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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육군 기병
병과 휘장. 기병용 외날도
세이버 두 자루를 교차시킨 모양새다. 현재는 미 육군 기갑, 공중강습, 기계화보병 등의 부대 중 기병 부대에서 개편된 일부 부대가 전통 계승 차원에서 전투 병과 인원들이 해당 휘장을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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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설리번 윌리엄 홈즈(Sullivan William Holmes) 작, 《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1898년 영국 육군의 로열 스콧츠 그레이즈(Royal Scots Greys) 기병대[1]가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군기를 빼앗고 있다. |
언어별 명칭 | |
한국어 |
기병 마병[2] 말탄이[3] |
한문 | 騎 兵[4] |
영어 | Cavalry |
말을 탄 병사, 군인, 무사를 뜻한다. 또 군대에서 기병으로 이루어진 병종을 뜻하는 단어이며 기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기병대, 기마대라고 한다. 기마병이라고도 하지만 '기'자가 말을 탄다는 뜻이므로 겹말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기동성과 강력한 위력으로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상대적으로 무장이 가볍고 빠른 경기병과 중무장한 중기병으로 구분할 때가 많은데, 경기병과 중기병 사이의 구분이 엄밀하지는 않은 편이다. 화약 무기들의 위력이 충분치 않고 냉병기가 효과적이던 시대에 매우 중요한 전력이었다.
현대에 와서는 의장대나 기마경찰, 혹은 티베트 고원 같은 특수한 지역 등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모두 사라졌으나, 이들의 역할은 기술 발달로 육군이 기계화되면서 등장한 기갑 병과와 육군 항공대, 일부 수색대가 인계받아서 수행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의 여러 기갑부대나 육군 항공대는 과거의 기병 병과의 전통을 계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타는 것이 말에서 기갑차량이나 항공기가 되었을 뿐 이전에 기병이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이들을 현대의 기병이라고 봐도 된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기마보병의 경우에도 군대에서는 기계화보병과 차량화보병이, 경찰에서는 싸이카가 그 역할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말을 타더라도 이동을 위해서만 말을 사용하는 보병 병과 장교, 기마보병, 포병, 수송 병과 등은 기병 병종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2. 역사
자세한 내용은 기병/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3. 역사상 기병의 장점 및 단점
3.1. 장점
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 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나는 기병들이 보병 대열의 중앙에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창을 들고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보병들이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자, 그들은 전선 곳곳에서 동시에 돌격을 시작했다. 한 부대는 우익, 다른 부대는 좌익, 그리고 세 번째 부대는 중앙으로 돌격해 나갔다. 우리 군사들은 그들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중앙에 있었는데, 많은 군사들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가장 가까운 사단인 좌익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좌익은 이미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래서 우익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그들이 좌익과 중앙보다 더 비참하게 도주한 것을 보았다.
바하 앗딘, 『술탄의 일화와 유수프의 공덕』[7]
바하 앗딘, 『술탄의 일화와 유수프의 공덕』[7]
왜적은
철환(鐵丸)을 비 오듯 퍼붓는데 한번 맞기만 하면 곧바로 쓰러지고, 근접해서는
칼을 사용하는데 그 검술이 지극히 기이하니, 이들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지금
이 적병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아서 다른 기예(技藝)는 없고 단지 궁시(弓矢)와 전마(戰馬)만이 있을 뿐인데, 그 궁시는 사거리(射距離)가 우리 군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다. 다만 그들의 전마는 힘이 매우 좋아 치달리며
진격하기에 적격이라서, 순식간에 아군(我軍) 속으로 돌입(突入)하기 때문에 아군이 저절로 그 위세에 눌려서 무너지곤 한다.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이 오랑캐와 전투를 벌일 적에 접전할 때마다 꼭 패하곤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그들의 전마를 막을 기구를 설치하여 돌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군의 마음을 안정시켜 동요되지 않게 하고는 꿋꿋이 서서 사격을 하게 하면, 적병이 진입을 하려다가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지체하며 머뭇거릴 것이요, 그러는 사이에 선봉(先鋒)이 모두 죽으면 뒤에 오는 자들도 모두 겁을 먹고 도망칠 것이 분명하니, 그들이 도망치는 기회를 이용해서 추격하며 사격한다면 크게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조익, 『포저집』
기병의 전성기였던 전근대시기, 기병은 아래와 같은 강점으로 인해
보병에 대해 절대우위를 가졌다. 크게 분류하자면 하나는 충격력, 다른 하나는 기동력이다.조익, 『포저집』
-
기병 돌격의 위압감과 돌파력
전근대 시대에 기병은 전투능력에서 대개 보병을 크게 상회했다. 우선 충격력은 기병이 가진 질량과 속도에서 오는 것으로, 말과 기수의 무게를 합치면 적어도 500kg이 넘어가고[8], 그렇게 완전히 무장한 채 밀집대형을 이룬 상태에서도 최대 20㎞/h대로 달릴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 수백 kg의 질량이 창끝에 일점 집중되기까지 하니 그 관통력은 가히 엄청나서 말과 기수를 한꺼번에 관통했다는 기록이나 심지어 무려 보병 5~6명을 한꺼번에 관통했다는 믿기 힘든 기록까지 있을 정도다. 따라서 수백 kg이 넘는 수천기의 기병들이 돌격을 시전할 경우 상대 보병에게 강력한 위압감을 주며 기선을 제압하고 돌격성공 시 아예 전선을 통째로 붕괴시킬 수도 있었다.
온갖 날붙이와 화살촉이 스쳐 지나가는 전쟁터에서, 딛고 선 대지마저 적들이 뒤흔드는 상황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 병사는 없다. 멀리서부터 돌진해 오는 기병대의 위압감은 상상 이상으로, 시각적인 위용뿐 아니라 소음, 특히 땅이 울릴 정도의 진동은 충분히 훈련받고 준비된 보병이라도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9] 역사에 기록된 전투 묘사를 보면 기병대가 돌진해오는 것만으로도 비숙련보병들은 사기가 무너져 그대로 패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기병 돌격에 대열이 무너지면, 거의 대부분은 그걸로 끝이었다. 대열이 무너진 구멍으로 기병들이 계속 돌파해 들어오며 보병대의 내부, 후방, 측면을 정신없이 타격하기에, 아무리 정예보병이라 할지라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진형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10]
기병의 돌격이 전투 전체의 전황을 결정지은 사례 중 하나를 들자면,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려 전쟁을 벌이던 와중인 1578년 1월 31일에 벌어진 젬블루(Gembloux) 전투에서 2만 5천 명의 네덜란드 독립군은 불과 1200명의 스페인 기병대가 돌격하자 공황 상태를 일으키며 무너졌고 그 결과 무려 1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완전히 참패하였다.[11] 반면 승리한 스페인군의 사상자는 고작 20명에 불과했다! 이건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엄연히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었다. # 이 밖에도 십자군 전쟁의 람라 전투나 몽기사르 전투 등에선 불과 수백기의 기사들이 수만의 이슬람 보병대를 격파했었고 17기의 금나라 기병이 2000의 송나라 보병대를 격파하는 등 기병의 엄청난 전투력을 증명해주는 사례는 동서양을 통틀어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동일한 역할을 전차나 일부 장갑차가 대체한다.
