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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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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원3. 역사
3.1. 초기3.2. 전성기3.3. 말기3.4. 몰락
4. 사무라이 계급5. 문화
5.1. 교양5.2. 의리와 무사도5.3. 생계
5.3.1. 부업
5.4. 부레이우치5.5. 무예
6. 창작물에서7. 이모저모 8. 관련 문서9. 사무라이를 소재로 한 작품

1. 개요

일본 봉건시대 무사 계급을 일컫는 말. 시대에 따라서는 사족(士族)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그 일컫는 범위와 위상을 생각하자면 유럽 기사(knight, 騎士)에 해당된다. 일본도와 화려하게 장식된 일본 갑주 및 뿔 장식이 달린 투구는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할복 항목도 참고.

사무라이들은 양민들보다 높은 신분으로서 을 차고다닐 권리가 있는 특권계급이었다. 본래는 전쟁에서 활약하는 무사(부시, 모노노후)와 일치하는 개념이 아니었으나 역사학이 아닌 일반적인 용법으로는 구분 없이 쓴다. 구체적으로는 문관도 사무라이를 자처하며 칼을 차고 다녔으며[1][2] 그런 면에서 무사(부시 武士)와 사무라이(侍)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무사 계급이 나타난 것은 헤이안 시대이며, 이들이 귀족을 경호해주면서 사무라이(그 당시에는 사부라히/사부라이, 아래 어원 참조)라는 말이 생겼지만, 겐페이 전쟁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를 거치면서 귀족이 되었다. 그런데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들 무사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하급계층들이 하극상을 일으키면서[3] 다수의 지역 토호들이나 하급 군인(사무라이)들이 새로이 무사 계급('센코쿠 다이묘')이 되었다. 이렇듯이 신분 체계가 혼란스러워지면서, 관리들을 칭하는 용어가 사무라이가 되었고, 전쟁을 업으로 삼는 무관들은 모노노후로 불리게 되었다. 사무라이가 문관 무관의 총칭이 된 것이 전국시대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전쟁을 업으로 삼는 부시, 모노노후는 의미가 없어지고, 평민을 다스리는 지배계급 사무라이만 남게 된다.

훗날 메이지 유신 이후 사민평등을 실현한다는 기치하에(사실은 구 무사계급의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4] 칼을 빼앗는 " 폐도령"이 내려졌고, 칼과 신분을 잃은 구 무사계급은 대부분 "향사"가 되어 아무런 특권이 없는 평민이 되었고 실측석고 1만석 격 이상인 극소수 상위 무사인 경우 " 화족"으로 편입되었다.

2. 어원

사무라이라는 말의 등장은 헤이안 시대이다. 귀족들을 경호해주는 사람을 사무라이라고 부른 것이 시작인데, 구체적으로는 '시중들다'를 의미하는 옛 일본어 사부라우(さぶらう, 당시 표기로는 さぶらふ)에서 유래했다. 구체적으로는 사모라후/사모라우(さもらふ)라고 썼던 것이 말이 변해 사부라우가 된 것인데, '사부라우'의 명사형(시중드는 사람)이 사부라히(さぶらひ)이고 이것이 다시 변형되어 사무라히(さむらひ)가 되었다. 그리고 1946년 정서법 개정에 따라 さむらい라고 쓰게 되었다. 싸울아비에서 나왔다는 일부의 주장은 전혀 신빙성 없는 주장이다.

사무라이는 한자로 侍('모실 시')를 쓴다.

3. 역사

3.1. 초기

사무라이의 기원은 천황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 체제를 수립하였던 아스카 시대가 끝나가고 점차 세력을 키운 귀족들의 지방 분권 체제가 확립되었던 시기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들어서면서 명문귀족인 후지와라 가문이 천황을 제치고 중앙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이전까지 천황의 황권에 의해 통치되었던 일본의 질서는 해이해져갔다. 이에 따라 10세기 초부터 일본의 율령제가 급속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렇게 중앙 집권 질서가 무너지자 중앙 기관은 더 이상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쇠약해진 중앙 기관은 지방의 세력가들인 '고쿠시'들에게 중앙 기관을 대신하여 해당 지역을 다스리고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내려주었다. 이들 고쿠시들 역시 자신들의 영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통치하게 위해서 유력한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사업을 맡겼는데, 이들을 '다토'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토들이 스스로 토지를 개간하여 새로운 경작지를 만들고는 스스로 영주라고 자처하면서 다토와 고쿠시 간에 권력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고쿠시에 비해 비교적 세력이 미약했던 다토들은 중앙권력자에게 자신의 땅을 바쳐서 세력을 키워나갔고, 이에 따라 권력 투쟁은 더욱 치열하게 번져갔다. 다토들은 싸움으로부터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무력집단을 만들게 되었다.

이런 무력집단의 일부가 중앙귀족의 눈에 들어 귀족의 사병으로 종사하는 시종(侍從)이 되는데, 이 시종에서 나온 것이 사무라이(侍)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헤이안 시대 말기에 접어들면서는 귀족의 경호원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무사들까지 통틀어 이르는 말로 변질되었다.

