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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소비에트 몰도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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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도바 공화국 트란스니스트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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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국 Țeara Rumânească Valah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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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1330년[1] ~ 1859년 (529년) |
||
성립 이전 | 동군연합 이후 | |
불가리아 제2제국 헝가리 왕국 |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 |
수도 |
아르제슈(1330~1418) 트르고비슈테(1418~1659) 부쿠레슈티(1659~1859)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선거군주제 | |
국가원수 | 프린스( 보이보드) | |
주요 군주 |
미르체아 1세 블라드 3세 |
|
언어 | 루마니아어 | |
문자 | 키릴 문자 | |
민족 | 루마니아인 | |
종교 | 정교회 |
언어별 명칭 | |
현대 루마니아어 |
Țara Românească, '로마인의 땅' România, '로마인의 나라' Valahia, '블라흐인의 나라' |
중세 루마니아어 |
Цѣра Рȣмѫнѣскъ Țeara Rumânească '로마인의 땅' |
불가리아어 | Влашко (Vlaško) |
세르비아어 | Влашка (Vlaška) |
체코어 | Valašsko |
헝가리어 | Havasalföld |
독일어 | Walachei |
라틴어 | Valachia / Transalpina |
그리스어 | Οὐγγροβλαχία |
오스만 튀르크어 | افلاق (Eflâk) |
1. 개요2. 어원3. 지리4. 역사
4.1. 건국 이전의 역사4.2. 바사라브 왕조
5. 역대 군주(
보이보드)4.2.1.
바사라브 1세: 최초의 보이보드4.2.2.
니콜라에 알렉산드루 ~
단 1세
4.3.
미르체아 1세: 왈라키아의 명군4.4. 드라쿨레슈티 가문 vs 다니슈티 가문 (1)4.5.
블라드 3세: 블라드 체페슈4.6. 드라쿨레슈티 가문 vs 다니슈티 가문 (2)4.7.
라두 4세: 13년간의 안정4.8. 재현되는 왕위쟁탈전4.9.
네아고에 바사라브: 9년간의 안정기4.10. 대혼란기4.11.
미하이 2세: 미하이 비테아줄4.12. 이어지는 혼란4.13.
마테이 바사라브: 22년간의 선정4.14.
콘스탄틴 셰르반 ~
셰르반 칸타쿠지노4.15.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26년간의 치세4.16.
파나리오테스 체제4.17.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봉기4.18. 러시아 제국의 간섭과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의 성립[clearfix]
1. 개요
루마니아의 세 구성지역인 남부 왈라키아, 동부 몰다비아, 중서부 트란실바니아 중 남부의 왈라키아 지방에 세워졌던 보이보드(Voivode) 국가. 몰다비아 공국과 더불어 현대 루마니아의 전신이 되는 국가이다.[2] 15세기경 50만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산되며[3] 초창기 지배가문은 바사라브 가문, 지배체제는 전제군주정, 귀족 계층은 보야르, 종교는 정교회였다.2. 어원
공국의 주류 민족인 루마니아인은 스스로를 로마인이라 일컬었으며, 자기들이 사는 땅을 로마인의 땅(Țeara Rumânească)이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현대 루마니아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주변 민족들은 이들을 블라흐(Vlach)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게르만족과 초기 슬라브족이 로마인과 다른 외국어 화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 'walhaz(외국인)'라는 용어에서 유래되었다. 루마니아인들은 이 용어를 발라히아(Valahia)로 변형해 사용했으며, 현대 루마니아인들도 '왈라키아 공국'을 가리킬때는 블라흐라고 부른다. 영어 이름 왈라키아(Wallachia)는 발라히아가 독일어를 거쳐 변형된 것이다.[4]왈라키아는 14세기 이후 불가리아 자료에서는 블라슈코(Влашко), 세르비아 자료에서는 블라슈카(Влашка), 우크라이나 자료에서는 볼로쉬냐(Волощина), 독일어권, 특히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했던 색슨족 자료에서는 왈라케이(Walachei) 또는 왈라체이(Walachey)로 불렸다. 헝가리인은 왈라키아를 하바살폴드(Havasalföld)라고 지칭했는데, 그 의미는 "눈 덮인 저지대"를 의미한다. 한편, 라틴어로 번역된 트란살피나(Transalpina)는 헝가리 왕국의 공식 왕실 문서에 사용되었다. 오스만어에서는 'Eflâk Prensliği' 또는 간단히 'Eflâk'로 지칭되었다. 고대 알바니아어에서는 'Gogënia'로 지칭되었는데, 이는 알바니아인이 아닌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용어였다.
3. 지리
왈라키아 공국의 면적은 약 77,000 제곱 킬로미터로, 다뉴브 강 북쪽과 세르비아 동쪽, 남부 카르파티아산맥 남쪽에 위치한다. 전통적으로 올트 강을 사이에 두고 서부와 동부로 나뉘는데, 서부는 올테니아(Oltenia), 동부는 문테니아이다. 이중 문테니아가 전통적으로 왈라키아의 정치적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종종 왈라키아와 동의어로 이해되었다. 왈라키아 공국의 통치자인 보이보드는 문테니아에서 군림하는 한편, 올테니아의 반(Ban)을 별도로 칭했다.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의 전통적인 국경은 대부분 밀초프 강과 일치했으며,동쪽으로는 도브루자와 이웃했고, 서쪽으로는 트란실바니아와 국경을 공유했다. 왈라키아 군주들은 오랫동안 경계 너머 북쪽 지역(암라슈, 치세유, 파가라슈, 하체그)를 소유했지만, 왈라키아 본토의 일부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왈라키아의 첫번째 수도(1330 ~ 1418, 89년간)는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Curtea de Arges)이며, 두번째 수도(1418 ~ 1659, 242년간)는 트르고비슈테이며, 1659년부터 1859년까지 부쿠레슈티가 왈라키아 공국의 수도로 기능했다.
4. 역사
4.1. 건국 이전의 역사
왈라키아는 다키아 전쟁이 끝난 후인 106년부터 271년까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면서 로마에서 이탈했다가, 콘스탄티누스 1세 치세 때 일시적으로 복속되었다. 로마군이 철수한 후에도 로마화된 부족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체르냐코프 문화를 꽃피웠다. 이후 게피드족, 아바르족, 슬라브족이 이곳에 거주했으며, 서기 7세기 경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018년 불가리아 제1제국이 멸망한 뒤 동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가, 11세기 중순 페체네그족의 지배를 받았고, 페체네그족이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과정에서 쇠락하던 1091년경에 쿠만족이 왈라키아 일대를 장악했다.1241년 몽골 제국이 유럽을 침략했을 때 쿠만족이 왈라키아를 떠나 사방으로 피신했지만, 몽골 제국이 왈라키아를 직접적으로 통치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왈라키아에는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고, 헝가리 왕국과 불가리아 제2제국간의 영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왈라키아 원주민들이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수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247년 7월 2일, 헝가리 국왕 벨러 4세가 발행한 구호기사단 영지 수여 칙령에서는 "보이보드 세네슬라우의 영토를 제외한 올트 강 동쪽의 영토를 구호기사단에게 수여한다"라고 기술되었다.
1272년, 리토보이라는 인물이 카르파티아 산맥 양쪽의 땅을 통치하면서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에게 조공을 바치길 거부했다가 헝가리군의 침공으로 전사했다. 그의 형제인 바르바트는 헝가리군에 붙잡혀 헝가리 왕국의 수도 부더로 이송된 뒤 헝가리의 통치를 인정하고 몸값을 지불하는 대가로 올테니아의 통치를 인정받았다. 17세기 루마니아 연대기는 전설상의 통치자 라두 네그루가 1290년 또는 1292년에 피기라스에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왈라키아로 이주한 뒤 그곳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바사라브 1세가 라두 네그루로 지칭된 인물의 아들이었으며, 1304년에서 1324년 사이에 라두 네그루의 뒤를 이었다고 추정하나, 라두 네그루 자체가 왈라키아에 등장한 여러 통치자의 활약상이 뒤섞인 전설상의 인물이기 때문에 신빙성은 부족하다.
4.2. 바사라브 왕조
4.2.1. 바사라브 1세: 최초의 보이보드
역사에서 뚜렷한 행적을 보이는 왈라키아 공국 최초의 보이보드는 바사라브 1세이다. 바사라브(Basarab)는 튀르크어족의 동사 bas- ("압박하다, 통치하다, 통치하다")와 존칭 aba("아버지, 연장자 친척")의 합성어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바사라브 1세가 튀르크 계열인 쿠만 또는 페체네그 조상을 두었다고 추정하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는 1332년 법령에서 그를 "우리의 불충실한 블라흐, 바사라브"라고 거론하면서, 그를 블라흐인으로 지명했다.바사라브 1세가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324년이다. 그 해 7월 26일,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가 발행한 왕실 문서에서, 바사라브 1세는 "우리의 왈라키아 총독"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당시 카로이가 바사라브 1세를 충성스러운 가신으로 여겼음을 암시한다. 1325년 6월 18일자 헝가리 왕실 문서에서는, 바사라브 1세가 "헝가리의 신성한 왕관에 불충실하다"고 기술되었다. 바사라브 1세는 이때부터 헝가리 왕국에 공물을 보내기를 거부하고 충성 서약을 깬 것으로 여겨진다.
1329년 헝가리 왕실 문서에서, 바사라브 1세가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타타르인과 함께 메하디아 주변을 습격한 적으로 언급되었다. 여기에 1324년에서 1330년 사이에 세베린[5]을 점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30년,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미하일 아센 3세가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했다. 1331년 세르비아 국왕이 된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발행한 왕실 문서에 따르면, 바사라브 1세는 미하일 아센 3세를 돕기 위해 그의 군대를 이끌고 세르비아를 위협했다. 그러나 미하일 아센 3세는 1330년 7월 28일 벨버즈드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1330년 9월, 카로이 로베르트는 헝가리군을 파견해 올테니아를 침공하여 세베린 요새를 탈환하고 세베린의 반(Ban)으로 데니스 제시를 임명했다. 이에 바사라브 1세가 은화 7,000개를 즉시 바치고 연간 공물을 보낼 것이며, 아들 한 명을 비셰그라드로 보낼 테니 군대를 물려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카로이는 단호히 거부하고, 바사라브 1세가 숨은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Curtea de Argeș)로 진군했다. 그러나 적군이 청야 전술을 사용하는 바람에 식량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바사라브 1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철수길에 올랐다. 1330년 11월 9일 카르파티아 산맥 남부를 가로지르는 좁은 통로를 행진하던 헝가리 왕실군은 포사다에서 왈라키아인의 습격을 받았다. 카로이는 데시데리우스 헤데르바리(Desiderius Hédervári)라는 이름의 기사와 옷을 바꿔 입은 후 전장에서 탈출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카로이로 자처하며 적의 시선을 잡아끌면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카로이는 왈라키아 침공을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고, 왈라키아는 헝가리로부터 독립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바사라브 1세는 헝가리와의 전쟁으로 수도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가 파괴되자, 수도를 큼플룽으로 옮긴 후 대대적인 개발을 단행했다. 이후 세베린 요새를 탈환했고, 사위인 이반 알렉산더르가 불가리아 왕위를 차지하는 걸 도왔으며, 이반이 1331년과 1332년에 동로마 제국에 맞서 싸우는 걸 지원했다. 1340년 이후 파괴되었던 쿠르테다 데 아르게슈에 새로운 요새와 궁전을 건설했으며, 산 니코아라 교회 건축도 개시했지만 사후에야 완공되었다. 1344년 헝가리 왕국의 새 국왕 러요시 1세가 아버지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왈라키아로 쳐들어가려 하자, 바사라브 1세는 위협을 느끼고 아들 니콜라에 알렉산드루를 그에게 보내 봉신을 자처했고, 그는 이에 만족하여 수도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왈라키아에 대한 헝가리의 종주권은 명목상이나마 복원되었다.
4.2.2. 니콜라에 알렉산드루 ~ 단 1세
바사라브 1세의 손자인 블라디슬라프 1세기 발행힌 왕실 문서에 따르면, 바사라브 1세는 우주력 6860년(서기 1352년)에 큼플룽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 후 보이보드에 선임된 니콜라에 알렉산드루는 아버지의 치세 말부터 건설되던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의 산 니코아라 교회를 완공했고, 콤플랑에 건설되던 네글루 보다 수도원 공사도 마무리했다. 한편, 집권 후 헝가리 왕국과의 갈등이 불거졌다. 1355년자 헝가리 왕실 문서에서, 왈라키아 보이보드가 헝가리 국왕에게 확실히 복종한다면 "헤택"을 준다는 내용이 기재되었다. 이 혜택이 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부 학자들은 전임 왈라키아 공 바사라브 1세와 헝가리 왕국의 분쟁 지역이었던 세베린 요새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바사라브 가문의 통치를 인정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갈등은 계속 이어졌다. 1359년 8월 29일자 왈실 문서에서, 러요시 1세는 헝가리 사절이 1351년 이후 왈라키아에 여러 임무를 수행하고자 파견되었다가 모두 실패했다고 밝혔다.이렇듯 헝가리 왕국과의 갈등이 심해지자, 그는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기로 하면서, 정교회를 수용하기로 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에 응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지도 아래 비시나 대주교인 치르 자친트가 이끄는 웅그로 블라히아 대주교가 설립되었다. 이리하여 가톨릭과 정교회 세력이 혼재했던 왈라키아는 정교회 국가로 굳어졌다. 알렉산드루는 끝까지 러요시 1세와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러요시 1세는 알렉산드루가 죽고 아들 블라디슬라프 1세가 왈리키아 공에 오른 직후에 "바사라브 1세의 나쁜 습관을 따랐다"고 비판하며, 니콜라에와 블라디슬라프 1세 부자를 보이보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1364년 11월 16일 니콜라에 알렉산드루가 사망한 뒤, 아들 블라디슬라프 1세가 왈라키아 3대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365년 2월,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는 새 보이보드 블라디슬라프 1세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걸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테메스바르에 군대를 집결했다. 하지만 블라디슬라프 1세가 복종 의사를 밝히자 방향을 바꿔 불가리아 쪽을 공략하기로 했다. 당시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는 1355년 후계자로 정했던 미하일 아센 4세가 흑사병에 걸려 사망하자 막내 아들 이반 시슈만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에 내심 자신이 후계자가 되리라 여겼던 또다른 아들 이반 스라치미르가 반발하여 영지로 삼고 있던 비딘에서 외교권을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중앙 정부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등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러요시는 그런 그에게 비딘의 종주권을 자신에게 넘긴다면 불가리아의 왕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스라치미르가 거절하자, 러요시는 1365년 5월 1일 비딘을 침공해 6월 2일 함락시키고 스라치미르를 사로잡았다.
1366년, 러요시 1세는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 블라디슬라프 1세에게 세베린 일대와 포가라스 백국의 통치권을 넘겨줬다. 1368년, 블라디슬라프 1세는 헝가리의 지배에 반기를 든 뒤 이반 시슈만과 동맹을 맺고 비딘을 포위했다. 러요시는 이에 맞서 그 해 가을에 도나우 강 하류로 진군하면서 에르데이 보이보드 러크피치 미클로시에게 왈라키아를 침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알로미차 강 계곡을 행진하던 중 왈라키아인들의 습격을 받고 괴멸되었고, 미클로시는 가까스로 전장을 탈출했다. 이 소식을 접한 러요시는 본군을 이끌고 왈라키아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블라디슬라프 1세는 1369년 여름에 귀순했다. 이후 러요시는 이반 스트라치미르를 비딘의 통치자로 복위시켰고, 스트라치미르는 그 대가로 러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두 딸을 인질로 보냈다.
1368년 1월 20일 브라쇼브 상인들에게 상품에 부과되는 관세인 트리세시마에 대한 특권을 부여했으며, 왈라키아 공국 최초로 은화를 독자적으로 주조했다. 1375년 세베린 인근의 보디차와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 왕립 교회를 창건했다. 1377년경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에서 사망했을 때 자녀를 두지 못했고, 이복 형제 라두 1세가 뒤이어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측 기록에 따르면, 왈라키아 공국은 1377년에 전신 갑옷을 대량으로 주문했다고 한다. 그 후 라두 1세는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이반 시슈만, 오스만 술탄국의 무라트 1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에 대항했다. 이에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는 왈라키아로 군대를 파견해 왈라키아-불가리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세베린 바나트를 공략했다. 그러나 왈라키아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에르데이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이들과 함께 하던 튀르크군은 바나트를 철저히 약탈했다.
1377년 11월 19일, 러요시 1세는 브라쇼브에서 온 트란실바니아의 작센 상인들에게 왈라키아가 자신의 소유가 되면 세금을 감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382년, 러요시 1세는 오르소바의 지주들에게 내린 칙령에서 외국 상인이 상품을 가지고 왈라키아에 들어가는 걸 금지하고 밤낮으로 국경을 지키며 모든 일을 자기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여기서 세베린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오르소바가 왈라키아-헝가리 국경 요충지로 거론되는데, 학자들은 이에 대해 세베린은 왈라키아에 완전히 넘어갔고, 오르소바 역시 상당수가 라두 1세에 의해 합병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라두 1세는 1380년대에 성 필로프테아의 유해를 타르노보에서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로 옮기고 그곳의 왕립 교회에 이를 기념하는 벽화를 그리도록 했다. 또한 그는 치세 내내 많은 교회를 건설했는데, 티스마나, 코지아, 코트메아나에 정교회 성당을 건설했고, 세베린(1380년경), 아르게슈(1381년)에 2개의 가톨릭 성당을 건설했으며, 타르고비스테에 가톨릭 수도원을 세웠다.
1383년경 라두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단 1세가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385년 8월 31일 주판 다고미르가 아르게슈의 코트메아나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했음을 알리는 증서에서, "단 보이보드의 치세에 기증했다"라는 문구가 적혔다. 1390년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가 작성한 왕실 문서에서, "단 보이보드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우리 성 메히디아의 영지를 습격했다"는 문구가 있다. 이로 볼때, 단 1세는 헝가리 왕국과 전쟁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쟁의 경위와 전개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은 불분명하다. 아테네 출신의 동로마 제국 역사가 라오니코스 찰코콘딜레스(Λαόνικος Χαλκοκονδύλης, 1430 ~ 1470)에 따르면, 1386년 9월 23일에 미르체아 1세가 보야르들과 공모해 단 1세를 독살했다고 한다. 반면, 익명의 불가리아 연대기는 단 1세가 1384 ~ 1386년 사이에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은 타르노보의 이반 시슈만과 전쟁을 벌이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단 1세의 아들 단 2세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이복형제인 미르체아 1세가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에 등극했다. 이후 미르체아 1세의 후손은 드라쿨레슈티 가문, 단 2세의 후손은 다니슈티 가문으로 일컬어지며, 두 가문은 보이보드 직위를 놓고 오랜 세월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4.3. 미르체아 1세: 왈라키아의 명군
4.3.1. 외치
단 1세의 뒤를 이어 보이보드에 선임된 미르체아 1세는 왈라키아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동맹국을 찾았다. 1388년 다뉴브 강 하류 지역인 도브로게아를 합병했으며, 1389년 몰다비아 보이보드 페트루 무샤트와 우호 관계를 맺었고, 페트루의 중재로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와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1404년과 1410년에 갱신되었다. 헝가리 왕국의 국왕 지기스문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오스만 술탄국의 발칸반도 확장 정책에 맞섰다.1934년 가을, 오스만 술탄국의 술탄 바예지트 1세는 다뉴브 강 남쪽의 기독교인들을 지원해 오스만 제국에 맞서게 하는 미르체아 1세를 정벌하기 위해 4,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켰다. 당시 12,000명의 군대만 이끌었던 미르체아 1세는 정면 대결은 자살 행위라고 판단하고 유격전을 택했다. 1394년 10월 10일[6], 미르체아 1세가 이끄는 군대는 다뉴브 하류 저지대의 숲이 우거진 로비네에서 궁수대를 이끌고 오스만군 선봉대를 향해 화살을 퍼부어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 벨부즈 데스포티스 콘스탄틴 드라가쉬가 전사했다. 그러나 미르체아 1세는 오스만군의 추가 공세에 밀려 가족과 추종자들을 이끌고 헝가리 왕국으로 피신했고, 블라드 1세가 오스만 제국군의 추대로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396년, 미르체아 1세는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의 가신 자격으로 십자군에 참여했다. 신성 로마 제국, 헝가리, 프랑스 왕국을 주축으로 한 십자군은 남하하면서 라호브에 거주하던 무슬림을 학살하는 등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군주와 귀족들이 한데 섞인 십자군은 불분명한 지휘체계로 인해 작전 진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지기스문트와 미르체아 1세 등은 튀르크군을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낸 뒤 그동안 그들과 수많은 격전을 치러봤던 왈라키아 보병대가 전방에서 적을 묶어두는 동안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의 기사단이 출격해 적의 측면과 후방을 강타하는 전술을 제시했다. 그러나 기사들은 자기들이 먼저 튀르크군의 정면으로 돌격하겠다고 고집했다. 급기야 미르체아 1세와 지기스문트가 공적을 빼돌리려 든다는 비난마저 일었고, 결국 두 사람은 기사단의 뜻대로 하게 했다.
그 후 1396년 9월 25일부터 28일까지 벌어진 니코폴리스 전투는 십자군의 재앙이었다. 기사단은 무작정 돌격했다가 압도적인 수의 적군에게 포위되어 궤멸되었고, 후방에 남겨진 십자군 역시 승기를 탄 튀르크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나마 미르체아 1세는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기사단이 궤멸될 무렵에 전력을 보전한 채 전장을 빠져나갔다. 1396년 10월,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인 오스토야의 스티보르가 블라드 1세를 격파하고 생포했다. 블라드 1세는 포로 신세로 지내다가 1396년 12월 또는 1397년 1월에 사망했고, 미르체아 1세는 1397년 1월 왈라키아로 돌아와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1397년 다뉴브 강을 건너 약탈을 자행하던 오스만 습격대를 격파했고, 1400년 또다시 다뉴브 강을 건너 약탈하려던 오스만 습격대를 격파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에게 참패하고 생포된 후 오스만 술탄국이 바예지트 1세의 아들들에 의해 내전에 휘말리자, 미르체아 1세는 이때를 틈타 영토 확장에 착수했다. 1404년 도브로게아를 재장악했으며, 오스만 술탄국의 내전에 참여해 무사 첼레비가 발칸 반도에서 술탄이 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413년 메흐메트 1세가 내전을 수습하고 오스만 술탄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자, 1415년경 오스만 술탄국과 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오스만 제국이 매년 3,000개의 금화를 받는 대가로 왈라키아를 속주("파샬리크")로 삼는 걸 그만둔다는 것이었다.
