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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8:33:01

고이즈미 준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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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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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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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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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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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모치 가쓰라 다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오쿠마 시게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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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가토 도모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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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곤노효에 기요우라 게이고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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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카이 쓰요시 사이토 마코토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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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아베 노부유키 요나이 미쓰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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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고이소 구니아키 스즈키 간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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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시타 노보루 우노 소스케 가이후 도시키 미야자와 기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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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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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고이즈미 준야 (데릴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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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고타로 고이즈미 신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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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하토야마 이치로
2대
이시바시 단잔
3대
기시 노부스케
4대
이케다 하야토
5대
사토 에이사쿠
6대
다나카 가쿠에이
7대
미키 다케오
8대
후쿠다 다케오
9대
오히라 마사요시
권한대행
니시무라 에이이치
10대
스즈키 젠코
11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12대
다케시타 노보루
13대
우노 소스케
14대
가이후 도시키
15대
미야자와 기이치
16대
고노 요헤이
17대
하시모토 류타로
18대
오부치 게이조
19대
모리 요시로
20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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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22대
후쿠다 야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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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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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가키 사다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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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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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요시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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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후미오
28대
이시바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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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후생대신(1938년~2001년)
초대
기도 고이치
2·9대
히로세 히사타다
3대
오하라 나오시
4대
아키타 기요시
5대
요시다 시게루
6대
야스이 에이지
7대
카네미츠 츠네오
8대
고이즈미 치카히코
2·9대
히로세 히사타다
10대
아이카와 카츠로쿠
11대
오카다 타다히코
12대
마츠무라 켄조
13대
아시다 히토시
14대
가와이 요시나리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15대
히토츠마츠 사다요시
16대
타케다 기이치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17-18대
하야시 조지
19대
구로카와 다케오
20·31대
하시모토 료고
22대
요시타케 에이치
23대
야마가타 가쓰미
24대
구사바 류엔
25대
쓰루미 유스케
26대
가와사키 히데지
27대
고바야시 에이조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28-29·41-41대
간다 히로시
30대
호리키 겐조
20·31대
하시모토 료고
32대
사카타 미치타
33대
와타나베 요시오
34대
나카야마 마사
35대
후루이 요시미
36대
나다오 히로키치
37대
니시무라 에이이치
38-39대
고바야시 다케지
28-29·41-41대
간다 히로시
42대
스즈키 젠코
43-44대
보 히데오
45·59대
소노다 스나오
46·48대
사이토 노보루
47대
우치다 쓰네오
46·48대
사이토 노보루
49대
시오미 슌지
50·58대
사이토 구니키치
51대
후쿠나가 겐지
52대
다나카 마사미
53대
하야카와 타카시
54대
와타나베 미치오
55대
오자와 다쓰오
56대
하시모토 류타로
57대
노로 쿄이치
50·58대
사이토 구니키치
45·59대
소노다 스나오
60대
무라야마 다쓰오
61대
모리시타 모토하루
62대
하야시 요시로
63대
와타나베 고조
64대
마스오카 히로유키
65대
이마이 이사무
66대
사이토 주로
67대
후지모토 다카오
68-69·80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68-69·80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70대
도이다 사부로
71·84대
쓰시마 유지
72대
시모조 신이치로
73대
야마시타 도쿠오
74·82-83대
니와 유우야
75-76대
오우치 게이고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75-76대
오우치 게이고
77대
이데 쇼이치
78대
모리이 추료
79대
간 나오토
68-69·80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81대
미야시타 소헤이
74·82-83대
니와 유우야
74·82-83대
니와 유우야
71·84대
쓰시마 유지
85대
사카구치 치카라
노동성설치준비위원회위원장(1947년)
초대
요네쿠보 미츠스케
노동대신(1947년~2001년)
초대
요네쿠보 미츠스케
2대
가토 간쥬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3대
마스다 가네시치
4대
스즈키 마사후미
5대
호리 시게루
6대
요시타케 에이치
7대
토츠카 쿠이치로
8대
고사카 젠타로
9대
치바 사부로
10대
니시다 타카오
11·15대
쿠라이시 타다오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12-13·15대
마츠우라 슈타로
14·17-18·22-23·39대
이시다 히로히데
11·15대
쿠라이시 타다오
16대
마쓰노 라이조
14·17-18·22-23·39대
이시다 히로히데
19대
후쿠나가 겐지
20-21대
오오하시 타케오
14·17-18·22-23·39대
이시다 히로히데
24대
고다이라 히사오
25대
야마테 미츠오
26-27대
하야카와 타카시
28대
오가와 헤이지
29·31대
하라 켄자부로
30대
노하라 마사카츠
29·31대
하라 켄자부로
32대
츠카하라 도시오
33대
타무라 하지메
34대
가토 츠네타로
35·37대
하세가와 타카시
36대
오쿠보 타케오
35·37대
하세가와 타카시
38대
우라노 사치오
14·17-18·22-23·39대
이시다 히로히데
40대
후지이 카츠시
41대
쿠리하라 유코
42대
후지나미 타카오
43대
후지오 마사유키
44대
하츠무라 다키이치로
45대
오노 아키라
46대
사카모토 미소지
47대
야마구치 도시오
48대
하야시 유우
49대
히라이 다쿠시
50대
나카무라 타로
51대
니와 효스케
52대
호리우치 미쓰오
53대
후쿠시마 조지
54대
츠카하라 슌페이
55대
오자토 사다토시
56대
콘도 테츠오
57대
무라카미 마사쿠니
58·69대
사카구치 치카라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9대
하토야마 구니오
60대
하마모토 만조
61대
아오키 신지
62대
나가이 다카노부
63대
오카노 유타카
64대
이부키 분메이
65대
아마리 아키라
66-67대
마키노 타카모리
68대
요시카와 요시오
58·69대
사카구치 치카라
후생노동대신 (2001년~)
1-3대
사카구치 치카라
4·5대
오쓰지 히데히사
6대
가와사키 지로
7대
야니기사와 하쿠오
8-10대
마스조에 요이치
11·12대
나가츠마 아키라
13대
호소카와 리쓰오
14대
고미야마 요코
15대
미쓰이 와키오
16·23대
다무라 노리히사
17·18대
시오자키 야스히사
19·20·22·26대
가토 가쓰노부
21대
네모토 다쿠미
19·20·22·26대
가토 가쓰노부
16·23대
다무라 노리히사
24·25대
고토 시게유키
19·20·22·26대
가토 가쓰노부
27대
다케미 게이조
28·29대
후쿠오카 다카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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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우정대신 (1949~2001)
초대
오자와 사에키
2대
다무라 분기치
3대
사토 에이사쿠
4대
다카세 소타로
5대
쓰카다 주이치로
6대
다케치 유키
7대
마쓰다 다케치요
8·35대
무라카미 이사무
9대
이시바시 단잔
10·11대
히라이 다로
12대
다나카 가쿠에이
13대
데라오 유타카
14대
우에다케 하루히코
15대
스즈키 젠코
16대
고가네 유키테루
17대
사코미즈 히사츠네
18대
데시마 사카에
19대
오자와 규타로
20·21대
고이케 신조
22·23대
도쿠야스 진조
22·23대
도쿠야스 신조
24대
코오리 유이치
25대
신타니 도라사부로
26·27대
고바야시 다케지
28대
고모토 토시오
29대
이데 이치타로
30대
히로세 마사오
임시대리
다나카 가쿠에이
31대
미이케 마코토
32대
구노 추지
33대
하라다 겐
34대
가시마 도시오
8·35대
무라카미 이사무
36대
후쿠다 도쿠야스
37대
고미야마 주시로
38대
핫토리 야스시
39대
시라하마 니키치
40대
오니시 마사오
41대
야마우치 이치로
42대
미노와 노보루
43대
히가키 도쿠타로
44대
오쿠다 게이와
45대
사토 메구무
46대
사토 분세이
47대
가라사와 슌지로
48대
나카야마 마사아키
49대
가타오카 세이이치
50대
무라오카 가네조
51대
오이시 센파치
52대
후카야 다카시
53대
세키야 가쓰쓰구
54대
와타나베 히데오
55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56대
미야자와 기이치
57대
칸자키 다케노리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8대
히카사 가쓰유키
59대
오오이데 슌
60대
이노우에 잇세이
61대
히노 이치로
62대
호리노우치 히사오
63대
지미 쇼자부로
64대
노다 세이코
65·66대
마에지마 시게사부로
총무대신으로 계승
67대
히라바야시 코조
68대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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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초대
사와 노부요시
2대
이와쿠라 도모미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5대
이노우에 가오루
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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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이노우에 가오루
6대
이토 히로부미
7대
오쿠마 시게노부
8대
아오키 슈조
9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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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무쓰 무네미쓰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13대
니시 토쿠지로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15대
아오키 슈조
16대
가토 다카아키
17대
소네 아라스케
18대
코무라 주타로
19대
가토 다카아키
20대
사이온지 긴모치
21대
하야시 타다스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3대
코무라 주타로
24대
우치다 고사이
25대
가쓰라 다로
26대
가토 다카아키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28대
가토 다카아키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30대
이시이 키쿠지로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32대
모토노 이치로
33대
고토 신페이
34대
우치다 고사이
{{{#!wiki style="margin: -16px -11px" }}}
34대
우치다 고사이
3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36대
이주인 히코키치
37대
마츠이 케이시로
38대
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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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다나카 기이치
40대
시데하라 기주로
41대
이누카이 쓰요시
42대
요시자와 겐키치
43대
사이토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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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우치다 고사이
45대
히로타 고키
46대
아리타 하치로
47대
하야시 센주로
48대
사토 나오타케
{{{#!wiki style="margin: -16px -11px" }}}
49대
히로타 고키
50대
우가키 가즈시게
51대
고노에 후미마로
52대
아리타 하치로
53대
아베 노부유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54대
노무라 기치사부로
55대
아리타 하치로
56대
마츠오카 요스케
57대
토요다 테이지로
58대
도고 시게노리
{{{#!wiki style="margin: -16px -11px" }}}
59대
도조 히데키
60대
타니 마사유키
61대
시게미쓰 마모루
62대
스즈키 간타로
63대
도고 시게노리
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wiki style="margin: -16px -11px" }}}
64대
시게미쓰 마모루
65대
요시다 시게루
66대
가타야마 데쓰
67·68대
아시다 히토시
69·70·71대
요시다 시게루
{{{#!wiki style="margin: -16px -11px" }}}
72·73·74대
오카자키 카츠오
75·76·77대
시게미쓰 마모루
78대
이시바시 단잔
79·80대
기시 노부스케
81·82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83·84대
고사카 젠타로
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87·8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9·90대
미키 다케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91대
사토 에이사쿠
92·93대
아이치 기이치
94대
후쿠다 다케오
95·96대
오히라 마사요시
97대
키무라 토시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98대
미야자와 기이치
99대
고사카 젠타로
100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101·102대
소노다 스나오
103대
오키타 사부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04대
이토 마사요시
105대
소노다 스나오
106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107·108대
아베 신타로
109대
쿠라나리 타다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10대
우노 소스케
111대
미쓰즈카 히로시
112대
나카야마 타로
113·114대
와타나베 미치오
115대
무토 카분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16대
하타 쓰토무
117대
가키자와 고지
118대
고노 요헤이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121대
오부치 게이조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123·124·125대
고노 요헤이
126대
다나카 마키코
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128·129대
카와구치 요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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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2·133대
아소 다로
13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5대
고무라 마사히코
136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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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가쓰야
13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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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대
에다노 유키오
14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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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대
겐바 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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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후미오
145·146대
고노 다로
147-149대
모테기 도시미쓰
150대
기시다 후미오
151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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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대
가미카와 요코
153·154대
이와야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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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 농림대신 (1925~1943)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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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오카자키 쿠니스케
3대
하야미 세이지
4·6대
마치다 추지
5·7대
야마모토 테이지로
4·6대
마치다 추지
5·7대
야마모토 테이지로
8대
고토 후미오
9·11·2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10·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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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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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우치 유키오
14·16대
고도 타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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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대
시마다 토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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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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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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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라이시 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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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 가나가와 11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4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제45~49대
고이즈미 신지로

