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 아일랜드 |
1. 개요
영국과 아일랜드의 외교관계를 다루는 문서.
영국과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한 나라였고 아일랜드는 영국 본토의 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수탈과 압제가 심했다. 또한 독립 이후에도 북아일랜드를 두고 분쟁을 벌였으며 1973년에 영국과 공동으로 유럽연합에 가입했지만 이후 피의 일요일 사건 등 무력충돌을 겪었다. 또한 이 외에도 아일랜드 단식투쟁 등 피눈물나는 역사를 겪은 바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지금도 양국 사이에는 갈등이 매우 심하다.
2. 아일랜드인의 반영감정
800년 동안의 영국의 지배를 받다보니 영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아일랜드 섬은 잉글랜드로부터 지속적인 침략과 수탈, 지배를 당했다. #1 #2 #3[1]특히 영국에선 아일랜드인을 아프리카의 흑인과 같은 수준의 야만인이라는 뜻으로 "하얀 흑인(또는 하얀 침팬지)"이라 부르며 멸시했고 걸핏하면 납치해서 계약제 하인 하인[2]로 매매했다. 그러면서도 아일랜드인들은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며 영국의 지배에 맞서 싸웠다. 우여곡절 끝에 국제정세에 따라 독립을 쟁취했지만, 북아일랜드가 영국에 잔류하면서 아일랜드 섬은 남북으로 쪼개졌다.[3]
아일랜드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사례로도 부적합한데, 1920년대까지도 아일랜드 산업은 거의 근대화되지 않았다. 산업 혁명 과정에서 아일랜드는 빈곤한 농업 지역으로 남았는데, 인구부족과 노동력 부족, 지리적 고립성으로 공업화가 추진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올리버 크롬웰의 아일랜드 정벌 이후 농지는 거의 다 잉글랜드계, 스코틀랜드계 신교도 지주,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 부재 지주들의 소유였고 대다수 아일랜드인은 빈곤한 소작농 신분으로 남아 있었다.
아일랜드는 중세시대부터 수백년간 계속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고 영국의 한 지방으로 취급받았는데도, 영국이 선도한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나마 공업화가 조금 진척되었던 벨파스트와 북아일랜드 지역은 계속 영국령으로 남았고 독립 직후 아일랜드는 경제적으로 매우 후진적인 농업 국가였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친 영국의 통치 정책은 아일랜드의 빈곤과 빈부격차, 사회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지 전혀 해결하지 못했고, 수백년 세월 동안에도 아일랜드를 영국의 일부로 동화하지 못해 결국 아일랜드의 분리 독립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대실패라고 할 수 있다.
아일랜드어로 로칼(Rocal) 혹은 로카바리(Rocabarraigh), 영어로는 로콜(Rockall)이라 불리는 대서양의 작은 바위섬을 영국이 자기네 EEZ로 집어넣으려 하여 갈등을 겪고 있다. 분쟁의 소지가 있지만 문화적, 역사적으로는 명백한 아일랜드의 영토였기 때문에, 반영감정의 원인 중 하나이다. 심지어 1970년대에는 울프 톤스(The Wolfe Tones)라는 정치색 강한 아이리시 포크 그룹이 'Rock on Rockall'[4]이라는 노래를 내놓았다. #
이렇듯 현재 아일랜드에는 영국의 오랜 지배가 남긴 상흔이 여전히 크다.
3. 제2차 세계 대전 아일랜드의 중립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일랜드는 중립국이었는데, 물론 당시 약소국인 아일랜드의 사정상 전쟁에 참여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여력도 되지 못했지만, 아일랜드에 만연했던 반영 감정도 아일랜드가 중립을 지킨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영연방 소속 국가 중 영국에 협력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한 것은 아일랜드가 유일했다.[5]예를 들어 아일랜드의 베레하벤, 코브, 락 스월리 항구를 영국 해군이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윈스턴 처칠의 요청을 당시 아일랜드 총리였던 에이먼 데 벌레라는 철저히 무시했다. 이 항구들에 영국 군함들이 기항했다면 대서양으로의 항속거리를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나치 독일의 U보트에 시달리던 영국의 입장에서는 답답했겠지만, 영국의 해군이 아일랜드에 기항하는 것은 아일랜드인들의 국민 감정상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다.
