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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15일 |
1991년 9월 24일 |
1993년 9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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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cb81e> 커트 코베인 Kurt Cob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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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커트 도널드 코베인 (Kurt Donald Cobain) |
출생 | 1967년 2월 20일 |
워싱턴 주 애버딘 | |
사망 | 1994년 4월 5일 (향년 27세)[1] |
워싱턴 주 시애틀[2]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5cm | 61kg | O형 | 다른손잡이[3] | ||
직업 | 보컬리스트, 기타리스트, 싱어송라이터, 음악가 | ||
소속 그룹 | 너바나 (1987년 ~ 1994년)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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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cb81e> 부모 |
아버지 도널드 코베인 (1946 ~ ) 어머니 웬디 오코너 (1948 ~ 2021 )[4] |
|
배우자 | 코트니 러브 (1992년 결혼, 1994년 사별) | ||
자녀 | 프란시스 코베인 (1992년 출생)[5] | ||
학력 | 애버딘 고등학교 (중퇴) | ||
혈통 | 아일랜드계 미국인 | ||
종교 | 무종교 ( 유신론)[6] | ||
활동 | 1982년 ~ 1994년 | ||
사용 악기 | 보컬, 기타, 드럼 | ||
장르 | 얼터너티브 록, 그런지, 펑크 록, 하드 록 | ||
레이블 | 서브 팝, DGC, 게펜 | ||
링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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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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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등장과 함께 글램 메탈의 시대를 종결시키고 그 자리를 얼터너티브 록과 힙합이 채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듦으로서 현대의 대중음악으로 이어지는 가교를 건설한 대중음악사의 거인이다.[7]
2. 생애
2.1.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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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지 9시간 된 커트 코베인을 안고 있는 그의 아버지 도널드 코베인 |
그러나 부모님은 커트가 9살 되던 해에 잦은 마찰과 다툼으로 인해 불화가 커져[11] 결국엔 이혼하게 된다. 부모님의 이혼 후 코베인은 아버지를 증오하였고[12] 이로 인해 죽을 때까지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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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가족 사진 |
사실 그와 함께 밴드를 꾸려온 멤버들과 올림피아 그리고 시애틀의 록 씬 대부분의 펑크 로커들은 커트처럼 가난했고 이혼으로 얼룩진 인생을 헤쳐나왔다. 당장 절친이자 같은 밴드에 속해 있던 크리스 노보셀릭도 부모의 이혼으로 얼룩진 과거를 가지고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은 사실 그 바닥에서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인터뷰 중 기자가 커트 코베인에게 '스스로의 인생이 슬프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커트는 "자신은 그저 미국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산물일 뿐이다."라고 대답했던 적도 있다.
그의 사진집 겸 기록물인 'Cobain Unseen'에서는 어렸을 때 동네 친구의 형이 산속에서 목을 매 자살한 시체를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들이 현장에 올 때까지 몇 십분 동안이나 그 기괴한 현장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그의 성격, 불우한 가정환경, 이러한 충격적 장면을 본 기억의 잔재 등이 그의 곡이나 특히 가사에 많이 투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와 살았는데 어머니의 재혼과 바람기로 인해[13] 사이가 나빠 매일 싸웠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고 재혼한 어머니의 양부와도 사이가 나빴으며 양부가 어머니와 커트에게 가정폭력을 일삼아[14] 가출하기도 했으며 가출한 동안에는 친척과 친구 집을 돌아다니며 살기도 하고 노숙을 하기도 했다.[15] 학교에서는 급우들에게 시니컬하게 대하고 대마초를 피웠기 때문에 비행 청소년이라며 선생님들에게 배척받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청소년 시절부터 그는 대마초, 술, 담배 등에 빠져서 심각한 중독 수준에 이르렀고,[16] 동시에 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가 차차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처음 배운 악기는 드럼이었다고 한다.
생전 커트는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였는지 혹은 특별히 의도했는지 몰라도 인터뷰에서 본인의 성장 이야기를 말할 때 사실과 허구를 섞어서 모호하게 표현하곤 했으며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 중에는 사실이 아닌 것들도 일부 있다고 한다.
2.2. 너바나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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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의 너바나 |
1987년, 마침내 커트 코베인은 자신을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해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인 베이시스트 크리스 노보셀릭과 함께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에서 너바나를 결성했고 2년 후인 1989년 6월 15일 데뷔 앨범 Bleach를 발매한다. 인디 시절, 커트 코베인은 동료 뮤지션들 사이에서 최소 하루 9시간 이상은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는 정열적인 음악인으로 유명했다. 또한 당시 커트는 대중들에게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공연 중에는 금주, 금연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금연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커트는 만성적인 위염과 복통으로 고통을 겪는다.[21] 이 외에도 그는 선천적이라 할 수 있는 조울증과 더불어 기관지염과 척추측만증을[22][23] 비롯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렸다.[24] 게다가 그는 주변의 평가에 심하게 휘둘렸기 때문에 데뷔 싱글 Love Buzz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던 커트 코베인은 결국, 1987년부터 헤로인을 하기 시작했다.
1989년 6월 15일에 발매한 너바나의 1집 앨범 Bleach는 언더에서 발매한 앨범치고는 차트에도 오르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너바나는 많은 라이브 공연들과 미국 투어들에 힘입어 언더 씬에서 확고한 팬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이미 시애틀을 넘어선 언더그라운드 록의 기대주가 되었고, 그 잠재력을 밴드 멤버나 외부의 많은 레이블들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90년 6월에는 첫 앨범 Bleach의 드러머였던 채드 채닝이 탈퇴하였고 밴드는 데이브 그롤을 새로운 드러머로 영입했다.
한편, Sub Pop으로부터 실력에 비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낀 커트와 크리스는 이때부터 미국 전역 및 전세계에 음반 배급망을 갖춘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기를 원했고, 너바나는 부치 빅의 스마트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데모를 많은 유명한 메이저 레코드 레이블들에게 보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커트 코베인이 존경하고 교류가 많았던 소닉 유스의 서스턴 무어가 데이비드 게펜 사장에게 너바나를 추천하여 너바나는 당시 소닉 유스도 속해 있었던 게펜 레코드의 산하 레코드인 DGC(David Geffen Company)와 1991년 초에 계약을 맺고 전에 같이 데모를 녹음했던 프로듀서 부치 빅을 앨범의 프로듀서로 발탁하여 메이저 데뷔 앨범의 녹음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2.3. Nevermind의 대성공
자세한 내용은 Nevermind 문서 참고하십시오.너바나는 소닉 유스의 멤버 킴 고든의 추천을 받아 LA에 있는 사운드 시티 스튜디오에서 1991년 5월 2일부터 6월 9일까지 Nevermind 앨범을 녹음했다. 멤버들은 완성본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녹음을 진행했고 앨범의 녹음이 다 끝난 뒤 프로듀서 부치 빅이 녹음물을 믹싱한 마스터 테입을 들려주었을 때가 되어서야 녹음 결과물이 너바나의 다듬어지지 않은 음악이 아닌 너무 깔끔한 팝송으로 만들어졌다며 경악했다고 한다. 그래서 밴드는 앤디 월리스[25]를 새로 고용하였고, 드럼과 기타 믹싱을 더욱 무겁게 손보았다. 훗날 월리스와 빅은 커트 코베인이 앨범의 최종 결과물을 듣고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고 밝혔다.[26]
앨범 녹음이 끝난 직후 밴드는 각종 페스티벌에 참가해서 곧 발매될 메이저 데뷔 앨범을 홍보하였다. 사실 커트 코베인은 어렸을 때부터 가난에 지쳐있었고, 사회적 성공을 원했기에 앨범이 발매된 직후에는 매니저 앞에서 왜 MTV에 앨범의 첫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의 뮤직비디오가 자주 나오지 않냐고 불평했을 정도로 밴드의 인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27]
Nevermind는 1991년 9월 24일 발매되었고, 빌보드 200에 144위로 입성하며 좋은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Smells Like Teen Spirit의 엄청난 인기로 Nevermind는 거침없이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까지 밀어내며 빌보드 1위를 달성하였다. 그렇게 너바나와 커트 코베인은 세대의 아이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2.4. 우울증과 마약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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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과 코트니 러브 |
Help me God, to kick this addiction.
(주여, 제가 이 중독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 유명한 헤로인 중독자였던 커트 코베인의 일기장에서.
