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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1 23:17:47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파일:오스카 와일드.jpg
본명 오스카 핑걸 오플래허티 윌스 와일드[1]
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2]
출신
[[아일랜드|]][[틀:국기|]][[틀:국기|]]
출생 1854년 10월 16일
영국 아일랜드 더블린 웨스트랜드 로우
사망 1900년 11월 30일 (향년 46세)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데프레 알자스 호텔[3]
직업 작가, 시인, 극작가
서명
파일:Oscar_Wilde_Signatur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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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colbgcolor=#fff,#191919>페르 라셰즈 묘지
신장 183cm[4]
종교 가톨릭
학력 포토라 왕립학교 (졸업) (1864년 – 1871년)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고전문학) (1871년 – 1874년)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5]
(문학 / 학사) (1874년 – 1878년)
사조 유미주의
부모 아버지 윌리엄 와일드 (1815~1876)
어머니 제인 와일드 (1821~1896)
배우자 콘스턴스 로이드 (1858~1898, 1884년 결혼)
자녀 장남 시릴 홀랜드[6] (1885~1915)
차남 비비언 홀랜드 (1886~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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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인생
2.1. 퀸즈베리 사건2.2. 수감 생활2.3. 출옥 후
3. 어록 제조기4. 작품
4.1. 소설4.2. 동화4.3. 시4.4. 희곡4.5. 수필
5. 관련 매체
5.1. 영화5.2. 음악5.3. 뮤지컬
6. 여담7.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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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의 인생은 한 편의 그리스 비극이었고, 그 자신이 그리스 비극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오스카 와일드의 친구 프랭크 해리스가 오스카의 인생을 평하면서 남긴 말 中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빅토리아 시대 가장 성공한 작가로 뽑히는 인물이다. 걸출한 글솜씨에 183cm에 달하는 기럭지, 준수한 외모의 유명인사였으며 자신감에 찬 문학인 이미지의 전형 같은 인물. 그래서인지 자신을 남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 평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인 유미주의를 지향했으며 작품들의 성향도 그러하다. 영화로도 제작된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살로메> 등이 그러하며 그가 창작한 유명한 동화 ' 행복한 왕자'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 외에도 시, 희곡도 썼다. 형식과 구조를 중요시하며 특유의 위트있고 날카롭게 비꼬는 언어유희와 비유, 그리고 모순과 쾌락으로 점철된 인생 자체가 그의 매력이다.

2. 인생

오스카 와일드는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안과의사였고, 어머니는 성공한 작가이자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부친인 윌리엄 와일드는 여왕의 주치의로 임명받은 바 있었으며 센서스 작성에 공헌해 작위도 수여받은 인물이었다. 오스카 와일드 본인도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문학과 예술에서 고귀한 이름을 물려받았다며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

9살 때까지 가정 교육만 받다가 1864년에 포토라 왕립학교에 진학해 1871년에 졸업했다. 이후 1874년까지는 더블린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평소 성격이 아주 게을렀으나, 고전학 성적만큼은 아주 좋았다. 1874년에 오스카는 옥스퍼드 대학의 모들린 칼리지에 입학해 고대 언어를 배웠다.

한동안 미술 평론가로 지내던 와일드는 런던 파리 등지에서 유미주의에 중점을 두는 미학 강연을 시작했다. 그의 모피 코트, 네로 스타일의 머리, 문학적인 달변은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상류층의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성공은 뉴욕 진출로 이어졌다.
1881년에 낸 첫 시집을 통해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성공한 와일드는 1887년에는 소설가로 데뷔해 『 캔터빌의 유령』과 『아서 새빌 경의 범죄』를 출판했다. 1890년에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1891년 살로메를 쓰는 등 걸작을 거듭해서 내놓았다. 이즈음에 런던 사교계는 오스카를 모시는 것을 영예로 여겼다. 당시 웨일스 공의 자리에 있던 에드워드 7세조차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고 싶어 했을 정도.

2.1. 퀸즈베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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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더글러스(좌), 오스카 와일드(우)
부와 명성을 모두 손에 쥔 잘나가던 작가 오스카 와일드를 몰락시킨 스캔들이다. 와일드는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도 둘이 있었지만, 동성애자이기도 했다.[7] 와일드는 1891년 라이어널 존슨[8]의 소개로 퀸즈베리 후작의 막내아들(삼남)인 16세 연하의 앨프리드 더글러스[9], 일명 보시(Bosie)]를 만나게 된다.

