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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연립여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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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우회 (1973.3.10.~1979.10.26.) |
자유민주연합 (1998.2.25.~2001.9.3.) |
더불어시민당 (2020.3.8.~2020.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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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신당 (개별 합류,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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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C]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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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국민연합 (개별 합류, 2004)[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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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C] (일괄 합류, 2006) |
자유민주연합 | |
<colcolor=#1B5B40,#289020> 영문명 | <colbgcolor=#fff,#1f2023>United Liberal Democrats (ULD) |
등록 약칭 | 자민련 |
1차 창당일 | 1995년 3월 30일 ( 민주자유당에서 분당) |
2차 창당일 | 1995년 5월 31일 (자유민주연합과 신민당의 신설합당) |
해산일 | 2006년 3월 10일 (해산 직후 한나라당에 일괄 합류)[7] |
선행 조직 |
[[민주자유당| |
중앙당사 |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로 70 ( 신수동, 인산빌딩[8]) |
의석 수 |
1석 / 299석 (해산 직전)
|
대표 | 김학원 / 3선 (15-17대) |
원내대표 | 김낙성 / 초선 (17대) |
사무총장 | 권영백 |
정책위의장 | 류근찬 / 초선 (17대) |
당색 |
초록색 (#1B5B40)
|
연두색 (#289020)
|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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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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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련의 당색(黨色)과 로고를 확인할 수 있는 사진들[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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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을 중심으로 창당한 정당으로, 사실상 충청 지역주의[12]에 기반한 정당이었다. 이후 2012년까지 이어지는 충청권 보수정당의 대표주자이자[13] 헌정 사상 존재했던 제3지대 정당 중에서 가장 성공했던 당 중 하나로[14] 꼽힌다. 이념적 성향은 자유민주주의, 보수주의.[15]
자민련의 '련'은 기저[16]에서 연합의 제1음절과 같은 聯을 쓴다. 한국어 음소배열론 규칙에 따라 어두 초성 ㄹ은 금지되는데[17] 이에 따라 연합, 연대 등에서 표면형으로 ㄹ이 탈락된 [연]이 도출된다. 그러나 어두환경이 아닌 경우 기저형의 두음이 탈락할 이유가 없으므로 '한총련', '자민련' 등에서는 탈락하지 않은 형태로 실현된다.[18] 다만, 한국어의 음운규칙 중 자음조화로 인해 발음 후보형은 [자민년] 혹은 [자밀련]으로 경합하나, 실제발음형은 [자민년]으로 되는 경우가 많았다. [19]
2. 강령 및 기본정책
우리는 근대화로 이룩된 광복 50년의 국가저력을 바탕으로 하여 의회민주정치를 확립하고 민족 재도약의 웅대한 역정을 펼쳐야 할 신세기 앞에 다가서 있다. 여기, 우리 자유민주연합은 이 시대의 소명을 수행할 가장 책임있는 정치세력으로서 의회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이념을 토대로 모두가 훈훈하고 보람있게 사는 선진문화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민족 대통합의 위업을 이루어 낼 것을 다짐하면서 우리의 강령을 밝힌다.
1. 우리는 의원내각제를 추진하여 권력의 독선과 전횡을 막고 의회의 권능을 확립하여 주권재민의 참된 책임정치를 실현한다.
2. 우리는 완벽한 지방자치의 실시로 주민자치의 시대를 열고 지방의 특색과 토양에 맞는 생활정치를 실천한다.
3. 우리는 질 높고 안정된 성장 속에서 중산층의 권익을 보호∙신장하고 농어민∙노동자 및 저소득층 모두의 중산층화를 위하여 지원과 복지를 확충한다.
4. 무한경쟁시대에 대응하여 국제경쟁력 강화를 도모하고 정보화시대, 고도지식산업사회에 부응키 위하여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진흥시킨다.
5. 우리는 도덕과 신의가 지켜지며 자율과 책임이 강조되는 사회를 건설하여 모두가 서로 믿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게 한다.
6. 우리는 교육의 기본을 인성의 함양에 두고 교육의 자율화로 개성과 창의를 제고하며 문화예술의 창달에 진력한다.
7. 우리는 민족에 대한 존엄과 사랑을 견지하는 가운데 자유민주체제를 토대로 한 평화통일을 차분하게 추구한다.
8. 우리는 안보를 굳건히 하고 평화와 번영을 위한 능동적 외교로 국제사회에서 성숙한 성원이 된다.
2. 우리는 완벽한 지방자치의 실시로 주민자치의 시대를 열고 지방의 특색과 토양에 맞는 생활정치를 실천한다.
3. 우리는 질 높고 안정된 성장 속에서 중산층의 권익을 보호∙신장하고 농어민∙노동자 및 저소득층 모두의 중산층화를 위하여 지원과 복지를 확충한다.
4. 무한경쟁시대에 대응하여 국제경쟁력 강화를 도모하고 정보화시대, 고도지식산업사회에 부응키 위하여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진흥시킨다.
5. 우리는 도덕과 신의가 지켜지며 자율과 책임이 강조되는 사회를 건설하여 모두가 서로 믿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게 한다.
6. 우리는 교육의 기본을 인성의 함양에 두고 교육의 자율화로 개성과 창의를 제고하며 문화예술의 창달에 진력한다.
7. 우리는 민족에 대한 존엄과 사랑을 견지하는 가운데 자유민주체제를 토대로 한 평화통일을 차분하게 추구한다.
8. 우리는 안보를 굳건히 하고 평화와 번영을 위한 능동적 외교로 국제사회에서 성숙한 성원이 된다.
기본정책 10가지
책임정치의 실현
경제정의의 실현
중소기업의 육성
국제화, 개방화를 대비한 농림수산업의 진흥
교육 개혁과 문화의 창달
창조적인 연구와 과학기술 진흥의 지원
국토개발의 질적 전환과 균형 있는 지방사회 발전
안정된 복지사회 구현
환경복지와 환경창조의 사회 실현
외교주권의 확보와 민주평화통일
경제정의의 실현
중소기업의 육성
국제화, 개방화를 대비한 농림수산업의 진흥
교육 개혁과 문화의 창달
창조적인 연구와 과학기술 진흥의 지원
국토개발의 질적 전환과 균형 있는 지방사회 발전
안정된 복지사회 구현
환경복지와 환경창조의 사회 실현
외교주권의 확보와 민주평화통일
3. 역사
1995년 3월 30일에 창당돼 2006년 3월 10일까지 11년간 존속한 정당이었다. 한나라당이 약 14년 2개월 21일[20] 존속하여 장수 기록을 깼지만, 2004년 3월 23일에 한나라당이 상징을 변경한 것을 감안하면 상징의 지속성 등의 정체성은 더 길었던 정당이다.[21] 굳이 '당'이라고 하지 않고 '연합'이라고 한 까닭은 민주자유당에서 분당돼서 나왔는데 자유민주당이라고 하면 구분이 잘 안 될 것이고 일본 자민당의 한국 내 부정적인 이미지가 전이될 가능성이 있어서 자유민주연합이 당명으로 결정되었을 수도 있다.[22]3.1. 창당과 1회 지선의 돌풍
1994년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인해 민정계[23]+민주계[24]+공화계[25] 크게 3계파로 구성돼 있었다. 그런데 YS가 대통령이 된 이후 민주계가 높은 정권 지지율을 등에 업고 본격적인 당권 장악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민주계의 젊은 의원들은 1994년 말 당시 민자당 대표위원이던 김종필을 '개혁 정권에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 인사'라고 몰아세우며 강력하게 퇴진을 주장했다. 믿었던 YS마저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김종필 대표위원은 1995년 1월 자신을 따르는 공화계 의원들을 데리고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했다. 여기에 민주계에 밀렸다고 생각한 민정계 일부가 가담했다.자민련은 당시 김종필 총재의 '당 대표 쫓아내는 게 세계화냐', '다른 지역에서 충청도를 핫바지로 보고 있다' 등의 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충청도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핫바지론'[26]과 '북한 쌀 보내기 결사 반대'[27], '문민정부는 사이비 보수, 내가 원조 보수다'라는 '원조보수론' 등을 무기로 강원도와 수도권 보수층의 민심을 얻어냈다. 당시 선거 직전 노태우 대통령의 처남인 김복동의 신민당과 합당하는 등 4·5공, 노태우 세력을 대거 영입함으로써 당시 PK 정권이라 불리던 YS 집권기 소외감을 느끼던 TK[28] 지역을 공략했다.
