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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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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1353b4,#1353b4>역임 지위 <colbgcolor=#fff,#1f2023> 영국 여왕( 인도 제국 여제 · 캐나다 여왕 · 호주 여왕) · 영국 왕실 수장
생애 생애
재위 시기 빅토리아 시대( 연표)
가족 관계 가족 관계
아버지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 어머니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 배우자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 장남 에드워드 7세 · 차녀 영국의 앨리스 공주 · 차남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 3녀 영국의 헬레나 공주 · 4녀 영국의 루이즈 공주 · 3남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 4남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 5녀 영국의 베아트리스 공주
기타 대영제국 · 하노버 왕조 · 빅토리아 섬 · 빅토리아주 · 퀸즐랜드 · 빅토리아 폭포 · 빅토리아 호 · 빅토리아 수련 · 빅토리아 공원 · 런던 빅토리아 역 · 빅토리아 선 · 빅토리아 & 압둘 · 빅토리아(드라마) · 코이누르 · 빅토리아 · 빅토리아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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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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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8102e><colcolor=#fff> 1558 ~ 1603 엘리자베스 시대
Elizabethan era
1603 ~ 1625 제임스 시대
Jacobean era
1625 ~ 1649 찰스 시대
Caroline era
1649 ~ 1660 공위시대
The interregnum
1660 ~ 1714 왕정복고
The Restoration
1660 ~ 1685 찰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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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 ~ 1901 빅토리아 시대
Victorian era
1901 ~ 1910 에드워드 시대
Edwardian era
1910 ~ 1952 세계 대전 및 전후재건기
World war - Post war Britain
1952 ~ 2022 엘리자베스 2세 시대
Second Elizabethan era
2022 ~ 찰스 3세 시대
new Carolean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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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
Victorian Era
파일:2053f64f94542f916b5c2bed9f19df63.jpg
1901년의 런던 시가지
1837 ~ 1901
이전 시대 조지 시대
이후 시대 에드워드 시대
군주 빅토리아 여왕

1. 개요2. 시대
2.1. 빅토리아 시대 이전2.2. 연표2.3. 동시대 국가들의 수장들
2.3.1. 아메리카 대륙2.3.2. 유럽2.3.3. 아프리카2.3.4. 아시아 대륙
2.3.4.1. 서아시아2.3.4.2. 남아시아2.3.4.3. 동남아시아2.3.4.4. 동아시아
2.3.5. 오세아니아
3. 영국 사회
3.1. 사회계급(Social Class)
3.1.1. 상류층(Upper Class)3.1.2. 중산층(Middle Class)3.1.3. 노동계급(Working Class)3.1.4. 빈민층(The Poor)
3.2. 정치 구조: 입헌군주제
3.2.1. 여왕: 국가원수3.2.2. 영국 총리: 정부수반3.2.3. 의회: 양원제
3.3. 사회상
3.3.1. 주요 키워드
3.3.1.1. 서구권3.3.1.2. 서구권 외
3.3.2. 산업의 발전3.3.3. 현대적인 범죄조직의 등장3.3.4. 종교3.3.5. 대중문화의 태동3.3.6. 사회복지3.3.7. 교육3.3.8. 제국주의
3.3.8.1. 미국의 식민지화(1607 ~ 1783)3.3.8.2. 인도 식민지화(1757 ~ 1947)
3.3.8.2.1. 경작
3.3.8.3. 캐나다의 식민지화(1763 ~ 1982)3.3.8.4. 호주의 식민지화(1787 ~ 1986)3.3.8.5. 말레이시아 식민지화(1826 ~ 1957)3.3.8.6. 홍콩 식민지화(1842 ~ 1997)3.3.8.7. 아프가니스탄 보호국화(1880 ~ 1919)3.3.8.8. 이집트 보호국화(1882 ~ 1922, 1956)
3.3.9. 식민지 플랜테이션
4. 문화
4.1. 상류층 문화4.2. 대중문화4.3. 교통·통신수단4.4. 의복
5.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인 목록
5.1. 문학5.2. 과학·공학5.3. 철학5.4. 예술5.5. 기타
6.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작품내 연도)
6.1. 소설6.2. 동화6.3. 그래픽 노블6.4. 영화6.5. 드라마6.6. 연극/오페라/뮤지컬6.7. 만화6.8. 애니메이션6.9. 게임

1. 개요

1901년, 빅토리아 시대 말 잉글랜드 북부의 노동자들을 촬영한 동영상

Victorian Era (1837 ~ 1901)
We are not interested in the possibilities of defeat; they do not exist.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패배 따위에 관심도 없습니다.[1]
빅토리아 여왕, 제2차 보어 전쟁에 대해, 1899년
Great Britain no time to lose
대영제국은 해 질 날이 없다.(의역)
당시 대영제국의 위상을 짐작케하는 빅토리아 여왕의 언급, 1883년

