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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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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산업 혁명 제2차 산업 혁명 제3차 산업 혁명 제4차 산업 혁명 제5차 산업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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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혁명
Industrial Revolutio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rtmann_Maschinenhalle_1868_(01).jpg
1868년 리처드 하트먼의 기계 공장을 묘사한 삽화.
파일:영국 산업 혁명.png
영국 내 산업 혁명의 전개를 나타낸 지도.

1. 개요2. 명칭3. 원인 및 배경4. 전개
4.1. 기술 혁신
4.1.1. 면 방직업의 발전4.1.2. 증기기관과 교통의 발전4.1.3. 제철 공업의 발전
4.2. 산업의 성장4.3. 노동 계급 탄생
4.3.1. 노동자의 고통4.3.2. 노동 조건 개선
5. 의의와 영향6. 기타7. 참고 자료8.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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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업 혁명(, Industrial Revolution)이란 18세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현재 영국)에서 시작된 사회경제적 변화와 기술의 혁신,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아 크게 변한 인류 문명의 총체를 가리킨다.

주류 역사학계와 경제학계에서는 산업 혁명이 근, 현대의 많은 성취와 사건들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현대 사회를 이루는 문화 및 제도의 대부분은 산업 혁명 시기에 완성되었으며, 양적인 면에서도 15세기와 21세기를 비교할 때 인구는 5억에서 80억으로 늘었고 전 세계 총생산은 2,500억 달러에서 109조 달러로 약 436배 불어났다.

2. 명칭

독일의 사회주의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시대 구분으로서 1780~1840년대에 진행된 제조업, 공업의 기계화와 공장화를 처음 '산업 혁명'이라고 지칭했으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Lectures on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Eighteenth Century in England》라는 책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대중화되었다.

3. 원인 및 배경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산업 혁명/원인 및 배경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전개

파일:유럽의 산업 혁명 전파.jpg 파일:세계의 산업 혁명 전파.png
유럽의 산업 혁명 전파 전 세계적인 산업 혁명 전파

대항해시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브리튼 섬은 지중해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벽지(僻地)에 지나지 않았다. 브리튼 섬은 비가 자주 내리고 바람이 많이 부는 큰 섬에 지나지 않았고, 내세울 것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브리튼 섬을 비롯한 서유럽이 군사, 정치, 경제, 문화 발전의 온상이 된 것은 15세기 말에야 생긴 일이었다. 1500년에서 1750년 사이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은 세(勢)를 얻고 '외부 세계'를 제패했다.

그렇다면 유럽 변방에 있던 영국은 어떻게 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는 상호 보완적인 두 가지 답이 존재하는데 바로 과학, 자본주의이다.

서구에서는 기술적인 우위를 누리기 전부터도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의 노다지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서구인은 다른 누구보다 그것을 잘 부릴 수 있었다. 따라서 과학과 자본주의가 산업혁명이라는 결실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국의 강력한 경쟁 후보인 프랑스와 스페인은 재정이 바닥나고 있는 데다 끊임없이 유럽 대륙을 흔드는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산업화는 영국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되었다. 일찍이 1780년경에 영국에는 2만 대의 면사 방적기가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단 9백 대뿐이었다. 국토의 면적만 봐도 프랑스와 스페인 모두 영국의 두 배나 되다 보니 수송 비용 또한 그만큼 많이 든다.

반면 영국은 비교적 크지 않은 국토와 강과 수로를 충분히 활용하여 원자재를 도시까지 손쉽게 운송하고 완제품을 국내·외 시장으로 훨씬 쉽게 내보낼 수 있었다. 또 공업도시의 가까운 곳에는 풍부한 석탄 광산이 있었고 1830년대에는 철도망이 발달하면서 이동 속도도 한층 가속화되었다.

영국에서 일어난 방적기 개량을 시작으로 한 기술 혁명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 사이에 유럽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 수공업에 기초한 작업장들이 기계설비를 갖춘 큰 공장(공장제 기계공업)으로 전환되었으며, 자본주의 경제가 확립되었다. 혁명은 19세기에 유럽을 넘어 북미, 그리고 아시아로까지 확산되었다.

백여 년에 걸쳐 일어난 사건인 만큼 전개 과정과 시기에 따라 세분할 수 있는데, 18세기 후반~ 19세기 전반에 소비재와 경공업을 중심으로 일어난 변화는 1차 산업 혁명으로 분류되고, 19세기 중후반에 전기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시작된 것은 2차 산업 혁명으로 분류된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그 기준을 쉽게 합의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뚜렷하게 변화의 계기나 시작점을 찾을 수 있는 정치적 사건에 비해서 오랜 세월이 걸린 산업·경제 분야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기준인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증기기관 등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사건이 있기 때문에 편의적으로 나눈 것이라고 여기는 역사가들도 있다. 또한 후술하듯 16~17세기에 걸쳐 일어난 다양한 진보를 '조기 산업 혁명'이라고 부르는 구분도 존재한다.[1]

4.1. 기술 혁신

산업화 이전의 세계에서는 무엇을 하든 물리적인 노동력, 풍력, 또는 수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에너지원들은 마음대로 필요한 장소로 보낼 수 없기에, 접근이 가능한 지역에서만 자연이 뒷받침해주는 정도까지만 생산 작업이 가능했다. 이것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제약하는 큰 구속이었다.

