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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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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House of Saxe-Coburg and Got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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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일 | 1826년 11월 21일 |
창립자 | 에른스트 1세 |
現 수장 | 안드레아스[1] |
국가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벨기에 왕국 포르투갈 왕국 불가리아 왕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인도 제국 |
본가 | 베틴 가문 |
분가 |
윈저 왕조 (영국)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2]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3] (포르투갈) 삭스코부르고츠키 왕가 (불가리아) 벨기에 왕조 (벨기에) |
작위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1826년 - 1918년) 벨기에 국왕 (1831년 - 1920년[4]) 포르투갈과 알가르브의 왕 (1837년 - 1910년)[5] 불가리아의 대공 (1887년 - 1908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왕 (1901년 - 1917년) 인도 제국의 황제 (1901년 - 1917년) 불가리아의 차르 (1908년 - 1946년) |
작센코부르크고타 가계도 |
[clearfix]
1. 개요
언어별 명칭 | ||
독일어 | Haus Sachsen-Coburg und Gotha(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 |
영어 | House of Saxe-Coburg and Gotha(색스코버그고타 가문) | |
프랑스어 | Maison de Saxe-Cobourg et Gotha(삭스코부르고타 가문) | |
네덜란드어 | Huis Saksen-Coburg en Gotha(삭선코뷔르흐호타 가문) | |
포르투갈어 | Casa de Saxe-Coburgo-Gota(사셰코부르구고다 가문) | |
불가리아어 | Династия Сакскобургготски(삭스코부르고츠키 가문) |
독일 작센의 통치가문인 베틴 가문(Haus Wettin)의 종가 에른스트계의 막내뻘 가문이다. 1826년 베틴 가문 에른스트계의 영지 조정 이후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에른스트 3세가 초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로 불렸다.
명목상으로는 윈저 왕조의 본가지만 찰스 3세의 즉위로 사실상 본가는 글뤽스부르크 왕조로 바뀐 상태다.
2. 상세
먼저 베틴 가문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는데 베틴 가문은 10세기부터 마이센 지역[6]에 자리잡은 가문으로 13세기에는 튀링겐을 획득하였고, 15세기 초반에 작센 선제후로 등극하였다. 1485년, 라이프치히 조약으로 장자 계열인 에른스트계, 차자 계열인 알브레히트계로 분가하여 작센과 튀링겐을 반분하여 다스렸다. 라이프치히 조약 당시에는 장자 계열인 에른스트계가 작센 선제후였으며 종교 개혁 시기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비텐베르크에서 마르틴 루터를 보호하면서 작센 선제후는 최초의 개신교 제후이자 개신교 제후 중 대표급이 되었다. 반면 차자 계열 알브레히트계는 종가와 영지 분쟁과 종교 문제 같은 복잡한 사정으로 에른스트 계열 선제후와 갈등 관계였는데 1547년 슈말칼덴 전쟁 때 가톨릭 황제 카를 5세와 동맹을 맺은 알브레히트계의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7]가 동맹을 맺은 대가로 작센 선제후 직위와 대부분의 영토를 찬탈했고 에른스트계의 기존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튀링겐 소규모 영지로 이전했다.이후 에른스트 계열은 분할 상속에 따라 크게 네 개 공국으로 분할되었다. 19세기 시기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외동딸만 남겨 단절이 예정된 상태여서 다시 에른스트계열 영지 재조정이 불가피했고,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에른스트 3세는 영지조정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친척인 작센고타알텐베르크 공국의 외동딸과 정략 결혼하면서 장인의 영지 중 가장 큰 영토인 고타를 물려받고 기존의 자신의 영지 중 작은 영토인 잘펠트는 작센마이닝겐 공국에 할양하여 에른스트 계열 공작령이 재조정되었고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에른스트 3세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에른스트 1세로 취임했다.
