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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6-17 21:06:29

중세 일본의 관위와 역직



1. 개요2. 칸이(官位)
2.1. 개요
2.1.1. 일본 각지에 창궐하는 관직 사칭과 햣칸나 풍습2.1.2. 호칭
2.2. 태정관과 신기관 그리고 사등관(四等官)2.3. 정일위2.4. 관위 목록
2.4.1. 영외관(令外官)2.4.2. 종일위(정일위/종이위 겸)2.4.3. 정이위 / 종이위2.4.4. 정삼위 / 종삼위2.4.5. 정사위 / 종사위2.4.6. 정오위 / 종오위2.4.7. 정육위 / 종육위
3. 역직
3.1. 개요3.2. 역직 목록

1. 개요

중세 일본의 관직체계와 변천을 다룬 문서.

일본 역사 관위는 고대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중세 일본의 관위와 역직이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지만, 이 문서는 역사적 권력 체계인 막부 성립 이후 신설된 막부 역직을 포함하므로 부득이 중세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2. 칸이(官位)

2.1. 개요

일본의 군주인 천황에게 인정받은[1] 모든 정권의 역대 관위를 총칭한다. 아스카 시대부터 시작된 율령격식으로 구성되었다.[2]

한반도의 율령제는 삼국시대에 처음 반포되고[3]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독자적으로 발전, 변형한 반면, 일본은 견당사를 통하여 당나라의 제도를 적극 모방해 체계적인 법전을 편찬하고 오랜 기간 시행하였다. 즉, 당나라식 율령제를 가장 오랫동안 유지한 나라는 일본이라는 뜻.[4] 그러나 중국 원형의 율령제를 그대로 유지하진 않고, 일본 특유의 정치색을 가미하여 영외관(令外官)과 권관(権官) 등을 포함했다. 물론 형식이 그럴 뿐 일본 특유의 인세이, 바쿠후, 셋칸정치 등을 하느라 실질적인 정착은 지지부진하였다.

기본적인 일본 율령제의 골격은 다이호 율령에서부터 나왔다. 지토 덴노 3년 6월(689)에 일본의 첫 율령인 아스카기요미하라령(飛鳥浄御原令)을 반포·제정했지만, 일본의 국내 사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몬무 덴노 때 오사카베 황자(忍壁皇子), 후지와라 후히토(藤原不比等), 아와타 마히토(粟田真人), 시모쓰케노 고마로(下毛野古麻呂) 등이 율령 선정을 담당하여 700년에 령을 거의 만들고 남은 율의 조문을 작성하여 다이호 원년(701)에야 다이호 율령을 완성했다.

다이호 율령은 본래 군주인 천황을 정점으로 관료기구를 2관 8성[5]으로 정한 체계를 골격으로 삼아 본격적인 중앙집권 통치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관청에서 사용하는 문서에는 연호를 사용하고, 인감을 찍고, 정해진 형식에 따라 작성된 문서 이외에는 수리하지 않는 등 문서와 수속의 형식을 중시한 서면주의를 도입했다. 그러나 무인들이 발호하자 천황과 조정이 쥐었던 모든 통치권이 사실상 세습 섭정과 지방 토호 가문들에게 넘어가 중앙집권적 율령제가 붕괴되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사실상 율령제가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랫동안 관위가 소멸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때부터 관위는 일종의 명예작위로서, 수도 교토의 공가와 명문귀족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출신이 미천한 신진 토호들이 출신을 숨기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도구로 변질되었다. 예를 들면 교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의 영주였던 타케다 신겐은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유력 다이묘였으나 관직은 세습받은 종사위하 좌경대부, 상경하여 받은 정오위상 대선대부에 불과했고 신겐과 호각을 이루던 우에스기 겐신은 이보다도 낮은 정오위하 탄정소필이었다. 반대로 교토를 장악한 유력 다이묘는 천황과 귀족들이 보호의 대가로 고위직을 받을 수 있었다.[6] 교토를 장악한 오다 노부나가는 정이위 우대신을 받았다. 아예 평민 출신인 하시바 히데요시는 물심양면의 부단한 노력으로 최고위 관직인 관백, 태정대신을 받고. 중앙 귀족의 성씨를 받는 등[7], 관위의 권력에 매우 연연했다. 즉 천황의 선하로 통치한다는것.