}}} ||
일본국 제87-89대 내각총리대신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泉純一郎 | Koizumi Junichirō
파일:Junichiro_Koizumi_20010426.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942년 1월 8일 ([age(1942-01-08)]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재임기간 제87대 내각총리대신
2001년 4월 26일 ~ 2003년 11월 18일
제88대 내각총리대신
2003년 11월 19일 ~ 2005년 9월 20일
제89대 내각총리대신
2005년 9월 21일 ~ 2006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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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가족 외조부 고이즈미 마타지로[1]
부친 고이즈미 준야[2]
모친 고이즈미 요시에
전처 미야모토 가요코 (이혼)
장남 고이즈미 고타로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
며느리 타키가와 크리스텔
삼남 미야모토 요시나가
학력 요코스카 시립 야마자키 초등학교 (졸업)
요코스카시 마보리 중학교 (졸업)
가나가와현 요코스카 고등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 (경제학 / 학사)
신체 169cm, A형
종교 신토
정당

지역구 가나가와 11구
의원 선수 12 (중)
의원 대수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약력 후쿠다 다케오 비서관
중의원 의원
대장정무차관[3]
제69-70·81대 후생대신
제55대 우정대신
제20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87-89대 내각총리대신
제133대 외무대신[겸임]
제38대 농림수산대신[겸임]
}}}}}}}}} ||

1. 개요2. 생애
2.1. 젊은 시절2.2. 총리가 되다2.3. 총리 시절
2.3.1. 두 차례의 북일정상회담2.3.2. 주변국들과의 마찰과 고이즈미 담화2.3.3. 고이즈미 극장
2.4. 퇴임 후: 정치적 제자와의 충돌
3. 성격4. 어록5. 가족 관계
5.1. 가정사
6. 선거 이력7. 여담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 정치인. 제87~89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내각총리대신치고는 상당히 긴 기간인 5년 5개월을 재임했으며, 그렇게 4년 11개월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를 제치고 전후 최장기 재임 4위 기록을 세웠었다. 의원내각제 일본 정계에서 연임을 포함해 총리 임기를 다 채우고 나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단임인 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 5년보다 더 길게 재임하였고, 그 재임 기간 중 3년 8개월(2003년 ~ 2006년)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겹친다. 게다가 정치인 치고 개성 강한 헤어 스타일[6] 유지해서 한국인에게 여러 의미로 기억되는 일본 총리가 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랜 재임기간 때문에 그에 비례해 악명을 널리 떨친 측면도 있다.[7]

