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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0:58:04

북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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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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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누트 대왕 시기의 최대 강역
1013 ~ 1042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덴마크 왕국 덴마크 왕국
노르웨이 왕국 노르웨이 왕국
잉글랜드 왕국
[[웨식스 왕국|
웨식스 왕조
]]
[[데인로|
데인로
]]
잉글랜드 왕국
[[노르만 왕조|
노르만 왕조
]]
위치 스칸디나비아반도, 유틀란트반도, 그레이트브리튼섬
수도 리베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동군연합
국가 원수
군주 목록 스벤 트베스케그
크누트 대왕
하레크누드
종교 기독교
고대 노르드 종교[2]
언어 고대 영어, 고대 노르드어
주요 사건 1013년 스벤 트베스케그의 잉글랜드 정복
1016년 크누트 대왕 잉글랜드 왕위 획득
1018년 크누트 대왕 덴마크 왕위 획득
1026년 헬가 전투
1042년 하레크누드 승하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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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덴마크어 Nordsøimperiet
노르웨이어 Nordsjøveldet
스웨덴어 Nordsjöväldet
아이슬란드어 Norðursjávarveldi
Norðursjávarríki
영어 North Sea Empire
1. 개요2. 역사
2.1. 크누트 대왕
2.1.1. 잉글랜드 정복2.1.2. 덴마크 왕위 획득2.1.3. 노르웨이 정복
2.2. 크누트 대왕 사후
3.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1013년부터 1042년까지 29년 동안 스칸디나비아에 존재한 제국.

북해 제국, 즉 North Sea Empire라는 명칭 자체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등장한 이름이다. 당시에는 '북해 제국'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 제국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던 걸로 보인다. 북해 제국을 제국으로 분류하는 첫 언급은 1623년에야 등장하고, 그 이전까지는 그냥 덴마크 왕국, 노르웨이 왕국, 잉글랜드 왕국의 느슨한 동군연합체 수준으로만 봤다. 즉 이 동군연합체를 부르는 이름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명칭은 거창한 제국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앙집권적 단일제국은 전혀 아니었다. 북해 제국은 크누트 대왕이라는 정복자에 의해 잠시 하나로 묶였을 뿐이지 크누트 대왕 사후 조각조각 분해된 나라였다.

2. 역사

2.1. 크누트 대왕

2.1.1. 잉글랜드 정복

당시는 북유럽의 바이킹들이 한창 날뛰던 바이킹 시대여서, 바이킹들은 전 유럽을 누비고 다니며 침략을 자행했다. 그중에는 덴마크의 왕 스벤 트베스케그도 있었는데, 스벤 트베스케그는 잉글랜드를 공격하던 중 1014년 2월 3일에 승하하고 말았다. 스벤 왕이 죽자 그의 아들이 원정군 사령관직을 물려받았는데 이 사람 훗날 그 유명한 크누트 대왕이 되는 크누트 왕자였다. 당시 트렌트 강에서 함대를 지휘하던 크누트는 휘하 바이킹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사령관직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크누트는 사령관에 선출되자마자 눈물을 머금고 잉글랜드에서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 귀족으로부터 착취당하던 농민이 바이킹에게 군마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정작 그 시점이 되니 아직까지도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애설레드 2세를 잽싸게 왕으로 복위시키고[3]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미 스벤 왕의 죽음으로 한 차례 큰 충격을 겪은 바이킹이 대오를 정비한 잉글랜드 귀족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고, 결국 크누트와 바이킹 군대는 잉글랜드에서 물러났다.

한편 덴마크 본토에서는 크누트의 형제였던 하랄 2세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크누트로서는 왕위도 없고 잉글랜드 원정도 실패한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마침 노르웨이의 도움으로 어찌저찌 병력을 모아 잉글랜드로 재침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냈다. 크누트는 자신의 함대를 모아 1015년 여름에 다시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잉글랜드가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복위한 애설레드 2세가 제 본성을 못버리고 다시 폭정을 펼치는 바람에 왕과 귀족 사이에서 대대적인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애설레드 2세의 아들들이 바이킹 쪽으로 투항했고, 잉글랜드 왕국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웨식스가 크누트 쪽으로 넘어가버렸다.

