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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20:18:30

로만 브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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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니아 속주
Provincia Britannia
로마의 속주
파일:Britannia_SPQR.png
로마 제국 전성기 시절 로만 브리튼의 위치
43년[1] ~ 410년[2]
위치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파일:웨일스 국기.svg 웨일스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스코틀랜드 남부
중심 도시 론디니움( 런던)
카물로두눔(콜체스터)
국가 원수 로마 황제
언어 라틴어
브리튼어
민족 라틴족
브리튼인
멸망 이후 로만 브리튼 이후

1. 개요2. 역사
2.1. 로마 제국의 정복2.2. 로마 제국의 철수
3. 하위 속주와 지역들4. 기타

[clearfix]

1. 개요

로만 브리튼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던 지금의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남부 지역을 일컫는다. 당시로서는 로마 제국의 최북단에 위치했고 총 4개의 속주가 존재했다.

로마 제국의 첫번째 브리튼 섬 침공은 기원전 55년에 있었다. 그 후 기원후 43년 시작된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 이후 약 350년 가량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395년 로마 제국의 동서분열을 즈음하며 410년 서로마 제국 군대가 공식적으로 완전히 철수함에 따라 로만 브리튼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 시기 로마 제국의 브리튼 정복은 지금의 영국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지금 존재하는 영국의 몇몇 도시들과 그 지명들은 로만 브리튼에서 유래되었다. 이 시기의 문화를 로마노-브리튼 문화라고 부른다. 또한 이 때 들어온 라틴어 어휘가 지금도 웨일스어 콘월어에 남아 있다. 다만 영어는 이 시기에 라틴어 계통 어휘가 들어오지 않았다. 고대 영어를 사용하던 게르만족인 앵글로색슨족은 서로마 제국 군대가 철수한 5세기부터 브리튼 섬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현대 영어에 존재하는 많은 라틴어 계통 어휘는 1066년 윌리엄 1세 노르만 정복 이후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아 생겼다.

2. 역사

2.1. 로마 제국의 정복

"그리고 이곳 또한..." 말로가 갑작스럽게 말을 꺼냈다. "한때는 세상의 가장 어두운 변방 중 하나였네."
- 조지프 콘래드, " 어둠의 심연", 이석구 역, 을유문화사, 13p

기록으로 남아 있는 로마 제국의 첫번째 브리튼 침공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공이다. 기원전 55년 당시 브리튼 섬은 로마인들에게 미지의 세계에 가까웠다. 이때 브리튼인이 로마 제국과 전쟁 중이었던 갈리아인(현재의 프랑스 땅에 살고 있던 켈트족)의 편을 들면서 카이사르는 브리튼인의 위협을 막기 위해 브리튼 섬을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자료 조사를 위해 브리튼인과 무역을 해 본 적이 있던 상인들에게 브리튼 섬에 대해 물었을 때 상인들이 잘못된 정보를 흘려 카이사르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 후 카이사르는 허둥지둥 두 군단을 이끌고 도버에 상륙을 시도했다( 카이사르의 1차 브리타니아 원정).[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C3%A9sar_%2813667960455%29.jpg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러나 위기를 직감한 브리튼인들이 뭉쳐 로마의 상륙을 방어해 내고 역으로 큰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포기하지 않고 조금 더 북쪽에 있는 딜 지역에 상륙해서 소규모의 전투를 벌인 끝에 브리튼 동남부 해안에 거점을 만들게 되었지만 결국 철수한다.

1년 후 카이사르는 다시 한번 브리타니아를 침공한다.( 카이사르의 2차 브리타니아 원정) 무려 800척의 배에 기병까지 추가로 태워 도버 해협을 건넜고 당시 지금의 서포크 지역에 있던 카시벨라우누스와 동맹을 맺어 체계적인 공격을 준비했다. 도버 해협을 건넌 카이사르는 빠른 속도로 작전을 전개해 순식간에 잉글랜드 동남부를 빼앗았다. 그러나 영토 확장이 목표가 아니었던 카이사르는 브리튼족과의 합의하에 수많은 재물과 포로를 데리고 갈리아 지역으로 돌아왔다.