4.3.2. 내치
4.3.2.1. 경제
왈라키아의 주요 통화는 은 두카트였다. 미르체아 1세 치세에 수많은 문구가 새겨진 은화가 대량으로 발행되었는데, 앞면에 통치자의 왕조 문장이 있고 뒷면에는 왈라키아 독수리가 그려진 헬멧이 새겨지거나 오른손에 창을 들고 동로마 제국 의상을 착용한 미르체아 1세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여기에 반(Ban)이라고 불리는 작은 동전 도 발행되었다. 앞면에는 왈라키아 독수리가 서 있는 투구가 찍힌 왕조의 문장이 그려졌고, 뒷면에는 똑같이 갈라진 팔이 있는 십자가와 다양한 수의 구체가 있는 십자가가 그려졌다. 주로 외국인과 상인들이 동전을 사용했고, 국내에서는 주로 현물거래가 이뤄졌다.왈라키아의 주요 수출 및 수입품은 곡물(밀, 기장, 귀리, 보리) 및 야채로, 주로 트란실바니아와 다뉴브강을 통해 거래했다. 왈라키아 곳곳에 물이 침투하지 않도록 지어진 지하 곡물창고가 있었고, 방앗간도 전국에 퍼졌다. 이외에도 상당한 양의 와인과 과일도 왈라키아에서 생산되었으며, 호두 과수원 등 다양한 유형의 나무가 부동산 문서에 자주 언급되었다. 하지만 농업에서 가장 큰 부를 챙길 수 있는 상품은 단연 가축이었다. 주로 소, 말, 양, 돼지, 벌이 사육되었으며, 소가죽, 치즈, 밀랍, 꿀 등이 상당량 수출되었다. 왈라키아의 강과 연못에서 풍부하게 살아가던 물고기들도 많이 수출되었다. 미르체아 1세는 트란실바니아 출신의 목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그들이 왈라키아 산에서 양떼를 치고 그 나라의 초원과 연못을 방해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만약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가 전쟁을 벌여도, 이들 목자의 마을은 특별히 파견된 보야르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광산에서 추출한 소금과 구리 역시 상당한 수입원이었다. 소금은 주로 다뉴브강 남쪽으로 수출되어 큰 수입을 거두었다. 블라드 2세는 지우르주 성채에 대해 "이 성에는 내 아버지(미르체아 1세)의 소금 바위를 희생하지 않은 돌이 하나도 없다"라고 밝혔는데, 이는 소금 판매를 통해 얻은 수입으로 지우르주 성채를 세웠음을 암시하는 발언이었다. 한편, 미르체아 1세는 1392년에 바이아 데 아라마에 구리 광산을 건설하고, 이 광산의 수입의 십일조를 티스마나 수도원에 기증하도록 했다. 티스마나 수도원에서는 구리를 판매하거나 총, 양초 등 특정 제품을 제조하는 데 사용했다. 구리 또는 구리로 만든 물건은 트란실바니아 및 기타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왈라키아는 트란실바니아와 깊은 상업적 관계를 유지했다. 트란실바니아에서 공산품, 특히 무기가 수입되었고 전문 장인(건축가, 석공, 목수 및 목수 등)이 왈라키아로 보내졌다. 그 대신, 왈라키아는 막대한 농산물을 트란실바니아로 수출했다. 관세는 수출품(즉, 트란실바니아로 떠난 물품)의 경우에만 상인이 지불했다. 미르체아 1세는 트란실바니아와 브라쇼브 상인들이 판매하는 다양한 제품 범주에 대한 관세와 금액, 상인의 권리와 의무, 가능한 지불 면제 등 다양한 특권을 부여했다. 또한 미르체아 1세는 폴란드 왕국과도 상업적 관계를 맺었다. 그는 폴란드 상인을 유치하기 위해 그들에게 관세 면제를 허용했으며, 르부프 상인들은 전국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상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또한 왈라키아는 이탈리아 국가들, 특히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와도 상업 교류를 유지했다. 왈라키아는 두 도시국가로부터 동양 상품(고가의 직물, 향신료, 향수 등)을 수입하고 밀랍, 꿀, 모피 등을 수출했다.
4.3.2.2. 행정
미르체아 1세는 행정 제도를 개편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왈라키아를 최소 6개에서 최대 11개의 공국으로 분할하고, 보이니쿨(Vornicul)을 각 공국의 수장으로 세워서 해당 지역의 사법과 내정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리고 바눌(Banul)은 보이니쿨의 행정 명령을 집행하는 동시에 군사 총독의 기능을 수행했다. 한편, 왈라키아 보이보드의 궁정의 행정도 체계적으로 개편되었다. 로고파트(Logofăt, 전령관)는 통치에 관한 기록을 보관하고 가장 중요한 헌장을 정성 및 봉인했으며, 비스티에(Vistier, 재무관)는 왕국의 수입과 지불을 관리했고, 스파타르(Spătar)는 잔치나 의식에서 보이보드의 검을 들고 전쟁시에는 군대의 수장을 맡았다. 스톨니치(Stolnic, 집사)는 보이보드의 식탁을 관리했으며, 파하르니치(Paharnic, 술잔 관리관)는 보이보드가 마실 술을 먼저 마시고 보이보드에게 술을 시중들었고, 피타르(pitar)는 보이보드가 먹을 빵을 관리했다. 마지막으로 코니술(Comisul)은 보이보드의 마구간을 관리했다.지방 행정은 소규모 보이니쿨, 지방 보야르 또는 통치 사절에 의해 보장되었다. 오하바(면세 마을)의 경우, 경영권은 해당 마을, 장원 또는 수도원 소유자에게 속했다. 나머지 지역에서는 지방 보이니쿨과 보이보드가 파견한 관리가 행정부를 이끌었다. 도시는 뚜렷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영주는 도시가 위치한 토지의 소유자였지만 특별 허가를 받지 않고 박람회를 조직하고 토지를 경작하는 등의 자유를 부여했다. 세금과 판결에 관한 한, 왈라키아에는 세무서와 사법부의 순회 시스템이 있었다. 세금 수취관과 판사는 특정 날짜에 관할권이 있는 지역을 순회하며 엄무를 수행했다. 또한 보이보드가 제공한 "구호품/봉사 및 혜택"을 전파하거나 이행하기 위한 관리들도 자주 파견되었다. 미르체아 1세는 도브로게아를 공략한 후 그곳의 옛 지방 행정을 유지했다. 도브로게아 총독은 케팔리아(kephalia) 라고 불렸는데, 이 단어는 본래 대규모 토지를 보유한 이 중에서 선택된 총독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용어였다.
4.3.2.3. 군대
미르체아 1세는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병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군역 면제를 누구에게도 제공하지 않았고, 보야르, 자유 농민, 농노, 상인, 수도사들에게도 국난 시 소집령을 발동했다. 이렇듯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인구 전체로 구성된 국가군을 가리켜 '대 호스트'로 일컬어졌다. 영주가 평시에 대동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군대는 소위 '궁정군'으로 일컬어졌는데, 주로 귀족과 특권을 가진 마을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가능한 한 빨리 무기를 가지고 영주의 처분을 받아야 했다. 이 군대에는 산 너머의 통로를 방어해야 하는 플라이에시(Plăiesi)와 노잡이를 제공할 의무가 있는 오파키나(opacinas) 등이 포함되었다. 용병도 미르체아 1세에 의해 고용되었다. 그들은 수백 가량의 기병 또는 보병들이었는데, 땅이 없고 손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나 농민 중에서 선택되었다.미르체아 1세의 군대에서는 기병대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모슈넨과 보야르들은 사망 시 또는 기타 상황(토지 거래 등)에서 말을 영지에 의무적으로 돌려줘야 했다. 그들의 말 외에도 특정 마을에서 관리하는 말도 있었다. 이 말들은 일반적으로 다뉴브 초원 에서 풀을 뜯기 위해 끌려가곤 했다. 기병들 중에는 갑옷을 입은 기사단이 눈에 띄었는데, 이들의 존재는 미르체아의 아버지 라두 1세가 베네치아에 사슬 갑옷 1만 벌을 주문한 것에서 처음 거론되었다. 1412년 헝가리 부더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서 루마니아 기사가 언급되기도 했다.
미르체아 1세 시대의 주력 무기는 화살이었다. 익명의 불가리아 연대기는 로비녜 전투에서 루마니아 궁수대가 쏜 수많은 화살이 태양을 가려서 하늘이 어두워졌다고 밝혔다. 또한 석궁과 창도 언급되었다. 왈라키아의 방패는 타타르의 것과 유사하게도 가죽으로 덮인 나무로 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무기는 주로 트란실바니아의 작센인들에게서 조달되었다. 일부 기록에는 대포 몇 문과 포대도 갖췄다는 내용이 있으나, 이들의 구체적인 활약상은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미르체아 1세는 도나우 강변에 여러 요새를 새로 짓거나 보수했으며, 교회를 다수 건설하는 등 정교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해 민심을 안정시켰다.
4.4. 드라쿨레슈티 가문 vs 다니슈티 가문 (1)
1418년 1월 31일, 미르체아 1세가 29년간 통치한 끝에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1391년부터 공동 통치자로 언급되던 아들 미하이 1세가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는 헝가리 왕국과 몰다비아 공국에 대한 부친의 우호 정책을 유지했으며,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색슨 상인과의 협력을 이어갔다. 1419년 봄 오스만 제국이 이웃한 기독교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왈라키아를 2차례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왈라키아군은 헝가리 왕국의 지원에 힘입어 이들을 격퇴했다. 하지만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는 왈라키아에 속한 보디차와 티스마나 수도원에 헌장을 내림으로써 그곳들의 관리권을 획득했고, 오스만 제국군의 침략을 막아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왈라키아가 소유하던 세베린 요새에 군대를 주둔하는 등 왈라키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그 해 가을, 미하이 1세는 오스만 제국을 침공한 지기스문트를 지원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왈라키아를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미하이 1세는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다뉴브 강변의 지우르지우 및 요러 요새를 오스만 제국에 양도하고, 지난 3년간 보내지 않았던 공물을 바치기로 했으며, 두 아들 미하이와 라두를 오스만 제국에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
1420년, 왈라키아 공국 제5대 보이보드 단 1세의 아들이자 미하이 1세의 사촌인 단 2세가 알불(Albul)과 우트메스(Utmeș) 등 왈라키아 보야르들의 추대를 받고 보이보드 직위에 도전했다. 미하이 1세는 처음엔 단 2세를 격퇴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1419년 가을에 맺었던 계약을 당장 이행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단 2세를 지원하자 전세가 불리해졌다. 미하이 1세는 헝가리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냈지만, 1420년 8월 오스만 제국군에게 참패했고 전장에서 사망했다. 그 후 단 2세가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1421년 5월, 미하이 1세의 이복형제인 라두 2세가 반기를 들어 단 2세를 축출했다. 단 2세는 추종자들을 끌어모은 뒤 반격을 가해 그해 11월 라두 2세를 축출했다. 라두 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한 뒤 오스만 제국 술탄 무라트 2세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왈라키아가 오스만 제국의 확실한 속국이 되고 다뉴브 강 남쪽의 도브로게아를 오스만 제국에게 내주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서약했다. 1423년 여름, 라두 2세가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단 2세를 몰아내고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단 2세는 군대를 끌어모아 반격을 가해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고 라두 2세를 도로 몰아냈다.
1424년 12월, 라두 2세는 3번째로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받아 단 2세를 밀어내고 권좌를 되찾았으며, 사전에 약속한 대로 도브로게아를 오스만 제국의 소유물로 인정했다. 이에 단 2세는 헝가리 왕국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가해 1426년 5월 라두 2세를 몰아내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오스만 제국은 단 2세를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단 2세는 많은 수의 불가리아 군인을 용병으로 고용해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1427년 1월 라두 2세가 재차 오스만군의 지원을 받고 쳐들어오자 물러났다.
1427년 봄, 단 2세는 헝가리군과 왈라키아 추종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라두 2세를 다시 몰아내고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했으며, 지우르지우 요새를 탈환했다. 이후 라두 2세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데, 일부 학자들은 라두 2세가 단 2세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을 거라고 추정하나 불확실하다. 1428년, 단 2세는 기병 6,000명을 이끌고 지기스문트의 헝가리군과 함께 세르비아의 골루바슈에 있는 오스만 요새 공방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공방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퇴각하던 중 오스만군에 생포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 협상한 끝에 그들을 주권자로 받들고 공물을 납부하며, 더 이상 헝가리 왕국을 돕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로 인해 단 2세와 지기스문트간의 관계가 냉각되었다.
1431년 6월, 오스만 제국군이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단 2세는 이번엔 헝가리 왕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단독으로 맞섰지만 끝내 전사했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은 미르체아 1세의 또다른 사생아인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를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헝가리 왕국의 국왕 지기스문트는 오스만 제국이 이대로 왈라키아를 복속하면 자국에 불리해질 거라고 여기고, 미르체아 1세의 또다른 아들인 블라드 2세를 트란실바니아의 시기쇼아라 시에 정착해 알렉산드루 1세와 대적하도록 했다.
1432년, 알렉산드루 1세는 헝가리 왕국과 손잡고 반 오스만 정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지기스문트는 블라드 2세가 그를 상대로 적대행위를 하는 걸 금지했다. 그 해 6월 22일 몰다비아로 향하던 오스만 침공군을 헝가리군과 합께 격파했다. 이후 지우르지우, 드로베타-투르누 세베린 등 다뉴브 강변 요새들을 탈환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군의 반격으로 지기스문트가 격파되고 트란실바니아의 샤라 바르세 일대가 황페화되자, 그는 위협을 느끼고 오스만 술탄국과 조약을 갱신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오스만 술탄국에 매년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바치며, 헝가리로 향하는 오스만 제국군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기로 했다.
그 후 알렉산드루 1세가 술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아드리아노폴리스로 향했을 때, 블라드 2세가 그에게 축출되었던 보야르들과 함께 왈라키아 공국에 침입했지만 알렉산드루 1세를 추종하는 보야르들에게 패퇴했다. 1435년 블라드 2세가 다시 침공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알렉산드루 1세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개입하는 바람에 격퇴되었다. 1436년 6월 25일, 알렉산드루 1세가 병사했다. 블라드 2세는 지기스문트의 지원을 토대로 1436년 9월 카르파티아 산맥을 건너 왈라키아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뒤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블라드 2세는 초기엔 오스만 술탄국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술탄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1437년 1월 20일에 자신을 "하느님의 기름부은 자, 위대한 사령관이자 왈라키아 통치자, 암라스와 파가라스의 공작, 헝가리의 충실한 봉신"이라고 칭하는 헌장을 반포함으로써 친 헝가리 성향을 드러냈다. 그러나 1437년 12월 9일 지기스문트가 향년 69세로 병사한 뒤 왈라키아에 대한 헝가리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그는 입장을 바꿔 오스만 술탄국의 봉신을 자처했다.
1438년 술탄 무라트 2세가 트란실바니아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일으켰을 때 진군로를 안내해주는 역할로서 원정에 참여했다. 오스만 제국군은 시비우와 브라쇼프 공략엔 실패했지만, 6주 동안 주변 지역을 철저히 약탈하고 수많은 주민을 생포해 끌고 가서 노예로 팔았다. 이때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군에 포위되었던 세비스 시 주민들에게 도시를 넘기고 왈라키아로 이주하도록 설득했다.
1442년 3월, 오스만 특사로부터 에디르네로 가서 무라트 2세에게 경의를 표하라는 지시를 받은 블라드 2세는 장남 미르체아 2세를 왈라키아 통치자로 세운 뒤 공물을 가지고 에디르네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라트 2세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반역죄로 기소되어 감옥에 갇혔다. 1442년 6월, 트란실바니아 총독 후녀디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한 뒤 단 2세의 아들 중 한 명인 바사라브 2세를 왈라키아의 보이보드로 앉히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미르체아 2세는 후녀디 야노시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산악지대로 피신한 뒤 오스만 술탄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 후 블라드 2세는 어린 아들 블라드 3세, 라두 3세가 인질로 넘겨지고, 매년 공물을 바치고, 매년 왈라키아의 소년들을 보내 오스만 군대에서 복무하도록 훈련하는 조건을 수락한 뒤에야 겨우 풀려났다. 1443년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토대로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1443년 10월 ~ 1444년 1월까지 지속된 후녀디 야노시와 폴란드 국왕 및 헝가리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의 오스만 술탄국에 대한 원정이 벌어졌을 때, 블라드 2세는 중립을 고수했다.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는 후녀디 야노시와의 전쟁이 갈수록 불리해지자 1444년 6월 12일 에디르네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 조약에는 블라드 2세가 술탄 무라트 2세의 가신으로 남지만 인질을 돌려받으며, 공물을 바칠 의무를 면제받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추기경 줄리아노 체자레니는 전쟁이 이 정도로 끝나기를 원하지 않고 대오스만 동맹 결성을 촉구하였고 여기에 호응한 교황령, 헝가리 왕국, 폴란드 왕국, 부르고뉴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의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블라드 2세는 자식들이 오스만 술탄국에 인질로 잡혀있는터라 십자군 지도부에 원정을 취소해달라고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십자군을 직접 돕기를 거부하고 왈라키아로 돌아갔다. 그 대신 장남 미르체아 2세가 4,000 ~ 7,000명의 기병을 맡겨 십자군에 가담했다. 1444년 11월 10일 십자군이 바르나 전투에서 완패하고 브와디스와프 3세가 전사한 후, 후녀디 야노시는 다뉴브 강변 너머로 피신했다가 블라드 2세에게 생포되었다. 블라드 2세가 후녀디 야노시를 생포한 이유는 불분명한데, 일전에 야노시가 그를 몰아내고 바사라브 2세를 세운 걸 마음에 담아뒀을 수도 있고, 십자군이 바르나로 진군할 때 왈라키아 영토를 약탈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후녀디 야노시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난 뒤 풀려났다.
1445년, 블라드 2세는 후녀디 야노시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 술탄국으로부터 지우르지우를 탈환했고, 1446년 봄에는 우즈베이 다부드가 이끄는 오스만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왈라키아와 헝가리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 블라드 3세는 브라쇼브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왈라키아 상인들이 트란실바니아에서 체포되었다며 헝가리 왕국의 행태를 비난했다. 1446년 또는 1447년에 오스만 술탄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인질이 된 두 아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이 다시 지우르지우 요새를 통제하도록 허용했다. 여기에 불가리아 난민들을 오스만 술탄국으로 돌려보내는 걸 받아들였다. 1447년 7월 몰다비아 왕좌를 놓고 벌어진 내전에 개입해 로만 2세를 지지했다. 로만 2세의 상대인 표트르 2세는 후녀디 야노시의 지원을 받았기에, 이 일 역시 야노시와 블라드 2세의 관계가 악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1447년 7월 20일, 후녀디 야노시는 브라쇼브 시민들에게 블라드 2세의 사촌이자 정적인 블라드슬라프 2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1447년 11월 말, 후녀디 야노시는 단 2세의 아들인 블라디슬라프 2세와 함께 왈라키아를 기습 침공했다. 이때 장남 미르체아 2세는 체포된 뒤 색슨 귀족들에 의해 빨갛게 달군 꼬챙이로 실명된 뒤 산채로 매장되었다. 블라드 2세는 페리슈로 피신했지만 곧 암살당했다.
블라드 2세 사후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집권한 블라디슬라프 2세는 1448년 10월 후녀디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 2차 코소보 전투를 치를 때 8,000 왈라키아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왈라키아군은 전투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오스만군 편으로 넘어가 버려 헝가리군의 완패에 일조했다. 그 후 블라드 3세가 오스만군과 함께 왈라키아로 쳐들어오자, 블라디슬라프 2세는 헝가리 왕국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물러난 뒤, 블라디슬라프 2세는 헝가리군의 지원에 힘입어 반격에 착수해 1448년 12월 블라드 3세를 오스만 술탄국으로 몰아냈다.
