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중국 인민해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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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
1차 대전 와중이었던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성립된 소비에트 러시아는 초창기에는 합법 정권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국제 사회에서 많은 견제를 받고 있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고립을 피하기 위해 남쪽의 갓 생겨난 중화민국을 주목하고 있었다. 중화민국은 마찬가지로 청말 시절부터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탈 때문에 신음하고 있었고, 신해혁명으로 생겨난 중화민국은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소련은 중국과의 협력을 모색했고, 베이징에 있던 북양정부에 밀려 광저우로 피신해 있던 혁명가 쑨원을 주목하게 되었다.당시 쑨원은 광저우 한켠에서 군벌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연명하고 있었는데, 소련은 아돌프 요페를 보네 그에게 접근하였고, 쑨원과 그의 정당인 국민당의 무력집권을 돕는 대신, 국민당은 집권후 소련과 동맹을 맺는다는 합의를 맺었다. (1923년 쑨원-요페 선언) 이것으로 1차 국공합작에 합의, 중국 공산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기본적으로 소련도 중국은 아직 봉건제 사회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보다는 그에 앞선 부르주아 혁명이 필요하다는 유물사관의 교리 탓에 비공산주의자인 쑨원과의 합작에 쉽게 이르렀고, 쑨원 또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나, 1차대전 이후 영미일 제국주의 세력이 독일이 가지고 있던 중국에서의 잇권을 대신 차지하려는 행태에 실망을 느끼고 강하게 불신하게 되었기 때문에 소련의 접근을 환영한 것이다.
1921년 창당된 중국 공산당의 세력은 상당히 미악했으나 국민당 내부로 진출한 공산당원들은 국민당 좌파와 연계하여 수백명에 불구한 작은 세력임에도 빠른 속도로 확장하며 국민당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 때문에 국민당 우파의 불만이 가중되었고 1925년 쑨원이 사망한 후에는 이 불만을 조정할 사람조차 없게 되었다. 같은해 터진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으로 국민당 우파의 거두 후한민, 린썬, 쩌우루 등이 차례로 숙청되자 격노한 국민당 우파들은 서산회의를 열어 상하이 당중앙을 차리고 국공합작을 끝낼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광저우 국민정부는 1926년 북벌을 선언하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허나 북벌 와중에도 국민당 우파-좌파 및 국민당에 합류한 여러 군벌들 사이의 이해관계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들은 국민당 좌파를 지지하는 탕성즈, 장파쿠이, 국민당 우파를 지지하는 리쭝런, 바이충시 등의 광서파 등으로 분할되어 첨예하게 대립했다.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탕성즈 등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장제스 견제에 활용했고 난징-상하이 점령, 난징사건의 처리 등을 맡으며 장제스의 영향력이 강화되어가자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장제스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시키고 상하이를 떠날 것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난징 사건이 공산당의 폭동이라고 믿고 있던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는 공산당의 목적이 열강과 국민당의 전쟁을 붙여서 국민당의 완전한 적화를 노리는 것이라고 판단, 국공합작이 지속될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 때마침 장제스가 머물던 상하이에서 노동조합과 좌익 군부대들과 장제스의 충돌이 격심해졌고 장제스는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를 발동하여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이어 코민테른이 국민당 좌파의 우한 정부를 장악하라고 공산당에 지시하고, 코민테른이 그걸 우한 정부의 수장 왕징웨이에게 폭로하며 협조하지 않으면 맹우가 아니라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하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졌다. 이에 우한 정부가 분공을 결정하면서 국공결렬이 일어났다.
국민당 우파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수 많은 공산당원들이 살해되었고 중국 공산당 총서기 천두슈는 폭동과 파업으로 국민당에 대항할 것을 결정했다. 1927년 8월 1일 후난성 난창에서 공산당원들이 무장봉기하여 난창 폭동을 일으켜 국민혁명군과 싸웠는데 이를 군의 유래로 삼는다. 그래서 인민해방군 엠블럼에는 붉은별 안에 8월 1일을 뜻하는 八一이라고 씌여 있으며, 인민해방군의 군기를 팔일기라고 한다. 이때는 중국공농홍군(中国工农红军)[1]으로 불렸다. 이 봉기는 저우언라이가 지휘했으나, 압도적인 병력을 가졌던 국민혁명군에 패퇴했고, 남쪽방면으로 도주했다.[2] 이후 취추바이, 리리싼 등이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 등 총폭동, 총파업 노선을 지도했으나 모두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이들 부대보다는 추수폭동 시기에 봉기한 마오쩌둥의 부대가 그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부대는 압도적인 국민혁명군부대에 패퇴하였고, 마오쩌둥은 패잔병을 이끌고 장시성 정강산으로 도피하였다.