다만 아일랜드가 괜히 어설프게 영국 편을 들었다가 영국 본토 항공전과 같은 일이 아일랜드에서도 일어났다면 아일랜드로서도 도리가 없었다는 당시 상황을 감안할 필요[6]가 있다. 당시 아일랜드에는 공군 전력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전무했는데 아일랜드 공군은 전투기의 종류 자체는 꽤 다양하게 보유했지만, 다른 강대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일랜드를 점령하면 영국의 목에 칼을 겨눈 형국이 된다는 점에서 한때 아돌프 히틀러가 아일랜드 침공을 계획한 일이 있었지만, 해군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했다. 상식적으로도 코앞인 도버 해협도 건너지 못하는 독일 해군이 아일랜드에 상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아일랜드인들도 상당수 있었으며, 영국군에 자원하여 참전한 아일랜드인들도 약 4만 5천여명[7]에 달했다. 하지만 아일랜드 주민들의 반감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이 아일랜드인들은 휴가를 나올 때 군인인 걸 철저히 숨겼으며, 아일랜드 정부는 이런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언론의 검열에 의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탑승 함선이 격침되었다가 살아남은 한 해군 병사에 관한 기사는 '태평양의 선박 사고에서 생존'이라는 식으로 보도되었고, 아프리카 전선에 참전했던 병사에 관한 기사는 '리비아 사막에서 납 중독으로 고생한 후 입원 중(한마디로 총탄을 맞고 입원했다는 얘기)' 이라는 식으로 보도되었다.
심지어 1945년 5월 히틀러 자살 직후에는 더블린에 주재한 독일 대사관에 총리 에이먼 데 벌레라가 조의를 표명했을 정도로 나치와 아일랜드 간에는 외교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8][9]
1941년 4월 독일군이 영국령인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를 폭격했을 때 아일랜드에서는 소방차를 보내 구호를 지원해준 일이 있다. 이건 중립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인도주의적, 민족주의적[10] 입장에서 행해진 일이었고, 독일은 이에 대한 보복 폭격을 몇 차례 하였다.
아일랜드는 비교적 늦은 1955년에야 국제연합에 가입할 수 있었다. 소련이 스페인 내전 당시 소련과 적대적이었던 국민전선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했고, 2차 대전 당시에는 중립국이었던 아일랜드의 UN 가입을 불쾌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쟁 직후 만들어진 영국 영화 I See a Dark Stranger는 당시 미묘한 관계를 경쾌한 로맨틱 코미디로 풀어낸 영화이다.
4. 애증의 이웃: 현대 아일랜드와 영국 관계
오늘날 아일랜드의 영국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지만 아일랜드 역사에서 영국이 남긴 영향은 너무 크다. 8세기에 달하는 지배기간 탓에 문화적으로 상당히 동화된 면도 적지않다.아일랜드와 영국의 오랜 갈등 원인 중 하나였던 가톨릭과 성공회, 장로교 간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었으며, 80년대 이후 종교의 영향력은 서유럽에서 전반적으로 퇴조했고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의 영향력도 조금씩 감소 중이다. 민족 고유 언어인 아일랜드어[11] 또한 거의 잊었고, 영국의 언어인 영어가 사실상 모국어이다.
아일랜드가 자랑하는 대문호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어 부활과 교육에 반대했으며, 자신의 작품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도 이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 외에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조너선 스위프트 등 아일랜드 문학가들도 주요 작품은 영어로 작성하고 출판했다.