1452년, 블라디슬라프 2세는 헝가리 왕국의 은화 주조를 거부하고 왈라키아만의 은화 주조에 착수했다. 이에 후녀디 야노시는 1452년 4월 23일 트란실바니아의 파가라스와 암라스를 왈라키아로부터 빼앗았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이에 보복하기 위해 브라쇼브 시에 대한 왈라키아의 무역을 금지했다. 이후 헝가리 왕국과 왈라키아간의 무력 충돌이 몇차례 벌어졌다. 1455년 11월 15일, 블라디슬라프 2세는 암라스를 탈환하고 파가라스 요새를 포위 공격해 함락엔 실패했지만 몇몇 색슨 마을을 불태웠다. 이에 후녀디 야노시는 블라드 3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1456년 8월 20일, 블라드 3세가 소규모 용병대를 이끌고 왈라키아로 진군했다가 블라디슬라프 3세의 군대와 조우했다. 전승에 따르면, 블라디슬라프 2세는 타르그쇼루 시 근처에서 블라드 3세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블라드 3세는 이에 응했고, 격투 끝에 블라디슬라프 2세를 사살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블라디슬라프 2세가 보야르들에 의해 배신당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의 유해는 트르고비슈테의 딜루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 후 블라드 3세가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4.5. 블라드 3세: 블라드 체페슈
1456년 8월 20일 블라디슬라프 2세를 무찌르고 보이보드에 복위한 블라드 3세는 본명이나 공식적인 이명인 드러쿨레아(Drăculea: 용의 아들)보다는 별명인블라드 3세는 왈라키아의 경제를 장악하던 트란실바니아의 브라쇼브와 시비우의 색슨족이 단 2세의 아들이자 자신과 오랫동안 왕위 쟁탈전을 벌였던 블라디슬라프 2세의 형제인 단 3세를 돕는 걸 몹시 껄끄럽게 여겼다. 1458년 군대를 일으킨 블라드 3세는 시비우를 포위 공격하다가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의 중재에 따라 시비우 시민들과 화해했다. 그러나 1459년 브라쇼브에서 왈라키아 상인들이 사려던 철이 압수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1460년 단 3세가 브라쇼브에서 보이보드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분노한 블라드 3세는 그해 4월 루차르 전투에서 단 3세를 격파하고 생포한 뒤, 자기 무덤을 파도록 강요한 후 참수형에 처했다. 그리고 단 3세의 추종자들을 꼬챙이에 산채로 꿰뚫리는 형벌에 처했으며, 브라쇼브를 파괴했다. 이후, 7월 26일 황폐화된 브라쇼브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블라드 3세는 내치에서도 엄벌주의를 실시했다. 그는 전쟁포로와 범죄자, 행실이 바르지 못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항문을 꼬챙이에 끼우고 서서히 죽게 만드는 형벌을 도입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인류에 도움이 안 되는 자들'은 모조리 처형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주민들에겐 온건하게 대했기에, 주민들은 그를 무척 두려워하면서도 공정한 지도자로 여겼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정교회 신앙심이 투철해 왈라키아 곳곳에 정교회 성당을 건설했으며, 수도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를 동방 정교회 신앙의 중심지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헝가리령 트란실바니아와의 접경지대에 포에나리 요새를 축조하는 등 방위에 힘을 기울였으며, 슈테판 3세가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에 오르도록 힘씀으로써 몰다비아와의 우호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1459년, 블라드 3세는 복위 후 4년째 연공을 바치지 않는 이유를 따지기 위해 찾아온 오스만 제국 사절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다. 이에 오스만 파디샤 메흐메트 2세는 함자 파샤의 오스만군을 왈라키아 공국으로 파견했지만, 블라드 3세는 매복 공격을 가해 섬멸하고, 함자 파샤를 비롯한 포로들을 꼬챙이에 꽂아 죽였다. 그 후 블라드 3세는 다뉴브 강 남쪽 너머 불가리아 일대의 오스만군 진지들을 대거 파괴했으며, 불가리아에 남아있던 기독교도들을 왈라키아 공국으로 이송시켰다. 상황이 이처럼 흘러가자, 메흐메트 2세는 1462년 6월 4일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왈라키아 공국으로 쳐들어갔다.
블라드 3세는 압도적인 군세로 밀려오는 적과 정면대결하는 건 자살행위라고 판단하고, 청야 전술을 통해 적을 괴롭힌 뒤 1462년 6월 17일 밤에 야습을 감행해 메흐메트 2세를 처단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오스만군의 진군로에 꼬챙이에 꽃은 오스만군 시체들을 걸어놓아서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렸으며, 전염병에 걸린 병사나 시신을 오스만 군 진영에 보내어 병을 퍼트리는 전술을 실시하기도 했다. 메흐메트 2세는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밀어붙인 끝에 왈라키아의 수도 트르고비슈테를 공략했지만, 블라드 3세의 청야전술로 인해 병사들이 굶주린 데다 다들 더 이상 싸울 의욕을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다만 블라드 3세의 아우이자 예니체리 대장으로서 이번 원정에 동참한 라두 3세는 별동대를 이끌고 왈라키아에 남았다.
라두 3세는 1462년 다뉴브 강 평원에서 보야르들을 설득했다. 그는 특권을 회복하겠다고 약속하고 블라드 3세의 진영에서 탈영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켰으며, 평화, 온화한 통치, 과거의 잘못에 대한 어떠한 보복도 없음을 약속했다. 여기에 블라드 3세에게 심한 탄압을 받았던 색슨족이 거주하던 도시들에 사절을 보내 유리한 무역 규정을 맺겠다고 약속했다. 그동안 블라드 3세의 공포정치에 시달렸던 보야르들과 색슨족은 즉시 그에게 귀순했고, 부쿠레슈티와 트르고비슈테 시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다. 블라드 3세는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 북쪽 성으로 피신했지만, 그곳마저 위험해지자 이전에 동맹을 맺었던 헝가리 왕국의 국왕 마차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헝가리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는 도움을 받기는커녕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이리하여 6년간 공포 정치를 벌이면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던 블라드 3세는 몰락했다.
4.6. 드라쿨레슈티 가문 vs 다니슈티 가문 (2)
라두 3세는 형 블라드 3세를 몰아내고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된 뒤 오스만 제국군 소속 기병대인 시파히가 왈라키아 남부에 영구 주둔하는 걸 허용해, 오스만 제국이 다뉴브강 무역을 통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471년, 라두 3세는 칠리아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몰다비아 보이보드 슈테판 3세와 전투를 치렀다. 이에 슈테판 3세는 라두 3세를 축출하기로 마음먹고, 1472년 단 2세의 아들 바사라브 3세를 섭외했다. 1473년 11월, 슈테판 3세의 몰다비아군과 바사라브 3세가 고용한 용병대가 밀코프 강을 건너 왈라키아로 진격했다. 그 해 11월 18일에서 20일 사이, 라두 3세는 프라호바의 게르기차 인근에서 침략군과 맞섰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부쿠레슈티 성채로 피신했다. 이후 한동안 농성하던 그는 보이보드들이 대거 침략군에 가담했다는 걸 알게 되자, 11월 23일 밤에 다뉴브 강변 오스만 제국 요새인 지우르지우 요새로 피신했다.1473년 11월 28일, 라두 3세는 13,000명의 오스만군과 함께 왈라키아를 탈환하려 했지만 몰다비아군과 6,000가량의 왈라키아군이 연합한 바사라브 3세 휘하 군대에게 격파되었다. 12월 23일, 라두 3세는 다시 30,000 가량의 오스만군의 선두에서 다뉴브 강을 건넜다.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지 못한 바사라브 3세는 몰다비아로 피신했다. 오스만군은 여세를 이어가 몰다비아로 진군했지만, 바라드에서 슈테판 3세에게 완패했다. 1474년 3월,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은 바사라브 3세가 라두 3세를 일시적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라두 3세는 몰다비아군이 철수하자마자 반격해 바사라브 3세를 도로 몰아냈다. 1474년 여름,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은 바사라브 3세가 라두 3세를 재차 몰아냈다.
바사라브 3세는 라두 3세가 재차 공격할 것을 우려해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이슈트반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재빨리 왈라키아로 진군했지만, 바사라브 3세가 아닌 그의 사촌 바사라브 4세를 옹립하려 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바사라브 3세와 2차례 맞붙었는데,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두 번째 전투에서는 격파했다. 한편, 슈테판 3세의 몰다비아군은 라두 3세를 지지하던 텔레아젠 요새를 며칠만에 함락하고 수비대를 학살하고 성채를 불태웠다. 1474년 10월 20일, 라두 3세는 오스만군의 지원을 토대로 바사라브 3세와 바사라브 4세를 몰아내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 후 오스만군은 바사라브 3세가 망명한 몰다비아로 진군했지만, 1475년 1월 10일 바슬루이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라두 3세도 이 원정에 참여했는데, 이후 기록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은 걸 볼 때 이때를 전후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라두 3세 사후, 바사라브 3세는 왈라키아 보야르들의 추대로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 후 바슬루이 전투에서 참패한 뒤 귀환하던 오스만 제국군 8,000명이 왈라키아로 진입할 때 습격해 격파했다. 하지만 그 직후에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고 반 오스만 연합에서 이탈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슈테판 3세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그때까지 블라드 3세를 감금 중이던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블라드 3세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했다. 마차시 1세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트란실바니아 남부의 수비를 블라드 3세에게 맡겼다. 바사라브 3세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고, 1476년 2월 22일 시비우와 브라쇼브의 색슨족에게 자신은 더 이상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할 수 없다며, 왈라키아와의 우정을 이어가고 싶으면 블라드 3세를 축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별다른 응답이 없자, 바사라브 3세는 오스만 제국 편에 가담했다.
1476년 7월 26일,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30,000 오스만 제국군이 왈라키아를 경유하여 몰다비아를 침공해 발레아 알바 전투에서 슈테판 3세가 지휘하는 몰다비아-헝가리-리투아니아 연합군 20,000명과 격돌했다. 그 결과 메흐메트 2세가 큰 손실을 무릅쓰고 승리를 거두고 몰다비아 상당 부분을 점령했지만, 수체아바, 네암츠, 호틴 등 주요 몰도바 거점을 공략하지 못했다. 여기에 몰다비아인들의 유격 전술에 시달려 기아에 직면했고, 급기야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그러던 중 바토리 이슈트반이 지휘하는 반란군이 트란실바니아에 집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메흐메트 3세는 어쩔수 없이 그해 8월 몰다비아에서 철수했다.
오스만 제국군이 철수한 뒤, 헝가리군과 몰다비아군은 블라드 3세를 앞세워 왈라키아 원정을 감행하기로 했다. 1476년 11월, 25,000명에 달하는 헝가리-몰다비아 연합군이 트르고비슈테로 진군했다. 바사라브 3세는 이에 대항해 18,000명 가량의 병력을 일으켜 트르고비슈테 인근에서 저항을 시도했지만, 격전 끝에 패배를 면치 못하고 부쿠레슈티 성채에 갇혔다. 15일 간의 공방전 끝에 11월 16일 함락을 면치 못하게 되자, 바사라브 3세는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1476년 12월 또는 1477년 1월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왈라키아로 복귀했다. 이때 블라드 3세는 사망했는데, 오스만 제국군에게 살해되었다는 설, 사냥 중에 사고로 죽었다는 설, 한 보야르에게 암살당했다는 설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바사라브 3세는 블라드 3세가 사망한 뒤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복위했지만, 1477년 11월 몰다비아 보이보드 슈테판 3세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또다시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 슈테판 3세의 후원에 힘입어 집권한 바사라브 4세는 메흐메트 2세의 지시를 받은 알리 코차 베이가 트란실바니아 원정에 착수했을 때 메흐메트 2세의 지시에 따라 5,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는 1479년 10월 13일 헝가리 왕국과 바사라브 3세가 이끄는 연합군에게 오라슈티에 전투에서 격파되었다. 1481년 메흐메트 2세가 사망한 뒤, 두 아들 바예지트 2세와 젬 술탄이 파디샤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바사라브 4세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원이 끊어지자, 슈테판 3세는 이 때를 틈타 그해 6월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름니쿠 발체아에서 바사라브 4세를 격파했다. 바사라브 4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고, 블라드 3세의 이복형제인 블라드 4세가 슈테판 3세에 의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481년 11월, 바사라브 4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블라드 4세를 축출하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러나 1482년 3월 23일 고르지 글로고바에서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왈라키아 보야르들이 일으킨 음모에 휘말려 살해되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슈테판 3세가 블라드 4세를 복위하기 위해 침공하자 이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그 후 보이보드에 복위한 블라드 4세는 슈테판 3세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고, 보이보드들과 우호 관계를 이어갔으며, 오스만 파디샤 바예지트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공물을 꾸준히 바친 덕분에 직위를 보장받았다. 그는 트란실바니아의 브라쇼보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를 설립하는 데 많은 자금과 인력을 보내줬다.
4.7. 라두 4세: 13년간의 안정
1495년 9월 블라드 4세가 70~71세의 나이에 사망한 뒤, 장남 라두 4세가 집권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오스만 제국에 연간 공물을 바쳤는데, 8,000 굴덴에서 12,000굴덴으로 늘림으로써 오스만 파디샤 바예지트 2세의 신임을 확보하여 오스만 제국군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했다. 여기에 1503년 세게드 마을에서 헝가리 왕국의 국왕 울라슬로 2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고,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색슨족과도 우호 관계를 이어갔으며,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슈테판 3세와도 친선 관계를 유지했다. 1497년 10월 26일 슈테판 3세가 폴란드 국왕 얀 1세 올브라흐트를 상대로 코즈민 숲 전투를 치를 때 2,000 병력을 파견해 슈테판 3세의 승리에 기여했다.1507년 10월 28일,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 보그단 3세는 왈라키아를 침공해 름니쿠 서라트 시 주변을 황폐화했다. 침략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몰다비아 보야르 포페스티의 보그단이 자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축출된 뒤 왈라키아가 그를 보호하자, 장차 왈라키아가 포페스티의 보그단을 앞세워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찬탈하도록 부추길 거라고 의심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기도 아버지 슈테판 3세처럼 왈라키아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이어가려는 열망일 수도 있다. 당시 헝가리 국왕 울라슬로 2세를 대신해 외교 임무를 맡은 베오그라드의 막심 대주교[7]와 협상하던 라두 4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즉시 름니쿠 서라트 시로 달려간 뒤 몰다비아군과 대치했다. 이때 그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국민은 형제이므로 서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그 후 보그단 3세는 그와 평화 협약을 맺고 몰다비아로 철수했다.
라두 4세는 1498년에서 1500년 사이에 수도 트르고비슈테 인근의 딜루 수도원을 수리하고 확장했으며, 고보라 수도원을 수리했고, 세르비아 국경 인근에 위치했으며 당시 폐허였던 라포스나 수도원을 재건했다. 1503년에서 1505년 사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폐위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폰 2세를 초빙했다. 니폰 2세는 한동안 왈라키아 교회를 다스렸지만, 라두 4세의 여자 형제 칼페아가 왈라키아로 망명한 몰다비아의 보이보드 보그단과 결혼할 때 라두 4세가 니폰 2세의 결혼 축사를 "이미 결혼한 성직자는 타인의 결혼을 축복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라두 4세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라두 4세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자, 니폰 2세는 왈라키아를 떠나기로 했다. 또한 라두 4세는 아토스 산 수도원과 시나이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상당한 기부를 했고, 성 판텔레이몬과 케이아리우 수도원에도 기부했으며, 여러 세르비아 수도원에 수익을 분배했다.
4.8. 재현되는 왕위쟁탈전
1508년 4월 23일, 왈라키아를 13년간 안정적으로 다스렸던 라두 4세가 사망했다. 그 후 블라드 3세의 아들인 미네아 1세가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을 비롯한 보야르들의 협조를 받아 라두 4세의 아들들을 밀어내고 보이보드 직위를 획득했다. 왈라키아에서 활동하던 수도사 가브릴 프로툴( Gavriil Protul)의 연대기에 따르면, 미네아 1세는 보이보드가 되기 전에는 보야르들을 잘 대할 것처럼 굴었지만 왈라키아에 군림한 즉시 돌변해 수많은 보야르들을 붙잡은 뒤 그들에게 끔찍한 노동을 많이 시켰고, 모든 재산을 몰수했으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아내 및 딸들과 성관계를 맺었고, 어떤 보야르들의 코와 입술을 잘랐고, 또다른 이들의 목을 매달았으며, 몇몇을 익사시켰다고 한다. 그는 이 행적으로 인해 '사악공(cel Rău)'이란 별명으로 불렸다.1509년 10월 12일 아들 미르체아 3세에게 보이보드 직위를 물려줬다. 과거 루마니아 역사가들은 미르체아 3세가 아버지와 공동 통치했다고 여겼지만, 현대 학자들은 당대에 발행된 문서에서 "Io Mircea voievod, din mila lui Dumnezeu, domn"(신의 자비로 이오 미르체아 보이보드, 주님)이라는 서명이 있는 걸 볼 때, 미르체아 3세가 단독으로 권력을 잡은 것으로 추정한다. 미네아 1세가 아들에게 보이보드 직위를 양도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510년 1월 왈라키아 보야르들의 호소를 접한 오스만 파디샤 바예지트 2세는 메흐메트 베그 미할로글루에게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교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메흐메트 베그 미할로글루가 오스만 제국군을 이끌고 왈라키아에 들어서자, 미네아 1세는 아들 미르체아 3세와 함께 트란실바니아로 도피했다. 이후 블라드 4세의 아들인 블라드 5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1510년 3월 12일, 미네아 1세는 헤르만슈타트의 한 성당[8]에서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이 고용한 암살자들에 의해 피살되었고, 그 성당에 안장되었다.
1511년 1월, 미네아 1세의 아들 미르체아 3세가 헝가리 국왕 울라슬로 2세의 지원을 받으며 왈라키아로 진군해 세케이족의 호응을 얻었다. 이에 블라드 5세는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의 지원을 받고 이에 맞섰고, 게르기차 전투에서 미르체아 3세를 격파했다. 그 후 1511년 8월 17일에 울라슬로 2세가 자신의 주권자임을 인정하는 왕실 문서를 발행해, 헝가리 왕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최고 관리인 디완의 수장 자리를 놓고 크라이오베슈티 가문과 마찰을 벌였다. 당초 그 자리는 파르부 크라이오베스쿠가 맡았는데, 1511년 블라드 5세의 처남인 포페스티 스파타르의 보그단이 물려받았다.
이에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의 움직임이 불온해지자, 블라드 5세는 자기를 옹립한 메흐메트 베그 미할로글루와 다뉴브 강변에서 만나 충성을 서약했고,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을 비롯한 보야르들이 "만약 우리가 교활하게 행하고 우리 주권자 블라드를 정의롭게 섬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명과 이름이 이 나라에서 영원히 멸망하게 하소서."라고 맹세하게 했다. 그 대신, 블라드 5세는 보야르들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이 맹세에도 불구하고, 블라드 5세와 크라이오베슈티 가문간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1511년 연말, 블라드 5세는 파르부 크라이오베스쿠의 아들인 네아고에 바사라브가 보이보드에 오르려 한다고 의심해 그를 체포했다. 이에 크라이오베슈티 가문 인사들은 메흐메트 베그 미할로글루에게 달려가서 블라드 5세가 맹세를 어겼으니 무장 지원을 요청했다. 1512년 1월, 오스만 제국군이 왈라키아를 침공해 부쿠레슈티로 진군했다. 블라드 5세는 부쿠레슈티 인근에서 맞서 싸웠지만 끝내 패배하고 생포된 직후 목이 베어졌고, 그의 수급은 부쿠레슈티 성채에 매달렸다.
4.9. 네아고에 바사라브: 9년간의 안정기
블라드 5세 사후, 왈라키아의 대 보야르 가문인 크라이오베스쿠 가문의 일원 네아고에 바사라브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무역과 공예를 장려했고, 오스만 제국의 충실한 가신을 자처하면서도 헝가리 왕국과도 우호 관계를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정교회와 가톨릭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1519년 몰다비아 공국의 통치자 슈테판 4세와 함께 로마에 사절단을 보내, "바사라브와 그의 선택된 아들 테오도시에와 페테르, 슈테판과 그의 아들들은 다른 기독교 군주들과 함께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교황은 "투르크족의 폭군 셀림 1세에 대한 거룩한 원정"을 유럽 각지에 선포했다. 하지만 그는 십자군에 직접 뛰어들지 않고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 남았다.네아고에는 왈라키아, 발칸 국가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 예루살렘 및 시내 산 등 각지의 정교회 수도원에 관대하게 기부했으며, 1517년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에 수도원 단지와 교회를 설립했다. 또한 남유럽 문학의 고전 걸작으로 손꼽히는 <네아고에 바사라브가 그의 아들 테오도시에에게 가르친 책>을 집필했다. 그는 이 책에서 국가의 정치적 정부 원칙, 청소년 교육의 도덕적 원칙, 영적 향상의 원칙을 기술하고, 아들 테오도시에에게 이 가르침을 함양하여 훌륭한 통치자가 되라고 권고했다. 이 저서는 슬라브어로 작성되었지만, 17세기 중반에 루마니아어로 번역되었다.
1521년 9월 15일, 네아고에 바사라브가 사망했고 아들 테오도시에가 뒤이어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당시 그는 아직 어렸기에 어머니 밀리카 데스피나가 섭정했으며, 삼촌인 프레다 크라이오베스쿠가 군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네아고에 바사라브가 그를 위해 통치술을 다룬 책을 집필한 것이 부질없게도, 그해 10월 라두 4세의 아들 라두 5세가 반란을 일으켜 타르고비슈테 전투에서 프레다 크라이오베스쿠를 패사시켰다. 테오도시에는 어머니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로 망명했다가 1522년 1월 22일에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이후 왈라키아는 또다시 혼란에 휩싸였다.
4.10. 대혼란기
테오도시에를 몰아내고 왈라키아의 보이보드에 오른 라두 5세는 곧 위기에 직면했다. 오랫동안 왈라키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스만 제국의 니코폴리스 베이인 메흐메트 베그 미할로글루는 왈라키아를 오스만 제국의 파찰리크(pachalik: 오스만 제국 직할령.)로 삼으려 했다. 1522년 1월, 메흐메트 베그가 군대를 이끌고 다뉴브 강을 건너 왈라키아로 진군하자, 라두 5세는 구바비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그는 곧 네아고에 바사라브와 테오도시에를 보이보드로 배출한 크라이오베슈티 가문과 이복형제인 라두 6세의 도전에 맞서야 했다.1522년 4월, 메흐메트 베그는 라두 5세를 배제하기 위해 다뉴브 강을 다시 넘어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라두 5세는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유격전으로 맞서 싸웠지만, 점점 불리해지자 헝가리 왕국의 국왕 러요시 2세가 영지로 부여한 트란실바니아로 철수했다. 메흐메트 베그는 왈라키아를 여러 개로 분할해서 직할 통치를 실시하려 했지만, 왈라키아 보야르와 백성들은 오스만 제국의 직접 지배를 거부하고 라두 5세를 꿋꿋이 지지했다. 라두 5세는 1522년 6월 왈라키아로 귀환해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드 서포여이 야노시가 보내준 트란실바니아 분견대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군을 다뉴브 강 너머로 몰아냈다. 그러나 그해 8월 메흐메트 베그가 재차 공세를 가해오자 트란실바니아로 도주했고, 메흐메트 베그는 신 정부를 세운 뒤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든 자들을 모조리 탄압했다.