여기서 마오쩌둥은 직업군인 출신이었던 주더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전략-전술의 일반적인 이론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으나, 전문적으로 군사학을 공부한 적이 없던 마오는 주더의 도움을 받아 매우 효율적인 조직을 구성하였고, 특히 절대로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엄격한 군율을 만들었다. 이 군율은 삼대기율 팔항주의(三大紀律 八項主義)라고 하며, 지금도 인민해방군에서 복무신조 내지 병영생활 행동강령 격으로 내려오고 있다. 엄정한 기율과 정치성으로 무장한 홍군은 빈약한 무장과 적은 머릿수에도 불과하고 압도적인 숫자의 국민혁명군을 대상으로 효율적인 투쟁을 전개했고 창사 폭동 이후 국민정부의 초공작전에 마주하게 되었으나 1930년 제1차 초공작전을 손쉽게 격퇴했고 1931년 제2차 초공작전도 분쇄했다. 여기에 친공 장령과 부대들이 속속 합류하고 포로들을 전향시키면서 주모군은 10~15만의 규모로 불어났으며 이들의 무장한 무기의 절대다수는 국민당에게서 노획한 무기였다. 1931년 7월의 제3차 초공작전은 수도 루이진 인근까지 국민혁명군이 전진하는 등 위기였으나 만주사변과 1차 양광사변으로 장제스가 철수하면서 승리했고 1931년 11월에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찍이 마오쩌둥을 우경기회주의노선, 소극주의자로 좋지 않게 보던 상하이 당중앙의 유소파 보구 등은 마오쩌둥에게 계속 비난을 가했고 1933년 국민당의 탄압이 거세지자 당중앙이 상하이에서 루이진으로 이동했는데 당내 기반이 약하던 마오쩌둥은 간저우 공격에서 소극주의적인 행동을 일삼았다는 이유로 비판받고 군권을 박탈당했다. 허나 이들 소유파[3]가 지도하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1932년 제4차 초공작전을 상대로도 살아남고 자신들의 전략에 대해 자신감을 가졌으나 1933년 10월 국민당의 제5차 초공작전을 마주하게 되었다. 토치카를 건설하며 조여오는 국민당에 맞서 코민테른이 파견한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은 단촉돌격이라는 돌격 전술로 맞서려 했으나 압도적인 화력에 번번이 패퇴할 뿐이었다.
더이상 해방구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공산당군은 중국대륙을 남쪽으로 부터 시계방향으로 반바퀴 돌아 서북쪽에 마련된 산시성으로 1년간에 걸쳐 도주하였다. 이를 대장정이라고 하며, 공산당군은 병력의 90%를 잃으면서도 어쨌든 1년후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1935년 1월 15일 쭌이회의를 통해 다시 지휘권을 되찾았고, 이렇게 마련된 서북방에서 게릴라전으로 다시 세력을 확장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대장정 문서로. 사실상 대장정이야말로 현대 중국과 중국 인민해방군의 모든 것이 만들어진 시기이다.
