸어, 1968년부터 1973년까지 5번에 걸쳐 야스쿠니 신사를 특수법인화하는 시도를 했다. 이는 일본 헌법에서 정교분리를 규정하기 때문에, 민간 종교단체 야스쿠니 신사를 국유화할 수 없다면 특수법인으로 만들어 국유화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반대 세력,[14] 종교계에 의해 뜻을 접어야 했다.
4. 제신
제신 내역 | ||
명칭 | 위수[15] | 내용 |
보신 전쟁, 메이지 유신 | 7751위 | 메이지 천황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신정부군 편에서 싸우다 죽은 군인(창의대, 신선조 포함됨)[A] |
세이난 전쟁 | 6971위 | 정부군만 포함[B] |
모란사 사건 | 1130위 | |
운요호 사건 | 2위 | |
임오군란 | 14위 | |
갑신정변 | 6위 | |
청일전쟁 | 1만 3619위 | |
의화단 운동 | 1256위 | 유슈관에는 북청사변이라고 하였다. |
러일전쟁 | 8만 8429위 | |
제1차 세계 대전 | 4850위 | |
청산리 전투 | 11위 | |
제남 사변 | 185위 | |
우서 사변 | ||
나카무라 대위 사변 | 19위 | |
만주사변 | 1만 7176위 | |
중일전쟁 | 19만 1250위 | |
태평양 전쟁 | 213만 3915위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등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전사한 군인이 포함된다. |
총합 | 246만 6584위 |
4.1. 합사된 전범
야스쿠니 신사에는 1,068명의 전쟁범죄자가 합사되어 있다. 아래는 A급 전범만 나열.[18][19] 도쿄 전범 재판에 따르면 국제조약을 위반하여 침략전쟁을 기획, 시작, 수행한 사람들(평화에 대한 죄)이다. 스가모 형무소에서 수감되었으며 8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표시는 순국칠사묘와 중복 합사된 전범이다.
- 기무라 헤이타로⚠️(1888.9.28.~1948.12.30.) - 버마의 도살자(ビルマの とさつしゃ)라고 불리지만, 포로 학대를 방관했다는 것 말고는 제노사이드와 직접적인 연관을 찾기는 힘들다. 이 작자의 버마 전선 관련 처벌은 사실 일본군의 버마 전선에서의 졸전과 동남아 전선에서 일어났던 바탄 죽음의 행진 같은 포로 학대 행위, 죽음의 철도같은 민간인 강제 징용, 포로 강제 동원 및 학대 행위에 대한 버마 방면의 총사령관으로 받은 상징적인 처벌에 가깝다.[20][21][22] 극동군사재판 판결문에 따르면 그가 실제로 처형된 이유는 육군차관 시절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개전, 특히 진주만 공습에 관여했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항목참조
- 도이하라 겐지⚠️(1883.8.8.~1948.12.23.) - 관동군 사령관(1938~1940). 중국의 화북분리공작에 관여하였으며 포로 및 피억류자들에 대하여 야만적으로 대우하였다. 특히 삼광작전이라고도 불리는 신멸작전의 주동자로 악명이 높다.
- 마쓰이 이와네⚠️(1878.7.27.~1948.12.30.) - 1937년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당시 부하들이 난징대학살을 자행했다. 마쓰이 이와네는 난징대학살이 일어날 당시 결핵으로 병가 중이었기 때문에 학살을 주도하지 않았고, 학살이 일어나기 전 민간인은 절대 죽이지 말 것을 당부했다.
- 무토 아키라⚠️(1892.12.15.~1948.12.30.) - 중국파견군 참모장(1937), 육군성 국무국장(1939~1942), 수마트라의 일본군 사단장(1942~1943), 필리핀 방면군 참모장(1944~1945). 광범위한 지역의 침략과 난징대학살을 포함한 중국의 일련 사건들까지 폭 넒은 책임을 물었다. 다만 침략전쟁에 앞장선 죄는 있으나 마쓰이 이와네와 마찬가지로 학살 혐의와는 관련이 없다.