3.2. 전성기

이후 12세기에 겐페이합전을 거치면서 일본의 무사 계급은 더욱 발달하였고, 일본 다이묘들의 으뜸격인 쇼군 막부를 세우고 천황을 대신하여 일본을 통치하는 시기가 찾아오면서 사무라이들의 격이 좀 더 높아졌다.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무라이 문화가 형성된 시기는 흔히 말하는 전국시대, 곧 센고쿠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그나마 중앙의 질서를 유지하던 무로마치 막부의 힘마저 유명무실해져서 일본 각지의 다이묘( 영주)들이 세력을 다투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사무라이들은 다이묘들의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사무라이들은 다이묘로부터 보호받고 영지를 하사받는 대신에 다이묘들을 주군으로 섬기며 그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병력을 고용해서 전장에 나가 싸웠다.

바로 이 시기에 일명 ' 무사도'가 생겨났으며, 사무라이들 역시 단순한 무사에서 영지를 받고 싸우는 준귀족 계층으로 신분이 상승함에 따라 사무라이 특유의 문화도 더욱 발달하였다.

3.3. 말기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 시기에 들어서도 사무라이들은 일본의 지배계급으로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다만 사무라이들이 주로 활동하던 센고쿠 시대의 지방 분권 체제가 붕괴되면서 사무라이들의 문화도 중앙 집권 체제에 맞도록 변질되어 갔다. 또한 한편으로는 일본 내에서 전쟁이 거의 사라지고 일본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서민 계층의 조닌 문화가 발달하면서 예전에 비해 그 위세가 크게 줄었다. 더군다나 히데요시가 사무라이의 농업 종사를 금지시킨 이후 주군 가문의 가이에키 등으로 봉토가 없는 사무라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죠닌들의 밑에서 막노동을 한다든지 상인들을 호위하는 일을 하기도 했으며, 대만, 마카오, 필리핀 루손, 동남아 등지로 이주[5]하기도 했다. 심지어 태국에서 전쟁에 참전한 사무라이들도 있었다.

3.4. 몰락

사무라이들의 역사는 메이지 유신 시기에 종결되었다. 사무라이들의 계급을 유지시켜주었던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토지 개혁 정책에 따라 사무라이들에게 지급되던 영지가 사라지자 당연히 큰 반발이 일었다.

사무라이나 그 후손들은 메이지 유신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을 거치며 결국 신식 군대에 의해 진압되면서 번번이 실패하였다. 결국 세이난 전쟁을 마지막으로 1870년대에 들어 사무라이라는 존재 자체는 거의 소멸했고 현재는 과거의 명문가 정도로 남아 있다. 이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바로 라스트 사무라이. 사무라이들의 몰락을 소재로 한 게임은 토탈 워 사가: 사무라이의 몰락

그러나 사무라이들이라고 해서 영화에 나온 것마냥 신식 군대에게 갑주입고 칼을 휘두르며 싸운 것은 아니었다. 애시당초 사무라이는 칼에 특화된 게 아니라 단지 군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전사계급이었고[6], 그들 역시 신식 군대처럼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히려 몇 년 사용법 교육받는 평민과는 다르게 10년 이상 사격술을 갈고 닦고, 그 시대 총기사용에 가장 중요한 대열과 사기에서도 굉장히 뛰어났다.[7] 정부에서 무기 입수를 방해하지 않는 한 권력과 재산을 이용해서 유럽1선급 무기를 들여오는 일도 많았다. 즉, 이들은 단지 구체제인 막부체제와 이념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한 것이였다. 무진전쟁, 서남전쟁 항목 참조.


1877년 발발한 서남전쟁과 사무라이의 몰락을 다룬 뮤직비디오[8]

4. 사무라이 계급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무라이 이미지는 전신 갑옷을 입고 말 타고 칼로 싸우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 중기 이후 부터는 일본 내에서 말 수급도 어렵고 양성기간도 긴 기병들은 쇠퇴하고 대신 점점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보병들로 주력 병종이 대체되었기 때문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무라이들도 보병화 되었으며 이들은 칼과 활, 쇠뇌를 주력으로 가지고 다녔다. 무로마치 시대의 전사상자 비율을 본다면 스즈키 마사야는 화살 87%, 칼과 나기나타 8%, 투석 3%, 창 1%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고, 토머스 콘랜은 말은 화살 61%, 칼 35%, 창 3%이며, 사람은 화살 73%, 칼 25%, 창 2%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덤으로 백병전에서 칼에 의한 부상 비율은 92%라고 콘랜은 설명하였다. 전국시대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쳐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여름의 진과 겨울의 진이 지나 사무라이가 관료화 되는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전투가 필요없어지자 칼 자체도 정장의 소품화가 되어 칼을 두 개 차고 다니는 것은 사무라이의 상징이었다.[9]

이때의 사무라이는 엄밀하게 말하면 전쟁에 나갈 때 말타고 나갈 자격이 있는 중급 기마(騎馬, 키바) 무사이고 그 밑에 하급 도보(徒, 카치)무사가 있었다. 사무라이의 다음 계급은 ' 아시가루'가 있다. 출판물에 따라 최하급 사무라이로 번역하기도 하며, 농민과는 엄연히 신분이 다른 무사의 일종이다. 우리가 임진왜란 하면 생각하는 삿갓맨들이 바로 아시가루.

