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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엥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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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프리드리히 엥겔스[1]
Friedrich Engels
파일:Friedrich_Engels_portrait_(cropped).jpg
출생 1820년 11월 28일
프로이센 왕국 라인란트 바르멘[2]
사망 1895년 8월 5일 (향년 74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국적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1803-1892).svg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철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 인류학
학력 엘버펠트 김나지움 (중퇴)
베를린 대학교 (무학위)
배우자 메리 번스 (1843년 ~ 1863년, 사별 / 사실혼)[3]
리디아 번스 (? ~ 1878년, 사별 / 사실혼)[4]
종교 무종교( 무신론)
서명 파일:프리드리히 엥겔스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초기 맨체스터 시절2.3.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혁명가 활동2.4. 다시 맨체스터로2.5. 아내의 사망 관련한 일화2.6. 양자 입양2.7. 런던으로 이사2.8. 말년
3. 영향4. 주요 저서5. 어록6. 평가7.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젊은 시절 엥겔스.jpg 파일:중년 엥겔스.jpg 파일:엥겔스.jpg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독일 철학자, 경제학자, 정치이론가, 혁명적 사회주의자. 독일 태생으로 젊은날까지 독일에서 삶을 거쳐 영국에서 활동했다. 카를 마르크스의 지적 동료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 라인란트주 바르멘(Barmen, 오늘의 부퍼탈)에서 부유한 방직 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엥겔스 집안은 매우 돈이 많은 자본가 집안이었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비교적 노동자들의 처우에 신경을 써주는 편이어서 동네주민들에게는 존경받았었다. 당시에는 흔했던 어린이 노동 착취를 하지 않았고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학교까지도 따로 마련해주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신 가문의 공장 노동자 아이들과 같이 스스럼없이 어울려 놀고는 했는데, 이런 그의 성장 환경은 후일 그가 영국 솔퍼드의 슬럼가와 파리의 공산주의자 클럽을 어색함 없이 돌아다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독실한 개신교 신도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에서 고전 독문학과 독일 민족주의에 관심을 쏟는 것을 보고, 아들을 자신 같은 자본가로 키우기 위해 김나지움을 자퇴시키고 집안의 사업을 물려주기 위한 후계자 수업을 강행했으나, 그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기독교에 대한 회의주의 및 헤겔 철학에 빠져들었다. 이 시기에 그는 '도이칠란트 통신'에 지배 계급을 비판하는 수많은 글을 내었다. 트리스트럼 헌트가 쓴 엥겔스 평전에 따르면 엥겔스는 자신이 좋아했던 문학 분야, 시 짓기 실력은 별로였으나 신문 기사를 쓰는데는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1841년에 엥겔스는 베를린에서 지원병으로 포병 연대에 들어 갔으며, 베를린 대학교에서 쇠렌 키르케고르, 미하일 바쿠닌 등과 함께 철학 강의를 청강하면서 과거 자신이 매료되었던 헤겔주의 역시 비판적으로 분석하게 되었다. 당시 엥겔스가 사귀었던 친구로는 그 유명한 카를 마르크스가 있었는데, 마르크스 같은 불량 학생과 어울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 그의 아버지는 그가 군복무를 끝내자마자, 열심히 일하면서 나쁜 친구들과 관계를 끊으라는 뜻에서 영국 맨체스터로 보냈다.

2.2. 초기 맨체스터 시절

맨체스터에서 엥겔스는 한편으로는 샴페인 마시기 등등 부르주아적 취미를 즐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 노동 계급의 비참한 삶을 연구하는데도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맨체스터에 도착했을 당시 1842년에는 맨체스터의 공장주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일방적으로 50% 삭감하고 이에 노동자들이 시위로 저항하자 군인들을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하는 이른바 플러그 폭동[5]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했던 시점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맨체스터 시는 면방직 산업이 발달하면서 인구가 급증했지만 아직 도로와 하수도 시설이 미비하여 노동자들의 거주 환경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엥겔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엥겔스 역시 돈을 펑펑 쓰던 부르주아 출신이라는 점을 가지고 엥겔스를 위선자라고 조롱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당시 유산계급 입장이던 엥겔스가 직접 더럽고 비참한 환경에서 거주하는 노동자들을 자주 찾아가서 교류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6][7] 엥겔스는 맨체스터에서 차티스트 운동 관련자들과 연을 맺었으며, 영국의 여러 언론지들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실 비평은 마르크스가 이상적 사회주의를 비롯한, 현실에 맞지 않는 사회주의 조류들을 극복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고유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3.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혁명가 활동

1844년, 마르크스와 파리에서 재회한 뒤로 그는 마르크스의 열성적인 동지이자 후원자가 된다. 마르크스는 심각한 악필이었는데, 이런 마르크스의 글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엥겔스 뿐이었다. 이는 두 사람의 우정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부분이다.

여하튼 마르크스와 함께 의인동맹에 가입한 후 의인동맹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바꾸고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함께 저술하였다. 1848년 유럽 각지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엥겔스는 독일 각지를 전전하며 혁명 활동에 참여하는데,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군과 몇 차례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8] 엥겔스는 공개수배 대상이 되었고, 엥겔스의 가족들까지 프로이센 경찰에 끌려가서 심문의 대상이 되면서 가족들에게 욕을 먹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자 결국 그는 이탈리아를 거쳐 다시 영국으로 망명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엥겔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무신론자에 공산주의자가 된 것을 무척 가슴아파했는데, 다른 한편으로 엥겔스는 아버지가 학교를 못 다니게 하는 바람에 결국 정식으로 대학생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컴플렉스와 원망감을 가졌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엥겔스는 "제발 좀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나쁜 친구들과 그만 어울려다녀라"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호소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엥겔스의 여동생 역시 공산주의자와 결혼하자 분노한 엥겔스의 아버지는 엥겔스에게 보내던 용돈을 끊어버렸고, 엥겔스는 한동안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부쳐주는 용돈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한편으로 엥겔스의 친척 중 상당수가 반혁명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엥겔스가 혁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 때문에 자신들도 취조를 당하고, 같은 동네 이웃 자본가 가문들이 엥겔스 가족들을 험담하면서 엥겔스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진 것은 덤이었다.

