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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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제6대 주석 후진타오 [ruby(胡, ruby=Hú)][ruby(锦, ruby=Jǐn)][ruby(涛, ruby=tāo)] | 胡錦濤(호금도) | Hu Jinta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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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출생 | 1942년 12월 21일 ([age(1942-12-21)]세) | ||
중화민국
장쑤성 타이저우현[1] (現 중국 장쑤성 타이저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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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제6대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 ||
1998년 3월 15일 ~ 2003년 3월 15일 | |||
제4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 |||
2002년 11월 15일 ~ 2012년 11월 15일 | |||
제6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 |||
2003년 3월 15일 ~ 2013년 3월 14일 | |||
제5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
2004년 9월 19일 ~ 2012년 11월 15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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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본관 | 룽촨 후씨 | |
부모 |
아버지 후징즈(胡静之)[2] 어머니 리원루이(李文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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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여동생 후진롱, 후진라이 | ||
배우자 | 류융칭 (刘永清, 1940년생) | ||
자녀 |
아들 후하이펑 (胡海峰, 1971년생) 딸 후하이칭 (胡海清, 1972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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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타이저우 중학 (고교) (졸업) 칭화대학 (수리공학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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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무종교( 무신론) | ||
신체 | 175cm[3] |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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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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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국경절 열병식에 등장한 초상화 |
2003년부터 2013년까지 제6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재임했다. 다만 최고 실권자로 여겨지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는 장쩌민과의 알력 다툼으로 인해 2004년에야 넘겨 받았다. '과학 발전관'과 '붉은 자본가', '8영 8치' 등의 아이디어를 중국공산당의 행동 강령에 추가하면서 명실상부한 중화인민공화국 4세대 지도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2007년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주요 전략 사상'을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의 '삼개 대표 사상'과 나란히 당 규약에 명기했다.[4]
그의 치세 10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이래 가장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누렸다. 경제 규모는 네 배로 늘어나 당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을 추월하고 G2의 위상을 확립했으며 내실로도 중진국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집권 기간에는 지나치게 유약하고 개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던 인물이나, 2010년대 중반부터 그의 후임 주석인 시진핑이 종신 집권을 획책하고 1인 독재 체제와 사회 통제를 강화하며 국수주의적 외교를 펼침에 따라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5]
2022년 후진타오 강제 퇴장 논란 이후로는 그나마 남아있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전직 주석 예우만 받으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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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후진타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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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후진타오와 학생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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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기 시절의 후진타오 |
그런데 티베트 지역에서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는 승려들의 반중 시위가 이어지자, 1988년 12월 당 중앙은 후진타오를 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로 임명하여 라싸로 급파하였다. 후진타오는 티베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단호하게 소요를 진압하면서 강하고 결단력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급부상했다. 직접 철모를 쓰고 강경 진압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 덩샤오핑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은 크게 만족했고, 이것이 차세대 주자로 치고 올라가는 발판이 되었다.
덩샤오핑의 적극적 지지 속에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파격 승진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성장 배경을 가진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단원들을 자기 파벌로 삼아 세력을 키워 199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2002년 장쩌민의 뒤를 이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맡은 데 이어 2003년 국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2004년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어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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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와 덩샤오핑[8] |
원래부터 본인의 적극적인 권력의지나 카리스마로 최고자리까지 오른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 등의 당지도부의 후원 및 계파간 합의에 의해 최고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집권 내내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타협하는 자세로 임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반중 논객의 분석처럼 장쩌민이 뒤에서 수렴청정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다. 후진타오의 공청단은 상하이방 세력보다 당내에 뿌리가 매우 깊고, 특히 상하이방은 60년대생 이후의 세대가 거의 없는 상태로 대부분 노장이지만 공청단은 공산당의 제도상 계속 충원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 권력투쟁에서 유리해지게 되어 있다.
러닝메이트인 국무원 총리( 정부수반)는 원자바오(온가보温家宝)로 2003년부터 10년간 계속 함께 한 것이 특징이다.
