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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6.4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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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천안문 항쟁
六四事件 (육사사건)
1989 Tiananmen Square Protests
파일:tank man wide shot.jpg
▲ 천안문 6.4 항쟁을 상징하는 탱크맨
기간
1989년 4월 15일 ~ 6월 4일
지역
베이징시 중국 전역 400개 도시
원인
후야오방의 죽음, 인플레이션 부정부패 등에 따른 민주화 운동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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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5월 20일 ~ 1990년 1월 10일까지 베이징시 특정 지역에 계엄 실시[1]
• 민간인 및 군경 사상자 다수 발생
• 무력 진압에 대한 전국적 항의 시위 발생
• 시위 주동자 및 민주인사 망명 및 투옥
자오쯔양 실각[2]
장쩌민 중국공산당 중앙총서기 및 최고지도자로 승격
• 중국에 대한 제1세계 경제제재 및 무기 금수조치 실시
• 카나리아 작전(Operation Yellowbird) 실시[3]
• 경제 개혁 연기
• 미디어 통제 강화
• 표현의 자유 제한
• 정치 개혁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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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노동자자치연맹
대학생들
홍위병 일부 잔당[5]
공장 노동자들
중국 전역의 시민들
지식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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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중화민국 세력
중국공산당 내 일부 자유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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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시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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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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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탱크맨
• 자오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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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군인 10명, 경찰 13명[G] 218명[G]
2,600~10,454명[10]
천안문 6.4 항쟁
[age(1989-06-04)]주년
D[dday(1989-06-04)]


1. 개요2. 명칭3. 주도 계층
3.1. 베이징노동자자치연맹
4. 사진으로 보는 당시 천안문5. 배경 및 발단
5.1. 개혁개방이 불러온 사회적 모순5.2. 당내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5.3. 일당독재 및 빈부격차에 대한 반발5.4. 후야오방 총서기의 죽음
6. 진행7. 결과8. 천안문 6.4 항쟁의 구심점 3인방9. 그 외 유명한 시위 참여자와 피해자10. 영향
10.1. 국제적 제재의 타격10.2. 화교들의 동요10.3. 대만에 끼친 영향10.4. 교육, 문화적인 충격10.5. 정치적 영향
11. 언론의 보도12. 중국 지도부의 대응
12.1. 강경 진압 주장12.2. 온건 대응 주장
13. 각종 매체14. 평가
14.1. 중국공산당
14.1.1. 검열과 일반적인 중국인들의 인식
14.2. 중국 본토 중화권14.3. 여담
15. 관련 링크 및 문서16. 당시 뉴스 보도17. 여담18. 둘러보기1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주도로 1989년 4월 15일에 시작되었으며, 중국 정부의 군대가 유혈 진압하여 1989년 6월 4일에 진압된 항쟁이자 민주화 운동이다. 중국 본토에서의 마지막 민주화 운동이며 이것을 끝으로 중국 본토에서 다시는 민주화 운동의 '민' 자도 나오지 않고 있다. 본토가 아닌 곳을 포함하면 홍콩 민주화 운동이 마지막이다.

2. 명칭

학자들이 천안문 항쟁 혹은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공식 명칭은 아니다.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감안하여 한국에서도 거의 천안문 사태로 부른다. 따라서 언론에서도 거의 대부분 천안문 사태라고 언급한다. 일각에서는 천안문 사태라는 명칭이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쓰인다고 비판한다. 일본에서는 주로 천안문 '사건'이라 칭하며 앞에 간혹 六四 또는 1976년과의 구별을 위해 2차를 붙인다.

강경 반중 인사들은 피의 일요일, 천안문 대학살(Tiananmen Massacre) 등으로 부른다. 다수 학자들은 '1989년 톈안먼 광장 항쟁(Tiananmen Square Protests of 1989)'이라고 부른다.[11] 1976년 천안문 사태와 구분하는 뜻으로 '제2차 천안문 사태'라는 명칭도 제법 알려져 있다.

중국 정부 당국에서는 과거 '반혁명폭란'이라고 칭했으며, 이후 공산당 역사결의를 통한 현재 공식 입장은 '1989년 춘하지계 정치풍파'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철저한 검열을 통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취급하기 때문에, 외교부에서 외신 기자들의 관련 질문에 대응할 때도 "이미 정론이 나온 사안"이라며 직접적인 언급 자체를 거부한다.

중국 관변학자들은 '톈안먼 광장 사건(Tiananmen Square Incident)'이나 '6.4 사태(June Fourth Incident)'라는 용어를 쓴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할 때에는 '1989년 반정부정치폭란'이라고도 한다. 또는 공산당의 당론을 따라 '1989년 춘하지교 정치풍파'라는 보다 순화된 표현을 쓰기도 한다. 중화권에서는 유혈 진압이 일어난 6월 4일에서 따와서 '류쓰(六四)', '육사사건(六四事件)'이라고 부른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六四를 그대로 썼다가는 바로 검열을 받아서 그런지 5월 35일, VIIV, , 8964 등 다양하게 부르는 모양이다.

3. 주도 계층

不自由毋宁死
LIBERTY or DEATH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12]
All power belongs to the people.
모든 권력은 인민의 것이다.[13]
反官僚, 反腐, 廉潔的中國共產黨萬歲!
반관료, 반부패, 청렴한 공산당 만세![14]
杜絶權力腐敗和腐敗! 確保機會均等!
권력 비리 부정 부패를 척결하라!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라![15]
人民不會忘記
인민은 잊지 않는다.[16]

지식인들, 대학생들이 주도했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계각층의 시민들도 많이 참여했다. 그들 중에는 상인, 노동자, 언론인, 의사, 교사, 대학 교수, 심지어는 공안, 법조인, 공무원도 있었으며 적게는 9살짜리 아이에서 많게는 백발의 노인까지 참여한 범대중적 평화 시위였다.

3.1. 베이징노동자자치연맹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천안문 항쟁 당시의 주요 노동단체는 “베이징노동자자치연맹”(Beijing Workers' Autonomous Federation, 중국어 약칭 공자련)이라는 노조였다. 이전의 당이 통제하던 어용노조 같은 것이 아닌 노동자의 실질적인 권리와 공산당 권력을 감독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 중국 최초의 독립 노조였다. 노조는 6월 3일 중국 공산당 군대의 유혈 진압에 당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자율노조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는 Walder와 Gong의 피인용수 168회 가량의 논문이다.[17] #

노조는 1989년 5월 19일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까지는 민주화 운동에서 눈에 띄지 않았다. Walder와 Gong은 노조가 격변의 결과로서 성장할 수 있었음을 언급한다.
10년 전 폴란드 노동자 운동의 관점에서 볼때, 공자련의 정치적 의미는 실로 제한적이다. 사건 직후에 작평된 평가에서 우리는 공자련이 원인보다 격변의 결과임을 관찰했다. 그들은 훨씬 더 큰 학생 운동, 정부의 분열, 그 결과로서 만들어진 정권의 정치 기구의 마비로 인해 형성된 정치적 공간을 사용하는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18]

그런 이유로 공자련은 5월 19일 계엄령 선포 이후로 급성장을 할 수 있었는데 계엄령 기간 내내 투쟁하며 함께 주장된 성명과 전단 등에서는 우리가 국가주인이며, 소수의 타락한 국가와 노동계급이 우리의 이름을 빼앗고, 학생들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살해하고, 인권탄압을 하는 것을 용납해선 안된다는 주장, 200주년을 앞둔 프랑스 대혁명에 비유하여 바스티유 습격을 촉구하는 주장, 파시스트 정부와 스탈린주의 체제를 타도하자는 주장, 자유와 민주주의 아래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 "스탈린주의의 마지막 요새인 20세기 바스티유를 휩쓸어라", "덩샤오핑을 몰아내야 한다"와 같은 주장들이 적혀 있었다.[19]

군대의 진압 직전인 1989년 6월 3일 당시까지 2만 명 가량의 노조원을 보유했었다. 1989년 6월 4일 광장에는 150여명의 노조원이 있었고 뒤이어 이어진 진압과 체포로 그 회원 대부분이 몰살되었다.

Walder와 Gong은 공자련과 학생들은 노동권을 중시하는 공자련, 이념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학생층의 차이와 갈등 때문에 두 집단은 제대로 협력할 수 없었음을 언급하며, 학생, 지식인 그리고 노동자 간의 장벽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중국의 민주화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공자련의 지도자는 한둥팡(Han Dongfang)이라는 노동운동가였는데 그와의 인터뷰에서 공자련을 엿볼 수 있다. #

항쟁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는 물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운동이 시작된 날인 4월 16일, 2~3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왜 후야오방이 죽어야 했는지, 어째서 내부 민주주의가 없었는지, 무엇이 민주주의인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민주주의를 독립적인 의미로서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의 민주주의'와 같이 항상 다른 개념에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바는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어 민주라는 단어는 “민중이 주인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노조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 노동자들에게 남긴 공포의 흔적과 학생들과의 연대도 언급한다.
5월 하반기, 17일 23일 28일에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많은 노동자들이 서로 다른 공장에서 트럭과 깃발을 가지고 광장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접근하여 노조에 들어올 수 있는지 물었을 때, 그들은 한 걸음 물러서며 단지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왔고 복잡한 상황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문화대혁명 이후의 공포의 흔적이었습니다. 반혁명적인 개인으로 낙인찍히는 것보다 반혁명 조직의 일원으로 간주되는 것은 훨씬 더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개인으로서 시위에 참여하여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습니다. 6월 1일 혹은 2일 경에 왕차오화(Wang Chaohua)를 비롯한 몇몇의 학생들이 토론을 위해 우리 텐트로 왔습니다. 그들은 학생 동원이 탄력을 잃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어떻게 조직될 수 있는지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학생들이 이것에 대하여 우리와 이야기 한 것은 처음이었고 저는 매우 고무되었습니다.

6월 4일 탄압에서의 일화에서 공자련과 한둥팡에 대한 이미지를 엿볼 수 있었다.
6월 3일 밤 11시 30분경, 15~20명의 젊은이들이 나를 찾으러 왔습니다. 내 동료들이 그들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내 밀치고 들어와서 내가 그들과 함께 가야하며, 여기서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소개하지 않고서 내가 여기서 머물러선 안되며 나를 폴란드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 레흐 바웬사에 비유했습니다. 물론 나를 그렇게 여겨줘서 좋았지만 내 목숨이 다른 이들의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망치는 것은 부끄러운 행동이었습니다. 나는 머무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떠났지만 5분 뒤에 다시 돌아와서 그 중 한명이 말했습니다 “실례지만 같이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임무이며 당신의 운명입니다.” 아주 강한 친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손짓했고, 그 중 몇 명이 나를 태우고 텐트 밖으로 이동했습니다. 군대는 서쪽에서 이동중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총알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둘러싸고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북서쪽 구석에서 우리는 불타는 탱크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공안 본부를 지나 베이징 호텔을 지나쳤고 그곳에서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한손으로 자전거를 타고 동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가 새벽 1시경이었고 내가 살던 곳인 장안가 동단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제 도시를 떠나십시오. 우리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광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말하곤 사라졌습니다. 나는 그들이 살아남았는지, 부상을 입었는지, 감옥에 갔는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4. 사진으로 보는 당시 천안문

파일:external/www.abc.net.au/students-protest-and-pay-their-respect-to-reformist-leader-hu-y-data.jpg

천안문 광장에 모여 적기를 내건 시민들의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칭화대, 난카이대(南开大学) 등의 대학 깃발도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대학생들로 보인다. 또한 멀리서 후야오방의 영정도 보인다.