2.4. 다시 맨체스터로

1849년 엥겔스가 런던으로 망명에 성공한 이후, 카를 마르크스도 아내 예니 마르크스를 데리고 런던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마르크스 부부는 극심한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는데, 1849~1850년 당시는 엥겔스 역시 마르크스를 도와줄 수 없는 처지였다.[9]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 부부 사이에서 갓 태어난 아이 기도가 영양결핍과 잦은 이사로 병을 얻어 사망하자, 엥겔스는 결국 친구 마르크스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 가족들과 화해하고 맨체스터 사업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친애하는 엥겔스 선생님[10]은 정기적으로 연봉의 절반 이상을 마르크스 가족에게 나눠줬다. 엥겔스가 회사 일을 했던 20년간 그 총액은 3000-4000파운드(현대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45-60만 달러)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그에게 돈을 더 달라는 편지를 부칠때마다 "솔직히 정말이지 자네한테 이런 편지를 쓰느니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네. 반평생을 남한테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건 정말이지 정신이 피폐해지는 일이야"같은 미사여구를 사용하곤 했다.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 엥겔스 평전 / 트리스트럼 헌트

엥겔스의 아버지는 엥겔스가 무신론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다시 가족 사업에 뛰어드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엥겔스 가문의 맨체스터 사업장 "에르멘 앤 엥겔스"는 한 편으로는 사업이 번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업자들 사이에 내분이 심화되어가는 상황이었다. 엥겔스의 여동생이 아버지에게 엥겔스 가문의 몫을 동업자들이 모조리 가로챌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결국 엥겔스는 에르맨 앤 엥겔스 사에 복귀할 수 있었다. 에르만 가문 동업자들은 엥겔스의 복귀를 탐탁지 않아하며 그를 따돌렸지만, 엥겔스는 유럽 대륙에서 갈고 닦았던 정치력이 있었고[11] 에르멘 가문 동업자들의 내분에 빠진 빈틈을 이용해 회계 장부들을 꼼꼼히 점검하면서, 그동안 에르멘 동업자들이 마음놓고 떼먹던 이익금 상당수를 아버지에게 부쳐주는 데 성공했다. 엥겔스가 사업에 성실하게 몸담으면서 절연 직전까지 갔던 부자 관계도 회복되었고 엥겔스는 회사 수익금의 7.5%를 배당받는 주요 임원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한편 맨체스터 시는 엥겔스가 떠나 있던 몇 년 사이 빠르게 변해 있었다. 빈곤 문제가 극심하던 맨체스터 시는 1846년 영국 곡물법이 폐지되면서 노동자들이 더 저렴한 가격에 식료품을 구할 수 있게 되고, 영국 면직물이 중국과 호주 등으로 수출되면서 커다란 호황을 누리면서 신흥 중산층들이 성장하는 단계가 되었고 오물로 뒤덮여있던 도로가 새로 포장되고, 빈민가가 있던 자리에는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엥겔스는 자신이 맨체스터를 바탕으로 저술했던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가 몇 년 만에 구닥다리 책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엥겔스의 공장 역시 노동자들의 처우가 과거보다 많이 개선된 상황이었고[12] 이러한 여건 하에 엥겔스는 별다른 죄책감 없이 "자본론 말마따나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여 얻은 자본"을 친구 마르크스의 생계비로 보태줄 수 있었다.[13]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마르크스 지원은 일반적인 우정만으로 설명되기 힘든 것이었다. 에르멘 앤 엥겔스 사로 복귀한 초창기에는 아직 엥겔스 역시 아버지로부터 의심을 받아 충분한 급료를 받기 이전이었지만, 엥겔스는 월급날마다 마르크스 가족들에게 뭉칫돈을 보내주었다. 엥겔스 평전의 저자 트리스트럼 헌트에 따르면, 엥겔스는 동업자 고드프리 에르멘이 사무실을 비우고 없을 때는 금고에서 우편환이나 우표, 5파운드짜리 지폐를 비롯해 몇 파운드씩 슬쩍해 보내기도 했다. 그 밖에도 쇼핑조차 귀찮아하던 마르크스를 위해 식료품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보내기도 하고, 마르크스 딸들의 생일 선물까지 꼬박꼬박 챙겨줬다. 딱 한 번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이가 나빠진 적이 있었는데, 아내가 죽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편지를 썼는데 마르크스가 답장에 돈 좀 꿔달라는 말을 써 넣어 엥겔스가 폭발한 것이다. 마르크스 본인은 무신론자였어도 어머니가 신실한 유대교 랍비 가문이었던 영향으로 성 문제에 있어서 다소 보수적이라, 자신의 친구 엥겔스가 사회적으로 경멸받는 아일랜드인 출신 문맹하고 사실혼 관계였던 것을 내심 못마땅하게 여겼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심결에 그동안 도와주던 친구 심경을 긁어놓으니 사달이 났던 것.

