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니카라과의 반군조직
니카라과 혁명 당시 활동한 우익 반군. 일명 Contras라고 칭한다.1979년 독재정권이었던 소모사 정권을 무너뜨리고 성립한 사회주의 성향 정권인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정권에 대항하는 반군 활동을 벌인 조직으로 1981년에 결성되었다. 콘트라는 CIA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아서 조직되었고, 또한 반공주의 성향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콘트라'라는 용어는 당시 니카라과의 특정한 무장단체를 뜻하는 말은 아니다. 그저 당대에 존재했던 반 산디니스타 성향의 여러 무장 단체나 민병대들을 모두 싸잡아서 콘트라라고 통칭한 것이다. 스페인어로 콘트라란 단어 자체가 특정 집단을 의미하는 명사도 아니고 그냥 영어로는 against랑 똑같은 의미의 조사이다.
니카라과와 중부 아메리카, 나아가 마약 거래로 연결된 미국 사회는 이런 무장 단체들을 무턱대고 지원한 결과 수십년 지난 후에도 그 댓가를 치르고 있다. 애초에 소득 수준도 낮은 중부 아메리카 국가들에 총기만큼은 넘쳐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80년대 초 당시 니카라과에는 기존 소모사 정권의 잔당들이 결성한 우파 성향의 민병대도 있었며, 산디니스타 내의 다툼에 밀린 파벌이 조직한 민병대도 있고, 원주민들이 조직한 민병대도 있었다.
한편으론, 산디니스타 정권하에서도 무장행위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당시 정부를 비판하면서 활동한 야당들도 있었다. 아래에 언급되는 비올레타 차모로 대통령도 그런 경우다. 이들은 무장행동에 나서지 않았기에 콘트라에 포함하지 않는다.
원주민들이 조직한 콘트라 반군들은 1980년대 초반에 행정상 편의를 이유로 교육언어를 스페인어로만 쓸 것을 의무화(원주민 입장에서는 강제화)하자 이에 반발해서 들고 일어섰다. 그러다가 1984년에 원주민들에게 자치권을 보장해 준다는 조건으로 산디니스타와의 양보를 받아내면서 무장을 해제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산디니스타 정권하에서 자유선거가 치러지긴 했다. 하지만 4개의 주요야당들은 자유로운 선거여건이 보장되지 않는다면서 선거를 보이콧했고, 콘트라 반군들도 선거가 공정하지 못하다며 선거를 보이콧했다. 미국도 이 선거를 소련식 사기극이라고 비난하며 니카라과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와 별개로 이 선거는 국제 선거참관인들도 공정하게 진행되었다고 호평할 정도였다. 그런데 또 후일 취재에 의하면 상당수 지역구에서 비밀선거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선거는 75%의 투표율을 보였고,대통령 선거에 오르테가가 67%의 득표율을 확보하면서 압승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총선에서 야당 세력들도 개헌저지선을 확보할 정도(35/96)는 되었던데다가 전체 유권자 수 대비 득표율로 따진다면 47% 정도라서 오르테가의 완전한 압승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1985년에 나머지 콘트라 반군들의 통합이 진행되어 나갔다. 당시 콘트라 반군은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권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당시 이란에 잡혀 있던 인질 교환의 대가로 적성국가인 이란에게 무기를 몰래 팔고 그 대금을 콘트라 반군에게 지원한다. (이 때 한국제 M16A1 소총들도 비밀리에 콘트라 반군에게 지원되었다.) 미국의 이런 짓이 1986년에 발각되어 대통령 탄핵 직전까지 갈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것이 유명한 이란-콘트라 사건이다.
이 사건이 터지면서 콘트라 반군들은 이제 미국의 지원이 줄어들게 되었다. 게다가 이후 니카라과 정부와 산디니스타는 경제제재와 소련의 약화로 인한 지원의 감소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된데다 산디니스타 내에서 부패 스캔들도 터지면서 지지율이 급락하였다. 결국 주변국들과 UN의 중재 하에서 산디니스타와 콘트라 반군들 간의 협상이 진행되고 1988년에 협상이 타결되었다.
그러나 아직 콘트라의 무장해제는 완전히 이루어지지않았다. 1990년에 총선과 대선이 치러지면서 니카라과 첫 여성 대통령인 비올레타 차모로가 오르테가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소모사 정권 시절, 차모로의 남편인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프레사'의 편집장)가 소모사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도 정부 비판 기사를 써 오다가 소모사에게 살해당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소모사 일가는 쫓겨나게 되었다.
차모로는 혁명이 성공한 뒤에 산디니스타가 주도한 국가재건위원회 위원으로 재직하게된다. 하지만 국유화나 종교 등 현안에서 차모로와 산디니스타와 성향 차이가 컸기 때문에 얼마 안 가 차모로는 사퇴한다. 이후에 남편의 뒤를 이어서 <라 프렌사>지의 편집인을 맡으며 정권의 압력에도 산디니스타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꼿꼿하게 올려서 거물급 야권 정치인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정이 있어서 1990년 대선,총선에서 차모로는 남편이 소모사에게 살해당했다는 점을 어필하고 미국의 경제지원재개를 원하는 여론에 힘입어 오르데카를 제치고 니카라과 대통령에 당선 된 것이다. 당초에는 오르테가가 의외로 여유있게 승리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미국의 원조재개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것도 차모로 승리의 한 요인이 된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선거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이 차모로 후보를 지지했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이 정당들은 산디니스타와는 성향이야 비슷하기는 했으나 이미 1960년대부터 소모사 타도를 목적으로 우파와 합동 투쟁에 나서기도 했고, 1984년 총선에서 굳이 산디니스타 해방전선과 따로 출마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세력이 굉장히 약화된다.
차모로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에 콘트라와 산디니스타 간의 갈등이 대대적으로 볼거지기도 했지만 콘트라 반군들은 무장해제하였다. 이후에 일련의 화합정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각 지자체별로 산디니스타 당원들을 쫓아내거나 한직으로 몰아내거나 하는 식의 보복은 있었다고 한다.
차모로 정권에선 민영화 정책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정책으로 초인플레이션은 진정되었지만 혁명의 성과인 복지 혜택까지 빼앗고 빈부격차가 다시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비올레타 차모로는 언론인으로서는 호평받지만 대통령으로서는 그리 좋은 평을 받지는 못한다.
그리고 1996년 대선에서 소모사 일가와 연관이 있는 인물인 알레만이 집권한다. 이 사람은 아버지가 소모사 정권 당시에 장관을 역임했다. 또 2001년 대선에선 엔리케 볼라뇨스가 집권하였다. 그렇게 니콰라과에서는 16년간 우파 계열 정파가 계속 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콘트라든 산디니스타군이든 1980년대 내전에 대한 보상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게된다. 경제 또한 초인플레이션이 진정되기는 했지만 높은 실업률로 몸살을 앓는 등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게된다. 그런 상황에서 우파가 두 갈래로 분열하면서 2006년 대선에서 오르테가가 다시 당선되었고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
아이러니 한 건 오르테가가 다시 집권했을 때 러닝메이트로 콘트라 반군의 수장을 지명했다는 것이다. 그 덕택인지 피델 카스트로나 우고 차베스와 매우 친하게 지내고 미국 때문에 경제가 파탄낸 경험 때문에 러시아의 편도 시시때때로 들어주기도 한다. 물론 산디니스타의 실책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미국이 산디니스타 정권 축출 목적으로 니카라과의 경제파탄을 의도적으로 진행시킨 건 결코 부정할 수 없기때문.
현 오르테가 정권이 국내 정책에서는 룰라식의 정책을 펴고 있다는 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