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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21:35:02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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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사진
[1] Photography[2], Picture, View[3]
파일:Windows XP 배경화면.jpg
<환희(Bliss, 1996년 촬영)>[4]

1. 개요
1.1. 과정 및 원리
2. 역사
2.1. 초기 인식
3. 한국 최초의 사진들4. 예술
4.1. 미술에 끼친 영향4.2. 예술적 특징4.3. 진실성4.4. 순수사진작가
5. 사회
5.1. 사진 규격5.2. 사진학과5.3. 사진 포즈5.4. 사진병(촬영병)5.5. 촬영금지 장소5.6. 대중매체에서의 사진5.7. 사진과 시험
6. 용어7. 여담
7.1. 인물

[clearfix]

1. 개요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Photography'는 phos와 graphos의 합성어로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 동양에서는 사진이라는 단어로 해석하였는데 원래 '사진(寫眞)'이라는 단어는 함의하는 바가 photography와는 다르다.[5] 본디 포토그라피 발명 이전에 사진이라는 단어는 전통적으로 초상화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寫(사)는 인물의 모든 요소들을 베낀다라는 의미이고, 대상의 본질을 眞(진)이라고 하였다.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모든 요소들을 정확하게 베껴야 한다는 동양회화의 철학적 사고를 반영하는 단어이다. 즉, 사진은 진(眞)을 사(寫)한다라고 볼 수 있으며, 언어적으로는 초상화를 뜻하는 명사적 의미와 사실을 베낀다라는 동사적 의미가 동시에 존재한다.[6]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내 보존할 수 있게 만든 것. 물체로부터 오는 광선 사진기 렌즈로 모아 필름, 건판 따위에 결상()을 시킨 뒤에, 이것을 현상액으로 처리하여 음화()를 만들고, 다시 인화지로 양화()를 만든다.

물리학적으로 사진의 정의를 설명하면 '물체에서 반사된 빛과 같은 전자기적 발광을 감광성 기록재료 위에 기록하여 얻은 빛 그림'을 말한다. 명암만 기록한 흑백이 먼저 개발되고 나중에 컬러가 RGB를 각각 맡은 층을 쌓는 방식으로 뒤이어 개발됐다.[7] 이어 디지털 카메라 발명으로 현재에 이른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일반적으로 사진은 사진기로 만드는 경우가 많고, 사진기는 빛을 모아 필름이나 CCD[8] 또는 CMOS[9] 같은 이미지 센서에 초점을 맞추어 상을 맺히게 한다.

사진을 찍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사진사, 예술 활동으로서 사진을 찍는 사람을 사진 작가, 사진에 대한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갖춘 사람을 사진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1.1. 과정 및 원리

아래 내용은 필름 카메라 기준이다. 출처 필름 카메라에 넣으면 내부 어두운 곳에서 장착이 된다. 촬영 버튼을 누르면 셔터(광학 기기)가 여닫히며 잠깐 필름의 할로겐화은 등 감광 물질을 비추고 다음 필름 칸으로 넘긴다. 빛을 비추는 시간을 셔터 속도라고 하고, 순간 빛의 양은 조리개가 조절한다. 이런 빛의 정도를 노출(사진)이라 한다. 필름의 빛에 대한 예민한 정도는 감도(사진)라고 한다. 다 촬영한 필름은 눈에 안보이는 잠상이 기록돼 있지만 빛에 약하므로 현상 전 절대 내부를 끄집어내면 안된다. 이 이후엔 사진관이 알아서 하므로 전문가 외에는 거치지 않는 과정. 필름의 상을 나타나게 하고 고정하는 과정. 깜깜한 곳에서 필름을 꺼내 릴에 감고, 잠상을 드러내는 현상액, 더이상의 현상을 막는 정지액, 화학 작용을 멈추는 정착액에 절차에 따라 순차적으로 담그고 씻어내 말린다. 이 이후엔 필름을 꺼내도 상관없다. 이 상태는 색이 반전돼 있어 네거티브라고도 한다. 필름에 기록된 내용을 인화지라는 종이에 인쇄하는 것. 인화지에 영향이 없는 붉은 암등만 켜진 암실에서 작업을 한다. 일단 여러 조건에서 노광하는 실험을 하고 필름을 확대기에 걸치고 인화지에 빛을 확대해 쏜다. 이를 아까와 다른 현상액, 정지액, 정착액에 담그고 씻어 말린다. 이렇게 되면 다시 색이 반전돼 촬영시의 모습이 나타난다.

물론 디지털 카메라는 CCD나 CMOS를 사용해 바로 파일을 만들고 프린터로 뽑으면 끝이라서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다.

2. 역사

초기 사진기의 프로토타입 카메라 옵스큐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기존부터 상을 그대로 재현해내어 회화 발전에 큰 영향을 준 물건이긴 하지만, 그냥 회화의 스케치를 제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 전체를 그대로 옮겨서 재현하려는 구상은 있어왔고, 19세기 들어 광학기술과 화학의 발달로 이를 실제로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
파일:http-%2F%2Fimages.nationalgeographic.com%2Fwpf%2Fmedia-live%2Fphotos%2F000%2F014%2Fcache%2Fniepce-first-photo_1459_990x742.jpg 파일:external/file2.answcdn.com/rdglq4zstaybgudd5sby.jpg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가 찍은 세계 최초의 사진(1826년)[10] 헬리오그래피 기법을 응용한 그림( 1825년)[11]
이후 프랑스 발명가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가 11년 간의 연구를 통해 드디어 1826년 여름[12] 자신의 집 1층에 있는 작업실 창문을 통해 역청으로 덮인 광택 있는 주석판과 암실을 사용하고 이를 라벤더 에센스로 헹구며 세계 최초로 사진을 촬영하는데 성공한다.