2.5. 아내의 사망 관련한 일화

엥겔스는 1863년 1월 사실혼 관계였던 아내 메리 번스가 사망했을 때 마르크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메리가 죽었다네. (중략) 월요일 저녁까지는 아주 건강했는데.. 지금 심정을 뭐라 말 못하겠네. 불쌍한 여자, 정말 진심으로 날 사랑했는데."
이에 마르크스는 편지로 답장했다. 이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메리가 죽었다는 소식에 정말 놀랍고 슬펐다네. 정말 착하고 위트 있고 자네를 참 좋아했는데"라는 말로 애도의 편지를 그럴듯하게 시작했으나 그건 의례적인 말에 불과했고, 곧바로 아이들 학비와 집세 독촉으로 힘들다는 푸념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었다.
"내가 요즘 겪고 있는 이런 저런 끔찍한 일들을 자네한테 말하는 건 너무 이기적이겠지. 하지만 그런 일도 자꾸 겪으니까 면역이 되더라고. 새 재난에 신경 쓰다 보면 이전 것은 잊히는 거지."
그러고 나서는 말미에 기운을 내라는 뜻으로 "건강하기를!"이라는 인사까지 덧붙였다. 마르크스는 한 번도 메리를 사회적으로 대등한 존재 혹은 엥겔스에게 걸맞은 반려로 여긴 적이 없어서 그녀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친구의 매정함에 충격을 받았다. 이른바 "속물 지인들"도 가장 친하다고 자부하는 마르크스보다는 더 많은 위로와 동정을 표시했기 때문이었다. 엥겔스는 5일 동안 연락을 끊었다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이번에는 나에게 닥친 불행도 있고, 자네가 그 일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인 탓에 나로서는 더 빨리 답신을 보내기가 정말 어려웠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네. (중략) 자넨 그 일이 자네의 그 잘난 '냉철한 정신'을 발휘할 기회라고 생각했지? 그래, 좋아!"
마르크스가 미안해한 것은 당연했다.
"내가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은 정말 잘못됐어. 그리고 보내고 나서 바로 후회했네. 하지만 진짜로 무정해서 그런 건 정말 아니야."
일주일 뒤 마르크스는 집안 사정이 너무 어려워서 무심결에 그랬다는 변명의 편지를 보냈다. 매우 쑥스러워하며 한 얘기지만 마르크스로서는 유례가 없을 만큼 드문 사과의 표현이었다. 상처 입은 엥겔스는 사과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그의 답장은 이랬다.
"그렇게 솔직히 얘기해주니 고맙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았으니 그녀의 죽음에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지 않을 수 없지. (중략) 그 편지 정도면 됐어. 메리는 잃었지만 가장 오랜, 가장 좋은 친구까지 잃을 생각은 없다네"
이렇게 심각한 불화는 일단락됐고, 우정을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엥겔스는 100파운드를 에르멘 앤드 엥겔스 구좌에서 슬쩍해 마르크스에게 보내줬다.[14]

그리고 이 이야기에 후일담이 있다. 당시 아내가 죽으면 노처녀 여동생과 살림을 합치는 것이 빅토리아 시대의 관행이었기 때문에, 메리 번즈가 죽은지 18개월이 지난 어느 시점에 그녀의 여동생 리디아(리지) 번즈는 엥겔스의 연인이 되었다. 리디아 번즈는 울끈불끈한 성격의 메리 번즈보다 친화력이 높아 마르크스의 딸 투씨와도 허물없이 지냈다. 훗날 리디아 번즈가 죽기 전 종교적 이유로 결혼을 간청하자 당시 결혼제도에 회의적이었던 엥겔스는 기꺼이 혼인 성사를 치르고 혼인 신고도 올렸다. 엥겔스가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에 대한 집착을 접고 리디아 번즈의 소망을 들어준 극히 드문 사례였다. 리디아 번즈가 죽은 후 마르크스는 지난번의 일과는 달리 엥겔스의 슬픔을 함께 애도해주면서 바르게 처신했지만, 사적으로는 자신의 아내에게 글을 읽지 못했던 리디아 번즈를 무시하는 농담을 하곤 했다. 리디아가 죽은 지 이틀밖에 안되는 시점에서 마르크스는 아내 예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15]
"투시[16]와 렌쇼 부인, 펌프스[17]가... 죽은 여자의 잡동사니를 정리했어. 렌쇼 부인[18]이 편지 한 묶음을 발견하고는 물주 선생[19]에게 주려고 했지. 그 자리에 같이 있었거든. 그러자 그 친구가 그랬대. "됐습니다. 태워버리세요! 볼 것 없어요. 날 속일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아니까." 피가로[20]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나중에 렌쇼 부인이 투씨한테 그랬대. "물론 리디아의 편지를 본인이 써주고 받은 편지를 읽어주기도 했으니까 비밀로 할 얘기는 없다고 확신했겠지. 하지만 리디아로서는 그래야 할 내용이 있을지도 몰라"라고.

2.6. 양자 입양

카를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 마르크스 역시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무리한 부탁을 많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귀족 가문 규수였던 그녀는 마르크스와 결혼하기 이전 고향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미녀로 유명하였는데, 이러한 배경에서인지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씀씀이가 컸고, 엥겔스에게 눈치없는 행동을 할 때가 많았다.

마르크스가 영어로 대화는 가능해도 영어로 글을 쓰는데는 서툴렀기 때문에,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글을 영어로 번역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851년 마르크스가 미국 신문사 뉴욕 데일리 트리뷴로부터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해달라는 계약을 맺었을 당시에는 마르크스가 "고작 기사 쓰느라고 자신의 연구가 방해받기 싫다"며, 엥겔스에게 정기 기고를 대필해 줄 것을 부탁했고, 자신의 친구가 원고 마감을 잘 안지킨다는 것을 보아온 엥겔스는 친구 가족을 먹여살리느라 바쁜 와중에도 미국 언론에 정기적으로 기사를 기고하였다.[21] 마르크스 부부는 자신들의 생계를 책임져주는 엥겔스가 심지어 신문 기사까지 대필해준다는 것에 대해 별 고마움을 못느꼈는지, 한 번은 예니가 엥겔스에게 눈치도 없이 "우리 남편이 선생님이 쓴 기사로 미국 서부와 동부, 남부를 깜짝 놀라게 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라고 물은 적도 있다고 한다. 참고로 엥겔스도 마냥 성인군자는 아닌지라 미국 신문에 대필한 기사들은 평소 그의 수준에 걸맞지 않게 다소 대충 쓴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엥겔스가 대필을 맡은 그해 카를 마르크스가 가정부 헬레네 렌헨 데무트를 임신시켰고, 그렇게 태어난 사생아 프레디를 예니 마르크스가 직접 편지를 통해 엥겔스에게 맡긴 것이다.[22] 엥겔스는 혁명 동지의 가정을 지킴으로서, 혁명의 대의를 지킨다는 결정 하에 비공식적으로 마르크스의 사생아의 친부가 되어주고 그 얘기가 자신의 세례명을 쓰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당연히 엥겔스의 명예는 훼손됐다. 즉, 프레디[23]의 생부는 엥겔스로 알려졌고, 이 때문에 엥겔스는 주변인들로부터 많은 놀림을 받아야 했다. 아무리 엥겔스가 사람이 착하다고 해도 이는 도가 넘는 일이었다. 이런 까닭에 엥겔스는 프레디를 냉담하게 대하곤 했다. 프레디는 커서 재단사와 선반공 일을 하며 살게 된다.