아시가루처럼 걸어다니기는 하지만 무장도 좀 좋아보이고, 삿갓 대신 투구다운 것을 쓰고 있으면 카치 사무라이, 말타고 있으면 기마무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키바, 카치, 아시가루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는 것이 상급 무사라고 할 수 있는 하타모토이다. 고쿠다카가 200석[10]인 하타모토에서 9000석[11]인 하타모토까지 다양했다. 고쿠다카가 1만 석이 넘으면 다이묘라고 칭했다. 도식화 해보면 아시가루<카치<키바<하타모토<다이묘 순이 된다.

각 무사들은 고쿠다카(石高, こくだか)라고 하여 영지를 지급받았다. 1석이 1,000홉이고, 인간이 1년 365일동안 1홉씩 3끼를 먹으니 대략 고쿠타카 1석당 1명은 인간을 부양할 수 있다고 본다.(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보니 조선 사람들은 1일 2끼, 한번에 7홉씩 먹었다.) 즉 고쿠다카가 1만석짜리 땅이면 1만명의 영민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보통 이 고쿠다카 생산량 중 70%를 다이묘가 가져갔다.[12][13][14]

그리고 이 고쿠다카를 바탕으로 각자 군역(軍役)이 정해져 있어 전시에 정해져 있는 병사를 데리고 집합하여야 한다. 대충 200석은 5명, 1,000석은 25명, 1만석은 250명씩이다. 그러나 고쿠다카 200석 사무라이라고 해서 각자 병사 5명이나 짐꾼 5명씩 데려오면 되는 것은 아니고, 고쿠다카에 따라 병종 비율이 정해져 있어 각자가 소규모 부대를 이룰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전국시대에는 이러한 기준이 관습, 지역에 따라 제각각이었고,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들어서야 통일성을 갖춘 동원기준이 마련된다.

5. 문화

서양 기사 문화의 발전사처럼, 최초의 사무라이들은 대개 싸움을 잘하는 무사들을 모아 귀족들을 경호하는 수준에 그치는 단순한 무사 집단 정도였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로 접어들어 다이묘 정권이 들어서고 400년 넘게 거의 서양의 기사와 가까운 계급으로 뛰어오르게 되면서 당연히 그 격과 수준도 높아졌다. 때문에 그 오랜 기간 동안 이들이 이끌어온 일본의 문화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5.1. 교양

가마쿠라 막부 시기에는 단순한 전사 집단이었지만, 무로마치와 전국을 거치면서 에도 막부 시기에는 일종의 사대부가 되었다. 도쿠가와 치세에 사무라이들은 유학과 병법 외에 난학이라 하여 서양 문물도 수학하였을 정도다. 실제로 대다수가 관료와 학자 등으로 활약하였다. 각각 오오카 타다스케나 오규 소라이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사무라이의 문사적 측면은 자주 조명되지는 않는 편이다.

그러나 에도 막부말기에는 약 200년 이상의 평화 끝에 완전히 공무원화 해버린 사무라이 계급이 명, 청, 조선에서 들어온 주자학, 양명학 계열의 유학을 접하고 그것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국학(国学)이라는 학문을 만드는 등 사무라이의 문화적 깊이는 더욱 깊어갔다. 이러한 사무라이의 문관화는 몰락한 일부 공경귀족의 독자적 헤이안 문화와 결부되는 등 변화를 겪었으며, 에도 막부 말기 흑선내항과 더불어 발생하는 여러 체제혼란 속에서 근대 일본의 존황양이 사상을 확립하고, 메이지 유신의 기반이 되었다.

사무라이들의 교양의 수평은 지방별로 큰 격차가 있었으며[19] 어떤 사무라이들은 서양의 언어를 필두로 하는 외국어 서적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 정도의 교양이 있었던 반면, 어떤 사무라이들은 한자로 제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일본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 과거제도를 위시한 유교가 조선만큼 보편화되지 못한 대신에 경제력과 군사력의 치중에 중요시한 점도 있었다. 애초에 일괄적으로 사무라이라고해도 1만 석 이상의 다이묘와 다이묘의 시종이나 다름없는 하급 사무라이들 간에는 큰 격차가 존재했고 다이묘들끼리도 가문의 위세나 성향에 따라서 큰 격차가 있었으니 일괄적으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일부 다이묘나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권세를 뽐내기 위하여, 혹은 권력다툼에 패하여 할 일이 없어서, 혹은 그냥 취미생활로 교양을 쌓았으며 이 과정에서 선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차문화와 독특한 화풍 등을 활발하게 발달시키기도 하는 등 제법 높은 교양과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일명 하이쿠라 불리우는 문학도 이 시대에 꽃을 피우게 된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불교와 유교의 이론에 깊이 감화된 사무라이들이 일부 늘어나면서 그 전성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말 극도로 꺼리는 왠지 사무라이답지 않은 사무라이들도 늘어났다(...). 사무라이들이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출가하여 승려가 된 사례도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승려 쪽에서 사무라이들에게 환상을 품고 일부 승려는 직접 나기나타같은 무기를 들고 난폭하게 설쳐대거나, 무뢰배들을 모아 승병을 만들기도 했다. 승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이묘를 축출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쪽하고는 분명하게 거리를 두는 종파도 있었다.

