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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 | ||||
John Lennon/Plastic Ono Band 1970 |
Imagine 1971 |
Some Time In New York City 1972 |
Mind Games 1973 |
Walls and Bridges 1974 |
|
Rock 'n' Roll 1975 |
Double Fantasy 1980 |
Milk and Honey 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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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관련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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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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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이름 |
존 레논 JOHN LENN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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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액 부문 | 공연자 (Performers) | ||||||||||||||||||||||||||||||||||
멤버 | (개인자격) | ||||||||||||||||||||||||||||||||||
입성 연도 | 1994년 | ||||||||||||||||||||||||||||||||||
후보자격 연도 | 1994년 | ||||||||||||||||||||||||||||||||||
후보선정 연도 | 1994년 | }}}}}}}}} |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이름 |
존 레논 JOHN LENNON |
|
멤버 | (개인자격) | ||
입성 연도 | 1987년 # | }}}}}}}}} |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 수상자 '''[[틀: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 수상자(1980년~1999년)|Grammy Award for Album of the Ye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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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5px" |
<rowcolor=#b69858>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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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nd Street | Christopher Cross | Double Fantasy | Toto IV | Thriller | |
빌리 조엘 | 크리스토퍼 크로스 | 존 레논 & 오노 요코 | 토토 | 마이클 잭슨 | |
<rowcolor=#b69858>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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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t Slow Down | No Jacket Required | Graceland | The Joshua Tree | Faith | |
라이오넬 리치 | 필 콜린스 | 폴 사이먼 | U2 | 조지 마이클 | |
<rowcolor=#b69858>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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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k of Time | Back on the Block | Unforgettable... with Love | Unplugged | The Bodyguard OST | |
보니 레잇 | 퀸시 존스 & VA | 나탈리 콜 | 에릭 클랩튼 | 휘트니 휴스턴 & VA | |
<rowcolor=#b69858>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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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V Unplugged | Jagged Little Pill | Falling into You | Time Out of Mind |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 |
토니 베넷 | 앨라니스 모리셋 | 셀린 디옹 | 밥 딜런 | 로린 힐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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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100 Greatest Britons | ||||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rowcolor=#ffe>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윈스턴 처칠 |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 다이애나 스펜서 | 찰스 다윈 | 윌리엄 셰익스피어 | |
<rowcolor=#ffe>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아이작 뉴턴 | 엘리자베스 1세 | 존 레논 | 호레이쇼 넬슨 | 올리버 크롬웰 | |
11위~100위 | |||||
<rowcolor=#ffe>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어니스트 섀클턴 | 제임스 쿡 | 로버트 베이든 파월 | 알프레드 대왕 | 아서 웰즐리 | |
<rowcolor=#ffe>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마거릿 대처 | 마이클 크로포드 | 빅토리아 여왕 | 폴 매카트니 | 알렉산더 플레밍 | |
<rowcolor=#ffe>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앨런 튜링 | 마이클 패러데이 | 오와인 글린두르 | 엘리자베스 2세 | 스티븐 호킹 | |
<rowcolor=#ffe>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윌리엄 틴들 | 에멀린 팽크허스트 | 윌리엄 윌버포스 | 데이비드 보위 | 가이 포크스 | |
<rowcolor=#ffe>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레오나르드 체셔 | 에릭 모어캠브 | 데이비드 베컴 | 토머스 페인 | 부디카 | |
<rowcolor=#ffe>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 토머스 모어 | 윌리엄 블레이크 | 존 해리슨 | 헨리 8세 | |
<rowcolor=#ffe>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찰스 디킨스 | 프랭크 휘틀 | 존 필 | 존 로지 베어드 | 어나이린 베번 | |
<rowcolor=#ffe>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보이 조지 | 더글러스 베이더 | 윌리엄 월레스 | 프랜시스 드레이크 | 존 웨슬리 | |
<rowcolor=#ffe>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아서 왕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 로버트 스콧 | 이넉 파월 | |
<rowcolor=#ffe>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클리프 리처드 |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 프레디 머큐리 | 줄리 앤드류스 | 에드워드 엘가 | |
<rowcolor=#ffe>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조지 해리슨 | 데이비드 애튼버러 | 제임스 코널리 | 조지 스티븐슨 | |
<rowcolor=#ffe>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찰리 채플린 | 토니 블레어 | 윌리엄 캑스턴 | 바비 무어 | 제인 오스틴 | |
<rowcolor=#ffe>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윌리엄 부스 | 헨리 5세 |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 로버트 1세 | 밥 겔도프 ( 아일랜드인) | |
<rowcolor=#ffe>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무명용사 | 로비 윌리엄스 | 에드워드 제너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찰스 배비지 | |
<rowcolor=#ffe>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제프리 초서 | 리처드 3세 | J. K. 롤링 | 제임스 와트 | 리처드 브랜슨 | |
<rowcolor=#ffe>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보노 ( 아일랜드인) | 존 라이든 | 버나드 로 몽고메리 | 도날드 캠벨 | 헨리 2세 | |
<rowcolor=#ffe>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 J. R. R. 톨킨 | 월터 롤리 | 에드워드 1세 | 반스 월리스 | |
<rowcolor=#ffe>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리처드 버튼 | 토니 벤 | 데이비드 리빙스턴 | 팀 버너스리 | 마리 스톱스 | |
출처 | |||||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0 Voices of the Century | ||||||||
※ 2001년 영국 BBC 방송이 약 44,756명의 대중들과, 현직 가수들, 음악 전문가를 상대로 조사한 투표를 바탕으로 '20세기의 목소리'를 선정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프랭크 시나트라 | 엘비스 프레슬리 | 냇 킹 콜 | 엘라 피츠제럴드 | 빙 크로스비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존 레논 | 아레사 프랭클린 | 빌리 홀리데이 |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프레디 머큐리 | |||||
출처 | }}}}}}}}} |
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올타임 아티스트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6px" |
※ 어클레임드 뮤직의 올타임 아티스트 순위. 기본적으로 역사상의 앨범/노래의 순위를 매기는 형식의 사이트이지만, 개인의 취향을 모두 배제하고 음악 평론가들, 또는 잡지 등의 매체들이 매긴 순위를 종합해서 포인트를 줘서 순위를 매기는 사이트다. 순위가 매겨진 앨범과 곡의 리스트를 공개된 공식을 바탕으로 합해 올타임 아티스트들의 순위도 매긴다. | ||||
<rowcolor=#fff>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비틀즈 | 밥 딜런 | 롤링 스톤스 | 데이비드 보위 | 브루스 스프링스틴 | |
<rowcolor=#fff>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라디오헤드 | 레드 제플린 | 닐 영 | 프린스 | 비치 보이스 | |
<rowcolor=#fff>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R.E.M. | 엘비스 프레슬리 | 칸예 웨스트 | 더 후 | U2 | |
<rowcolor=#fff>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마일스 데이비스 | 벨벳 언더그라운드 | 너바나 | 더 클래시 | 지미 헨드릭스 | |
<rowcolor=#fff>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마빈 게이 | 핑크 플로이드 | 엘비스 코스텔로 | 스티비 원더 |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 | |
<rowcolor=#fff>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마돈나 |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 더 스미스 | 마이클 잭슨 | 밴 모리슨 | |
<rowcolor=#fff>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토킹 헤즈 | 켄드릭 라마 | 아케이드 파이어 | 아레사 프랭클린 | 비요크 | |
<rowcolor=#fff>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JAY-Z | 제임스 브라운 | 톰 웨이츠 | 존 콜트레인 | PJ 하비 | |
<rowcolor=#fff>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킹크스 | 퍼블릭 에너미 | 버즈 | 비스티 보이즈 | 조니 미첼 | |
<rowcolor=#fff>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벡 한센 | 더 큐어 | 존 레논 | 도어즈 | LCD 사운드시스템 | |
<rowcolor=#fff>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블러 | 크라프트베르크 | 레너드 코헨 | 픽시즈 | 루 리드 | |
<rowcolor=#fff>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조니 캐쉬 | 소닉 유스 | 록시 뮤직 | 오아시스 | 플리트우드 맥 | |
<rowcolor=#fff>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 듀크 엘링턴 | 더 밴드 | 아웃캐스트 | 다프트 펑크 | |
<rowcolor=#fff>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사이먼 앤 가펑클 | 프랭크 시나트라 | 척 베리 | 프랭크 오션 | 비욘세 | |
<rowcolor=#fff>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 조이 디비전 | AC/DC | 윌코 | 오티스 레딩 | |
<rowcolor=#fff>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뉴 오더 | 메탈리카 | 화이트 스트라입스 | 라몬즈 | 더 폴리스 | |
<rowcolor=#fff>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스투지스 | 브라이언 이노 | 엘튼 존 | 뱀파이어 위켄드 | 퀸 | |
<rowcolor=#fff>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섹스 피스톨즈 | 매시브 어택 | 레이 찰스 | 스틸리 댄 | 블랙 사바스 | |
<rowcolor=#fff>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케이트 부시 | 악틱 몽키즈 | 찰스 밍거스 | 패티 스미스 | 포티스헤드 | |
<rowcolor=#fff>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건즈 앤 로지스 | 페이브먼트 | 수프얀 스티븐스 | 알 그린 | 펑카델릭 | |
101위 ~ 4112위: 공식 사이트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롤링 스톤이 2015년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송라이터를 선정한 순위다.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밥 딜런 | 폴 매카트니 | 존 레논 | 척 베리 | 스모키 로빈슨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믹 재거 & 키스 리처즈 ( 재거-리처즈) | 캐롤 킹 & 제리 고핀 | 폴 사이먼 | 조니 미첼 | 스티비 원더 | |||||
11위부터는 문서 참조. | |||||||||
같이 보기: 명반, 명곡, 앨범 커버, 아티스트, 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 1 / 2, 베이시스트, 드러머, 듀오 | }}}}}}}}} |
선정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 (2008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2px" |
{{{#000,#ddd ※ 롤링 스톤이 2008년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 ||||||||
<rowcolor=#fff>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아레사 프랭클린 | 레이 찰스 | 엘비스 프레슬리 | 샘 쿡 | 존 레논 | |||||
<rowcolor=#fff>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마빈 게이 | 밥 딜런 | 오티스 레딩 | 스티비 원더 | 제임스 브라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11 - 50위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폴 매카트니 | 리틀 리처드 | 로이 오비슨 | 알 그린 | 로버트 플랜트 | |||||
<rowcolor=#fff>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믹 재거 | 티나 터너 | 프레디 머큐리 | 밥 말리 | 스모키 로빈슨 | |||||
<rowcolor=#fff>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조니 캐시 | 에타 제임스 | 데이비드 보위 | 밴 모리슨 | 마이클 잭슨 | |||||
<rowcolor=#fff>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재키 윌슨 | 행크 윌리엄스 | 재니스 조플린 | 니나 시몬 | 프린스 | |||||
<rowcolor=#fff>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하울링 울프 | 보노 | 스티브 윈우드 | 휘트니 휴스턴 | 더스티 스프링필드 | |||||
<rowcolor=#fff>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브루스 스프링스틴 | 닐 영 | 엘튼 존 | 제프 버클리 | 커티스 메이필드 | |||||
<rowcolor=#fff>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척 베리 | 조니 미첼 | 조지 존스 | 보비 밴드 | 커트 코베인 | |||||
<rowcolor=#fff>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팻시 클라인 | 짐 모리슨 | 버디 홀리 | 도니 해서웨이 | 보니 레이트 | |||||
51위부터는 문서 참조. |
같이 보기: 명반, 명곡, 앨범 커버, 아티스트, 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1/ 2, 베이시스트, 드러머, 듀오 | }}}}}}}}} |
선정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 (2023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2px" |
{{{#000,#ddd ※ 롤링 스톤이 2023년 새해를 맞아 2008년에 발표됐던 위대한 가수 리스트를 리뉴얼했다. | ||||||||
<rowcolor=#fff>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아레사 프랭클린 | 휘트니 휴스턴 | 샘 쿡 | 빌리 홀리데이 | 머라이어 캐리 | |||||
<rowcolor=#fff>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레이 찰스 | 스티비 원더 | 비욘세 | 오티스 레딩 | 알 그린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11 - 50위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리틀 리처드 | 존 레논 | 팻시 클라인 | 프레디 머큐리 | 밥 딜런 | |||||
<rowcolor=#fff>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프린스 | 엘비스 프레슬리 | 셀리아 크루즈 | 프랭크 시나트라 | 마빈 게이 | |||||
<rowcolor=#fff>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니나 시몬 | 아델 | 스모키 로빈슨 | 조지 존스 | 메리 제이 블라이즈 | |||||
<rowcolor=#fff>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폴 매카트니 | 돌리 파튼 | 마할리아 잭슨 | 샤카 칸 | 행크 윌리엄스 | |||||
<rowcolor=#fff>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루서 밴드로스 | 데이비드 보위 | 베시 스미스 | 톰 요크 | 더스티 스프링필드 | |||||
<rowcolor=#fff>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커트 코베인 | 밴 모리슨 | 커티스 메이필드 | 루이 암스트롱 | 알리야 | |||||
<rowcolor=#fff>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에타 제임스 | 테디 펜더그래스 | 아리아나 그란데 | 제임스 브라운 | 엘라 피츠제럴드 | |||||
<rowcolor=#fff>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마비스 스테이플스 | 린다 론스태드 | 토니 브랙스턴 | 로드 스튜어트 | 조니 미첼 | |||||
51위부터는 링크 참조. |
같이 보기: 명반, 명곡, 앨범 커버, 아티스트, 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1/ 2, 베이시스트, 드러머, 듀오 | }}}}}}}}} |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롤링 스톤이 2004년 엘비스 프레슬리 데뷔 50주년을 기념해 로큰롤(Rock And Roll)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를 선정했다. 롤링 스톤이 직접 현직 뮤지션, 기타 음악산업 중진, 음악평론가 등 총 55명의 패널을 뽑아 이들에게 투표를 실시한 결과다. 2011년 한 차례 개정했으나 기존 아티스트 순위는 거의 변동이 없어 새로 업데이트 된 아티스트에 대한 재평가가 주로 이뤄졌다.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비틀즈 | 밥 딜런 | 엘비스 프레슬리 | 롤링 스톤스 | 척 베리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지미 헨드릭스 | 제임스 브라운 | 리틀 리처드 | 아레사 프랭클린 | 레이 찰스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11위-50위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밥 말리 | 비치 보이스 | 버디 홀리 | 레드 제플린 | 스티비 원더 | |||||
<rowcolor=#fff>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샘 쿡 | 머디 워터스 | 마빈 게이 | 벨벳 언더그라운드 | 보 디들리 | |||||
<rowcolor=#fff>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오티스 레딩 | U2 | 브루스 스프링스틴 | 제리 리 루이스 | 패츠 도미노 | |||||
<rowcolor=#fff>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라몬즈 | 프린스 | 더 클래시 | 더 후 | 너바나 | |||||
<rowcolor=#fff>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조니 캐시 | 스모키 로빈슨 앤 더 미라클스 | 에벌리 브라더스 | 닐 영 | 마이클 잭슨 | |||||
<rowcolor=#fff>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마돈나 | 로이 오비슨 | 존 레논 | 데이비드 보위 | 사이먼 앤 가펑클 | |||||
<rowcolor=#fff>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도어즈 | 밴 모리슨 |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 퍼블릭 에너미 | 버즈 | |||||
<rowcolor=#fff>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재니스 조플린 | 패티 스미스 | Run-D.M.C. | 엘튼 존 | 더 밴드 | |||||
51위부터는 문서 참조. |
같이 보기: 명반, 명곡, 앨범 커버, 아티스트, 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 1 / 2, 베이시스트, 드러머, 듀오 | }}}}}}}}} |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롤링 스톤이 2015년 100대 기타리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실제 현역 기타리스트들과 평론가들이 뽑은 순위다. | ||||||||
<rowcolor=#fff>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지미 헨드릭스 | 에릭 클랩튼 | 지미 페이지 | 키스 리처즈 | 제프 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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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 킹 | 척 베리 | 에디 밴 헤일런 | 듀언 올맨 | 피트 타운젠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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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해리슨 | 스티비 레이 본 | 앨버트 킹 | 데이비드 길모어 | 프레디 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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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트럭스 | 닐 영 | 레스 폴 | 제임스 버턴 | 카를로스 산타나 | |||||