2.2. 대국 굴기 - 대외적 치적
그의 통치 시대는 전반기의 화평굴기'(和平崛起, 평화롭게 일어선다)'에 이어 거침없이 상대를 압박한다는 뜻의 '돌돌핍인(咄咄逼人)'까지 나아갔다.중국은 그의 10년 치세 동안 가히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처음 4년간(2003년 말 ~ 2007년 말)에는 GDP가 12조 위안(1.5조 달러)에서 24조 위안(3조 달러)으로 2배, 무역액은 3.5배(6천억 달러 → 2조 1천억 달러)나 성장했고, 후반 임기 5년 동안에도 계속 성장하여 2010년 일본의 경제 규모를 추월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5배 가까이 증가한 외환 보유액은 이미 2007년 1조 5천억 달러로 세계 1위가 되었다.[9]
후진타오 시대에 중국인의 1인당 GDP가 1,289달러(2003년)에서 7,020달러(2013년)로 폭등하며 중국은 비로소 개발도상국 중에서도 중하위권이던 수준[10]에서 하위권으로나마 중진국 수준의 질적 경제를 가지게 된다. 다만 이 성장에는 환율과 인플레이션의 원인도 있었기에 이 시기 중국의 물가도 상당히 올랐다.
대외적으로는 항공모함( 랴오닝급)까지 도입했다.
2.3. 동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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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 |
대한민국 정부와의 관계도 좋았다. 연평도 포격전에서 기계적 중립을 통해 사실상 북한의 편을 들어준 것을 제외하면[11]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시진핑과는 달리 당시 대만의 천수이볜 민진당 정권에 대해서도 중국 내 강경 여론에도 불구하고 유화책을 쓰려고 했으며 # 인도, 베트남과도 원만한 관계를 가지려 노력했다. 이러한 연유로 2002년에서 2012년 사이의 인도인과 베트남인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시진핑 집권기의 중국과 비교해 굉장히 좋았다.
후진타오 집권 시기 한국과 일본 내에서는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약간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와 같은 이미지까지 존재했다.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흔히 대륙 시리즈라고 하여 중국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올리는 것이 굉장히 유행했던 적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후진타오 집권기 시절의 중국이 가진 이미지를 잘 보여줬던 대목이다. 후임 시진핑 시대에 들어 중국의 오만한 행보로 이웃나라 한국과 일본이 중국에 반감을 가지게 되어 짱깨, 지나 등의 비하적인 명칭으로 중국을 부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졌지만 후진타오 시기에는 중국을 두고 스스로 대륙, 따거, 파트너라고 부르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
이렇게 후진타오 시대에 이루어진 폭발적인 중국의 경제성장은 대한민국에게 있어서도 중국으로의 수출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면서 경제 안정의 토대가 되었고, 대외적으로도 한국을 존중하는 중국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비추어져 국가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었지만, 한편으로는 동북공정이나 이어도와 같은 실제적 위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다가오기도 했다.
후임 시진핑이 중국의 신세대이자 애국민족주의로 뭉친 소분홍 세대를 이끌고 노골적으로 한국을 상대로 동북공정과 문화공정을 진행한다면, 후진타오는 한국을 상대로 온건하고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 중국에 호감을 가지게 하고 뒤에 숨어서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따라서 후진타오 시대에 이미 고구려 역사 침탈이 본격화됐고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조선족을 앞세워 한복을 등장시켰음에도 당시 한국 대중은 크게 중국에 반감을 가지거나 분노하지 않았고 가볍게 논란만 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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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북한 김정일 위원장 |
이렇듯 노골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전랑외교를 펼치는 시진핑과 달리 후진타오는 겉으로는 유화정책을 펼치면서도 뒤에 숨어서 서서히 잠식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나 일본에서는 오히려 스스로 중국이 고립되는 길을 자초하는 시진핑이 아니라 후진타오가 장기적으로 훨씬 위협적인 인물이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2.4. 경제 성장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인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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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의 후진타오 |
다만 대침체에도 끄떡 없었지만 그만큼 거품경제의 정도가 심해 부동산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고 보다 심각해진 양극화와 계층 갈등도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구체적인 중국 경제의 문제점은 중국/경제/부정적 전망을 참조.
