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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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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
최성원
주찬권

{{{-2 {{{#!folding [ 구 멤버 ]
{{{#!folding [ 정규 앨범 ]
<colbgcolor=#000><colcolor=#fff> 전인권
全仁權 | Jeon In-kwon
파일:가수전인권.jpg
출생 1954년 9월 30일[1] ([age(1954-09-30)]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도렴동[2]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정선 전씨
본적 함경남도 북청군
신체 AB형[3]
가족 아버지 전호준[4], 어머니 고옥순[5]
큰형 전세권[6], 둘째 형 전권
배우자 정혜영(1961년생)[7]
아들 전진환, 딸 전인영
학력 서울재동국민학교[8] (졸업)
명지중학교 (졸업)
명지고등학교 (중퇴)
데뷔 1978년 따로 또 같이 1집 <따로 또 같이>
소속팀 전인권 밴드
소속사 와이드엔터테인먼트[9]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0]

1. 개요2. 생애와 활동
2.1. 들국화 이전 (1978~1984)2.2. 들국화 시절 (1984~1987)2.3. 솔로 시절 (1988~2011)2.4. 들국화 재결성 (2012~2013)2.5. 전인권 밴드 결성 (2014~)
3. 보컬리스트로서4. 논란 및 사건 사고
4.1. 마약 복용4.2. 표절 논란4.3. 이은주와의 관계4.4. 이웃집 기왓장 투척 사건
5. 최성원과의 파란만장한 관계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전인권.png
MBC <텔레콘서트 자유> 에 출연해 공연하는 모습
대한민국의 록 밴드 들국화의 리드 보컬이자 프론트맨. 1980년대 이후의 한국 대중음악을 정립했다. 대한민국 록 음악의 전설로 평가받는 인물로, 한국의 존 레논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와 활동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토박이로 태어나서 현재까지도 삼청동에서 계속 살고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인쇄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하지만 나중에 아버지가 분가하면서 어머니, 형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중고교는 의외로 삼청동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명지중고교를 나왔다. 당시 서울 종로구 일대에는 지금은 강남으로 이전한 수많은 명문 고등학교들이 즐비했고 특히 경기고등학교가 바로 삼청동에 있었다. 비평준화 시절이라 당시 서울 강북에 있던 어지간한 중고교를 다 떨어지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통학한 듯하다.[11] 당시에는 청와대 뒷길도 막혀 있었고 세검정은 개발도 되지 않은 시절이라 삼청동에서 명지중고교까지 통학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중고교 시절에는 공부보다 미술을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교 1학년 때 규율부 학생들과 싸움을 한 후 학교를 자퇴했다고 한다.

이후 음악에 심취하여 삼청공원에서 기타를 치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2.1. 들국화 이전 (1978~1984)

파일:따로 또 같이 전인권.jpg
'따로 또 같이' 활동 당시의 전인권
초년 시절 음악 감상실 '쉘부르' 출신으로 전국을 유랑하며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하곤 했다. 쉘부르는 이종환이 운영하던 통기타 업소로, 1970년대 초 통기타 진영의 중심이었던 ' 쎄시봉'의 쇠퇴 이후 새로운 통기타 가수들의 중심이었다.

1978년 강인원, 이주원, 나동민과 <따로 또 같이>로 활동하며 '맴도는 얼굴'을 발표하면서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첫 솔로 음반을 발표하였으나 후에 인터뷰에서 불 태우고 싶었던 음반이라고 말할 정도로 엉망인 앨범이었다고 언급한다.[12]

1980년대 초부터는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함춘호의 소개로 키보디스트 허성욱과 기타리스트 조덕환, 드러머 한춘근[13]을 만나 강릉시의 한 디스코텍에서 밴드를 처음 시작했다. 그러나 한 달 쯤 되었을 때 허성욱의 부모가 찾아와 팀이 해체되었다.

1982년에는 허성욱과 함께 다시 통기타 업소인 '까스등' '모노'에서 통기타 음악을 했다. 이때 '모노'에서 활동하던 최성원을 처음 만났는데, 최성원은 당시 '매일 그대와' 같은 자작곡으로 인정 받고 있었다.[14] 최성원, 전인권, 허성욱 세 사람은 <전인권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84년 봄 무렵에 음악적 견해 차이를 보이던 최성원과 전인권, 그리고 허성욱은 전인권의 모친상을 계기로 해산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인권의 회고에 따르면 전인권 트리오의 해체 사유는 다음과 같다.
'최성원, 허성욱과의 활동은 1984년 5월 어머니의 죽음과 각자의 의견차이로 당분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 삼총사는 방배동의 '이트'라는 연주실을 연습장소로 택해 쓰고 있었는데 포크록을 하고 싶어하는 최성원, 클래식하길 원하는 허성욱 간에 가끔 마찰이 일곤 했다. 그러던 차에 암으로 오랫동안 앓아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충격으로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고 성원이와 성욱이도 잠시 헤어져 있게 되었다.' (일간스포츠 스타스토리 - 전인권 1990)

2.2. 들국화 시절 (1984~1987)

파일:321025E7-7204-4A96-987B-DC3DE33CEF72.jpg 파일:73D43469-B19E-4BC4-A971-B8BED8367B33.jpg
사진기준 만 34세(1988년)
하지만 같은 해 여름, 조덕환의 권유로 전인권, 조덕환, 허성욱 세 사람이 밴드를 재결성한다. 1984년 겨울에는 밴드 들국화가 결성되었으며, 1985년 6월에는 최성원이 재합류했다.

