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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4:52:43

이이(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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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4e3f> 성균관 문묘 배향 아국 18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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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81e> 서배향
제1위
<colbgcolor=#fff078>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colbgcolor=#78f0ff> 홍유후(弘儒侯)
설총
<colbgcolor=#1ec8ff> 동배향
제1위
제2위 문충공(文忠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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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위
제3위 문헌공(文憲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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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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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위
제5위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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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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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혼
문성공(文成公)
이이
제6위
제7위 문열공(文烈公)
조헌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제7위
제8위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문경공(文敬公)
김집
제8위
제9위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제9위
<colcolor=#373a3c,#ddd> ■ 진한 색: (동배향) 조선 5현
■ 진한 색: (서배향) 조선 5현
{{{#c00d45
적색}}}: 조선 종묘 배향공신
※ 순서는 선후배 순으로, 동순위일 경우 동쪽이 서쪽보다 선배이다. ※ 조선 5현: 조선시대에 최초 종사된 5인.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역대 종묘 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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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 태조 조준, 의안대군, 이지란,
조인옥, 남재, 이제, 남은
정종 익안대군
태종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세종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문종 하연
세조 권람, 한확, 한명회
예종 박원형
성종 신숙주, 정창손, 홍응
중종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정광필
인종 홍언필, 김안국
명종 심연원, ■이언적
선조 이준경, ■이황, ■이이
인조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능원대군
효종 김상헌, ■김집, ■송시열,
인평대군, 민정중, 민유중
현종 정태화, 조경, 김좌명, 김수항, 김만기
숙종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경종 이유, 민진후
영조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장조 이종성, 민백상
정조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순조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남연군, 조만영
문조 남공철, 김로, 조병구
헌종 이상황, 조인영
철종 이헌구, 익평군, 김수근
고종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순종 송근수, 이완용, 서정순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동배향)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서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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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
西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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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림파 [[틀:훈구파|{{{#000,#ddd ▲ 훈구파}}}]]
선조
(1575 ~ 1608)
박순 윤두수 고경명 성혼 심의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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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인조
(1608 ~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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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 이식 김자점 이시백 최명길
효종 -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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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서 소서 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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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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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기 김석주 김만중 박세채 최석정
노론 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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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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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7월
김정희
8월
장영실
9월
김소월
10월
세종대왕
11월
김홍도
12월
신재효
1991년
1월
나운규
2월
정철
3월
한용운
4월
김정호
5월
방정환
6월
정약용
7월
문익점
8월
안익태
9월
허준
10월
주시경
11월
윤선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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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
이황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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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박지원
4월
우장춘
5월
신사임당
6월
류성룡
7월
일연
8월
홍난파
9월
고유섭
10월
이윤재
11월
안창호
12월
윤동주
1993년
1월
이이
2월
이인문
3월
장보고
4월
이천
5월
윤극영
6월
원효
7월
지석영
8월
안중근
9월
박연
10월
최현배
11월
장지연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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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월
우륵
2월
황희
3월
김유정
4월
홍대용
5월
강소천
6월
이상백
7월
안견
8월
박은식
9월
박승희
10월
이희승
11월
정도전
12월
신채호
1995년
1월
강세황
2월
조식
3월
월터 정
4월
최무선
5월
이원수
6월
김병로
7월
이육사
8월
김구
9월
채동선
10월
김윤경
11월
이수광
12월
곽재우
1996년
1월
김만중
2월
최치원
3월
이순지
4월
서재필
5월
김명국
6월
유일한
7월
도선
8월
심훈
9월
왕산악
10월
정인승
11월
전형필
12월
이제마
1997년
1월
송석하
2월
성현
3월
최윤덕
4월
이중환
5월
초의 (의순)
6월
한호
7월
이세보
8월
박제가
9월
박진
10월
장지영
11월
왕인
12월
송진우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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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개벽에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10개 부문별 위인의 선정자 및 차점자 명단이다.
<rowcolor=#ffffff> 사상 정치 군사 문학 미술
이황 이이 이순신 최치원 솔거
- 을파소 을지문덕 박지원 담징
<rowcolor=#ffffff> 종교 과학 산업 교육 사회개선
최제우 서경덕 문익점 최충 유길준
원효 정약용 흘간(屹干) - -
※ 응답수 100명 미만의 차점자는 공개하지 않음.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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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단군
동명성왕 온조왕
이사부 백결선생 의자왕 계백
김관창 김유신 문무왕 원효
혜초 장보고 고왕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고회
김부식 지눌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 이상 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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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8ad85><colcolor=#000000> 이이
李珥 | Yi I
파일:이이 표준영정.jpg
출생 1537년 1월 17일[1]
강원도 강릉 오죽헌
(現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죽헌동 오죽헌)
사망 1584년 2월 27일[2] (향년 47세)
한성부(現 서울특별시)
본관 덕수 이씨 (德水 李氏)[3]
부모 아버지 이원수, 어머니 신사임당
형제자매 4남 3녀 중 3남
배우자 부인 노씨
자녀 2남 1녀
친인척 증외고조부 최만리[4]
숙헌(叔獻)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 문성공(文成公)
학력 성균관 (졸업)
종교 유교 ( 성리학)
서명
파일:이이(조선)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구도장원공2.3. 관료 시기2.4. 말년
3. 평가
3.1. 정치적 능력3.2. 십만양병설
4. 대중매체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5000 앞.jpg
오천 원권 지폐 속 초상화

조선 유학자, 관료.

조선은 물론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손꼽힌다. 장원 급제를 9번이나 하고, 이기일원론을 겨우 23세일 때 정립하였다.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이론에만 몰두하지 않고 현실 개혁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한 정치인. 우리나라 오천 원권 지폐의 모델이며, 신사임당이 오만 원권 지폐의 모델이 되며 모자(母子)가 지폐 인물이 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본인은 평생 붕당의 대립 해소에 진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5] 오랫동안 유학자의 면모만 부각되어 왔지만 정치인으로서도 영향력이 컸다. 생전에 이이의 서얼 차별 완화 등의 개혁 정책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6] 사후 조선에서 거론된 수많은 정책과 개혁론은 이이의 사상과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2. 생애

2.1. 유년기

1536년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부친 이원수와 모친 사임 신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외가인 강릉에서 자라 강을 낀 산천을 보며 심신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6살 때 모계 집안인 강릉[7]을 떠나 부계 집안으로 이사했는데 이이 본인의 고향은 강릉이지만 본가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8]라는 곳에 있었고 이이의 아호인 '율곡'도 파주 '율곡리'에서 본딴 것이다.