2. 중일전쟁
섬서성으로 피신한 중국 공산당은 동정항일 운운하면서 산서의 옌시산의 영지를 침공하는 등 화북분리공작에 대응 중인 국민정부의 배후를 계속 공격하면서 그것이 항일이라고 선전하였으나 마오쩌둥의 동정항일은 옌시산의 반격에 참패로 끝났다. 중국 공산당은 다시 궁지에 몰렸으나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장쉐량은 공산당의 공격에 잇달아 패할 뿐 전혀 실적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만주사변으로 자신이 지배하던 만주에서 축출되어 낭인 신세로 전락했던 장쉐량은 공산당이 아니라 일본을 공격하여 자신의 영지인 만주를 되찾고 싶어했으나 일본과 정면대결이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장제스와 중국 군부는 장쉐량의 주장을 일축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원하지 않은 초비작전을 맡아서 계속 피해를 입게 되자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독려 차 방문한 장제스를 납치하고 서안 사건을 일으켜 국공합작을 강요했다. 장제스가 마지못해 동의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은 중단되었고 1937년 일본제국이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정식으로 합작이 이루어져 공산당군은 형식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제18방면군이 되었고, 그 아래 화북지역에는 제8로군(팔로군), 화남지역에서는 신4군으로 재편되어 중일전쟁을 맞게 되었다.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중일전쟁 기간 동안 자신들이 6~7할에 달하는 일본군을 상대하였고 장제스와 국민당은 후방에서 놀며 팀킬이나 했다고 거짓 선전을 하면서 자신들이 항일전쟁의 주역이라는 말도 안되는 개구라를 남발했지만 이는 추악한 거짓말로, 전쟁 초반의 평형관 전투 등에서 일부 활약한 공산당은 일본군이 산서성을 침공해 옌시산의 수도인 타이위안을 점령한 이후로 지극히 소극적인 방어전으로 전환하여 항일을 회피했다. 이 때문에 백단대전 이전까지 일본제국 육군은 공산당을 제대로 된 전투세력이 아니라 비적떼로 간주하여 상대하지 않았고 국민정부의 임시수도 충칭은 두들기는 동안 공산당의 중심지 옌안에 대한 폭격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동안 공산당은 화북 전역에 해방구를 건설하였고 화중과 화남에서 신사군이라 불리는 유격부대를 활동시켜 국민당과 충돌했고 이 때문에 환남사변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펑더화이가 백단대전으로 일본군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주면서 일본군은 그제서야 공산당 토벌에 나서 공산당의 해방구를 섬멸하는 작업에 들어갔으나 신멸작전이라 불리는 그들의 잔혹한 작전으로 민심의 이반을 불러 일으켰다. 다만 일본군의 공포작전이 효과를 보아서 한때 화북 거의 대부분을 장악할 정도로 성장했던 중국 공산당과 홍군은 큰 타격을 입고 축소되었다. 하지만 1944년 일본이 다시 국민정부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대륙타통작전을 감행하여 화북에 주둔한 병력을 죄다 화중, 화남으로 내려보내 일본군의 치안유지력이 약화되자 다시 해방구를 확장했다. 그리고 미국을 상대로는 자신들이 항일을 하고 있으며 장제스를 버리고 자신들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해달라고 로비 활동을 벌였으나 미국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OSS 특작부대인 스패니얼 특공대가 화북에 상륙하자 이들을 억류하여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1945년 일본군이 중국군에게 항복하자 중국 공산군은 화북의 일본에게 항복하라고 회유했으나 지나파견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항복하기로 결정, 공산당을 상대로는 무력을 써서 저항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세력의 중심이 북부에 있었으니 만큼 북부지역에 대한 장악이 서남부에 고립된 국민당보다 수월하여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서 빠르게 만주와 화북을 장악하게 된다.
소련은 장제스 정부를 중국의 합법 정부로 인정하는 스탠스를 취하면서도 은밀히 만주 지역에서 노획한 50만명을 무장시키기 충분한 일본군과 괴뢰군의 무기와 중장비를 홍군에 인도했다. 홍군 역시 적극적으로 파일럿이나 기술병,의무병 등의 투항한 일본군 전문인력을 포섭해 군의 능력을 키워나갔다. 이를 통해 홍군은 2차대전 직후에 머릿수만 많던 토비 군대에서 국민당군에 대항하기 충분한 전차와 항공기를 포함한 장비를 갖춘 강력하고 거대한 군대로 성장한다.[4]
3. 2차 국공내전
중국이 일본에게 항복을 받아내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평화교섭을 했으나,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46년에 국민당군은 휴전협정을 어기고 공산당군을 공격하였다. 중일전쟁 기간을 거치면서 홍군은 게릴라전을 통해 130만명까지 병력을 증강한 상태에 소련의 은밀한 지원도 받았으나 내전 초기에는 수세에 몰렸다. 홍군은 강력한 적의 주력과 교전을 피하면서 처음에는 본거지 옌안까지 내어줄 정도였으나, 이렇게 점령된 곳을 유지하기 위해 분산된 국민당군을 전략적으로 포위할 수 있었다. 중국 내전을 원치 않던 미국이 보낸 조지 마셜의 중재는 궤멸 직전인 홍군에 숨을 고를 시간을 벌어주는 등 역효과만 냈고 홍군이 점차 유리해진다.상황이 무르익자 1948년 가을부터 공세로 전환했고, 수적으로 유리했지만 중국 대륙에 분산된 국민당군은 만주와 화북에서 벌어진 국공내전 3대 전역에서 패배, 순식간에 무너졌다. 게다가 국민당군이 계속해서 공산군으로 이탈하면서 공산당군의 병력은 순식간에 500만까지 불어났다. 북방에서 군사적으로 결판이 나자 모택동은 과감하게 양쯔강 이남으로 진군했고 국민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한다. 결국 1년 남짓한 기간에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였다. 1950년 2월에는 중소우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소련제 전차를 수령하기 시작하는 등 질적 개선에 나섰다.