이 때 그의 사진현상법을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라고 했다. 문제는 한 장을 찍는데에 무려 6~8시간이 걸렸다. 사진을 찍는데 필요한 아스팔트가 마르는 데에 그 정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조차 처음에 비해 대폭 단축된 것이다. 위의 사진을 찍는 데에는 무려 며칠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방법으로는 인물사진을 찍을 수 없었고 풍경사진만 찍었다.

그 후 니에프스와 함께 연구를 한 화가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ouis-Jacques-Mandé Daguerre)가 기술을 개량해 1839년 좀 더 발전적인 사진현상법인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을 발표했다.

이는 은판사진법이라고 불리는 물건으로 아직 사진의 특성인 복제 인화의 개념이 도입되지 않은 물건이었다. 그러나 다게레오타입은 한 장을 찍는데에 들이는 시간을 시간 단위에서 20분으로 줄였고, 이 때문에 인물 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해졌다.

비록 아무리 시간을 대폭 줄였다고 해도 사진을 찍는 데에 20분이 걸렸기에 당시 인물 사진은 모든 게 세팅된 스튜디오에서, 오랫동안 가지런히 포즈를 잡고 찍는 경우가 많았긴 했지만, 다게레오타입 덕분에 1840년대~ 1850년대까지 살아남은 유명인들이 초상화가 아닌 사진으로 모습을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루이필리프, 에드거 앨런 포, 프레데리크 쇼팽 등이 있으며, 심지어 나폴레옹 시기에 전성기를 누린 웰링턴 공작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도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발명 초기에는 엄청 비싸고, 시간도 오래 걸렸지만, 여러 연구와 노력으로 1840년대 초반에 수십 분 이상이던 노출 시간을 수십 초가량으로 줄이는데 성공한다.

다게르와 같은 시기( 1835년), 영국 윌리엄 헨리 폭스 탤벗(William Henry Fox Talbot)은 칼로타입(Calotype)을 발명했다. 이후 탤벗은 칼로타입의 이름을 talbotype로 바꾸었다. 그가 발명한 칼로타입(종이인화법)은 현대 사진과 유사하게 감광처리된 종이를 이용한 인화의 개념을 등장시켰고, 본격적인 복제 가능한 사진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현대 사진의 시초라고 할만하다. 칼로타입은 다게레오타입보다 사진을 찍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았으며, 종이를 이용했으므로 비용도 더 저렴했고, 필름 원리를 통해 동일한 사진을 찍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게레오타입보다 화질이 떨아졌고 특허 문제까지 있어서 다게레오타입보다 인기가 적었다.

1851년, 영국의 프레드릭 스콧 아처( Frederick Scott Archer)에 의해 개발된 습판사진술(Collodion Process)은 사진의 획기적인 개량을 가져왔다. 이것은 다게르가 발명한 사진술이나 톨벗의 종이인화법보다 노출시간을 줄이는데 기여하였고, 또한 음화(陰畵)에서 양화(陽畵)로 인화하는 과정도 간략화시켜 사진표현 상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발명이었다. 이미 은판사진이나 종이인화법에 의한 초상사진의 수요가 증가하였으나, 습판사진술의 출현으로 한층 더 유행을 자극하여 1850년대에는 그 정점에 이르렀다.

1843년 존 퀸시 애덤스 사진
1846년 에이브러햄 링컨 사진
파일:Ds6avNJ.jpg
토마스 서튼이 찍은 세계 최초의 컬러사진( 1861년)[13]

이후 1888년, 코닥 사의 조지 이스트먼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사진의 개념인 롤 필름을 발명해냈다. 당시 25달러짜리 코닥 필름이 들어 있는 코닥 1호 사진기에는 100장의 필름이 들어 있었는데, 100장을 다 찍고 10달러와 함께 코닥 사에 우편을 보내면 사진을 다 인화해주고 새 필름을 넣어주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시스템이었다. 이로써 현대적인 사진이 완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며, 코닥사의 필름을 뤼미에르 형제 에디슨 같은 초기 영화 제작자들이 사용함으로써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컬러 사진이 전 세계적으로 대중화되기까지는 훨씬 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세계 최강의 국가원수라는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사진을 봐도 알겠지만, 세계 최초의 컬러 사진이 1861년에 찍혔는데, 컬러 사진을 찍은 미국 대통령은 그로부터 50여년은 더 지난 후에야 나왔다. 나라의 권력을 가진 그것도 미국 같은 엄청난 부자 나라의 권력을 가진 고위층들조차 컬러 사진을 찍기는 매우 어려웠다는 것이다.

