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tish Inva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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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후 | 비틀즈 | 롤링 스톤스 | |
애니멀스 | 킹크스 | 좀비스 | |
스몰 페이시스 | 크림 | 야드버즈 |
브리티시 인베이전 British Invasion[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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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1964년 - 1967년 |
대표 음악가 | 비틀즈, 롤링 스톤스, 좀비스, 킹크스, 애니멀스, 야드버즈, 더 후, 스몰 페이시스, 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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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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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2월 7일, 비틀즈의 첫 방미 당시 미국 JFK 공항에 내리는 모습[2] |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음악적이나 문화적으로나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
빅뱅"처럼 이전과 이후가 있었습니다. 생각이 바뀌고, 음악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비틀즈의 영향만으로도 팬과 역사가는 영원히 바쁠 것입니다.
20세기의 결정적인 순간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영원히 강하게 계속될 것입니다.
Todd Sucherman, Styx, 음악 평론가
한국어로는 '영국의 침략' 또는 '영국의 침공'으로 번역할 수 있는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란 단어는
영국의
음악이 미국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미국 음악계에서 유례가 없던 대성공을 거둔 시기를 의미한다.[3] 기본적으로는 1960년대의 문화 현상으로 영국의 음악과 문화가 미국을 점령하면서
대서양 양편을 시작으로
반문화로서 크게 부상한 것을 의미한다. 이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1960년대 반문화의 신호탄을 알리며 그 시대의 반문화를 정립하기 시작했다.Todd Sucherman, Styx, 음악 평론가
넓게는 음악 외적인 분야의 영국 문화의 부흥과 열풍, 세계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2. 역사
2.1. 폭풍전야: 미국의 상황
1960년대가 개시되었을 때, 미국의 록은 완전히 전신마비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보수적인 미국 사회는 매카시즘의 광풍과 스푸트니크 쇼크로 인해 언제든지 공산주의가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공포를 맞이하면서 심각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1960년까지 미국은 1945년에 끝난 제2차 세계 대전의 뒷처리 과정과 냉전의 초기 세력구도를 결정한 그리스 내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6.25 전쟁 등 동시다발적인 공산주의와의 국지전을 맞닥뜨렸고 이 때문에 늘어난 어마어마한 전비와 전시경제의 장기화로 초래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여기에 내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사회에서 배제되어 있다가 일터와 전쟁터로 나오기 시작한 여성, 흑인들 같은 사회적 비주류, 소수자들이 일하면서 번 돈과 참정권의 확대를 통해 점차 목소리를 내기 시작해 백인들이 주류 기득권으로 자리잡은 사회 구조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런 전후 혼란의 상황에 미국의 기득권인 앵글로색슨 백인들은 크게 당혹해 했고 이런 사회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압박에 들어갔다.이런 인종주의에 기반한 사회적 압박은 문화라고 예외가 아니라서 흑인음악에서 유래한 로큰롤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으려고 했다. 제리 리 루이스는 만 13살밖에 안 된 질녀[4]와 결혼하다[5] 사회적인 비난을 받았고, 리틀 리처드는 비행기 사고를 당할 뻔한 경험을 한 뒤 목사가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음악계를 은퇴했다. 심지어 그는 "로큰롤은 사탄의 음악이다!"라고 주장하며 자기가 해왔던 로큰롤을 배신해 버렸다.[6]
척 베리는 사실상 로큰롤 기타 연주의 모든 것을 만들어 냈을 정도로 위대한 뮤지션이었지만 미성년자 소녀와 커플이 되어 주 경계선을 넘다 수감되었으며[7] 리치 발렌스, 버디 홀리, 빅 바퍼라는 세명의 걸출한 로큰롤 거인들은 비행기 사고로 동시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에디 코크런과 진 빈센트는 로커빌리의 투톱이었지만 자동차 사고로 인해 에디 코크런은 즉사, 진 빈센트는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8] 그런 험악한 사회 분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백인으로써 로큰롤을 메인스트림에 끌어올린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는 데뷔 초기부터 성적 행위를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무대 퍼포먼스와 시끄러운 음악, 껄렁껄렁한 태도로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보수 세력들의 비난을 계속 받아 왔는데 이런 비토적인 기성세대의 지긋지긋한 비난을 일단 피하고 차후 더욱 폭넓은 계층으로 팬층을 확대시키려는 이미지 관리와 방향 모색의 일환으로 잠시 군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직전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던 로큰롤 가수는 10대 아이돌 그룹인 디온&더 벨몬츠의 리드 보컬 출신으로 Runaround Sue와 The Wanderer를 연속으로 성공시킨 디온이었다.[9]
이렇게 1950년대 후반에 주요 로큰롤 뮤지션들이 갑자기 사라지자 미국의 대중음악계는 리키 넬슨 같이 표백처리된 얌전한 음악이나 스탠더드 팝이 가요계를 탈환했다. 대신 미국 흑인들의 R&B/ 소울 음악이 차트를 지배하게 되는데, 로이드 프라이스와 브룩 벤턴 등 R&B 가수들의 대성공[10], The Shirelles를 대표로 하는 걸그룹 열풍(Girl Group Era)과[11] 모타운 전성시대가 이때 시작되었다.[12] 레이 찰스의 전성기도 이 시절이었다.[13] 하지만 락앤롤 정신은 이미 사라져 벤쳐스와 섀도우즈 같이 아예 가사가 없고 소재가 철저히 제한되어 있는 서프 음악이나마 기존의 로큰롤의 역할을 대신한다. 비록 소재와 폭은 좁은 장르였지만, 정교한 기타 연주 테크닉과 각종 이펙터가 도래하는 장비 측면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 의의가 큰 시기이긴 했으나[14] 테크닉적인 면모만을 중시해 온 나머지 대중을 오래 사로잡지는 못하고 약 2년만에 단명했다.[15]
하지만 서프 음악 말고도 기존의 로큰롤 음악, 그러니까 그 사운드 자체는 로큰롤 정신을 잃고 R&B 음악과 결합해 트위스트 등의 댄스 음악으로 바뀌었다. 처비 체커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뮤지션으로, 트위스트 열풍, 락앤롤 댄스 열풍을 실질적으로 시작한 ' The Twist'는 빌보드지에서 역대 최고 히트곡으로 선정되었다. 덕분에 로큰롤 1세대의 퇴장 이후로도 로큰롤 음악 자체는 한물 간 장르로 남을 벼랑끝 상황을 가까스로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했듯이 락앤롤은 음악만 남고 그 정신 자체는 사라지고, 댄스 음악 등 다른 의미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1959년~1963년은 미국 로큰롤의 암흑기였다.
당시의 상황으로썬 여담에 가까운 얘기긴 하지만 각종 스쿨 로큰롤 밴드에서 맹위를 떨치고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리틀 리처드의 동료가 되길 갈망한다는 글을 써놓은 청년 로버트 짐머맨은 이런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로큰롤 가수에 대한 꿈을 접고 밥 딜런이라는 예명을 달고[16] 통기타를 들고 포크 가수로 전향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의 포크 운동 진영도 로큰롤을 경멸한 시선으로 보긴 마찬가지였는데 기성세대의 사고와는 정반대로 진정성 없는 가벼운 내용에 악기 본연의 소리를 돈 쳐발라서 죽인 상업적 음악이라는 게 주 이유였다. 포크 송의 가사가 주는 울림에 압도당한 밥 딜런은 당시 로큰롤의 가사가 가볍다는 인식에는 공감했지만 음악 자체만큼은 전혀 이야기가 달라[17] 밑에서 설명할 현상이 벌어지고 난 뒤 태도를 바꾸게 되는데...
2.2. 1차 침공: 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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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의 비틀즈 |
많은 사람들이
설리반 쇼가 미국 역사와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던 이유를 이해하지 못 합니다. 미국은
매우 고통스러운 애도의 시간을 겪었습니다. … 엄청난 양의 절망, 비탄, 실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여전히 한 국가로서 슬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습니다. 비틀즈는 미국에 음악 이상의 무언가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가져왔습니다.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 및 미국 대통령 후보 #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 및 미국 대통령 후보 #
반면 당시의 영국은 문화적인 면에선 여러모로 미국보다는 개방적인 나라였다. 이 시기는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런던이 쑥대밭이 되는 등 엄청난 타격을 입고 한때 배급제를 시행해야 했을 정도로 참담했던 2차 세계대전 직후의 폐허를 벗어난 시대로 당시 영국은 마셜 플랜을 통한 물자 지원도 크게 받았지만 나치의 폭격이 본토 전체에 미치지 않아 프랑스, 독일 등 경쟁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업시설이 정상 작동했고 비록 식민지는 다 내주었지만 영연방 경제블록은 유효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자원 확보는 물론 영국의 유럽 내 수출이 매우 활발했다. 그래서 이시기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상승곡선을 그렸고 1960년대까지 호황기를 누릴수 있었다. 그 덕에 영국은 상대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마셜 플랜을 위해 부지런히 물자를 나르던 미국과의 교류를 통해 미국과의 문화적 교류도 용이했다.
