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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1위 – 100위 ] {{{#!wiki style="margin: -6px -1px -16px" |
※ 2019년 빌보드가 발표한 빌보드 Hot 100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순위다. 얼마나 많은 곡들을 차트에 높은 순위로 진입시키고 유지했는가를 기준으로 산정한 리스트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싱글을 많이 낸 뮤지션들이 더 유리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크다. | ||||
<rowcolor=#fff>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비틀즈 | 마돈나 | 엘튼 존 | 엘비스 프레슬리 | 머라이어 캐리 | |
<rowcolor=#fff>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스티비 원더 | 자넷 잭슨 | 마이클 잭슨 | 휘트니 휴스턴 | 리아나 | |
<rowcolor=#fff>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드레이크 | 롤링 스톤스 | 폴 매카트니 | 비 지스 | 어셔 | |
<rowcolor=#fff>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시카고 | 슈프림즈 | 프린스 | 홀 앤 오츠 | 로드 스튜어트 | |
<rowcolor=#fff>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테일러 스위프트 | 올리비아 뉴튼 존 | 아레사 프랭클린 | 마룬 5 | 마빈 게이 | |
<rowcolor=#fff>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케이티 페리 | 필 콜린스 | 빌리 조엘 | 브루노 마스 | 다이애나 로스 | |
<rowcolor=#fff>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포 시즌스 | 템테이션스 | 도나 서머 | 비치 보이스 | 라이오넬 리치 | |
<rowcolor=#fff>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닐 다이아몬드 | 카펜터즈 | 저스틴 비버 | 잭슨 파이브 | 보이즈 투 멘 | |
<rowcolor=#fff>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코니 프랜시스 | 브렌다 리 | 더 위켄드 | 비욘세 | 크리스 브라운 | |
<rowcolor=#fff>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케니 로저스 |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브라이언 아담스 | 셰어 | 블랙 아이드 피스 | |
<rowcolor=#fff>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조지 마이클 | 핑크 | 바비 빈튼 | 존 멜렌캠프 | 레이디 가가 | |
<rowcolor=#fff>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쓰리 도그 나이트 |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 | 글로리아 에스테판/마이애미 사운드 머신 | 본 조비 | 처비 체커 | |
<rowcolor=#fff>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레이 찰스 | 포리너 | 쿨 & 더 갱 | 글래디스 나이트 앤 더 핍스 | 리키 넬슨 | |
<rowcolor=#fff>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듀란 듀란 | 저스틴 팀버레이크 | 코모도스 | 이글스 | TLC | |
<rowcolor=#fff>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폴 앵카 | 에미넴 | 배리 매닐로 | 디안 워윅 | 넬리 | |
<rowcolor=#fff>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하트 | 포스트 말론 | 아리아나 그란데 | 에벌리 브라더스 | 칸예 웨스트 | |
<rowcolor=#fff>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바비 다린 | R. 켈리 | 제임스 브라운 | 폴라 압둘 | 켈리 클락슨 | |
<rowcolor=#fff>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앨리샤 키스 | 에드 시런 | 린다 론스태드 | 리처드 막스 | 데스티니스 차일드 | |
<rowcolor=#fff>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셀린 디옹 | JAY-Z | 미라클스 | 디온 | 플리트우드 맥 | |
<rowcolor=#fff>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밥 시거/실버 불릿 밴드 | 닐 세다카 | 브루스 스프링스틴 & E 스트리트 밴드 | 포인터 시스터스 | 존 덴버 | |
출처 | }}}}}}}}} |
{{{#!wiki style="margin:0 -10px" {{{#000,#fff {{{#!folding [ 1위 – 60위 ] {{{#!wiki style="margin:-5px -1px -10px -1px" |
※ 2018년 빌보드에서 Hot 100 차트 60주년 기념으로 1958년부터 2018년까지 차트에 오른 곡들을 분석해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남성 아티스트들을 발표했다. 얼마나 많은 싱글을 차트에 높은 순위로 진입시키고 오래 유지했는가를 누적치로 계산하여 산정한 리스트이기 때문에 영향력이나 음악성과 같은 평론적인 요소들이 반영된 것은 아니며 순전히 상업적인 성공도가 기준이다. | ||||||||
<rowcolor=#fff>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엘튼 존 | 엘비스 프레슬리 | 스티비 원더 | 마이클 잭슨 | 폴 매카트니 | |||||
<rowcolor=#fff>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어셔 | 프린스 | 로드 스튜어트 | 드레이크 | 마빈 게이 | |||||
<rowcolor=#fff>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필 콜린스 | 빌리 조엘 | 라이오넬 리치 | 브루노 마스 | 닐 다이아몬드 | |||||