<rowcolor=#fff>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쳇 앳킨스 | 프랭크 자파 | 버디 가이 | 앵거스 영 | 토니 아이오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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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메이 | 보 디들리 | 조니 라몬 | 스코티 모어 | 엘모어 제임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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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쿠더 | 빌리 기븐스 | 프린스 | 커티스 메이필드 | 존 리 후커 | |||||
<rowcolor=#fff>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랜디 로즈 | 믹 테일러 | 디 에지 | 스티브 크로퍼 | 톰 모렐로 | |||||
<rowcolor=#fff>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믹 론슨 | 마이크 블룸필드 | 휴버트 서믈린 | 마크 노플러 | 링크 레이 | |||||
<rowcolor=#fff>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제리 가르시아 | 스티븐 스틸스 | 조니 그린우드 | 머디 워터스 | 리치 블랙모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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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마 | 클라렌스 화이트 | 오티스 러쉬 | 조 월시 | 존 레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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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콜린스 | 로리 갤러거 | 피터 그린 | 로비 로버트슨 | 론 애시튼 | |||||
<rowcolor=#fff>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디키 베츠 | 로버트 프립 | 조니 윈터 | 듀언 에디 | 슬래시 | |||||
<rowcolor=#fff>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레슬리 웨스트 | T-본 워커 | 존 맥로플린 | 리처드 톰슨 | 잭 화이트 | |||||
<rowcolor=#fff>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로버트 존슨 | 존 프루시안테 | 커트 코베인 | 딕 데일 | 조니 미첼 | |||||
76위부터는 문서 참조. |
같이 보기: 최신 버전, 명반, 명곡, 앨범 커버, 아티스트, 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 1 / 2, 베이시스트, 드러머, 듀오 | }}}}}}}}} |
롤링 스톤 선정 250대 기타리스트
159위 |
선정 가장 위대한 가수(보컬리스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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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영국의 대중음악 전문지 NME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가장 위대한 가수 Top 20' 투표를 진행. 1,000만 표 이상이 모여 순위를 정했다. | ||||
<rowcolor=#fff>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마이클 잭슨 | 프레디 머큐리 | 엘비스 프레슬리 | 액슬 로즈 | 존 레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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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위 | 로버트 플랜트 | 폴 매카트니 | 스티비 원더 | 아레사 프랭클린 | |
<rowcolor=#fff>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매튜 벨라미 | 레이 찰스 | 짐 모리슨 | 밥 말리 | 엘튼 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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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 | 스티븐 타일러 | 믹 재거 | 마빈 게이 | 티나 터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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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빌보드에서 Hot 100 차트 60주년 기념으로 1958년부터 2018년까지 차트에 오른 곡들을 분석해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남성 아티스트들을 발표했다. 얼마나 많은 싱글을 차트에 높은 순위로 진입시키고 오래 유지했는가를 누적치로 계산하여 산정한 리스트이기 때문에 영향력이나 음악성과 같은 평론적인 요소들이 반영된 것은 아니며 순전히 상업적인 성공도가 기준이다. | ||||||||
<rowcolor=#fff>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엘튼 존 | 엘비스 프레슬리 | 스티비 원더 | 마이클 잭슨 | 폴 매카트니 | |||||
<rowcolor=#fff>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어셔 | 프린스 | 로드 스튜어트 | 드레이크 | 마빈 게이 | |||||
<rowcolor=#fff>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필 콜린스 | 빌리 조엘 | 라이오넬 리치 | 브루노 마스 | 닐 다이아몬드 | |||||
<rowcolor=#fff>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케니 로저스 | 브라이언 아담스 | 조지 마이클 | 바비 빈튼 | 존 멜렌캠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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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비 체커 | 레이 찰스 | 크리스 브라운 | 리키 넬슨 | 저스틴 팀버레이크 | |||||
<rowcolor=#fff>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폴 앵카 | 배리 매닐로 | 넬리 | 바비 다린 | R. 켈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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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브라운 | 에미넴 | 리처드 막스 | 칸예 웨스트 | JAY-Z | |||||
<rowcolor=#fff>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밥 시거 | 닐 세다카 | 저스틴 비버 | 브루스 스프링스틴 | 존 덴버 | |||||
<rowcolor=#fff>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50 센트 | 플로 라이다 | 앤디 깁 | 로이 오비슨 | 디온 | |||||
<rowcolor=#fff>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빌리 오션 | 토미 제임스 | 존 레논 | 브룩 벤턴 | 마이클 볼튼 | |||||
<rowcolor=#fff>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릴 웨인 | 바비 브라운 | 에드 시런 | 루다크리스 | 에릭 클랩튼 | |||||
<rowcolor=#fff>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쟈니 리버스 | 글렌 캠벨 | 릭 스프링필드 | T.I. | 더 위켄드 | |||||
출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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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593a32> Memb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1] 존 레논 John Lennon[2] |
|||
|
|||
본명 |
존 윈스턴 오노 레논[3] John Winston Ono Lennon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4] |
||
출생 | 1940년 10월 9일 | ||
잉글랜드 랭커셔 리버풀[5][6] | |||
사망 | 1980년 12월 8일 (향년 40세) | ||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 |||
직업 |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배우, 사회 운동가 | ||
소속 |
쿼리멘 (1957 - 1960) 비틀즈 (1960 - 1970) 플라스틱 오노 밴드 (1970 - 1974) 무소속 (1974 - 1980)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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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593a32> 배우자 |
신시아 레논 (1962 ~ 1968, 이혼) 오노 요코 (1969 ~ 1980)[7] |
|
자녀 |
슬하 2남 줄리안 레논 (1963 ~ ) 션 레논 (1975 ~ ) |
||
동거인 | 메이 팡 (1973 ~ 1975) | ||
거주지 |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맨해튼 다코타 아파트[8] | ||
신체 | 179cm, 71kg, O형 | ||
학력 |
도브데일 예비학교 (졸업) 쿼리뱅크 학교 (전학) 캘더스톤스 스쿨 (졸업) 리버풀 미술대학 (중퇴) |
||
혈통 | 아일랜드계 영국인[9] | ||
활동 기간 | 1957년 ~ 1980년 | ||
종교 | 무종교 ( 무신론)[10] | ||
장르 | 록 음악, 팝 록, 로큰롤, 블루스 록, 하드록, 포크 록, 소프트 록, 아방가르드 음악[11] | ||
사용 악기 | 보컬, 리듬 기타, 키보드 등[12] | ||
로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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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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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틀즈의 멤버로서 세계적인 인기와 인지도를 누렸으며, 20세기의 대중음악을 상징하는 인물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틀즈 내에서는 리드 보컬리스트이자 리듬 기타리스트였다.[13] 비틀즈의 창립자이자 초창기 리더로서 비틀즈라고 하면 폴 매카트니와 더불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음악가가 되었다. 비틀즈가 해체한 이후로는 영국을 떠나 뉴욕에 정착해 활동했다. 1970년대 이후로는 음악 뿐만 아니라 좌익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했다.[14]
2. 생애
I was the Walrus, But now l'm John, The dream is over와 같이 문단의 영어 문구는 존 레논의 노래인, God의 가사 중 일부이다. 이는 존 레논이 말년에 생전 동안 있었던 과거, 본인의 인생사에 대해 스스로를 부정하며, 히피이자 사회운동가로써의 새 삶으로 살아갔던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Strawberry Fields Forever는 아마, 사람들은 말년의 존이 부정했던 그 비틀즈 시절의 존 레논을 기억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각 앨범의 문서마다 해당 앨범을 제작 및 발매할 당시의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같이 읽기를 권장한다.
2.1. I Was The Walrus: 유년부터 비틀즈 전성기까지
|
비틀즈 초중기 시절의 존 레논[15][16] |
존 레논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선원이었던 아버지 프레디 레논[17]은 집을 나갔고, 어머니 줄리아 레논 역시 다른 남자와 동거하게 되었다. 결국 줄리아의 언니인 미미, 메어리 부부 밑에서 자랐다. 6살 때 아버지가 돌아와 몇 주간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지며, 어머니와는 청소년기에 관계를 회복했다. 존은 근처 고아원이었던 스트로베리 필드(Strawberry Field)[18]에서 자주 놀았으며, 이때 Walrus(바다코끼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15살 때, 엘비스 프레슬리의 " Heartbreak Hotel"을 듣고 로큰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교 근처에 살던 어머니의 집을 오가며 우쿨렐레를[19] 배워 음악에 관한 흥미를 가지게 된 존은 16살 때 보호자인 미미 이모를 졸라 17파운드짜리 기타를 구입하고[20], 맨날 같이 학교를 뒤집어놓던 친구들과 함께 비틀즈의 전신이 되는 밴드 "쿼리멘(The Querrymen)"을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한다.[21] 밴드 결성 직후, 퀴리맨의 멤버 아이반 본의 소개로 폴 매카트니와 만나게 되고 폴이 밴드에 합류한다.[22] 얼마 후, 밴드에 공석이 생기자 폴의 소개로 조지 해리슨을 만났고, 조지가 밴드에 합류한다.
그러나 존 레논이 17살 때, 어머니 줄리아 레논이 만취한 경찰관이자 견습 운전수였던 에릭 클래그가 운전하던 경찰차에 치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더욱 어이없는 것은 그 경찰관이 임시 직무 정지 처분 외엔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점.[23] 그 때 당시 여론과 시민단체에서는 사실상 살인이자 뭐든지 술만 마시면 다 감형해주냐면서 경찰과 법원을 강하게 비난했다.[24]
어머니의 죽음과 말도 안되는 재판은 존 레논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역시 유방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폴과의 우정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음악에 더욱 몰입하게 된 존은 폴에게서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고.[25] 이 때문에 존 레논은 특히 어머니와 관련된 곡을 자주 썼으며, 첫째 아들 이름도 줄리안으로 지었다.
1960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합류하고, 밴드 명을 "실버 비틀즈"로 변경하고 활동하다가 후에 피트 베스트가 들어오자 밴드명을 " 비틀즈"로 결정한다. 이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밴드에서 개인적인 사정[26]으로 탈퇴하게 되고, 피트 베스트는 나머지 멤버의 불만 때문에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즈(Rory Storm and Hurricanes)'의 드러머 링고 스타로 교체되게 된다. Please Please Me 녹음 때까지만 해도 링고 스타의 자리는 불안 불안했으나, 결국 링고 스타로 확정된 채 본격적으로 비틀즈가 출범한다.
|
왼쪽이 폴 매카트니, 오른쪽이 존 레논 |
비틀즈 활동 초기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와 함께 거의 대부분의 곡을 썼으며, 이 둘의 협력은 레논-매카트니라고 칭해진다.[27] 그러나 1965년부터 본격적으로 존 레논의 자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 Help!', ' In My Life'[28], ' Nowhere Man' 등이 바로 그런 곡.[29]
2.2. 예술가로의 변모
|
1967년 Strawberry Fields Forever 뮤비에서의 모습[30] |
1966년, ' Revolver' 녹음을 앞두고 존 레논은 비틀즈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고 말았다. 존 레논은 "비틀즈는 예수보다 유명하다(popular)"라고 발언했는데, 이 때문에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는 비틀즈 상품을 모아놓고 불태우는 등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비틀즈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를 하기도 했다.[31] 이러한 해프닝과 밥 딜런과의 접촉 등 다양한 사건들은 그들로 하여금 기존 음악성을 탈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비틀즈가 아이돌 그룹[32] 에서 역사상 가장 실험적인 밴드 중 하나로 변모하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
음악적 전환과 함께 비틀즈의 활동 스타일 자체에도 큰 변화가 생기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일체 콘서트를 중단해버린 것이었다. 이 선택은 멤버들이 공연장보다 스튜디오에 머무는 시간을 늘려, 다양한 아이디어와 악기들로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존 레논의 실험적인 작곡의 예로는 싱글 음반 ' Paperback Writer/ Rain'에서 처음 등장한 백마스킹[33]을 생각해낸 것과, Revolver에서 사이키델릭한 곡들을 작곡한 것 등이 있다.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서부터는 폴 매카트니가 밴드를 주도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레논-매카트니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둘이 큰 대립 구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당시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곡을 합쳐 만든 ' A Day in the Life'[34]는 비틀즈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명곡 중 하나이며, 폴 매카트니는 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에게 Hey Jude라는 곡을 써주기도 했다.
' Yellow Submarine'에서는 녹음 중간 폴 매카트니가 장난으로 개 짖는 소리를 냈다가 존 레논과 함께 그것을 바탕으로 곡을 작곡한 ' Hey Bulldog'이 수록되어 있다.
' Magical Mystery Tour'에서 존 레논은 ' Strawberry Fields Forever'[35], ' I Am the Walrus'[36]라는 곡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더욱 확고히 해간다.
2.3. But Now, I'm John: 비틀즈가 해체된 뒤 솔로 활동
2.3.1. 오노 요코를 만나다
|
1966년,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하고, 휴식기를 갖게 되자 존은 미국에서 일본인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의 전시회를 관람한 것을 계기로 요코에게 푹 빠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화이트' 앨범을 작업하던 도중인 1968년 신시아와 이혼하고, 요코와 재혼한다.
요코는 존을 아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대학에서 신시아가 다른 남자와 얘기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신시아의 뺨을 때릴 정도로 꼴마초였던 존은 요코를 만난 뒤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사회 이슈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으며, 전위 예술을 자신의 음악에 접목시켰다. 존은 요코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난 늘 예술가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을 꿈꾸어 왔다. 나와 예술적 상승을 공유할 수 있는 여자 말이다. 요코는 바로 그런 여자였다.
일부 팬들은 훗날 요코가 비틀즈 해체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여겨 '마녀', '일본 잡귀'라며 맹렬히 비난하게 되였는데, 그녀가 미디어를 통해 비틀즈 해체의 공신 중 한명으로 비추어지며 달갑게 보기 힘들었던 것.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요인은 멤버들 간의 음악적, 사업적인 이견[38]과 개인적인 불화였다지만, 바로 그 불화를 가속화 및 재점화하는데 요코가 관련되어 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다수의 비틀즈 팬들 입장에 그녀는 어느 날 갑툭튀해 존의 옆자리를 차지한 외부인이었고, 존의 음악까지 간섭했기에 굴러들어온 돌이 깽판친다는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연유로 비틀즈 해체에 미친 영향 이상으로 과도하게 까이는 경향도 확실히 있다.
|
1969년 3월, 'Bed-In for Peace' 시위 도중 인터뷰를 하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 |
신혼여행 대신 언론을 호텔방에 초대한 후, 침대 위에서 파자마를 입고 앉아 반전시위를 한다던가(Bed-In for Peace 시위), 요코와 함께 발매한 실험 음반 자켓에 알몸으로 사진을 찍어 커버로 삼는다든가. 앞 뒷면 전부.
2.3.2. 비틀즈가 무너지다
|
화이트 앨범 제작 무렵에 찍은 사진. 머리 스타일이 변해서 그렇지 데뷔 초기에 비해 외모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
폴은 존이 오노 요코와의 사랑에만 치중하고 비틀즈를 뒷전시한다고 느꼈고, 존이 스튜디오에까지 요코를 데리고 오자 이러한 내부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 물론 충분히 빡친 폴 역시 이에 질세라 자신의 약혼녀 린다 매카트니를 스튜디오에 데려오는 식으로 그와 경쟁했다. 폴 매카트니 문서로. 물론 이 갈등 과정에서 존의 자의식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40]
|
해체 직전의 비틀즈[41] |
Let It Be는 멤버들의 불화와 감정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시점에서 제작된 앨범이지만,[42] Abbey Road는 이미 멤버들이 해체를 마음 속으로 예감한 상태에서 작업한 앨범이다. 따라서 불화가 곡들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존에게는 여러모로 폴과의 음악적 이견 차를 실감한 시간이었다.
존은 해체 직후인 1970년대 초반에는 비틀즈 후반부에 두드러진 폴의 약진과 성과를 부정했고, 폴이 주도한 애비로드 메들리와 Let It Be 등의 작품들을 폄훼했다. 초기 레논-매카트니 체제의 득세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다만, 이는 해체 직후 서로 간의 감정적 앙금이 남아있던 상황에서의 발언이고, 1970년대 중반부터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존 레논의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비평도 누그러들게 된다. 특히, 1980년의 인터뷰를 보면 폴의 곡을 칭찬하는 등 상당히 유화적인 태도를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비틀즈 해체 직후 이 둘은 서로를 디스해대며 싸워댔고, 특히 해체 직후인 1971년, 존은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Lennon Remembers)에서 폴과 조지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과의 사이는 이미 옛날에 끝났다', '요코를 욕하는 그놈들을 패줘야 했었는데'라는 등. 당시 인터뷰 존의 성격답게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어조가 깊기는 하지만, 존이 당시에 얼마나 쌓인 것이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인터뷰에서 그렇게 불만을 표출한 조지 해리슨과는 Imagine 레코딩을 함께 했다는 점.
이 당시 결과물들은 존의 Imagine 앨범과 폴의 Ram 앨범에 특히 잘 나타나있다. 존과 폴이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하고 싸워댄 것은 아니었고, 1973년을 기점으로 감정적 대립이 상당히 누그러들었으며, 메이 팡의 설득과 존도 욕하지 않던 인물인 링고 스타의 중재로 연락이 닿아 1974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스튜디오에서 믹 재거, 스티비 원더 등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43] 가끔씩 안부 전화도 하고, 폴이 지나가다가 존의 집에 들러 같이 연주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비틀즈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1974년에 최종적으로 종결되고, 존이 아들 션을 얻게 되면서 가정주부 생활을 하게 될 무렵에는 상당히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물론 과거의 영혼의 콤비였던 시절 만큼은 아니고 다소 서먹서먹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적어도 비틀즈 해체 직후 서로를 향해 증오에 가득찬 디스를 하던 시절보다는 훨씬 나아진 관계였다.[44] 오히려 존과 말년에 사이가 안 좋아진 것은 자서전 <I Me Mine> 문제로 관계가 소원해진 조지 해리슨 쪽이었다.