데뷔 앨범은 1985년 9월 발매되었다. 그동안 들국화의 곡들은 드럼 파트가 없었기 때문에 리듬이 강조되지 않아 포크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지만, 앨범 녹음 과정에서 드럼과 더불어 일렉기타 세션이 추가되었다. 결과적으로 들국화의 곡들은 이전보다 락적인 이미지가 훨씬 더 강화되었다. 헤비메탈 밴드 백두산, 아시아나의 기타리스트였던 김도균의 회고에 따르면 들국화는 포크 음악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한다.
'처음 볼 때는 들국화도 3인조였죠, 그런데 조금 독특한 멤버 구성이었습니다. 드럼 없이 어쿠스틱 기타(전인권), 일렉트릭 기타(조덕환) 그리고 베이스(최성원). 사실 처음 보는 형태였죠.[15] 매일 밤마다 연주를 하니까 항상 만나게 되고 또 농담도 서로 자주 주고 받으며 아주 사이 좋게 지냈었습니다. 그 후 앨범을 내고 국내에서 상당히 유명해졌죠. 사실 음악적인 스타일은 저희와는 달랐습니다. 제가 볼 때는 포크 음악으로부터 출발한 것 같습니다. 그 쪽의 선배들은 한대수, 김민기, 조동진 등 이런 분들로부터 내려온 라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rock 과 folk music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 서로 돕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밥 딜런 노래를 지미 헨드릭스가 부르는 등 같은 히피 시대의 동지들이죠...' 김도균 홈페이지. 지금은 없어짐.

들국화 1집은 발매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성공하였으며 후에 대중음악 100대 명반 중 1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솔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판소리 명창들에게 창을 배워서 동굴에서 1년동안 득음 연습을 했다고 한다.[16] 결국 국내외에서도 찾기 힘든 독자적인 창법을 지니게 되었다.

1980년대 당시엔 높은 톤의 미성과 허스키한 쇳소리가 혼재된 독특한 음색의 보컬이었다. 음역도 높아서 벨팅을 통해 3옥타브대의 고음을 쉽게 소화해냈다.[17] 당시에는 지금보다 목소리가 가늘고 톤이 높았기 때문에 양희은의 성대모사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18] 김현식과 고음 대결을 해서 이긴 적도 있다는데[19] 이는 한영애의 '바라본다'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이 그 곡에서 코러스로 참여했는데, 거기서 초고음의 샤우팅을 내지르는 남성이 바로 전인권이다.[20]

타고난 미성과 피 나게 갈고 닦은 창법으로 당시에는 레드 제플린 딥 퍼플, 스틱스 같은 외국 록밴드의 곡 커버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부르고는 했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사랑일 뿐이야', 들국화 라이브 앨범에 수록된 ' Come Sail Away', 2집 '조용한 마음', 솔로 1집 '돌고 돌고 돌고', '사랑한 후에' 등에서 리즈 시절 맑고 시원했던 고음역대 보컬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1987년 김현식, 허성욱 등과 함께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에 따른 여파로 들국화는 해체되었다.

2.3. 솔로 시절 (1988~2011)

파일:전인권.jpg
솔로 활동 시절인 2000년대의 모습
들국화 해체 이듬 해인 1988년에 1집 앨범을 발표하며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타이틀 곡은 '사랑한 후에' 와 후속곡 '돌고 돌고 돌고' 가[21]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솔로로 성공적인 전향을 하게 되었다.[22] 1989년에는 '전인권과 가야' 밴드를 결성하고 2집 <언제나 영화처럼>을 발표하고 활동했으며 특히 콘서트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1995년에는 들국화를 재결성해 3집 앨범을 발표했다. 타이틀 곡 '우리' 등이 괜찮은 반응을 얻었지만, 전인권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교체되었고 들국화의 원년멤버들이 1명도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들국화 팬들 중에서는 이 앨범을 정식 들국화 앨범으로 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마약 사건으로 1992년과 1997년, 1999년 3차례 구속수감되면서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공연 위주로 활동하다가, 2003년 3집 '다시 이제부터'[23]를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했고 스카이라이프 CF에 출연하여 "인권이 라이프!"라는 유행어까지 남겼다. 또한 KBS 신화창조의 비밀 삽입곡으로 들국화의 대표곡인 행진이 선정되기도 했다. 전인권은 논스톱4에 출연해 첫 시트콤 출연도 했고, 예능 프로그램에 대거 출연하며 다시금 재기에 성공했다. 2004년 4집 '전인권과 안 싸우는 사람들' 을 발표하고 타이틀 곡 걱정말아요 그대로 활동했는데, 이는 12년 뒤 한 드라마의 OST로 사용되어 뒤늦게나마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마약 사건과 여러 부침으로 인해 2000년대 중반부터 목 상태와 컨디션이 심각하게 나빠졌고, 2005년 생을 마감한 배우 이은주와 관련된 일련의 논란으로 잠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2007년 결국 필로폰 투약 혐의로 5번째 구속을 맞게 되고, 지상파 방송에서 출연금지까지 당하며 징역형을 살게 되었다. 마약 중독으로 망가져가는 전인권의 모습은 기존의 팬들에게도 재기에 대한 기대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출소 이후에 다시 활동을 재개하는 듯 보였으나 2010년 모르핀 투약으로 다시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 활동이 연기된다.[24]

이렇듯 전인권 인생의 말기는 재기가 불가능할만큼 심각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25]

2.4. 들국화 재결성 (2012~2013)

2000년대 이은주 사건과 마약 복용으로 인한 투옥, 정신 병원 입원 등 전인권의 인생 말기는 그야말로 막장같이 끝나가는 듯 했으나... 꾸준한 치료로 인해 다시 가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다. 당시 최성원의 말에 따르면, 막장이 되어가던 친구가 너무 안타까웠는데,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지금까지 들은 목소리 중 최고의 목소리를 들려줬다고 한다. 결국 2012년 10월을 기점으로 들국화가 드디어 재결성되었다. 이때 아내와 재결합도 하고[26] 정신병원에 감금된 동안 성찰도 많이 하면서 사람이 많이 바뀌었다.