1995년에 열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은 대전과 충남의 광역단체장 선거를 압도적인 격차로 승리하고 기초단체장을 석권하여[29] 휩쓸면서 신민주공화당에 이은 충남권의 맹주가 부활했음을 증명해냈다. 다만, 이때도 신민주공화당 시절과 비슷하게 충북에서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대전과 충남의 광역단체장 선거에선 각각 63%, 67%의 득표율로 민주자유당과 민주당을 가볍게 제쳤지만 충북에서는 겨우 36% 득표에 그쳐 고작 10%대 격차로 승리하였고 기초단체장 선거는 아예 11곳 중 청주와 청원 단 2곳밖에 승리하지 못하였다.[30][31]
충청권 이외 지역의 기초단체장 선거에선 강원과 대구에서 1명씩 당선자를 낸 것 이외에는 성과가 없었지만, 강원도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최각규 후보가 무려 65%를 득표해 압도적인 격차로 승리하면서 민주자유당을 관광보냈다. 이외에도 당선자를 내진 못했지만 경기 지역에서 어느 정도 선전했고 대구에서 민주자유당을 제치고 무소속 후보에 이은 2위를 차지하면서 다음 해 열릴 15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녹색 바람을 예고했다.
3.2. 15대 총선과 전성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는 가히 자민련의 전성기였다. 충청권 가운데 대전에선 7석을 모두 싹쓸이했고, 충남에선 13석 중 12석을 석권했으며, 충북에서도 8석 중 5석을 획득하면서 전체 충청권 의석 중 28석 중 24석을 쓸어담았다. 지난 1회 지선에서는 대전과 충남에서만 확실한 승리를 거뒀지만 이번엔 충북 지역까지 크게 선전하면서 더 이상 충남권에 한정되지 않은 충청권의 맹주로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32] 이것만으로도 교섭단체 구성 요건인 20명을 채우기 때문에, 충분한 돌풍이다. 하지만 15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대선전은 충청권의 석권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당시 반 신한국 비 민 주 정서가 팽배했던 T K 지역에 자민련은 원조보수론을 내걸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에 문민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던 대구광역시에서 녹색 바람이 불었고 13석 중 8석을 휩쓸어 1당 자리를 차지했다.[33] 다만, 경상북도는 자민련의 바람이 그렇게 거세지 않았고 신한국당이 11석으로 무난히 1당을 차지하면서 자민련은 경상북도에서 2석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그외 지역에서는 경기와 강원에서 의석을 배출해냈다. 경기도에서는 신민주공화당 시절부터 지지세가 있던 지역들을 잘 지켜내면서 5석을 얻어 선전했고 강원에서는 1회 지선보다 상대적으로 부진했지만 2석을 확보해냈다.결과적으로 충청권에서 24석[34], 비충청권에서 17석[35], 전국구 9석으로 총 50명의 당선자를 내게 되었고 DJ의 새정치국민회의 다음가는 제2야당의 지위를 굳히며 리즈 시절을 찍게 된다. 다만 전국구에서 자민련의 막장 공천이 드러났다. 보통이면 젊은 의원이나 정치신인에게 주는 전국구 의원 상위 순번을 정상구, 정상천 등 줄줄이, 민정·공화계의 노장들로 채워버리는 짓[36]을 했다.[37] 반면 신한국당·국민회의는 비교적 젊은 정치 신인들에 전국구 공천을 주었다.[38]
자민련 소속 인사들을 보면 대다수가 민정공화계이거나 관료, 군인 출신들이 많았다. 15대 총선 당시 자민련의 구성을 살펴보면 총재 김종필을 주축으로 한 공화계[39], 민정계[40], 관료 출신[41], 유명인사[42], 지역 유지 출신[43] 등을 위주로 이루어졌고, 극히 일부의 이원범 같은 민주계 인사가 가담한 경우가 있었다.
황학수 정도가 신진 인사였다고는 하는데, 막상 이상만과 김고성은 훗날 김용환을 따라 희망의한국신당으로 2000년에 이탈하면서 무소속으로 이탈한다. 보면 알겠지만 과거 운동권에서 종사했던 인물이나 젊은 인물들은 전혀 없었다. 그나마 젊은 사람이 44세의 정우택[44]이었으니 장기적으로 생존하기에는 힘들어보였다.
3.3. DJP연합과 2회 지선의 약진
15대 총선이 끝나고 바로 다음 해인 1997년 치러질 15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DJ와 JP는 각각 단독 집권이 어렵다는 공통 인식을 갖게 되었고[45], 김종필과 자민련은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로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하고, 집권 시에 내각을 공동으로 구성한다는 일명 DJP연합에 합의해 15대 대선에서 DJ를 지원했다.[46] 이후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자민련은 공동 여당이 되었다.[47] 반대로 한나라당(신한국당)은 이인제가 경선 불복을 선언하면서 국민신당을 창당해 출마하는 바람에 표가 분산돼 버렸다. 마치 10여 년 전 김영삼, 김대중이 서로 아웅다웅하던 통에 표가 분산되고 그 결과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과 비슷한 일이 다시 재현된 것이다.정권 교체 후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의 국무총리 3명을 배출하고[48] 국무위원 다수를 배당받는 등 명실상부한 공동여당으로 위세를 떨쳤다. 이한동[49], 김학원[50], 이완구[51], 노승우, 백남치, 이상현, 오세응[52], 이택석, 김종호[53] 등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대거 탈당하고 자민련으로 옮겨온 것도 이때다.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열린 1998년의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DJP연합의 연장선상에서 국민회의와 전 지역에서 후보를 단일화하였고[54] 이런 연합공천의 위력으로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6공화국 출범 이후 유례없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55] 자민련은 자신들의 텃밭인 대전광역시, 충청북도에서 각각 73%, 74%를 득표해 한나라당을 가볍게 눌렀고 충청남도에서는 심대평 후보가 84%를 득표해 재선에 성공하면서 영남과 호남에 결코 밀리지 않을 수준의 정당 지지도를 보여주었다. 수도권에서는 후보 단일화로 인한 효과가 가장 컸고 자민련은 인천광역시에서도 압도적인 격차로 승리했다.[56] 강원도에서도 무소속 후보 난립이 아니었으면 승리했을 것이다. 이로서 여당과 야당이 국토 좌우를 딱 나눠먹은 모양새가 되었다. 합산 지지율 시· 도지사 선거 49.8%, 시·도 의원 49.6%, 시장· 군수·구청장 선거 45%. 부산에서도 보궐선거에서 김동주 후보가 당선되었다.[57]
이 시기에는 대선과 지방선거의 연이은 승리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간의 합당이 거론[58]될 정도로 두 당 사이의 관계가 매우 화기애애했다. 오히려 한나라당이 김종필 국무총리 인준안을 부결시키는 등 자민련에 대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공세를 펼치고, 서로서로 의원 빼가기를 하는 등 날선 각을 세웠다.
3.4. 균열과 16대 총선 참패
그러나 DJP연합이 2년차에 접어들던 1999년 말에 자민련과 국민회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다.[59] 두 당은 내각제 개헌, 햇볕정책, 남북정상회담, 재벌개혁 등 여러 분야에서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가 7월 내각제 개헌 추진 포기를 합의하자 자민련 내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고, 공동정권 철수 같은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왔다.[60] 이런 연장선상에서 결국 합당은 물 건너 갔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의 양당 연합공천이 무산되었다.[61][62][63]그러나 자민련이 연합공천을 거부하고 호기롭게 16대 총선에 나선 결과는 대참패였다.