정작 로큰롤의 종주국이자 본토였던 미국에선 1950년대 후반~1960년경을 전후해서 로큰롤 열기가 급작스럽게 꺼져 버렸고 이후에도 부활의 기미조차 안 보여서 이젠 생명력을 다해 죽어 버린 장르 취급을 받았으며 로큰롤을 하는 음악인 자체가 없어서 씨가 말라버렸다. 그러나 영국에선 여전히 생명력이 남아있던 로큰롤의 짜릿함을 잊지 못하고 로큰롤을 계속 연주하는 청소년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비틀즈로서 쿼리맨이라는 고교 스쿨밴드로 시작해서 졸업 후엔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리버풀과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클럽 연주 활동을 하며 실력을 다지고 있었다. 이후 비틀즈 외에도 리버풀 출신 밴드들이 여럿 나오며 이런 리버풀 출신 밴드들을 가리켜서 머시 비트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제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 서쳐스, 허먼즈 허미츠, 러빈 스푼풀[18], 프레디 앤 더 드리머스 등이 있다. 그리고 런던에서도 1963~4년경에 더 후, 롤링 스톤즈, 스몰 페이시스 같은 밴드들이 막 활동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영국의 여기 저기서 다양한 밴드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바야흐로 영국식 로큰롤 음악이 태동하게 된 것이었다.
어느 분야에서나 마찬가지로 대중음악계에서도 세계로 뻗어나가려면 먼저 세계 문화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성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까지 클래식 음악과 재즈의 영향력은 어마무시했고 미국의 대중음악 시장은 로큰롤쪽과는 거리가 먼 팝 음악이나 R&B/ 소울 위주였으며 대학가에서도 그때까지만 해도 " 로큰롤은 철없는 10대나 듣는 생각없는 양아치 노래" 취급하며 무시하던 사회참여적인 포크 음악계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이미 생명이 꺼진 지 수년이나 되는 로큰롤 음악이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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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4월 4일, 빌보드 핫 100 차트. 최초의 차트 줄 세우기임과 동시에 빌보드 역사상 최초의[19] 주간 싱글 차트 (핫 100) 1~5위 동시 차지 |
그러나 1964년 캐피톨사에서 발매한 첫 비틀즈 미국 앨범 ' Meet the Beatles'가 그 철없는 10대들의 열광적 호응에 힘입어 미국에서 대히트를 쳤고, ' I Want to Hold Your Hand'를 비롯한 여러 싱글곡들이 역사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너무 많이 봐 질린 올드한 흑인 뮤지션 대신 20대 초반의 서글서글한 잘생긴 외모에 단정한 차림을 한 영국 미청년들이 보여주는[20] 기존의 흑인 음악 원류와는 또다른 진화한 로큰롤 사운드에 대한 미국 청소년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고조되었다. 드디어 비틀즈의 첫 미국 공연이 결정되었고 1964년 2월 7일 비행기를 타고 뉴욕 JFK 공항에 내려 당시 유명한 쇼 프로그램이었던 에드 설리반 쇼(Ed Sullivan Shows)에 출연하였다.
역사적인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비틀즈의 열광적인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비틀즈가 출연한 에드 설리반 쇼는 7,300만명 이상의 미국인이 시청했다고 한다. 이는 1964년 미국 인구인 1억 9천만 명의 40%, 그리고 텔레비전 시청자의 60%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그리고 LP가 주류 매체였던 당시 비틀즈의 음반이 광풍적으로 팔리며 기존 대중음악 시장에 유례없는 대호황이 오면서, 음악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맞이했다.[22]
비틀즈가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1963년 11월에 일어난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한 애도가 나라에서 아직 가시지 않은 때였다. 논평가들은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비틀즈의 설리번 쇼 공연은 암살 이후 잠시 동안 사라졌던 흥분감과 가능성을 재점화시켜 주었으며 # 또 다음 십년대에 올 혁명적인 사회 변화에의 길을 터주는 데 기여하였다고 말한다. 암울했던 미국 사회는 비틀즈의 로큰롤 침공으로 다시 사회적인 활기를 되찾았다. #
그러나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성 기득권의 대대적인 반발을 받았는데 사회적으로 영국 및 미국의 기득권들에게 숱한 질타는 물론이고 정치계는 물론, 종교계에서도 난리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정부 기관이 나섰을 정도였다. 미국 노동부가 문화적 보수주의에 동기를 부여하고 로비를 받은 미국 음악가 연맹과 미국 이민귀화국이 비틀즈의 미국 공연을 금지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갔고 기성 가치관과 관습은 비틀즈로 인해 박살났다. 참고로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로널드 레이건 주지사는 이 시기의 비틀즈를 비판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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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 설리번 쇼에서 I Want to Hold Your Hand를 부를때 비춰진 관객의 모습. 열광하는 여성 뒤에서 굳은 표정을 한 백인 노신사의 모습이 당시 비틀즈를 보는 미국 주류사회의 시각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
인종차별과도 맞닥뜨렸는데 바로 1964년 잭슨빌 게이터볼 공연 에피소드로 이때 비틀즈는 역사상 대중 음악계 최초로 관중석 인종 분리를 부쉈다. 공연장에 인종 분리가 있을 거라고 들은 비틀즈는 공연을 거부하였고 격렬한 대치 끝에 결과를 받아냈다. 당시 존 레논은 이러한 말을 하면서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인종이 분리된 상태로는 절대 공연치 않을 것이며 지금 시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 차라리 출연료를 날리겠어요." 시 공무원은 결국 비틀즈의 손을 들어주고 인종을 분리하지 않고 공연을 진행시켰다. 비틀즈는 잭슨빌의 호텔 조지 워싱턴의 백인 전용실에 대한 예약도 취소하였고 이후 1965년과 1966년의 마지막 공연에서도 비틀즈는 계약서류 조항에 인종차별이 없을 것을 명기하도록 조치하였다. # 대중음악에 새로운 양심을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그렇게 민권법 운동을 지지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미국 전역이 비틀즈의 폭발적인 인기로 초토화되었는데 '오빠 부대'가 항상 그들을 따라다녔다. 그들이 덮고 잤던 담요가 조각으로 나뉘어 팔리기도 했으며[23] 그들이 목욕할 때 사용한 물을 병에 담아 팔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그만큼 그들의 인기는 전대미문의 사회 현상이었다. 이토록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집착하는 여성팬들은 이후 영국, 미국 록 음악을 비롯한 대중음악계[24]에 자리잡은 그루피족 문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루피족은 후에 1960년대 중반부터 크게 부상할 히피 문화와 더불어서 자유로운 성문화를 조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패션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현대 정장의 기준으로 볼 수 있는 ' 모즈 룩'이 비틀즈를 필두로 인해서 크게 대중화되었고 터틀넥 니트도 영화계에는 스티브 맥퀸과 오드리 헵번이 있다면 대중음악계에는 비틀즈가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첼시 부츠도 비틀즈가 착용하면서 크게 유행을 타며 지금까지 유행해오고 있고, #[25]
헤어 스타일의 패러다임도 바꿨다. 그때까지 남자의 헤어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머리를 넘기는 식의 올백부터 크루컷, 리젠트 스타일이 정석이었다. # # 1950년대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나 당대 헐리우드 영화의 남배우들의 스타일을 보면 더욱 잘 알수 있다. 그런데 비틀즈가 몹톱컷[26]과 바가지 머리, 후기 비틀즈 스타일[27]같은 "내림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남성 헤어 스타일의 패러다임까지 바꾸게 된다. 몹톱컷은 당시 기성 세대들에게 걸레 머리라고 조롱을 당하기도 했으나, # 이는 시대에 비해 유난히 길었고, 1960년대에 들어서 태동하고, 급성장하는 청소년 문화의 반항의 상징이 되었다.[28] 비틀즈의 헤어 스타일이 중성성을 상징 하므로 10대 소녀들에게 덜 위협적인 남성 섹슈얼리티를 제시했으며, # 비틀즈의 결과로 전통적인 미국 남성의 크루컷 스타일이나 뒤로 빗은 머리가 긴 머리에 대한 선호성으로 대체되었다. #
특히 비틀즈 #와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는 대중음악계의 대표적인 패션 아이콘으로 1960년대부터 패션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이후에도 패션업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 # 그리고 비틀즈와 그들을 중심으로 성장한 1960년대 반문화의 영향으로 10대-20대 중심의 패션 서브컬처가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캐주얼적인 스타일이 주류가 되면서 일상 패션에서는 수트, 특히 중절모 착용이 쇠퇴하고 미니 스커트의 발명과 대중화, 남녀 모두에게 청바지가 베이스가 된 스타일링이 대중화됐다.