한국에서 고이즈미의 이미지는 지속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독도 문제 등으로 인해 극우 이미지가 강하게 박히긴 했지만, 사실 후술되어있듯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하며 무라야마 담화의 계승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고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해 사죄의 목소리를 전하는 등 한국에 우호적인 모습 역시 제법 보였다.[8] #

어찌 됐든 이 사람만큼 한국인들에게 혐오를 받은 일본 총리는 당시 기준으로는 거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한창 반일 감정이 고조되던 시기엔 '고이즈미 가지고 놀기' 등의 플래시 게임이 국내에서 유행하기도 했었으며, 같은 이유로 불멸의 이순신(게임)에서 적으로 나오거나,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독도 지키기'에서 최종보스로 나오는 등 당시 기사, 고이즈미 가지고 놀기 게임 그런데 세월이 약인지 고이즈미의 악명도 퇴임 후 [age(2006-09-26)]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바랬으며, 퇴임 이후 그의 정치적 제자이기도 했던[9] 아베 신조가 2013년 재집권 시작부터 막 나갈 기질을 보이면서 고이즈미를 능가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아베 집권기 당시 일본이 한창 우경화되었을 때는 아예 "고이즈미 시절 일본이 그나마 나았다"고 하소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고이즈미가 과거사 관련해서 구설수에 오른 적은 많았지만 현대사는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았는데, 아베 정권 들어선 현대사의 대명사인 한일월드컵 개최 사실을 삭제한 교과서를 검정 통과시키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으니. 또 2003년 유사법제 3법 통과 등 군사대국화 기도로 논란이 있었으나, 아베만큼은 아니었다.

이 외에도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 아소 다로나 모미이 가츠토,[10] 햐쿠타 나오키, 그리고 다모가미 도시오 등 다수가 미친 존재감을 보이면서 한국에서 고이즈미의 존재감은 점점 묻히고 있다. 도리어 "이런 인간들을 거느리고도 결정적인 선을 넘지 않았던 고이즈미는 의외로 정상인이 아니었을까"라는 재평가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독도 문제를 제외하곤 상식 선에 들었던 인물이었다는 평도 있다. 실제로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한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하고, 서대문 형무소에도 갔다오는 등 일본 제국의 만행에 대해서 어느정도 참회하는 모습도 보였다. 2004년에는 한국을 안보 우호국격인 백색 국가에 지정해 신뢰할 만한 나라라는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임기 초반엔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국립 추도시설로 쓰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야스쿠니 신사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일본 우익들의 성화 때문에 무위로 끝난 적도 있었다. 심지어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도 이시기(2002, 2004)에 이뤄졌다. 이러한 재평가는 청출어람을 이룬 그의 후임자의 탓도 상당하다.

이런 이면엔 대외정책 문제는 미일동맹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국내 문제에 집중하겠다는 의도 또한 작용했을 것이다. 고이즈미는 특별한 외교적 지향이나 대외정책에 대한 정견이 없었으며, 내정개혁이 임기 내내 추구한 단일 목표였다. 그 밖의 다른 분야 정책들은 그 달성을 위해 희생되어도 좋다는 것이 내각의 일관된 기조였다. 고이즈미가 보여온 이러한 혼란스러운 모습은 이에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파일:Junichiro_Koizumi_and_Junya_Koizumi.jpg
어린 시절, 아버지 고이즈미 준야와 함께

1942년 1월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총리들이 흔히 그렇듯 선거구를 3대째 세습해 온 정치 명문가의 3세 국회의원이다. 외조부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郎)는 야쿠자 조직 고이즈미구미(小泉組)의 보스로 시작하여 일본 제국 중의원에서 12선 의원과 하마구치 내각 - 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제33대 체신대신을 지냈다.[11] 부친 고이즈미 준야는 9선 중의원과 1960년대 방위청 장관을 지냈다.

준야의 성씨는 본래 '사메지마(鮫島)'였으나 마타지로의 외동딸인 고이즈미 요시에(小泉芳江)와 결혼[12], 아내의 성씨를 따라 '고이즈미'로 성씨를 바꾸고 고이즈미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준야와 요시에는 장녀 미치코(道子), 차녀 다카코(隆子), 3녀 노부코(信子), 장남 준이치로, 차남 마사야(政也)를 낳았는데 2남 3녀 모두 '고이즈미' 성씨를 따랐다.

고이즈미는 가나가와 현립 요코스카 고등학교[13]를 거쳐 3수로 명문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으며 대학 졸업 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으로 유학을 갔다. 런던에서 공부하던 중 부친 준야가 급사하는 바람에 급히 귀국하여, 부친의 지역구를 물려받아(가나가와 2구) 총선에 출마하면서 27세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했다.
파일:고이즈미 첫당선.jpg
1972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첫 당선된 고이즈미

그러나 27세에 처음 출마한 선거인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했고[14], 훗날 일본 총리가 되는 자민당 우파의 거두 후쿠다 다케오 당시 중의원 의원의 비서관으로 들어가 정치를 배웠다. 2년 후인 29세에 중의원 초선에 당선되고 이후로 12선 중의원, 대장성 정무차관, 후생대신, 우정대신 등의 각료를 역임했다. 우정대신 때부터 민영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해 결국 뜻을 이뤘다.

2.2. 총리가 되다

고이즈미는 1990년 가토 고이치, 야마사키 타쿠와 함께 YKK 연합을 결성하고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YKK는 세사람의 영문이니셜로 이들은 다케시타파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YKK 연합은 고이즈미보다는 가토가 리더의 역할을 했기에, 사실상 이 연합의 막내격이었다.

1995년 9월에는 우정 민영화를 내걸고 게이오기주쿠대학 선배 하시모토 류타로와 총재직을 놓고 싸웠으나 대패하고, 1998년에는 오부치 게이조와의 대결[15]에서도 패하였다. 그러나 2000년 말 ' 가토의 난'이 실패하면서 고이즈미가 YKK연합의 대표로 나섰으며, 모리 요시로가 지지율이 10% 아래로 추락하면서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가 확실시되었던 상황이었고, 2001년 4월 24일, 자민당 총재경선에서 예상 밖의 당원 돌풍을 일으키면서 95년 패했던 자민당 최대 파벌 헤이세이 연구회 하시모토 류타로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이로 누르고 총재도전 3수 만에 정상에 올랐다. 이후 2003년에 후지이 다카오 후보를 누르고 총재 자리를 연임했다. 그리고 2001년 10월 16일 방한했다.

한국의 인터넷에선 원래 노나카 히로무가 총리로 유력했으나 부라쿠민이어서 고이즈미가 이겼다는 식의 얘기가 퍼지기도 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노나카 히로무는 총재 선거에 출마한 적도 없고, 하시모토 류타로 후지이 다카오를 후보로 밀었으나 두 후보 모두 개혁을 내세운 고이즈미에게 패배한다.

2.3. 총리 시절

총리로 재임할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내각으로는 사토 에이사쿠 요시다 시게루 다음으로 오래 집권(1,980일)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로 오래간만에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끝까지 마친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었다.