일단 비충청권 지역에선 모조리 망했다.[64][65] 16대 총선에서 비충청권 지역구에서 승리한 자민련 후보는 경기도 연천군·포천군의 이한동 총재 단 한 명뿐이었다.[66] 김대중 정부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비충청권 지역, 특히 영남 지역의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제1야당인 한나라당에 몰표를 던지고 연립정권의 공동여당이었던 자민련은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67] 자민련이 15대 총선 이후 국민회의와 연대하면서, 지지자들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는 여론이 컸던 것이다.[68] 이들은 DJP연합이 시작된 이후부터 자민련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들은 한나라당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69]
그러면 충청권은 석권했느냐? 그렇지도 않았다. 연합공천이 무산된 이후 새정치국민회의는 새천년민주당으로 당을 개편하고 충청권 출신의 유력 대권주자 이인제를 앞세워 충청권 공략에 나선다.[70]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의 분열을 틈타 공천을 시도해 선방. 반면 자민련은 대전 3석, 충남 6석, 충북 2석에 그치며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71] 자신들의 텃밭인 충청권에서조차 절반도 안 되는 11석을 얻는 데 그쳤다.[72]
결국 전국구(비례대표) 5석을 포함하여 총 17석을 획득하면서 15대 총선의 50석에 비하면 1/3로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20석도 얻지 못하여 원내 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는 굴욕[73]을 겪게 된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도 피해를 안 받은 것이 아니었다. 연합공천 무산으로 자민련에 돌아갈 의석들이 한나라당으로 가버린 격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민주당과 자민련이 연합공천 실패로 날린 의석 수를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면 무려 27석[74]이나 날려먹었다. 만약 민주당과 자민련이 2회 지선과 동일하게[75] 연합공천을 하고 비례대표 배분율을 2:1로 했다 가정하면 자민련은 충청권 24석 중 23석[76], 강원 6석, 인천 9석, 경북 2석, 비례 8석으로 총합 48석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외에는 한나라당 107석, 새천년민주당 111석, 민주국민당 2석, 무소속 5석이 된다. 이 때 연합공천 무산으로 인한 여야의 의석 수 변화를 보면 여당 163석 → 136석[77], 야당 110석 → 137석[78]으로 민주당과 자민련이 연합공천 무산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연합공천 실패로 인해 당시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안정적 과반 확보 실패로 국정 운영에 난항을 겪게 되었고, 자민련은 교섭단체 구성 실패와 더불어 충청권 이외 지역에서 사실상 기반이 전멸당하는 결과를 받게 되었다.[79]
3.5. 연정 파탄과 3회 지선 대패
그러나 처참한 총선 결과로 인해 자민련과 민주당은 둘 다 본인들 코가 석 자라서 반목이 불가능해졌기에 연정은 사실상 지속되었고, 2000년 12월 말, 민주당 측이 '연정은 아직 깨진 게 아니다'면서 의원 4명을 꿔주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진다.[80] 이때 송석찬 의원이 한 그 유명한 "여당으로 한 마리 연어가 되어 돌아오겠다."란 말이 두고두고 회자되기도 했다.[81] 결국 자민련은 아슬아슬하게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할 수 있었고[82], 이에 다시 만족한 자민련은 김대중 대통령 임기 말까지 연정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83] 하지만 연정 후에도 민주당 115석+자민련 20석=135석으로 의석 수 절반(137석)에서 2석 모자랐던 민주당은 민주국민당(2석)[84]과 무소속 정몽준 의원[85]에게도 손을 벌려야 했고, 민국당의 한승수 의원(강원 춘천)을 외교통상부장관으로 입각시키며 간신히 원내 과반수를 채웠다. 사실 보면 알겠지만, 국민의 정부 중기 쯤부터는 사실상 내각책임제처럼 운영된 감이 있다.이렇게 그럭저럭 유지되던 DJP연합은 2001년 9월 3일,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86]에 자민련이 동조하면서[87]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결국 붕괴되고 만다.[88] 자민련으로 갔던 민주당 의원 4명(송석찬, 배기선, 장재식, 송영진)은 민주당으로 원대복귀했으며, 입각했던 자민련 소속 장관(농림부 한갑수, 건설교통부 김용채, 해양수산부 정우택)들도 사퇴하였다.[89] 그러나 자민련 총재인 이한동 국무총리는 오히려 내각 잔류를 결정했고, 결국 자민련은 극단적으로 현직 총재이자 국무총리인 이한동을 당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한다.[90] DJP연합이 붕괴되면서 민주당은 국민의 정부 말기 들어서 국정운영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고, 자민련은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하며 당의 존립 여부조차 위태해지게 된다.
이런 자민련의 좋지 않은 상황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 이전까지 비충청권 지역 중 어느 정도 선방하던 강원도와 인천광역시에서 한나라당에 싹쓸이 패배를 당했으며, 텃밭이었던 충청북도[91]와 대전광역시마저 한나라당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나마 대전에서는 어느 정도 비볐지만[92], 충북에서는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차이로 대패하면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충청남도만 간신히 사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이는 자민련이 이후부터 대전 - 충남 지역에 완전히 고립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93]
3.6. 제16대 대통령 선거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한나라당과의 연대론과 독자출마설 등 여러 전망이 나오고 있었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단일화를 성사시키면서, 보수 진영에서도 JP와 이회창 전 총재의 정치적 연합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갔다. 그러나 국무총리 시절 인준안 거부, 자민련 의원 빼가기, 2000년 총선에서의 해프닝 등 한나라당에도 크게 반기를 들고 있던 김종필은 끝내 이회창에 대한 지지를 거부했다. 16대 대선 정국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 링크 참조. 이회창 전 총재와 서청원 대표가 선거 막판까지 도와줄 것을 요청했으나, JP는 끝까지 거부하고 대선 나흘 전인 12월 15일 "급진세력도 대통령이 될 수 없지만 한나라당도 자격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JP와 한나라당의 연대 실패로 이완구, 함석재, 이재선, 이양희 의원이 자민련을 탈당하고 한나라당으로 합류했다.[94]결과는 노무현 후보가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JP가 노무현을 음지에서 도왔다는 평도 나왔다. 이에 대한 김종필의 견해는 "역사에 가정이라는 것은 없으며,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도 그의 성취이고 국민이 노무현을 선택하면 그건 그것대로 국운"이었다.
3.7. 탄핵의 역풍과 17대 총선
탄핵 열풍이 몰아치던 2004년, 총재이자 당의 구심점이던 JP는 마지막 순간까지 탄핵을 원론적인 측면에서 반대했으나 소속 당원들은 일제히 탄핵에 찬성했다.[95] 이때 JP를 제외하면 민정계 출신의 비례대표 김종호 의원만이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96][97] 내각제 합의 등이 뒤에서 오간 거 아니냔 관측들도 있었는데, 어차피 탄핵과 마찬가지로 내각제도 정족수의 2/3 이상 동의로 개헌이 가능했었다.하지만 탄핵 역풍은 예상보다 거셌고, 국민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내각제의 ㄴ자도 안 꺼내면서[98] 자민련이 가장 피를 봤다. 이후 열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10선에 도전하던[99] 당 총재 김종필이 무려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선 상황에서 득표율 2.82%를 얻어 딱 0.18%차로 3%를 채우지 못해 비례대표 의석을 1석도 획득하지 못하는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실 지역구 의석이 5석 이상인 정당은 3% 제한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저 득표율로도 비례대표 당선자를 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단 한 석이 모자라면서 실패하여 더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17대 총선에서는 비례대표에 50% 이상의 여성을 홀수번에 꼭 배정하도록, 사실상 1번에는 여성을 앉히도록 하는 정당법이 개정되었는데, 김종필은 본인을 1번으로 공천하고[100] 법까지 어겨가면서 뒷번호도 당장 당선이 급한 남성 정치인들로 채워 버린다. 대표적으로 비례대표 2번이 경남기업 회장인 성완종이었다. 어쨌든 이런 결과에 충격을 받은 김종필은 얼마 뒤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탈당했다.
결국 자민련은 충청권 지역정당임에도 불구하고 4석의 충청권 지역구 당선자로 막을 내렸다.[101] 그렇게 한때의 공동여당이자 제2 야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은 함께 몰락한다. 이 선거로 인해 양당은 원내 제3당의 자리를 민주노동당에게 내준다.
3.8. 분당과 소멸
김종필의 정계 은퇴 및 탈당으로 자민련은 당 내 구심점이 사라졌고, 이인제 - 조부영 임시 지도부를 거쳐 김학원 의원이 대표최고위원에 올랐다. (총재직 폐지) 이후 한나라당 들러리 정도로 존속하다가, 부총재이자 충남도지사였던 심대평이 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을 대신하는 중부권신당인 국민중심당 창당에 나서면서 급속히 무너진다. 자민련은 결국 중부권신당에 흡수되는 식의 합당 합의를 했으나, 이 합의가 파기되면서 지역구 의원 4명 중 당 대표를 제외한 3명이 탈당의 방식으로 중부권신당으로 가버렸다. 결국 자민련은 마지막 의원 1명인 김학원 대표가 조직, 당 자산 등을 갖고 한나라당과 합당[102]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형식은 한나라당과의 합당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중심당이 자민련의 후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후 이회창과 심대평을 중심으로 2000년대 후반 충청 지역을 잠시 석권했던 자유선진당 - 선진통일당,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국민중심연합의 전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2010년대 들어선 선진통일당도 2012년 새누리당과 흡수합당되면서 충청지역 기반정당은 사실상 사라졌고, 구성원 전원이 현재는 민주당계 정당, 보수정당 계열으로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103]
그러다가 2020년에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자유민주연합, 심대평의 국민중심당, 이회창의 자유선진당, 선진통일당에서 당원 생활을 했던 박석우라는 골수 충청지역 기반 정당 출신 인물이 충청지역 기반정당 소속이었던 일부 사람들을 끌어모아 독자적으로 충청의미래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미약하게나마[104] 충청지역 기반정당이 부활하였다. 박석우 대표는 자유선진당에서 상임고문을 맡은 적이 있다.