가문이 중요시되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고향은 '나 자신'이 아니라 '집안'이 연원을 둔 곳을 의미했는데,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율곡의 고향은 탄생지인 강릉이 아니라 친가가 위치한 파주가 된다. 다만 실질적인 본거지는 파주가 아닌 강릉인데, 이원수가 신사임당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인물이기 때문이다.[9] 강릉에는 외할아버지 신명화와 그 윗대로 이어지는 고리가 있고 집안 재산의 절대 다수가 있는 반면에 파주에는 진짜 아무 것도 없는데 유일한 장점은 근기(서울)에서 가깝다는 것뿐이다.

아버지인 이원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하다. 이이가 남긴 기록 중 아버지에 관한 별다른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이이와 형제들은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원수 때만 해도 가세가 좋지 않아 자기들보다 가세가 강했던 집안의 신사임당과 결혼했는데, 신사임당이 엄청난 인물이었던 데다가 아들까지 아버지의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인물이었으니 이원수가 소외감을 느껴서 그랬을 듯하다.[10]

1548년 13세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조광조의 문인인 백인걸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16세 때인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였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18세(1553년)에 관례를 마치고 상복을 벗었으나 모친을 잊지 못하였으며 봉은사에서 불서를 읽고 나서 감명하여 속세를 떠날 결심을 했다. 19세(1554년)에 친구들에게 편지로 이별하며 절에 들어갔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시점에서 불가에 회의를 느끼고 하산하여 이후 유학에 전심했다.[11]

22세(1557년)에 성주 목사 노경린(盧慶麟, 1516-68)의 딸인 곡산 노씨와 혼인했다.[12] 당대로서는 만혼이었는데 한창 결혼해야 할 나이에 어머니 삼년상을 치른 데다 삼년상 이후 불도를 익힌다고 산에 틀어박혀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죽자 정신적 충격을 받고는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가 삭발을 했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을 받기는 했다.[13][14] 그 때도 두문불출하며 온갖 불경들을 읽어내어 주변 스님들이 생불이 나타났다며 감탄해했다고 전한다. 머리가 좋은 것은 유교에서만이 아니라 불교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 부분은 훗날 그를 공격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불교를 증오하다시피 했다. 천원권에 이황이 쓴 복건도 이황은 중이 쓰는 두건과 비슷하다고 하여 싫어했을 정도인데, 이이가 한때 불교에 심취했으며 법명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충분한 비난거리였다.[15] 이이는 성균관에서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하며 신입 벼슬아치들이 당하는 면신례도 심하게 당했는지, 그는 바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고 이를 비판했다고 한다. 다만 면신례는 본래 대상을 불문하고 혹독했는데 심지어 정몽주의 증손자도 과거에 급제하고 난 뒤 치른 면신례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숨졌다. 사대부들이 극진히 모신 정몽주 집안 사람이 이 정도였다면 당시 일반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던 이이를 어찌 대했을지는 뻔하다.

23세(1558년)에 퇴계를 만나기 위해 도산으로 갔고 이후에도 서찰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학문을 보완하게 된다. 퇴계를 만난 율곡은 자신이 불가에 들어갔던 사실을 이야기했는지 퇴계가 편지에서 이를 언급하고 있다.[16]

26세(1561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3년상을 치렀다. 이후 출사 준비를 마친 이이는 29세인(1564년)에 생원시[17], 진사시[18]를 거쳐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정6품 호조정랑으로 등용되며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예조와 청요직인 이조좌랑,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쳤고 선조 재위 1년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와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당시 율곡은 상소하여 하직하며 '어릴 때에 선학(禪學)에 물든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감히 논사(論思)의 책임을 맡을 수 없습니다.'고 하자 선조는 '예전부터 아무리 호걸스러운 선비라도 불씨(佛氏)에게 빠져들어 간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전에 선문(禪門)에 종사(從事)했다는 작은 실수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논사(論思)하는 중대한 직책을 경솔하게 체차할 수는 없다. 또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진 그 뜻이 가상하다.' 비답하였다. 이것이 이들의 첫 만남이었다.

2.2. 구도장원공

가장 유명한 일화로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과거는 생원과 / 진사과(소과) 초시 → 생원과 / 진사과 복시 → 문과(대과) 초시 → 문과 복시 → 문과 전시의 5번을 거치게 되는데 이이의 경우는 생원과와 진사과 모두 장원으로 통과, 문과 전 시험 장원으로 통과, 거기에 특별 시험인 별시[19]에서도 장원, 진사과 초시에서도 장원을 한 번 더 해서 총 9번의 장원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시, 외시, 행시 고등 고시의 1차, 2차, 3차 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20]한 이상의 대업적이다. 그런데 응시자인 양반들 입장에선 9번이나 열 명 단위로 뽑히는 커트라인이 올라간 셈이다.

실제로 당시 이 부분은 정적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이미 합격해서 안 쳐도 되는 시험까지 억지로 중복 응시를 감행하는 행동이 장원이라는 타이틀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이가 장원을 한 시험과 시간은 다음과 같다.
이이가 장원을 많이 했다고는 하나 시험에 떨어진 적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23세 때 이이는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 초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과에서는 낙방하였다.[21]
“그런데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니,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順)하면 천지의 기도 순하다. 그렇다면 이의 상(常)과 이의 변(變)을 어찌 한결같이 천도에 맡길 수 있겠는가? …… 성왕(成王)이 한번 잘못 생각하매 대풍(大風)이 벼를 쓰러뜨렸고, 주공(周公)이 수년을 교화하매 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았으니, 그 기가 그렇도록 시킨 것도 또한 사람의 일(人事)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 아아, 일기(一氣)의 운행 변화가 흩어져 만수(萬殊)[22]가 되나, 나누어서 이를 말하면 천지만상이 각각 일기(一氣)이지만, 합하여 이를 말하면 천지만상이 같은 일기(一氣)이다. …… 이로써 본다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육성되는 것이 어찌 임금 한 사람의 수덕(修德)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
율곡 이이의 과거시험 답안지 천도책(天道策)의 마지막 부분 출처