카이사르의 승리로 브리튼 지역에서도 로마 제국의 화폐가 통용되었고 로마 제국과 브리튼 간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또한 브리튼 여성들은 빼어난 외모로 로마 제국의 남자들에게 인기가 높아서 많은 브리튼 여성들이 로마의 남자들에게 시집을 가기도 했다.

그렇게 브리튼과의 전쟁은 끝난 듯 싶었으나 43년 로마 제국의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는 명성을 얻고 싶어하는 장군들과 작위를 얻고 싶어하는 관리들의 요청에 따라 약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브리튼 섬을 침공했다.(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 클라우디우스가 침공했을 당시 브리튼족은 로마 제국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별 저항도 하지 않아서 로마 제국은 단기간에 브리튼 섬을 정복했다. 물론 저항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로마 제국의 잔인한 통치에[4] 화가 난 브리튼인들이 부디카를 여왕으로 모시고 반란을 일으켜[5] 잉글랜드의 반 이상을 차지한 적도 있지만 일시적인 반란에 그쳤다.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튼 섬의 남부를 모두 점령하고 자신의 점령지를 로마의 속주로 삼았다.

클라우디우스의 침공으로 브리튼 섬 곳곳에 여러 도시들과 길이 닦이고 기반 시설이 갖추어졌다. 클라우디우스가 해군 보급 기지[6]를 세운 후 로마인이 이주해 오면서 세워졌던 도시[7] 중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가 런던(당시 명칭은 론디니움(Londonium))이다. 지금의 윈체스터, 맨체스터, 울체스터 등의 이름에 체스터(chester)가 들어가는 지명은 라틴어로 요새를 뜻하는 카스트룸(castrum)이 어원으로 이름처럼 당시 로마군의 전진 기지였던 곳이었다. 또한 런던과 군사 기지를 이어주던 길은 지금의 웰링턴 거리가 되었다. 이외에도 로마 제대 군인들이 건설한 콜로이, 브리튼의 도시에 그대로 만든 도시인 무니키비움, 브리튼 부족들을 집결시켜 만든 칸톤과 칸톤의 수도 키비타스가 있었다. 이 도시들의 외관은 전형적인 로마의 도시들 같은 모습이었다. 여기에 정복 이후 브리튼인들에게도 로마 제국에의 납세 의무가 부과되었다.

대다수의 브리튼인들은 이런 로마 도시에서 거주하지 않았고 갈리아나 히스파니아와 다르게 일부 식민 도시들을 둘러싸고 켈트 문화를 유지한 채 자치 독립을 공인받은 부족들의 부락이나 마을에서 거주하는 농민들이 훨씬 많았다. 그나마 로마화가 이루어진 동남부 지방에서는 앞의 두 속주들과 같이 농민들이 로마식 빌라에 귀속되었다. 빌라는 부자들의 단독 주택으로 광활한 부지를 갖고 있었다. 목욕탕, 마사지소, 연회장과 같은 온갖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넓은 토지에서 일하는 소작농들과 이집트, 중동, 소아시아, 동유럽, 게르마니아 등지에서 온 노예들이 주변을 둘러싸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49년에는 지금의 콜체스터(카물로두눔)에 콜로니아(colonia)를 건설했는데 복무를 마친 군인들을 전략적 요지에 배치한 일종의 예비군 주둔지로 쓰였고 로마의 도시 생활을 브리튼인들에게 전파하는 역할도 했다.

로마의 웨일스 정복은 78년에 완수되었으나 이후에도 칼레도니아(대략 지금의 스코틀랜드)의 로우랜드(저지대)와 하이랜드(고지대)를 공략했다. 하이랜드의 픽트족을 제압하기는 했지만 끊임없는 반항으로 인해 상당한 인력 손실을 겪었다. 로마군의 브리튼 섬 북부에 경계선을 마련하려는 몇 번에 걸친 시도 끝에 마침내 122년에 솔웨이 만과 타인 강 사이의 지협이 경계선으로 선택되어 오현제의 일원인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곳에 돌로 된 길이 120km의 방벽을 쌓았다(122~130년). 이것이 로마 제국에서 가장 긴 국경선 방벽으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만들어지고 나서도 칼레도니아를 점령하려는 뜻을 굽히지 않았던 로마는 북진해 142년 포스 만에서 클라이드 만에 이르는 길이 63km의 안토니누스 방벽을 구축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하드리아누스 성벽으로 후퇴했다.
파일:230px-Hadrians_Wall_map.png
하드리아누스 성벽