이글스 - desperado


딥 퍼플 - Smoke On the Water, 존 레논 - Imagine


들국화 - 사랑한 후에, 그것만이 내 세상. '사랑한 후에'는 전인권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곡이라고 한다.[27] 그래서 그런지 '사랑한 후에'를 전인권만큼 부르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28]

완전 부활이라고 해도 무방... 아니, 원숙미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2013년 10월에 드러머 주찬권이 사망하며 들국화의 활동이 전면 중단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새 앨범을 위한 주찬권 드럼 파트는 녹음을 마친 상태여서 2013년 12월 주찬권의 유작이자 신보 + 리메이크 형식의 들국화 4집 '들국화'가 무사히 발매된다. 하지만 이후 들국화의 활동은 기대하기 힘든 상태다. 그 이유는 만나면 늘 다투기만 하던 전인권과 최성원의 사이를 중재해주던 주찬권의 역할이 사라지자 둘의 사이는 다시 악화되었고(재결성 후 자주 하던 카톡도 안 한다고 한다), 둘이서 투맨 밴드 하기도 좀 뭐하기도 해서... 자세한 건 들국화 항목을 참고.

2.5. 전인권 밴드 결성 (2014~)

주찬권의 죽음으로 들국화의 활동은 중지되었지만, 60대의 나이에 다시 불타오른 음악에 대한 열정을 멈추기 싫었던 전인권은 자신의 이름을 필두로 한 '전인권 밴드'를 결성한다. 현재까지 콘서트와 새 앨범들을 내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전인권 밴드는 2014년 9월 정규 앨범인 '2막 1장'을 내고 2015년 12월 미니 앨범 '전인권 밴드 겨울이야기'를 냈다.

2015년 9월 밴드 활동과는 별개로 후배들( Zion.T, 윤미래, 타이거 JK, 강승원, 서울전자음악단, 갤럭시 익스프레스(Galaxy Express),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그레이프 티(Grape T))을 모아 싱글 앨범 '너와 나'를 발표했다.

2020년 11월 16일부터 JTBC 싱어게인에 심사위원으로 출연중이었지만 태도 논란 등이 겹치며 결국 1화만에 하차하게 되었다.

3. 보컬리스트로서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가장 유니크한 스타일의 음색과 창법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한국 가요계에서 가창력으로는 역대 최고 수준의 가수로 평가되고 있다. 리즈시절이었던 1980년대에는 김현식 등과 함께 시대를 대표하는 보컬로 손꼽혔으며, 절규하는 듯한 특유의 독창적인 창법과 한계를 모르고 올라가는 넓은 음역대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위에 서술된 것처럼 전인권은 판소리를 하는 명창을 찾아가 창을 배웠는데 이것이 록 보컬 스타일과 결합되어 다른 보컬들과는 구분되는 유니크한 창법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 창법을 만들기 위해 산에 올라가서 목소리를 내며 수련을 했다고 밝힌 바 있으며, 박완규는 히든싱어 전인권 편에서 "이 목소리는 아무나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전인권이라는 보컬, 단 1명만 이 소리를 낼 수 있다" 라며 그의 보컬에 대해 경외심을 표하기도 했다. 한국 가요계에서 가창력으로는 역시 으뜸의 평가를 받는 임재범조차도, 들국화 1집의 전인권의 노래를 듣고 가수를 접어야 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 만큼 전인권의 유니크한 창법과 가창력은 지금까지도 대체자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다만 오랜 활동 기간과 여러 인생서사들이 말해주듯이, 늘 보컬 컨디션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전인권은 판소리를 배웠기 때문에 성대 상태는 창을 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변했는데 소리꾼의 성대는 의학적으로는 성대결절로 분류되어 있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컨디션에 따라 목소리 상태가 안 좋았던 시절도 더러 있었고, 특히 마약 투약으로 수차례 구속되었던 시절의 목상태는 이에 따른 영향 때문에 그리 좋지 못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전인권은 보컬로서 최절정을 찍었던 시절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특유의 미성과 높은 하이톤으로 양희은 모창도 가능할 정도였으며 미성을 기반으로 한 좋은 음색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발표한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 사랑한 후에 등의 노래는 그의 리즈시절을 대표하는 명곡으로 뽑힌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마약 사건으로 몇 차례 구속되면서 목 상태가 상당히 나빠졌고, 이때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남아 있던 미성의 음색은 거의 사라지고 목소리 자체가 거친 탁성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습을 여러차례 보여주었다. 소위 고추털뽑창법, 전기감전창법이라고 인터넷에서 조롱을 받았던 그것만이 내 세상 라이브도 한창 전인권의 보컬 컨디션이 최악이었던 1996~1997년 경의 공연이었다.