대영제국 시기, 빅토리아 여왕(1819 ~ 1901)이 여왕으로 즉위한 1837년부터 사망한 1901년까지 64년간의 치세를 빅토리아 시대라 한다. 동시기 한국은 세도 정치기 ~ 구한말, 미국은 서부개척시대였다.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다방면에서 변혁이 있었다. 고전적이면서 보수적인 도덕주의, 엄숙주의와 함께 허영과 위선도 함께 존재하는 시대이자, 합리주의와 발명, 탐구를 지향하던 근대 과학자와 발명가들과 전근대의 유산인 갖가지 미신과 전설, 도시괴담을 믿던 대중들이 뒤엉켜 공존하던 시대로 일컬어진다.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타 유럽국가들과의 경쟁을 통해 신대륙의 식민지들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 영국은 대영제국의 기반을 다지게 되고, 이후 산업혁명이 전개되며 한층 국력이 신장되면서 대영제국 제국주의가 절정에 다다른다. 빅토리아 시대는 이러한 배경 하 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유럽문명, 과학문명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이 사회 전체에 펴져있던 시기( 벨 에포크)이면서, 동시에 거대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부여되었던 비인간적이며 과도한 노동에 반발해 차티스트 운동 등의 노동운동 또한 시작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영화, 애니, 만화, 게임 등 다양한 매체에서 묘사되는 근대 유럽의 모습은 바로 이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혹은 벨 에포크 시대의 프랑스를 따온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실제 빅토리아 시대의 고증이나 역사적인 사건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근대 유럽의 의복이나 사회상, 문화 정도만 차용하면서 작중 시기를 빅토리아 시대라고 설정하는 정도에 그치는게 다수.[2] 즉 창작물에서 빅토리아 풍은 근대 유럽 풍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3] 영국을 모티브로 할 경우 귀족, 집사, 메이드처럼 다소 딱딱하고 고풍적인 분위기인 작품이 많은 반면, 프랑스를 모티브로 했다면 보다 낭만적인 분위기인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이외에도 군사적 분위기를 활용하고자 독일 제국을, 궁정 문화를 극대화하고자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 등 황제국을 배경으로 삼기도 한다. 아직 근대 과학 문명이 과도기에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판타지와 접목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빅토리아 시대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 중 마법과 기계장비를 동시에 사용하는 세계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강대국 사이의 전쟁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시대인 만큼, 역사적인 사건이 중심 소재가 되는 작품은 국가 간의 전쟁보다는 국가 내부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운동이나 이와 관련된 당대 민중의 생활상을 그리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국가 사이의 전쟁을 소재로 삼으려면 당대에 절정에 달했던 식민주의를 묘사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주인공 측으로 주로 나오는 유럽이 가해자가 되므로 단순히 모티브만 따오고 중심 소재는 역사적 사건과 무관한 별도의 장르( 추리물, 로맨스 등)가 많은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또한 스팀펑크 장르도 산업혁명의 아이콘이 영국인 영향으로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영국 또는 서유럽을 모티브로 삼은 경우가 많다.

서양사에서 벨 에포크와 함께 근대를 상징하는 시대로, 영미권에서는 보통 근대 양식을 빅토리안(victorian)이라고 칭한다. 이렇게 서양에서는 근대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시대이기에 당시의 생활상을 소개하는 자료들도 여럿 있는데, 여기에 관심있다면 좋은 자료이다.

2. 시대

2.1. 빅토리아 시대 이전

2.2. 연표

빅토리아 시대/연표 참조.

2.3. 동시대 국가들의 수장들

대영제국의 구성원은 파일:영국 국장(1837-1952).svg 1837년~1952년 당시 영국 왕실 문장 사용.

2.3.1. 아메리카 대륙

=====# 미국 #=====
=====# 캐나다파일:영국 국장(1837-1952).svg #=====
=====# 멕시코 #=====
=====# 브라질 #=====
=====# 아르헨티나 #=====

2.3.2. 유럽

=====# 영국파일:영국 국장(1837-1952).svg #=====
=====# 프랑스 #=====
=====# 독일 #=====
=====# 오스트리아 #=====
=====# 헝가리 #=====
=====# 이탈리아 #=====
=====# 바티칸 #=====
=====# 스페인 #=====
=====# 포르투갈 #=====
=====# 네덜란드 #=====
=====# 벨기에 #=====
=====# 덴마크( 유틀란드 반도) #=====
=====# 스웨덴-노르웨이( 스칸디나비아 반도) #=====
=====# 러시아 #=====
=====# 루마니아 #=====
=====# 세르비아 #=====
=====# 그리스 #=====
=====# 튀르키예 #=====

2.3.3. 아프리카

=====# 이집트 #=====
=====# 모로코 #=====
=====# 라이베리아 #=====
=====# 가나파일:영국 국장(1837-1952).svg #=====
=====# 콩고민주공화국 #=====
=====# 남아프리카공화국파일:영국 국장(1837-1952).svg #=====
=====# 에티오피아 #=====

2.3.4. 아시아 대륙

2.3.4.1. 서아시아
======# 사우디아라비아 #======
======# 오만 #======
======# 이란 #======
2.3.4.2. 남아시아
======# 인도파일:영국 국장(1837-1952).svg #======
======# 네팔 #======
2.3.4.3. 동남아시아
======# 인도네시아 #======
======# 태국 #======
======# 베트남 #======
2.3.4.4. 동아시아
======# 중국 #======
======# 홍콩파일:영국 국장(1837-1952).svg #======
======# 한국 #======
======# 일본 #======

2.3.5. 오세아니아

=====# 호주파일:영국 국장(1837-1952).svg #=====
=====# 뉴질랜드파일:영국 국장(1837-1952).svg #=====
=====# 통가 #=====
=====# 하와이 #=====

3. 영국 사회

3.1. 사회계급(Social Class)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 계급에 따른 생활상을 소개하는 영상.