4. 한국 전쟁
미군의 전격적인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형세가 북한에 위태롭게 돌아가자, 내부의 치열한 격론 끝에 1950년 10월 19일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해서 중국 인민지원군이란 이름하에 약 40만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1953년 7월 27일 22시 휴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총 병력 약 수백만명이 투입되었다. 이 가운데 전사상자는 전사자 18~20만명을 포함해 약 36~40만명, 기타 비전투 사상자 38~4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비록 장비는 낙후되었지만,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통해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인민지원군은 뛰어난 야간이동능력과 기동성으로 UN군을 포위,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즐겨사용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5] 오죽하면 인천 상륙 작전 이후 기고만장해져 무리하게 북진을 추진하던 유엔군과 미국정부가 1.4 후퇴를 전후한 시점에 유엔군을 한국에서 철수하는 계획을 비밀리에 검토했을 정도이니......
하지만 미8군사령관 매튜 B. 리지웨이가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는 방향으로 미군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화포와 항공기 지원 등 가지고 있는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곧장 반격하는 방식을 택하자 한동안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주춤거렸으나, 전쟁 말기에 다시 유례없는 규모로 반격에 나서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때 중국의 해상전력은 있으나 마나한 수준이었기에, 제해권은 완벽하게 UN군이 쥐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군수보급을 만주를 거쳐 지상으로 했다.[6]
다만 제공권 관련해서는 논란거리가 있다. 흔히 중국측에서 소련에게 공군지원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다수의 소련공군 조종사들이 비공식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다만 공식적으로는 참전을 부정한 상태였기에 기체는 모두 북한이나 중국공군의 마크를 칠하는 등의 위장을 했었다. 또한 당시 참전한 소련 조종사들에게 전투시 중국어로 교신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으나, 급박한 전투상황에서 조종사들이 익숙한 러시아어로 사용하곤 하였다. 이런 사실을 미공군측도 무선감청을 통해서 알고 있었으나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서 공개하지는 않았다. 중국 또한 참전의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최신예기인 MiG-15를 공급받는등 소련의 지원하에 공군을 확충해 나가고 있었다. 이렇듯 비밀리에 참전한 소련 공군과 세력을 확충하고 있는 중국 공군은 지상군을 지원하고 군수보급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활약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참전 때문에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번질까 우려한 소련 공군은 규모와 작전반경을 극도로 제한[7]하였고, 신생 중국 공군은 모든게 걸음마 단계 였기 때문에 1:10의 교환비를 기록할 정도로 미공군에 압도당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8]
덧붙여 이 때 개입이나 간섭이라는 이미지를 피하기 위함인지 대외적으론 자원자들로 구성된 의용병이라고 칭했는데, 이때문인지 중국인들 중에서는 당시 중국과 한국의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한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중국에선 6.25 전쟁 개입을 항미원조라고 부른다. 자세한 내용은 중국 인민지원군 문서로.