- 우메즈 요시지로(1882.1.4.~1949.1.8.) - 관동군 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등을 지냈고, 전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의 미주리호 선상에서 시게미츠 마모루와 함께 항복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 마츠오카 요스케(1880.3.3.~1946.6.26.) - 일본 제국의 전 외무대신(1940~1941). 국제연맹의 탈퇴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1937년 남만주철도 총재,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와의 삼국동맹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1941년 소련-일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대 소련 개전을 주장하였다. 대미정책에서도 강경론을 주장하였으며 도쿄 전범 재판 진행 중 병사하였다.
- 히라누마 기이치로(1867.9.28.~1952.8.22.) - 추밀원 의장(1936, 1945), 제35대 총리대신(1938.1~8), 내무대신(1940.12.~1941.7.)을 지내며 쇼와 천황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국가신토를 장려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국가주의 우익 단체 국본사를 조직하였다. 복역 중 1952년 초 석방되었으나, 동년 병사하였다.
- 고이소 구니아키 (1880.3.22.~1950.11.3.) - 조선 총독(1942.5.29.~1944.7.22), 제41대 총리대신이자 극동국제재판에서 종신금고형을 선고받았고, 그럼 이후 1950년에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 나가노 오사미(1880.6.15.~1947.1.5.) - 일본제국 38대 해군대신 당시에 진주만 공습을 승인한 사람으로, 체포는 되었지만 스가모 형무소에서 판결전에 폐렴으로 인한 폐결절으로 사망했다.
- 도고 시게노리(1882.12.10.~1950.7.23.) -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 이 인물은 전쟁을 반대했다는 점, 아내가 유대인이라는 점, 그리고 조선에서 건너간 도공의 후손이라는 점 등 때문에 일본 극우주의자들이 되려 명단에서 빼라고 요구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 시라토리 도시오(1887.6.8.~1949.6.3.) - 일본의 주 이탈리아 대사이자 국제 연맹 탈퇴 공작을 펼쳤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종신 금고형을 받았고, 이후 복역 도중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5. 조직
야스쿠니 신사는 일단 표면적으로는 일본 정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단순 종교법인이다. 그동안 일본 우익들에 의한 국유화 시도는 있었지만, 일본국 헌법이 보장하는 정교분리의 원칙상, 국가가 특정 종교시설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반대 여론이 거세서 번번이 막혀왔다. 참고로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제2차 세계 대전 희생자 추모 시설은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이다.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법률상 단립종교법인(単立宗教法人)으로 분류되어서 신사본청과 포괄적인 관계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수호 신사이며, 언젠가 국가에 반환될 것이기에, 특정 종교법인의 포괄적인 관리하에 들어가지 않는다."라는 야스쿠니 신사와 신사본청 쌍방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가 신사본청의 관할이 아님에도 신사본청이 '야스쿠니 신사 숭경봉찬회(靖國神社崇敬奉賛会)'의 법인 회원으로 가입돼있는 등 이 둘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5.1. 내부 조직
야스쿠니 신사에는 2005년 1월 기준으로 총 108명이 재직하고 있으며, 조직에는 부서도 있다.- 제무부
- 제의과
- 조사과
- 총무부
- 총무과
- 인사과
- 관리과
- 광보과(홍보과)
- 선덕부
- 숭경봉찬과
- 선덕과
- 경리부
- 경리과
- 사업과
- 유취관부
- 사료과
- 전시과
- 문고실
- 사무실습생
6. 방문
도쿄에서도 가장 땅값이 비싼 곳중 하나인 치요다구에 떡하니 위치하고 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야스쿠니 신사의 원래 목적을 보면 왜 거기 있는지 이해가 간다. 황거[23]도 코앞이고. 야스쿠니 신사 건너편에는 일본 무도관이 있다. 또한 근처에는 꽤 유명한 가톨릭계 명문 여학교인 도쿄 시라유리 여학원이 있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중앙본부와도 꽤 가깝다.