원양 항해 기술은 원거리 운송 비용을 파격적으로 낮추었고 그 덕분에 유럽 제국들은 먼 곳까지 진출하는 '시늉'을 내기는 했지만, 여전히 손쉽게 운항 가능한 수로를 보유한 지역들 간의 경쟁이 중요했다. 세계의 변방 지역들 즉, 지구상의 대부분의 지역들은 여전히 개발되지 않은 미개척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산업화 시대에 등장한 다음과 같은 기술들은 이런 상황을 완전히 뒤바꿀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기술적인 차원에서 산업 혁명은 강철이라는 새로운 소재의 활용, 석탄 증기 기관 같은 새로운 동력원의 사용, 방적기 방직기 같은 새로운 기계의 발명, 공장제라는 새로운 노동 분업 체계의 발전, 증기 기관차나 증기선과 같은 새로운 운송 및 통신수단의 발전 등 다양한 변화를 동반하며 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산업 혁명은 과학의 급속한 발전( 과학혁명)을 원동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과학 기술은 산업 혁명의 도화선은 아니었다. 산업 혁명 초기부터 과학 이론이 산업 기술에 직접 응용된 사례는 다소 찾아보기 힘들다. 초기 산업 혁명에 기여한 기술. 예를 들면 플라잉 셔틀, 증기기관, 뮬 방적기, 코크스를 이용한 제철법, 압연법 등등은 전부 숙련된 기술공들의 작품이었다. 19세기 중후반 전기, 광학, 화학산업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기술 진보는 과학자의 이론과 연구가 아닌 숙련공 발명가들의 경험과 시행 착오의 산물이었다.

또한 산업 혁명이 일어난 영국은 교육이나 과학에 있어 프랑스보다 다소 뒤쳐졌다. 프랑스는 파리 대학을 대표로 중세부터 이어진 학문의 전통이 존재했고, 프랑스 혁명 시대에도 나폴레옹이 파리 이공과 대학을 설립하고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등 체계적인 학문의 발전과 절차가 있었으나, 잉글랜드의 대학이라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둘 뿐이었는데 둘 다 당시 유럽에서는 쳐주지도 않는 대학이어서, 좀 공부한다 하는 잉글랜드인은 오히려 스코틀랜드로 가서 교육을 받았다. 일례로 증기기관을 설명하는 열역학이 프랑스인 카르노에 의해 시작됐다는 점, 근대 경제학의 시작인 애덤 스미스가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것이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근대 과학의 의의는 산업 혁명의 기술혁신 과정에서 나타난 발명품과 공학 기술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완성시킨 것에 있다. 그리고 산혁 과정에서 더 다양한 기계와 제품, 더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과학 기술은 학자들의 논문을 벗어나 산업・민간 분야에 널리 상용화되었다.

4.1.1. 면 방직업의 발전

영국의 산업을 변화시키는 첫걸음은 바로 면직물 공업에서 시작되었다.

1733년 존 케이가 직조기 ' 플라잉 셔틀(Flying shuttle, 나는 북)'을 발명하게 된다. 베틀의 북을 스프링을 이용해 자동화해서 한 번에 짤 수 있는 면포의 너비가 2배가량 늘어나고 속도 또한 훨씬 빨라지게 되었다.[2] 플라잉셔틀의 개발로 인한 생산성 혁신은 엄청났는데, 이전까지 양모, 실, 모직물 전부를 수출했던 영국은 이후로는 실과 양모를 수출하지 못하고 오히려 수입해서 모직물로 재가공한 다음 다시 수출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천을 짜기 위한 실이 부족해진다. 그러자 제임스 하그리브스 1767년, 한 번에 8개의 실을 자아낼 수 있는 제니 방적기[3][4]를 발명하게 된다. 그리고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1768년에 동력으로 수차를 이용하는 수력 방적기를 발명하고 1769년에 특허를 받는다.[5] 또 새뮤얼 크롬프턴은 이 둘을 합친 뮬 방적기를 만들어낸다. 이 셋이 산업 혁명 출발기에 면직물 공업의 혁신을 일으킨 이들로 보통 회자되지만, 사실 토머스 하이즈, 폴, 와이아트 등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발명가들도 같은 시대에 비슷한 물건을 발명했다. 특히 토머스 하이즈는 아크라이트가 자신의 발명품을 표절했다고 소송, 승소했다. 게다가 제니 방적기도 그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으며 제니라는 이름도 그의 아내에게서 따온 이름이라고 여겨진다. 어쨌든 그 덕에 아크라이트의 특허가 무효가 되어 기계를 마음껏 공짜로 사용할 수 있게되어 전국 각지에 수많은 방직 공장이 설립된다. 참고로, 이 발명들이 있기 전 방적기는 한 번에 한 가닥의 실 밖에 잣지 못했고 수력이 아닌 인력 혹은 축력으로 가동되었다.

방적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자 이번엔 또 직조 능력이 방적을 따라가지 못해 실이 남아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1785년, 에드먼드 카트라이트가 동력으로 천을 짜는 방직기( 직조기)인 역직기(力織機, power loom)를 발명, 이것을 수력 혹은 증기기관에 연결함으로서 직조 능력이 방적 능력을 따라잡는다. 여기에 1804년 프랑스의 자카드 천공 카드를 연결해 패턴까지 넣어 천을 만들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방직 산업은 자동화의 길에 완전히 들어서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때 근대적인 공장이 처음 나오게 되며, 바로 이전까지만해도 공장은 주로 수차를 사용하여 강 주변에 많이 지어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후에 제임스 와트가 개발한 증기기관의 보급으로 공장의 위치가 자유롭게 변하기 시작한다.