2.3. 관료 시기

선조대에 시작된 붕당 간의 싸움에서 그는 중립을 지켰다. 서로를 그르다고 주장하며 분열한 사림에게 양쪽 다 옳고 그르다고 하자 사림들이 양시양비론이 어디 있냐고 반발하니, 이에 전국시대 군주들의 전쟁은 다 그른 것이고 주 무왕 주왕을 정벌한 것이나 백이숙제가 말린 것은 다 옳은 일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년의 이이는 붕당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붕당이란 것이 풍문ㆍ명목으로 존재하여도 그들은 모두 군자당이므로 결국 공존하고 화합하지 계파가 나눠 대립한다는 생각부터를 않으려 했다. 붕당의 문제를 인정하여 훈구에게 반격할 빌미를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언에선 붕당의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특히 이이를 한 축으로 지목하기까지 한 이준경을 '말이 사악하다'라고 비난했고, 죽은 이준경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 문제는 류성룡 등의 동인이 반대해서 무산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유언으로 말미암은 이 이슈 또한 동서 분당의 무수한 전개 과정 중 하나로 작용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림이 자기들끼리 분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훈구의 정치적 수명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고, 실제 역사에서도 붕당의 문제와 대립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이 현실을 자각한 이이도 자신의 생각이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양파의 화합을 위해 움직이게 된다. 이때 이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건이 바로 1575년 (선조 8년)에 있었던 을해당론(乙亥黨論).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며 슬슬 붕당이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자 김효원과 심의겸을 모두 지방관으로 좌천시켜 버린 것.

당대 집권층인 동인은 이이를 맹렬히 규탄했는데,[23] 이는 나중에 이이의 제자들이 성장하여 서인의 주된 세력을 형성하여 본래 중립적인 위치를 견지하던 이이가 서인의 종주로 세워지는 모순적인 상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심의겸의 파벌을 서인이라 부르다가 어느새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을 서인이라 부른다고 나온다. 당시 심의겸은 자신의 학파를 형성하기는커녕 이이에게 보호를 받는 처지였기 때문에 붕당을 주도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이황, 조식 등 높은 학문적 성과를 이룬 거물급 유학자들의 제자인 신진 사림 동인에게는, 독학으로 학문적 일가를 이룬 이이가 배척의 대상이었던 반면 훈구들에게 우호적이던 기존의 권세가들에게 맞설 만한 거물이 없었던 서인들은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구도장원공의 문제 등 이이의 성격과 행동은 당대 조정의 비난 대상이었다. 29세로 젊은 나이에 한참 명성을 날리던 이이가 이미 합격을 해놓고도 계속 장원 자리를 노리며 불필요한 과거시험에 중복응시까지 감행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이의 성격은 "교만하고 일처리를 멋대로 한다"라며 삼사의 탄핵 사유가 되었다. 40~50살까지도 과거급제 33인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본인은 갑과 장원을 하겠다고 중복응시.... 이뿐만 아니라 실록을 보면 이이는 어전에서 이황이나 서경덕의 학문을 비판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그 제자들이 이이를 역공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박시백의 의견이 흥미로운데, 정리하면 이이는 이황이나 조식, 서경덕 등의 시대가 끝나면서 막 그들의 학파가 정립이 된 상황에서 그들의 영향과는 별개의 학술적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말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선배 학자들의 계보를 잇는 사람들과는 필연적으로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선조 초년에 그는 관직 생활을 하며 <경연일기>를 남겼는데, 이 기록을 살펴보면 그에게 있어서 이황, 이언적[24], 권벌, 이준경, 기대승은 다 비난 대상이었고, 특히 기대승이나 이준경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준경은 자기 스승이 위훈 삭제를 하려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훈 삭제 문제에 대해 매우 강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이이는 이준경의 면전에서 "대신의 말이 애매모호하다."고 말하며 대놓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건 이준경과 이이의 환경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기는 그렇다. 그리고 이준경이 죽으면서 붕당을 경계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자, 그 말이 악하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자신을 추천하고 동네방네 자랑하던 백인걸 역시 예외없이 비판했다. 백인걸에 대한 인물 평을 요구받은 이이는 한마디로 "기고학황氣高學荒" 이라고 답변했다. 쉽게 말해서 "기가 높고 글이 거칠다"는 것이다.

가령 이황의 제자였던 김성일과 동석한 어전에서 이이는 " 이황의 학문은 좋은데, 자풍이나 정신은 옛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고 발언했다. 이를 들은 김성일은 발끈하여 "이황의 학문은 하늘의 해와 같은데 어찌 언론이나 세간의 평판으로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반박하였고, 이황의 또 다른 제자인 류성룡은 이이에 대해 "다 좋은데 뭐든지 따지고 고치려 드는 성품이 흠이다"고 말하기도 했다.[25]

또한 서경덕이 죽고 나서는 우의정 추증에 찬성했을지라도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도에 너무 치우쳤다"라고 비판했는데, 조선시대에 멀쩡한 유학자를 도교 불교에 엮는 것은 대놓고 조롱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이도 한 때 불교 심취한적이 있다. 이렇게 서경덕을 비판한 것은 제자이자 허난설헌 허균의 부친이기도 한 허엽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26]

특히 이이와 허엽은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는 사이였는데,[27] 향약의 시행을 두고 허엽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허엽은 이이를 가리켜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비판하며 그를 혐오하였으며 이이는 허엽을 평하며 "이론에 모순된 점이 많고 문의에 어둡다"고 비판했다. 또한 허엽의 아들인 허봉은 이이를 탄핵한 '계미삼찬'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허봉은 이이를 탄핵했다가 선조의 분노를 사서 파직당했고 귀양에서 풀려난 직후 병사한다. 결과적으로 붕당 정치의 최종 승리자는 이이와 그의 문파였다.