2.1.1. 일본 각지에 창궐하는 관직 사칭과 햣칸나 풍습

막부 체제는 조정의 정치권한을 무사정권이 대행한다는 기이한 형식이었기 때문에 조정과 트러블이 잦았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은 막부의 정식 중개와 승인 없이 조정에 직접 임관하여 벼슬 받음을 엄금하고 이를 어긴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주살하기까지 했다. 이런 과정에서 관위는 점차 정치적 실권을 잃고 명예직이 되었다.

센고쿠시대의 혼란함 속에서 조정의 관위체계와 기존 사회질서가 완전히 붕괴하자, 많은 관직들이 실제 조정의 해당 직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단순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고위무사는 조정에 일정한 돈을 바쳐 관위를 사기도 했지만, 하위무사들이 제멋대로 관위를 참칭하는 사례가 늘자 전국시대부터는 관위가 아무 의미나 권력이 없이 단순히 지방의 일개 하급무사들의 이름을 대신해 부를 때 사용하는 별호나 호칭 구실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무식하고 출신이 일천한 자가 발호하고는 자기 멋대로 칭호를 붙이다보니 없는 직책의 명칭을 지어내기도 하였다. 예로 어린 촌놈 시절 오다 노부나가는 카즈사 지방의 태수인 카즈사노카미(上総守)를 자칭했다. 문제는 카즈사 지방은 천황의 아들, 즉 친왕이 태수로 임직하는 특별행정구역(친왕임국: 히타치ㆍ우에노ㆍ카즈사 국)이었으므로 태수가 있을 리 없다는 것. 그래서 몇 년 뒤 그 대리인이란 뜻인 카즈사노스케(上総介)로 슬쩍 명칭을 수정했다.

그러다 보니 '햣칸나(百官名)'라는 실제 관위와 상관이 없는 명예성명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일본 위키피디아는 가명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8] 실제 관위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칭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이묘들이 사적으로 가신들에게 관직명을 붙여주고 세습하기까지 했다.
한자 문화권에서 상대방의 실명을 그대로 말함은, 설령 이름 뒤에 경칭을 붙이더라도 매우 무례했다(실명경피속). 특히 하급자가 상급자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림은 죽을 죄였다. 헌데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이런 풍조가 더 심해져서 실명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명예성명인 햣칸나로만 부르는 풍습이 생겼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만이 아니라 낮은 사람도 햣칸나로 불러야 했고, 심지어 면전의 적장도 햣칸나로 호명할 정도였다. 일본 사극을 보면 나이후니 지부니 교부니 하는 도통 알 수 없는 호칭이 나오는데, 나이후는 내부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 지부는 치부소보 이시다 미츠나리, 교부는 형부소보 오타니 요시쓰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햣칸나가 실제 벼슬과 관련성을 잃고 가명에 가깝게 사용되다 보니, 나중에는 이름보다 관위가 유명해지는 경우도 생겼다. 예로 키리시탄 다이묘로 유명한 다카야마 우콘은 본명이 '시게토모'지만, 통칭이자 관위인 '우콘' 쪽이 훨씬 널리 알려졌다. 기요오키도 시마 사콘으로 더 유명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집권하자 도쿠가와씨와 마에다씨 외에는 관위를 받지 못하게 함으로서 핫칸나 풍습은 사라졌다. 그래서 에도 막부를 다룬 사극에서는 핫칸나가 쓰이지 않는다.

2.1.2. 호칭

관위를 호칭으로 쓸 때는 보통 성과 이름 사이에 넣었다. 이시다 미츠나리를 예로 들어보자. 이시다 지부노쇼 미츠나리, 줄여서 이시다 지부노쇼, 더 줄여서 지부라고 불렸다.

관위가 지방직이라면 해당 지방의 약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관위가 셋츠노카미였다. 그래서 '셋츠노카미'의 약칭을 써서 주로 고니시 셋슈라고 불렸다. 고위 다이묘는 봉건제 유럽과 비슷하게 자기 영토의 이름을 성 대신 붙이기도 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사시 나이다이진', 혹은 '간토 나이후'라고 불렸다.