한편, 대량의 목화를 공급하던 미국 남부에서는 큰 골칫덩이로 목화와 씨를 분리하는 작업이 남아있었는데, 1793년 일라이 휘트니가 이를 빨리 분리시켜줄 수 있던 조면기(cotton gin)를 발명했으며 이 기계는 2 마력의 수력으로 5,000파운드의 솜을 처리해 1,000명분의 일을 하게 만들어줬다. 그러나 정작 휘트니는 특허를 출원해놓고 소송에 휘말려 이익을 올리지 못하다가, 1798년 소총 제조업으로 업종을 전환하며, 소총 산업에서는 부품 호환식 생산법을 발명함으로써 또 다른 산업 혁명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4.1.2. 증기기관과 교통의 발전

흔히 알고 있는 제임스 와트 이전에도 증기기관은 있었다. 1663년 에드워드 서머셋 우스터 후작이 개발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업용 증기기관이 등장한다. 후작은 이걸로 광산채굴업을 하려고 했다. 영국은 지질 구조상 광산을 조금만 깊게 파도 물이 나와서 물을 지속적으로 퍼내야했기 때문. 하지만 그렇게 되기도 전에 사망한지라 무산되었고, 이후 1698년 토마스 세이버리라는 자가 우스터 후작의 증기기관을 개량한 광산채굴용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1712년경에 토마스 뉴커먼이 증기 기관을 더 개량한다.

하지만 이 초기의 증기기관은 1마력시[6]의 힘을 내는 데에 석탄이 20kg 가량 필요할 정도로 아주 효율이 낮았다. 수증기를 데워 실린더를 채운 다음 실린더에 찬 물을 끼얹어 실린더를 식히고, 다시 하염 없이 물이 끓기를 기다려 수증기를 데워 실린더를 채우는 원리였기 때문에 효율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낮을 수 밖에 없었다. 기관을 써서 채굴 효율이 개선된 만큼 석탄을 잡아먹은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 지경이었데, 실제로 석탄이 비싸고 구하기 힘든 지역의 광산, 혹은 채굴되는 광물의 가치가 낮은 광산에서는 뉴커먼의 기관을 쓰면 오히려 적자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런 뉴커먼 기관이 퍼진 것은 일단 영국이 사방에 석탄이 널려서 석탄값 걱정은 그다지 할 필요가 없는 나라였던 것이 제일 먼저이며, 둘째론 광산이 너무 깊게 파져서 사람 손으로 물을 도저히 빼낼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셋째론 뉴커먼이 자신의 발명에 대해서 특허를 출원해야할 정도로 대단한 발명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허를 내지 않은 덕이다. 뉴커먼은 자신의 발명을 토마스 세이버리를 베낀 것 정도로 간주했고, 세이버리의 특허가 1733년 만료되고 더 갱신되지 않아 증기기관의 특허는 사라진다.

뉴커먼 기관은 영국 광산 지역 곳곳에서 사용되기는 했으나 연료 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문제 때문에 광산주들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줬다. 그러다가 마침내 1765년 스코틀랜드의 기계공학자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개량하는데, 와트의 기관은 1마력시의 힘을 내는데에 필요한 석탄이 600g 가량 정도로 효율을 크게 개선했고, 강가나 석탄 산지와 먼 곳에서도 가동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와트는 1774년 매튜 볼턴이라는 운명의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사업가였던 그는 증기기관의 파워를 한눈에 알아봤고, 증기기관에 대해서 특허를 출원만 하고 사업화하기에는 재정적으로 영 부족해서 슬슬 관심이 없어지던 와트에게 개량을 종용하고 볼턴앤와트라는 기업을 설립했다.

뉴커먼 기관까지는 석탄이 무지막지 싼 영국과 유럽 일부 지방 광산에서나 좀 쓰이는 정도였으나,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은 사업화 궤도에 들자마자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인류의 역사를 바꿀 발명, 고통 받는 노예들을 해방시킬 위대한 발명이라는 칭송이 당대에 나왔을 정도. 산업 혁명기에는 위대한 발명을 하고서도 특허권 끝날 때까지 사람들이 사용을 안하거나 불법적으로 복제해가는 경우들 때문에 불우하게 산 발명가들이 부지기수였지만, 와트는 에딘버러 왕립 학회의 회원과 프랑스 국립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초청받는 등 생전에 영광을 누렸다.

그 이후 미국 발명가 로버트 풀턴은 이 회사에 증기기관을 주문했고, 이를 이용해 클레르몽(Clermont)[7]이란 증기선을 개발했고, 1807년 성공적으로 운행을 완료했다. 클레르몽은 후에 뉴욕 허드슨 강의 승객을 나르게 된다. 이 발전된 수상교통은 영국의 운하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운송비를 크게 절감시켰다.

한편 1769년에는 프랑스의 공병장교 니콜라스 조제프 퀴뇨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증기 자동차가 나오게 된다.