이처럼 복잡한 사정으로 비록 소규모 영토를 다스리는 집안이었지만 원래 분가였던 알브레히트계가 신성 로마 제국의 7 선제후 중 세속 선제후 가운데 최선임이었던 작센 선제후[8]였던데다가 나폴레옹 전쟁으로 작센 왕위를 얻었기 때문에 베틴 가문 친척으로 본래 여러 왕실과 동일한 혼인이 가능했고, 게다가 본래 개신교 제후 중 최선임 제후라는 역사성 때문에 신교도 통치가문 중이서도 프로이센 왕국의 호엔촐레른 가문, 네덜란드의 오라녜나사우 가문,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 하노버 가문 등과 혼인이 잦았다. 19세기엔 초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동생 레오폴트가 영국 왕 조지 4세의 외동딸 샬럿과 결혼한데다가 1831년 레오폴드 1세로 벨기에의 초대 국왕으로 추대받았고, 에른스트의 조카 페르디난트는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와 결혼했으며, 에른스트 1세의 둘째 아들 앨버트는 사촌인 빅토리아 여왕과 결혼했고, 19세기 후반에 에른스트 1세의 종손자 페르디난트가 신생 불가리아 공국(당시)의 왕위까지 차지하면서 한 번에 4개 나라의 왕위를 가진 유럽 최고의 가문 중 하나로 등극했다.
앞서 설명한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여러 분파 간의 관계를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본가 -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의 장남 에른스트 1세의 후손. 에른스트 1세의 장남 에른스트 2세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그 조카인 영국의 에든버러 공작 앨프레드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로 즉위했는데, 앨프레드의 외아들 영 애피가 요절하면서 또 후사가 끊겨 앨프레드의 조카인 찰스 에드워드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로 공작위를 승계했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대에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이 멸망한 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는 카를 에두아르트의 직계자손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 영국 색스코버그고타 왕조( ~ 1917년) → 윈저 왕조(1917년 ~ 2022년)
-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단절) - 에른스트 1세의 첫째 남동생 페르디난트의 후손으로 페르디난트 공자가 헝가리계 귀족 가문인 코하리 가문의 상속녀와 결혼하면서 설립되었다. 현재 페르디난트의 장남 페르난두 2세의 후손인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타 왕가는 단절, 삼남 레오폴트는 귀천상혼을 했고 이후 단절, 차남 아우구스트의 3남 2녀 중 장남 필리프의 가계는 필리프의 장남이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단절되었고, 차남 루트비히 아우구스트의 가계로 이어졌다가 계승권을 가진 유일한 후계자 요하네스가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2010년에 단절되었다. 루트비히 아우구스트의 남계후손은 있으나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현재 계승권을 갖고 있는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가의 남계후손은 불가리아 차르가인 삭스코부르고츠키가가 유일하며, 2010년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가 본가가 단절되자 삭스코부르고츠키가의 수장이자 불가리아의 마지막 차르였던 시메온 삭스코부르고츠키가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가의 수장이 되었고, 2015년 누나인 불가리아 공주 마리야 루이자에게 넘기면서 가문명만 유지할 뿐 작센코부르크고타가의 분가로서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 브라간사셰코부르구고다 왕조(단절)
- 삭스코부르고츠키 왕조
- 벨기에 왕조
3. 이름 변경
하지만 포르투갈 왕국에서 1910년 혁명이 일어나 왕가가 몰락하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도 하락세를 걸었다. 비슷한 시기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영국에서도 반독 감정이 증가했고, 설상가상으로 이름이 같은 고타 G.IV 폭격기가 영국을 폭격하는 사건까지 벌어지자 1917년 당시 국왕 조지 5세는 독일어 명칭 대신, 윌리엄 1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왕실 별궁인 윈저 성의 이름을 따 새로 윈저 왕조로 개창하였다. 마지막으로 독일 제국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왕가들이 폐지되면서 작센코부르크고타 본가도 망했다. 가문의 수장인 카를 에두아르트는 이후 나치 독일의 적십자사 총재를 지냈다가 패전 후 무거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1920년에는 같은 가문인 벨기에 왕실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성을 벨기에[9]로 바꿨다. 이후 역사는 벨기에 왕조 참조. 2019년에 왕실 문장 속에 다시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문장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왕조도 영국에서 망명하던 중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 왕조의 마지막 왕인 마누엘 2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1932년에 대가 끊겨 원래 왕조명인 브라간사로 복귀했다. 브라간사 방계 왕족인 브라간사 공작 두아르트 누누[10]가 수장 자리를 계승했지만 더이상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와는 인연이 없기 때문에 원래 이름으로 돌아간 것.[11] 보통 이런 작명의 왕조[12]는 기존 왕조가 남계후손이 아예 없어서 이렇게 된건데 오히려 브라간사 왕조는 매우 드문 케이스다.