<rowcolor=#fff>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케니 로저스 | 브라이언 아담스 | 조지 마이클 | 바비 빈튼 | 존 멜렌캠프 | |||||
<rowcolor=#fff>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처비 체커 | 레이 찰스 | 크리스 브라운 | 리키 넬슨 | 저스틴 팀버레이크 | |||||
<rowcolor=#fff>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폴 앵카 | 배리 매닐로 | 넬리 | 바비 다린 | R. 켈리 | |||||
<rowcolor=#fff>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제임스 브라운 | 에미넴 | 리처드 막스 | 칸예 웨스트 | JAY-Z | |||||
<rowcolor=#fff>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밥 시거 | 닐 세다카 | 저스틴 비버 | 브루스 스프링스틴 | 존 덴버 | |||||
<rowcolor=#fff>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50 센트 | 플로 라이다 | 앤디 깁 | 로이 오비슨 | 디온 | |||||
<rowcolor=#fff>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빌리 오션 | 토미 제임스 | 존 레논 | 브룩 벤턴 | 마이클 볼튼 | |||||
<rowcolor=#fff>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릴 웨인 | 바비 브라운 | 에드 시런 | 루다크리스 | 에릭 클랩튼 | |||||
<rowcolor=#fff>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쟈니 리버스 | 글렌 캠벨 | 릭 스프링필드 | T.I. | 더 위켄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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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이름 |
디온 DION |
|
헌액 부문 | 공연자 (Performers) | ||
멤버 | (개인자격) | ||
입성 연도 | 1989년 | ||
후보자격 연도 | 1986년 | ||
후보선정 연도 | 1986년 | }}}}}}}}} |
디온 Dion |
|
|
|
본명 |
디온 프란시스 디무치 Dion Francis DiMucci |
출생 | 1939년 7월 18일 ([age(1939-07-18)]세) |
뉴욕 주 브롱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싱어송라이터 |
장르 | 로큰롤, R&B, CCM, 두왑, 블루스, 포크록 |
활동 | 1957년 ~ 현재 |
데뷔 |
1958년 5월 5일 앨범 'I Wonder Why' ([age(1958-05-05)]주년) [dday(1958-05-05)]일째 |
배우자 | 수잔 버터필드 (1941년생) (1963-현재) |
자녀 |
장녀 테인 디무치 (1966년생) 차녀 라크 디무치 (1969년생) 삼녀 어거스트 디무치 (1974년생) |
종교 | 가톨릭 |
[clearfix]
1. 개요
자신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는 디온. 벽 한켠에 로버트 존슨의 초상화가 있다.[1]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195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60년이 넘도록 현역으로 활동 중에 있다. 처음에는 디온&더 벨몬츠[2]의 리드 보컬로 활동했으며, 솔로로 전향한 후에는 Runaround Sue, The Wanderer, Ruby Baby, Lovers Who Wander 등을 발표해 큰 인기를 끌며 브리티시 인베이전 직전 가장 유명한 로큰롤 가수가 되었다. 60년대 중반 인기를 잃으면서 Abraham, Martin and John과 같은 성숙하고 사색적인 노래로 장르를 변경했고 70년대까지 그 인기를 유지하였다. 80년대부터는 기독교 음악을 발표하였으며, 80년대 후반부터는 블루스로 장르를 변경해 6장의 차트 1위 앨범을 발표했다.
2024년 현재까지 40여장의 앨범을 발표하였으며, 빌보드 핫 100차트에서 11개의 톱10 히트곡을 기록했으며, 198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2000년에 보컬 그룹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고, 2002년에는 Runaround Sue로 그래미상 명예의 전당에 입성는 등 미국의 레전드 가수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또한 폴 사이먼, 루 리드,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같은 여러 가수들에게 영향을 줬는데, 대표적으로 빌리 조엘이 그의 창법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1958년의 디온&더 벨몬츠. 왼쪽부터 카를로 마스틀란젤로, 프레드 밀라노, 디온 디무치, 안젤로 달레오.
1939년 7월 18일 미국 뉴욕 주 브롱스의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파스콸레 디무치와 프란시스 디무치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때부터 보드빌 연예인이었던 아버지 파스콸레 디무치와 함께 공연을 다녔으며 컨트리 가수인 행크 윌리엄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자신이 살던 아파트 관리인이자 무명 가수였던 윌리 그린으로부터 몇몇 노래를 배우게 된다.
1957년 모호크 레코드에서 오디션을 봤다. The Choosen Few라는 앨범을 냈는데 백보컬은 더 팀버레인즈라는 그룹이 맡았다.[3] 이후 로리 레코드로 이적하였고, 안젤로 달레오, 카를로 마스틀란젤로, 프레드 밀라노를 영입하여 디온&더 벨몬츠라는 두왑 그룹을 결성한다.[4][5] 디온이 리드보컬, 안젤로 달레오가 팔세토[6], 프레드 밀라노가 제2 테너, 카를로 마스틀란젤로가 베이스를 맡았다. 이들은 1958년 I Wonder Why로 빌보드 차트 핫 100에서 22위, 후속 곡인 No One Knows는 19위에 오르며 성공을 거둔다.
1958년 10월 15일 뉴욕 로체스터 커뮤니티 워 시어터 백스테이지에서 디온과 버디 홀리.