인구 성장은 10년간 1억(12억 → 13억)으로 성장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만큼 눈앞에 다가온 고령화사회도 중국의 가장 큰 문제로 떠올랐다. 중국의 계획생육정책은 군사정권 시대 한국보다도 더한 수준으로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소득은 겨우 중진국 수준에 불과한 반면, 빠르게 동아시아의 선진국인 한국, 일본, 대만 수준의 초저출산, 초고령화 사회가 닥쳐온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후진타오의 시대에 중국인 평균 수명은 73세까지 올라갔다. 특히 상하이나 선전 같은 경우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중국 내에서는 이런 빠른 경제 성장에 정신없이 달려가는 신세대들이 천안문 사태 세대보다 더 약한 정치 의식을 가지게 됐다. 1980년대생으로 구성된 이른바 '80后(빠링허우)' 세대. 중국판 88만원 세대로 그만큼 현실지상주의의 성향도 강해졌다고 한다. 약간 한국과 10년, 미국과 20년 간격을 띄고 X세대같은 느낌도 난다. 또한 이 시기부터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으며 쓰촨성 대지진 같은 악재도 있었다. 물론 원자바오 같은 인물이 수습을 했다.
후진타오 시대 경제의 성장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경제 자유화의 혜택을 누렸지만, 당시 1억 5,000만명이 최저 임금제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하루에 1,000원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다만 마오쩌둥 시대 문화대혁명 직후에는 중국의 1인당 소득이 인도보다도 더 낮았지만 후진타오 시대에 이르러 1인당 소득이 인도보다 4배 이상으로 뛰어올랐다. 여러모로 빈부격차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성장과 분배를 모두 잡기는 힘들다는 것을 감안하고 본다면 비판을 받더라도 경제적으로 무능하지는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후진타오 시기,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25만에서 30만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판결도 받지 못하고 노동 재활 캠프에 감금되었고 범죄 판결 중 목격자를 확보한 경우가 5% 미만이며, 유죄 판결 비율이 99.7%에 육박했다. 정부는 우편물을 검열할 수 있으며, 전화, 팩스, e메일과 텍스트 메시지를 검사할 수 있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이면도 빼놓을 수 없다. 대규모의 올림픽 경기장을 건설하고 못사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공안까지 동원하여 베이징 내 빈곤층을 주거지에서 끌어내리는 강제 이주 조치가 있었다.[13]
후임 시진핑과 비교를 한다면 인권문제에 있어서 후진타오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 편이나 이것은 시진핑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며 후진타오의 행태 역시도 서방의 기준에선 정상적인 국가 지도자의 모습으로 보기 어렵다.
2.5. 미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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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상단)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하단) |
당시 후진타오 주석이 연설을 마치고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부시 대통령이 후 주석의 왼쪽 팔 소매를 잡아끌었다. 부시 대통령은 후 주석을 준비된 계단으로 안내하려고 다른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후 주석의 소매를 잡아끈 것이나, 이때 후 주석이 짜증을 내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방영됐다. 소매를 잡아끄는 과정에서 후진타오가 입고 있었던 양복이 찢어졌는데, 알고보니 이게 또 짝퉁 이탈리아 양복임이 밝혀져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꼴이 되었다.
부시 대통령이 일부러 이러한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해서 별다른 의도 없는 행동이라는 해석도 있지만[14], 미국의 모든 방송사와 중국 국영 방송인 CC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 발생한 일이라서 말이 매우 많았다. 당연히 중국측에서는 미국의 외교적 결례라며 비판했고, 미국측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퇴임 전까지 오바마 미국 대통령하고도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이른바 G2라며 세계 양강으로 대우했고 대신 그만한 대국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했다. 이는 중동 문제에서 발을 빼는 대신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아시아 태평양 재균형 전략'의 일원이었다.