그런 역할만큼 위험성도 컸다. 기동력과 돌격력을 살려 공격력을 극대화하는 대신 방어력이 그만큼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기병이라는 병종의 약점이었다.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메이지 시대 일본 육군에 기병대를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육군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자리에서,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박살내 버린 다음,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놀란 학생들한테 보여 주면서 "기병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한 일화가 있는데, 적에게 기동력을 살려 타격을 가하는 것이 기병의 궁극적인 역할이고, 그러기 위해 방어력을 버리는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병종이 기병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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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자체의 전투력
매체에서 거의 묘사되지 않지만, 말이 가진 힘 자체도 무시하기 힘든 요소다. 군마는 품종개량 및 훈련을 통해 전투에서 공격성을 발휘하기 마련이며, 전투 중에 말에 가해지는 창상이나 화살 등의 피해는 말을 더욱 흥분시켰다.[12] 매체에서는 안전을 위해 기병 돌격 자체를 거의 묘사하지 않거나, CG를 쏟아부어 어찌저찌 돌격을 묘사하더라도 말이 부딪히는 순간만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애니에서도 돌격 후 벌어지는 난전과 그 과정 속에서 말이 적 보병을 공격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별로 없는 편이다. 하지만 실제 기록을 보면 한 번 돌격이 이루어진 이후 난전이 벌어질 때 말발굽에 밟히거나 채이거나, 말의 이빨에 물려 죽거나 혹은 말의 몸통박치기에 들이받히는 등 말 자체의 공격에 죽은 병사도 굉장히 많았다. 말발굽질은 제대로 맞으면 뼈가 박살나며, 반 톤에 이르는 큰 덩치에서 나오는 치악력은 굉장히 치명적이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 기병 장교의 기록에 따르면 말이 한 입 물어 뜯으니 얼굴 가죽이 뜯겨져 나가고, 복강이 뜯겨 내장이 흘러나올 정도였다는 살벌한 내용이 있다. 게다가 기병끼리 맞붙을 경우, 기수가 아닌 말끼리 서로 싸우기도 했는데, 말이 적군의 말을 물어 죽이거나 발굽으로 걷어차거나 밟아서 죽이기도 했다. 말발굽은 매우 강해서 인간은 물론이고 같은 말이나 혹은 심지어 사자 같은 맹수도 한대 맞으면 최소 치명상이 가능하다. 게다가 총이나 활에 말이 아닌 기수가 맞아서 떨어질 경우, 이미 흥분한 말을 어느 정도 통제해줄 기수가 없어진 만큼 그대로 돌격해서 적들을 죽이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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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성 및 전장에서의 주도권
기병이라는 병과자체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동성 그 자체였다. 전략 및 전술, 그리고 주력간의 결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원하는(유리한) 시점에, 원하는(유리한) 곳에서 원하는(유리한) 방식으로 싸울 것을 적에게 강요하는 것, 다시 말하자면 주도권이다. 문단 위의 제시문 중 헤로도토스가 스키타이 기병을 묘사한 부분이 기병의 이런 강점을 잘 표현했다 할 수 있다.
전근대 이후부터 대기병 전술과 화기가 발달함에 따라 보병과의 정면승부는 기병에게 점차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병은 기동력을 가지고 적의 취약점을 타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결론적으로 기병 전력이 우세한 쪽은 열세한 쪽에 비해 전장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기병은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적의 취약점인 측면이나 후방을 우회하고 돌파하는 망치의 역할로서 널리 운용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적의 정면은 가장 전투력이 강력하나 측면과 후위는 상대적으로 훨씬 취약하다. 기병은 기동성을 살려 적의 취약점인 측후방으로 우회하고 돌파하는 것, 즉 포위섬멸을 유도할 수 있었다. 물론 보병으로도 가능하나 속도가 기병만큼 빠르지 않아 효과가 떨어졌던 반면에 기동성을 갖춘 기병은 적이 제대로 대응하기 전에 취약점인 측후방을 신속하게 우회하고 돌파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기병은 대개 양 측면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측 기병 역시 보통 같은 방식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기병의 제일 우선시되는 임무는 적 기병을 격파하여 아군의 측면을 엄호하고 동시에 적의 측면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밖에 정찰력에서도 우위를 점하며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하거나 약탈을 할 때도 넓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고 지휘관의 명령을 전달할 때도 훨씬 신속하며 위기에 빠진 아군을 도와주러 갈 때도 훨씬 빠르게 갈 수 있고 심지어 전황이 불리해 후퇴할때조차 보병은 기병에게 잡히지만 기병은 보병을 따돌리고 탈출할 수 있는 등 직접적인 전투력을 빼고도 기동력이 가져다주는 이점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실제로 1524년부터 1526년까지 독일 전역에서 일어났던 독일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12~15만 명이나 되는 많은 병력 수에도 불구하고 훨씬 적은 수의 귀족 연합군인 슈바벤 동맹군한테 패배하였는데, 그 이유는 기병 때문이었다. 농민군은 기병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으며, 어쩌다 있는 극소수의 기병들도 정찰용으로만 썼지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동성에서 창기병을 내세운 슈바벤 동맹군에게 밀려서 패배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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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임무 수행 및 기능
전장에서 주력 간의 결전에서 뿐 아니라 기병은 필수적인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기병의 이런 다재다능함은 위에 설명한 기동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기능으로 척후 및 정찰을 통한 적정파악, 적의 척후활동을 거부하는 차장( screen; #), 적 견제 및 교란, 매복과 기습, 패주하는 적의 추격, 대분란전 및 치안유지, 연락 및 전령역할 등이 있다.
차량과 항공기가 발달하기 이전에 적정파악에는 기병이 필수적이었다. 또한 적 역시 당연하게도 기병 등으로 척후대를 구성하여 정찰과 정보수집에 나설 것임으로 적의 정찰부대를 사전에 미리 제거하거나 쫓아내는 차장활동을 수행하기도 했다. 정찰과 차장활동은 통상 소규모 제대가 산개하여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정찰대만으로는 대응하기 힘든 규모의 적을 만난다면 신속히 접촉을 끊고 이탈해야 했다. 반대로 정찰대만으로도 상대할만한 규모의 적과 만났다면 신속히 집결하여 적을 제거하거나 쫓아내야 했다. 따라서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이 이런 임무를 맡기에 제격이었다. 차장활동은 적으로부터 아군 주력부대의 규모나 위치, 의도나 이동방향 등을 은폐할 수 있고 잘만하면 아예 은폐를 넘어 적을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교란시켜 적이 아군의 의도를 오판하게 만들 수도 있다. 반대로 정찰을 통해서는 적의 정확한 규모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기병을 적절하게 운용한다면 적에게 의도치 않은 기습을 받을 가능성을 낮추면서 동시에 적에게 기습을 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따라서 기병은 본격적인 결전에 앞서 승리의 여건을 조성하는데 필수적이었다.