이때 디온은 한 옷가게에서 우연히 만난 버디 홀리와 친해지게 되었고, 그가 자신이 기획한 겨울 댄스 파티 투어에 게스트 가수로 초대하자 이를 받아들인다. 겨울 댄스 파티 투어에는 디온 말고도 리치 발렌스와 빅 바퍼도 게스트로 참여하였다. 여기에 지역 로큰롤 가수로 활동하던 프랭키 샤르도를 오프닝 가수로 영입했다.[7]
2.2. 음악이 죽은 날
1959년 2월 2일 아이오와주 클레어 레이크에서 열린 겨울 댄스 파티 투어 포스터. 다음날 사고가 일어났다.
실제 공연 모습.[8] 왼쪽부터 웨일런 제닝스, 디온, 버디 홀리[9], 카를로 마스트란젤로, 프레드 밀라노. 마스트란젤로 뒤에 뒤통수만 나온 사람은 토미 올섭이다.
1959년 1월 24일 위스콘신 주 커노샤 공연에서 몰려든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리치 발렌스, 디온, 프랭키 샤르도, 빅 바퍼. 가장 오른쪽 인물은 현장 MC를 맡은 짐 라운스베리다.
1958년 11월 크리켓츠를 탈퇴한 버디 홀리는 베이스의 웨일런 제닝스, 기타의 토미 올섭, 드럼의 칼 번치로 구성된 자신의 밴드를 만들었다. 당시 홀리는 크리켓츠 시절 매니저인 노먼 페티가 돈을 횡령한데다, 임신한 아내와 뉴욕에서 같이 살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10] 또한 영국 투어까지 계획했기 때문에 홀리는 미국의 중서부 24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기획한다. 투어는 1959년 1월 23일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서 시작하여 사고 전날인 2월 2일 아이오와 주 클레어레이크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11번의 공연을 벌였다.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밥 딜런같이 공연을 보고 대중가수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가 나타났는데, 먼저 공연이 있는 도시들 간의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대부분 500km가 넘는 거리를 10~12시간 동안 이동하는데 보내야 했다. 당시에는 고속도로가 없어 시골의 2차선 도로를 이동해야 했는데, 심지어 이동수단도 교회에서 빌린 노란색 스쿨버스가 전부였다. 설상가상으로 버스의 난방시스템까지 고장나 게스트 중 누군가가 감기에 걸렸다.[11] 또한 드러머 칼 번치가 동상에 걸려 가수들이 돌아가면서 드럼을 쳐야 했다.
사고 전날 공연이 있던 아이오와주 클레어레이크는 원래 예정에 없었지만, 현지 프로모터의 요청으로 급히 공연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다음 공연장이 있는 미네소타 주 무어헤드까지 590km를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 공연지인 아이오와 주 수시티는 또 520km를 이동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버디 홀리는 비치크래프트사의 보난자 비행기 N3794N번을 빌려 무어헤드와 인접한 노스다코타 주 파고로 이동하고자 했다. 여기서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웨일런 제닝스와 디온의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가장 잘 알려진 웨일런 제닝스의 주장에 따르면 홀리가 비행기를 빌린 이유는 자신의 밴드 멤버들을 태우기 위해서였다. 이때 독감에 걸린 빅 바퍼에게 제닝스가 비행기 좌석을 양보했고, 토미 올섭과 리치 발렌스가 동전 던지기를 했는데 여기서 발렌스가 이겨서 좌석을 차지했다. 원래 발렌스는 할아버지가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에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했지만, 인생에서 누군가를 이겨본 것이 처음이라며 용기를 내서 비행기를 탔다. 이 주장은 영화 라밤바에 그대로 묘사되면서 유명해졌다.
하지만 2009년 디온이 더 팜비치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한 주장은 전혀 다른 내용이다. 디온에 따르면 홀리는 게스트들을 태우기 위해 비행기를 빌렸다는 것이다. 비행기 조종사인 로저 피터슨,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기획한 홀리, 최연장자인 빅 바퍼가 각각 좌석을 차지했고, 남은 한자리를 놓고 디온과 발렌스가 동전 던지기를 했는데, 디온이 이겼다. 하지만 디온은 비행기 좌석값이 자신의 한달 집세와 같은 36달러라는 사실에 부담을 느껴 발렌스에게 양보했다. 이에 발렌스는 감사를 표하면서 디온에게 자신의 기타를 맡겼다고 한다. 현재까지 제닝스와 디온의 주장 중 누구의 말이 맞는 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1959년 2월 3일 기상악화와 비행기 조종사 로저 피터슨의 실수 등이 겹치며 보난자 N3794N번은 추락했고, 버디 홀리, 빅 바퍼, 리치 발렌스는 모두 사망하고 만다. 바비 다린, 폴 앵카, 필 스펙터, 딕 클라크 등 여러 가수가 디온 등 살아남은 이들에게 전보를 보내 사실을 확인하였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끔찍하게도 겨울 댄스 파티 투어 일정이 2주나 더 남아있었다. 심지어 사고가 일어난 2월 3일 공연도 취소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열렸다. 디온&더 벨몬츠와 프랭키 샤르도를 중심으로 남은 공연을 벌였고, 홀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당시 15세의 무명가수였던 바비 비(Bobby Vee)[12]를 영입했다.[13] 이후 파비앙 포트(Fabian Forte)[14], 지미 클랜튼(Jimmy Clanton)[15], 프랭키 아발론(Frankie Avalon)[16], 데비 스티븐슨(Debbie stevens)[17]등 다른 가수들이 참여해 어떻게든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끝마칠 수 있었다. 이때 몇몇 공연 프로모터들은 주요 가수들이 사망해 출연하지 않았다고 계약된 공연료를 주지 않으려 했다.