1522년 10월, 라두 5세가 트란실바니아 분견대의 지원에 힘입어 또다시 오스만군을 격퇴하고 1523년 4월까지 군림했다. 그러나 1523년 4월 다니슈티 가문의 블라디슬라프 3세[9]가 정변을 일으켜 라두 5세를 축출했다. 하지만 블라디슬라프 3세 역시 11월 8일 라두 5세의 이복형제인 라두 6세의 정변으로 축출되었다. 1524년 1월, 라두 5세가 왈라키아로 돌아와서 라두 6세를 밀어내고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해 6월, 블라디슬라프 3세가 재차 정변을 일으켜 라두 5세를 축출하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1524년 9월, 헝가리 왕국의 국왕 러요시 2세의 지원을 받은 라두 5세가 블라디슬라프 3세를 축출했다. 1525년 4월, 블라디슬라프 3세가 반격해 라두 5세를 축출했다. 하지만 그해 8월 라두 5세가 재차 반격해 블라디슬라프 3세를 몰아내고 복위했다.
라두 5세는 블라디슬라프 3세를 최종적으로 몰아낸 뒤 올테니아를 지배하고 있던 크라이오베스쿠 가문과 화해하고 네아고에 바사라브의 딸인 룩산드라와 결혼했다. 여기에 1525년 11월 코스탄티니예로 가서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쉴레이만 1세는 연간 공물을 12,000 두카트에서 14,000 두카트로 늘리는 조건으로 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집권하는 걸 용인하기로 했다. 1526년 8월 29일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이 완패하고 러요시 2세가 전사한 뒤 헝가리 왕국이 붕괴되면서 더 이상 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라두 5세는 장남이자 상속자인 블라드를 코스탄티니예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1528년 말, 드라쿨레슈티 가문의 전통적인 지지자인 보니치 네그루와 포스텔닉 드라간이 이끄는 보야르들은 라두 5세가 크라이오베스쿠 가문과 너무 밀접하게 의존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정변을 계획했다. 1529년 1월 2일, 그는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고 램니쿠 발체아 인근의 체타수이아 교회로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아들 블라드와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목이 잘린 시체는 이틀 후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머리는 파디샤에게 복종하겠다는 표시로 코스탄티니예에 보내졌다.
라두 5세 사후, 바사라브 6세가 보니치 네그루 등에 의해 새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네그루 등은 1529년 2월 5일에 마음을 바꿔 바사라브 6세를 축출하고, 네그루 본인이 공석이 된 보이보드의 섭정을 자처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이 체제에 동의하지 않고, 블라디슬라프 3세의 아들 모이세를 보이보드로 선임하도록 했다. 모이세는 초기엔 오스만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복종했다. 그는 파디샤의 지시에 따라 트란실바니아 도시인 시비우에 사절을 보내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된 동헝가리 왕국의 국왕 서포여이 야노시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했다. 시비우가 거부하자, 그는 보복에 착수해 시비우 외곽 지역을 약탈했다.
그러던 1529년 9월 27일에서 10월 14일까지 18일간 이어진 제1차 빈 공방전이 오스만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모이세는 오스만 제국과 관계를 끊고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 몰다비아 보이보드 페트루 4세와 연합하려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의 지지를 받았지만, 다른 보야르들은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 1530년 2월 13일, 모이세는 크라이오베슈티 가주의 자매와 결혼했다. 이때 그는 네그루와 드라간을 비롯한 반 오스만 연합에 거부하는 인사 몇 명이 결혼식에 참석한 틈을 타 긴급 체포한 뒤 처형했다. 이에 보야르들은 오스만 제국 영토로 피신한 뒤 블라드 6세를 새 보이보드로 추대하고 오스만 제국의 승인을 얻었다. 블라드 6세는 그해 5월 왈라키아로 쳐들어갔고, 모이세는 6월에 시비우로 피신했다. 블라드 6세는 시비우에 사절을 보내 모이세를 넘기거나 죽이라고 요구했지만, 시비우 시민들은 모이세가 이제 자기들의 동맹이 되었다며 거부했다.
1530년 8월 24일, 모이세는 페르디난트 1세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로 진군해 슬리티나에서 자기를 지지하는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의 군대와 합류했다. 8월 29일 텔레오르만의 비쇼아라에서 오스만 제국군과 연합한 블라드 6세와 격돌했으나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1530년 10월, 비쇼아라에서 모이세와 함께 전사한 바르부 크라이오베스쿠의 형제인 단키우 크라이오베스쿠는 아들 드라기치를 보이보드로 추대하고 올테니아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에 미로네슈티의 반(Ban) 세르반 1세가 블라드 6세를 대신해 다른 보야르들과 함께 그곳으로 진군해 드라기치를 제압한 후 처형했다. 이후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의 영지를 대거 몰수했으며, 주동자들이 잇따라 처형되었다. 이후 아니노사에서 비포라타 수도원을 건설했다.
1532년 9월 18일, 블라드 6세는 한 연회에 참석해 술을 많이 마신 뒤 말을 타고 담보비차 강 방향으로 가다가. 부쿠레슈티 남쪽의 포페슈티 마을 근처 스나코프 호숫가를 지나가다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낙마해,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 사후 라두 4세의 아들 블라드 7세가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534년 1월 6일 부쿠레슈티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파견한 대표단을 맞이해,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 대한 왈라키아 교회의 복종을 맹세했다. 또한 성 아나스타세, 크세로포타무스, 바토페디, 힐란다르 및 조그라포 수도원을 후원했다.
1534년 여름,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의 총신인 알로이시오 그리티가 소규모 분견대를 이끌고 왈라키아를 지나가고 있을 때,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블라드 7세에게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이 그에게 접근해 그의 아들들을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옹립할 테니 블라드 7세를 몰아내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식을 접한 블라드 7세는 즉시 피테슈티에 있던 알로이시오의 군영으로 갔고, 반군을 넘겨주는 대가로 그가 트란실바니아로 계속 갈 수 있도록 했다. 이리하여 블라드 7세의 손에 넘어간 보야르 75명 중 일부는 처형되었고, 일부는 입술과 코가 잘렸으며, 나머지 5명은 포에나리 성에 감금되었다.
1535년 6월, 블라드 7세는 크라이오바 인근에서 사냥하던 중 적으로 간주하는 여러 보야르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사전에 정적의 사주를 받은 그의 친척이 하인들을 시켜 그를 창으로 찔러 죽이게 했다. 그 후 스스로 라두 4세의 아들이자 라두 5세와 블라드 7세의 이복 형제를 자처한 라두 7세가 보이보드에 등극했다. 라두 7세는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그리스 북서부 테살리아의 트리칼라 지역에 있는 메테오라 수도원에 기부했으며, 네아고에 바사라브의 딸이자 라두 5세의 미망인인 룩산드라와 결혼했다.
그러나 즉위 다음해인 1536년 2월 24일,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의 일원인 바르부 네아고에 크라이오베스쿠가 그를 폐위했다. 하지만 바르부는 2달 후인 4월 18일에 도로 축출되었고, 라두 7세가 다시 권좌를 확보했다. 1537년 6월 10일, 그는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장남 마르코를 공동 통치자로 세웠다. 1538년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가 왈라키아 공국에 소속된 도시인 브라일라를 병합했지만 별다른 항의를 하지 못했다.
1539년 6월 2일, 라두 7세와 마르코는 세르반 딘 이즈보라니에 의해 다시 축출되었다. 그는 권좌를 되찾기 위해 다뉴브 강을 건너 오스만 제국의 원조를 받아낸 뒤 1539년 7월 19일 세르반 딘 이즈보라니를 몰아냈다. 세르반 딘 이즈보라니는 코스탄티니예로 망명한 뒤 추종자들 사이에서 보이보드로 행세하다가 1543년 6월 15일 파디샤 쉴레이만 1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1541년, 라두 7세는 오스만 제국군의 트란실바니아 원정에 참여해 오스만군이 코르빈 야노시를 체포하고 투옥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오스만군이 부더를 점령한 후, 그는 오스만 제국이 왈라키아 주위를 모조리 둘러싸면서 언젠가 자국을 병합하려 들 것을 우려해 합스부르크 제국에 접근했다. 1543년 1월 7일, 라두는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독일왕인 페르디난트 1세와 상호 동맹을 맺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만 제국군을 몰아내기 위한 공세를 벌이겠다고 약속했고, 라두 7세는 오스만 제국군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비밀 협약은 곧 새어나가 오스만 제국의 첩보망에 걸려들었고, 쉴레이만 1세는 장남 마르코를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마르코는 1543년 1월 13일부터 공식 문서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그의 죽음 또는 권력 박탈을 암시한다. 그 후 둘째 아들 블라드가 9월 1일부터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1544년, 이번에는 라이오타 바사라브를 추종한 일부 보야르가 반기를 들었다. 라두 7세는 전투에서 패한 뒤 1544년 5월 5일 니코폴리스로 탈출해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오스만 제국은 그를 돕기로 하고 6월 2일에 반란군을 물리치고 그를 복위했다. 그러나 라두 7세가 여전히 인질을 보내기를 거부하자, 오스만 제국은 그를 몰아내고 그의 형제인 미르체아 5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했다. 1545년 3월 1일, 미르체아 5세가 집권했고, 라두 7세는 오스만 제국군에 체포된 뒤 아내 룩산드라와 아이들과 함께 이집트로 끌려갔다.
연대기에 따르면, 미르체아 5세는 부쿠레슈티 입성 2주 후 코아다 보르니쿨, 라둘 코미술, 드라굴 스톨니쿨, 스트로 스파타룰루, 빈틸라 코미술을 비롯한 여러 보야르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연대기에는 보야르들이 돈과 보석을 어디에 숨겼는지 밝히기 위해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살해된 보야르들의 친척들이 트란실바니아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연합해 그를 왕좌에서 전복하려고 시도했다. 1545년 8월 24일, 한 보야르가 이끄는 군대가 오라라키아로 진입했다가 페리슈에서 미르체아 5세의 기습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1548년 초, 스토이카 스톨니쿨, 빈틸라 보르니쿨, 라두 마렐레 로고팻, 파르부 포스트텔니쿨 등 미르체아 5세의 의심을 받은 보야르들이 해외로 추가로 피신해 기존에 피신한 보야르들과 합세했다. 그해 말 보야르들이 1,000명의 용병과 함께 왈라키아에 진군하면서 백성들이 호응하기를 기대했지만, 백성들은 미르체아 5세를 굳건히 지지했다. 이후 벌어진 발체아의 밀로스테아 전투에서, 미르체아 5세는 다시 승리했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보야르들은 사방으로 탈출했다.
1552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트란실바니아를 공략한 뒤 왈라키아에 자신들의 대의에 헌신하는 통치자를 세우기로 했다. 합스부르크 제국 장성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는 라두 5세의 아들이며 망명중인 보야르들의 지지를 받는 라두 8세를 옹립하기로 했다. 1552년 11월, 카스텔도는 1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왈라키아로 진군했다. 미르체아 5세는 8,000 ~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에 맞섰는데, 전투가 벌어지기 이틀 전에 배신이 두려워 보야르 47명을 식사하던 중에 체포해 처형했다고 하다. 1552년 11월 16일 매네슈티 전투에서 카스텔도가 승리했고, 미르체아 5세는 지우르지우로 피신했다.
1553년 5월 11일 몰다비아 공국의 통치자 알렉산드루 4세의 지원을 받은 미르체아 5세가 라두 8세를 밀어내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루 4세는 곧 그와 마찰을 벌였고, 1554년 2월 28일에 군대를 보내 그를 축출한 뒤 라두 7세의 아들인 파트라스쿠 첼 분을 새 보이보드로 세웠다. 미르체아 5세는 코스탄티니예로 망명했다. 1558년 1월 파트리스쿠가 사망한 후, 쉴레이만 1세는 미르체아 5세를 다시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했다.
이에 많은 보야르가 카르파티아 지역으로 도망치자, 미르체아 5세는 그들이 돌아와서 자신에게 충성을 서약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이에 보야르들이 돌아왔고, 오스만 제국 고위 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쿠레슈티에서 보이보드와 보야르들의 화해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인사들이 떠난 후, 미르체아 5세는 여러 보야르를 처형했고 1558년 2월 3일에는 성직자들도 처형되었다. 1559년 9월 25일에 사망했고, 부쿠레슈티의 쿠르테아 베체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 후 보이보드에 선임된 페트루 1세는 나이가 13세에 불과했기에, 어머니 치아나가 섭정했다.
일찍이 미르체아 5세의 박해를 피해 달아났던 보야르들은 나이가 어린 그가 보이보드에 오른 틈을 타 왈라키아로 쳐들어갔다. 로마네슈티 마을에서 벌어진 첫번째 전투는 보야르 측이 승리했지만, 세르바네슈티에서 벌어진 2번째 전투는 토벌군이 승리했다. 보이아누에서 벌어진 3번째 전투에서, 치아나가 친히 전장에 나와서 토벌대를 격려했고,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반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559년 10월 24일, 페트루 1세는 보야르들의 공인을 받고 보이보드 취임식을 거행했다. 그는 보야르들을 잔혹하게 대한 아버지와는 달리 성격이 온화했고 신앙심이 깊었다. 그를 대신해 나라를 이끈 치아나는 보이보드 직위를 노리는 자들의 음모와 트란실바니아 공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왈라키아를 공략하려는 음모를 모조리 분쇄했다.
그러나 1568년 5월, 오스만 제국은 왈라키아와 미르체아 5세 일가의 부를 확보하고자 페트루 1세와 그의 어머니를 코스탄티니예로 소환했다. 페트루 1세는 5월 31일이 코스탄티니예에 도착한 뒤 7개의 탑 요새로 끌려갔고, 6월 8일에 모든 직위와 재산을 박탈당했다. 그 후 아나톨리아의 코냐로 보내졌다가 1569년 8월 19일 그곳에서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보이보드에 선임된 알렉산드루 2세 미르체아는 자신의 집권에 반발한 여러 보야르를 처형했다. 1570년 가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참칭자의 반란을 진압한 뒤[10], 수많은 보야르를 처형하거나 감옥에 가뒀다. 처형된 이들의 수급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니예로 보내졌다. 1573년, 그는 아내 에카테리나 실바레소와 함께 부쿠레슈티의 플럼부이타 수도원에 루마니아 최초의 인쇄소를 설립했다.
1574년 4월, 알렉산드루 2세의 형제인 페트루 6세 슈체아풀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알렉산드루 2세와 페트루 6세는 이를 기리기 위해 자기들을 추종하는 보야르들과 함께 포크사니 인근의 사파세니에서 축하 행사를 개최했다. 그 때, 공물을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던 몰다비아 보야르 군대의 수장인 덤브라바가 페트루 6세와 맞서던 몰다비아 보이보드 이오안 3세 첼 비테아즈와 합류한 뒤 사파세니로 쳐들어갔다. 알렉산드루 2세와 동생 페트루 6세는 급히 이에 맞섰지만, 미처 많은 병력을 모집하지 못해 름니쿠 서라트 인근 질리슈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알렉산드루 2세는 가까스로 도주했고, 파트라스쿠 첼 분의 아들 빈틸라가 이오안 3세와 보야르들의 추대로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574년 5월, 추종자들을 결집한 알렉산드루 2세가 공세를 개시해 이오안 보다의 몰다비아군을 격파하고 부쿠레슈티를 탈환했다. 빈틸라는 체포된 뒤 처형되었고, 그의 수급은 왕궁 문에 못 박혔다. 그렇게 복위한 그는 마른 양에 관한 법을 포함한 새로운 법을 재정했고, 이 때문에 '마른 양(Oaie Secă)'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576년, 70~80명의 보야르로 구성된 사절단이 오스만 제국 파디샤 무라트 3세에게 찾아가 알렉산드루 2세가 자기들을 학대하니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무라트 3세는 이에 응했지만, 조사를 맡은 시난 파샤는 알렉산드루 2세의 뇌물을 받고 보야르들이 자기들 군주를 모함했다고 보고했다. 이로 인해 보야르들은 체포되었고, 그중 10명은 왈라키아에 소환되어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갤리선 노예로 전락했다. 이듬 해 초에는 로소라는 인물이 보야르 7명을 이끌고 무라트 3세에게 찾아가 자신이 바사라브 가문의 일원이니, 폭정을 일삼는 알렉산드루 2세를 밀어내고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고 청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갤리선 노예로 전락했다.
1577년 9월 11일, 알렉산드루 2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후 외아들 미네아 2세가 13세의 나이에 보이보드에 등극했고, 어머니 에카테리나가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보야르들이 어린 보이보드를 섬기길 꺼려 오스만 제국에 다른 보이보드를 세워달라고 청원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오스만 제국에 잘 보이기 위해 더 많은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막대한 세금이 농민들에게 부과되자, 농민들은 견디지 못하고 트란실바니아로 대거 이주했다.
1583년, 올테니아의 강력한 보야르 가문인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이 드라쿨레슈티 가문의 또다른 구성원인 라두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다른 보야르들이 별로 호응하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무산되었다. 얼마 후, 전임 보이보드 파트라스쿠 첼 분의 아들인 페트루 2세가 프랑스 국왕 앙리 3세와 섭정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호의를 사 막대한 자금을 받아낸 뒤 코스탄티니예로 찾아가서 파디샤 궁정에 막대한 뇌물을 건네며 자기를 옹립해달라고 청했다. 이에 오스만 파디샤 무라트 3세는 페트루 2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하기로 결정했고, 에카테리나와 미네아 1세 모자를 트리폴리로 추방했다.
페트루 2세는 보이보드에 집권한 뒤 1584년에 왈라키아의 수도를 부쿠레슈티에서 트르고비슈테로 옮겼고, 트르고비슈테의 왕궁을 재건축하고 확장했으며, 왕립 교회를 세웠으며, 청동 대포 주조소를 설립했다. 또한 프랑스에 빚진 돈을 갚기 위해 백성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렸다. 그러나 그의 재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네아 2세의 어머니 에카테리나는 코스탄티니예에서 탄탄한 기반을 갖춘 이탈리아 대상인 집안 출신으로, 가문의 도움에 힘입어 억류 생활에서 풀려난 뒤 700,000 스쿠디에 달하는 돈을 마련해 파디샤 궁정에 바침으로써 아들 역시 풀려나도록 했다. 그 후 에카테리나와 그녀의 가문의 지속적인 로비 끝에, 무라트 3세는 1585년 4월 6일 미네아 2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복위하기로 했다.
페트루 2세는 오스만 제국군의 체포를 피해 열린 창문에 밧줄을 타고 내려가 탈출한 뒤 바르샤바로 피신한 후, 유럽 각지를 돌며 자기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589년 7월 코스탄티니예로 돌아왔다. 이후 미네아 2세를 축출하기 위해 파디샤 궁정에 로비 활동을 벌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네아 2세는 대재상 시난 파샤에게 600마리의 말이 운반할 수 있는 금화를 줄 테니 무라트 3세에게 페트루 2세를 처형해달라고 청원해달라고 부탁했다. 시난 파샤는 이를 받아들이고 무라트 3세에게 페트루 2세 처형을 건의했고, 무라트 3세는 이에 따르기로 했다. 이후 무라트 3세의 지시를 받은 무사들이 1590년 3월 페트루 2세를 로도스로 추방한다는 칙령을 보여주고 그를 배에 태운 뒤, 에게 해상에서 바다에 던져 죽였다.
하지만 1591년 어머니 에카테리나가 사망하면서, 미네아 2세는 든든한 후원자를 상실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관리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그들의 불만을 샀다. 그러던 중 몰다비아 보이보드 이오안 2세 보다의 사생아인 슈테판 수르둘이 자기가 미네아 2세가 빚진 돈을 대신 주겠다고 제안했고, 오스만 관리들은 파디샤에게 미네아 2세를 폐위하자고 건의했다. 결국 미네아 2세는 1591년 5월 19일에 폐위되었다. 그 후 왈라키아 보이보드가 된 슈테판 수르둘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농민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렸다. 그럼에도 충분한 돈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에 화가 난 오스만 관리들은 1592년 8월 알렉산드루 3세 첼 라우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했다. 슈테판은 곧바로 체포된 뒤 히오스로 추방되었고, 알렉산드루 3세가 오스만 제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왈라키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입성했다.
알렉산드루는 전임자가 돈을 갚지 못해 무너진 걸 똑똑히 지켜봤기에,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고자 왈라키아 농민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고 악착같이 거둬들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대규모 봉기가 일어날 조짐이 포착되자, 그는 희생양을 지정하고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일부 채권자와 보야르들을 처형했다. 그는 이로 인해 '첼 라우(cel Rău, 악한 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사형집행인은 처형 대상이었던 크라이오바 반(Ban) 미하이 2세를 살려줬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긴급 체포된 뒤 처형되기 직전에 몰렸지만, 보야르 12명 앞에서 자기가 드라쿨레슈티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고 맹세하는 대가로 풀려났다고 한다.
그 후 코스탄티니예로 피신한 미하이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 트라노스 및 어머니의 친족들의 도움을 받아 오스만 제국 궁정에 접근했다. 그는 잉글랜드 대사 에드워드 브래튼으로부터 200,000플로린의 대출을 받은 뒤, 궁정 관리들에게 뇌물을 뿌리면서 알렉산드루 3세의 폭정을 성토하고, 자기가 왈라키아 보이보드가 된다면 혼란을 수습하고 그들이 왈라키아 보이보드들에게 빌려준 돈을 받아내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파디샤 무라트 3세는 1593년 9월 관원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미하이 2세를 새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알렉산드루 3세는 그동안의 행적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코스탄티니예로 향했다가 곧바로 체포된 후 가신 조항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어 4년간 구금되었다가 1597년 3월 20일에 코스탄티니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4.11. 미하이 2세: 미하이 비테아줄
4.11.1.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무라트 3세의 지명으로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된 미하이 2세는 1593년 10월 15일 부쿠레슈티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보이보드가 되자마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대로 헝가리 전선에서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속국인 도나우 공국(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과 트란실바니아 공국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치게 했다. 해당 지역 통치자들은 지시에 따르기 위해 주민들을 수탈해야 했고,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갈수록 커졌다. 전임 보이보드인 알렉산드루 3세 역시 막대한 공물을 바치기 위해 주민들을 수탈해야 했고, 즉위 전에 오스만 관원들이 보이보드들에게 빚진 돈을 받아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특별세를 악착같이 징수하다가 주민들의 반감을 사 폭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관리 소홀 혐의로 코스탄티니예로 끌려가서 목숨을 잃었다. 미하이 2세는 이 상황에서 권력을 유지하려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밖엔 방도가 없다고 판단했다.1594년 11월 13일, 미하이 2세는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주도로 설립된 기독교 신성 동맹에 가담했다. 처음에 신성 동맹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교황령, 스페인, 페라라 공국, 만토바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이 가담했고, 그 다음으로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가담했으며, 1594년 9월 16일 몰다비아 보이보드 아론 트리아눌이 뒤이어 참가했다. 미하이 2세는 이웃한 두 공국이 신성 동맹에 가담하자 자기도 가담하기로 했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그는 빚진 돈을 받아내기 위해 부쿠레슈티에 방문했던 채권자들과 그곳에 주둔한 오스만 수비대 전체를 학살했다.