4. 역대 지도부
총재 및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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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 |||
<rowcolor=#289020> 제1·2대 김종필 |
권한대행 김복동 |
제3대 박태준 |
권한대행·제4대 이한동 |
|
<rowcolor=#289020> 제5대 김종필 |
권한대행 이인제 |
비대위 조부영 |
||
대표최고위원 | ||||
<rowcolor=#289020> 제6·7대 김학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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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대표 ▶
국민중심당 대표 ▶ 희망의한국신당 대표 ▶ 하나로국민연합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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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이름 | 직책 | 임기 |
초대 | 김종필 | 총재 | 1995년 3월 30일 ~ 1997년 6월 23일 |
제2대 | 1997년 6월 24일 ~ 1997년 11월 21일 | ||
제3대 | 박태준 | 1997년 11월 22일 ~ 2000년 2월 8일[105] | |
제4대 | 이한동 | 2000년 2월 9일 ~ 2001년 10월 8일[106] | |
제5대 | 김종필 | 2001년 10월 9일 ~ 2004년 4월 16일 | |
권한대행 | 이인제 | 2004년 4월 16일 ~ 2004년 4월 20일 | |
비대위 | 조부영 | 비상대책위원장 | 2004년 4월 21일 ~ 2004년 6월 7일 |
제6대 | 김학원 | 대표최고위원 | 2004년 6월 8일 ~ 2006년 2월 9일 |
제7대 | 2006년 2월 10일 ~ 2006년 3월 10일 |
원내총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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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한영수 |
제2대 이정무 |
제3대 구천서 |
제4대 강창희 |
제5대 이긍규 |
|
제6대 오장섭 |
제7대 이양희 |
제8대 이완구 |
제9대 김학원 |
제10대 김낙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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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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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부영 |
제2대 김용환 |
제3대 강창희 |
제4대 박구일 |
제5대 박준병 |
권한대행 이완구 |
제6대 김현욱 |
제7대 강창희 |
제8대 함석재 |
제9대 오장섭 |
|
제10대 이양희 |
제11대 오장섭 |
제12대 이봉학 |
제13대 권영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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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위원회 의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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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구일 |
제2대 허남훈 |
제3대 차수명 |
제4대 함석재 |
제5대 정우택 |
제6대 이재선 |
제7대 원철희 |
제8대 정우택 |
제9대 류근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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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민이
자세한 내용은 자민이 문서 참고하십시오.6. 여담
- 창당 후 한 번도 당명과 로고를 바꾸지 않았다.[107] 정당명을 자주 갈아치우는 한국 정치에서는 참 희귀한 경우. 덕분에 한나라당과 합당될 당시를 기준으로 존재했던 정당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같은 이름을 써온 정당으로 기록되었다.
- 자민련 이후 참여정부 시기엔 원내교섭단체를 이룬 제2야당은 없었으나[108],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각종 야당이 난립하고 특히 그 중 자유선진당이 제2야당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109] 이후 2016년엔 국민의당이 38석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가뿐히 넘기며 제2야당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다만 국민의당은 안철수라는 구심점과 기타 호남기반 정치인들이 뭉친 정당으로 자유민주연합-자유선진당과는 뿌리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충청도 지역보수 정당의 맥은 선진통일당에서 끊겼다는 것이 중론이다.[110][111] 이후부터 충청 지역은 반기문, 안희정, 양승조 등 그냥 충청 지역 정치인을 당을 가리지 않고 밀어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대체적으로 경합지역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수도권에서 젊은 층들이 충청권으로 많이 이주하면서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비교적 강해진 편이다.
- 구 자유민주연합의 핵심 인사들은 이후 시간이 흐른 2010년대에 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당적을 옮겨 본인들의 숙원 사업들 중 하나였던 박근혜의 대통령 취임을 이뤄냈으나 정작 그 박근혜 정부가 박근혜가 탄핵 당하고 구 자민련 중진 본인들과 함께 나란히 구속수사를 당하는 배드 엔딩으로 끝나면서 그마저도 거진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이로써 자유민주연합은 2024년 기준 구 자민련 핵심 인사들의 대부분이 이제 노령으로 사망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흑역사 정당의 오명을 벗지 못했다.
-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면서 충청도를 벗어나서는 영 힘을 못 쓴다는 자민련의 특성이 드러난 이후 지역 기반에만 안주해 특정 지역에서만 지지가 뚜렷한 정당을 가리켜 앞에 지역명을 붙인 'XX 자민련'이라는 조롱성 표현도 생겨났다. 1995년에 창당된 정당 이름으로 쓰인 고유 명사에서 현재에는 지역 기반에만 안주하고 전국 정당이 되지 못하는 정당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로 쓰이는 셈. 예를 들어 자민련이 사라진 후 충청을 기반으로 했던 자유선진당이 그러한 멸칭으로 불리었었고, 국민의당(이후 민주평화당, 대안신당, 민생당)과 자유한국당(이후 미래통합당, 국민의힘)이 각각 호남 자민련, TK 자민련으로 불리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민주당계 정당 또한 수도권과 충청권, 낙동강 벨트에서 대참패하여 밀릴때마다 호남 자민련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2006년의 민주당 또는 열린우리당, 이명박 정부 초기 및 18대 총선의 대통합민주신당 등. 바른정당이 바른정당 탈당사태 이후 합당전까지 지방선거에서 원희룡을 제외하곤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 없게 되자 눈물의 제주 자민련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112][113] 단, 자민련의 마지막이 비참해서 그렇지 초기 충청도는 물론 대구광역시, 경기도 북부, 강원도 일부를 아울렀던 초기 기세와 더불어 아직까지 그 어느 원내 3당 중에 자민련처럼 공동정권의 한 축에 활동한 당은 없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지역기반에 안주했다는 이유로 'XX 자민련' 이런 식으로 부르기에는 너무 가벼운 감이 없지 않다.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총수 김종필이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으나 그 김종필이 낙선하는 바람에 비례대표는 전멸했으며, 지역구 역시 단 4곳( 보령시·서천군 류근찬,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이인제, 부여군·청양군 김학원, 당진군 김낙성)만 당선되었고 TK의 자민련계 무소속 당선자를 합쳐 5석으로 처참한 꼴을 당했다.[114] 2021년의 정의당보다도 의석수가 적은 것이다. 단, 구조적으로는 정 반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차이가 큰데,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정의당은 지역구는 경기도 고양시 갑의 심상정만 당선되었고 나머지 5석은 전원 비례대표였으며 이 점은 애초에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원내진출한 이후 소위 진보정당들이 전국 단위 정당 지지율은 어느 정도 나왔지만 지역 기반은 거의 확보하지 못해 대부분의 의석을 비례대표에 의존한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반면 자민련의 경우 지역구에서는 당선자를 여럿 배출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정당 지지율(정당득표)가 안 나와서 비례대표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므로 상황 자체는 정 반대이다. 다만 17대 총선의 경우 자민련의 이름값때문에, 21대 총선의 경우 연동형 비례대표제 때문에 해당 정당이 좀 더 많은 의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처참히 무너졌다는 점 정도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차라리 이 현상들을 연관하여 의미를 찾는다면 자민련의 처참한 몰락과 민주노동당의 첫 원내진출(+단숨에 원내 3당 부상)이 같은 17대 국회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17대 총선에서 처음 도입된 1인 2표제의 영향력에 주목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특히 자민련의 경우 당의 몰락을 초래한 김종필의 낙선사태가 달라진 선거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충분히 연구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지 문제를 제기하는 쪽이 더 의미있을 것이다. 차라리 지역구(특히 자민련의 본진인 충청 지역의 선거구)에서라면 여전히 승산이 작지 않았던 거물인 김종필이 비례대표 명부로 들어간것 자체가 실수라는 것. 물론 반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미 한번 물려준 지역구를 도로 뺏어온다면 김종필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다른 당들은 대부분 (강제력이 없는 허수아비 규정이라도 충실히 지켜) 비례 1번(및 홀수 순번)을 여성으로 채우고 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나 정치 신인들을 상위순번에 배치하는 등 나름 비례대표제를 통하여 정치에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부응하려는 시도를 했던 반면, 유독 자민련은 한국 사람 누구나 다 아는 김종필이 딱! 비례 명단 1번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미 적지 않게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것.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비웃음을 면할 수 없다면 당의 구심점이던 김종필이라도 살아남는 쪽이 나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당시 자민련측에서는 '그래도 자민련'이고 '그래도 비례 1번'인데 설마 떨어지겠느냐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만 1인 2표제의 특성상 차라리 '낯선 지역구라도 3김의 한 축인 김종필의 개인기로 뚫는 것'이 '자민련이 전국적으로 3%의 지지율을 확보하는 것'보다 성공 가능성이 높았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지 않을까? 라는 지적이다.