파일:external/i2.cdn.cnn.com/140527041719-tam-goddess-2-horizontal-large-gallery.jpg

1989년 4월 말부터 계엄령이 선포된 5월 20일까지 천안문 광장에는 2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민주화와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단식투쟁에 참여했고, 이것에 자극받은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점점 몰려들기 시작했다.

뒤에는 1937년 소련에서 조각된 '노동자와 여성 콜호즈 대원'을 모방한 '민주주의의 여신상'도 보인다.

파일:external/92729bad844bace09d4d7092b2f5c832f7b639071ca5a08665fb5fae6f4fbae8.jpg

베이징시 공안들도 시민과 학생의 민주화 시위를 지지한다는 뜻에서 상당수 행렬에 참여하기도 했다.

파일:GettyImages-52010891.webp
1989년 5월 18일, 학생 시위대와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법복을 입은 베이징 법관들의 모습이다.[20] #

파일:external/inapcache.boston.com/bp6.jpg

학생 시위대는 인민해방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연이은 단식시위와 군중시위로 녹초가 된 상황이었다.

파일:external/globalasiablog.com/lSzvWLU-2kz1lpo.jpg

그리고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향해 포신을 겨누며 광장으로 들어왔다.
"피해는 최소화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봐라!"
덩샤오핑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총리 리펑에게 무력 진압 명령을 내리면서 남긴 말이다. 리펑 본인의 회고록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5. 배경 및 발단

5.1. 개혁개방이 불러온 사회적 모순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집권했으나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을 수습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결국 //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덩샤오핑이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화궈펑을 밀어내고 대권을 장악하였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을 청산하고 개혁개방을 추진하였으나, 개혁개방 초기에 있었던 개혁 조치는 여러 불만을 야기하였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를 공산주의에 도입하면서 민영화와 자율화로 인한 이권 때문에 하급관료의 부패는 날이 갈수록 커졌으며, 초유의 인플레이션과 더불어 실업 문제도 가중되었다. 특히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지방정부와 기업에 자율권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창업에 뛰어들고, 그 결과 1980년대 말 기준으로 약 3천만명 가량이 완위안호(만원호, 万元户)라고 볼리는 신흥 부유층으로 등극하면서,[21] 우호상점( 외화상점)의 매출액과 점포수는 급속히 늘었으며, 1970년대까지 일부 지역에서나 보던 사치품 취급이었던 텔레비전도 방송권역을 확대함과 동시에 대중화가 진행되기 시작했고, 또한 청바지와 원피스같은 (당시 중국 서민들 입장에서) 사치스러운 옷들이 유행하기 시작하는 등,[22] 중국의 경제력은 급속히 상승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꽌시라고 불리는 부정부패가 발생하였고 개혁개방의 과실은 당간부 및 그들과 결탁한 소수, 부유한 기업인들이 차지하면서 도농격차 및 빈부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마오쩌둥 시기 내내 물가상승률이 연 평균 1% 이하에 그칠 정도로 물가는 안정되었는데, 경영자율화와 외자기업의 대규모 진출에 따른 경기과열과 수출활성화를 위한 고환율정책으로 통화수요가 급속히 늘어나며 1985년에 물가상승률이 9.3%로 치솟아 물가상승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1988년도에는 물가상승률이 18.8%로 두자릿수대로 올라서며 국공내전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천안문 항쟁이 벌어진 1989년에는 18.0%를 기록하여 임금생활자들 사이에서 물가상승에 대한 불만이 나날히 높아지고 있었다.

여기에 그동안 사람들을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옥죄던 철권통치를 완화하고 사회적 분위기를 느슨하게 옮기자, 그동안 억눌렀던 데 대한 반작용이 일면서 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자 덩샤오핑은 다시 강경노선으로 돌아서서 1983년부터 " 엄타(嚴打:준엄하게 처벌한다)"를 모토로 반부패운동을 포함한 중국판 범죄와의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 당시 웬만한 범죄는 모조리 사형선고를 받았고, 체포에서 처형까지 이르는 시간도 1주일로 단축되었다. 엄타 기간 중에 처형자 수는 1년에 2만 명에 달한다는 설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강력-신속한 처벌도 형사범죄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부정부패는 전혀 다스릴 수 없었다. 특히 엄타운동 속에서도 부정부패를 저지르던 당간부들과 유력자들은 빠져나가면서 오히려 꽌시와 유전무죄 무전유죄만 부각되었다. 당연히 겉으로 표출하지는 못했지만, 공산당에 대한 불만들은 계속 쌓여만 갔다.

5.2. 당내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

1988년 5월 30일에 중앙정치국이 확대회의를 소집해서 가격 개혁과 임금 개혁 시행이라는 '난관 돌파책'을 결정했다. 이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따라 높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후 당내의 개혁에 관한 의견이 명확히 갈렸다. 정국은 덩샤오핑의 지지 아래 더 강력한 개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서 지속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자오쯔양 당 총서기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와 덩샤오핑과 동급의 권위를 가졌다고 평가되는 천윈의 지지 아래 개혁을 잠시 멈추고 정비와 조정을 통해서 체제내부 통솔에 힘써야 한다는 리펑 국무원 총리 등의 보수파로 나뉘었다.

그러던 중 리펑은 국무원 총리로 취임한 뒤 1988년 9월 공산당 13기 3중 전회에서 "경제 환경을 정비하고 경제 질서를 조정하고 개혁을 전면 심화하자."라는 정책 조정안을 제기했는데, 이것은 표어와는 달리 사실상 자오쯔양의 개혁 노선을 수정하고 나아가 개혁파의 영향력을 줄이겠다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는 내용이었다. 중앙당의 이 결정으로 사회 전반에서 보수파의 부상에 대한 염려와 우려가 일어났다.

5.3. 일당독재 및 빈부격차에 대한 반발

4인방의 실각 이후, 공산당 내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강력한 성찰이 일었다. 그 결과 문화대혁명의 재난이 중국의 일당독재 정치 제도에서 온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사회 전반에서 사상 해방을 요구하고 민주화를 추진하고 정치개혁을 하자는 목소리가 줄곧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에 실망한 대중들은 서서히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을 실시한 중국 정부에 대한 대중들, 특히 대학생 층의 불만이 늘어났다.

여기에 개혁개방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외국의 문물을 보고 대중은 각성하기 시작했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다당제를 보장하고 자유를 확대하는 조치를 내놓는 등 이런 사회적 배경 하에 학생과 시민들은 중국공산당전면적인 민주화 조치대대적인 부정부패 척결을 주장하며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학생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마오쩌둥 시절에는 대학 등록금과 기숙사비, 식비 모두 무료였는데 개혁개방 이후 대학이 기숙사비와 등록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집안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던 대학생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만 갔다. 당시는 개혁개방 초기였지만 벌써부터 부동산 투기와 같은 막장 자본주의 행각으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대다수는 개발 정보를 독점하고 있던 부정부패한 관료들 혹은 관료의 친인척이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눈에 띄게 늘어나자 대학생들은 점점 정부에 사회정의를 요구하게 되었다.

5.4. 후야오방 총서기의 죽음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은 죽고,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 않네.
야오방은 이미 죽었고, 좌파가 또다시 번성하니, 국민이여 깨어나라, 투쟁을 잊지 말라.
베이징대학의 대자보
덩샤오핑의 심복이었던 후야오방 당총서기는 이러한 민주화 요구에 매우 동조적이었다. 이전부터 후야오방은 당 고위 간부들과 그 친인척의 부패에 재갈을 물리려고 해 원로들이 불만을 가졌는데, 민주화 요구에 동조적인 것에 원로들이 반발한 것을 계기로 1987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23] 이 자리를 덩샤오핑의 다른 심복이었던 자오쯔양[24]이 이어받았다. 자오쯔양도 후야오방과 마찬가지로 개혁파였지만 학생운동은 더욱 격렬해졌고, 전국 각지의 대학교에서는 민주화 서클이 활발히 활동하였다. 마치 198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의 대학교들과 비슷한데, 실제로 당시 시위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우얼카이시 둬라이티는 대한민국의 1987년 6월 항쟁이 천안문 6.4 항쟁의 표본이었다고 술회했다.

4월 18일 왕단과 궈하이펑은 학생운동을 대표하여 정부에 다음의 7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1. 후야오방의 업적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자유, 민주주의, 중용에 대한 그의 견해가 옳음을 인정하라.
2. 영적 오염과 자유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잘못됐음을 인정하고,[25] 그 때문에 박해받은 사람들을 복권하라.
3. 국가 지도자와 그들의 가족의 소득을 공개하라.
4. 민간 언론을 허용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
5. 교육 자금을 늘리고 지식인의 급여를 인상하라.
6. 시위를 제한하는 베이징 인민대표회의의 위헌적 10조를 폐지하라.
7. 잘못된 정책 결정을 내린 정부관료들을 교체하기 위해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고 이 요구사항들을 언론을 통해 온전히 보도하라.[26]
1989년 후야오방은 정치국 회의 도중 발언을 막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4월 15일에 사망했다. 후야오방의 사망을 기점으로 베이징에서는 지식인들과 대학생[27],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하여 민주화 요구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는 단식투쟁으로 시작하여 그 모습에 자극받은 각계 각층의 시민들이 참여하고, 마침내 전국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천안문 광장에는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의 미래를 결정한 천안문 6.4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6.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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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결과

천안문 6.4 항쟁 일주일 뒤, 시위를 주도한 자들에게는 당초 약속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뒤집고 대거 수배령이 떨어졌다. 특히 다수의 학생 시위대를 겨냥한 21명의 블랙리스트가 중국 언론 매체에 퍼졌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 시기에 잡혀들어가 중형을 언도받거나 국외로 추방되었고, 혹은 외부 세력의 도움을 받아서 국외로 망명했다.