1804년 리처드 트레비식은 자신이 만든 증기 기관차 페니다렌호의 시운전에 성공했다. 그는 내기에도 이겨 몇천 파운드를 땄다. 그리고 이 일은 현존하는 4대 교통 수단 중 하나이자 육상 교통 수단의 양대 축 중 하나인 철도의 시발점이 되었다. 증기 기관차와 철도의 가능성을 예감한 영국의 기술자들은 트레비식의 것을 개량하기 시작했다. 조지 스티븐슨은 1825년 요크셔의 석탄광에서부터 스톡턴의 항구를 오가는 43 km짜리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화물철도를 깔았고 이 뉴스는 신속하게 영국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이것이 바로 스톡턴-달링턴 철도이다. 사업가들은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레일로 연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1830년에는 최초의 여객/화물 겸용 철도인 리버풀- 맨체스터 간 철도가 개통되며 철도시대의 개막을 알렸다.[8]

철도는 국가기간시설이 될 뿐만 아니라 막대한 철의 수요를 창출해서 제철 사업 규모를 성장시키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정작 철도 사업 자체는 수익성이 높지 못했는데, 평균적으로 3.7% 정도의 수익률을 보였고, 중요 구간이라고 해도 너무 비싸면 차라리 다른 운송 수단을 택한 사람들 덕에 대부분의 구간은 적자만 겨우 면하거나 아예 적자가 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도 사업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는데, 급증한 중산층이 수익성 있어보이는 투자처를 찾아서 적극적으로 투자를 했던 덕택이었다.

4.1.3. 제철 공업의 발전

영국은 15~17세기에 이미 해상 강국으로써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그 대가로 배를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나무를 소모해서 16세기 즈음에는 전 브리튼 섬의 산림이 소실될 지경이었다. 덕분에 연료로 쓸 나무도 부족해져 다른 나라에서 나무를 수입해와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9]

17세기 말, 에이브러햄 다비 1세가 화학의 발전으로 영국에서 풍부했던 역청탄을 코크스로 정련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이전까지 용광로에서 사용했던 연료인 숯을 대신해서 코크스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코크스는 심지어 숯에 비해 높은 온도로 오랫동안 연소했기에, 주철의 생산량을 급속도로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존과 같은 고로(高爐)에서 생산되는 주철[10] 탄소 함량이 지나치게 높아 유연성이 떨어져 쉽게 부서져, 강철 혹은 연철[11]의 생산을 위해서는 기존처럼 주철을 다시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헨리 코트가 철과 연료가 분리된 용광로를 사용, 철을 완전히 녹임으로써 불순물을 분리하고 녹은 철을 산소에 노출시켜 탄소를 제거하는 기술인 교련법을 개발, 또 녹은 철을 판 형태로 가공하는 압연 기술을 개발해 연철 생산량이 급격하게 증가한다. 코크스와 새로운 제철기술은 영국의 철 생산량을 급격하게 증가시켜 이후 산업 혁명의 전개에 필요한 막대한 철을 공급할 수 있었으며 1788~1796년 사이에 영국의 철 생산량이 2배 증가했고, 이후 8년 동안 다시 2배 증가한다. 특히 1779년에는 영국 세번 강에 세계 최초의 철교가 건설됨으로써 영국의 제철 공업의 발전을 증명하는 이정표가 된다.

4.2. 산업의 성장

영국의 산업은 왕성히 성장했고, 이에 따라 공업과 상업의 중심지 도시도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인구도 역시 성장하게 되는데, 도시거주민들은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기보다는 구매하거나 공급받는 측이었고, 이들의 인구가 늘수록 농업부양인구가 늘어나면서 나폴레옹 전쟁 무렵 영국은 식량수출국에서 식량수입국이 되었고 식량 수입대금은 무역흑자로 축적된 무역수지로 지불하는 양상이었다. 그런데 점차 늘어나는 면화 수요량이나 수출대금으로 내야할 식량의 수입량에 비해서 면화 생산량이 지지부진하거나 감당못할 수준이 되자,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에서는 1800년대에 대규모 면화 플랜테이션을 조성했다. 이곳의 노동자는 아프리카 노예였다.

거기에 때마침 아메리카에서 기존의 수작업 대비 50배의 효율을 지닌 조면기가 발명되어 퍼진터라 아메리카의 면화 플랜테이션에서는 대량의 면화를 값싸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아프리카의 노예 → 영국이 노예 수입 → 아메리카 면화 플랜테이션에 노예 공급 → 아메리카 면화 플랜테이션이 노예들이 생산한 값싼 면화를 영국으로 공급 → 생산된 면직물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수출하는 삼각무역이 완성되었다.[12]

특히, 영국에 의해 면직물 산업이 일찌감찌 붕괴하고 만 인도에 대한 수출이 엄청나게 활발해 20년 만에 수출 규모는 10배 증가했으며 면직 산업에 이어 철강 산업이 활기를 띄면서 워털루 전투 이후, 영국 주도의 철도 건설이 시작되어 영국의 호황은 절정에 이른다.

4.3. 노동 계급 탄생

인클로저 운동의 결과 농지들이 지주나 차지농들에 의해 통합되어 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여타 유럽 국가들은 상속시에 토지를 자손의 수에 맞게 분배해주어 땅크기가 점점 줄어 들었으나 영국은 장자 상속제를 이어오고 있었으므로 대규모 농지를 가진 농장주들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도 대토지소유에 한몫했다. 대토지소유자들의 대두로 그들과의 시장경쟁에서 도태된 농민들이 등장하면서 농민층은 부농과 빈농으로 나뉘었고 빈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자기 땅의 경작을 포기하고 차지농인(Yeoman)밑에서 임금을 받고 일을 하게 되면서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이 탄생했다.