(주여, 제가 이 중독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 유명한 헤로인 중독자였던 커트 코베인의 일기장에서.
Smells Like Teen Spirit의 대박 히트 후 대중들과 평론가들은 Nevermind 앨범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창시한 앨범이라는 식으로 호평들을 하기 시작했지만, 커트 코베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관과 상충되는 상업적인 사운드로 프로듀스되었기 때문에 앨범이 성공한 것이다."라며 Nevermind 앨범의 인기에 회의감을 느꼈고 자신이 시대의 대변자로 떠받들여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 및 밴드가 <Smells...>만이 히트한 원 히트 원더 밴드로만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에 우울해 하며 점점 음악에 흥미를 잃어갔다.[28]
무엇보다 앨범의 성공 후 언론에서는 커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커트 코베인이 쓴 가사의 속뜻을 트집잡는가 하면, 커트가 동성애 인권 옹호주의자라는 것과 그의 중학교 시절 친한 친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엮어서 커트를 동성애자로 몰아가기도 했다.[29] 심지어 커트가 파티에서 웃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찍은 파파라치의 사진을 싣고는 "무명 시절에는 '엘비스 프레슬리는 예술적인 재능이 없는 장사꾼이다'면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까던 사람이 성공하니 엘비스처럼 행동한다."며 그를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커트는 자신과 밴드가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고 결국 마약, 특히 헤로인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코트니 러브가 위장병으로 괴로워하는 커트에게 진통제로 헤로인을 사용해보라고 권유했다고도 한다. 한편으로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이혼과 불화, 양부의 가정폭력으로 인해 심한 애정결핍을 가지고 있었던 커트 코베인은 온전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싶어했고 때마침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코트니 러브와 1992년 2월 24일 결혼하였다.[30] 그러나 커트와 코트니의 결혼 후, 두 사람에 대한 언론의 공격이 더 심해지게 된다. 언론은 커트가 낙태를 찬성한다는 발언을 하자 부부가 심각한 마약 중독자라 기형아가 태어날 확률이 굉장히 높은데도 낙태를 하지 않고 프란시스 코베인을 낳았다는 이유 등으로 까댔다.[31]
결국, 최고의 인기를 얻으며 Nevermind 투어를 진행하던 도중, 커트는 심한 복통으로 쓰러져 입원하였고, 몇 달 동안 치료를 받으며 잠적한다. 그리고 1992년 8월 18일에 딸 프란시스 코베인이 태어나고 커트는 1992년 8월 30일, 레딩 페스티벌에서 컴백한다. 당시 언론에서는 커트 코베인이 마약으로 인해 건강이 매우 안 좋아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커트 코베인은 록씬에서 유명한 헤로인 중독자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약중독자라는 사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굉장히 꺼렸고 그를 마약 중독자라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몹시 싫어하였다. 때문에 인터뷰에서 매번 자신이 마약 중독자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었다. 그래서 커트는 언론들을 조롱하기 위해 괴상한 가발을 쓰고 병원 가운을 입고 휠체어를 탄 채 무대 위에 나타나서 부들부들 떨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뒤로 쓰러지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그리고 공연 중에 루머로 인해 고생하는 코트니 러브를 위해 관객들에게 "Coutney, We love you"라고 외쳐주기를 부탁한다.
자세한 내용은 Live at Reading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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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Utero 활동기의 커트 코베인 |
앨범 녹음 당시 커트 코베인은 프로듀서 스티브 알비니에게 최대한 무겁고 더러운 사운드를 수차례 주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DGC 음반사는 이 사운드를 별로 맘에 들어하지 않아 R.E.M.의 프로듀서였던 스콧 릿을 데려와 앨범을 다듬었다. 그래서 커트 코베인은 이 앨범의 최종본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In Utero 문서 참고하십시오.
2.5. 사망
자세한 내용은 커트 코베인 사망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3. 그의 음악 세계
3.1.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들
커트 코베인이 좋아하는 TOP 50 앨범오아시스나 라디오헤드와 같은 여느 1990년대 록 아티스트와 마찬가지로, 커트 코베인 역시 다양한 장르의 음악가들을 좋아했고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음악적 성향은 두말할 것도 없는 펑크 록, 얼터너티브 록, 그런지이지만, 달달한 메인스트림 팝 곡도 아주 좋아하여 ABBA나 베이 시티 롤러스, 몽키즈같은 팝 밴드도 자주 들었다.[33]
비틀즈와 존 레논도 아주 좋아해서 생전에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을 세계 최고의 앨범이라고 극찬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비틀즈의 중~후기 명반들만큼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닌 초창기 로큰롤 시기의 비틀즈 음반들도 엄청나게 좋아했다. 외에 낵, 칩 트릭 등의 파워 팝 밴드들과 매지 스타, 비트 해프닝, 바셀린즈 같은 인디 팝, 드림 팝 밴드도 즐겨 들었다. 그의 이렇게 멜로딕하고 팝적인 음악에 대한 애정은 그의 강렬하면서도 한편으론 멜로디감이 살아 숨쉬는 그의 작곡 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렇게 은근히 뛰어난 멜로디 작곡 능력 때문에 당시 대중들에게 생소했던 얼터너티브 록 음악으로도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당시 시애틀의 그런지 씬 아티스트들과도 막역한 사이를 유지했으며 무명 시절 동료 밴드의 녹음이나 공연에 참가한다던가 서로 홍보를 도와준다던가 하는 일이 잦았다. 대표적으로 멜빈스의 앨범 "Houdini"는 커트 코베인이 손수 프로듀싱했으며, 스크리밍 트리스와 그 보컬 마크 레너건의 음반에 기타와 코러스로 참여했고, 코트니 러브의 밴드 홀의 2집 녹음에도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초기 그런지 씬 아티스트들은 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라 이렇게 상부상조하는 일이 잦았다. 당시 대중음악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던 힙합에도 상당히 관심이 있었으며 퍼블릭 에너미의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은 커트가 좋아하는 음반 중 하나였고, 힙합을 새로운 시대의 음악이라 평하며 흥미를 보였다. 그러나 여러 힙합 가사의 여성혐오, 동성애 혐오적 표현에 대해서는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다.
그가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장르는 펑크 록이며 전설적인 펑크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1집 이름에서 히트 앨범인 Nevermind의 제목을 따 붙였다고 한다. 정작 존 라이든은 그 답게도 커트 코베인 같은 허접한 아티스트가 자기 1집 이름을 따 앨범 명을 지은건 역겨운 일이라며 커트 코베인을 무진장 깠다. 존 라이든은 너바나보다는 건스앤로지스가 훨씬 나은 밴드라고까지 했었다. 다만 존 라이든은 누군가를 깔 때 노이즈 마케팅 언플과 자신의 비주류적인 반골 이미지의 일관성을 위해 무작정 까는 경우가 워낙 많고, 그에게 안 까인 뮤지션이 거의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그의 험담에는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게다가 커트 코베인이 죽은 이후에 존 라이든은 존 레논이나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와 마찬가지로 커트 코베인의 업적을 어느정도 인정하긴 했다.
커트는 더 섀그스라는 프로토 펑크 밴드의 유일한 앨범 Philosophy of the World를 좋아하는 앨범 5위에 올려놓기도 했다.[34] 커트는 와이퍼즈, 블랙 플래그, 스투지스, 배드 브레인스, 갱 오브 포, 버즈콕스 등 여럿 펑크 록 밴드들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으며 너바나 역시 근본적으로는 펑크 밴드였다.