이들을 돕기 위한 망명 작전 중 하나가 바로 ' 카나리아 작전'이었다. 카나리아 작전은 서방 국가나 대만 등 중화권 시민들과 민주화에 찬성하는 일부 중국 시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많은 수의 해외 인권운동가, 저널리스트, 중국 학자들과 뜻있는 시민들이 이 시기 반체제 지식인들을 위해 비자를 발급해주고 비행기나 배 등의 수단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도왔다.[28] 후술할 시위의 구심점 3인방인 왕단 우얼카이시 둬라이티, 차이링 또는 시위의 상징이 된 탱크맨 등이 이 작전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8. 천안문 6.4 항쟁의 구심점 3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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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수배 1호였던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1학년 왕단(王丹)은 1991년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1993년에 가석방되었지만 1995년에 체제 전복 기도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고 1996년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다. 1998년에 빌 클린턴의 요청으로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질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망명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만의 국립타이완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교단에 서게 되었다. 동오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참고로 미혼이며, 친중단체에서는 이걸 빌미로 동성애자가 아니냐며[29] 시비를 걸기도 했다. 더불어 덩샤오핑의 강경진압은 사정없이 비판하지만, 경제정책에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면을 보였다. 그리고 2017년 6월에 대만 내 활동을 마치고 미국으로 복귀하였다. 2019년에는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 2022년 11월에는 자신이 대만 타이베이에 있음을 밝히며 제로 코로나로 인한 병폐를 시작으로 발발한 시위를 '백지혁명(白紙革命)'이라고 일컬으며 행동 요령 등을 소개하였다. #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의 시위 언급(중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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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수배 2호였던 베이징사범대학 대학생이자 위구르족 출신인 외르케시 될레트(ئۆركەش دۆلەت/Örkesh Dölet),[30] 중국어명 우얼카이시 둬라이티(吾尔开希·多莱特)는 상당한 강경파로 학생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리펑 총리가 직접 찾아오자 그에게 대화 주제는 자신들이 정할 것이니 듣기만 하라는 식의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며, 조영남 교수는 이를 '건방진 태도'였다고 표현했다. 시위 이후 홍콩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지만[31] 졸업은 하지 못했다. 이후 대만에서 거주하며 라디오 DJ와 작가 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 여러 번 홍콩을 거쳐 고향에 있는 부모님을 찾아보려 했지만, 중국 정부의 거절로 번번히 실패했다. 이후 2016년 군소 정당 소속으로 제9대 대만 입법위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위구르족이면서도 근현대 중국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족적을 남긴 흔치 않은 사례인데 이걸 뒤집어 보자면 위구르족이 다른 한족과 함께 중국이라는 나라의 미래를 향해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물론 중국 정부 입장에선 그저 반체제 집단의 일원이라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하나의 중국에 걸맞은 인물인 셈이다. 여담으로 시위를 이끌 당시에는 제법 잘생긴 대학생이었던지라 연설을 하는 자리마다 여자들이 눈을 부릅뜨는 수준으로 집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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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사람과 더불어 3인방이라고 불린 베이징사범대학 대학원생 차이링(柴玲)은 사태 직후 배를 타고 홍콩 프랑스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에서 하버드 대학교 MBA를 졸업하고 미국의 컨설팅회사 '베인 & 컴퍼니'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미국에서 미국인과 결혼한 차이링은 남편과 함께 '젠제이버(Jenzabar)'라는 교육용 소프트웨어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망명 후 세 아이의 엄마인 차이링은 미국에서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로 살고 있다. 차이링은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미국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류샤오보와 나는 천안문에 탱크가 밀려들 때 마지막까지 같이 서있었다"며 "기념비적인 일이며 노벨위원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차이링은 현재 '올 걸스 얼라우드(All Girls Allowed)'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중국의 강제낙태와 여아(女兒) 인권문제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차이링은 미국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중국에서 매일 3,500여 명의 여아가 강제낙태되고, 500여 명의 여성이 자살을 선택한다"며 중국의 여성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2012년에는 학살의 주범인 덩샤오핑 리펑, 그리고 천안문 광장에 쳐들어온 군인들 모두를 용서한다고 밝혔다. 차이링 스스로가 기독교적 신앙에 따라 원수를 용서하겠다는 취지인데 당연히 왕단 우얼카이시 둬라이티 등 다른 중국 민주 진영에 항의를 받자 개인적인 용서일 뿐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9. 그 외 유명한 시위 참여자와 피해자

바둑기사 장주주 九단 역시 장주주가 민주화 요구 피켓을 들고 “기수”에 섰다는 이유로 수배령을 받았다. 이에 장주주와 연인 루이나이웨이는 1989년부터 한국기원에 오게 되는 1999년까지 홍콩, 대만, 일본, 미국을 거치며 중국공산당의 감시를 피하는 도피생활을 하였다. 1992년 제2회 응씨배 때는 장주주 루이나이웨이한테 참가권을 줬다는 이유로 중국 바둑기사들이 단체 기권을 할 정도로 마찰이 컸다. 참고로 이 대회에서 루이나이웨이는 여자기사로 최초로 세계 바둑대회 4강에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32]( 오타케 히데오 九단한테 패해서 결승행은 실패했다.) 1993년에 4강전 종료 직후 장주주 - 루이나이웨이는 결혼을 하였다. 1999년에 한국에 정착하였다가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루이나이웨이가 중국 국적 대표로 참가하게 된 것을 계기로 후진타오 중국 주석 2011년 특별사면했다. 루이나이웨이가 먼저 2011년에 중국으로 귀국하고, 장주주는 2012년에 중국으로 귀국했다.

중국공산당에서는 시위대를 진압한 인민해방군 측의 공로를 치하하며 인민해방군 1천 명이 희생되었으나 시위대는 27명이 죽었다고 당초 보도했었지만, 이후에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에 의하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인민해방군과 무장경찰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다만 뉴욕 타임스에서는 400명에서 800명, NSA에서는 약 1천 명, 중국적십자에서는 2,600명, 시위대의 주축을 이룬 학생들은 7천 명이 넘게 죽었다고 하며, 부상자 수는 진압에 나선 중국 인민해방군을 포함해 약 7천 명에서 1만 명으로 추산된다. 한편 천안문 6.4 항쟁 피해자 유가족 모임인 '천안문 어머니회'에 따르면 현재까지 확인한 사망자는 203명이었고, 이들 중 초~중학생이 14명이었으며, 최연소 희생자는 9세, 최고령 희생자는 66세였다고 한다. #

정치권에서는 무력 진압 명령을 하달한 총리 리펑 덩샤오핑을 이을 후계자로 부상하는 듯했으나, 정작 덩샤오핑은 당시 상하이 시장이었던 장쩌민을 중앙 정계로 진출시키고 실제로 후임 주석으로 취임하게 된다.

천안문 6.4 항쟁에 참여한 정치범 가운데 마지막까지 복역한 먀오더순이 27년 만인 2016년 10월 15일에 출옥한다고 보도했는데 석방 일시를 공식 확인해 주지는 않았다.

2018년 12월 13일에 당시 정부 대변인으로서 터무니없는 축소 발표로 거센 비난을 받았던 위안무(袁木) 전 국무원 연구실 주임이 사망했다. 이후 인민해방군 내에서도 유혈 진압에 저항해 징계받은 인원이 사병 중에서만 1천 명 단위로 있었다는 내부 문건이 폭로되었다. 탄을 허공에 다 쏴 버리고 빈 총 들고 다니다 걸린 인원, 총기를 일부러 고장내다 걸린 인원, 못 본 척 하거나 빠져나갈 길을 트여주다 걸린 인원, 아예 무전을 꺼놓고 버티다 걸린 인원, 그냥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하고 흐느끼며 울다가 걸린 인원, 일부러 제 발에 총 쏘고 후방으로 후송되다 걸린 인원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2023년 7월 3일. 당시 당국과 학생 시위대 간 중재에 나섰던 옌밍푸 전 중앙통일전선부(통전부) 부장이 사망했다. #

2024년 1월 25일. 계엄군 총탄에 맞아 한 쪽 다리를 잃은 중국 인권운동가 치즈융(齊志勇)이 6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10. 영향

개혁, 개방 개시 이후 서구와 일본 등의 선진국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경제 성장을 꾀하던 중국공산당에게는 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큰 충격을 몰고 왔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먼저 선린우호 전략을 내세워서 아시아의 주변 국가와 국교를 맺는 전략을 취했다. 1992년의 한-중 수교도 바로 이러한 중국 전략 변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내부적으로 중국은 국가 내 사회영역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국내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며 체제 안정과 제도의 정비를 국내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게 된다.

10.1. 국제적 제재의 타격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들은 이 사건을 비인도적인 민주주의 탄압 행위로 규정하고 비난 성명을 냈다.[33] 미국은 먼저 정부 및 민간의 대중 무기수출 중지와 양국 간 군사 관계자들의 상호방문 정지를 첫 제재 조치로 내세웠다. 그리고 재미 중국인 유학생들의 비자 신청을 연장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무력진압으로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국제적십자를 통한 의료 원조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힌 한편, 이 제재가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추가로 6월 23일 미국 의회에서 컴퓨터, 무기, 인공위성의 수출을 대폭 삭감하고 동시에 융자의 감축을 요구하는 수정방안이 제출되었다. 또한 국제무역에서 중국의 최혜국 대우(MFN) 지위를 인권 문제와 연계하며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을 때는 최혜국 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였다.[34] 그러나 미국은 향후 미중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유럽권에서는 프랑스가 가장 먼저 대중 제재에 나섰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 축제의 열기가 뜨겁던 6월 6일, 프랑스의 로카르 총리가 프랑스 정부와 중국 지도층의 접촉을 필두로 모든 차원의 대중 접촉을 동결시켰다고 발표했다. 이후 중국 주재 모든 프랑스 외교관들의 수도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감축할 것을 표명했고, 7월 13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G7 정상회담에서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 등의 지도자에게 중국을 격렬히 비난하고 대중제재를 위한 공동 보조를 제의했다. 프랑스는 이외에도 티베트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나라라서 중국은 프랑스를 여전히 좋게 보지 않는다.

일본은 소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일단 일본은 대 중국 원조국가 중 가장 큰 규모의 원조를 제공한 나라라는 경제적인 문제가 컸으며, 향후 중일관계에서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적극적인 제재는 피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제적인 지위도 있고 해서 형식적으로나마 제재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강력 제재에는 반대표를 냈고, G7 정상회담 이후 자국민의 중국여행금지 경보를 풀었다. 1988년 8월에 발표한 8,100억 엔(당시 58억 달러)의 대중 차관을 유보한다는 발표를 했지만, 중국 정부와의 실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차관 유보는 일시적인 것이며 정치적 자유가 허락되지 않더라도 중국의 경제자유화 계획이 부활되면 원조를 재개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그리고 1990년 11월 2일 차관 공여를 정식으로 시작했다.

세계은행은 가장 혹독한 제재를 가했다. 6월 8일 세계은행은 서방 세력의 압력을 수용해서 중국에 대한 7억 8,000만 달러의 차관을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개혁 개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1981년 이후 세계은행이 중국의 가장 중요한 융자기관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대단한 수준의 제재였다. 8년 동안의 차관 총액이 약 85억 달러로, 1/3이 농업, 나머지가 교육, 문화, 그리고 사회복지에 사용된 것을 감안하면 이 차관의 유보가 중국 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세계은행은 12월 4일 이사회에서 중국 경제개혁 프로젝트에 1억 달러의 융자를 결정하고 대중 융자규제를 사실상 전면 해제했다.