도시에서는 일찍이 도제제도가 상공업을 기반으로 하여 근로계약이 정립되었다.

4.3.1. 노동자의 고통

급속한 산업 발전은 많은 문제점을 불러왔다. 가장 문제시되었던 것은 가혹한 노동 환경이다. 위에서 서술되었듯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하는 데 비해, 당시 영아 사망률이 조금씩 줄어감에 따라 인구는 매년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더해 인구가 늘고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 공급은 급속하게 증가했다. 이로써 부르주아들이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을 손쉽게 착취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의 참정권이 없었고 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로 정부와 의회는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만 바빠 관련 법 제정이 미비했기에, 제대로 된 근로시간도 정해지지 않아 많은 노동자들이 과로에 시달렸다. 특히 노약자 계층에서의 노동이 크게 늘어났는데, 어린이들도 만 7세부터 면직 산업에 동원되어 학대를 받으며 일하다 요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각에서는 가혹한 노동조건은 전근대 농촌 사회로부터 이어졌고, 그 근거로는 전통 사회에서는 막 걸음걸이를 뗄 만한 어린 나이부터 일에 동원되는 것이 다반사였고, 16시간에 달하는 가혹한 노동 시간도, 전근대 사회에서 해 뜰 때 일어나서 해 질 때까지 일하는게 당연했던 점이 이어졌다는 것을 든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봤을때 산업 혁명기의 노동환경은 그 이전 농경시대 노동환경에 비교해봐도, 엄청나게 퇴보했다고 보는게 맞다. 퇴보의 정도가 "전근대 농촌사회로부터 이어졌다." 라는 한 문장으로 퉁 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물론 그 이전 농경시대에도 아동노동이 있었고, 노동 시간에 대한 것도 명확히 정해진 바 없이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는 수준이었다는건 맞다. 그러나 이걸 빌미로 마치 그 이전 시대에도 산업 혁명기의 열악한 수준의 노동환경이 당연했고 그게 산업 혁명기까지 이어졌다는 뉘앙스로 읽히게끔 서술하는건 그냥 교묘한 왜곡성 서술이다. 그 이전 농경시대에는 각 지역사회마다 관습법이 존재해서 산업 혁명 초기 수준으로 아동을 미친듯이 굴리고, 성인이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미친 짓이 당연하게 성행하진 않았다. 아동은커녕 청소년조차도 통계적으로 어른에 비해 더 적은 노동을 했을 정도였다. 긴 말 할 것 없이 그 이전시대와 비교해보았을 때 노동 시간이 30% 증가해서 연평균 노동시간이 1,100시간 늘어난 시대다. 자세한건 "노동조건 개선" 문단에서 후술.

임금은 후대에 보면야 최소한의 생활 수준만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낮은 수준으로 보이지만, 바로 이전의 농촌 사회와 비교했을 때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초기 직물 공장은 여성 성인 노동자가 대다수였는데, 남성 직물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초기 공장들은 남성 수준의 임금을 제시해서 여성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는데, 이 시대 런던의 남성 노동자들의 임금은 북프랑스에 비해서 2배, 밀라노와 비교해서 4배에 달했다. 산업화가 시작되지 못한 유럽 타 지역에 비해서 거의 4배에 달하는 임금을 받은 것. 식량 유통을 기준으로 가늠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데, 이 시대 영국은 타 지역에서 일방적으로 식량을 빨아들였고 런던은 그 영국에서도 식량을 빨아들이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즉, 당시 기준으론 그 공장 노동자들의 구매력과 임금이 영국 및 유럽의 타 지역 사람들보다는 확실하게 높았다는 것이다. 당대 런던 노동자들의 임금이 먹고 살 여력이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이었다면 런던의 인구성장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급여가 그렇다는 것이지, 사회변화상을 살펴보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또한 산업 혁명 시기에는 기존의 관습법이 사라진 시기여서 더욱 큰 문제가 일어났다. 기존에는 관습법으로 인해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하한선이 존재했지만, 관습법이 무시되면서 평균적인 노동자들의 삶은 관습법이 정해주었던 하한선보다 더욱 낮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또한 어린이 노동 같은 경우에도, 농촌과 같은 시간을 일했다고는 하지만 농촌의 경우 모든 사람이 오랜시간동안 면식이 있던 사이다 보니 위아래간 서로 간의 편의를 봐주는등의 여유가 있었지만, 공장에서는 사방에서 온 사람들이 모인 만큼 이런 편의가 거의 없었고, 공장의 노동 강도는 당시 농촌의 노동 강도보다 훨씬 심했다.

1810년대에 러다이트 운동으로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항의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당시 영국 정부에서 이를 탄압했지만 더이상 늘어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아예 안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를 무마하는 차원에서 규제하는 법률은 1833년에 제정되었으나,[13][14] 이후 30~4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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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1차 산업혁명, 아동 노동자들의 노동 실태 | 내 일의 미래를 위한 잡담회 1 회
미성년 노동자들은 탄광이나 공장에서 하루에 1시간도 쉬지 못하고, 매일 10시간씩 건강을 해쳐 가면서 일을 해야 했다. 일을 하다 다치거나 쓰러지면 과정은 상관없이 무조건 본인 과실 취급이었고 급여 또한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실상 노예노동이었다. 심하면 탄광에서 주 6일 동안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산업 혁명을 겪은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여서 19세기 후반 유럽 노동자들이 저 힘든 중노동을 주당 평균 50~60시간 했어야 했다.

