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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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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ST )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연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
세기
19세기 20세기 21세기 22세기 23세기
밀레니엄
제2천년기 제3천년기 제4천년기
세계 각 지역의 표기
서기 2004년
단기 4337년
불기 2548년
황기 2664년
간지 계미년 ~ 갑신
대한민국 86년
주체 93년
대만 민국 93년
일본 헤이세이 16년
이슬람력 1424년 ~ 1425년
히브리력 5764년 ~ 5765년
페르시아력 1382년 ~ 1383년
에티오피아력 1996년 ~ 1997년
인류세력 12004년
로마 숫자 MMIV

1. 개요2. 설명3. 기후
3.1. 2004년 폭설
4. 주요 화제
4.1.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4.2.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4.3. 고속철도 시대의 개막4.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4.5. 김선일 피살 사건4.6.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논란4.7. 한류(韓流) 열풍의 원년4.8. 스포츠계와 e스포츠계
5. 사건
5.1. 실제
5.1.1. 1월5.1.2. 2월5.1.3. 3월5.1.4. 4월5.1.5. 5월5.1.6. 6월5.1.7. 7월5.1.8. 8월5.1.9. 9월5.1.10. 10월5.1.11. 11월5.1.12. 12월
5.2. 가상
6. 탄생
6.1. 실존인물
6.1.1. 걸그룹 비주얼 : 04라인
6.2. 실존동물6.3. 가상인물
7. 사망
7.1. 실존인물7.2. 실존동물7.3. 가상인물
8. 데뷔
8.1. 가수8.2. 배우8.3. 스포츠8.4. 아나운서8.5. 만화인8.6. 예능인
9. 은퇴/해체
9.1. 스포츠9.2. 정치계9.3. 성우계
10. 히트작
10.1. 영화10.2. 드라마/시트콤10.3. 가요10.4. 개그 코너10.5. 애니메이션10.6. 게임
11. 유행어12. 최초
12.1. 방송 프로그램 및 코너
12.1.1. 지상파 TV12.1.2. 케이블 TV12.1.3. 라디오
12.2. 인터넷 웹사이트
13. 최종
13.1. 방송 프로그램 및 코너
13.1.1. 지상파 TV13.1.2. 케이블 TV13.1.3. 라디오
13.2. 인터넷 웹사이트
14. 출시 상품
14.1. 자동차14.2. 휴대폰14.3. 식음료
15. 단종 상품
15.1. 자동차15.2. 휴대폰15.3. 식음료
16. 관련 문헌17. 달력
17.1. 공휴일/연휴

1. 개요

2004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자 21세기의 첫 번째 윤년이다.[1] 또, 21세기 제3천년기의 네 번째 해이며, 2000년대의 다섯 번째 해이기도 하다. ( KBS, MBC, SBS, YTN)

2004년은 60갑자로 나타낼 경우 갑신년(甲申年)에 속하며, 간지로 구분할 경우 푸른 원숭이의 해이다. #[2]

2. 설명

송년기획 KBS 영상실록 2004
2004년 서울(영상)
2004년 서울(사진)
2004년 부산(사진)
2004년 통일호(사진)

2004년은 2000년대 21세기에 접어든 이후 유난히 괴롭고 힘든 한 해였다.[3] 이 해 시작부터 당시 일본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기습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로 인해 한국 네티즌과 일본 네티즌 사이에 사이버 갑신왜란까지 벌어지면서 국내에서는 반일 정서가 더욱 심화되었다. 이어서 민경찬 게이트[4] 김영삼 前 대통령이 연루된 안풍사건이 곧바로 터지면서 나라가 조용할 틈이 없었다. 이후에는 안상영 부산시장,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김인곤 전 국회의원, 박태영 전남지사, 이준원 파주시장 등 고위인사들의 잇따른 자살로 정치판이 시끄러웠다.[5]

3월에는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어 대통령이 직무 정지 상태가 된 바 있었다. 때문에 고건 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이루어졌으며,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탄핵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게다가 이 해 3월에는 한반도에 엄청난 폭설이 내려 전국에 대설주의보가 발효되었으며, 이 폭설로 인해 수 많은 농가와 도시민들이 큰 피해를 당한 바 있다.

4월에는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 발효로 사회에 큰 파장이 일었다. 한편, 한칠레 FTA 타결로 묻히긴 했지만, WTO 국가별 중요 농산물 개방 협상 또한 이 해 4월에 있었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는 WTO와의 협상에서 쌀 시장 개방을 10년 연기해 다가오는 2014년에 재합의하기로 결론지었다. 이로 인해 농업계에서는 한칠레 FTA와 WTO 쌀 시장 개방 등 농업정책에 대해 항의시위가 유난히 많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6월에는 쓰레기 만두 파동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만두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은 매출이 크게 감소하는 피해를 보았다. 게다가 만두 파동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 온 뒤, '쓰레기 만두'를 제조했다고 알려진 만두 공장 사장은 죄책감을 이기다 못해 끝내 한강에 몸을 던져 세상을 등졌다. 그러나 사건이 알려진 지 나흘이 지나자 경찰청에서 이 사건을 엠바고 처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시민들이 분노를 감추지 못했으며, 사건 7년 후인 2011년에는 여러 언론사가 이 사건을 두고 오보를 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져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6]

또, 전 년도에 미국과의 전쟁으로 초토화된 이라크에서는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무장단체가[7] 미군 군납업체인 가나무역에서 통역원으로 지낸 김선일을 피살하여 고국으로 시신이 운구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 일각에서 6월 하순부터 7월 상순 사이에 반(反)아랍 및 이슬람 정서가 확산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 파병 정책에 대한 반대 시위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거세졌다.[8] 때문에 2002년에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문에 반미 시위에 참여한 O2(산소)학번과 이라크 전쟁을 규탄하기 위해 반미에 나선 O3(오존)학번 그리고 공포(04)학번은 이 사건으로 반미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다.

7월(하반기)에는 열린우리당이 제17대 국회 개원에 맞추어 국가보안법 개정/폐지, 사립학교 개혁, 언론개혁, 과거사 청산 등을 담은 '4대 개혁 입법'을 발의해 여-야 간에 파장이 일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독재시대의 유물인 국보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존해야 한다."고 국보법을 철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보수-진보 양측이 연말까지 치열하게 격돌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군인공제회에서 비리를 저지른 것과 관련해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사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무거워진 감이 있었다.[9]

10월에는 2003년부터 큰 논란거리가 된 수도이전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면서 수도권 충청권 지역간 갈등과 대립이 심했다. 서울/경기도 등은 수도이전 반대, 대전/충청권은 수도이전 찬성으로 갈라섰으며, 결국 이 문제는 헌법재판소로 넘어가게 되어서 수도이전은 위헌이라는 최종판결이 내려졌고 관습헌법이라는 용어가 이 때부터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충청권 지역은 당황해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지역 등 수도권은 크게 기뻐하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수도이전이 합헌으로 바뀌었고, 8년 후에는 행정중심복합단지인 세종특별자치시가 들어서게 되었다.

11월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대규모 부정행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는 총 300여 명 이상의 가담자가 연루되었고, 그 중에서는 학생[10], 학부모, 학원 교사 등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 수능 응시자들이 수능 감독 시스템의 허점을 노려 진행되었는데 당시 부정행위를 저지른 응시자들은 시험 도중 자신의 휴대폰을 통해 자신이 매수한 사람과 문자를 주고 받아 답안을 전송 받으며 시험지에 그대로 답을 마킹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2005년에 치뤄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는 수능 응시 전에 필적 확인란에 문구를 기입해야 하는 과정이 생겨났다.

12월에는 성탄절에 동남아 지역에서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가 덮쳐서 세계구급 재앙이 벌어졌다. 이 참사로 총 4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150만 명에 육박했다. 심지어 몇몇 고아들 중에서는 싼 값에 팔려 인신매매를 당하기도 하여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분노해 했으며, 한편으론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간접적으로 위로하기도 하였다. 당시 대지진 피해 국가들은 다른 국가 또는 국제 기구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워낙 연말인지라 구호 물품이 사고 지역에 빨리 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대지진으로 인해 2005년 새해는 전세계적으로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1월 1일을 맞이하였다.[11]

2004년, 한국 경제는 2002년부터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카드 대란이 이 해에도 지속되면서 시민들의 소비 심리가 크게 위축되어 국가 경제가 한 때 위태로웠던 적이 있었다.[12] 그 외에도 이 해 5월 10일에는 미국의 조기금리 인상과 중동 지역의 국제유가 급등, 중국의 긴축정책, 한국의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외국인들의 순매도 등 별의 별 악재가 겹쳐 블랙 먼데이로 한 주일을 시작했다. 한편 같은 날인 5월 10일, 정부가 종합토지세와 대중교통 비용을 인상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면서 서민들의 시름이 더해졌고, 동시에 서민들이 한탄하는 목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다음 날인 5월 11일에는 다행히 종합주가지수가 반등세를 보였지만 그마저도 약진이었으며, 원-달러 환율은 전 날보다 더 올라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후 2004년 8월 중순에 정부가 새로운 방향의 경제 정책과 카드 대란 피해자들을 빚으로부터 구제 할 방법을 발표하면서 급한 불은 꺼졌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호소했으며, 몇몇 시민들은 새로운 경제 정책에도 불만을 표출했다.

위에서 언급된 경제적 어려움 탓인지 이 해에는 잘 알려진 살인사건이 유난히 많았다. 2003년 9월부터 이 해 7월까지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마사지사 여성 등 총 20명을 살해한 유영철, 이 해 1월부터 2006년 4월까지 서울 서남부 지역과 경기 지역에서 총 14명을 살해하고 19명에게 중상을 입힌 정남규, 이 해 8월에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에서 자신의 애인과 경찰관 2명을 흉기로 살해한 이학만, 이 해 9월에 대구광역시 중구에서 불특정 다수를 노린 독극물 요구르트 사건[13], 이 해 12월에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서 남성 2명이 모 전당포의 주인을 범행 대상으로 삼아 무자비하게 칼로 찌른 뒤 돈을 챙기고 달아난 2인조 연쇄살인 사건 등이 발생했다.[14] 이외에도 살인사건은 아니지만 2003년 1월부터 경상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강도 짓을 벌여오던 이미혜를 경찰이 특수강도 혐의로 공개수배 하였으나 수배 전단지에 올라온 피의자 이미혜의 뛰어난 미모에 얼짱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강도얼짱 사건이 있었다.[15][16][17]

일본에서는 이 해에 인구 수가 최정점에 도달했다.[18] 한편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독도 관련 망언 등이 큰 논란으로 불거져 한일관계가 2001년 이후 다시 경색된 바 있다. 그러나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덕분에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감정은 과거에 비해 다소 긍정적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사세보 소학교 동급생 살인사건 Bakky 사건 등의 엽기적인 사건들이 일본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해 일본 사회를 경악케 한 바 있다. 일본의 서브컬쳐 분야에서는 토에이 애니메이션 꼬마마법사 레미 시리즈의 후계작으로 프리큐어 시리즈를 이 해 2월에 선보여 국내에서는 또 다른 장수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다.

미국에서는 연중에 이라크전 명분 논란과 아부 그라이브 포로 학대사건 등에 대한 논란이 연쇄적으로 벌어지자 부시 대통령은 여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아 위기를 겪었다. 이 때문에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의 존 케리 후보가 '경제 회복'을 외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부시를 이길 것처럼 보였으나, 테러 위협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길 바랐던 국민들은 부시를 더 크게 밀어주며 부시 대통령은 아슬아슬하게 연임에 성공했다.