이 후 199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몸 상태를 회복했고 2003년 정규 3집 <다시 이제부터> 를 냈을 때는 80년대 최전성기의 보컬 컨디션을 거의 회복하여 최상의 라이브를 보여주었다. 1998년경부터 정규 3집으로 활동했던 2003년까지가 전인권이 보컬로서 누린 또 다른 리즈시절이라고 해도 무방하며, 실제로 이 시기 여러 음악방송에 출연해 역대급으로 평가받는 라이브를 더러 남겼다. 1998년 사랑한 후에 라이브 2001년 들국화 헌정 콘서트에서 부른 그것만이 내 세상 2002년 대학가요제에서 YB와 부른 돌고 돌고 돌고 2003년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부른 축복합니다

그러나 2003년 정규 3집으로 재기에 성공한 후, 2004년경부터는 다시 컨디션이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바빠지며 스케줄이 많아진 탓에 전인권의 목이 혹사당한 것도 있었고 마약 사건과 자기관리 실패가 큰 원인이었다. 한창 구설수에 휘말리고 5번째 마약사건으로 구속되기 전인 2006~2007년경에는 보컬로서의 기량이 거의 최하를 찍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2007년 말 전인권은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수감되고, 이 후 들국화가 재결합하기 전인 2012년까지 요양병원을 전전하는 등 공백기를 가지며 대중들에게 잊혀졌다.

2012년 들국화의 재결합으로 다시 컴백했는데, 완전부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놀라운 가창력을 선보였다! 보컬로서 한창 날라다니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기량보다 훨씬 더 회복한 건 물론, 원숙함까지 더해져 대중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그야말로 전설의 귀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회복력은 놀라웠다. 2012년 윤도현과 함께 부른 그것만이 내 세상

들국화의 재결합 이후에는 원숙한 가창력을 선보이며 현재까지도 왕성히 활동 중이다. 무엇보다 이전과 달리 컨디션 기복이 들쑥날쑥하지 않고 꽤 오랜 기간동안 일정한 수준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전인권이 들국화 재결합을 기점으로 마약과 술담배를 완전히 끊고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왔기 때문에 성대 상태도 큰 변동 없이 잘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21년 불후의 명곡에 출연했을 때는 곧 70대를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좋은 컨디션으로 노래를 불렀다.

4. 논란 및 사건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국 대중음악의 거탑인 그이지만 그의 개인사는 논란의 사건들이 많다.

4.1. 마약 복용

한때 심각한 마약중독 증세를 겪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고등학생 시절인 1970년대부터 마약을 복용하기 시작해[29] 2000년대 후반까지 마약 복용으로 처벌받은 횟수만 5회에 달한다.

1987년 10월에 김현식, 허성욱 등과 함께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에 따른 영향으로 들국화는 해산하게 되었다. 이 후에도 1992년 다시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었고 1997년, 1999년, 2007년 총 3차례에 걸쳐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그 외에도 2004년 10월에는 울산병원 응급실에서 마약 성분이 있는 진통제 투약을 해달라고 요구했다가 전날 같은 약을 투약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병원의 기물들을 파손하고 병원 관계자들에게 폭력을 휘둘러 경찰이 출동한 적이 있었다. 당시 출동한 경찰이 간이 마약 조사를 실시했으나 무혐의로 훈방 조치만 취했다.

2007년에는 메스암페타민 복용 혐의로 조사 도중 필리핀으로 돌연 출국, 수배 중인 상황에서도 한국인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는 대범함을 보여주었다. 5개월간 체류하다가 귀국했고 인천국제공항에서 검거되었으며 필리핀에서 마약을 한 것은 사실이나 한국에서는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였다. 한 차례의 항소 끝에 2008년 3월, 징역 1년과 추징금 546,000원을 선고받았다. 그때 가요계 후배들과 동료들의 많은 도움이 있었는데 사진작가 김중만을 중심으로 이수만, 윤도현, 김장훈 등 16명이 천만원 정도를 변호사비로 모금하여 주었고, 윤도현 김장훈은 변호측 증인으로도 출석했다. 김부선, 조덕배, 정경수 등은 탄원서를 제출하여 구속보다 치료를 위해 선처해 줄 것을 부탁했다.

2008년 9월 6일에 만기 출소했으며, 출소한 이후 지난 2002년에 이혼한 아내와 재결합을 하고 신곡을 작곡하며[30] 콘서트를 준비하는 등 다시 일어서는 듯 하였으나, 지병인 대상포진으로 인해 첫 콘서트가 취소되었으며 다시 만난 아내와도 2009년 3월에 다시 결별하였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뒤 추모콘서트에도 참석했다.[31]

이 무렵 전인권은 대상포진에 걸리게 되었고, 치료를 위해 처방받은 옥시콘틴에 중독되어 갔다. 처음에는 1~2알 먹는 정도였지만 점차 중독 증세가 심해져 하루에 80알을 먹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 그렇게 중독되어 가던 2010년 2월, 그의 집에 갑자기 낯선 남자 5명이 들이닥쳐 전인권을 강제로 차에 태운 뒤 전남 담양군에 있는 어느 요양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 별거하던 전인권의 아내가 중독증세로 폐인이 되어가는 전인권을 걱정해 신고했으며, 그렇게 전인권은 요양병원에 강제입원 조치되어 1년 6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오랜 마약중독으로 인해 신체의 바이오리듬이 완전히 망가진 터라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폐인처럼 보냈다고 한다.[32] 그렇게 8개월간 의욕 없는 생활을 하다가 요양병원에서 만난 할머니가 자신이 커버했던 <사노라면>을 부르는 것을 본 뒤 다시 삶의 열정을 되찾았다고.

그렇게 1년 6개월간 치료를 받은 뒤 2011년 8월 퇴원한 전인권은 헤어져살던 아내와 다시 재결합했다. 당시 요양원에서 나올 때 전인권이 아내에게 "왜 나에게 잘해주는 것이냐. 앞으로 나는 혼자 살아야 할 텐데 지금 당신이 잘해주면 내가 더 힘들어지니 당신은 당신 길로 가라"라고 말하자 아내는
"내가 전인권 좋아하잖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이 전인권에게는 신앙이 되어 이후 마약에서 손을 완전히 떼고 가족과 음악에 몰두하게 되었다.