미하이 2세는 뒤이어 8,000 장병을 이끌고 왈라키아 남쪽의 도나우강 일대에 설치된 오스만 요새들( 지우르지우, 투르누, 하르쇼바, 실리스트라)를 연이어 공격해 심한 파괴를 자행했다. 오스만 측은 이를 응징하기 위해 왈라키아에 가까운 현지군을 급파하는 한편, 크림 타타르 용병대를 고용해 왈라키아를 급습하게 했다. 그러나 크림 타타르 용병대는 왈라키아로 진입했다가 푸티네이우에서 기습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고, 오스만 제국군 역시 스타네슈티 마을 인근의 파디나[11] 세르파테스티에서 궤멸되었다.
미하이 2세는 여세를 이어가 루세를 습격해 파괴를 자행했다. 한편, 몰다비아 보이보드 아론 역시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 루마니아인과 함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해 이아시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군은 헝가리 전선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붙이고 있던 터라 왈라키아,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갑작스러운 반란에 대처할 병력을 제때에 보낼 수 없었다. 미하이 2세는 이때를 틈타 발칸 반도 깊숙이 공세를 개시해 니볼루, 리프니치, 킬리 요새를 점령하고 여러 농촌과 도시를 심하게 약탈했다. 급기야 오스만 제국의 옛 수도이며 코스탄티니예와 지척인 에디르네까지 진출해 주변 지역을 약탈한 뒤 왈라키아로 귀환했다.
1595년, 몰다비아 보이보드 아론이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의 음모로 체포된 뒤 트란실바니아의 수도인 줄러페헤르바르로 이송된 후 독살당했다. 그 후 왈라키아 보야르들은 미하이 2세를 대신해 바토리 지그몬드와 협상한 끝에 줄러페헤르바르 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12명의 대 보야르로 구성된 위원회는 보이보드와 함께 국가의 행정 통치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보야르들은 트란실바니아 공의 승인 없이는 보이보드에게 처형될 수 없고,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았다. 미하이 2세는 사절들이 협상한 조약 내용이 자기에게 지극히 불리하고 보야르들에게 유리한 걸 보고 불만을 품었지만,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보야르들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그 후 미하이 2세는 보야르들의 지지를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 그들의 영지에 소속된 농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곳을 떠날 수 없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부유한 농노들은 뇌물을 바쳐서 법망을 빠져나갔고, 군자금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미하이 2세는 이를 눈감아줬다. 한편, 줄러페헤르바르 조약에서는 트란실바니아의 모든 루마니아 정교회가 트르고비슈테 대주교의 반할권에 속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무렵, 오스만 제국은 미하이 2세를 응징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했다. 헝가리 전선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했던 오스만 대재상 시난 파샤가 85,000 ~ 1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루세로 집결시켰다. 이에 맞서는 미하이 2세는 15,000명의 왈라키아군과 트란실바니아의 세케이인 분견대, 일부 용병대, 그리고 대형 야전포 12문을 갖췄다. 미하이 2세는 적의 임박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 장소를 물색한 끝에, 칼니슈테아 강과 네일로브 강의 교차점인 칼루가레니 마을 부근에 군대를 배치했다. 그곳의 지형은 숲으로 두러싸인 습지였기에, 오스만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전투력을 약화할 수 있었다. 10,000 병력과 대포 10문이 네일로프 강 북쪽과 마을 남쪽에 배치되었고, 세켈러 용병대장 알베르트 키랄리는 세케이 분견대와 왈라키아 예비군 6,000명을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평원에 배치했다.
1595년 8월 23일 오전, 미하이 2세가 급파한 왈라키아 기병대가 칼루가레니로 접근하던 오스만 선봉대를 기습 공격해 타격을 입힌 뒤, 그들이 반격을 시도하자 네일로프 강으로 후퇴했다. 한창 행군하던 중 선봉대가 적을 추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시난 파샤는 적군이 선봉대를 포위 섬멸하려 들 것을 우려해 12,000명을 추가로 파견했다. 오스만군은 적이 네일로프 강위에 설치된 좁은 다리를 건너는 걸 보고 즉시 따라가서 다리를 건넜지만, 그걸 기다리던 미하이 2세가 포병대를 시켜 포격을 퍼부은 후 맹렬히 공격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고 강 건너로 밀려났다.
그날 정오, 35,000 ~ 40,000 가량의 병력을 집결한 시난 파샤는 총공세를 감행하기로 했다. 예니체리가 다리를 건너 정면 공격을 가하는 동안, 메흐메트 시타르기 파샤가 기병대를 이끌고 동쪽의 습지대를 지나 강을 건너 적의 배후를 치고, 루엘리아의 베일러베이 하산 파샤가 분견대를 이끌고 서쪽의 숲으로 이동해 역시 강을 건너 적의 배후를 치도록 했다. 예니체리들은 좁은 다리를 통한 공세가 격퇴되자, 통나무와 판자를 깔아서 다리 외의 건널목을 확보한 뒤 다시 공세를 개시했다. 왈라키아군은 굳건히 버텼지만, 동쪽으로 이동했던 오스만 기병대가 여울목을 통해 강을 건너 왈라키아군의 좌익을 위협하자 미하이 2세의 명령에 따라 후퇴하면서 모든 대포를 버렸다. 그 후 미하이 2세는 마을 북쪽에 군대를 집결한 뒤 상황을 살폈다.
그날 오후, 짙은 안개가 끼면서 시야가 불량해졌다. 미하이 2세는 대병력인 적군이 강을 아직 다 건너지 못했고, 자신들이 재차 반격할 거라 예상하지 못하리라고 판단하고, 안개를 틈타 강을 건넌 적군을 기습하기로 했다. 여기에 정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코체아 대위의 기병 400기를 측면 기동에 사용했다. 오스만군은 적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예상하지 못해 속절없이 밀려나 네일로프 다리로 밀려났고, 왈라키아군은 야전 대포 12문을 탈환한 뒤 다리 쪽으로 몰린 적을 향해 발포해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시난 파샤는 호위대와 함께 최전선으로 달려가 상황을 회복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코체아 대위의 기병대가 오스만군의 후방을 강타하자, 오스만군은 혼란에 빠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왈라키아군은 추격했는데, 전승에 따르면 미하이 2세는 전투 도끼를 들고 시난 파샤를 공격해 습지대에 낙마하게 했지만, 노예 한 명이 시난 파샤를 구해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때까지 숲을 헤매던 하산 파샤의 군대가 나타나 아군의 오른쪽 측면을 위협하자, 미하이 2세는 추격을 중단하게 한 뒤 모든 병력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해 궤멸시켰다.
칼루가레니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미하이 2세는 시난 파샤에게 여전히 대규모 병력이 있으며 자신이 가진 병력으로는 이들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는 적군이 부쿠레슈티를 향해 행진하는 걸 허용하고 산악 지대로 후퇴해 바토리 지그몬드의 지원을 기다렸다. 시난 파샤는 부쿠레슈티에 도착하여 그곳에 메흐메트 파샤와 10,000명의 수비대를 배치하고 교회를 모스크로 바꾼 뒤, 트르고비슈테를 추가로 점령하고 1,500명의 병력과 대포 30문을 남겨뒀다. 오스만군 대부분은 스토에네슈티로 진군해 미하이 2세의 군대 앞에 진영을 세웠지만, 험준한 산악지대에 자리를 잡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한편, 시난 파샤는 왈라키아 각지에 분견대를 파견해 여러 곳을 장악하고 오스만 관리들을 임명해 왈라키아를 제국의 직할령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스만군의 가혹한 수탈과 약탈에 분노한 왈라키아인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키면서, 점차 입지가 불안해졌다.
1595년 9월 6일,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가 용병 13,200명, 세케이인 8,000명을 이끌고 미하이 2세와 합류했다. 여기에 10월 초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가 파견한 정예병 1,500명과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온 실비오 피콜로미니 휘하 포병 300명이 도착했다. 미하이 2세는 총 23,000명에 달하는 연합군의 선봉에 서서 반격 작전을 개시해 10월 5~8일 트르고비슈테 공방전을 벌인 끝에 탈환했고, 뒤이어 부쿠레슈티로 진군해 1595년 10월 12일 치열한 공병전을 치른 끝에 탈환했다. 여기에 왈라키아인들이 대거 합세하면서 적의 군세가 갈수록 불어나자, 시난 파샤는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10,000마리 이상의 짐승과 포로 수천 명을 끌고 가느라 철군 속도가 매우 느렸고, 결국 10월 15일 도나우 강변의 지우르지우에서 철수 작전을 수행하던 중 연합군에게 따라잡혔다. 시난 파샤 본인은 강을 건넜지만, 10,000명 가량의 병사들과 포로, 짐승들은 강을 미처 건너지 못했다. 이어진 지우르지우 전투에서, 미처 건너지 못한 오스만군 대부분이 궤멸되었다. 생존한 병사들은 지우르지우 성채로 들어가서 며칠 동안 처절하게 항전했지만, 끝내 궤멸되었다. 특히 오랜 세월 정찰 및 적지 약탈 임무를 수행했던 아킨지(Akinji) 부대는 이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시난 파샤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실각했고, 미하이 2세는 승리의 여세를 이어가 도나우 강 남쪽으로 진군해 이사카아, 마신, 체르나보다, 라즈그라드, 바바다그, 실리스트라, 루시우츠, 시슈토바, 니볼루, 비딘 요새와 도시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그리하여 도나우 강변에 포진해 왈라키아를 옥죄었던 오스만 제국의 거의 모든 요새가 파괴되었으며, 도나우 강 남쪽의 많은 영토가 황폐해졌다. 1595년 1월에는 도나우 강의 외쪽 기슭 전체가 왈라키아의 손아귀에 넘어갔으며, 도나우 강 동쪽의 요충지인 투르누 요새 역시 미하이 2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왈라키아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이에 미하이 2세는 왈라키아 출신의 모든 토지 없는 농민을 보야르들의 영지에 강제 정착시키고 그들의 후손까지 영구적으로 보야르들의 농노로 귀속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공표했고, 이를 통해 큰 이득을 얻은 보야르들로부터 돈을 받아냄으로써 재정을 충당하고자 노력했다.
1596년 10월 26일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와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가 이끄는 40,000 ~ 50,000 가량의 신성 동맹군이 오스만 파디샤 메흐메트 3세와 다맛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군 80,000 ~ 10,000명을 상대로 패배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 공국과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자신을 도와줄 여력이 없어지면서 오스만 제국의 반격이 가시화되자, 미하이 2세는 오스만 제국에 화해를 청했다. 때마침 오스만 제국 역시 오랜 전쟁으로 지쳤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양자는 1597년 12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미하이 2세는 오스만 제국을 주권자로 받아들이고 공물을 바쳐야 했지만, 도나우 강변의 요새들을 그대로 가지는 걸 허락받았으며, 오스만 제국은 그가 평생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통치하는 걸 받아들이고 통치자의 깃발을 선물했다. 1598년 6월 9일, 미하이 2세는 딜루 수도원에서 루돌프 2세의 사절단과 조약을 체결했다. 루돌프 2세는 그에게 군대 유지를 위한 보조금을 제공하기로 약속했으며, 미하이 2세가 자신을 주권자로 섬기는 대가로 자손 대대로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세습하는 걸 받아들였다.
4.11.2. 트란실바니아와 몰다비아 공략
1595년 8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원에 힘입어 몰다비아 보이보드이 된 이에레미아 모빌라는 형제인 시미온 모빌라를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다. 여기에 1598년 3월 23일 바토리 지그몬드가 퇴위한 뒤 트란실바니아의 새 공이 된 바토리 언드라시도 자기 동생 이슈트반을 왈라키아의 보이보드로 앉히려 했다. 미하이 2세는 1598년 6월 26일 바토리 언드라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자리를 보전하려 했지만, 언드라시의 사절단은 7월 3일에 이에레미아 모빌라를 찾아가서 협정을 맺었다. 언드라시는 여기에 더해 오스만 제국과 협상해 자신이 왈라키아에 대한 종주권을 가지는 걸 인정받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바치겠다고 제안했고, 오스만 제국은 위험 인물인 미하이 2세보다는 언드라시 쪽이 상대하기 편할 거라 여기고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1598년 8월, 트란실바니아 전임 공 바토리 지그몬드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사촌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결혼이 무효로 선언되었다. 언드라시는 마리아와 결혼하면 루돌프 2세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여기고 그녀와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루돌프 2세는 언드라시가 트란실바니아에서 통치하는 걸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언드라시의 요청을 기각했다. 미하이 2세는 루돌프 2세의 마음을 읽고, 1599년 7월 프라하에 있던 루돌프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기가 트란실바니아를 차지하는 것에 동의하는지 물었다. 루돌프 2세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같은 해 말 루마니아인과 트란실바니아 출신의 헝가리인과 세케이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 등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25,000명 가량의 병력을 동원해 부자우 고개를 통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했다.
1599년 10월 28일, 미하이 2세는 셀림바르 전투에서 바토리 언드라시가 이끄는 16,000명 가량의 트란실바니아군을 격파했다. 언드라시는 몰다비아로 도망쳐서 이에레미아 모빌라와 합세해 재기를 도모하려 했지만, 도중에 산지에서 세케이인들에게 생포된 뒤 10월 31일에 참수된 후 수급아 미하이 2세에게 전달되었다. 그 후 미하이 2세는 1599년 11월 1일 트란실바니아의 중심지인 줄러페헤르바르에 입성한 후 주교 데메트리우스 나프라기로부터 요새의 열쇠를 받았다. 이후 언드라시의 수급을 줄러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정중히 묻었다. 전승에 따르면, 미하이 2세는 루마니아 관습에 따라 언드라시의 수급이 담긴 관을 양초를 손에 든 채 따라갔다고 한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소집한 뒤 귀족들로부터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추대된 후 스스로 "왈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의 통치자"를 칭했다. 또한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법률, 제도 및 관습을 준수했고, 모든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을 확인했다. 또한 바토리 지그몬드와 바토리 언드라시 치세 때 박해받았던 세케이인의 자치권을 인정했으며,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작센인들이 루터교를 믿는 걸 허용했다.
트란실바니아를 공략한 뒤, 미하이 2세의 눈길은 몰다비아로 향했다. 1600년 4월 14일, 미하이 2세는 줄러페헤르바르를 떠나 왈라키아로 돌아가면서 미할카 반이 자신을 대신해 트란실바니아를 통치하도록 했다. 1600년 5월 1일 브러쇼 인근에 숙영지를 세운 그는 장병들에게 지난날 자기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던 이에레미아 모빌라를 추방하기 위해 몰다비아로 쳐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5월 6일, 미하이 2세는 카르파티아산맥을 등반했다. 이때 그는 적군이 산길을 막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통행이 가장 어려워서 경계가 허술한 산으로 향했다. 이 때문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지만, 그의 군대는 몰다비아에 도착한 뒤 공세를 개시했다. 이에레미아 모빌라는 미처 이를 막을 병력을 모으지 못하고 바커우로 도주했지만, 적군이 그곳까지 이르자 가족과 함께 호틴으로 피신했다.
1600년 6월 1일, 미하이는 몰다비아 공국의 중심지인 이아시에 도착한 뒤 몰다비아 보야르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후 루돌프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이에레미아 모빌라가 오스만 제국, 크림 칸국와 연합해 왈라키아를 침공하려 했다고 주장하면서, 트란실바니아, 몰다비아, 왈라키아에 대한 자신의 영구 통치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해 7월 6일자 공식 문서엔 "루마니아 땅과 트란실바니아 및 몰다비아 전체의 군주"를 칭했다. 그 후 미하이 2세는 몰다비아에 대리인을 앉혀놓은 뒤 트란실바니아로 이동했다.
4.11.3. 몰락
미하이 2세가 1599년부터 1600년까지 불과 1년만에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 몰다비아를 석권하자, 주변 열강들은 긴장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루돌프 2세는 충실한 봉신이라 여겼던 미하이 2세가 너무 강해져서 트란실바니아를 영향권에 두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고 여겼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몰다비아가 미하이 2세에게 넘어가면서 통제권을 잃게 생기자 불만을 품었다. 오스만 제국 역시 미하이 2세의 급격한 성공으로 인해 봉신으로 두기 힘들어졌다고 여겼다. 여기에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 귀족들은 미하이 2세에게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으며, 작센인들은 미하이 2세의 군대가 여러 마을에서 약탈을 저지르자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미하이 2세는 자기에게 공공연히 적대하는 헝가리 귀족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 그러던 중 조르조 바스타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18,000명이 헝가리 귀족들을 돕기 위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하이 2세는 이에 맞서려 했다. 1600년 9월 18일에 벌어진 미라슬라우 전투에서, 미하이 2세는 무레슈 강, 언덕, 로파데아 강 및 도랑으로 둘러싸인 요새화된 지형에 10,000 ~ 12,000명을 배치하고 오스트리아군과 맞서 싸웠다. 조르조 바스타는 미하이 2세의 군대가 강력한 방어 진형을 구축한 걸 보고, 그들을 유인하기로 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군이 적진을 공격했다가 강력한 저항에 못 이겨 후퇴하자, 미하이 2세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로 마음먹고 기병대를 이끌고 추격했다. 그러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총사대가 왈라키아 기병대를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고, 뒤이어 독일 흉갑 기병대가 출격해 믹대한 피해를 입혔다. 결국 미하이 2세는 4,000명을 잃고 패주했고, 트란실바니아는 순식간에 오스트리아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미하이 2세는 산지에 사는 주민의 도움으로 전장을 가까스로 탈출한 뒤 몰다비아로 돌아갔다.
그 사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대원수 얀 자모이스키가 윙드 후사르를 앞세워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미하이 2세는 군대를 새로 모집한 뒤에 이에 대항하려 했지만, 1600년 10월 20일 부코프 전투에서 참패하고 왈라키아로 도주했다. 얀 자모이스키는 이에레미아 모빌라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한 뒤, 여세를 이어가 왈라키아로 쳐들어갔다. 이에 왈라키아 보야르들은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미하이 2세를 배신하고 이에레미아 모빌라의 형제인 시미온 모빌라를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미하이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에게 의탁한 뒤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하는 대신 루돌프 2세에게 반기를 든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를 축출하는 걸 도와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미하이 2세는 지난날 자신을 격파하고 트란실바니아를 빼앗아갔던 조르조 바스타와 함께 트란실바니아로 쳐들어가 1601년 8월 3일 구루스라우 전투에서 바토리 지그몬드를 격파하고 조르조 바스타가 트란실바니아 총독으로 군림하는 데 일조했다. 미하이 2세는 여세를 이어가 왈라키아로 진군하려 했지만, 루돌프 2세는 1년 전에 루마니아 전역을 석권했던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조르조 바스타에게 그를 암살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결국 미하이 2세는 1601년 8월 9일 또는 8월 19일 투르다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평원에서 조르조 바스타가 파견한 암살자들에게 살해되었다.
4.12. 이어지는 혼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원에 입입어 왈라키아 보이보드가 된 시미온 모빌라는 미하이 2세에 대한 복수와 돈에 대한 갈증으로 왈라키아 전역을 폴란드군과 함께 철저하게 약탈했고, 이로 인해 보야르들의 반감을 샀다. 폴란드군이 돌아간 뒤, 시미온은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보야르들의 연이은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급기야 1601년 6월 라두 9세가 반란을 일으켜 왈라키아 전역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시미온은 몰다비아로 도주했고, 그해 10월 폴란드군의 지원을 받고 돌아와 라두 9세를 쫓아내고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그러나 1602년 8월 라두 10세의 정변으로 재차 축출되어 몰다비아로 피신했다.라두 10세는 집권 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왈라키아를 해방하고 합스부르크 제국과 동맹을 맺는 미하이 2세의 정책을 계승했다. 1602년 가을, 시미온 모빌라는 크림 칸국 에 찾아가서 자신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복귀하는 걸 도와준다면 그들이 왈라키아를 마음껏 약탈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크림 칸국에 소속된 타타르인 수만 명이 가세했고, 그의 형이자 몰다비아 보이보드인 이에레미아 모빌라가 파견한 몰도바인, 카자크 300명이 가세했다. 라두 10세는 이에 대응해 보병 8,000 ~ 10,000명과 기병 6,000명을 소집했고, 나중에 합스부르크 장군 조르조 바스타가 트란실바니아에서 파견한 기병 1,000명이 가세했다. 라두 10세는 텔레아젠 강 계곡의 테이샤니에서 참호와 방어벽을 갖추고 적의 공세에 대항했다.
1602년 9월 23~24일, 타타르군은 이 요새에 대한 공세를 퍼부었지만 막대한 손실만 보았다. 이때 크림 칸 가지 기라이의 사위가 결투를 제안하자, 스트로 부제스쿠라는 이름의 왈라키아 전사가 응해 결투를 벌인 끝에 그를 처단했다. 다만 스트로 역시 중상을 입고 10월 2일에 사망했다. 현재 루마니아 올테니아 발체아 주 스타네슈티 초원의 스타네슈티 수도원에 스트로 부제스쿠의 묘비가 세워졌다. 결국 타타르군은 왈라키아군을 꺾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1603년 여름, 라두 10세는 트란실바니아에서 합스부르크 세력을 몰아내려는 세케이 모제시가 이끄는 헝가리계 트란실바니아 귀족 연합에 맞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편을 들었다. 게오르게 라슈와 바실라 마르자가 지휘하는 왈라키아군 선봉대는 텔레아제눌루이 계곡을 건너 브라쇼프 인근 펠디오아라에 숙영지를 세웠고, 라두 10세는 본대를 이끌고 루카르-브랜 고개를 통해 카르파티아산맥을 등반해 선봉대와 교차점을 이루었다. 세케이 모제시는 이에 대응해 헝가리인 4,000명, 타타르인 2,000명, 경대포 25문을 이끌고 브라쇼브 인근에 도착했다.