총리가 된 후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하자며 성역없는 개혁이라는 슬로건하에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들어갔는데 공기업 민영화, 낙하산 철폐, 정경관 유착 해소, 조직 유연화 등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당시 일본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소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반대로 복지 정책 축소와 이로 인한 양극화 심화 등 부작용에 따른 비판도 있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 방한하여 온전한 한일관계 유지에 노력하였으나, 참여정부 시절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함께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면서 한국 네티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다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자기의 의지가 아닌 자민당내 우익들을 회유하기 위해 고이즈미가 쓴 수단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2000년 초반에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국립묘지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그 외에 반원전 등을 주장하였으며, 2001년 10월 15일 일본 총리로선 최초로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하여 참배하기도 했기 때문. # 물론 임기 내내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에 단순히 우익 회유 수단으로 참배를 했다고 보긴 좀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만. 아니면 회유를 넘어 친밀감을 심으려는 의도였을지도.

2001년 참의원 선거에서 9년 만에 자민당이 압승을 거둘때부터만 해도 탄탄대로를 걸을 거 같았지만, 2003년에 민주당 자유당과의 합당을 통해 세력확장을 단행하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어그로를 끌었지만 결국 자민당 의석이 줄어들어 단독과반 확보에 실패하고 오히려 민주당에게 비례대표 1당을 빼앗겼다. 그래도 연립여당인 공명당, 보수신당과 합해서 275석으로 절반을 넉넉하게 넘었기 때문에 정권을 안정적으로 연장할 수 있었지만 이듬해인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선 민주당이 50석을 확보하며 1956년 참의원 선거에서의 기존 야당 최대였던 사회당 기록을 깨고, 자민당은 49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는 패배를 기록한다.

이렇게 두 차례 연속 선거에서 부진한 성적표를 보인 탓에 장기집권 여부는 불확실해졌고 당내에서도 점차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있었으며 우정선거 직전에 치러진 2005년 도쿄도의회 선거에서도 자민당은 연립정당인 공명당과 합쳐서 과반을 획득했지만 어쨌든 의석수가 줄어드는 등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썩 좋지 못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이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을 뒤엎기 위해 단박에 승부수를 던진다.

2005년 8월 8일 중의원에서 통과된 우정 민영화 관련 법안이 민주당이 다수당인 참의원 본회의에서 부결되자 참의원 부결 30분 만에 내각에서 중의원 해산을 결정하고, 중의원 해산 결의 서명을 거부한 시마무라 요시노부 농림수산대신을 파면[16]한 뒤 본인이 '내각총리대신 겸 농림수산대신'으로서 겸직한 채 가결시키는 패기를 보인다.[17] 이른바 우정 해산. 이 도박으로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정국을 뒤엎고 지지율이 급상승, 9월 11일 제44회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296석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는 1986년 중의원 선거 이래로 최다 의석수를 확보한 것이었다.[18]

이후 자민당 총재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2006년 9월 20일 일본의 아베 신조 내각관방장관이 자민당 제21대 총재로 선출되면서 내각총사퇴 후 내각총리대신직에서 물러났다.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마친 몇 안 되는 총리였다. 이후에는 스가 요시히데가 총재 임기 만료 후 재선을 포기함에 따라 만기 퇴임했다.

정책적인 면에서는 지금도 제법 회자되는데, 일본 역사에서 손꼽히는 리버럴리스트였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고이즈미의 기본 기조는 작은 정부였으며, 이는 일본의 전통적인 정치성향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야당 뿐만 아니라 여당에서도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이 많았다. 모리 요시로 총리가 대표적. 그러나 신자유주의 성향의 인사들과 친미 기조 아래 '북일 정상회담'[19] 등 외교정책에서의 지지층도 있었기에, 이들을 결집시켜서 우정 민영화나 여계 혈통 천황 인정 등 일본의 내부적인 개혁 안건을 추진하기도 했다. 일본 같은 폐쇄적인 나라에서 고이즈미 같은 (일본 기준) 개혁 소장파 성향 인물이 총리직을 오래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결과, 복지 혜택이 축소되고 많은 분야에서 불평등성이 심화되었다는 평가 역시 나온다. 특히 고이즈미 임기 만료 후, 이러한 폐단이 보도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고이즈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관광 부문으로 2003년 1월에 2010년까지 관광객 1,000만 유치라는 목표 아래 Visit Japan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는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에 실현되었으며, 일본이 관광대국으로 가는 원동력을 만들었다.

2.3.1. 두 차례의 북일정상회담

북핵문제로 인한 고립을 돌파하기 위해서 2000년대 이후 개혁개방적 면모를 한창 보이던 김정일은 2000년 6월, 한국 김대중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같은 해 9월에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10월에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각각 회담을 마쳤다. 하지만 조지 W. 부시가 예상을 깨고 앨 고어를 꺾고 당선 되면서 상황은 뒤집힌다.

그러나 북한의 평화공세는 계속되었고, 결국 2002년 9월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와 일북 수교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당시 김정일은 고이즈미에게 " 남한에 8억 달러 줬으니 우리에게도 100억 달러는 줘야 한다"면서 속마음을 넌지시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일본과의 실무협상을 맡은 사람은 'X'라 불린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는데 일본에서 그의 정체를 간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간단한 신상조차 캐낼 수 없었다. 다만 일본 측에서 성의를 보이려면 스파이 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된 일본 기자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하자 정말로 석방해주는 등 막강한 힘이 있던 인물임은 분명한데 이후 북한 인질외교의 대가였던 보위부 부부장 류경이라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지만 결정적 증거는 없다. 만약 류경이 맞다면 그는 2010년 이명박과의 남북정상회담 성사 실패 이후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북한의 납북 일본인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본 사회의 반북 감정이 심화되기 시작한다.[20]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를 비롯한 납북자의 가족들이 연일 시위하면서 납북 일본인 귀국을 촉구했고, 이에 고이즈미는 "납북 일본인의 존재를 밝히고 사죄하라"는 요구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당혹한 김정일은 "오후에 대답하겠다"고 자리를 피한 다음, 결정을 내렸는지 그날 오후 일본인 납북 문제를 시인하고 사과한다.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던 김정일이 한발 물러선 것이다. 납북자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요코타 메구미의 경우에는 죽었다고 둘러대면서 실체가 불분명한 유골만 돌려주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소가 히토미를 비롯해서 그때까지 살아있는 일본인들의 귀국을 성사시키는 등 업적은 분명히 있었으며, 납북자 가족들이 그의 귀국 때 항의시위를 하자 특유의 승부심을 발휘하여 자신에게 항의하는 유족회 사람들을 마주하여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이 그들의 비난을 들었고, 이에 일본 민심이 유족회를 비난하고 고이즈미를 옹호하면서 지지율 급등의 호재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허나 북미 관계가 개선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이즈미 내각이 북한과 수교를 서둘러봤자 얻을 것보단 잃을 것이 더 많아보였고, 이런 모험을 할 수 없던 고이즈미에 의해 결국 북일수교는 무산되고 만다. 당연히 북한은 제2의 경술국치, 제2의 을사조약 운운하면서 길길이 날뛰게 된다. 이후 지금까지도 북한과 일본은 납북자 문제를 가지고 지리한 외교적 공방을 벌이면서 관계 개선은 올스톱된 상태이다. 한편, 고이즈미도 일본에선 납북자들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북한 칠보산 송이를 받아온 일은 일본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결국 북한과의 관계 개선 시도는 본전도 못 건졌고, 이 납치 문제는 현재까지도 북일관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2.3.2. 주변국들과의 마찰과 고이즈미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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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국립 추도시설로 쓰는 방안을 구상하기도 했던 고이즈미였지만 2001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였다. 이에 대해 고이즈미는 2001년 8월 13일 첫번째 참배 이후, "내가 신사에 구애를 받거나 집착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수상 고이즈미 준이치로라는 자가 온 정성을 다해 신사에 참배를 했을 뿐이다. 주변 나라들의 반발과 입장도 고려해서 부득이 오늘(2001년 8월 13일) 참배한 것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즉, 그래도 주변국 신경 써서 8월 15일에 안 했다는 소리. 중국은 여기에 대단히 화가 났는지 2차 참배 이후로 고이즈미의 방중을 거부하기도 했다.[21]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논란과 관련해서도 한국의 재수정 요구에 '일본 역사교과서는 별 문제가 없다'는 부정적 입장을 밝히는 한편, 자위대의 집단 자위권 용인 등 보수 우경화 정책을 시도하기도 했다. 덕분에 일본 우익층에선 호감을 샀지만, 반대로 일본내 양심 세력이나 주변국들에겐 제대로 어그로를 끌었다. 일본내에선 그래도 소장파 소리 듣던 고이즈미에 대한 환상이 깨지던 순간. 이에 대해 자민당 내부의 강경우익을 비롯한 고이즈미 반발 세력 약화와 선거에서의 보수층 결집을 위해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는 약간 다른 방법을 택한 것에 가까웠던 것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패전 60주년이었던 2005년 8월 15일, 고이즈미는 기존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답습, 계승하는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했다.[22]
일본국은 일찍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행위로 인해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국민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 재차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의 뜻을 표명함과 동시에 지나간 전쟁으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에게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담화 전문