천안문 6.4 항쟁 진압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1982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고성장세에 접어든 중국의 경제가 1989년에 성장률이 4.2%, 1990년에 3.8%로 떨어지며 성장세가 확연히 꺾였기 때문이다. 이에 덩샤오핑은 돌파구 중 하나로 한국의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리펑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여 남한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안에 중국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며 만약 북한이 동참하지 않으면 중국은 남한의 단독 유엔가입을 지지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내게 된다. 이에 기겁한 북한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에 찬성으로 선회하였으며 이후 중국은 한중수교까지 단행하면서 한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급속도로 개선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91년을 기점으로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다시 상향곡선을 그리면서 경기침체에서 벗어났고, 특히 1992년부터 1995년까지 4년 연속 10%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큰 영향에서는 벗어나게 되었다.

10.2. 화교들의 동요

전 세계의 화교, 특히 당시 영국령 홍콩에 거주하던 화교들에게 큰 충격을 던진 사건인데,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에 기대를 걸었던 많은 중국계 홍콩인들이 홍콩의 중국 귀속에 회의적으로 변해 한때 영국, 미국 등 외국으로 이민을 간 홍콩인들이 대폭 증가하기도 했다. 중국공산당의 무력 진압을 봤던 홍콩인들과 싱가포르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기존에 중화권 내부에서 중국공산당에 대한 인식은 그래도 공산당이기에 앞서 같은 중국인이라는 것으로 설마 학생들을 상대로 유혈진압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이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낙관은 1989년 6월에 산산이 부서졌다. 홍콩 반환을 앞두고 1989년 1월에 이루어진 설문조사에서 홍콩 시민의 75%는 홍콩의 미래에 대해서 낙관한다고 답변했으나 유혈진압이 일어나기도 전인 1989년 5월에 52%로 급감하였고, 유혈진압 이후 벌어진 설문조사에서 37%의 응답자가 즉각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고 답변하거나 외국에 영주권을 가진 가족이 있다고 답변했다. 1989년 1월까지 같은 응답을 한 시민들은 29%에 불과했다. 또 다른 조사에서 홍콩 시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55만명이 이민을 고려하고 있으며 전문직, 기업가의 64%는 홍콩을 떠나려 한다고 나왔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천안문의 학생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고 콘서트를 열고 돈까지 보내준 홍콩에 공격적으로 주목하였다. 인민일보는 홍콩 언론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베이징 시장 천시퉁은 전인대 상무위원회에 홍콩을 독점자본주의자들의 조종을 받는 반혁명의 본산이라고 지목하는 보고를 올렸다. 1989년 6월 11일, 장쩌민은 일국양제를 거론하며 홍콩인들에게 감히 대륙에 간섭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8년만 있으면 영국은 떠날 것이고 코앞에서 중국공산당이 주먹을 흔들어 보이자 홍콩 시민사회는 공포에 질렸고 이 시점을 계기로 해서 홍콩 시민사회와 중국 민주화 운동 집단의 연계는 상당수 붕괴되었으며 홍콩 언론과 기업들은 반중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게 되었다.[35]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베이징 올림픽을 거치면서 상황은 좀 낙관적으로 되는 듯 했지만 2010년대 시진핑 집권 이후 현재는 시궁창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10.3. 대만에 끼친 영향

당시는 대만에서도 한창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던 상황이었다. 또한 대만이 장징궈 후반기부터 국제적인 고립이 심화되면서 대만의 생존을 위해서 민주화 작업에 대해 언급되기 시작했고, 1987년 7월을 기점으로 대만 계엄령이 철폐되고 1988년 리덩후이가 총통으로 등극하면서 계엄령 철폐와 언론통제 폐지, 야당[36]의 허용 등 정치개혁과 민주화 조치가 시행되며 자유화 조치들이 하나하나 실현되기 시작했고, 그 이전까지 철저하게 언급이 금기시되었던 2.28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에 대한 논의도 이때부터 본격화되었으며[37] 동시에 중국에 대한 유화책도 어느 정도 쓰면서 대만 기업들이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대만과 중국간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활발해지면서 통일 여론도 어느 정도 존재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이 대만처럼 민주화 과정을 밟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며 중국과의 통일에 대한 회의론이 커졌다. 또한 당시 대만 야당에서 대만독립을 지지한 민주진보당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통일에 찬성하는 사회민주당과 노동당, 공당도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대만 내에 성장하는 노동운동을 바탕으로 세를 갖추려고 했지만 애초부터 민진당에게 지지율에서 밀리던 차였는데 천안문 6.4 항쟁까지 겹치며 거대정당으로 성장하지 못하며 결국 이들 정당 중 사회민주당과 노동당은 기존 국민당내 외성인계가 빠져나와 창당한 신당에 사실상 합병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신당도 얼마가지 않아 지지기반을 쑹추위와 그의 정당인 친민당에게 빼앗기고 현재는 군소정당 신세로 전락했다.

어쨌든 이로 인해서 중국과의 통일을 반대하는 민진당의 파이가 압도적으로 커진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민진당이 가장 먼저 창당된 정당이고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제2정당 자리를 차지했지만 천안문 항쟁 6개월 후에 치러진 국민대회 입법회, 지방 동시선거에서 민진당이 약진하며 민진당의 입지는 굳건해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리덩후이가 대만독립론을 내세우게 된 것도 천안문 항쟁의 영향이 없지않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타이완 독립운동 지지자들은 천안문 6.4 항쟁을 통일반대론의 단골 레퍼토리로 쓰고 있다.

한편으로 천안문 6.4 항쟁은 대만의 민주주의 정착에 큰 도움이 되었는데, 비록 1980년대 후반에 민주화 조치가 단행되었다지만 여전히 국민대회와 입법원은 전면적인 총선거가 진행되지 않고 1947년도와 1948년도의 선거에서 뽑힌 의원들이 종신의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등의 부조리가 남아 있었는데 이를 하나하나 혁파시킬 수 있는 동력 중 하나가 중국과 어떻게든 차별화를 해야 했다는 점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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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4일, 천안문 6.4 항쟁 30 주년을 맞아 대만에는 풍선으로 탱크맨을 재현하는 작품이 전시되었다.

10.4. 교육, 문화적인 충격

천안문 6.4 항쟁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학문과 예술의 자유 부흥 움직임이 거셌다. 문화대혁명 이후 당시 세태를 고발하는 작품들이 여론에 힘입어 개혁 개방의 물결과 더불어 쏟아져 나왔다. 1986년~1988년에 걸쳐 철학, 문학서들의 출판이 이전에 비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독립적인 신문 잡지도 몇 개씩 발간되었다. 또한 문화대혁명에 대한 진상규명 논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이 시위대를 무력진압하고 권력을 공고히 확립한 후 이 사건을 자유화에 영향을 받은 반체제 무리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날조해서 대학생들의 사상교육을 강화하는 전국적 운동을 실시했다. 먼저 1989년에 졸업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2주 동안의 정치수업을 의무적으로 참여시켜서 정부의 데모진압의 정당성을 주입시키고, 각 대학에서 학생들을 소수 그룹으로 나누어 시위대가 인민해방군을 공격했을 때에만 강제진압이 이뤄졌다는 내용의 영상을 의무적으로 시청하게 했다. 또한 시위 주동자들의 많은 수가 대학생인 것을 감안해 1989년~1990년에 입학하는 대학 신입생을 3만 명이나 감축시켰다. 이 삭감조치는 먼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대학이자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던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주로 시작되었다. 베이징대학의 신입생은 천안문 6.4 항쟁 이전에 2,100명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사건 이후 고작 784명으로 대폭 감축되었다. 특히 학생운동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철학, 역사, 국제관계 및 행정학 전공자인 것을 보고 4개 학과에게 아예 신입생의 선발을 중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신입생들에게는 엄격한 군사훈련과 공산주의 이론 교육을 실시했다. 1990년 베이징대학 신입생들은 1년동안 스좌장의 육군학원에서 혹독한 군사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았고, 톈진시, 상하이시, 시안시 등에 소재한 학교에서도 8주 동안의 군사훈련이 의무적으로 부과되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여신상'을 제작한 중국예술학원 역시 탄압을 받았다. 1989년 여름에 졸업한 모든 학생들은 도시에서의 취직이 허가되지 않았고 적어도 1년동안 농촌과 공장에서 일하며 정신개조를 당했다. 학생들은 당 관료에 의해 사상검증이 실시되고 그곳에서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평가받았다고 한다. 이미 졸업해서 직장에 다니던 학생들도 공장, 광산, 농촌 등으로 보내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천안문 6.4 항쟁 1주기에 베이징대 전체에 경찰의 통제가 시작되었는데, 무언의 시위차원에서 기숙사 전체에 촛불이 켜지고 일부 학생들은 창 밖으로 작은 병을 던져 깨뜨렸다고 한다. 이유는 '작은 병'이 중국어로는 '샤오핑(小瓶)'인데, 이게 학살의 주범인 덩샤오핑을 연상시킨다는 것 때문이었다.

출판물에 대한 탄압도 철저히 진행되었다. 지명수배자 리스트에 올라간 지식인들의 저작과 자유사상을 포함하는 문학서, 철학서는 당연히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다. 반정부적 견해를 유포하는 혐의를 받은 신문과 잡지는 모두 폐간 처분을 받았다. 이로 인해서 1980년대 활발히 이루어졌던 문화대혁명에 대한 진상규명 논의도 물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비록 규모나 유혈이 마오쩌둥이 저지른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부족하기는 했으나 덩샤오핑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이들은 천안문 6.4 항쟁을 탄압한 여파가 문화대혁명 못지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비록 중국이 문혁 이후 과거의 중화 문화와 단절되었다는 수준의 평을 받을 정도로 큰 상처였으나 6.25 전쟁 이후의 한국처럼 기존 사회가 완전 리셋된 대신 새로운 사회 질서와 문화를 창조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안문 6.4 항쟁 이후 이런 아래에서부터의 자체적 개혁 요구는 완전히 소멸했고 중국의 소프트파워는 박살이 나버렸다. 그나마 이때 사망하지 않고 체포되었던 천안문 6.4 항쟁에 참여한 10만 명이 넘는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생들은 덩샤오핑이 죽이거나 버리지 않고 목숨만은 살려줘야 한다며 모두 강제추방시켰고,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방 선진국들이 정치적 이유로 이들을 망명자 신분으로 받아주고 공부까지 시켜 주었다. 그 덕에 21세기부터 재개된 중국의 개혁개방 때 이들이 다시 모국에 돌아와 중국의 기술, 과학 발전에 이바지할 카운터파트 역할을 맡아 기여했다. #

10.5. 정치적 영향

중국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구권을 중심으로 한 외부 세계에서는 중국의 경제 발전이 자연스럽게 정치적 자유의 신장과 민주주의 제도로의 점진적 전환을 이끌어 낼 것으로 보는 낙관적 시각이 많이 존재하였으나.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이 시각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천안문 6.4 항쟁 이후 가해진 서방의 경제적 제재는 덩샤오핑의 개방 정책과 1년 뒤 새로운 이슈로 부상한 걸프 전쟁 등으로 얼마 안 가서 곧 유명무실해졌고, 중국은 정치적 억압을 강화하면서도 1991년에 고성장 기조가 회복되었고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연속적으로 10%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보란듯이 고도 경제성장을 구가했다. 덕분에 중국공산당 내부의 개혁적 세력과 시민 사회 세력은 다 쓸려나가게 되고 민주화를 갈망하는 동력은 현저히 약해졌으며 견제 세력 없는 중국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는 오히려 더 공고해졌다.