1760~1830년대 1인당 GDP의 성장률은 상당히 느렸기에[16] 실제 경제성장은 상당히 미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경제학에 따르면 임금은 대체로 노동의 한계생산만큼[17] 증가하기 마련인데, 이 노동의 한계생산은 노동에 들어가는 자본이 많을수록 올라간다. 1760~1830년대 영국의 자본투자는 나폴레옹 전쟁이나 주식투자 규제 등으로 상당히 미진한 상태였고 따라서 근로자들의 임금이 별로 높지는 않았다고 한다. 즉 임금이 적기 때문에 저런 중노동을 통해서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유럽권의 산업 혁명뿐 아니라 사실 각국의 산업화/근대화에선 독재정권,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이런 노동자의 고통이 거의 예외 없이 동반되었다. 소련의 스탈린 개발독재는 워낙 유명하며,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 한국의 제3공화국, 중국의 덩샤오핑 집권기 등으로 근대화가 진행될 때는 국민들은 항상 힘들었다. 유럽의 근대화에서도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어나갔고, 일본은 근대화와 경제발전 시기에 환경오염과 산업재해가 빈번히 일어나서 미나마타병, 이타이이타이병 같은 질병이 만연했고 한국의 경우에도 한강과 낙동강 등 주요 하천이 오염되면서 그냥 먹을 수 없는 수준이 되었고 정부와 기업이 수출 제일주의라는 구호 아래에서 노동 착취를 방조하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연간 3,000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18] 이는 현재 중국, 인도, 동남아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문제점으로 스모그 현상 등 환경 문제도 이런 성장제일주의의 결과물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나마 한국/일본/대만은 이러한 산업 혁명의 피를 바탕으로 선진국으로 도약했고, 단순노동 대신 수출주도산업 체제로 성공적으로 올라가서 이제 이런 극악한 산업노동 문제에서 벗어났으나 그 외의 아시아 국가들은 여전히 이러한 시기를 기약없이 계속 겪고 있다. 올리버 트위스트 플랜더스의 개가 산업 혁명 당시의 유럽의 사회상을 반영한 소설이었고, 카를 마르크스가 왜 떴는지 알 만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동시대 인물인 허버트 조지 웰즈가 SF 소설인 타임머신에서 '엘로이'와 '몰록'의 설정을 각각 지배층과 하층 노동 계급의 후손으로 설정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 처참한 격차 수준을 볼 때,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같은 인류라고 보기도 힘들 지경이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전혀 무리가 아니었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19세기 중반에 들자 사회주의 이념이 형성되어 일부 지식인과 정치인, 그리고 소수의 공상적 사회주의 성향의 자본가들[19]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복지제도와 사회보험제도들을 도입하고 규제를 시작하면서 최소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꼬락서니는 갖추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계속 놔둔다면 건강이 나빠져서 조기사망은 물론이고 극단적 양극화로 인해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없어져 생산물을 구매할 수요자층도 줄어 공멸할 것이기 때문이며, 심지어는 공멸 그 이상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러시아 혁명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12세 이하의 아이는 몇 시간 이상 노동 금지 같은 규제를 시작했는데, 당시 시장경제 자유주의자들은 "아이들의 일할 권리와 자유를 빼앗지 말라!"는 논리로 이에 반대했다.[20][21]

4.3.2. 노동 조건 개선

일단 1차 산업 혁명기는 임금은 유지 혹은 약간 상승이지만 노동시간은 30% 이상 증가해서 뜨악한 시대가 맞다. 대략 노동시간이 연 2,400시간 평균에서 3,500시간 평균으로 산업 혁명 기간에 노동 시간이 늘어났다는 게 통설이다. 얼마나 늘었는지에 관해 그 레퍼런스는 당시 재판기록을 이용한 추정으로서 최근에 이루어졌는데 범죄는 아무 때나 일어나므로 범죄 발생일과 그 전날 용의자와 증인의 기상 출근 식사 퇴근 취침 등의 행적으로 노동시간을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성인 남성의 노동시간은 대폭 증가했다. 1750년 런던에서 연간 2,631시간, 1800년 3,538시간, 1760년 잉글랜드에서 2,576시간, 1800년 3,328시간, 1830년 3,356시간. 그렇다면 노동생산성 증가 추계는 하향 조정돼야 할 것이다. 여가를 고려할 때 생활수준은 그만큼 낮아졌다. 산업노동 공급은 양적이라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즉 노동의 본질적 변화라는 면을 봐야 한다. 주 6일제 50주 근로라고 대충 땡치면 11.5시간 정도가 나온다.

허나 이런 상황은 19세기의 2차 산업 혁명기를 거치며 대부분 나라에서 자연스럽게 완화된다. 이유는 크게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또한 같은 시기에 도시의 인프라가 개선되며 인구를 수용할 여력을 갖춘 것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전례없는 인구 증가 및 이촌향도로 인해 도시가 노동자 인구를 감당을 못한 것이 노동자들에게 자본가들의 착취 못지 않은 고통 요소였는데[22] 주택 공급과 상하수도, 교통망, 교육 시설 등이 뒤늦게나마 정비되며 생활수준 향상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또한 같은 시기 축구, 야구 등의 스포츠 인프라와 휴가, 위락 시설이 정비되며 영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노동계급의 특색을 이루는 특유의 문화가 크게 꽃피었다.