그리고 앞선 그해 정월에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미루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내각내 반대 탓도 있었고, 여론도 좋지 않았으며,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 등도 반대했기 때문. 그렇게 2005년엔 안가는가...했는데, 결국 2달 만인 10월 17일 개인 자격으로 신사참배를 강행하였다. 우정 해산 이후 승리에 따른 자신감으로 풀이되었다. 덕분에 같은 해 12월에는 국제무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관련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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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 패전국인 독일의 경우)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가 이웃에 고통을 준 사람들에 대해 일체의 추모시설을 만들지 않았다. 독일은 일부 영토까지 포기할 정도로 역사인식을 철저히 청산했다. (역대 공동체 발전은) 과거 질서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 기초해야 한다."
"한 명의 국민, 총리로서 자국 시설에서 평화를 빌고 전몰자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을 비판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다. 전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
2005년 12월 14일, 대통령 노무현 - 총리 고이즈미 설전 내용.
아예 임기 마지막 해인 2006년에는 쐐기를 박았다.
일국의 수상이 내 나라에 있는 신성한 신사에서 수상 명의로 참배하는 것이 뭐가 그리 거슬리거나 잘못되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고로 반대 세력들이 제발 좀 내정간섭이나 신사참배 가지고 뭐라고 안 했으면 좋겠다.
- 2006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이후

2.3.3. 고이즈미 극장

고이즈미의 정치 방식은 일본의 일반적인 정치 방식과 궤를 달리한다. 자민당 일당우위제로 인해 일본 정치에선 파벌과 이익단체 등 배후의 움직임이 중요해졌다. 심지어 국민의 의견이나 정치계 표면의 움직임 보다도 중요한 경우도 곧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고이즈미 극장'이라는 방식을 쓰는 고이즈미는 일본 정치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고이즈미 극장은 국민들에게 하나의 극장과도 같은 극적인 현실을 보여주고 그 무대를 통해서 주도권을 확보하는게 특징이다. 상대가 대응한다고 해도 그가 아니라 국민을 설득함으로서 상대의 대응을 무효화하고,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목적을 달성한다.

우정민영화를 예로 들자. 우정국(한국의 우체국) 개혁은 우정국이란 이익집단과 일본 정치의 보수적 파벌 때문에 이루어지기 힘들다. 일반적인 정치 방식으로는 지지부진하게 정치 협상이 이어지다가 부결되는 것으로 끝이다. 지루하고 재미없지만 정치는 협치와 협상의 결과물이기에 어쩔 수 없다. 다른 의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협상과 정치력의 부족을 인정하는 대신, 고이즈미 극장을 개막한다. 즉각적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이에 반대하는 장관을 그 자리에서 파면시킨다. 국회 해산 이유를 우정민영화로 확고하게 선언함으로서 국민들에게 개혁을 각인시킨다. '4개 회사로 쪼개어 2017년까지 민영화합니다'라는 말 대신에 '민간에서도 할 수 있는 우정서비스를 굳이 공무원만 해야 하는가', '단시간 근무자를 포함해 38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계속 국가공무원으로 유지해야 하는가' 등의 단순 명쾌하고 서민적인 언어로 계속 어필한다. 자민당이 내부분열해서 당에서 독립한 중진의원들이 고이즈미를 비난하고, 고이즈미는 그들을 '내각의 방침에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저항세력이다', '나의 신념이다. (내가) 죽어도 좋다'라는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언론들은 파격적인 상황에 연달아 특종과 취재를 보도한다.

총리인 고이즈미가 이렇게 극적이고 재미난 무대를 깔았으니 국민은 팝콘먹으면서 구경할 수 밖에 없다. 공약과 개혁의 장단점이 뭔지, 고려할 점이 뭔지, 고이즈미와 그의 대적자의 머리 아프고 복잡한 주장들은 간과된다. 국민들 입장에선 명쾌하다. 고이즈미 극장의 '주인공인 고이즈미'와, '주인공의 대적자'들이 눈앞에 있다. 국민들은 고이즈미 극장에 집중하다가 주인공의 편을 들어주면 된다. 고이즈미 극장이 아니어도, 개혁을 부르짖다가 좌절하고 최후의 카드를 꺼낸 신예 정치인과 그걸 막는 구시대적이고 막강한 정치인들 중 누굴 국민이 더 선호할지는 명백하다. 이것 자체가 고이즈미 극장의 영향으로 도출된 생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고이즈미 극장은 선과 악, 주인공과 주인공의 적, 개혁을 부르짖는 신예 정치인과 구시대의 망령, 국민의 지지를 받는 총리와 개혁의 발목을 잡는 자들로 고이즈미와 다른 이들을 나눈다. 고이즈미 극장을 통해서 국민의 지지를 얻은 고이즈미를 일본 정치 구조에서 이길 수 없었다. 국민만 보면 이긴다는 걸 알고 있던 고이즈미와, 국민이 아니라 파벌을 보던 일본 정치인들의 차이는 역력했다. 고이즈미는 반대파를 설득하는게 아니라 국민을 설득하면 되는 거였고, 고이즈미 수준으로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인은 드물었다. 고이즈미 극장 안에서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은 더 드물었다. 고이즈미 극장은 일본 정치인들에게 저항불가능한 재해에 가까울 정도로 충격과 패배를 안겨주었다. 자민당의 파벌들과 고참 정치인들도 우정민영화로 펼쳐진 고이즈미 극장으로 큰 타격과 붕괴에 이를 정도였다.

정치계에서의 화려한 성과와 별개로 문제들도 많다. 정치적 협상 대신 국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했기에 정치적 대립은 심했고, 합리적인 반대 이유들까지 악역의 주장으로서 여론의 뭇매를 받았다. 반대측의 의견을 무시하는 강한 개혁 추구는 협의로 개선 가능했을 부작용을 남겼다. 개혁과 혁신을 부르짖음으로서 지지를 받았지만, 지지자들은 고이즈미가 뭔 개혁을 하는지도 제대로 몰랐다. 표퓰리즘 정치라는 비판도 강하다. 고이즈미라는 걸출한 정치인 외에 이런 방식을 따라하는 것은 힘들기에 이 방식을 이어간 일본 정치인은 없었고, 고이즈미가 사라지자 고이즈미 극장도 사라졌다.