또한 헤비 메탈 팬들에게는 거의 죽일 놈 취급을 받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드 록 성향의 음악가답게 여러 메탈 밴드들의 팬이기도 했다. 1집 제작 당시에는 켈틱 프로스트의 음반을 귀에 달고 살았으며, 슬레이어 역시 그의 페이브릿 메탈 밴드였다. 특히나 커트 코베인은 메탈리카의 광팬이었다고 한다. 어떤 날은 메탈리카의 공연에 찾아가서 그 떡진 금발을 휘날리며 헤드뱅잉을 하면서 미쳐 날뛰고 있었는데, 그걸 알아본 커크 해밋이 팬 서비스 차원에서 커트가 가장 좋아하는 메탈리카의 곡인 'Whiplash'를 연주해 주었다고 한다.(커크 해밋 인터뷰 중) 사실 너바나가 갑자기 팍 뜬 이유가 팝 메탈의 야들야들한 미들이 강한 기타톤에 질린 락키드들이 코베인의 하이게인 디스토션 기타 톤에 열광함에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스래시 메탈 밴드인 메탈리카가 너바나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35] 참고로, 90년대 당시 우리나라 매체를 보면 너바나를 헤비메탈 밴드라고 잘못 소개하기도 했는데, 이런 사운드로 인해 문외한에게는 헤비메탈과 상당히 유사하게 들렸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어렸을 적에 레드 제플린, AC/DC, 에어로스미스 등의 고전 하드록/헤비메탈 밴드들도 좋아했다고 한다. 역사적인 너바나의 초연에서 레드 제플린의 곡인 Heartbreaker를 커버하기도 하고, Immigrant Song 등 레드 제플린의 곡을 가지고 기타랑 보컬을 연습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는 레드 제플린과 에어로스미스를 어린 시절때만큼 좋아하지는 않아서, 큰 이후에는 어릴때 모았던 레드 제플린과 에어로스미스의 앨범들을 단돈 12달러[36]에 모두 팔아버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코베인은 페미니스트답게 "예전에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레드 제플린이나 에어로스미스 같은 헤비메탈 밴드들의 가사들은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이라 환멸을 느꼈다"라고 소회했다. 헤비 메탈 씬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펑크 록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도 이들에 대한 개인적인 존경심은 유지했으며 유럽 투어 당시 어린 시절 자신의 영웅이었던 에디 밴 헤일런이 술과 마약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백 스테이지에 난입, 온갖 깽판을 벌이고 팻 스미어에게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내뱉는 등의 추태를 보이자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인디 음악과도 큰 연관이 있었다. 너바나가 픽시즈에게 받은 영향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커트는 머드허니, 브리더스, 소닉 유스, R.E.M., 화이트 좀비 등 당대 미국 인디 록 씬의 열성적인 지지자였으며 이들과 사적으로도 친분을 쌓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비교적 인기가 적었던 조이 디비전이나 더 스미스와 같은 영국 밴드들 역시 그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꽤나 마니악한 면모도 있어서 다니엘 존스턴이나 버트홀 서퍼즈, 하프 재패니즈, 스완스 같은 극도로 마이너한 음악가들의 열성 팬이었으며 당시 미국은 커녕 본국 일본에서도 마이너하기 짝이 없었던 일본 언더그라운드 밴드 쇼넨 나이프와 보어덤즈를 용케도 찾아내 광적으로 빠져들었다던가[37], 네덜란드 공연 시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60년대 말에 잠시 활동한 네덜란드의 로큰롤 밴드 더 아웃사이더즈의 리더 왈리 택스(Wally Tax)를 찾아가 대화를 나눴다던가 Incesticide의 라이너 노트에서 뜬금없이 런던에서 포스트 펑크 밴드 레인코츠의 앨범을 구하러 발품을 판 썰을 주욱 늘어놓는다던가[38] 하는 일화가 많다.
이 외에, 커트가 좋아한다고 언급을 한 적은 없지만, 퀸의 프레디 머큐리를 특히 공연 퍼포머로서 상당히 존경하고 부러워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커트의 유서에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기는 많은 관중이 들어서는 대규모 공연 무대에 공포감과 거부감이 있다면서 많은 청중들 앞에서 마음껏 즐길줄 아는 프레디 머큐리가 부럽다며 프레디 머큐리를 유능한 무대 퍼포머의 대표격으로 딱 집어서 언급을 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헤비메탈 같은 주류 장르에 속하지 않던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은 거의 다 이렇게 힙스터적인 음악 취향을 가진 괴짜들이었다. 커트 코베인의 업적 중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런 마이너 음악가들을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대중들에게 소개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덕택에 그를 은인으로 여기는 인디 뮤지션들도 많다.
3.2. 사용 음악 장비
3.2.1. 일렉트릭 기타
머스탱 기타 자체는 별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커트가 머스탱 기타를 애용한 것은 유명하다. 대개 In Utero 시기 때 주로 사용. 다만 오리지널 그대로 썼다기 보다는 험버커 픽업을 장착하여 개조해 쓴 것으로 보아서는 머스탱 기타의 출시 목적[39]과 커트의 신체 조건을 생각해보면 가격과 무게, 파워 코드의 연주가 용이하다는 점이 가장 큰 메리트여서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그의 가장 유명한 기타 중 하나. 다만 인터뷰에 따르면, 싼 만큼 많이 좋지는 않고, 튜닝이 항상 튼튼하게 맞추어지지도 않는다면서 소소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으나, 소유했던 기타 중에서 제일 많이 아끼고 사용했다.
커트가 쓴 또 다른 유명한 기타인 펜더 재규어. 그러나 머스탱과 마찬가지로 오리지널 그대로 쓰지는 않고 원래 장착되어있던 싱글 코일 두 개를
DiMarzio 험버커 두 개로 교체해서 썼다.[40] 또한 원래 재규어 기타는 여러 소리를 낼 수 있게 다량의 스위치와 회로를 갖고 있으나, 커트의 경우 딱히 쓸 일이 없었기에 제거하고 테이프도 감아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는 인터뷰를 보면 이 기타를 상당히 아낀 것으로 보인다. 다만 93년
In Utero 투어부터는 사용하는 빈도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 Fender Stratocaster "The Vandalism"
* Fender Stratocaster "The Vandalism"
펜더 재팬에서 생산된 스트라토캐스터.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제 버전보다 프렛이 더 작기도 하고, 값도 저렴해서 썼다고 한다. 기타에 붙어있는 " 반달리즘" 스티커가 유명해서 해당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외에도 Mosrite 사의 기타, 아이바네즈와 그레코의 기타 등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3.2.2. 어쿠스틱 기타
- Epiphone FT-79 Texan
- Martin D-18E
3.2.3. 앰프
Aaron Rush 채널에서 잭 엔디노를 찾아간 영상. 해당 영상에 Twin Reverb 앰프가 등장한다. |
- Fender Twin Reverb
- 메사 부기 스튜디오 프리앰프
이외에도 마샬, Crest, Sunn 등의 제품도 썼다고 한다.
3.2.4. 이펙터
- BOSS DS-1/2 디스토션 페달
- 커트가 주로 썼던 디스토션 페달. 너바나의 게인 톤은 대부분 이 페달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 Tech21 SansAmp Classic 디스토션
- Live And Loud와 In Utero 투어 때 쓰인 메인 디스토션이다.
- DOD Grunge 디스토션
- Live And Loud에서 사용되었다.
- Electro-Harmonix Small Clone 코러스
- Come as You Are와 Smells Like Teen Spirit 녹음 당시 쓰였다고 한다.
- Electro-Harmonix Big Muff 퍼즈
- Lithium의 스튜디오 버전에서 쓰였다고 한다. 허나 라이브에서는 BOSS 페달로 대체되었다는 듯.
- Electro-Harmonix Stereo PolyChorus 코러스
- Heart-Shaped Box녹음에 쓰였다. 코러스 외에도 플렌저 등의 이펙트를 걸어 썼다.
- ProCo RAT 디스토션
- Territorial Pissings의 스튜디오 버전에서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외에는 거의 쓴 적 없는 페달. 다만 노보셀릭은 이 페달을 자주 썼다.
3.2.5. 이 외
- 스트링
- Dean Markely Heavy Guitar Strings
- 주로 The Red Pack을 썼던 듯하다.
- 피크
- Dunlop Tortex .60mm 피크
4. 음반
4.1. 정규
- Montage of Heck: The Home Recordings (2015년 11월 13일)
4.2. 싱글
- And I Love Her / Sappy (2015년)
5. 평가
앨리스 인 체인스, 펄 잼, 사운드가든과 함께 그의 너바나는 시애틀 출신의 Big 4 얼터너티브 록 밴드의 일각이다. 그가 활약한 이후의 록 음악은 어떤 식으로든 그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롤링 스톤 등 권위 있는 평론가들이 꼽는 세기의 명곡 리스트에서는 상위권에 항상 과거 1950년대 ~1980년대 명곡[41]들이 주류를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커트가 작곡한 너바나의 대표곡인 Smells Like Teen Spirit은 90년대 이후 곡들이 20위 권안에 전멸할 때 조차 항상 10위 권 안에 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Nevermind' 앨범 역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을 뽑는 각종 명반 리스트에서 매번 10위권 내지 20위권 안에 든다.