1970년대 후반 집필해 1980년 8월에 발표한 자서전에서 조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서술하는 부분에 존을 누락시켜 버렸고, 존은 이걸 무척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심지어 존이 살해되기 직전까지 화해조차 하지 못했다. 말년의 조지의 인터뷰를 보면 존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은 듯하다. 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조지는 힌두교에 더욱 깊게 몰입하게 된다.[45]
2.3.3. 솔로 활동
|
솔로 시절의 존 레논 |
존은 비틀즈 활동에서 점차 이탈하고, 오노 요코와 함께하는 과정에서 아서 재노프 박사가 개발한 프라이멀 스크림 요법[47]이라는 정신과 치료를 받았는데, 이 때 어렸을 때의 애정 결핍과 여러 가지 심적인 문제들에 대해 직면하면서 그의 내면 세계는 부쩍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것들을 통해 만든 앨범이 바로 John Lennon/Plastic Ono Band 음반으로, 비틀즈 해체 이후 존의 생각이 모든 곡에 오롯이 담겨 있다. 덧붙이자면 이 시점 이후로 자신이 만들고 키워온 비틀즈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앨범의 수록곡인 ' God'의 가사에서도 "I don't believe in Beatles"라 외치며 비틀즈에 대한 자기부정을 선언한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비틀즈 해체 시기를 전후하여 존은 요코와 함께 베트남 전쟁 반전 평화 운동을 시작하여, 미국 내의 반전 분위기를 북돋았다. 다큐멘터리 존 레논 컨피덴셜(원제 The US vs John Lennon)에서 이 시기의 존을 자세히 묘사했다. 특히나 Imagine은 그러한 정서를 반영한 대표적인 앨범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그의 사상은 한 단어로 된 세 곡('God', 'Love', 'Imagine')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반전 평화주의자(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 Imagine 중), 무신론자(God is a concept by which we measure our pain - God 중), 무정부주의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트남전에 반대해 MBE 훈장을 반납하기도 했다. 실제 무정부주의 사상에 심취해 요코와 함께 만우절인 1973년 4월 1일, 이상향을 뜻하는 'Utopia(유토피아)'에서 본 따 'Nutopia(뉴토피아)'라는 가상 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해당 지식인.
사회참여적 메세지가 돋보였던 Imagine의 상업적, 비평적 성과에 힘입어, 1972년에 존 레논은 더욱 정치적인 스탠스를 띄는 앨범인 Some Time In New York City를 발표한다. 그러나 정치적 메세지에 과도하게 치중한 나머지, 사운드적인 측면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고,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하고 만다. 게다가 이 앨범 커버 우상단처럼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의 역사적인 만남을 남자 알몸 댄서들에다 합성하는 등 레논이 스스로 선을 많이 넘었다보니, 미국 정부와 FBI도 레논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정확히는 도청은 1971년에 뉴욕에 와서 급진적 반전주의자들을 만난 이후부터 시작( #)됐고, 이에 레논은 1972년에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생하자 닉슨 정권을 비난했다가 아예 이듬해인 1973년에는 미국 정부를 고소했다( #).] 이렇듯 존 레논은 미국 영주권을 못해서 비자를 계속 발급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사회 활동 때문에 미국 정부에게 미운털이 박힌 것이다. 사실 위의 뉴토피아 건국(?)도 이런 미국 정부와의 마찰에 대한 반발의 일환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상황이 영 좋지 않았는데, 바로 배우자인 오노 요코와 18개월 동안 별거하기로 결심하고 비서인 메이 팡과 동거한 것이다. 레논 자신은 이 시기를 (동명의 1945년작 영화에서 따온) " 잃어버린 주말(Lost Weekend)"이라 불렀으며, 로스앤젤레스에서 해리 닐슨과 어울리며 과도한 음주로 클럽에서 쫓겨나는 등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어감과 달리 불륜과 음주로 망가진 게 아니라 약간의 '일탈 겸 휴식기'에 가까웠으며, 보다 내면적 감정에 초점을 둔 Mind Games와 Walls and Bridges를 발표한다. 멜로디컬하고 풍성한 사운드가 특징인 두 앨범 모두 준수한 성과를 거두었고. 빌보드 싱글차트 1위곡을 배출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 소울메이트인 폴 매카트니와의 교류를 재개했으며, 비틀즈 시절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던 과거와 달리 비틀즈의 음악을 긍정하는 태도로 돌아서기 시작한다.
엘튼 존과 협업하며 음악 활동을 계속하던 레논은 1974년에 다시 오노와 결합했고, 이듬해인 1975년에 차남 션 레논을 낳았으며 엘튼 존이 대부가 되어줬다. 같은 해 말에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1976년에 비로소 미국 영주권이 발급되는 등 경사가 겹치자, 존 레논은 음악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가정주부로 살겠다고 선언한다. 차남 션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겹쳐본 듯하며, 실제로 몇몇 사진들을 보면 아버지로서의 진한 애정이 느껴진다. 이 과정에서 여러 미술 작품을 남기기도 했는데 공식 갤러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 잠깐의 휴식기를 가진 존 레논은 1980년에 가정주부 생활을 마치고 음악계 복귀를 선언한다.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와 내면적 이야기를 다룬 새 앨범 Double Fantasy를 발매한 것. 비록 이 앨범은 썩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고 휴식기가 도리어 방해가 됐다면서 갑론을박이 일기도 했지만, 존 개인에게는 매우 의미 깊은 시간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2.4. The Dream is Over: 세상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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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기의 존 레논[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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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마지막 모습으로 알려진 사진. 뒤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범인 마크 채프먼이다. 존은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불과 5시간 후 총격으로 사망한다.[49] |
1980년 12월 8일 월요일, ' Double Fantasy'를 제작하고 활동을 다시 시작하려던 찰나, 존은 뉴욕에 있는 자택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사람에게 사인을 하려는 그 순간 총을 맞았다.[50] 녹음 스튜디오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마크 채프먼이 쏜 차터 암즈 사의 언더커버. 38구경 리볼버의 할로포인트[51] 총탄 4발을 왼쪽 가슴과 어깨 부분에 맞아 쓰러졌다고 한다.[52] 그는 병원으로 즉시 이송되었고, 피격 당시에는 살아 있었지만, 도착할 즈음에 결국 심정지가 발생했고 의료진들이 필사적으로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마크 채프먼이 존을 죽인 이유를 놓고 과거에는 비틀즈와 존을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존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결국 자신이 진짜 존 레논이며, 저기 있는 존 레논은 가짜라는 망상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설이 힘을 얻었다. 그러나 비록 채프먼의 아내가 동양인이긴 했지만, 오노 요코와는 정반대로 순종적인 타입의 여성이었고, 채프먼의 자택에서 발견된 비틀즈의 앨범 또한 그의 아내가 구입한 것으로, 채프먼이 비틀즈, 특히 존의 광적인 팬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적당하지 않다.
오히려 채프먼이 레논을 살해한 동기는 그의 개인적인 정신병력과 종교적 동기가 복잡하게 결합한 결과물이다. 채프먼이 아주 어렸을 때 레논을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고등학생 무렵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선언하며 오히려 철저한 안티로 돌아섰다. 채프먼은 법정에서 " 스스로 예수보다 유명하다고 지껄이며 신성모독이나 저지르고, 노래 Imagine에서는 무소유를 주장하는데 정작 본인은 수백만달러짜리 아파트에서 호화 생활하는 위선자가 아니냐,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처단했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53] 다만 Court TV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버지가 애정을 한번도 주지 않아서 트라우마에 시달렸는데, 레논이 아버지처럼 보여서 죽였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54]
이 사건으로 채프먼은 현재 40년 가까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 2000년부터 2년 마다 가석방 신청을 내고 있으나, 2022년 9월 그의 열두 번째 가석방 신청이 거부되었다. 거부된 이유는 유가족과 고인을 사랑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 그러나 존 레논의 팬들이 채프먼에게 보복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어 내보내지 않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Yes. we have to say it, remember this is just a football game, no matter who wins or loses. An unspeakable tragedy confirmed to us by ABC News In New York City. John Lennon, outside of his apartment building on the west side of New York City, the most famous perhaps of all of The Beatles, shot twice in the back, rushed to Roosevelt Hospital. Dead on arrival. Hard to go back to the game after that news.
예, 말씀드려야만 하겠군요. 누가 이기든, 지든 간에 이것은 단지 미식축구 경기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방금 뉴욕의 ABC 뉴스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적인 소식이 들어와 바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마 비틀즈에서도 가장 유명한 존 레논이 뉴욕 시의 서쪽에 있는 아파트 건물 근처에 두 차례에 걸쳐 총을 맞아 급히 인근 루스벨트 병원으로 향했으나 이송중에 사망했습니다.[55] 아무래도 이 소식 이후에는 게임에 집중하기 힘들 것 같네요.
존 레논 암살 당시 중계 도중에 전한 속보 전문
예, 말씀드려야만 하겠군요. 누가 이기든, 지든 간에 이것은 단지 미식축구 경기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방금 뉴욕의 ABC 뉴스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적인 소식이 들어와 바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마 비틀즈에서도 가장 유명한 존 레논이 뉴욕 시의 서쪽에 있는 아파트 건물 근처에 두 차례에 걸쳐 총을 맞아 급히 인근 루스벨트 병원으로 향했으나 이송중에 사망했습니다.[55] 아무래도 이 소식 이후에는 게임에 집중하기 힘들 것 같네요.
존 레논 암살 당시 중계 도중에 전한 속보 전문
이때, ABC 방송이 먼데이 나잇 풋볼 중계 도중 암살과 관련하여 당시 스포츠캐스터인 하워드 코셀[56]이 속보를 전했다.
채프먼이 사인하기 직전에 "당신 존 레논이죠?"("Are you John Lennon?")이라는 질문에 "네..."("Yeah...")라고 대답했고, 결국 이게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고 존을 5차례씩 저격했다.. 20세기 최고의 싱어송라이터라 칭송받던 사람의 최후치곤 무언가 안타까운 죽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존 레논의 유골은 화장 후 요코가 보관하고 있다.
이 때문에 폴 매카트니와 함께 음모론의 단골 손님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폴 매카트니 사망설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비틀즈 관련 음모론이 FBI가 마크 채프먼을 이용해 그를 죽였다는 암살 사주설이다. FBI도 이런 썰을 의식하고 있는지 지금도 존의 파일을 비공개로 지정해놓고 있다.[57]
이런 음모론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은 존과 요코가 반전 운동을 벌이다 영국의 보수 언론에 쫓겨 미국으로 왔는데, 미국에 와서도 반전 운동을 계속해 당시 미국 정부나 보수 언론들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 Some Time In New York City" 앨범을 낼 때 레논은 닉슨 = 마오쩌둥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2.5. Strawberry Fields Forever: 죽음 이후의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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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인 곡을 주로 작사, 작곡해서 대중들에게 넓은 사랑을 받았던 폴과는 달리, 생전의 존은 비록 전성기 시절 히트곡 수는 폴에게 밀렸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깊은 가사와 아름다운 음악, 사회 참여적 행동들은 수많은 전문가들과 대중에 의해 재평가되며 진가를 인정받았다.[59]
3. 비판 및 논란
존 레논 사후 시간이 흐르고,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 부정적인 방향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평화주의자 존 레논의 폭력적인 사생활은 이미 널리 알려져 "인간성과 음악성이 별개인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고 있다. 일이 여기까지 온 데에는 물론 레논이 좋은 소리 듣지 못할 인물인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외부적인 요인도 여럿 떠올릴 수 있다.존 레논의 이면이 유명해진 건 거의 성자에 가깝게 알려졌던 과거 이미지에 대한 반작용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신성시되는 인물의 재탐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재탐구의 사실은 괴리감으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더 받기 마련이다. 실망감이 워낙 심했던 탓인지 존 레논에 대한 각종 음해나 루머들도 생겨나고 있는 형국이다. #
예를 들어 청년 시절 문란한 사생활로 유명한 마하트마 간디나 반대로 사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알려진 아돌프 히틀러가 있다. 또한, 존 레논이 이른 나이에 사망한 결과 노년에 이미지 관리를 하지 못한 것도 한 요인일 것이다. 당장 비틀즈 멤버 중 좋은 이미지의 링고 스타와 조지 해리슨이 불륜을 저지른 적 있다. 특히, 링고 스타는 불륜의 피해자이기도 한데, 아내 모린 콕스가 불륜을 저지른 배경에 대해 자신의 알콜 중독으로 인한 상습적 폭력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판이 여러 차례 나왔고, 최근 어린 시절 자신이 무의식적인 인종차별 주의자였음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했다.
1960년대 영국은 철저히 백인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이 만연했고, 특히 노동자 계급이며 거칠기로 소문난 리버풀 출신의 비틀즈 멤버들이 성장한 환경은 더욱 거칠었다. 존 레논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 영역이고, 지탄받는 사생활의 배경을 어느 정도로 고려할 것인지는 개개인의 몫이다. 확실히 존재하는 그의 인격적인 결함에서 아예 눈을 돌릴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판들이 공적마저 마냥 무마시킬 정도의 추악함이었다면 지미 새빌이나 필 스펙터, 롤프 해리스 등 처럼 기록말살형에 처해진다던지 각종 헌사들도 취소되는 후폭풍이 발생해야겠지만, 존 레논의 경우는 헌액 취소는커녕 사후에도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에 높은 순위에 안착하는 등[60] 오히려 늘어만가고 있으며 역작 Imagine은 아직까지도 평화와 화합의 상징으로 커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과열된 재발굴의 분위기 속에서 위선자라고만 평하는 일부 반응들과는 달리 사생활은 별개로 구분시키는 경향이 강한 서구권에선 마냥 매장시켜야만 하는 급의 실책은 아니라는건 각종 헌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이다. 가족의 헌신이나 질서를 강조하는 유교적인 문화가 약한 대신 기독교 등의 전통이 강한 영미권 중심의 서구권은 개인이 삶을 개척해나가는 것을 중시하고, 과거의 실수나 잘못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을 강조하며 불의에 관용으로 대처하는 사고방식[61]이 있기 때문이다.
3.1. 야스쿠니 신사 방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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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존 레논은 일본을 여행하면서 일본의 문화와 신앙을 좋아하게 되었고 여러 신사를 방문했다. 하나 1971년, 야스쿠니 신사에 오노 요코와 방문해 논란이 있다.
레논와 요코 부부는 일본 신앙에 대한 관심으로 많은 신사를 방문했고, 야스쿠니 신사 방문도 그 여행 중의 일이었던 만큼 정치적 목적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오노 요코는 좌익 성향의 인물로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물론 무지한게 변명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존 레논은 단순한 뮤지션이 아니고, 반전운동과 평화사상을 외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들을 합사시킨 것은 1978년의 일이므로 당시 레논 부부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것은 전범 참배와는 관련이 없다는 옹호도 있지만, 메이지 시대부터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에서 전사한 일본 군인들의 위패를 가져다 놓고 제사를 지내왔고[62] 국가 프로파간다에 활용되어 왔으므로 평화주의자로서의 행보로는 여러모로 적절치 않다고 볼 수 있다.
존 레논의 일본 여행에 관해 남아있는 기록은 오노 요코의 사촌이자 우익 인사인 가세 히데아키의 칼럼이 있다. 가세 히데아키의 주장에 따르면 존 레논은 야스쿠니 신사를 싫어하지 않았고, 일본의 전쟁은 방어의 개념이었으며 미국에게 공격당한 베트남과 비슷한 처지라는 본인의 의견을 납득했다고 한다. 물론 극우 인사인 가세 히데야키가 정치적 메세지를 담아 작성한 글인 만큼 이야기는 약간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겠다.
서양 열강들은 미국 외에는[63] 모두 유럽 전선에만 신경썼지[64] 일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으며[65], 존 레논의 경우에는 부인이 일본인이므로, 당연히 별 생각 없어도 일본에 옹호적인 입장을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옹호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평화를 외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애초에 전쟁이란게 현재의 역사기도 하지만 과거의 역사 또한 공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이 누구인지 제대로 파악하도 않고 위의 언사를 했다거나, 야스쿠니 신사에 방문했다라는 것 자체가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전쟁의 폭력성과 참혹성을 어필한다는 사람이 역설적이게도 과거의 전쟁과 폭력을 모른다는 것 부터가 겉으로는 함구적인 평화와 전 세계적인 인류를 부르짖지만 속으로는 진지한 연구 없이 앵무새마냥 전쟁반대만 외치고 있다는 것 아닌가?
결국 2019년 차남 션 레논과 그의 애인 샬럿 캠프 뮬이 욱일기 관련 논란을 일으키고 존이 아내 오노와 평화를 위한답시고 비둘기를 날린 곳이 전범들이 묻힌 야스쿠니 신사였다는 사실이 일제강점기 피해국들에게 알려지자 평화를 위해 노래를 부른 자가 한 행동이 이것이였냐며 비난이 쏟아졌다.
3.2. 아동 방임
존은 신시아와의 관계에서 생긴 자식인 줄리안 레논에게도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린 줄리안에게 존은 관심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많은 상처를 남겼다.이후 존은 잃어버린 주말[66] 시기 줄리안과 시간을 보냈지만, 줄리안에게 아버지는 애증의 대상으로 남았다. 줄리안은 아버지가 평화와 사랑을 말하면서 외도로 자신과 어머니를 버렸다고 비판하다가도 그와 함께한 행복한 시간을 추억하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줄리안 본인이 대놓고 아버지보다 폴 매카트니와 보낸 시간이 더 많다고 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다만, 줄리안의 최근 인터뷰에서는 존이 죽기 전, 자신을 비롯한 나머지 가족과의 관계를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해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기가 너무 늦었던 지라, 결국 관계를 개선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3.3. 악담
존 라이든, 키스 리처즈와 마찬가지로 동시대나 후배 밴드에 대한 악담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아서 비판받는다.[67] 다만, 일부는 시간이 흘러 그 내용이 와전되거나 부풀려지는 등 적당히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생전 존 레논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가들은 음악적 성취도와는 별개로 인신공격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 멀리 갈 필요 없이 첫빠따로 한때 밴드의 소울메이트였던 폴 매카트니가 있는데, 1971년 폴과 존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았을 시절 존은 폴 매카트니 때문에 비틀즈 명반이 모두 망가졌다고 욕했다. 페퍼 상사는 폴의 독재로 인해 망가졌고, 화이트 앨범은 폴이 혼자서 스튜디오를 독차지했고, 애비 로드는 폴 매카트니의 메들리 아이디어 때문에 허접해졌다고 깠다.