결전이 끝난 이후에도 기병의 역할은 중요했다. 결전에서 패배한 경우 패자측은 잔존병력의 전력을 유지한채 적과의 접촉을 끊고 전장에서 이탈하여 한번의 전투에서의 패배로 주력이 소멸되는 대참사만큼은 피해야했다. 반대로 기병의 임무는 퇴각하는 적의 이러한 의도를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저지하여 전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보병으로도 추격이 가능하긴 하지만 적이 퇴각하는 시점에서 충분한 기병대가 있다면 아예 퇴각하는 적을 앞질러 퇴로를 차단해버리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런 대전과는 흔하게 일어나진 않았지만, 적을 계속 추격하며 접촉을 유지하며 적이 재집결하여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계속 압박을 가하는 것만으로도 적에게 손해를 강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도 충분한 기병 예비대를 유지하며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할 때까지 신중히 사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이유에서 앞서 소개되었듯이 나폴레옹은 기병이 전투 이전에도, 전투 중에도, 그리고 전투 이후에도 중요하다는 말로 기병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척후와 차장 그리고 적 추격은 현대전에서도 여전히 중요하다. 오늘날에는 이런 임무는 거의 기계화부대의 역할이 되었다. 전차와 장갑차가 사실상 기병의 후예라고 불리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외에도 통신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구두와 수신호, 깃발이나 악기 등으로 병력을 통제해야 했는데 전쟁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이마저도 한계에 부딪쳤다. 따라서 기병을 통한 전령이나 명령전달, 보고가 이루어졌고 때로는 이러한 요인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기도 했다. 대분란전이나 점령지에서의 치안유지에도 기병은 기동성을 살려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 넓은 지역을 커버할 수 있었다. 또한 점령지에 분산되어 주둔하더라도 필요시에는 신속히 집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유용했다.
-
기계화부대에 비해 가지는 이점들
기술혁신에도 불구하고 기병이 초기 기계화부대에 비해 가지는 강점도 존재했다. 우선, 기병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전차보다는 저렴한 편이었으며 대체불가능한 전략자원인 각종 금속이나 고무, 연료를 거의 소모하지 않았다. 군을 기계화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천연자원, 산업력, 경제력과 같은 강력한 국력이 뒷받침 되어야했다. 이런 역량을 갖추지 못한 여러 비열강 중소국가에서는 기계화부대로의 대체는 커녕 기병의 부분적인 차량화와 기계화조차도 쉽지 않았다. 따라서 2차 대전 시기만해도 여러 중소국가들에서는 기병이 여전히 운용되었고 심지어는 열강국인 나치독일과 소련에서도 기병과 군마가 대량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기병은 전술적인 기습에 있어서도 기계화부대보다 유리한 점이 존재했다. 우선 기병은 기계화부대에 비해 기동 중에 발생하는 소음과 먼지 등이 현저히 적었다. 또한 하천이나 수로, 산림, 습지와 같은 다양한 전장환경과 장애물에서도 기계화부대보다 유연한 움직임이 가능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이밖에도 위에 설명한 정찰, 기습, 매복, 추적, 치안유지 등 다양한 임무 수행이 여전히 가능했다. 특히 2차대전의 주요전장 중 하나인 동부전선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기병이 독일과 소련 양측 모두에서 널리 활용되었다. 다만 기계화부대에 가지는 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기병은 아래 단점 문단에서 계속 설명할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점들이 존재했다. 결국 기병은 예전의 보병, 포병에 이은 지상군의 주력 병과라는 지위에서 물러나 보조 병과 정도로만 운용되었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기술혁신과 전장환경의 변화로 2차대전 이후 기병은 사실상 도태되었다.
-
넓은 시야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말을 탄 상태에선 생각보다 시야가 넓어진다. 때문에 전장의 상황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며, 부대의 지휘 통제가 더 쉬워진다.[13] 특히 원거리 무기를 쓰는 기병들의 경우, 더 넓은 시야 덕분에 그 효과가 더 높아지므로 훨씬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기병은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보병에 대해 절대우위를 갖기에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망치 역할을 담당하는 등 핵심전력으로 분류되어 왔다. 보병으로도 망치 역할을 한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의 정통 농경왕조처럼 기병전력이 부족한 경우에나 어쩔 수 없이 택한 것이고, 언제 어디서나 망치 역할로는 기동력과 충격력이 있는 기병을 더 선호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심지어 한니발 같은 전쟁사상 최고의 명장조차 기병전력이 상대보다 열세인 경우에는 자마 전투처럼 패배하기도 했으며,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헝가리 독립군에게 무참히 찢겨나가 러시아 제국군의 도움을 받은 것도 헝가리 특유의 후사르 기병연대 때문이었다.
3.2. 단점
이토록 강력한 기병이지만, 많은 단점도 있다. 결국 이러한 단점들은 무기가 발달할수록 전장에서 기병의 입지가 좁아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고, 끝내는 전장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전장 환경,
지형 및 기상환경에 따른 영향
가령 물렁한 지형에서 폭우가 쏟아질 경우 말의 다리가 논두렁 같은 곳에 빠져 나오지 못하니 살아있는 과녁으로 전락한다. 말의 다리는 소보다 연약해서, 수렁에서 억지로 빠져 나오려다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는데, 다리 하나만 부러져도 다른 세 다리에 과부하가 걸려 관절이 망가져서 매우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14] 임진왜란 때 맹장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기병대를 이끌었다가 패배한 이유 중 하나도 전날까지 이어진 비로 전장이 진흙탕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공성전이나 시가전에서도 기병이 이점을 발휘하기 어렵다. 특히 공격쪽일 때 성곽 때문에 말을 타고 싸울 수가 없으니 내려 싸울 수밖에 없었다.[15] 다만 공성전 중에서도 성곽 바깥에서 싸워야할 때에는 유용했는데, 수성측의 소티엔 포위당하지 않은 문을 쓰거나 약한 방어선을 노리겠지만 적의 포위를 뚫고 추격이 들어오기 전에 성문을 닫아야 하는 만큼 기병대가 유용하게 쓰일 수밖에 없으며, 공성측도 수성측의 소티에 대해 일차적인 대응에 실패했다면 기병대가 맞대응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병의 역할이 완전히 없을 순 없었다. 대표적으로 제2차 빈 공방전 당시에 폴란드군을 주축으로 한 신성동맹의 구원군이 윙드 후사르를 앞세워 오스만군의 포위를 깨부수고 빈을 구원한 사례가 매우 유명하다. 반면 같은 전투에서 공자측이었던 오스만군은 공성전 상황에서 적절한 기병 운용에 실패했다. 오스만군 산하의 크림 칸국 기병대가 인근 지역을 정찰하여 구원군의 접근을 미리 포착하고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어야 했다. 하지만 지휘통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신성동맹군에게 허를 찔리고 대패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또 임진왜란에서의 영천성 전투와 신립이 지휘한 탄금대 전투에서 그 단점이 드러나는데, 영천 전투 당시엔 포병의 지원을 받은 조선 관군과 의병으로 이루어진 보병들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권응수 휘하의 5백여 조선군 궁기병대가 일본군이 점령한 영천성을 상대로 남문이 포격에 직격당해 붕괴하여 보병들이 성내로 쇄도할 수 있을 때까지 뺑뺑이 돌며 일본군을 일방적으로 두들기기도 했다. 심지어 중간에 반격을 위해 서문으로 나와 맞돌격한 일본군이 있었는데, 기병들이 죄다 몰려가 이를 쓸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남문이 열리자 기병대장을 맡은 권응수가 도끼를 들고 앞장서 돌격하며 성내로 조선 관군과 의병이 쇄도하고, 폭약통에 탄약고가 유폭하고, 일본 장수 법화가 마지막으로 사살당하며 전투는 조선의 승리로 돌아갔다. 반면 일반적인 전투에서 조선 기병은 대부분 조총에 갈려나갔다. 그리고 탄금대 전투에선 신립이 이전에 북방에서 기병으로 활약했던 경험으로 일본군을 막으려고 무리하게 기병들로 구성했던 것이 패전의 요인이었다. 당시 탄금대 전투에 참전한 조선군의 기병들은 급하게 징집된 기병들이라 훈련도 제대로 안됐고, 전투 도중 비가 와서 탄금대는 진흙 수렁이 되어 말이 기동하기 어려워졌다. 이를 간파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군의 주력이 기병이란 것을 알고 늪지대로 유인하여 조총병들로 하여금 괴멸시킨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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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보다 떨어지는 밀집화력