장점도 단점도 있지만 고이즈미 시기는 일본 정치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고이즈미 극장으로 대표되는 방식은 당대 일본 정치계를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

2.4. 퇴임 후: 정치적 제자와의 충돌

5년 반을 집권한 자민당 총리인 그가 2010년대 들어선 원전 반대를 외치고 다녀서 아베 신조와 자민당 인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일본의 시사 잡지 '프레지던트'의 창간 50주년 기념 행사에서 고이즈미는 "인간이 원자력을 제어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정치권이 원전 제로를 결단해야 한다'"고 역설해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사회민주당과의 좌담 강연회에서는 "(기술 문제와 관계 없이) 국민과 정권이 마음만 먹으면 원전 제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며 원전에 대해서는 급진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사실 고이즈미는 총리 재직 시절만 해도 원전 찬성론자였는데, 2013년 8월 핀란드 방사성 폐기물 최종 처분장을 방문한 뒤 지하수가 많고 지반이 불안한 일본에서 원전을 통제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탈원전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직후 터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도 큰 영향을 줬을듯.

그렇게 아베 내각과 각을 세우다 결국 2014년 1월 14일엔 탈원전을 기치로 하여, 2월 9일에 있을 도쿄도지사 선거에 나선 호소카와 모리히로 후보를 전격 지지 선언. 참고로 호소카와는 전 일본 총리로 비 자민당 출신 총리다. 이런 배경엔 정치적 스승인 자신의 탈원전 조언을 아베 신조가 무시한 채 중동 지방을 돌아다니며 원전 세일즈를 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전직 스승 총리 vs. 현직 제자 총리[23] 구도가 되어 언론에서 주목을 받았고, 자민당은 고이즈미 전 총리의 차남인 고이즈미 신지로를 자민당 유세에 투입하여 부자대결 식으로 맞불을 놓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신지로가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고이즈미와 정면 대결하기보다는 원전 이슈를 희석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선거 결과 자민당 후보가 막강한 화력을 등에 업고 호소카와 후보를 더블 스코어 이상으로 앞서며 승리했다.

자민당의 관계자는 고이즈미가 아베를 흔들려고 이런다기보다는 자민당 내에 친원전 의원들이 아베에게 원전 재가동을 압박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스처로 본다고 지적했다. 어찌 되었든 당의 원전 재가동 정책과는 정반대의 행보라 "그냥 말을 말았으면" 하는 반응이 대다수. 그의 아들인 신지로를 비롯해서 유력 인사들은 고이즈미의 발언과 자민당 사이에 선긋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베와는 우정 민영화 철회 등으로 정책적 골이 상당한지라 고이즈미의 행보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동일본대지진 후쿠시마 원전사고 4주년인 2015년 4월 11일 후쿠시마현에서 행한 강연에서 “오염수는 통제되고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지만 전혀 통제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

2016년 들어서도 탈원전 운동에 열심인 듯하다. 5월에는 미국 강연에서 " 도호쿠 대지진 당시 구호작전에 나섰다가 피폭당한 미군을 도와야 한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같은 때 방일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아베 신조 총리와도 만났는데, 대화 주제 중 하나가 부시와 고이즈미와의 추억이었다고 한다. 아베가 고이즈미 정권 당시 관방장관 출신이라 그런 듯한데, 원전 문제로 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미묘한 부분이 있다.

사실 고이즈미의 성향 자체가 완전히 통일된 게 아니라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데, 정치/경제적으로는 좀 더 보수적인 성향이나 사회적인 문제에선 진보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우정 민영화야 개혁은 개혁이래도 경제적으로 봐서는 약간 보수적인 시각이겠으나, 천황의 여계 혈통을 인정하는 방안을 고려했던 사람도 고이즈미였다.[2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경제적으로도 마냥 보수적 성향이라기보단,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리버럴 성향이 드러난다고 일본내에서 평가받았던 게 고이즈미였다. 애초에 고이즈미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자이고, 사회 분야에서도 시민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자민당 총재직 역임 당시, 파벌 정치에 반대하고 자민당을 뿌리부터 바꿔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25] 다만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일본에서도 이런 과거사 발언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은 많다. 주로 자민당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자민당내 비주류가 많아서 문제일 뿐. 물론 그 수가 적진 않다. 당장 2019년 참의원 선거만 봐도 정당 득표율만 보면 범야권이 4할에 가까운 득표를 했다. 게다가 범여권인 공명당도 과거사 문제에선 자민당 주류와 결이 다르다.

2018년에는 고이즈미가 아베 신조 총리의 내년 개헌 완료 및 2020년 새 헌법 시행 추진과 관련해 "해야 하는 일은 안 하고 할 수 없는 일만 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12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개헌에) 야당은 찬성하지 않는다"며 아베 총리를 지적했다.

고이즈미는 니가타현에서 열린 반(反)원전 집회에 참석해 야권이 지지하는 니가타현지사 후보와 악수를 했고, 아베 정권에 반대하는 야권 자유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공동대표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원전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2018년 12월에는 아사히신문과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의 개헌 드라이브에 대해 "판단력이 나쁘다"고 비판한 적도 있다.

15일  NHK에 따르면 고이즈미 전 총리는 이날 이바라키현 히타치시에서 열린 '원전 제로(0)' 집회에 강연자로 나서 아들 신지로가 환경대신으로 입각한 것과 관련해 "힘냈으면 좋겠다. 그(신지로)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스타일로 나보다 공부를 많이 하고 있다. 환경은 지금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환경을 중요하게 다뤄서 원전을 없앴으면 좋겠다"며 "(일본을) 자연 에너지로 발전 가능한 국가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

고이즈미 전 총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반원전' 목소리를 내고 있다. 틈만 나면 반원전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쳐 원전 재가동 정책을 펴는 아베 총리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과 관련하여 2020년 3월 31일 발간된 주간지 '슈칸아사히'(週刊朝日)에 실린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는 사학 비리에 대해 책임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베 총리를 작심한듯 강하게 비판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 "아베 거짓말 해...총리직 그만둬야" 비난 '정치적 스승' 고이즈미 "아베, 거짓말 해... 그만둬야" 맹비난 처음에 아베 총리는 이에 대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대책에 전념하겠다면서 사퇴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 그런데... 아베 총리는 결국 5개월 뒤 진짜로 사임하고 말았다. 물론 사학 비리는 입 안 대고 단순히 지병 때문이라는 이유만 붙이고 얼른 도망갔다. 그리고 후임에는 스가 요시히데가 선출되었다.

또, 2020년 11월 3일에는 홋카이도에 핵처리 폐기시설을 신설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비슷한 시기 홋카이도에 있는 가타오카하루오촌장 선거에서 자민당의 지원을 받은 핵폐기물 처분장 유치파가 승리했기 때문. 물론 이때 이미 총리는 스가 요시히데로 바뀐 이후지만 아베가 막후에서 여전히 실세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

이렇게 이어져온 정치적 사제의 대립은 아베 신조가 2022년 7월 8일 선거 유세 도중 피살을 당하면서 어긋난 상태로 결말을 맺었다.