교육에도 많은 힘을 썼던 모양인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1549년에 로마에 보냈던 보고서엔 대학 비슷한 교육시설도 있었던 모양이며 사무라이의 자제는 8살부터 19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도 전해져 온다. 치열한 센고쿠 시대에도 이랬으니 에도 시대쯤 되면 더욱 사무라이에게는 단순한 전투력이 아니라 정치력, 지력이 요구되기 시작한다.

5.2. 의리와 무사도

각종 픽션에서는 주군에 대한 충과 의를 다하는 것처럼 묘사되며 실제로 그런 충의 로운 사무 라이들도 있었지만, 사무라이도 엄밀히 사람이었기에 많은 경우 주군이 함부로 행동하거나 가진 영토에 비해 군주로서 다스릴 능력이 미약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독립하거나 동맹을 공격하는 등 들도 많았다.

충과 의를 중시하는 무사도는 후에 에도시대에 중앙집권적인 에도막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강조된 것이고 전국시대에는 적 앞에서 방심하면 등 뒤에서 찌른다거나 배신을 하거나 동맹을 깨거나 하는 일도 몹시 흔한 편이었다.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무사도에는 유교 사상[20]의 영향이 크다.

유럽에서 기사의 시대가 지나고나서 기사도 로망이 유행하며 기사도가 발생한 것처럼[21] 무사도 또한 무사의 시대가 지난 에도 시대에나 발생한 개념이다. 현대에 알려진 멋진 무사도는 사실 옛날을 동경하던 에도 시대 공무원 사무라이들이 유학사상과 버무려낸 통치계급적 내용에서 직접 유래했고, 메이지 시대의 니토베 이나조가 유학중 서양의 기사도에 영향을 받아 역사적인 사실에 국뽕을 적절히 버무린 <무사도(Bushido: The Soul of Japan)>라는 그의 저서에서 작성한 내용도 있으며, 그걸 가장 잘 나타내는 희곡 < 충신장>이 결정타를 쳤다. 문제는 이걸 일본제국 일본군이 절대의 국시이자 이데올로기로 삼아버렸다는 것. 결국 일제시대의 맹목적이고 부정적인 무사도 숭배로 악용된 적도 있었다.

5.3. 생계

실제 센고쿠 시대의 무사들은 현대의 인상과 달리 엄밀히 말해 철따라 조건 따라 직장을 옮기는 샐러리맨에 가까웠다. 보통 이들은 전공을 세우면 적극적으로 주군에게 보고했고, 주군은 칸죠라고 불리는 "감사장"으로 보답했다. 이 감사장에는 해당 무사의 무공이 적혀 있어, 이를 타 가문에 임관할 때 이력서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인 토리이 모토타다는 "나는 도쿠가와 가의 귀신이 될 것인데, 타 가문에 임관할 때 쓰이는 감사장이 무슨 소용인가?"하고 감사장을 대놓고 거부했다고 한다.

야마나카 유키모리가 후세의 교과서에도 등장할 만큼 유명해진 이유는 녹봉과 대우 등에 따라 주군을 옮기는 것이 보통이었던 당시 사회에서 주가에 대해 전설로 남을 만한 의리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해당 가문을 대대로 섬기는 오랜 가신들은 원로 대접을 받으며 후다이라고 불렸고 중용되었다.

사무라이 중에 10% 가량은 영주의 영지의 일부를 위임받아서 직접 농민으로 부터 쌀과 농산물 등 세금을 거두기도 했지만 대부분 80% 는 1년에 3회 (2월 4월 10월) 영주의 쌀 창고에서 직접 은급을 쌀섬으로 수령해 집에 보관하거나 고향집에 보내거나 이를 시장에 내다 팔아 봉급을 받았다. 일부 10%-20%의 하급 무사는 쌀 대신 금화 등 현금으로 지급받았다.

주인이 없으면 로닌[22]이 된다. 이들은 보통 주가가 망하거나 처벌을 받거나 해서 규모가 쪼그라들어 더 이상 부양할 수 없자 내쳐진 일종의 실직자인데, 출세를 위해서 전쟁에 목이 말라 있는 호전광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암적 존재이기도 했고, 가끔 충성스러운 로닌들은 떠돌아 다니며 주가의 복수를 하기도 했다.