부피면에서 보병이 어깨를 맞대고 서면 직경 2 제곱미터 당 3~4명이 붙을 수 있지만 기병은 말 자체가 워낙 큰 동물이라 1명이 한계다. 때문에 충돌력으로 보병을 밀어내지 못하면, 기병 1명은 보병 3~4명과 동시에 대결해야만 했다. 또한 말은 본능적으로 뾰족한 물건에 뛰어들기를 꺼리기 때문에[17] 아예 작정하고 장창이나 파이크로 밀집대형을 이룬 보병은 기병으로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몇몇 전설적인 사례들을 제외하고 역사상 대부분의 전투에서 기병이 밀집장창을 정면으로 뚫어내는 경우가 드물었던 이유는, 장창 자체의 리치도 있지만 그것이 기병보다 훨씬 촘촘하게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병 1기당 무려 4개의 창날을 돌파해야 하니 정면대결로 뚫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기병 역시 이 같은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카라콜 전술같은 것도 등장하였지만 문제는 사격전에서도 밀집화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같은 면적 기준으로 보병 궁병대는 궁기병의 3배의 화살을 퍼부울 수 있었다. 여기에 흔들리는 말안장 위에서 쏴야하는 쪽과 두 다리를 굳건히 땅에 디디고 안정되게 활을 쏘는 쪽의 차이는 덤이다.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총검[18]과 수발식 소총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기병이 밀집대형을 이룬 보병대와 정면대결하는 것은 도저히 승산이 없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시로 7년 전쟁 중 프랑스 왕국군과 영국 및 동맹군 간에 벌어진 1759년의 민덴 전투가 있다. 민덴 전투에서 프랑스군 중앙에 배치된 기병대 63개 대대[19]가 영국 및 하노버 전열보병 9개 대대와 정면 대결을 벌였다. 아직 대기병 방진이 도입되기 전 시기라 영국 보병들은 선형 대열을 이룬 상태로 포격을 맞아가며 전진했다. 이에 맞서 프랑스군 기병대는 순차적으로 3파로 나뉘어 영국보병대에 돌격을 가했다. 이때에 프랑스 기병대는 영국 보병보다 숫적으로 우세한 데다가 아군 포병의 지원사격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예상과 달리 머스킷으로 무장한 영국보병들이 세 차례에 이은 프랑스군 기병돌격을 모조리 분쇄했고 되려 프랑스군 기병대가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즉 18세기 즈음에 이르면 심지어 기병이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조차 보병의 밀집대형에 정면으로 돌격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 되어버렸다. 대신, 보통 보병의 선형대열은 측면이 취약하여 기병이 보병대의 옆구리를 칠 수 있다면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보병도 대기병 사각 방진이 등장하여 이를 보완했지만, 이럴 경우 적 보병과 포병에 그만큼 취약하였다.[20] 결론적으로 보병과의 정면 대결이 어려워진 이후에도 기병은 최대 강점인 기동성을 살려 적의 취약점을 타격하고 다른 병과인 보병, 포병등과도 협동함으로써 그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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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력 부족
말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기수가 무기를 휘둘러 자신의 말을 보호해야 하지만 말의 목과 머리가 앞에 있기에 제한이 매우 클 뿐더러, 그마저도 무기가 짧다면 더더욱 힘들다. 이러한 물리적인 유지력 외에도 정신적인 부분을 살펴봐도, 말을 타면 위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기에 기병은 보병에 비해 전열에서 이탈하여 도주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위험이 훨씬 크다. 기병이 전술적으로 방어가 아닌 공격에 주안점을 두는 병과기에 큰 단점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같은 기병끼리 격돌할 때도 위의 단점 때문에 열세인 쪽이 삽시간에 무너지는 경우가 잦다. 이 때문에 기병 전력이 상대보다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열세일 경우 아예 기병들이 전부 말에서 내려 보병대에 합류하는 경우도 꽤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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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비해 떨어지는
체력
말은 인간이 가축화한 동물 중에서 체력이 가장 높은 동물 중 하나이나 인간보다는 체력이 열등하다. 중/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주행이나 이동에서도 두드러지는데, 이 경우 사람과 말의 속도 차이는 거의 없거나 되려 사람쪽이 우세한 편이다. 우선, 승마 단체에서 공통적으로 주장되는 내용에 의하면, 총 주행거리나 일수를 고려해서 날씨나 지형이 좋다는 가정하에 훈련되거나 사육된 말은 중간 중간 잘 쉰다는 전제하에 하루에 걸어서 걸어서 25에서 35마일(40 ~ 56km), 속보(Trot)로는 하루에 20마일(32㎞) 정도를 이동할 수 있지만, 권장 이동 가능 거리는 하루 7마일(11.6km)정도이며, 갤롭으로 질주할 수 있는 거리는 2마일(3.2km) 내외라고 한다. 링크[21] 실제로 전원이 기병이었던 몽골 제국군이 2,000km 이상의 장거리 원정시 일평균 이동거리는 수부타이/바투 원정군이 하루에 27km, 훌레구가 하루에 15km 혹은 6~9km 정도였다. 링크 예외적으로 아예 지구력 위주로 품종이 개량된 말의 경우 하루 100마일(160km)씩 2~3일 미만의 기간동안 이동할 수 있는데 흔한 경우는 아니다. 링크
인간은 건강하고 평소에 적당한 운동을 취한 경우 하루에 20~30마일(32km~48km)을 걸을 수 있는데 링크, 극단적인 예부터 살펴보면, 병사의 체력 보존을 고려치 않고 더욱 훈련받은 인간을 기준으로 천리행군같이 진행한다면, 말보다 더 빠른 속도인 하루 50km 정도에 더 긴 거리를 수 백km단위로 더 오래 걸을 수도 있고(낙오 가능성이 있지만), 실전사례로는 한국 전쟁 당시 중공군 제 38군 113사단이 야간 행군으로 14시간 동안 72.5km를 주파하여 유엔군을 포위 공격한 사례도 있다.[22] 그 외에도 드문 사례지만 세계정상급 장거리 주자들 기준으로 24시간 내에 246km 주파한 세계기록도 여러 개가 존재한다.(spartathlon 참조)
물론 이는 꽤 이례적인 극단적인 사례이고, 군장을 메고 전투력과 체력을 보존하면서 걷는 일반적인 행군속도를 고려하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중 블레넘 전투에서 말버러 공작군이 34일간(25일간 행군 9일 휴식) 400km를 이동하여 하루 11.76km, 오스만 제국군이 바그다드 원정 때에 일평균 18km, 폴리비우스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한니발이 로마를 침공할 당시 10일간 800stadia 즉 일간 18km, 알렉산더원정군이 휴식일을 포함하여 행군한 속도가 하루 18~32km라고 한다. 출처
결론적으로 위 행군속도 사례에서 보병은 속도 면에서도 전원 기병으로 구성된 몽골군과 비교해봐도 비슷하거나 되려 더 빠르고, 보병의 경우 말과 달리 야영과 숙영을 위한 숙영지 건설과 경계 근무, 취사 등의 노동도 해야 하므로, 동일 거리를 이동했다 하더라도 하루에 육체활동을 지속하는 시간과 부담은 보병이 말보다 훨씬 길고 큰 편이다. 그래도 표준적으로 인간은 말보다 훨씬 높은 이 정도의 체력 부담과 노동 종사에도 곧잘 버티는 편이다.