마르크스의 딸 엘리노어(투씨)는 주변인들에게 따뜻했던 엥겔스 선생님이 왜 유독 자신의 아들에게 냉담했는지 의아해하곤 했는데, 엥겔스가 임종하는 자리에서 프레디는 사실 마르크스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고백하자 경악한다. 엥겔스는 친구 때문에 여생을 “사생아를 낳고 냉담하게 대하는 나쁜 아버지”라는 오명을 감내하게 되었는데, 이 스캔들은 엥겔스가 친구를 보호하고 사회주의의 진군을 촉진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얼마나 큰 희생을 감수했는지는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엘리노어는 프레디와 남매처럼 지내면서 프레디의 정신적 고통을 보상해주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고 한다.[24]

2.7. 런던으로 이사

1869년에는 20년 동안 일해온 에르멘 앤 엥겔스 사를 은퇴하고, 동업자에게 지분을 넘기는 조건으로 상당한 액수의 현금과 주식을 받아 마르크스와 자신의 노후 생계비로 사용하였다. 자유의 몸이 된 엥겔스는 1870년 여름 친구 마르크스가 사는 런던으로 이주하였다. 새로 이사온 집은 마르크스의 집과 10분 거리였다. "자본론 말마따나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여 얻은 자본"을 친구 마르크스의 생계비로 보태주는 모순된 상황은 그가 에르맨 앤 엥겔스 사를 퇴직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가 은퇴한 시점에서 런던은 금융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25] 엥겔스 역시 마르크스주의에서 악당으로 규정하는 금리생활자가 된 것이다.[26]

런던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엥겔스는 제1 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인터내셔널 벨기에 담당 연락서기로 시작하여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덴마크까지 담당하면서 엥겔스는 사실상 전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조율하는 책임을 맡았다. 엥겔스는 에르멘 앤 엥겔스 사에서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인터내셔널 내에서도 매우 좋은 평판을 얻었는데, 근면성실한 것은 물론 폴리글롯이라 유럽 각지에서 자신에게 배달되는 편지의 주요 내용들을 모두 정확하게 분류하고 기억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엥겔스는 당시 영국 내에서 구사자가 극히 드물었던 러시아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의 프로방스어, 스페인의 카탈루냐어 같은 지역어도 능숙하게 구사했고, 현지 공산주의자들이 현지어로 보낸 편지에 그 해당국 현지어로 답신을 보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물론 엥겔스 역시 제1인터내셔널 내에서 다른 혁명가, 사상가들과 발언권 싸움을 벌이는 일이 많았다.[27] 인터내셔널 내에서 종종 마르크스의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조롱받기도 했으며 특히 미하일 바쿠닌과의 대립이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권력 싸움을 벌일 때 종종 더티한 방법을 사용했던 것과는 별개로 인터내셔널 내에서 개인적인 평판이 매우 좋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제1인터내셔널이 해체된 이후 일이긴 하지만) 한번은 1878년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반사회주의법을 만들어 독일 내 사회주의 운동가들 상당수를 투옥시키거나 직장에서 해고시킨 적이 있는데 이 당시 엥겔스가 직접 나서서 체포된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정적이건 정적 아니건 가리지 않고 해당인들 가족들에게 밥을 굶지 말라고 돈을 꾸준히 부쳐주기도 했다.

2.8. 말년

마르크스 사후에는 그가 미처 다 쓰지 못한 자본론의 2권과 3권의 원고를 정리하여 출판하는 일로 한동안 바쁘게 지냈다. 마르크스 사후 그가 남긴 원고들은 출처 인용이 전혀 정리가 안 되어 있고 마르크스의 글씨를 해독할 수 있었던 두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예니 마르크스는 이미 마르크스가 사망하기 이전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다. 예니와 엥겔스 역시 마르크스의 악필을 완벽하게 독해할 수 있는게 아니라서,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예전에 편지로 주고 받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완성해나가야 했다. 마르크스가 얼마나 심각한 악필이었는지 2년에 걸쳐 자본론 2권 원고를 정리 출간하는 과정동안 건강관리를 잘 하는 것으로 유명하던 엥겔스의 시력이 급격히 악화되기도 했다. 의사의 처방 끝에 다행히 실명은 막을 수 있었다. 뒤이어 자본론 3권 출간까지 완료된 이후 엥겔스는 미국에서 익명으로 관광을 즐기며 마르크스의 악필과 씨름하며 악화되었던 건강을 회복하였다.

제 2 인터내셔널을 설립해 국제공산주의 운동에도 힘썼다. 말년의 주요정당으로 등극한 독일 사회민주당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마르크스의 사유방식 전체는 어떤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방법이다.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도그마들을 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토대로 더 탐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고 그런 탐색을 위한 방법이다.
사망하기 몇 달 전 엥겔스가 독일 정치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1895년 8월 5일 식도암으로 세상을 마쳤으며,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그의 유지(遺志)에 따라 해저에 가라앉혀졌다. 저서로는 『자연변증법 (Dialektik der Natur)』,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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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에는 마르크스, 레닌과 함께 공산주의 3대 위인으로 추앙받았다. 소련이나 동독의 정치행사를 보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3인의 초상화를 함께 배치한 경우가 많았다. 동독군 최정예 부대에 '프리드리히 엥겔스 연대' 이름이 붙었다.