잘 나가던 작가와 철없는 귀족 대학생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10] 더글러스는 와일드에게 거리의 소년을 돈 주고 사는, 일종의 매춘을 소개하기도 했다. 다혈질에 경박한 더글러스는 둘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표현하고 다녔고, 게다가 아버지인 9대 퀸즈베리 후작 존 숄토 더글러스와 사이가 안 좋았던 더글러스는, 와일드와의 연애를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수단쯤으로 여긴 듯 했다. 이즈음에 둘 사이에 다리를 놔준 라이어널 존슨은 둘에게 절교를 선언하면서, 자기 사촌인 더글러스의 영혼을 부숴버린 자라며 와일드를 디스하는 시를 썼다.

둘의 관계는 평범한 연인 사이라고 보기 힘들다. 일방적인 더글러스의 사치와 향락 그리고 히스테릭한 성격[11]에 와일드는 천천히 지쳐갔다. 더글러스는 와일드에게 수시로 "호텔에 데려가 달라", "친구를 만날 돈이 필요하다", "하인을 고용해달라"는 식의 요청을 하며 와일드의 돈을 소비했다. 오스카가 더글러스로부터 옮은 독감에 시달릴 때, '당신은 그동안 물론 내 돈으로 지내면서 마차로 드라이브를 하고 그랜드 호텔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사실상 돈이 필요할 때만 내 방에 나타났지.'라고 더글러스를 힐난한 바 있다. 후술할 그의 편지 <심연으로부터>에 따르면 와일드와 더글러스는 3주에 한번 꼴로 이별하고 더글러스의 애원으로 다시 재결합하는 일을 반복하는 시기도 있었으며, 끝내 와일드는 해외로 도피해 그와 연락을 단절하는 것으로 더글러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와일드는 더글러스의 어머니에게 더글러스를 다시는 마주치지 않도록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2].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금방 무색해졌다. 때마침 더글러스가의 장남이 사고로 죽게 되고, 이에 연민을 느낀 와일드가 다시 더글러스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들의 관계는 이어졌다. 물론 이후로도 더글러스의 속물 근성은 그대로였다.

아버지 퀸즈베리 후작은 아들과 아들 애인의 이러한 행각에 수치심을 느끼며 펄펄 뛰었고, 길거리에서 자기 아들을 때린 적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퀸즈베리 후작은 오스카 와일드를 수많은 소년들을 추행했다는 혐의로 고발했고 와일드 역시 명예훼손죄로 퀸즈베리 후작을 고소하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특기인 화려한 달변으로 유리하게 재판을 이끌어 나갔으나,[13] 교차신문 등에서의 실수들로 인하여 와일드에게 불리한 상황들이 연출되었다. 일례로, 검사가 와일드에게 "더글러스의 어린 하인에게 키스한 적 있냐"고 묻자 와일드는 거들먹거리며 "그 소년은 너무나 못생겼기에 키스할 생각이 안 들었다"고 말했다. 검사가 이 답변을 듣고 왜 외모를 언급했는지 추궁하자 와일드는 처음으로 법정에서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결국 자신이 신중하게 발언하지 못하였음을 시인하였다. 이후, 검사 측에서 "와일드와 성관계를 하였다는 남성들을 증인으로 세울 수 있다"고 하자, 와일드와 그의 변호사들은 "퀸즈버리에 대한 소송을 취하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여 고소를 취하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와일드가 퀸즈버리의 소송비용까지 모두 부담하게 되었고, 결국 와일드는 이로 인해 파산하게 된다. 참고로 퀸즈베리 후작은 1900년 1월, 와일드가 죽기 10개월 전에 55살로 죽었다.

여담으로 와일드가 죽고 나서 1902년에 알프레드 더글러스는 결혼하는데, 아내인 올리브 쿠스탄스[14] 또한 양성애자 시인이었다. 1902년 외아들[15]이 태어났을 때 아내의 여자친구 나탈리 클리포드 바니(Natalie Clifford Barney)가 대모가 되었다. 1920년대 말엔 부부 관계가 완전히 깨어져 별거 상태였으나 공식적인 이혼은 하지 않은 채로 42년 동안 결혼생활을 이어나갔다. 1944년 올리브가 먼저 죽고, 1년 뒤에 알프레드도 만 74세로 죽었다.