하지만, 사람이 감당 가능한 체력적 부담을 말한테 부과하게 되면, 말은 체력적으로 과로를 하게 되어 심장에 부담이 가 폐사할 수도 있다. 특히 더더욱 높은 운동량과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전장에서 말들이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은 보병보다 훨씬 짧으며, 휴식도 오래 필요로 한다.[23] 따라서 몽골 기병같은 경우 기수 한 명당 적어도 3마리~10마리까지 말을 대동해서 전쟁에 참가하며, 말을 갈아타며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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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 통제의 어려움
기병은 정밀한 기동 지휘 및 돌발상황 대응이 보병에 비해 어렵다. 기병 돌격을 생생하게 그려낸 워털루( 1971년 영화)나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같은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일단 돌격명령이 떨어져 수백~수천 기의 기병이 우르르 달려 나가기 시작하면 신호 전달이 매우 어려워진다. 돌격이 시작되면 말의 발굽 소리와 울음소리로 인해 목소리는 커녕 나팔 소리도 듣기 힘들 정도로 소란스러우며, 안 그래도 빨리 달리는 상황이라 주변을 제대로 보기 힘든 데다 흙먼지 때문에 깃발 신호를 눈으로 보기도 어렵기에, 한 번 시작한 돌격은 사실상 취소할 수 없었다.[25] 그래서 아군 기병대가 통제에 벗어나 패주하는 경우나, 적 기병을 격파하고 나서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거나 약탈에 몰두하느라 전장을 이탈해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다보니 초반에 잘 싸우다가 기병을 통제하는데 실패하여 패배한 사례들도 많다. 전근대에 벌어진 브라이텐펠트 전투, 엣지힐 전투, 네이즈비 전투 등이 기병의 지휘통제가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인지 잘 나타난 사례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상술했듯이 창, 활 등의 무기가 날아오는 상황이 말들을 흥분시켰기에 말들이 이미 흥분하면 기수들이 통제하는 것도 어려웠으며, 특히 적의 공격으로 인해 기수가 말 위에서 떨어져 기수가 없어진 말들은 사실상 통제할 방법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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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참(
군수)의 문제
기병의 가장 핵심적인 단점으로, 기병은 훈련 및 양성하고 유지하는 비용(유지비)이 엄청나다. # 기병은 기수인 인간 뿐 아니라 동물인 군마가 필수적이다. 군마는 가장 좋은 말을 골라 쓰는데다 이를 사육해서 훈련시키고 먹이는 비용이 장난 아니었다. 말은 세상에서 가장 겁이 많은 동물 중 하나이며 근처에서 좀 큰 소리만 나도 눈을 희번덕거리며 도망칠 길을 찾는다. 명령에 따라 기병이 포화 속으로 돌진할 정도로 말을 훈련시키는 것은 군인을 훈련시키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어려운 과정이며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었다. 게다가 훈련을 시킨 후에도 유지비(먹이)가 엄청나다는 문제가 남는다. 말 한 마리가 하루에 먹는 양은 아무 일도 안 할 때 15,000칼로리, 중간강도의 노동을 할 때 25,000, 고강도 운동을 할 때는 33,000칼로리로 링크 성인 남성보다 최소 6~13배는 먹는다. 부피를 덜 차지하는 귀리나 감자를 건초와 섞어 규격화한 덩어리가 사료로 사용되었으나 이마저도 먹는 양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 전에는 부피가 큰 마초를 먹여야 해서 수송조차 어려웠다. 수백~수천 마리의 마필이 먹을 만큼 풀이 넉넉한 곳은 오로지 초지가 끝도 없이 수십~수백만 ㎢ 단위로 펼쳐진 비옥한 초원지대뿐이었다. 길가에 난 아무 풀이나 마구잡이로 먹이면 양부터 턱없이 모자라거니와 배탈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말은 물도 많이 마시기에 식수 보급도 생각보다 큰 부담이 된다. 가령 사람의 일일 수분섭취량이 총 2.5리터고, 음식물로 섭취된 양을 제외하면 보통 1.3리터의 물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말은 사람과 신진대사가 달라 하루에 5 ~ 10갤런 즉 18.9리터에서 37.85리터의 엄청난 양의 물을 별도로 섭취해줘야 한다. 링크 말 한 필이 14~28인분의 식수를 먹는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기병의 작전과 행군은 식수를 획득하기 용이한 곳으로 제한받는다. 이는 기병의 기동경로와 공격지향점을 어느정도 예측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먹이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것도 아니다. 이 밖에도 군마 운용에는 온갖 전문인력들이 필요했다. 대표적으로 말의 상처나 질병을 치료하는 수의사, 말의 편자를 만드는 장제사가 있어야 하고 훈련에는 당연히 전문 조교사가 필요하며 또한 말이라는 동물이 인간의 개량을 거치며 온갖 이유로 죽는 생각 이상으로 연약하고 섬세한 동물인지라 뜬금없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말이 죽는 사태를 막으려면 마필관리사(구무원)가 하루종일 다수의 말과 붙어있어야 한다. 따라서 보급의 양만 많을 뿐 아니라 체계까지 복잡해진다. 지원인력과 자원이 충분하지 않다면 군마 손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솟곤 했다. 이는 아래에서 후술할 군마 보충과 양성이 어렵다는 점과 맞물려 군마 부족문제를 심각하게 만들곤 했다.