1990년대를 상징하는 '락 히어로'라고 평가받으며, 명실상부 1990년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반드시 언급되는 X세대의 아이콘이다.
6. 여담
6.1.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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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커트 코베인 | 액슬 로즈 | 크리스 코넬 | 자레드 레토 | 브루스 디킨슨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존 본 조비 | 짐 모리슨 | 프레디 머큐리 | M. 섀도우스 | 빌 발로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엘비스 프레슬리 | 빌리 조 암스트롱 | 코리 테일러 | 제리 캔트렐 | 데이비드 리 로스 | |||||
16위 부터는 출처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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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
MTV는 구려!) 그럼 왜 여기 있는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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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음악성, 상징성, 음울한 분위기에 가려져 이름만 아는 사람이 많았겠지만 커트 코베인은 상당한 미남이었다. 지저분하게 막 기른 금발[42]에 선명한 푸른 눈, 낡은 가디건만 주로 입었음에도 그것이 그런지 패션이라는 하나의 트렌드가 된 것은 밑바탕인 그의 외모가 매우 빼어났던 덕분이다.
정작 본인은 자신의 외모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항상 정돈되지 않은 스타일로 다녔지만, 이런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 그의 외모와 어우러져 퇴폐적인 매력을 발산해냈고, 이게 청자들로 하여금 부성애나 모성애를 불러 일으켰던 것. 그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랑 병원 간호사들까지 눈이 예쁘다고 감탄했었다고 한다. 그의 인기와 신격화에는 이러한 외모도 큰 역할을 하였다.
6.2.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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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MTV VMAs에 참석한 커트 코베인 가족 |
- 아내는 록 가수이자 배우인 코트니 러브[43]로 커트 코베인과 결혼하기 전부터 막장 중의 막장이었는데 커트가 죽은 지 3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도 마약과 각종 사고로 뉴스에 오른다. 코트니 러브는 펑크 록 그룹 홀의 리더였고 사회를 도발하는 이미지의 악동이었다.
- 딸은 코트니 러브 슬하로, 이름은 프란시스 코베인, 시각 예술가 겸 모델이다.[44] 1992년생으로 현재 [age(1992-08-18)]세이며 이제는 사망할 당시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다. 2024년 9월 17일, 아들 로닌 워커 코베인 호크를 낳았고, 커트 역시 할아버지가 되었다. 성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란시스의 남편이자 사위가 토니 호크의 아들인지라 커트와 토니는 사돈 관계가 되었다.
- 딸인 프란시스 코베인에게는 애증의 존재인데 프렌시스는 인터뷰에서 '자살한 아버지가 정말 밉다. '내 나이 5살 때 아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치열했던 사춘기 시절 스스로 내 곁을 떠난 아빠에 대한 원망이 가시질 않는다'고 하지만 전 남편과 아버지인 커트 코베인의 기타를 두고 소송을 벌이거나 아빠의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거나 커트 코베인의 50번째 생일날 sns에 '오늘 아빠가 살아 계셨다면 아빠의 50번째 생일이 되었을텐데, 아빠 생일 축하해요. 아빠의 사랑하는 딸 프렌시스 코베인 드림'한 걸로 보아 그리움과 원망의 감정이 있는 듯하다. 프란시스는 너바나의 열렬한 팬까지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너바나 노래들이 있고 그 중 하나가 Territorial Pissings라고 한다.
6.3. 가치관
- 1990년대 저항 정신의 상징적 인물이며, 액슬 로즈, 존 본 조비, 노엘 갤러거 등의 동시대의 다른 가수들처럼 강력한 진보주의 성향이다.[45]
- 일반적으로는 진보로 알려져있으나 크리스 노보셀릭에 따르면 그는 진보주의 보다는 자유주의, 즉 리버럴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으며 덕분에 개인의 영역을 존중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불교 사상의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특히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다. 토비 베일과 사귀게 되고 비키니 킬 등 올림피아의 라이엇 걸 밴드들과 어울리면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Never met a wise man. If so it's a woman.’ (지혜로운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여자였다.) 이나 ‘I like the comfort in knowing that women are generally superior, and naturally less violent than men. I like the comfort in knowing that women are only future of rock and roll.' (나는 여성이 남성보다 일반적으로 우월하고 덜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에서 오는 위안을 좋아한다. 나는 여성이 락앤롤의 유일한 미래라는 것을 아는 데에서 오는 위안을 좋아한다) 등 다양한 말을 하거나 남기기도 하였다.
- 커트 코베인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싫어했다는 말이 한국인들 사이에 퍼져 있지만, 대표적인 래디컬 페미니스트 연예인 코트니 러브와 결혼해서 죽기 전까지 잘 살았고 음악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큰 교류를 나눴으며 래디컬 페미니즘을 겨냥하며 비판한 적도 없다. 커트 코베인이 비키니 킬의 드러머 토비 베일에게 일방적으로 차인 이후 너바나가 Nevermind 앨범으로 큰 성공을 거두자 토비를 비롯한 비키니 킬 멤버들이 너바나에게 협업을 제의했는데 커트가 이를 단칼에 거절하면서 일기장에 토비를 " 페미나치"라고 비난하긴 했지만 이건 그냥 분노한 상태에서 붙인 멸칭에 가깝다. 토비 베일이 페미니즘을 무기로 이득을 취하고자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철면피를 깔고 염치없는 행동을 한 것이기 때문. 커트 코베인은 토비 베일을 정말 엄청나게 사랑해서 그녀에 대해서만 총 6곡의 노래를 썼고, Aneurysm에 love you so much it makes me sick이라고 적었으며, 약속 장소에서 토비를 만나기 전 너무 떨려서 토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기에 토비에게 차였을 때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가부장적인 가치관은 혐오했지만 가벼운 관계를 지향하는 토비와 더 깊은 관계를 원하는 커트 사이에 마찰이 있어 왔다고.
- 커트가 꼴마초적인 남성을 매우 혐오한 것은 아버지 돈 코베인의 영향 또한 매우 큰 것으로 보이고, 그 혐오를 주제로 한 너바나의 곡들도 꽤 있다. Bleach의 Mr. Moustache, Nevermind의 In Bloom과 Territorial Pissings, In Utero의 Very Ape 등.
- 또한 1992년 발매된 Incesticide의 속지에 적힌 커트의 글을 통해 커트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동성애자,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혹은 여성을 혐오한다면 한가지 부탁하건대 우리를 가만 냅둬라! 우리 공연에 오지 말고 우리의 음반도 사지 마라.
If any of you in any way hate homosexuals, people of different color, or women, please do this one favor for us—leave us the fuck alone! Don't come to our shows and don't buy our records.
If any of you in any way hate homosexuals, people of different color, or women, please do this one favor for us—leave us the fuck alone! Don't come to our shows and don't buy our records.
- 성폭력에 대해 비판하는 곡을 다수 썼다. ('Polly', 'Rape Me', 'Sappy' 등.) "여성들에게 강간을 방어하는 법을 가르치기보단 그 대신 여성을 강간하지 않도록 남성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했다. ("The problem with groups who deal with rape is that they try to educate women how to defend themselves. What really needs to be done is teaching men not to rape.") 여성 관객을 성추행하는 남성 관객을 커트 코베인이 공연 도중에 제지해서 쫓아내고 다른 멤버들이 그 남성 관객을 조롱하는 장면 또한 짧은 영상으로 남아 있다.
6.4. 대인관계
- 건즈 앤 로지스의 보컬 액슬 로즈와 사이가 매우 나빴던 것으로 유명하다. 액슬 로즈는 본래 너바나의 팬으로 너바나에게 합동 공연을 요청했지만, 커트 코베인이 이를 거부하고 액슬을 기성 록스타라고 비난했다, 이에 액슬 로즈는 꼭지가 돌아서 공연장에서 너바나를 공개적으로 욕하고 다니기 시작했고 둘의 사이가 나빠졌다. 하루는 액슬을 만난 커트 코베인과 코트니 러브가 액슬에게 시비를 건적도 있었고, 이 때문에 액슬이 커트를 때리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또 커트 코베인은 액슬을 인터뷰에서 인종차별주의자이자 호모포비아라고 마구 깠다. 자세한 것은 건즈 앤 로지스 문서 참고. 그래도 커트 코베인의 사후 액슬은 다른 멤버들과 그럭저럭 화해했는지 액슬 로즈와 데이브 그롤은 나름 친한 관계라고 한다.