1970년대 말, 조지 해리슨과도 사이가 나빴던 시기에는 조지를 비난한 적도 있었다. 가령 "그 녀석, 알고도 그랬던 게 분명해.[68] 멜로디만 조금만 바꿨어도 안 걸렸을텐데 그렇게 내보내니까 벌을 받지. 신이 다 알아서 해줄 거라고 생각했나보지?"라며 조지의 종교관까지 걸고 넘어가면서 신랄하게 디스를 했다.
비틀즈 내부 뿐만 아니라, 동료 혹은 후배 아티스트에게도 악담을 꽤나 퍼부은 바 있다. 롤링 스톤스를 두고 뛰어난 밴드고, 그들의 음악을 존중하나 비틀즈와는 상대가 안된다고 말했다.[69] 또한, 시드 비셔스나 짐 모리슨의 사망 사건이나, 닐 영의 철학관도 알고보면 완전 X같은 일이라고 한 바 있다.[70] 핑크 플로이드 같은 몇몇 후대 밴드들은 아예 관심조차 안가지고 무시하기도 했다.
자의식이 상당히 높았던 점과 엮여서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1971년경의 인터뷰를 보면 자신을 천재라고 지칭하는 등 유아독존의 태도를 많이 보여서 존 레논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나르시시스트라고 까기도 한다.[71] 하지만 척 베리나 엘비스 프레슬리 등의 존 레논이 호평했던 아티스트도 있다.
그의 악담은 후배 음악가로 그치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비틀즈 초기 시절에 무대 위에서 중증 장애인을 비하한 일이 자주 언급된다. 동영상 링크 참고로 이 공연 이전에 사전에 알지도 못한 채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가졌었다고 한다.[72]
사실 존 레논은 특유의 핵이빨 성향과는 다르게, 선후배 가리지 않고 대체로 음악가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죽기 전에 퀸의 음악을 몇 번 흥얼거렸다는 카더라도 있고, 폴 매카트니에 대한 인식도 서로에 대한 감정적 오해가 풀린 1970년대 중반부터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데이비드 보위나 레드 제플린, 엘튼 존 등 몇몇 후배 음악가들도 인터뷰에서 그들의 팬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비교적 리스너들의 주목을 못받던 제네시스의 신보도 칭찬한 적이 있다. 다만, 음악적인 호불호를 넘어서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 굉장히 감정적인 비난을 남겼다는 점이 비판받는다.
3.4. 폭력적 성향
어린 시절의 폭력적인 일화들은 좋게 봐주기 어렵다. 리버풀 내에서 꽤나 유명한 양아치였고, 일진들과 어울리면서 학교폭력을 일삼았다. 그와 절친 관계였던 폴 매카트니조차 존 레논과 친구가 되기 전에는 큰 덩치[73]에 양아치로 유명해서 눈이 마주치면 맞을까봐 2층버스에서 일부러 떨어져 앉았다고 한다. 함부르크 시절에도 돈이 부족해서 행인을 폭행해 돈을 빼앗는 절도죄를 수차례 저질렀다고 한다.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런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았는지 여러 폭력의 일화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이야기가 부인인 신시아 레논이 펍에서 다른 남자[74]와 춤을 췄다고 뺨을 때렸다는 일화. 그 일을 계기로 신시아는 그와 헤어졌다가, 3개월 후에 존이 사과하면서 돌아와 받아주었다고 한다.
신시아는 존이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불안정했다고 생전에 언급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인 자신과 여러 모로 정반대되는 존의 ' 나쁜 남자'적인 매력에 끌려 결혼을 한 건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폭력이 계속 이어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외도를 비롯해 존은 그녀에게 결코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75] 신시아는 반항적이고 냉소적인, 예민한 예술가 성향이 강한 존과 자신은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대인배스럽게도 이혼 이후 그에 대해서 별로 나쁜 감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초기 캐번 클럽에서 일할 당시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같이 휴가를 다녀온 이후 캐번 클럽의 MC였던 밥 울러라는 사람이 "허니문은 어땠어, 존?" 이라고 자신을 게이라고 놀리는 농담을 했다는 이유로 그를 죽일듯이 패 갈비뼈를 부러뜨렸다는 일화도 있다.
이러한 그의 폭력적이고 마초적인 성격은, 60년대 후반 오노 요코를 만나 그녀에게서 페미니즘 등의 사상을 배우고, 이외에 히피 문화와 사회 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서서히 변했고, 그에 따라서 그 이후로는 이런 폭력적이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하기도 했다.[76] 하지만 학교 폭력과 가정 폭력 문제가 최근 들어 더욱 민감하게 다뤄지는 사안인 만큼, 이런 존 레논의 과거는 여전히 여실한 비판을 받는다.[77]
3.5. 원인 분석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 만남을 가지고, 정신적 성숙을 거치면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평화와 사랑을 외치는 삶을 살았다. 실제로 야스쿠니 신사 방문을 제외한 모든 논란이 요코를 만나기 전에 생긴 것이며, 이후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노래를 많이 발표했다.이 시절, 그는 원초적 외침이라고 불리는 심리 치료를 통해 평생의 트라우마였던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치유하기 시작한다. Plastic Ono Band 전반에 그런 치유의 과정이 나타나며, 이후 그가 정신적으로 안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존은 외도를 멈추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두 번째 결혼도 그다지 평탄하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자면 존과 오노의 관계는 오픈 릴레이션쉽(Open-relationship)에 가까웠으며, 일반적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고, 당사자들의 생각과 다르게 왜곡되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존과 메이 팡의 관계.
그의 사생활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존의 이러한 행동들은 자신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 및 질투심에서 비롯된 소유욕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존이 폴을 밴드에 받아들인 것도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취향이면서도 기타 연주를 자신보다 잘 하기 때문이었고, 신시아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중산층 출신에 자신과는 다른 얌전한 무리들과 어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시아와 속도위반으로 결혼한 존은 결혼생활 도중 그녀에게 죄책감과 더불어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가졌었던 듯 한데, '자신이 신시아에게 아이라는 족쇄를 채워두었다'는 식으로 표현했었다고 한다. 비틀즈 활동 당시에도 존과 폴은 작곡 파트너쉽으로도 유명했으나, 밴드 내부에서는 둘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들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부정적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 레논이 여전히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결국 그가 예술가적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넘어 불안정한 내면을 치유하고 성숙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솔로 커리어에서 이런 면이 돋보이며, '비틀즈의 아이돌'에서 '고독한 뮤지션'으로 이미지를 탈바꿈하였다. 주변 인물들과 과거의 나쁜 기억을 풀기 시작하고, 한 가정의 아버지로 자리를 잡은 것도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폴과 화해하고, 줄리안과 다시 만나기 시작하면서, 또한 두 번째 아들 션에게는 제대로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면서 그의 천재적 재능의 이면에 늘 부족했던 일반적인 행복도 어느정도 충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일반적인 부성애와 행복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둘째 아들인 션 레논에게만 해당한 것으로 상술했듯이 전처 소생인 줄리안 레논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신시아와의 결혼 생활 중에는, 비틀즈의 바쁜 스케줄 탓도 있었겠으나, 아들 줄리안 레논을 방임했다. 훗날 회고하길[78] 당시엔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었다는 식으로 자조하였다.
신시아와의 이혼 후에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어느 정도 후회하고, 줄리안과 다시 만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했지만, 존이 줄리안과 제대로 된 부자간의 교류를 나눴던 시기는 오노 요코를 두고 메이팡과 외도를 하던 그 짧은 기간 동안이었다.
하지만 이후 요코와 재결합하면서 다시 아들에게 소홀해졌다. 결국 줄리안은 유년기 시절을 아버지의 부재로 외롭게 보내야 했고, 어린 줄리안에게 아버지 자리의 공백을 대물림해줄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성심성의껏 챙겨준 사람이 바로 폴 매카트니였다.[79]
다만, 줄리안은 아버지인 존에 대해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마냥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1971년부터 1980년, 줄리안이 불과 17세였을 때 존 레논은 사망했고, 이 시기 레논이 거주했던 미국을 방문했던 줄리안은 아버지를 “매력적이고, 재미있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4. 음악성
4.1. 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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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wberry Fields Forever (1967) | I Am the Walrus (1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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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Together (1969) | Isolation (19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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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ne (1971) | (Just Like) Starting Over (1980) |
I don't expect you to understand
After you've caused so much pain
But then again, you're not to blame
You're just a human, a victim of the insane
네가 이해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너는 이미 수많은 고통을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네 잘못은 아니야
넌 평범한 사람이고, 미치광이들의 피해자니까
We're afraid of everyone
Afraid of the sun
Isolation...
우리는 모두가 두려워
태양이 두려워
고립감이란...
Isolation
After you've caused so much pain
But then again, you're not to blame
You're just a human, a victim of the insane
네가 이해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너는 이미 수많은 고통을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네 잘못은 아니야
넌 평범한 사람이고, 미치광이들의 피해자니까
We're afraid of everyone
Afraid of the sun
Isolation...
우리는 모두가 두려워
태양이 두려워
고립감이란...
Isolation
명실상부한 대중 음악 사상 최고의 송라이터 중 한명이다. 그의 작곡 파트너인 레논-매카트니는 작곡, 작사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콤비였으며, 솔로 아티스트로서도 대단한 역량을 가진 송라이터였다.
존 레논은 어린 시절부터 엘비스 프레슬리와 척 베리의 열성팬이었던 로큰롤 키즈로서, 그의 음악은 데뷔 초기부터 마지막 앨범까지 1950년대 정통 로큰롤 사운드가 근간을 이룬다.
특히나 존 레논은 명실상부한 초기 비틀즈의 히트메이커였다. 빌보드 1위를 달성한 비틀즈 초기의 10곡 중 8곡이 존 레논의 주도 하에 작곡한 곡일 정도.[80]
1965년 무렵에는 밥 딜런의 영향을 받아 포크 록의 색채가 짙어지며, 예술가적인 자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단순하고, 발랄한 사랑 노래를 넘어, 가사에 다양한 주제를 담아냈으며, Help!, In My Life,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 등을 만든다.
1966년 발표된 Revolver 이후로는 사이키델릭 록과 아트 록을 기반으로 한 실험적인 사운드로 선회했다. 이 시기, Tomorrow Never Knows, Strawberry Fields Forever,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등의 명곡을 작곡한다. 레논-매카트니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A Day in the Life 또한 존의 주도로 만들어진 사이키델릭 록의 대표곡이다.
1968년 이후에는 당시 유행의 바람을 타던 블루스 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외에도 하드 록, 프로그레시브 록, 아방가르드 음악, 자장가, 동요, 팝 록, 소프트 록, 바로크 팝, 사이키델릭 팝, 뮤직 홀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
비틀즈 해체 직전까지만해도 음악 세계가 상당히 다채로웠지만, 솔로 시절에는 포크 록, 소프트 록, 블루스 록에서 크게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Plastic Ono Band와 같이 록과 아방가르드를 결합시킨 앨범도 만들었고, Rock and Roll처럼 본인이 선호하던 원초적인 로큰롤의 색채가 짙은 작품도 만들었다.
작곡만큼이나 존 레논은 작사의 측면에서 매우 고평가받는다. 존 레논의 가사는 자전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알려진 곡 중 대부분의 곡은 자전적 경험에 기초해서 만든 곡이다. Strawberry Fields Forever, Mother 등 존 레논은 자신의 일대기와 자신이 처한 상황,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정치적 상황들을 솔직하게 가사에 담아냈다.
낙관적인 가사가 많은 폴 매카트니의 곡들과 달리 존 레논의 곡들은 어두웠던 유년기 때문인지 냉소적이며, 대체로 부정적인 분위기를 띈다. Glass Onion나 Sexy Sadie 같은 곡이 대표적. 그러나 All You Need Is Love, Dear Prudence 같이 밝은 곡들도 많다. 이는 특정한 주제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곡에 풀어내는 그의 작사 방식 때문이다.[81]
1960년대 중후반, 비틀즈가 사이키델릭 장르에 몰두해있을 무렵에는 I Am the Walrus와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처럼 가사의 의미보다는 문장 하나하나와 사운드를 이미지화키고, 모호함을 부각하는 가사를 즐겨 쓰기도 했다.
솔로로 전향한 이후로는 정치적인 가사의 비중이 대폭 늘어났다.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를 음악에 결부시켜 만든 곡이 대표적으로 Give Peace a Chance, Imagine이다. 존 레논의 이런 가사들은 현대에 들어서도 연구 대상이고, 밥 딜런이나 레너드 코헨 등과 함께 " 음유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존 레논의 음악은 '실험적이고 난해하다’라는 인식도 있으나, 존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낼 줄 아는 천재적인 작곡가이기도 했다. 특히나 솔로로 전향한 이후 작곡한 Love, (Just Like) Starting Over, Real Love, Beautiful Boy (Darling Boy) 등에서 특유의 복고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이지 리스닝 음악을 확인할 수 있다.
선대 음악가 중에서는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버디 홀리, 엘비스 프레슬리 등 로큰롤 음악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동료 음악가 중에서는 밥 딜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대중음악가가 아닌 사람중에서는 존 케이지나 오노 요코,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와 같은 아방가드르 음악가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이래저래 선배와 동료 음악가들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폴 매카트니일 것이다. 폴 매카트니와는 음악적 관계 이상의 관계를 가졌다.
그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은 음악가는 거의 없다. 존 레논의 영향력을 언급한 음악가로는 대표적으로 블랙 사바스, 레드 제플린, 주다스 프리스트, 라몬즈, 본 조비, 브루스 스프링스틴, 핑크 플로이드, 건즈 앤 로지스, 마이클 잭슨, U2, 커트 코베인, 데이비드 보위, 엘튼 존, 빌리 조엘, 오아시스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수 없이 많으나, 가독성을 위해 이만 줄인다.
4.2. 리듬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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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nt To Hold Your Hand | A Hard Day's Nig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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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p! | Get Back |
비틀즈는 멤버들이 악기 연주를 하는데 있어서 다재다능하고 레코딩을 할때 서로 역할을 바꾸기도 했기 때문에[82] 멤버들의 포지션을 단적으로 정의내리기 어렵지만 존 레논은 주로 비틀즈의 리듬 기타리스트로 구분된다.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리드 기타리스트에 비해 리듬 기타리스트들은 평가가 박한 경향도 있고[83], 같은 그룹의 조지 해리슨이 연주 실력도 매우 뛰어나서 록/팝 음악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논할 때 항상 매우 높은 순위[84]에서 언급되기 때문에 존은 ' 작곡가' 이미지이지 상대적으로 기타리스트로서의 면모가 부각되는 편은 아니다. 또한, 같은 밴드의 베이시스트인 폴 매카트니가 베이시스트 답지 않은 엄청난 기타 실력을 가지고 있던 점도 존의 기타 실력이 저평가 되는 데 한 몫 했다.
하지만 본인이 지닌 역사에 길이 남을 작곡 실력과 조지 해리슨의 괴물같은 연주 실력에 묻혀서 그럴 뿐이지 존 레논은 기타리스트로서도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다. 특히, 리듬기타 파트를 논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화려한 기타 연주와는 거리가 있지만 간단하면서 캐치한 리듬 기타 연주[85]로 노래를 잘 구성한 것으로 유명하다.[86]
테크닉적으로는 딱히 언급할만한 부분은 없지만[87][88], 기본에 충실하면서 개성있는 사운드와 연주 방식을 보여준 것은 충분히 고평가받을 만하다.
게다가, 존 레논이 처음 기타리스트로써 활동한 시기는 1950년대 말엽인데다 17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폴 매카트니에게 배웠다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놀라운 실력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존 레논 본인도 "자신의 테크닉은 그냥저냥이지만, 기타를 울부짖고 살아 움직이도록 할 수 있다며 자기는 괜찮은 기타리스트"라고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Abbey Road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The End에 폴, 조지, 존이 번갈아가며 연주하는 기타 솔로도 존이 제안한 아이디어였는데, 만약 본인 기타 실력에 자신이 없었으면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실제로 존은 The End 기타 솔로 파트에서 개성있고,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다. 다른 유명 기타리스트들도 존 레논은 워낙에 뛰어난 작곡 실력에 묻혀서 그렇지 기타 연주 실력 역시 훌륭하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에서 존 레논은 55위에 랭크되어 있다. 특히나 그가 활동 시기 내내 연주력보다는 작곡 능력에서 훨씬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기타 연주 부분에서 이러한 높은 순위에 랭크된 것을 보면 그가 기타리스트로써도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지를 알 수 있다.
4.2.1. 사용 악기
존 레논은 시기 별로 자주 사용했던 기타가 있다. 존 레논이 사용한 악기들 중 대부분 사람들이 알 만한 악기를 열거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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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kenbacker 1958 325 | Rickenbacker 1963 325 |
비틀즈 초기에 사용한 일렉트릭 기타. 함부르크 시절 구매해서 65년까지 무대에서 사용한 기타이다. 58모델은 원래 내츄럴 피니쉬인데 레논이 검정 페인트로 리피니쉬 해서 사용하다가 리켄배커에서 블랙 피니쉬로 재생산하여 준것이 63모델이다.
