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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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들의 청나라(
이홍장) 침탈을 대표하는 삽화. 1898년, 르 쁘띠 주흐날 |
언어별 명칭 | |
중국어 | 百年國恥( 번체) 百年国耻( 간체) |
한국어 | 백년국치 |
일본어 | 百年国恥(ひゃくねんこくち)/百年恥辱(ひゃくねんちじょく) |
영어 | Century of Humiliation |
프랑스어 | Le siècle d'humiliation |
독일어 | Das Jahrhundert der Demütigung |
이탈리아어 | Secolo dell'umiliazione |
러시아어 | Век унижения, столетие унижени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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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百 年 國 恥백년국치는 중국의 역사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대략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한 1840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수백년간 강대국으로 군림한 중국이 이 시기 동안 국력이 급격하게 추락 및 서구, 미국, 일본 등의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공을 받아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고 황제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사학, 그리고 반대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쓰이는 용례가 많이 보이지만 사실 이 표현의 최초 사용례는 1915년,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위안스카이가 일본 제국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인 것에 대한 반발로 중국의 중국 내셔널리즘이 대두되면서 나온 개념이다. 이후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또한 이 표현을 널리 사용하면서 '백년국치'는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을 나타내는 대표적 표현으로 자리잡는다.
애초에 개념인만큼 명확히 기간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아편전쟁 이전부터 대영제국을 위시로 한 유럽 열강들은 중국 내에서 아편 밀무역을 한 만큼 그 이전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종결 년도도 1943년 협상들로 불평등 조약들이 철폐되면서 장제스가 백년국치의 종결을 선언한 바가 있으나 중국공산당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1949년을 종결 년도로 보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또한 1953년 6.25 전쟁 휴전 (중국의 소위 "항미원조 전쟁"), 1997년 홍콩 반환, 1999년 마카오 반환을 종결 년도로 보는 이견 또한 존재한다. 양안통일이 이뤄지기 전까지 국치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2. 연표
- 1840년 ~ 1842년: 제1차 아편전쟁과 영국의 청으로의 아편 무역
- 1842년: 난징 조약
- 1844년: 황푸 조약 ( 프랑스 제2제국과의 불평등 조약)
- 1856년 ~ 1860년: 제2차 아편전쟁과 원명원 약탈 및 방화
- 1858년: 아이훈 조약 ( 러시아 제국에 아무르 강 이북 외만주 할양)
- 1860년: 베이징 조약 (러시아 제국에 연해주와 하바롭스크 할양. 외만주의 상실)
- 1884년 ~ 1885년: 청프전쟁
- 1894년 ~ 1895년: 청일전쟁
-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 대만일치시기 시작
- 1898년: 러시아 제국의 다롄 조차 및 러시아 제국의 요동 반도 점령
- 1899년: 의화단의 난과 열강 8국군의 진공
- 1900년: 러시아 제국의 만주 침공
- 1903년 ~ 1904년: 영국의 티베트 침공
- 1905년: 러일전쟁 중 일본 제국의 요동 반도 점령
- 1910년: 신해혁명 (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성립)
- 1915년: 일본 제국의 칭다오 점령 및 21개조 요구
-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령 칭다오 일본 제국으로 할양. 이 반동으로 5.4 운동 발생
- 1925년: 5.30 운동
- 1931년 ~ 1932년: 만주사변, 열하사변, 제1차 상하이 사변
- 1934년: 소련의 신강 침공
- 1937년 ~ 1945년: 중일전쟁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 국부천대)
3. 영향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에서 "백년국치"는 중국 근현대사 해석에 주된 개념이 되어 이 시기 ' 중화 강역의 침탈'에 초점을 맞춘 해석이 주를 이룬다.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 위기에 처했던 중국의 통일과 중화 강역의 보전은 중국인들과 중국 정부의 의식에 깊게 각인되어 중국이 영토보전에 특히나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초석이 되었다.사실, 이 백년국치 전까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최대 점유지역과 동일했던 청나라는 장강 이남에서 건국해 중원을 차지했던 명나라를 멸망시킨 만주족의 국가로, 중화 강역에 속하는 변방인 동이,서융,남만,북적의 지역을 만주족 주도로 전부 차지한 중국 역사에 처음 있던 중국 대륙의 최대 경계선이다. 청나라가 제국주의의 침탈과 만주족이 한족과 동화되어 사라지면서 인종적으로는 중화사상을 주장하는 한족이 2차 세계 대전이후 국제관계 재편과정에서 방치상태였던 청나라의 영토를 대만을 제외한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이 어부지리로 차지하면서, 한족이 수천년 중국 역사에 처음으로 중화 강역을 전부 지배한 첫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중원과 이들간은 인종적,정치적 간극이 크고 역사적으로 남이었던 시기가 길었던 만큼, 하나의 중국은 이 고작 70여년 밖에 되지 않는 한족들의 중화강역 영유사를 수천년간 한족이 지배해온양 역사적 사실로 만들려는 역사수정주의의 출발이자, 중국식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하게 백년국치의 기억은 중국이 오늘날 서방과의 협약들, 그리고 서방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사건들에서 지속적으로 반추하고 언급하는 개념이 되었으며[1], 대내적으로도 '백년국치'라는 개념은 일종의 표지석으로서 비교되어 백년국치 이후 "신중국의 진보"[2]를 선전하고 각인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반대로 백년국치라는 이름의 근대 서방의 간섭 개입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가 남은 중국인들은 무질서, 분열과 침탈, 즉 중국의 분열 및 붕괴에 대한 공포로 상당수가 이를 중공의 집권 대의명분으로 악용한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 통제에 대한 내부 인권 탄압의 문제와 중국 민주화 운동, 부패상에서 눈을 돌리는 큰 부작용을 낳았다.