국내에서는 문화적으로 디시인사이드에서 싱하형의 등장과 스타크래프트 갤러리의 부흥, 딴지일보 독자투고 게시판 출신 찌질이들의 암약으로 인해 기존 아햏햏로 대표되던 사이트의 분위기에 꽤나 큰 변화를 겪은 해였다. 게다가 투표 마케팅의 레전설급으로 회자되는 파맛 첵스 사건 또한 이 해에 벌어졌다. 또, 김대중 정부 초기(1998년)부터 이 해까지 7년 동안 한국 정부가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순차적으로 시행해 1950~90년대와는 달리 일본의 대중문화가 우리나라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2004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당동벌이(黨同伐異)'였으며,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2004년 올해의 한자는 '災(재앙 재)'였다. UN은 2004년을 '노예제 반대투쟁 및 폐지의 해'와 '세계 쌀의 해'로 지정했고, 서울신문은 대한매일신보 창간을 기준으로 '창간 100년'을, 기상청은 1904년 측후소 설치를 기준으로 '근대기상 100년'을 각각 맞이했다.

3. 기후

대체로 포근한 해여서 연평균기온 상위 6위이다. 다만 초이상 고온 현상도 딱히 일어나지 않았다.[19] 그러나 일별로 따지면 기온이 최고기온 극값을 기록하거나 반대로 한파와 폭설이 오는 날도 있었다. 먼저, 월별로 보면 1~ 4월에는 대체로 온화했지만 가끔씩 한파, 폭설, 꽃샘추위가 왔다. 대표적으로 3월 4일부터 3월 7일까지는 한시적으로 봄답지 않게 전국에 100년 만의 강력한 폭설이 내리기도 했다. 5월에는 기온은 평범했으나 비 오는 날이 대체적으로 많았고, 6월에는 평년보다 기온이 다소 높았다. 7~ 8월에는 2015년처럼 짧지만 강력한 폭염이 며칠 있었으며, 특히 이 중 7월 23일과 8월 10일에는 단 하루 동안 모든 지역이 37도를 넘기기도 했다. 9~ 10월은 평년보다 조금 높았을 뿐 별 이상 없이 지나갔지만 11~ 12월에 기온이 꺾이지 않고 계속 가을 날씨를 유지하여 초이상 고온 현상이 나타났다. 때문에 이 해 11월은 기상 관측 사상 최초로 서울 최저 기온이 영하인 날이 없었으며, 12월에는 눈이 쌓이지도 않았음은 물론이고 기온도 15~16도까지 올라갔다. 결국 기상학적 겨울은 12월 하순이나 되어서야 시작되었다.[20]

이 해에 발생한 자연재해로는 대표적으로 8월 18일에 북상한 태풍 메기가 있다. 당초 태풍 메기는 중소형 크기에 속도도 크게 빠르지 않은 수준이었지만 우리나라 쪽으로 북상하면서 갑자기 크기를 키우고 바람의 속도가 빨라졌다.[21] 이렇게 태풍 메기는 우리나라 쪽으로 북상한 뒤 남부 지방 등을 강타해서 엄청난 피해를 안겼는데 이 때 전남 지역은 농작물 흉작까지 겹치면서 농산물의 가격이 크게 뛰어올랐다.

서울과 전국의 월별 평균기온은 다음과 같다. (단위는 °C)
[22]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서울월평균기온 -1.6 2.3 6.3 13.1 17.6 23.2 24.8 26.1 21.7 15.2 9.1 1.9 13.3
평년대비편차 0.9 2.6 1.1 1.0 0.2 1.3 -0.1 0.7 0.9 0.8 2.2 1.7
전국월평균기온 -1.2 2.7 6.2 12.7 17.2 21.6 25 24.8 20.6 14 8.7 2.8 12.9
1973년 이후 순위 9 7 10 11 16 4 18 11 8 10 4 4
연 최저기온 연 최고기온 연교차
-16.7 °C ( 0122) 36.2 °C ( 0810)[23] 52.9 °C

3.1. 2004년 폭설

MBC의 유튜브 채널 14F가 다룬 2004년 폭설 영상
2004년 3월 5일, 근 100년 만에 기록적인 폭설이 중부지방을 강타했다. 때문에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교통시설은 명절을 방불케하는 몸살을 앓았으며 그마저도 사정이 나았던 곳 또한 거북이 걸음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심한 교통 체증이 벌어졌다. 먼저, 도로의 경우 폭설로 인해 낮부터 충청지방 10군데 나들목의 고속도로 차량 진입이 통제되면서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목천 청원/상행선 죽암 남이 그리고 중부고속도로 하행선 오창 남이/상행선 남이 서청주 구간은 아예 차가 움직이지도 못해 차를 버리고 고속도로를 빠져 나오거나 차에서 하룻 밤을 묵는 사람이 많았다. 또, 이러한 대폭설로 도로가 끊기면서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임시 휴교령이 내려져 많은 학생/학부모들이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하늘길과 바닷길 또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늘길의 경우 제주국제공항, 김포국제공항과 같은 거점공항은 3월 5일 오전부터 이틀 동안 비행기가 운행하지 않는 결항 사태가 빚어졌으며, 청주 여수, 원주 등 지방 공항 또한 주변에 강풍이 불거나 짙은 구름이 끼면서 모두 20편 가량의 항공편이 결항되었다. 게다가 동북아시아의 허브 공항이자 우리나라 최대 공항인 인천국제공항 또한 개항 3년 만에 처음으로 모든 항공편이 지연되거나 결항되었다.[24] 바닷길의 경우 전라남도 목포에서 근처 섬들로 가려는 여객선 운항이 전면 중단돼 대부분의 섬지역은 통행이 끊긴 고립상태에 빠졌었다.

100년 만에 왔다는 이 기록적인 폭설은 대전광역시 경상북도 지역에 50cm 정도가 쏟아졌으며, 충청북도 지역에서도 35cm 이상이 쏟아졌다. 그나마 상황이 나았던 강원도 지역도 20cm는 기록하여 1904년 기상관측 이래 3월 하루 적설량으로는 최대치를 기록한 셈이다. 하필 이러한 대폭설은 농경지가 많은 지방에 많이 내려 농가의 피해가 상당했다.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되는 오이와 상추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서 시들해졌으며, 그마저도 창고에 보관 중이었던 무와 배추도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피해 규모가 상당했다. 이와 더불어 고속도로까지 차단된 터라 농산물 수급불안은 더욱 심화되었다.
파일:2004년 3월 폭설 관련 뉴스.png 파일:2004년 3월 폭설 뉴스.png
한편 2004년 폭설과 관련해 정부의 부실한 대응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먼저, 폭설이 내리면 건설교통부 또는 도로교통공단[25]이 즉시 고속도로의 진입을 차단하는 것이 옳은 방안이지만 끝내 진입로를 차단하지 않고 오히려 고속도로에 들여보내는 바람에 교통정체를 더욱 심화시켰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통행료까지 꼬박꼬박 받았다는 점에서 비판이 쇄도했다.[26] 두 번째는 기상청이 이러한 대형 폭설을 왜 예측하지 못했냐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정부의 부실한 대응이 아쉬웠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특별재해지역 선포를 두고 당국이 늦장 대처를 했다는 것이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허성관 행정자치부 장관에게 폭설로 인한 피해상황을 보고받고 피해 최소화와 복구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폭설 5일 후인 3월 10일, 고속도로에 있던 모든 눈을 치우고, 방치된 차량들을 모두 견인하면서 마비되었던 도시기능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또, 이틀 후( 3월 12일)에는 행정자치부가 폭설 피해 상황을 발표했는데,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 해 3월에 발생한 폭설로 인한 전체 피해액은 6,734억 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게다가 전국에서 주택 94동과 학교시설 79동, 축사 8,990동, 비닐하우스 2,221㏊가 붕괴해 전체 피해액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리고 이 해로부터 10년 후인 2014년에는 또 다시 동해안 폭설 사태가 발생해 일부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는 일이 벌어졌다.

4. 주요 화제

4.1.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

2004년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
파일:MBC news 20040106.png 파일:MBC news 200401062.png
한화그룹 압수수색 검찰의 출국금지 명령
파일:SBS news 20040107.png 파일:SBS news 2004-01-07 2.png
금호그룹 압수수색 자금 수수 국회의원 4명 구속
파일:MBC news Daewoo 2004.png 파일:MBC news Sun and moon 2004.png
대우건설 압수수색 썬앤문 그룹 압수수색
파일:MBC newsdesk 국회의원 구속 2004.png 파일:MBC newsdesk 한나라당 불법자금 관련 뉴스.png
자금 수수 국회의원 8명 구속 한나라당 불법 자금 전달 사건
파일:KBS news SK그룹 손길승 회장 관련 2004.png 파일:MBC newsdesk 삼성 자금 지원 관련 2004.png
SK그룹 손길승 회장 소환 삼성그룹 압수수색
파일:SBS news 검찰의 대기업 총수 줄소환 관련.png 파일:KBS news 롯데그룹 관련 2004.png
검찰의 대기업 총수 줄소환 롯데그룹 압수수색
2004년은 지난 2002년에 시행된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발생한 불법 대선자금 지원 사건에 대해 검찰이 대대적인 수사를 펼친 해였다. 때문에 검찰은 불법 대선자금을 수사하기 위해 김진홍 특검을 출범시켜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불법 대선자금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한 인물들을 포괄적으로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후 김진홍 특검이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새천년민주당 소속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소속 이회창 후보에게 불법 자금을 지원한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 수 많은 기업인과 정치인 그리고 시민단체로부터 뒷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으로 큰 골칫거리로 작용했다.

4.2.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3월 12일 SBS 뉴스특보 5월 14일 MBC 뉴스데스크
제가 유감스러운 것은, 한 번도 한나라당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탄핵 얘기가 나온 게 언제인지 아십니까? 작년( 2003년) 3월 10일, 취임 14일 후입니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언론에 보도된 탄핵 관련 발언만 한나라당 민주당 합쳐서 무려 114건입니다.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의 100분 토론 발언
사람은 아이를 낳을 때 진통을 겪더군요. 또 곤충은 허물을 벗을 때 엄청난 고통을 겪습니다. 사회는 개혁이 될 때 변화가 생길 때 진통을 겪습니다. 저는 이번 탄핵을 그 진통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저 괴롭기만 하고 그저 소모적이기만한 진통은 아닐 것이다, 반드시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위한 진통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대로템[27]을 방문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
여러분,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설마 그러랴 했습니다마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습니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개별적인 판단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193명의 찬성으로, 비리로 점철된 16대 국회는 이제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킨 것입니다. 탄핵 가결, 그 최대 피해자는 물론 우리 국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엄기영 앵커의 MBC 뉴스데스크 오프닝
노무현 대통령 직무정지 기간 / 고건 총리 권한대행 체제 기간
2004년 03월 12일 17시 15분 ~ 2004년 05월 14일 10시 28분
2004년은 대한민국에서 정치적인 격랑이 그 어느 때보다 심했던 해였다. 결국 정부와 여당 그리고 야당 간 의견차가 갈수록 깊어져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먼저, 야당(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게 된 배경을 파악하려면 탄핵안 가결 전인 2003년 9월과 2004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03년 9월, 2000년 1월 창당 이후 쭉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이 당 내 노선갈등으로 계파 간 싸움이 잦아지면서 분당 위기를 겪었다. 결국, 우려한 대로 새천년민주당은 친노계(탈당파)와 동교동계(온건파)로 나뉘어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 세력인 친노계는 신규 정당인 열린우리당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지 세력인 동교동계는 기존 정당인 새천년민주당에 계속 남아있었다.[28] 그 결과 분당 과정을 겪은 새천년민주당은 풍비박산 난 당의 모습에 노무현 대통령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행보를 보였으며, 제17대 총선 직전에는 새천년민주당의 당원 중 한 명이 " 당원들이 열심히 고생해서 대통령 자리에 앉혀놨더니 당을 버리고 떠났다"는 듯한 뉘앙스로 노무현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이는 새천년민주당이 노 대통령의 탄핵을 실행키로 결정한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이다.