3.1.1. 상류층(Upper Class)

토지를 보유하고 노동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유한계급. 전근대 시대부터 전통적인 지배층으로 군림하며 특권을 누리던 계층이다. 비록 부르주아의 등장과 근대적 시민의식의 성장 등으로 이전처럼 절대적인 지위는 아니게 되었지만,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들의 정치, 경제적 영향력은 막강했다. 하지만 이들의 드높은 지위도 1차 세계대전으로 전근대적 귀족체제가 붕괴되면서 사회·역사적 상징성 외에는 영향력을 대폭 상실하게 된다. 물론 기존에 쌓아둔 부가 어디 가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부 몰락 귀족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경우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해 기업가로 변신하는 식으로 경제적 지위는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3.1.2. 중산층(Middle Class)

근세부터 지속적으로 성장해 온 중산층은 근대 산업혁명 시대를 거치며 자유방임주의 경제와 대량생산 시대라는 새로운 사회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3.1.3. 노동계급(Working Class)

일반적으로 서민 내지는 하류층으로 취급되던 신분이다. 당시 영국인의 절대다수는 이 노동계급에 속했다.
특히 대중의 인식과는 다르게 집사와 메이드는 위의 막노동자들보다는 좋은 대우[9]를 받으며 일을 했기에 노예같은 위치가 아니여서 어느정도 인간적인 삶과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기술발전으로 청소기가 등장하고, 임금상승으로 고용유지가 어려워지자 왕실이나 대귀족 가문 몇몇을 제외한 일반 중산층 가정의 메이드들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들 중 일부는 경력을 활용해 카페를 차리거나 메이드 카페 연관업종(청소, 빨래방 등)에 재취업하여 종사하기도 했다.

3.1.4. 빈민층(The Poor)

3.2. 정치 구조: 입헌군주제

17세기의 명예혁명이래 영국은 군주가 자의적으로 통치하지 못하고, 의회의 승인 하에 법을 지켜가며 통치를 해야 한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최초로 확립한 나라가 되었다. 이 시대의 입헌군주제는 지금의 현대적 입헌군주제와는 달리 엄연히 군주가 통치에 참여했으며, 다만 통치를 주도하는 내각과 의회와의 협의를 거쳐 법에 입각하여 통치한다는 개념에 가까웠다. 군주가 입장을 밝히거나 요구를 하면 내각에서 결정하는 식.

3.2.1. 여왕: 국가원수

윌리엄 4세의 조카로 성인이 된지 20여일만에 왕위에 오른 빅토리아 여왕은 60년을 넘게 재위하며 현대 영국의 정치, 사회, 문화의 확립에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또한 제국주의적 정책 또한 절정에 달했다. 초기에 여왕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총리를 자의적으로 지명하는 등의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으나, 중반 이후부터는 의회와 내각에 더 많은 권한을 맡기고 자신은 외교 정책 등 중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에 참여하는 형태로 물러섰다. 이는 현대 영국의 입헌군주제 원칙인,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를 확립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 사실이 알려진 수 십 년 후 일하지 않는 왕이란 이미지가 구축되었다.[10]

3.2.2. 영국 총리: 정부수반

3.2.3. 의회: 양원제

빅토리아 시대에 들어, 이전 시대부터 이어진 두 주요 정파였던 휘그당 토리당은 각각 자유당 보수당으로 진화함으로서 현대적 정당 체제, 현대적 양당제를 확립했다. 총리 지명 역시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의 당수가 임명된다는 원칙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3.2.3.1. 귀족원( 상원)
지배층(귀족, 성직자)으로 구성.
빅토리아 시대의 상원은 지금과는 달리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이라도 상원에서 부결되는 바람에 무산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또 상원의원 중에서 총리로 임명되는 경우도 아직 이 시기까지는 존재하는 등, 하원과 상원이 서로를 견제하는 구조였다.
3.2.3.2. 서민원( 하원)
중산층(부르주아 등)와 피지배층(노동자, 하류층)으로 구성

3.3. 사회상

3.3.1. 주요 키워드

3.3.1.1. 서구권
3.3.1.2. 서구권 외

3.3.2. 산업의 발전

인간과 동물의 힘을 이용하던 형태에서 증기의 힘을 이용하는 기계장치, 증기기관이 산업에 적용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특허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자본가가 탄생했다.

증기기관은 초기에는 방적기의 형태로, 이후에는 증기기관차, 증기선의 형태로 응용되면서 단순히 인간의 노동을 대치하게 되는 것을 넘어서 기존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 장거리 여행등의 전세계적 육상, 해상 공공교통수단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산업 혁명으로 확산된 부의 불평등이나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인해 하층민의 삶은 처참했고, 이는 공산주의 사상을 낳아 20세기 내내 치열하게 벌어질 사상 대립을 예고했다.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을 집필한 곳도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이었다. 그러나 정작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한 장소는 빅토리아 시대의 서유럽이 아닌 20세기 초입의 동유럽이었다.

3.3.3. 현대적인 범죄조직의 등장

근대화를 통해 다양한 산업이 발전하고, 각지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도시로 유입되면서 19세기 후반부터 자연스레 갱스터, 마피아같은 현대적인 범죄조직들도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무역이 활발한 리버풀, 글래스고 같은 항구도시나 공업이 크게 발달한 런던, 버밍엄, 맨체스터 같은 도시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이후에 범죄조직들은 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20~30년대 전간기의 혼란한 사회상을 이용해 크게 성장하여 도시의 치안을 위협하기도 했는데, 이런 갱스터들의 모습은 BBC의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에서 잘 묘사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악명높은 갱단들