모제시는 왈라키아군과 정면 대결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라쇼노프 인근에서 요새를 세운 뒤 방어 전술로 적에 맞서기로 했다. 7월 17일에 벌어진 라쇼노프 전투에서, 왈라키아군은 맹공격을 퍼부은 끝에 방어선을 뚫고 적군을 패주시켰고, 라두 10세는 친히 기병대를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때 세케이 모제시는 탈출을 시도하다 추격대에 따라잡혀 전사했다. 그 후 라두 10세는 왈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 국경지대의 여러 요새를 자기 수중으로 삼은 뒤 왈라키아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트란실바니아 공국과의 북쪽 국경을 확보하고 타타르군을 격파하면서 입지를 확고히한 뒤, 오스만 제국에게 공물을 보내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는 동시에 오스만 제국군의 침략을 대비해 수비에 용이인 트르고비슈테를 수도로 삼는 한편 부쿠레슈티 인근에 요새를 설치했다. 또한 개인 간의 부채를 소멸하고 약탈, 절도 및 강도로 피해를 입은 이들에 대한 보상을 실시해 경제 발전을 도모했다. 또한 1608년 체르니카 수도원을 건설을 후원했으며, 1461년 블라드 3세가 세웠지만 폐허가 되었던 코마나 수도원을 재건했다.
1608년, 미하이 2세의 아들 니콜라에 파트라스쿠가 소규모 군대를 모집한 뒤 트란실바니아로 가서 그곳의 지배자인 바토리 가보르와 동맹을 맺고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10세를 타도하려 했다. 그러나 바토리 가보르는 그를 체포한 뒤 라두 10세에게 넘겼고, 그는 코 일부가 베어짐으로써 보이보드 계승권이 무효화된 뒤 추방되었다. 니콜라에는 나중에 라두 10세와 화해하고 포스텔닉으로 선임되었으며, 아버지가 과거에 영지로 다스렸던 치울니차에 대한 증서를 왈라키아의 로고테테스인 오안세아에게 넘기고 대신 글리나를 다스릴 권리를 획득했지만, 글리나를 실제로 다스리지 못했다.
1610년, 트란실바니아의 공 바토리 가보르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상대로 공격적인 정책을 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이에 대응해 몰다비아의 새 공 콘스탄틴 모빌라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1610년 12월 20일, 바토리 가보르가 이끄는 용병들이 왈라키아로 쳐들어와 5일간 샤라 바르세 일대를 약탈한 뒤 눈덮인 카르파티아 산맥을 건너 왈라키아 본토로 진입했다. 미처 군대를 모집하지 못한 라두 10세는 트라고비슈테를 떠나 몰다비아로 피신했고, 바토리 가보르의 용병들은 왈라키아를 잔인하게 약탈했다. 교회와 수도원이 모조리 약탈당했고, 납 지붕이 녹여져서 총알로 제작되었으며, 수많은 무덤이 도굴당했다. 한편 라두 10세는 몰다비아의 로만에서 군대를 끌어모은 뒤 복수전을 준비했다.
1611년 3월, 오스만 제국이 바토리 가보르를 압박해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갸게 한 뒤 라두 9세를 보이보드에 복귀시켰다. 그해 6월, 라두 10세가 몰다비아 공국의 지원에 힘입어 라두 9세를 축출하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 후 라두 10세는 바토리 가보르가 왈라키아에 행한 악행을 복수하려는 보야르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르기로 하고, 대규모 병력을 소집한 뒤 7월에 카르파티아 산맥을 건너 브라쇼프 인근 프레지미르로 진격했다. 바토리 가보르는 급히 브라쇼브로 후퇴하려 했지만, 라두 10세는 산을 넘는 험난한 행군으로 인해 장병들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격해 7월 9일 브라쇼브와 산페트루 마을 사이의 평야에서 따라잡았다. 이어진 전투에서, 왈라키아인과 라두 10세에 의해 용병으로 고용된 폴란드 흉갑기병들은 트란실바니아군을 격파했고, 바토리 가보르는 목숨만 간신히 건져 도주했다.
그러나 승리를 거두고 왈라키아로 돌아간 라두 10세는 1611년 9월 라두 9세를 복위하기 위한 오스만 제국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직면했다. 라두 10세는 몰다비아로 퇴각하려 했지만, 9월 30일 바카우 인근 숲에서 추격대에 따라잡혀 가을비로 인해 진흙에 갇힌 대포와 보급품이 담긴 마차를 전부 잃었고, 숙련병 상당수와 주력군의 퇴각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한 폴란드 흉갑기병들도 상실했다. 라두 10세는 수체아바로 이동한 뒤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빈으로 떠났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만 제국과 정면 대결을 피하고 싶었기에, 그에게 연금을 지급할 뿐 군대를 파견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시키려 하지 않았다. 왈라키아 내 라두 10세 추종자들은 1611년 말, 1612년, 1616년에 반란을 꾀했지만 모조리 진압되었고, 라두 9세는 음모를 꾸민 많은 보야르의 처형을 명령하고 그들의 땅을 압수했다.
1613년, 라두 9세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아흐메트 1세의 지시에 따라 몰다비아 보이보드 슈테판 9세 톰샤와 함께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가보르를 상대로 벌인 오스만 제국군의 원정에 참여했다. 오스만군은 바토리 가보르를 성공적으로 몰아낸 뒤 베틀렌 가보르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옹립했다. 한편, 라두 9세의 치세 동안 그리스인들이 왈라키아 공국에 대거 이주했다. 1616년 7월, 아흐메트 1세는 라두 9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옮겼고 가브릴 모빌라가 뛰어난 학식과 덕망을 높게 평가한 보야르들에 의해 새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오스만 제국 궁정은 가브릴 모빌라 대신 알렉산드루 4세 일리아슈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세웠다.
알렉산드루 4세 일리아슈는 1617년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전쟁을 벌이는 오스만 제국군에 참여했으며, 그 해 9월 트란실바니아 공 베틀렌 가보르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에게 큰 수입을 가져다주는 직위를 제공하는 것에 반감을 품은 왈라키아 보야르 카스테아와 술잔 관원장 루푸, 대장 부스두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1년간에 걸친 전쟁 끝에 알렉산드루 4세는 축출되었고, 많은 그리스인, 보야르, 고위 성직자 및 상인들이 살해되었다. 오스만 제국 궁정은 왈라키아 보야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1618년 6월 가브릴 모빌라를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반란을 주도한 루푸 등은 가브릴을 호위한 튀르크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1619년, 가브릴 모빌라는 트란실바니아 공 베틀렌 가보르와 동맹을 맺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교역 협약을 맺는 등 우호 관계를 맺었다. 1620년 7월, 오스만 제국 파디샤 오스만 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전쟁을 치르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사이가 좋은 가브릴을 의심해 보이보드에서 축출한 뒤 라두 9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재선임했다. 라두 9세는 1621년 오스만 2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원정에 참여했고, 호틴 전투에서 왈라키아 부대를 이끌었다. 그 후 호틴에서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간의 평화 협상이 진행될 때 중재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22년 트란실바니아 공 베틀렌 가보르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1623년 8월, 라두 9세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옮겨졌고, 장남 알렉산드루 5세 코코눌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알렉산드루 5세 코코눌은 4년간 왈라키아 공국을 다스렸지만, 1627년 11월 3일 '관리들에게 너무 많은 금 자루를 보내 국고를 낭비했다'는 비방을 받고 코스탄티니예로 소환되었고, 알렉산드루 4세 일리아슈가 그를 대신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복위했다가 1629년 10월에 오스만 제국 관리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준 ' 레온 톰샤에게 밀려났다. 레온 톰샤는 뇌물로 지출한 금액을 회수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훨씬 더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하지만 이걸로 충족되지 않자, 그는 보야르들에게 나머지 금액을 자비로 지불하도록 강요했다. 여기에 그리스에서 왈라키아로 이주한 이들에게 막대한 권리를 부여해, 보야르들의 반감을 샀다.
1630년, 보야르들은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1세에게 레온 톰샤를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레온은 라코치에게 서신을 보내 왈라키아를 공격하지 말 것을 청했으며, 1631년 7월 귀화하지 않은 그리스 이민자들을 왈라키아에서 내보내는 법령을 발표하고 새로운 세금을 취소하며, 보야르와 사제들에게 모든 세금을 면제하는 조치를 내리는 등, 보야르들을 회유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632년 트란실바니아군은 왈라키아를 침공해 레온 톰샤에게 반감을 품은 보야르들과 연합했다. 하지만 얼마 후 부쿠레슈티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레온 톰샤를 지지하는 군대가 승리했고, 트란실바니아군과 그에게 반기를 들었던 보야르들은 해외로 도주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궁정은 레온 톰샤의 무능 때문에 분란이 일어났다고 여기고 1632년 7월 레온 톰샤를 폐위하고 라두 11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그러나 그 해 9월 마테이 바사라브가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1세의 지원을 받고 그를 축출했다. 라두 11세는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반격을 꾀했지만, 그 해 10월 30일 플럼부이타 수도원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후 마테이 바사라브는 오스만 제국 궁정에 뇌물을 바치고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4.13. 마테이 바사라브: 22년간의 선정
마테이 바사라브는 집권 후 입지를 다지기 위해 주변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노력했다. 오스만 제국에 공물을 꼬박꼬박 바치고 파디샤에게 경의를 표해 그들의 호의를 사는 한편, 1635년 트란실바니아 공 라고치 죄르지 1세와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1636년, 1637년, 1639년에 각각 신성 로마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베네치아 공화국과 평화 및 우호 협정을 맺었다.한편, 마테이는 오랜 혼란으로 피폐해진 왈라키아의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외국과의 무역량을 늘리는 데 힘을 기울여 자국의 경제 발전을 도모했으며, 키예프 대주교 표트르 모길라의 도움으로 캄푸룽과 고보라의 인쇄소를 설치했다. 또한 46개의 정교회 성당과 수도원을 새로 지었고, 아토스 산과 다뉴브 강 남쪽의 비딘과 시스토프 등 많은 성당을 복원했다. 왈라키아 수도원들은 세금 면제 및 교회 복원을 위한 정부 지원의 혜택을 받았다. 또한 마테이는 종교 및 시민 생활에서 슬라브어를 루마니아어로 대체하는 데 공헌했다. 그는 <고모라의 규칙>[12]과 <법률 지침>[13]을 루마니아어로 발간했다. 또한 마테이는 국방력을 강화해 22년의 통치 기간 동안 병력 규모를 40,000명으로 늘렸고, 여러 요새를 건설했다.
이 무렵, 1634년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된 바실레 루푸는 마테이를 밀어내고 자기 아들 이오안을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하려 했다. 이에 자극받은 마테이는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했던 몰다비아 공위 경쟁자 이오안 모빌라를 지원했다. 오스만 제국은 마테이와 바실레간의 갈등을 비밀리에 부추김으로써, 봉신들이 서로 지리멸렬해져 자국으로부터 독립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 했다. 바실레 루푸는 왈라키아의 여러 보야르들을 회유했고, 몇몇 오스만 고위 관리들에게 뇌물을 줘서 파디샤가 마테이를 폐위하도록 부추기려 했다. 그러나 마테이는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오스만 관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고, 바실레 루푸를 지지한 보야르들을 처형했다.
1637년 11월, 바실레 루푸가 산악 지대를 넘어 왈라키아를 급습했지만 포차니에서 마테이에게 격파되었다. 1639년, 바실레 루푸는 아들 이오안과 함께 마테이의 퇴위를 위해 전쟁을 재차 벌이면서, 파디샤 무라트 4세로부터 마테이를 폐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해 12월 네니쇼르 마을 인근 전투에서 패배하고 몰다비아로 후퇴했다. 이후 양자는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1세의 중재에 따라 휴전 협약을 맺었고, 1644년에 휴전을 갱신했다. 두 군주는 평화의 표시로 상대 국가에 수도원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화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테이는 새로운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지원을 받았고, 바실레 루푸는 자포리자 코자키의 헤트만인 보흐단 흐멜니츠키와 크림 칸 이슬람 3세 기라이의 지원을 받았다. 양자는 몇 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렀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1653년 4월, 마테이는 바실레 루푸에 대한 음모를 조직했다. 그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작위를 주장하는 게오르게 슈테판을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하고,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와 함께 몰다비아를 침공했다.
연합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바실레 루푸는 우크라이나로 피신한 뒤 1653년 5월 보그단 흐멜니츠키의 지원을 받아 카자크와 함께 몰다비아 공국을 탈환한 뒤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마테이는 이에 대응하고자 출진해 핀타 전투에서 바실레 루푸를 격파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바실레 루푸는 핀타 전투 패전 후 카자크로 도주했다가 크림 칸국으로 이동한 뒤, 다시 코스탄티니예로 피신했으나 곧 일곱 개의 탑에 투옥되었다. 1654년 4월, 세이멘[14] 분견대가 수도 트라고비슈테를 점령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이 임금 대폭 인상을 요구하자, 마테이 바사라브는 이들과 어떻게든 협상하려 했다. 그러나 핀타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면서 4월 9일 협상 도중 사망했고, 트라고비슈테에 묻혔다.
4.14. 콘스탄틴 셰르반 ~ 셰르반 칸타쿠지노
마테이 바사라브 사후, 콘스탄틴 셰르반이 1654년 4월 19일에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지원 덕분에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고, 1654년 6월 11일 오스만 제국 궁정의 승인을 받았다. 그는 초기엔 마테이가 고용한 용병 부대 세이멘과 도로반츠의 호의를 얻으려 노력했지만, 1655년 2월 보야르들의 요청에 따라 용병들의 수를 줄이려 했다.이에 반감을 품은 용병 집단은 1655년 2월에 반란을 일으켜 부쿠레슈티를 공략한 뒤, 그 직후 왈라키아 전역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보야르들에게 반감을 품었던 농노들과 연합한 뒤 보야르들의 집을 약탈하고 여러 보야르와 그들의 아내, 아이들을 살해했다. 이후 반란군은 고스포다르의 재무관인 크리시아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콘스탄틴은 이 혼란에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다가 라코치 죄르지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가 지원군을 보낸 뒤, 진압군은 즉시 반격에 착수했다. 1655년 6월 26일, 왈라키아-몰다비아 연합군은 텔레아젠 강변의 쇼플레아 마을 인근에서 반군 20,000명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크리시아는 체포된 뒤 투옥되었다가 트란실바니아로 탈출했지만, 그곳에서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그러나 반란군 잔당은 1657년까지 반란을 이어갔다.
그 후 콘스탄틴은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를 주군으로 섬기고 공물을 바쳤다. 그러나 보야르들은 이에 불만을 품었고, 1658년 1월 26일에 콘스탄틴을 축출한 뒤 자신을 왈라키아 전임 보이보드 라두 9세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미네아 3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미네아 3세는 그해 3월 오스만 궁정의 승인을 받았지만, 1659년 10월 4일 브란 성에서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와 동맹을 맺은 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야심을 품었다. 1659년 10월 20일, 미네아 3세는 군대를 일으켜 다뉴브 강을 건넌 뒤 지우르지우, 브라일라, 투르누 등지를 습격해 지우르지우와 브라일라를 공략했다. 11월 23일 프라세스티 전투에서 현지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11월 말 오스만-타타르 연합군의 역습으로 패퇴한 뒤 오스만 제국과 맞서기를 바라지 않았던 보야르들의 반란에 직면하자 트란실바니아로 피신했고, 오스만 제국은 게오르게 기카를 새 보이보드로 세웠다.
1660년 5월, 일전에 게오르게 기카를 밀어내고 몰다비아 공국을 일시적으로 손에 넣었다가 크림 칸국이 파견한 타타르군의 지원을 받은 슈테판 루푸에게 밀려나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갔던 콘스탄틴 셰르반이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왈라키아로 쳐들어갔다. 게오르게 기카는 일시적으로 쫓겨났지만, 그해 6월 타타르군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틴을 축출했다. 그러나 왈라키아가 연이은 내전과 혼란으로 파탄 지경에 처한 데다, 기근과 역병이 창궐해 수많은 주민이 사방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게오르게 기카는 스만 제국 궁정에 공물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궁정은 그가 불충해 공물을 보내지 않는다고 간주하고 1660년 9월 1일 전격 체포한 뒤 에디르네로 이송했다가, 다시 코스탄티니예로 이송했다. 그 후 4년간 옥고를 치르다 1664년 11월 2일에 옥사했다.
게오르게 기카가 축출된 뒤, 외아들 그리고레 1세 기카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물려받았다. 이후 전임 보이보드 마테이 바사라브 치세 때 포스텔닉을 맡는 등 왈라키아에서 강력한 보야르로 군림하던 콘스탄틴 칸타쿠지노의 지원에 힘입어 거듭된 내전으로 극심한 혼란과 기근에 시달리던 왈라키아를 어느정도 안정시켰다. 또한 1662년 오스만 제국의 지시에 따라 봉신으로서 트란실바니아 공 케메니 야노시에 대한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합스부르크 제국과 비밀 우호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스트로에 레우르데아누와 두미트라슈쿠 칸타쿠지노가 콘스탄틴 칸타쿠지노가 보이보드 직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발하자, 그리고레는 이를 믿고 1663년 12월 그를 스나고프에서 목졸라 죽이게 했다. 이에 콘스탄틴 칸타쿠지노의 가족 및 추종자들이 분노해 봉기를 일으키면서 왈라키아가 혼란에 빠지자, 오스만 제국 궁정은 1664년 11월에 그를 폐위하고 라두 12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세웠다. 라두 12세는 왈라키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칸타쿠지노 가문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을 적대하는 스트로에 레우르데아누, 니콜라에 소피알룰, 발라사크를 고위 관직에 앉혔다. 이에 칸타쿠지노 가문 인사들은 오스만 제국 궁정에 라두 12세가 폭정을 일삼고 있다고 보고했다. 특히 그는 보야르조차 면제되지 않는 세금을 도입했다고 비난받았다.
이에 라두 12세는 칸타쿠지노 가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2가지 법령을 반포했다. 첫번째 법령은 그리고레 1세 기카 치세 때 살해된 콘스탄틴 칸타쿠지노가 결백하다고 선포했다. 두번째 법령은 왈라키아로 이주한 그리스인들에 의해 소개된 모든 "새롭고 사악한 관습"을 폐지하고 새로 이주한 그리스인들을 국가에서 추방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법령 중 어느 것도 시행되지 않았고, 콘스탄틴 칸타쿠지노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스트로에 레우르디아누는 처벌받지 않았으며, 그리스 출신의 고위 인사들은 보야르 의회에 계속 자리를 잡았다. 이에 칸타쿠지노 가문은 그가 앞뒤가 다른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비난하고 계속 맞섰다.
1668년 왈라키아에서 반그리스 폭동이 발발했다. 1669년 초, 칸타쿠지노 가문과 그들을 추종하는 보야르들은 라두 12세의 폭정을 규탄하고 폐위할 것을 요청하고자 대표단 200명을 코스탄티니예로 파견했다. 오스만 제국 궁정이 아가(Aga: 오스만 제국 궁정 관리의 호칭)를 파견해 진상을 파악하게 하자, 칸타쿠지노 가문은 아가에게 뇌물을 주었고, 아가는 라두 12세에게 불리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결과 라두 12세는 폐위되었고, 안토니에 딘 포페슈티가 칸타쿠지노 가문의 추천에 힘입어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는 꼭두각시 노릇만 해야 했다. 칸타쿠지노 가문과 오랜 경쟁 관계였던 발리아누 가문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칸타쿠지노 보야르들에 의해 정해진 일일 식량 및 음료 배급량 대로 매일 먹고 마셔야 했다고 한다. 그의 치세에 블라드 3세가 세웠지만 폐허가 된지 오래였던 타르그쇼르의 투르누 수도원이 재건되었다.
1672년 2월, 오스만 제국 궁정 관료 파나이오타케 나쿠시스는 그리고레 1세 기카에게 뇌물을 받고 안토니에 딘 포페슈티를 폐위한 뒤 그리고레 1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시켰다. 이후 그리고레 1세 기카는 자기를 축출했던 칸타쿠지노 가문 인사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둬서 고문하는 등 박해를 가했고, 칸타쿠지노 인사들은 코스탄티니예로 달아난 뒤 그가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 계획을 품고 있다고 고발했다. 1673년, 그리고레 1세는 왈라키아군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의 편에 서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상대했다. 하지만 그는 호틴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완승을 거두자 폴란드-리투아니아군 사령관 얀 3세 소비에스키와 손잡아 오스만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얼마 후,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국왕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1673년 11월 10일에 르부프 궁전에서 위장병에 시달리다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귀족들은 새로운 왕을 선출하기 위해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했다.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지원을 얻을 수 없게 된 그리고레 1세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폐위되었고, 게오르게 두카가 그 대신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게오르게 두카는 초기엔 칸타쿠지노 가문과 우호 관계를 맺었지만, 칸타쿠지노 가문의 권세가 너무 강해서 자기가 독자적으로 통치하는 게 힘들자 그들에게 불만을 품고, 칸타쿠지노 가문과 적대하는 보야르들과 손잡고 그들의 권세를 약화하려고 했다. 그러자 칸타쿠지노 가문은 오스만 제국 궁정에 사람을 잇따라 보내 그의 통치가 억압적이라고 비난하며 폐위해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오스만 제국 궁정은 1678년 11월29일에 그를 폐위하고 셰르반 칸타쿠지노를 새 보이보드로 세웠다.
셰르반은 집권 후 보이보드들의 잦은 교체와 내전으로 피폐해진 왈라키아를 재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여러 인쇄소 설립을 지원했으며, 16898년 부쿠레슈티에서 루마니아어 성경이 출판되도록 후원했다. 또한 옥수수를 왈라키아 농부들에게 널리 전파해 주식으로 삼도록 했으며, 저수지를 설치하고 부쿠레슈티 최초의 포장 도로인 세르반-보다 도로를 개통했으며, 해외와의 무역 활동이 증진되도록 힘을 기울였다.