이 와중에 정작 애설레드 2세는 1016년 4월 23일 죽어버렸고, 런던 백성들은 에드먼드 2세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대다수의 잉글랜드 귀족들이 크누트 쪽으로 투항했고, 크누트는 그 기세를 몰아 런던을 포위했다. 에드먼드 2세는 잠시 오트포드 전투에서 이기면서 승기를 잡았으나 바로 연이어 벌어진 아산둔 전투에서 대패했다. 기가 꺾여버린 에드먼드 2세는 크누트와 조약을 맺고 템스 강 이북 잉글랜드는 모두 크누트에게, 그 이남 지대만 자신이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에드먼드 2세가 얼마 안 가 1016년 11월에 죽어버리면서 크누트가 잉글랜드의 유일한 왕으로 자리매김했다.

잉글랜드의 유일무이한 군주가 된 크누트는 1017년에 폭군 애설레드 2세의 왕비이자 과부였던 노르망디의 엠마와 재혼하여 영향력을 굳혔다. 그리고 자신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런던 백성으로부터 막대한 재화를 뜯어내 원정군에게 나누어주면서 바이킹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오는 일이 없도록 확실히 막아버렸다. 더는 잉글랜드 내에서 크누트에 저항할 세력은 없었고, 크누트는 잉글랜드의 적법한 군주로 공인받는 데 성공했다.
파일:340px-Earldoms_of_Anglo-Saxon_England.svg.png
북해 제국 시기 잉글랜드 왕국의 백작령 분포.

그후 크누트는 잉글랜드를 네 개의 백작령(earldom)으로 나누었다.[4] 웨식스 지방은 본인이 직접 통치했고, 동앵글리아[5] 야를에 《 빈란드 사가》에 등장한 걸로도 유명한 토르켈을 앉혔다. 북쪽의 노섬브리아에는 노섬브리아 바이킹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에릭 하콘손을 다시 복귀시켰다. 머시아는 기존 백작이었던 에아드릭 스트레오나를 그대로 인정했으나, 얼마 안가 토사구팽시켰다. 1018년에는 다시 두 개의 백작령을 분할했고, 스코틀랜드에 영향력을 뻗기 위해 원정을 시도하기도 했다.

2.1.2. 덴마크 왕위 획득

파일:d3117aaf-0001-0004-0000-000000220398_w996_r1.778_fpx69.95_fpy54.98.jpg
당시 북해 제국의 수도였던 덴마크의 리베
한편 하랄 2세는 1018년 후사없이 승하했다. 후사가 없었으니 크누트가 덴마크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였고, 그는 덴마크를 인수하기 위해 잉글랜드에서 벗어나 덴마크로 향했다. 크누트는 잉글랜드의 신하들에게 자신이 불특정한 '위험'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잠시 떠나있는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겼고, 가끔씩 왕의 부재를 틈타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들을 정벌하기 위해서만 간간히 돌아왔다.

꽤나 비옥했던 잉글랜드와 스칸디나비아 3국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편에 속하는 덴마크가 합쳐지려는 낌새가 보이자 노르웨이 스웨덴은 이를 지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이전에 이미 잉글랜드와 덴마크를 모두 잠시나마 정벌한 적이 있었던 크누트의 부왕 스벤 트베스케그의 다음 목표가 바로 스웨덴과 노르웨이 정복이었기 때문이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1025년 크누트가 잉글랜드에 있는 틈을 타서 덴마크를 기습공격했다. 당시 덴마크의 섭정이자 크누트의 형제였던 울프 야를이 침략군에 합류하면서 덴마크가 스웨덴-노르웨이 연합군의 손에 떨어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바로 행동을 개시한 크누트 대왕은 노르웨이 함대를 기습했고, 헬가 전투에서 스웨덴 함대를 깨부쉈다. 노르웨이의 올라프 2세는 도망쳤고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노르웨이-스웨덴을 꺾고 스칸디나비아의 확고한 패자가 된 크누트는 1027년 로마로 떠났다.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는데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울프 야를을 크리스마스에 죽인 죄를 표면적으로라도 속죄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큰 이유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콘라트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 여행 도중 크누트는 북유럽에서 로마로 가는 순례자들에게 걷는 통행세를 인하했고, 교황청과의 관계도 개선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딸 군힐트와 콘라트 2세의 아들을 결혼시켰고, 옛날에 독일인들이 덴마크계 바이킹( 데인족)들을 쫒아내고 확립해놓은 완충지대를 다시 돌려받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2.1.3. 노르웨이 정복