1949년 건국선언 당시 550만에 달하던 병력은 한국전쟁 파병 과정에서 더 불어나서 한때 627만까지 늘어났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계속된 군축으로 1958년에는 300만을 약간 웃도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5. 계급제 도입
1955년도에 최초로 계급제도를 도입하였다. 즉 1927년 남창봉기 때부터 국공내전, 중일전쟁, 6.25 전쟁을 치르는 동안은 계급없이 직책만 존재하였던 것이다.[9] 그러나 군이 500만에 달하는 거대규모로 성장하자 계급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고, 한국전쟁때부터 의논해서 1955년도에 10대 원수, 10대 대장 임명을 시작으로 계급제도를 전면 도입하였다.[10] 10대 원수는 주더, 펑더화이, 린뱌오, 류보청, 허룽, 천이, 뤄룽환, 쉬샹첸, 녜룽전, 예젠잉이다.하지만 계급제는 1965년에 다시 폐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판문점의 중국 인민지원군 대표로 새로 부임한 정감여(丁甘如)는 그저 동지라는 직함만을 가지고 새로 부임하였으나, 유엔사측 수석대표 윌리엄 야보로 육군소장은 정전협정 20항에 군정위 인원 10명 중 5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 공동으로 임명하며, 3명이 장성, 2명이 소장, 준장, 대령이나 그와 동급의 사람으로 임명한다고 되어있는데, 정감여는 동지라는 직함만 가지고 있으니 대표 자격이 없다고 시비를 걸었다. 게다가 중국인민지원군이 1958년에 철수한 상태로 더 이상 사령원도 없기 때문에 그의 신임장에 사령원의 이름이 없는 것도 문제삼았다. 이에 북측 수석대표 박중국 소장은 내정간섭이라고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대응했으나, 정작 정감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북한 측을 답답하게 했다. 정감여는 1967년에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북중관계가 악화되면서 1971년 하거야(何渠若) 소장이 부임하기 전까지 중국 대표는 공석으로 남았다.
6. 중국-소련 국경분쟁
해당 문서로.7. 중국-인도 국경분쟁
해당 문서로.8.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막대한 양의 군사장비와 군사고문단을 북베트남에 지원하며 대내외적으로 입지를 굳힌다. 특히 북베트남군의 장교단 상당수는 중국 윈난성의 보병학교에서 게릴라전술을 배웠다. 고사포 부대와 공병부대를 중국 후근부대라는 이름으로 파병해 연인원 32만명 이상이 참전해 1,100명이 전사하기도 했다. 전시 경제 복구를 위해서도 많은 물자를 지원하였다.9. 양탄일성 추진과 문화대혁명
다만 중국 역사상 최대의 병크인 문화대혁명 기간에 군의 발전 역시도 정체된다. 아울러 소련과 관계악화로 인한 중국-소련 국경분쟁에서 전술, 전략적 취약점을 드러내며 "인민의 바다" 전략의 한계성[11] 또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에는 도리어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베트남을 침공해 중월전쟁을 일으켜 베트남과의 어중간한 전쟁을 치르다가 깨지고 물러난다. 베트남은 주력이 다른 곳(캄보디아)에 파견나간 상태였는데도 중국군은 국경지대를 넘지 못했다. 결국 베트남에게 고전한 중국군은 결국 포기하고 전쟁을 중단, 다시 돌아왔다. 그 당시에는 베트남이 프랑스와도, 미국과도 싸워 이긴 나라 타이틀을 갖고 있었던 상황이기도 했고, 중국군은 더욱 저평가받게 된다.한편 중국공산당은 이미 문화대혁명 이전부터 미국, 소련에 비해서 현격하게 뒤쳐진 재래식 군사력과 경제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전략무기 개발에 몰두하였다. 1955년 첸쉐썬 박사와 100여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귀국하면서 시작된 핵무기 개발와 장거리로켓/미사일 개발은 문화대혁명 와중에도 꾸준히 진행되어 1962년 핵실험에 성공하고 67년에는 수소폭탄을 보유하게 되었다. 1970년에는 독자적인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양탄일성, 로켓 창정 문서로.
1960년대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것을 첩보로 인지한 미국은 내륙에 있는 중국의 핵플랜트를 폭격하려고도 했으나, 베트남에서 발목을 잡히고 있는데다가 자칫 확전이 될 수도 있는 부담이 있어서 포기했다.
10. 중국-베트남 전쟁
해당 문서로.11. 현대화 추진
덩샤오핑 집권 이후 서방과의 급속히 가까워지며 사회 전반에서 정체되었던 현대화가 가속되는 와중에도 고루한 "인민의 바다" 전략에 얽매인 군 조직은 변화에 둔감했으나 걸프전에서 미군이 보여준 가공할 첨단전쟁방식에 당 지도부와 군부 모두 큰 충격을 받고 장비뿐만 아니라 인적자원에서도 현대화를 시작한다. 90년부터 92년까지 걸프전에 대한 보고서만 2만 건이 넘는다고 한다. 이때부터 첨단 무기의 개발과 배치에 노력을 기울여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차세대 전차와 자체개발 전투기, 러시아로부터 수입한[12] 각종 무기에 이를 기반으로 자체개발한 장비 등 외형적으론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또한, 병력 중심의 전투력을 변화시켜 병력수를 확 줄였으나, 여전히 이백만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1990년-2000년 중국이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군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2028년에 러시아 육군 전력이 최고조에 달하고, 2030년에는 중국 육군 전력이 최고조에 달한다고 밝혔다. #
11월에 전군 연합 작전을 발표했다. #
2013년 4월 국무원은 '중국무장역력다양화운용', 즉 국방백서를 발간하면서 처음으로 전체 병력 규모와 편제를 공개했다. “중국군 병력 230만 명” 첫 공개
12. 대개편
중국 인민해방군의 5대 전구 | ||||
동부전구 | 남부전구 | 서부전구 | 북부전구 | 중부전구 |
2016년을 기해 대대적인 개편이 단행되었다.