불가리아 왕실은 나치 독일과 동맹국이라서인지 성씨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불가리아 왕가는 1946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버텼는데, 1990년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시메온 2세는 1996년 망명에서 벗어나 불가리아로 귀국했다. 그리고 2001년 불가리아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2005년까지 불가리아 총리가 되었다. 폐위된 군주가 공화국의 정부수반이 된 최초의 사례로 이때 시메온 2세는 삭스코부르고츠키(Сакскобургготски)를 성씨로 사용했다.
이로써 작센코부르크고타라는 이름으로서는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영국과 벨기에 두 나라 및 영연방 왕국 14개국의 왕조를 잇고 있으니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사라진 다른 왕가들보다는 나은 편이다. 한편 본가 역시 단절되었거나, 단절될 예정이거나, 정통성에 논란이 있는 다른 에른스트 계열 공가나 작센 왕가와 달리, 아직까지는 별다른 문제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13]
벨기에는 2017년부터 왕실 구성원들이 작센코부르크고타 성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고 2019년에는 왕실 문장에 다시 작센의 문장을 복귀시켰다.
현재 베틴 가문 에른스트 계열 공가 중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가 남계 자손이 끊어져[14] 조만간 단절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만일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가에서 계승법을 바꾸지 않는다면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본가에서 명목상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위를 계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엘리자베스 2세의 사망과 찰스 3세의 즉위로 영국 왕실은 사실상 글뤽스부르크 왕조로 넘어갔다. 이름만 윈저 왕조를 유지할 뿐 생물학적 본가는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에서 글뤽스부르크 왕조로 바뀌였다.
4. 가계도
4.1.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4.2.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2세
5. 계보도
1차로 가문의 공통조상인 프란츠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부터 4대손까지의 가계도이다.분홍색 바탕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파란 바탕은 영국 국왕, 진연두색 바탕은 불가리아 차르, 짙은 군청색 바탕은 포르투갈 국왕, 노랑색 바탕은 벨기에 국왕이다
프란츠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 | 에른스트 1세 | 에른스트 2세 | ||
앨버트 공 | 에드워드 7세 | 조지 5세 | ||
알프레트 | 알프레드 | |||
레오폴드 | 카를 에두아르트 | |||
페르디난트 | 페르난두 2세 | 페드루 5세 | ||
루이스 1세 | 카를루스 1세 | |||
아우구스트 | 페르디난트 1세[16] | 보리스 3세 | ||
레오폴드 1세 | 레오폴드 2세 | |||
알프레드 | 알베르 1세 | 레오폴드 3세 |
2차로 가문의 공통조상인 프란츠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4대손부터의 가계도이다. 편의상 여왕을 뺀 여성은 기재하지 않는다
조지 5세[17] | 에드워드 8세 | |||
조지 6세 | 엘리자베스 2세 | |||
헨리 | 리처드 | 알렉산더 | 잔 | |
조지 | 에드워드 | 조지 | 에드워드 | |
니콜라스 | 앨버트 | |||
레오폴드 | ||||
루이 | ||||
마이클 | 프레드릭 | |||
카를 에두아르트 | 프리드리히 요지아스[18] | 안드레아스 | 후베르투스 | 필리프 |
알렉산더 | ||||
카를루스 1세 | 마누엘 2세 | |||
보리스 3세 | 시메온 2세[19] | 카르담 | 보리스 | |
레오폴드 3세 | 보두앵 | |||
알베르 2세 | 필리프 | 가브리엘 | ||
에마뉘엘 |
[1]
Andreas Michael Friedrich Hans Armin Siegfried Hubertus
Prinz von Sachsen-Coburg und Gotha Herzog von Sachsen.