2.6. 퇴임
2012년 11월 중국 공산당 제18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 공산당 총서기 직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을 시진핑에게 넘겨주었으며, 국가주석 직에서도 2013년 3월 퇴임하였다.후계로는 공청단(공산주의 청년단) 파벌인 리커창을 밀었으나, 결국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손을 잡은 태자당의 시진핑이 후임자가 되었다. 리커창은 2인자로 차기 국무원 총리 직을 맡는 것으로 타협했다. 많은 관측자들은 후진타오도 전임 장쩌민처럼 인민해방군 통수권을 가진 직책인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은 몇년 더 유지하면서 자기 세력을 확실히 심어놓을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군대로 인민해방군의 최고 통수권자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다. 마오쩌둥이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라고 설파했듯이, 중국의 최고권력자는 국가주석도 중국공산당 총서기도 아니고 바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다. 덩샤오핑 이후로는 보통 한 명이 세자리를 겸임하면서 당 / 정 / 군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굉장히 미묘한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후진타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중앙군사위 주석 직까지 시진핑에게 이양하고 퇴임했다. 여기에는 몇가지 추측이 있다.
- 자신이 첫 몇년간 장쩌민의 눈치를 보며 반쪽짜리 국가원수였던 설움을 후임자에게는 겪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즉 자신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퇴임함으로써 아직도 상당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장쩌민까지 함께 야인으로 돌아가라는 정치적 메시지로 보인다. 실제로 장쩌민은 18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도 후진타오 바로 옆자리를 항상 차지하는 등 아직 막강한 권력이 있음을 과시하였다.
- '깨끗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바로 넘겨주었다는 관측이다.
- 중앙 군사위 주석 직을 바로 넘겨준 것 자체가 '빚지게 만든 것'이라는 의견이다. 즉 바로 넘겨주는 은혜를 베풀어 자신과 계파인 공청단을 해코지하는 것을 막은 의도라고 해석하는 쪽도 있다. 사실 둘 다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시진핑의 집권 자체가 후진타오의 장쩌민에 대한 대항 의식 때문이고 둘이 연계해 장쩌민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아마도 진실은 후진타오 본인만 알 것이다. 그러나 상하이방 다음의 반부패 타겟은 공청단인게 확실해져가는 분위기이기에 시진핑에게 배신당했다는 의견도 있다.
2017년 춘절을 맞아 차세대 지도자 후보로 꼽히는 후춘화(胡春華) 광둥성 서기와 함께 공개 행보를 벌이기도 했다.
2.6.1. 퇴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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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중국 국경절 열병식의 후진타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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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중국 공산당 100주년 기념식의 후진타오 |
2022년 11월 30일 장쩌민 前 주석이 사망하면서 장례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다. 이후 같은 해 12월 5일 장쩌민 주석을 추모하기 위해 바바오산 혁명공묘를 방문했고 화장식에 참여했다.
2.6.1.1. 제20차 당대회 강제 퇴장 논란
자세한 내용은 후진타오 강제 퇴장 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3. 고통과 수난의 10년 권좌
권좌를 차지한 10년 동안 전임자 장쩌민의 상왕 행세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002년 당 총서기를 이양받았지만 장쩌민은 핵심 요직인 중앙 군사위 주석직을 장악한 상태에서 기존의 7인 체제였던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의 정원을 9명으로 확대하고 해당 상무 위원에 무소불위의 권좌가 되어버린 정법위 서기[16](당시 정법위 서기는 장쩌민의 측근인 뤄간이 역임하고 있었고 그 저우융캉은 공안 부장에 재직할 시절이다)까지 편입시키면서, 상무위 9명 중 6명 가량을 상하이방으로 채워넣다시피했다.결정적으로 장쩌민은 궈보슝과 쉬처이허우를 중앙 군사위 부주석으로 삼아, 군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게끔 만들었다. 일련의 과정들은 훗날 후진타오가 중앙 군사위 주석을 인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허수아비로 맴돌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궈보슝와 쉬처이허우가 매관 매직을 통하여 군부 내에 세력을 키우고 후진타오를 철저하게 배제시킨 까닭에, 후진타오 집권시절에 생긴 말이 정령불출 중남해(政令不出中南海, 정책이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 밖으로는 전해지지 않는다.)이었다.