3. 영향

산업화 이전 소작농들은 식물처럼 조용한 삶 속에 안주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이 없었더라면 그런 생활에서 결코 깨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엥겔스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농촌에서 쫓겨나서 멍한 전원생활에서 깨어나 공장에 떠밀려 들어간 다음에야 프롤레타리아로서 존재 이유를 자각하게 된다. 이 부분이 엥겔스가 공산주의의 전위대로서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기능을 처음으로 설명하는 대목이다. 노동자들이 농민과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는 본질적인 이유는 도시에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그의 후배 레닌이 러시아 상황에 맞추어 혁명의 주체로 노동자 이외에도 농민과 소수민족을 주목했던 것과 다르게, 선배였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이 활동하던 영국, 프랑스, 독일의 상황에 맞추어 부르주아 혁명 이후 다가올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를 도시 노동자로 한정하였다.[28]

또한 성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던 샤를 푸리에의 영향으로 가부장제에 대해 크게 비판하였으며, 생애 말년에는 미국의 인류학자 루이스 H. 모건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쓴 저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는 인류는 본래 모계 사회였으나 농업 혁명을 통해 부계사회로 바뀌었다는 이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는 또한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해 유산계급 혹은 소생산자 계급 남성의 여성억압의 원인을 남성이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재산을 확실히 자기 자식에게 상속하고자 여성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해결책을 상속할 재산 자체가 없는 노동계급에 의한 사회혁명을 통해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노동 발전 단계가 낮고 노동 생산물의 양이 제한적일수록, 그리고 사회의 부가 제한적일수록 사회질서는 혈연집단에 의해 지배된다.

엥겔스는 다가올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남녀 양성의 관계가 변혁될 것이라면서 공산주의는 사적 소유를 폐기하고 아이들을 공동체적으로 교육함으로서 아내는 남편에게 의존하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의존하게 되는 구조가 허물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소련의 피오네르 형성 이외에도 공공 탁아소 및 보육제도 확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다만 레닌[29] 이후에 집권한 스탈린의 경우 성문화나 가족 문제 관련하여 레닌이나 엥겔스에 비해 더 보수적인 입장이었고, 스탈린 시대 이후 소련은 낙태나 사실혼, 동성연애[30] 문제 관련하여 소련 초창기보다 보수적인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68혁명에 끼친 그의 영향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최종 목표는 전지구적 차원의 계급투쟁이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정점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국가는 소멸되고 인류는 해방되며, 노동자들은 인간으로서 저마다 타고난 모든 능력을 발휘하고 성적 자유를 누리는 낙원을 맞게 된다. 엥겔스가 목표하던 사회 즉 억압과 제약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도약하는 것이 바로 68 혁명의 이상이기도 했다. 엥겔스는 행복한 인생을 열망했고, 개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했으며, 사람들이 모여서 허심탄회하게 교류하는 장으로서 문화, 문학, 미술, 음악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3.1. 러시아 혁명에 미친 영향

러시아 혁명이 서구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탄이 된다면 서로 보완이 될 수 있고, 현재 러시아의 공동체적 토지 소유는 공산주의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1882년 『자본론』 러시아어판 2판 서문

상술한 것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이 어느 정도 완료된 상태에서 가능하다고 보았었다. 그래야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이 발전하고 여타 변혁의 조건도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후대의 마오주의와는 정 반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농촌 형태의 공산주의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입장을 보여왔다. 두 사람은 아시아의 농촌 공동체는 동양적 전제주의의 부산물이며, 사회주의를 향한 세계적 차원의 진군에 장애물이 되는 시대착오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같은 맥락에서 마르크스는 러시아 제국을 후진적인 자급자족 경제를 가진 나라로 평가하였고, 서구에 앞서 먼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일어날 나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1870년대 들어 서유럽에서 혁명의 가능성이 퇴조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만히 앉아서 실망만 하고 있는 대신 인류사의 초기 단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엥겔스는 미국의 인류학자 루이스 H. 모건이 1877년 출간한 『고대 사회: 야만에서 미개를 거쳐 문명에 이르는 인류 발전 단계에 관한 연구』를 읽고 원시 공산주의의 정치적 가능성을 다시 짚어보게 되었다. 이미 엥겔스는 1874년부로 러시아의 혁명 관련하여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와 있다."는 발언을 남긴 바 있었다. 엥겔스는 1885년에는 러시아에서 조만간 혁명이 터질 것이며 언제라도 터질 수 있다는 확정적인 견해를 남겼다.

이를 반영하듯 러시아 제국 내에서는 마르크스주의 해석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계파가 나누어졌다. 하나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이끄는 노동해방단 일파로 마르크스주의 정통 노선 해석에 입각하여 러시아 제국이 서구 유럽의 산업화, 계급의식 발전을 뒤따라야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들은 슬라브족의 전통적인 농업 공동체인 미르를 주목하고 러시아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길을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쿠닌의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러시아 농민들이야말로 사회주의의 달성을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며 미르에서 일하는 러시아 농민들은 천성적으로 공산주의자이므로 서유럽인들로부터 공산주의의 주도권을 빼앗아오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제 조건은 노동 계급의 생활 환경이 악화되면서 일어나는 계급 의식의 발전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서유럽에서는 미국으로 이민하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인구 압력이 약화되고, 대외 무역이 팽창하면서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으며, 두 사람의 살아생전 서유럽 산업사회에서는 기대했던 상황은 오지 않았다. "노동 계급이 생활 환경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계급 의식이 급속히 발전하고 계급투쟁이 활발해지는" 상황은 19세기 말 서유럽 대신 1차대전 당시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레닌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이우, 리가를 중심으로 노동자 계급이 성장했지만 그 이외의 국토 대부분 지역에서 농업인구가 우세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은 플레하노프의 견해와 나로드니키의 견해에 대한 정반합을 바탕으로 레닌주의 이론을 정립하고 러시아 혁명을 지휘하여 소련을 건국하게 되었다.[31]