[2]
코하리는
헝가리계 귀족 가문이다. 원래 이 쪽의 본가는
포르투갈
브라간사 왕조의 왕위 계승권이 있었으나 남계 후손이 단절되어 현재는
불가리아 삭스코부르크고츠키 왕가가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의 본가이다.
[3]
다만 포르투갈은 그냥
브라간사 왕조로 보지, 작센코부르크고타 가계로 보지 않는다. 애초에 포르투갈은 여성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있어서 브라간사 왕조의 정통성이
마리아 2세로 옮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포르투갈어 문헌들은 마리아 2세 이후 포르투갈 국왕들의 왕실을 하나같이 'Casa de Bragança'로 표기하지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 왕조(Casa de Bragança-Saxe-Coburgo e Gota)로 표기하지 않는다.
[4]
2017년, 방계 왕족들은 예전 성씨인 작센코부르크고타를 사용하는 것을 허가하고 2019년에는 왕가 문장에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문장을 다시 추가했으나 벨기에 왕실의 명칭은 여전히
벨기에 왕조이다.
[5]
다만 포르투갈은 브라간사 왕조로 본다.
[6]
현재의
작센은 당시 마이센 변경백국이었고
니더작센 지역이 작센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하인리히 사자공에게
제국추방령을 선고하고 작센 공국을 해체시키면서
안할트의 아스카니아 가문(Haus Askania)이 작센 공작 칭호를 주워갔고,
금인 칙서로 작센 선제후가 된 작센비텐베르크계 아스카니아 가문이 대가 끊기고 작센 선제후가 된 베틴 가문으로 인해 작센의 위치는 점차 동쪽으로 이동해 마이센 변경백국이
작센 선제후국이 되었다.
[7]
비록 신교도로 개종했으나 신앙심이 아주 큰 인물은 아니었다. 개종한 것도 원래 큰아버지 게오르크 공작은 골수 가톨릭이었고 큰아버지는 적자가 없어서 아버지 하인리히가 물려받았는데 아버지는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 큰아버지는 동생이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영지를
합스부르크 가문에 들어 바칠 작정까지한 골수 가톨릭 제후이며 유명한 마르틴 루터 안티였다. 그래도 골수
가톨릭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루터교회에 호감을 가지도록 한 인물 중 하나라 완전히 신앙심이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8]
작센 선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공위시에 북독일의
섭정 자격으로 황제 대리가 가능했다. 남독일은
팔츠 선제후 담당. 7선제후 중 최선임은
마인츠 선제후였다.
[9]
프랑스어로는 de Belgique,
네덜란드어로는 van België
[10]
미겔 1세의 손자이다.
[11]
다만 이 부분과는 별개로, 두아르트 누누의 아들인 현 수장 두아르트 피우와 그 후계자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의 여계후손이기는 하다. 두아르트 피우의 어머니는
브라질 구황족인 마리아 프란시스카(
페드루 2세의 딸
이자베우의 손녀)인데, 이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증조할머니 빅토리아가
페르난두 2세의 여동생이기 때문.
[12]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 왕조.
[13]
현재 본가의 수장인 안드레아스(마지막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의 손자)에게 두 아들과 어린 손자(2015년생) 한 명이 있어, 당분간은 공가가 계속 이어지는 데 별다른 장애요인은 없는 상황이다. 다만 수장 자리를 이을 수 있는 손자가 1명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이기는 한데, 만에하나 불상사가 생겨 공가가 단절되면 초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남동생 페르디난트 공자의 남계후손에 해당하는 불가리아 왕가 쪽에서 명목상의 공작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높다.
[14]
공가의 남자 구성원이 현 수장 미하엘과 그 사촌 빌헬름 에른스트 2명뿐이고 두 사람 모두 고령인 상황이다. 본래 빌헬름 에른스트에게 아들이 한 명 있었으나, 2018년에 낙마 사고로 자녀 없이 사망하여 다른 남자 자손이 태어날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
[15]
후손은
빅토리아 여왕/가족 관계 참조
[16]
형인 루트비히 아우구스트의 가계도 생략
[17]
윈저 왕조로 가문명 변경
[18]
귀천상혼한 큰 형과 자녀없이 죽은 작은 형 생략
[19]
2015년에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의 수장을 누나 마리야 루이자에게 넘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