- 생전 스매싱 펌킨스의 리더 빌리 코건과 라이벌 관계였다. 두 사람이 유명해지는 계기가 된 앨범들은 모두 같은 프로듀서(부치 빅)에 의해 프로듀스되었지만 두 사람은 추구하는 음악적 성향부터 매우 달랐고 두 사람 모두 밴드의 메인 송라이터이자 리더였지만 두 사람이 밴드를 운영하는 방식은 정반대였다.[46] 게다가 코트니 러브와 삼각관계를 이루기까지 했다.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주로 언론에서 부추긴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 빌리 코건은 커트 코베인을 은근히 의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스매싱 펌킨스의 2집이 성공하고 가진 인터뷰에서 기자가 커트 코베인과 자신을 비교하자 빌리 코건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그는 기타를 연주하는 손조차 정반대다."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하기도 했다.[47]
- 멜빈스(Melvins)의 버즈 오스본과 커트는 같은 고향 친구이고 매우 친한 사이였다. 서로 주고 받고 했던 관계. 멜빈스는 너바나와 같은 시애틀 그런지 밴드들에게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하고, 너바나의 사운드 일부는 멜빈스에게 영감을 받기도 했다. 사실 초반에 커트가 멜빈스의 앨범 프로듀싱을 맡으려고 했으나 멜빈스가 커트의 마약 문제 때문에 프로듀서 자리에서 해고 시켰다고 한다. 그래도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졌던 건 아닌 모양. 드러머 데이브 그롤을 너바나에게 소개 시켜준 것이 바로 버즈 오스본.
- 앨리스 인 체인스의 보컬 레인 스테일리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같이 헤로인을 투여하는 등 어느정도 친분이 있었다. 공연하면서 몇 번 마주쳐서 어울린 적도 있었다고 레인 스테일리가 인터뷰에서 말했는데 커트 코베인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를 회고하면서 “내가 커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는 커트가 나를 한 식료품점에서 친구 집까지 태워준 것이었다. 약 15분 거리에 있는 그곳으로 가는 내내, 커트는 자신의 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 조용한 사람치고는, 그는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너무나도 흥분했고, 그 어린 소녀를 정말 사랑했다.“.
6.5. 기념지
커트 코베인을 기리던 자원자들이 관리하던 기념공원(Memorial Park)이 그가 태어난 도시 워싱턴주의 Aberdeen시에 의해 2015년 정식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첫번째 공식 기념공원이 탄생했다. 이 기념지의 이름은 Kurt Cobain Memorial Park 혹은 Kurt Cobain Landing이라 불린다.굉장히 작은 공원으로 멈추지 않고 걷는다면 가로지르는데 1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공원 안에는 그의 펜더 재규어 기타상과 그가 이 공원의 위를 가로지르는 Young Street Bridge에서 가사를 떠올렸다고 전해지는 ' Something in the Way' 가사를 적은 팻말, 그리고 그의 사진과 그의 생전 어록을 함께적은 돌판이 있다. '커트 코베인의 에어기타'라는 기타 스탠드같이 생긴 조형물도 있으나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참고로 그곳의 돌판은 그의 묘비가 아니며 커트 코베인은 땅에 묻히지 않고 화장을 했으며, 그의 재는 시애틀 위시카 강변에 뿌려졌다. 돌판에 적힌 어록들 중 "...they(마약을 말함) will fuck you up"의 Fuck 부분은 파여져 있는데 누가 훼손한것이 아니라 Aberdeen시의 시장이 그 단어를 기입하는걸 원치 않아서 그렇다. 공원은 Young Street Bridge가 위로 가로지르고 있어 그 브릿지의 밑을 볼수 있는데 그를 기리는 팬들의 그라피티를 구경할수 있다.
돌판에 적혀있는 가장 첫 문장 : I'd rather be hated for who I am than be loved for who I am not(내 본연의 모습으로 미움받을 지언정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고 싶지는 않다.).
이 말은 커트 코베인이 최초로 만든 말은 아니다. 이 말은 프랑스의 소설가 André Gide(앙드레 지드)의 Autumn Leaves에 적혀있는 같은 의미의 말을 약간 다르게 말한 것이다. 하지만 커트 코베인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돌아봤을때, 그의 죽음과 자기모순과 그로 인해 괴로워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아닌 그가 이 말을 했다는 것에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언급해두었듯이 정말 작은 공원으로, 너무 초라하고 잘 관리된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실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커트의 수난많던 어린 시절 집에서 나온 그가 노숙을 하며 밤을 지새기도 했던 장소에 직접 앉아볼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는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48]
이 기념공원은 커트 코베인을 기리는 첫번째 공식 기념물은 아니다. 그를 기리는 첫 공식 기념물은 이 공원에 들어가기 위해 필시 통과해야할 Aberdeen시의 입구에 세워진 'Welcome to Aberdeen'이란 환영 도로표지판 밑의 'Come As You Are'라 적힌 표지판이다. 이것은 2005년에 만들어졌으며 만약 원한다면 차를 멈추고 도로표지판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지만 필시 운전 중일 것이므로 안전하게 정차하고 뒤차를 위험하게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커트의 기념공원에 대해 한가지 언급하자면 이 기념공원은 일반 민가 바로 앞에 있다. 문자 그대로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집주인은 매일 찾아드는 커트의 팬들을 봐야한다. 이 작은 공원은 전용 주차장 따윈 없으며 고로 팬들은 그의 집앞에 주차를 한다. 꽤나 팬들에게 시달린 모양인지 집 앞에 페인트로 팻말을 만들어 못에 박아놓았는데 그 내용은 자신의 집은 커트의 기념품 상점이 아니고, 이 집은 커트가 살았던 집이 아니며, 자신은 커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고(그러나 옆집의 이웃은 알았으며), 자신은 많은 구경객에 힘들어 하고 있으며,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당신들이 직접 911을 불러야하고, 다리밑의 주사기등의 뾰족한 물건에 조심하고, 자신들의 물건을 가져가지 말것을 부탁하고 있다. 이 모든 말들은 영어의 대문자로 적혀있는데 영문에서 대문자로 적는것은 소리를 지르는 모양새를 표현하는 경우가 있단걸 생각해 보면 방문객으로서 그들을 존중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공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커트가 정말로 어린시절을 보낸 집이 보존되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볼수도 없고 심지어 공식 기념물도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칠 순 없을것이다. 얼마나 가깝냐면 차로 1분 걸어서 3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집의 넘버는 1210이며 노란색의 조그맣고 낡은 집이다. 이 집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집의 이웃집에는 분명히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두집 정도 앞에사는 주민은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6.6. 기타
-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로 커트 코베인: 몽타주 오브 헥이 있다. 브렛 모르겐 감독의 2015년 영화이며,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 둠 2의 레벨 21이름은 'Nirvana'인데, 커트 코베인이 몸담은 밴드 너바나의 어원인 열반으로 봐도 되지만, 레벨 디자인의 정황을 감안하면 커트 코베인 및 너바나를 의미한다고 봐도 된다. 시작지점에 슈퍼 샷건이 놓여져있는데, 레벨 이름과 연관지어보면 명백히 커트 코베인의 산탄총 자살에 대한 리퍼런스다. 단 이 리퍼런스가 고인드립이라고도 볼수있지만, 둠의 제작진들에 메탈헤드가 상당하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때 오히려 고인드립이라기보다는 단순 리퍼런스 내지 추모의 의미로 봐야한다는 의견도 많다.
- 한 시대를 대표했던 뮤지션이라는 상징성과 비극적인 인생사로 인한 충격적인 자살 등의 이유로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의 존경과 우대를 받으며, 그들이 쓴 곡들의 노랫말에 자주 등장한다. 커트 코베인을 언급한 가삿말들
- 커트 코베인이 좋아했던 영화들 목록
- 커트 코베인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앨범 50선"을 보면 그가 좋아했던 뮤지션들을 알 수 있다.
- 많은 뮤지션들이 그렇지만, 커트는 유독 명확한 가사를 기피했다. 대표적으로 ' Smells Like Teen Spirit'은 그냥 라임에 맞게 아무 말 떡칠을 해놨다. 예외적으로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에 관한 자전적인 곡 " Sliver"는 꽤나 정확한 가사를 전달하고 있다. 이 곡에서 알 수 없는 유일한 것은 제목인데, 커트는 자신이 제목을 'Sliver'라고 지어도 다른 사람들은 'Silver'라고 부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타이틀을 그렇게 정했다고 한다.