당시 후진타오의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일화로 2004년, 상하이 당 서기였던 천량위가 당 중앙의 거시적 조절 통제가 상하이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면서 원자바오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일개 직할시 당 서기가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 위원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하극상이었지만, 정작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원자바오는 총리급인 상무위원인데 부총리급인 정치국원 천량위에 갈굼에 당할 정도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광역시장겸 시도당위원장이 국무총리에게 대드는 꼴이다.
이렇듯 사방이 장쩌민에게 포위당해, 후진타오가 본인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하던 기류는 2006년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17]가 부패 혐의로 인해 낙마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후계자 리커창을 지원하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장쩌민과의 권력암투 끝에 두 사람은 상하이방도 공청단도 아닌 태자당의 시진핑을 차기 최고지도자로 합의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 모두 속내가 달랐던터라, 후진타오는 리커창, 장쩌민은 자신의 절친 보이보의 아들 보시라이를 후계자로 앉힐 생각이었는데, 보시라이가 언론통제로도 덮지 못한 초대형 스캔들로 몰락하면서 후진타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리커창이 최고지도자가 되고 후진타오계가 상무위원회를 장악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던 장쩌민은 후진타오의 심복 링지화 중앙판공청 주임(쉽게 말해 대통령비서실장) 아들이 페라리를 몰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을 이용, 링지화의 대규모 부정축재를 공론화시켜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회 다수를 장악하려던 후진타오의 계획을 무산시킨 결과, 상무 위원회 7명 중 후진타오계인 공청단은 2명 만이 진출하였고 최고지도자도 리커창이 아닌 시진핑으로 확정되었다.[18]
이에 후진타오는 시진핑에게 국가 주석과 중앙 군사위 주석을 한 번에 넘겨주어 상왕정치를 하지 않는 대신, 장쩌민도 함께 은퇴시킬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 소위 동귀어진 작전. 그리고 이 판단은 결과적으로는 늑대를 쫓아내자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 되었다. 시진핑은 장쩌민의 영향력이 쉽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취임하자마자 당과 군의 장쩌민 측근들은 물론 아들까지 부정부패 혐의로 처벌하며 장쩌민을 순식간에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청단도 숙청과 좌천을 당했고 후진타오 본인조차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갑자기 자리에서 퇴장당하는 치욕을 받게 되었다.
4. 약력
<rowcolor=#ffff00> 연도 | 활동 |
1942년 | 상하이 출생 |
1965년 | 베이징 소재 칭화대학 수리공정과 졸업 |
1988년 ~ 1992년 | 티베트 시짱 자치구 당 서기, 14차 당 대회 최연소 정치국 상무위원 선출 |
1989년 | 천안문 사태 당시 당국의 무력 진압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짐 |
1992년 | 덩샤오핑이 중점 배양 후계자로 지명, 당 서열 7위로 상승 |
1997년 | 15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재선출 |
1998년 | 국가 부주석 임명 |
1999년 | 당 중앙 군사위 부주석 |
2001년 2월 |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회동 |
2002년 4월 | 미국 방문, 부시와 재회동 |
2002년 11월 15일 | 당 총서기 취임 |
2003년 3월 15일 | 국가주석 취임 |
2004년 9월 19일 | 중앙군사위 주석 취임[19] |
2012년 11월 15일 | 당 총서기 및 중앙군사위 주석 퇴임 |
2013년 3월 14일 | 국가 주석 주석 퇴임 |
5. 기타
- 후진타오 자신은 중국 최대의 성군 중 하나로 꼽히는 강희제를 그토록 본받고자 했으나, 정작 후진타오의 뒷배로 정권을 잡은 후임 시진핑은 강희제의 흔적을 문화 정책 등에서 지우다시피 한다. 시진핑이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를 무너뜨리고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상기하면, 시진핑의 야욕을 가늠치 못하고 그에게 순순히 권좌를 넘긴 것이 후진타오의 실책이라는 평도 있다.