비틀즈를 중심으로 1960년대 반문화(Counterculture)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반문화는 1960년대 역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 문화 이념이다. 60년대는 문화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로, 이때 몇몇 대사건들과 인물들의 등장으로 사회가 전체적인 대격변을 겪었다. 1960년대가 진전됨에 따라 다른 이슈들과 관련하여 광범위한 사회적 긴장감이 발전했고, 개인에 대한 존중, 인간의 성, 여성의 권리, 전통적인 권위 방식에 대항, 같은 사회인으로 평등, 백인이 아닌 사람들의 권리, 인종차별의 종식, 향정신성의약품에 대한 실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다른 해석 등에 따라 흘러갔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많은 주요 운동들은 1960년대 반문화권 내에서 시작되거나 발전되었다. 이 당시 비틀즈는 반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여러가지 사회문화 현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의 반문화 운동은 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으로 시작된 환경주의적 사상이 크게 수면에 오르게 도우면서 환경운동의 근간이 되어 주었다.
미국에서 영국 밴드인 비틀즈의 이런 활약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영국 로큰롤 밴드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이에 따라 다른 여러 영국 밴드들도 뒤이어 미국으로 넘어와서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런 영국 록 밴드들에게 영향과 자극을 받아 미국에서도 다시 로큰롤이 부흥하게 되어 많은 록 뮤지션들이 새로 쏟아져 나왔고 비틀즈, 롤링 스톤스 등의 영국과 미국의 이런 다양한 록 뮤지션들에 의해 저변이 넓어지면서 록 음악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록 음악 열기가 영국과 미국 뿐 아니라 세계로 퍼지면서 전 세계적으로도 록 음악 열풍이 불며, 더욱이 비틀즈 같은 창조적인 개척가들로 인하여 기존 로큰롤에서 하위 장르를 아우르는 상위 장르의 음악 록 음악이 전 세계 대중문화의 중요한 분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 시기 비틀즈를 시작으로 현대의 대중음악 시대가 형성됐다고 보고 있다.
2021년 USA 투데이의 켄 반즈(Ken Barnes)의 분석 기사에 의하면 당대 미국 음악 신의 약 34%가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인해 몰락했으며, 나머지 음악가들은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으나 살아남았고 그 중 24%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꾸준히 인기를 유지했다. 미국 음악계의 약 1/3이 무너진 셈이니 가히 '침략'이라 부를 만 했다.
세계화의 첫 시작점으로도 평가된다. 수십 년 동안 미국은 할리우드 영화, 재즈, 브로드 웨이 와 틴 팬 앨리 음악을 통해 전 세계의 대중 엔터테인먼트 문화를 리드했었다. 그러나 1964년 초 라이프 매거진은 "영국은 미국 식민지를 잃었었지만, 비틀즈가 식민지를 되찾았습니다."고 선언했다. # 미국이 리드하던 엔터테인먼트 문화가 비틀즈에 의해 영국의 색으로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비틀즈는 영국의 미국 침공을 촉발시켰고, 이후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현상이 되었다.[29]
영국에서 시작된 로큰롤의 재탄생이 비틀즈를 계기로 다시 미국에 전파되었고, 많은 인적 자원을 가진 미국을 거치며 더욱 거대한 태풍으로 확대되어,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1960년대에 관한 문화사에서는, 비틀즈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청년에게서 영감을 받은 영국 대중 문화의 헤게모니"를 확립한 "단일 중요한 사건"으로 식별한다.[30] 다른 나라들이 비틀즈의 영향력에 굴복하면서, 밴드는 "영국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실상 재정의"했고, 영국 문화는 밴드 창립 이후 처음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문화"가 되었다.[31] 수출 수익의 급증은 영화 및 기타 상업 예술 분야로 확대되었으며, 런던은 국제 문화의 "흔들리는 도시" 로 인식되었다.
이런 파장은 단순히 음악이나 문화계 내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적인 영향력으로도 뻗어나가기 이른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하여금 촉발되었던 사회적인 열기는 68혁명, 히피, 문화적 자유주의라는 세상을 뒤흔들게 되는 근간이 되어주기도 했으며 영국을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문화의 메카로 발전시키는[32] 효자 브랜드로서 역할도 맡아주기도 하여 소프트 파워의 위력을 새삼 알리는 계기로 자리잡기도 했다. 당시 영국은 96%~97%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세율을 비틀즈에게 부과했는데 그럼에도 폴 매카트니의 재산은 1조 5천억 + 알파라고 알려졌으니 그 거의 전부를 떼어가고 멤버끼리 분배하고도 저 정도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세수를 확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33]
특히 비틀즈는 전 세계로 뻗친 영향력이 엄청나서 소련 같은 공산권도 절대 예외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소련을 뒤집어 놨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진 냉전 시기 소련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의 ‘ 철의 장막’에 침투한 비틀즈코드(비틀즈의 음악·패션 등)는 이념 대립과는 별개의 문제로 공산권 국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1960년대를 지배하던 비틀즈는 생활과 밀접한 이야기나 개인의 감정을 음악이나 옷차림으로 자유롭게 표현했고 그 키워드이자 ‘ 비틀즈코드’는 ‘자유분방함’으로 이 신드롬은 철의 장막 속의 소련 같은 공산권 국가에도 침투했다. 하지만 공산권 국가에서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개인의 개성이나 자유 등의 민주적이고 자유주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았고 소련 정부 측에서는 체제선전용 연극과 노래 공연 등을 이용해 ‘건전한 체제·문화를 이룩하자’는 구호 아래 선전활동에 힘을 쏟았다. 암시장에서 당시 노동자의 월급 이상의 액수에 비틀즈 앨범이 비밀리에 활발히 거래되었는데 그 풍경은 가히 007 작전을 연상케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엑스레이 사진을 병원에서 저렴하게 사거나 폐기된 엑스레이 사진에 음악을 입히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이렇게 만든 앨범은 '뼈에 와 닿는 음악(on the bones)'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이 방법은 1950년대부터 이용되던 방법이었지만 비틀즈의 광팬들로 인해 대중화되었다.
비틀즈 문화를 막기 위해 정부가 민병대를 조직하여 단속했고 음반을 가지고 다니다 적발되면 바로 대학교에서 제적당하는 등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자유를 맛본 젊은이들은 녹음기를 이용해 서로 다른 음반을 사서 따로 녹음해 나눠 갖거나 '해적판'을 이용해 꾸준히 음반을 접했다. 결국 소련도 경제적 실리도 취할 겸 젊은이들의 열망에 항복했고 이후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1990~)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어떤 종교보다, 베트남 전쟁이나 어느 전쟁이나 핵폭탄보다 냉전 확산의 가장 중요한 단일 원인은 비틀즈였다."라는 말을 남기며 # “비틀즈로 소통했고, 개혁했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 통일부 프라하의 봄 당시 시민들이 Hey Jude를 시위대의 상징 곡으로 사용했고 레논 벽은 민주화의 상징이 됐다. 비틀즈는 공산권에서 " 자유주의 문화"의 위대한 사례로 알려져 공산권의 반서구적이고 폐쇄적인 체제를 무너트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비틀즈가 공산주의를 죽였다."는 말과 미국 대통령이 못 한 일을 영국 밴드가 해냈다는 식의 말이 나올 정도였다.
브리티시 인베이션은 1960년대 미국 중서부, 서북부 등 서부개발이 진행되던 당시의 서부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각 동네의 괴짜 청년들은 "연주력이 되든 안 되든" 무조건 밴드부터 일단 만들고 음질이고 뭐고 부족한 부분은 열정으로 커버하는 기행을 일삼았다. 이것이 바로 개러지 록[34]의 탄생이 되었다. 이때가 1964~5년경으로서 바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시기다. 당시의 주요 밴드는 비틀즈, 롤링 스톤스, 애니멀스, 킹크스[35], 그리고 조금 뒤로 크림, 더 후, 야드버즈였다.
당시의 영국에선 단지 로큰롤뿐 아니라 그 밑바탕이 되거나 관련성이 있는 미국의 루츠(roots) 음악들에 대해 오히려 그 음악의 종주국인 미국에서보다 더 애정을 가질 정도로 열려 있는 분위기가 강했다. 로큰롤의 뿌리가 되었지만 미국에선 전국적인 인기는 누리지 못했던 옛 블루스 음악들이나 당시의 미국 젊은이들이 촌스럽다고 느끼며 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컨트리 앤 웨스턴, 블루그래스 계열의 음악들에까지 영국 뮤지션과 음악팬들은 애정과 존경심을 보이며 흡수하고 소화해 갔다. 한마디로 미국 본토에서 무시당하던 흑인음악이 영국 젊은이들에게는 풍성하고 쏘울풀한 끝내주는 음악으로 인식되었고 수많은 미국 흑인음악 카피 밴드가 생겨났다. 예를 들어 롤링 스톤스. 그리고 더 나아가 미국 내에서도 블루스의 대가이자 위대한 기타리스트 중 하나로 존경받는 에릭 클랩튼이라는 거장을 낳는 토대가 되었다.