사무라이는 급에 따라 년에 1회 주군부터 쌀로 급여를 지급 받았는데, 상인들은 사무라이들이 급여를 지급 받는 날을 노려 쌀을 풀어 쌀가격을 떨어트리고 사무라이들이 외상을 쌀로 갚는 것을 방해하여 일부로 그들을 빈곤하게 만든 후, 친절한 척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어 많은 사무라이들이 막대한 빚더미에 앉도록 만들어 버렸다. 이로인해 에도 시대 후기~말기에는 많은 하급 사무라이들이 사회적 취약계층으로 전락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이것이 메이지 유신의 원인이 되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근세 일본에선 다이묘를 제외하고 토지를 보유할 수 없었고 이는 다이묘가 아니고 다이묘를 섬기는 사무라이들도 마찬가지였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일단 전국시대에는 에도시대와 달리 쌀이 아닌 토지로 봉급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였음으로(이를 은급(恩給)이라 한다) 이 원칙이 성립된 시기에는 작은 텃밭부터 대장원(荘園)에 이르기까지 땅을 가진 사무라이가 너무 많아 일일이 이를 회수할 수가 없었고, 만약에 그딴 짓을 강행 했다가는 전국에서 땅을 뺏긴 사무라이들의 반란이 폭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다가 신규로 땅을 하사하는 것은 그만뒀다지만 에도시대에도 평민부터 사무라이로 등용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고 그 중에는 영주의 감시가 닿지 않는 깡촌을 감독시키기 위해 마을 촌장이나 그 주변 부농한테 칼 두자루 채워주고 사무라이 시킨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 당연히 사무라이가 되기 전부터 가지고 있는 논밭이 있었으며 오히려 일반적인 사무라이와는 달리 봉급도 못받고 그냥 벼슬시켜줄테니 니 밭에서 나온 거 주워먹으면서 세금이나 잘 걷어라 식으로 방치되는 일도 많았다. 또한 땅을 가진 사무라이의 증가는 당시 일본의 상속법과도 연관이 있었는데, 에도시대의 상속법에 따르면 부모에 일(=벼슬)과 지위는 장남에게 모두 상속되며 당연히 먹고 살아가기 위한 봉급은 일을 해야만 얻을수 있음으로 차남 이하의 자손들에게는 자급자족을 시켜야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일과 지위는 장남에게 물려주고, 차남 이하는 농지를 쪼개받아서 이름만 사무라이인 농민이 되는 식의 상속이 진행되었고 이 때문에 에도 시대 후기에 가면 갈수록 땅을 가진, 그러나 정작 사무라이다운 일은 하지않는 가난한 사무라이가 엄청나게 늘어나버리게 되었다.

5.3.1. 부업

본래는 관리, 군인 등의 공무원처럼 계급에 맞는 본업을 제외한 부업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에도 시대 하위권 사무라이들은 가난하여 먹고 살기 어려워서 암암리에, 혹은 대놓고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상층부도 뻔히 다 알고 있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겨 묵인했다. 에도 시대 중기부터 일본에서는 상업이 엄청나게 발달하여 상인 계급이 사회의 실세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경제적 이익 추구와 사무라이 계급의 약화를 목적으로 주기적으로 쌀가격을 조작하였다는 것. 조선과 달랐던 것은 직업에 귀천의식이 없었다. 그래서 가장 크게 부흥된게 상업과 대를 잇는 장인문화였다. 그로 인해 기술이 섬세해져 프로의식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이 기업문화로까지 발전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필사, 도장이나 서당의 선생부터 우산, 도자기, 일본도, 목공예품 등을 만드는 수공업, 소바과 같은 식당 문화, 땅을 가졌다면 농사를 지었다.

사무라이의 부업으로는 우산제작이 대표적이고 그외 대나무 바구니 짜기, 벌레기르기가 크게 유행해 새나 벌레를 사육하는 초롱, 조명용 등롱 등을 제작해 팔기도 하고 학식이 있는 사무라이는 평민이나 상인들의 자식을 가르치는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은 나중에 전문적인 직인, 장인 계급으로 발전하였다.