1900년대 초중반에 찍힌 사진들의 상당수도 컬러 사진보다 흑백 사진이 매우 압도적으로 많다. 심지어 이후로도 기술 발전이 이뤄졌음에도 본격적인 컬러 사진의 대중화는 1960년대 중반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진 촬영은 가능했으나, 현상이 비싸고, 플래시 기술의 문제로 특별한 순간에만 쓰는 사진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윌리엄 이글스턴이 유명해진 이유도, 이런 컬러 사진의 대중화랑 관련이 있다.

1960년대부터 컬러 사진이 상용화 된 곳은 유럽 미국 등, 당시에도 꽤나 잘 살았던 국가들인데, 당시엔 한국이 가난해서 1960년대 중반은 흑백이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에서 컬러 사진은 1970년대 중후반에야 그 수가 늘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 1988년)을 기점으로 대중화되었다.

한편 아시아에서 호황을 누리던 일본은 서구권과 비슷하게 1960년대부터 이미 많아졌고, 1970년대에는 완전히 대중화가 되었다.

이후 한 세기 가까이 사진의 기본틀은 유지되어 왔으나, 21세기에 들어선 직후?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사진은 기존의 필름 아날로그 사진과 디지털 사진으로 분화되게 된다.

디지털 사진이 화소성능 향상과 더불어 아날로그 사진보다 선명하고 깨끗한 상을 얻을 수 있고, 아날로그 사진보다도 복제와 재생산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어 현재로서는 예전의 필름 사진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나, 아날로그 사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색채나 질감을 중시하는 마니아층의 수요가 있어 그 존재 가치가 완전히 퇴색되지는 않을 듯하다.

일단 기술적인 측면에서 사진의 발전사는 대충 이러하나, 예술적인 측면이나 기법적인 측면에서 사진의 발전상은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어 왔다.

2.1. 초기 인식

사진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사진 찍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자기와 똑같은 모습이 종이에 찍혀 나온다'는 것에서 기원하는데, 때문에 사진기가 영혼을 뺏어간다고 믿는 사람도 많았다. 이는 문화권을 가리지 않고, 사진을 처음 접한 전 세계 사람들이 대체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14]

이와 같은 인식은 현대에도 심령사진이나 귀신 들린 사람은 사진을 찍히는 것을 싫어한다는 속설 등을 통해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 개화기 조선시대에 사진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기다 아이를 잡아서 그걸로 현상액을 만든다는 괴담까지 나돌다가 단발령이 내려지자 머리 안 잘린 모습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유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영혼을 빼앗긴다는 믿음 때문에 구한말의 사진을 보면 사진속 사람들의 눈빛이 매우 강렬하단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영혼이 눈을 통해 왕래했다는 믿음 때문에 눈을 일부러 강하게 뜨고 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전 세계 어디서나 그랬고, 심지어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 같은 북미 일부 지역, 시골에서도 나타나던 일이다.

그 밖에도 19세기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각지에서도 무턱대고 사진을 찍으려던 백인들이 구타당하거나 사망하고, 사진기가 박살나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게다가 유럽이나 미국 일부 지역도 마찬가지로 사진 찍는 것을 재수 없다고 여겨서 20세기 중반까지도 외면하던 경우도 있었다.

다만 이건 영화가 나올 때도 벌어진 일이다. 1890년대, 흑백영상을 촬영하던 촬영기사들도 제법 이런 수난을 겪었다. 유명한 사례가 바로 니콜라이 2세 행렬을 촬영하던 촬영기사를 사람들이 집단 구타한 사건이다. 사진처럼 똑같이 온갖 말이 많았다.

지금도 파푸아뉴기니, 바누아투 같은 터부가 강한 문명권에 사는 주민들은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빼앗긴다고 여겨 사진을 찍히지 않으려고 한다. 사진기가 널리 쓰이는 터부가 강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저런 미신을 믿지는 않아도 왠지 찜찜해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관광객들이 무턱대고 찍다가 현지인들과 갈등을 빚다가 집단구타라든지 폭행을 당하고 사진기가 박살나든지 경찰까지 나타나 필름을 압수당하거나 유치장 신세로 상당한 벌금을 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슬람권에서도 여성을 찍을 때 조심하는 것이 좋으며, 차도르 부르카 차림이니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괜찮겠지 하고 멋대로 찍다가 분노한 해당 여성들이나 남편에게 맞을 수 있다. 2000년대 중반에 예멘에서 부르카 차림으로 이나 염소를 몰던 여성들을 무단으로 사진 찍던 호주 사진작가가 그 여성들에게 몽둥이로 집단 구타당했던 일도 있다.[15] 당연히 나중에 달려온 경찰도 왜 그러기에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찍었냐고 그 사진작가를 탓했다. 다행히 그 사진작가는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비슷하게 이런 사진찍던 미국인도 아랍지역에서 목축하는 여성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 가볍게 타박상을 당한 사건이 있다.[16]

그래서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온 이들은 반드시 현지인 허락을 맡고 사진을 찍으라고 거듭 강조한다. 사실 인물 촬영에 대한 인식은 국가별로 천차만별이라 가령 우즈베키스탄은 사람들이 자신을 찍는 것에 대한 인식이 좋은 편이다.[17]

하지만 전 세계에는 무작정 찍으려 하면 좋게 보지 않는 지역이 더 많다. 국내에서도 지역이나 시골에 가서 현지인을 일하는 것이나 여러가지를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는다고 욕을 먹는 경우도 꽤 있으니 주의할 것.