러시아 혁명 관련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상 중 한 가지는 맞고 한 가지는 틀렸다. 두 사람은 러시아 농민들이 "부르주아적 소규모 자영농이라는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좀 더 높은 단계의 사회 형태로 옮아갈 수 있다."라고 주장했지만, 표트르 스톨리핀의 농업 개혁으로 러시아의 전통 농민 공동체는 붕괴되었고 자영농 부농 계급이 출현하게 되었다.[32] 다른 한편으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말도 남긴 바 있다. "50만 지주와 8000만 소작농들을 새로운 계급으로 바꾸려면 끔찍한 고통과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잔인한 여신이다. 역사의 여신은 수많은 시체더미를 밟고 전진한다. 전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평화적인 경제적 발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후일 러시아 혁명에 뒤이은 스탈린의 5개년 개발 계획, 농업 집산화를 예견한 듯한 섬뜩한 예언이었다.

3.2. 엥겔스와 마르크스-레닌주의

블라디미르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상술한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였다. 제네바에서 망명객 신세로 체류하던 플레하노프는 영국에 있는 엥겔스와 서신을 교환하며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구하곤 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최초로 변증법적 유물론[33]이라고 규정한 것도 플레하노프였다. 플레하노프가 생각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마르크스, 엥겔스가 헤겔 변증법을 적용해 발전시킨 수미일관한 세계관이었다. 플레하노프와 레닌은 마르크스보다는 엥겔스의 저작에 의존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후일 소련이 주도하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원동력이 된 철학도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설보다는 플레하노프가 엥겔스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공부한 바로 그 변증법적 유물론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단순히 사회주의 이론만이 아니다. 총체적인 세계관이며 하나의 철학적 체계다. 프롤레타리아를 주인공으로 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그 체계의 논리적 귀결이다. 이런 철학 체계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 한다.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1950 / 이오시프 스탈린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 당의 세계관이다.
소련공산당 약사 1938 / 이오시프 스탈린

한편 플레하노프는 소수의 전위대 주도로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는 식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는데, 이는 그가 마르크스, 엥겔스의 기본 이론 즉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들이 공산주의 혁명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라는 점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플레하노프는 위에서 아래로 찍어누르는 방식의 혁명을 일으켜봐야 "고대 중국에서 일어난 반란들이 그러했듯이 본질적인 변화 없이 황제 일인 독재 체제가 공산주의식 독재 체제로 바뀔 뿐"이라고 주장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 본래의 정치적 목표는 실종된다."고 우려하였다.
다시 정리해보자. 엥겔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그 끔찍한 만행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역사적 과오에 대한 사죄가 넘쳐나는 지금 우리 시대에도 답은 "노"일 수 밖에 없다. 상식적인 의미에서 엥겔스나 마르크스는 몇 세대 후에 역사의 주역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아무 책임도 질 수 없다. 그들이 아무리 두 사람의 이름을 걸고 정책을 시행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유시장 체제인 서방의 불평등 구조에 대해 애덤 스미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고, 현대 개신교 복음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마르틴 루터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고, 오사마 빈 라덴이 저지른 잔인한 테러에 대한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처럼, 스탈린주의 또는 마오쩌둥의 중국, 폴 포트의 캄보디아, 멩기스투의 에티오피아가 수백만 명을 죽인 것이 19세기에 런던에서 활동한 두 철학자 책임은 아니었다.

단순히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엥겔스는 20세기에 정권을 잡은 공산주의 계열 정당들이 했던 식으로 소수의 전위대가 주도하는 톱다운 방식의 혁명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그는 항상 노동계급(지식인과 직업 혁명가들이 아니라)이 주도하는 노동자들의 당만이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또 프롤레타리아가 사회주의에 도달하려면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과 정치적 각성이 전제돼야 한다고 확신했다. 소수의 공산당 지도부가 사회주의를 프롤레타리아에게 억지로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 엥겔스 평전 / 트리스트럼 헌트

물론 블라디미르 레닌은 볼셰비키로,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맨셰비키로 각각 노선 차이로 갈라지는 과정에서 레닌은 플레하노프의 이러한 우려를 씹었고, 레닌과 스탈린의 후배 마오쩌둥은 "고대 중국에서 일어난 역성혁명들이 그러했듯" 전통적인 유교 관료제 사회에서 본질적인 변화가 없는, 황제 일인 독재 체제를 계승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4. 주요 저서

엥겔스는 22살이었던 1842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의 철학을 비판하는 「셸링과 계시」(Schelling und Offenbarung)등의 논문을 내었고, 그 이후부터 마르크스가 죽은 이후까지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며 유럽 공산주의 운동의 중추로 자리매김했다. 다음 목록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 목록을 모은 것.

대표 저작 (1842~1895년)

5. 어록

정의(定義)란 늘 불충분하기 때문에, 과학에 대해서는 무가치한 것이다. 단 하나의 참된 정의는 오직 사물 자체의 발전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이상 정의가 아니다.
《반뒤링론》

6. 평가

영국에서 대규모 산업이 시작되는 시기부터 1845년까지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에 그치겠다. 상세한 설명을 원하는 독자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본질에 대한 엥겔스의 통찰이 얼마나 완벽한 것이었는지는 그의 책이 출판된 이후에 나온 각종 공장 보고서, 광산 관련 보고서 등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1권 관련 메모
엥겔스의 기여는 단순한 사실 제공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 『정치경제학 비판 개요』가 공산주의 이론의 선구적인 텍스트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매우 인색했다. 엥겔스는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를 탈헤겔화했다.
대중 정치 운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론이나 결국은 실패한 제1인터내셔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1880년대 엥겔스가 쓴 수많은 팸플릿과 선전물로 시작된다. 엥겔스가 고인이 된 동료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마르크스주의를 인류사에서 가장 설득력 있고 강력한 정치철학 가운데 하나로 발전시킨 것이다.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 엥겔스 평전 / 트리스트럼 헌트

카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의 근간을 닦은 인물이다. 19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별명도 붙었다.