1683년 오스만 제국군이 제2차 빈 공방전을 감행할 때 몰다비아 보이보드 게오르게 두카, 트란실바니아 공 어퍼피 미하이 1세와 함께 오스만 제국 편에서 참전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왈라키아군이 가져온 대포들은 포위된 기독교인들을 해치지 않기 위해 짚으로 가득 찬 공을 발사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오스만군에 복무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을 위해 돌십자가를 세웠는데, 이 십자가는 빈 공방전이 끝난 뒤 수비대에게 발견되어 빈으로 옮겨진 뒤 처음 세워졌던 자리에 설치된 성당 안에 세워졌다.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 등이 신성 동맹을 창설한 뒤 대튀르크 전쟁을 단행해 오스만 제국을 몰아붙이자, 셰르반은 1688년 10월에 빈에 형제 이오르다케, 외조카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조카 셰르반 칸타쿠지노를 포함한 사절단을 보내 합스부르크 제국에 경의를 표하며, 합스부르크군이 왈라키아 근방까지 이르렀을 때 오스만 제국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그들 편에 서겠다고 약속했다.
1688년 10월 29일 또는 11월 8일, 셰르반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의 비서였던 이탈리아 학자 안톤 마리아 델 치아로는 셰르반의 두 형제 콘스탄틴과 미하이가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걸 언급했다. 몰다비아 연대기 작가 이온 네쿨리스(Ion Neculce, 1672 ~ 1745)는 단순한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했지만,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 치세 때 왈라키아 궁정 연대기 작가로 활동한 라두 포페스쿠(Radu Popescu, 1655 ~ 1729)는 두 형제가 분명히 그를 독살했으며, 오스만 제국과 모든 관계를 단절하려는 그의 행동이 너무 위험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현대 학계에서는 그가 독살했는지 여부에 대해 진위가 불분명하다고 본다.
4.15.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26년간의 치세
4.15.1. 자르네슈티 전투와 입지 다지기
셰르반 칸타쿠지노 사후, 콘스탄틴 칸타쿠지노와 미하이 칸타쿠지노가 권력을 잡은 뒤 새 보이보드로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를 세우기로 결의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과 외교 활동을 수행하러 빈으로 가던 콘스탄틴은 이 소식을 접했지만, 빈으로의 여정을 이어가기로 했다. 1688년 12월 10일 빈에 도착한 사절단은 이듬해 1월 30일 레오폴트 1세 앞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서약했다. 그와 함께 사절 임무를 수행했던 게오르게와 미하이가 약속을 보증하기 위해 빈에 인질로 남아있게 됭써다. 그 후 귀국길에 오른 콘스탄틴은 도중에 셰르반 칸타쿠지노의 미망인 마리아와 함께 트란실바니아인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그 사이에 그와 함께 돌아가던 셰르반 블라데스쿠가 단독으로 왈라키아로 돌아갔는데, 콘스탄틴은 나중에 왈라키아에 도착한 후 셰르반을 추방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셰르반 블라데스쿠가 먼저 돌아가서 왈라키아 보이보드 직위를 가로채려 시도했다가 콘스탄틴에게 발각되어 추방당했다고 추정하나 진위는 불분명하다.콘스탄틴은 왈라키아에 도착한 뒤 오스만 제국과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고 했던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으며, 전쟁에 뛰어들려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는 대튀르크 전쟁을 치르면서 왈라키아군의 지원이 필요했던 합스부르르 제국군의 불만을 샀다. 이에 그들은 무력으로 그를 복종시키기로 마음먹었다. 1689년 11월 초 합스부르르 제국군이 왈라키아를 침공해 부쿠레슈티를 비롯한 여러 마을을 점거하자, 콘스탄티은 1688년 1월 공물을 지급하고 합스부르르 제국군 12개 연대가 겨울 기간 동안 왈라키아에 주둔하는 걸 받아들였으며, 말 1,500마리 이상을 합스부르르 제국군에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합스부르르 제국군이 왈라키아에서 약탈을 자행하자, 그는 오스만 제국과 크림 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1690년 1월 크림 칸국에서 파견된 타타르족이 왈라키아에 진입하자, 합스부르르 제국군은 급히 철수했다.
하지만 콘스탄틴은 왈라키아-트란실바니아 국경에 위치한 합스부르르 제국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트란실바니아 공위 주장자 퇴쾨이 임레와 함께 1690년 여름에 공세를 개시했다. 그들은 산길을 이용해 브란 강을 우회한 뒤 합스부르르 제국군을 자르네슈티에서 기습 공격했다. 그 결과 합스부르르 제국군은 궤멸되었고, 합스부르르 제국군 사령관 하이터스하임의 하이슬러 백작 도나트 요한이 생포되었다. 이후 퇴쾨이 임레가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취임했지만, 합스부르르 제국군이 반격을 가해오자 카르파티아 산맥 남쪽으로 후퇴했다. 이후 전선은 다뉴브 강 북쪽에 형성되었고, 왈라키아는 전장이 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콘스탄틴은 합스부르르 제국군이 부쿠레슈티를 강제 점령했을 때 자금을 보낸 몰다비아 공국을 응징하고 싶어했다. 1693년 봄 몰다비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칸테미르가 사망하고 디미트리에 칸테미르가 집권했다. 디미트리에가 셰르반의 미망인 마리아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음모를 꾸미는 기미가 보이자, 그는 자기 딸 마리아를 전 몰다비아 공 게오르게 두카의 아들인 콘스탄틴 두카와 약혼시켰다. 그해 4월, 콘스탄틴 두카는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의 지원에 힘입어 디미트리에를 몰아내고 몰다비아 공에 즉위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두카는 집권 이래 반대파에 대한 잔인한 탄압을 가해 오스만 제국 총독의 분노를 샀고,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는 총독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재정을 털어서 뇌물을 줘야 했다.
1693년 6월, 오스만 제국과 크림 칸국이 왈라키아의 문테니아를 거쳐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콘스탄틴은 두 군대가 그 계획대로 움직였다가는 이들이 지나가면서 왈라키아를 약탈할 거라고 우려해 루시우크로 달려가 원정군 지휘부와 접견했고, 운테니아 대신 텔레아젠 강쪽으로 진군하라고 조언했다. 그 후 오스만 제국군이 베오그라드를 포위한 합스부르르 제국군을 격파햐기 위해 베오그라드로 방향을 돌리면서, 왈라키아는 오스만 제국과 크림 칸국에 의해 약탈당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695년, 오스만 파디샤 무스타파 2세가 헝가리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리포바를 공략했으며, 루고이 인근에서 베테라니를 사살했다. 한편 콘스탄틴은 체르네시에서 다뉴브 강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클라도바 요새를 수리했다.
4.15.2.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 이후
1698년 11월 16일, 합스부르크 제국을 비롯한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의 평화 협약인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되면서, 발칸 반도에 평화가 찾아왔다. 1700년 초, 콘스탄틴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반란을 일으킨 노가이에 맞서 싸우는 크림 칸을 도우라는 지시를 받고 드라가네스티로 이동했다가, 거기서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귀환해도 좋자는 파디샤의 전갈을 받았다. 그 사이, 두미트라슈쿠 코르베아누, 그리고레 발레아누, 라두 흐리제아 포페스쿠 등이 오스만 총독에게 콘스탄틴이 합스부르크 제국과 손잡고 오스만 제국을 배신하려 했다고 고발했다. 하지만 오스만 총독은 이 사실을 콘스탄틴에게 알려줬고, 콘스탄틴은 즉각 자기를 모해하려 했던 보야르들을 투옥했다. 다만 그는 재무부에 보관중이던 67,500 탈러와 자신의 수입에서 82,500 탈러를 챙겨서 300자루에 넣은 뒤, 자기에게 호의를 베푼 오스만 총독에게 이 막대한 자금을 바쳐야 했다.1702년, 콘스탄틴은 브란코베니 수도원에서 코스탄티니예 주재 영국 대사 윌리엄 파제트를 영접했다. 그는 영국 대사로부터 잔인하고 탐욕스럽기로 유명한 무스타파 파샤 탈타반이 다뉴브 공국 방면 대총독으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무스타파를 만족시키기 위해 주민들이 바쳐야 할 세금을 한꺼번에 거둬들였고, 관직을 매매해 추가 금액을 확보했다. 그렇게 연말까지 자금을 모은 뒤 무스타파에게 바쳤다. 그러나 무스타파는 곧 피살면서 그 뇌물은 쓸모가 없어졌다. 1703년, 콘스탄틴에 반대하는 보야르들이 루마니아 출신 오스만 제국 기병대장이자 대총독인 알렉산드루 마브로코르다트에게 사람을 보내 콘스탄틴을 모함했다. 알렉산드루 마브로코르다트는 콘스탄틴에게 사람을 보내 50자루에 돈을 담아서 자기에게 보내면 봐줄 의사가 있다고 전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그해 4월, 쿠치우크 셀린이 이끄는 사절단이 부쿠레슈티에 도착해 콘스탄틴이 직접 에디르네로 와서 충성서약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콘스탄틴은 자기가 독감에 걸렸다는 이유로 출발을 4주간 연기했다.
4주 후 몸이 회복된 그는 5월에 칸타쿠지노 일가를 비롯한 강력한 보야르들, 지역 유지 등 1,500명을 이끌고 에디르네로 이동했다. 이윽고 에디르네에 도착한 그는 오스만 제국 고관으로부터 공물을 280자루에서 520자루로 늘려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와 보야르들은 이에 분개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콘스탄틴은 고관이 보이보드와 보야르들에게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긴 망토인 카프탄을 입히는 의식을 통해 보이보드로서의 주권을 재확인받았다. 그러나 그가 떠날 때 가져온 뇌물이 오스만 제국 관리들을 만족시키지 못하자, 보야르 토마 부쿨비사를 시켜 더 많은 돈을 가져와서 파디샤 본인과 그의 어머니에게 선물로 주도록 했다.
한편, 그는 자기를 실망시킨 몰다비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두카를 몰아내기 위해 오스만 제국 관리들을 설득했다. 오스만 관리들이 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겸임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그는 자기로부터 더 많은 돈을 뜯어내려는 복심이 숨겨져 있음을 눈치채고 거절했다. 그 대신 미하이 라코비차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콘스탄틴이 에디르네로 향하는 여정, 파디샤를 접견한 모습, 부쿠레슈티로 돌아온 모습은 부쿠레슈티 중심가에서 15km 떨어진 별궁인 모고쇼아이아 궁전의 프레스코에 장식되었다고 전해지나 현존하지 않는다. 1705년 초, 콘스탄틴은 알렉산드루 마브로코르다트와 도시테 총대주교의 중재에 따라 안티오 칸테미르와 다시는 서로 다투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그 후 미하이 라코비차가 폐위되었고, 안티오 칸테미르가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707년 6월, 미하이 칸타쿠지노가 그랜드백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외교 임무를 수행하던 대사 콘스탄틴 칸타쿠지노가 코스탄티니예에서 소환되었다. 그가 자기 외삼촌 2명을 경질한 건 그해 4월 프란시스 라코치를 러시아 주재 대사로 삼으려 했는데 두 사람이 이를 무시하고 데이비드 코베아를 대사로 삼았고, 이후 코베아는 칸타쿠지노 인사들에게만 편지를 쓰는 모습을 보인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루스 차르국이 개입해 자기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 미하이 칸타쿠지노를 복직시키라고 요구하자, 콘스탄틴은 두 삼촌은 여전히 국정을 수행하고 있다며 듣지 않았다. 그해 7월, 표트르 1세가 콘스탄틴에게 서신을 보내 미하이 칸타쿠지노를 복권시켜달라고 청했지만, 콘스탄틴은 정중하게 거절했다.이후 콘스탄틴과 그의 두 삼촌간의 관계는 매우 나빠졌다. 미하이는 표트르 1세에게 망명을 요청했고, 콘스탄틴 칸타쿠지노는 영지로 물러났다.
한편, 콘스탄틴은 1707년 초 안티오 칸테미르와 함께 오스만 제국 파디샤로부터 벤더 요새의 수리 및 요새화에 참여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들은 목수 200명, 석공, 100명, 인부 2,000명, 마차 350대를 제공해야 했다. 이듬해 봄에도 요청이 반복되어 살라호리 1,500명, 전차병 220명, 도끼병 60명을 벤더에 파견해야 했다. 그런데 이들을 보낸 지 며칠 후, 살라호리 500명, 마차 운전사 100명, 목수 40명을 추가로 보내라는 명령이 도착했다. 여기에 그해 여름에는 오스만 제국 궁정으로부터 공물 142자루를 미리 보내라는 요구가 전달되었다. 그는 어떻게든 공물을 거둬들인 끝에 180자루를 거둬들여 오스만 제국 궁정에 바쳤다. 오스만 제국 측은 목표를 추가 달성한 것에 흡족해 하며 감사의 표시로 다이아몬드가 박힌 옷걸이를 하사했다. 그러나 1709년 초, 오스만 제국은 그만큼의 공물을 또 다시 요구했고, 콘스탄틴은 이를 충당하기 위해 자신의 영지에서 나는 수입과 유력한 보야르들, 길드, 수도사들로부터 자금을 뜯어내야 했다.
이렇듯 오스만 제국의 수탈이 심하자, 콘스탄틴은 자연히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했다. 때마침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가 스웨덴-우크라이나 카자크를 상대로 폴타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자, 그는 표트르 1세와 손잡기로 마음먹었다. 1709년, 그는 표트르 1세와 비밀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왈라키아 측은 루스 차르국이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일 때 30,000명을 지원해주며, 러시아는 왈라키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걸 보장하며, 콘스탄틴은 평생 통치를 보장받았다.
4.15.3. 왈라키아 문화 증진
콘스탄틴은 문화 증진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건축, 벽화 및 조각에서 왈라키아 전통, 네오비잔틴 스타일 및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조합한 '브랑코벤 스타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예술이 왈라키아 전역에 널리 퍼지도록 장려했다. 브랑코벤 스타일은 외부 계단, 전망대 또는 로지아의 건축적 볼륨을 강조한다. 멀리언 아치를 갖춘 전통적인 장식 시스템이 여전히 적용되지만, 프레임, 기둥 및 난간의 풍부한 장식이 추가로 들어갔다. 또한 개방형 현관이 건물의 대표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둥근 천장은 일반적으로 반원통형이나 반구형 돔에서 이뤄졌다. 장식은 돌로 조각하거나 치장벽토 부조 형태로 적용되었다. 돌 장식에는 꽃 무늬가 주로 쓰였고, 치장 벽토에서는 동양 장식품이 자주 쓰였다.그의 치세에 지어진 대표적인 궁전으로 포트로그 여름 별궁, 부쿠레슈티의 모고쇼아이아 궁전과 메트로폴리탄 궁전, 수 삼바타 드 수스의 브랑코비아누 성을 들 수 있으며, 성당으로는 부쿠레슈티의 총대주교청 대성당, 성 게오르게 교회, 름니쿠 서라트의 성모 수도원, 보르데슈티의 가정 성당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그의 치세에 그려진 그림들은 기독교와 왈라키아 역사를 주제로 삼았으며, 서양화, 특히 이탈리아-크레타 학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부쿠레슈티 성모 교회의 프레스코, 후레지 수도원의 벽화, 필리페슈티 데 파두레의 칸타쿠지노 가문 봉헌화를 들 수 있으며, 대표적인 화가로는 왈라키아의 성화 화가 파르부 무투와 왈라키아 태생 그리스인 콘스탄티노스를 들 수 있다.
콘스탄틴은 1694년 스판둘 사바 수도원에 고대 그리스어를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고등학교인 부쿠레슈티 왕립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여기에 일부 수도원 구내에는 슬라브어와 루마니아를 가르치는 학교들이 운영되었다. 부쿠레슈티에 있는 스판툴 게오르게 베키 수도원과 콜차 수도원 내 학교들은 왕실 장관, 사제 및 교사를 위한 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일련의 루마니아 학교가 해당 국가의 도시, 수도원, 심지어 시골에 신설되었으며, 몇몇 수도원에서는 도서관이 생겨났다. 또한 그의 치세에 여러 인쇄소가 새롭게 설립되어 루마니아어, 그리스어, 슬라브어, 아랍어, 튀르크어, 조지아어로 인쇄된 종교 서적들이 대거 출판되었다.
4.15.4.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최후
1710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1711년 5월 러시아군이 몰다비아에 입성하자 몰다비아 보이보드 디미트리에 칸테미르는 표트르 1세 편으로 돌아서면서 러시아 측에 17,000명의 병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오스만 제국군이 왈라키아 인근 티기나에 집결한 걸 보고, 사전에 맺은 약속대로 러시아군과 합세하려 했다간 오스만 제국군이 곧바로 자국으로 쳐들어와 파괴를 자행할 거라 여기고 망설였다. 그러던 중 오스만 제국 사절로부터 러시아군에 맞서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그는 1711년 5월 18일 부쿠레슈티에서 출발해 게르기차에 이르렀다. 이때 우르라티 강 어귀인 알베슈티에서 기다리라는 오스만 제국의 지령이 전달되었다.그 후 다뉴브 대총독 흐리산트 노타라는 콘스탄틴에게 표트르 1세와 자신 사이에서 중재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는 이 임무를 수행하려 했지만, 표트르 1세는 자기와 합류하지 않는 대신 중재하려는 것에 분개해 그가 약속을 위반했다고 간주했고, 왈라키아 장성 토마 칸타쿠지노가 일부 군대를 이끌고 진영을 떠나 표트르 1세에 가담해 버렸다. 결국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뒤이은 전투에서 표트르 1세가 스타닐레슈티에서 패배한 뒤 오스만 제국과 평화협상을 벌인 끝에 7월 21일 휴전을 체결하고 본국으로 물러났다. 콘스탄틴은 즉각 러시아군에 가담했다가 러시아로 도망친 토마 칸타쿠지노의 그의 동료들의 재산을 몰수했고,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다시 서약하고 러시아로부터 받은 선물을 넘기고 공물을 바치는 등, 입지를 다지려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오스만 제국이 자신을 해치려 들 것을 우려해, 트란실바니아에서 자신을 위한 피난처를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궁정은 콘스탄틴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칸타쿠지노 가문으로부터 그가 러시아와 비밀 협약을 맺은 사실을 상세히 전해들은 뒤, 러시아와 손잡고 독립하려 했던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로 했다. 1714년 3월, 오스만 파디샤 아흐메트 3세는 그를 폐위하고 코스탄티니예로 소환했다. 그는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체포된 뒤 예디쿨레 요새에 투옥되어 입고 있던 모든 옷이 벗겨졌으며, 슈테판 칸타쿠지노가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이후 가혹한 고문을 받은 끝에 1714년 8월 15일 네 아들 및 그의 충실한 친구이자 대재무관인 에나체 바카레스쿠와 함께 참수되었다. 그는 참수되기 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다면 사형을 모면할 수 있다는 권유를 받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그와 네 아들의 수급은 창에 꿰어져 전시되었고, 유해는 보스보퍼스 해협에 던져졌다가 기독교인 어부들이 시신을 건져서 섬에 묻었다. 1720년 미망인 마리카가 콘스탄틴의 유해를 부쿠레슈티의 성 게오르게 수도원에 옮겼다.
콘스탄틴은 사후에 일련의 무나미나 민속 발라드에서 기독교를 끝까지 지키다가 순교한 영웅으로 추앙되었으며, 루마니아의 공식 화폐에도 등재되었다. 1992년 함께 처형된 네 아들과 함께 루마니아 정교회 성인이자 순교자로 시성되었다. 축일은 8월 16일이다. 2018년 3월 7일 러시아 정교회도 그들을 성인으로 인정하고, 러시아 정교회의 달력에 추가했다. 2020년 8월 16일, 루마니아 당국은 처음으로 전 세계의 기독교인 박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4.16. 파나리오테스 체제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뒤, 콘스탄틴을 고발했던 슈테판 칸타쿠지노가 오스만 제국의 선택을 받고 보이보드에 집권했다. 이 무렵, 오스만 제국은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합스부르크 제국군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슈테판은 합스부르크 제국 편에 서기로 마음먹고 오스만 제국의 전쟁 준비 상태 등 여러 정보를 트란실바니아에 주둔한 합스부르크 제국군 사령관 에티엔 드 스테인빌을 통해 외젠에게 전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첩자들을 통해 슈테판의 행동을 고스란히 밝혀냈다. 1716년 1월 6일, 카푸쿠[15]의 성토를 받고 부쿠레슈티에서 체포된 뒤 아버지,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코스탄티니예로 끌려갔다. 그 후 1716년 6월 7일 코스탄티니예에서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두 사람의 시체는 바다에 던져졌고, 머리는 면화로 채워진 뒤 에디르네로 전해졌다. 여기에 왈라키아 대장 미하이 칸타쿠지노와 라두 두데스쿠도 긴급 체포된 뒤 에디르네로 끌려가 교살되었다.그 후 오스만 제국은 왈라키아 보야르들이 보이보드를 선출하고 자기들이 승인하는 구조로는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이후부터는 보야르들의 선출권을 박탈하고 파나리오테스 출신 인사를 임의로 앉히기로 했다. 이렇게 도입된 파나리오테스 체제의 첫번째 보이보드인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동조한 여러 보야르를 처형하고 왈라키아 대주교인 이베리아인 안팀을 오스만 제국으로 압송했다. 그러나 1716년 11월 25일 부쿠레슈티가 오스트리아군에 함락된 뒤 그들에게 체포되어 빈으로 시비우로 끌려갔고, 오스만 제국은 그를 대신해 동생인 이오안 마브로코르다트를 새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세웠다. 이오안은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이 체결된 후 니콜라에가 풀려난 뒤에도 왈라키아 보이보드 직위를 유지했지만, 1719년 3월 6일에 사망했다.