2010년대 이후에 들어서 마오쩌둥 사후 그나마 유지되던 당내의 집단 지도 체제마저 유명무실해지고 오로지 시진핑 1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퇴행적 현상마저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국공산당은 다당제와 보통선거로 대표되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중국에 맞지 않는 포퓰리즘이라며 배격하고 심지어는 어용 학자와 관변 지식인들을 동원 및 매수해 자신들의 독재를 철인정치 혹은 능력주의로 미화하고 포장하기에 바쁘다. # 허나 현실은 중국공산당의 부패는 이미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민주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실시하는 공직자 재산공개조차도 중국은 절대 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앞으로 중국의 경제성장이 위축되는 순간 빈부격차와 지역간 불평등과 같은 산적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불만은 봇물처럼 터져나올 가능성이 높은데 민주주의 국가와는 달리 정상적인 권력 교체가 불가능한 일당 독재 체제의 특성상 큰 정치적 충격과 내부 혼란이 발생하거나 아니면 이를 무마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팽창주의적 대외노선을 채택할 것으로 관측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당연히 이럴수록 범세계적으로 반중감정이 극대화되어 더 고립된다는 사실을 시진핑도 모를 리가 없지만 내부 불만을 돌리려면 어쩔 수 없다. 이러한 딜레마는 권위주의 정부를 가진 중국이 미중 패권 경쟁에서 이기기 힘든 주된 원인으로 여겨진다. 내부 불만을 돌리자니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그렇다고 그 불만을 방조하자니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시진핑 시대부터 중국이 생존전략으로 발견한 정책이 바로 일대일로 중국몽이다. 서구세계에서 활로를 찾을 수 없으니 제3세계로 가서 부를 가져오자는 것이다. 그러면 인권문제를 무시하면서도 여전히 경제발전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제3의 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시간이 흘러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38]

결국 이 당시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은 2022년에 곯아 터져 또 한 번 대규모 시위로 번질 뻔했다. 중국 당국이 뒤늦게 위드 코로나로 선회하며 시위는 일단락되었지만 이 시위를 통해서 현재의 중국 시민들이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거부하거나 불신하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언제 또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와, 천안문 이상으로 끔찍한 진압 작전이 일어날지는 모를 일이다.

11. 언론의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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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에 대항한 반란
중국-폴란드-소련
천안문 6.4 항쟁을 다루는 미국 주간지 타임(TIME)
천안문 6.4 항쟁은 신문방송학이나 대중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에서도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당시 미뤄진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 취재를 위해서 베이징시에 머무르던 외신기자, 특히 CNN이 천안문 광장 근처 빌딩의 옥상에 설치해 놓은 카메라가 천안문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라이브로 전 세계에 중계했기 때문이다.
1989년 6월 4일 당시의 CCTV 신문연파 방송영상이다.[39] 위에 나온 CCTV 남녀 아나운서(두시안, 쉐페이)는 유독 평소와 다르게 상복과 유사한 검은 정장을 입고 부고를 읽을 때와 같은 느린 어조로 보도한 탓에 교체되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의 대외 라디오방송인 중국국제방송국(Radio Beijing, 지금의 CRI로 다시 말해서 중국 정부 산하의 국영방송이다.) 영어방송 부서의 한 아나운서는 직설적이고 격앙된 어조로 당국의 무력 진압을 비판했다. 중국국제방송국의 일부 직원도 무력 진압 때 희생되었다고 한다.

방송사 뉴스 다시보기에서 당시 한국 언론의 보도를 찾아볼 수 있다. KBS 뉴스 다시보기 MBC 뉴스 다시보기[40]

12. 중국 지도부의 대응

소스에 따라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다르게 나오기 때문에 아래 명단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강경파의 대표인 덩샤오핑과 온건파의 대표인 자오쯔양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은 확실하지 않다.

12.1. 강경 진압 주장

12.2. 온건 대응 주장

13. 각종 매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천안문 6.4 항쟁/각종 매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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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평가

1980년대 말 세계는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동구권에 불기 시작한 자유화·민주화의 물결로 넘실대던 시기였고, 천안문 6.4 항쟁의 소식이 전 세계 언론으로 보도되자 미국, 유럽은 물론 개방화가 진행되던 소련 매체들도 이 시위를 지지했다.

따라서 학생 지도부, 베이징시 시민, 그 누구도 인민해방군의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예상하지 못했다. 대부분 진압봉과 최루탄 정도를 사용한 강제해산 정도로 끝나고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본 것이다. 실제 학생 지도부 중 " 천안문 광장이 피로 얼룩져야만 민중들이 각성할 것이다."라고 끝까지 저항을 계속한 강경파 차이링도 훗날 "기껏해야 강제해산일 줄 알았다."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이 이끌던 중국 중공군은 인민들을 무력으로 깔아뭉개 버렸다. 당시 덩샤오핑은 텔레비전 등에 나와 이들을 난동꾼이라고 비난하면서 확고한 진압을 주장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그의 확고한 의지였나 아니면 보수파의 위협적인 부상을 무마하려는 것이었나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으나 결론적으로 덩샤오핑은 이 사건에 대한 평가를 이후에도 뒤집지 않았다. 특히 인민을 해방한다는 군대가 일당독재와 부정부패로부터 해방을 부르짖던 인민을 짓밟았다는 점은 큰 충격이자 아이러니였다.

천안문 6.4 항쟁은 현대 중국의 운명을 결정한, 그리고 1980년대 말 세계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사건이자 중국 민주주의 역사에 주요한 이정표로 남게 된 미완의 가능성으로 평가받는다. 시민과 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하여 저항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는 점, 투쟁과 시위 와중에 락 페스티벌을 방불케 할 만큼의 자유와 창발이 구현되었다는 점, 당시 각 세계의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의 격화로 인해 조성된 정국하에 촉발되었다는 점 등에서 68운동과 교집합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사건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중국은 한국과 같이 민주화되어 현재의 중국보다도 사회 여러 방면에서 훨씬 발전하였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43] 게다가 이 운동의 실패로 중국 내의 여러 교수들과 학생들, 유학파 출신의 사람들과 지식인들이 잡혀들어가 고문 후 투옥당하거나 사형까지 당하는 등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발생한다.

14.1. 중국공산당

1989年春夏之交的政治风波(1989年4月—6月):长期以来,一些西方国家有计划地对社会主义国家进行思想、政治渗透,竭力支持和扶植各种反共反社会主义活动。20世纪80年代末,东欧一些社会主义国家开始出现动荡。西方敌对势力加紧推行和平演变战略,通过多种渠道对中国施加影响,使国内搞资产阶级自由化的人受到鼓舞。由于在一段时间里,党内少数领导同志在推进改革开放、大力发展经济的同时,对坚持四项基本原则缺乏一贯性,忽视党的自身建设和社会主义精神文明建设,思想政治工作受到削弱,少数干部中滋生了相当严重的腐败现象,损害了党在群众中的威信和社会主义在人们心目中的形象,资产阶级自由化思潮再度泛滥。1989年春夏之交,极少数反共反社会主义分子利用党在工作中的失误和人民群众对物价上涨、特别是对一些干部中腐败现象的不满情绪,进行煽动反对共产党领导、反对社会主义制度的活动。他们借群众悼念胡耀邦逝世这件事,大肆散布谣言,掀起一场有计划、有组织、有预谋的政治动乱,并在北京地区煽动一些不明真相的人占据天安门广场,冲击党政首脑要害部门,制造反革命暴乱。在关系党和国家生死存亡的关键时刻,中共中央总书记赵紫阳犯了支持动乱和分裂党的严重错误。中央政治局在邓小平和其他老一辈革命家坚决有力的支持下,依靠人民,旗帜鲜明地反对动乱,并采取果断措施,在6月4日一举平息了北京地区的反革命暴乱,捍卫了社会主义国家政权,维护了人民的根本利益。
오랫동안 일부 서방 국가들은 계획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에 사상적, 정치적 침투를 실시하여 각종 반공주의, 반사회주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고 육성하였다. 1980년대 말 동유럽의 일부 사회주의 국가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서방의 적대세력은 평화적 변천전략을 더욱 박차를 가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국내 부르주아 자유화를 하는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한동안 당내 소수 영도동지들은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경제를 대대적으로 발전시키면서 4대 기본원칙을 견지하는데 일관성이 부족하고 당의 자체건설과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사상정치공업이 약화되었고 소수간부들 사이에 상당히 심각한 부패현상이 발생하였으며, 대중들에 대한 당의 위신과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의 사회주의의 이미지를 손상시켰으며, 부르주아 자유화 사조가 다시 범람하였다. 1989년 봄과 여름 사이, 극소수의 반공 반사회주의자들이 당의 업무상의 실수와 물가상승, 특히 일부 간부들의 부패 현상에 대한 인민대중의 불만을 이용하여 공산당 영도 반대, 사회주의 제도 반대를 선동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군중들이 후야오방의 사망을 추모하는 이 일을 빌어, 마구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계획적이고 조직적이며, 계획적인 정치 동란을 일으켰으며, 또한 베이징 지역에서 일부 진상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톈안먼 광장을 점거하고, 당정 수뇌의 급소 부서를 격파하여 반혁명적인 폭동을 일으켰다. 자오쯔양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당과 국가의 존립이 걸린 고비에서 동란을 지지하고 당을 분열시키는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중앙정치국은 덩샤오핑과 다른 구세대 혁명가들의 결연하고 강력한 지지 아래 인민에 의존해 기치를 선명하게 난에 반대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 6월 4일 베이징 지역의 반혁명 폭동을 일거에 진압하고 사회주의 국가정권을 수호하며 인민의 근본 이익을 수호했다.
바이두 백과 1989년 춘하지교 정치풍파 문서다.
중국공산당은 천안문 6.4 항쟁을 두고 극소수의 반사회적, 반공적인 지식 세력이 순진한 노동자와 시민들을 선동해서 국가를 뒤엎으려 한 난동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폭력적 진압 역시 '당연히 이루어졌어야 할 조치'라고 평가하며, 이 평가를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뒤집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은 당시 소련이 비슷한 상황에서 대폭적인 민주화 개혁을 실시했다가 주민들의 불만이 폭주하면서 국가체제가 붕괴했기 때문에 진압 자체는 불가피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허나 '인민'해방군이 인민을 향해 총부리를 돌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긍정하기 힘든 사건이기는 하다.