이런저런 일화가 보여주듯이 학자와 사상가로서 업적도 마르크스에게 밀리지 않고[37], 인성적인 면에서는 마르크스보다 훨씬 좋았다. 사방에 적을 만들고 다녔던 마르크스와 달리, 엥겔스는 부유층 출신으로 태어나 사회 연구를 위해 빈민계층에 뛰어들어서 메리 번즈를 아내로 맞을 만큼 인망도 좋았고, 마르크스 생전이나 사후에나 엥겔스가 주관하는 파티는 유감없이 하객들 호강시켜주는 대범함으로도 유명했다.

엥겔스는 엄연히 19세기 인물이었고 현대 21세기 기준으로 그의 도덕성을 따지기는 애매하다. 엥겔스는 주변 정적들과 싸울 때 인종 문제를 약점잡을 때가 없지 않았는데, 이 외에도 맨체스터의 실러 연구소 회원 중에 유대인이 너무 많다고 불평한 적이 있으며, 주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서유럽인이 흑인이나 슬라브족, 아랍인보다 훨씬 문명화되었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인종 문제를 둘러싼 현실 정치 문제에서는 거의 언제나 당시 기준으로 무척 진보적인 편에 섰다. 미국 남북 전쟁에서는 북부연합을 지지했고, 1865년 자메이카 모란트베이 반란 때 영국 총독이 저지른 현지인 흑인 학살 행위를 비판했다. 반유대주의 성향이 없지 않았지만 1870년대 말 독일에서 유대인 박해가 다시 등장하자[38] 이를 크게 비판한 바 있다. 엥겔스는 진심으로 반유대주의를 후진적으로 혐오스러운 것이며 "타락한 사회계층이 현대 사회에 대해 보이는 퇴행적인 반응에 불과하며, 반동적인 목적에 이용당할 뿐"이라고 규탄했다. 엥겔스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반유대주의와 적극적으로 싸우라고 촉구했으며, 유대인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엥겔스는 아일랜드 관련해서도 아일랜드인 관련한 경멸적인 편견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일랜드인 여성과 결혼하고 리디아 번즈를 자랑스러운 아일랜드인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부르며 그녀를 도와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후원했던 사람으로서, 유대인 관련한 그의 견해와 행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엥겔스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떨쳐버리지는 못했지만 한편으로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반유대주의는 결국 역사가 발전하면서 소멸해야 되는 것이라고 믿고 이를 실천에 옮겼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7. 여담