여담으로 음악이 죽은 날의 당사자들 중 유일한 생존자이다. 디온&더 벨몬츠의 동료인 안젤로 달레오도 2024년 현재 생존 중이지만, 음악이 죽은 날에는 해군에 입대한 상태였다. 1959년 2월 3일 사고로 죽은 버디 홀리, 빅 바퍼, 리치 발렌스를 제외하고 웨일런 제닝스는 2002년 2월 13일 향년 64세로 사망, 토미 올섭은 2017년 1월 11일 향년 85세로 사망, 칼 번치는 2011년 3월 26일 향년 71세로 사망, 프랭키 샤르도는 2014년 2월 26일 향년 78세로 사망, 카를로 마스트란젤로는 2016년 4월 4일 향년 79세로 사망, 프레드 밀라노는 2012년 1월 1일 향년 72세로 사망했다. 버디 홀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영입된 바비 비도 2016년 10월 24일 향년 73세로 사망했다.
2.3. 솔로 전향
1959년 3월 A Teenager in Love[18]로 미국 팝 차트 5위를, 11월 Where or When로 3위에 올랐다. 1960년 디온은 10대부터 앓아온 헤로인 중독으로 입원해야 했으며, 이후 다른 멤버들간 음악적 견해 차이, 재정적 차이로 갈등을 겪다가 10월 솔로로 전향하기 위해 탈퇴한다. 재밌게도 디온과 다른 멤버들이 기억하는 디온의 탈퇴 이유가 서로 다르다. 디온 본인은 로큰롤을 하고 싶어서 탈퇴했다고 밝혔는데, 안젤로 달레오는 디온이 블루스를 하고 싶어서 탈퇴했다고 밝혔다. 어쨌든 디온과 다른 멤버들이 서로 좋게 헤어진 것은 양쪽 다 인정하고 있다.[19] 이후 로리 레코드로 이적하였고 1961년 첫번째 솔로 앨범 Alone with Dion을 발표한다. 이때부터 디온 디무치 대신 디온으로 활동하였으며, Lonely Teenger로 12위까지 올랐으나, 후속 곡들의 인기는 시원찮았다. 그러나 Runaround Sue로 대박을 친다. 미국 빌보드 핫 100에서 2주간 1위를 차지했으며, 100만장이나 팔리며 골든디스크에 오른다. 1961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는 46위를 기록했고,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 500곡 중 351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2002년에는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뒤이어 발표한 The Wanderer도 빌보드 핫 100에서 2위에 올랐다. 원래는 A면인 The Majestic을 홍보했지만, 실제 인기 있었던 것은 B면인 The Wanderer였다.
1961년 컬럼비아 픽쳐스의 뮤지컬 영화 트위스트 어라운드 더 클락에 본인 역으로 출연했다. 처비 체커, 비키 스펜서, 더 마셀러스와 함께 찍은 이 영화는 제작비 250만 달러로 만들어져 6개월만에 6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62년에도 Lovers Who Wander가 빌보드 핫 100에서 3위를, Little Diane이 8위, Love Came to Me가 10위를 차지하며 브리티시 인베이전 직전 미국을 대표하는 대중가수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컬럼비아 레코드로 이적했는데,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한 최초의 로큰롤 가수가 되었다. 당시 컬럼비아의 A&R 매니저이자 밴드 리더인 미치 밀러가 로큰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디온에 따르면 이때 컬럼비아 레코드는 디온이 앨범을 발매하든 하지 않든 매년 10만 달러를 주기로 계약했다고 한다. 컬럼비아 레코드로 이적한 후 처음으로 발표한 Ruby Baby[20]가 빌보드 핫 100에서 2위를 차지했다. 드리프터스의 또 다른 히트곡들인 Donna the Prima Donna와 Drip Drop을 편곡해 1963년 빌보드 핫 100에서 6위에 올랐으나, 이후 앨범들의 인기는 신통치 않았다.