2004년 2월, 이번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큰 논란이 되었다. 첫 번째는 2월 18일에 치뤄진 합동 기자회견에서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나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라는 발언을 해서 개헌저지선 논란을 일으켰으며 #, 두 번째는 2월 24일에 치뤄진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라는 발언을 해서 열린우리당 공개 지지 발언 논란을 일으켰다. #

이에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는 벼르고 벼르다 2월 25일[29],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그리고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함께 긴급 회동을 가졌고, 그 결과 '대통령 탄핵'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그러다 3월 2일 3월 3일에 여택수 청와대 행정관과 안희정 전 노무현 후보 캠프 정무팀장이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치뤄진 2002년 롯데그룹으로부터 각각 5억원 정도의 정치 자금을 받은 사실이 차례대로 언론에서 보도되었고, 야당은 대통령을 탄핵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30]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3월 9일, 야당은 대통령 측근 비리 / 도덕적인 정당성의 상실 / 국정파탄과 무능이란 세 가지 사유로 대통령 탄핵안을 국회에서 발의했으며, 이는 56년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운명의 날을 하루 앞둔 3월 11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로 기자들을 초청해 특별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여기서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자금과 측근 비리에 대해서는 거듭 사과했으나, 탄핵을 모면하기 위해 야당에게 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31] 또, 노무현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대통령의 친형인 노건평에게 돈을 주고 연임을 청탁한 것으로 알려진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였고, 남상국 사장은 그 기자회견을 보고 끝내 한강에 투신하였다. #[32] 이에 여당과 야당은 서로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의 투신 원인을 놓고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을 자아냈다.

같은 날(3월 11일), 국회에서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국회의사당을 사수한다며 의원 일부가 본회의장에서 잠을 청하거나 보초를 서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탄핵을 저지하기 위해 준비하였다. 이에 맞서 야당은 박관용 당시 국회의장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국회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등 대여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아오면서 여야 의원들간의 난투극이 벌어지고 국회가 소란에 빠진 가운데 박관용 국회의장은 야당의 호위를 받으며, 본회의장에 입장하였다. 이후 박관용 국회의장은 의장석에 도달하자마자 질서유지권을 발동하였으며, 대통령 탄핵 소추안의 안건 소개나 찬반 토론도 생략한 채 곧바로 투표를 진행했다. 이 때 열린우리당은 대거 불참을 선언했지만 탄핵안 투표는 힘 있는 야당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마침내 가결 193표, 부결 2표라는 결과가 나오게 되면서 박관용 의장은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였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오후 5시 15분을 시작으로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어 고건 총리의 권한대행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은 전국의 모든 경찰에 비상 근무와 경계 강화를 지시했다. # 같은 시각, 노무현 대통령은 현대로템을 방문해 시설을 둘러보다가 자신의 탄핵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자리에서 헌법재판소는 법적으로 판단하니까 정치적으로 판단하는 것과는 결론이 다를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 영부인 권양숙 여사는 경남여성대표 오찬 간담회에 참석해 세련된 정치를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해 송구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 본 시민들은 '탄핵안 가결'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민들은 국회의 판단을 개탄스럽게 여기며 3월부터 5월까지 광화문광장 서울시청 앞 분수대[33]에서 대규모 촛불집회를 열었는데 이 때 탄핵 반대에 대한 시민들의 외침과 열기는 대단했다. 그 이유는 탄핵안 가결 당일( 3월 12일)부터 탄핵안 기각 결정이 내려질 때( 5월 15일)까지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첫 날에는 1만 2000여 명 이상이 모였으며 #, 촛불집회 사흘 째에도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와 평화적으로 탄핵 반대를 외쳤다. # 이후 촛불집회 여드레 만에 촛불집회 참가자가 사상 최대치(13만 명)를 기록하면서 한국 뿐 아니라 외신들도 놀라게 했다. 특히, 이 해에 열린 촛불집회는 진보-보수 지지자[34] 그리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들 평화롭고 질서 있게 집회에 임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의 시민의식이 또 한 차례 성장했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한다.

탄핵안 가결에 대한 전직 대통령들의 반응 또한 국론 분열의 현장이었던 여의도만큼 반응이 저마다 각각 달랐다. 먼저,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은 탄핵안 가결은 나라에 불행한 일이라며 빠른 정상화를 위해 국민 모두의 단결을 강조했으며, 김대중 제15대 대통령은 탄핵사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며 여야 정치인들은 책임감을 갖고 사태를 수습하라고 촉구했다. 반면, 김영삼 제14대 대통령은 앞서 말한 두 전직 대통령들과는 달리 이번 탄핵은 자신(김영삼)의 충고를 소홀히 여긴 노 대통령에게 엄연히 큰 책임이 있는 것이라며 그를 강하게 문책했다. 나머지 최규하 제10대 대통령과 전두환 제11·12대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 소식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세계 주요 국가의 수장들도 우리나라의 탄핵안 가결 소식을 두고 여러 반응을 보였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은 역동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며 하루 빨리 불안정한 국면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도 관저에서 한일관계의 영향과 다가올 6자회담에 악영향이 있을까 주시하고 있으며, 순조로운 국정 운영을 위해 노 대통령의 직무 복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장쩌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당 회의를 거친 뒤 한국의 내정에서 비롯된 만큼 한국의 정국이 하루 빨리 냉정을 되찾기를 바란다고 전했다.[35]

결국 2달이 지난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기나 긴 심판 끝에 노 대통령의 탄핵을 끝내 기각으로 결정 내리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했고,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 여권으로 돌아갔다. 이 때 열린우리당은 탄핵기각 결정이 사필귀정이라며 야당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했고, 한나라당은 헌재의 결정을 겸허히 수용한다며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나머지 세 정당(민주노동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한다며 이제부터는 상생의 정치를 펼쳐 보자는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12년 후인 2016년[36], 또 다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는 일이 벌어졌다. 놀라운 점은 2004년 대통령 탄핵 사태와 2016년 대통령 탄핵 사태를 비교했을 때 탄핵 추진을 주도하던 측과 반대하던 측의 위치가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뒤바뀌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변호하던 문재인 당시 피청구인 대리인단 간사, 정세균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은 각각 대통령과 총리에 취임한 반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던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김기춘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피의자 신분으로 대통령직이 파면되었고, 이내 구속되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주역들은 12년만에 역할이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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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고속철도 시대의 개막

파일:2004년 4월 1일 KTX 개통 포스터.png
3월 30일
MBC 뉴스데스크
고속철도 개통 포스터
2004년 4월 1일, KTX가 개통되면서 대한민국은 고속철도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이와 동시에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5번째로 고속철도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또, 당시 기준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빠른 고속철도에 이름을 올렸다.[37]

1992년 6월 30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경부 고속철도가 끝내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착수하였다. 고속철도 공사가 막 시작된 당시에는 1998년 말 또는 1999년 초에 완공해서 고속철도를 타고 새천년을 맞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열차 한 편성에 1천 명의 승객을 싣고 서울-대전 간을 38분 그리고 서울-부산 간은 1시간 40분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러나 큰 금액의 공사비 조달 방안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고 소음과 진동 등 공해처리 문제, 그리고 서울 역사와 대전 역사의 위치 선정에 따른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시민 단체와의 갈등 등 갖가지 문제가 발생해 사실상 1994년까지는 고속철도 공사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38]

그러다 1995년 3월부터 경부고속철도를 지하화하는 방안이 적극적으로 논의되었고, 설계 변경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며 공사가 다시 재개되는 듯 했으나 건설교통부 내에서 일어난 의견 마찰로 재개는 얼마 가지 못해 고속철도 개통이 2년 늦어져 2000년 또는 2001년으로 완공 시기가 미루어졌다. 드디어 1996년 12월, 건설교통부가 고속철도 차량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는데, 그것이 현재 KTX에 쓰이고 있는 프랑스의 TGV 차량이다.[39] 그러나 1998년에 갑작스러운 IMF 외환위기 여파로 1차 고속철도 개통 시기를 2004년으로 늦추고, 2차 개통은 2006년에 하기로 결정했다.[40] 이후 1999년에는 한국의 고속철도 이름을 KTX로 결정하였다.

이 해 4월 1일, 위에서 서술된 것처럼 수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고속철도가 12년이라는 긴 시간과 13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 부은 끝에 마침내 개통되었다. 개통일 새벽 4시 반, 밤새 정비를 마친 첫 고속열차가 서울역에서 부산역으로 떠났는데, 그 날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첫 고속철을 타기 위해 일부러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선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이 때 놀라운 점은 이 해 4월 1일은 주말도 아니고, 목요일이었을 뿐더러 새벽 4시 반이면 굉장히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와야 할 시각이기에 시민들의 고속철도에 대한 기대감은 굉장히 높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KTX 개통 이틀 째를 맞는 4월 2일에는 고속철도 관련 사건사고가 연달아 발생했다. 먼저, 서울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고속철도에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던 40대 남성이 허술한 응급체계에 의해 주변 병원까지 옮겨지는 데 한참이나 걸려서 결국 숨지는가 하면 까치집이나 이물질 등으로 고속철이 멈춰서 운행에 차질을 빚었다. 심지어 몇몇 시민들은 KTX의 비용이 너무 비싸서 이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던가 또는 굳이 비행기가 있는데 뭣하러 고속철도를 이용하냐는 등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고속철도가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화되는 것에 가중 시킬 수 있다던가 또 환승할 수 있는 교통 수단이 잘 운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많아 전날보다 평가가 좋지 않았다.

한편 KTX가 개통되면서 기존에 운행된 열차들은 모두 큰 후폭풍을 맞았다. 먼저, 통일호의 경우 객차 내구연한이 도달하여 CDC형 동차를 제외한 객차형 통일호가 폐지되었고, 남은 CDC형 동차의 경우 통일호 이름을 버리고 통근열차라는 새 열차 체제로 개편되었다.[41] 무궁화호는 기존 통일호의 위치였던 완행열차의 자리로 내려앉았고 1975년부터 이 해 3월까지 특급열차로 불리며 군림하던 새마을호는 무궁화호 급으로 격하되어 기존의 위상을 거의 대부분 잃어버렸다. 당시 철도청은 KTX 개통 이후 새마을호를 무궁화호 급으로 격하시키는 과정에서 정차역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편수를 감편하는 등 전면적으로 새마을호의 위상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했었다. 또한 고급 서비스로 유명했던 새마을호의 서비스, 식당차의 퀄리티 역시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심지어 새마을호를 KTX 셔틀열차로 굴리기도 했다.

역사 역시 KTX 개통을 앞두고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중심 역이라 할 수 있는 서울역은 KTX 개통을 앞두고 1925년부터 2003년까지 78년을 사용했던 구 역사를 뒤로하고 2004년 1월에 문을 연 신 역사로 주 기능을 옮겼고, KTX 개통으로 호남선 출발역으로 선정된 용산역[42] 기존의 낡고 비좁은 역사를 철거하고 종합쇼핑센터가 입주한 대규모의 민자역사를 완공했다.