이유가 어찌됐든 찍히는 사람이 찍지 말라면 찍지 않아야 한다. 사실 저런 미신 때문은 아니더라도 초상권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양해를 받아야 한다. 그게 어디든 간에 말이다.

3. 한국 최초의 사진들

조선에서는 쇄국정책을 펼치던 시기였고, 타국가와의 교류는 공식적인 사절단 파견으로 이루어졌다. 최초로 사진과 접촉했던 한반도 출신 인물은 이의익[18]을 위시한 연행사들인데, 이들은 1862년 청나라 베이징에 가서 1863년 1월 29일[19] 러시아 공사관에서 러시아인 사진관들에게 직접 의뢰해 사진을 찍었다. 당시 찍힌 사진들 이에 대한 기록은 『연행일기』로 알 수 있는데 이는 이의익의 수행원인 이항억이 개인적으로 기록한 사행록을 통해 남긴 것으로 밝혀졌다.[출처]

파일:external/www.homeofheroes.com/5_prisoners.jpg

파일:external/www.histopia.net/2-103.jpg
그리고 조선 내에서 처음 찍힌 조선인의 사진은 바로 신미양요 시절 1871년 미합중국 해군이 찍은 조선군 포로 사진이다. 2008년 2월에 위의 사진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이 사진이 한반도인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졌다.

고종황제 1884년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찍어 준 사람이 훗날 천문학자가 되는 미국의 퍼시벌 로웰이었다.

한국 최초의 사진엽서는 알레베크 사진엽서 1899년 프랑스 우체고문인 클레망세(E. Clemencent)가 한국의 여러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를 판매하면 재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의를 하여 대한제국 정부가 프랑스인 샤를 알레베크가 촬영한 사십여 장의 궁궐과 풍속 사진을 엽서로 제작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총 48장으로 여러가지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어 구한말 풍속사에 귀중한 자료이다.

한국에서 찍은 사진을 프랑스로 가져가 인쇄하여 제작하였으며, 1900 파리 엑스포 때 한국관 기념품으로 팔았다. #

4. 예술

4.1. 미술에 끼친 영향

사진의 등장은 미술계에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사실성을 중시하던 기존 고전미술이 어떻게 해도 사실성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와 맞부딪치게 된 것. 이로 인해 현대미술은 다른 방향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인상파, 야수파, 추상화, 초현실주의같이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작가의 독특한 관점, 감정, 생각을 부각시키는 미술사조들이 등장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진의 극사실성에 도전하는 극사실주의 화풍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데는 실패했다.

본디 사진은 회화의 복제수단 정도로 여겨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이후 19세기까지 사진기의 원형인 카메라 옵스큐라는 그림을 정확하게 그리기 위한 스케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 그런데 사진기의 등장으로 인해 상을 옮기는 과정에서 더 이상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게 된 것이다.

사진은 또한 판화와도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회화의 복제기술로서 판화는 18세기에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시민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난 부르주아 계층이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회화를 소유하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정밀하기로는 회화를 능가하고 복제하기 편하기론 판화를 능가하는 물건인 사진이 등장했으니 어땠겠는가? 값이 저렴한 카메라가 등장했을 때 유산계급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다보니 기존에 회화를 다루던 예술가들은 사진의 극사실주의적 재현에 감탄하면서도 그것이 예술이라기보단 단순히 현실을 재현한 기술의 산물이라고 여기고 반발했던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런 사진술의 발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독창적인 예술의 개념, 원형의 벽을 허물게 된다. 발터 베냐민이 말한 대로 문명의 발달로 새롭게 등장한 복제기술은 '지금', '여기' 밖에 없는 일품 일회성의 오리지널에 대한 신화( 아우라)를 깨트리고 근대사회의 시민들이 눈뜬 평등의식과 직결되었다.

이와 더불어 사진은 새로운 미학적 사유를 펼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한 예로 롤랑 바르트는 예술로서 사진을 해석하는데 필요한 개념으로 스투디움 푼크툼을 도입했다.

이런 경향은 현대에 복제품의 범람으로 오리지널에 대한 관심이 무디어지는 세태를 낳았으며, 현대 팝아트의 성립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사진의 등장 이후 사진으로부터 성립되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닐 영화 같은 영상물, 레코드, 텔레비전 등 새로운 시대의 대중예술은 처음에는 예술의 복제수단으로 여겨졌으나, 현대에는 각각 예술의 장르로서 자리 잡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은 이러한 복제예술이라는 장르를 형성하게 만든 원동력이라고 할만하다.

순수사진(Fine art Photography)은 보기에 아름답고 뽀대나는 사진을 찍으려는 상업 사진쪽과 달리 예술적인 사진을 찍으려 한다.[21]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 존 디볼라(John Divola), 프란체스카 우드먼(Francesca Woodman), 신디 셔먼(Cindy Sherman) 등의 미술 사진작가들을 보면 도통 이해하기 힘들 뿐더러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 것이라 왜 이게 작품인지 의문이 많을 것이다.

4.2. 예술적 특징

사진은 태생부터가 과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이런 특성은 기존 회화가 가지지 못했던 표현과 리얼리티를 내세우는 데 적합하였다.

이러한 사진의 특징은 예술적인 것과 결부되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낳는다.