3.3.4. 종교

종교 간의 갈등은 비록 내부적으로는 지속되었지만 이전처럼 격렬하게 갈등이 표출되지는 않았다.[11] 당시 성공회는 고교회파와 저교회파로 나뉘어 있었다. 고교회파는 초기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전례의식 등을 중시했고 저교회파는 좀 더 개신교적인 성향을 띄었다. 이들의 반목 끝에, 고교회파가 대거 가톨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톨릭이 1850년, 비오 9세가 영국에 교구를 재설치하고 추기경을 서품하며 다시 사목을 시작했다. 한편 성공회 내부에서 빈민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며 비판하는 일파가 대두되었다. 존 웨슬리로 대표되는 이들은 복음주의를 주장하며 결국 다른 종파로 떨어져 나가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감리교이다. 이러한 성공회를 제외한 신교는 영국에서 비국교회(Non-conformist)로 통칭되었는데, 17세기에 이런 비국교회 신교들에 대한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고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러서는 감리교, 퀘이커, 침례교, 장로회 등 다양한 교파들이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불가지론이 크게 대두되었으나 무신론은 각광 받지 못했다. 법으로 대놓고 신성모독법이 있어 무신론을 정죄했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유럽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으며, 영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계층에 상관없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흠으로 여겨졌다.[12]

이 시대에는 종교적인 도덕성이 이전보다 훨씬 강조되었다. 특히 성문화의 경우 이전 시대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양상을 띄었다. 성적인 언급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는 것은 상당히 무례한 일이었다. 나폴레옹 시대만 해도 기혼 여부와 관계없이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나, 빅토리아 시대에는 외도가 사회적으로 크게 지탄받을 일이 되었다. 이혼은 여전히 종교적으로 기피되었고, 혼전순결은 전보다 더욱 중시되었으며 여성에게 더 엄하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엄격한 성도덕성 때문에 불감증을 겪는 여성이 늘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도시의 발달과 빈민층의 등장으로 음지에서 성매매가 더욱 활성화되는 아이러니를 빚기도 했다.

3.3.5. 대중문화의 태동

이전에는 지배층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을 위해 만들어지던 문화들(그림, 소설, 시, 연극, ...)이 도시중심으로 모인 대규모의 노동자들이 즐길 수 있는 형태와 내용으로 변해가면서, 대중문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셜록 홈즈와 같은 추리소설, 대규모의 마술쇼, 뤼미에르 형제 열차의 도착 같은 초기 형태의 영화 등 사람들의 여가시간에 즐길만한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이 생겨난다. 이러한 초기 대중문화는 바다 건너 미국에 영향을 주면서 20세기 이후 주류가 되는 미국 대중문화의 기초가 된다.

공교롭게도 빅토리아 시대, 정확히는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시작된 19세기 유럽은 근대 과학의 시대이기도 하면서 중세의 미신과 오컬트의 잔재가 남아있던 과도기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현재까지 내려오는 판타지적 문화요소들의 이미지가 정립된 시기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당시 상류층과 젠트리들 사이에서 위자 보드같은 강령술이나 흑마술, 최면술과 점성술 등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점, 뱀파이어처럼 일부 지역의 미신에서 머무르던 도시전설이 1897년 출판된 브램 스토커의 소설, ' 드라큘라'를 통해 대중적 문화요소로 자리잡고 고딕 소설이 유행하는 등 초자연적, 초과학적인 도시전설들이 과학발전에 힘입은 파급력을 통해 그 문화적 영향력을 키우는 흥미로운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즉, 전근대 시대의 미신이 현대 문화요소로서의 오컬트와 판타지로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3.3.6. 사회복지

1870년대 대불황 시대가 시작되자, 피지배층이었던 중류계급은 정치에 참여하는 형태로, 노동자 계급은 파업의 형태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에서 1830년대에 차티스트 운동을 때려잡은 것처럼 이러한 움직임을 억누르려고 하였으나,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성인 남성의 보통 선거가 가능해졌다. 이로서 보편적인 교육, 복지, 위생 등에 대해 정부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는 이전에는 각각의 영지 내에서 자체적으로 처리되던 일들이, 산업혁명을 통해 국가라는 규모로 사회가 통합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파악하고 대응, 혹은 예측하기 위한 시스템( 학문, 부처, ...)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권리는 여성에게 부여되지 않는 반쪽짜리였고,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하던 시기임에도 여성의 자유과 권리는 인정받지 못했다. 서프러제트에 의해 여성 참정권 운동이 발생했으나, 빅토리아 시대가 끝난 1차 세계대전 이후에서야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3.3.7. 교육

19세기 초기 영국 대학들의 모습은 현대의 대학들과 크게 달랐다. 당시 영국의 본토인 브리튼 제도에서 대학으로서 인가 받은 교육기관은 아래와 같았다. ()
이 중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경우 모든 학생이 수학 시험(Mathematical Tripos; 현재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학부생들이 학년 말에 치는 시험 혹은 수학 전공 자체를 가르키는 말)을 치러야 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의 경우 모든 학생이 고전 그리스어 라틴어를 배워야 했다. 그러나 1851년 정부의 권고에 따라 해당 의무사항들이 폐지되고 대학 교육과정이 다양화되기 시작하여 자연과학, 사회과학 분야 전공 및 학과들이 신설되었다. 또한 옥스브리지의 기존 칼리지들은 모두 남자대학이었으나, 1870년대부터는 여자대학 칼리지들이 세워지기 시작한다.[13]

빅토리아 시대 들어 교육기관의 설립도 활발해졌다. 1832년에는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더럼 더럼 대학교가 설립되고 인가받았으며, 1836년에는 런던에서 1826년 설립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과 킹스 칼리지 런던(KCL)이 결성한 런던 대학교 또한 대학 인가를 받는다. 또한 전국 각지에 대학 인가는 받지 못한 실업 및 예체능 계열 고등교육기관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이들 중 다수는 먼 훗날 인가를 받아 정식 대학으로 승격된다. 예를 들어 1824년 맨체스터 기술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맨체스터 대학교, 1858년 케임브리지 예술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앵글리아 러스킨 대학교 등.