그러나 KTX가 개통된 원년답게 지금과는 여러모로 괴리가 느껴지는데, 대표적으로 KTX 객차 내부에 있는 모니터가 LCD가 아니라 CRT가 쓰였다는 점이다. KTX 객차 내부의 LCD 모니터는 2005년 1월에 대한민국 철도청 한국철도공사로 승격됨과 동시에 교체 작업에 착수했다. 또한 지하철 역사 내부의 플랩식 안내판이 주류를 차지하던 시기였다.[43] 이외에도 지하철 전면부의 롤지가[44] 쓰였으며, 철도청의 역삼각 로고가 담긴 역명판이 일부 역에서 쓰이던 마지막 시기였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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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KBS 정치합시다가 제작한 제17대 총선 보도물 모음집[46]
2004년 4월, 국내에서는 카드 대란 사태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한국 경제가 다시 어려워지면서 국민들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국민들 중 투표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4년 동안 국민을 대표할 국회의원을 뽑아야 했다.[47]

제17대 총선을 치루기 전 KBS 뉴스 보도국에서 집중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시민들의 의사 결정을 예측했다. 먼저, KBS가 서울 강북지역 20개 선거구를 조사한 결과 모두 열린우리당이 강세를 보였다. 이어서 서울 강남지역 21개 선거구를 조사한 결과 강북보다는 덜했지만 이 지역 또한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보다 조금 더 우세했다. 경기 남부지역 26개 선거구에서는 열린우리당이 크게 앞서는 상황이 나타났으며, 경기 북부지역 23개 선거구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초강세를 보였다. 인천지역 12개 선거구에서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혼전 양상을 보이며 치열한 격전지임을 드러냈다.[48]

다음은 대전, 충남지역 15개 선거구인데 이 중 열린우리당은 14곳에서 1위를 하여 강세를 유지했다. 충북, 강원지역 15개 선거구 중에서 열린우리당이 11곳에서 우세를 보여 탄핵 역풍을 실감케 했다. 진보 정당의 지지 기반이 탄탄한 광주, 전남지역 20개 선거구 중 경합 지역 3곳을 제외하고는 열린우리당이 크게 앞질렀다. 이외에도 전북, 제주지역 13개 선거구에서는 열린우리당이 모든 곳에서 1위를 차지하며 독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반면, 보수 정당의 탄탄한 결집력을 자랑하는 경남, 울산지역 23개 선거구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초접전 양상을 보였다. 또, 부산지역 18개 선거구에서는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을 앞서기도 하였다. 한편 대구지역 12개 선거구와 경북지역 15개 선거구에서는 접전 양상을 보였으나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보다 더 우세했다.[49]

이후 4월 15일에 치른 제17대 총선 투표 결과, 당시 열린우리당[50]에 많은 동정표가 쏟아지면서 과반 이상의 의석수를 확보하게 되어 16대 국회와는 달리 반전을 이루어냈다. 제 1야당인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에 패했으면서도 개헌저지선을 확보하게 되었다. 민주노동당도 약진을 이루어냈으며, 2000년 창당 이후 처음으로 제3당으로 원내진출이라는 대성과를 이루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발의를 주도한 새천년민주당은 추락했고, 그와 손 잡은 자유민주연합은 명맥만 유지했다.[51]

이 때 각 정당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먼저, 열린우리당은 개표 방송을 지켜보는 내내 기쁨을 감추지 못해 환호성과 박수가 끊이지 않는 등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 특히, 열린우리당 시점에서 바라본 제17대 총선은 대통령의 탄핵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판단하였기에 마지막까지 환호성과 박수가 끊이지 않을 만도 하다. 당시 노인비하 논란으로 선대위원장에서 사퇴하고 평당원 신분으로 선거운동을 지휘하던 정동영 의원은 열린우리당이 압승한다는 뉴스보도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그 장면이 항상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뉴스에서 자료화면으로 사용될 만큼 유명하다.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에 패했으면서도 예측의석 수를 넘겨 다행이라는 평이 많았으며, 동시에 개헌저지선을 확보해 1당 독재는 막았다는 의미있는 결과를 얻으면서 당 지도부 내에서도 나쁘지만은 않은 결과라고 판단하였다. # 때문에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영웅 취급을 받기도 했다.[52] 그 결과 당시 총선을 계기로 박근혜 대표의 영향력이 높아지면서 박근혜 대표를 중심으로 한 계파인 친박이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해 기존의 이회창/최병렬 계파를 따돌리고 한나라당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 박근혜 대표의 총선 승리와 활약이 훗날 그녀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가장 큰 정치적 성과가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여러 지역에서 선택을 받아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을 이기고 당당히 제3당 원내진출을 하게 되면서 열린우리당과 비슷하게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 또,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긴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는 제15대 대통령 선거와 제16대 총선 그리고 제16대 대통령 선거 패배 이후 처음으로 얻은 승리라고 말하며, 이에 감격해했다. 허나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는 ‘극좌’라는 정치 성향을 띄고 있었던지라 한나라당을 비하하는 듯한 인터뷰를 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새천년민주당은 개표 방송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의원들 외에는 모두 당 사무실을 빠져 나가면서 당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크나 큰 허탈감에 빠진 모습이 역력했다. # 왜냐하면 새천년민주당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지지율은 좀 떨어졌어도 이전에 여당이었던 적도 있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비교적 표심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어느정도 패할 것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 자유민주연합 또한 새천년민주당과 크게 다를 바 없이 허탈한 모습을 보였다. # 이유는 자유민주연합 소속 국회의원들은 물론이고, 삼김시대를 이끌었던 한 사람이자 10선에 도전하는 김종필 당시 자유민주연합 총재마저 낙선했기 때문이다.[53]

청와대는 개표방송 초반까지는 별다른 감정 없이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밝혔으나 개표 후반부에 들어서자 열린우리당의 제1당이 확실시되면서 안도하고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 또, 청와대는 제17대 총선을 기점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진정한 임기가 시작될 것이라면서 국정수행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다만, 설령 열린우리당이 승리했더라도 당시는 대통령 권한정지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은 고건 권한대행이 경제와 민생 등 국정 현안을 잘 챙기도록 적극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이후에는 말을 아꼈다.

여담으로 당시 진행된 제17대 총선은 사실상 마지막으로 진행된 대규모 낙선 운동 선거였던지라 선거 운동의 열기가 뜨거웠다. 특히 대규모 낙선 운동을 주도하기 위해 이 해 2월에 발족된 “2004 총선시민연대”는 선거 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2월~3월에 이미 낙천, 낙선 대상자를 발표하였다. 그들이 1차로 발표한 낙선 대상자는 총 66명이었으며, 이들 중 32명은 한나라당, 19명은 새천년민주당, 7명은 열린우리당, 3명은 자민련, 1명은 국민통합21, 또 다른 1명은 하나로국민연합 소속이었다. #

이후 제17대 총선 당선자들은 2004년 5월 30일부터 2008년 5월 29일까지 국회의원직을 수행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제17대 총선은 최초로 탄핵 시기에 진행되었으며, 제6공화국 내에서는 첫 여대야소를 이루게 된 선거인지라 현재까지도 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억되는 선거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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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김선일 피살 사건

파일:김선일 피살 KBS 뉴스.jpg
6월 23일 KBS 뉴스광장
2004년 6월 23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한국인 김선일이 이라크 무장세력에게 피살된 사건이 발생해서 한국을 비롯해 세계구급으로 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 준 일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김선일 피살 사건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과 함께 2004년의 톱뉴스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먼저, 김선일이 이라크에서 피랍된 사건을 설명하려면 김선일이 이라크에 입국한 2003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3년 당시 이라크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으로 인해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침공으로 이라크 대통령궁이 무너지고, 수도 바그다드까지 장악되었으며, 반란군과 무장세력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질서와 규율은 파괴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선일은 대학원 학비를 벌겠다며 살인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이라크에 입국했다. 그렇게 그는 전쟁의 아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라크에 입국한 후 만 11개월 동안 미군의 군납업체인 가나무역에서 통역원으로 근무했다. 또, 그와 동시에 이라크 입국의 또 다른 목적이었던 선교 활동까지 펼치게 된다.[54]

이라크에 입국한 지 11개월이 지난 2004년 5월 31일, 김선일은 바그다드의 한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중 이라크의 무장세력 가운데 하나인 알 자르카위에게 납치되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김선일의 피랍 소식을 전혀 모른 상태였다. 피랍된 지 3주가 지난 6월 21일, 김선일이 이라크 무장세력에게 피랍된 내용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알자지라 위성 방송을 통해 전해지면서 대한민국 외교부가 이를 확인하고, 국내 모든 방송사에서 일제히 그 소식을 뉴스 특보로 내보냈으며, 신문 기사 1면에 그 내용을 실었다. # 알자지라 위성 방송을 통해 알려진 그 테이프에는 초췌한 몰골로 무릎을 꿇은 채 흐느끼고 있는 김선일과 그의 뒷쪽에 서 있는 이라크 무장세력이 대한민국 정부에게 이라크 파병을 24시간 내에 철회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신속히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를 열고, 김선일 구출 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끝내 김선일의 구출 작전에 힘쓰겠다면서도 이라크 파병을 철회하지는 않을 것이라 시사하면서 무장세력의 요구를 끝내 듣지 않았다. 대신 어디까지나 이라크의 재건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알리기로 했으며, 이라크의 주변국과 모든 재외국민을 대상으로 대테러 예방 활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고 전했다. # 이러한 사실이 방송을 통해 시민들한테 전해지자 김선일의 피랍 사실이 알려진 6월 21일부터 6월 25일까지 나흘 동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휘하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이라크 파병을 끝내 추진하려는 노무현 대통령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 각 지역에서 벌어졌다. #

2004년 6월 23일,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 김선일은 이라크 팔루자 지역으로부터 8Km 떨어진 곳에서 몸에 폭탄이 둘러 쌓인 상태로 발견되었다. 사흘 후인 6월 26일, 김선일의 유해는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송환되었으며, 장례식을 치른 뒤 안장되었다. #

시민들은 김선일의 피살 소식을 전해 들은 뒤 큰 충격에 빠진 모습이 역력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피랍 후 인질을 석방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끝내 무참히 살해한 것에 대해 분노하고 분개해 했으며, 일부는 슬픔을 잠겨 통곡해 하거나 오열해 하기도 하였다. # 특히, 광화문 거리에서는 시민들이 총 3,000여 명이 모여 집회를 열었을 정도로 이라크 무장세력의 무모한 테러행위를 강경하게 규탄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김선일의 피살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온통 통곡에 휩싸였다. 지난 6월 22일까지만 해도 김선일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실낱 같은 희망에 뜬눈으로 밤을 지샜지만 뉴스 속보를 통해 아들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망연자실해 했다. 이후 김선일의 부모님은 오랫 동안 통곡을 하다가 끝내 실신해 주위를 안타깝게 하였다. #

정치권에서도 김선일 피살 소식에 여야할 것 없이 한 목소리를 냈다. 국회에서는 시급히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반인륜적 테러행위를 규탄한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특히,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테러를 수단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으며,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반인륜적인 행위는 정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만, 이라크 파병 찬반에 대해서는 이견이 어느 정도 존재했다. 열린우리당 의원 27명을 포함한 50명의 국회의원들이 파병 중단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당.정 간에 마찰이 생겼다. 정당별로 파악할 경우 대체적으로 한나라당 의원들은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는 분위기였으나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은 청와대의 정책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다른 국가의 수장들도 이 사건을 보고 김선일을 애도하고, 김선일을 살해한 무장단체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김선일을 무참히 살해한 것은 야만적인 범죄라며 맹비난했다. 또, 부시 대통령은 한국 정부가 지난 며칠간 테러에 대해 보여준 확고부동한 태도에 감명 받았다는 말을 전하며 이라크 파병을 계속 진행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김선일 피살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무고한 민간인을 희생시킨 이라크 무장단체의 비열한 행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도 김선일과 그의 가족에게 애도를 표하고, 이라크의 무자비한 살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한 어조로 입장을 발표하였다. 추가로 코피아난 UN 사무총장 또한 이례적으로 반응을 내놓았는데, 그는 UN 회원국이 단합하여 테러범에 대항해야 한다며 강력히 규탄했다.