이러한 사진에 의한 기록적인 재현의 영상은 실제 사물을 인간이 재현하는 데 있어 기억의 애매함이나 모호함을 개선하고, 그로 인해 생긴 실제와 다른 개념의 재정립을 가능케 한다. 사물에 대한 기호적 의미부여가 실제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보았을 때 사진이 극단적인 사실주의로서 현실을 재현하게 되면 이런 개념을 설명하기에 용이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진은 그 스스로가 개념이나 기호로서 작용한다기보단 개념 기호를 새롭게 갱신시키는 새로운 기호로서의 본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순수사진은 Fine Art Photography로 상업사진, Commercial Photography랑 전혀 다른 사진분야므로 상업사진쪽의 예술과 미술사진쪽의 예술은 굉장한 차이를 보여준다. 물론 둘 다 할 순 있지만 배우는 거 자체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미술을 할 것인가 아니면 상업쪽으로 갈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상업은 돈, 미술은 명성. 물론 많은 미술이 그렇듯, 한 쪽의 극에 달하면 돈과 명성 둘 다 얻을 수 있긴 하다.

4.3. 진실성

발명 당시에 사진은 기존의 예술과는 차별된 진실성과 사실성, 즉시성 등으로 피사체를 그대로 투영하는 도구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사진 기술이 발전하고 사진에 대한 여러 가지 시도와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사진의 진실성에 대한 인식 또한 달라지게 되었다. 모든 예술과 기록이 그러하듯 사진 또한 촬영자의 의지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사진 또한 어느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동일한 객체를 어떠한 구도, 렌즈, 필터, 인화로 사진으로 촬영하는가에 따라서 해당 사진이 품는 메시지가 달라지게 된다. 심지어 동일한 사진이라고 하더라도 작가가 붙이는 단 한 줄의 제목에 의해서 사진의 의미가 180도로 뒤바뀔 수도 있다. 실제로 사진은 독재자 또는 독재 국가의 선전으로 널리 활용되기도 하고 전쟁의 승리만을 강조하는 프로파간다로도 활용된 역사가 길다.

요즘에는 사진 조작 기술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프로필 사진은 기본적으로 포토샵 보정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범죄에 가까운 딥페이크 가짜뉴스까지 발생하게 되는 등 점차 사진의 진실성은 축소되고 있다. 어찌나 문제가 심한지 객관적인 모델의 외모를 평가해야 하는 오디션에서는 아예 폴라로이드 사진으로만 응시할 수 있도록 하는 미봉책을 널리 사용할 정도다.

이 때문에 무엇보다도 진실에 가까운 사건내용을 취재해야하는 진실보도의 의무가 있는 기자들은 아예 사진보정이나 조작을 금지하는 직업윤리를 가지고 있다. 촬영한 장소와 시간은 물론 어떠한 사진기와 렌즈, 필터를 사용했는지까지 일일이 기록해서 사진의 정보왜곡이 최대한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기도 한다.

2020년대 이후로 아예 무에서 유를 자연스럽게 창조할 수 있는 수준으로 AI가 발달하게 되어 사진의 신뢰성에 대해 더욱 의구심을 가져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4.4. 순수사진작가

5. 사회

5.1. 사진 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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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사진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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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사진 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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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사진병(촬영병)

군부대 대부분에서는 일명 사진병(촬영병)이라는 직책도 있는데 연대급 본부대에 속하며, 사진영상 특기가 있거나 사진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알고 있는 병사를 중심으로 선발한다.

사진병의 임무는 군부대 내의 행사기념 촬영 및 단체방문 기념 촬영 등이다. 다만 연대장이나 중소대장 또는 직책급 장교의 허가 없이는 무단으로 촬영할 수 없으며 대외반출 또한 금지한다.

사진 병과는 사실 현대의 군대라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미디어를 통한 여론전이 매우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게 되었고, 사진기술이 발달하면서 기존의 풍자화(만화 일러스트)가 차지하던 미디어 저널리즘은 사진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 미국에서는 "LIFE" 같은 사진 저널리즘 전문 잡지가 오랜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2차대전 미군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창설 초기 대한민국 국군에도 사진병과가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사전병이 찍은 사진들은 평시에는 각종 홍보자료로, 전시에는 전황의 증빙으로 활용되게 된다. 물론 디지털 시대가 되며 영상이 도입되자 사진병이 커버 못하는 동영상의 영역까지 확장한 영상 전담병도 존재한다.

이는 군대뿐만 아니라 홍보 전담조직을 갖고 있는 모든 정부기관, 회사, 학교 등 조직에서 사진병과 비슷한 직책의 업무분장을 찾아볼 수 있다.

5.5. 촬영금지 장소

촬영금지가 되어 있는 곳은 아래와 같으며, 촬영금지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5.6. 대중매체에서의 사진

사진을 찍는 것을 게임으로 구현한 게임들로는 격사보이 동방 프로젝트 시리즈의 동방문화첩, 더블 스포일러 ~ 동방문화첩, 하쿠나 마타타(게임), 포켓몬스터의 외전 작품인 포켓몬 스냅 New 포켓몬 스냅, 호러 게임 제로 시리즈[31], 미연시이자 애니메이션인 포토카노[32], Photography Simulator[33] 등이 있다.