다만 중국은 본래
마오쩌둥 시대 이후 집단지도체제가 자리잡은 이래로 현역 지도자가 후임을 정할 경우, 차기 후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차기 후임을 정하는 방식을 유지해왔다. 이를 격대지정이라 한다. 현역 지도자가 후임과 결탁해 정국을 장악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나름의 안전 장치가 된다. 즉 후진타오를 후임으로 지명했던 것은 그의 전임
장쩌민이 아니라 장쩌민 이전의 지도자 덩샤오핑이었으며, 후진타오도
시진핑을 후임으로 지명한 것이 아니라 차차기로서
후춘화를 지명했다. 시진핑을 차기 지도자로 지명한 것은 후진타오가 아닌 장쩌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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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교편을 잡다가 그만두고 찻집을 운영했는데, 전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찻집을 빼앗겼다.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나라에서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2003년에 일어난 사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태 진상을 은폐한 자들을 엄벌에 처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고 사스 사태가 진정된 후에는 자국의 책임이라는 등 사과하기도 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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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영애와 후진타오 중국 주석 |
- 대한민국의 여배우 이영애와 만났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도 후진타오는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았다. 특히 조선 궁녀의 이야기를 다룬 요리 드라마 대장금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 덕에 이영애를 직접 초대해 만나기도 했던 것이다.
- 애처가라고 한다. 아내 류용칭이 자신의 부탁으로 공산당원으로서의 출세를 포기하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아내를 아껴준다는 뒷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 의외로 키가 175cm로 큰 편이었다. 현직 국가주석 당시 사진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168cm)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173cm)보다 확연히 큰 것을 알 수 있다. 키가 178cm 전후로 추정되는 시진핑 주석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2006년 아베 신조(175cm)와의 회담 당시에도 신장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 지금은 많이 노쇠하여 173cm로 줄었지만 여전히 객관적으로 봐도 덩치가 큰 편인 시진핑과는 큰 차이가 없다.
- 자식이 두명 있는데 큰아들 후하이펑(胡海峰, 1971년생)은 기업인으로 재직하다가 2010년대 관리로 전직해서 저장성 자싱시에서 부시장까지 역임했다. 2019년 9월 일부 반중 화교 언론들이 " 시진핑이 후진타오를 달래기 위해 그의 아들인 후하이펑을 시안시장으로 임명한다"는 설을 풀었으나 임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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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베이징 올림픽에 참석한 각국 정상의 모습 |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각국의 정상들을 줄줄이 세워놓고 마치 황제가 알현을 받는 듯한 모양새를 만들어 각국에 외교 결례가 아니냐는 논란을 빚기도 했다.( #) 상단 사진은 당시의 모습으로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 트라이안 버세스쿠 루마니아 대통령, 후쿠다 야스오 일본 수상의 모습이다. 옆자리에는 정상들의 배우자가 위치했다.
- 중국의 역대 집권자들 중에서 화궈펑을 제외하면 가장 짧은 집권 기간을 기록했다. 원래 관료출신으로 본인의 권력 의지가 아니라 덩샤오핑의 낙점으로 정권을 승계한지라 권력확대나 집권연장에 별 관심이 없었다.[21] 다만 국가주석 임기만 따지자면 장쩌민과 마찬가지로 10년이다.