이러한 교육기관의 확충 및 현대화는 빅토리아 시대 이후에도 계속되어 1900~1960년에는 붉은 벽돌 대학(), 1960~1992년에는 판유리 대학()들이 설립된다.

3.3.8. 제국주의

폭발하는 생산성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깥으로 계속 진출하여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 자원을 싼 값에 들여와 높은 값에 팔기 위해서는 식민지인의 희생이 필수였고, 불만이 쌓여가서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만들기도 했다. 이 시기 어지간한 비유럽 국가들은 열강의 식민지가 되어가는 전철을 밟아가다 결국 식민지가 되었다.
3.3.8.1. 미국의 식민지화(1607 ~ 1783)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뒤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동해안에 식민지가 건설되었으나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미국 스페인령은 남부 플로리다 텍사스, 루이지애나, 오클라호마 그리고 서부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였다. 남부는 쿠바 부왕령의 일부였다.

1607년, 영국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에 건설한 식민지가 현 미국의 모태가 된다. 그 이후 1620년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달한 청교도[14]들이 건설한 식민지[15]는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이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운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소상공인들이라서 낚싯대 하나 챙겨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황무지 개척에는 능력이 없었다. 그 결과 제임스타운의 전례를 밟기라도 하듯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12월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가 다시 영국으로 떠난 이듬해 4월에는 거의 절반인 54명만 살아남아 있었고, 그나마도 절반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이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순전히 인근에 거주하던 원주민 왐파노와그족들의 호의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나마도 두 번이나 유럽인에게 납치당하고 노예로 팔리는 등의 고생을 하다가 겨우 메이플라워호 도착 1년 전에 돌아왔다가 2년 뒤에 역병으로 사망한 티스콴툼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이 사람만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표류인들? 이 사람들은 티스콴툼이라는 발음도 못해서 스콴토라고 불렀다.

여기서 여담을 붙이자면, 티스콴툼이 죽고 정착민들이 자력 생존이 가능해진 이후에 왐파노와그 족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한 것에서 짐작하겠지만, 필그림들은 원주민들을 사탄의 종자라고 불렀다.[16] 하지만 정착민들의 계속되는 확장과 더불어 왐파노와그 부족의 영역에 침범하게되고 결국 필립왕 전쟁 때, 왐파노와그들은 정착민들을 공격해서 양측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정착민들에 의해 왕파노와그 족은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된 평화협정이 맺어진 지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거의 절멸했다. 이 시기를 다룬 글.

이후 계속된 식민 사업으로 미국 동부 13개 주의 기초가 되는 식민지들이 세워진 상황(1732년)에서 여러 요인들로 인한 본국과의 불화가 생겨난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 재정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영국이 치안 유지비를 식민지들에게 부담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사실 미국에 주재하던 밀수업자들(아직은 미국인 아님)이 영국의 무역 재정 적자를 악화시킨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처음엔 관계 개선을 원하였을 뿐 독립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식민지 출신 온건파들의 주된 입장은
"저기요, 그렇게 세금 의무 주시면 권리도 줘야죠."
정도로. 프랭클린의 "대표 없는 곳에 세금도 없다."라는 유명한 발언이 이런 의견의 연장선이었다. 다만 실제로는 세금 못 내겠다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식민지 대표들이 영국에 가서 대서양 건너 식민지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은 개소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실제로 당시 기록을 봐도 정치적 권리를 달라는 것보다 세금 내기 싫다가 훨씬 많다.

여튼 영국 본토는 무시하고 인지세를 걷어서 식민지의 공업성장을 억제하여 식민지를 영국의 시장 정도로 유지하려 들었다. 이에 대해서 영국인들이 식민지인들에게 참정권을 주면 어느 순간엔가 그 세력이 대책없이 커져 버린 식민지가 본토를 누르고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될 것을 우려했다는 설도 있다. 현재 미국과 영국의 내수경제 규모를 생각해보면 일리있는 판단이다. 소규모 권리를 인정해주더라도 실제 정치-경제적 영향력과 행사 가능한 권한의 괴리로 인한 불만은 터져나올 것이며, 결국 독립을 하던지 아니면 본인들의 힘에 걸맞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후자가 된다면 본토가 식민지에 먹히게 되는 셈.

그래서 점차 급진파가 여론을 장악하면서[17] 렉싱턴 전투를 기점으로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1775~1783). 이에 영국은 식민지 독립을 막기 위한 약 4만여 명의 군대를 대대적으로 파견하게 된다.