대마초 흡연 사건으로 2008년 1월 25일 KBS의 출연금지 명단에 올랐다가 2012년 6월 7일부로 해제되었다.[33] 그 뒤 2014년 3월 2일에 배철수가 진행했던 KBS 콘서트 7080 함춘호와 함께 출연했다. 여기서 "이제는 몸 관리를 철저히 한다."고 전인권 본인이 직접 말했고, 배철수도 "전인권의 피부가 반짝거린다"고 말한 것으로 보면 전인권 자신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듯하다.

참고로 전인권은 마약을 한 이유에 대해 단순히 좋아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마약을 할 때만 음악을 열심히 하고, 마약이 들어가지 않으면 차가 기름이 떨어진 것처럼 음악에서 손을 놓게 돼서 결국 진도가 안 나가고 0으로 돌아갔다고. 어쨌든 들국화 재결합 이후에는 완전히 마약을 끊었다.

2012년 공감토크쇼 놀러와에 출연했을 때 지금은 절대로 마약에 손대지 않고, 가족들의 사랑을 먹으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방송이나 콘서트에서도 "마약에서 완전히 손을 뗐으며 건강을 위해 금주와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인권은 술까지 완전히 끊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 인터뷰에서 술을 끊지 못하면 마약도 끊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금주한 것이라고 밝혔다.

4.2. 표절 논란

2차례의 표절 논란이 제기되었으며 곡이 상당히 유사해 비판을 받았다.

4.2.1. 걱정말아요 그대

전인권의 대표곡인 ' 걱정말아요 그대'[34] 독일 곡인 Bläck Fööss(블랙 푀스)[35]의 'Drink Doch Eine Met'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표절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한 구절 정도를 베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걱정말아요 그대'는 독일 원곡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그대로 베꼈다는 점에서 표절 가운데에서도 악질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Bläck Fööss - Drink doch ene met (1971)[36] 전인권 - 걱정말아요 그대 (2004)
전인권은 처음에는 표절을 부인했다. 4월 26일 전인권은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나는 표절 안해요."라고 표절을 부인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생을 걸고 표절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논란이 더욱 커지자, 4월 28일 본인의 페이스북에서 사실상 표절을 인정하며 원작자 측과 합의하고 저작권료를 지불하겠다라고 밝혔다. 전인권은 페이스북에 "나는 곧 독일로 간다"라며 "일단 그 곡을 만든 사람 입장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원하는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밝혔다. "그날(합의가 된날 이후) 로열티를 달라고 하면 적당 선에서 합리적으로 재판하든, 그쪽 입장대로 로열티가 결정되면 한국 저작권협회와 상의해서 줄 것"이라고 말했다. # 그리고 앞으로는 이곡과 관련된 어떤 인터뷰도 거절하겠다고 말했다. # 합의하고 저작권을 지불하겠다는 그의 발언은 표절을 인정한 것으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고, 언론 또한 그렇게 보도했다. 하지만 나중에 전인권은 실제로 독일에 가지는 않았다고 밝혔고 표절하지 않았음을 계속 주장했다.

전인권은 2019년 10월 콘서트 투어를 앞두고 이곡에 대한 표절에 관한 질문을 받자 독일 밴드 ‘블랙 푀스’ 측에서 "의도적이지 않은 것으로, 표절로 보기 어렵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주장했다. # 하지만 이와 관련된 아무런 물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또 독일 그룹 '블랙 푀스' 측은 이와 관련하여 국내외 어떤 언론에도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힌 바가 없다.

4.2.2. 우리

'걱정말아요 그대'의 표절 의혹이 진행되는 와중인 1995년에 발매된 들국화 3집 '우리'가 1984년 발표된 개신교 찬양곡 'I just want to praise you(주를 찬양하며)'의 표절이라는 의혹이 추가되었다.
올네이션스 경배와 찬양 - 주를 찬양하며 (1984) 들국화 - 우리 (1995)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했다. 안찬용 서울장신대학교 예배찬양사역대학원 교수는 "이 논란이 있기 전부터 찬양사역자들 사이에서 두 곡의 유사성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있었다"고 밝혔다. 추연중 CCM 전문 칼럼니스트는 "8마디의 멜로디와 코드 진행에서 유사성이 발견된다"고 밝혔다. 스포츠경향에서 이 논란에 대해 전인권 측의 입장을 듣기 위해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본인은 물론 매니저에게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스포츠경향 기사.

후배 가수 김경호는 인터뷰를 통해 "'걱정 말아요 그대'보다 '우리'의 표절 의혹건이 더 문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37] 그러자 전인권의 팬이 이 인터뷰 기사를 전인권에게 전달했고 전인권은 본인의 페이스북에 분노하는 글을 올렸다양심이.... # 이에 김경호는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찬송가의 표절부분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것을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내용임에도 잘못 인식해 언급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하게 돼 경솔했다며 사과의 글을 올렸다. #

'걱정 말아요 그대'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의 후속 내용이 없다. 표면적으로나마 블랙 푀스가 '상관없다'라고 공언한 걱정 말아요 그대와 달리 이쪽은 원곡자 관련 이슈가 없다.

4.3. 이은주와의 관계

생전 배우 이은주와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송지나 작가의 소개로 2000년 <오! 수정>을 촬영할 당시 처음 만나 이은주가 사망할 때까지 친분을 이어왔다. 이은주가 출연한 <안녕 UFO>에 전인권이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연애소설과 안녕 UFO에서 들국화의 노래가 OST로 삽입되기도 했다. 이은주의 장례식 당시 이틀 연속으로 빈소를 지키고, 바다와 함께 추모곡까지 불렀으며[38] 직접 운구도 도맡았다.