이런 당시 영국 음악팬들의 개방적인 풍토는 영화 캐딜락 레코드 후반부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미국의 흑인 블루스 기타리스트 머디 워터스는 미국에서 인종차별으로 인한 생활고 때문에 음악을 포기하기 직전이었는데 동료로부터 영국에서 공연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하지만 머디는 돈이 없어서 영국으로 갈 수 없다고 했는데 "그런 건 그쪽에서 다 지불한다, 넌 몸과 기타만 오면 된다."고 한 것. 그리고 영국에 가보니 많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인터뷰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심지어 다 백인 기자들이었다. 영국에서 이렇게 흑인 뮤지션들에 대한 대접이 좋았기 때문에 상당수의 유명 흑인 기타리스트들이 영국으로 넘어가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미국에선 대접도 못 받으며 무명의 세션맨 시절을 지냈던 지미 헨드릭스도 이런 흐름을 타고 영국행 비행기를 탔으며 영국에서 보여준 테크닉과 필링으로 영국 뮤지션들이 완전히 뻑가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렇게 영국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후 미국으로 금의환향했다. 지미 헨드릭스는 첫 영국 무대에서 관객석에 가득차서 환호하는 백인 관중을 목도하고 어이가 없어서 잠시 멍해졌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렇다고 미국 음악이 마냥 빌빌거리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밥 딜런은 비틀즈와의 조우 이후 서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36] 일렉기타를 다시 잡아 포크 록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키며 록 역사의 당당한 주역이 되었고 밥 딜런의 지원을 받은 버즈 또한 빌보드는 물론 영국 차트까지도 정복할 정도로 상당한 위상을 보이긴 했다. 비틀즈와 선의의 경쟁을 펼치던 비치 보이즈의 음악적인 성장 또한 고무적인 요소. 슈프림즈, 포 탑스, 템테이션스를 위시한 모타운 소속의 뮤지션들과 필 스펙터 사단의 로네츠, 크리스탈스 같은 걸그룹 역시 크게 인기를 끌며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한편으로는 벨벳 언더그라운드,[37] 프랭크 자파 등의 전위 음악가는 지하에서 후대 록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실험을 시도하고 있었으며[38] 미국 서부에서는 도어즈, 그레이트풀 데드, 재니스 조플린, 제퍼슨 에어플레인 등이 주도해 거대한 샌프란시스코 사이키델릭 록 신이 형성되었으나 이 또한 당대 영국 음악의 위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당시 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의 전성기를 담은 1968년의 '롤링 스톤스 로큰롤 서커스'의 영상. 주최자인 롤링 스톤스를 비롯해 더 후, 더티 맥[39], 마리안느 페이스풀과 제스로 툴이 공연했다. 존 레논의 부인 오노 요코와 롤링 스톤스의 전 리더 브라이언 존스도 나온다. 참고로 이 공연이 브라이언 존스가 참여한 마지막 롤링 스톤스 라이브였다고 한다.
2.2.1. 197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졌는가?
일부 사이트에서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1970년도에도 이어졌다며, 이를 가리켜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이전의 롤링 스톤스는 각종 명반 행렬로 최고의 전성기를 여전히 누리고 있었고, 비록 해체했지만 비틀즈의 멤버들 또한 각자도생하며 제각기 여전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특히 존 레논이 Imagine 등을 필두로 반전 운동을 벌이며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점은 괄목할만한 행적. 폴 매카트니 역시 자신이 주축이 된 밴드 윙스를 만들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외에도 조지 해리슨과 링고 스타 역시 각자의 솔로 곡을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리면서 비틀즈는 모든 멤버가 솔로곡으로도 빌보드 1위를 기록하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밴드를 나열하자면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블랙 사바스 등의 하드 록[40] 밴드와 핑크 플로이드, 예스 등의 일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41] 등의 밴드들이었다.
70년대 중요한 음악의 동향 중 하나인 파워 팝의 도래도 영국에서 발생한 장르. 특히 주요 밴드로 거론되는 빅 스타는 비틀즈를 추종하던 미국 밴드였는데, 1차 침공 당시 미국에 뿌려놓은 영국 음악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42] 미국에 각종 유산을 남겨 온 글램 록 또한 영국의 작품이었으며 퀸, 데이비드 보위, 엘튼 존 등 참신함을 보여준 스타들은 미국을 나름 성공했으며 빌보드서의 성과도 탁월했다. 그리고 미국인도 섞여 있는 밴드라 완전한 영국 밴드라기엔 애매하지만 영국에서 결성된 플리트우드 맥 또한 상업적으로 월등한 성공을 거둔 바 있었다.
2.2.1.1. 1970년대 초반은 ‘침공’이 아니다.
결론부터 서술하자면, 전 세계에서 1970년대 초중반 영국 음악가들의 성공을 가리켜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주장하는 매체는 극소수밖에 없다.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Second British Invasion)’이라는 용어는 후술하겠지만 1970년대가 아닌 1980년대 초, 특히 1983년의 영국 뉴웨이브 붐을 의미한다.[43]1960년대는 상술했듯이 영국 음악가들이 넘쳐나 미국 음악계의 1/3이 전멸했던 시기였기에 가히 침공이라고 부를 만했다. 당시 미국 아티스트들은 영국 아티스트들에게 밀려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저조했으나[44], 1970년대 초반 당시 미국 음악계는 자립에 성공한 상태였다. 1970년 비틀즈가 해체하고 히피 문화가 죽으면서 사이키델릭 록의 자리를 소프트 록과 하드 록이 양분했는데, 소프트 록은 철저한 미국 음악이었고 하드 록은 상술했듯 레드 제플린 정도를 제외하면 미국 밴드들이 미국의 지분을 접수했다. 이 외에도 수요가 있던 컨트리 록, 아메리칸 포크 록 등의 미국만의 조류도 존재했다. 여기에 미국 흑인들의 음악인 소울, 펑크(Funk)는 70년대 초중반 록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70년대 중후반의 디스코는 약 5년 동안 록 음악을 침체기에 빠지게 했고 유명 록 밴드들마저 한 번쯤은 차용해볼 정도로 상당한 위세를 떨친 바 있었다.
물론 레드 제플린, 롤링 스톤스, 핑크 플로이드 같은 많은 영국 밴드들이 여전히 미국 대중들에게 다른 미국 밴드들을 위협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철저히 미국 대중들의 입맛에 맞춘 음악이고 활동 자체를 미국에서 주로 하였기에 이것을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지속적인 상황으로 보는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블루스와 컨트리 등의 미국 본토 음악을 영국 밴드들이 미국 밴드들 못지않게 잘 해석했다고 보는게 맞다.[45]. 좀 더 쉽게 말하면, 이 밴드들의 국적이 영국인일 뿐이고 영국 음악 자체가 록 음악의 헤게모니를 잡았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보기는 힘들다. 또한 1970년대의 미국 음악계에서는 영국 밴드들 뿐만 아니라 이글스같은 컨트리 록 밴드들이나 레너드 스키너드, 올맨 브라더스 밴드 등의 서던 록 밴드들, 그리고 에어로스미스, 보스턴, KISS, 밴 헤일런, 포리너 등의 아메리칸 하드 록 밴드들도 위의 네 밴드 만큼의 큰 인기를 누렸다.
물론 프로그레시브 록 등 압도적으로 영국이 우위인 장르가 있긴 하였지만 애초에 프로그레시브 록 자체가 마이너한 장르였다. 핑크 플로이드를 제외한 다른 밴드들은 인기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록 음악에 거대한 틀을 세운 섹스 피스톨즈와 더 클래시, 버즈콕스 등의 펑크 록에다 와이어, 갱 오브 포, 조이 디비전 등 먼 후대에 미국까지 수많은 씨앗을 뿌려 놓은 포스트 펑크 밴드들도 70년대 영국 작품이긴 하지만,[46] 어디까지나 후대의 영향력이었지 이들의 당시 상업적 존재감은 본토 영국에서마저 미미한 수준이었다.
또 소위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 당시 음악가로 분류되는 음악가들 역시 이러한 견해를 반박하는 데 사용된다. 가령 레드 제플린은 브리티시 인베이전 당시 활동했던 야드버즈의 직접적인 후신으로서 당시와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더러[47], 모국인 영국보다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48] 롤링 스톤스 또한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주도했던 음악가이며, 70년대의 선풍적인 인기는 1960년대의 침공을 기반으로 쌓아올린 것이었다. 또한 플리트우드 맥은 시작은 영국 밴드였으나, 1970년대에 미국인들도 합류를 하면서 순수한 영국 밴드가 아닌 다국적 밴드가 되었다.[49]
그리고 데이비드 보위의 미국내 성공은 글램 록 전문에서 벗어나 소울 음악을 도입한 이후 부터였다. 이전까지는 어디까지나 글램 록 뮤지션들 중에선 잘나가는 정도에 불과했으며, 티렉스 등 대다수의 글램 록 뮤지션은 미국 진출에 실패했다.[50] 조브리아스나 뉴욕 돌즈, 루 리드 등 미국에서 등장한 글램 록 뮤지션들도 빌보드에선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야 했고 오히려 KISS, 앨리스 쿠퍼 등 글램 록 요소를 받아들이되 자신들의 입맛대로 변형한 미국 밴드들이 원본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고 이후 글램 메탈이란 조류가 등장하고서야 글램은 미국 시장에 안착하게 된다. 당시 글램 록이 미국에 먹히지 않은 이유로는 글램 록 특유의 양성적인 외견이 보수적이었던 미국 대중의 성향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이런 미국의 보수적인 면모는 10년이 지나도 여전해서 퀸이 I Want to Break Free로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이런 고로 대다수의 영미권 음악 평론지에서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늦게 잡아도 1969~70년을 끝으로 종료되었다고 보며, 상술했다시피 70년대에도 인베이전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매체는 극소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론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 한다면 60년대의 현상만을 칭하므로 이에 유의할 것.