결론적으로 기병, 특히 군마를 전투가능 상태로 유지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가령 흉노와의 전쟁을 위해 30만 명의 기병을 유지했던 한나라의 경우 규모가 과장되었다는 의견이 많긴 하지만 아무튼 매우 많은 기병을 운용했음은 분명해 보이는데, 평시에 식량을 포함한 기병1기의 유지 비용은 보병의 8.7배에 달했고, 이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예산은 1년 총 세익의 2.18배에 달하였다.[26] 기병의 재정을 연구한 창춘수 교수에 의하면, 전시에는 감가상각이나 소모품 비용이 급증하므로 유지비는 평시의 저것보다 증가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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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마 양성 및 획득의 어려움
유지비가 엄청난 대신 생산비가 적냐면 그것도 아니다. 일단 말을 군마로 쓰기 위해서는 생후 1.5년 이상 마체를 키우고 다음 최소 3년간 집단 훈련과 빠른 걸음, 구보 및 사람과 친해지는 것을 가르쳐야 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훈련시켜야 했다.[27] 즉, 쓸만한 군마를 얻는 데는 생후부터 최소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런 말을 예비마까지 포함해 몇 필이나 거느려야 하는 것이 기병. 게다가 말은 한 번에 많은 새끼를 낳는 돼지와 달리 한 번에 한 마리의 새끼만 낳을 수 있다. 그래서 유목민처럼 목축이나 수렵 따위의 생업(生業)을 목적으로 사람과 말이 함께 자연스럽게 단련이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인위적으로 기병이라는 병종을 편성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기병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훈련받은 군마를 획득하는 시스템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20세기 중반 이후 기병이 도태되는 시점까지도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까다로운 문제였다. 즉 기병을 일단 한 번 대량 손실한다면 말을 공장에서 찍어낼 수 없으니 단시간 내에 재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훈련을 받은 군마들도 전장의 가혹한 환경, 특히 포위전 시에는 대량으로 죽어나갔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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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 양성의 어려움
기수를 양성하는 건 군마보다도 더욱 어려웠는데, 군마가 기수의 통제를 잘 따르도록 훈련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수 역시 말을 잘 다루도록 훈련을 받아야 했으며 또한 흔들거리는 말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고삐와 무기를 다뤄야 했다. 그리고 말은 기수의 통제를 잘 따르기만 하면 되지만 기수는 말을 잘 다루는 것 뿐 아니라 상관의 명령까지 잘 따라야 하는 건 물론 동료들이나 다른 병과와도 호흡을 맞춰야 하며, 지휘관의 경우는 기수들이나 말이 명령에 따라 움직이도록 훈련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기병대의 대형을 짜고 움직이게 해야 하는 데다 전장의 환경 변화나 흐름도 파악할 수 있어야 했고, 나아가 전체적인 전략을 짜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휘하의 기병들을 통솔할 수 있어야 했다. 거기에 사람은 말처럼 새끼를 한 번에 한 명만 낳는 데다 말은 4~5년이면 성체가 되지만 사람은 16~20년이 되어야 성체가 되며, 군마와 마찬가지로 성인이 되고 나서도 아무나 기병으로 삼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군마 자체도 길러내기 어렵고 오래 걸리는데 기수는 그보다 더 힘들고 더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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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등 열병기에 너무 취약
사실 기병이 도태된 가장 큰 원인이다. 유목 제국등은 천년 넘게 정주 문명을 유린하여 왔지만, 당장 가장 원시적인 핸드 캐논의 등장 이후부터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화살로도 말을 제압할 수 있긴 했으나, 말이라는 동물이 워낙에 빠른데다가, 군마같은 경우는 근육 덩어리라 화살로 맞춰 제압하기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포 및 총기는 특유의 큰 소리와, 폭음, 파편 등으로 인해 예민한 군마가 쉽게 놀랄 수 있으며, 총알은 물론이고 대포 파편 한대만 맞춰도 군마는 바로 무력화된다. 어지간한 소음에 대해 훈련이 된 군마도, 총기의 폭발음, 그보다 더 센 대포의 폭음은 견디지 못하고 폭주하기 시작하며 바로 기병의 대열은 무너지게 된다. 그나마 전열보병시대에는 물량으로 어찌저찌 극복이 가능하다고는 하나, 기관총 및 돌격소총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기병은 완전히 쓸모가 없게 된다. 군마의 경우 현대에도 매우 비싼 동물인데, 이 군마가 단가 300원도 안하는 총알 하나에 하나씩 삭제되기 시작하면 기병부대는 유지를 할 수가 없게 된다. 세계를 호령했던 몽골 제국군이 현대에 와서는 일개 지방군벌 하나에 정복당하는 굴욕을 당하기 시작한 것도, 기관총의 등장 이후이다.
4. 유명한 기병대
- 한국
-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개마무사[28]
- 고려: 신기군[29]
- 조선: 이성계의 가별초, 선기대[30], 별무사[31], 별기대[32], 겸사복[33]
- 대한민국: 독립기갑연대 기병대대[34]
- 중국
- 전국시대 조나라 : 호복기사[35]
- 전한: 기병대에 특별한 명칭을 붙이지는 않았으나 초원 지대에서 흉노와 정면으로 대결하던 질적, 양적으로[36] 최강급의 기병대중 하나라 할 수 있다.
- 후한: 백마의종, 호표기
- 북조
- 당나라: 현갑군[37], 월기
- 요나라: 궁위기군, 부족군
- 금나라: 맹안모극, 괴자마
- 명나라: 북병,[38] 관녕철기(關寧鐵騎)[39]
- 청나라: 팔기군
- 몽골
- 그리스( 마케도니아 왕국 포함): 헤타이로이
- 누미디아: 누미디아 기병
- 러시아: 카자크[40]
- 로마 제국: 스콜라이 팔라티나이, 클리바나리, 아르콘토풀레
- 미국: 러프 라이더
- 스웨덴: 하카펠리타트
- 스페인: 히네테[41]
- 시크 왕국: 고르쿠라 사르다르[42]
- 신성 로마 제국: 독일인 용병 기병[43], 흑기병(Schwarz Reiter)
- 오스만 제국: 시파히
- 잉글랜드: 노르만 기사[44], 철기대, 스콧츠 그레이
- 중동: 맘루크
- 카르타고: 신성 기병대, 누미디아 기병
-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 파르티안 카타프락토이, 푸쉬티그반
- 폴란드-리투아니아: 윙드 후사르
- 폴란드: 울란
- 프랑스: 노르만 기사[45], 장다르메[46], 프랑스 제국 근위 기병대, 메종 드 루아( 프랑스 왕국 근위 기병대), 퀴레시어, 캐러비니어
- 헝가리: 후사르[47]
- 세르비아: 세르비아 기사단[48]
5. 기병으로 유명한 인물들, 혹은 기병 출신인 유명 인물들
- 곽거병
- 견훤[49]
- 고노자
- 공손찬
- 관영
- 광개토대왕
- 게오르기 주코프[50]
- 남옥
-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
- 드제
- 리처드 1세
- 마초
-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51]
- 설인귀
- 글필하력
- 제베, 수부타이 등 몽골제국의 장군들
- 세묜 부됸니
- 숭덕제
- 신립
-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 아키야마 요시후루[52]
- 알렉산드로스 3세
- 앙투안 샤를 루이 드 라살
- 에드윈 램지
- 여포[53]
- 얀 3세 소비에스키
-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 올리버 크롬웰
- 이오시프 스탈린[54]
- 위청
- 유금필
- 이성계
- 이지란
- 이범석
- 장철부
- 정문부[55]
- 장 바티스트 베시에르
- 제임스 이월 브라운 스튜어트
- 조무령왕
- 조아킴 뮈라
- 조조
- 조인
- 조운
-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 천명제
- 칭기즈 칸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필리프 르클레르
-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틀리츠
- 한스 요아힘 폰 치텐
- 항우
- 헨리크 도브잔스키
- 혁련발발
6. 여담
기창(騎槍)이나 기보(騎步) 등의 단어들이나 기병(騎兵)과 마병(馬兵)이 서로 바꿔 쓰는 것에서 보듯, "기(騎)"라는 말은 대체로 '말'을 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별다른 설명이나 수식어 없이 기병(騎兵)이라고만 하면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기마(騎馬)와 승마(乘馬)가 상통하는 것처럼, 기(騎)를 말이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타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기도 한다. 실제로 인간을 태울 수 있는 동물이고 훈련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기병의 탈것으로 사용할 수 있다.-
낙타
티베트 지역, 인도-페르시아 지역, 아프간 지역, 중국 사막, 몽골 사막, 아랍 및 북아프리카에서는 서식하는 야생 낙타들을 길들여 가축화하면서 군마로도 사용하였다. 보통 낙타기병이라고 표현한다. 유럽도 낙타를 길들여 기병으로 사용한 사례가 있다. -
당나귀
성격이 사나워서 승마전투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아 본격적으로 사용된 예는 없으나, 종종 위장 기병대를 급조하는 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코끼리
말이 아닌 탈것들 중에서도 제일 강력하다. 코끼리기병이라고도 표현하지만, 코끼리 부대나 전투 코끼리 등의 단어도 많이 쓰인다.