문제는 4개월 뒤 전인권이 한겨레와 추모 인터뷰를 하며 이은주와 4년간 연인 사이였다고 주장하며 파문이 일었던 것. # 자신과 이은주의 사이를 레옹과 마틸다의 관계로 비유하며,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를 이야기했다. 두 사람이 가까운 지인 사이인 것은 대중들이나 이은주의 팬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사랑하는 연인 사이였다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기에 논란이 많았다.

이은주의 친한 언니인 하 씨는 "전인권 씨는 이은주가 살아 있었을 때부터 이은주의 끈질긴 스토커였다"라면서 하루에 20차례씩 문자 메세지를 보내고, 새벽에 전화를 받지 않으면 폭언을 녹음해서 보내는 등 스토커 수준의 행동을 일삼았다고 밝혔다. #

이에 대해 이은주의 친오빠는 팬클럽 카페에다 게시글을 하나 올렸는데 "문자뿐만 아니라 당신과의 교류는 단순한 친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을, 어찌하여 그렇게 착각하면서 이제 고인이 된 은주를 두 번 죽이시는지 가슴이 아픕니다"라는 심정을 전한 이후에 "그리고 그걸 기정 사실인 양 언론에 떠들어 대는 전인권 씨를 보며, 연민마저 느낍니다"라며 답답하고 씁쓸한 심정을 밝혔다. #

이런 논란과 계속되는 반론, 유가족 측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전인권은 "수개월이나 이은주와 연인 관계였다"는 주장을 반복하여 국민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심지어 전인권은 콘서트에서 "제가 물의를 일으켜서 신나죠?"라고 말하며 자신과 관련된 언론과 대중의 관심과 논란을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대중들을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

이에 대해 시골 의사로 알려진 박경철은 자서전에서 전인권의 행위를 늙은 추물의 집착이라며 비꼬기도 했다.[39]

이은주를 사랑했는가 안 했는가를 떠나서, 이미 고인이 된 이은주가 반박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구원의 여지가 없다.

일례로 미국에서는 가수 모비가 자서전에서 14살 가량 연하인 나탈리 포트만과 잠깐 사귀었다는 식의 얘기를 했다가 포트만이 부인하는 바람에 사과한 적이 있다. 나탈리 포트만이야 멀쩡히 살아 있기 때문에 반박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이은주는 이미 고인이므로 어떤 입장 표명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설사 진짜 둘이 연인 관계였어도 발언을 신중하게 해야 하는 상황인데, 심지어 연인 관계였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할 얘기는 아니었던 것.

다만 언론이 이 둘의 관계를 너무 확대해석해서 몰아간 점도 적지 않다. 전인권이 실제 인터뷰에서 한 발언은 “은주가 있었다면 애썼다는 문자 한 통 보냈을 텐데…” 정도였지만 이걸 기사들이 사랑했다는 식으로 기사를 냈다는 것. 커뮤니티나 유튜브 등지에서 전인권이 일면식도 없던 이은주를 쫓아다녔다는 식의루머가 떠도는데, 이는 거짓이며 실제 두 사람은 위에 서술된 것처럼 친분이 깊었다. 다만 둘의 관계가 단순히 친한 선후배 관계인지, 아니면 전인권의 주장처럼 연인 관계였는지에 대한 진위여부가 있을 뿐이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가 진짜 어땠는지는 본인들만 알 것이다.

4.4. 이웃집 기왓장 투척 사건

2021년 1월 전인권 자택의 이웃집이 지붕 공사를 했는데, 전인권이 조망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이웃집에 기왓장을 투척했다는 신고가 접수되어 경찰이 전인권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다. # 이에 본인은 "기왓장을 던진 게 아니고 돌을 던진 것"이라고 밝혔다.

5. 최성원과의 파란만장한 관계

그의 평생의 동료이자 음악적 경쟁자였던 최성원과는 말 그대로 애증으로 점철된 30년의 세월을 보냈다. 흥미롭게도 최성원의 별명 중에 '한국의 폴 매카트니' 가 있는데 전인권을 존 레논에 대입하면 꽤나 그 관계가 들어맞는다. 포크락을 베이스로 하여 대중친화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최성원과 락킹한 사운드로 시대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던 전인권. 각각의 음악 성향도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에 놀라울 정도로 대응된다. 또한 전인권이 이것저것 문제로 언론사에 구설수로 오르내리고 방황하는 동안 최성원은 가요계 원로로서 별 풍파 없이 안정적이게 지냈고. 심지어 들국화 시절 포지션도 최성원은 베이스 & 보컬, 전인권은 리듬 기타 & 보컬이었는데, 이것은 정확히 비틀즈 시절 폴 메카트니와 존 레논과 대응된다. 흥미로운 건 주찬권의 역할인데, 주찬권은 링고 스타가 비틀즈의 링크(link)였던 것처럼 들국화라는 밴드를 지탱하고 전인권과 최성원을 연결시켜 주었으며, 둘 다 밴드의 드러머였다.[40]

공감토크쇼 놀러와에서 들국화가 한 얘기를 요약하자면 안 싸운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고 한다. 그렇다고 심각한게 아닌 사소한 이유. 예를 들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물론 이건 농담이고, 서로의 주관이 너무 뚜렷하며 각자 음악적 역량 역시 뛰어났기에 충돌하다 보니 사소한 이유로 싸운게 아닌가 싶다.