또한 현대 영국의 구성국인 스코틀랜드는 아일랜드와 켈트계 혈통, 문화를 공유[12]한다. 특히 현대 글래스고 지방과 서부 해안, 하이랜드 지방은 항상 아일랜드와 밀접한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애초에 개신교도인 북아일랜드인들 상당수가 잉글랜드 아니면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켐벨, 카메론, 맥도널드, 고든, 맥도넬 등 수많은 하이랜드의 거대 클랜들은 아일랜드에도 그 분파가 존재했고, 반대로 아일랜드 기원의 오닐, 오도넬 같은 클랜들도 많은 수가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분파를 형성했다. 이들이 영국 왕실에게 협조하기만 한다면 런던과 에든버러의 중앙 권력자들은 오래부터 비교적 현대까지 그 문화적, 사회적 자치성을 인정하거나, 중앙에 통합하여도 주요 클랜 당주들에게 귀족 작위를 내려주는 형식으로 상당히 융통성 있게 대하여 유기적으로 영국이란 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현대까지도 스코틀랜드에서 그 인구의 20% 가까이 되는 가톨릭 신자들은 대부분 부모 중 1명 이상이 아일랜드계인 것 등 압도적인 '소수민족'은 아일랜드계 영국인이고, 북아일랜드 장로회의 위세를 보면 아일랜드 또한 스코틀랜드 혈통의 인구가 굉장히 많다. 여기서 아일랜드가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다르게 영국이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다양성을 포용한 국가 공동체에서 배제된 건 일단 종교적, 그 이후 경제, 사회적 요인이 가장 크다.
이렇기 때문에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은 종교, 문화, 민족,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결합된 복합적이고, 시대적 여건에 따라 변화해 온 다이너믹한 관계이며 일차원적인 민족적 '타자'의 억압과 핍박의 관계로만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영국은 공공연하게 아일랜드를 차별했고 이에 분노한 아일랜드 민중은 아일랜드인이라는 민족 의식을 가지고 영국에서 독립했다.
영국이 종교적으로 더 관용적이었고 경제적으로 수탈이 덜했다면 현대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 또한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으로는 독자성을 주장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영국이란 큰 국가의 틀을 유지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공유하는 바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결국 실제 역사에서 급진 민족주의자들이 등장해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는 토양을 만든 것은 전적으로 영국 당국의 책임이다.
이러한 이유로, 특히 북아일랜드 IRA의 무장 투쟁에 대해, 자치권을 획득한 20년대 중반부터 줄곧 비협조적이었으며, 아일랜드 내에서 IRA의 활동과 지원을 아일랜드 정부가 전면 금지하자 이에 실망한 일부 IRA 과격파들이 아일랜드에서 군자금 탈취를 위한 은행강도 등의 범죄를 저질러 아일랜드 경찰이 IRA 단원들을 체포하여 수감한 일도 있을 정도. 이런 흑역사 과거사로 인해 현재도 북아일랜드 신페인당과 아일랜드 정부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하며, 아일랜드 통일에 양측이 소극적 입장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상 80년대 중반까지도 서유럽에서 경제 규모, 경제력 수준이 포르투갈과 경쟁하며 하위권을 다투던 나라였기 때문에, 이웃국가 영국과의 교역과 경제적 관계는 국가 유지에 필수적이었다. 또한 현재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아일랜드계 이민 1세대, 2세대와 유학생, 노동자 등 영국 체류 아일랜드 국적자, 영국-아일랜드 이중국적 보유자 등을 모두 합치면 수백만 명이 넘어 아일랜드 전체 인구와 맞먹는 숫자로, 인적 교류도 아주 많다.[13]
EU 출범 이후로는 같은 유럽연합 회원국으로서 물적 인적 교류가 점차 더 확대되었다. 아일랜드는 1990년대 호황기엔 "켈틱타이거"라 불리며 유럽의 신흥 경제강소국으로 급성장하고 선진국 도약이 이루어졌지만, 이후 대침체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 영국의 투자를 유치하고 경제교류를 더욱 더 확대하기 위해 영국과 전반적인 관계 개선에 나서게 되었다.
2011년 영국 국왕의 아일랜드 최초 방문도 그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2011년과 2012년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잇따른 방문에 아일랜드의 여론이 크게 갈리고, '폐하(Your Majesty)'와 같은 존칭까지 사용해주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다만 여왕이 방문했을 당시 아일랜드에선 반영시위 또한 일어났다.[14]
오늘날 아일랜드 정부는 꾸준히 신세대들에게 아일랜드어 를 가르치는 등 민족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해외로 이주했던 아일랜드인들도 타 이민족들에 비해서 자신의 민족성을 강하게 느끼고 살아간다. 이민을 간지 200여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아일랜드식 이름을 유지할 정도이다.