3. 성격

일명 '헨진(変人:괴짜)'[26], '일언거사(一言居士)'로 불리는 등 파격적이고 독설적인 언동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한국 네티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성격 문제 때문에, 그의 아내였던 미야모토 카요코는 결혼한 지 4년 만에 3남 요시나가(佳長)를 임신하고 있던 중에 이혼을 당했다. 고이즈미 집안에 문제가 있다는 설도 자자하다. 또한 카요코는 이혼당한 후, 두고 온 장남 고이즈미 고타로와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때마다 고이즈미가 거절해서 멀쩡히 살아 있는 어머니와 아들들을 생이별하게 만들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인 사이에서는 널리 퍼져 있는 소문.[27]

소설가 이케미야 쇼이치로에게 " 오다 노부나가와 닮은 꼴"이라는 평가를 받고 대단히 흡족해한 적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오다 노부나가의 열렬한 팬이라고.[28] # 여담으로 이 소설가는 소설 < 혼노지>의 작가로 이 사람의 소설 <혼노지>는 한국에 <난세의 파천황 오다 노부나가>라는 제목으로 정발된 바 있다.

4. 어록

출전은 일본어 위키인용집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문서. 그중에서도 대부분의 출처는 오가타 구니히코의 '괴짜 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이다.
간과 고이즈미의 해당 설전은 일본 드라마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에도 나왔다.

5. 가족 관계

5.1. 가정사

1977년, 당시 35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21세의 미야모토 카요코와 맞선을 봤고, 당일 프로포즈를 해 다음해인 1978년 도쿄 프린스 호텔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하였다. 하지만 카요코에게 아버지와도 같았던 외할아버지 쇼잔은 이 결혼을 반대했다.[32] 고이즈미 일족은 제약회사 회장인 쇼잔으로부터 카요코가 물려받을 재산을 기대한 듯하지만,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한 카요코에게 쇼잔은 금전적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카요코는 금방 임신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이즈미 가문에서 여러 갈등을 겪었고, 결국 부부는 4년 후인 1982년에 이혼하였다. 당시 카요코는 셋째를 임신 중이었고, 첫째와 둘째는 고이즈미 일가에 두고 나와야 했다. 두 아이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헤어져 고모들과 가정부들의 손에 자라며,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때 준이치로도 맘고생이 심했는지 "이혼이 결혼보다 10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다"라며, 그후로도 영영 재혼을 하지 않았다. 이건 카요코도 비슷했는지, 둘 다 이혼하고 [age(1982-01-0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쭉 독신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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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인 고이즈미 고타로(小泉孝太郎, 1978년생, [age(1978-07-10)]세) # 일본에서 드라마 영화의 주조연급 배우로 활약 중이다. 대표작은 국내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직장의 신의 원작인 파견의 품격(2007년작)인데, 파견사원을 물심양면 도와주는 사람 좋은 직장상사로 나온다. 재미있는 건 아버지 고이즈미 총리는 각종 노동법을 개악시킨 걸로 유명한데, 드라마 <파견의 품격>에서 고타로가 연기한 '사토나카 켄스케'는 노동법의 부조리에 괴로워 한다는 설정이었다는 점. 물론 선역뿐 아니라 악역으로써도 활약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게 <변두리 로켓 (下町ロケット)>에서 주인공의 회사와 경쟁하는 대기업의 NASA 엘리트 출신의 사장으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압박하는 포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준이치로는 자식들이 정치에 입문하는 걸 반대했기에 자연스럽게 장남인 고타로는 다른 쪽 일을 알아보다 배우가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달리 표정이 호감상이어서 한국의 일본 드라마 팬들에게도 나름 인기를 끌었는데, 알고 보니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아들이라서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래도 정치 활동과는 거리를 두고 연기 쪽에 몰두하는 행보를 보이는 터라 국내에서도 크게 논란거리가 되진 않는다. 2010년대 들어선 미국 디즈니사 + 마블 코믹스의 첫 합작품인 빅 히어로 6에서 테디 하마다의 성우로도 활약했다.[33]

드라마 외에도 활약 중인데, 고시엔 등의 여러 스포츠 대회의 메인 캐스터로 자주 나오고, 예능에서는 선배 배우인 사사노 타카시와 함께 블랙마요네즈와 베키가 진행하는 "인간 관찰 버라이어티 모니터링"에 레귤러 패널로, 그리고 매주 다른 연예인들과 하룻밤을 지내는 예능인 모노모노 후타리에서 바나나맨과 함께 진행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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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인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1981년생, [age(1981-04-14)]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정치계에 입문해서 활약중이다. 위에 언급된대로 아버지가 정치에 뜻을 두지 말라고 반대했지만 본인이 강하게 원하는터라 허락은 해줬는데, 그 대신 직접 뛰면서 배우라며 크게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2006년 6월 아버지가 총리직을 내놓은 뒤로 정치의 중심에서 급속히 멀어지자 미국에서 정치학 공부 중이던 신지로가 급히 귀국해 아버지의 개인 비서 자격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 2008년 아버지의 공식 정계 은퇴 후 후계자가 됐다.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나가 아버지의 지역구인 가나가와현 제11구에서 중의원에 당선됐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재선에 성공해 현재 5선 의원이다. 2019년 중순엔 한국의 환경부장관에 해당하는 환경대신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2019년 8월 7일, 4살 연상의 전직 아나운서 겸 프리랜서 타키가와 크리스텔과의 결혼을 발표했다. 이때 이미 임신 중이었고, 2020년 1월 17일에 장남 고이즈미 미치노스케를 출산했다. 기타 고이즈미 신지로의 행보는 본인의 항목을 참조.

막내(3남)인 미야모토 요시나가는 부모의 이혼 후 출생하여 어머니 카요코의 곁에서 자랐으며,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중학교까지는 일본에서 다닌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고등학교를 마친 후로는 교토외국어대학에 진학했다. 아버지를 만나려고도 했으나 거부당했고, 어머니 카요코와 함께 친할머니 요시에의 장례식에도 참석하려 했지만 제지당했다고 한다. 카요코와 요시나가는 간곡히 애원하여 간신히 분향만 할 수 있었고, 분향이 끝나자 곧바로 쫓겨났다고. 이때 준이치로, 고타로, 신지로는 카요코와 요시나가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2016년 카요코의 인터뷰에 따르면, 2008년 고이즈미가 정계 은퇴하면서 차남 신지로에게 “집안일은 모두 네게 맡긴다. 3형제끼리 친하게 지내라.”라고 했고, 이후 3형제가 만났다고. 그리고 2013년 말 요시나가의 결혼식 땐 다섯 식구(본인, 전 남편(준이치로), 아들 셋을 말하는 듯)가 30년 만에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고 한다.