현대 중국에 끼치는 영향력이 지대한 만큼 반대로 현대 중국에 대한 연구에서도 언급되며 분석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앨리슨 A. 카프만의 미국 연방정부의 미중경제안보조사위원회(USCC) "국가안보정책에 관한 중국의 관념" 청문회에서의 증언, 외교안보연구소의 김한권 아시아태평양연구부 교수 저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對中) 정책과 중국의 대응"
굽시니스트의 시사만화에서도 언급된다.
4. 비판
제인 E. 엘리엇(Jane E. Eliot)은 중국이 근대화를 거부하거나 서구 군대를 단순 장비로 물리칠 수 없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했으며, 엘리엇은 또한 서방 국가들에 대한 패배가 중국 사회에 트라우마를 남겼다는 주장에도 반론을 제기하는데, 이는 조계지 밖에 살고 있던 많은 중국 농부들(당시 인구의 90%)이 별다른 의식 없이 일상을 계속했기 때문이다.[3]5. 여담
식민제국 열강 세력에 의한 식민주의 침탈을 나타내고 비판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식민지배나 비슷한 국권침탈을 겪은 다른 나라에 의해 변형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한국과 북한의 "일제 35년"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또다른 예시로는 인도 외무부 장관 수브라마냠 자이샹카르의 2019년 연설에서의 언급 "인도는 서방에 의해 200년의 치욕을 겪었다."[4]반면 대만 내부에는 범록연맹 및 본성인을 중심으로 백년국치 개념을 회의적으로 여기는 부류가 의외로 적지 않다. 홍콩의 경우 친중파를 제외하면 백년국치라는 개념을 자신들의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6. 관련 문서
[1]
예시로
2021년 알래스카 미국-중국 고위급 외교회담에 참석한 외교부장
왕이는 의도적으로
의화단의 난 진압을 언급하며 "더이상 12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고 선언, 패권을 쫓는 오늘날에도 백년국치 시기를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
[2]
물론 중국의 역사 교과서들에서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대혁명과 같은 공산당의 오류들은
흑역사 처리되어 의도적으로 누락되었다.
[3]
다만 중국은 그 당시에도 거대한 국토를 가졌음은 감안해야 한다. 그 예시로 대지의 저자인 펄 벅이 시골 농촌에 방문했을 때 그곳 사람들은 서태후가 죽은지 수십년이나 지났음에도 그 사실을 모르다가 그녀가 그 사실을 알려주자 이제 누가 우리를 돌봐줄 것이냐며 절규하였다고 한다. 길게 잡으면 함풍제의 죽음부터 사망까지 50년가까이 중국을
캐리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죽었는데도 수십년이나 모른다. 심지어 청나라 망한 뒤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수십년 동안 중국은 전국을 아우르는 통일정부가 없는 분열 상태였다. 조계지는 열강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니 바깥소식에 민감할 수 밖에 없지만 어디 저 멀리 시골동네는 원래부터 바깥소식이 들어오기 좋은 환경도 아닌데 거기다 청나라라는 중앙정부가 망한 것에 그러고도 사실상 새 중앙정부가 들어선 것도 아니니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무지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4]
https://www.mea.gov.in/Speeches-Statements.htm?dtl/318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