사진학과와 관련이 있는 게임으로는 Life is Strange가 있다.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가 전국에서 인기있는 예술학교. 그 중 사진학과가 가장 유명하다. 그리고 직접 사진찍는것을 조작하진 않지만 사진을 찍는게 간간히 나온다. 또한 초반부에 사진의 역사를 배우는 부분이 나온다.[34]

사진을 다룬 애니메이션으로 타마유라가 있다. 정확히는 사진 찍는 이야기를 다룬 일상물.

잡지 사진을 현상하는 주인공을 소재로 만든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도 있다. 사진이 소재이다 보니 마치 여행 사진 슬라이드쇼를 보는 듯한 기법도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이 외 사진을 다룬 영화는 셀 수 없이 많은 편인데, 가장 유명한 영화를 꼽자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욕망이 있다.

만화 데스노트에선 사진과 동영상에 의해 본명 노출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진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생존수단 중 하나이다. 얼굴과 본명으로 원격살인이 가능하다는 것을 추론해낸 수사 측에서 가명사용을 적극 권장했으나, 이 조차도 우키타라는 수사관이 최초로 사신의 눈에 의한 살해로 저지당하면서, 얼굴만으로 살해 당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난 후에 수사관 측에선 선글라스 착용이나 차량 유리에 선팅을 한다거나 선팅이 된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얼굴이 노출된 사진이나 동영상 공개를 극도로 꺼린다. 니아는 키라 수사 본부와 만나기 전까지 대면은 고사하고 절대 사진이나 동영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5.7. 사진과 시험

6.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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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담

7.1. 인물

파일:QQv3U3O.png
사진 속에 남아 있는 가장 나이든 사람
위 사진은 1845년에 찍었다. 사진 속 주인공의 이름은 존 애덤스(1745[35]~1849, 향년 104세)로, 미국인 신발제작자였으며 미국 독립전쟁 참전용사다. 출처

국가별 최초로 사진을 찍은 국가원수는 다음과 같다
사진을 찍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웃지 않고 항상 무표정이거나 한결같은 자세만을 취한다거나, 사진발을 유독 못 받아 사진이 이상하게 나와서 자주 놀림거리가 된다거나, 종교적 이유, 도촬을 당해서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경우 등 여러가지 개인적 사유로 사진 찍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살아생전에 사진 찍는 걸 싫어하던 대표 유명인으로는 시인 김소월,[36], 화가 빈센트 반 고흐[37]가 있다.

해외에서는 사진을 찍는 사람 뒤나 근처에서 기괴한 표정과 자세를 연출해 사진을 망치는 장난이 잦은 편으로, 이를 photobombing(사진 폭격)이라고 한다. 참조

세계 어디든 허락 없이 촬영하거나, 분장하거나 탈바가지를 쓴 사람을 찍으면 모델비를 내라고 몰려오는 사람도 많다. 내든 안 내든 알아서 조심해야 하지만 아주 제대로 걸리면 미리 대기한 동료들이 몰려와 위협을 가하며 돈을 강요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 이쪽에서도 촬영비를 강요하면 된다.

이런 현지인 사진모델 상업성(?)은 선진국에서도 꽤 있으니 특이한 옷차림이나 분장으로 있는 사람을 무턱대고 찍으면 돈을 준비하는 게 낫다. 한 축구팬은 스페인에 가서 레알 마드리드 경기를 보러갔다가 경기장 근처에서 귀여운 털복숭이 인형옷을 입고 마드리드 깃발을 들고 다니는 사람과 같이 사진을 찍고 5유로[38]나 되는 돈을 억지로 냈던 경우도 있다.

쿠바에선 특이하게도 멋지게 입고 다니는 현지인을 찍으면 그야말로 귀신같이 숨어서 살피던 현지인이 튀어나와서 모델비를 내라고 강요하는 사례들이 꽤 있다. 돈만 밝힌다고 할 수도 있지만 현지인들에게 그게 벌어먹을 직업이라고 항변하는 경우도 있기에 무턱대고 욕할 일만도 아닌 듯.

모스크바에선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여제 분장을 한 모델을 조심할 것. 특히 크렘린 주변과 아르바트 거리 주변에 이런 모델들이 많아 돌아다니니 혼자 다니는 여행객은 조심해야 한다. 무방비 상태에서 나타나 사진을 찍자 하며 심하게는 모델비와 촬영비를 포함하여 6,000루블(약 13만 원 상당)을 뜯어 가기도 한다.

자연물 사진 관련으로 일부 사진작가들의 자연 훼손 행각이 꾸준히 문제시되고 있다. 보기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새끼 새들을 둥지에서 억지로 꺼내 나뭇가지에 앉히거나 심지어 본드로 새의 발을 나뭇가지에 고정시키는가 하면, 희귀 야생화나 식물 사진을 찍겠다고 주변의 다른 식물들을 훼손하거나 아예 피사체 주변을 갈아엎는 사례가 있다.

심지어 2014년 7월에는 유명 사진작가가 사진 구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울진 금강송 군락지에서 금강송을 무단 벌목한 일이 알려져 큰 논란이 되었다. #[39] 아이러니한 것은 문제의 사진작가는 평소 금강송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사진을 찍어왔다고 밝혀왔다는 점. 더욱 큰 문제는, 이런 일들이 이미 사진작가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무용담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심지어 '관행'으로 생각하는 작가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가들은 악행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각종 사진 및 카메라 커뮤니티에선 인정받지 못한다.