그래도 아버지로서 아들 교육은 나쁘지 않게 했는지 2남 신지로가 타키가와 크리스텔과 결혼한다고 발표했을 때, "개인적으로 정치인으로서 아버지를 본받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아버지로서는 아버지를 본받고 싶다."리는 발언을 하기도 한 걸 보면, 정치인으로서 여러가지 바쁜 와중에도 자녀들에게는 나름대로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한 듯하다.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가나가와 2구[34]

103,381 (16.5%) 낙선 (5위)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2,188 (16.8%) 당선 (4위) 초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7,698 (14.5%) 재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5,125 (16.4%) 당선 (3위) 3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6,681 (17.5%) 당선 (2위) 4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5,274 (15.1%) 당선 (3위) 5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67,838 (20.8%) 당선 (1위) 6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68,997 (18.4%) 7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9,269 (16.5%) 당선 (2위) 8선[35]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가나가와 11구[36] 118,955 (58.2%) 당선 (1위) 9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57,335 (69.0%) 10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74,374 (74.4%) 11선[37]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97,037 (73.2%) 12선[38]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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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koizumi_1501581c.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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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선 중의원 의원, 중의원 부의장, 체신대신, 요코스카시장 역임. [2] 9선 중의원, 방위청장관 역임. 데릴사위로 본성은 사메지마(鮫島). [3] 現 재무대신 정무관 [겸임] 내각총리대신과 겸임 [겸임] 내각총리대신과 겸임 [6]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오히려 평범했다. [7] 아베 신조가 한국인들에게 악명을 떨친 것 또한 오랜 재임기간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망언의 수위나 극우 성향부터가 고이즈미를 따위로 만들어 버릴 수준이기도 했지만. [8]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극우 이미지가 강하게 박힌 아베 신조 또한 "혐한시위 하는 애들은 같은 일본인으로서 부끄럽다"고 말하는 등 마냥 극우적인 모습만 보이지는 않았다. [9] 아베 신조는 총리로 처음 취임한 2006년 이전에, 직전 내각이었던 고이즈미 정권에서 관방장관을 지냈으며, 90대 내각총리대신 지명 역시 당시 현직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만 2010년대 들어 원자력을 중요시하는 아베 신조와 탈원전을 주장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관계는 틀어져 현재는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다. 자세한 것은 후술한다. [10] NHK 제21대 회장이다. 아베 집권기 NHK를 우경화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11] 온 몸에 문신이 있었기 때문에 별명이 이레즈미( 문신) 대신이었다. [12] 당시 준야는 마타지로가 간사장을 맡고 있던 입헌민정당의 일개 사무 직원이었는데 마타지로가 자신의 딸과의 관계를 반대하자 요시에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해 도쿄에서 동거를 시작했다고 한다. 마타지로는 이에 자신의 딸에게 돌아오라고 신문에 광고를 싣기도 했다. 결국 준야가 데릴사위가 돼서 마타지로의 뒤를 잇는 조건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한다. 참고로 준야는 3남 6녀중 차남이다. [13] 지역에선 명문고이며, 아들 신지로는 요코스카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졌다. [14] 소선거구제로 전환한 이후로 편하게 당선되는 입장이 되었지만 이때 가나가와 2구는 상대적으로 자민당 약세 권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다가와 세이이치가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자유클럽에 합류하면서 1990년 중의원 선거구를 제외하면 해당 선거구에서 당선자 5명 가운데 1명만 자민당인 대표적인 자민당 약세지역이 되었다. [15] 오부치는 고이즈미 모교의 영원한 숙적 와세다대학 출신이다. [16] 그래도 총선 공천은 줬다. [17] 내각제 하 각료회의는 만장일치가 기본이다. 각의의 결정사항에 대해 총리를 비롯한 각료 전원이 연대책임을 지기 때문. [18] 연립여당 공명당의 31석까지 합하면 여권이 총 327석으로 중의원 의석의 2/3를 넘어섰다. 이렇게되면 참의원에서 부결된 법안을 중의원으로 다시 가져와 2/3 동의로 재의결시켜 법을 성립시킬 수 있다. [19] 2002년, 2004년 2차례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때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20] 아베 신조 당시 관방장관 역시 고이즈미와 동행하여 2차례 평양을 방문했는데, 이때 그가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부각시켰다는 얘기가 있다. [21] 의외일수도 있겠지만 이런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했던 것이 2007년 1차 임기를 보내고 있던 아베 신조였다. 이후 총리가 한국, 중국과의 외교관계 악화를 우려해 직접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걸 자제하는 것이 자민당-민주당 정권을 가리지 않고 유지되다가 2013년 2차 임기를 맞이한 아베가 직접 이 관례를 깨고 다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하지만 이 참배로 인해 미국 유럽연합에게 경고를 받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현직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22] 경술국치 후 100년 만에 나온 간 나오토 간 담화가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갖고 있지만, 사실 고이즈미가 무라야마 담화를 후퇴시키지 않고 계승한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10년 뒤 2015년에 나온 '아베 담화'의 후퇴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23] 아베 신조는 고이즈미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지냈으며, 파벌도 똑같은 청화회( 모리파) 출신인지라 고이즈미의 제자라 봐도 무방하다. [24] 1965년 이래 일본 황실에는 공주만 줄줄이 9명이 태어났고,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 내외는 오랜 불임 끝에 2001년 겨우 아이코 공주를 낳았다. 그래서 여성 천황이나 여계 천황 허용도 검토했던 건데, 2006년 나루히토 황태자의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이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를 낳으면서 유야무야 되어 버렸다. [25] 이 부분을 보고 고이즈미가 극우 유권자들과 영합한것 아니냐고 주장할수는 있다. 사실 이건 과거사 인식에 하자가 있는 인물들과 우익 유권자들이 넘쳐나는(이중 극단종자는 세키호타이 사건 같은 신문사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일본 정치판에서 많은 정치인들이 겪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천황이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발언했다 총격맞은 시장까지 있는 판국이니. 21세기 들어선 이런 물리적 테러 행위 자첸 줄어들었지만, 넷우익들이 기승이다. 즉, 자기 정치 활동에 차질을 안 빚기 위해 개인적 소신과 무관하게 혹은 소신을 바꿔가면서까지 떠벌리는 측면도 있는 것. [26] 다나카 마키코가 1998년 자민당 총재선거 정국에서 고이즈미를 헨진이라 부르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7] 다만 후술되어 있듯, 2013년에는 3남의 결혼식에서 온 가족이 30년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고 한다. [28]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의 3영걸이라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3명 중 누구를 닮았는지로 정치인이나 기업인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신분과 외모에 컴플렉스가 많았던 히데요시, 최종 승자이지만 음흉하고 속이 검은 이미지가 강한 이에야스보다는 호방한 성격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장 적은 노부나가의 인기가 제일 높기에 노부나가를 닮았다는 게 대개 최고의 칭찬이기 마련. [29] 하시모토는 고이즈미의 게이오기주쿠대학 선배다. [30]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31] 참고로 그때 '가지가지' 드립을 치다가 질의를 하고 있던 간 나오토 당시 민주당 의원은 어이없다는 말투로 "총리도 참 가지가지 하시네요."라고 맞받아쳤다. [32] 쇼잔은 자민당 소장파 의원들이 탈당하여 만든 신자유클럽의 지지자였다. [33] 여담으로 원판 성우가 한국계 미국인 배우로 유명한 다니엘 헤니였다. 뭐, 한국인 캐릭터라는 고고도 한국계 미국인 배우 제이미 정이 녹음하고, 일본에서는 일본 성우 아사노 마스미가 녹음했지만 말이다. [34] 중선거구제 하에서의 지역구 [35]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36] 소선거구제 하에서의 지역구 [37] 2차 내각. [38] 3차 내각. [39] 원본은 2005년 부산광역시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 기간에 있었던 한-일 정상회담 당시 찍은 사진이다. [40] 물론 고이즈미는 현재 80대 초반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 후진타오 전 주석, 마틴 스콜세지, 폴 매카트니 등과 비슷한 연령대다. 해당 인물들 전부 지금은 백발이 되고 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