2.3. 2차 침공: 1980년대
2차 침공은 이른바 ‘ 뉴 로맨틱(New Romantic) 붐이라고 한다. 70년대 말엽 도래한 신디사이저 기반의 신스 팝 밴드들의 도래, 그리고 영국을 넘은 미국서의 80년대 초반 상업적 성공을 일컫는 뉴 웨이브의 하위 무브먼트 명칭이다. 영국에서 등장한 록 사운드도 무시할 만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미국에서 성공한 밴드가 심히 제한적인데 비해 이 무브먼트는 미국에서 성공한 사례들이 광범위하게 등장해 영어권 평단에서는 이러한 뉴 로맨틱 붐을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영어 위키백과 문서
영국 런던과 버밍엄의 나이트 클럽을 중심으로 성행하던 음악 스타일로서 기존 프로그레시브 록과 글램 록, 크라우트 록 등 실험적인 장르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데이비드 보위, 브라이언 페리의 록시 뮤직, 크라프트베르크 등이 일궈놓은 글램 록과 일렉트로닉 뮤직 사운드를 보다 대중 친화적 수려한 멜로디로 개조시킨 점이 특징이다. 이 무브먼트의 첨병으로는 게리 뉴먼을 들 수 있겠고 70년대 말엽 영국에서 먼저 차트인을 달성하는 상업적 가능성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80년대 초반 MTV를 활용한 물량 공세를 펼치며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 이르렀는데 이들 중 대다수가 빌보드 최상위권을 점령하고 마는 승전보로 하여금 뉴 로맨틱 붐은 대중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듀란 듀란, 컬쳐 클럽, 휴먼 리그,[51] 스팬다우 발레, 재팬, 데드 오어 얼라이브, 유리드믹스, 빌리 아이돌,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52] 등을 대표 뮤지션으로 들 수 있겠고 특히 1983년의 발매 음원 중 1/3 가량은 영국발 음원들로 집계될 지경으로 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결코 꿇리는 성과는 아니었다.
신명나는 음악만이 아니어도 이들이 보여준 중성적이면서도 다채로운 비주얼과 패션도 이 문화의 유산이었다. 이 팬덤들은 뉴 로맨틱의 산실 중 하나였던 클럽 ' 블리츠'로 자주 몰려들어 '블리츠 키즈'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데이비드 보위와 록시 뮤직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글램 록의 파격적이고 전위적 패션 감각을 흉내내는 젊은이들은 패션 업계를 진일보시키는 첨병을 자처하곤 했다. 펑크 패션, 해적, 고딕, 밀리터리, 할리우드 등등 이색적 요소들에서 따온 비주얼들은 패션 업계에 다양성을 더했으며 파워숄더, 배기 팬츠 등의 융성도 이때 나온 것. 이렇게 눈과 귀를 매료시킨 이 무브먼트는 미국에서도 80년대의 필수적 상징으로 회자되곤 한다.
2.4. 번외편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하면 상술했듯이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등을 필두로 한 1960년대의 침공 사건을 의미하지만, 폭풍 간지가 흐르는 이 명칭을 갖다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후에도 이 명칭을 종종 사용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 등 일부 영국 아티스트들의 미국 시장에서의 성공을 갖다가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칭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1960년대의 ‘침공(Invasion)’과 달리 1970년대에 대성공한 신예 밴드는 정말 저 두 밴드가 끝이었기에, ‘침공’이라는 단어를 쓸 수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여담으로 당시 미국 백인 보수층은 당시에도 소울, 펑크(Funk) 등의 흑인 음악을 저속하다고 여기지만 몰래 흑인 클럽을 찾아 술과 음악을 즐기는 이중성이 공존했다. 한마디로 백인이면서 대놓고 흑인 음악 팬이라고 말하기 힘든 시기였던 것. 이것 때문에 표면적이라도 미국 흑인 음악을 기반으로 한 영국 로큰롤 밴드들의 유입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롤링 스톤스는 첫 미국 방문시 거구의 미국 경찰들에게 대놓고 외모 조롱을[53]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레드 제플린 또한 롤링 스톤스와 마찬가지로 장발로 인해 살해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54]
2.4.1. 1980~90년대
영국 음악의 전성기는 지속되갔지만, 그래도 이미 1970년대부터 브루스 스프링스틴부터 이글스 등 하트랜드 록, 컨트리 록의 거물들부터, 영국의 밴드들이 꽉 잡고 있던 하드 록에서도 에어로스미스, 보스턴 등 미국의 신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었고, 1970년대 후반기에 부흥했던 펑크 록에서 파생한, 다음 시대의 기둥이 될 뉴웨이브가 탄생하는데, 이 뉴웨이브에서도 미국의 블론디, 토킹 헤즈 같은 거물들이 등장하고, 큰 물결을 일으킨다.그리고 미국 내 헤비 메탈 밴드들이 떠오르면서 하드록/메탈 음악의 주도권을 미국 쪽이 탈환하게 된다. 사실 이미 영국에서 70년대 후반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라는 메탈 무브먼트가 먼저 시작되어 도화선의 역할을 했으니 이 도화선도 영국이라고 칭할 수는 있겠지만, 미국의 밴 헤일런이 크게 기여한 바가 있다. 게다가 MTV의 등장, 대중음악 최초의 흑인 슈퍼스타 마이클 잭슨의 등장과 마돈나, 신디 로퍼 등 미국 팝 뮤지션들의 이어진 성공가도와 머틀리 크루, 본 조비 등을 필두로 미국의 글램 메탈(팝 메탈)의 독자적인 조류가 주류가 되어 버리면서 영국의 록 밴드들은 자연스레 밀려나게 된것이다.
사실 80년대의 주요 밴드들을 꼽아보면 영국 밴드의 비중이 확실히 줄어든다. 당시 반열을 나열하자면 메탈리카, 메가데스, 콰이어트 라이엇, 스키드로우, 밴 헤일런, 본 조비, 건스 앤 로지스 등등... 앞서 말한 NWOBHM의 대표주자인 아이언 메이든, 주다스 프리스트, 모터헤드도 유명했지만 미국의 철옹성을 넘을 정도는 아니었다. 색슨처럼 미국에서 아예 인기를 얻지 못한 엔워븜 밴드들도 많았다. 다만 80년대 중반 데프 레파드는 3집과 4집이 록밴드 역사상 최초로 무려 1천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당대 미국의 본 조비와 라이벌로 등극했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또한 하드 록계열과 헤비 메탈이 아닌 신스 팝을 필두로 한 영국 밴드들은 제 2의 브리티시 인베이젼이라 불릴만한 성과를 빌보드 핫 100과 앨범차트에서 나타냈으니 그 주인공은 더 폴리스를 필두로 듀란 듀란, 컬쳐 클럽, Wham!, 티어스 포 피어스, 제네시스[55], 펫 샵 보이스, 유리스믹스 등의 거물 밴드들은 물론 셀수 없이 많은 영국 신스팝 밴드들이 80년대 중후반까지 차트를 휩쓸게 된다.
물론 정통 락 밴드만 이야기하자면 이 시기의 영국에서도 더 스미스, 큐어, 스톤 로지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56],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 같이 모던 록 계열에서 족적을 남긴 밴드들이 활약했지만 미국에선 그다지 인기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사실 이들 중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은 영국에서도 상업적 성공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성공했다는 스미스 같은 밴드도 후술된 데프 레파드같은 글램 메탈 밴드와 비교하면 최소 수십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애초에 이들은 어디까지나 인디 밴드였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미국에서도 소닉 유스나 픽시즈, R.E.M., 리플레이스먼츠 등 모던록 내지 얼터너티브 록 부문에서 활약상을 보인 밴드는 얼마든지 있었으나, 이들 역시 주류까지 올라서진 못했다.