5. 의의와 영향

계속적인 발명과 기술혁신은 종전의 농업적인 사회와는 전혀 다른 산업사회를 출현시키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생산력이 인류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고,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과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산업 혁명 이전에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식량과 재화의 생산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났으므로 인구가 늘어날수록 재화의 가격이 상승하여 인구증가를 억제했다. 이것에 대한 이론이 바로 맬서스 트랩이다. 그러나 산업 혁명 후 인구와 함께 물자의 생산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면서 인구가 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며, 최종적으로는 2차 산업 혁명의 초입에 독일의 프리츠 하버 질소 정제 방법을 발견하여 공기로 비료를 만들 수 있게 됨으로써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마지막 고삐가 풀리게 되었다.

산업 혁명 이전에는 아무리 발전된 사회라도 무제한적인 풍요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이후에는 상점마다 물건이 가득 쌓여 소비자를 기다리며, 과잉생산으로 인해 가격이 폭락하여 생산비용보다 아래로 떨어지고 가격조정을 위해 일부러 물건을 폐기하는 사건이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인류 역사상 겪은바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산업 혁명 이전 풍년은 역사적으로 식량이 풍부해지는 행운이었으나, 산업 혁명 이후로는 공급량 조절을 위해 식량을 폐기처분해야 하는 모순까지 나타나고 있다. 기업이나 국가는 과잉생산된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 마케팅 활동을 하거나 새로운 시장 수요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러한 시장 수요 창출의 노력이 국가적 규모로, 그것도 부정적인 면모로 나타난 것이 바로 해외 식민지 설립이다. 바로 아래에서 설명하는 산업 혁명으로 인한 제국주의의 대두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도 나타나는 것이었다.

전 세계에 자본주의의 열풍을 불러 일으킨 이 사건은 귀족과 평민, 지주와 농민이 아닌 산업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으로의 계급 전환을 불러 일으켰다. 공장의 출현으로 수공업자들이 밥그릇을 잃게 되었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공장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구의 도시 집중현상과, 노동 계급의 대두는 노동 계급의 권리 신장을 위한 투쟁 및 사회주의 운동을 일으켰고, 카를 마르크스를 필두로 해 공산주의가 생겨나는 등 정치체제에도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산업 혁명은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를 불러왔다. 18세기 산업 혁명으로 인해 서양이 비서양을 압도하는 경제력을 가지게 됐다는 것은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동의하는 사안이다. 산업 혁명을 거쳐 기계화된 문물을 갖춘 서양의 군대는 산업화되지 않은 군대에 비해, 그야말로 밸런스 붕괴 수준의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유럽의 여러 열강은 대항해시대부터 성장한 우수한 군사력을 이용해 다수의 식민지를 갖추고 이미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문명권에 대해 주도권을 갖고 우위에 설 수는 있어도[23][출처1][출처2] 일방적으로 정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분열된 유럽에 비해 비서구 제국들은 통일된 시스템을 유지하여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질적인 열세를 양적 우위로 보상할 수 있었지만[26], 나중엔 인구빨로도 극복이 안 될 정도로 질적 격차가 벌어지자 결국 유럽 국가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유럽은 다른 모든 문명권을 제압했음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밀림부터 시베리아의 원시림에 남태평양의 작은 섬들까지 정복하고 심지어 북극과 남극까지 깃발을 꽂아 말 그대로 지구 전체를 정복했다.