그에 맞서서 독립 분자(Patriot)들은(아직도 미국인은 아니다)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대륙군(Continental Army)을 결성, 자발적으로 참여한 민병대 등과 함께 독립전쟁에 나선다. 당시 세계최강이던 영국군의 세력 탓에 한동안 영국에 유리하게 전황이 흘러갔으나, 결국은 프랑스 등과 동맹을 맺은 미국인들이 영국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거둔다. 이 와중에 프랑스는 너무 많은 전비를 사용해 훗날 혁명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 역시 문제는 돈. 독립 전쟁 직전에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있었는데, 이 사건 때문에 미국인들은 홍차 대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물론 실상은 보스턴 차 사건 항목에도 있지만, 영국 상인에 의해서 인도와 중국에서 건너와야 하는 차보다 중남미에서 생산된 커피를 미국 상인들이 직접 들여오는 쪽이 훨씬 저렴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영국은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과 미시시피 강 동쪽의 영유권을 승인하였고, 1787년 미국은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미국의 국기에 줄이 13개 그려져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시대에 연방에 가입한 주가 13개였기 때문. 첫 번째로 가입한 주는 델라웨어 주. The First State라고 불린다.
3.3.8.2. 인도 식민지화(1757 ~ 1947)
근세 이후 인도 각지에 침투하던 유럽 세력은 대체로 프랑스 영국 동인도 회사(영국의 경우 1757년 설립)로 요약되는데, 7년 전쟁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군이 인도 현지 군대와 합세한 프랑스를 격파하면서 지배력을 굳혔고,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라는 동인도 회사 소유의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다.이후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각지 중소 국가들을 격파하고 영국이 전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으나, 무굴 제국 왕실은 델리 지역만을 통치하며 형식적으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1858년 일어난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면서 무굴 제국 왕실(과 함께 동인도 회사도)이 폐지되었고, 1877년에는 영국령 인도 제국(1858~1947, 황제 즉위는 1877)으로 굳혀진다. 이 시기까지 로이의 브라모 사마지 운동 등 의식 개혁 운동과 교육의 보급 운동 등이 진행되었으나, 추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식민 지배 시기 마하트마 간디 등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자와할랄 네루와 인도 국민 회의 계통의 독립 운동,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연맹 등의 독립 운동 등이 계속되어 인도의 주권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대체로 인도의 독립 운동은 자치권을 확대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도입하면서 자신들의 의석 보장을 원하는 이슬람교와 자신들에게 유리한 일반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힌두교 세력이 서로 대립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군과 맞서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일본군을 이용해 영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려 한 찬드라 보스의 활동도 있었다. 1942년에는 마하트마 간디의 지도 하에 대대적인 저항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일본 제국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했으므로 이들 운동을 신속하게 무력 진압했다.
3.3.8.2.1. 경작
3.3.8.3. 캐나다의 식민지화(1763 ~ 1982)
7년 전쟁의 끝나면서 프랑스 식민지들이 영국의 식민지로 굳어짐. 이후 영국은 캐나다 지역이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위해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프랑스어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특권을 인정해줌.
3.3.8.4. 호주의 식민지화(1787 ~ 1986)
1787년 영국 호주 대륙의 동반부를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Colony of New South Wales)로 선포한다. 그후 영국인들의 호주 대륙 해양 탐사에 따라 식민지는 차츰 넓어져가서 가장 넓었을 시절의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는 퀸즐랜드, 빅토리아, 태즈메이니아, 노던 준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까지 모두 포함하는 거대 식민지였다.

1788년 영국이 유형수들을 시드니에 상륙시킴으로써 호주 이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륙의 동남부를 차지하며, 대륙 개발의 거점이 되었던 지역이다.

이민으로 인구와 이민자 정착지가 증가하면서 1825년 태즈메이니아가 별개의 식민지로 떨어져나간 것을 시작으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빅토리아, 퀸즐랜드가 별개의 식민지로 떨어져나갔으며, 1863년에는 노던 준주의 영역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관할로 넘겼다. 1901년에 영국의 자치령으로서 호주 연방이 결성되면서 뉴사우스웨일스는 호주의 주가 되었고, 1911년에 신수도 건설을 위해 캔버라와 그 일대를 호주 수도 준주로 떼주고 1915년에는 연방정부의 물류수송과 연방 해군의 조차를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 저비스베이 준주 지역을 떼주면서 현재의 영역이 확립되었다. 오늘날에도 호주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강력하며 중요한 주이다.
3.3.8.5. 말레이시아 식민지화(1826 ~ 1957)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급진전했다. 네덜란드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공격을 받아 정복당하고, 왕은 영국으로 망명해 아시아 지역에서의 네덜란드 지배권을 모두 영국에게 위임했다(1795). 그러자 영국은 더욱 대담하게 동남아시아 식민지 경영에 착수하여 페낭에 영국 상관을 설치하고, 말라카 및 바타비아를 접수했으며, 향료 제도에 이르기까지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영국은 페낭을 얻었고, 이 곳을 시작으로 해서 1819년에 싱가포르를 건설하기까지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증대해 갔다. 1824년에는 네덜란드와 맺은 조약(런던 협약)에 의해 수마트라, 자와(한국에 익히 알려진 자바(Java)는 영문명) 등 현재의 인도네시아 지역은 네덜란드가, 말레이 반도 지역은 영국이 관할하기로 결정되었다.

결국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를 한데 묶어 ' 해협 식민지(Straits Settlements)'를 만들기에 이른다(1826). 하지만 이 때까지의 영국의 관심은 무역로 장악이었을 뿐이고, 특히 중요한 것은 '중국으로의 길' 이었다. 해로상의 거점을 장악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당시까지는 말레이 반도에서 수익성 높은 자원이 생산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19세기부터 영국은 말레이 반도 그 자체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 중심에는 주석이 있었는데, 주석을 이용한 함석 제조 기술이 발전하고 수요가 증대함으로써 말레이 반도의 주석 광산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던 것이다.