리켄배커 325는 다른 일렉트릭 기타에 비해 넥과 스케일이 매우 짧은 편인 21인치(533mm)인데 이런 특징은 리듬 기타인 존 레논에게 코드를 빨리 변환할 수 있어 용이한 기타였다. 숏 스케일 기타는 리듬 연주시 코드 잡는데 편하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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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켄배커에서 트리뷰트 모델을 만든 적이 있다. 픽가드에 싸인이 있으며 리미티드로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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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bson J-160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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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딩하고 남은 기타줄에 담배를 끼고 튜닝을 하고 있는 존 레논 |
Gibson의 엔도서로 조지 해리슨과 함께 받은 어쿠스틱 기타. 분실된 기타가 최근에 경매에 붙여졌다. 깁슨과 에피폰에서 시그니처가 나왔으며 특징은 픽업으로 P90 픽업이 달린 것. 일렉기타 픽업이 달린 탓에 볼륨 노브와 톤 노브가 있다. 70주년 기념 모델도 출시. 위 기타는 70주년 모델이다.
레넌은 빈티지 선버스트 제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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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phone 1965 Casi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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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olution Casino |
비틀즈 중기, 후기, 솔로활동 초기까지 애용한 기타이며, 존 레논을 상징하는 모델이다. 처음 에피폰 카지노를 쓴 비틀즈 멤버는 스튜디오 녹음용으로 구매한 폴 매카트니이다. 이것을 보고 존도 조지와 함께 샀으며 조지는 다른 기타도 사용했지만 존은 1966년부터 Imagine 앨범을 녹음한 1971년까지 에피폰 카지노를 메인 기타로 사용했다.[90]
구입 당시에는 빈티지 선버스트에 픽가드가 달려 있었으나 존은 픽가드를 제거하고 뒷판을 회색 페인트로 칠해서 사용했으며 인도에서 수행 후 돌아와서는 내츄럴 색상으로 리피니쉬한다.[91]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제작된 모델은 비사이드 곡인 Revolution의 프로모션을 목적으로 한 라이브 무대에서 대중들에게 처음 공개되었고, 그 이후로 Revolution Casino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소리가 일반 카지노보다 날카로운 것이 특징. 워낙에 아이코닉한 기타라서 한때 에피폰에서 존 레논 시그니처 기타로 세 번이나 한정 판매했다.[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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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bson Les Paul J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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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공연에서 들고 나온 적이 있으며, 특이점은 넥 픽업이 찰리 크리스천 모델이라는 것과 픽업 셀럭터가 있단 점. 브릿지는 일반 P90이다. 깁슨 커스텀 샵에서 한정판매 되었다.[93]
4.3. 보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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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ase Mister Postman | No Rep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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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a | Jealous Guy |
비틀즈에서 폴 매카트니와 함께 리드보컬 포지션을 담당했으며, 멤버들 중 가장 많은 109곡의 비틀즈 노래에서 리드 보컬을 맡았다. 롤링 스톤 선정 위대한 가장 위대한 가수 5위, 가장 위대한 록 가수 8위에 올라있을 정도로 보컬 실력 역시 출중했다.
존 레논의 보컬은 얇고 날카로운 음색이 가장 큰 특징인데, 이 선명한 음색은 그가 백킹 보컬을 맡았을때도 두드러질 정도로 강한 개성을 지녔다.[94]
보컬 트레이닝으로 다듬어진 가수는 아니었기에 정석적인 보컬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상당히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보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감정 표현에 있어서 매우 뛰어난 보컬이었는데, 자신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투영되는 보컬이 가사와 어우러져 곡에 이입을 불러오도록 만든다.
얇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로큰롤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존 레논은 자신의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비틀즈 초창기 시절 레논은 목소리를 더블 트랙으로 여러 번 덧입혀 자신의 목소리를 가리고, 목소리가 굵게 들리도록 진성과 샤우팅을 기반으로 한 창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창법이 부각되는 곡이 대표적으로 Please Mister Postman, Twist and Shout, No Reply 등이다. 이와 같은 보컬 스타일은 명랑한 로큰롤 사운드에 잘 어울려서 비틀즈의 엄청난 인기에 기여했다.
1965년 정도를 기점으로는 힘을 빼고, 콧소리를 살려, 얇은 목소리를 보다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창법을 바꾼다. 후에 이는 일반 대중에게 익숙한 레논의 목소리로 자리 잡았고, A Day in the Life, Strawberry Fields Forever, Imagine 등의 대표곡에서 들을 수 있다.[95]
다만, 얇상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음역대가 높은 편은 아니었다. 비틀즈 시절에도 하모니에서 낮은 음을 담당하고 폴에게 높은 음을 맡겼다. 높은 바리톤과 낮은 테너의 그 중간 쯤에 위치한 정도로, 바리톤에 가깝지만 테너 음역대도 소화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최고 음역은 진성으로는 B4(2옥타브 시), 가성을 포함하면A5(3옥타브 라)까지 소화가 가능했고 최저음은 B1(-1옥타브 시)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5. 정치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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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to the People (인민에게 권력을) |
음악적인 업적 외에도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이자 사회주의자로서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사회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가 작곡했던 Imagine은 현대에 들어서는 거의 평화주의와 아나키즘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을 정도다.
오노 요코를 만나기 전까지는 신시아 레논이 다른 남자와 같이 있었다는 이유 만으로 뺨을 때릴 정도로 폭력적인 성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노 요코를 만난 이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며, 좌파 운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96] 그가 1971년 작곡한 Power to the People은 여성주의,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대표적인 노래이다.
좌파적인 운동을 하면서 보수 언론과 정치권과 수많은 마찰을 겪었으며, 이 때문에 말년에는 영국의 보수 언론을 피해 미국 이민까지 준비했다.[97]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존 레논의 신좌파 운동 주도에 경계를 가지고 조치를 취하자, 그를 독재자라고 폭풍 디스하는 곡까지 발표했다.
다만,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에 당시 68 혁명의 주류 기류였던 호치민 및 마오쩌둥 옹호에는 비판적이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Revolution에서는 만약 너가 마오 주석의 사진을 들고다닌다면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을거야라고 마오쩌둥과 학생 운동권을 비판했다. Some Time In New York City에서는 리처드 닉슨이 마오쩌둥급의 독재자라면서 마오쩌둥을 돌려 깠다.[98]
가까운 조수에 의하면 말년에는 레이건의 지지자였다고 한다. # 다만 이는 미국 민주당 내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존 레논은 정치적으로 조지 맥거번, 유진 매카시 등 민주당의 반전좌파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들은 휴버트 험프리[99]로 대표되는 민주당 주류파[100]와 갈등이 심각했다. 그리고 1976년 대선에서 당선된 지미 카터는 비록 아웃사이더로 시작했지만, 당내 주류가 어느정도 수용할 수 있는 후보[101]였다. 이에 반발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많은 민주당 좌파들이 카터 지지를 거부했고, 종종 레이건을 지지하기도 했다.[102] 해당 기사에서도 그가 지미 카터를 경멸했기에(he was really sour on Jimmy Carter) 레이건을 지지했다는 식의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존 레논 역시 이런 경우에 속한 것으로 보이며, 무엇보다 존 레논이 레이건을 정말로 지지했는지는 믿을만한 출처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6. 평가
6.1. 위상
비틀즈 시절에도 인기가 대단했지만, 솔로 커리어 역시 핵이빨로 악명 높은[103] 노엘 갤러거, 루 리드와 쟈니 로튼에게 동시에 극찬을 받을 정도로 후대 뮤지션들에게 존경을 받는 음악가이다. 20세기의 대중음악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많지만, 존 레논은 그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20세기의 대중 음악을 상징하는 인물들 중 한 명이다.1970년대 이후로는 음악 뿐만 아니라 좌익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했다. 1975년 즈음 잠정 은퇴한 이후, 1980년 다시 음악 활동을 시작했지만, 동년도에 마크 채프먼에 의해 암살당하였다.[104] 가족으로는 첫번째 아내인 신시아 레논과 두번째 아내인 오노 요코, 장남 줄리안 레논 그리고 차남 션 레논이 있다.
송라이팅, 리듬 기타, 보컬 등 그가 활약했던 모든 분야에서 전설이 된 인물이다. 비틀즈 시절에는 폴 매카트니와 함께한 대중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사-작곡 콤비인 레논-매카트니의 일원이기도 했다.
솔로 시절 활동도 비틀즈 시절 못지 않게 고평가를 받는데, 그래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에도 솔로 자격으로 선정되었다. 다른 음악가들이 롤링 스톤에서 선정한 리스트에 많아야 3~4개씩만 선정되는 것과 달리 존 레논은 자신의 분야가 아닌 드럼과 베이스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순위에 올랐다.
그는 자전적이면서도 사회참여적이고, 몽환적이면서도 주제 의식이 뚜렷한 가사들로 밥 딜런, 짐 모리슨, 폴 매카트니, 믹 재거와 더불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사가들로 불리고 있다. 음악적으로도 로큰롤, 포크 록, 사이키델릭 록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말할 것 없이 크다.
비단 이런 장르들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계에서 그의 영향력을 받지 않은 음악가를 찾기 힘들다. 팝과 R&B의 전설 마이클 잭슨과 헤비메탈의 전설 블랙 사바스가 동시에 존 레논의 영향력을 언급했을 정도다.
또한, 정치적으로 꽤나 유명하다. 그는 영국의 좌익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105]로, 1970년대 솔로 활동 시기 평화주의, 반전주의적 정치 신념을 가지고 숱한 노래를 써내려갔다. 그 중에서도 Imagine은 감미로운 멜로디와 아름다운 가사로 현재에 들어서는 평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노래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단순히 노래에서 그치지 않고, 전쟁 반대 시위 등 여러 집회와 사회 운동을 직접 주도해서 20세기 중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운동가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미국의 리처드 닉슨 정부까지도 그의 사회적 영향력을 우려해 감시하였을 정도로 그는 음악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후술할 몇몇 인간적인 논란들로 인해 비판받는 부분도 있지만, 그의 음악적/정치적 업적은 현 시점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설로 평가받으며, 음악가이자 사회운동가로서의 존 레논은 영원히 전설로 남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6.2. 인기
폴 매카트니, 엘튼 존, 믹 재거, 로버트 플랜트, 프레디 머큐리와 함께 가장 상징적인 록스타중 하나로 사망한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의 조국이었던 영국에서는 존 레논이 가장 위대한 록스타로 꼽히는 일이 흔하다. 특히나 리버풀에서 존 레논은 과장하자면 거의 신과 비슷한 수준의 대우를 받아, 리버풀의 공항 이름까지 리버풀 존 레논 공항일 정도다.물론 동료 및 후대 음악가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가장 인기가 좋은 음악가 중 한 명이다.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8위에 선정될 정도로 대중들에게도 존경을 받는다. 음악적 평가든간에 대중적인 인지도로던간에, 20세기 대중문화의 상징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송라이팅에 대한 엄청난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가수로서의 커리어 역시 최고의 가수 리스트 Top 10 안에는 무조건 들 정도로 뛰어나다. 같은 밴드 내의 폴 매카트니가 음역대는 존보다 훨씬 더 넓고 보컬리스트로서의 테크닉도 한 수 위라고 하는 이들이 많지만, 폴과는 차별화되는 독특하고 뛰어난 발성력, 진솔함이 베어나오는 창법으로 현재까지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유튜브 구독자 수 역시 존 레논의 여전한 인기를 보여주는 수치이다. 존 레논의 공식 계정은 사후 4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190만명이 넘는 구독자수를 보유해 비틀즈 멤버들중 유튜브 구독자수 1위이다. 2022년 11월 기준으로 2위인 폴 매카트니가 110만명이며, 그 뒤로 조지 해리슨 75만명, 링고 스타 21만명이다.
음악가 뿐만 아니라 독특한 개인 철학관 때문에 존 레논 그 자체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일례로 BBC의 조사에서 존 레논은 영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8위로 꼽혔다. 이는 영국에서 국부급의 대우를 받는 아서 웰즐리와 호레이쇼 넬슨보다도 높은 수치이며, 영국 역사상 최징기 재임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 전후 영국 최고의 총리[106]로 자주 꼽히곤 하는 마거릿 대처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특히나 전후 영국인만을 대상으로 했을 때 존 레논은 윈스턴 처칠과 다이애나 스펜서에 이어 3위였다.
물론 에드 시런처럼 폴 매카트니의 광팬인 경우도 많지만, 후배 록 뮤지션중에서는 존 레논을 폴 매카트니보다 존경하는 경우가 더 많다. 대표적으로 리암 갤러거가 존 레논의 광신도인데, 폴 매카트니도 좋아하는 형 노엘과 달리 리암은 존 레논을 독보적으로 사랑하는 수준이다.[107]그 외에 전설적인 메탈 밴드 블랙 사바스의 오지 오스본도 존 레논의 광팬이며, 퀸은 멤버 전원이 존의 팬들이다. 공산권 록 음악가들중에서도 의외로 존의 팬들이 많은데 러시아 록의 상징과도 같은 빅토르 초이 역시 존 레논의 노래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은 연예인이다. 존은 1세대 좌파 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고,[108] 그에 따라 사회주의, 평화주의, 아나키즘 성향의 노래를 여럿 작곡하는 등 진보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이 진보적인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존 레논을 우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는 존 레논은 진보 연예인의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라, 보수적인 사람들이나 언론 사이에서는 존 레논의 정치관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아주 높은데, 존은 롤링 스톤이 선정한 100대 기타리스트, 100대 아티스트, 100대 송라이터, 100대 가수, 500대 명반, 500대 명곡에 모두 스스로나 자신의 작품을 올린 유일한 아티스트이다. 스티비 원더, 밥 딜런 등 극소수만이 2~3개 정도의 리스트에만 자신의 이름을 올렸는데, 존 레논은 드러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선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다재다능한 재능으로 널리 사랑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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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레논은 살아생전 미 육군 제2보병사단의 부대마크와 미 육군 Sergeant[109] 계급장, 임진강 정찰대(Imjin Scout) 마크 등이 박음질된 OG-107[110] 상의를 입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1960년대에 있었던 존 레논과의 인터뷰에서 밝히길, 해당 셔츠는 몇년 전 독일의 한 공항에서 레인코트를 입고 기다리다가 만난 피터 제임스 라인하트(Peter James Reinhardt) 육군 하사가 존 레논을 알아보고 이런 옷을 좋아한다면 주겠다고 하여 나중에 자신의 육군 작업복을 소포로 보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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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트 하사의 실제 사진.[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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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사진의 좌측 인물은 촬영을 위해 해당 상의를 대신 입은 라인하트 하사의 형제 앤드류(Andrew) 라인하트이다. |
존 레논은 이것이 베트남전 참전용사의 것이라고 믿고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군복을 입은 이유가 베트남전 시기에 퍼져있던 반전의 메시지라는 분석도 있다. 당연히 이 부대는 한국에 주둔한 주한미군 소속이라 베트남에 간 적은 없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상황을 생각하면 반전, 평화 메시지를 전하는 데엔 부족함이 없는 부대이긴 하다. 실제로 60년대 후반 DMZ는 북한군의 도발이 극심해 미군 사상자도 종종 발생할 정도로 위험한 지역이었다. 오늘날 이 레논의 무대 의상대로 세팅된 OG-107, 혹은 디자인이 거의 같아 대용품으로 쓰이는 OG-507[112] 셔츠는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국내에도 판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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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시계 중 하나인, 존 레논의 파텍필립 REF.2499 |
-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의 파텍필립 Ref.2499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시계 중 하나로 유명하다. # 파텍필립 Ref.2499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계로 불리는 모델으로 1년에 10개 미만만 생산되었으며, 35년간 오직 349개만 만들어진 한정판 아닌 한정판이다. 37mm의 사이즈, 최상의 혈통을 가진 이 시계는 첫 번째 시리즈는 경매를 통해 2012년에 약 30억원에 판매되었고, 플래티넘 모델은 1989년에 당시 가격으로 무려 30억원에 판매된 적도 있다. 2023년 4월자 물가로 환산한다면 대략 96억원 5천만원이다. 더군다나 존 레논이 착용한 이 모델은 파텍필립 Ref.2499 모델 중에서도 2499/100 이라는 레퍼런스를 달고 나온 Ref.2499의 네 번째 시리즈로 추정된다. 여기에 존 레논 프리미엄까지 붙었으니 그 가치는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 스티브 잡스도 존 레논의 팬. 실제로 아이팟터치 1세대의 32기가 모델 발표였던 1월 이후 출시된 아이팟터치 제품군의 표지에는 존 레논의 Imagine이 재생되고 있으며 존 레논의 앨범아트가 붙어있다. 또한 "내 비즈니스 모델은 비틀즈다"는 등의 평소 발언과 그의 전기 내용에 비추어 볼 때, 팬임이 확실하다.
- 엘튼 존과 돈독한 사이를 지내기도 했다. 션 레논의 대부가 바로 엘튼 존이다.
- 살아있었으면 80살이 넘었을 나이임에도 아직 손자녀가 없다. 큰아들 줄리안이 60살 넘어서도 미혼이고 작은아들 션 레논도 현재 장기간 연애중이긴 하지만 결혼까지는 생각이 없기 때문.
