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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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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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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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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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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펑 리톄잉 저우카이솬
중화인민공화국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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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화이진펑 }}}}}}}}}}}}}}}
<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중화인민공화국 제4대 국무원 총리
리펑
[ruby(李,ruby=Lǐ)][ruby(鹏,ruby=Péng)](李鵬, 이붕) | Li Peng
파일:리펑 총리.png
출생 1928년 10월 20일
중화민국 쓰촨성 청두시
사망 2019년 7월 22일 (향년 90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학력 모스크바전력공학연구소 (졸업)
재임기간 제6기 국무원 부총리
1983년 6월 6일 ~ 1987년 11월 24일
제1대 국가교육위원회 주임
1985년 6월 18일 ~ 1988년 4월 12일
제4대 국무원 총리
1988년 3월 25일 ~ 1998년 3월 17일
제7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1998년 3월 16일 ~ 2003년 3월 15일
경력 베이징전력공급국장
국무원 전력공업부 부장
1. 개요2. 생애3. 여담4. 가족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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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 정치인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제3세대 정치인의 대표적 주자이자, 마오쩌둥의 오른팔이었던 2인자 저우언라이의 양자이기도 하며, 2세대 집권자 덩샤오핑의 심복 중 하나로서, 덩샤오핑 집권후반기부터 장쩌민 초기 시절까지 국무원 총리를 지냈다. 장쩌민 시절에 총리였지만 상하이방이 아닌 태자당 계열이다. 천안문 6.4 항쟁 당시 시위 진압을 주도하는 입장을 보였기에 중국 공산당의 1당 통치에 반대하는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들과 반체제 인사들에게는 학살자로 불리기도 한다. 같은 이유로 서구에서는 “베이징의 도살자”(Butcher of Beijing)라는 별명을 얻었다.

2. 생애

1928년 쓰촨성 청두에서 중국 공산당 초기 지도자 리옌쉰(李硯勛)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1927년 장제스가 공산당의 합작 파기를 선언하고 공산당 숙청을 단행하기 위해 벌인 4.12 상하이 쿠데타 과정에서 부친 리옌쉰은 처형되었고, 리펑은 고아로 떠돌았다. 하지만 공산당은 이렇게 희생당한 당원의 유족을 찾아내 당시 대장정을 마친 공산당이 건설한 옌안으로 도피시켰고, 리펑도 옌안으로 와서 자라나게 되었다.

이렇게 옌안에 온 혁명 유자녀 고아들은 여럿 있었는데, 마침 자식이 없던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가 입양해 키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리펑도 저우언라이의 양자가 되어 태자당의 일원이 된다.

리펑은 그 양자녀 중에서도 가장 똑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1945년 17살의 나이로 공산당에 가입했고, 공산당의 차세대 엘리트로서 키워지게 되었다. 아직 국공내전이 끝나지 않은 1948년 모스크바 전력 공학원에 유학을 갔다. 박사 학위를 받고, 1949년 공산당이 국민당을 패퇴시키고 대륙을 장악했고, 1955년 리펑은 소련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와 신 중국에서 기술 관료로 계속 출세했다.

처음에는 만주 지역으로가서 발전소 건설 부문에서 일하다가 1966년부터 1980년까지 베이징 전력 공급국 (北京供电局)의 국장으로 일하게 된다.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외국에서 공부한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홍위병에게 박해를 당하기 딱 알맞았으나, 양아버지가 저우언라이라는 무시무시한 거물이었기 때문에 무사히 피해갔다. 기본적으로 천윈의 새장경제(조롱경제(鳥籠經濟)) 이론을 지지하였으며 소련 유학 경험 때문에 스탈린식 중앙집권 경제계획에 익숙한 경제적 보수파에 해당했다.

이어 이렇게 전력 계통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1979년에 국무원 전력공업부 부부장에 임명, 전력공업부 당위원회 위원 및 화북전업관리국 당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82년 9월,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전력공업부 부장 및 당위원회 서기로 승진, 수리전력부 부부장 및 당위원회 부서기 등을 지냈다. 1983년, 국무원 부총리 겸 교육위원회 주임에 임명되었으며, 1985년, 12기 5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 및 중앙서기처 서기에 선출되었다. 자오쯔양이 총서기로 이동하면서 대리 총리를 맡았다가 정식으로 국무원 총리에 선출되었다. 1987년 10월, 13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88년 경제위기를 바탕으로 자오쯔양을 제압하고 국가경제개혁위원회 주임에 임명, 경제정책을 통솔해서 보수파의 지지를 받는 차기 총서기로 부상하게 된다.