- 대한민국의 중국 표준음 제도가 전면적으로 적용 된 첫 중국 최고지도자이다. 마오쩌둥(모택동), 화궈펑(화국봉) 시기까지는 거의 대부분 한국 한자음으로 표기되었고, 덩샤오핑(등소평), 장쩌민(강택민)은 중국어 발음과 한국 한자음 표기가 공존했다.
- 시진핑이 시다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것처럼 이쪽 역시 후꺼(胡哥 : 후 형님)라는 별명이 있지만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사실 후진타오는 자신에 대한 호칭에 대해 시진핑마냥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시진핑에 비해 자기 애칭이 그다지 유명해지지 않은 면도 있다.
- 후진타오(胡锦涛)라는 이름의 한국 한자음은 호금도다. 대한민국에선 주로 노년층 위주로 손문( 쑨원), 원세개( 위안스카이), 장개석( 장제스), 모택동( 마오쩌둥), 주은래( 저우언라이), 등소평( 덩샤오핑), 이광요( 리콴유)와 같이 중화권 정치인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발음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22] 후진타오의 경우 어감 때문에 호금도라 불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진핑의 경우, 잘 쓰이진 않아도 습근평이라는 한국식 발음의 이름도 어느 정도 알려진 반면, 후진타오를 호금도라고 부르면 절대 다수는 모른다. 북한에서는 '베이징' 정도만 제외하면 중국 인명이나 지명을 한국 한자음으로 발음하기에 선전 방송에서도 '호금도동지'라고 언급하였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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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 | 쓰촨성 대지진,(2008), 2009년 우루무치 유혈사태,(2009), 중국 재스민 혁명,(2011), | ||
관련 정치인 | 덩샤오핑 · 장쩌민 · 시진핑 · 리커창 · 후춘화 · 보시라이 · 원자바오 | ||
기타 |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 동북공정 · 반분열국가법 · 후진타오 강제 퇴장 논란 |
[1]
공식적인 출생지지만 대체적으로 원적지인
안후이성 지시 출신으로 보는 편이다.
[2]
초명은 후쩡위(胡增钰).
[3]
주석 당시에는 175cm였으나 노화의 진행에 따라 신장이 줄어 173cm다. 그러나 현대 중국인 남성 평균 신장(172.6cm)보다 여전히 큰 장신이며, 1940년대 출생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장신이다.
[4]
일당제 국가인 중국에서 최고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정책을 사상적,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들고 이를 홍보함으로써 인민들의 지지를 받고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5]
대체로 중국인들은 후진타오 시대에 느꼈던 희망과 가능성,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를 그리워하며 외국인들은 후진타오의 평화 지향적 외교를 높게 평가한다. 다수의
친중 세력들이 생긴 것도 후진타오 때로, 이들은 친중을 유지하면서도 반시진핑으로 돌아섰다.
[6]
쉽게 말해 당, 정, 군 고위직이
관료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는답시고
시골이나
공장으로 보내
체험 삶의 현장을 시키는 것이다. 이게
전시행정에 그쳤거나 일년에 며칠 정도 단기간이면 또 모르겠는데, 완전히 거처를 옮겨서 시골로 보낸 다음에 일부러 방치했다. 사실상의
귀양이 된 것이다.
덩샤오핑은 물론이고 덕분에 간부와 지식인, 학생 등 고등교육을 받은 천만명 가량의 엘리트 계층이 졸지에 시골 깡촌의
노동자가 되어버렸다. 사실 문화 대혁명 당시 하방은 마오쩌뚱이
홍위병을 이용해서 '자본주의의 못된 물이 들었으니 다시 혁명화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이었다.
[7]
당대회가 아닌 조선로동당 당대표자회와 비슷한 행사.
[8]
여담으로 사진을 조작하여 뒤에
장쩌민이 삭제된 사진이 한때 떠돌기도 했지만 해당 사진이 원본이다.