7. 미디어
자세한 내용은 기병/대중매체 문서 참고하십시오.8. 관련 문서
[1]
스코틀랜드산 회색 군마로 무장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다만 이들은 이 돌격 이후 프랑스 창기병대의 반격을 받아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이 전투에서 더 이상의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이들을 이끌던 폰슨비 소장도 이때 전사했다.
[2]
조선 후기에 많이 쓰였는데, 주로
훈련도감 소속 기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3]
순우리말이다. 다만, 실제로는 거의 "기병"을 쓴다.
#우리말샘
[4]
한국어와
일본어 등.
중국어에서는
간체자인 "骑"를 쓴다.
[5]
전투 전에는 척후병으로서 주변 정찰 및 진격로 확보를, 전투 중에는 상대방 기병에 대한 견제와 요격, 진격해오는 적 전열 보병들에게 방진을 강요하여 아군 포병 화력 밀집도 극대화, 또 상대 포대 습격이나 빈약한 적 보병 전열에 대한 직접적
강습 및 돌파등 다양한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으며 전투 후에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며 전과 확대를 할 수 있다. 물론 패전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기병 예비대가 있다면 추격해오는 적을 교란시킬 수 있다.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시대에는 이전에 비하면 보조적이지만 여전히 기병이 다양한 상황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기병 병과가 생겨났고 이들은 전장의 상황에 맞게 많은 활약들을 할 수 있었다.
[6]
나폴레옹의 휘하에는
조아킴 뮈라라는 뛰어난 기병지휘관이 있었고
아일라우 전투에서 프랑스 기병대 1만 1천 기의 돌격은
제2차 빈 포위전에서의
윙드 후사르들의 1만 8천 기의 돌격 다음가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 돌격으로 남았다.
[7]
원 제목은 "al-Nawādir al-Sultaniyya wa'l-Maḥāsin al-Yūsufiyya"이다. 해당 장면은
제3차 십자군 전쟁 당시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십자군의 전술적 움직임을 묘사한 것.
[8]
군마의 몸무게는 약 380~500kg이다. 여기에 사람 무게와 각종 보호 장구류, 말에도 씌워지는 마갑과 안장 등의 무게까지 합치면 충분히 넘고도 남았다.
[9]
흔히 "지축이 울린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현대 보병 훈련 과정 중에 대인수류탄을 터뜨려 땅이 잠깐 흔들려도 병사들이 전율을 느끼는 걸 생각해 보자. 수천의 군마가 떼지어 오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땅은 보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충분했다. 과장되었지만
최종병기 활에서 이런 묘사를 상세히 보여주었다.
[10]
요한 반 나사우가 훈련시키면서 파이크를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양민이라고 모욕한 스웨덴군도 그 근방 동네에서는 나름대로 우수한 창병대였는데 장비 면에서는 서유럽 기병에게 밀리던 윙드 후사르에게 처참하게 털렸다. 물론 기병들이 제대로 된 파이크 방진을 정면돌파로 이긴 기록은 희귀하지만 문제는 제대로 된 총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 제대로 된 파이크 방진도 희귀했다는 게 함정이다. 5~6m에 이르는 길고 무거운 장창을 지휘관의 구호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다루는건 그 자체로 고도의 훈련이 필요했고 병종 특성상 주로 하는 임무가 기병돌격을 저지하는 것이므로 깡다구도 대단해야 했다. 즉 파이크병은 기병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자원과 훈련시간을 필요로 하는 정예병들이었고 때문에 필요할때마다 제깍제깍 마음놓고 펑펑 투입할 수 있는 흔한 병종이 아니었다. 초창기 고구려에 뼈아픈 패배를 안긴 위나라 장창병의 대승도 중국 기록에 의하면 보병과 기병의 합동공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1]
이 중 기병 돌격으로 죽은 자는 6천 명 가량이며 나머지는 겁에 질려 도망치면서 우왕좌왕하다가 자기들끼리 짓밟혀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12]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실제 군마들은 창칼이나 화살에 한 두대 맞는다고 해서 픽픽 쓰러져 죽는 약골들이 아니었다. 예시로, 조조의 말은 화살을 여러 발 맞고 심지어 한 발은 눈에 맞았는데도 조조를 적진에서 무사히 탈출시켰다.
[13]
꼭 기병이 아니라도 전장에서 지휘관들이 말을 탔던 이유가 이 때문이다.
[14]
현대
경마에서도 유명한 경주마들이 분쇄, 복합 골절을 당해 안락사 처분되어 관중에게 충격을 주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말의 다리가 순환계 또한 겸한다는 구조적인 약점에서 기인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21세기의 발달된 의학으로 수의사 여럿을 동원해도 절대 완치를 보장하지 못하며, 치료에 성공해도 예전처럼 달리는 것은 불가능하여 대부분 종마 등의 진로로 은퇴하게 된다. 그리고 말 하나에 수의사 여럿을 동원하는 것은 마주가 부자거나 말이 유명해야만 베풀 수 있는 사치이다.
[15]
예외적인 사례겠지만 기병이 성벽을 돌파하는 경우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성벽 앞에 흙주머니를 잔뜩 던져 언덕을 만들어서 타고 올라가거나, 말이 오를 수 있는 거대한 사다리차를 만들어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16]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17]
사람이라고 과연 손 안 쓰고 얼굴과 가슴팍부터 뾰족한 곳에 들이대고 싶을까 생각하면 쉽다.
[18]
정확히는 총구에 삽입하는 플러그식 총검이 아닌 장착한 상태에서도 총을 사용할 수 있는 탈부착식 총검의 등장 이후
[19]
squadron
[20]
사각형 대열을 짜면 정면 화력은 ¼로 줄어드는 셈인 데다 포탄을 피하기도 어려웠기에 자칫하면 기병을 보낼 필요도 없이 포병에 의해 몰살당할 위험이 매우 컸다.
[21]
How many miles per day a horse can travel depends on the gait at which it is traveling, as well as the terrain that they are covering the distance over. At a steady walking pace, a horse can travel 25 to 35 miles per day. When traveling at a trot, a horse can go about twenty miles. A cantering horse moves at about 10-17 miles per hour, which means a very fit horse can travel about seven miles; however, the more average horse will not be able to travel nearly as far. Finally, when galloping, the average horse cannot travel more than two miles before becoming fatigued.
[22]
황성철, <한국전쟁시 중공군의 제1·2차 공세 전역에 관한 재조명>, <<군사연구>제122호, 130쪽
링크
[23]
경주마들의 경우 한번 경주를 하고 나면 10일 가량 휴식 기간을 가지고 나서 다시 훈련을 시작한다.
[24]
한국사 인간흉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 태조 이성계의 경우에도 전투마가 총 8마리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고려 말 최유력 군벌 수장이다 보니 일반 기병과 비교하기 어려운 것은 맞으며 실제로 저 8마리를 다 끌고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기병이라면 예비마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는 할 수 있다.
[25]
사실 보병도 이러한 특성이 있기는 하다. 한 번 시작한 전면공격을 갑자기 취소하면 왕성하던 병사들의 사기가 자칫 한순간에 최악(아군에 무슨 큰 일이 생긴 것으로 오인→공포심이 급속도로 전염)으로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수대전 항목 참조. 동서고금의 병서들이 "한 번 내려진 군령은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취소하지 말 것"이라는 금언을 넣은 것은 이 때문이다.