- 비 지스의 모리스 깁을 알코올 중독의 길로 이끈 경력이 있다. 나중에 모리스 깁에게 어쿠스틱 기타를 선물해주는데 이 기타는 비 지스의 This Is Where I Came In 앨범의 동명의 곡 뮤직비디오에 등장한다.
- 비 지스의 배리 깁과는 대면하지 않은채 만난 적이 있다. 비 지스가 영국에 돌아온 1967년 3월 30일, 런던의 나이트클럽인 The Speakeasy Club에서 배리는 피트 타운젠드의 소개로 존 레논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레논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의 커버 사진을 찍은 날이라 커버 속 코스튬을 그대로 입은 채 발코니에서 밖을 보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었다. 배리와 피트는 스카치 앤 코크를 마시고 있었고, 피트가 존을 소개해주겠다고하며 배리를 존에게 데려갔다. 피트는 존에게 "존, 이쪽은 비 지스의 배리 깁이야."라고 소개했고, 존은 뒤도 보지 않고 "Howyadoin"이라고 했고 곧바로 "Pleased to meet you"라고 한 후 다른 사람과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결국 배리는 존 레논을 뒷모습으로만 만나게 되었다.
- 존의 두 아들들도 가수로 데뷔하여 뮤직비디오( 샘 페킨파 감독)까지 찍었으나, 결국 자기 아버지보다는 못했다. 정확히는 전처 신시아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과 오노 요코의 아들 션 레논이 있는데, 둘 다 가수로 데뷔했고. 앨범 판매량은 플래티넘까지 따낸 줄리안의 압승. 다만 평론가들의 평은 션의 음반이 더 좋고 션은 사업도 잘 되고 있기에 음악은 취미로 하는 수준.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해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던 줄리안이지만 의외로 이복동생인 션하고는 2007년 션의 투어에도 게스트로 참여할 정도로 사이가 괜찮았다. 션이 어릴때 줄리안이 잘 돌봐줬다고. 하지만 줄리안이 요코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자 션이 일방적으로 줄리안과의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결국 줄리안이 사과해 션이랑 같이 잘 지낼려고 노력하는 중이며, 지금은 사이가 많이 좋은 편이다. 줄리안과 션은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제로, 무려 12살 차이다. 션에 의하면 줄리안이 자신한테 기타를 가르쳐줘 자신한테 영웅같은 존재라고 밝힌 바있다. 후에 비디오 게임 GTA5를 통해서 수록된 줄리안의 곡 "Too Late for Goodbyes"가 다시 주목받기도 하였다.
- 존 레논은 숫자 9를 매우 좋아했으며 또한 특별하게 여겼는데, 실제로도 존 레논과 숀 레논의 생일은 10월 9일, 비틀즈가 처음으로 공연한 날도 2월 9일인 등 그의 삶 중 중요한 날들은 9라는 숫자와 연관되어있다. 심지어 존 레논이 죽은 날인 12월 8일은 그의 고향 리버풀 시간으로 따지면 12월 9일이였다. Revolution 9, One After 909, #9 Dream 등 노래에 9를 넣기도 하였다. 또 9번째로 만들어진, 일련번호 9가 새겨진 화이트 앨범을 특별히 자신이 소유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리마스터된 비틀즈 앨범의 발매일도 2009년 9월 9일이였다.
- 그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영화 <존 레논 비긴즈: 노웨어 보이>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다. 존 레논 역은 에런 존슨이 담당했다.
- 중간 이름은 전 영국 총리인 윈스턴 처칠에게서 따온 것이지만, 강경한 좌파 성향이었던 존은 보수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처칠에서 따온 자기 이름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나중에 오노 요코의 성을 따 개명했을때 중간 이름을 빼버리려고 했지만 기각당해 고치지 못했다. 상술했듯이 폴 매카트니와 집단자위를 했는데, 이 자위 룰이 상딸을 하면서 자기가 떠올린 사람을 외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존이 뜬금 없이 윈스턴 처칠(...)을 외쳤다는 사실이 폴 매카트니의 인터뷰를 통해 밝혀졌다. # 정말 어지간히 싫어한 듯.
- 한국의 가수 한대수와 만난적이 있다. 한대수가 1978년 뉴욕의 한 식당에 들렀다가 우연히 존을 보았고, 그가 존에게 훌륭한 음악을 들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자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고...
-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 무대를 퍼포먼스와 함께 존 레논 생전에 녹화했던 Imagine 영상을 리마스터링해 장식했다. 영상. 개막식을 장식한게 폴 매카트니라면, 존 레논은 폐막식을 장식한 셈.
- 평소 자신의 얇은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남자답지 못하다며 싫어해서 비틀즈 시절에는 대부분의 곡에 더블트랙으로 보컬을 녹음했다. 대표적인 트랙이 A Hard Day's Night 스테레오 판에 수록된 'If I Fell'
- 뉴욕 센트럴 파크에 있는 그의 묘지를 포함해 세계 각지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물이 들어서있다. 이중 매우 특이한 곳에 있는 기념물이 있는데 바로 쿠바 아바나에 있는 레논 공원. 2000년에는 레논 사망 20주기를 맞아 등신대의 레논 동상도 세워졌는데, 제막식에는 한때 비틀즈를 '이기적인 소비주의의 상징'이라고 강하게 비난한 적이 있던 피델 카스트로도 참석했다. 여담으로 이 동상의 안경을 누군가 훔쳐가는 일이 하도 잦아서 자원봉사자들이 안경을 보관한다고 한다.
- 공연 영상이나 프로모 비디오 등에서 확인해 볼 수 있듯이 비틀즈 초반기때는 상당히 건장한 체격이었으나 1967년 이후로는 살이 급격히 빠지면서 마른 체형이 돼버렸다.
- 존 레논의 치아를 낙찰받은 캐나다의 한 치과의사가 2013년에 치아에서 DNA를 추출하여 존을 복제인간으로 부활시키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물론 팬들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 영국의 유명 자동차 메이커인 롤스로이스와 '악연'이 있다. 롤스로이스는 자사의 정숙함, 고급스러움이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인사에게만 차량을 판매하였다. 독재자와 같은 인사는 말할 것도 없고, 연예인도 이미지가 '경박한' 셀러브리티 유형의 스타에게는 판매하지 않았다. 하지만 존 레논의 경우엔 비틀즈라는 유명세를 롤스로이스도 포기하기가 아까워서 차량(롤스로이스 팬텀5)을, 그것도 다른 주문을 제쳐두고 레논에게 먼저 판매했다. 이런 뒷배경을 모를리 없던 레논은 당연히 아니꼽게 보았고 자동차에 장난(?)을 쳤다. 그 장난이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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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에 노란 칠을 하고 여기에다 현란한 아프리카 토속 문양을 그려버렸다. 말 그대로 롤스로이스의 이미지에 먹칠을 한 격. 이 자동차는 이후 스미소니언 재단에 기증하였고,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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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년도 쯤부터 모자 쓰기를 좋아했다.
- 채식주의자의 상징과도 같은 폴 매카트니에 밀려 잘 안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역시 채식주의자였다. 다만 종교적인 이유로 채식을 했던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나 정치적인 이유로 채식을 한 폴과는 달리, 존은 건강 상의 문제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고기를 좋아했던 존은 결국 1970년대부터는 채식주의를 포기하고 허용 범위에서만 육식을 하는 플렉시테리언 정도로 돌아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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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후대 밴드에 인신 공격에 가까운 수준의 악담을 늘어놓거나, 아예 개무시하는걸로 유명하지만 생전 인터뷰를 들어보면 후대 음악가 중에서는
레드 제플린[113]과
데이비드 보위,
엘튼 존[114] 등을 좋아했다. 또
제네시스의
Selling England by the Pound 앨범을 칭찬한적도 있다. 선대나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음악가 중에서는
에릭 클랩튼,
밥 딜런,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폴 매카트니등을 좋아했다. 특히나 척 베리를 무척이나 사랑해서 "로큰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면 척 베리라고 불러야한다"라고 할 정도로 좋아했다.
- 좋아하는 폴 매카트니의 노래로는 "Here, There and Everywhere", "For No One" 등이 있었다. 한창 존과 폴의 사이가 안좋았을때에는 그 외에 폴 매카트니의 곡들은 듣기도 싫다고 무진장 깠다. 페퍼 상사 앨범은 폴 매카트니가 쓸데없이 음악 더빙을 해 곡들을 망쳤고, 화이트 앨범은 폴 매카트니가 너무 스튜디오를 혼자서 오래 썼고, 애비로드는 메들리 구성이 앨범을 망쳤다며 폴 매카트니 때문에 자기가 만든 비틀즈 앨범이 쓰레기가 되었다며 비난한 바 있다(...).
- 타 뮤지션들의 노래로는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등 로큰롤 장르의 노래를 좋아했다. 밥 딜런, 애니멀스의 노래도 좋다고 평가했으며, 후대 밴드의 음악중에서는 Stairway to Heaven을 칭찬했다. 생전에 퀸을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죽기 직전에 퀸의 노래를 흥얼거린적은 있다고 한다.[115]
- 매부리코다.
- 비틀즈 멤버들 가운데 유일하게 셀프 타이틀 음반이 없다. 폴 매카트니는 1970년 솔로 데뷔 앨범부터 셀프 타이틀 음반이었으며, 이후로도 1980년과 2020년에 셀프 타이틀 음반을 발매했다. 조지 해리슨은 1979년에, 링고 스타는 1973년에 셀프 타이틀 음반을 발매했다. 다만 사후 컴필레이션 앨범 및 박스세트까지 확장한다면 1990년에 컴필레이션 박스세트 Lennon이 발매된 적은 있다.
7.1. 성적 지향
1963년 게이이자 비틀즈의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존 레논이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낸 후 그가 게이라는 소문이 돌았었다.[116][117] 폴 매카트니는 존의 게이설에 대해 "난 존과 단 둘이 한 방을 쓴 적이 여러 번 있지만, 그는 내게 아무 짓도 하려하지 않았다."라며 소문을 부인했다.[118]그런데 2015년 오노 요코가 인터뷰에서 밝히길, 엡스타인과의 외도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가 양성애자 성향이 있긴 했으며, 존과 이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했었는데 우리 모두 양성애자 성향이 조금이나마 있을 수 있으나, 사회적 시선 때문에 숨기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119] 그리고 존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매력적인 남자를 만난다면 거부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7.2. 레논 벽
존 레논의 이름을 따온 민주화 운동 성지. 홍콩과 체코 프라하 이렇게 2군데 있다.7.2.1. 홍콩 레논 벽
자세한 내용은 레논 벽(홍콩) 문서 참고하십시오.7.2.2. 프라하 레논 벽
자세한 내용은 레논 벽(프라하) 문서 참고하십시오.8. 디스코그래피
8.1. 앨범
자세한 내용은 존 레논/음반 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8.1.1. 빌보드 200 1위
- Imagine (1971)
- Walls and Bridges (1974)
- (Just Like) Starting Over (1980)
8.2. 싱글
8.2.1. 빌보드 핫 100 1위
-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 (1974)
- (Just Like) Starting Over (1980)
8.2.2. 빌보드 핫 100 2위
- Woman (1981)
8.2.3. 빌보드 핫 100 3위~10위
- Instant Karma! (We All Shine On) (1970)
- Imagine (1971)
- #9 Dream (1975)
- Watching the Wheels (1981)
- Nobody Told Me (1984)
8.2.4.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 Give Peace a Chance (1969)
- Power to the People (1971)
- Mind Games (1973)
- Stand by Me (1975)
9. 어록
음악 활동 뿐만 아니라 히피 사상가, 사회 운동가로도 활동한 사람이라 많은 어록을 남겼으며, 이 때문에 그의 명언은 종종 SNS나 방송에서도 회자된다. 히피답게 평화나 사랑에 관한 어록이 많다.A dream you dream alone is only a dream. A dream you dream together is reality.
혼자서 꾸는 꿈은 몽상이지만, 우리 모두가 꾸는 꿈은 현실이다.
혼자서 꾸는 꿈은 몽상이지만, 우리 모두가 꾸는 꿈은 현실이다.
It's weird not to be weird.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 더 이상하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 더 이상하다.
Time you enjoy wasting, was not wasted.
당신이 낭비된 시간을 즐겼다면 그것은 낭비된 시간이 아니다.
당신이 낭비된 시간을 즐겼다면 그것은 낭비된 시간이 아니다.
Everything will be okay in the end. If it's not okay, it's not the end.
모든 것의 끝에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 만약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다.
모든 것의 끝에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 만약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다.
War is over ... If you want it.
전쟁은 끝났다 ... 당신이 원한다면.
전쟁은 끝났다 ... 당신이 원한다면.
If everyone demanded peace instead of another television set, then there’d be peace.
만약 모두가 TV 하나를 장만하려는 대신 평화를 장만하려고 든다면 평화가 만개할 것이다.
만약 모두가 TV 하나를 장만하려는 대신 평화를 장만하려고 든다면 평화가 만개할 것이다.
Living is Easy with Eyes Closed, Misunderstanding all you see.
눈을 감고 사는 인생은 모든 것을 오해하기 때문에 쉽다.
눈을 감고 사는 인생은 모든 것을 오해하기 때문에 쉽다.
I can’t wake you up. You can wake you up. I can’t cure you. You can cure you.
내가 당신을 깨워줄 수는 없다. 당신만이 당신 스스로를 깨울 수 있다. 난 당신을 치료할 수 없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을 치료할 수 있다.
내가 당신을 깨워줄 수는 없다. 당신만이 당신 스스로를 깨울 수 있다. 난 당신을 치료할 수 없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을 치료할 수 있다.
Art is only a way of expressing pain.
예술은 고통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예술은 고통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You’re all geniuses, and you’re all beautiful. You don’t need anyone to tell you who you are. You are what you are.
당신은 천재이고 아름답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말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당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천재이고 아름답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말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당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We live in a world where we have to hide to make love, while violence is practiced in broad daylight.
우리는 대놓고 사랑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대신 이 세상의 낮에는 폭력이 공공연히 일어난다.
우리는 대놓고 사랑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대신 이 세상의 낮에는 폭력이 공공연히 일어난다.
Reality leaves a lot to the imagination.
현실의 많은 것들이 상상에서 비롯된다.
현실의 많은 것들이 상상에서 비롯된다.
When I was 5 years old, my mother always told me that happiness was the key to life. When I went to school, they asked me what I wanted to be when I grew up. I wrote down ‘happy’. They told me I didn’t understand the assignment, and I told them they didn’t understand life.
내가 5살일 때 우리 엄마는 행복이 삶의 열쇠라고 늘 말하셨다. 내가 학교에 갔을 때 선생들은 내가 자라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행복"이라고 답했지만, 그들은 내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그들이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내가 5살일 때 우리 엄마는 행복이 삶의 열쇠라고 늘 말하셨다. 내가 학교에 갔을 때 선생들은 내가 자라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행복"이라고 답했지만, 그들은 내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그들이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Peace is not something you wish for; It’s something you make, something you do, something you are, and something you give away.
평화는 당신이 원해야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만들어야할 것, 해야할 것, 그 자체인 것 그리고 줘야할 것이다.
평화는 당신이 원해야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만들어야할 것, 해야할 것, 그 자체인 것 그리고 줘야할 것이다.
It matters not who you love, where you love, why you love, when you love or how you love, it matters only that you love.
당신이 누구를, 어디서, 언제, 어떻게 사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당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누구를, 어디서, 언제, 어떻게 사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당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Count your age by friends, not years. Count your life by smiles, not tears.
당신의 나이를 햇수가 아니라 당신의 친구로 세어라. 당신의 삶을 눈물이 아니라 웃음으로 세어라.
당신의 나이를 햇수가 아니라 당신의 친구로 세어라. 당신의 삶을 눈물이 아니라 웃음으로 세어라.
Love is a promise, love is a souvenir, once given never forgotten, never let it disappear.
사랑은 약속이자 기념품과도 같다. 한번 주어지면 결코 잊지 않으니, 결코 그것을 잃어버리지 마라.
사랑은 약속이자 기념품과도 같다. 한번 주어지면 결코 잊지 않으니, 결코 그것을 잃어버리지 마라.
We need to learn to love ourselves first, in all our glory and our imperfections. If we cannot love ourselves, we cannot fully open to our ability to love others or our potential to create. Evolution and all hopes for a better world rest in the fearlessness and open-hearted vision of people who embrace life.
우리는 모든 영광과 불완전성 속에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워야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나 창조의 잠재성을 결코 얻을 수 없다. 진화와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희망은 삶을 열린 태도로 받아들일것이냐, 혹은 닫힌채 내버려둘것인가에 달려있다.
우리는 모든 영광과 불완전성 속에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워야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나 창조의 잠재성을 결코 얻을 수 없다. 진화와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희망은 삶을 열린 태도로 받아들일것이냐, 혹은 닫힌채 내버려둘것인가에 달려있다.
The more I see, the less I know for sure.
당연하지만 더 많이 볼수록 더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
당연하지만 더 많이 볼수록 더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
If everyone could just be happy with themselves and the choices people around them make, the world would instantly be a better place.
만약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과 주변 사람들의 선택에 대해 만족할 수 있다면, 세상은 즉시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과 주변 사람들의 선택에 대해 만족할 수 있다면, 세상은 즉시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다.
There are no problems, only solutions.
세상에 문제라는 것은 없다. 해결책만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 문제라는 것은 없다. 해결책만이 있을 뿐이다.
How can I go forward when I don’t know which way I’m facing?
내가 직면한 상황을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전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직면한 상황을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전진할 수 있겠는가?