2016년 브렉시트 사태가 터지면서 영국과의 관계가 다시 복잡해졌다. 이미 아일랜드와 영국 간의 경제 교류가 활발한 상태에서 브렉시트 사태는 아일랜드에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북아일랜드 문제까지 겹쳐서 더욱 복잡해졌다. 심지어는 아일랜드 내에서 '이참에 북아일랜드와의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자'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아일랜드 여권을 신청하는 아일랜드계 영국인들의 수가 늘어났고, 거기에다 아일랜드로 귀화를 하는 비율도 늘어났다. 그리고 아일랜드 여권을 신청한 영국인들이 크게 늘어났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2019년 5월 8일에 양국 국민들이 브렉시트 이후에도 상대국에 자유롭게 거주하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합의했고, 영국-아일랜드 간 공동여행구역을 브렉시트 이후에도 유지할 수 있는 협정에도 체결했다. # # #
브렉시트로 인해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관계가 안 좋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아일랜드는 10월 31일로 예정된 브렉시트의 추가 연기를 요청하면 영국의 요구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 8월 13일에 존슨 총리와 아일랜드의 미홀 마틴 총리가 회담을 가지면서 무역협정,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대해 논의했다. # #
2022년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사망하자 미할 마틴 총리가 영국에 추모의 메세지를 보냈다. 그러나 대중들의 반응은 차가운데 8일 아일랜드와 스웨덴의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경기에서 관중들은 손가락을 올리며 “여왕이 죽었다”(Lizzy’s in the box, in the box!)라는 가사를 넣어[15][16] 노래를 불렀으며 아일랜드 네티즌들은 ‘우리가 간다’(HERE WE GO)는 해시태그를 달고 엘리자베스 2세의 죽음을 축하하며 조롱하는 반응들을 내보였다. # ##
2022년 3월, 유럽 국가들이 구글에 제일 많이 검색한 나라들을 2004년부터 정리한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이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아일랜드는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를 제외하면 영국을 제일 많이 구글링했다. 아일랜드가 얼마나 영국에 대한 원한이 강한지 알 수 있는 부분.
다만, 영국의 아일랜드 침략사를 다룬 영화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켄 로치와 같은 영국 감독이 만들고 애니메이션인 울프워커스에서 영국 배우들이 참여하고,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가 북아일랜드 분쟁 관련해서 영국군의 민간인 살해를 인정하는 등 영국 측에서 과거사 관련해서 인정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
2022년을 기점으로 영국과 아일랜드는 난민 관련 갈등을 겪고 있는데, 영국이 르완다에 난민들을 추방하려고 하고 있고, 영국 이민단속국과 영국 국경통제국 위주로 난민들을 추방시키고 있다. 난민들은 북아일랜드를 거쳐 아일랜드로 이주했고, 이로 인해 더블린 쪽에서는 난민들이 리피 강에 텐트를 치고 거주하고 있다. 아일랜드 측은 영국 측에 난민을 다시 돌려 보내라고 하고 있고, 영국 정부는 자발적으로 출국했으니 송환 의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일랜드가 국경에 경찰을 파견하겠다고 하자 영국은 CTA 조약, 벨파스트 협정을 근거로 압력을 넣고 있다.
키어 스타머 총리가 아일랜드를 찾아 브렉시트 여파로 훼손된 양자 관계 복원을 모색했다. #
5. 북아일랜드 문제
↑아일랜드와 영국 북아일랜드를 잇는 고속도로의 아일랜드측에 설치된 영국 북아일랜드 진입 표지판에 ONE
폴란드볼 유튜버 No Idea Animation의 영상.
1937년부터 1999년까지 아일랜드의 헌법에는 ' 아일랜드의 국토는 아일랜드 섬 전체와 그 부속도서 및 해역으로 한다'(제2조)는 규정이 있었다. 단 '민족의 영토가 재통합될 때까지는 아일랜드 헌법은 남부 26개 주에만 적용된다'[18](제3조) 라는 구절도 있었다. 아일랜드의 입장에서는 '영국이 자국의 일부를 무단 점거 중'이라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북한 문제와 맥이 비슷하나 남북관계와 달리 양국 사이에는 정상적인 외교가 작동한다는 차이점도 명백하다.