교통편으로는 쿠단시타역이 가장 편리하고, 이다바시역, 이치가야역에서 가까운 편이다. 사실 JR그룹노선 역에서 걸어가기엔 대략 15~20분 정도로 꽤나 멀어서, 쿠단시타역을 이용하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다. 쿠단시타역에서 나와서 입구로 들어가면 길 가는 동안에 정말 커다란 토리이 몇 개가 서 있다. 길 가운데에는 야스쿠니 신사의 전신인 초혼사의 제안자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동상을 지나면 횡단할 수 있는 작은 길이 있는데 가끔씩 그곳에 우리가 아는 극우 트럭들이 줄줄히 선 광경을 볼 수 있다. 물론 극우라고 해서 개개인의 관광객에게 일일이 간섭하거나 터치하진 않는다. 작은 길을 건너면 본전 앞으로 갈 수 있는 토리이가 있다.
본전에서 오른쪽 방면으로 가면 유취관(遊就館, 유슈칸)이라는 전시관(또는 전쟁기념관)이 존재한다. 위 사진에서 본전이 있는 토리이 안쪽을 관람하는 게 꺼림칙하다면 유슈칸만 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되도록이면 보고 가는 것을 추천하는데, 일본 근현대 전쟁 역사에서 실제 쓰였던 전쟁 물품[24]이나 방대한 기록서적[25]이 남겨져 있어 일본의 전쟁미화와 군국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꽤 일으킬 수 있다[26]. 카드 결제가 가능하며, 입장료는 1천 엔이다. 전시실 내부가 꽤나 방대하므로 분 단위로 코스가 나뉘는데, 슥 둘러만 봐도 최소 30분이며 꼼꼼하게 둘러본다면 최대 3시간 정도 관람시간이 소요된다. 다큐 영화까지 본다면 한나절은 걸린다.
유치관 근처에는 도쿄 전범 재판 당시 일본 A급 전범들의 무죄를 주장해 오늘날 일본 극우들에게 극찬받는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을 기리는 현창비가 있다.
위의 사진에도 잘 보면 참배하는 곳 바로 옆에 신사 경비원이 지키고 있다. 대체적으로 참배하는 참배객들이나 관광객들의 야스쿠니 반달 행위를 제지하는 게 주 업무인 듯하다. 보통 신사 안쪽을 정면으로 사진 찍거나 도리이 안쪽에서 물 마시고 취식하는 행위를 제지하기도 하며, 매의 눈으로 항상 감시하고 있으니 조심하는게 좋다. 특히 신사 주위에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있는데 2인조 경비원이 항시 순찰한다. 꽤나 보안에 신경 쓰는 듯한 인상을 받으니 참고하는 게 좋다. 다만 경찰은 야스쿠니 신사 자체가 사설 종교 법인이여서 필요한 경우에만 방문하거나 순찰을 돌고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7. 외국인의 방문 및 참배
서양의 극우파, 와패니즈 서양인들이 간혹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러 오기도 한다. # 특히 서양 극우파들은 일본 극우파들과 정기적으로 교류를 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야스쿠니 신사가 서양 극우 세력들의 일본 방문시 필수 코스가 된 상황. 장마리 르펜등이 2010년 참배하러 온 후 서양인들이 종종 야스쿠니 신사에 온 후 참배하러 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다.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도쿄 대공습으로 죄없는 일본인들을 죽였다며 사과하러 왔다는 미국인 와패니즈도 있고 토니 마라노 등 혐한 성향 서양인도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다.위구르족의 대모로 불리며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된 바가 있던 독립운동가 레비야 카디르 여사가 2012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만 1980년대에 달라이 라마도 이곳을 참배한 전적이 있는 걸 보면, 단지 전몰자들이 모셔져 있다는 것 때문에 이곳의 진상을 모르고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식으로 참배했을 가능성도 있다.[27]
2014년 캐나다의 가수 저스틴 비버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신사 앞에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 논란이 되기도 했다. 팬들로부터 비판이 제기되자 저스틴 비버는 게시물을 삭제하고 사과했다. 저스틴 비버는 "순전히 기도하는 장소로만 잘못 생각했고, 내가 마음의 상처를 준 모든 분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입장을 밝혔다. #
2019년 9월 방일한 영국군 럭비팀이 이곳을 단체 참배한 적이 있었다. 이에 폴 매든 주일 영국대사가 이를 크게 질책했지만 일본 현지 여론이 나빠지자 '일본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있다'며 무마한 일이 있었다. #
2024년 9월 3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와중에 세르히 코르순스키 주일 우크라이나 대사가 (아마도 주일 외국 대사로서는 최초로) 이곳을 공식 참배하여 논란이 되었다. 특히 참배한 걸 대사의 개인 X 계정이 아닌 주일 우크라이나 대사관 계정으로 게시해, 단순 개인의 일탈이 아님을 명확히 해서 더더욱 논란이 되었다. Archive 백업 자세한 사항은 세르히 코르순스키 항목 참조.