- 공연 중에 드럼셋 등에 몸을 던지거나 기타를 박살내는 퍼포먼스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가 쓴 기타 대부분은 온전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라이브 중 박살내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니... 이 퍼포먼스는 Bleach 시절 드러머와의 불화 때문에 시작되었다. 당시 드러머였던 채드 채닝은 자신이 너무 작곡에 기여를 못한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커트와 크리스는 그의 드러밍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 라이브 공연중에 실수를 왕창 하거나 아예 곡을 연주를 못하는 상황이 나오면 둘이서 빡쳐서 무대를 개박살냈던 것이다. 드러머가 데이브로 바뀐 이후에도 이 관행은 계속되는데 이는 지병인 만성 위염과 장염의 고통 때문이었다고 한다.
- 커트 코베인은 파워 코드 기반의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기타 리프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이고 중독성있는 멜로디가 특징인 명곡들을 많이 만들어 낸 작곡가로서 워낙 유명하고 기타 솔로 또한 절제하는 경향을 보였기에 기타 연주 실력이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된 뮤지션이다. 그러나 'In Bloom'에서 볼 수 있듯이 커트 코베인은 수준급의 기타 솔로를 연주할 수 있는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커트 코베인은 이펙터는 별로 쓰지 않으면서도[49] 그런지 특유의 어둡고 노이지한 독창적인 기타 톤을 만들어냈다.
- 애초에 커트는 화려한 기타 솔로를 하며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는 연주 자체를 싫어했다. 인터뷰에서 "엄청난 테크닉을 뽐내며 자기과시에 빠져있는 기타리스트를 혐오한다. 그런 사람 때문에 누구나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되니까말이다. 기타를 연주하고 싶은 사람은 어느 누구든 즐겁게 무대에 올라 공연해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으며 공연에서 에디 밴 헤일런 특유의 Shredding 연주를 흉내내며 비꼰 적도 있다. 에디 밴 헤일런이 전에 공연 중 술에 취한 채 너바나를 소개하며 Pat Smear의 피부색을 가지고 모욕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50]
- " Smells Like Teen Spirit" 곡이 본인의 자작곡이자 최대 히트곡인 반면, 본인은 이 노래를 무척 부르기 싫어했다고 한다.[51] 영국의 뮤직뱅크격인 BBC의 Top Of The Pops에 출연해서 이 노래를 연주했을 때 방송사 BBC의 핸드싱크 요구에 반발해서 개판친 전설적인 공연 영상이 존재한다. 일명 커트 코베인이 마이크 먹는 영상.[52] 코베인 본인은 스미스의 모리세이 모창을 시도한 것이라고 했다.
- 대부분의 작곡을 도맡고 프론트맨을 하는 등 비중은 밴드 내 제일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밴드 초창기에는 수익을 공정하게 나눴으나 Nevermind 히트 이후 코트니가 곡은 당신 혼자 썼는데 왜 수익은 공평하게 나눠?라고 항의하자 아무래도 사랑하는 여자와의 경제적인 문제다 보니 결국 밴드의 인세 중 50%를 자신이 차지하는 것으로 내용을 바꿨다고 한다. 이로 인해 절친이었던 크리스 노보셀릭과의 사이가 조금[53] 나빠졌고 1992년에 열린 커트-코트니의 결혼식에 불참하게 된다. 커트 사후 코트니가 너바나의 곡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자 크리스는 "난 코트니와 항상 잘 지낼려고 노력해보지만 그녀는 항상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 커트는 데이브 그롤이 곡 작업을 하는 것을 여러 차례 엿들었고[54] 이를 매우 흡족하게 여겨 In Utero 앨범부터는 그롤의 곡들을 적극적으로 수록하고자 하였지만 그롤이 스스로 자신의 곡들은 '너바나스럽지 않다'고 여기며 합주를 통한 공동작곡의 형식을 지향했다고 한다. 이에 커트는 1994년 자살하기 직전 인터뷰에서 "나는 혼자 곡을 만드는 것에 지쳤고 밴드는 해체 직전의 상황이다. 멤버들과 합주를 해서 곡을 만들려고 해도 소음만 나오고 음악은 안 나온다."라는 불평을 했다.
- 무대에서 보이는 분노와 폭발적 매너와는 달리, 실제 성격은 점잖았으며 우울감을 자주 드러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밴드가 크게 성공한 뒤 부터는 극심한 위장 장애와 헤로인 중독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히스테리를 부렸다고 한다.
- 커트 코베인은 동성애 인권 옹호주의자로 유명하며 그로인해 동성애자라는 오인을 받기도 하였다. 다만, 실제로 코트니 러브를 만나기 전에는 성적 지향에 혼란을 느낀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양성애자로 살아왔다고. #
- 인간 커트 코베인의 모습은 커트 코베인: 몽타주 오브 헥에서 주변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Incesticide의 앨범 커버가 그가 그린 그림 중 하나이고, 2015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커트 코베인: 몽타주 오브 헥의 사운드트랙 앨범 커버도 그의 그림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볼 수 있는데, 굉장히 기괴한 그림도 있으니 주의.[55] 그의 불안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 일단 운전면허를 따긴 했지만 운전 실력은 영 좋지 못했다. 밴드의 첫 투어 때 커트 코베인은 밴을 거의 시속 30km 이하로 느릿느릿하게만 몰다가 결국 운전석에서 쫓겨 났고, 이후 다시는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 은근히 자동차 운전에 겁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커트의 전 여친 트레이시 머랜더는 그의 운전 솜씨에 대해 "마치 내 작은 할머니처럼 차를 몰더라"고 회고했다.
- 은근히 존 레논과 닮은 점이 많았다. 시대를 풍미한 록밴드의 리더였다는 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점, 요절했다는 점, 전설적인 송라이터라는 점 등이 비슷하고, 코트니 러브와 커트의 관계도 오노 요코와 존 레논의 관계와 정말 비슷하다.[56] 또 존 레논과 커트 코베인 둘다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가졌다는 점[57]도 유사한 것이다. 무엇보다 존 레논과 커트 코베인은 밴드 내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았고, 젊은 나이에 총기로 죽었다는 점까지 판박이다.[58] 여담으로 커트 코베인은 생전 Nevermind 앨범을 만들 때 틈만 나면 The Beatles 앨범을 반복해서 들었을 정도로 비틀즈를 좋아했다고 한다.
- 커트 코베인은 노르웨이의 블랙 메탈 뮤지션 바르그 비케르네스와 기타를 본격적으로 독학하기 시작했을 당시의 상황이나 각자 몸담은 장르에서의 음악적인 업적은 비슷하지만 그 외의 면들은 정말 상극인 뮤지션이었다.
- 두 사람은 모두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자퇴한 후 본격적으로 기타 연주를 독학하기 시작했지만 커트 코베인이 학교 내에서 유명한 아웃사이더였다면 바르그 비케르네스는 급우들을 아무 이유없이 괴롭히는 것으로 악명을 떨친 일진이었다.
- 커트 코베인은 사회의 모든 불합리한 차별을 반대하고 저항하는 진보적인 성향으로 유명했으며 마초를 혐오하는 페미니스트였다면 바르그 비케르네스는 백인 우월주의 및 네오나치 성향을 지닌 극우주의자에다기 평상시 남자다움의 중요성을 강하게 설파한 인물이었다.
- 추구하는 음악도 정반대였다. 커트 코베인은 펑크 록과 인디 음악에 기반한 독창적인 음악을 선보여 헤비메탈의 시대를 저물게 한 뮤지션이었다면 바르그 비케르네스는 80년대 당시 융성하던 헤비메탈을 극도로 추구한 익스트림 메탈의 거두이자 블랙 메탈이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뮤지션이다.
6.6.1. 유품
사후 30년이 넘은 지금도 그의 유품은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그의 생전 음악과 관련된 유품이면 경매에 등장하자마자 최고가를 우습게 갱신하곤 한다.
- 그가 MTV 언플러그드 공연에서 입은 가디건은 약 4억원에 거래되며 가장 비싼 가디건으로 기록됐다
- Smells Like Teen Spirit 뮤직비디오에서 연주한 펜더 머스탱 기타가 2022년 경매에서 450만 달러에 팔리며 세계에서 가장 비싼 일렉트릭 기타로 기록됐다. 일렉트릭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 둘 다 커트 코베인의 악기가 최고가가 된 것.