단 일본도 명백히 계급 의식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체면 차릴수 있는 부업이라고 하면 무술이나 학문을 활용할 수 있는 도장 or 서당(일본에서는 데라코야라고 불렸다) 선생, 또는 학자 정도로 쳤고 조상 대대로 받아내려온 밭을 가꾸어 목에 풀칠하는 것을 그 다음으로 보았다. 취미로 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먹고 살기 위해 대장간이나 공방에서 장인으로 일하는 것은 남에게는 말 못할 부끄러운 일로서, 그 중에서도 최하급으로 친 것은 바로 상업. 가게를 차린다거나 상회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은 거의 사무라이는 이제 때려친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주군부터 녹을 받아 먹으면서 한편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은 같은 사무라이 사이에서는 도저히 상종 못할 인간 말종 취급을 받았다. 예로 에도 시대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던 하급 관리인 도신(同心)은 업무 성격상 고요키키(御用聞き)라고 불리는 평민 출신 조사원들을 대량으로 고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막부부터 받는 봉급과는 별개로 하사 받은 부동산을 활용하여 상업 활동을 병행했는데, 평민들 사이에서는 일상에서 자주 볼일이 많은 사무라이 계급인 것도 있어서 인기가 많았으나 같은 사무라이 사이에서는 거의 평민과 같은 취급을 받고 멸시 당했다. 전국 시대에는 상업과 사무라이 일을 병행한 인물도 많은 것을 보면, 이는 에도 시대에 들어 사무라이와 상인 계급 간에 마찰이 표면화 됨에 따라 나타난 경향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메이지 유신 이후 직업에 대한 제한이 풀어져 사무라이들도 장사를 대놓고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초기에는 오히려 손님인 평민들이 장사를 하는 사무라이들에게 굽신거리며 마치 하사를 받듯한 자세로 물건을 구입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5.4. 부레이우치

해당 항목 참조. 평민에 대한 살인 면허. 일본의 에도시대에 사무라이계급에게 허용되었던 특권의 하나. 키리스테고멘(切捨御免, きりすてごめん)이라고도 한다. 자주 행해진 것은 아니다.

5.5. 무예

검술은 유래가 오래되어... 수십 번을 안과 밖을 뛰어넘는 것이 마치 금수(禽獸)와 같으며, 더러 늘 경쟁을 시켜 사심(死心)을 앞다투어 발휘케 하는데 칼을 휘둘러 서로 치며 반드시 죽이기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는 사이에 칼등으로 칼날을 받아쳐서 결국 다치지는 않으니 그 교묘하게 피하는 기술과 능숙하게 부딪치는 기술은 완연히 백원(白猿)의 검법(劍法)이 있습니다. 근기(近技)는 신묘하여 사람마다 검객이 아닌 자가 없고 기계의 정밀함도 다 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장검(長劍)과 철환(鐵丸)인데 철환은 비가 내리듯이 쏟아지고 칼은 숲이 서 있는 것과 같으나, 총을 쓰는 것은 칼을 쓰는 것에 비해 자못 뒤떨어집니다.
정탁, 『약포집』. 1593년 8월 15일 명나라 유생 호환에게 보낸 편지

위의 기록처럼 보통 검에 죽고 검에 산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초창기에는 오히려 "활 없이 말을 타지 않는다"고 얘기할 정도로 활을 중시했다. 거기다가 소위 말하는 일기토도 본래는 서로 말 타고 달리면서 활 쏘는 것이었다고. 그래서 사무라이를 궁수(유미토리)라고도 표현하며, 사무라이의 무력을 궁술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활들은 조선에서 쓰던 활과는 달리 길이가 1.8m나 되는 사람보다 큰 장궁이었다. 링크 그리고 활로 승부가 나지 않으면 일본도를 쓰기도 했지만 주 무기는 4.5m 정도 되는 창이었다.

이들은 후세인의 인상처럼 칼에만 목숨을 거는 단순 한칼잡이들도 아니었다. 일본에선 유럽과 달리 장거리 공격을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었고[23] 헤이안 시대만 해도 사무라이 간의 단기접전이란 서로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을 의미했고, 검을 쓰는 것은 활쏘기로 승부가 나지 않았을 경우에 한정되었다. 유럽 기사들이 창으로 겨루다 3합 이내에 승부가 안나면 검으로 넘어가던 것과 비슷하다. 총포가 도입된 이후에는 전투의 첫 포를 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기도 했다. 이는 환경적인 요인도 있는데, 일본에는 양질의 철광이 드물어서 사철을 주로 사용했는지라 제련이 까다로워 전금속제 갑옷은 마련하기 힘들었고, 유럽에 비해 훨씬 습하고 더운 날씨에서 중무장은 오히려 전투력에 해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24] 덕분에 투사 무기가 유럽에 비해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본디 전투원인 사무라이들은 평화가 찾아오자 그 성격이 변하기 시작하는데, 에도 막부 때의 사무라이라는 이들은 전투에 나가는 이들이 아니라, 다이묘 밑에서 그 지역을 다스리는 관리직이 주된 임무였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사무라이들이 일평생 칼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아예 칼을 휘두르는 법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것은 시대가 지날수록 심해져, 나중에는 성 하나에 제대로 실전 경험이 있는 이는 외부에서 고용해온 검술 사범 딱 한 명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25] 이런 상황에서 실전 분위기만이라도 맛보겠답시는 중2병스러운 발상으로 츠지기리 도장 깨기 등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사무라이들도 나왔을 정도면 에도시대의 일반 무사들이 얼마나 전투로부터 멀어져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거친 무사들의 풍습이었던 할복도 진짜 배를 가르는 것에서 아프니까 에도 막부에서는 귀찮았는지 그냥 참수형에 처해 버린 다음 보고만 할복으로 처리해버리는 사례도 많았다.