2.2. 수감 생활

위의 소송 직후 와일드는 동성애를 하였다는 죄로 기소당하게 되고(Regina v. Wilde), 이로 인해 아래에 기술된 형을 선고받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2년 동안 교도소[16]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더글러스는 와일드가 보낸 편지를 잡지사에 기고하고자 시도했다.[17][18]

이러한 절망 속에 와일드는 교도소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귀를 다치게 된 것으로도 모자라, 아내 콘스턴스에게 별거를 선언당하고 아들인 비비언과 시릴도 평생 볼 수 없게 되었다.[19] 와일드는 가정에 대한 애정이 있었으며 특히 자신의 아이들을 '나의 빛나는 보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가정파탄은 와일드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20]

이때 감옥에서 쓴 편지를 모은 것이 <옥중기>, 혹은 <심연으로부터>란 제목으로 출판된다. <옥중기>와 <심연으로부터>는 와일드가 더글러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는 맥락이 같으나 차이가 있다. 와일드는 친구이자 재산 관리인인 로버트 로스[21]에게 부탁해 한 장의 타이핑 사본을 남긴 후 원본 편지는 더글러스에게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로스는 친필 원본을 보관한 채 더글러스에게 사본 편지를 전달했으며[22], 동시에 수취인이 더글러스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을 모두 삭제해 <옥중기>라는 제목을 붙이게 된다. 이것은 오스카 와일드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 출간되었으며, 편지의 전문이 훼손되지 않은 판본이 <심연으로부터>다. 이 책은 앨프리드 더글러스에 대한 원망과 자책으로 시작해 용서와 참회, 예술관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2.3. 출옥 후

레딩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는 그날 바로 프랑스로 건너갔는데[23], 이곳에서 그는 아내가 보내오는 1주당 3파운드라는 매우 적은 돈과 유지되던 인맥을 통한 간단한 일을 통한 아주 적은 수입으로 생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돈은 술을 사는 데 사용하였고, 정신적으로도 매우 피폐해져 폐인같은 삶을 이어갔다. 치통에 시달렸지만 치과에 갈 돈조차 없었고, 결국 빌붙고 구걸을 하며 근근이 연명했다. 한번은 런던에서 알고 지내던 오페라 여가수를 길에서 만났는데 그는 길을 가로막고 서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요. 지금부터 지독히도 끔찍한 이야기를 할 테니 잘 들어보오. 돈 좀 주시오"

이후 그의 천재성이 발휘된 것은 딱 한번, <레딩 감옥의 노래>를 발표했을 때였다. 와일드는 이 시에서 연인을 살해하고 교수형에 처해진 병사의 이야기를 썼는데,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삶과 연계해서 절실한 글을 남겼다. 1900년, 그를 괴롭혀오던 귓병에 대한 수술을 받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뇌수막염에 걸려 1900년 11월 30일 사망한다.

한 친구가 임종을 앞둔 그에게 마지막 샴페인 잔을 권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내가 살아온 과정처럼 분에 넘치게 죽어가네"

아내인 콘스턴스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24] 와일드는 형기를 마치고 아이들을 볼 권리를 얻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무척 우울해 했다고 한다. 와일드가 프랑스로 갔을 때 그를 한 레스토랑에서 본 이의 증언에 따르면, 한 아이가 와일드에게 "아저씨는 왜 혼자인가요?"라고 묻자, "나도 너 같은 아이들이 있는데, 지금은 아주 멀리 있어서 볼 수 없단다" 라며 울먹이며 말했다고 한다.

큰아들인 시릴 홀랜드는 1차 대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같은 프랑스 땅에 묻혔다. (물론 지역은 다르다) 작은아들인 비비언 홀랜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포병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BBC 민간 통역가로 활약하였다. 비비언 홀랜드의 외동아들이자 오스카 와일드의 손자인 멀린 홀랜드는 오스카 와일드 연구의 권위자로 유명하다. 증손자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할 때 증조할아버지가 썼던 방을 배정받았다고 한다.

와일드의 작품은 독일에서 다시 발굴되어 재평가 받았다. 1905년에는 런던에서 <살로메>가 초연되었고, 3년 뒤에는 전집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Policing and Crime Act 2017에 의해 동성애로 처벌된 사람들에 대한 자동사면의 혜택을 받아 사후 사면이 되었다.