[26]
A cavalryman on average cost 87,000 cash, not including rations, while a regular soldier only 10,000 cash. The total expenditure of a 300,000 strong cavalry force would therefore have been around 2.18 times the entire government's annual revenue.
위키피디아, Chang, Chun-shu (2007), The Rise of the Chinese Empire 1,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창춘슈 교수의 원책 내용에 의하면 식량과 사료값, 의복비를 다 포함한 비용이 8.7배에 달한다고 서술하고 있으므로 위키피디아에 나온 내용은 오독으로 보인다.
[27]
가령 메이지유신 때 일본은 외국으로부터 전투용 2살 망아지를 사들여 3년간의 훈련을 시켜서 기병부대에 배속한 후 1-2년의 훈련을 추가로 거쳤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훈련을 거듭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28]
개마무사를 고구려만의 고유한 병종이었다고 보는 오해가 많은데,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중장기병을 운용한 게 고구려인 건 맞지만 백제 외에도 신라, 가야등 삼한계 남방 국가들 역시 적지 않은 수의 개마무사를 운용했다.
카타프락토이 참조.
[29]
별무반의 하나
[30]
장용영, 총위영 소속.
[31]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소속.
[32]
훈련도감 소속.
[33]
국왕을 호위하던 정예 기병들로, 신분보다는 무재(武才)가 더 중시되었다.
[34]
마지막 기병대장으로 알려진
장철부 중령이 지휘했던 부대다.
[35]
'오랑캐의 복식과 마상궁술(胡服騎射)'이란 뜻의 궁기병 부대로 당시 조나라가 마상궁술을 제일 먼저 도입했다고 볼 수 있다.
[36]
무제 치세때는 30만을 넘었다.
[37]
당태종
이세민이 직접 만든 친위 부대로 약 1천~3500명의 중무장 기병들로 이루어졌다
#
[38]
여진족,
몽골족 등 명나라 치하의 북방 유목민족 및 이들에게 동화된
한족들로 구성된 기병부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엄청난 약탈을 저질러서 조선에서는 순수 한족들로 구성된 남병 위주로 파병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39]
명나라 말기의 명장인
원숭환이 요동 출신 중국인들로 모집하여 훈련시킨 중무장 기병 부대로 그 수는 대략 9천 명에서 1만 명 사이였다. 후금(청)의 군대를 상대로 여러 차례 싸워 이길 만큼 강력한 부대였다.
#
[40]
민족의 이름이지만, 러시아가 이들로 구성된 경기병 부대를 양성하여 병과의 이름과 같이 쓰였다. 물론 이 이름은 괜히 쓰인 건 아니고 당연히 카자크 족이 기마에 능숙한 전투민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이 바로
대장 부리바다.
[41]
스페인어로 '기병'이란 뜻으로 중세 스페인에서 이베리아 무어인을 막기 위해 창설된 경기병 부대이다.
[42]
인도 북부의
시크교도들이 세운 나라인 시크 왕국의 기병 부대로 사람과 말이 모두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은 채로 긴
창을 쥐고 돌격하는
창기병으로 운영되었다. 이 사르다르 부대와 맞서 싸운 영국군조차 그들을 가리켜 "세계 최고의 기병대"라고 칭송할 만큼 용맹스러운 부대였다.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92쪽.
[43]
중세 유럽에서 독일인들은 유럽 각지에서 용병으로 고용되어 싸웠는데, 대부분은 중무장을 한 기병으로 싸웠다. 아래에서 언급한 세르비아 기사단 대부분도 독일인 용병들이었고, 이들은 매우 사납고 난폭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전통적인 중기병 강국인 프랑스에서조차 16세기에 독일인 용병 기병들을 대규모로 고용할 정도였다. 그밖에도 16세기 유럽 최강의 군사 강국이었던 스페인에서도 기병들의 대부분은 독일인 용병들이었다.
[44]
노르만 기사들이 워낙 다양한 곳에 진출하였고 따지고 보면 프랑스와도 봉신관계이긴 해서 마냥 잉글랜드만을 대표하는 기병대라 보긴 힘들 수 있으나 결국 이들이 최후까지 가장 네임드 메인 지배계층으로서 정착한 국가가 잉글랜드이다. 현세엔 이들의 후손들이
노르만족의 정체성을 내세우지는 않으나 지금까지도 잉글랜드 왕가에는 이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이들을 좀 더 정확히 지칭하자면 앵글로-노르만이다. 그리고
채널 제도의 노르만족은 영국 본토의 노르만계 후손들과 달리 현재까지도 노르만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45]
잉글랜드가
백년전쟁에서의 패전으로
노르망디를 상실한 이후로도 계속 노르망디에 잔류한 노르만족은 잉글랜드로 이주한 노르만족과 달리 현재까지도 나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프랑스의 노르만족은 백년전쟁 종전 이후에는 잉글랜드의 노르만족과 달리 메인 지배계층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46]
프랑스 헌병대의 기원으로
프랑스 왕이 지휘하던 중기병대였다.
[47]
후사르라는 이름의 병종은 근세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나, 그 원조는 헝가리 후사르이다.
[48]
1402년 벌어진
앙카라 전투에서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 참전한 세르비아 기사단은 두꺼운 갑옷을 입고 다녀 적수인 티무르 제국 군대가 쏘아대는 화살을 막아내며 전장을 해집고 다녔고, 그들의 용맹함을 본 티무르조차 사자처럼 용감하다고 칭찬했다. 오히려 다른 오스만 제국 군대의 부대들이 도망치거나 항복하는 와중에서도 이 세르비아 기사단은 최후까지 주군인 바예지드를 지키며 용감하게 싸웠다. 다만 세르비아 기사단의 대부분은
독일인
용병 출신들이었다.
[49]
신속한 기동전으로
서라벌 기습을 성공하고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대패시켰다.
[50]
이 양반도 1차 대전때 러시아 제국군 제 10 기병사단 예하 제 10 노브고로드 드라군 연대 소속 기병으로 참전한 전적이 있었고,
볼셰비키 공산당 가입 후 아래 부됸늬와 스탈린처럼 적백내전때도 적군파 기병으로 참전했었다.
[51]
이쪽은 사실 1차대전 당시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더 유명하지만 원래는 황실 제1기병대의 육군 기병장교로 군생활을 시작했던 기병 출신 인물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기병이란 병과 자체가 쇠퇴하던 시대에 난지라 식료품만 나르는 신세로 전락했고 이에 병과전환을 신청, 항공장교로 전과했으며 이는 그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계기가 된다.
[52]
일본 기병의 아버지라 불리며 제병협동체계를 확립했다.
[53]
출신이 흉노의 영토와 가까운 병주 출신이라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기마술이 뛰어났다고 하며,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할 때도 자신을 기병대장으로 삼으면 된다고 꼬드겨 조조가 일순간 고민하게 했을 정도다. 참고로 조조 역시 기병으로 유명했는데 그런 조조를 고민시킬 정도면 기병대장으로서의 능력은 탁월했을 가능성이 높다.
[54]
이 양반의 어록 중에 "포병은 전장의 신이다." 라는 말 때문에 포병 출신이라고 오해받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적백내전 당시
볼고그라드 부근에서 기병대 정치위원, 즉 기병대 정치장교로 처음 참전했다. 이 때 지휘를 해보기도 했는데,
안톤 데니킨 휘하 부대의 단독 공격을 격퇴하는 등 2차대전때 실책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군사적 소질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55]
북관 대첩 당시 소수의 기병대로 기습전을 펼치며
가토 기요마사를 농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