- 최근 그의 머리카락 6가닥이 경매에 올라왔는데 무려 14,000 달러에 낙찰되었다.
- 그가 1992년 싱가포르에서 그린 자화상이 경매에 올라와 281,000달러에 낙찰되었다.
- 마지막 공연에서 연주한 일렉트릭 기타가 158만7천500달러(약 20억6천만원)에 팔렸다. #
7. 어록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번에 불타는 것이 낫다.[59]
사람들은 내가 남들과 다르고 튄다는 이유로 비웃는다. 나는 그들 모두가 개성없이 똑같은 놈들이라는 이유로 비웃는다.
너답지 않은 모습으로 사랑받을 바에야 네 본연의 모습으로 미움받는 것이 낫다.
[1]
사망 추정일자로, 시신이 발견된 날짜는 사망 3일 후인
1994년
4월 8일이다.
[2]
상세 주소: Denny-Blaine, 171 Lake Washington Blvd. E.
[3]
기타는
왼손잡이용을 쓰지만 일상 생활은 오른손으로 했다. 그 당시 풍조와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인 케이스.
[4]
프란시스 코베인이 인스타그램에 사망 사실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2021년 6월에 유방암으로 인해 사망했다.
[5]
프란시스가 불과 생후 19개월 때 죽었다.
[6]
유년기에는 개신교 신자였고 청년기에는 잠시
불교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으나, 말년에 쓴 일기들을 참조한다면 최종적으로 신 자체에 대한 믿음은 버리지 않았던 듯하다.
[7]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너바나의 등장으로 메탈 자체가 몰락하지는 않았다. 너바나 이후로도
판테라나
메탈리카,
본 조비 같은 유명 메탈 밴드들은 여전히 메인스트림에 남아 있었으며, 이후엔
콘이나
린킨 파크를 위시한
뉴메탈 역시도 대중음악계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대중 음악계에서 메탈의 입지가 좁아졌다 뿐이지 도리어
블랙 메탈이나
파워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같은 세부적인 장르의 분화와 발전은 도리어 1990년대에 왕성해져서 메탈의 장르로서의 깊이가 더 깊어져 음악적 완성을 이룬 시기였다.
[8]
백인 하류층을 뜻하는 말. 대표적 사례로는 미국의 전설적인 래퍼
에미넴을 들 수 있다.
[9]
후에 너바나의 다큐멘터리 영화 '몽타쥬 오브 헥'의 어머니 웬디 인터뷰에 따르면 결혼 당시 어렸던 만큼 경제적인 어려움을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았고, 결혼 후에도 가능한 한 빨리 아이를 가지기를 원했다고 한다.
[10]
킴벌리는 커트가 매우 아끼는 여동생이었고 킴벌리도 오빠와의 관계가 좋았다. 참고로 킴벌리는 동성애자로 레즈비언이다. 그래서 동성애와 낙태에 찬성하던 너바나 멤버들도 이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 킴벌리는 커트의 딸인 프란시스와도 관계가 좋은데 커트의 아내 코트니가 마약 중독과 정신질환으로 인해 딸을 제대로 키우지 못할때 프란시스에 대한 양육권을 자신이 가지고 프란시스를 자신의 딸처럼 아끼며 키웠기 때문이다. 프란시스에게는 어머니와도 같은 고모인 셈.
[11]
근본적인 원인은 금전 문제 때문이었는데 양측의 부모가 동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커트의 부모가 준비도 없이 성급하게 결혼했기 때문이다.
[12]
왜냐면 아버지가 재혼하지 않겠다고 말하고선 재혼하여 자식을 둘이나 가졌고 그가 아끼는 여동생 킴벌리를 데려갔기 때문이다.
[13]
재혼했는데도 남자친구를 수도 없이 사귈 정도로 문란한 성격이었다.
[14]
양부의 폭행으로 팔이 부러져 커트가 병원에 입원할 정도였다. 양부는 나중에 어머니와 커트를 심하게 폭행하여 결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감옥에 가면서 이혼당했다.
[15]
"Something In The way"의 노랫말은 내가 만약 가출했을 때 다리 밑에서 살았다면 이렇게 살았을 거라고 상상하며 썼다고 한다.
[16]
시간이 지나서 너바나를 결성한 1987년 무렵부터는
헤로인까지도 손댔다. 그러나
평전에 따르면 커트 코베인은 그리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게 아니었기 때문에 너바나가 본격적으로 성공하기 전까지는 헤로인이나 코카인을 그리 쉽게 접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17]
왜냐면 공부를 너무나 싫어하고 하지 않다보니 성적이 나빠 졸업할 수 있는 학점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18]
커트의 어머니는 커트가 학교를 그만두자 직장을 구하든가 아니면 집을 나가라며 커트를 구박했고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잦았다. 그러다 결국, 커트가 더는 어머니와 살고 싶지 않아서 집을 나간 것이다. 딸 프란시스를 가졌을 때도 커트는 어머니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다만 커트의 어머니는 나중에 아들이 자살한 것을 알게 되고는 아들의 장례식으로 찾아와 크게 슬퍼했고 지금도 손녀 프란시스를 매우 아낀다.
[19]
이때 워낙 가난하게 살았는데 커트의 고백으로는 여자친구 트레이시가 일하는 식당에서 손님들이 남긴 음식들을 훔쳐와서 먹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20]
사실 녹음 상태가 매우 조악하고 가창력이나 연주도 아직 아마추어 티를 벗지 못하여 그다지 들을 만한 작품은 아니다. 커트 코베인의 초기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을 뿐.
[21]
이때문에 음식을 많이 먹지도 못해 항상 소식을 할수밖에 없었고 마른 체격을 유지하게 되었다. 커트는 자신의 마른 체격을 싫어했고 콤플렉스로 여겼기에 주로 큰 사이즈의 옷을 입고 다녔다.
[22]
이는 커트가 기타를 항상 메고 있었기에 발생했다. 커트가 애용한 머스탱이나 깁슨/에피폰사의 SG/카지노처럼 가벼운 기타들도 있지만, 레스폴처럼 묵직한 기타도 있다. 커트 코베인이 사용하던 펜더사의 스트라토케스터나 재규어의 경우 3kg 정도하는 물건이다. 군필자들이라면 K-2 소총과 비슷한 무게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른 체격으로 늘 무거운 기타를 메고 1~2시간짜리 공연을 거의 쉬지도 못하고 소화를 하면 몸이 남아 돌리가 없다. 록/메탈씬 뮤지션들이 괜히 우락부락한 체격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23]
부활의 김태원의 경우 저질 체력으로 인해 무거운 기타를 공연 때 장시간 메고 다니기 힘들어서 ESP 커스텀 기타를 주문할 때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24]
죽기 직전의 인터뷰에서 커트가 위장 수술을 받았다는 언급이 있었는데 수술을 받은 뒤, 커트는 주위 사람들이 그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만족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커트는 인터뷰에서 복통이 너무나도 고통스럽지만 없어지는 것은 두렵다고 했다. 그의 고통이 그가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칠 수 있는 원동력이자 큰 영감이었기 때문.
[25]
슬레이어의 Season in the Abyss와
화이트 좀비의 La Sexorcisto: Devil Music, Vol. 1 앨범을 프로듀싱하였다.
[26]
그러나 커트 코베인은 사망 직전 인터뷰에서 Nevermind 앨범의 사운드가
펑크 록 답지 않고 너무 정제되었다며 당시 프로듀서들의 녹음본에 OK 싸인을 했던 자신의 결정을 무척이나 후회한다고 말했다.
[27]
조지프 히스의 '혁명을 팝니다'는 이러한 커트 코베인의 자기모순에 대해 잘 다루고 있다.
[28]
다만, 커트의 생각과는 달리 Nevermind 수록곡들 대다수는 90년대에 매우 유행했다.
[29]
다만, 실제로
코트니 러브를 만나기 전에는 성적 지향에 혼란을 느낀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양성애자로 살아왔다고.
#
[30]
크리스 노브셀릭은 훗날 밝히기를 커트와 코트니의 관계는 연인 사이보다는
섹스 파트너에 가까웠다고 한다. 너바나의 멤버들은 어느 날 LA의 한 카지노에 놀러갔는데 커트와 코트니가 마주치자 너바나의 다른 멤버들이 있는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둘이 격정적으로 스킨쉽을 하기 시작했다고... 커트 코베인은 영국의 방송에 출연하면서 "나는 이곳에 계신 분들께 락 그룹
홀 멤버인 코트니 러브가 세상에서 가장 섹스를 잘한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어요"라는 멘트를 하기도 했다.