주석 광산의 운영에는 세 집단이 관련되어 있었다. 첫째는 주석 광산을 보유한 술탄이었고, 둘째는 그것을 운영하는 영국의 자본가들이었으며, 셋째는 바로 주석 광산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이렇게 말레이 반도로 건너온 중국인들이 뛰어난 교육열과 부지런함으로 영국령 말레이시아의 중간 공무원들이 되기도 하고 말레이시아의 경제권을 장악하기도 하면서 소외된 말레이계 사람들과 점점 반목하게 된다. 당시 영국인들은 말레이계열은 착하고 성실하지만 단순하고 게으르고, 중국인들은 능력있지만 영악하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편향적인 말레이계-중국계 고정관념은 동남아에선 아직도 통한다. 심지어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통한다. 영국인 지주들은 말레이계 사람들을 하인으로 삼아 집안일을 시켰고 중국계를 부두나 시장에서 일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아직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구 통계 작성시에 '기타' 항목이 아닌 별도 항목으로 작성될 정도로 숫자가 많다.

한편 19세기 말부터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한 고무 플랜테이션 역시 말라야의 경제에 큰 역할을 했다. 20세기 초가 되면 고무가 말라야의 주 수출품목으로서 주석과 경쟁하게 되었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말레이 반도의 고무 농장 면적이 전 세계 고무 농장 면적의 절반에 달할 정도였다. 주석의 생산을 주로 중국계 광산 노동자들이 담당했다면, 고무 생산은 주로 계약이민으로 넘어온 인도계 농장 노동자들이 담당하였다. 20세기 초 고무 산업의 급성장에 발맞추어 말라야의 인도계 이민자 인구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고무 농장은 주로 페락, 슬랑오르, 크다, 조호르, 느그리슴빌란 5개 주에 집중되어 있었다.
3.3.8.6. 홍콩 식민지화(1842 ~ 1997)
당시 중국의 청나라와의 제1차 아편전쟁 이후 1842년 홍콩(정확하게는 홍콩 섬)을 양도받게되고, 이곳에 빅토리아 시티를 건립하고 총독부를 신설한다.
3.3.8.7. 아프가니스탄 보호국화(1880 ~ 1919)
독립국이 된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가 영국의 심기를 건드려서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전쟁에서 패전하여 사실상의 보호국 신세로 전락한다. 7개월 뒤, 봉기가 일어나고, 영국이 이를 진압한 후 아프가니스탄은 정식으로 보호국이 된다.

이후, '압둘 라흐만 칸'과 그의 후계자인 '하비불라 칸' 시대까지 친영정책이 유지되어 영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하비불라 대에 이르러서는 영국이 아프간에 지나치게 간섭하여 들기 시작하여 아프간은 오스만 제국과 독일을 끌어들여 영국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오스만과 독일과의 여러 차례 교류와, 영국이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아프간을 방어해 낼 여력이 없음을 알게 된 '하비불라 칸'은 아프간을 완전한 주권국으로 부활시킬 꿈을 꾸었다. 이에 하비불라는 영국에게 이를 요청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거절하고, 1919년 2월 하비불라는 암살당한다.

하비불라가 암살당한 이후 그의 동생인 나스랄라 칸과, 하비불라의 아들이었던 아마눌라 사이에 왕위계승 분쟁이 일어났다. 보수파가 나스랄라를 지지하고 민주주의적 성향을 띈 개혁파가 아마눌라를 지지했는데, 아마눌라가 분쟁에서 이기고 나스랄라를 구금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라는 극히 불안정했고 보수파들은 공공연히 쿠데타를 이야기하고 다녔다. 보수파의 지지를 얻고 내부 불안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아마눌라는 영국령 파키스탄과 인도를 침공하였다.

비록 영국군이 아프가니스탄군에 비해 우월하다고는 하나, 이미 영국군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상당한 군인과 장비를 소모한 상태였기에 잘 해본다면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다. 초기에는 이를 이용하여 아프가니스탄군이 상당히 진군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영국군의 반격과 아프가니스탄군 사이의 내부 분열로 인해 오히려 밀리기 시작했다. 당시 아프간군은 통일된 군대가 아니라 여러 부족들의 민병대를 규합해서 모은 연합부대의 성격에 가까웠기에 분열이 매우 극심했다. 특히 부족의 족장들을 국왕이 통제하지 못하다 보니 단합력도 떨어졌다. 결국 아프가니스탄군은 1천명의 전사자를 냈고 나중에는 전세가 아프가니스탄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둘 다 싸움을 지속할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결국 양측이 라왈핀디에서 회담을 가져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완전 독립을 보장하며 떠났고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면서 끝났다. 아프가니스탄은 그리도 원하는 완전한 주권국이 될 수 있었지만, 장기간 식민통치를 받고 독립전쟁을 치르며 큰 타격을 입었고 영국이 보내주던 막대한 액수의 보조금도 사라져 한동안 재정난을 겪어야만 했다.
3.3.8.8. 이집트 보호국화(1882 ~ 1922, 1956[18])
1870년대, 이집트는 많은 이권을 영국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특히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주식을 영국이 구입하면서부터 간섭이 심해졌다. 1879년, 이집트에선 아라비 파샤를 중심으로한 민족주의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Urabi revolt) 그러자 1882년, 영국은 이에 개입해 군대를 파병하였고, 반란군은 영국군에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그 이후 이집트에는 영국군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약 74년간 영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19] 이집트의 민족주의자들은 반영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진압당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1914년, 이집트에서는 후세인 카멜[20]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21] 이집트 술탄국이 설립된다. 그러나 영국은 이집트를 식민지로 병합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자 이를 알게알게된 이집트인들은 영국의 적국인 독일 제국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를 독립시키기 위해 친독 성향을 가지기도 했다. 할수 없이 이집트를 자국 편에 끌어들이는 것을 원한 영국은 공식적인 보호령으로 삼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이집트인들을 전쟁터로 동원하고, 전쟁 물자도 수탈해간 영국에 대해 분노한 이집트인들은 전후인 1919년, 대규모 반영 운동을 일으키는데, 이게 바로 1919년 이집트 혁명이다.