그러나 1998년 4월 북아일랜드 문제와 관련해 영국-아일랜드 간에 " 벨파스트 협정"[19]이 맺어지자, 같은 해 6월 19차 헌법개정으로 영토 관련 부분이 삭제되었다. 대신 해당 조항은 "아일랜드의 통일이 민족의 굳은 의지임을 선언하되, 그것은 북아일랜드 주민의 동의를 통한 평화적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수정되었다.
그래서 명목상으로는 북아일랜드를 영국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 언젠가 반환받을 영토로 간주한다. 즉, 아일랜드 헌법상 북아일랜드는 자국의 영토와 동일한 지위를 가진다. 그러나 현재 아일랜드 정부는 북아일랜드의 주권이 영국에 있다는 사실도 묵인하며,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더블린에서 경기를 치를 때는 영국 국가를 연주해 준다.
반면 아일랜드 외교부는 잉글랜드 런던에 주영 자국 대사관을 두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주요 도시에는 자국의 총영사관을 두고 있으나 벨파스트를 포함한 북아일랜드에는 두지 않는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국과의 주권 분쟁보다도 행정력 낭비의 문제가 더 크다는 지적이 있다.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를 위시한 얼스터 지방 내에도 가톨릭교도가 1/3이 있었기 때문에 북아일랜드 내에서 또 신/구교도끼리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들 지역에서는 피의 일요일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대체로 북아일랜드는 어느 시대에나 신교도 친영파의 세력이 우세했고, 친영파 신교도들은 UDA, UVF 등의 무장민병대들을 조직하고 IRA와 충돌하며, 일부 친 IRA 성향의 아일랜드인들에게도 위협을 가했다. 결국 통일과 영토 회복에 대한 열망과는 달리, 북아일랜드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친영파 신교도들의 동의를 얻고 그들을 국민으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여건 때문에 아일랜드 통일 가능성은 낮게 점쳐진다. 북아일랜드인들의 과반수가 찬성하지 않는 아일랜드 통일을 추진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다수결 원칙에도 어긋난다.
현재는 조금씩 평화 분위기가 불고 있다. IRA는 2005년 소수의 원칙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무장해제하였고 대부분의 남&북아일랜드인의 지지를 얻어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재확인되었다. 물론 아일랜드 대통령과 아일랜드 총리 등 정계에서는 아일랜드 통일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북아일랜드 출신자 중 아일랜드 시민권을 원하는 사람에게 아일랜드 여권을 발급한다.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가 북아일랜드 공동정권 재출범을 위한 합의안 초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3년만에 공동정권을 재출범하기로 합의했다.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 협약을 변경하려 하는 데 대해 미할 마틴 아일랜드 총리가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 # #
브렉시트 이후 영국-아일랜드-북아일랜드 관계는 상당히 미묘하게 재정립되었다. 유럽연합에 속한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시장은 사실상 하나로 통합된 반면, 북아일랜드와 EU를 탈퇴한 영국 본토와는 무역 장벽이 세워져 있어서 사실상 EU 가입국가인 아일랜드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로 영국 본토와는 단절된 상황이다.
근데 여기서 영국이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를 아예 단절시켜버리는 식으로 나오면 반대로 북아일랜드의 친아일랜드 지지 세력이 반발하게 되어 있어서 영국은 어쩔수 없이 북아일랜드만을 EU와 연계시킨 상황인 것, 이는 벨파스트 협정 이후 북아일랜드 정세를 안정시키시 위한 영국의 고육지책인 셈이다. 그리고 북아일랜드 갈등을 증폭시키지 않고 안정화 시키려는 영국과 아일랜드는 어쩔 수 없이 국경 개방을 협의한 거다.
일단 영국 정부는 영국 본토와 북아일랜드간의 상품의 통관 간소를 대책으로 내세웠지만 1920년대 이래로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가 유래없이 가까워진 이 상황에서 친영 연합주의자의 반발은 끊이지 않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급진 연합주의자들은 북아일랜드 자치정부에 참여하는 것 역시 거부하고 있다.