파일:Cnut-north-sea-empir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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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 제국의 영향권[6]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위치한 크누트 대왕의 무덤
크누트 대왕이 한 차례 노르웨이 군대를 덴마크에서 내쫒았지만 아직 올라프 2세는 크누트 대왕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올라프 2세와 크누트 대왕의 악연은 꽤나 뿌리가 깊은 것이어서, 그 옛날 크누트가 잉글랜드를 정벌할 때 쫒겨났던 애설레드 2세를 다시 잉글랜드로 들여보내 크누트와 맞서싸우게 했던 인물이 바로 올라프 2세였다. 게다가 1024년 크누트 대왕이 올라프 2세에게 자진 복속하여 자신의 가신 자격으로 노르웨이를 다스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올라프 2세는 이를 칼같이 거절했다.

올라프 2세를 더이상 놔둘 수 없었던 크누트 대왕은 노르웨이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뇌물을 뿌려 가신들이 올라프 2세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드는 한편, 1028년부터는 아예 50여 척의 덴마크 함대를 이끌고 노르웨이 해안가 일대를 정벌했다. 올라프 2세가 노르웨이인들로부터 별 인기가 없었던 것도 크누트가 쉽게 노르웨이 정벌을 실행할 수 있는 큰 요인이었다. 올라프 2세는 오슬로피요르드로 도망쳤으며, 크누트는 함대를 이끌고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순회하면서 수많은 족장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아냈다. 결국 올라프 2세는 변변찮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몇 개월만에 스웨덴으로 달아나야 했다. 올라프 2세는 1030년에 다시 귀환하려 시도는 해봤지만 노르웨이인들이 그의 귀환을 원치 않았고, 결정적으로 스티클스타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비참하게 사망했다.

참고로 헬가 전투에서 스웨덴 함대를 꺾은 이후, 크누트 대왕은 스웨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CNVT REX SW', 즉 '스웨덴의 크누트 왕'이라는 동전을 대놓고 주조하면서 외국에 자신이 스웨덴 국왕이라는 걸 강조하려 시도했고, 실제로도 스웨덴 땅 일부는 지배했다. 그러나 전국을 지배했던 잉글랜드와 노르웨이와는 달리 스웨덴은 확고히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 거의 확실하고, 스웨덴을 실제로 다스렸다기보다는 그냥 자신의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 붙인 타이틀이라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스웨덴인들은 끊임없이 크누트 대왕의 골머리를 썩혔고 1030년에 올라프 2세가 노르웨이를 되찾기 위해 돌아올 때는 군함을 지원해주기까지 했다.

그 외에도 크누트 대왕은 로마에서 돌아오자마자 대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봉신국으로 삼았으며 아일랜드섬 일부까지도 영향력을 미쳤다. 더블린이 북해 제국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되었고, 웨일스까지도 반쯤 속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크누트 대왕이 승하하기 직전 전성기의 북해 제국은 노르망디 폴란드와 동맹국이었으며,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속국으로 두고, 본토가 덴마크, 잉글랜드, 노르웨이, 스웨덴에 걸쳐 있는 거대한 크기의 제국이었다.

2.2. 크누트 대왕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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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레크누드 망누스 1세 스벤 2세
이렇게 강성하던 북해 제국은 1035년 크누트 대왕이 승하하자 바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특히 노르웨이에서는 이미 크누트 대왕의 통치 말년부터 제국이 붕괴하고 있었다. 올라프 2세를 죽였던 노르웨이인들이 마음을 바꿔 올라프 2세의 어린 아들이었던 망누스 1세를 새로 데려와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미 노르웨이인들 사이에서 분란이 일어났고, 결국 북해 제국을 받쳐주던 크누트 대왕이 승하하자 노르웨이의 섭정으로 머물던 크누트 대왕의 아들 스벤과 그의 어머니는 바로 덴마크로 도망쳐야했다. 스벤은 얼마 못가 죽었다.