사진작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무리한 사진 욕심으로 인해 애꿎은 동물들이 희생되는 사례도 많다. 해변에 밀려 올라온 상어 돌고래 같은 수중 동물들을 보고 사진을 찍겠다고 뭍에서 오랫동안 방치하거나 함부로 만지거나 해서 괴롭히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의 사례가 있는가 하면, 2016년 7월에는 미국 알래스카의 한 유명 항구도시의 제방에 산양 한 마리가 길을 잃고 헤매다 나타났는데, 산양을 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주변을 둘러싸는 바람에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결국 바다로 뛰어들어 익사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알래스카 산양, 관광객들 사진 공세에 익사

롯데월드 어드벤처 등 놀이공원에서는 놀이기구 위에서 사진을 찍어 주는 속칭 온라이드 포토존이 존재한다.

과거 나라사랑카드에는 사진이 들어간 적이 있으며 현재 나라사랑카드에는 사진이 없다.

사진이 들어가는 카드도 있다. 서울랜드, 에버랜드, 롯데월드 어드벤처의 연간회원권에는 사진이 반드시 들어간다.

유럽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사후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사망한 가족의 시신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으로, 당시는 유럽 전역에 창궐하던 각종 전염성 질환으로 여성과 영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이 무렵 병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자식을 추억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는데[40], 1839년 초상화에 비해 완성에 걸리는 시간이 짧고, 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은판 사진의 발명으로 초상화를 대체할 수 있게 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다만 초상화에 비해 저렴한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일상적으로 찍기에는 부담이 큰 가격이었기에 서민들은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정도만 사진을 찍었고, 죽은 가족을 추억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써 사망한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게 되었던 것.

사후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시신에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화장을 한 뒤, 특수한 지지 장치를 이용해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출했고, 완성된 사진에는 색을 덧입히거나 눈을 그려넣는 등의 보정 작업을 거쳐 시신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만들었다.[41] 다만 자연스러운 사후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은 부자나 중산층뿐이었고, 가난한 서민들은 비용을 마련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사진을 바로 찍지 못하고, 시신의 부패가 진행되어 가는 상태에서 찍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되었다. 영상.