3. 어록 제조기

오스카 와일드는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시니컬한 어록 제조기라고 봐도 된다. 더구나 자뻑기질까지 있다보니, 그의 어록엔 예술에 대한 그의 심미적 가치[25], 자기모순도 충만하다.

4. 작품

4.1. 소설

제목 발간년도
<colbgcolor=#fff,#1f2023> W. H. 씨의 초상
The Portrait of Mr. W. H.
<colbgcolor=#fff,#1f2023> 1889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39] 
The Picture of Dorian Gray
1890년
아서 새빌 경의 범죄와 다른 소설들 
Lord Arthur Savile's Crime and Other Stories
1891년
모범적인 백만장자 (The Model Millionaire)
비밀 없는 스핑크스 (The Sphinx Without a Secret)
아서 새빌 경의 범죄 (Lord Arthur Savile's Crime)
캔터빌의 유령 (The Canterville Ghost)

4.2. 동화

제목 발간년도
<colbgcolor=#fff,#1f2023> 행복한 왕자와 다른 이야기들
The Happy Prince and Other Tales.
<colbgcolor=#fff,#1f2023> 1888년
나이팅게일과 장미(The Nightingale and the Rose)
유별난 로켓 불꽃(The Remarkable Rocket)
이기적인 거인(The Selfish Giant)
행복한 왕자(The Happy Prince)
헌신적인 친구(The Devoted Friend)
석류나무의 집 
A House of Pomegranates
1891년
어부와 그의 영혼 (The Fisherman and his Soul)
왕녀의 생일 (The Birthday of the Infanta)
젊은 왕 (The Young King)
별 아이 (The Star-child)

4.3.

제목 발간년도
<colbgcolor=#fff,#1f2023> 라벤나
Ravenna
<colbgcolor=#fff,#1f2023> 1878년
시집[40] 
Poems
1881년
산문시 
Poems in Prose
1894년
스핑크스
The Sphinx
레딩 감옥의 노래[41] 
The Ballad of Reading Gaol
1898년

4.4. 희곡

제목 발간년도
<colbgcolor=#fff,#1f2023> 베라, 혹은 허무주의자
Vera; or, The Nihilists
<colbgcolor=#fff,#1f2023> 1880년
파두아의 공작부인 
The Duchess of Padua
1883년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Lady Windermere's Fan
1892년
보잘것 없는 여인 
A Woman of No Importance
1893년
살로메
Salomé
성스러운 매춘부 
La Sainte Courtisane
1894년
이상적인 남편 
An Ideal Husband
1895년
진지함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4.5. 수필

제목 발간년도
<colbgcolor=#fff,#1f2023> 거짓의 쇠락
The Decay of Lying
<colbgcolor=#fff,#1f2023> 1889년
펜, 연필, 그리고 독
Pen, Pencil and Poison
가면의 진실 
The Truth of Masks
1891년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
The Soul of Man under Socialism
예술가로서의 비평가
The Critic as Artist
심연으로부터 
De Profundis[42]
1905년[43]