2.4. 몰락과 재기
1962년 컬럼비아 레코드의 프로듀서 사무실에서 아레사 프랭클린과 같이 자신의 신곡인 Drip Drop을 부른 디온은 존 헤먼드로부터 블루스에 재능이 있다고 칭찬받았다. 그리고 존 헤먼드로부터 라이트닝 홉킨스, 르로이 카와 같은 블루스 가수들을 소개받으며, 본격적으로 블루스로 전향하게 된다. 하지만 컬럼비아 레코드는 그가 제2의 프랭크 시내트라가 되길 원했기 때문에 갈등을 겪게 된다. 1964년 디온은 윌리 딕슨의 I'm Your Hoochie Coochie Man과 아서 크루덥의 Chicago Blues와 같은 클래식 블루스 곡을 싱글로 발표했으나, 차트 성적이 좋지 못했고 컬럼비아 레코드는 이를 앨범에 포함시키길 거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5년에 완성된 앨범 Kickin' Child의 발표가 무기한으로 연기된 일로 폭발한 디온은 결국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해버렸다. 그리고 이 Kickin' Child는 무려 52년이 지난 2017년에 디온과 컬럼비아 레코드가 화해하면서 발매된다. 더 벨몬츠와 재결합하기도 했으나 결과는 나빴다. 설상가상으로 비틀즈로 대표되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직격탄을 맞아 완전히 한물간 가수가 되어 버린다. 이때문에 더욱 약물에 의존하게 되면서 건강까지 나빠졌다. 1967년은 디온이 자신의 자서전에 인생 최악의 해라고 적어놨을 만큼 약물 중독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21] 특히 프랭키 라이몬[22]을 만나게 되어 친구가 됐는데, 이는 디온과 라이몬 모두에게 안좋은 결과로 끝났다. 두사람의 우정은 헤로인 주사바늘을 공유하는 그야말로 잘못된 우정이었다. 결국 라이몬이 1968년 2월 27일 급성 약물 중독으로 요절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해 4월 1일 15년간 해온 마약과 술을 끊었다. 그리고 디온은 다시 로리 레코드로 돌아가 Abraham, Martin and John[23]을 발표해 빌보드 핫 100 4위에 오르며 재기에 성공한다. 또한 100만장 이상 팔리며 골든디스크에 오른다.1969년 필 스펙터의 권유로 워너 브라더스로 옮긴다. 그리고 1970년 그와 함께 Born to Be with You 앨범 제작을 하지만, 필 스펙터의 잦은 음주와 변덕, 1973년 Rock 'n' Roll 앨범 작업 도중 존 레논과의 마찰 끝에 퇴출, 이혼과 교통사고 때문에 지지부진했고, 4년만인 1974년에 완성된다. 하지만 필 스펙터는 다시 1년 동안 발매를 막았고, 그리고 1975년에 정식 발매때는 필 스펙터 인터내셔널을 통해 영국에서만 발매했다. 당연히 미국에선 발매가 안됐고 상업적으로 실패한다. 디온은 아예 이 앨범을 장례음악 같다며 없는 노래 취급 해버렸다. 하지만 1990년대 재평가 받으며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에 수록 되었다. 또한 영국 뮤지션들은 이 앨범에 무한한 찬사를 보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더 후의 피트 타운젠드, 프라이멀 스크림의 바비 길레스피, 스피리추얼라이즈드의 제이슨 피어스, 악틱 몽키즈의 알렉스 터너, 펄프(밴드)의 자비스 코커, 롤링 스톤스의 초기 매니저인 앤드류 올드햄 등이 있다. 이후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면서 1979년부터는 기독교 음악을 제작한다.
198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디온
1987년 12월 13일 데뷔 30주년 콘서트의 디온.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후배 가수들인 제임스 테일러, 루벤 블레이즈, 빌리 조엘, 폴 사이먼, 브루스 스프링스틴, 루 리드.
디온의 데뷔 30주년 콘서트에서 A Teenager in Love를 부르는 디온과 후배 가수들. 왼쪽부터 루벤 블레이즈, 제임스 테일러, 빌리 조엘, 폴 사이먼, 브루스 스프링스틴, 루 리드, 디온. 위의 사진 모습은 영상의 5:10초 쯤에 나온다.
1987년에 데뷔 30주년 콘서트를 열었는데, 자신에게 큰 영향을 받았던 폴 사이먼, 루 리드,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같은 후배 가수들이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다시 대중가요로 돌아왔으며, 폴 사이먼, 루 리드, 브라이언 아담스와 함께 작업한 앨범 Yo Frankie를 발표한다. 또한 1989년에는 4수 끝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2.5. 현재
2021년 디온의 신곡 Song For Sam Cooke을 작업 중인 디온과 폴 사이먼.
2000년 디온&더벨몬츠로 보컬그룹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2002년 Runaround Sue로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2005년 Bronx in Blue로 탑 블루스 앨범 차트 2위에 올랐다. 2005년 30번째 앨범 Son of Skip James로 4위에, 2015년 폴 사이먼과 함께 작업한 New York Is My Home이 3위, 2020년에는 제프 벡, 폴 사이먼, 밴 모리슨, 브루스 스프링스틴, ZZ TOP의 빌리 기븐스 등과 함께 작업한 Blues with Friends로 빌보드 블루스 앨범 차트 1위에[24], 2021년 에릭 클랩튼,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과 함께 작업한 Stomping Ground로 빌보드 블루스 앨범 차트 1위에 오른다.[25]
2023년 롤링 스톤은 디온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200인 중 154위에 올렸다.