반면 친아일랜드계인 북아일랜드 가톨릭 쪽에서는 내심 영국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아일랜드와 밀접하게 연결된 지금 상황을 즐기는 중이다. 점점 수가 줄어들어 전체 주민의 30% 정도로 비율이 내려간 신교도들과 달리 북아일랜드 가톨릭 교도들은 전체 인구의 40%를 상회하며 오히려 비율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렇게 구교-신교 비율이 역전된 상황에서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가 지금처럼 더욱 가까워지면 벨파스트 협정에 따라 주민투표를 실시할 시 아일랜드 통일이라는 오랜 아일랜드 민족의 염원도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보기 때문이다. #
물론 북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도 현상 유지를 원하는 이들이 많은 터라 현재까지는 여전히 북아일랜드의 영국잔류지지율이 더 높은 편이다. 최근(2022년 12월)에 조사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북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통일지지는 35%, 영국잔류는 47%의 지지율을 보였다 #
6. 기타
- 영국과 아일랜드는 이미 1923년부터 공동여행구역(Common Travel Area)을 결성하였기에 입국심사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영국을 구성하는 4개 구성국과 왕실령의 주민의 경우 아일랜드인과 동등한 교육/사회보장/직업선택 등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아일랜드인 또한 마찬가지로 영국 내에서 영국 국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고, 여기에는 영국 내 투표권도 포함된다. 브렉시트 이후에 영국에서 아일랜드인 여권 신청 비율 및 귀화 비율이 올라간 이유는, 먼저 아일랜드인과 영국인은 브렉시트 이후에도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하지만 영국인이 EU국가로의 자유로운 접근이 막히기 때문이다. 노딜 브렉시트가 논란이 된 이유도 노딜이 될 경우 EU국가인 아일랜드가 EU의 협약을 공동여행구역(Common Travel Area)보다 우선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현재 그런 논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저 공동여행구역은 반드시 영국 왕실령 주민과 영국을 구성하는 4개 구성국, 그리고 아일랜드 주민만이 해당된다. 따라서 아일랜드에서 유효한 비자지만 영국 본토 상륙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영국 본토는 상륙이 가능하지만 아일랜드 상륙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단, 대한민국 국적자는 양국 모두 비자 면제이기에 문제가 없다.
- 이디 아민이 자국을 아일랜드의 상황과 등치하여 논란을 빚은 바 있다.
- 지금의 영국 젊은 세대들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사에 대해 학교에서 잘 배우지 않았기에 어렴풋이 아는 정도이다. 국내 한 유튜버가 올린 영상을 보면, 아일랜드인은 역사에 대해 잘 설명하지만, 영국인은 아일랜드에 대해 상당히 무지한 모습을 보이며 오히려 그걸 지켜보던 독일인이 흥분하며 그런 영국인을 질책한다.[20]
- 역사저널 그날 아일랜드 특집 두 번째 에피소드의 게스트로 한국계 영국인 방송인 피터 빈트가 나와서 역사 교육을 할 때 자랑스러운 것 위주로 가르친다고 언급했다. 아일랜드의 잔혹사에 대해서는 성인이 된 후 따로 공부해서 알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 역사적인 접점과 양국간의 국민감정의 형태 때문에 이를 한일관계와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 영국-아일랜드 간의 관계는 위에 언급되었듯이 한일관계와 1:1로 비교하기엔 복잡한 점이 많다. 이 부분은 한국-아일랜드 관계 문서 참조.
7. 관련 문서
- 영국/외교 / 유럽연합-영국 관계 / 영국/외교/옛 식민지 국가들과의 관계
- 아일랜드/외교
-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 벨파스트 협정
- 피의 일요일 사건(북아일랜드)
- 영국/역사
- 아일랜드/역사
- 아일랜드/정치
- 북아일랜드 분쟁
- 브렉시트
- 영국/경제
- 아일랜드/경제
- 영국/문화
- 아일랜드/문화
- 아일랜드계 영국인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서유럽 국가
[1]
아일랜드의 비극적인 역사를
한일관계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2]
영국계 이주민들이 주를 이루었던 미국도 마찬가지. White Nigger라고 불렀다. 대기근 당시 아일랜드 사람들이 무수히 미국으로 쏟아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멸시와 비아냥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아일랜드에서 잡아온 노예는 흑인 노예보다 더 싸게 매매당했다.
[3]
그런데 그게
미국에서는
영국계 미국인들이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을 멸시하는 구조로 간다.