이런 여러 이야기들을 볼 때 이이가 주변인들의 어그로를 잘 끄는 성격이기는 했던 모양[28]

2.4. 말년

1581년에 그는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였고 이와 더불어 군사훈련 등을 주창했으나, 선조와 대신들의 반대와 거부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부분은 후술.

이후 탄핵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조정의 호출을 받아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를 지냈다. 그는 1584년에 47세를 일기로 서울 대사동 사저(舍邸)[29]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자운산에 있는데, 아주 가까운 위치에 그를 배향한 서원인 자운서원이 있어서 지금은 율곡 유적지-라는 형태로 한 동선에서 관람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묘역은 이이과 부인 노씨의 묘 이외에도 아버지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이이의 형 이선의 묘, 이이의 장남 이경림의 묘, 장손 이제의 묘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가족묘이다.

실록의 율곡 졸기는 다음과 같다.( 링크)

물론 이 졸기는 『 선조수정실록』에 있는 졸기로 서인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고 있는 졸기이다. 참고로 원래 『 선조실록』에는 그냥 '졸하였다' 한 줄만 쓰여져 있다. 다만 이이와 같은 명망 있는 신료의 죽음에 사관이 평을 안 했을리가 없고, 아무래도 『선조실록』을 편찬했던 북인이 이이와 대척점에 서있던 동인 계열 중에서 강경파였다는 점에서 일부러 졸기의 내용을 뺐을 가능성이 높거나 이이 사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중 일부가 소실되었는데, 그 때 사관이 쓴 이이의 졸기도 소실되면서 빠졌을 가능성도 있다.]

3. 평가

서경덕 등이 주창한 주기론[30] 이황이 정립한 주리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학들이 크게 받듦으로써 '기호학파'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졌다. 흔히 이기 일원론이라고 하고 심시기(心是氣),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도 하는데, 퇴계학파에게는 주기론이라고 비판받았다.[31]

학자적인 성취는 이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사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성리학 주자가 집대성했다면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가 그리했다고 볼 수 있다. 끝까지 '이'와 '심' 중심의 경학적 해석을 제일시했던 이황과 '이통기국'의 기발이승일도설이라는 독창적인 관점으로 이기의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는 해석을 고집했던 이이의 성리학은 '이기론'을 대표하는 입장들이었다. 이후 조선의 모든 붕당은 표면적으로나마 이기론의 해석에 따라 갈렸다.

조선 땅에서 500년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성리학은 이렇듯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이기론, 18세기 인물성동이론 등의 논의를 거쳐 인간 심성론 쪽으로 치중되어 갔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이 심성학으로 변한 것은 이이 등을 필두로 시작된 이 일련의 논의들로부터 도출된 결과물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이이와 이황의 성리학을 당사자들이 학문하면서 스스로 밝혔던 바와는 판이하게 각각 성리학이 아닌 율곡학, 퇴계학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대표적인 제자로 김장생, 정엽, 조헌, 이귀가 있다. 이이의 학문은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을 거쳐 송준길, 송시열로 이어져 나가며 서인의 뿌리가 되어 조선 후기 사상계를 장악하게 된다.[32]

중국에선 명나라 대부터 과거 시험에서 양명학 등 다른 학문의 논리임이 분명한 견해도 이치에 맞는 훌륭한 답변이라면 정답으로 간주한 반면,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답이 아니라면 답변자를 사문난적으로 간주하였다. 이이와 이황은 성리학 논의의 방향성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나 말 그대로 '학문을 완성'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주류 유학이 조선 중기 이후 강한 폐쇄성을 나타내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을 드러내게 되는 폐단의 책임도 본의는 아닐지언정 일정 정도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3.1. 정치적 능력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 선조실록> 전반기를 이이 중심으로 그려낼 만큼 이이의 경장을 높게 산다. 이순신만 아니었어도 < 중종실록> 편의 조광조처럼 표지 모델로 썼을 거라는 평가. 다만 사상사 - 제도사 등 큰 그림에서 역사를 보지 못해서 이이의 경장론이 후대의 서인에게 이어지는 대목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점은 아쉬운 점. 또한 해당 책에는 '경장'이라는 단어만 강조되나 이이는 '시무(時務)'[33]와 ‘무실(務實)'[34]이라는 표현도 즐겨 썼다.

이이가 병조판서로 재직하던 시절, 조선이 가장 우려한 외세의 공격은 일본이 아닌 여진족이었다. 여진족들은 바다 건너 일본 열도나 해적들보다 지속적이고 눈에 보이는 위협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이 경험한 가장 큰 전투가 벌어졌으니 바로 니탕개의 난이다. 이이는 장장 1년에 걸쳐 병력의 선발과 양성, 보급으로 니탕개가 호시탐탐 노리는 함경도에 중앙군 파견을 지속했다.

이이가 관료로서 세운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 전시 국방 장관으로서 세운 공이다. 이 시기에 행한 여러 긴급조치들이 동인들에게 지탄받아 "망국의 간물"이라는 하는 공세에 시달렸다.

사실 현실 정치에 있어서 이이는 1564년 급제 직후 차관보~국장급인 6조 좌랑에 오를 만큼 능력이 뛰어났던 관료였다. 불가에 잠시 몸을 담근 적은 있으나 보우, 윤원형 탄핵에 가세하는건 물론 3년 뒤 선조가 즉위할 때는 인순왕후의 외척을 탄핵하는 파이터이기도 했다.[35] 그 직후 즉위 사신단 서장관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 - 대사간을 거쳤다.