하지만 개혁 초기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봉기한 천안문 6.4 항쟁에서 진압 작전을 지휘해서 악명을 얻었는데 악역을 뒤집어썼다는 평도 있으나, 본인 자신이 그 진압에 신념적 확신을 가지고 있는게 분명했기에 그렇게 보긴 힘들다. 좀처럼 공식적 입장을 내보이길 주저하는 덩샤오핑과는 달리 공개적으로 강경 발언을 일삼았고, 덩샤오핑이 리펑과 함께 비밀회담을 한 다음 공산당 내부 비밀 문건으로만 사설을 작성했는데 그걸 덩샤오핑 재가도 받지 않고 멋대로 공개 발표했기 때문이다.[1] 물론 학생이 주동이 된 홍위병의 등쌀에 문화대혁명때 실각해 길게는 10년간 삽질을 하던 8인 원로 회의[2]는 학생운동에 부정적이기는 했지만, 덩샤오핑 및 원로들 본인들도 군벌이나 장제스 독재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을 해본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을 희생시키는 결단을 주저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3] 때문에 단순 집행을 떠맡겨진 또 다른 희생자 운운은 말도 안 되는 것이며, 중국 민주화 운동가들이 이런 권력 관계를 몰라서 그한테 "학살자"라고 비난하는 건 아니다.

물론 원로들에게 충성을 다하긴 했지만,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덩샤오핑한테 이 일로 눈밖에 나게 된다. 진압 자체는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의 의중이긴 했으되, 리펑이 자의로 마지막 순간 머뭇하던 덩샤오핑을 서두를 수밖에 없게 몰아붙인 건 사실이었기 때문. 사실 실무자가 권력자의 의중보다 속도를 더 나가서 권력자를 밀어붙이는 사례는 역사에 많다. 가장 정확한 예로 사마소와 가충의 사례를 들 수 있겠다. 다만 이후에도 계속해서 가충을 중용한 사마소와는 달리, 덩샤오핑은 그러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

때문에 덩샤오핑은 리펑 대신 당시 상하이 서기였던 장쩌민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여 그를 후계자로 삼고 국가주석 및 당 총서기로 임명한다. 자오쯔양이 쫓겨났으니 후임 총서기는 자신일 것이라고 여겼던 리펑은 매우 불만스러워했고 양상쿤과 함께 장쩌민의 중군위 주석 선출에 훼방을 놓으려 했으나 양상쿤은 자신이 중군위 제1부주석, 동생 양바이빙이 중군위 비서장으로 선출되는 조건으로 타협했고, 리펑도 장쩌민을 자신이 조종할 수 있으리라 여겨 최종적으로 포기했다. 리펑은 1998년까지 국가주석 양상쿤(1993년까지) 장쩌민 (1993년부터 2003년까지) 밑에서 총리역을 하였으나 1993년부터는 심장병으로 퇴임하여 제1부총리 주룽지가 총리를 대행하였고 남순강화 이후 개혁개방에도 더 딴지를 놓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리펑의 카드였던 치리정돈은 이미 시장화가 많이 된 중국경제에서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에 스탈린식 경제에 익숙한 리펑의 입지는 심장병이 아니더라도 심각하게 좁아진 상황이었다. 결국 10년 임기에 걸려 장쩌민보다 먼저 퇴임했고, 그를 이어 주룽지가 총리에 오른다. 1994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중 최초로 대한민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퇴임 후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맡았으며 상무위원장 퇴임 이후에는 여러 상징적인 지위를 맡으면서 조용히 살았다. 하지만 강경 진압에 상당 부분 개인적 확신을 가지고 앞장선 건 사실이라 민주화 운동가 및 반중 인사들에게는 나쁜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천안문 사태 당시 자신이 악역으로 몰린 것에 대한 반발로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기 위해 6.4일기라 불리는 회고록을 남겼는데 정부 당국의 검열로 출판이 무산되었다가 결국 자오쯔양이 그랬던 것처럼 원고를 밀반출하여 출판하는 근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천안문 사태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나 리펑이 고의적으로 왜곡한 것같은 내용도 일부 있어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2010년에는 미국에서 중국 민주화 운동가들의 주도로 영역본 출판이 시도되었으나 출판 3일 전에 저작권법 문제로 무산되었다. 2014년에는 천안문 사건을 언급하지 않은 별도의 정치적 회고록을 출판했다.

2008년부터 건강 이상설이 제기가 되어서 그런지 꾸준히 사망설이 나오고 있다. # 결국 2019년 7월 22일에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3. 여담

4. 가족

아들 리샤오펑 (李小鹏, 1959년 ~)은 중국 교통운수부 부장(장관)이자, 당직으로는 당 조직 부서기를 맡고 있다. 딸 리샤오린 (李小琳, 1961년 ~)은 칭화대학 MIT를 나온 재원으로 아버지의 배경을 업었는지 전력 회사를 설립하고 다이탕 그룹 부회장까지 오르는 등, 중국 전력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나, 사치 행각이나 외국 계좌 보유설 등의 여러 추문이 흘러나왔고, 2015년 시진핑의 부패 단속의 압력때문에 모든 지위를 사임했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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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때문에 덩샤오핑은 자기 이름 왜 파냐고 매우 불쾌해했다. [2] 덩샤오핑, 천윈, 리셴녠, 양상쿤, 보이보 펑진, 완리, 쑹런충, 시중쉰 인데, 모두 문화대혁명 당시 귀양을 가서 삽질을 하거나 홍위병에게 구타당한 경험이 있던 인물들이었다. [3] 본인 자신이 피해자 중 하나인 왕단이 저술한 <<왕단의 중국현대사>>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