Everything is as important as everything else.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소중하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소중하다.
I believe in God, but not as one thing, not as an old man in the sky. I believe that what people call God is something in all of us. I believe that what Jesus and Mohammed and Buddha and all the rest said was right. It's just that the translations have gone wrong.
나는 신을 믿는다. 하늘 위에 떠있다는 노친네 말고. 나는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속에 잠재되어있다고 믿는다. 난 예수 그리스도와 무함마드, 그리고 부처와 나머지 모든 신들이 모두 옳았다고 믿는다. 그냥 그들의 가르침이 곡해되었을 뿐이다.
나는 신을 믿는다. 하늘 위에 떠있다는 노친네 말고. 나는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속에 잠재되어있다고 믿는다. 난 예수 그리스도와 무함마드, 그리고 부처와 나머지 모든 신들이 모두 옳았다고 믿는다. 그냥 그들의 가르침이 곡해되었을 뿐이다.
Love is a flower. you got to let it grow.
사랑은 꽃과 같다. 그것이 자라도록 해야 한다.
사랑은 꽃과 같다. 그것이 자라도록 해야 한다.
I want you to make love, not war. I know you've heard it before
당신이 전쟁이 아닌 사랑을 하길 소원한다. 당신도 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당신이 전쟁이 아닌 사랑을 하길 소원한다. 당신도 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
[1]
후일
베트남 전쟁이나 지원하는 왕실이 주는 훈장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며 반납했다. 비슷한 성격이었던
조지 해리슨 역시 자신이 받은 최악의 상이 바로 MBE 왕실 훈장이라고 했지만, 반납하지는 않았다.
1966년, 일본 공연 당시 인터뷰에서 기자가 '왕실 훈장을 받은 기분이 어땠냐'라고 했을때,
링고는 좋았다고 한 반면 존과 조지는 상 받으려고 일찍 일어나야해서 피곤했다고 말했다. 정치 성향과 상관 없이 직설적인 성격답게 원래부터 그런 훈장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2]
한국어 차용어 음운론 연구에서 '스탠리'와 함께 자주 나오는 토큰이다. /nl/ 연쇄는 한국어 음소배열론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유음화되거나 비음화되어 해소되어야 하는데, 단일어내의 연쇄인 스탠리의 경우 '스탠니'로 비음화되는 것이 확정적이나 존 레논의 경우 비음화한 '존네논', 유음화한 '졸레논' 혹은 고유어에서 불가능한 연쇄인 '존레논' 그대로 발음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참고로 차용어 /nl/연쇄의 처리 문제는 나이에 따른 발음차이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되어있으며 나이가 많을수록 비음화하여 '존네논'이라고 발음하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3]
원래는 존 윈스턴 레논이었지만 오노 요코와 결혼하고 개명했다.
[4]
비틀즈 해체 이후 미국에서 거주했지만, 시민권자가 아닌 영주권자였기 때문에 최종 국적은
영국이다.
데일리 텔레그래프,
데일리 익스프레스 등의 영국 보수언론사들과
더 선을 비롯한
황색언론사들의 악의적 선전에 지친 데다가
뉴욕이라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도시가 마음에 들었는지
미국 국적을 따려고 했지만, 국적 취득 코앞까지 갔다가 피살당해 결국 이루지 못했다.
[5]
現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리버풀.
[6]
그가 태어난 곳인 리버풀 모성병원은 1995년 리버풀 여성병원과 합병된 이후 문을 닫았고, 원래 쓰던 건물은 현재 학생 숙소로 쓰이고 있다.
[7]
1973년부터
1975년까지는 별거.
[8]
1884년에 지어진 뉴욕 최초의 고급 맨션으로, 존이 암살된 곳도 이 곳이다.
[9]
전원이 아일랜드계인
비틀즈 멤버 중 가장 아일랜드계 혈통이 짙었다. 잉글랜드계는 1/8정도 밖에 안되었고, 나머지는
웨일스와
아일랜드 혈통이라고 한다. 이 때문인지 1970년대에는
북아일랜드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사회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0]
자신의 노래 God에서 자신은
신도
부처도
성경도 믿지 않는다며 믿는 것은 오직 존 레논 자신과 아내인
오노 요코 뿐이라고 자신의 무신론에 못을 박았다. 심지어 자신이 몸담았던 비틀즈조차 믿지 않는다고 가사에 넣었다. 참고로 존 레논과 갈등이 있었던
폴 매카트니는 확고한 무신론자는 아닌 무신론적 불가지론자다.
[11]
비틀즈 중후기 시절에는
사이키델릭 록,
익스페리멘탈 록,
사이키델릭 팝,
블루스 록(
1968년 이후)을 주로 시도했다. 솔로 활동 시절에는 사이키델릭부터 일렉트로니카까지 상당히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던
폴 매카트니와 달리
포크 록,
블루스 록,
팝 록,
로큰롤 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12]
폴 매카트니와 마찬가지로 다룰 줄 아는 악기는 30개가 넘는다.
조지 해리슨도 존 레논의 사후 존 레논이 인도 음악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비틀즈 해체 이후 존 레논의 집에 놀러갔을때 존이
시타르를 들고 인도 음악을 연주해서 깜짝 놀랐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하모니카 역시 잘 불어서
Love Me Do나
I Should Have Known Better, I'm a Loser 같은 곡들에서 훌륭한 하모니카 연주를 보여주었다.
[13]
비틀즈의 멤버들 중 가장 많은 곡의 리드 보컬을 담당했다.
[14]
1975년 즈음 잠정 은퇴한 이후, 1980년 다시 음악 활동을 시작했지만, 동년도에
마크 채프먼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안타깝게도,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는 제일 단명하였다. 두 번째로 단명한 인물은 2001년 암으로 사망한
조지 해리슨.
[15]
Please Please Me ~
Revolver까지의 모습.
[16]
국내에서는 긴 머리에 안경을 쓴 이미지가 많이 굳어졌지만, 이 시기의 존 레논은 시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를 가진 상당한 미남이었다. 훗날 폴 매카트니와 결혼하게 되는
린다 매카트니조차도 이 당시엔 존 레논의 열성 팬이었다고 한다.
[17]
존 레논은 좋게 볼 수 없는 사람. 존의 유년시절 그를 떠난 것도 모자라, 훗날 비틀즈의 인기에 힘입어 어느 소녀팬과 결혼한다.
[18]
노래제목인
Strawberry Fields Forever가 여기에서 나온것이다.
[19]
록엔롤 명예의 전당에서 폴이 연설하는 것을 들어보면
밴조가 아니라 우쿨렐레라고 한다. "존의 어머니 줄리아 레논은 빨간머리의 우쿨렐레를 치는 멋진 예쁜 여성이였어요. 그런 여성은 처음 봤어요. 존은 어머니에게 우쿨렐레 코드를 배워서 연주하는데, 저에게 처음으로 기타 코드를 배웠지요."
[20]
존은 이모 미미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미미가 보수적이어서 존의 삶을 이해하진 못했음에도 사이는 상당히 좋았다고. 심지어 다른 가족들과 관계를 끊으면서도, 미미하고는 죽을때까지 매주 연락을 했다고 한다. 미미는 존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11년을 더 산 뒤, 1991년에 타계했다.
[21]
대학 밴드 급이라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이름이 "쿼리 뱅크(Quarry Bank)"였기 때문에 이름을 쿼리+멘(Men)으로 지었다.
[22]
이 당시 존은 왼손잡이인 폴이 기타를 거꾸로 잡는 걸 보고 "기타도 똑바로 못 드는 놈이 뭘 하겠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인상적이었고, 특히 폴이 자작곡을 만드는 것과 기타를 조율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23]
실제로 법정에서 존의 이모가 그에게 '살인마!'라고 소리쳤다.
[24]
이후, 에릭 클래그는 나중에 상관에게 된통 털리고 잠시 직무에서 정직되었다 상관과 동료, 세간의 눈치 때문에 얼마안가 경찰을 관두고 우편 배달부로 이적했다고 하며, 그러다
비틀즈가 유명해지자 수많은 편지를 집집마다 돌리는 일로 고생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만취한 경찰이 시민을 죽이고 무죄선고를 받은데다 이로 인해 세간의 비난을 받았으니 경찰 입장에선 그 한놈 때문에 경찰 이미지에 먹칠을 당한 셈이다. 물론 그 역시 세간의 눈치와 죄책감 때문에 한동안 힘들게 살았다.
[25]
그때까지만 해도 존은 어머니에게 배운
우쿨렐레 코드로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26]
본래 미술학도였던 자신의 정체성과 독일인 애인과의 문제 등이 겹쳤다.
비틀즈 항목으로.
[27]
존 레논은 폴의 멜로디 메이킹 실력을
폴 매카트니는 존의 노랫말을 쓰는 실력을 높이 샀다고 한다.
[28]
In My Life의 경우,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곡인데, 존의 생전 그의 곡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폴 매카트니가 자신의 곡이라며 주장하고 나온 것. 사실 폴은 존이 죽기 전에도 자신이 작곡한 곡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비틀즈 시절 그들이 쓴 모든 곡들은, 심지어
Yesterday처럼 온전히 개인의 창작물인 경우에도 Lennon-McCartney로 표기되어 진위 여부를 가리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단 작사가는 존이라는 것이 중론. 일부 팬들은 메인 보컬이 존이라는 것과 특유의 서정적인 스타일 등을 근거로 들며 존의 곡임을 주장하지만, 일각에서는 폴이 괜히 거짓말까지 해가며 200곡들 중 한 곡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했겠냐며 반론한다. 어떤 이들은 아예
작곡가가 누구인지를 크게 신경쓰지 않기도 하고.
http://cafe.naver.com/thebeatlemania/76433 같이 읽어보면 좋을 포스팅.
[29]
1965년 이전에도 I'll Cry Insted, I'm A Loser와 같은 레논의 내면이 반영된 곡들을 간간이 만들긴 했다.
[30]
이 시기부터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얇은 금테 안경을 쓰기 시작했으며, 수염을 길렀다.
[31]
근데 어째 사과 내용도 예수쟁이들을 비꼬는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예수 발언 항목으로.
[32]
비틀즈는 애초부터 록 그룹임을 잊지 말자.
[33]
이
백마스킹에 근거해 '
비틀즈 노래를 거꾸로 들으면 악마숭배적 메시지가 관측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백마스킹이 화제가 된 또 다른 노래로는 Revolution #9이 있다.
[34]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각자가 쓴 미완성 곡을 하나로 연결해서 만든 노래다. 이와 반대로 두 사람이 같은 앨범 안에서 같은 주제로 다른 두 곡을 쓴 경우로, 존의
Strawberry Fields Forever와 폴의
Penny Lane이 있다.
[35]
이 곡과 폴 매카트니의 '
Penny Lane'은 사실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보다도 먼저 발표된 싱글이다. 자세한 내용은
Magical Mystery Tour 항목으로.
[36]
이 곡 이후 존 레논은 'Walrus'라는 가사를 곡에 자주 사용하는데, 이유없이 등장하는 경우도 많지만, 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경우도 잦다. 'Glass Onion'에서는 'The Walrus Was Paul'이라면서 폴을 까기도 했다.(해당 구절의 내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착한 등장인물로 나온다고 알고 있던 Walrus가 사실 악당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폴은 착해 보이지만 사실은 악당이다'라는 의미. 곡 자체도 폴을 까기 위해 만든 곡이다. 폴이 평소에 자신의 노랫말을 짓는 실력을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존 레논이 "폴이 만든 가사는 '유리 양파'라는 단어처럼 뭔가 그냥 있어보이는 단어를 붙여놓았을뿐 사실 아무런 의미없는 가사일 뿐이다."라면서 폴을 디스하는 내용) 음모론자들은 이를 폴이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들이밀기도 한다. 왜냐하면 저 가사를 직역하면 "(사실) 왈루스는 폴이었지"라는 뜻인데, 왈루스는 위에서 적은 존의 별명(바다코끼리)이기도 하지만, 그리스어로 시체라는 뜻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어에 walrus 라는 단어는 없으므로 이는 루머로 추정된다. 일단 폴 매카트니 사망설 자체가 아무 근거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
[37]
실제로 신시아의 존재는 미국 진출 이후에야 밝혀졌다.
[38]
사망한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대신할 비틀즈의 후임 매니저 선정에 대한 멤버들의 이견 불일치를 말한 것으로 현재 시점에서 비틀즈 해체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39]
비틀즈 문서로. 사실 존의 인생사와 우여곡절 자체를 비틀즈와 구분지어 생각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40]
원래부터 존은 자의식이 강했는데, 밴드 성향 때문에 자신이 작곡한 곡들의 멜로디가 폴의 방향으로 대중성 있게 수정되면서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예로
Help!의 오리지널 템포는 엄청 느리고 우울한 멜로디이다. 존 내면을 드러내는 가사들을 가지고 폴이 로큰롤 사운드를 입혀 대중적인 히트곡으로 탈바꿈시킨 작품 중 하나. 본인이 비틀즈 활동시 발매한 노래들은 대부분 극혐이라고 셀프 디스 한 적도 있다. 이 점이 마음에 남았는지, 훗날 폴 매카트니는
리버풀 공연에서 Help!를 존 레논이 의도한 버전으로 편곡하여 커버해
무대에 선보이기도 했다.
[41]
해당 사진은
Abbey Road 앨범 자켓 촬영 당일인 1969년 8월 8일에 찍힌 것이며, 비틀즈의 공식적인 해체 발표는 1970년 4월 10일이지만, 밴드 멤버 4명이 마지막으로 모인 것은 1969년 8월이었다. 이후 넷이 한꺼번에 모이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둘이 서로를 마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이 사진의 감상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42]
그래도 옥상 공연이나 스튜디오에서의 영상을 보면 녹음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사이가 안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애플사의 경영과 같은 음악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때 분위기가 험악해진 편이다.
[43]
이 녹음을 담은 부틀렉이 존재한다. 제목은 "A Toot and a Snore in 74"로 위키피디아에도 항목이 개설되어 있다. 다만, 존 레논과
링고 스타가 약과 술에 취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기에 연주 자체는 형편 없었다. 레코딩의 질 보다는 역사성으로 인해 높게 평가받는 부틀렉이다.
[44]
이후에 밝혀진 일화에 따르면 폴의 음반이 나올 때마다 꼭 찾아 들었다던가, 오노 요코가 폴에게 '존은 당신을 정말 좋아했어요'라고 말한 부분들을 살펴보면 한참 싸우는 와중에도 폴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45]
훗날
Cloud Nine을 발표한 1987년, 조지는 존 레논의 영향을 축소 서술한 이유를 질문 받자, "제가 존 레논에게 미친 영향도 스스로 상당 부분 생략해서 서술했어요. 저는 상호 영향을 쌤쌤이 치기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라고 답하면서 오히려 가까운 관계였기에 일일이 서술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46]
이는 다른 어떤 비틀즈 멤버들의 솔로 1위곡 기록보다 적은 수이다. (폴 9곡, 조지 3곡, 링고 2곡. 링고는 존과 동점이라 생각되겠지만, 링고의 1위곡들은 모두 그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1위에 올랐으며, 존 사망 직후 그의 곡들에 관심이 쏠리며 1위에 올라간 스타팅 오버와 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47]
Primal therapy. 유아기 시절처럼 돌아가 크게 울부짖는 등의 감정 표출을 통한 신경증 치료법. 밴드
프라이멀 스크림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48]
그 옆은 아내
오노 요코. 그가 저격당하기 얼마 전인 1980년 11월 2일 촬영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진을 촬영한 후 정확히 36일 뒤 저격당한다. 밑에 있는 저격 직전 자신을 암살한 범인인
마크 채프먼과 함께 찍힌 사진과 더불어 죽기 직전 찍은 사진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
[49]
존은 마크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었는데, 그의 생전 마지막 사진은 자신을 죽인 사람과 찍은 사진이 되어버렸다.
[50]
총에 맞은 당일 하루 전날, 레논은 자신의 이모인 미미에게 어린아이같은 말투로 "내일 만나요 미미, 집에 갈게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미미는 그 다음날 일어나서 방송에서 레논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보면 슬픔에 가득한 눈으로 인터뷰하는 미미를 볼 수 있다.
[51]
덤덤탄으로도 불리며, 총탄 앞을 파 놓아 부위에 피격 시 몸 속에서 찌그러지게 만들어 박힐 때 관통력을 최소화하고 저지력과 살상력을 높인 탄약이다. 일반적으로 피갑을 입힌 것은 JHP라 한다.
[52]
채프먼은 총 5발의 총알을 쐈는데 첫 발은 빗나갔지만, 3발이 몸을 완전히 관통했으며 나머지 한 발은 가슴에 박혔다. 불행 중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심장에는 맞지 않았고, 피격 후 즉사하진 않았지만, 탄약이 하필 그 위험한 할로포인트라 어마어마한 위력에 왼쪽 허파와 대동맥 포함 심장 주위의 무수한 혈관들이 파괴되었기에 소생 가능성이 없었다. 수술실에서 총을 맞고 지체없이 바로 소생술을 시행했더라도 결국 사망했을 것이라는게 담당의사의 결론이었다.
[53]
주간조선 2010-10-18
《존 레넌 탄생 70년·암살 30년 아직도 눈물 흘리는 뉴욕!》
[54]
중앙일보 2002-02-23
《
존 레넌 살인범 '범행 이유는 애정결핍'》
[55]
잘못된 정보가 하나 기재되어 있는데 레논은 2발이 아니라 5발의 총탄을 맞아 사망했다. 속보 자체가 급작스러웠고 병원에서 정확한 부검 관련 정보가 나오기 전이라 약간의 오류가 있었던 듯하다.