6. 창작물에서

사무라이들은 일본인들에게 인식이 매우 좋은데 닌자와 함께 일본 문화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존재이기도 하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당한 인지도가 있다. 덕분에 와패니즈 관련 매체들이 많이 써먹으며, 사무라이를 다룬 각종 매체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대표적으로 사무라이 스피리츠 시리즈. 흔히 서양의 관점에서 중국 쿵푸가 있다면, 일본에는 이 닌자사무라이가 있다고 한다. 다만 동양 전통 의상 입고 칼 들면 다 사무라이인 줄 아는 사람이 자주 보인다. 일본에서도 전국시대를 그린 역사물이 늘어나고 관심이 증가하면서, 점차 모노노후와 사무라이를 분리해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아졌다. 전국 시대의 모노노후는 칼을 도구로 여기는 실용주의적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에도시대의 사무라이는 칼을 명예로 여기고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형식주의적인 모습이다. 이는 흔히 서양의 기사도와 대비되는 부시도의 모습이다. 도검제일주의와 충인의예지신의 유교문화가 혼재된 것. 때문에 일본도 최강설도 이 사무라이 찬양과 연관이 깊다. 종종 구 일본군 문화 일부를 무사도라며 찬양하기도 하지만 실제 일본군의 문화는 무사도와는 거리가 멀다.

도미네이션즈에서 고전~화약 시대의 일본 고유 유닛 및 전술성 병력들로 등장한다.

물론 옆동네 한국과 명나라는 그들이 장식용 칼을찬 공무원인걸 잘 알아서 말이 없다.