결국 영국은 1922년 이집트를 이집트 왕국이라는 왕국으로 독립시킨다. 그러나 영국군은 여전히 주둔하고 있는 상태였고, 수에즈 운하도 여전히 영국 소유였다. 경제적으로도 영국에 의존하는 성향이 컸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령 리비아를 통하여 이집트를 침공했으나 영국군이 이탈리아군으로부터 이집트를 보호하였다. 2차 대전 이후, 영국은 자국의 군대를 수에즈 운하를 제외한 이집트의 영토에서 철수시킨다.

3.3.9. 식민지 플랜테이션

4. 문화

4.1. 상류층 문화

4.2. 대중문화

4.3. 교통·통신수단

4.4. 의복

5.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인 목록

5.1. 문학

5.2. 과학·공학

5.3. 철학

5.4. 예술

5.5. 기타

6.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작품내 연도)

6.1. 소설

6.2. 동화

출판년도 순으로 기재

6.3. 그래픽 노블

6.4. 영화

6.5. 드라마

6.6. 연극/오페라/뮤지컬

6.7. 만화

6.8. 애니메이션

6.9. 게임


[1] 영어에는 Royal We 혹은 Majestic Plural 으로 불리는 보통 서구의 군주가 스스로를 복수(We)로 칭하는 장엄 복수형이라는 어법이 존재하나 위 발언은 당시 보어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전시 내각이 소집된 상태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다소 소극적인 행보를 보인 총리를 꾸짖으면서 나온 것으로 정황상 본인 혼자만을 가리키기보다는 내각 전원을 칭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2] 대부분의 중세 판타지가 중세 시대의 고증에는 관심이 없고 단순히 중세의 시대적인 분위기만 차용하는 것과 유사하다. [3] 물론 엄밀히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절대왕정이나 프랑스 대혁명, 혹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처럼 빅토리아 시대 이전의 의복이나 시대상을 모티브로 잡은 경우도 있다. [4] 훗날 이탈리아 왕국 제6대 총리를 역임했다. [5] 마지막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총리이자 이탈리아 왕국 초대 총리 [6]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에서 다른 식민지들이 갈라졌다가 호주 연방으로 합쳐진 것이지만, 편의상 뉴사우스웨일스만 넣는다. [7] 참고로 호주에서 이 사람이 활동할 무렵 동시대 미국에서는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이 재직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리스 신화의 인물 이름을 가진 태평양 양쪽의 지도자가 1870년대에 두명 나왔다.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가진 로빈슨 뉴사우스웨일스 총독,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가진 그랜트 미국 대통령. [8] 하루의 일과가 새벽에 일어나 삶은 감자 한개 먹고 저녁 10시까지 일하는 기계부품 같은 삶을 살았다. 이러다가 장애인이 되면 보상은 커녕 해고당하는 것도 모자라 가족들에게까지 버림받은 채 죽어갔다. [9] 정해진 임금, 숙식 보장, 일 잘하면 신분상승, 실내근무 등 인권이 없던 그 시대 치고는 굉장히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주인의 인성에 따라 폭행, 성폭행 사건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10] 하는 일이 있긴 하지만 세부 사항을 국민이 알 수는 없었다. [11] 물론 이후 아일랜드 문제에서 다시 한번 구교와 신교의 갈등 구조가 표면화되지만 애초에 아일랜드는 단순한 종교 갈등이 아니라 민족 갈등 문제와 결부된 것이었다. [12] 대표적으로 셜록 홈즈 시리즈만 봐도 증인들이 용의자의 평소에 행실이 좋지 않다며 자주 지적하는 점 중 하나가 신앙심이 없다는 것이다. [13] 참고로 옥스브리지 주요 칼리지들 및 미국 아이비 리그 대학들의 남녀공학화는 1960~80년대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14] Puritan인데, 이들을 청교도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많다. 영국역사에서 청교도는 국교회에 대항해서 개혁운동을 벌인 이들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들처럼 영국국교회를 버리고 이탈한 이들에 대해서는 분리주의자(Separatist)라고 부른다. [15] 제임스타운에서 북쪽으로 수백km 떨어진 곳에 위치 [16] '영어를 할 줄 아는 스콴토'는 자신들의 정착을 돕는 하느님의 사자였다. [17] 이 과정에서 토마스 페인의 팜플릿 '상식'이 큰 역할을 했다. [18] 제2차 중동전쟁 이후 [19] 이때부터 영국의 비공식적인 보호령이 된다. [20] 참고로 이 사람은 이라크 후세인 카멜이 아니다. [21] 19세기 중반 쯤부터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상황이였으나,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였다. [22] 현대 관점에서는 스팀펑크로서의 성격도 갖는다. [23] 현재 기준으로는 체코인이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오스트리아 제국민임. [24] 엄밀히 말해 빅토리아 시대 배경은 아니나, 출간은 빅토리아 시대에 이루어졌고 시대적 배경인 6월 혁명은 빅토리아 시대 초기와 매우 인접한 시기이기에 이곳에 작성한다. [25] 따지고 보면 빅토리아 시대 이후에 쓰인 작품도 많은데 여전히 그 시절의 향수를 부르는 게 인기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26] 단, 마지막 10권은 에드워드 시대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