2024년 4월 24일 아메리카 뮤직 아너스에서 동료 가수들과 공연 중인 디온. 왼쪽부터 브루스 스프링스틴, 마비스 스테이플스, 달린 러브, 디온, 존 멜렌캠프, 잭슨 브라운.
2024년 4월 24일 아메리카 뮤직 아너스에서 마비스 스테이플스, 존 멜렌캠프, 잭 브라운과 함께 수상하였다.
3. 말말말들
만약 당신이 위대한 가수를 듣고 싶으면, 디온을 들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모든 것에서 색깔을 가져옵니다. 그의 천재성은 결코 그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
밥 딜런
그는 항상 그 모든 것을 말해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
브루스 스프링스틴
디온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돌고 있는 별처럼 우리가 몸을 일으켜 다시 시작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와 불을 만들어냅니다. -
피트 타운젠드
4. 대표곡들
I Wonder Why
Where or When[27]
A Teenager in Love
Runaround Sue
The Wanderer
Ruby Baby
Abraham, Martin And John
Born To Be With You
5. 여담
- 뉴욕시는 브롱스의 벨몬츠 근처에 있는 벨몬츠 대로와 이스트 188번가의 모퉁이는 디온 디무치의 업적을 기려 디온 디무치 길로 이름이 붙었다.
- 성공한 로큰롤 가수에서 종교음악을 만들다가 다시 대중가요로 복귀하는 등 삶의 궤적이 리틀 리처드와 유사하다. 실제로 친한 사이였고, 때문에 2020년 리틀 리처드가 사망했을때 가장 먼저 조의를 표하였다. 여담으로 리틀 리처드가 목사로 활동했을때 디온의 아내 수잔이 그의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녀에게 디온의 약물 중독에 대해 충고해줬다고 한다.
- 아내인 수잔 버터필드와 1963년 결혼 후 2024년 현재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보통 유명 스타들이 화려한 여성 편력과 불륜, 외도로 막장인 가정사를 자랑하는 것과 달리 디온은 고등학교때 동창생인 수잔과의 결혼생활을 60년 동안 별 잡음 없이 유지했으며, 이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 아내와는 테인, 라크, 어거스트라는 3명의 딸을 두었다.
- Runaround Sue의 Here's my story, it's sad but true라는 가사에 디온의 아내 이름이 수잔이라 노래 주인공인 수가 수잔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디온은 긍정과 부정을 반복하다가 1990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하여 수가 수잔이 맞다고 인정한다. 이후 2009년 블루스왁스와의 인터뷰에서 조금 더 상세한 내용을 밝히는데, 수가 수잔이라는 이야기를 퍼뜨리는 사람이 바로 수잔 본인이라고. 디온이 그 이유를 물어보자, 이렇게라도 안하면 아무도 자기를 기억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라고 한다.
- 1989년 4수 끝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때, 디온&더 벨몬츠가 아니라 디온 개인만이라 더 벨몬츠의 멤버인 프레드 밀라노, 카를로 마스트란젤로, 안젤로 달레오와 분쟁이 있었다. 2012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서 리드 싱어들만 헌액되고 그들의 백그룹들이 제외되었던 오류를 시정하고자, 그러한 그룹들을 대량으로 헌액했었다. 버디 홀리의 크리켓츠, 스모키 로빈슨의 더 미라클즈, 행크 발라드의 더 미드나이츠, 제임스 브라운의 더 페이머스 플레임스, 빌 헤일리의 더 코메츠, 진 빈센츠의 더 블루캡츠가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더 벨몬츠는 제외되어 논란이 있었다. 이와 별개로 2000년 디온&더 벨몬츠는 보컬 그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그를 대표하는 별명은 The Wanderer(방랑자)로 디온의 자서전과 그의 삶을 그린 뮤지컬도 모두 제목이 The Wanderer다.
- 디온의 삶을 그린 뮤지컬 The Wanderer는 2011년 10월 디온과 극작가인 찰스 메시나가 해당 프로젝트를 위해 서로 논의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디온이 가수로 데뷔한 1958년부터 68년까지 그의 성공과 좌절, 약물중독으로 인한 방황과 구원을 다루고 있다. 배우 마이클 워텔라가 디온 역을, 크리스티 알토말레가 디온의 아내 수잔 역을, 뉴 키즈 온 더 블록 출신의 조이 맥킨타이어가 조니 역[28]을, 스테판 서프와 빌리 핀, 제스 르프레토가 더 벨몬츠역을 맡았다.[29] 당초 2020년 첫공연을 하려 했으나 코로나 사태로 인해 2022년 3월 24일 페이퍼밀 플레이 하우스에서 첫공연을 가졌다.
- The Wanderer가 폴아웃 4의 공식 트레일러 배경음악에 사용되자, 폭력과 살인을 미화한 게임에 자신의 노래가 사용되었다며 소송을 걸었으나 패소했다.