관위사칭이 남발하는 가운데 관위만으로는 구분이 어려워지자 관위를 당명(唐名), 즉 중국식 명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신겐의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는 사마노스케란 관위를 자칭했는데, 사마노스케의 당명인 '덴큐'라고 불렸다. 이름과 붙여서 '덴큐 노부시게'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같은 남발용 관위를 가진 자들은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지명에 관위명을 더해서 새로운 햣칸나를 만들었다.

2.2. 태정관과 신기관 그리고 사등관(四等官)

2관 중 태정관 사법·행정·입법을 관장하는 최고국가기관이다. 장관은 태정대신이나, 상설직이 아니었던 탓에 통상적으로는 좌대신과 우대신이 장관 역할을 맡았다.

중국의 율령제가 황제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켜 3성[9]이 보좌하는 체제인 데 반해, 일본의 율령제는 천황과 각 성(省)의 사이에서 천황의 대리 기능을 하는 관대한 합의체인 태정관을 둔 것이 특징이다. 헤이안 시대가 되자 섭정과 관백이 신설되어 그 힘은 약해졌으나 가마쿠라 막부 때까지 정무기관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그러나 무사들이 일본 역사의 주역이 되는 무로마치 막부 시절이 되면 그런 것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신기관 국가의 제사를 관장하는 최고국가기관이다. 신기(神祇)라는 단어는 천신지기(天神地祇)를 줄인 말로, 하늘과 땅의 신을 뜻한다. 아베노 세이메이 등이 신기관의 관위에 역임했으나, 이 문서에서는 신기관의 관위는 제외하였다.

일본의 관위는 사등관(四等官) 체계로 구성되었다. 가미(長官 장관), 스케(次官 차관), 조(判官 판관), 사칸(主典 주전)으로 네 등분되어 각기 맡은 관위의 상대적인 권력 크기를 구분했다.[10]

8성에 대한 설명은 하단의 표 비고란을 참고.

2.3. 정일위

정일위는 일본의 관위 체계 하에서 최고의 품계이다.

통상 어떤 직이 정일위라 규정된 것은 아니고, 주요 고위 관료가 큰 공을 세운 경우 생전, 혹은 사후에 이 위계를 부여받았다. 조선에도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라는 품계가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원평등귤에 속하는 귀족가문 출신이 아니면 생전에 일본의 정일위 품계를 받기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정일위를 죽은 다음에 공적을 기리는 명예적처럼 운용했기 때문에 사후에 추증받기는 비교적 쉬웠지만[11] 생전에 정일위를 받기는 일본에 존재했던 그 어떤 관위보다 넘사벽으로 어려웠다.

일본 역사상 정일위를 생전에 받은 사람은 총 6명이다. 724년에 받은 후지와라노 미야코, 749년에 받은 다치바나노 모로에, 762년에 받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770년에 받은 후지와라노 나가테, 1146년에 받은 미나모토노 마사코, 마지막으로 1891년에 받은 산조 사네토미[12] 등이다. 생전에 제대로 정일위 품계를 받은 자들은 모두 13세기 이전 4대 명문 원평등귤 소속 인사들뿐이다. 전국시대에 천민 출신으로 아득바득 출세해 관백이 되어 원평등귤의 유리천장을 깬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도 생전 정일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차라리 천황을 시해하고 새 왕조를 개창하기가 더 쉬웠을 수준.

일본의 3대 천하인 오다 노부나가ㆍ도요토미 히데요시ㆍ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3명은 전부 사후 정일위에 추증되었다. 특히 오다 노부나가는 최후의 정일위[13]고, 그 앞이 히데요시[14]다.

2.4. 관위 목록

2.4.1. 영외관(令外官)

2.4.2. 종일위(정일위/종이위 겸)

2.4.3. 정이위 / 종이위

2.4.4. 정삼위 / 종삼위

2.4.5. 정사위 / 종사위

2.4.6. 정오위 / 종오위

2.4.7. 정육위 / 종육위


관련출처 : 출처 출처2, 출처3, 출처4,

3. 역직

3.1. 개요

관등에서 임시직위를 말하거나 가마쿠라 막부 이후 쇼군 이하의 직책들을 언급하는 자리이다.