특히 1574년 대사간에 오른 이후부터는 사실상 대사간에만 6년을 있었다. 이전에는 승진이 늦어진 것 아니냐는 소리일 수 있으나 사림들에게 가장 중요한 직책이었던 3사 중 최고위직을 이렇게 오래 역임했다는 것은[36] 그의 학문적 깊이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 기술에는 삐져서 만언봉사를 올렸다 하는데 정작 만언봉사를 올린 시기는 1574년으로 막 대사간에 올랐던 시기이다. 사간원은 임금에게 간언하는 곳이었으니 오히려 이건 이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임금에게 피력하는데 더활나위없이 좋은 직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이가 1580년부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1584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친구였던 송강 정철도 1583년이 되어서야 예조참판으로 갔다가 특별 제수되어 예조판서가 되었고, 3살 정도 어린 이산해도 1580년에 가서야 형조판서가 되었다. 한마디로 이이는 늦게 승진했다기보다는 되리어 호조판서 제수 이후 이이의 승진속도를 봤을 때에는 이이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영의정은 무조건 갔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선조의 신임을 꽤나 받았기에 이조판서 다음 직책은 우의정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분위기상 1590년이 되기 전에 영의정에 제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하튼 다행히 왕의 신임이 있을 때에 떠나 좋은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동료들이 적어 홀로 개혁하는데 일생을 바쳤지만, 결국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정계에서 파란만장하게 산 고독한 정치인의 면모가 있다.

3.2. 십만양병설

그가 서인의 종주로 추대된 이후 임진왜란 종전과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서인이 정권을 얻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명 조식과 그 직계인 정인홍 등의 북인, 특히 대북 계열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고, 상단에서 언급된 이이와 직접 대립했던 이들의 평가도 아작난다. 그리고 이것은 이이에 대한 평가가 대폭 수정되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선조실록에는 없으나 선조수정실록에는 실린[37] 십만 양병설이다. 실제로 선조실록에는 이이가 선조에게 여러가지 국방과 세제개혁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기록인 시무 육조는 있으나, 십만이라는 구체적 숫자를 언급한 기척은 전혀 없다. 십만 양병설은 서인들이 이이를 높이기 위해 짜맞추어 만든 기록일 가능성이 높아 여러모로 의심스럽다.

우선 이이가 병조 판서로 있던 1583년 올린 시무 육조에는 양병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십만이라는 숫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이는 양병은 양민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면서 우선 양민부터 하고 나서 논의할 일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건 마치 중국의 삼국 시대 때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삼국 정립설과 같이 당시에 통용되던 의견들과 비슷하다.

그럼 십만양병설은 이후에 주장했다면 시급하여 의견을 바꾸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십만양병설에 대한 주장은 1582년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한다. 여기서도 본문에는 없고 덧붙여진 기사로 10만을 양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선조실록에는 없고, 서인 집권 이후인 선조 수정실록에만 존재하는 이 내용은 그 외에도 여러 글들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게 모두 이이의 제자인 서인들의 문집으로, 그나마도 양이 점점 불어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글은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이 1597년 편찬한 율곡행장이다.
'일찍이 경연에서 청하기를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위급한 사태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장차 토붕와해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혼의 제자로 역시 서인이고 이이가 죽었을 때는 겨우 13살이었던 안방준이 '임진기사'에서 그 내용을 보강하고 있다. 그 내용은 역시 서인으로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율곡연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세가 부진한 것이 극도에 달했으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마땅히 토붕와해의 화가 있을 겁니다. 원컨대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을 비치하고, 세금을 덜어주고 재주 있는 자를 훈련시켜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다가 변란이 있으면 도성을 파수하게 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게 하소서'

이 글들에서는 10만이라는 수 외에도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이라는 구체적 방법과 더해서 앞서 언급된 글의 10년이 되지 않아서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참고로 임진왜란이 1592년 4월에 일어났다는데, 송시열의 율곡연보에는 1582년 4월 조에, 선조수정실록은 1582년 9월에 기사를 올리고 있는 것은 상당히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그 외에도 역시 서인인 이정구의 율곡시장, 이항복의 율곡신도비명, 성혼의 문인이었던 어우당 유몽인이 1622년 편찬한 어우야담 등에서 십만 양병설을 언급하고 있다. 십만 양병설 회의론에서는 이들이 모두 김장생의 율곡행장[38]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지만, 그렇게 볼 분명한 근거는 없다. 특히 이항복은 조정 내부 사정에 대해 어느정도 정통한 인물인만큼 이이가 실제로 그러한 종류의 발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유몽인은 북인이었고 실제로 류성룡이 한양에서 후퇴하며 '문성(文成, 이이)의 말이 과연 사실이었구나.' 식으로 후회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문성' 칭호는 인조가 내렸으므로 임진왜란 때 류성룡이 이이를 문성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이문정은 참 성인이다'라는 표현은 뛰어난 선견지명에 대한 당시의 관용구로 쓰였고, 실제로 율곡행장의 초판이나 율곡연보에도 이문정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항복이 쓴 이이신도비에는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李文靖眞聖人也)라고 쓰여있고, 율곡전서에도 문성이 아닌 문정으로 되어 있다. 문성으로 나오는 것은 후대의 것이다. 이문정은 북송 때의 명신 이항으로 류성룡이 이이를 이항에 빗대어 찬탄한 것인데, 율곡전서의 후기 교정자가 문정을 문성으로 잘못 교정한 것이다. 따라서 교정자의 실수에 불과한 것을 십만양병설 후대 조작설의 근거로 볼 수 없다. 수정실록이 편찬되기 전에 지어진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도 십만 양병설이 등장하고 유성룡의 후회도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유성룡이 이이를 숙헌(이이의 자)이라고 지칭했다. 참고로 이덕일은 이 꼬투리를 잡아서 십만 양병설을 율곡연보의 저자인 송시열이 조작했다고 우기고 있다...

당시의 조선의 상황으로 볼때 10만 양병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200만 정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훈련하고 먹이는 비용은 상상도 못할 비용이라서 그 때 당시 조선으로서는 안하는 것이 상책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10만의 군대를 모았다 해도 백성들의 민심이 나라를 떠나버리기 때문에 의병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39]