그나마 영국에서 소수의 글램 메탈(팝 메탈)이나 블루스 밴드 정도가 미국에서 그럭저럭 성과를 거두고 있었는데, 선술한 데프 레파드만이 미국 시장 내에서 미국 밴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특히 Hysteria 앨범은 건즈 앤 로지스나 본 조비가 위세를 떨치던 시대에도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는 등[57] 위세를 떨쳤다. 이 이외에 1985년을 지배한 다이어 스트레이츠가 있다. 스팅과 함께 작업한 Money for Nothing이 빌보드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서 수록된 앨범인 Brothers in Arms가 대박을 쳤다. 노래와 뮤직비디오가 MTV를 비판하는 내용인데도 너무 잘 팔렸기 때문에 MTV가 이 노래의 뮤비를 계속 방영하기도 했다. 그 외에 스팅의 폴리스도 미국에서 빌보드와 평단 모두를 매료시키는 활약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1985년 라이브 에이드에서 위 기라성 영국 밴드들이 대활약을 펼치자 영국 음악도 상당히 회자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80년대 후반 들어서는 블루 아이드 소울 계열들이 미국에서 나름의 큰 수확을 거두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조지 마이클을 들 수 있겠고 릭 애스틀리, 스티브 윈우드 등 후속 계보들도 미국 시장에서 큰 존재감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에 위 뉴 로맨틱 열풍을 기반으로 영국에서도 수많은 신스 팝 밴드들이 미국에서 활약을 이어가기도 했는데 스팅의 폴리스와 필 콜린스, 디페시 모드는 상업과 평단을 모두 매료시키는 활약상을 보이기도 했다.
90년대가 되었지만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얼터너티브 록의 초반기 주도권도 미국 쪽이 장악했다. 너바나와 펄 잼으로 대표되는 시애틀 그런지나 스매싱 펌킨즈와 같은 밴드들의 위력에 영국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국 록음악계가 커트 코베인의 자살로 인한 그런지의 쇠퇴, 뉴메탈의 부흥으로 어지럽던 90년대 중후반에 영국의 모던록 밴드들이 이 틈새를 파고들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때의 주요 밴드론 오아시스, 블러[58], 라디오헤드 등으로 특히 브릿팝 계열의 밴드가 많았다. 그러나 상업적인 성적은 선배들이 이뤄놓은 것에 비하면 미미했다. 오히려 영국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미국 적인 얼터너티브 음악으로 승부를 보았던 부시와 브릿팝의 대표격인 오아시스, 전세계 락 음악의 향락적 분위기를 바꾼 라디오헤드 정도가 미국시장에서 히트를 쳤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 특히 라디오헤드는 4집 Kid A가 난해하다는 평가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빌보드 200 1위를 찍고 500만 장을 파는 등의 성공을 거두었다.
추가하자면 95년, 영국의 최정상급 보이밴드였던 테이크 댓의 곡 Back for Good이 빌보드 핫 100 7위까지 오르자 테이크 댓은 본격적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하려 했지만 로비 윌리엄스의 탈퇴로 인해 그룹이 해체가 되면서 실패했다.
2.4.2. 2000년대 이후
2000년대에는 콜드플레이의 활약이 눈부셨다. 3집 X&Y가 2005년 최다 음반 판매량, 4집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가 2008년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며 전 세계를 지배했다.에이미 와인하우스, 아델, 샘 스미스를 위시한 영국 가수의 복고풍 소울, R&B 장르 음악이 돌풍을 일으켰다. 이른바 소울 인베이전.
혹자는 영국에서 짧고 굵었던 장르였던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씬도 인베이전의 후보로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리버틴즈는 철저하게 내수용 밴드였고 프란츠 퍼디난드는 미국 성적이 크게 시원치 않은데다가, 악틱 몽키즈는 그나마 빌보드 상위권에 들 정도로 히트를 치긴 했어도 해당 장르로 인기를 끌었다고는 보기는 힘드므로[59] 의미있는 성과라 보긴 힘들다. 사실 이 장르도 스트록스라는 미국 밴드에 의해 촉발된 장르였고 화이트 스트라입스, 킬러스 등 상업적으로나 평론적으로나 의미있는 성과물도 미국에서 나왔기 때문에 마냥 브리티시 장르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그리고 해당 시기에는 영국 록 밴드들의 미국내 약세가 본격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위 언급했던 악틱 몽키즈를 제외한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밴드 대다수를 비롯해 트래비스 등 포스트 브릿팝 계열 밴드와 뮤즈, 플라시보, 스타세일러, Nothing But Thieves 등의 알려진 걸출한 밴드들도 영국에서 등장하긴 했지만, 유명세와는 대비되도록 미국내의 객관적인 상업적 성적은 상당히 저조했다. 이러는 와중에 블러의 자매 그룹인 고릴라즈 정도가 Demon Days로 빌보드 9위를 달성하는 정도로 체면은 살리기는 했다.
2010년대 초반 들어서는 클럽 문화가 유행하고 EDM/ 댄스 팝이 대세가 되면서 전반적으로 영국 음악의 영향력이 상당히 낮아졌으나 원디렉션이란 보이밴드의 새로운 계보 등장과 함께 아델, 에드 시런, 앤 마리 세 가수가 세계 음악시장을 휩쓸고 다니면서 영국 대중음악의 건재함을 알렸다.
3. 유사한 사례
- 1980년 말엽쯤에 그랜트 모리슨, 앨런 무어, 닐 게이먼, 가스 이니스 등의 영국계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 코믹스계에 엄청난 인기와 반향을 불러일으킨 현상을 코믹스계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칭하기도 한다.
-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큰 족적을 남긴 나라가 몇개 더 있는데 그 중 제일 두드러지는 것이 영미권 국가가 아닌 스웨디시 팝, 블랙메탈으로 유명한 스웨덴이다. Swedish Music Miracle(스웨덴 음악의 기적)이란 단어가 있을 정도이고 음악은 스웨덴의 대표적 수출품으로 미국, 영국 다음으로 음악 수출이 많다. 스웨덴 음악의 대표 뮤지션으로는 Ace of Base[60], ABBA, Alesso, Avicii, Bathory, Brainbombs, Dungen, Eric Prydz, Europe, Jessica Folcker, Joakim Karud, Refused, Roxette[61] 카디건스, Wannadies, 다크 트랭퀼리티, 더 리얼 그룹, 라쎄 린드, 앳 더 게이츠, 사바톤, 소일워크, 스웨디시 하우스 마피아, 인 플레임스, 잉베이 말름스틴, 켄트, 토브 로, 피터 비외른 앤드 존 그리고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프로듀서 맥스 마틴 등이 있다.
- 같은 영어권 국가이자 영연방 국가인 호주 역시 미국 시장을 점령한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AC/DC, 비 지스, Men at Work, Little River Band, 바르도, Savage Garden, 시아 플러, 에어 서플라이, 올드맨 리버, 제이슨 도노반, 카일리 미노그, 테임 임팔라, 트로이 시반 등이 미국과 전세계에 족적을 남겼다.[62] 그 외에 영국과 이웃나라인 아일랜드에서도 U2, 엔야, 로리 갤러거 같은 거물들을 배출한 바 있었고 독일의 스콜피온스, 크라프트베르크가 나름의 주목을 받는 등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다른 서방 국가들에서도 큰 자극제가 되었다.
- 미국은 아니지만 어느 나라의 음악이 다른 나라의 대중음악계에 침공이라고 부를 만한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례로 대한민국의 K-POP이 동아시아/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를 휩쓸었던 것, 이탈리아의 이탈로 디스코, 유로비트 계열이 일본을 휩쓸었던 것과 홍콩의 칸토팝(Canto Pop)이 중화권과 동남아의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 있다.
- 또 음악계는 아니지만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인하여 한국에서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영향력이 강해진 것도 이와 비슷하다. 심한 탄압으로 쇠퇴한 미국 로큰롤계에 로큰롤 팬들의 니즈를 비틀즈가 채워 줬듯이 만화 검열제와 합동출판사로 인해 '무장해제'된 한국 만화계에 사실상 '무혈입성'한 것이기 때문. 이후 웹툰이 대한민국에서 대세가 될 때까지 상당 기간 지속된 바 있다.
-
2017년 미국 언론에서
BTS의 성공을 두고 Korean Invasion, K-POP Invasion의 용어들을 쓰며
비틀즈와
비교하기도
했다.
둘 다 보이밴드고[63] 팬덤 역시도 유사한 외국의 가수들에다가 비록 장르는 달라도 미국에서 대가 끊긴 부분을 공략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정작 뉴 키즈 온 더 블록과 같은 아이돌의 원조인 미국은 정작 2000년대 초반의 백스트리트 보이즈와 N Sync 이후 BTS 포지션의 그룹이 거의 없고 그나마 있는 그룹조차 대중적 영향력이 거의 없다.[64] 비틀즈와는 규모 면에서 아직까지는 큰 차이는 많지만 최초로 미국 공항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팬들이 모였으며 팬들의 충성도와 적극성이 매우 높은 등 비슷한 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비틀즈는 이전의 가수들과는 다르게 매스미디어를 활용하여 파급력을 높였으며 BTS는 유튜브와 SNS 같은 인터넷 뉴미디어를 통해 인기를 얻는 점으로 새로운 마케팅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비틀즈로 하여금 롤링 스톤즈, 더 후 등의 후배들도 미국 시장에 연착륙했듯 BTS의 도래 후 (아직 성과는 미미하지만) BLACKPINK, NCT, 몬스타엑스, NewJeans 등 케이팝 후발 주자들도 빌보드에 입성하는 등 가시적인 성취를 보여주기도 했다. 심지어 비틀즈의 고향인 영국의 BBC에서 21세기의 비틀즈라고 불러 준 데다 당사자인 폴 매카트니도 그들이 비틀즈의 행보와 비슷하다고 시인하던 바 있었다.