#
[31]
당사자들도 출산 및 육아에 마약이 해가 된다는건 인지하고 있던 터라 오히려 둘은 재활원으로 폐관 수련하러 자진 입소하는 등 마약을 끊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곤 했다. 이런 언론들의 조소와는 다르게 프란시스는
1992년
8월 18일에 아무런 병이나 장애도 없이 건강하게만 태어났다.
[32]
이때 작곡한 곡이 Frances Farmer Will Have Her Revenge on Seattle 등, 분노가 가득찬 곡들이다.
[33]
전미 투어 도중 투어 버스 안에서 당시 갓 발매된 아바의 Gold: Greatest Hits 음반을 내내 돌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34]
이 밴드의 문서를 읽으면 알겠지만 더 섀그스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아방가르드 음악쪽으로 분류될 정도의 엉망인 실력을 가진 밴드다. 물론 이런 점은 다른 방향으로 유명해져
더 클래시,
프랭크 자파 등 여러 펑크/전위 예술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말이다.
[35]
사실 메탈리카도 결성 당시 유행하던 팝 메탈과는 다른, 주로
모터헤드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스래시 스타일의 노선을 타기로 결심하여 결성되었던 것이라 너바나를 필두로 한 그런지 및 얼터너티브 씬의 아티스트들과 어느 정도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음악적 이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6]
현재의 한국 돈으로 약 1만 3천원 정도. 물론 당시인 1980년대 후반의 기준으론 훨씬 더 된다.
[37]
너바나가 성공한 이후 커트는 이들을 직접 미국에 초청해서 오프닝 밴드로 세웠으며
보어덤즈의 경우 아예 객원 멤버로 참여하려 하기도 했다.
[38]
이 인연으로 커트는 레인코츠 음반의 재발매 당시 라이너 노트를 쓰게 된다.
[39]
입문자, 학생들을 위한 저가형 모델
[40]
넥 쪽에는 PAF 모델, 브릿지 쪽에는 Super Distortion 모델. 훗날 1993년에 브릿지 쪽 픽업을 Seymour Duncan JB로 바꾼 듯하다.
[41]
비틀즈의 수많은 명곡들과 롤링 스톤즈의 Satisfaction, Sympathy of the Devil,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 등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곡 순위를 보면 거의 1960년대의 격변기 시절 노래들이 최상위권을 차지한다.
[42]
게다가 커트는 머리를 잘 안 감아서 사진과 영상을 자세히보면 머리가 항상 기름기로 떡져 있었다.
[43]
1992-1994 혼인. 커트가 사망함으로써 사별.
[44]
딸이 엄마의 코와 아빠의 눈을 닮았는데 코트니 러브를 더 많이 닮았다. 다만 록 스피릿은 둘 다 닮았다는 평이다. 참고로 딸 이름은 코베인이 죽어라 좋아했던
스코틀랜드 인디 팝 밴드 더 바셀린즈(한국의 바세린하고는 상관 없다.)의 여성 보컬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너바나보다는
오아시스, 머큐리 레브, 브라이언 존스타운의 음악을 더 좋아한다고 밝혔다.
[45]
이 넷은 모두 매우 진보적인 도시에서 성장했기에 진보주의 성향이 된 것일 수도 있다. 액슬은 LA, 본 조비는 뉴저지, 커트는 시애틀에서 성장했으며, 노엘은 영국인이지만 맨체스터 노동자 출신인지라 골수 중의 골수 노동당 지지자이다.
[46]
빌리 코건이 밴드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는 독재자로 군림했다면 커트 코베인은 본인이 리더임에도 불구하고 생전 "나는 비틀즈의 링고 스타같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멤버가 되고싶다."는 발언을 할 정도로 전권을 휘두르지 않았다.
[47]
빌리 코건은 왼손잡이인데 오른손으로 기타를 연주하고 커트 코베인은 오른손잡이인데 왼손으로 기타를 연주한다.
[48]
사실, 이 Bridge 밑에서 커트가 노숙을 했는가는 의문이 남긴한다. 커트의 일생에 대한 책인 Charles Ross의 책 Heavier than Heaven에서는 커트가 가출을 했을시 함께했던 친구를 인터뷰했는데 그가 말하길 사실 다리밑에서 노숙을 한건 사실이 아니고 24시 열려있는 병원의 대기실같은 곳에서 밤을 지새웠다라고 한다.
[49]
생전에 쓰던 이펙터는 앰프 드라이브는 아예 사용하지 않고, 고작 보스 DS-1
디스토션과 Small Clone 코러스 이펙터 페달이 전부였다.
[50]
...And
Krist goes, "Oh Eddie, you haven't met Pat. He's our new guitar player." /
Eddie turns around and sees me, but he doesn't say hello or anything. He just say's, "Oh no, not a dark one."
[51]
코베인 평전에 따르면 Nevermind 발매 전에 라이브로 공연했을 당시에는 관객들의 호응이 높아서 사실은 그도 이 노래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히트곡으로 떠오르고 자신이 화제의 중심이 되어 언론들의 먹잇감이 되자 이러한 원인이 <Smells Like Teen Spirit>의 지나친 히트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점차 이 곡을 부르기 싫어했다. 심지어 어떤 공연에서는 커트한테 <Smells Like Teen Spirit>을 부르지 않으면 공연을 취소해 버린다는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공연에서 Teen Spirit만 듣고 공연장을 나가는 사람들도 많아서 스트레스가 굉장히 심했다고. 다만 공연장에서 가장 반응이 좋은 곡이었기 때문에 말년에도 팬서비스 차원에서 종종 부르기는 했다고 한다. 물론 그럴수록 자기모순이 심해졌겠지만.
[52]
이 퍼포먼스는 영국 언론에서 '가장 반항적인 락 퍼포먼스'에서 2위에 랭크되었다.
https://loudwire.com/most-rebellious-tv-rock-performances/
[53]
사실 크리스가 코트니를 싫어하게 된 것에 가깝다.
[54]
데이브 그롤은 이미 너바나 시절부터 수 많은 자작곡을 가지고 있었다.
[55]
항문이 찢어진 사람, 붉은색 태아, 기이한 꼭두각시 등
[56]
이 때문에 혹자는 커트니 러브를 "그런지계의 오노 요코"라고 하기도 한다.
[57]
그러나 커트 코베인은 존 레논과는 달리 사회주의적인 신념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존 레논이 커트 코베인에 비해서는 사회주의, 구좌파 성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Working Class Hero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커트 코베인은
조 바이든과 같은 진보 자유주의 성향, 존 레논은
버니 샌더스와 비슷한 사회주의 성향이다.
[58]
단, 커트 코베인은 마약 중독으로 인하여 자신의 의지로 자살했고, 존 레논은 마약 중독에 의한
짐 모리슨,
시드 비셔스 등의 인물의 죽음을 비판하며 건강한 것이 최고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후 1980년 폴 매카트니의 McCartney II를 듣고 음악계에 다시 돌아오려는 의도를 보이며, 신곡을 작업하던 중 존의 정신나간 광팬인
마크 채프먼에게 잘못 걸려 참변을 당했다. 즉, 죽기 직전의 개인의 정신적 상태는 완벽히 정반대였던 셈.
[59]
그의 유서에 써 있는 문장으로 유명하지만, 본래는
닐 영의 《
Hey Hey, My My (Into the Black)》라는 곡의 가사 구절 중 하나이다. 닐 영은 상심한 나머지 코베인의 죽음 이후 한동안 이 곡을 공연에서 부르지 않았다. 애초에 이 가사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짧고 굵게 살고 가란 뜻으로 쓴 것이 아니라, 당시 섹스 피스톨즈의 리더였던 쟈니 로튼이 '로큰롤은 죽었다'고 말한 데서 비롯된 말이었다. 닐 영은 로튼의 그 말을 듣고서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단 차라리 한번에 불태우는 게 낫다. 왕은 죽었지만 잊혀지지 않는다.' 라는 가사를 쓴다. 왕은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말한다. 즉 저 가사는 애초에 죽은 사람을 기리는 '추모'의 뜻으로 쓴 것이었으니 닐 영이 죄책감에 비통해 할 만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