이후 2007년, 김선일의 부모는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재판부에서는 김선일 피살 사건에 대해 국가가 배상을 질 만한 책임은 없다고 판결하였다. 우연히도 김선일의 부모가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한 2007년에는 김선일 피살 사건과 비슷한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이 발생해 또 다시 충격을 안겨주었다. 또, 이미 위에서도 언급하였 듯 김선일은 별 다른 목적이 아니라 선교를 하기 위해 이라크에 입국한 것이 이후에 밝혀졌기 때문에 김선일에 대해 옹호 여론보다는 비판 여론이 더 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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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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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매일신문 기사
수도이전을 확정하고 이전 절차를 정하는 법률은 ‘우리 수도가 서울’이라는 불문의 관습헌법 사항을 헌법개정 절차를 이행하지 않은 채 법률의 방식으로 변경한 것 (중략) 국민의 헌법개정 국민투표권을 침해했으므로 헌법에 위반된다.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의 결정문
2004년, 대한민국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 된 후에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발표가 큰 논란으로 번지며 여당(열린우리당)과 야당(한나라당, 민주노동당, 자유민주연합, 새천년민주당[55])이 또 한 차례 크게 대립한 적이 있다.

먼저, 신행정수도 이전 논란이 일어난 배경으로는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9월,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한계에 부딪힌 수도권 집중 억제와 낙후된 지역경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 청와대와 중앙부처부터 옮겨가겠다"라고 입장을 밝히면서 행정수도 이전을 공식적으로 자신의 대선 공약의 포함시킨 때부터였다. 이후 3개월이 지난 2002년 12월에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 당선자가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을 발의하였고, 취임 직후인 2003년 4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산하의 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획단을 발족시켰다.

해가 지나 2004년 1월에 드디어 노무현 정부가 본격적으로 행정수도 이전을 실행하기로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신행정수도 예정지의 땅투기를 막기 위해서 규제의 그물막을 이중으로 대폭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다 약 4개월이 흐른 5월 중순에 여러 언론사가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의 오송지구[56] 충청남도 공주시 장군면의 장기지구[57]가 신행정수도 후보지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흘러나오면서 여러 사람들이 주변의 땅을 매입하는 투기 열풍이 불었다. 그러자 정부는 늘어나는 투기 열풍의 심각성을 느끼고 유언비어로 퍼진 신행정수도 후보 지역에 투기한 사람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벌였다.

반면,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두고 심기가 불편했던 이명박 당시 서울특별시장은 정부의 수도 이전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반대운동에 돌입할 방침이라고 발표하면서 노무현 정부에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신행정수도 이전 정책을 굽히지 않는 태도로 받아들이자 서울특별시청 관계자와 교수 등 전문가 100여 명으로 구성된 수도이전 반대 국민포럼은 행정수도 이전의 근거법률인 신행정수도 건설특별법에 위헌소지가 있다며 헌법소원을 내기로 결정했다. #

이를 의식했는지 노무현 대통령은 행정수도 이전은 자신의 진퇴를 걸고 성사 시키겠다며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였다. 또, 정부는 같은 날 신행정수도로 선정한 4곳을 발표했는데 선정된 곳은 충청북도 음성· 진천과 충청남도 천안, 충청남도 연기·공주, 그리고 충청남도 공주· 논산 등이었다. 때문에 후보지로 선정된 지역의 주민들은 대체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하는 분위기도 보였다. # 이후 80명의 평가위원들이 일주일 동안 후보지 4곳에 대한 점수를 매긴 결과 그 동안 최종 입지로 유력시되어 온 충남의 연기·공주 지역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최종적으로 신행정수도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정부의 선정 지역 발표가 있은 후 얼마 가지 않아 투기꾼들이 입주권을 노리고 빈집까지 싹쓸이하는 사태가 벌어져 선정 지역 주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순탄하게 진행될 줄만 알았던 노무현 정부의 신행정수도 이전 계획에 반발한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하나였던 국민 투표로 신행정수도 이전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는 국민 투표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 이와 같은 총리의 태도에 서울시청과 한나라당은 총리 사퇴론을 거듭 주장하며, 행정수도 이전이 합헌인지 위헌인지 가리기 위해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 또, 한나라당은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정을 유도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들을 초빙해 자문을 구하는 등 지속적으로 신행정수도 이전 논란을 가라 앉힐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렇게 헌법 소원이 제기된 지 3개월 후인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최상철 외 221인(대리인: 이석연 등)이 청구한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 대해 위헌 판정을 내렸고, 주문 과정에서 서울은 관습헌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 수도라는 결정문을 낭독하면서 국민들의 시선을 잡아내었다. # 이 때 관습헌법이라는 생소한 단어는 정치권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으며, 한 동안 TV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관습헌법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판결문에 관습헌법이 나온 사례나 관습헌법의 뜻을 분석하기도 하였다.

이 재판에서 서울특별시는 승리자로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인정한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행정수도 이전을 지지했던 충청남도, 충청북도 그리고 대전광역시는 충격에 빠졌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인 것은 당연하다, 수도이전을 빌미로 국민들과 서울시민들을 당혹하게 만든 노무현 정권이야말로 진심으로 사죄해야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 때 손학규 당시 경기도지사도 이명박 서울시장의 입장을 거듭 지지하며 경기도도 행정수도 이전을 반대한다고 밝혔다.[58] 반면, 심대평 당시 충남도지사는 관습헌법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충남도민들의 염원이 한순간에 무산된 것 같아 도지사로서 도민들 앞에 사죄를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받아들이겠다면서도 행정수도 이전이 무산된 것은 아쉽다고 밝혔다.

시민들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대해 대체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MBC 한국갤럽리서치가 전국에 있는 성인 남녀 916명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했는데, 먼저,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은 잘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62.8%가 그렇다고 답했으며, 27.8% 정도만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또, ‘수도 이전을 위해서 헌법을 개정해야 할까’라는 질문에는 57.9%가 필요없다고 답했으며, 34.4%의 사람들만 개정해야 한다고 답하였다. ‘행정수도 이전을 국민투표로 결정해야 하나’라는 질문에는 63.9%의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답했으며, 33%는 굳이 필요하겠냐고 답하였다. 추가로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어떤가’라는 질문에는 잘못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59.3%로 압도적이었고, 잘하고 있다고 평가한 사람들은 31.9%에 불과했다. #

한편,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내려진 지 3주가 지난 11월 12일, 열린우리당의 이목희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헌재의 결정은 사법적 쿠데타”라며 헌법재판소를 맹비난해 논란을 일으켰다. # 또, 이목희 의원은 그 자리에서 7명의 헌법재판관들을 국민과 국회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한 법복 입은 정치인으로 규정해 이 또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에 한나라당은 헌정질서를 부인하는 발언이라며 격렬하게 반발했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자유민주연합 의원들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국회가 오랜 파행을 끝내고 다시 정상화가 된 만큼 이제는 그만 대립해야 한다고 의견을 같이했다.

이후 정부는 이 해 12월에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반영하고 국가균형발전을 이루는 등의 5대 원칙에 따라 행정수도 후속대안을 선정했다고 발표했으며, 2005년 6월에 또 다시 신행정수도와 관련해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제기했는데, 그 결과 합헌으로 결정되어 2005년 11월에 첫 삽을 파게 되었다. 그렇게 시행착오와 논란이 많았던 신행정수도는 8년 후 우리나라의 행정복합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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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한류(韓流) 열풍의 원년

파일:2004년 한류 열풍 관련 뉴스 모음.jpg
2004년, 한류 관련 뉴스
2004년, MBC의 허준, 대장금과 KBS의 겨울연가, 풀하우스 그리고 SBS의 불꽃, 천국의 계단 등을 비롯한 대한민국 문화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59] 다음 내용은 일본- 중국- 대만 순서대로 당시 한류 열풍을 분석한 것이다.
"' 겨울연가'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으신 분들은 본 작품에 나오는 인물배역을 맡은 배용준을 보고 '저런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녀석이 뭐가 좋다고' 라고 한 마디만 해보시라. 아마 부인께서는 화가 나서 며칠동안 귀하의 아침밥을 차려주지 않으실 것이다."
아사히 신문
일본에서는 2002년에 방영된 KBS 드라마 겨울연가가 2003~2004년 사이에 굉장한 히트를 쳤다. 2003년 4월, 일본의 한 케이블 방송에서 겨울연가를 방영했는데, 초기에는 시청률이 저조하다가 회를 거듭할수록 재미있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시청률이 폭증하게 된다. 이후 2003년 9월에 겨울연가가 케이블 방송에서 종영된 후 30~50대 여성들 사이에서 미칠 듯한 인기를 끌게 되었고, 거의 하나의 사회현상에 비견될 만한 거대한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고민 끝에 이 해 4월에 겨울연가를 재방영했다. 당시 겨울연가의 방영 시간은 매주 토요일 오후 11시 10분이었데도 불구하고 NHK의 간판 드라마인 대하드라마 신센구미!를 능가하는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한다.[60]

심지어 이 해 5월 22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북한 방문 일정 때문에 드라마 방영이 1주일 연기되자 "왜 겨울연가를 방영하지 않느냐"는 문의가 3,000건이나 들어왔으며, 2004 아테네 올림픽 기간에는 중계 방송 때문에 19회의 시간대를 늦춰서 방영하자 문의가 쇄도했다.[61] 또, 이 해 7월 23일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직후 바로 겨울연가에 출연했던 배우 최지우 내각총리대신 관저에 특별초청 했다.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최지우를 보자마자 "아, 후유노 소나타!"라고 외쳤으며, 배용준이 일본에서 '욘사마'로 불리우며 엄청난 인기를 얻는 것에 자극을 받았는지 한 모임에서 "앞으로 '준사마'로 불리도록 노력하겠다.'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

한편, 이 드라마로 인해 강원도 춘천시에 위치한 남이섬 경상남도 거제시에 위치한 거제도는 일본에서 성지순례를 온 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또한 탤런트 배용준과 최지우가 일본에 갔을 때 4,500여 명 정도의 인파가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에 몰렸으며, 이 중 대다수는 30대~ 60대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배용준과 최지우를 보러 온 사람이 대부분 중년 여성인 것도 모자라 몇몇은 눈물까지 흘리며 그들을 맞이한 것이었다. 추가로, 배용준 팬들은 배용준을 ‘ 욘사마’(용준 님), 최지우 팬들은 최지우를 ‘ 지우 히메’(지우 공주)로 부르며 팬덤을 다졌다.

이에 대해, 일본 미디어 전문가들은 유례없는 한국 드라마의 대성공을 분석했다. 그 결과, 가부장적 성격이 강한 일본 가정 내의 권위주의· 남존여비에 지친 주부들에게 드라마 가을 연가는 대리만족을 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대박을 칠 수 있었다는 분석이 강하다. 또, 당시 일본 드라마는 도시적인 분위기가 주류였던지라 중년 여성들이 볼 만한 컨텐츠는 거의 없었으며,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히트를 치기 전까지 일본의 주요 시청자는 대부분 젊은 세대와 남성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일본 방송사들은 중년 여성들의 관심을 끌어 올리기 위해 힘을 주어 편성하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일본에서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역으로는 인기가수 보아, 신화, 쥬얼리가 있으며, 탤런트 중에서는 이병헌, 장동건, 원빈이 있다. 특히, 가수 보아의 경우 이 해 연말에 발표한 메리크리가 일본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일본의 민영방송 후지 테레비가 서울 동대문을 실시간으로 연결해 보아의 가요 무대를 생중계할 정도였다.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중국에서는 2003~2004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대장금이 이 해에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이 해 10월, 중국의 한 케이블 방송을 통해 대장금이 중국 전역에 방영되었는데 시청률이 3.2%였다. 시청률만 보면 터무니 없는 수치인 것 같지만, 중국의 평균 시청률 수치를 따졌을 때 3.2%는 제법 잘 나온 시청률로, 공식 시청자수는 약 1억 6천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특히, 드라마 대장금은 중국에서 밤 10시에 방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도시 지역에서 시청 점유율 10%대를 기록했다.