[4]
다만 IRA를 지지하는 밴드답게 노래 가사는
독도는 우리 땅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노골적이다. 일례로 노래 후렴구가 (로칼의) 천연가스로 니들 궁둥짝을 불태운 다음 지옥으로 날려버릴거야(Natural gas will burn your ass and blow you all to hell)!다.
[5]
참고로
아일랜드가 영연방 탈퇴를 선언한 것은 1937년이고,
영국이 이를 정식으로 승인한 것은 1949년이다. 즉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은
아일랜드를 영연방 소속 국가로 간주했으나,
아일랜드는 이를 부정했다.
[6]
실제로 일부
영국,
독일 파일럿들이
아일랜드 가까이서 전투를 벌이다 불시착한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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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반대로 지난 1차 대전처럼 영국군과 싸우기 위해 독일군에 복무한 아일랜드인들도 있었다.
[8]
실제로
스페인 내전에서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나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던
국민전선에 자원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스페인 제2공화국이 당시 교권주의 문제로
가톨릭과 심각한 수준의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반면,
아일랜드인들은 열성적인 가톨릭이었기 때문이지, 아일랜드인들이
나치를 좋아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9]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거물인 에이먼 데 벌레라도 나치 추종자가 아니었다. 데 벌레라를 비롯한 아일랜드 독립과 전간기의 국부가 된 세대는 어쨌든
영미식 정치적 가치관에 큰 영향을 받아 프랑스 혁명의 대륙식 민족주의에는 열광했지만, 그 이상의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본격적인 대중동원식 전체주의적 사상은 혐오했고, 아일랜드 내에서는 그나마 에몬 더피를 위시로 하는 가톨릭 교권주의의 영향력도 만만찮게 강했다. 이렇듯 아일랜드에는 소수 움직임을 제외하곤 유의미한 파시스트 세력이 자리잡은 적이 없었다.
마이클 콜린스를 위시한
IRA의 무장투쟁과 에이먼 데 벌레라의 미국 내 정치 여론 활동이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가장 큰 두 축이었다.
[10]
북아일랜드도 한 민족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며 영국-아일랜드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된 1998년 이후에도 이러한 기조는 여전하다.
[11]
몇 백년이나 버텼으나
아일랜드 대기근을 결정타로 해서 많은 아일랜드인이 죽거나 이민을 가서 소멸되었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영어는 본토 영어와 매우 달라서 원어민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12]
단순히 같은 '켈트족'인 것 정도가 아니라, 스코트인의 조상은 7~8세기경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게일인이다.
[13]
글로벌화 지구촌 시대에
영국으로 구식민지 출신
아프리카인,
인도계 영국인,
파키스탄계 영국인,
방글라데시계 영국인,
아랍인이나
홍콩인,
중국계 싱가포르인,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등
동아시아인까지 몰려오는 실정에서,
아일랜드인 정도는 그나마 같은 유럽계 백인으로서
영국인들이 그리 거부감을 가지거나 차별할만한 이유가 없어진 것이 현실이다.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도 많으며, 배우 연예인 가수 등의 유명인들(예를 들면 제 5대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이라든지)도 많다.
캐나다인,
호주인,
뉴질랜드인을 제외한 외국 출신으로 영국 사회에 가장 많이 동화된 사람들이
아일랜드계 영국인들이다.
[14]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70~80년대
북아일랜드 독립을 단호하게 반대하며
IRA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무력진압을 지지하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북아일랜드 IRA와
영국 왕실은
피의 일요일 학살 사건과 1979년 왕실 인척인
마운트배튼 백작의 암살 사건으로 개인적인 원한도 깊다.
[15]
직역하자면 ’Lizzy(Elizabeth를 격의없이 부르는 표현)가 관짝에 들어갔네‘ 라는 뜻이다.
[16]
심지어 어린 아이들까지도 뻐큐를 날리며 노래를 부르는데, 옆의 부모로 보이는 보호자들은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격려하며 같이 부른다. 아일랜드인들의 영국을 향한 반감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얼마나 뿌리깊은지 알 수 있는 부분.
[17]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확인 가능하다.
[18]
위의 유튜브 영상 36초부터.
[19]
성 금요일 협정(Good Friday Agreement)이라고도 부른다. (성 금요일은
부활절 이틀 전의 금요일)
[20]
일본의 젊은층들이
일본 제국의 행각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