게다가 그 1200만명 중 절반은 여자임이 명백하고 그럼 나머지 600만 중에서도 왕족, 노비 등의 천민을 제외하면 징발 대상인 평민은 더욱 한정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조선이 유지한 상비군인 갑사의 숫자가 14800명이였는데 4교대제라 평시 근무 인원은 3천 ~ 4천에 불과했던 것을 보면 10만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겠지만, 상비군이 아닌 예비군으로 해석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유형원의 반계수록 등에는 임란 전 조선의 군액 중에서 보인, 수군을 제외한 정병 기보병을 17만 ~ 18만으로 잡고 있다. 이렇게 10만을 훌쩍 넘어가는 숫자가 가능한 것은 조선군의 기본적인 체계가 교대 근무이기 때문이다. 4교대라면 정병 17만 ~ 18만에 상번군이 4만 남짓이 되며 이 숫자는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17만 ~ 18만에 달하는 정병은 엄연히 전시가 되면 정상적으로 동원될 수 있는 병력이지만, 당시에는 거의 방군수포화되거나 노동 부대로 전락해서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훈련은 사실상 전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선조도 "병사들을 농사에 부치는 것을 비록 말하길 좋은 제도라고는 하나, 우리 나라(조선)는 병사가 없다. 다만 농민을 몰아 싸움할 뿐이니 마땅히 그 패함이 있다.(兵寓於農, 雖曰好制, 而我國則無兵, 只驅農民以戰, 宜其敗也)"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10만의 상비군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제대로 훈련을 받은 병력 10만을 갖추자는 것은 현실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군제에 맞는 대응책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전근대 국가에서 상시 유지 가능한 군사력의 한계로 여겨지는 기준이 대략 총 인구의 1% 정도이다. 인구의 절반은 여성이고 나머지 절반인 남성 중에서도 또 대략 절반정도는 징병에 적절치 않은 연소자, 노약자, 환자나 장애인 및 기타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인원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총 인구중 징병대상인 건강한 성인 남성의 비율은 약 1/4(25%) 정도라고 어림잡을 수 있다. 따라서 총 인구의 1%는 곧 건강한 성인 남성 인구의 4%(1/25)이며, 성인 남성 25명 중 1명이 군인이 되는 정도가 전근대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회의 기능의 유지를 전제로 상시 유지할 수 있는 전력의 한계라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보면 당시 조선의 인구가 1200만이면 상비군 10만 유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물론 정말 상비군 10만을 편성하여 유지하려면 양반 및 노비의 비율 및 징병문제도 따져야 하고 전반적으로 가벼운 세금-작고 검소한 정부를 지향했던 조선 정부의 유지 방침 자체가 제고되어야 하며, 정기적인 군사력 투사를 정책화-산업화하지 않았던 조선에서 이 정도의 군사력을 유지할 이유가 있는가, 정 유지하려면 그를 위한 제도적 기반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부터 문제가 되겠지만...

결국 지봉유설이나 반계수록 등에 나왔다는 정병 17~18만에 상번군 4만은 총 인구의 1.5% 정도를 전시 동원 가능한 예비군으로 유지하고 총 인구의 0.3%~0.4%를 상시 전력으로 유지하는 선으로써, 조선 정도 규모의 국가면 으레 유지해야 할 병력의 수준으로써도 결코 무겁거나 가혹하여 국가경제에 부담을 줄만한 규모는 아니며, (조선에서 운영하던) 교대근무식 징병제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힐만 하다. 결국 무(武)보다 문(文)을 더 중시하던 조선왕조에서도 국가의 안전보장에 필요한 수준의 군사력은 합리적인 수준에서 유지되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안배되어 있었으나 이 시대에는 그러한 제도가 형해화되어 국가의 군사력 자체가 유명무실한 상황에 이르렀고, 이이의 양병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줄 알고 군대를 이렇게 허술하게 내버려두냐. 유사시에 대비하여 유명무실해진 군사제도를 정비해놓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애초에 조선을 포함한 전근대 동아시아는 숫자에 그렇게 민감한 문화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10만이라는 숫자에 그렇게 집착할 필요가 있는지는 좀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이가 주장한 것이 십만 양병설 하나가 아니라 십만 양병설은 그저 그가 주장한 경장의 일부였을 뿐이다. 이이는 기본적으로 사회 개혁을 주장한 경장론자였고 그의 경장에는 대동법의 전신인 수미법(收米法), 세제 개혁 등 여러 개혁이 있었으며 10만 양병론으로 대표되는 것은 그 중 군제 개혁 방안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십만 양병론 때문에 이이의 군제 개혁의 기반을 위한 양민 정책이 묻혀 버린 성향까지 존재한다. 이이의 주장은 시종일관 양민 후에 양병이었다.

여하튼 학자적인 성취는 상당해 지금은 여러 나라의 학자들에게 연구대상이며 조선의 엘리트층을 길러낸 밑거름이지만 당파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의 위치와 서인들의 신격화 흔적 등은 그의 가치를 깎아내고 있다.

물론, 이 문단의 평가는 주의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일단, 학계에서는, 이 십만양병설을 부정하는 논란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정해야 할 근거도 없기 때문에 십만양병설을 긍정하는 것이 주류다. 더욱이 손쉽게 편집 가능한 나무위키의 특성상, 이 평가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보다는 학계에서는 이러한 견해도 있다라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이와는 별개로,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있다. 니탕개의 난으로 위협성이 증명된 여진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 당시의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한 이후 다시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조선은 일본이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되어 안정을 찾을 것인지조차 예측이 쉽지 않았다.[40]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국방상 집중할 곳은 정치 전황 자체를 예측하기 힘든 일본보다는 당장 침략이 자행되어서 위기감을 조성시키고 있는 북방의 여진족이었으며, 이이의 십만양병설도 이와 연계된 것이지 임진왜란이란 일본의 침략과는 별개의 사항이라는 게 이 주장의 핵심이다.