참배 목적은 아니지만 야스쿠니 신사 내에서 어떤 식의 전시가 이루어지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한(다크 투어리즘) 한국인, 중국인 여행객들과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난다는 이유로 신사에 방문하려는 서양인 관광객들이 주변에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의 광신적인 극우들이 자주 방문하거나 결집하는 장소가 바로 이곳인 데다가, 우경화와 함께 신사 내 각종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이 근방에서 한국, 중국인으로 특정짓기 좋은 말을 쓰거나 옷차림 등을 했다간 곧장 달려들어 시비나 위협하는 일도 종종 생기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28] 실제로 2015년 외교부에서는 야스쿠니 폭발음 사건이 한국인에 의한 범행 가능성이 있다는 현지 보도를 언급하며, 일본에 거주하거나 방문 예정인 국민은 신사와 우익 시위현장에 접근이나 대응을 자제하여 신변 안전에 최대한 유의해 달라는 안내문을 영사콜센터 홈페이지와 휴대전화 문자를 통해 공지한 바 있다. KBS 뉴스
8. 논란
자세한 내용은 야스쿠니 신사/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9. 사건사고
자세한 내용은 야스쿠니 신사/사건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10. 기타
- 야스쿠니 신사를 찬양하는 노래인 야스쿠니 신사의 노래가 존재한다.
- 한 서양인(캐나다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일본 우익 인사들에게 이건 독일이 나치를 찬양하는 것과 같다고 문제점을 비판하며 설전을 벌인 일이 있었다. 영상, 한국어 자막. 이에 일본 우익들은 "여기는 일본이야, 네놈이 왜 이래라저래라 참견이야" 등 아전인수격 격앙 반응을 보였다.
- 일본 극우하면 생각나는 검은 트럭[29]에 '천황 폐하 만세' 문구를 새기고 욱일기를 꽂고 달리는 사람들이 입구에 많이 죽치고 있다. 이외에도 일본 제국 연간의 군복을 맞춰 입은 극우 활동가들도 많다. 하지만 극우들이 중요시하는 그 천황인 히로히토조차도 해당 신사에 전범 위패가 안치되는 순간부터 방문을 거부했다. 히로히토의 장남 아키히토 상황도 퇴위할 때까지 절대로 가지 않았으며, 아키히토의 장남 나루히토도 그러한 의지를 받아서 참배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극우와 가깝다고 알려진 차남 후미히토 친왕도 야스쿠니에는 참배한 적이 없다. 다만 아키히토의 사촌동생 토모히토 친왕은 생전에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자위대 행사 참석 등의 우익적 행보를 보였고, 그가 죽은 후에는 두 딸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가 아버지의 우익적 행보를 이어서 하고 있다.
- 일본에는 '다 같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의 모임'이라는 이름의 초정당 단체도 있다. #
- 일본 최대 보수지 요미우리 신문조차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는 비판적인 논조를 보이고 있다.
- 신사 입구에 근대 일본군의 아버지라고 평가받으며 야스쿠니 신사(당시엔 도쿄 초혼사) 건립을 기획하기도 한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첫 번째 서양식 동상이기도 한데, 이를 위해 오쿠마 우지히로가 약 8년 넘게 제작에 착수하여 1893년 완성되었다. 여담으로 이때 동상 높이가 하도 높아서 도쿄 시민들이 마스지로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현재도 가보면 약 10m에 달한다.