- 새정치민주연합은 새정치연합이 공식 약칭이었으나, 비공식 약칭으로 새정연, 새정련, 새민련, 아니면 그냥 다 무시하고 민주당 등이 있었는데, 이 중 어감이 가장 이상한 새민련이 끝이 안 좋았던 자민련의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만들어낸 멸칭이었다. 당연히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새민련은 금기시되는 표현이었다.
- 의외로 대경권 출신 비보수계열 정치인들이 자민련 소속으로 많이 뛰었다. 특히 이 경향은 DJP연합 이후에 더 짙어졌는데, 이유는 박태준 전 국무총리의 자민련 입당과 함께 포항시를 비롯한 대경권에서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입당했기 때문. 게다가 이 당시 대경권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민주당의 지지세가 매우 약했기 때문에 그나마 연립 여당이면서 대경권에서 이름이 좀 먹히는 자민련으로 많이 활동했다.
- 민주자유당에서 떨어져 나와 자립에 성공한 자민련과 달리 자민련에서 분당한 정당들은 모두 실패했다. 하나로국민연합, 희망의한국신당은 거진 폭망 수준으로 떨어졌고[116], 국민중심당은 골수 자민련 지지 지역을 제외하고 기반을 흡수하지 못했다. 결국 국민중심당은 이회창의 자유선진당에 흡수 합당된다.[117]
7. 역대 선거결과
7.1. 대통령 선거
연도 | 선거명 | 후보자 | 득표 수(득표율) | 결과 |
1997년 | 15대 | 김대중 | 10,326,275 (40.27%) | 당선(1위)[118] |
7.2. 국회의원 선거
연도 | 선거명 | 지역구 | 비례 | 결과 | 비고 |
1996년 | 15대 | 41 / 253 (16.2%) | 9 / 46 (19.5%) | 50 / 299 (16.7%) | 원내 3당 |
2000년 | 16대 | 12 / 227 (5.2%) | 5 / 46 (10.8%) | 17 / 273 (6.2%) | 원내 3당 |
2004년 | 17대 | 4 / 243 (1.6%) | 0 / 56 (2.82%)[119] | 4 / 299 (1.3%) | 원내 5당 |
7.3. 지방선거
연도 | 선거명 | 광역단체장 | 기초단체장 | 광역의원 | 기초의원 |
1995년 | 1회 | 4 / 15 (26.7%) | 24 / 230 (10.4%) | 86 / 875 (9.8%) | 미실시 |
1998년 | 2회 | 4 / 16 (25.0%) | 29 / 232 (12.5%) | 82 / 616 (13.3%) | |
2002년 | 3회 | 1 / 16 (6.25%) | 16 / 232 (6.9%) | 33 / 682 (4.8%) |
7.4. 재보궐선거
연도 | 국회의원 | 광역단체장 | 기초단체장 | 광역의원 | 기초의원 |
1996년 4월 | 2 / 9 | ||||
1996년 9월 | 1 / 1 | ||||
1996년 10월 | 1 / 2 | ||||
1996년 11월 | 1 / 1 | ||||
1996년 11월 | 1 / 1 | ||||
1997년 3월 | 1 / 2 | ||||
1997년 3월 | 0 / 3 | ||||
1997년 7월 | 0 / 2 | ||||
1997년 9월 | 1 / 1 | ||||
1998년 4월 | 0 / 4 | ||||
1998년 7월 | 1 / 7 | ||||
1998년 11월 | 0 / 1 | ||||
1999년 3월 | 1 / 2 | 0 / 1 | |||
1999년 6월 | 0 / 2 | ||||
1999년 6월 | 1 / 1 | ||||
1999년 6월 | 0 / 1 | ||||
1999년 8월 | 0 / 1 | ||||
1999년 9월 | 0 / 1 | ||||
1999년 9월 | 0 / 2 | ||||
1999년 10월 | 0 / 1 | ||||
1999년 10월 | 0 / 1 | ||||
1999년 11월 | 1 / 1 | ||||
1999년 12월 | 0 / 2 | ||||
2000년 1월 | 0 / 2 | ||||
2000년 6월 | 2 / 7 | 0 / 32 | 0 / 57[a] | ||
2000년 10월 | 1 / 2 | 1 / 9 | 0 / 37[a] | ||
2001년 4월 | 1 / 7 | 0 / 6 | 0 / 14[a] | ||
2001년 10월 | 0 / 3 | ||||
2002년 8월 | 0 / 13 | ||||
2002년 12월 | 0 / 1 | 0 / 1 | 0 / 3 | 0 / 4[a] | |
2003년 4월 | 0 / 3 | 0 / 2 | 1 / 4 | 0 / 23[a] | |
2003년 10월 | 2 / 4 | 0 / 9 | 0 / 66[a] | ||
2004년 6월 | 0 / 4 | 0 / 19 | 1 / 38 | 0 / 53[a] |
8. 당가
당가는 1절과 2절로 나눠졌다.
자유민주연합의 깃발을 들고
경륜과 젊음이 여기 뭉쳤다
우리 길은 하나다 이길 뿐이다
사랑과 믿음으로 모두가 하나되어
찬란한 신세기를 열어나가자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영원하여라 아
자유민주연합의 깃발을 들고
패기와 슬기가 여기 뭉쳤다
우리 길은 하나다 이길 뿐이다
미래를 희망으로 이끄는 주역으로
찬란한 신세기를 열어나가자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영원하여라
경륜과 젊음이 여기 뭉쳤다
우리 길은 하나다 이길 뿐이다
사랑과 믿음으로 모두가 하나되어
찬란한 신세기를 열어나가자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영원하여라 아
자유민주연합의 깃발을 들고
패기와 슬기가 여기 뭉쳤다
우리 길은 하나다 이길 뿐이다
미래를 희망으로 이끄는 주역으로
찬란한 신세기를 열어나가자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영원하여라
9. 갤러리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선거 포스터 (1996) |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선거 포스터 (2000) |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선거 포스터 (2004) |
10. 관련 문서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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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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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1b5b40,#ddd> 일생 | <colbgcolor=#fff,#1f2023> 일생 · 평가 | |
가족 | 아내 박영옥 · 형 김종락 · 형 김종익 | ||
역대 선거 | 제13대 대통령 선거 | ||
사건사고 | 사건사고 및 논란 · 5.16 군사정변 · 4대 의혹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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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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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1951.12.~1960.4.) 한국민주당 (1948.7.~1949.2.) 민주국민당 (1949.2.~1949.11.) 대한국민당 (1949.11.~1951.12.) |
장면 내각 | 민주당 (1960.8.~1961.5.) | |
박정희 정부 |
민주공화당 (1963.12.~1979.10.) 유신정우회^[1]^ (1973.3.~1979.10.) |
|
전두환 정부 | 민주정의당 (1981.1.~1988.2.) | |
노태우 정부 | 민주정의당 (1988.2.~1990.1.) → 민주자유당 (1990.1.~1992.10.) | |
문민정부 | 민주자유당 (1993.2.~1995.12.) → 신한국당 (1995.12.~1997.11.) | |
국민의 정부 |
새정치국민회의 (1998.2.~2000.1.) →
새천년민주당 (2000.1.~2002.5.) 자유민주연합 (1998.2.~2001.9.) 민주국민당 (2001.4.~2001.9.) |
|
참여정부 | 새천년민주당 (2003.2.~2003.9.) → 열린우리당 (2004.5.~2007.2.) | |
이명박 정부 | 한나라당 (2008.2.~2012.2.) → 새누리당 (2012.2.~2013.2.) | |
박근혜 정부 | 새누리당 (2013.2.~2017.2) → 자유한국당 (2017.2.~2017.3.) | |
문재인 정부 |
더불어민주당 (2017.5.~2022.5.) 더불어시민당^[A]^ (2020.3.~2020.5.) |
|
윤석열 정부 |
국민의힘 (2022.5.~현재) 국민의미래^[A]^ (2024.2.~202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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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섭단체. [A] 비례대표 득표용 위성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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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자민련과의 합당 반대파가 탈당. 이듬해 무정파전국연합으로 개칭.
[2]
김허남 등.
[B]
2002년 자민련을 탈당했으나, 2004년 자진해산 후 자민련으로 개별 입당하는 방식으로 복당.
[C]
해산 이후 한나라당으로 당원과 당 재산을 일괄 귀속시키기로 합의했으나, 선관위의 유권해석에 따라 재산 귀속은 무산되었다.
[B]
[C]
[7]
참조.
다만 당 재산은 귀속되지 못했다.