* 비틀즈로 대표되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직격탄을 맞은 가수지만, 비틀즈와는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1964년 2월 맨하탄에서 존 레논, 링고 스타를 만나 친구가 되었으며, 폴 매카트니와도 친한 사이다. 비틀즈도 디온의 Ruby Baby를 좋아해서 자주 연주했다고.[30] 비틀즈의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서 밥 딜런과 함께 앨범 아트를 장식한 유이한 대중가수로, 디온의 얼굴은 왼쪽 중단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남성[31] 밑에 있다. 그와 별개로 딱히 비틀즈의 앨범들을 사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때의 디온은 로큰롤에서 블루스로 넘어가던 시기라 다른 가수들의 앨범들을 구매했다고 한다.
- 샘 쿡과도 친분이 있었는데, 1962년 바비 블랜드, 리틀 윌리 존과 함께 투어를 다니다가 샘 쿡을 만나 친해졌다. 이들은 멤피스에서 제임스 브라운의 공연을 보러 갔는데, 유일하게 백인이었던 디온이 위협을 받게 되자, 샘 쿡이 나서서 디온을 위협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디온은 샘 쿡에 대해 매우 지적이고 세련된 신사라고 평했다. 이후 디온과 샘 쿡은 함께 6주간 투어를 다녔다. 2021년에는 샘 쿡을 추모하는 Song For Sam Cooke을 발표한다.
- 1965년 컬럼비아 레코드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원래 발표되어야 했던 Kickin' Child는 무려 52년이 지난 2017년에 발표된다. 총 10곡의 노래로 구성되었는데, Baby, I’m in the Mood For You, Farewell, It’s All Over Now Baby Blue는 밥 딜런의 노래를 커버한 것이다.
- 세계 최초의 뮤직비디오를 찍은 가수중 한명이다. 1963년 스코피톤[32]용으로 제작한 Ruby Baby 뮤직비디오는 흔히 세계 최초의 뮤직비디오로 잘못 알려진 비틀즈의 Paperback Writer보다 3년 먼저 나왔다. 문제는 스코피톤이 1960년대에 잠깐 유행했고, 한창 유행했을때도 미국 전국에 겨우 500여개가 성인 술집에 설치되어 접근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단점을 지녔다. 때문에 비틀즈는 이런 문제를 인식해 Paperback Writer를 스코피톤이 아닌 텔레비전 용으로 제작했으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 2016년 자신의 인생을 바꾼 5개의 앨범으로 행크 윌리엄스의 Greatest Hits, 지미 리드의 Bright Lights, Big City, 밥 딜런의 The Freewheelin Bob Dylan, 척 베리의 Golden Hits, 더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의 East-West를 꼽았다.
- 겨울 댄스 파티 투어의 게스트 가수였음에도 라 밤바(영화)에서 등장은 커녕, 작중 공연 간판에 이름조차 올라가지 않았다.
- 더 후의 피트 타운젠드의 기타 부수는 퍼포먼스를 부정적으로 본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두사람의 사이는 좋으며, 피트 타운젠드는 디온의 앨범 Born to Be With You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또한 디온이 2021년에 발표한 Stomping Ground의 라이너 노트를 써줬다.
- 그레미 어워드에 2번 노미네이션 되었으나 수상은 못했다. 1983년 26회 그레미 어워드에서는 I Put Away My Idols로 베스트 남성 가스펠 가수 부분에 노미네이션 되었고, 2006년에는 Bronx in Blue로 베스트 정통 블루스 부문에 노미네이션 되었다. 정작 로큰롤 부문에선 노미네이션 된 적이 없다.
2010년 어 리틀 헬프에 출연한 디온.
- 영화에 여러편 출연했다. 1961년 트위스트 어라운드 더 클락과 10대 백만장자, 1977년 딘 클라크의 굿 올드 데이스, 2010년 어 리틀 헬프, 2012년 더 트루 오브 버디 홀리 스토리에 출연했는데 기묘하게도 모든 영화에서 디온은 디온역으로 출연했다.
- 플로리다주 주지사인 론 디샌티스의 미들 네임인 디온의 유래이다. 디샌티스는 공화당 소속이지만 디온은 절친한 후배인 브루스 스프링스틴, 폴 사이먼, 잭슨 브라운처럼 민주당 지지자다. 때문에 2024년 디샌티스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때 한 언론에서 디온을 찾아가 이에 대해 묻자, 디온은 자신은 정치를 잘모른다며 대답을 거부했다.
- 2024년에 60년대 말 한물간 가수가 된 디온과 그의 팬이자 야심에 찬 젊은 가수인 존 덴버의 만남을 다룬 단편영화 디온&덴버가 개봉했다. 감독은 잭 호세이니, 디온역은 대니 디토리스, 존 덴버역은 데이비드 샌 미겔이 맡았다.
- 국내의 인지도는 거의 바닥이다. 당장 금영노래방과 태진노래방 어디에도 그의 노래는 수록되지 않았다. 심지어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랐던 Runaround Sue조차 없을 정도다.
[1]
로버트 존슨의 악마계약설을 따와 십자로가 그려져 있다.
[2]
안젤로 달레오(Angelo D'Aleo. 1940.02.03~), 카를로 마스틀란젤로(Carlo Mastrangelo, 1937.10.05~2016.04.04), 프레드 밀라노(Fred Milano, 1939.08.23~2012.01.01)로 구성된 두왑 그룹.