[56]
1995년 별세.
[57]
미국 정부는 당시 헨드릭스의 집에 이사했던 것을 찝어서 마약문제와 여려가지 자잘한 것들을 시비 걸면서 이민을 거부하였다. 사실 이민을 거부한 이유는 존 싱클레어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사회운동을 하며 젊은이들이 정부에 반감을 가지게 해서 높으신 분들이 맘에 안들어 했다는 것이 누가 봐도 정설이다. 하지만 전남편이 미국인이었던
오노 요코는 미국 이민이 신청되었다고 한다. 살해당한 그날까지도 레넌은 이민을 하려고 변호사와 상담을 하며 애썼다. 그 전에 했던 마약들을 문제 삼았기에 오노 요코와 헨드릭스가 죽은 집에서 대청소를 했다고 인터뷰한다.
[58]
돈 맥린의
American Pie에 등장하는 가사인 "the day the music died"(음악이 죽은 날)에서 따온 표현. 실제로는 1959년 2월 3일, 즉 비행기 추락으로 버디 홀리, 리치 발렌스, 빅 바퍼가 한꺼번에 객사한 날을 가리킨다.
[59]
우습게도 이런 존 레논의 재평가를 기점으로 하여 폴 매카트니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는 것. 그러나 현재는 폴 매카트니 역시 솔로 시절의 음악적 성취를 인정받아 존 못지 않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비틀즈 시절~존 레논 죽음 이전의 평가는 폴>=존이었다가 존의 죽음을 기점으로 존>=폴로 헝세가 역전, 2010년대에 접어들고 폴 매카트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존=폴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60]
얼마나 높은 순위냐하면
헨리 8세나
알프레드 대왕 등 위인까지도 앞서는 정도다.
[61]
창의성 증진, 동양에서 차별받는 사람에 대한 인권 보호와 같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열악한 치안이나 생활 환경 등의 문제도 유발하는 양면적인 사고방식이다.
[62]
당연하지만 여기에는 2차세계대전 관련자는 물론이고 길개보면 러일전쟁, 청일전쟁 등 일본의 침략 역사를 같이하는 신사이다.
[63]
미국은
진주만 공습의 피해자였기에 일본의 과거사 지우기에 대해서 분노한다.
[64]
물론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서양 열강 식민지에서 살다가 일본의 침략을 당한 유럽계 이주민들에게 일본은 침략자였고 그 이주민들의 후손들 또한 일본을 증오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입장일 뿐, 서유럽 본토인들에게는 남의 일에 불과했다.
[65]
본인들이 침략당한 것도 아니고 자신들도 똑같이 제국주의적 침략을 했으므로
[66]
Mind Games 녹음을 시작하고, 존과
오노 요코가 이별하기로 결정하면서 요코는 존에게 비서 메이 팡을 소개시켜준다. 메이 팡은 존에게
폴이나 줄리안 같은 사람들과 나은 관계를 쌓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고 존은 그녀의 말을 납득한다. 이후 존이 다시 오노와 화해하면서 흔히 말하는 잃어버린 주말은 끝나게 된다.
[67]
흔히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존 라이든, 키스 리처즈,
노엘 갤러거를 록 음악 3대 핵이빨로 쳐주지만 노엘 갤러거는 선배 밴드에 대한 존경심을 가리지 않고 드러내는 편이라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앞의 두 사람보다는 욕을 덜 먹는다. 그래도 존 레논은 워낙에 상징적이고 전설적인 인물이라서 본인이 깠었던 후배 뮤지션들은 물론이고, 앞 세대 뮤지션들에게까지도 존경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대에는 존 라이든, 키스 리처즈 정도로 알려지진 않았으나 생전에는 굉장한 핵이빨로 유명했다.
[68]
1970년에 발매한
My Sweet Lord의 표절 시비를 가리킴.
[69]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는 서로를 존중하고 친분도 두터운 밴드이며,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인
키스 리처즈도 비틀즈를 깐 적이 수도 없이 많다.
[70]
그나마 이는 있어보이는 채 하고 시드 비셔스나 짐 모리슨 같은 요절한 가수들을 찬양하는 몇몇 몰지각한
록부심 부리는 록빠들을 비판하는 측면에서 나온지라 참작의 여지가 있다.
[71]
물론 존 레논이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하나인 건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타 아티스트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며 독설을 내뱉는 사람이 정작 본인은 천재라고 말하고 다니니 비판받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존 레논에게는 비틀즈의 유명세와 세간의 어마어마한 관심에서 비롯된 스타로서 소비되는 이미지에 대한
강박과 부담감 역시 가지고 있었다.
[72]
다만, 이것은 조금 달리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비틀즈는 1960년대 초기 비틀매니아 시절 영국 내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위치해있었고, 그로 인해 당연히 현대의 연예인처럼
사생팬 문제 역시 극심했었다. 당시는 21세기처럼 팬으로서 지녀야 할 예절 같은 것이 제대로 정립 되지 않았던 상태로, 일부 극성적인 팬들 사이에서 멤버들을 만지면 질병이 일시적으로 낫거나 치유된다는 여러 근거없는 낭설들이 돌았다고 한다. 실제로
폴 매카트니는 집에 사생팬이 침입해 옷가지를 훔쳐가는 등의 사건을 겪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으며, 이 당시 멤버들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일부 정신질환자 또는 환자들과 만남을 가졌어야 했고, 가벼운 신체 접촉 역시도 요구받았다고 한다. 당시 비틀즈가 받던 이러한 처우와 연관 지어 생각해봤을 때 존 레논이 실제로 중증 장애인을 비하하려는 의도보다는 이러한 행태에 대한 비판의 의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73]
재미있는 점은 폴이 존보다 키가 더 크다는 것. 그러나 당시에는 폴이 학생이었을 것이고, 존 레논이 2살 형이므로 폴의 이러한 말이 틀리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74]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였다는 설이 있다.
[75]
뺨을 때린 사건 이외에는 신체적인 폭력은 없었으나, 언어적으로는 여전히 그녀에게 자주 차갑고 불친절했다고 한다. 또한 오노 요코를 만난 이후 대놓고 보는 앞에서 바람을 피우는 등의 행보로 그녀를 충격받게 했다고 한다...
[76]
Getting Better나
Jealous Guy와 같은 곡에서 가사로 반성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인터뷰들에서도 자신이 과거에 여성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폭력적이었다고 말하며 잘못을 일부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77]
이렇다보니 정치적이나 음악적으로 존 레논을 좋아하더라도 인간적으로는 폴 매카트니가 훨씬 낫다고 하는 사람들이 비틀즈 팬덤 내부에서도 많다. 폴 매카트니는 후배 뮤지션들에게 격려도 많이 해주고, 사적으로 친근하고 사교적이라는 미담이 많다. 논란거리를 몰고다니는 록 음악가들 중에서 독보적으로 논란이 적고,
영국의 악명높은 더 썬 같은 황색 언론들도 폴 매카트니에 대한 비판은 자제할 정도.
[78]
아버지인 알프레드 레논에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79]
Hey Jude가 줄리안 레논을 위로해주려 만든 곡이라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리고 초창기엔 폴 매카트니가 존 레논에게 줄리안에 대해 잘 챙겨주라는 식으로 언급해보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아들이니 넌 관심 끄라'는 식으로 응수했다고 한다.
[80]
이 중 그가 주도하여 작곡한
She Loves You와
I Want to Hold Your Hand는 각각 그 해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싱글이 된다.
[81]
그러나 이러한 점들 때문에
Rubber Soul에서는 당시 자신의 마초적인 사고관을 솔직하게 가사에 쓰는 바람에, 훗날 본인 스스로도 흑역사로 치부하는 곡도 있었다.
[82]
Rubber Soul의 수록곡
Drive My Car는
폴 매카트니가 리드 기타를,
조지 해리슨이 베이스를 쳤고
Revolver의 수록곡
She Said She Said에서는 조지 해리슨이 베이스를,
Taxman에서는 폴 매카트니가 리드 기타를 맡았다.
The Beatles의
Back in the U.S.S.R.에서는 폴 매카트니가 드럼을 담당하기도 했다.
[83]
다만,
롤링 스톤즈의
키스 리처즈와
AC/DC의 말콤 영은 팀 내 리드 기타 포지션을 맡은 인물들과 동급 내지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84]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에서 11위에 랭크되어 있다.
[85]
All My Loving,
This Boy, I'm Happy Just to Dance with You 등 초창기 로큰롤 시절에 존의 리듬 기타가 돋보이는 곡들이 많은 편이다.
[86]
이러한 면은 훌륭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뛰어난 곡에 연주를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는 점에서
링고 스타와 유사하다.
[87]
사실 리듬 기타 포지션 자체가 테크닉을 중요시하는 부분이 아니기에, 크게 별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대표적으로
키스 리처즈 역시 테크닉적으로 뛰어나다기보다는 리프 창작과 작곡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는다.
[88]
Get Back에서는 리드 기타를 담당하여 화려한 기타 솔로 연주를 보여주는 등 테크닉이 없는 기타리스트는 결코 아니다. 디스토션을 잔뜩 먹인
Revolution 도입부의 강렬한 기타 속주도 존의 작품.
For You Blue에서는 랩 스틸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자기 연주가 너무 마음에 들었는지 "나 지금 완전 날아다니고 있어"라며 자화자찬했다(...).
[89]
대표적인 숏 스케일 기타는 커트 코베인이 애용했던 24인치(610mm) 펜더
머스탱,
재규어나 24.75인치(628.65mm) 깁슨
레스 폴,
SG 같은 모델들이다. 일반적인 프렛간격이 아닌 더 짧은 간격을 사용함으로 특유의 짧은 서스테인 그리고 작은 장력이 주는 소리 등이 특징이다. 위에서 서술했다 싶이 본인이 리듬기타 파트인데 손가락이 짧다면 숏 스케일 기타를 고려해보길 바란다.
[90]
이 시기, 극소수의 곡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레코딩에 이 기타가 사용되었다.
[91]
1968년, 인도 수련 중 어떤 사람에게 '악기의 도색을 벗겨내면 좋은 소리가 난다'라고 들어서 1968년에 직접 사포로 바디 도색만 벗겨냈다.
[92]
메이드 인 제펜, USA, 차이나 3개로 나뉘며 차이나 빼곤 거의 구할 수 없다. 현재 일반버전은 3가지로 나뉘며 차이나에서 만드는 카지노와 일본에서 만드는 5ply 1965 Elitist 메이플 바디 카지노 그리고 3ply의 메이플 바디로 만드는 제펜 Elitist 1955 빈티지 아웃핏 등이 있다.(중간 중간 발매한 리미티드 버전은 제외, 빈티지 아웃풋은 현재 일본 내수용이며 직구로 구매하여야 되고 현재 생산이 중단된 상태로 보인다.)
[93]
주니어 모델은 원래 1픽업 1볼륨 1톤이다. 스페셜처럼 되어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94]
대표적으로
Lovely Rita 등.
[95]
물론 이후에도
Yer Blues너
Don't Let Me Down 등의 블루스 록 넘버에서는 예전처럼 거칠고 파워풀한 보컬을 선보였다.
[96]
다만, 오노 요코를 만나기 이전부터 존 레논은
리버풀 노동 계급 출신이었던 만큼 진보적이고 반항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오노 요코를 만난 이후 그런 성향이 제대로 정립되고 정제되어 사회에 영향을 줄만큼의 사상으로 발전되었고 공공연하게 드러내어지기 시작한것.
[97]
존 레논이 세상을 떠난 지 40여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다수의 영국 내 보수적 타블로이드지에서는 존에 대해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수준이다.
[98]
그 당시
미중관계는 2023년 현재와 달리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우호적인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서 닉슨이 문화검열을 하고 동시에 마오쩌둥과 친하게 지내자, 분노한 존 레논은 닉슨과 마오쩌둥을 동일시하며 이 둘을 강하게 비판했다.
[99]
조 바이든이 1970년대에 모신 보스로,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조직을 물려받아 1970년대 내내 민주당의 실세로 자리잡은 정치인이었다.
[100]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맥거번이 민주당 후보로 결정되자, 민주당 주류 세력은 조지 맥거번의 지지를 거부했고, 이른바 '닉슨을 위한 민주당원'을 주장하며 오히려 공화당 후보였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지지했다. 이로 인해 1970년대 내내 맥거번 등 당내좌파와 험프리 등 주류파의 갈등이 있었던 편이었는데 존 레논은
조지 맥거번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선거운동도 간접적으로 도와준 사람이었다.
[101]
물론 모두가 그를 수용한건 아니었다. 애초에 앞서 말한 휴버트 험프리부터 카터의 부상을 경계한 주류파가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 시도했었다. 이른바 '카터가 아니라면 누구든(Anybody But Carter)' 운동.
[102]
대표적으로
유진 매카시 전 상원의원이 있다. 유진 매카시는 맥거번과 함께 가장 앞장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 저명한 급진좌파 정치인이었으나 카터의 무능함과 민주당 지도부 견제를 목적으로 레이건을 지지했다. 다만 매카시의 성향은 연달은 낙선 이후 말년에 리버테리안•중도 포퓰리즘 성향으로 선회하는 경향을 보였다.
자유당을 지지한다든지,
전략방위구상과 보호무역을 지지하는등. 오히려 카터에 반대한 민주당내 이탈은 주류파에서 가속화되었는데, 외고 매파 성향의 헨리 M. 잭슨 상원의원이나 레이건 행정부 밑에서 유엔대사를 역임한 진 커크패트릭등이 그 예시다. 이들을 소위 '레이건 민주당원'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레이건 행정부 이후 공화당으로 완전 전향하거나 민주당으로 복귀했다. 매카시 역시 민주당으로 복당해 1992년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빌 클린턴에 맞서기도 했다.
[103]
아이러니하게도 후술하겠지만, 존 레논 역시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등의 동료 음악가들과 후배 음악가들을 자주 비판했던 핵이빨로 알려져 있다.
[104]
안타깝게도,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는 제일 단명하였다. 두 번째로 단명한 인물은 2001년 암으로 사망한
조지 해리슨.
[105]
영국의 진보주의자를 상징하는 다른 인물을 꼽자면
핑크 플로이드의
로저 워터스,
폴리스의
스팅 등이 있다. 이 두명 모두 지금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당대 존 레논의 영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106]
다만 이 부분은 좌우파나 사회적 계층에 따라 관점이 상당히 갈린다. 대처 시기 큰 피해를 입은 노동계급이 많은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에서는 거의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특히 존 레논을 비롯한 비틀즈 멤버들의 고향인 리버풀에서는 지금까지도 악마 중의 악마로 취급받고 있다.
[107]
2000년대에는 아예 존 레논 코스프레를 하고 다녔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둘다 훌륭한 음악가이며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폴 매카트니는 너무 반듯한 데 비해 존 레논은 광기어린 면이 있어서 더 좋아한다고 밝혔다.
[108]
물론 이전에도
헨리 폰다나
프랭크 시나트라처럼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연예인들은 많이 있었지만, 존 레논처럼 슈퍼스타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 적극적으로 사회 운동에 발을 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후대 연예인중에서는
호아킨 피닉스,
로저 워터스 등이 비슷한 커리어를 보이고 있다.
[109]
국군 공식 번역 및 계급 대치에 따르면 육군
병장이지만, 실제 역할 및 지위를 고려하면 육군
하사에 더 가깝다.
[110]
1950년대부터 베트남 전쟁 종전 직후까지 사용된, 미군이 채택한 전군 공용 민무늬 작업복.
[111]
그는 1968년에
한국에 배치되어 근무했고, 그 시절의 전투복을 레논에게 보냈다.
[112]
베트남 전쟁 종전 직후부터 80년대까지 쓰인, OG-107의 후신인 미군 최후의 민무늬 작업복. 이후 채택된 것이 그 유명한 위장무늬 전투복인
BDU다. OG-107은 폐지된 지 오래된데다 베트남 전쟁 때 소모된 게 많고 재현자들 위주로 많이 사갔기 때문에 가격도 비싸고 순면 재질이라 합성섬유가 들어간 507보다 광택이 덜하고 후줄근해 보여서(대신 흡습성과 속건성, 방염성은 107이 더 높다.), 대용품으로 507이 많이 쓰인다.
[113]
폴 매카트니도 좋아한 밴드다.
[114]
보위와 엘튼 존은 레논과 실제 친분이 있었다.
[115]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좋아했다는 소문이 있다.
[116]
아예 이 소문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까지 있을 정도.
#
[117]
존은 어렸을때 부터 아버지를 잃고 성장하였기 때문에 브라이언을 자신의 아버지로 생각하고 따랐으며, 그래서 함께 시간을 자주 보내곤했다.
[118]
다만 같이 성행위는 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폴 매카트니의 말에 따르면 둘이서
자위 행위를 하여 누가 더 오래 참는지 내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119]
영국에서 동성애죄는 1967년에서야 폐지됐다. 당연하게도 성 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매우 좋지 않았고, 존을 비롯한 비틀즈 멤버들도 이와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 강력히 부인했다.
[120]
사실 이건 존 레논이 먼저 한 말이 아니다. 그가 이 문구가 나온 신문을 접하게 되고 그것을 모티브로 동명의 곡을 만든 것이다.
[121]
리암 갤러거가 본인의 곡 Chinatown에 오마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