3.2. 역직 목록


[1] 형식상으로는 선하, 즉 조서를 받고 정권을 인정받았는데, 사실상 도장찍기에 가까웠다. [2] 율령은 중국에서 수·당대에 완성한 국가적 성문법 체계로, 고대 동아시아의 전반적인 중앙집권 행정 체계를 뜻한다. 우리가 흔히 쓰이는 율령제라는 단어는 율령격식(律令格式)을 줄인 표현이다. 율(律)은 형법, 령(令)은 공사 제반의 제도에 관한 규정, 격(格)은 율령을 수정 증보한 명령, 곧 칙령(勅令)의 편집, 식(式)은 율령의 시행 세칙을 뜻한다. [3]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3년(373)에, 신라에서는 법흥왕 7년(520)에 율령을 반포했다. [4] 단, 중국에서 율령제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율만 존재했던 청나라를 제외하고 수나라부터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1000년간 율령격식이 모두 존재하였다. 이 문서에서 율령제는 수당의 율령제를 뜻한다. [5] 태정관(太政官)ㆍ신기관(神祇官) 등 2관, 중무성(中務省)ㆍ식부성(式部省)ㆍ치부성(治部省)ㆍ민부성(民部省)ㆍ병부성(兵部省)ㆍ형부성(刑部省)ㆍ대장성(大蔵省)ㆍ궁내성(宮内省) 등 8성을 아울러 이른다. [6] 막부 역직으로 기준을 따지면 우에스기 겐신은 결국에는 관동 관령(간토간레이)으로 사실상 관동 지방의 지배자 타이틀까지 차지하지만 다케다 신겐은 그 아래 수호(슈고)에 불과했다. 즉, 라이벌끼리 조정 기준 서열과 막부 기준 서열이 다른 셈이다. [7] 그것도 가장 격이높은 섭관가 중에서도 후지와라 북가의 종가 중의 종가인 고노에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고노에(近衛, 근위)는 천황가와 신적강하 되지 않은 가까운 왕족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격이 높은 가문이다. [8] 리스트 이 문서에는 무사들이 주로 자칭하던 관위명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9] 중서성(中書省)ㆍ문하성(門下省)ㆍ상서성(尚書省) [10] 가미에서 사칸으로 갈수록 권력이 작아진다. [11] 가령, 메이지 유신 이후 공작에 추서된 시마즈, 모리 가문 당주, 거의 대부분의 도쿠가와 막부 쇼군, 심지어 일개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나리아키 같은 인물도 받았다. [12] 산조 사네토미는 그나마 죽기 바로 직전에 사실상 유신 이후 최초의 수상인데도 기록상 이토 히로부미에게 밀린 반대급부로 정일위를 주었을 뿐이다. 유신 후라 사후추증이나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의미뿐이었다. [13] 1917년 [14] 1915년 [15] 도쿠가와 가문도 이와 동급으로 취급되었다. [16] 좌대신, 우대신, 내대신 등 [17] 당시 우대신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임이었다. 참고로 이에야스는 위계는 종일위로 정이위인 히데요리보다 한 단위 높았다. [18] 기도 다카요시의 양손자이다. [19] 여기서 권(権)은 권(權)을 다르게 쓴 것이다. 흔히 권(權)을 '권력'이란 뜻으로 쓰지만, 벼슬 이름 앞에 권(權) 자를 붙이면 임시직, 또는 대리직이란 뜻이다. [20] 이 지역들을 친왕임국(親王任国)이라 한다. [21]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좌천된 후 죽기 전까지 있던 직위 [22] 다만 사쿄다이부보다는 인기가 덜한 관직이었다. 사쿄다이부 또한 사실상 명예직이긴 했지만 센고쿠시대에는 이미 교토 서쪽이 인근 하천의 잦은 범람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늪지대가 된지 오래다시피한 상태였다. [23] 정원 외에도 곤스케(権助 권조)라는 동급 직종이 한 명이 특별직으로 더 있기도 했다. [24] 원래 명경(明經)이란 한잣말은 유학의 경서에 해박하다는 뜻이다. 여기에 '박사'란 단어를 붙였으니 직책명의 의미가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