[3]
디온의 자서전에 따르면 디온은 한번도 이 그룹을 본 적이 없었으며, 이후로도 그들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4]
로리 레코드의 사장 진 호킨스는 디온을 전적으로 신뢰해서 멤버 선정을 디온에게 맡겼다고 한다. 한편 더 벨몬츠와 함께 그룹명 후보로 추천된 것에는
캐딜락,
엘도라도,
임팔라가 있었다고 한다.
[5]
디온의 인터뷰에 따르면 두왑 그룹을 결성한 이유는 악기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6]
제1 테너.
[7]
그렇게 유명한 가수가 아니라 공연 포스터를 보면 샤르도의 대표곡인 Fake Out을 Take Out으로 오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8]
디온& 더 벨몬츠의 멤버 중 안젤로 달레오는 해군에 입대해서 겨울 댄스 파티에 불참했다.
[9]
사진을 올린 디온에 따르면 드럼을 치는 사람은 버디 홀리라고 한다.
[10]
디온에 따르면 홀리는 겨울 댄스 파티 투어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많은 돈이 필요해 어쩔수 없이 투어를 했다고 한다.
[11]
누가 감기에 걸렸는지는 웨일런 제닝스와 디온의 주장이 달라 미스터리로 남았다. 제닝스는 빅 바퍼가 걸렸다고 주장하고, 디온은 리치 발렌스가 걸렸다고 주장했다.
[12]
1943년 4월 30일~2016년 9월 24일. 대표곡은 빌보드 핫 100 1위에 오른 Take Good Care of My Baby가 있다.
[13]
당시 바비 비는 형과 학교 친구들과 더 새도우즈라는 5인조 밴드에서 활동했다. 버디 홀리의 대체가수로 영입되기 전 그는 원 키 피아노 연주자였던 얼스톤 건을 퇴출시켰는데, 그가 바로 밥 딜런이었다.
[14]
1943년 2월 6일 생으로 대표곡은 빌보드 핫 100에서 31위를 기록한 I'm a Man이 있다.
[15]
1938년 9월 2일 생으로 대표곡은 빌보드 핫 100에서 4위에 오른 Just a Dream이 있다.
[16]
1940년 9월 18일 생으로 대표곡은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한 Venus가 있다.
[17]
1928년 2월 1일~2001년 2월 17일. 대표곡은 빌보드 핫 100에서 14위를 기록한 Don't Let Him Shop Around이 있다. 겨울 댄스 파티 투어 참여 가수중 유일한 여성가수다.
[18]
원래는 같은 레이블의 5인조 두왑그룹인 더 미스틱스(The Mystics)의 데뷔 앨범으로 기획되었으나, 로리 레코드의 사장 로버트 슈워츠가 자신들의 밥줄인 디온&더 벨몬츠에게 넘겨 주었다. 대신 더 미스틱스는 Hushabye로 데뷔 한다.
[19]
더 벨몬츠는 다른 가수들을 멤버로 충원하여 2000년대까지 활동하였다. 2023년 최후의 콘서트를 끝으로 해체했는데, 2024년 현재 안젤로 달레오를 제외한 멤버들이 모두 사망한 상태다.
[20]
1956년
드리프터스가 발표한 동명의 노래를 편곡했다. 다만 원곡보다 디온이 로큰롤로 편곡한 버전이 더 인기가 좋았다.
[21]
지하의 작업실로 내려가던 중 약물 중독으로 인한 환상으로 악마를 보았다고 한다. 이때 본 악마는 디온의 삶을 그린 뮤지컬 The Wanderer에 나오는 디온의 매니저 조니의 모델이 된다.
[22]
한때 인기절정의 가수였으나, 변성기를 맞아 인기가 시들해졌다. 그렇게 한물간 가수가 되자, 약물에 의존하게 되었다.
[23]
이 3명과
로버트 케네디를 추모하는 노래다. 1968년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에 큰 충격을 받은 작곡가 딕 홀러가 작곡했다.
[24]
밥 딜런은 앨범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신 라이너 노트를 써주었다.
[25]
피트 타운젠드가 라이너 노트를 써주었다.
[26]
1989년 디온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때 루 리드가 바친 헌사다.
[27]
안젤로 달레오는 해군 복무 중이라 해군복을 입고 있다.
[28]
작중 빌런으로 디온의
매니저이자, 디온이 약물에 중독되도록 방조한 인물이다.
[29]
빌리 핀은 버디 홀리, 스테판 서프는 빅 바퍼역을 중복으로 맡았다. 리치 발렌스는 미구엘 모랄렌스가 맡았다.
[30]
정확히는 비틀즈가 비트 브라더즈라는 이름으로 토니 셔리던의 백그룹으로 활동했을때, 토니 셔리던이 디온의 Ruby Baby를 편곡해서 앨범을 발매했다.
[31]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를 쓴 미국의 작가 테리 서던이다.
[32]
196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일종의
주크박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