[8]
現 화수목빌딩. 한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였다가 2006년 자민련 해산과 함께 매각하였다. 2016년에 리모델링을 해서 자민련 당사시절과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자민련이 해산되면서 발생한 52억원의 당사 매각대금은 당 사무처 직원의 퇴직금 지급 및 부채상환에 쓰였으며 남은 금액 수억원은 다시 사회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화수목빌딩의 5층에는 정치성향이 정반대인
한겨레신문의 출판자회사가 들어와 있다.
[9]
진한 초록색을 주로 사용했지만, 간혹 청록색이나 연두색을 쓰는 등 당색이 통일되지 못한 면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당측에선
김종필 총재가 선호하는 진한 초록을 주로 썼고, 시도당위원회 등에서는 연두색도 간혹 썼다. 오른쪽 사진의 인물은
이인제 당시
총재 권한대행.
[10]
첫 번째 제2야당은
통일국민당.
[11]
유신정우회는 아예 대통령에게 지명되는 의원들이라 다소 애매했다.
더불어시민당과
국민의미래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사실상 본체였던데다가 선거가 끝난 직후 흡수합당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별개의 정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2]
정확히는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 반면
충청북도는 무려 6개의
광역자치단체와 접하며 국토의 정중앙에 있기 때문에 외지인의 유입이 많아 충청
지역주의가 힘을 쓰기 어려웠다.
[13]
이전 버전에는 원조라고 지칭됐지만 원조는 따로 있다. 1987년
김종필이 창당했던
신민주공화당이 충청권 보수정당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14]
자민련 외에 그럭저럭 성공했던 제3지대 정당으로는
1992년에 등장했던
정주영의
통일국민당,
2016년에 등장했던
안철수의
국민의당 등이 있다.
[15]
보수주의를 표방하지만 의외로 반(反)신한국당에 가깝고[127], 자민련이 살아있는 동안 아주 가끔은 농담삼아 '반(半)신한국당'으로 불렸다. 그래서 자민련과 자민련의 후신인
자유선진당 모두 해체 후 한나라당으로 안 가고
민주
당계
정
당으로 넘어간 의원(
권선택 전
대전광역시장,
류근찬 전 의원 등)도 많이 있다.
[16]
언어학에서 말하는 두뇌에 저장되어있는 어휘단위.
[17]
흔히 일반적으로
두음법칙이라 한다.
[18]
일반인들은 "'ㄹ'이 살아난다" 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듯한데, 생성음운론이든 최적성이론이든 어떤 이론틀에서도 기저의 ㄹ이 사라졌다 나타나거나 없던 게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난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19]
한편, 각종 단체 이름에 들어간 '연합(聯合)', '연대(連帶)' 등을 약칭에서 이런 법칙을 무시하고 원래 명칭의 발음 그대로 '연'으로 적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는
한자가 상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표면형이 두음법칙의 적용 결과인지 여부가 불투명해진 까닭에 기저형 자체를 /연/으로 재분석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유사한 사례로 ㄴ삽입 현상이 있다. 한자어 끼리의 결합과 어종 혼합 결합 사이에는 ㄴ삽입 빈도가 달라지는데 2000년대 이후 이러한 빈도 차이가 줄고 있다. 어종의 구분이 희박해지고 있다는 논증의 근거로 사용된다
#.
[20]
1997년 11월 21일~ 2012년 2월 12일
[21]
광복 이후 국내에서 오래 같은 당명으로 존속한
정당은
1963년
2월 26일 창당하여 1980년 8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민주공화당(17년 8개월)이고, 2위는 한나라당이다. 3위는
신민당으로 13년 8개월, 1969년의 재창당을 고려하면 11년 1개월 존속했다. 4위는
국제녹색당(2007~2020), 5위는
민주노동당(2000~2011)이다. 물론 국내 기준. 미국과 서유럽 등의 민주주의 선진국에선 한 정당명으로 역사가 백 년이 넘어가는 정당도 여럿 있다.
[22]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당'으로 끝나지 않는 정당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다.
[23]
옛
민주정의당 출신. 군부와
대한민국 검찰청/고참 판사/정보기관/경찰/관제 언론인/기업인/사학재단 오너/족벌 언론인/원로 교수/원로 문화인 출신이 상당수였다. 다만
민정당 출신 중에서도
김윤환을 중심으로 김영삼을 지지했던 통칭 '신민주계' 의원들이 대략 20여 명 존재했다.
[24]
옛
통일민주당 출신.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자 민자당의 주류가 되었다.
[25]
옛
신민주공화당 출신.
김종필이 당대표였지만 세 계파 중 가장 세력이 미약했다.
[26]
그러면서 당 신문 광고에는 지역주의를 배격한다고 했다.
[27]
대북 식량 지원을 시작한 것은 의외일지 모르지만
문민정부 시기였다. 1995년 북한에 15만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대북 식량 지원이 시작된다. 사실 이건
우루과이 라운드 때문에(
WTO가 1995년 1월 출범했다.)으로 쌀 수입 문제와 추곡 수매 등이 엮여서 남아도는 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28]
또한 그 해 4월 발생한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사고도 민심 이반의 주 원인이 되었다.
[29]
충남은 14곳 싹쓸이, 대전은 5곳 중 4곳에서 이겼다.
[30]
충북의 11개 지역 중 민주자유당이 4곳, 민주당이 2곳, 자민련이 2곳, 무소속이 3곳에서 승리했다.
[31]
이후에도 충북은 자민련의 최전성기인 1996~1998년을 제외하고는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는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이 참패한 이후 충북이 급속도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만, 모든 선거를 통틀어 충청 지역 정당이 충북에서 승리한 선거가 자민련의
1회 지선,
15대 총선,
2회 지선 3번이 전부이다. 그나마 자민련이 충청 지역 정당 중 가장 세력이 강했기에 적은 격차이지만 이긴 것이다. 충청지역 정당 중 각각 2번째와 3번째로 세가 강했던
신민주공화당과
자유선진당은 충북에서 선거를 이긴 적이 없다.
[32]
물론 8석 중 5석이 대전-충남에 비하면 완전한 석권이라 보긴 어렵지만 적어도 일방적으로 승리한 수치라고는 할 수 있다.
[33]
신한국당은 대구에서 겨우 2석(서구 을
강재섭, 달성
김석원)을 얻는 데 그쳤다. 이마저도 서구 을 강재섭은 자민련과 기타 무소속 후보들의 표 분산으로 인해 득표율이 겨우 32%였다.
[34]
대전 7석, 충남 12석, 충북 5석
[35]
대구 8석, 경북 2석, 경기 5석, 강원 2석
[36]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는 것이 함정이었다.
[37]
특히 비리 문제에 연루되었던
이건개가 전국구 3번,
한호선이 7번을 받은 데에 반발해 당시 당에 몇 안 되는
민주당계 정당 출신 인사였던
이필선은 사실상 정계 은퇴를 택하게 된다.
[38]
물론 신한국당도 공화계 중진인
이만섭(14대 하반기, 16대 상반기 의장), 민주계의
김수한(15대 상반기 의장),
김명윤, 민정계의
강용식,
정재철, 그리고 국무총리 직에서 물러났던
이회창,
이홍구 같은 중량감 있는 인사들에게 전국구 공천을 주었다. 그렇지만,
황우여나
김영선,
박창달 등의 신인들을 발굴했으며, 만 31세였던 IT기업계의 신화인
이찬진을 공천하는 흠좀무한 일도 있었다.
[39]
구자춘,
이병희,
정석모,
김용환,
이인구,
김칠환,
김종학
[40]
박준규,
박태준,
박철언,
김복동,
강창희,
박준병,
이태섭,
이정무,
김일주,
박구일,
구천서,
김현욱,
이긍규
[41]
정우택,
이의익,
허남훈,
이양희,
김의재,
박종근,
류종수,
김선길,
함석재,
오용운,
이재창,
조종석,
김화남
[42]
이근영,
이상만,
변웅전,
박신원,
어준선
[43]
정일영,
김범명,
권수창,
김고성
[44]
그나마 정우택도 충북 진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재임하던
정운갑의 아들로 2세 정치인이라 그다지 신선감은 없었다.
[45]
두 당의 연합은 이미
15대 총선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총선이 끝나자 두 당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 신한국당으로 입당한 의원들을 향해 '민의를 저버리지 말고 무소속으로 되돌아가라'고 촉구했다.
[46]
#
강창희 당시 자유민주연합 선거대책본부장의 회고에 따르면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선거자금으로 80억원을
차떼기로 주었다고 한다. 하루는 국민회의 모 인사의 초대를 받고 갔더니 여러 개의 더플백에 현금 10억원을 승용차로 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47]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안택수 당 대변인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DJP연합에 반발해 탈당하기도 했다. 참고로 안택수 당 대변인은
대구광역시 소속 의원이었다. 헌데 의외로 자민련 내에서 DJP연합을 처음 적극 권유한 것도 TK 중심의 민정계였다고 한다. 자세한 건
DJP연합 항목 참조.