이렇게 대장금이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굉장한 인기를 얻자, 대장금의 주제곡 또한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심지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한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대장금'을 매우 좋아하지만 공무로 바빠 전부 보지는 못했다"라고 할 정도로 드라마 대장금의 열렬한 팬임을 드러냈다. 말고도 이 해 5월에는 중국 선양시에 코리아타운이라는 곳이 새롭게 생기기도 하였다. # 또, 중국에서 유행한 한류의 특징이 있다면 일본과는 달리 젊은 세대에서 더 인기가 많았다는 점이다. 실제 당시 중국의 젊은 세대[62]에게는 중국 문화에 비해 한국 문화가 화려함과 동시에 너무 일탈적이지도 않은 적당한 성격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 중국 미디어 전문가들은 중국에서 한류가 유행하게 된 배경을 탐구했다. 당시 중국의 전문가들은 중국인들은 서구지향적 문화 소비 추세가 상승 중이었는데, 미국 문화로 대표되는 서구 문화는 미국과 대립 관계를 갖은 중국 입장에서는 거부감을 주었고, 일본과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같은 정치적인 갈등으로 반일 감정이 컸다. 또, 홍콩의 문화는 이미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다보니 한국 문화가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유행하게 되었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또, 미국이나 일본 문화에 비해 한국 문화는 소비 비용이 상당히 저렴한 것도 한몫했다.

이외에도 중국과 홍콩에서 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역으로는 인기가수 NRG, 베이비복스, 코요태가 있으며, 탤런트 중에서는 장나라, 이정현, 김희선이 있다. 이 중 걸그룹 베이비복스의 경우 이 해 11월, 중국에서 제1회 동맹 박람회 폐막식 공연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으며, 베이징올림픽체육관에서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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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스포츠계와 e스포츠계

국내 축구계에서는 2004년 아시안컵 8강이라는 좋지 않은 성적과 2006 독일월드컵 2차 지역예선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어떻게 해서든 최종예선에는 진출하였고, 연말에는 지금도 회자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조 본프레레 감독이 이끈 2군과 유망주로 라인업이 구성되었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최정예 1군 멤버들로 구성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평가전에서 3:1로 격파하는 이변을 보여준 사건이다. 특히 이 경기를 통해 독일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 팀에 패배한 기록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독일전 승리 기록을 달성하였다. 특히 이 경기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본인의 인생골이라 불리는 이동국의 터닝 발리슛을 통한 멋진 골장면과, 이운재 미하엘 발락의 페널티킥을 선방해내는 장면이다. A매치에서 독일을 제압한 한국 축구의 이 역사적인 순간은, 14년이 지난 후 2018년 월드컵에서도 재현되었다.[63] 한편 K리그에선 안양 LG 치타스 서울특별시 연고이전으로 인해 FC 서울로 팀명이 바뀌었고, 이 소식은 안양 시민들에게 피눈물만 안겨 안양 팀을 맞이하는 데 9년을 기다려야 했다.

해외 축구계에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이변들과 엄청난 기록들이 연속으로 있었던 해로 기억된다. 먼저 UEFA 챔피언스 리그/2003-04 시즌에서는 그 누구도 결승전에 진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언더독으로 평가받은 두 팀인 FC 포르투 AS 모나코가 서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알 마드리드와 같은 빅리그의 빅클럽들을 격파하고 결승전까지 진출해 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고, 결승전에서는 FC 포르투 AS 모나코를 상대로 3:0으로 승리하면서 포르투는 17년만에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얼마 뒤 개최된 유로 2004에서도 유럽의 약체 그리스 축구 국가대표팀이 개막전에서부터 개최국이자 포르투의 챔스 우승 주역들이 주전이었던 우승후보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에게서 승리를 차지하고 이후 조별리그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또 다른 우승후보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과 동유럽의 강호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제치고 8강 토너먼트에 진출하고, 이후 8강에서도 디펜딩 챔피언인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과 4강에서 파벨 네드베드를 위시한 황금세대들이 포진했던 동유럽의 강호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 그리고 결승전에서 다시 만난 개최국이자 개막전 상대였던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을 차례대로 승리하면서 전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리스는 사상 처음으로 메이저 국가대항전 트로피를 들어올린다.[64]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2003-04 시즌에는 앙리, 비에이라, 융베리 등을 위시한 아스날 FC EPL 개편 이후 첫 무패 우승을 달성했고, 스페인 라리가팀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한 리아소르의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이들보다는 덜 조명 받지만 분데스리가에서는 SV 베르더 브레멘이 리그와 포칼컵을 동시에 우승하는 더블을 달성하고, 라리가에서도 발렌시아 CF가 리그와 UEFA 컵을 동시에 우승하는 더블을 달성한다.[65] 세리에 A는 AC 밀란이 5시즌만에 스쿠데토를 따냈다.

리즈 유나이티드는 재정난으로 인한 전력 약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프리미어리그 19위로 강등되어 2020년까지 16년 동안 기나긴 하부리그 생활을 시작한 해이다.

국내 야구계에서는 이 해에 최악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소 평균관중을 기록했고 이 해에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이 터진다. 관중은 평균 4,383명이 왔고 총 2,331,978명이 입장했다. 이 해를 비롯한 2000년대 전반기는 야구의 인기가 매우 없던 시절이다. 스타리그로 대표되는 e스포츠가 매우 흥행한 것도 있고, 이 시기는 대만에게 올림픽 예선에서 지면서 못 나갈 정도로 국제대회 성적도 좋지 않았다. 인기팀으로 분류되는 삼성 라이온즈와 KIA 타이거즈는 평균 관중수가 2000명대였고, 한화 이글스는 비인기팀인 현대 유니콘스보다도 관중이 적었다. 한화가 평균 1,916명이고 현대는 1,955명이었다.

해외 야구계에서도 엄청난 화제거리가 있었다. 2004년 월드 시리즈는 보스턴 레드삭스가 86년의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우승했고[66] 2004년 한국시리즈는 무려 9차전까지 가는 우중 대혈투 끝에 현대 유니콘스가 삼성을 꺾고 마지막 왕조의 불씨를 살렸다. 2004년은 각 리그의 최종우승자 결정시리즈가 가장 화끈했던 해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 외 국내 야구계 동향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해 봉황대기부터 기존의 알루미늄 배트 대신 나무 배트를 도입한 점이다.

국내 농구계에선 연세대 선수 하승진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입단하여 NBA 무대를 밟았다.

해외 농구계에선 NBA 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가 14년만에 파이널에서 이겨 래리 오브라이언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두 번째로 e스포츠에서는 2001년, 2007년과 함께 가장 화제거리가 많았던 해로 평가받은 해이다. 먼저 박성준이 8월 초에 있었던 Gillette 스타리그 2004 결승전에서 박정석을 꺾고 저그의 첫 온게임넷 스타리그 양대리그 우승을 일구어낸다.[67][68] 그리고 이 전에 있었던 4강에서는 당시 수많은 저그들의 악몽과도 같았던 최연성을 상대로 그 유명한 5:0 관광을 선보이면서 3.3 혁명 이전까지 스타판 최고의 충격적인 이변을 안겨준다. 그는 이러한 여세를 몰아 7차 iTV 랭킹전 결승전에서도 다시 한 번 더 최연성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고, 연말에는 제2회 KT-KTF 프리미어 리그에서 KTF 리그 우승 및 통합 챔피언전 진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EVER 스타리그 2004에서는 그 유명한 삼연벙, 감동의 골마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11월에 있었던 삼연벙 3.3 혁명 이전까지 가장 충격적인 5전제로 꼽힐 정도였다.

최연성 역시 지난해 11월 TG삼보 MSL 우승에 이어 이 해에도 4월에는 하나포스 센게임 MSL과 8월에 Spris MSL을 차례대로 MSL을 3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최강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이후 11월 가을에 펼쳐진 EVER 스타리그 2004 결승전에서도 스승 임요환을 꺾으면서 2004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한편 7월에는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열린 SK텔레콤 T1 한빛 스타즈 이 두 팀이 펼친 SKY 프로리그 2004 1Round 결승전에서는 10만 관중이 왔다는 설이 퍼졌을 정도로 정말 많은 관중들이 운집하면서 이 때를 기점으로 광안리는 한동안 e스포츠의 성지로 떠오르게 된다.[69] 그리고 한빛 스타즈가 당시 스타군단이었던 SK텔레콤 T1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 끝에 4:3의 세트스코어로 우승을 차지하며 팀 사상 최초로 프로리그 및 팀단위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또한 강민도 3월에 NHN 한게임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03~04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프로토스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양대 리그 우승을 기록한다. 그외에도 그 유명한 이병민을 상대로 할루시네이션 리콜을 시전한 역대급 입스타를 시전한 것도 이 시절.[70] 그 외에 SK텔레콤 T1 팀리그 2연패를 기록하였고, 슈마 GO neowiz Pmang Cup 온게임넷 프로리그 우승과 Tucson MBC GAME 팀리그 준우승을 기록하고, 팬택앤큐리텔 큐리어스도 10월 말에 끝난 SKY 프로리그 2004 2Round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팀 최초이자 유일의 팀단위대회 우승 트로피를 획득하였다. 또한 KTF 매직엔스는 2월에 끝난 LG IBM MBC GAME 팀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구단 사상 최초로 팀리그 및 팀단위대회 결승진출과 준우승 기록을 남기고, SouL SKY 프로리그 2004 2Round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구단 사상 최초로 프로리그 결승 진출 및 준우승 기록을 남긴다.

대회 내적으로 보면 먼저 기존의 온게임넷 스타리그 Gillette 스타리그 2004부터 대회 명칭에서 온게임넷을 빼고 그냥 스타리그라는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MSL 하나포스 센게임 MSL을 통해 본격적으로 권위와 위상이 강화되면서 양대 리그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기 시작한다. 온게임넷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SKY 프로리그 2004 1Round부터 당시 11개팀 모두가 참가하면서 당대 최대 규모의 대회로 나아가기 시작하였고, MBC게임 팀리그도 하반기에 개최한 MBC 무비스 MBC GAME 팀리그에서는 기존의 7전 4선승제 팀배틀 더블 엘리미네이션 방식에서 좀 더 대중적인 5전 3선승제 팀배틀 풀리그 방식을 채택하였다. 지난해부터 치뤄진 당대 최대 규모의 이벤트 대회였던 KT-KTF 프리미어 리그도 다시 한 번 더 개최되면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반면에 iTV 랭킹전은 이 해 여름에 열린 7차 iTV 랭킹전을 마지막으로 iTV가 송출이 중단되어버리면서 자연스럽게 폐지가 되고 만다.