5. 관련 매체

5.1. 영화

5.2. 음악

5.3. 뮤지컬

6. 여담

7. 관련 인물



[1] 중간의 이름들은 큰 의미가 없다. 와일드 자신도 그저 Oscar Wilde라고 불러주기를 바랐다. [2] 아일랜드 출신이나 19세기 당시 아일랜드는 국가가 아니었고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라 하여 영국의 일부였다. [3] 오스카 와일드는 이곳에서 방을 두 개나 빌려서 생활했다고 한다. 이유는 쉬는 곳과 글 쓰는 곳을 구분하기 위해서였는데 와일드 본인은 글을 쓰기 위한 방과 불면을 위한 방이라고 했다. 이 호텔은 현재 L'hotel'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호텔 입구에는 "오스카 와일드가 죽은 장소"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숨을 거두었던 장소로 전해지는 1층 방은 현재 호텔 응접실로 바뀌었으며, 대신 오스카 와일드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여 헌정한 방이 따로 존재한다. [4] # 자서전에 따르면 6 피트(약 183cm)였다고 한다. [5]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고 연간 £95 (현재 가치 약 £8,900) 상당의 장학금을 받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6] 본래 이름은 시릴 와일드 였으나, 후술할 퀸즈베리 사건 이후 콘스턴스가 오스카 와일드와 별거하면서 자녀들의 성도 바꾸었다. [7] 양성애자라는 말도 있는데, "와일드는 아내와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에 동성애자였다는 것은 신빙성이 낮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성애자이건 동성애자이건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어디끼지나 사회적 체면 때문에 위장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았을 가능성도 있다. 인생 후반부에서 와일드는 어느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남자들과만 어울려 지냈었다. [8] 영국 시인으로, 이 사람도 동성애자였다. 동성애 성향을 억누르느라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그것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보드게임 워해머 40K 다크 엔젤의 프라이마크 라이온 엘 존슨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9] Lord Alfred Bruce Douglas. 1870 - 1945. [10] 애정표현 관련 일화를 하나 꼽자면, 와일드는 1893년 1월, 옥스퍼드생이던 더글라스를 가리켜 '아폴론이 미치도록 사랑했던 히아킨토스가 바로 그리스 시대의 당신이었음을 난 알고 있소'라고 했다고 한다. [11] <심연으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옥중편지에서 와일드는 그에 대해 '절대 혼자 있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시간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성격, 지적이고 일관된 집중력의 부족, 불행한 사고로 인해 지적인 문제에서 옥스퍼드적인 기질을 갖추지 못하게 된 사람'이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12] 더글러스를 이집트로 보내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더글러스의 어머니는 유약한 성정에 아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오히려 오스카 와일드에게 더글러스를 설득해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13] 재판 당시의 와일드는 불리한 답변을 유머로 받아친다거나, 동성애 문화에 대해서도 서양 문화의 토대가 된 고대 그리스의 유산임을 주장하며 상대편을 압박하였다. [14] Olive Custance. 1874 - 1944. [15] Raymond Wilfred Sholto Douglas. [16] 펜튼빌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원즈워스로 이감. [17] "당신이 남아있는 내 편지들 중에서 고른 것들을 출간할 것을 진지하게 제안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어. 그게 어떤 편지들이었는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내가 처음 들은 당신의 소식이었고, 난 몹시 불쾌했지." -심연으로부터, 108p. [18] "'오스카 와일드씨의 소송에 관하여'라는 기고문을 발표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내 편지 몇 편과 발췌문을 싣는 것을 허락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이었지. 어떤 편지들을? 내가 홀러웨이 구치소에서 당신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당신에게는 이 세상 무엇보다 신성하고 비밀스러운 것이었어야 할 그 편지들을!" -심연으로부터, 111p. [19] 아예 아이들 성까지 홀랜드로 갈아 버렸다. 다만 가정이 파탄난 상황에서 법적인 이혼만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이 시기 낙상으로 얻은 척추 질환 때문에, 아내인 콘스턴스가 오스카 와일드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20] 게다가 투옥되었을 때도 한동안은 아내 콘스턴스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와일드의 어머니는 그가 투옥 중이던 때 사망했는데, 콘스턴스는 아픈 몸으로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직접 감옥으로 그를 찾아왔다. 와일드는 더글러스에게 쓴 편지에서 아내의 배려심에 찬사를 보낸다. [21] 와일드의 첫 동성 애인이기도 하다. 