[48]
그러나 이한동 국무총리는 2001년 DJP 연합이 무너진 뒤에도 계속 총리직을 유지하다가 이에 대한 반발로 자민련에서 제명당한다.
[49]
2000~2002 국무총리. 2001년 9월에 연립내각이 붕괴되자, 현직 총재 신분임에도 자민련에서 제명되었다. 다시 야당이 된 자민련은 김종필 명예총재가 다시 총재직으로 돌아온다. 이한동 총리는 무소속으로 2002년까지 총리직을 맡았고, 대선을 앞둔 4월에 사직했으며, 이후
하나로국민연합이라는 독자적인 정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으나 낙선. 2004년 자민련 복당, 2007년에 한나라당에 복당한다.
[50]
국민신당을 거쳐 자민련에 합류. 2004~2006 자민련 대표최고위원. 이후 자민련이 해산되고 한나라당에 8년만에 복당.
[51]
한나라당에 2002년에 복당.
충남도지사, 국무총리 역임.
[52]
신민당 - 민정당 - 민자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을 거친 7선 의원. 15대 하반기 국회의장 선거에 나갔으나, 자민련 박준규 의원(9선)에게 패배. 2000년에 이회창 총재에 의해
김윤환,
이기택 등과 함께 공천 탈락을 당하고,
민주국민당 대신 자민련에 입당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정치 신인인
임태희에게 처참한 득표율로 져서
낙선하고 정계 은퇴.
[53]
16대 총선에서 전국구 출마.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반대표를 던진 후 의원직 사직(자민련 탈당).
[54]
다만,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만 연합공천이 이루어졌다.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와 광역의원 선거에서는 연합공천이 무산돼 양당 후보가 각각 나오는 경우가 상당수 있었다.
[55]
15대 총선에선 자민련이 50석을 얻긴 했지만 엄연히 신한국당도 선전한 선거였다.
[56]
단,
인천광역시장 당선자인
최기선의 경우 애초에 국민회의 간판을 원했다가 막판에 양당간 조율로 자민련 후보로 결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항목 참조.
[57]
다만 김동주 의원은 부총재 자리까지 올랐으나, 2000년 3월에 탈당해서
민주국민당에 입당했다.
[58]
실제로 1999년 초만 해도 어느 정도까지 진척되었지만, 99년 여름에 내각제 개헌 연내 불가 선언 이후 연말에 흐지부지되었다.
[59]
이전에도 지방선거 기초단체장 후보 및 광역의원 후보 연합공천에서의 신경전, 각료 배분을 둘러싼 신경전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신경전이었지, 틈이 벌어질 정도까진 아니었다.
[60]
김종필 총재의 최측근으로
DJP연합 성사의 일등 공신이었던
김용환 의원은 아예 자민련을 탈당해
희망의한국신당을 창당했다. 김용환은 이후 극렬JP까로 변신해서 계속 김종필에게 부담이 되었다.
[61]
다만 김대중 대통령이 약속대로 내각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하더라도, 개헌엔 전체 의원의 2/3 동의가 필요한 만큼 야당인 한나라당이 반대하는 한 통과는 불가능했다.
[62]
합당을 고려하여 지연되던 국민회의의 재창당은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의 창당으로 현실화 된다.
[63]
연합공천이 무산된 이유는 당시 공동여당인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간의 1인 2표제에 대한 견해 차이가 컸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1인 2표제 도입을 주장했으나, 자민련과 한나라당이 반대했다.(1인 2표제는 1인 1표제가 위헌 판결을 받은 이후인
17대 총선부터 적용됐다.) 새천년민주당의 연합공천 전제가 1인 2표제 찬성이었는데, 자민련이 이에 반대하면서 연합공천 자체가 무산되었다.
#
[64]
4년 전 15대 총선에서는 반민자당, 비민주당 정서에 힘입어 충청권을 필두로 수도권과 강원도, TK(대구경북) 지역에서 反
신한국당 보수표를 끌어모아 다수의 당선자를 배출하면서 50석을 차지했었다. (지역구 41석, 전국구 9석)
[65]
지역구 41석 중 충청권에서 24석을 획득했고(대전 7석 싹쓸이, 충남 12석, 충북 5석) 충청권 이외의 지역에서는 17석을 획득했다.(대구 8석, 경북 2석, 경기 5석, 강원 2석)
[66]
이한동은 1981년 11대 총선부터 계속 당선될 정도로 지역 기반이 탄탄한 거물이었고, 11대 총선을 제외하고, 12대 총선 이후부터 항상 5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67]
박철언이 대표적인 예다. 항상 과반이 넘는 득표를 올려 대구
수성구의 왕으로 불리다 24%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68]
15대 총선 당시의 지지층들은 보수의 주도권을 민주계 보수가 아닌, 기존의 민정계 보수 또는 공화계 보수(소위 원조보수)가 쥐는 것을 원했기에 자민련을 밀어준게 컸다. 더구나 집권 전이나 후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69]
15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은 TK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박근혜를 영입했고, 선거 결과는 근소한 패배로 끝났으나, 자민련으로 넘어갔던 민정계 보수 또는 공화계 보수(소위 원조보수) 유권자의 표를 한나라당 쪽으로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TK 지역에서 자민련의 영향력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70]
경기도 안양에서 두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경기도지사를 지냈던 이인제가 지역구를 옮겨 자신의 고향인 충남 논산에 직접 출마하면서 대전, 충남에서 민주당 바람을 일으켰다. 자민련은 이인제의 상대로 현역 의원 김범명을 그대로 공천했고, 졌다.
[71]
대전은 한나라, 민주당이 각각 1석, 2석을 차지하며 6석 중 절반인 3석에 그쳤고, 충남은 가장 많은 당선자(6명)를 냈지만 새천년민주당에서 무려 4명을 당선시켜 상당수 의석을 상실했으며, 충북은 한나라당이 3석, 새천년민주당이 2석을 얻어 절반에도 한참 못 미쳤다.
[72]
1998년 지방선거 당시 충청지역 기초단체장 후보를 보면,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광역단체장 선거와는 대조적으로 기초단체장에서는 연합공천이 무산돼 각자 후보를 낸 곳이 대다수였다. 그래도 이 당시에는 김종필이라는 네임밸류가 꽤 높았고, 충청권에서 자민련의 지지세가 견고했기 때문에, 연합공천이 무산돼 각각 후보를 냈다고 해도, 자민련이 충청권 기초단체장 대다수을 획득했다.[128] 하지만 1999년 여름에 김종필 국무총리가 내각제 문제를 둘러싸고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에 반발한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가 탈당하여 독자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자민련의 충청권 정세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후 국민회의가 새천년민주당으로 당을 탈바꿈하고 연합공천이 무산된 이후, 충청권의 대표 주자 이인제를 필두로 충청권을 공략하면서 자민련은 충청 지역에서 크게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전 선거와는 정반대로 김종필이라는 메리트가 반감되었기 때문에, 본거지인 충청 지역에서조차 반토막이 나버린 것이다.
[73]
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면 국가로부터 각종 보조금을 지원받지 못하고, 국회 상임위의 위원장이 될 수 없는 등 여러가지 불이익이 있다.
[74]
한나라당에 26석,
희망의한국신당에 1석.
[75]
민주당: 서울, 경기, 부산, 경남, 광주, 전남, 전북, 제주 / 자민련: 강원, 인천, 충남, 충북, 대전, 울산, 대구, 경북.
[76]
대전 1석은 무소속과 분열돼 한나라당이 당선된 거라 연합공천을 해도 그대로 한나라당이 이겼을 것이다.
[77]
민주당 111석 → 115석, 자민련 48석 → 17석, 호남계 탈당파 4석 그대로 였다.
[78]
한나라당 107석 → 133석, 민주국민당 2석 그대로, 희망의한국신당 원외 → 1석, 무소속 정몽준 1석.
[79]
반면, 당시 야당들은 모두 이득을 보았다.
한나라당은 133석을 얻어 1당 지위를 공동여당으로부터 탈환했고,
민주국민당은 후에 연립여당이 될 기회가 생겼으며
희망의한국신당은 원내로 진출했다.
[80]
말 그대로 남의 당 국회의원 빌려오기로,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4명이 탈당하고 자민련에 입당하는 식.