5. 사건

5.1. 실제

5.1.1. 1월

5.1.2. 2월

5.1.3. 3월

5.1.4. 4월

5.1.5. 5월

5.1.6. 6월

5.1.7. 7월

5.1.8. 8월

5.1.9. 9월

5.1.10. 10월

5.1.11. 11월

5.1.12. 12월

5.2. 가상

6. 탄생

6.1. 실존인물

6.1.1. 걸그룹 비주얼 : 04라인

2022년 가요계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조합으로, 2004년에 출생한 걸그룹 멤버들 중 유독 비주얼로 주목받는 인물들이 많아 팬들 사이에서는 이들을 04라인, 04즈(공포즈)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2010년대 후반 ~ 2020년대 초반에 데뷔한 4세대 걸그룹에 속해있으며, 2022년을 기준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04라인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IVE 레이, 장원영, 리즈 / NMIXX 설윤, 지니, 배이 / STAYC, 재이 / Weeekly 이재희, 지한 / Kep1er 히카루, 휴닝바히에, 서영은 / NewJeans 민지, 하니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데뷔 1~2년차의 신인이지만, 벌써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거나 후보에 올라갔고, K-POP의 인기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04라인의 조합은 2010년대 초반 당시 인기를 끌었던 94라인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크리스탈, 설리, 강지영, 수지, 권소현, 손나은, 수빈 등 1994년에 태어난 걸그룹 멤버들 역시 유독 비주얼로 주목받는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6.2. 실존동물

6.3. 가상인물

7. 사망

7.1. 실존인물

7.2. 실존동물

7.3. 가상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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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데뷔

8.1. 가수

8.2. 배우

8.3. 스포츠

8.4. 아나운서

8.5. 만화인

8.6. 예능인

9. 은퇴/해체

9.1. 스포츠

9.2. 정치계

9.3. 성우계

10. 히트작

10.1. 영화

10.2. 드라마/시트콤

10.3. 가요

10.4. 개그 코너

10.5. 애니메이션

10.6. 게임

11. 유행어

12. 최초

12.1. 방송 프로그램 및 코너

12.1.1. 지상파 TV

12.1.2. 케이블 TV

12.1.3. 라디오

12.2. 인터넷 웹사이트

13. 최종

13.1. 방송 프로그램 및 코너

13.1.1. 지상파 TV

13.1.2. 케이블 TV

13.1.3. 라디오

13.2. 인터넷 웹사이트

14. 출시 상품

14.1. 자동차

14.2. 휴대폰

14.3. 식음료

15. 단종 상품

15.1. 자동차

15.2. 휴대폰

15.3. 식음료

16. 관련 문헌

17. 달력

1월 2월 3월
1 2 3 1 2 3 4 5 6 7 1 2 3 4 5 6
4 5 6 7 8 9 10 8 9 10 11 12 13 14 7 8 9 10 11 12 13
11 12 13 14 15 16 17 15 16 17 18 19 20 21 14 15 16 17 18 19 20
18 19 20 21 22 23 24 22 23 24 25 26 27 28 21 22 23 24 25 26 27
25 26 27 28 29 30 31 29 28 29 30 31
4월 5월 6월
1 2 3 1 1 2 3 4 5
4 5 6 7 8 9 10 2 3 4 5 6 7 8 6 7 8 9 10 11 12
11 12 13 14 15 16 17 9 10 11 12 13 14 15 13 14 15 16 17 18 19
18 19 20 21 22 23 24 16 17 18 19 20 21 22 20 21 22 23 24 25 26
25 26 27 28 29 30 23 24 25 26 27 28 29 27 28 29 30
30 31
7월 8월 9월
1 2 3 1 2 3 4 5 6 7 1 2 3 4
4 5 6 7 8 9 10 8 9 10 11 12 13 14 5 6 7 8 9 10 11
11 12 13 14 15 16 17 15 16 17 18 19 20 21 12 13 14 15 16 17 18
18 19 20 21 22 23 24 22 23 24 25 26 27 28 19 20 21 22 23 24 25
25 26 27 28 29 30 31 29 30 31 26 27 28 29 30
10월 11월 12월
1 2 1 2 3 4 5 6 1 2 3 4
3 4 5 6 7 8 9 7 8 9 10 11 12 13 5 6 7 8 9 10 11
10 11 12 13 14 15 16 14 15 16 17 18 19 20 12 13 14 15 16 17 18
17 18 19 20 21 22 23 21 22 23 24 25 26 27 19 20 21 22 23 24 25
24 25 26 27 28 29 30 28 29 30 26 27 28 29 30 31
31

17.1. 공휴일/연휴

2003년에는 연휴가 많았는데 2004년은 반대로 공휴일 절벽이었다. 현충일, 광복절, 개천절이 일요일, 제헌절 크리스마스가 토요일이어서 16일 연휴 중 5일이 날아간 절벽의 해였다. 다행히 설 연휴와 추석 연휴가 주말과 겹치지 않아서 5일 연휴였고,[123][124] 부처님오신날이 5월 26일 수요일이어서, 음력 연휴는 모두 주말과 겹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해에 대체 휴일 제도가 시행되었더라도 대체공휴일이 적용되는 휴일은 없었을 것이다.[125]

여담으로 이 해의 달력 형태는 1990년대의 마지막 해인 1999년과 똑같으며, 2010년대의 첫 번째 해인 2010년의 달력과도 일부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126] 추가로 이 해와 동일한 형태의 달력을 보이는 해들 중 가장 최근에 지나간 해는 2021년이었으며, 이 해와 동일한 형태의 달력을 띄는 해 중 다가오는 가장 빠른 해는 2032년이다.