물론 율곡 이이가 왜적이 아닌 여진족을 염두에 두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더라도 니탕개의 난-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괄의 난, 이렇게 4개 큰 변란으로 날라간 북방군과 대내외적인 혼란, 그리고 1570년대 말부터 요동총병 이성량의 비호를 등에 엎고 세력을 키워나가던 누르하치[41]를 고려해본다면, 그 현실가능성은 차치했을 때, 필요한 것이었다. 심지어 병자호란 이후로도 루스 차르국(러시아)의 만주 침공이 있었고 이는 결국 나선정벌로 이어졌는데, 비록 조청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서 루스 차르국의 한반도 및 중국 본토 침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유럽인의 동아시아 침공이라는 점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 시대 및 침략자가 속한 문화권을 막론하고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큰 의미가 있었던 셈이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찬양하는 부분은 '당장은 없더라도 미래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군사적 변란'을 대비해야 한다는 정치인으로서의 식견이지, 미래의 외국 정치 상황을 예언하는 노스트라다무스식 신통력이 아니다. 그러한 '미래의 변란'이 임진왜란으로 상당히 빨리 현실화된 것 때문에 이이의 식견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 뿐이므로, 이이가 구체적인 변란의 내용까지 예측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동시대 다른 정치인들 중에는 국방의 허약화에 대해 문제를 확실히 인식, 제기하고 구체적인 개선 정책안까지 표출한 사람은 이이 말고 없으므로 십만양병설의 병사 숫자는 후대의 부풀림이라 해도 상당한 현안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4. 대중매체