7. 이모저모

8. 관련 문서

9. 사무라이를 소재로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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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 자체가 신분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서양의 귀족작위 보유자들이 장식용 검을 패용했던 것과 같은 개념이다. [2] 물론 장식용이고 함부로 칼싸움을 했다간 둘다 참수인지라 그냥 칼날부위를 대나무를 깎아만든 칼날로 교체해서 다니는 경우도 잦았다. 이를 たけみつ, 타케미츠라 한다. 조선의 선비들이 의외로 궁술-무를 중요시한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파일:54616368_p0_square1200.jpg
타케미츠의 모습.
[3] 하지만 전국시대 일본 영주들 중 확실한 평민 출신은 지극히 적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괜히 특이케이스 자수성가자로 불리는게 아니다. 최소한 토호급은 되던 기반있는 사람들이 슈고 다이묘 영주들을 무너뜨리고 센고쿠 다이묘가 된 것이다. 평민이 다이묘가 될 수 있는 경우는 정말 지극히 적었다. [4] 아닌게 아니라, 말이 사민평등이지, 일본의 전통적인 천민 계층인 부라쿠민은 명목상으로만 평민 대접 받고, 실제로는 이전과 똑같이 무시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반대로, 사무라이들 중에서 다이묘와 같은 최고위 계급들은 문벌귀족들인 쿠게들과 함께 화족이라는 귀족 계층으로 재분류되어 여전히 기득권을 쥐고 있었다. [5] 에도시대에는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밖으로 허가없이 나간 일본인은 귀국이 금지되었으며 귀국 즉시 참수시켰다. [6] 전국시대 유파를 보면 칼 말고도 활, 창, 나기나타, 봉 같은 다양한 무기술을 배운다. 전쟁에 나가야 되니까 동, 서양을 막론하고 당연한 이야기. 그러다가 막부 평화기에 전쟁 할 일이 없어지고 칼만 차고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칼에 특화된 모습이 나타난다. 다만 나기나타나, 활, 총은 실전에서도 사용하기는 좋았으므로 여전히 이를 수련하는 유파가 많이 있었고, 이들이 개화기 시대에 이르러서 무진전쟁이나 서남전쟁 같은 내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7] 하지만 개화기 때에는 고위급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도검제일주의가 성행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아시가루 같은 하급 사무라이들이 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이 뒷날 태평양 전쟁 때의 병맛나는 무사도 드립으로 이어졌다. [8] 스웨덴 메탈밴드 사바톤의 2016년 앨범 'The Last Stand'의 '시로야마' 영상은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갤러리에서 만들었다. [9] 그러나 전쟁할 일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함부로 칼뽑고 살인했다가는 가족들까지 연좌제로 신분강등 당하는 에도 막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 칼을 뽑을 일조차 없어지자 칼날 없이 칼손잡이와 칼집만 차고다니거나, 모양만 잡아주는 날 없는 쇠만 끼워넣고 다니는 등 정말로 소품이 되어버린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 칼날은 녹이 슬지 않도록 집에 따로 보관해두었는데, 이를 시라사야라고 한다. [10] 하타모토의 하한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부하로 꼴랑 카치 1명, 창병 아시가루 1명을 거느리고 있으며 짐꾼으로 3명을 대동한다. [11] 이 정도면 부하로 키바(기마 무사)만 11명에 카치 14명, 아시가루 64명을 거느리는 집단의 대장이다. 또한 깃발잡이와 종자, 짐꾼 등을 합쳐 총 189명을 거느린다. 다시말해 사무라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무라이가 아니었다. [12] 4공6민이라 하여 40%는 다이묘가 가져가고, 60%는 농민이 가져가는 경우는 예외적인 선정으로 간주되었다. [13] 또한 고쿠다카에서 70%를 다이묘가 가져간다는 뜻이, 30%로 농민들이 살아갔다는 뜻은 아니다. 각종 부역, 그외 여러 활동에 다이묘들이 농민을 고용하면서 다시 지불하기도 했으며, 아시가루들에게 녹봉으로 지불되기도 했다. [14] 또한 조선과의 직접 비교는 어려운게 물론 조선은 정부가 농민들에게 직접 걷는 세율 자체는 일본보다 현저히 낮았지만(때문에 국가 체급에 비해 만성적으로 재정난에 시달리고 군대를 대규모로 유지하기 힘들어했다.) 조선의 경우 초기에는 외거노비에게 경작을 시키는 방식이 보편적이었다가 후기에는 지주전호제가 정착되어 국가와 농민들 사이에 수확량의 50~60%를 소작료로 걷는 지주 계층이 있었지만 일본의 경우 기본적으로 연공의 일원화가 이루어져 있어서 다이묘&하타모토=국가+지주와 같았기 때문에 농민들은 일단 자기 영주에게만 세금을 내면 되는 구조였다. [15] 다만 임진왜란기의 대마도처럼 전장에서 가까운 지역은 오히려 1만석당 병력 500명 가까이를 동원하여 영지내 젊은 남자들의 씨가 말라버려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수를 절반도 회복못하고 있다. [16] 5000석 이상 하타모토 33가문. [17] 이는 과거 제도와 같은 표준 공무원 시험제도를 갖추지 못하고 봉건제도의 경직된 신분사회를 유지한 일본 근세사회의 한계이다. 하급 사무라이 집안 태생이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이러한 제도를 극렬히 비판하며 천부인권과 만민평등을 주장했다. [18] 주인 신변의 잡무와 경호를 담당한다. 하인이 아니라 사무라이 견습생이라는 견해도 있다. [19] 전국시대 오우치 가문 지배 시절부터 학문이 특히 발달했던 조슈라는지, 사쓰마, 미토 번 등등이 사족들의 숫자도 많고 번교를 중심으로 학문이 발달했었다. [20] 당대 일본에서 가장 유행한 유학은 임진왜란 후에 전해진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율곡 이이의 이통기국설이다. 이들의 성리학은 에도 막부가 가장 원했던 것으로써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21] 서양에서 흔히 중세 시대하면 떠올리는 중세 전성기(11세기 이후)때는 기사계급의 준귀족화가 진행되며, 기사도가 생겨나고 있었고 기사의 시대가 끝나기까지는 그 후로 몇백 년이 더 흘러야 했기 때문에 기사의 시대가 끝나고 기사도가 생겼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기사 계급이 처음부터 기사도와 함께 생겨난 계급이 아니라고 하면 맞겠지만. [22] "뇌인"과 "낭인"은 엄연히 다르다. 항목 참조. [23]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부터 중세 초기까지 장거리 공격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는 국가가 꽤 있었다. 다만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헤라클레스 같은 명궁들이 좋은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는 걸 보면 반대로 장거리 공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고대 유럽인들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동유럽권 또한 우랄 알타이 제민족 계통 유목민들의 영향으로 인해 장거리 공격에 대한 인식이 대체로 좋았던 편이다. 동유럽권에서 기마술과 궁술이 발달한 것 또한 우랄 알타이 제민족의 영향이 강했다. [24] 반면 서양에서는 귀족과 부자들은 비싼 철갑주(풀 플레이트 메일)를 마련했고 경무장하고 투사무기를 쓰는 병사는 보통 평민 출신이 많았다. [25] 상황이 이렇다보니 각 지역의 영주들은 각지의 유명한 대리 결투자나 복수자(아녀자의 명예나 복수를 위해 대리로 결투하여 상대를 죽이는 것은 에도시대 일본에서 대단히 명예로운 행위로 간주 되었기 때문에 간간히 나서서 이런 일을 해주는 사무라이나 낭인들이 있었다)를 어떻게든 스카우트해 오기 위해 열심이였다. 그냥 검술에 능한 정도면 어디 검술 도장에서 잘한다는 놈 대려오면 그만이지만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는 놈은 그만큼 찾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26] 사실 싸울아비를 동양무사풍의 직업으로 묘사하는 것 자체는 의외로 자주 있어왔다. 물론 그런 작품들이 모두 싸울아비=사무라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닐 것이다. [27]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준비하며 당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었던 하라 타츠노리가 만든 별칭. [28] 2010년 남아공 월드컵부터 사용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칭. 여성 국가대표팀의 경우 나데시코 재팬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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