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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5년 6월 1일 | ||
오스트리아 제국
잘츠부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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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7년 7월 26일 (향년 52세) | ||
바이에른 왕국 밤베르크 | |||
묘소 | 테아티너 교회 | ||
재위기간 | 그리스 국왕 | ||
1832년 2월 6일 ~ 1862년 10월 23일 | |||
재임기간 | 제12대 총리 | ||
1837년 12월 8일 ~ 1841년 2월 10일 | |||
제14대 총리 | |||
1841년 8월 10일 ~ 1843년 9월 3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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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5eaf><colcolor=#fff> 가문 | 비텔스바흐 가문 | |
이름 |
독일어: 오토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Otto Friedrich Ludwi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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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오톤 프레이데리코스 루도비코스 (Όθων Φρειδερίκος Λουδοβίκο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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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루트비히 1세 | ||
어머니 |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테레제 | ||
형제자매 | 막시밀리안 2세, 마틸데 카롤리네, 테오델린데, 루이트폴트, 아델군데, 힐데가르트, 알렉산드라, 아달베르트 | ||
배우자 | 올덴부르크의 아말리 (1836년 결혼) | ||
자녀 | 없음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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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이자,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의 처음이자 마지막 국왕이다.2. 생애
당시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오스만을 약화시키기 위한 열강의 지원으로 인해 갓 독립된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와 어떤 관계도 없는 독일인이었는데, 아버지가 고대 그리스 애호가라서 왕위에 오른것이다. 그래도 즉위 초기에는 제법 환영을 받았는데,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바이에른 왕국 출신 섭정들이 섭정을 맡았고, 그리스 전역에 학교와 병원을 설립시키는 등의 일부 업적은 있었으나, 그리스의 현실과 맞지 않은 정책들을 남발했고, 긴축정책을 주창하면서 세금을 올려 오스만 제국시대보다도 과중한 세금을 부과한데다가, 독립전쟁 영웅들에게까지 사형선고를 남발하는 악정을 펼치다가 오톤의 손에 의해 해임되었고 1835년에 직접 통치에 나섰다. 하지만 직접 통치에 나선 오톤 역시 능력이 썩 좋지 않았고, 헌법 제정을 뒤로 미루면서 영토 확장 및 토목공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1843년에 그리스인들의 불만이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군대 역시 반발을 하면서 상황이 심삼치 않게 돌아가자, 결국 압력에 굴복하여 헌법제정을 하였다. 이를 1843년 혁명이라고 한다.그러나 오톤은 의회를 무시하고 내정에 지속해서 개입하는 방식으로 권위주의적인 통치[1]를 계속해서 벌여나갔기에, 그리스에서 인기는 그야말로 바닥이었다.
결국, 고대 그리스와 동로마 제국의 옛 땅과 영광을 되찾겠답시고 참전한 크림 전쟁에서 그리스는 러시아 제국에 줄을 서는 바람에, 러시아의 적인 영국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당해야 했다. 이로 인해 많은 배상금을 물어주고 그리스 항구도시 주둔권 및 여러 권리를 영국에게 넘겨준 여파로 안 그래도 바닥이던 인기는 사라질 지경이었다. 1861년의 암살시도는 간신히 넘겼지만 1862년에 오톤이 지방으로 순방에 나서는 동안 시위가 일어났고, 의회에 의해 탄핵당하면서, 결국 강제적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아말리와의 사이에서 무슨 방법을 동원해도 후사조차 얻지 못했으며, 친인척들도 개종을 해야된다는 조항으로 인해 왕위를 물려받는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왕위를 물려받을 자손이 없어[2],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는 폐지되었고, 덴마크 왕국의 제안으로 왕조도 글뤽스부르크 왕조로 왕조가 교체되었다. 그가 얼마나 그리스인에게 미움을 받았던지 1863년 그리스 새 국왕을 뽑는 국민투표에서는 24만 1202표 가운데 1표만이 그의 복위를 바란다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오톤은 고국인 바이에른 왕국으로 돌아갔다가 사망한다. 비록 혈통적으로도 그리스인이 아니었고, 그리스 본토에서 지독하게 인기가 없었던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그리스에 그리움이 심했던지, 바이에른에 돌아가서도 겨우 5년 만에 죽었다. 거기서도 그리스어를 사용하며 그리스의 전통 복장을 입고 지냈다고 한다.
3. 여담
- 위에 잘생긴 젊은 시절 초상화와는 달리 중년기에 찍은 사진을 보면 이런 느낌의 평범한 아저씨였다. 상술한 것처럼 그리스를 많이 그리워했는지 그리스의 전통 복장을 입고 있다.
- 건축과 예술을 사랑한 왕인 그 유명한 루트비히 2세의 삼촌이기도 하다. 올덴부르크의 아말리와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만약 오톤이 국왕의 신분으로 사망하여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가 계속 이어졌다면 오톤의 동생인 루이트폴트가 오톤의 뒤를 이어 그리스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3] 바이에른 국왕 오토가 폐위된 후 즉위한 루트비히 3세가 루이트폴트의 장남이므로, 이론상으로는 루트비히 3세의 후손이며 현 바이에른 왕위 요구자인 프란츠 폰 바이에른이 프란기스코스[4] 왕으로서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의 적법한 왕위 요구자가 된다.
- 현재 그리스의 의사당인 그리스 고궁은 원래 그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 재위 중인 1837년에는 오늘날의 아테네 국립 카포디스트리아스 대학교를 설립했다.
- 재위 중 그리스의 12대 총리, 14대 총리를 겸직하여 국왕과 총리라는 1인 2역을 수행하기도 했다.
[1]
종교부터도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과 달리 오톤은
가톨릭을 믿었고 끝까지 개종을 거부했다.
[2]
오톤이 워낙 인기가 없는데다 그의 형제들마저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을 거부해서 물려받을 후계자가 없는데다,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가 당대 그리스에서 워낙 여론이 안좋았기 때문에 오톤에게 자녀가 있었다고 가정하고 그 자녀가 왕위를 이어받았어도 왕조가 오래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3]
당시 그리스 헌법상 오톤의 형제와 그 자손들도 왕위 계승권이 있었기에, 오톤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는 오톤의 동생 루이트폴트가 추정상속인이었다. 그러나 이 헌법에 따르면 오톤의 후계자는 반드시 정교회 신자여야 했는데, 루이트폴트가 이 조건 때문에 오톤의 후계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상속을 거부하면서 후계구도가 붕 떠버린 것이다. 공화정 전환은 당시 그리스인 절대다수가 왕정을 선호해서 힘을 얻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열강의 조정에 의해
요르요스 1세가 차기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4]
독일어권의 프란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