5. 여담

6. 관련 문서



[1] 음력 1536년 12월 26일. 한국은행권 오천원권에는 음력 생일에 맞춰 1536년생으로 표기한다. [2] 음력 1584년 1월 16일. [3] 춘당공파(春塘公派) 13세손 옥(玉)변 항렬이다. 춘당공파의 지파(支派) 중 율곡문성공파(栗谷文成公派)의 파조이다. [4] 할아버지의 외할아버지. [5]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라인으로 이어진다. [6] 이른바 사림의 대두 이후 임진왜란 이전 까지의 정치제도 현황을 살펴보면 전근대 행정력의 한계로 수취, 재분배 체계에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연산군이 국역 체제를 심각하게 이완시키면서 걷잡을수 없어졌지만 서로 근간이 되는 사상이 다른 정치세력이 대립하고 중간에서 절대 한쪽손만 들어주지 않는 국왕과 미묘한 눈치게임이 벌어져 문제의식은 있으되 실행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던 상황이 초유의 국난을 맞아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어 신속하게 실행된 것이다. [7] 강릉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고향이며 이이에게는 따라서 외가가 있는 곳이었다. [8] 그래서 파주시 곳곳에 가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율곡로, 율곡수목원, 율곡습지공원 등 시설명에 호를 붙였다. [9] 사실 이는 조선 전기에 일반적인 결혼 형태였다. 아들은 사돈 집에 들어가고 사위가 우리 집에 들어와 사는 것. [10] 신사임당의 부친인 신명화가 딸 신사임당을 편히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한미한 집안의 평범한 사람인 이원수와 혼인시켜 데릴사위로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이원수는 평생 아내에게 큰 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했다고 한다. [11] '불씨(佛氏:부처님)가 그 제자에게, 생각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라고 경계한 것은 무슨 뜻인가. 대개 그 학문은 별다르게 기묘한 것이 없다. 다만 이 마음이 내달리는 길을 끊어 정신을 집중시켜 정(靜)함이 지극하여 허명(虛明)한 경지로 나아가게 하고자 할 뿐이다. 화두(話頭)를 두고 거기에 매달려 공부하게 하는데, 또 그 사람이 미리 이런 뜻을 알면 선(禪) 공부가 알뜰하고 전일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런 금법(禁法)을 만들어서 속이는 것이다.' [12] '선생의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노씨(盧氏)인데, 곡산(谷山)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노중례(盧重禮)의 현손(玄孫)이다. 그 아버지 노경린(盧慶麟)은 종부시 정(宗簿寺正)이요,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선공감 정(繕工監正)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부인은 가정(嘉靖) 신축년(1541, 중종36)에 나서 정사년(1557, 명종12)에 선생에게 시집왔다.' - 출처: 행장, 김장생 저, 링크 [13] 이를 밝혀낸 인물이 바로 이병도이다. 실제로는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기보다 거사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이 숭유억불로 유명하지만 조선 전기만 해도 유학자들 중에서 불교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고 그 중에 법명을 가진 거사들도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하루 술 3잔 설화로 유명한 손순효(칠휴거사). [14] 장유는 율곡을 직접 만났던 두 명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머리를 깎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게 사실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링크 [15] 조선 전기에 유학자들이 주변인의 사망에 충격받아 불교에 심취하게 되는 경우가 없진 않았다. 세종 또한 유학을 따랐지만 소헌왕후와 아들들의 사망에 충격을 받아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16] '지난날 남들이, 그대가 불교 서적을 읽고 꽤 중독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오랫동안 애석하게 여겼었는데, 일전에 나를 찾아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그 잘못을 말하였으며, 이제 두 번 온 편지의 뜻이 또 이러함을 보니, 나는 그대가 도에 함께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겠습니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 [17] 장원 급제 [18] 12위 급제 [19] 특히 별시 당시 내놓은 답안인 '천도책'(天道策)은 당시 그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에 학문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나 이 시험은 몇 달 동안 출제자들이 고심하여 제출한 문제였는데, 이이는 단 세 시간 만에 답안지를 작성해서 제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확실히 천재는 천재인 듯. [20] 과거시험은 보통 9세부터 일평생을 바쳐 공부해야 한 번 될까 말까한 시험으로 문과 평균 합격자 나이가 35세였다. [21] <퇴계선생전서 권16 담이숙헌>에 퇴계가 '소년 등과는 불행'이라며 등과에 실패한 이이를 위로하는 구절이 있다. -> 앞글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퇴계선생문집 제14권'에 퇴계가 율곡에게 답하는 2개의 편지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런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링크 [22] 모든 것이 여러 가지로 다 다름. [23] 왜냐하면 그들 생각에 심의겸은 외척 나부랭이로 허명을 얻었고, 김효원은 중망받는 사림인데, 이이의 해결책에서 심의겸은 조금 가깝고, 김효원은 멀리 간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지방의 거리까지 측정해서 똑같은 거리에 있는 곳으로 보내라는 것은 괴상하기 짝이 없다. [24] 율곡은 이언적이 을사사화 때 윤임파 사림을 취조한 일을 문제삼았다. [25] 류성룡이 좀 보수적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정작 류성룡은 이이를 높이 평가했을 뿐 아니라 이이의 정책과 사상을 지지했던 서인 인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재상이 된 이후에 이이의 경장론과도 부합하는 정책을 시행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특히 류성룡은 이이가 제안했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는데, 이는 뒷날 대동법의 토대가 된다. 다만 이이 생전에는 이이의 개혁 정책에 반대했긴 류성룡도 마찬가지였다. [26] 흥미롭게도 허엽 - 허균 - 기자헌 등의 동인 인사도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한때 법명까지 받아가면서 불법을 공부했던 이이도 그렇고, 조선 성리학에 불교 냄새가 강한 것이 괜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성리학부터 주희가 유학에다 불교, 도교를 섞어서 만든 것이다. [27] 허엽의 별명이 묘지(卯地)였다. 토끼라는 게 아니라, 동서남북 네 방위를 북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열둘로 나눈 것인데, 이렇게 하면 묘지는 정동(正東)이 된다! 그야말로 타협 없는 동인이었다는 이야기다. [28] 이후의 그의 학통은 정계를 장악한 집단이 되면서 조선 후기 많은 잘못들을 저지르게 되지만, 이런 비판적인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후학들이 주체적으로 선배들의 학설을 연구하여 보다 옳은 것으로 취사선택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되기도 하였다. [29] 지금의 인사동 관훈빌딩 언저리이다. [30] 카를 마르크스 유물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경덕의 경우는 기가 이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건 중국 성리학에도 없는 내용이었고, 이후에도 서경덕 계통의 학파는 맥이 단절되었다. [31] 흥미로운 점은 심지어 서인의 두 거두인 이이와 성혼도 논쟁을 했다.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하는 이이와 '이기 분속설(理氣 分屬說)'을 주장하는 성혼 간의 율·우논쟁(栗牛論爭). [32] 이이의 친구이자 학문적 동반자인 성혼의 학문은 사위 윤황과 외손자 윤선거를 통해 계승된다. 윤선거는 김집을 사사하기도 했고 아들 윤증으로 학맥이 이어져 나가며 소론의 뿌리 중 하나를 형성하게 된다. [33] 시급한 일, 혹은 그 시대에 중요하게 다루어야할 패러다임과 같은 말이다. [34]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뜻. 쉽게 말해 일을 해도 성과가 제대로 나도록 해야한다는 뜻이다. [35] 좌의정 심통원으로 심의겸의 작은 할아버지라는게 압권이다. 하지만 심의겸은 이를 일절 문제삼지 않았고 이것이 이이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배경이라고도 한다. [36] 심지어 중간에 자리를 잠깐 옮긴 자리도 홍문관 부제학이었다. [37] 다만 이 사례에는 문제가 있는데, 선조실록은 굉장히 부실할 뿐더러 선조수정실록이라고 정철을 비판했다. [38] 율곡전서에는 십만 양병설이 본편에는 없고 부록에 들어가 있다. 물론 율곡전서 역시 김장생의 율곡행장보다는 편찬시기가 느리다. [39] 당시에도 군역을 누가 지느냐에 대한 문제는 왈가왈부가 많았다. 후대로 가면서 개선을 꾀한다고는 하나 불합리하게 군역을 져야했던 대상들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됐던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자. 현재 대한민국에서조차 병역 징집 대상에서 누가 들어가고 누가 빠지고를 결정하는 일은 많은 논란을 불러오는데.. [40]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반으로 사망한 것이 1582년 6월이었고 노부나가의 가신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압한 것이 1586년, 규슈 토벌이 1587년이었고 1592년에 조선 침공이 일어났다. 1583년에 왜국의 침략을 예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41] 비단 누르하치가 아니더라도 조선과 국경을 맞닿은 건주 여진과 야인 여진에서 세력을 키우던 왕고, 왕올당 등의 여진 추장들은 1570~80년대 조선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 [42] 실제 유교에서 강조하는 군주에 대한 충성 사상은 모든 군주에게 있어서 매력적이기에 가능할 법한 이야기. [43] 장자는 양자로 들이면 안 되지만 이 규정도 편법으로 무시했다. 지손 가문의 장자를 종가의 양자로 들이기가 성행했다. [44] 여기서 더 이어지는 버전도 있다. 구미호를 퇴치한 한 후 노파가 구미호의 시체가 있던 곳에 여우 석상이 있을테니 절대 만지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이이는 이를 역시나 어긴다. 이이가 석상을 만지자 석상이 연기가 되어 이이에게 빨려 들어가는데, 놀란 이이가 노파에게 상담하니 구미호가 이이의 딸로 환생하여 재앙을 내리려 하니 나중에 태어날 딸을 죽여야지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며 마지막 충고를 한다. 그러나 이이는 딸을 죽일 수 없었고 그 대가로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이루지 못하고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고 끝을 맺는다. [45] 이야기의 다른 버전에 따르면 죽은 밤나무가 승려로 변한 호랑이에게 "죽은 밤나무는 밤나무가 아니더냐~!"라고 호통쳐서 호랑이가 달아났다고도 한다. 또다른 전승으로는 이원수가 심은 나무들 중 상수리나무가 1그루 섞여있었는데 상수리나무가 호랑이에게 "자신도 밤나무"라고 이야기하여 아이를 구하기 위해 상수리나무가 신통력을 발휘한것에 감명받은 호랑이가 이이를 포기하고 이원수에게 "아이를 잘 키우라"고 하고는 산으로 돌아갔다는 내용도 있다. [46] 당시 기준. [47] 영화 < 범죄와의 전쟁>에서 초반에는 설설 기다가 최민식이 하정우가 같은 성씨며 항렬이 낮음을 알고 사실상 남과 다름없는 하정우에게 족보를 들먹이며 하대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 [48]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본가로 돌아가는 형태 [49] 남자의 집에서 여자를 맞아들여서 혼례를 남자집에서 치르고 신혼을 보내는 형태 [50] 이이의 문묘 배향은 비교적 늦었으며 김장생, 김집, 송시열이 인조-효종-현종 시기에 정계를 장악한 서인들의 중심축을 형성하였기에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당장 송시열은 '宋子'라고 불렸으니 문묘 배향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 [51] 조식은 광해군 때 문묘 배향이 될 뻔하였으나 제자들의 어그로로 실패하였다. 자기 스승만 올리면 되는데 이언적과 이황이 문묘 배향된 것을 시비 걸며 남인과 서인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었다. [52] 이이 본인뿐만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의 동상도 함께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