4대 부서였던 중앙군사위원회 기구를 7부 3위원회 5서로 개편하였고 7대 군구를 5대 전구제로 개편하였다. 육군은 18개 집단군에서 13개 집단군으로 그 수를 줄였고 제2포병을 로켓군으로 개편하고 전략지원부대를 창설하였다. 로켓군의 초대 사령원은 웨이펑허이고 전략지원부대 초대 사령원은 가오진이다.
이어 2017~2018년에 걸쳐서 육군은 합성여단체제를 도입하였고 공군은 여단체제로 변화하였다.
2017년 7월, 연말까지 병력 감축을 완료하겠다고 선언했다. 감축된 병력 30만은 실업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으로 전환된다고 한다. 비전투조직은 민간으로 이양하는 식으로 군개혁의 방향을 잡은 듯하다. #
13. 관련 문서
[1]
당시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군대"였던
소련군의 명칭을 그대로 갖다 쓴 것이다.
[2]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지도부는 궤멸되었고, 각 지역조직들간의 연락체계도 무너진 상황이었기에, 난창봉기는 저우언라이를 포함해서 살아남은 몇몇 당간부들의 독자적인 판단이었다.
[3]
소련 유학파의 줄임말. 유소파, 국제파라고도 함.
[4]
#
[5]
국군과 미국군이 공동전선을 폈을경우 상대하기 쉬운 한국군만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며 뚫는데 성공하면 미군을 포위해서 공격하는 영악함도 보여줬다.
[6]
참고로 해상수송은 대량의 물자를 가장 싸고 빠르게 수송하는 방법이다.
[7]
소련 조종사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아주 얆은 회랑지대에서만 활동하였다. 이들은 미군과 공중전을 벌이다가도 약간만 불리해지면 바로 소련이나 중국 영공으로 도주하였는데, 한반도 상공에서 격추될 경우 미군의 포로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8]
이것은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소련군의 내부문서와 미군의 전투기록을
교차검증한 결과이다.
[9]
이는
소련군도 마찬가지로 초창기 적위대는' 모든 인민의 평등한 군대'라는 개념에 입각해서 계급이 없었으며, 병사소비에트의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지휘관들이 전투중에만 제한적인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모든 평시생활은 병사소비에트의 결정에 따랐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부작용을 일으켜서 적군은
적백내전 초창기에 연전연패했다. 이에 1918년
트로츠키는 장교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임명제를 도입하였으며, 1935년 계급제가 전면도입된다. 중국군도 소련의 이러한 실패를 똑같이 따라간 것이다.
[10]
이러한 와중에도 마오쩌둥은 끝까지 사상적 이유로 계급제를 싫어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대원수 계급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11]
인민의 바다 전략은 적을 끌어들여 공간을 주고 시간을 벌어 전력을 모으는(또한
청야전술이 높은 확률로 동반되는) 극히 방어적이고
소모전적인 전략이다. 그런데 소련군의 전략은 그런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기동전이었다. 그리고 구 소련은 만약 분쟁이 확대될 시
핵전쟁을 계획한 상태였다. 당시 중국은 재래식 전력이고 핵 전력이고 간에 전혀 소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2]
다만 러시아 입장에서는 중국도 국경협정을 하고있는 우방이며 안전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핵심무기의 경우 다른 나라에도 팔고 중국에도 파는 경우가 많다. 가령 Tu-22와 같은 전략폭격기는 중국이 아무리 비싸게 값을 불러도 안 팔고 있는게 아니라 미국이 제재해서 못팔 뿐이다. 이에 중국은 다른나라를 통해 표본을 얻어 짝퉁을 생산하거나 자기식으로 생산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