로마인의 정복으로 로마 문명이 서서히 브리튼 섬에 전파되었다. 도시가 세워지고 황제 숭배 의식이 행해졌고 상인들도 진출했다. 1세기 후반 이래 로마인들이 칼레도니아 지방으로 진출함에 따라 남부 지방에서는 군대가 떠나가고 대신 주민 대부분이 토착민들로 구성된 하나의 행정 구역을 말하는 키비타스가 지방 행정의 중심이 되었다. 키비타스를 중심으로 추진된 도시화 계획은 2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로마화 현상은 도시의 상층 계급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농촌 지역에서는 브리튼어가 계속 사용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라틴어와 브리튼어를 모두 사용했다. 벽이나 바위의 흔적들을 보면 심지어 수공업 장인들까지도 라틴 문자를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주로 식민 도시와 동남부에서 일어났고 여전히 대부분의 영역에서는 독립 부족 국가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별다른 외부 침략도 없고 중요도도 매우 떨어지는 브리타니아에 3개나 되는 군단을 주둔시킨 이유가 내부 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oman.Britain.campaigns.43.to.84.jpg 로마 제국의 정복 과정을 담은 지도
AD 43년(클라우디우스)
AD 43~47(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AD 47~52(오스톨리우스)
AD 52~57(디우스 가일루스)
AD 57(쿠인투스 베라누스)
AD 58~60(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AD 69~71(베르티우스 롤라누스)
AD 71~73(페르틸리우스 코르알리스)
AD 73~77(율리우스 프론티누스)
AD 77~84(아그리콜라)

2.2. 로마 제국의 철수

클라우디우스 1세에 의해 브리튼 섬 대부분이 정복당한 이후 약 350년간의 긴 지배가 찾아오게 되었고 브리튼인들도 로마 제국이 평화적으로 정복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유명한 로만 브리튼의 총독으로는 타키투스의 장인 아그리콜라가 있다. 이 시기에 로마인과 브리튼인의 혈통이 많이 섞였다.

3세기 이후 로마 제국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로마 군단이 사령관을 황제로 선포하는 군인 황제 시대를 맞아 내전을 끊임없이 벌여서 물자와 인력을 소모했기 때문에 로마군은 전투 능력을 크게 상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브리튼 섬도 북해를 넘어 들어오는 게르만 해적[8],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우회해서 내려오는 픽트족 해적, 아일랜드 해를 건너오는 아일랜드 해적들에게 해안 지대가 초토화되었다. 군단 병사들은 방위에 신경쓰기는커녕 정치 싸움에 끼어들어 군단장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로마 황제로 내세우고 383년 브리튼에서 갈리아로 진군했다.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갈리아에서 그 당시 서로마 제국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를 죽이고 갈리아와 브리튼을 통치했다. 그리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려다가 388년 판노니아에서 벌어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처형당했다.

브리튼 섬은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 대제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다. 하지만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자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할되었다.

그 후 스코트족, 픽트족, 색슨족의 침공은 계속되어서 399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명장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브리튼 섬 해안을 약탈하는 해적을 소탕한다. 그렇지만 401년에 스틸리코는 서고트족의 알라리크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군대와 브리타니아 속주의 군대를 로마 제국 본토로 철수시켰다. 그렇게 브리튼은 로마 본국에게 버려져 당분간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된다.

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파일:Map_Gaels_Brythons_Picts.png
게일인 픽트족
브리튼인
( 로만 브리튼)


알라리크와의 전쟁이 끝나고 복귀한 브리타니아 속주의 로마군은 407년 콘스탄티누스 3세를 황제로 세웠고 일부 수비군만 남기고 갈리아 지방으로 출정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3세는 갈리아로 진군하다가 후에 호노리우스와 공동 황제가 되는 콘스탄티우스 3세의 군대에게 패배해 사망했고 다수의 군대가 브리튼으로 돌아가지 못해 이후 로마 제국은 사실상 브리튼의 통제력을 상실했다.