더글라스와 연애하기 전에 만났다. [22] 훗날 더글러스는 편지를 전달받지 못했다고 진술했다가, 첫 장만 읽고 모두 태워버렸다고 번복했다. [23] 교도소장이 특혜를 주어 출소한 그에게 기자들이 달려들어 괴롭히지 않도록 만기 출소하기 몇 시간 전에 그를 런던으로 빼돌려 친구들의 도움을 받게 했다. [24] 오스카 와일드의 <거짓의 쇠락>에 등장하는 시릴, 비비언이라는 이름은 그의 아이들에게서 따온 것이다. [25] 여기서 수험생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26]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 소설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나오는 대화의 일부를 각색한 것으로 추측된다. 원문 [27] 영어권 속담, '병아리가 부화하기도 전에 의 수를 세지 마라 (don't count your chickens before they've hatched)'란 격언을 뒤튼 것으로, 원래 속담의 의미는 우리나라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28]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中 [29] 영국인은 자신들의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해 그에 대한 비교 대상의 타자가 필요했는데, 그 대상으로 아일랜드가 설정됐다는 뜻. [30]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中 [31] 이를 번역할 때, 모호한 부분이 존재한다. 'before the rest of the world'를 '남은 세계를 보기 전'으로 번역할 것인지,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이보다 먼저'로 해석할 지는 흥미로운 논쟁거리이다. [32] (Children begin by loving their parents; after a time they judge them; rarely, if ever, do they forgive them.). [33] 철권 7 TGS 트레일러와 엔딩에 이 문구가 나온다. 본 게임에서는 "아이들은 처음에는 부모를 사랑하지만 자라면서 평가하게 되며 부모를 용서하는 경우는 드물다"로 번역되었다. 카즈야의 행적 상 "가끔"이란 단어와는 멀어서 그런 듯. [34] 옥스퍼드 시절,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와 유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백합을 잔뜩 꽂은 블루 차이나로 자신의 기숙사 방을 장식하고는 한 말. [35] "We are each our own devil, and we make this world our hell." 이 말은 "We create our own demons."로 변형되어 영화 아이언맨 3 도입부에서 토니 스타크가 말하기도 한다. [36] 미국을 방문했을 때, 세관원이 신고할 것이 있느냐고 물은 질문에 대해서 답한 것. [37] 배경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원문은 In married life, three is company, and two is none. 그리고 이것은 Two's company, Threes's none이라는 속담의 변형이다. 이는 "둘은 마음에 맞을 수 있어도, 셋이 되면 갈라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아이가 있어야 결혼생활이 유지될 수 있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말은 원래 와일드의 희곡 < 진지함의 중요성>에 나오는 대사로, 그 실제 내용은 "적당히 외도해서 정부를 두면 결혼생활이 유지되지만, 그런 게 없으면 결혼생활이 깨진다"라는 의미이다.(…) 즉, 결혼생활의 신성함이나 완전성에 대한 비꼼을 담고 있다. 아내와 자식을 두고도 남자 애인을 만들었던 와일드에게 딱 맞는 명언이다. 물론 말년을 생각하면 정말 맞는 말인지는 의문. 본인은 본인의 삶에 만족하였는지, "나는 분에 넘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하며 죽긴 했다. [38] '아서 새빌 경의 범죄' 中 [39] 유일한 장편 소설이다. [40] 오스카 와일드의 첫 출판작. [41] 오스카 와일드의 유작. [42] 시편 130편의 모두(De profundis clamavi ad te, Domine: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이 어구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 <수정 마개>에서도 후반부에 등장한다. [43] 쓰인 연도는 1897년, 최초로 출판된 연도는 1905년이다. [44] 피터 핀치, 제임스 메이슨 등이 출연한다. 퀸즈베리 사건을 다루는 영화이다. [45] 여담으로, 오스카 와일드 역의 스티븐 프라이와 보시 역의 주드 로는 2011년 영화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에서 각각 마이크로프트 홈즈 존 왓슨로 다시 만나게 된다. [46]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진지함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을 각색한 동명의 영화에서(2002) 앨저넌 몬클리프와 잭 워딩 역으로 주연했던 두 배우 루퍼트 에버릿(감독/각본/오스카 와일드 역)과 콜린 퍼스(공동 프로듀서/레지 터너 역)가 다시 만났다. 보시 역은 콜린 모건이 맡았으며, 오스카 와일드 삶의 마지막 시간들을 그려낸다. [47] 정정호 and 이종찬. (2009).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 재론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나타난 미적 ‘감각’과 미의 ‘공적 효용성’의 문제. 세계문학비교연구, 29, 203-227. 참조. [48] 양극성 기분 장애와 정신 분열증이 동시에 드러나는 증상. [49] '어린 소년'이라는 뜻의 별칭으로, 어릴 때 이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50] 로스의 애칭. [51] 동성애가 처벌받던 시절이라 이쪽도 고생이 심했다. 케임브리지에 다닐 때 동급생에 의해 분수에 빠져 폐렴을 얻는 바람에 학교를 쉬었던 일도 있었다. [52] 더글러스가 속한 퀸즈베리 가문에 정신질환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글러스의 아버지 퀸즈베리 후작은 폭력적인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더글러스 본인도 예민하고 불안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53] 훗날 <심연으로부터>로 출간되는 그 편지들이다. [54] 와일드의 저작으로 받은 인세를 정리하여 그가 생전에 졌던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