그러나 브리티시 인베이전과 KPOP 뮤지션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기엔 케이팝과 영국 밴드들이 추구했던 음악의 장르와 방향성[65]도 다르고 상술했던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사회적 파급력을 따라잡기엔 아직까진 부족한 감이 많다. 그리고 BTS의 상업적 성공 또한 무시할만한 점은 아니지만 빌보드 1위부터 5위까지를 싹쓸이하면서 빌보드에 단골로 곡을 올리던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에 비견해 케이팝 밴드들이 특별히 더 높거나 비슷한 음악적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2021년 기준으로 케이팝이 미국에서 성공을 거둔 역사도 짧을 뿐더러 상업적인 성공 및 평론적인 면도 시간이 흘러야 좀 더 온당히 평가되겠지만 아직은 크게 평가하기엔 이른 감이 있는 시점이다. 이런 BTS의 미국 내 활약은 비틀즈의 초창기
Meet the Beatles! 등 아이돌로서의 활동 한정으로 비교되는 것이 전반적인 반응들이다.
- 홍콩 영화가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 것도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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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단의 영상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시초인
비틀즈의 첫 방미 당시의 실황.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도화선을 상징하는 순간이다.
[2]
뒤에
팬암의 로고가 보인다
[3]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4]
사촌 동생의 딸이었다.
[5]
제리 리 루이스의 3번째 결혼이었고 전 부인과의 결혼 관계가 법적으로 정리되지도 않은 상황이라서
중혼이었다. 그래서 문제의 사촌은 제리 리 루이스를
근친상간 및
중혼 혐의로 고소하려다가 딸이 불행해진다는 이유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 부부는 약 10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하다가 이혼했다. 사실 가장 큰 문제의 근원인 것은 이 결혼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당시 미국의 가족법인 것 같다.
[6]
물론 나중에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록음악의 인기가 다시 폭발하자 그 정신 나간 말을 번복하고 간간히 로큰롤 공연을 하면서 지냈다.
[7]
당시 그가 있던 주의 법률에는 미성년자와 허락없이 주 경계를 넘으면 추행죄에 버금가는 취급을 받았다. 이게 아니라도 척 베리는 이 백인 소녀를 데리고 순회 공연을 했는데 미성년자를 데리고 주 경계를 넘어 다니면서 공연을 하는 것은 연방법 위반이었다. 척 베리는 이 소녀가 자신의 나이를 속였다고(당연히 재판이 인종차별이라는 것도) 주장했으나 씨알도 안 먹혔다.
[8]
가수로 데뷔하기 전에 군 복무 중(
6.25 전쟁 중에
주한미군에서 복무한 적은 있지만 전장에 나간 적은 없다.)
오토바이를 몰다 다쳐 전역했는데 이 사고로 다쳤던 다리를 또 다치게 되어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결국 진통제로 고통을 극복하다가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9]
디온은 버디 홀리, 빅 바퍼, 리치 발렌스와 함께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다녔는데 다른 3명은 1959년 2월 3일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지만, 디온은 비행기 좌석값이 없어 좌석표를 리치 발렌스에게 양보해 목숨을 건졌다.
[10]
로이드 프라이스는 1959년
Stagger Lee (빌보드 핫 100 4주 연속 1위),
Personality (빌보드 핫 100 2위,
1959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 3위),
I'm Gonna Get Married (빌보드 핫 100 3위) 등의 대히트곡을 발매했고,
브룩 벤턴은 1959년 "
It's Just a Matter of Time" (빌보드 핫 100 3위), "Endlessly" (빌보드 핫 100 12위), "
So Many Ways" (빌보드 핫 100 6위), 1960년 "
Baby (You've Got What It Takes)" (빌보드 핫 100 5위), "
A Rockin' Good Way (To Mess Around and Fall in Love)" (빌보드 핫 100 7위), "
Kiddio" (빌보드 핫 100 7위), 1961년 "
Think Twice" (빌보드 핫 100 11위), "
The Boll Weevil Song" (빌보드 핫 100 2위), 1962년 "Lie to Me" (빌보드 핫 100 13위), 1963년 "Hotel Happiness" (빌보드 핫 100 3위) 등의 곡이 크게 히트했다.
[11]
1961년 미국 흑인 R&B 걸그룹 The Shirelles의 대성공으로 1964년까지 수많은 걸그룹이 미국 음악계를 차지했다.
슈프림즈는 이 걸그룹 열풍 때 결성되었지만 인기는 걸그룹 열풍 끝물이었던 1964년에 시작되었다. 슈프림즈의 히트로 기존의 걸그룹 열풍이 끝나고 모타운의 실질적인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12]
1960년 바렛 스트롱의
Money (That's What I Want), 1961년
스모키 로빈슨과 미라클스의 "
Shop Around", 1962년
메리 웰스의 대히트, 1963년 당시 13살이었던
스티비 원더의
Fingertips,
마빈 게이가
Pride and Joy로 첫 빌보드 탑 10 기록, 마샤 리브스 앤 더 벤델라스의 빌보드 핫 100 4위곡
Love is Like a (Heat Wave) 등등.
슈프림즈,
템테이션스,
더 포 탑스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된 이듬해인 1964년도에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3]
1959년
What'd I Say(빌보드 핫 100 6위와 동시에 흑인들에게만 인기 있었던
레이 찰스를 전미에 알린 곡), 1960년
Georgia on My Mind (빌보드 핫 100 1주간 1위), 1961년
Hit the Road Jack (빌보드 핫 100 2주간 1위), 1962년
I Can't Stop Loving You (빌보드 5주 연속 1위,
빌보드 연말 차트 2위)
[14]
당시의 밴드들인 벤쳐스,
섀도우즈(클리프 리처드의 백 밴드로 시작한 영국 밴드)같은 경우 완결성을 지닌 하나의 기타 연주곡을 정립하고 각종 이펙터의 등장으로 현대적인 기타사운드가 도래하기 시작한다.
[15]
서프 음악의 전성기는 1962년 말~1964년 초반.
[16]
훗날 예명 '밥 딜런'은 개명 신청으로 법적으로도 완전히 본명이 된다.
[17]
이것말고도 포크 진영을 기성세대와 다를 바 없는 꼰대집단으로 인식한 탓도 있다.
[18]
러빈 스푼풀은 미국 밴드였지만 영국에서 먼저 인기를 끌었다.
[19]
약 60 년 후,
드레이크와
테일러 스위프트가 각각
Certified Lover Boy와
Midnights으로 2021년, 2022년에 이 기록을 달성했다. 현대에는 스트리밍까지 포함하여 차트가 반영되는 반면 당대에는 물리적인 앨범 구입과 라디오만이 차트에 반영되므로 현대에서 이 기록이 갖는 의미보다 더 열기가 뜨거웠음을 알 수 있다.
[20]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찬가지로 백인, 그것도 미국의 기득권인 앵글로색슨인 영국인이라는 점이 다른 모든 것들이 기존의 가치에 반하긴 했어도, 결국에는 미국의 문화권력자들이 비틀즈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이다. 하필이면 상술한 대로 그즈음 미국 로큰롤계의 사실상 사멸과 기존의 로큰롤 스타들이 모두 사라지는 바람에, 로큰롤을 다시 끌어올린 비틀즈에 의해 순식간에 미국의 로큰롤씬이 비틀즈에게 접수되며, 그에 자극을 받은 청년들이 너도나도 기타를 들고 개러지에 모여 비틀즈처럼 되고싶어 음악을 하기 시작한 것이 현재 시대에 세계 최대의 대중음악 시장을 연 미국의 음악적 토대를 이루었다.
[21]
비틀즈의 에드 설리반 쇼를 지칭한다.
[22]
1970년대에 가서야
카세트 테이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CD가 발명된 것을 고려하면 상상을 뛰어넘는 판매량을 보인 것이다. LP 자체의 가격도 카세트 테이프와 CD에 비해 2-3배 수준이지만, 재생 기기인
턴테이블의 가격은 보급기 기준으로도 CD플레이어나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의 몇 갑절이나 된다.
[23]
덴버 공연 때 비틀즈가 묵었던 호텔 객실의 침대 시트를 한 업체가 3인치 크기로 잘라 한 조각에 10달러로 판매하여 돈을 벌었다.(...)
영상도 있다.
[24]
최근까지 힙합계에도 암암리 존재했다.
[25]
Bassett McCleary, John (2004). 《Hippie Dictionary: A Cultural Encyclopedia of the 1960s and 1970s》. Ten Speed Press. 44p.
[26]
# 해당 링크나 본문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기장이 긴 한국의
댄디컷같은 스타일이다. 단어의 유례는 마치 걸레를 거꾸로 세워둔 것 같다고 비꼬는 조롱에서 나온 것. 지금이야
방탄소년단 등으로 K-문화가 크게 알려지면서 '댄디컷'이 무엇인지 아는 편이지만, 과거
영미권 국가에서는 한국의 댄디컷은 '코리아 몹톱컷'이라는 식으로 통했다. 방탄소년단이 초반에 크게 뜰때, 비틀즈같다고 한 이유가 그들의 헤어 스타일에도 있다.