[1] Engels는 '천사'를 뜻하는 Engel의 단수 속격 형태로 독일어 발음은 [ʔɛŋl̩s\]에 가까우나 국립국어원 독일어 표기법 외래어 표기 용례의 표기 원칙에 따르면 '엥겔스'로 표기된다. [2] 현재는 부퍼탈시의 일부이다. [3] 20년 간이라 작성돼있다. (Danny Crosby, “ Engels in Manchester BBC) [4] 메리 번스의 여동생. 메리 사후 엥겔스의 연인이 되었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죽기 직전 목사를 불러 1878년 9월 11일에 그와 결혼했다. [5] 분노한 노동자들이 기계의 플러그를 뽑아버리며 저항하면서 붙은 이름이다. [6] 당시 같은 시대 맨체스터를 방문했던 성직자인 리처드 파킨슨은 자신의 보고서에 "공장주인 면방직업자와 노동자들 사이에는 사적인 대화가 거의 없었다."라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7] 보수적인 토리당 당원이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조차도 맨체스터 내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관계에 관련하여 "그들 사이에는 교류도 없고 공감도 없다. 서로의 관습과 생각과 느낌을 전혀 알지 못한다. 완전히 다른 행성에 사는 사람들 같다."라는 비평을 남긴 바 있다. [8] 엥겔스의 참전 경험은 이후 엥겔스 뿐만 아니라 그의 소울메이트 마르크스가 영국 내 좌파들 사이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같이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엥겔스가 불리한 전투에서도 용감하게 활약했다는 증언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부상이나 장애 없이 퇴각하는데도 성공했기 때문에 평판이 더 높아진 것은 덤이었다. [9] 아버지 몰래 용돈을 부쳐오던 엥겔스 어머니마저, 엥겔스의 혁명 활동 때문에 가족들이 고초를 겪자 "내가 볼 때는 죄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상을 퍼트리고 다니는 아들한테 왜 재정지원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구나."라고 힐난하며 용돈을 끊어버렸던 상황이었다. [10] 카를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편지를 쓸 때 항상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11] 엥겔스의 일생 중 1844~48년 기간은 다른 혁명가들과 견제와 권력 다툼의 연속이었고, 영국에 올라왔을 당시 엥겔스 역시 권모술수라면 도가 튼 사람이 되어 있었다. [12] 여담으로 엥겔스의 공장은 1871년 벤클리프의 질병장례공제조합 보고서에 따르면 맨체스터 내에서 가장 급료가 좋고 근로조건이 안정적인 공장으로 알려졌다 한다. [13] 엄밀히 말하자면, 엥겔스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노동자 복지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다시 자본가 사회로 복귀한 이유는 친구 마르크스의 생계를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14] 트리스트럼 헌트 『엥겔스 평전』, 글항아리, 2010, p.379~381 [15] 트리스트럼 헌트 『엥겔스 평전』, 글항아리, 2010, p.440~441 [16] 엘리노어 마르크스의 애칭. 마르크스의 딸을 말한다. [17] 리디아의 조카딸 [18] 리디아(리지)와 엥겔스 모두 잘 알던 사이였다. [19] 엥겔스를 뜻한다. [20] 보마르셰의 희곡에 나오는 주인공 피가로를 뜻한다. [21] 너무 마르크스를 깎아내리고 엥겔스를 올려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독자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매일같이 편지를 주고받던 사이였고, 엥겔스가 기고하는 기사 상당수는 마르크스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글감을 얻은 것이기도 했다. [22] 마르크스는 종종 엥겔스에게 돈 좀 달라는 편지를 써야할 때 상황이 좀 난감하다 싶으면 아내에게 대필시키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예니가 직접 나서서 편지를 썼는지 마르크스가 대신 시켰는지 알 길은 없다. [23] 프리드리히의 영어식 이름 프레더릭의 애칭 [24] 여담으로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부르주아 남성들이 가정부 사이에 사생아를 두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았다.(출처: 도널스 서순의 유럽 문화사) 대개 이런 경우에는 가정부가 임신하자마자 멀리 내쫓고 나몰라라 하는 방식으로 사건 수습이 이루어지곤 했는데, 마르크스가 사생아를 친구 아들로 둔갑시킨 것은 엄밀히 말하면 예니 책임보다는 마르크스가 가정부와의 옛 정을 못 잊어서 그런 것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마르크스가 사망하기 직전 당시 가정부 데무트가 마치 어머니가 자식 돌보는 듯한 태도로 마르크스의 병수발을 들었다 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25]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런던은 "세계의 중앙은행"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런던의 자본가들은 페루의 철도에서부터 포르투갈 리본의 시가 전차, 호주의 뉴 사우스 웨일스의 광산, 인도의 차 농장에까지 투자를 하고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이를 두고 에릭 홉스봄은 1870년대 이후 1차대전 사이의 영국 경제를 두고 "영국은 경쟁력 있는 경제가 아닌 기생적 경제가 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26] 여담으로 엥겔스는 지인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에서 "난 주식 거래에 도움을 받기 위해 사회주의 언론을 참고할 만큼 그렇게 순진하지 않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보유 자산이 순식간에 반 토막 나고 말거야!"라고 쓴 적도 있었다. [27] 인터내셔널에 가입하면서 갑자기 성격이 공격적으로 변한 게 아니라, 1844년부터 1848년 사이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할 당시 다른 혁명가들에게 속임수를 썼다가 쫓겨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28] 소수민족을 혁명의 주체로 상정했던 레닌과 다르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의 아일랜드인 관련하여 부정적인 편견을 감추지 않았다. 그나마 아일랜드인 메리 번즈와 사실혼 관계였던 엥겔스는 아일랜드인들과 직접 교류라도 많이 하는 편이었지만, 마르크스의 경우 엥겔스의 아일랜드인 부인을 아일랜드 출신에다가 문맹이라는 이유로 대놓고 개무시하는 수준이었다. [29] 레닌 본인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헌신적이었지만 이와는 별개로 공산주의 사회가 발전하면서 기존의 가족 구조가 해체될 것이라는 엥겔스의 예언에 열광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소련 초창기 어느 젊은 공산당원 여성이 배가 고파서 같은 당원이었던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자, 아버지가 아무 말도 없이 몇 루블을 쥐어주어서 여성이 수프를 사서 배를 채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레닌은 "역시 공산당원들은 사적인 가족 문제와 공적인 공산주의 혁명의 균형을 맞출 줄 안다."며 매우 좋아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출처: 속삭이는 사회 1권 / 올랜도 파이지스 [30] 엥겔스 본인은 동성연애 관련하여 매우 적대적인 입장이었으나, 후대 공산주의자들 중에서는 동성애 관련해서도 성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31] 볼셰비키 혁명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 이외에도 라트비아 리가를 중심으로 한 라트비아 소총연대가 맹활약했는데, 리가는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고, 라트비아 소총 연대는 이러한 리가의 산업화 과정에서 독일계 유산계급과 갈등을 빚던 라트비아의 무산 계급과 지식인들이 중추가 되었다. 뒤이어 벌어진 적백내전에서는 농민들이 백군 적군 모두 다 싫지만 그래도 차라리 적군이 낫다는 판단 하에 적군한테는 덜 적극적으로 저항하였고, 그 결과 적군이 승리하면서 러시아는 소련으로 거듭났다. [32] 표트르 스톨리핀의 농업 개혁으로 러시아 제국의 농업 생산성이 크게 개선되고 자영농민들이 재산을 축적하자 레닌은 자신의 살아생전 혁명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33] 나중에 스탈린이 자주 언급하게 되는 바로 그 단어이다. [34] 슬라브족 민족 운동이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에 기반한 것인데에 반해 마르크스주의는 민족주의를 배격하기 때문이다. [35] 반듀링론이라고도 한다. [36] 이 때문에 서구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는 기계론적 유물론이라는 비판 내지 비난을 받기도 했다. [37] 마르크스와 동업의 계기가 된 맨채스터 노동자들의 삶의 실태 조사도 그렇고, 가정과 결혼 제도의 분석을 정치경제적 분석에 끌어 올리는 등, 마르크스주의를 단순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비전이 아니라 현실 사회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많은 현상의 치밀한 분석과 통계적 연구에 기반한 하나의 과학적 사상체계로 끌어올린건 엥겔스의 공이 지극히 크다. 세간에서 잘못 알려진거와 달리 결코 마르크스의 명성에 캐리 받은거 아니고, 마르크스랑 무관하게 살았어도 엥겔스는 위대한 사회학자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38] 당시 독일의 반유대주의는 사회주의 진영이건 보수파 진영이건 별반 다를 바 없었다. [39] 친구 마르크스와 다르게 건강 관리에도 신경을 잘 쓰던 편이라, 날씬하면서도 혈색이 좋은 편이었다. [40] 대신 친구들에게 개인적으로 보내는 편지에서 폴 라파르그에 대해 이런저런 욕설을 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