게다가 최대한 공산당의 입장을 반영한 바이두 백과의 서술조차도 자오쯔양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당정 수뇌의 급소 부서를 격파하는 폭동을 일으킨 자들을 지지했다고 적혀있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이해가 안되는 건 당신이 건전한 사고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사실 관계를 밑도 끝도 없이 왜곡한 결과 말도 안되는 모순이 백과 사전에 버젓이 적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살 행위임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이런 자가 공산당 1인자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는지 공산당 조직의 인사능력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공산당 총서기 자리는 덩샤오핑이 내정한 인물이 앉게 되는데, 반혁명 분자를 지지하는 인물을 공산당 1인자 자리에 앉혀놓은 만행을 저지른 덩샤오핑도 '서방의 적대세력'과 내통하는 스파이라는 건가?

바이두 백과의 서술에 따르면 "(알 수 없는 이유로 반혁명 폭동을 지지하는 공산당 총서기가 이끄는) 공산당 중앙정치국은 (그런 성향을 가진 공산당 총서기를 내정한) 덩샤오핑의 강력한 지지 아래 반혁명 폭동을 일거에 진압하였다." 라고 적혀있다. 이미 논리 구조부터 이상하지만 이를 사실이라 쳐도 덩샤오핑이 반혁명분자를 지지하는 인물을 총서기로 뽑아놓고선 그를 혁명의 이름으로 숙청하는 미치광이가 되어버린다.

이를 해명하려면 하다못해 총서기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라도 적혀 있는 게 정상인데 당연하게도 그런건 적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저 서술이 통째로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타당한 역사적 사실은 "정부 개혁을 요구한 시민들을 차마 학살할 수 없었던 상식인인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시민들의 의견을 경청하였다." 이다. 이것을 어떻게든 숨기려고 사실 관계를 주물러댄 결과 이런 수준 낮은 거짓말이 등장했고, 이는 이 사건이 중국 현대사에 있어서 차마 숨길 수 없는 거대한 영향력을 미친 사건이었음을 암시한다.

물론 중국공산당이 후일 전향적인 조치를 전혀 내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론의 보도 자유를 조금은 풀어주었다. 정부 차원의 표현도 2010년대에 들어서 폭동에서 정치적 풍파 정도로 순화된 상태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검열과 보도 통제가 지속되는 것 역시 사실이며, 중국 당국의 천안문 6.4 항쟁에 대한 의견에는 변한 점 역시 없기 때문에 이 전향적인 조치들은 체제 지속을 위한 시도로 보는 것이 맞다. 인민망에서는 "1989년 정치풍파"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지만 "시위자들이 중국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혼란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왜곡 서술되어 있고 무력 진압 등의 언급도 없이 그저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정도로만 서술되어 있다. # #

천안문 6.4 항쟁 당시 베이징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강경 진압을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진 보수파 인물 천시퉁(陳希同)은 홍콩 저서에서 "나는 꼭두각시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는 부정부패와 권력투쟁이 얽힌 소위 '천시퉁 사건'으로 1998년에 징역 16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뒤 2004년 심혈관 질환 등으로 조건부 가석방되었다.

2010년 노벨평화상은 천안문 6.4 항쟁 당시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수감되고 풀려난 이후에도 활발히 시민운동을 벌인 민주화 인사인 류샤오보가 수상하였다. 이때 류샤오보 본인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일가친척들 역시 가택연금을 당하거나 교도소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본인이나 대리인이 수상을 할 수 없었다. 덕분에 중국과 서방 간의 신경전이 한때 치열해졌다. 류샤오보 CIA와 서방의 간첩이라는 억지 누명을 뒤집어쓰고 정치적인 활동이 아예 금지당한 채로 반체제 인사, 민주화 운동가 등과의 접촉이 전면 차단되었으며 부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처남은 사기 혐의로 11년형을 선고받았다.[44] 여기에 대해서는 중국 당국의 정치보복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류샤오보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었다는 점 때문에 노르웨이는 중국으로부터 대 중국 연어 수출량이 급감하는 경제 보복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은 이것 때문에 노벨평화상에 대항해 공자평화상을 만들기도 했다.[45]

2019년 6월 2일에 싱가포르에서 진행된 아시아안보회의에서 중국 국방부장 겸 국무위원 웨이펑허(魏鳳和)는 천안문 6.4 항쟁에 대해 "정치적 혼란이었으며 중앙 정부는 혼란을 안정시키려는 조처를 했다"면서 "그것은 옳은 정책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지난 30년간 중국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면서 당시 중국 정부가 천안문 6.4 항쟁을 잘 해결했기 때문에 "중국이 지금까지 안정과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2021년에 중국공산당은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9기 6중 전회)에서 채택된 3차 역사결의에서 천안문 6.4 항쟁을 "정치풍파", "동란" 등의 표현으로 묘사했다. #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끊임없이 천안문 6.4 항쟁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지만, 중국공산당이 독재하고 있는 한 중국 내부의 평가가 바뀔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요지부동인 중국공산당은 둘째치고 대다수 인민들도 애써 외면하고 있다.

14.1.1. 검열과 일반적인 중국인들의 인식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듯이 천안문 항쟁은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중국 본토에서 철저히 은폐, 검열된 상태이다. 앞서 서술한 "정치적 혼란", "폭동" 등의 부정적인 정의는 1989년 공산당 연혁 같은 불가피한 상황에서나 "1989년 춘하계 정치풍파"라는 매우 모호한 명칭으로 제한적이게 언급되며, 그 외에는 웬만하면 언급을 철저히 회피한다. 역사 교과서에선 관련 내용을 절대 찾을 수 없으며, 바이두 등 중국 검색엔진에서 "天安门事件"라고 검색하면 1976년의 사건만 검색되고, "六四"라고 검색하면 위 링크와 같은 중국공산당의 공식 입장과 아예 엉뚱한 내용이 섞여 나온다.

당국의 검열이 어느 정도냐면, 천안문 항쟁이 일어난 1989년 6월 4일을 뜻하는 수 8964, 89, 또는 64는 중국에서 일종의 금지된 숫자 취급을 받고 있으며 일부 사이트에선 저 숫자들이 검열 키워드로 지정돼있다. 영화 샹치에 나온 운전기사 팔뚝에 새겨진 숫자가 하필 8964여서 중국에서 논란이 된 적도 있으며 논란은 됐는데 원인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 아이디나 전화번호 등에 8964를 넣는 식으로 지지 또는 희생자 추모 의사를 표시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본 문서도 8964로 들어올 수 있다.[46]

결국 이렇게 장기적으로 은폐된 결과, 30년이 넘게 지난 시점에 중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탱크맨을 보고 천안문 사태를 유추할 수 있던 학생은 소수에 불과했다고 한다. 베이징시 시민들이나 학계에서는 희생자가 적지 않은 만큼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청년층들이나 베이징에 살고 있지 않던 지방민들은 천안문 항쟁이 뭔지 진짜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만 그와 별개로 지나친 검열 때문에 오히려 천안문 항쟁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상당하다고 하며( 스트라이샌드 효과), 사실 중국이 천안문 6.4 항쟁에 대해 은폐를 필사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홍콩, 싱가포르, 대만이나 해외로 나가는 중국인들이 1년에 1억 명 이상[47]을 거뜬히 넘기는 데다가 취업, 유학, 사업 등의 이유로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도 상당하기에 홍콩, 싱가포르, 대만, 해외에서 천안문 항쟁에 대해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문화대혁명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중국인들 앞에서는 천안문 항쟁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다. 그나마 문화대혁명은 역사 교과서에서도 실책이라고 명시할 정도로 중국공산당이 명백히 흑역사임을 인정한 사건이라 아무리 못해도 예의에 어긋나는 선에서 끝나지만, 천안문 항쟁은 잘못하면 공안이 끌고 갈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중국인 앞에서 언급해봤자 좋을게 없다.

VPN을 통해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해외 SNS에서 활동하는 우마오당 소분홍들은 대부분 천안문 항쟁에 대해 잘 알고있다. 다만 그들의 입장은 중국공산당의 입장과 일치하며, 이에 한술 더 떠서 시위대들에게 살해당한 인민해방군 군인들을 공화국의 수호자(共和国卫士)라며 추모하고 오히려 시위대들을 폭도로 간주한다. 때문에 SNS에서 중국인들과 키배를 뜰때 천안문 얘기로 겁을 줘봤자 의외로 별 효과가 없을 확률이 높다.

매년 6월 4일이 되면 중국에서는 뭔가 모르게 삼엄한 분위기가 흐른다. VPN 사용이 제한되고, SNS 포스팅 검열 강도가 높아지며, 일부 번화가에서는 공안들의 심문이 강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도시이자 천안문 항쟁이 일어난 베이징, 그중에서도 천안문광장 베이징대학은 출입 시 신분 확인이 대폭 강화된다.

2011년 2월 10일에 베이징에 인공강설로 첫눈이 내렸는데, 누군가가 천안문 광장에 6.4라는 글씨를 남겨서 화제가 되었다. 2023년에는 하루 앞두고 베이징 올림픽 스타디움 앞 단상에 올라가 성조기를 흔들고 "중국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돼야 한다"고 외치다 보안요원과 공안에 붙잡혔다.

다만, 중국이 특정 날짜에 맞춰 특정 조치를 취하면 사람들에게 오히려 특정 날짜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역효과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

14.2. 중국 본토 중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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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천안문 6.4 항쟁 23주기를 기리는 홍콩 시민들의 모습. 현재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일국양제의 영향으로 홍콩 마카오는 중국 내에서 중국공산당의 규제 없이 천안문 사건 희생자를 추모할 수 있는 곳이 되었고, 1989년부터 홍콩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2020년까지 6월 4일에 민주파 홍콩인과 마카오인들에 의해 추모제가 열었다. 마카오의 추모제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홍콩은 한때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내에서 유일하게 천안문 6.4 항쟁 희생자 추모가 가능한 곳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처음에는 홍콩 내 이런 움직임에 대해 경악했으나,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한때는 홍콩인들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반감을 측정하는 온도계 정도로 보기도 했다. 민주화 요구는 대놓고 막기에는 명분이 없고 천안문 6.4 항쟁 희생자 추모에 참여한 홍콩 주민들도 대다수는 중국 민주화를 주장하지, 하나의 중국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론 홍콩 독립운동이 대두한 이후 홍콩은 중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천안문 6.4 항쟁 희생자 추모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추모 자체를 반대한다기보다는 '민주 중국 건설'을 주장하는 촛불집회 주도 단체에 대해 홍콩의 민주화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주도하는 추모제에는 참가하지 않으며, 천안문 6.4 항쟁이 홍콩의 민주화와 독립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포럼 등을 개최하고 있다.