6. 기타

7. 참고 자료

8. 외부 링크



[1] 경제사는 상대적으로 잘 정리된 사료가 적고 서술 단위도 거시적인 점도 통설 성립이 어렵게 하는 한 원인이다. 원래 정치외교사나 법제사는 다른 분야보다 사료가 풍부한데, 이는 국가 등 권위있는 주체가 공식기록을 남기고, 하나하나 굵직한 사건들이어서 분석하기 용이하다. 근대 역사학이 탄생했을 때도 연구분야는 정치사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면 경제는 수많은 개인의 빠르고 역동적인 물질생활과 경제활동이 쌓여서 이루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나오는 사료들도 어디까지나 상거래 증빙 등 일상적 용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후대에 전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어서 담긴 정보도 한정적이다. 따라서 경제사를 연구할 때는 1차 사료에 대한 창의적 분석으로 개별자에서 드러나지 않는 총체적 구조까지 파악해야 한다. 이는 문화사 등 여타 분야도 마찬가지며, 여기서 파생한 다양한 접근법은 다시 정치외교사에도 영향을 주어서, 현대 사학자들은 외교관 한 개인이 남긴 사소한 쪽지까지도 샅샅이 찾아 분석하고 있다. [2] 참고로 이걸 발명한 존 케이는 방직공들이 자기들 일자리를 없애버렸다고 습격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신세가 돼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후대에 재평가되어 지금은 그의 고향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 [3] 딸 혹은 아내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이름은 Spinning Jenny [4] 그런데 하그리브스의 아내의 이름도 제니가 아니었고 여러 명의 딸들 중 제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제니는 엔진(engine)의 줄임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5] 이 사람도 방적공들에게 자신들의 일자리가 없어졌다고 공장이 습격을 당했다. [6] 1시간 동안 1마력 [7] 로버트 풀턴이 해당 증기선을 최초로 시험한 프랑스 북부의 강의 이름이다. 정식 명칭은 북부 강 증기선(North River Steamboat)이었으나 해당 강을 끼고 있는 도시의 이름인 클레르몽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해져 그렇게 불린다. [8] 기묘한 우연으로, 두 도시는 100년보다 조금 더 지난 20세기 후반에 거의 동시에 몰락했지만 아직도 영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다. [9] 당시부터 수입하던 질 좋은 노르웨이산 목재와 그걸로 만든 가구인 Norwegian Wood가 유명하여 비틀즈 노래에도 있다. [10] = 선철. 탄소 함량이 2.5~4% 인 철. [11] 탄소 함량이 0.01% 이하인 철. 유연성이 높아 무르고 잘 부서지 않는다. [12] 우연인지 증기기관을 개량한 제임스 와트 역시 노예무역에서 나온 자본의 지원을 받았다. [13] 그나마도 최저 연령이 9세로 늘어나고 노동시간을 제한한 정도지만 점점 나아지기는 했다. [14] 영국의 뒤를 이어 유럽 각국에서 아동노동을 규제하는 법률들이 성립되었는데 개중에서 독일의 프로이센은 그 입안 과정이 특이했다. 프로이센의 아동노동금지법은 프로이센 육군 참모총장이 국왕에게 건의해서 제정된 것이다. 참모총장 왈, "폐하, 제발 아동노동을 금지해 주십시오. 애들이 어렸을 때부터 하도 부려먹히다 보니 자라지를 못해 징집을 해도 애들 몸에 맞는 군복도 없고 총도 못 가눠서 픽픽 쓰러집니다!" [15] 이와 같은 현상은 과거 한국에서도 있었고 180년이 지난 현재에조차 개발도상국에서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 [16] 1830년 이전에는 1인당 성장률은 고작 0.3%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1830년 이후 1차대전까지는 1%씩 성장했고, 2차대전 후에는 2%씩 성장했다. [17] 물론 자본가의 지대추구나 효율임금, 노동시장구조 등에 따른 여러 변수가 있다. [18] 실제로 일본과 한국에서 미대륙으로 이민을 간 사람이 많았던 시기가 산업화 시기와 겹치기도 하다. [19] 사실 노동자 권리 보장에 적극적이던 자본가 중에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말고 보수주의 성향이 강한 이들도 있었다. 특히 일국 보수주의 기독교 민주주의와 같이 산업화 이전의 공동체 윤리와 관습법을 이상적으로 여긴 이들은 기업가는 장원의 영주나 집안의 가장처럼 행동하며 노동자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여기며 노동자 복지를 보수적인 관점에서 도입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보수, 문화적 자유주의와 사회자유주의는 진보라는 세계대전 이후의 통념 하에서는 이상해 보일 수 있으나 자유주의 진영 내에서 사회자유주의 발달이 미진했고 보수주의 역시 자유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보다는 반동주의, 왕정복고, 혹은 일국 보수주의나 기독교 민주주의 등에 가까운 스펙트럼을 가졌던 19세기 당시에는 사회주의와 보수주의가 비록 사고관이 달라 서로 갈등할 지더라도 자유주의자들의 개인화와 친부르주아 스탠스에 맞서 공동체를 중시한다는 목표는 의외로 공유하는 경우도 많았다. [20] 진지하게 분석하자면 일종의 문화 지체로 볼 수 있는데, 아동 및 청소년 보호 및 노동 금지를 당연시하는 도덕관 자체가 산업 혁명으로 이루어진 사회 변화의 영향이기 때문이다. 산업 혁명 이전 시대에는 앞 문단에 전술되었듯 아동 노동이 당연시되었고 그랬기에 사회 혼란 등의 폐혜를 직접 겪기 전까지는 특히 고통을 직접 겪기 힘든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기업 활동의 자유 영역으로 보는 관점도 강력했던 것이다. 물론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부르주아들의 입김 역시 있었고. 아이들이 행복한 유년기를 보낼 권리와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일종의 산업 혁명 시대 유산이다. [21] 산업이 고도화 되고 아래 숙련공 문단에서도 나왔듯이 자본가 입장에서도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느니 그들이 교육을 받게 해서 나중에 숙련공으로 고용하는게 더 효율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22] 이는 산업화 후발주자들과 현대 개발도상국 대도시에서도 흔히 드러나는 현상이다. [23] 상대주의 사관에 따른 동양 재평가 과정에서 나온 학설들 때문에 산업 혁명 이전 유럽이 동양보다 뒤떨어졌다는 오해가 많지만, 이미 산업 혁명 이전에 유럽의 육군과 해군은 타 문명권의 군대를 압도적인 교환비로 제압할 수 있었다. 15세기에 이미 서구 문명이 중동, 인도, 중국 등보다 군사적, 기술적, 제도적, 자본적으로 질적 우위에 섰다는 것이 보수적 서양 역사가들의 주장이다. [출처1] Civilization: The West and the Rest, Niall Ferguson. 참고로 니얼 퍼거슨은 제국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다. [출처2] Why the West Rules—For Now, Ian Morris [26] 산업 혁명 이전에 유럽이 지구 반대편에 투사할 수 있는 군사력은 수백 남짓이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단 몇 척의 함선만으로 인도네시아의 함대를 전멸시킬 수 있었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몇십 명의 용병대로 동남아를 휩쓸고 다닐 수 있었으나 가용 인력 문제로 정복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18세기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에 수천의 병력을 투입하여 수만의 현지 병력을 쓸어버릴 수 있게 된다. [27] 해당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