송석찬 의원(대전
유성),
배기선 의원(경기
부천 원미 을),
송영진 의원(충남
당진)이 자민련으로 1차 입당했다. 그런데 자민련 부총재인
강창희 의원(대전
중구)이 이에 반발해 교섭단체 등록을 거부하자, 당시 원내교섭단체의 자리가 급했던 자민련은 강창희를 제명시키고 민주당에서 다시
장재식 의원(서울
서대문 을)을 데려와 20석을 채웠다. 이들의 당적 자체는 당연히 자민련이지만, 소속은 사실상 민주당이었다. 이 행위 자체를 막을 법적 수단이 없는 편법적인 수단이다. 이때 의원 꿔주기를 반대하다 제명된
강창희 의원은 2001년 말에 당시 자민련을 떠나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던
김용환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81]
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장자인
김홍일(전남
목포)을 보낼 생각이었다고는 하는데, 막상 이뤄지지는 않았다.
[82]
정말 간신히 20석. 재밌는 사실은 이미 민주당이 16대 국회 개원 이후 자민련을 위해 원내교섭단체의 조건을 10석으로 낮추려고 날치기를 시도하다 당시 민주당 출신 이만섭 국회의장이 거부해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만일 성공했다면 2004년
민주노동당도 덕을 봤을 것이고, 2008년
자유선진당도 20석 만드느라 굳이
창조한국당과의 연합 같은 것은 안 해도 되었을 것이다.
[83]
이후 자민련은 김대중 대통령의 배려로 다시 장관 3명을 입각시켰다.
[84]
당 창당의 주역은 허주
김윤환이었으나, 암과 낙선 때문에 정치적 행보는 보이지 않았다. 당시 민국당 소속 의원은 한승수(강원
춘천),
강숙자(비례) 단 두명이었다.
[85]
당시는
국민통합21이 창당되기 이전이었다. 그리고 정몽준의 경우
통일국민당 와해 후 당적을 갖지 않고 한동안 무소속으로 있었지만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대통령 및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동안 행보를 같이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86]
8.15 평양 축전에 사람들의 방북을 허용했다는 이유였다.
[87]
새천년민주당과 연정 상태였으나 대북관에 관해선 의견 차이가 컸다. 기본적으로 자민련은 한나라당보다도 더 오른쪽으로 치우친 보수정당이라
햇볕정책에 회의적으로 대북강경책을 주장하였다.
[88]
연이은 의원들의 의원직 상실로 과반 붕괴가 확실시되자 자민련과의 관계를 끊어내기 위한 민주당과 자민련을 붕괴시켜 의석 수를 늘리고 충청권 기반을 흡수하려던 한나라당의 전략이었단 설도 있다. 당시 한겨레21 참조.
[89]
참고로 DJP연합이 깨진 무렵에 민주국민당도 새천년민주당과는 사실상 결별했다.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은 연합내각이 해체되자 2002년에 사임하고, 같은 해 말에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
[90]
이후 이한동은
하나로국민연합을 창당하여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이후 2004년 2월에 복당하였다.
[91]
당시 자민련 소속 현직
충청북도지사였던
이원종이 선거를 코앞에 두고 한나라당에 가버렸다.
[92]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선 4% 차이로 아깝게 패했지만 기초자치단체장 선거는 5곳 모두 올킬 성공.
[93]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이긴 지역을 보면 충남 7곳, 대전 5곳, 충북 3곳,
경기 1곳 이렇게 16곳이 전부였다. 2회 지선에서 충남 12곳, 대전 4곳, 충북 6곳,
경북 2곳, 강원 2곳, 경기 3곳으로 29곳의 당선자를 낸 것에서 거진 반토막 난 것이다.
[94]
대선을 20여일 앞두고 노무현에게 민주당 경선에서 패한 이인제가 자민련에 입당해 이회창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고 다녔는데, 김종필은 이에 "당의에 저촉될 수 있으니 유념해달라"고 자제해 줄 것을 당부했다.
[95]
당연한 소리이지만 엄연히 김종필과 이인제도 탄핵에 찬성하였다.
[96]
당시 충북 괴산군·진천군·음성군
지역구에 출마하려고 정치적 계산을 했다는 비아냥이 있긴 했지만, 일단 김의원 본인은 탄핵 사유가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해서 반대표를 던졌다고 한다. 이후 탈당했으며, 변웅전 전 의원이 승계받았다. 또한
17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97]
당시 탄핵 반대표가 2표였는데, 나머지 한 명은
이낙연
새천년민주당 의원. 이낙연 의원은 대선 직후에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의 대변인을 지낸 이력이 있었다. 이후
전라남도지사를 거쳐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가 된다.
[98]
당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내각제 개헌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연구를 했다. 당시 기사를 보면,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내각제를 암시하는 발언(:
2007년엔 내가 나이가 너무 많지만
2004년은 아니다.)을 하기도 했다.
[99]
9선으로
김영삼,
박준규와 함께 역대 최다선 국회의원이었다.
[100]
사실 이 규정은
20대 총선까지는 강제력이 없는 허수아비 규정이었기에 엄밀히 따지면 선거법 위반은 아니다. 사실 16대 총선에서도 김종필은 전국구 1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01]
경북의 자민련계 무소속까지 합해도 5석이다.
[102]
정확히 말하자면 해산 직후에 모든 당원들이 한나라당으로 일괄 합류하였다. 법적인 합당은 아니나 실질적인 흡수합당인 셈.
[103]
구 자민련은 창당 당시만 해도 보수정당의 정체성(
민주자유당
민정계 일부), 충청지역 정당의 정체성(
민주자유당
공화계, 충청 지역 인사) 둘다 갖추고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자 보다는 후자로 기울어지고, 보수색채가 옅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기류는 이후 후신 격인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으로 이어졌고, 당 자체는 최종적으로 새누리당에 흡수되었으나, 구성원들은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둘로 갈리는 요인이 되었다.
[104]
이 당이 기반으로 삼는 충청권에서도
인지도도 지지율도 존재감도 낮다.
[105]
국민의 정부 국무총리 임명으로 인한 당 총재직 사임.
[106]
DJP연합 해체 이후 국무총리직 사퇴를 거부하면서 제명 처분.
[107]
자민련보다 장수 정당이었던
한나라당도 로고를 바꾼 적이 있다.
[108]
교섭단체는 아니었지만 원내3당은
민주노동당이었다.
[109]
다만 자유선진당만으론 원내교섭단체 수립이 안되어서
창조한국당과
연합해야 했다.
[110]
다만 JP는 안철수 의원에게 관심이 있는지 2016년 본인이 먼저 냉면 회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111]
2020년에 충청권 보수정당을 맥을 있겠다고 주장한
충청의미래당이 생겼으나, 군소정당이라는 한계 탓에 영향력은 크게 못미친다.
[112]
다만 이 사례의 경우 XX 자민련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좀 많이 확대하여 사용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 바른정당이 제주도에 특별한 지역기반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제주도 내에 강한 지역 지지기반을 갖추고 있던
원희룡이 바른정당에 소속되어 있던 것일 뿐이다. 정작 원희룡이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된
7대 지선에서 (
바른정당의 후신인)
바른미래당
장성철의 득표율은 무소속 원희룡, 민주당
문대림,
자유한국당
김방훈은 커녕 녹색당 고은영의 절반도 안 되는 1.5%에 불과했다. 물론 당시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선거에서 녹색당이 원외 군소좌파정당으로써는 이례적으로 높은 득표를 올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사실상 전혀 지역기반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볼 수밖에 없다. 즉, 기본적으로 XX 자민련이라는 표현은 전국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특정 지역 기반에만 의존하여 연명하는 정당에 대한 멸칭으로 사용되지만, 7대 지선 당시 바른정당(이후 합당으로 탄생한 바른미래당까지)의 처지는 그 멸칭조차도 과대평가가 되어버릴 정도로 취약했고, 단지 해당 표현이 '이 당은 한 지역에서밖에 못 이길 것 같다'는 의미로 확장되어 사용되었던 것.
[113]
비단
대한민국 뿐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민중운동당도 한때는
풀라우피낭 자민련이라 불리곤 했다.
[114]
참고로 무소속 당선자가 자민련으로 당선되었으면 지역구 5석을 확보하여 봉쇄를 넘을 수 있었고, 그러면 JP는 10선을 달성했을 것이다.
[115]
특히 류근찬은 김종필의 특별보좌관 출신으로 핵심 참모라 할 수 있다.
[116]
하나로국민연합의
이한동은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0.3%로 4위
낙선,
희망의한국신당은 겨우 1석.
[117]
이후
국민중심연합이 분리되었지만, 이마저도 도로 자유선진당에게 통합되었다.
[118]
소속은
새정치국민회의였지만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 간의 선거 연합에 따른 것이다.
[119]
17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인 2표제가 시행되어 비례 의석을 얻으려면 최소 3%를 득표해야 했다.
[a]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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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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