- 2010년 12월 카미카제(神風)라는 이름의 유물 특별 전시회를 통해 야스쿠니 신사 내 유물 전시관인 유슈칸(遊就館) 1층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갑옷과 투구를 전시했다. 조선시대 갑옷에는 용과 봉황 문양이 새겨져 있고 투구에는 군최고통수권자인 '元帥(원수)'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고려시대 갑옷에는 용, 기린 등이 새겨져 있어 왕의 갑옷으로 추정된다.[30] 이들 옆에 敵國降伏(적국항복)'이라는 글을 내걸고 있다. #
- 2013년 8월 10일 도쿄 도심에서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촛불시위를 벌였다. 당연히 우익 단체 또한 지지 않고 맞섰다.
- 2014년 5월 26일 한글로 ' ㅋㅋ' ' ㅂㅅ' ' 개새'라는 낙서가 야스쿠니 신사의 입구에 있는 기둥에 써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사 관계자가 경찰에 신고, 일본 경찰이 조사에 나섰다. 도쿄 경시청이 조사에 나섰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
- 2014년 12월 31일 야스쿠니 신사에서 한 일본인이 방화했다가 체포당했다고 한다. 피의자의 변으로는 정치적인 의도가 아닌, 자살할 의도로 일부러 야스쿠니에서 방화한 것이라고 했다. #
- 서브컬쳐 관련해서는 소니애니가 이것과 관련된 요소를 넣어서 국내 방영사인 애니플러스가 방영중지를 하는 등 논란이 꽤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인기 성우 카야노 아이가 이곳을 참배해서 큰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카야노 아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 사건 참고할 것.
-
2013년 한국에서는 야스쿠니 신사의 신사를 신사 숙녀 할 때 그 신사인 줄 알았다거나 위인, 야쿠르트 드립을 치는 등 부족한 역사 인식을 드러내는 몇몇 시민들의 인터뷰 영상이 뉴스에 나와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 2019년에 창건 150주년을 맞았다. #
- 한국의 사회학 도서로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가 있다.
10.1. 기타 추축국의 유사 시설
독일의 경우, 비트부르크-콜메쇼헤 전사자 묘지(Kriegsgräberstätte Bitburg-Kolmeshöhe)가 유사한 위치에 대응한다. 독일 제국군과 국방군 외에도 일부 30명 가량의 나치 친위대원들까지 매장되어 있는 무덤이다. 비트부르크 시에서 관리하지만 야스쿠니와 같은 종교적인 시설은 당연히 아니다. 전후에는 무장친위대 전역자들의 전우회인 무장친위대 상조협회가 모임과 극우 집회를 가지는 장소 중 하나이기도 했다. 1985년 5월 5일 헬무트 콜 총리와 로날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함께 참배하여 안장자들의 "희생"에 "경의"를 표했다가 국내외적으로 질타를 받은 바 있다.이외에도 발터 모델 원수가 묻힌 휘르트겐 숲 집단묘지 등 독일 곳곳의 국방군 및 친위대 묘지들이 극우의 집결지 및 집단 참배 장소로 쓰이고 있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때문에 독일 좌파당은 휘르트겐 숲 묘지에서 모델 원수를 파묘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독일 정부에 의해 거부당했다.
다만 이 중 어느 곳도 야스쿠니의 사례처럼 공식적으로 2차 대전 당시의 전쟁 범죄자들을 찬양하는 곳은 없다. 위 사례들은 그저 무덤이며 특정 정치세력이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독일 육군 무명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코블렌츠의 독일 육군 기념관 역시 침략전쟁을 기리는 것이 아닌 독일의 과거사 반성의 장으로 쓰이고 있다.
[1]
이 중에는
군견이나
군마,
전서구와 같은 동물도 포함한다. 다만, 시신이나 유골을 안치한 건 아니다.
[2]
그동안 일본 우익들에 의한 국유화 시도는 있었지만,
일본국 헌법이 보장하는 정교분리의 원칙상, 국가가 특정 종교시설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반대 여론이 거세서 번번이 막혀왔다.
[3]
심지어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까지도 합사되어 있는 황당한 경우도 있다.
#
의친왕의 차남
이우도 강제 합사되어 있다.
[4]
1945년 광복 이후 관폐대사 겸 칙제사였던
조선신궁이 자진철거했기 때문에 지금은 16곳만 남았다. 그리고 칙제사에는 지금도 천황의 칙사가 정기적으로 예물을 올린다.