[1] 사진술이 전래되기 이전만 해도 사진이라는 용어는 초상화를 의미하던 말이었다. 근대로 오며 말의 의미가 변하게 된 셈. [2] 줄이면 Photo. 그리스어의 'phos'(. 소유격은 photos)와 'graphein'(쓰다, 새기다)에서 유래한 말로, 1839년 존 허셜 경이 처음 사용했다. 존 허셜 경의 아버지도 유명한데 바로 천왕성을 발견한 윌리엄 허셜이다. [3] 이쪽은 사진을 뜻하기도 하지만 풍경화를 뜻하는 말로 더 많이쓰인다. [4] 찰스 오리어 (Charles O'Rear)가 찍었으며, 장소는 미국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 Windows XP의 기본 배경화면으로 유명하다. 평소에는 포도밭이어서 저런 모습이 아니며 해당 사진은 운 좋게 휴지기에 찍은 사진이다. 2006년에 촬영된 모습 [5] 사진이라는 단어가 일본어인 写真에서 왔다는 말은 잘못된 것으로, 이규보의 시문집을 살펴보면 사진이라는 명칭이 사진술이 발명되기 이전인 고려시대 후반기에서부터 사용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6] 임금의 초상을 뜻하는 어진(御眞)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되는지 임금께 승인을 받는 과정에서도 사진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숙종 때 주고 받은 회의록인 '어진도사도감의궤(御眞圖寫都監儀軌)'를 보면 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선정된 단어임을 알 수 있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임금의 초상화를 뜻하는 많은 단어가 있는데 용례를 언급하면서 모두 적절하지 않아 보이나, 매우 정확하게 그려져 정신까지도 전할 수 있을 만큼의 초상화를 사진(寫眞)이라고 하니 이를 차용하여 어진(御眞)이라고 함이 어떻습니까? 라는 식으로 제안드렸고, 숙종은 이러한 신하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어진(御眞)'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된다는 뜻을 교지하며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7] 컬러사진 원리 필름 문서에 대강 설명이 나온다. [8] 빛을 전하로 변환시켜 화상을 얻어내는 센서이다. 전하결합소자라고도 불리며 디지털 카메라에서 많이 사용된다. [9] 마이크로프로세서 SRAM 등의 디지털 회로를 구성하는 데 이용되는 소체. 상보성 금속 산화막 반도체라고도 불리며, 이를 이용한 고체 촬상 소자등에 사용된다. 역시 디지털 카메라 등에서 많이 사용된다. [10] 사진의 이름은 '그라의 창문에서 바라본 조망(Point de vue du Gras)'이다. 위 사진을 찍은 위치는 니엡스의 집 창밖 풍경으로 프랑스 중부 손에루아르 주에 있는데, 전형적인 시골이다. 참고로 이 사진을 찍은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 영조의 재위기간에 태어난 사람이며, 이 사진은 2024년 기준으로 198년이나 된 사진이다. [11] 후술하듯이 헬리오그래피 사진은 만드는데 6~8시간 걸리므로, 동적인 장면은 찍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헬리오그래피 기법을 응용한 ' 그림'이지 결코 사진이 아니다. 다만 해당 기법이 사진현상법의 초기형이라는 사실만을 가지고 이 그림을 종종 최초의 사진으로 오인하는 일이 있다. [12] 니엡스가 동료에게 받은 편지를 근거로 6월 4일~7월 18일 사이에 촬영되었다고 보는 시선도 있으며, 2008년 한 연구에서 사진 속 그림자를 면밀히 분석한 바에 따르면 6월 말 하지 무렵 아니면 7월 말에 촬영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13] 리본이라고 한다. [14] 다만 상기한 한국의 최초의 사진을 찍은 사신들은 거부감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매우 신비로워하며 러시아인들에게 깊은 관심을 표현했다. 그 중 누군가가 자기자신의 사진을 보고 이 작은 것에 내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무척이나 경외했다고 한다. [15] 1980년대에 대본소 만화로 출판되었던 이현세 만화 '남 대 남'에서도 아랍에 간 한국 건설 노동자들 가운데 사진기로 무단으로 현지 여성 찍다가 한국인들 모두가 돌팔매를 신나게 당하는 사례가 나왔다. 현지에 대하여 아는 간부가 와서 현지인들에게 빌고 빌어 겨우 넘어갔는데, 나중에 고생 끝에 넘어간 그 간부가 팔을 힘주며 "무단으로 현지 여성들을 찍은 놈 누구야?" 라고 분노 게이지가득인 모습을 보이자 그 직원이 우는 얼굴로 손을 들고 주변 동료들이 '명복을...'이라고 생각하며 빌었다. [16] 경우는 다르지만, 현대국가에서 남의 얼굴을 맘대로 찍으면 경찰서로 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못 사는 개발도상국이라고 멋대로 찍어대는 건 지양하자. [17] 물론 경찰, 군인은 제외 [18] 李宜翼, 1794~?, 조선 후기에 이조참판, 예조판서, 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19] 음력 기준. 양력 기준으로는 1863년 3월 18일이다. [출처] 한국사진사, 박주석, 문학동네 [21] 구글로 검색해도 특정한 미술사진 작가를 검색하지 않는 이상 찾기 힘들다. [22] 카메라로는 사진의 효과를 넣을 수도 있고 원시, 근시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23] 물론 환타지 드림 같이 완만한 놀이기구는 촬영을 허용해주지만 (다만 여기도 빛에 민감한 안전센서 때문에 플래시는 쓰면 안된다.) 민감한 시설에선 플래시를 금지하는 경우가 있다. [24] 이유는 혹시 모를 간첩 및 사이버요원에 의해 군사기지 타격을 받거나 민간인이 몰래 어슬렁거리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그나마 보안이 완화된 김포 북부에서도 어슬렁거리다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25] 이 또한 죄수에 탈출도움을 차단하거나 폭동을 일으키는 걸 사전에 막기 위함이다. [26]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포스코 등이 대표적인 예. [27] 아동과 청소년들이 많이 이용하는 청소년센터 내 수영장은 거의 100% 촬영 금지다. [28] 심지어는 여름방학 시즌에 지자체에서 운영하고 근린공원 등에 설치된 에어바운스형 물놀이장에서도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곳도 있다. 해수욕장은 단순한 풍경 사진이라면 모를까 수영복 입은 사람(특히 여성)을 무단 촬영하면 불법촬영으로 몰려 곤욕을 치를 수 있다. [29] 부득이하게 방송 촬영을 하게 되면 식당 주인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거나 소리만 들리도록 한다. [30] 2018년 이전에는 하르툼 광역권 이외 지역을 여행할 때, 사진을 찍을 때 허가를 얻어야 했으나 이후 폐지되었다. [31] 사진으로 유령을 잡는 특이한 플레이 방식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32] 기기를 직접 조작해 주인공들의 사진을 찍는 파트가 크게 연관성은 없어도 비중이 있는 편이다. [33] 스팀에 출시 예정인 사진 찍는 게임으로 2023년 3월 2일 현재 정확한 출시일은 나와 있지 않다. [34] 또한 최종 보스가 사진학과 교사다(...) [35] 정조보다 무려 7살이나 많고 조선 최고의 화가인 김홍도동갑인 인물이 사진을 남긴 것이다. 참고로 동명이인인 미국의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보다 고작 10살 어리다. [36] 그래서 현재 전해지는 그의 사진은 많지 않다. [37] 수많은 초상화를 남긴 것과 정반대로 이렇다 할 사진은 젊었을 적(1873년)에 찍은 단 1장만 남겼다. 사실 1886년의 고흐를 찍은 사진이 1장 있긴 하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라 별 의미는 없다. [38] 약 7천 원. [39] 벌목 자체는 2014년 5월에 이루어졌으나, 본격적으로 기사화되기 시작한 것은 7월이다. 대구시립 중앙도서관 1층 현관에서도 이 사진작가가 찍은 소나무가 걸려있었으나, 기자에게 저격당한 그날 떼어내어져 어두운 창고 속으로 직행하고 말았다. [40] 당시 19세기 초까지 가족의 모습을 남기는 수단은 초상화가 유일했지만 그림의 특성상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사실상 귀족 계급의 전유물이었다. [41] 이런 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채색화가도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