이제는 전인권도 오랜 방황의 길에서 벗어났고, 최성원 역시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기에, 무엇보다 다들 이제는 산전수전 다 겪으며 웬만한 평지풍파에는 눈 하나 흔들리지 않을 내공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게 된 듯. 그러나 얼마 전 뉴스룸에서 전인권이 "나와 최성원은 안 맞는다. 앞으로 들국화 재결성은 힘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결합한다면 베이스 대신 어쿠스틱 기타를 쳐줬으면 좋겠다고. 이유는 팀에 이미 베이스가 있기 때문.

6. 여담

7. 관련 문서



[1] 음력 9월 4일 [2] 이후 삼청동에서 성장하였다. [3] 다음 프로필 기준 [4] 1988년 3월 17일 사망. [5] 1984년 5월 30일 사망. [6] 1939년 3월 2일생으로 TBC, KBS에서 활동한 드라마 연출가이자 연극 연출가. 2024년 4월 14일에 사망했다. 형의 마지막 연출 드라마인 가시나무 꽃 드라마에 ost를 참여했다. [7] 이혼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별거였고 전인권이 이를 이혼으로 적으면서 생긴 일이다. 1982년 결혼하여 2002년부터 별거를 시작했고 전인권이 필로폰 투약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출소한 뒤 2008년 재결합했다가 전인권의 모로핀 중독으로 이듬해 3월 다시 결별했다. 그러나 약물에 중독되어 망가져가는 전인권을 안타깝게 여긴 아내가 전인권의 요양원 입소를 주관하면서 다시 인연이 닿았고 요양원에서 퇴소한 뒤 다시 재결합하여 현재까지 함께 살고 있다. 여러모로 전인권의 삶을 다시 일으켜준 구원자 같은 존재다. 전인권도 인터뷰에서 가족, 특히 아내의 사랑이 없었다면 다시 재기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여러 차례 밝히기도 했다. [8] 現 서울재동초등학교 [9] 소속 가수로는 소찬휘와 전인권이 있다. [10] 자신의 옛 이야기, 추천 음악, 공연 소식 등을 올리고 있다. 글을 읽어 보면 전인권 특유의 화법을 느낄 수 있다. [11] 당시 명지고는 역사도 길지 않고 종교( 개신교) 분위기가 강해서 당시 강북에서 후순위에 있었다. [12] 신해철의 라디오 프로였던 고스트네이션에서 말하기를 반주 한큐에 녹음, 보컬 한큐에 녹음 그리고 끝이었다고(...) 그때는 그랬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는데, 그래서 백두산이라든지 당시를 전후로 한 여러 밴드들도 같은 이유로 1집의 퀄리티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13] 헤비메탈 밴드 백두산의 드러머로 간다. [14] 전인권의 말로는 "굉장히 부드러운 느낌의 아티스트지만 은근히 터프하다"고 하며 특히 "운전할 때 보면 정말 무섭다"고 한다. [15] 트리오 시절의 들국화는 전인권, 조덕환, 허성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3인조였다가 최성원이 나중에 재합류하게 되는데, 김도균은 아마도 허성욱이 후에 들어온 멤버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16] 산에 있는 폭포에서 소리를 지르며 연습했는데, 명창들이 소리를 연습하는 방법과 동일하다. [17] IZM에서 2015년에 임진모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전인권이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지금도 3옥타브 도#까지는 쉽게 올라간다고 한다. [18] 판타스틱 듀오에서 한 말. [19] 공감토크쇼 놀러와 방바닥 콘서트에서 확인할 수 있음. [20] 침고로 김현식과는 생전 매우 절친한 사이였으며, 장례식에서 김현식의 관을 운구한 사람 중 1명이 전인권이었다. [21] 이 곡의 탄생비화가 재미있다. 대마초 사건으로 구치소에 있을 때 같은 방을 쓰던 도둑이 있었는데, 전인권은 도둑질을 정말 잘한다는 그 도둑의 실력이 궁금해서 자신의 집주소를 주며 "내 집을 네가 털어가면 널 정말 인정해주겠다." 라고 제안을 했고 석방 후 집에 가보니 도둑은 정말 전인권의 집을 완전히 털어간 상태였다고 한다. 완전히 털린 집을 확인하던 전인권은 딸이 텅 빈 집 안에서 <둥글게 둥글게>를 부르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있는데, 저 도둑 친구는 또 저렇게 사는 구나. 같은 시간 속에서도 모두의 삶을 다르구나' 라는 메세지를 담아 돌고돌고돌고를 작사/작곡했다. [22] 같은 시기 최성원 역시 솔로 1집 타이틀 곡 제주도의 푸른 밤이 큰 히트를 기록했다. [23] 사실 이 노래는 1990년대에 이미 녹음이 완료됐으나 상술한 구속 크리티컬로 오랜 기간 미발표곡으로 남았다가 2001년 MBC에서 가수들이 나와 영화 친구를 패러디한 추석특집 개그 프로그램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24] 여담으로 교도소 신세를 지면서 독방 안에서도 매일같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25] 이 시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 자살을 생각했었다고 훗날 방송에서 밝히기도 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위패를 찾아가서 인사를 하며 "엄마 너무 힘들어서 이제 그만 살래요" 라고 독백을 한 뒤 가지고 있던 약을 모두 땅바닥에 버리고 죽으려했지만, 걸어가던 중 다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자살을 포기했다고. [26] 후술되어 있지만 전인권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사람도 아내였다. 전인권의 모르핀 중독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서 별거 상태였는데, 폐인처럼 망가져가는 전인권을 두고 볼 수 없어 팬클럽 회원들과 계획을 짜고 그를 입원시켰다고 한다. [27] 정확하게는 작사만 한 것이다. 원곡은 알 스튜어트의 'The Palace of Versaille'라는 곡이다. 들국화 재결성 이후 MBC 공감토크쇼 놀러와에 출연했을 때 다른 멤버들이 소개한 일화에 따르면 'The Palace of Versaille'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야 이거 인권이더러 부르라고 하는 노래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28] 그나마 음색이 전인권과 비슷한 하동균이 ' 불후의 명곡'에서 이 노래를 부른 뒤 큰 화제를 일으킨 바 있다. 