[27]
67 ~ 70년.
[28]
Gould, Jonathan (2007). Can't Buy Me Love: The Beatles, Britain and America. New York, NY: Three Rivers Press. 345p.
[29]
Gould, Jonathan (2007). Can't Buy Me Love: The Beatles, Britain and America. New York, NY: Three Rivers Press. 8p.
[30]
Marwick, Arthur (2012) The Sixties: Cultural Revolution in Britain, France, Italy, and the United States. London: Bloomsbury Reader. 413p.
[31]
Simonelli, David (2013). Working Class Heroes: Rock Music and British Society in the 1960s and 1970s. Lanham, MD: Lexington Books. p27, 37.
[32]
비틀즈의 출신지였던
리버풀만 해도 산업 도시로서의 역할이 저물어 영국판
디트로이트로 전락하는 전철을 밟았으나 비틀즈의 성공 이후 이들이 공연을 하던 캐번 클럽 등이 음악계의 성지로서 각광을 받아 관광 도시로 탈바꿈하면서 가까스로 회생하게 되었다. 실제로도 리버풀은 비틀즈를 은인으로 여기며 비틀즈 관련 사업이나 기념관을 운영하곤 한다.
[33]
이런 기괴한 세율은 당연히 영국 뮤지션들에게도 불만이었던지라 이를 풍자하는
Taxman이란 노래도 존재하고
롤링 스톤즈와
레드 제플린 등 당대 밴드들도 영국으로부터 벗어나 미국이나 유럽권을 전전하며 활동했다고 한다.
Exile on Main St.가 이렇게 미국과 프랑스로 망명 중 생겨난 일환이다.
[34]
Garage(미국에서는 '거라지'쪽에 가깝게 발음한다)는 '차고'라는 뜻으로,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젊은이들이 연습 공간이 없어 집 차고에서 연습한 것에 유래한다. 미국 청춘 영화 등에서 자주 볼수 있는 광경이다.
[35]
영향력이 영국 쪽에서 막강했고 비틀즈나 롤링 스톤스 등 워낙 넘사벽 수준의 동시대 밴드들이 미국을 휘젓고 다녔던지라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여서 그렇지 이들도
You Really Got Me 등 메가 히트곡을 생산한데다 빌보드 차트 중상위권 정도는 개근했고
라몬즈 등 미국 내 펑크 그룹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던 밴드였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멤버임은
롤링 스톤 등지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증되었다.
|#
[36]
비틀즈 입장에서도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게 밥 딜런과의 만남부터였다. 그리고 비틀즈는 밥 딜런에게
피우면 음악적 영감이 솟아오르는 담배 비슷한 것도 같이 배웠다.
[37]
참고로 멤버들 중
존 케일 또한 영국
웨일스 출신이다.
[38]
그러나 이들의 차트 성적은 지금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당대로선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영국은 물론 본토
빌보드 조차.
[39]
이 공연을 위해 일회성으로 결성된
슈퍼밴드로, 비틀즈의
존 레논, 롤링 스톤스의
키스 리처즈,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미치 미첼, 그리고
에릭 클랩튼으로 구성된 밴드다.
[40]
사실 이 중에서 정말로 미국 음악계를 평정한 밴드는
레드 제플린밖에 없다.
딥 퍼플은 유럽에서 활약했으나 미국 성적은 조금 모자랐고,
블랙 사바스는 그 딥 퍼플에도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으며, 이후
오지 오스본의 솔로 활동이 성공하자 뒤늦게 빛을 본 케이스이다. 흔히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 블랙 사바스를 70년대 하드 록의 대표적인 밴드들이라 하지만 이는 철저히 후대에 미친 영향력만을 고려한 평가이고, 실제 활동 당시에는 제플린과 나머지 둘은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41]
미국 시장에서 압도적인 성공을 거둔 밴드는
핑크 플로이드가 유일하다. 그 외엔
제스로 툴이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오르거나
Roundabout이
핫 100 8위에 오르는 등 나름 성과가 없는건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은 미국에서 선호하는 장르가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 출신의
캔자스,
스틱스 등이 영국 밴드들을 능가하는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리고
킹 크림슨은 그 음악적 평가와는 별개로 미국은커녕 영국에서도 제대로 인기를 얻은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홍보를 전혀 안했으니까. 사족으로 프록의 주요 밴드 중 하나인
제네시스의
필 콜린스는 80년대 프로그레시브에서 벗어나서야 빌보드를 점령하고마는 뒤늦은 성공을 보이기도 했다.
[42]
파워 팝은 당대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다. 대표주자 중 하나인
배드핑거의 불운의 역사와 멤버 피트 햄의 자살이란 비극적인 밴드사는 유명한 이야기. 그래도 배드핑거의 대표곡 'Without you'는 해리 닐슨이 부른 버전이 빌보드 1위를 달성하는 위업을 달성하기는 했다.
[43]
포브스
롤링 스톤
CBS
[44]
물론
밥 딜런이나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도어즈 등의 예외는 있었다.
[45]
물론
핑크 플로이드가 완벽하게 미국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음악으로 보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지만
데이비드 길모어의 기타가 워낙 블루스 음악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46]
사실 이들도 태동기에
라몬즈와
텔레비전 등 미국 밴드들도 있어 영국 지분도 100%는 아니다.
[47]
실제로 야드버즈와 뉴 야드버즈, 즉 레드 제플린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48]
모든 앨범이 미국에서 먼저 발매되었고 활동도 미국에서 더 많이 했다.
[49]
밴드의 주축
믹 플리트우드는 영국인이긴 하지만 밴드의 얼굴 마담이나 다름없는
스티비 닉스는 미국인이었다.
[50]
티렉스의 곡 Get It On,
게리 글리터의 곡 Rock and Roll은 히트쳤으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스위트는 예외적으로 많은 히트곡을 배출하긴 했다.
[51]
Don't You Want Me로 빌보드 1위를 달성한 밴드로 유명하다.
[52]
이들은 영국이 아닌 일본 밴드긴 하지만 영국발 뉴웨이브 문화를 발빠르게 흡수한 일본으로서도 장르의 거물급 뮤지션을 몇 배출했고 YMO 또한 이런 열풍에 아귀가 맞는 행적들이 많았기 때문에 뉴 로맨틱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목소리가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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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의 상고머리, 타이트한 정장, 마른 체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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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탕으로
로버트 플랜트가 쓴 곡이 바로
That's the Wa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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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시스는 70년대에는 아트록 밴드였지만 이 시기에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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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밴드긴 해도 영국 본토 및 레이블에서 활동했기에 영국 음악의 일원으로 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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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은 팝 메탈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다. 전작인
Pyromania도 큰 성공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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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반열에 끼기엔 블러의 미국 시장 성적은 그룹의 인지도에 비해 처참한 수준이다. 오히려
버브는 Bitter Sweet Symphony가
핫 100에서 12위라도 했지 블러는 그런거 없다. 그러나
Song 2는 블러의 노래 중 거의 유일하게 미국에서 큰 히트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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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작인
1집 앨범이 포펑 리바이벌의 끝물시기에 나온 앨범이기도 하고 그뒤로는 해당 장르에서 벗어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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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스 오브 베이스는 명실공히 1994년 미국을 지배한 음악 그룹이다. 1994년의 빌보드 연말 차트 1위, 9위, 10위가 에이스 오브 베이스였다. 1994년 미국은
R&B 전성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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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xette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빌보드 핫 100 1위곡 4개를 기록하며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Roxette이 미국에서 누린 성공은 ABBA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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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70년대~80년대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었는데 공교롭게도 AC/DC, 비지스, Men at Work 등 대다수의 그룹들의 주요 멤버들 대부분은 호주 태생이 아닌 영국 이주민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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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비틀즈가 현재의 아이돌 그룹과 같이 기획사 차원에서 보이밴드로 결성된 건 당연히 아니었고 멤버들 개인의 행보도 아이돌의 그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들 본연의 행동 양식과는 무관하게 대규모 흥행을 불러일으킨 마케팅 전략이 기획형 보이그룹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당장 최초의 기획형 보이그룹
몽키즈부터가 대놓고 비틀즈 벤치마킹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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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디렉션,
조나스 브라더스 등이 공백을 메워준 보이그룹으로 거론되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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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방탄소년단 등 수많은
K-POP 그룹들이 기획형 아이돌로 출발한 데 반해
비틀즈,
핑크 플로이드,
더 후,
롤링 스톤스 등 여러 밴드들은 고등학교나 대학교 시절의 친구들끼리 만든 학교 밴드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롤링 스톤스나 비틀즈 등 초창기에 매니저에 의해 여러 간섭을 받은 밴드도 있지만, BTS나 블랙핑크 등 아예 기획형으로 나온 아이돌과는 시작부터 다르기 때문에 1대 1로 비교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