한편 반대로 소수 친중 성향의 홍콩인들은 중국공산당의 강경진압을 옹호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중국 반환 이후 우산 혁명 이전까지는 홍콩-본토 관계가 한창 누그러지면서 추모제의 규모가 날이 갈수록 작아지는 것이 민주파 홍콩인들과 중국 민주화 운동가들의 걱정거리였다. 우산 혁명 이후에는 홍콩 내 반중감정이 극대화되면서 코로나19로 인해 통제가 심해지기 전까지 날로 규모가 거대해지고 있었다.

2019년에는 홍콩 시위 영향으로 천안문 6.4 항쟁 추모 집회에서 역대 최대규모인 18만 명이 모였다. 하지만 2020년 7월에 제정된 홍콩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2021년 이후로는 추모 집회가 못 열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그 말대로 추모단체들이 자진 해산하는 등 점점 암울해지는 실정이다. # 그럼에도 추모 사이트를 해외 계정으로 여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찾고 있다. # 추모 단체들이 국가전복선동죄로 기소되기도 했다. # 2021년에는 천안문 6.4 항쟁 추모 집회를 맡았던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支聯會·지련회)가 자진 해산했다. #

베이징의 간섭이 더욱 심해진 현재는 6월 4일만 되면 원래 추모 행사가 이뤄지던 빅토리아 공원 코즈웨이베이역 일대[48]에 무장 경찰이 쫙 깔려 있어 오프라인에서는 집단 행동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현재는 천안문 사건 혹은 민주화와 관련된 발언을 할 경우 경찰에 무력으로 제압당해 연행될 수 있다. 흰 꽃, 촛불 등 추모의 뜻을 나타낼 수 있는 물건을 소지해도 마찬가지.

2024년에는 홍콩에 주재하는 서방의 외교관들이 빅토리아 공원을 방문하여 간접적으로 추모하는 모습을 보였다. #

포르투갈령 마카오는 한 술 더 떠서 말이 포르투갈령이지 실제로는 1966년 12.3 사건 이후 실질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당시 마카오인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15~25만 명이 중국 민주화 지지 시위에 참여할 정도로 마카오 시민들 중에는 천안문 6.4 항쟁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중국 정부의 간접적 개입으로 천안문 6.4 항쟁에 대한 언급이 봉쇄되고 중국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인사에게는 가족 불화와 직장에서의 해고, 은행 계좌 동결, 기업의 경우 갑작스런 거래 중지 등의 불이익에서부터 심하면 적색 테러까지 횡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천안문 6.4 항쟁을 빌미로 친중파는 민주파를 대거 숙청하고 마카오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대만에서는 매년 천안문 6.4 항쟁을 추모하고 있다. 천안문 6.4 항쟁 27주년을 맞은 2016년 6월 4일에 차이잉원 총통이 페이스북에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민이 중국을 전진시킬 수 있다."며 간접적으로 이를 언급하기도 했다. # 2021년에는 허위정보 색출 사이트가 등장하였다. # 홍콩의 정치적 자유가 거세당한 현재 중화권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싱가포르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던 항쟁이었다. 무력 진압이 알려진 직후 중국은행 싱가포르 지점에서 대규모의 뱅크런이 있었다고 한다.

14.3. 여담

마이크 폼페이오 前 미국 국무장관은 2018년 6월 3일 중국 천안문 6.4 항쟁 29주년을 맞아 중국공산당에게 '사망자 수'를 밝힐 것을 요구하며 중국공산당의 인권 문제 개선을 촉구했고, 이에 중국공산당은 내정간섭을 하지 말라며 반발했다. # 다음해인 2019년에 천안문 6.4 항쟁 30주년을 맞아 폼페이오 장관이 성명에서 "중국공산당이 이 어두운 역사로 인한 많은 희생자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수를 밝히고 이를 완전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마이크 펜스 前 미국 부통령도 2019년 6월 24일에 워싱턴 D.C. 소재 싱크탱크 우드로 윌슨 센터에서 중국공산당의 인권 탄압 문제를 신랄히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다. #

천안문 6.4 항쟁 30년 후인 2019년 8월 18일에 홍콩에서의 대규모 시위에 대응하여 중공이 100여 대의 장갑차와 많은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자, 도널드 트럼프 前 미국 대통령이 "제2의 천안문 사태로 이어진다면, 미중외교 협상이 어려울 것"이라고 직접 언급하면서 중국공산당에 강력히 경고했다. #

다만 일본은 미국보다는 유화적인 입장으로, 외교 문서에서 인권보다 장기적으로 대국적인 모습 방향을 보여줘야 한다고 제시했다. # 그리고 중국공산당이 처리해야 할 국내 문제라고 사실상 덮었고 먼저 정상회담을 제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

한편 천안문 6.4 항쟁 관련 유족들은 시진핑에게 공개편지로 천안문 6.4 항쟁의 재평가를 촉구하기도 했지만 중국공산당은 이후 발전상과 긍정적인 부분을 보라며 재평가론을 일축했다.

사실 서구권을 비롯해 민주화가 이루어진 대다수 국가에서는 이 사태를 반민주·반인륜적인 폭거이자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짓밟은 중국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의 그릇된 행동으로 규정하며 1980년대 말 시점에는 중국에 대한 서방 각국의 투자 중단 및 철수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들어 이런 제재는 군사 부문만 제외하면 슬그머니 풀어졌다. 물론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한민국과 대만 간의 단교와 대한민국과 중국의 수교는 천안문 6.4 항쟁 이전이 아니라 3년이 지난 1992년에야 이루어졌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공산당은 서방과 연대해 소련과 대항하는 정책에서 친 소련(친 러시아) 정책으로 회귀하였다.

사회주의 계열의 웹진 jacobinmag의 YUERAN ZHANG은 천안문 6.4 항쟁에서 노동계급의 요구를 관찰하지 않고 단지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개혁으로 인한 자본주의 사회주의 대립으로 보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다고 비판한다.[49]
사회주의 vs 자본주의 내러티브는 항쟁에서 노동자의 역할을 인정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실제로 지배적인 주제라는 사실을 모호하게 한다. 이러한 열망은 "반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차원의 문제로는 포착될 수 없다. 더욱이 시장화에 대한 열망이 노동자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시장화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 마오주의나 마오쩌둥에 대한 향수도 거의 없었다.

해당 기사에서는 항쟁 당시에 설립된 베이징노동자연맹(Beijing Workers' Autonomous Federation)과 같은 노동운동 단체의 주장을 분석하여 학생들은 보편적인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했지만, 노동자들은 학생들이 말하는 추상적인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터의 관료제 타파 같은 작업장 민주주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같은 것을 요구했다고 말한다. 물론 시위대는 단일체가 아니고 그 중 일부만 보고서 전체를 해석한다면 아무 말이나 가능하다. 그러나 천안문 6.4 항쟁을 좌파적인 색채로 재해석하기보다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일부 존재한다. #[50]

천안문 6.4 항쟁 이후 진정한 중국인은 다 죽고 나쁜 중국인만 남았다는 드립이 생겼는데, 천안문 6.4 항쟁 유족들이 아직까지도 중국공산당에 투쟁하고 있기 때문에 틀린 주장이다.[51] 천안문 6.4 항쟁 이후에도 중국 재스민 혁명 등 민주화 운동의 기류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소수민족 자치구나 특별행정구 지역의 시위도 활발했으나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 정부와 국수주의자들이 더욱 준동하여 비판 세력들을 억압하여 민주화, 소수민족 자치 및 독립 세력이 약화되고 있다.

홍콩에 있다가 홍콩 국가보안법 발효 여파로 문을 닫은 6.4 기념관이 2023년 6월 뉴욕시에서 재개관했다. #

천안문 시위로 체포돼 장기간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난 뒤 미국에 망명했던 중국인이 중국 정부 요원으로 활동한 혐의로 미국 검찰에 기소됐다. #

15. 관련 링크 및 문서


이 각주에는 유혈 진압 직후 등 혐오스러운 사진이나 그것을 올린 사이트는 올리지 말아야 한다.[54] 그 밖에도 구글에 천안문 6.4 항쟁 또는 천안문 사태라고 검색하면 시위 당시의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연관 이미지로 유혈 진압 직후 현장 사진이 나올 수도 있으니 주의.

16. 당시 뉴스 보도

1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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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관련 문서