본토인 덴마크에서는 하레크누드가 이미 왕위를 승계받아 통치 중이었다. 하레크누드는 덴마크 한정으로는 그럭저럭 안정적인 왕권을 유지했지만 또다른 중요한 영토였던 잉글랜드로는 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노르웨이의 망누스 1세가 언제 부왕 올라프 2세의 복수를 한답시고 덴마크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와중에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하레크누드와 크누트 대왕의 또다른 아들 해럴드 1세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어 다투기 시작했다. 결국 하레크누드는 해럴드 1세를 잉글랜드의 섭정으로 삼고, 독립을 반쯤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대부분 해럴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잉글랜드에 머물던 하레크누드의 모후 노르망디의 엠마는 플랑드르로 도망쳤다.

하레크누드는 빼앗겨버린 잉글랜드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전쟁을 선포하기도 전, 해럴드 1세가 1040년에 죽어버렸고, 자동적으로 하레크누드에게 잉글랜드가 상속되면서 하레크누드는 잉글랜드 - 덴마크 통합왕국을 복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레크누드의 통치는 전반적으로 봤을 때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크게 암군도 아니었지만 먼 거리로 떨어져있는 잉글랜드와 덴마크를 동시에 통치하고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나마 북해 제국의 형체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하레크누드가 1042년 잉글랜드 귀족의 결혼식에 참석하던 도중 급사하면서 북해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노르웨이의 망누스 1세는 하레크누드가 승하하자 덴마크에 쳐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덴마크와 잉글랜드를 순서대로 정복해 크누트 대왕의 영광을 복원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하레크누드가 죽자 덴마크의 왕위는 망누스 1세에게 돌아갔고, 망누스 1세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동시에 다스리는 대왕이 되었다. 그러나 망누스 1세의 야심도 오래는 못갔다. 스웨덴에서 스벤 2세 에스트리드센이 넘어와 덴마크를 탐냈고, 1047년 스벤 2세가 잉글랜드의 지원에 힘입어 망누스 1세를 노르웨이로 격퇴한 후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 것이다. 노르웨이로 다시 쫒겨난 망누스 1세는 바로 그 해에 승하했고, 이후 잉글랜드 - 덴마크 - 노르웨이는 단 한 번도 같은 나라로 묶이지 않는 완전한 독립국으로 분리되었다.

3. 매체에서


[1] 큰까마귀가 그려진 국기. 흐라픈스메르키 raven boner(고대 노르드어: hrafnsmerki, 중세 영어: hravenlandeye)라고 한다. 북해 제국 뿐만 아니라 당대의 바이킹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상징들 중 하나였다. 북유럽 신화의 주신이었던 오딘은 후긴과 무닌이라는 2마리의 큰까마귀를 길렀는데 여기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10~11세기 바이킹 군주들이 가장 자주 쓰던 상징이기도 했다. [2] 잉글랜드에 사는 바이킹들은 11세기 초반을 기점으로 모두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바이킹 신앙이 남아 있던 곳은 실질적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뿐이었다. [3] 애설레드 2세는 무능함과 폭압적인 통치 때문에 이미 한 차례 쫒겨나 국외로 추방된 신세였다. 그러나 바이킹이라는 최악의 재난이 찾아오자 어쩔 수 없이 이전보다 덜 가혹한 통치를 약속받고 다시 왕위에 올렸던 것이다. [4] 이때는 잉글랜드나 스칸디나비아나 대륙식 공작 작위가 없었으며, 백작에 대응되는 야를이 가장 높은 작위였기에 웬만한 백작은 공작급으로 위세가 컸다. 야를이 백작급으로 격하된 것은 잉글랜드와 북유럽에 공작 작위가 만들어진 이후였다. [5] 옛 동앵글리아 강역에 에식스와 미들섹스 강역을 합쳤기에 실제론 굉장히 컸다. [6] 진한 붉은색은 본토, 주황색은 속국, 노란색은 동맹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