[9]
여담으로 종합 주가 지수는 2003년말 1497에서 2005년 6월 998로 최저점을 찍었다가 2007년 5291, 2007년 말 6124로 급상승, 이후 2008년 금융 위기를 만나며 다시 추락하여 지금은 2200선까지 빠졌다.
[10]
다만
최빈국 수준은 이미
장쩌민 시기인 90년대 후반부터 벗어난 상황이었다.
[11]
다만 이 시기 중국은 연평도 포격전 한국 피해자 유족들에게 유감을 표하긴 했다.
[12]
이 시기 일본은 민주당 정권이었는데, 일본이 경제 규모는 물론 외교적으로도 중국에게 완벽하게 굴복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일본 내부의 여론은 곧 민주당의 몰락과 더불어 강력한 일본의 부활을 외치는 자민당
아베 신조의 집권으로 이어지게 된다.
[13]
다만 이것은 중국보다 규모가 작기는 했지만
1988 서울 올림픽 당시에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다른 몇몇 올림픽 개최국가에서도 벌어졌던 사회문제였다.
[14]
그도 그럴것이 부시 대통령은 외교적 결례를 자주 범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15]
염색의 효과인 것일 수도 있다. 집권 당시에는 60대였지만 흑발이라 나이에 비해서는 비교적 젊어보였다. 퇴임 이후에는 염색을 그만둔 것으로 추정된다.
[16]
당시 정법위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우리나라로 치면 검찰, 법원, 국정원을 전부 산하에 둘 뿐만 아니라 무장 경찰권의 지휘권마저도 정법위 서기에 귀속되어있다. 이 정도면 그냥 또 다른 권좌라고 해도 무방하다.
[17]
당시 장쩌민이 후진타오의 후임 주석으로 만들려는 목적하에 후계자로 키우고 있었다. 천량위가 후진타오의 후임 주석이 되면 사실상 장쩌민이 도로 정권을 가져오는 것이나 다름없다.
[18]
대신 공청단을 군의 요직에 많이 진출시켰다. 대외적인 군사 경쟁과 충돌이 심화되어 군의 위상이 올라갈 것임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19]
이것으로 장쩌민과의 밀고 당기기 권력 암투는 일단락 되었다.
[20]
그래서 일부 친중 세력들은 후진타오와 비교하며 시진핑을 "중국 망친다"며 까기도 한다.
[21]
물론 후진타오의 이러한 행보는 훗날 시진핑이
종신독재를 추구하면서 한자녀 정책 폐지를 제외하고 긍정적 업적은 사실상 없다시피 한 모습으로 국내외적으로 비난받게 되자 후진타오 본인에 대한 평가를 더욱 높이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22]
이것은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
한중일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거나 나타난 모습이다. 중국의 경우, 한자는 표음 문자가 아니므로 외국인의 한자어 이름을 자국 발음으로만 부른다. 예: 퍄오진후이(Piáo Jǐnhuì,
박근혜), 안베이 진싼(Ānbèi Jìnsān,
아베 신조). 일본의 경우 노년층 위주로는 한국 지도자를 리 쇼반(り しょうばん,
이승만), 보쿠 세이키(ぼく せいき,
박정희), 젠 도칸(ぜん とかん,
전두환) 등의 일본식 독음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으며 후진타오도 고 긴토(こ きんとう)라고 부른다. 오늘날 일본에서 한국 현대 인명을 부를 때는
가타카나를 써서 불완전하게나마 한국식 발음으로 칭하는 편이나, 중국 현대 인명을 부를 때는 특별히 중국음을 밝히는 맥락이 아닌 이상 여전히 일본식 독음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도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 소화(쇼와) 등의 표현을 쓰곤 했으나 중국 인명에 대해선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이전 인물에 대해선 한국음을, 이후 인물에 대해선 중국음을 적용하는 기준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 일본 인명은 시대를 막론하고 일본음을 따르는 게 대세.
한자문화권/고유명사 표기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