[5]
이 포고령에 의하여 교토의 히가시야마산(東山)에 순난자들을 기리는 신사를 세웠는데, 오늘날 교토 료젠 호국신사(京都霊山護国神社)이다.
[6]
흔히 폐불훼석(廢佛毁釋)이라고 하는데, 1871년까지 극심했고 1877년쯤 되어야 끝났다.
[7]
국어에도 혼을 부른다는 의미로 똑같이 초혼(招魂)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김소월의 시 <초혼>이 잘 알려졌다. 비슷한 단어로 청신(請神) 등이 있다.
[8]
원한을 품은 영혼이 세상에 재앙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군 전사자라도 원한을 품으면 산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으니, 당연히 같이 위령제를 지내야 한다.
[9]
국폐소사 밑으로도 각 행정단위별로 해당지역을 대표하는 신사를 하나씩 지정했다. 지방의 작은 신사 중에는 아무 격도 받지 않은 곳도 있었는데, 이런 곳을 무격사(無格社)라고 하였다. 사실 일본 전체에 있는 신사들 중 숫자로는 무격사가 대부분이었다.
[10]
이세 신궁은 너무 존엄하다 하여 아예 이런 등급을 매기지 않았다.
[11]
효고현
고베시에 있다.
[12]
여타의 어지간한 신사들은 신사본청에 소속된다.
[13]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단체가 있는데 바로 일본 유족회이다. 당시에는 일본유족 후생연맹이라 하였다. 전몰자 군인을 기리고 유족의 복지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다.
[14]
주로 좌익 세력으로
일본공산당, 반 천황 연합,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일본군 성노예 및 강제연행피해자문제 대책위원회하고도 연계) 등이었다.
[15]
일본에서는
귀신이나 신령을 세는 단위로 柱를 쓰지만, 한국에서는 위(位)를 쓰므로 '위'라고 하였다.
[A]
단 막부군과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군인은 제외.
[B]
사이고 타카모리와 사쓰마군은 대상외.
[18]
평화에 대한 죄. A급 전범이 B, C급 전범보다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분류 기준이다. 즉, 어쨌든 A급·B급·C급 모두 전범이고, 내용을 살펴보면 B급과 C급은 학살이나 살해에 관한 죄라서 죄질이 상대적으로 더 나쁘다.
[19]
긴 말 필요없이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의 주범인
다치바나 요시오가 여기 합사되어있다.
[20]
이 또한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언급된 두 사건 모두 그가 총사령관으로 부임받기 전 발생했던 사건이기 때문. 뭐가 됐든 포로 학대를 방치했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21]
사실 이건 전임자였던
가와베 마사카즈의 작품. 행적만 보면 오히려 이쪽이 더 최악이다.
[22]
다만
중국 공산당 기관지 해외판에 기재된 죄상에 따르면
#, 버마에서의 일본군의 악행과 그가 하나도 연관이 없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23]
황거가 치요다구 한가운데 있다. 위치상으로 보면 고쿄 북서쪽으로
일본 무도관이 있고 도로를 경계로 북서쪽에 야스쿠니가 위치해 있다.
[24]
전쟁 후반부에 쓰인 자살특공병기의 실물 혹은 모형이 몇 점 있다.
[25]
일반인에게 공개된 소장품은 약 5,000여 점이다.
[26]
물론 이 전시관의 주 목적은 전쟁 및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것이지, 군국주의 미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런 일본 극우들의 군국주의 미화를 상당히 경계하기 때문에 내부 전시를 관람하면 그에 대한 반감과 극우들에 대한 경각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27]
이 점은 사실 일본 우익인사들이 전반적으로 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점도 한 몫했다.
[28]
그래도 신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사무적으로나마 한국인들에게도 친절한 편이다.
[29]
정확히는 우익 선전차.
[30]
고려 갑옷으로 보는 것에 이견이 제기되기도 한다. 밑의 기사에 나온다.
[31]
지금은 비공개 처리되었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방명록 노트 위에 야스쿠니 신사와 거대한 로봇을 합성한 일러스트를 그리고 NO!! WAR!!! NO!!! YASUKUNI!!!라고 그 아래에 크게 적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