[1] 그레고리력에 따르면 한 해(평년 기준)는 365.25일로 표기된다고 하는데, 2001년의 0.25일+ 2002년의 0.25일+ 2003년의 0.25일+2004년의 0.25일이 합쳐져 2004년에 하루가 더 생기면서 366일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2001년~2004년에 남는 0.25일이 4개가 결합하여 이 해가 윤년인 것이다. 참고로 평년과 윤년의 차이점은 2월 29일의 존재 여부로 나뉜다. [2] 일제강점기에 출생한 마지막 세대인 1944년생은 이 해에 60세를 맞았으며, 1956년생과 1968년생의 경우 이 해까지 총 4~5번의 원숭이띠 해를 맞이하였다. 또, 제4공화국 시기에 출생한 마지막 세대인 1980년생과 노태우 정부 시기에 출생한 마지막 세대인 1992년생의 경우 2004년을 기준으로 각각 24세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속해 있었으며, 그들은 이 해까지 총 2~3번의 원숭이띠 해를 맞이하였다. # [3] 1997년, 2014년, 그리고 2016년과 더불어 최악의 사건사고가 많이 발생한 해로 기록된다. [4] 여기서 민경찬은 노무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의 처남이다. [5] 안상영 부산시장 자살 당시 뉴스, 남상국 대우사장 자살 당시 뉴스, 김인곤 전 국회의원 자살 당시 뉴스, 박태영 전남지사 자살 당시 뉴스, 이준원 파주시장 자살 당시 뉴스 [6] 여기서 오보를 냈다는 의미는 이 해에 큰 논란이 되었던 쓰레기 만두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만두 공장에서 촬영된 영상도 조작된 것이다. 이러한 허위 사실을 제일 먼저 보도한 기자는 2010년 아이티 지진 사건 보도 당시 논란거리를 만들었던 MBC의 유재광 기자이다.(...) [7] 그 무장괴한 조직은 10여년 후, 전 세계를 공적으로 삼은 악의 조직이 된다. [8]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거셌던 이유는 당시 한국 정부에게 이라크 파병을 제안한 측이 미국 정부였기 때문. [9] 더군다나 출국금지는 물론이고, 압수수색까지 실시하며, 검찰 수사가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KBS 뉴스 MBC 뉴스 [10] 선배/후배 포함 [11] KBS 뉴스 보도 MBC 뉴스 보도 [12] 카드 대란에 의한 소비 심리 위축은 LG카드가 해체되기 직전인 2006년 12월까지 이어진다. [13] 아직 범죄자가 검거되지 않은 미제 사건이다. [14] 경찰이 이들을 조사한 결과 이미 1995년에 전라북도 익산에서 시체를 유기하고, 1997년에 서울특별시 서초동에서 2명을 살해, 2001년에 또 다시 전라북도 익산에서 여성을 성폭행 후 살해했으며, 2004년 6월과 8월에는 주부 총 3명을 살해한 것이 밝혀졌다. 즉, 초범인 줄 알았던 이들은 2004년 12월 전당포 사건 이전부터 이미 지속적으로 살인 행각을 벌인 연쇄살인마였다. [15] 검거된 이미혜와 그녀의 남차친구의 모습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4022410032330003010-001.jpg
[16]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경찰이 이미혜를 공개수배 할 때 키 165cm 미인형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담으로 그녀가 경찰에 검거된 후 자신이 왜 얼짱이라고 불리우는지 이해 못한다고 얘기했으나 넷상에서는 계속 그녀를 옹호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어 사회적 파장이 일기도 했다. # [17]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해 일본 네티즌들은 한국의 이러한 모습을 조롱하는 듯한 반응들을 보였는데 이 해 6월에 일본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 사세보 소학교 동급생 살인사건 [18] 2005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19] 이 부분은 2019년과 비슷하다. [20] 한편 이 해 12월과 2020년 1월이 비슷했다. 달력의 형태가 같고 25일 토요일마저 둘 다 공휴일의 당일인 것이 함정 [21] 이런 경우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 빈도수가 극히 적어 이례적인 일에 속한다. [22] 대개 12~2월은 겨울, 3~5월은 봄, 6~8월은 여름, 9~11월은 가을로 분류함으로 겨울은 파란색, 봄은 하늘색, 여름은 빨간색, 가을은 주황색이 적용 [23] 2000년대 중에서 가장 더운 해였으며, 1995~ 2011년을 통틀어봐도 가장 더웠다. [24] 다만 인천국제공항은 영종도에 위치해 있어서 눈이 많이 오지는 않았지만 매우 심한 바람이 불어 비행기가 뜨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25] 당시 명칭은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 [26] 다행히 도로공사 측에서 뒤늦게 환불 조치를 하기는 했다(...). [27] 당시 명칭은 '로템'. [28] 정작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에도 사이가 좋았다. 다만, 2003년 연초에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오른팔인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을 불법 대북송금 사건으로 구속 시키면서 잠시 동안 사이가 약간 멀어지기는 했다. [29] 공교롭게도 이 날은 노무현 대통령 취임 1주년이기도 하다. [30] 여택수 관련 보도 안희정 관련 보도 [31] 이 때 야당은 특별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사과에 따라 탄핵을 철회할 가능성도 언급했으나 끝내 노 대통령의 강경한 입장에 탄핵안을 가결하는 쪽으로 입장을 굳혔다. 다만, 노 대통령 역시 야당이 탄핵을 철회할 경우 사과할 것이라고 발언하기는 했다(…). [32] 시신은 투신 11일 후인 3월 22일에 발견되었다. # [33] 물론 당시에는 서울광장 대신 분수대가 존재했다. [34] 다만, 극좌 세력과 극우 세력은 각각 국회의사당과 헌법재판소에서 한 때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35] 중국의 수장이 2명인 이유는 후진타오와 장쩌민 둘 다 비슷한 자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 이 두 사람이 비슷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전직 국가주석이었던 장쩌민이 퇴임 당시에 국가주석 직위는 내놓았지만 중공의 군대를 이끄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직은 유지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직 국가주석인 장쩌민은 현직 국가주석인 후진타오의 2인자인 셈이다. [36] 공교롭게도 2004년과 2016년은 모두 원숭이(잔나비)띠이기도 하다. [37] 첫 번째는 일본, 두 번째는 프랑스이다. [38] 물론 당시에도 예산안 조정과 시민 단체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 마련 그리고 고속철도 운행 노선 계획은 계속되었다. [39] 여담으로 이 때 우리나라가 프랑스의 고속철 차량을 구입하는 조건으로 병인양요 때 뺏어간 외규장각을 돌려주었다. [40] 1차 개통 예상 시기는 적중했으나 2차 개통은 조금 더 늦어져 2010년에야 이루어졌다. [41] 통근열차는 기존 통일호가 운영했던 구간에 투입되어 운영되다가 2021년 현재는 광주선( 광주송정 - 광주)에만 운영중이다. [42] 2003년까지만 해도 통일호나 일부 완행 무궁화호나 정차하던 간이역이었다. [43] KTX가 정차하는 역들 가운데 플랩식 안내판을 제거한 곳도 있지만, 일부는 유지하는 곳도 존재했다. 또, LCD 안내판의 경우 2008년 초부터 보급된 바 있다. # [44] 2005년까지 쓰인 후 2006년에 모두 LED로 변경되었다 [45] 모든 역의 역명판을 한번에 교체하는 것은 재정적으로 부담이 컸으므로 2005년 철도공사 출범에 맞춰 새로운 역명판으로 교체하는 곳이 적지 않았다. 동인천역, 의정부 북부역, 대성리역, 금정역 [46] 당시는 탄핵 정국이었기에 뉴스에서도 중립성에 만전을 기울였다. [47] 만 20세 이상에게 투표권이 있었으며, 당시 기준으로 1984년 4월 16일생까지. [48] 서울 강북지역/ 서울 강남지역/ 경기 남부지역/ 경기 북부지역/ 인천지역 [49] 대전, 충남지역/ 충북, 강원지역/ 광주, 전남지역/ 전북, 제주지역/ 경남, 울산지역/ 부산지역/ 대구지역/ 경북지역 [50] 선거 때는 열린우리당이 여당이 아니었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에 입당신청서를 제출한 2004년 5월 말부터 여당이 되었다. [51] 한나라당이 주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발의한 것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새천년민주당이다. [52] 당시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아 한나라당 내에서도 총선 참패를 예측했기 때문. [53] 이후 김종필 총재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54] 사건 초기에는 단순히 학비를 벌려고 이라크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후 선교 활동이 주 목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때문에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는 등의 반전된 태도를 보이며,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 [55] 새천년민주당의 경우 제17대 총선 이전까지는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 크게 반대한 것이 사실이나 총선에서 크게 패배한 후에는 부분적으로 찬성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56]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57]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58] 참고로 당시 손학규 의원은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59] 허준과 불꽃의 경우 각각 1999년 방영작, 2000년 방영작이지만 해외에서는 이 시기 또는 비슷한 시기(2003년, 2005년)에 히트한 케이스이다. [60] 참고로 신센구미!는 2000년대 일본 대하드라마 인기 투표에서 1,355표를 얻어서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61] 비슷한 사례로 한국에서도 2020 도쿄 올림픽 개회식 때문에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가 1주일 연기되자 문의가 빗발친 적이 있다. [62] 대개 에코붐 세대 또는 밀레니얼 세대이다. (1975년생~1994년생) [63] 우리나라가 유독 독일과는 접전의 승부를 펼쳤다. 1994년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전반에 3골 내주고 후반에 2골 넣어서 2-3으로 석패했다. 2002년은 발락의 골로 4강서 탈락했다. 그래도 2002년도의 석패는 2번의 연장전을 거치고 이틀 쉬고 경기를 했기 때문에 체력이 바닥이 난 상태에서 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4년 3-1 승리, 2018년 2-0 승리로 통산 2승 2패다. 참고로 2004년도의 독일 골키퍼는 올리버 칸이고, 2018년도는 마누엘 노이어다. 둘 다 세계적인 골키퍼라는 점에서 놀라운 결과다. [64] 아이러니한 건 포르투의 챔피언스 리그 언더독 우승의 주역들이었던 주전 멤버 다수가 포르투갈 대표팀에서도 대부분 주전을 차지해서 역으로 그리스의 유로 2004 언더독 우승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점이다. [65] 아스날과 베르더 브레멘, 발렌시아 CF 모두 2021년 기준으로 마지막 리그 우승으로 남아있다. [66] 특히 AL챔피언십 시리즈는 사상 최초로 패패패승승승승이라는 역스윕 승리를 이루어냈다. e스포츠쪽은 역스윕이 흔하게 일어나지만 프로스포츠에서는 매우 드물다. 한국프로야구에서는 2패하다가 3승은 간혹 나왔지만 3패 뒤 4승은 단 한 번도 없다. 일본프로야구에서는 1986년과 1989년도의 사례가 있다. [67] 사실 2002년 하반기에 강도경이 같은 팀 동료 박경락을 상대로 제2회 GhemTV 스타리그 우승을 일구어냈지만 이 대회가 비공식전으로 격하되면서 박성준이 저그 최초의 우승자로 기록되었다. [68] 이후 2005년 2월에는 박태민 이윤열 당신은 골프왕 MSL 결승전에서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MBC게임 스타리그 최초의 저그 우승자라는 기록을 가지게 된다. 동시에 박태민은 양대리그 최초로 결승전에서 테란을 상대로 우승을 차지한 저그라는 기록도 가지게 된다. [69] 참고로 이 해 프로야구는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였다. 이 해만 놓고 본다면 e스포츠가 프로야구보단 흥행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임요환 하나만으로도 그 당시 프로야구 선수들 인기를 다 제칠 정도니깐... 지금이야 비교가 되진 않지만. [70] 강민은 물론이고 스1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를 꼽자면 절대로 빠지지 않는 명경기이다. 곰TV MSL 시즌1 16강 이전까지의 모든 경기 중에서 100전의 명경기를 엄선한 MSL 100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 [71]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시 안풍 사건 논란으로 초청받지 못했다. [72] 결국 이틀 후 생포되었다. [73] 물론, 이는 나중에 허위사실로 밝혀졌다. [74] 수배 전단지에 오른 이미혜의 사진이 너무 이뻐서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몇몇 네티즌들은 그녀를 옹호하며 강도얼짱이라는 신조어까지 붙여주었다. [75] 한국,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북한 등이 참석하였다. [76] 그러나 특이하게도 사범대생 가산점제도의 폐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77] 최도술, 안희정, 여택수, 신동인 등 [78] 2003년 2월~2003년 9월은 새천년민주당, 2003년 9월~2004년 5월은 무소속, 2004년 5월~2007년 5월에는 열린우리당이 여당이 되었다. [79] 이는 문재인 정부 시기인 2019년 들어서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로 개설되었다. [80] 1989년~2004년=우리은행 명동점, 2004년~현재=네이쳐리퍼블릭 명동점 (물론 2004년 당시에는 네이쳐리퍼블릭은 입점하지 않았다.) [81] 정작 실행은 한참 후인 2013년에나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82] 이 때 계급장 뗴고 논쟁하자는 말을 해 논란이 일었다. [83] 이 때 중앙수사부가 지탄을 받는다면 내 목을 치겠다는 말을 해 역시 논란이 일었다. [84] 당시는 혼혈아에 대한 편견이 워낙 강했던지라 비판이 많았다. [85] 박물관에서는 공간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전시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86] 알다시피 1936년 당시에는 일제강점기 시기였던지라 손기정 선수는 일본인 자격으로 나간 것이다. [87] 이 종목에서 올림픽 체조 사상 최악의 오심사건이 터져 금메달이 유력했던 양태영이 동메달로 만족했고, 도마 연기에서 착지 도중 큰 실수를 했던 미국의 '폴 햄'이 김대은과 양태영을 2, 3위로 밀어내고 금메달을 가져갔다. [88] 보아, 비, 샤크라, 신화, 이정현, JTL, NRG 등이 참여하는 합동 콘서트였다. [89] 그래도 2020년 11월 19일 오전 폭우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90] 사건 자체는 1월 중순부터 11월 하순까지 이어졌다. [91] 같은 무리와는 당을 만들고 다른 자를 공격한다. 출전: 『후한서』 '당고열전' 서문 [92] 다만 라디오 방송은 약 두 달 후에 재개했다. [93] 1998년 8월 31일부터 2004년 12월 30일까지는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가 전세계 최고층 마천루 자리를 유지하였다. [94] 미래 시점은 2032년 [95] 이후 2005년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인구 수는 계속 감소하고 있다. [96] 3×3×3 큐브 눈 가리고 맞추기 분야에서 대한민국 1위이다. [97] 전세계 틱톡 팔로워만 약 1억 명 이상으로 현재 팔로워 수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틱톡커이다. 1998년생 유튜버 MrBeast, 2003년생 가수 올리비아 로드리고, 2004년생 가수 GAYLE과 함께 Z세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98] 2022년 2월, 김정주 넥슨 회장이 사망하면서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에 등극했다. [99] 이외에도 눌지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있다. 작중 배경인 2021년이 기준이다. [100] 이외에도 2학년 5반 학생 전원 & 일진 패거리 일당 & 학교폭력 피해자 & 그 외의 인물 등이 있다. 작중 배경인 2021년이 기준이다. [101] 닌자 조직의 도움으로 부활하게 된다. [102] 컴백 무대 기준. 앨범은 3월 26일에 발매했다. [103] 솔로 데뷔일이며, 이미 1999년에 피플크루라는 그룹으로 데뷔했다. [104] 단, 채동하는 2002년에 솔로로 먼저 데뷔했다. [105] 2012년에 데뷔한 그룹 EXID의 멤버와 동일인물. [106] 2007년에 데뷔한 그룹 원더걸스의 멤버와 동일인물. [107] 현재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서울 광진구 국회의원이다. [108] 인기 MC 유재석의 부인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109] 다음 웹툰 <스틸 레인> 작화가. [110] 1991년 이후 13년 만에 돌아온 KBS의 황금기수이다. [111] 2004년 싸이월드 뮤직 연간차트 1위 [112] 2004 KBS 가요대상 대상 / 2004 MKMF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상 수상곡 [113] 2004 SBS 가요대전 / 2004 서울가요대상 대상 수상곡 [114] 2004 MBC 10대 가수 가요제 / 골든디스크 대상 수상곡 [A] 판권 자체는 대원방송에 있으나, 투니버스 방송 때부터 비로소 알려짐. [A] 판권 자체는 대원방송에 있으나, 투니버스 방송 때부터 비로소 알려짐. [117] 투니초이스 1위 선정. [118] 아래 내용들은 사실상 망언에 더 가깝다. 때문에 대부분 개그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였다. [119] 사건 자체는 2001년에 발생했는데 유행은 3년이나 지나서야 되었다. [120] 특이하게도 생산은 LG전자가 아닌 팬택&큐리텔이다. [121] 캔유 시리즈는 아니지만 LGT 전용으로 출시된 휴대전화이다. [122] 특이하게도 생산은 LG전자가 아닌 팬택&큐리텔이다. [123] 설 연휴는 1월 21일~23일에다 주말인 24, 25일까지 합쳐서, 추석 연휴는 주말인 27일~29일에다가 바로 전의 주말인 25일, 26일까지 합쳐서 5일 연휴였다. [124] 공교롭게도 2032년도 이 해와 똑같은 형태이다. 그 해는 설날이 화.수.목 연휴라 최장 9일을 쉴 수 있지만, 부처님 오신날 및 추석 당일이 일요일이라 2004년보다도 공휴일이 더 적다. [125] 만약 이 해가 윤년의 해가 아니었고 평년의 해였다고 해도 삼일절 식목일은 일요일, 현충일, 광복절, 개천절은 토요일에 있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가 평년이어도 연휴가 적은 해였을 것이다. 그 대신 제헌절 크리스마스은 금요일에 있었을 것이다. [126] 1999년, 2010년 모두 평년이었으므로 이 해 1월~2월과는 형태가 다르다. 즉, 3월부터 형태가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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