[1]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리펑의 지시로 발동된 조치. [2] 공산당 중앙총서기에서 물러나고 중앙정치국에서도 축출. [3] 홍콩 반환으로 종료. [4] 제27집단군 [5] 홍위병은 극좌였다. 개혁개방을 통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빈부격차를 키운 덩샤오핑을 증오했기에 대학생들과 연합했다. 즉 민주화를 바라는 사람들과는 다른 목적의 참가자들인 셈이다. 지금도 홍위병은 아니지만 중국마오쩌둥주의공산당 등을 비롯한 마오주의자들은 덩샤오핑을 중국을 "공산주의의 탈을 쓴 제국주의"로 만든 배신자로 여긴다. [6] 시위에 참가한 홍위병과 비슷한데, 마오쩌둥 사상은 인민들이 권위의 모순에 투쟁할 것을 요구하며, 아무리 공산당이라도 모순적인 행보를 보이면 투쟁하여 갈아치워야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시위대와 근본적인 사상은 달라도 행동은 함께 하였다. 마오쩌둥 사상이 당시에도 그렇고 현재의 중국공산당 노선과 정 반대다 보니 현재 마오쩌둥 사상은 중국공산당 규약에 명시되어 있는 것과는 별개로 현재 중국에서는 불법이며 중국마오쩌둥주의공산당은 철저히 금지된 정당이다. [7] 의외로 당시 자유주의 열풍에 따라 공산당 내에도 시위를 지지하는 당원들이 있었다. 물론 무력진압 이후 모조리 숙청되는 등 끝이 좋지 못했다. [G] 중국 정부 발표 [G] 중국 정부 발표 [10] 중국 홍십자회 발표 및 미국 정부 추정치 [11] 영어 위키백과의 제목도 이쪽이다. [12] 1989년 5월 14일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모인 시위대가 들었던 현수막 속 구호. 패트릭 헨리의 유언을 인용한 것이다. 지금은 천안문 6.4 항쟁을 상징하는 구호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 [13] 당시 천안문 광장에서 베이징대학 학생들이 들고 있던 현수막 속 구호였다. [14] 천안문 6.4 항쟁 당시 시위자들이 외친 구호였다. [15] 천안문 6.4 항쟁 당시 시위에 나섰던 학생들이 외첬던 구호. # [16] ' 홍콩 6.4 기념박물관'에 걸려있는 현수막에 먹으로 써 놓은 천안문 6.4 항쟁 당시의 구호였다. 이 구호는 지금까지도 상당히 대조적인데, 위 구호의 의미와는 달리 현재 중국 내에서는 교육은 물론 언론까지 통제된 채로 천안문 6.4 항쟁이 잊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콩 국가보안법이 발효된 2020년대 이후로는 그 홍콩에서마저도 서서히 잊히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17] 논문의 저자인 Walder는 SSCI 등재 논문인 'Tan Lifu: A "Reactionary" Red Guard in Historical Perspective'를 통해 마오주의 홍위병에 대해서는 반동이라고 부르며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 [18] From the perspective of the Polish workers' movement a decade before, the political significance of gongzilian appears limited indeed. In an assessment written shortly after the events, we observed that gongzilian 'was more a result of the upheaval than a cause', a movement that took advantage of the political space created by a much larger student movement, the disunity of the government, and the resulting paralysis of the regime's political apparatus. [19] In a statement issued on 26 May to all Chinese overseas, gongzilian stated, 'The foundations and columns of the People's Republic are stained with our blood and sweat. Our nation was created from the struggle and labour of we workers and all other mental and manual labourers. We are the rightful masters of this nation. We should be, indeed must be, heard in national affairs. We absolutely must not allow this small handful of degenerate scum of the nation and working class to usurp our name and suppress the students, murder democracy, and trample human rights!' 40 Another handbill issued the same day likened the movement to the Great French Revolution, whose 200th anniversary was rapidly approaching, and urged workers to 'storm the Bastille of the 1980s'. Declaring that 'The final struggle has arrived', the document continued, 'We have already seen that the fascist governments and Stalinist dictatorships spurned by hundreds of millions of people have not, indeed will not, voluntarily withdraw from the historical stage. Li Peng along with his backstage supporters and his followers are engaged in their final performance; they may still stake all on a last political gamble'. In a now-familiar style, the document called for all people to prepare to make great sacrifices in this final battle, in order to complete the mop-up campaign against Stalinist dictatorship and to live like human beings under unprecedented freedom and democracy: 'Storm this 20th century Bastille, this last stronghold of Stalinism!' 41 Three days later, they proclaimed, 'we must unite to sweep Deng Xiaoping from the historical stage'. [20] 피켓에 쓰인 글귀의 의미는 "중국에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중국에는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 이다. [21] 1980년 중국의 평균 연봉은 803위안, 1990년에는 2160위안이었고, 당연히 이 당시에 1년에 1만위안 벌면 부유층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소득수준과 물가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오르면서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옛날 유행어가 되었다. [22] 참고로 1980년대 초중반의 중국에서 청바지 한 벌 값이 50위안으로 노동자 1달 급여에 비견되는 물품이었다.이것이 개혁개방이 시작되었어도 사회인들이 한동안 계속 인민복을 입고 다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23]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 났으나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총리급) 직은 유지했고 이후 열린 제13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13기 중앙위원회에서 압도적 득표를 기록하며 당 중앙정치국 위원(부총리급)에 선임됐다. 물론 사실상 실각된 상태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무보직 무소임 정치국원이었다. 참고로 후야오방과 대조적으로 보수파 원로들의 총애를 받던 덩리췬은 정치국 자리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당내 투표에서 반대가 많아 낙선, 정치국에 진입하지 못했다. [24] 당시 국무원 총리였다.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 총서기 대리를 거쳐 정식 총서기가 되었다. [25] 개혁의 여파로 발생한 대중들의 자유주의적 사상을 탄압하는 당내 보수파 주도의 캠페인 [26] https://archive.nytimes.com/www.nytimes.com/books/first/l/liang-tiananmen.html?source=post_page--------------------------- [27] 특히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28] 사족으로, 이때 이들이 탈출한 지역 중엔 한국도 있었다고 한다. 일단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 중 하나라 한국 화교들의 도움으로 인천 차이나타운 등에 많이 밀입국했다고. # 설에 의하면, 미국 정부의 압박에 한국 정부도 눈 감아줬다고 한다. [29] 중국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시각이 매우 좋지 않다. [30] 영어로는 Uerkesh Davlet로 표기한다. [31] 사태 종식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약 3분 정도의 VHS 테이프를 대만 방송사에 보냈는데, 상당히 침통한 표정과 함께 자신의 주장을 조목조목 밝히기도 했다. [32] 제2회 응씨배 루이나이웨이 이후로 여자 바둑기사가 세계대회 4강에 간 사례는 2021년까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이 기록은 2022년 삼성화재배에서 최정이 결승 진출하며 갱신되었다. [33] 일본 같은 경우 똑같이 비난 성명을 냈지만, 제제에는 반대했다. [34] 여기서 최혜국 대우"다른 어떤 나라에게든 이로운 대우를 해 주기로 했다면 이 나라에게도 자동적으로 그 대우를 적용한다."는 것이다. 최혜국 대우는 말만 들으면 그 나라만 특별취급해 주는 것 같지만,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거의 모든 다른 국가들에게 최혜국 대우를 해주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기본 권리에 가깝다. WTO는 이 최혜국 대우는 가맹국 모두에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35] Joseph Y.S. Cheng, The Tiananmen incident and the pro-democracy movement in Hong Kong, in Jean-Philippe Be´ja(eds), The Impact of China’s 1989 Tiananmen Massacre, Routledge. [36] 1980년대 중반까지 대만도 중국국민당만 집권 가능했던 일당 독재 국가였고, 언론통제도 단행되었다. [37] 그 이전까지는 현대의 중국 정부가 천안문 6.4 항쟁을 폭동으로 치부하는 것처럼 장제스- 장징궈 당대의 대만 정부도 2.28 사건을 반국가분자들의 폭동으로 치부했고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제대로 된 보상 등은 기대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오히려 중국 대륙에서 2.28 사건에 대해서 인민들의 항쟁이라며 기념했던 것과 정반대의 양상이었다. 물론 1980년대 이후로 중국 당국이 대만 당국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면서 2.28 사건 기념행사는 없어졌다. [38] 다만 시진핑이 당내의 집단 지도체제를 무너뜨리고 일인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거대한 삽질을 함으로써 그나마 공산당 1당제이기는 했어도 비교적 온건했던 후진타오나 장쩌민 때가 더 나았다고 주장하는 중국 국민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39] 저 당시 신문연파 오프닝 음악은 현재까지도 리믹스를 거치지 않고 사용되고 있다. [40] 당시 MBC에서 활동한 손석희 박광온이 나온다. [41] 다만 자오쯔양이나 쉬친셴처럼 군, 정계에서 완전히 쫒겨나지 않았으며 이후 전국인민대표대회 부회장을 역임해 나름대로 대우는 받았다. 그의 자식들도 인민해방군 장교를 역임하고 있는데 그 중 장남이자 동부전구 부사령원 육군 사령원을 지낸 친웨이장 중장은 흑사회를 박살낸 것으로 유명하다. # [42] 뉴욕 타임스 중국어판 2019년 6월 3일자 기사에 잘 나와 있다.(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 기자 장림(江林)의 증언이다.) 나와 전총참모부 훈련처장 장성(张胜)은 장아이핑의 전기를 쓰기 위해 그를 방문했다. 장아이핑은 7명의 상장이 나서기 전에 중앙군사위원회에 단독으로 보고를 했다고 말했다. 그때는 아직 계엄이 내려지지 않았는데, 그(장아이핑)는 이 상장들을 이끌고 광장에 가서 학생들과 대화한 후, 중앙군사위원회에 학생들과 대립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장아이핑은 "우리(중국공산당 초기지도자들)도 소싯적에 학생운동을 했는데, 왜 그들(학생)들과 대화하지 않고 적으로 삼느냐. 이들이 단식해서 병든 모습을 봤는데 왜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43] 단순히 민주화했으니 잘 됐겠다는 것이 아니다. 붕괴 후 혼란이라던가 과도기적 체제에서 또 다른 독재 세력이 등장할 수 있는 등 혁명에는 여러 불안사항이 내포된다. 하지만 천안문 6.4 항쟁의 경우는 단순히 못살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민중운동이 아니라 지식인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진지한 고찰이 있었고, 그것에 호응한 시민들이 일어난 민주 항쟁이란 점부터가 결을 달리하는 항쟁이었다. 또한 땅덩어리나 내수시장 자체가 원체 큰데다, 군경 또한 강력한 통제를 받는 집단이었기에 오히려 혁명에 성공했다면 튼튼한 경제기반에 더해 자유사회 특유의 역동성까지 더해지면서 폭발적인 경제, 사회, 문화 성장의 발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에 IF란 없어서, 중국 공산당이 붕괴되고 오히려 소수민족의 독립이나(물론 민주사회였다면 무장 항쟁이 아닌 캐나다 퀘벡 등처럼 분리 투표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중진국 함정 등에 빠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긴 하다. 허나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천안문 항쟁이 성공했을 시 더 좋았을 가능성이 높긴 하다. 게다가 대만과의 통일 문제도 급진전되었을 것이고, 홍콩도 오늘날까지 시위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44] 이후 중공은 류샤오보가 암에 걸리자 시간을 끌다가 더 이상 손을 쓸수가 없는 말기가 되고 나서야 선심쓰는 척 치료를 받게 해줬고 결국 2017년 사망했다. [45] 다만 이 상은 중국 정부가 허가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조직이 만든 상이다. [46] 중국의 항공기 등록번호인 B-8964는 존재하지 않는다. B-8963( 춘추항공 A320-200)이나 B-8965( 중국남방항공 A321neo)는 있다. [47] 중국 인구를 감안하면 10명 중 1명이 약간 못 되는 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48] 이 근처에는 납치 사건이 있었던 코즈웨이베이 서점도 위치해 있었다. [49] https://jacobinmag.com/2019/06/tiananmen-square-worker-organization-socialist-democracy [50] 사회주의해방당의 Brian Becker가 작성한 글이다. [51] 심지어 천안문 항쟁에 가담한 이들 가운데는 중국 정부로부터 탄압받는 위구르족 출신인 외르케시 될레트나, 조선족(재중동포) 출신의 영화감독 장률 등 중국 내의 소수민족들도 포함되어 있다. [52] 천안문 항쟁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곡이다. [53] 첫 번째 화면에 적힌 문장(給我自由 或給我死亡)은 '나에게 자유를 주거나 나에게 죽음을 주어라'라는 뜻이다. 패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와 동일한 의미. [54] 리그베다 위키에서는 이 문서에서 유혈 진압 직후 사진을 올리고 지우는 수정전쟁이 난 적이 있었다. [55] 영상 속 두 아나운서(두시안, 쉐페이)는 검은 옷을 입고 침울한 어조로 뉴스를 읽었다는 이유로 해고 등의 불이익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