브리튼인들은 410년 서로마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브리튼을 포기하겠다는 호노리우스 황제의 공식적인 답장만을 받고 거부당했다. 보통 이 시기를 로마 제국의 브리튼 지배의 끝으로 간주한다.

446년 브리튼인들의 지도자 보티건(Vortigern, 왕이라는 뜻에서 유래)은 앵글로색슨족을 용병으로 불러들였는데 이들이 점차 더 많은 토지와 재물을 요구하면서 분쟁이 일어났다. 수도자 길다스(Gildas), 넨니우스(Nennius)의 기록에 따르면 보티건은 색슨족의 족장 헹기스트(Hengist)와 호르사(Horsa) 형제와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헹기스트의 딸 로웨나(Rowena)와 결혼했으나 헹기스트 형제가 보티건을 배신하여 잔치 자리에서 참석한 브리튼인 귀족 전원을 학살했고 보티건의 왕권을 강탈하여 켄트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보티건의 아들들인 보티머(Vortimer)와 카티건(Catigern)이 맞서 싸워 호르사를 죽였으나 이들도 결국 헹기스트와 로웨나에게 살해당해서 브리튼인은 색슨족에게 복속되었다. 이후 색슨족에 이은 앵글족, 유트족의 공격으로 수많은 브리튼인들이 학살당했다.

하지만 430년 전후에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Ambrosius Aurelianus)라는 지도자의 지도 하에 브리튼인은 약 한 세대 정도 앵글로색슨족의 침공을 저지했는데, 이 시대를 배경으로 생겨난 전설이 바로 아서 왕 전설이다. 특히 바돈 산 전투[9]에서 브리튼인은 앵글로색슨족에게 큰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그 잠깐의 승리 이후 결국 브리튼인들은 웨일즈, 콘월, 데번, 브르타뉴 등으로 후퇴했고 훗날 잉글랜드라고 불리게 된 땅에는 앵글족의 3, 색슨족의 3, 유트족의 1왕국으로 이루어진 앵글로색슨 7왕국이 세워졌다.

3. 하위 속주와 지역들

세베루스 황제의 계획에 따라 칼레도니아와 아일랜드 지역을 정복해 로만 브리튼을 4개의 속주로 개편할 예정이었으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로만 브리튼의 속주는 브리타니아 인페리오르와 브리타니아 수페리오르만 존재했다.

로만 브리튼(브리타니아 속주)에는 총 5명의 관리가 각각 5개의 지역을 관할했다.

4. 기타

영국의 고속철도 프로젝트인 HS2 사업으로 노스햄프턴 남쪽에서 로마 시대 유적지인 Blackgrounds가 발굴되었다.

[1] 로마 제국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가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을 시작한 시기. 그 이전에도 정복 시도는 몇번 있었으나 350년이 넘는 로마 제국의 브리튼 섬 지배는 바로 이 연도부터 시작된다. [2] 서로마 제국의 첫번째 황제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 군대로 브리타니아 속주를 방어해달라는 요청을 편지로 거절한 시기. 이 연도부터 브리튼인은 오직 스스로의 힘만으로 자신들을 지켜야 했으며, 이는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의 계기가 된다. 참고로 앵글로색슨 7왕국 중 가장 먼저 건국된 켄트 왕국은 이로부터 45년 뒤인 455년에 세워진다. [3] 상륙한 날은 기원전 55년 8월 26일이었다. [4] 이때 로마 황제가 암군이자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 황제였다. [5] 게임 Ryse: Son of Rome에서는 이 반란이 게임 초반의 주 스토리로 나온다. [6] 당시 템즈 강은 중요한 군사 지역이어서 해군 기지를 세웠고 이곳으로 상인들이 몰리며 점차 도시를 형성해 나갔다. [7] 은퇴한 로마군들이 작은 부락에 모여 살게 되면서 글로스터, 링컨 등의 도시로 성장했다. [8] 주로 앵글로색슨족이었다. 훗날인 5세기에 앵글로색슨족들이 대대적으로 브리튼에 침투하기 이전에 이미 브리튼 해안 지역에서 해적 활동을 벌였다. [9] 당시 기록에서는 브리튼인 측 지휘관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시기가 지난 후의 기록에서부터는 아서라는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