방송 후 그가 노래 부른 영상이 다시보기 1위를 기록했을 정도. [29]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17세였던 1970년~1971년부터 마약을 시작했다고 한다. [30]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당시 직접 손으로 드럼비트를 짜며 작곡했다고 한다. 한밤의 TV연예에서 살짝 공개한 적이 있는데, "나는 광대다!"라는 가사가 반복된다. [31] 노무현의 죽음을 애도하는 차원에서 본인의 콘서트는 취소했다. 참고로 전인권은 2002년 대선 당시 노사모에 가입해 축하 공연도 했으며 노무현 캠프에서 문화예술인 자격으로 그를 지지하기도 했다. [32] 아침에 일어나면 모두들 축 늘어져 의사로부터 약을 받았으며, 아침식사로 나온 죽을 겨우 한 두스푼 떠 먹고 그 다음 취침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한다. 원래는 식욕도 떨어져 밥을 안 먹으려 했으나, 식사를 거부하면 강제로 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었다고... [33] MBC에서는 명단에 없었다. SBS는 별도의 출연금지 명단이 없는 대신 자체 가이드라인을 통해 결정한다고 했다. 참고로 KBS의 출연금지 명단은 MBC에서도 준용한다고 한다. [34] 심지어 전인권은 자신의 자서전 제목도 '걱정 말아요 그대'라고 지었을 정도 이곡은 그가 큰 애착을 가졌던 대표곡이다. [35] '블렉 푀스'가 바른 표기법이지만, 대부분의 국내 언론이 '블랙 푀스'라고 표기했다. [36] 본 영상의 라이브는 1976년에 진행한 라이브이다. [37] 2017년 5월 25일자 세계일보 인터뷰 기사인데, 나중에 내용이 수정되었는지 원래 인터뷰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김경호 인터뷰 중 전인권 부분. [38] 걱정말아요 그대를 불렀다. [39] 물론 전인권을 비판하려고 쓴 것은 아니고, 주변 사람의 이야기와 전인권의 행위를 비교하면서 언급된 것이다. [40] 실제로 주찬권이 살아있을 때는 매일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의 관계를 주찬권이 중재하는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주찬권이 사망한 뒤 그 역할이 사라지자 두 사람의 사이를 중재해줄 사람이 없어 사이가 다시 악화되었고 결국 들국화는 해체하게 된다. [41] 지금은 청운동에서 7018번 버스를 타면 단번에 명지중고교까지 갈 수 있다. [42] 여담으로 2007년 2차 발표 때 교도소에서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2018년 3차에는 유재하 1집이 1위를 차지하면서 2위를 차지했다. [43] 일상으로의 초대를 불렀다. [44] 참고로 친딸의 결혼식이 전인권이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뒤 참석한 첫 대외행사였다. 전인권은 이때 수염을 모두 깎는 등 단정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참석해 하객들과 기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45] 실제로 선미는 원더걸스 해체 이후 가시나로 성공적으로 솔로가수로 거듭났고 가시나 이후에 낸 앨범들 모두 1위를 차지했다. [46] 실제 놀러와에 출연했을 때 마약 후유증 때문에 치아 상태가 좋지 않다고 밝혔다. [47] 인터뷰했던 기자의 언급에 따르면 중간중간 잠에 빠져들거나, 자신의 노래를 불러주거나, 계속 화장실을 가는 등 불안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같이 다니던 매니저에게 말보로를 사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48] 김도균 역시 2000년대 초반 무렵 전인권과 합동콘서트를 할 때, 대기실에서 대화를 하던 중 전인권이 정선에 자주 드나든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방송에서 말하기도 했다. [49] "형님 도박 계속하시다가 인생 종칠 거예요?"라고 아주 강한 어조로 말했다고 한다. [50] 실제 김대중은 재임기간 내내 야당과의 협치와 정치보복 근절 등을 약속하며 자신의 정적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시켜줬고, 한나라당과 10차례 이상 영수회담을 할 정도로 급진적인 태도를 지향하고 야당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51] 안철수 후보를 2012년부터 지지했다고 2017년에 밝혔다. 이미 전에도 전인권은 안희정에게 호의적이었다는 이유로 비슷한 일을 당한 전적이 있다. [52] 2007년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됐을 때 노회찬이 직접 춘천교도소까지 면회를 왔다고 한다. [53] 이상윤의 요청으로 불렀다 [54] 전인권의 노래를 통해 위로가 됐기에 운 것 같다. 육성재는 이전 방송분에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중에도 좋아해 줄 지 걱정되어 불안하다는 얘기를 전인권에게 한 적이 있다. 이상윤 역시 육성재와 마찬가지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고민과 불안감 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직업인데 이를 전인권이 ' 제발 '을 통해 위로해주고 격려해줬기에 눈물을 보인 것이다. [55] 2003년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통일의 노래' 공연 때 게스트로 참석하면서 처음 만났으며, 전인권이 필로폰 투약으로 교도소에 들어가있을 때 매주 영치금을 보내줬다고 한다. [56] 본관은 전인권은 정선 전씨고, 전인화는 문경 전씨이다. [57] 80년대 당시 보컬들 중 외모로 가장 많은 팬들을 끌어모은 사람은 이승철이었다. 김태원이 한 인터뷰에서 둘이 함께 무대에 서면 소녀팬들이 이승철 주위에만 한꺼번에 몰려들었다고 언급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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