그 후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복위한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는 오스만 제국 궁정의 호의를 사 공물 액수를 줄이고 세금을 감면해 백성들의 호응을 얻는 한편,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왈라키아에 그리스 풍습, 그리스어, 그리스 의상을 도입했고, 동로마 제국 모델에 따라 궁정을 새로 세웠다. 여기에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아 도서관을 여럿 세웠고, 바카레슈티 수도원과 스타브로폴레오스 교회를 세웠다. 한편, 그는 그리스 소설인 필로테우 파테르가(Philotheou Parerga, 필로테오스의 여가)를 집필했다. 이 소설은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의 스타일을 본받았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프랑스 도덕주의자들의 학설을 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다국어에 능통해 유대인 출신으로 여러 유럽 통치자들의 외교 고문을 역임한 다니엘 드 폰세카(Daniel de Fonseca, 1672 ~ 1740), 트란실바니아의 고전학자 스테판 베르글러(Stephan Bergler, 1680 ~ 1746) 등 여러 학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웨이크 등 서방 종교인들과도 서신을 교환했다.
1730년 9월 3일,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가 역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가 9월 15일에 보야르들 끼리의 선거를 통해 보이보드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1일, 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집권하는 걸 용인했던 오스만 파디샤 아흐메트 3세가 예니체리의 쿠데타로 폐위되었다. 그 후 예니체리가 아흐메트 3세와 관계가 깊었던 마브로코르다트 가문 인사들을 정계에서 배제하기로 하면서, 그는 10월 17일에 폐위되었다. 이후 미하이 라코비차가 예니쳬리의 선택을 받고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731년 예니체리에 의해 파디샤에 옹립된 마흐무트 1세가 예니체리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입지가 허물어졌고, 1731년 12월 25일 폐위되었다.
미하이 라코비차가 폐위된 뒤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복위한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는 1733년 4월 16일,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 그리고레 2세 기카와 서로 자리를 바꾸면서 몰다비아 보이보드 되었다. 하지만 그는 왈라키아로 돌아가길 희망했고, 코스탄티니예에 로비 활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그 결과 1735년 11월 27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할 수 있었다.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3번째로 옹립된 뒤,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는 계몽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본격적으로 단행했다. 일련의 간접세를 폐지하고 연간 10 탈러의 일반세를 4년 '분기'로 납부하는 정책을 도입했으며, 농민들이 수수료를 내면 한 영지에서 다른 영지로 이동할 권리를 가지도록 했으며, 농노들이 보야르에게 돈을 지불하고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보야르들이 이에 대한 불만을 갖지 않도록 농민들이 12일간 그들을 위해 노역해야 하며, '대 보야르'로 지명된 60개 가문은 국가 세금을 면제받도록 했다.
콘스탄틴은 여기에 더해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이스프라프니치(Ispravnic)를 각 지역에 파견해 행정을 돌보고 판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해, 보야르들이 임의로 지역을 다스리던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보다 전문적으로 급여를 받는 이스프라프니치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행정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또한 보이보드들의 전통적인 개인 금고를 왈라키아 행정부의 금고와 통합했으며, 공직을 맡지 않은 가족 구성원에게 보야르 지위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전에 추진했던 문화 진흥 정책을 이어받아 루마니아어 및 문학을 전문으로 다루는 학교를 관리했으며, 루마니아어로 교회 서적을 인쇄했다.
1741년 9월 16일, 왈라키아에서 선정을 베풀던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는 오스만 궁정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옮겨졌고, 미하이 라코비차가 10년 만에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는 1744년까지 역임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공물을 바치고 개인 재산을 비축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신민들로부터 뜯어내는 데 집착해 백성의 원망을 사다가 1744년 6월 8일에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 후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재차 선임되어 1748년 4월까지 역임하다가 1748년 4월 몰다비아 보이보드 그리고레 2세 기카와 자리를 바꿨다. 그리고레 2세 기카는 장기간 로비 활동을 벌이면서 막대한 빚에 허덕여야 했고, 이를 메꾸기 위해 시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그러면서도 여러 수도원을 수리했고, 부쿠레슈티에 프루모아사 수도원과 판텔리몬 수도원을 건설했으며, 병원도 세웠다.
1752년 9월 3일, 그리고레 2세 기카가 사망했고, 아들 마테이 기카가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는 즉위 후 첫 3개월간 스톨니치 30명, 파하르니치 20명, 세르다르 50명을 대거 선임했다. 이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짊어진 막대한 빚을 어떻게든 마련하려는 그의 의중에 따라 매관매직을 통해 관직을 얻어낸 뒤 농민들에게 가혹한 징수를 가해 본전을 뽑으려 했다. 이로 인해 민란이 일어날 조짐이 포착되자, 오스만 제국 궁정은 1753년 7월 3일에 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전임시켰고, 몰다비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라코비차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부임했다. 콘스탄틴 라코비차는 왈라키아의 강력한 보야르들을 키프로스로 추방하는 등 권력을 강화하려 애썼지만, 보야르들의 반발이 심해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자 오스만 제국 궁정에 몰다비아 공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다가 1756년 2월 19일 몰다비아 공을 맡던 마테이 기카가 사망하자, 오스만 제국 궁정은 그해 3월 11일에 그를 몰다비아 공으로 복위하기로 했다.
콘스탄틴 라코비차의 뒤를 이어 5번째로 왈라키아 보이보드가 된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는 1758년 8월 14일까지 왈라키아를 다스리다가 스카를라트 기카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스카를라트 기카가 집권할 무렵, 왈라키아의 다뉴브 강 서쪽 지역에 튀르크인 상인들이 대거 이주한 뒤 현지 주민들에게 무거운 빚을 지우고 마을 전체를 그들의 손에 쥐고 억압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다. 이에 스카를라트는 오스만 제국 궁정에 사절을 보내 이를 시정하지 않으면 공물을 정기적으로 마련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오스만 제국 측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뉴브 강 서쪽에 불법적으로 이주한 튀르크인들을 대거 퇴거시켰다. 다만 자신이 정당한 방식으로 이주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이는 예외적으로 그곳에 거주할 수 있게 했다. 이후 튀르크 상인들은 마을이 아닌 도시에만 머물러야 했으며, 일종의 거주 비자인 고정 기간 동안만 머물 수 있었다. 또한 다뉴브 강둑 방향의 영지를 소유한 귀족과 수도원은 무벨라-에펜디가 봉인한 문서를 통해 이를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렇듯 다뉴브 강 서쪽의 왈라키아인들를 튀르크 상인들의 횡포로부터 지켜내는 데 공헌했지만, 1761년 6월 5일에 정적들의 모함을 받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폐위되어 한동안 림노스섬으로 추방되었다가 코스탄티니예로 돌아갔다. 그 후 6번째로 왈라키아 보이보드가 된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의 치세에 올테니아의 반(Ban)이 크라이오바에서 부쿠레슈티로 옮겨졌고, 크라이오바는 카이마캄(Kaymakam: 군주를 대신하여 행정 임무를 수행하는 오스만 제국 고위 관료)이 군림했다.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가 1763년 3월에 물러난 뒤, 콘스탄틴 라코비차가 재차 집권했다. 그러나 1764년 1월 28일 부쿠레슈티에서 화려한 연회를 연 직후 급사했다.
콘스탄틴 라코비차 사후, 동생인 슈테판 라코비차가 그리스인 고위 관료 이오르다케 스타브라체(Iordache Stavrache)의 지원 덕분에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그는 왈라키아 관습법과 동로마 제국 법률을 결합한 성문법을 만드는 작업을 그리스 법학자인 미하일 포티노에게 맡겼다. 슈테판은 자기를 옹립한 이오르다케 스타브라체의 권고에 따라 포티노가 완성한 법률을 즉시 시행하려 했다. 그러나 보야르들이 강력하게 저항하자, 그는 가장 강하게 저항하는 18명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그 중 2명을 체포해 참수형에 처했다. 이에 반발한 부쿠레슈티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유혈 진압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궁정은 왈라키아가 폭동에 휘말리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그를 폐위하기로 하고, 스카를라트 기카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하기로 했다.
스카를라트 기카는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한 시기, 오스만 파디샤의 직할지이며 오스만 관리가 관리하는, 일명 "재상의 토지(Vizier's Chamber)"로 일컬어지는 지역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브라일라 지역 가장자리에 있는 이 넓은 평지는 오스만군이 영구적으로 주둔해 있었는데, 이웃 지역에서 보야르들의 억압과 무거운 과세에 시달리던 많은 농민들이 이곳으로 피신했다. 그는 이 지역을 총액 25,000 탈러를 분기별로 분할 납부하는 대가로 인수했다.
1766년 12월 2일, 스카를라트 기카가 사망했고 아들 알렉산드루 스카를라트 기카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그러나 1768년 10월 제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막대한 과세에 시달렸고 튀르크족에 대한 강한 반감을 품은 왈라키아인들이 대거 러시아군에 입대하자, 오스만 제국 궁정은 그가 이들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추방하고 전임 몰다비아 공이자 그의 사촌인 그리고레 3세 기카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그러나 그리고레 3세 기카는 1769년 11월 5일에 러시아군에 체포되어 러시아 제국으로 끌려갔다.
이후 왈라키아는 러시아군의 지배를 일시적으로 받다가, 1770년 6월 러시아군이 부쿠레슈티에서 철수하자 마놀레 기아니 루세트가 보이보드를 칭했다. 러시아군이 1770년 11월 24일 콜렌티나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하자, 그는 올테니아로 돌아갔지만 얼마 안가 러시아군에게 축출되었다. 이후 왈라키아로 복귀하려 했지만 러시아군에게 2차례 저지되었다. 하지만 1771년 5월 다뉴브 강을 성공적으로 도하했고, 6월까지 크라이오바와 올테니아를 탈환했다. 이후 크라이오바에서 통치를 행사했지만, 1771년 10월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왈라키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1774년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군이 왈라키아에서 철수한 뒤, 알렉산드루 입실란티가 그해 11월 3일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왈라키아 보야르들은 슈테판 프라스코베아누를 새 보이보드로 옹립하길 원했지만, 오스만 궁정은 이를 묵살하고 알렉산드루를 세웠다고 한다. 알렉산드루는 토지 귀족들로 구성된 새로운 보야르 의회를 구성했으며, 수도원의 여러 세금을 학교 지원을 위한 세금을 제외하고 모두 면제했다. 또한 <프라빌니시아스카 콘디카>(Pravilniceasca condică)로 명명된 법안을 1780년에 반포해, 왈라키아의 재정적, 행정적, 사법적, 정치적 결함을 수정하려 노력했으며, 각 왈라키아 주에 민사 법원을 세웠다. 이 법률에서는 공공직에 급여를 부과했는데, 이는 세금이 부과되는 사회 계층의 재정적 부담을 줄이고 보다 전문적인 행정 구조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세르비아인과 불가리아인, 그리고 나머지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2개 중대를 포함한 60개 중대로 구성된 군대를 창설했다.
1782년 2월 니콜라에 카라제아가 새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부임했다. 그는 통치자로서 공공 위생, 굴뚝 청소, 커피숍, 호스텔 및 거리 통제에 대한 법적 조항을 반포했고, 세금 정책에 대한 반란을 막기 위해 허가 없이 무기와 군복을 휴대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외국인의 입국을 통제하기 위해 여권을 도입했다. 1783년, 그는 10 피아스트레(Piastre)라는 새로운 세금을 도입했다. 이 세금은 나중에 6피아스트레로 줄어들었지만, 왈라키아 보야르들과 주민들 사이에 큰 불만을 일으켜 폭동의 조짐이 감지되었다. 이에 오스만 궁정은 7월 17일에 그를 폐위하고 미하이 수추를 새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했다.
미하이 수추는 학교와 병원 설립을 주도하는 등 왈라키아를 나름대로 잘 다스렸다. 그러나 제8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임박하자, 오스만 제국 궁정은 1786년 4월 6일 오스만 함대 사령관 가지 하산 파샤의 추천에 따라 군사적 역량을 갖췄다는 평을 받은 니콜라에 마브로게니를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이때 체레비스 페트라키스가 궁정의 결정을 바꾸기 위해 4,000 발란디아를 파디샤 압뒬하미트 1세에게 바치겠다고 제안했지만, 하산의 꼬드김에 넘어간 파디샤가 오히려 그를 체포해 감옥에 가둬서 고문을 가하게 했다. 얼마 후, 니콜라에가 파디샤를 알현하러 여정을 떠났을 때, 근위대 장병들이 고문으로 인해 처참한 상태에 있떤 죄수 체레비스를 데리고 그 앞으로 데려와서 말 발 앞에 엎드리게 했다. 체레비스는 자비를 호소했지만 니콜라에는 묵살했고, 뒤따라오던 하산은 사형 집행인을 불러 그를 참수했다.
니콜라에는 부쿠레슈티 외곽의 샘에서 점토관을 이용해 식수를 가져오는 사업을 성사시킴으로써, 그때까지 디보비차 강에서 식수를 구하던 주민들이 깨끗한 샘물을 마실 수 있게 해줬다. 또한 도시 외곽에 여름 별장을 지었고, 림니코스 주교 필라레토스를 아기오스 사바스 아카데미(현재 부쿠레슈티 고등학교)의 교육감으로 선임했고, 학교 인쇄기를 확장하도록 했다. 이후 니콜라에는 제8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왈라키아군을 이끌고 참전했으며, 1788년 4월 몰다비아 공 알렉산드루 입실란티가 러시아 제국 편에 선 오스트리아군에게 생포되자 몰다비아군도 이끌었다. 그는 1년간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는 등 선전했지만, 1790년 7월 26일 칼라파티 전투에서 오스만군이 오스트리아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자 왈라키아에서 도주해 불가리아 해안의 비알라로 피신했다. 그러나 오스만 궁정은 그가 오스트리아군에 귀순하려 한다고 의심해 처단하기로 결의했다.
니콜라에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하산이 궁정이 니콜라에의 죽음을 원한다는 걸 알게 되자 그의 군대에 합류한다는 구실로 파견대를 파견했다. 니콜라에는 은인이 보낸 파견대를 의심없이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1790년 9월 30일에 그를 기습해 목을 베었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군이 니콜라에의 군대를 포위하면서 저항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그의 병사들은 겁에 질려 니콜라에를 살해했다고 한다. 그의 수급은 코스탄티니예로 옮겨져 대중에 공개되었고, 유골은 나중에 친척들에게 전달되었다.
니콜라에 마브로게니가 처형된 뒤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한 미하이 수추는 1793년 1월 10일 몰다비아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모루지와 교체되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부임했다. 알렉산드루 모루지는 재산을 불리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했고, 엄청난 양의 밀을 싸게 사서 굶주린 주민들에게 거의 10배 가격에 판매했다. 그러다가 1796년 8월 오스만 궁정이 그를 물러나게 한 뒤 알렉산드루 입실란티를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알렉산드루 입실란티는 사법 개혁을 단행하는 등 왈라키아의 발전과 백성의 삶 개선에 힘을 기울였던 예전과는 달리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는 모습을 보이다 1797년 11월 콘스탄틴 한제를리로 교체되었다. 일각에서는 덜 알려졌던 한제를리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옹립될 수있었던 것은 그와 함께 오스만 함대에 근무했던 동료이자 카푸단 파샤를 역임한 후세인 퀴퀵이 강력히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1798년 1월 4일 부쿠레슈티에 도착한 뒤, 콘스탄틴 한제를리는 '칼리아 셰르반 보다(Calea Şerban Vodă)' 문을 통해 입성하는 관례를 깨고 모고소아이아 다리를 통해 입성했다. 이에 주민들은 이를 나쁜 징조이자 현명하지 못한 통치의 신호로 간주했다고 한다. 그는 공식 취임식을 위해 바카레슈티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성 사바 수도원으로 이동하기 전에 한 달 넘게 그곳에 머물렀고, 성 사바 수도원에서 쿠르테아 누아 궁전이 완전히 복원될 때까지 머물렀다.
콘스탄틴 한제를리는 대규모 세금 인상을 도입했고, 과부 세금을 포함한 새로운 세금을 고안했다. 이는 루멜리아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반기를 든 비딘 파샤 오스만 파즈반토글루를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후세인 퀴퀵에게 군자금을 보내주면서도 자기 수입도 늘리기 위한 조치였다. 급기야 전임 보이보드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가 영구적으로 폐지했던 소에 관한 세금이 다시 도입되자, 루마니아 정교회의 강력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보야르 역시 법령 서명을 거부했다. 이에 콘스탄틴은 보야르 4명에게 뇌물을 줘서 서명하도록 했고, 반란을 막기 위해 모든 보야르에게 매겨진 세금을 면제했다.
1798년 겨울,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가축을 숨겨가며 세금을 내지 않으려 하자, 콘스탄틴은 부하들을 왈라키아 각지로 파견해 주민들을 협박하고 고문해 세금을 받아내게 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거나 정신 이상에 걸렸고, 많은 마을이 약탈당했다. 후대의 루마니아 연대기 작가들은 1798년 겨울을 "한제를리의 겨울"로 일컬으며 이때의 수탈이 왈라키아 농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안겼다고 밝혔다.
한편, 후세인 퀴퀵은 오스만 파즈반토글루의 반란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했다. 이에 후세인은 패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콘스탄틴이 자기한테 충분한 자금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1799년 2월 11일, 오스만 파디샤 셀림 3세는 콘스탄틴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카푸쿠( kapucu, 오스만 제국 궁정에서 속국 군주들에게 보내는 사절)가 사형집행인과 함께 부쿠레슈티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평범한 임무를 가지고 찾아온 척하면서 궁정에 도착한 뒤, 자기들을 맞이하러 온 콘스탄틴에게 파디샤의 칙령을 보여줬다. 그가 그걸 다 읽고 경비병을 급히 부르려 하자, 카푸쿠는 즉시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졸랐고, 다른 한 명이 가슴에 두 번 총을 쏴서 완전히 제압했다. 경비병들이 총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오자, 카푸쿠는 파디샤의 칙령을 보여줘서 더 이상 개입하지 못하게 했다. 카푸쿠는 그의 수급을 벤 뒤 모두에게 이를 두루 보여줬다. 이후 콘스탄틴의 수급은 코스탄티니예의 세라이 문에 박혔고, 목이 잘린 시신은 부쿠레슈티의 성 스피리돈 노우 교회에 안장되었다.
콘스탄틴 한제를리가 처형된 뒤, 알렉산드루 모루지가 1799년 3월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다시 즉위했다. 그러나 비딘의 파샤이자 예니체리 오스만 파즈 반톨루가 이끄는 튀르크군이 타르구 지우와 크라이오바를 약탈하고 불태우는 데도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한 나머지 3차례나 사임을 요청했다가 1801년 10월 마침내 허락을 받아냈다. 이후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부임한 미하이 수추 역시 오스만 파즈반토글루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고, 1802년 5월 15일에 반란군이 부쿠레슈티에 접근하는 걸 허용했다. 부쿠레슈티의 대다수 주민은 도시를 떠나 브라쇼브로 이주했다.
1802년 5월 18일, 부루레슈티 수비대의 튀르크와 알바니아 용병들이 급료 지불을 요구하자, 미하이는 디틀 후에 지불하겠다고 약속한 후 농민으로 변장하고 도시 외곽에 있는 기카 가문의 영지인 콜렌티나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던 보야르들이 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다비아로 피신한 걸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그는 한동안 보야르들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다가 트란실바니아로 망명했다. 이리하여 보수를 받지 못한 용병대는 분노해 부쿠레슈티 궁전을 약탈하고 도시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했지만, 오스만군이 현장에 도착해 이를 막았다. 오스만 당국은 미하이 수추가 트란실바니아로 피신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자 분노해 보이보드 직위에서 폐위했다.
1802년 9월 1일, 러시아 제국의 압력에 직면한 오스만 당국은 친러시아 인사인 콘스탄틴 입실란티를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세웠으며 그의 임기를 7년으로 고정했다. 그는 러시아로 망명한 인사들이 왈라키아로 돌아오도록 허용하고 친 러시아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왈라키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대화재가 발생했고, 뒤이어 홍수가 일어났으며, 비딘의 파샤 오스만 파즈반토글루가 이끄는 튀르크인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인한 피해 가중, 러시아 제국 사절단이 지나갈 때 막대한 선물을 제공하느라 국고를 탕지하는 등 여러 악재가 연이어 벌어졌다. 그러다가 1806년 제9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편에 섰다가 오스만 제국군이 왈라키아로 쳐들어오자 몰다비아로 이동해 1806년 10월부터 11월까지 러시아군의 비호하에 몰다비아를 이끌었다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망명했다. 오스만 파디샤 셀림 3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아버지 알렉산드루 입실란티를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콘스탄틴 입실란티는 1806년 12월 27일 러시아군의 비호하에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귀해 1807년 5월 31일까지 역임했으며, 왈라키아에서 러시아군과 오스만 제국군간의 전쟁이 격렬하자 잠시 피신했다가 8월 8일에 재차 돌아와서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귀했지만 8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완전히 망명했다. 이후 왈라키아는 1812년까지 러시아군의 지배를 받다가 러시아군이 철수한 뒤 이오안 카라제아가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코스탄티니예 주재 프랑스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왈라키아 보이보드가 되기 위해 8,000자루의 황금을 오스만 궁정에 지불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부쿠레슈티에서 보낸 첫날 밤, 델룰 스피리에 있던 왕족의 거주지가 화재에 휘말려 소실되었다. 얼마 후 수행원 한 명이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다. 그 후 왈라키아는 1813년부터 1814년까지 이어진 대역병에 휘말렸다. 일명 '카라게아 역병'으로 일컬어진 이 역병에서, 7만에 달하는 왈라키아인이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는데, 그중 4만 명은 부쿠레슈티 시민이었다. 그는 역병이 창궐하는 동안 코트로체니 수도원에 피신했다.
역병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814년 3월 26일, 플로이에슈티 시민들이 그의 사촌인 코스타슈 카라제아의 도시 소유 주장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행정관들은 강하게 진압하길 꺼렸다. 그가 사촌의 주장을 인정하는 칙령을 반포하자, 도시 상인들은 4월 14일에 모든 상점을 폐쇄해 도시의 모든 활동을 마비했다. 그는 이에 강력하게 개입해 반란을 일으킨 모든 지도자를 재판없이 투옥하라고 명령했지만, 나중에 주동자 중 한 명이 러시아 국적을 지닌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면하기로 했다. 1816년 6월, 왈라키아 디반(Divan, 국가 평의회)에 속했던 2명의 오스트리아인을 포함한 음모자들이 그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모조리 처형되었다. 여기에 콘스탄틴 필리페스쿠, 콘스탄틴 발라세아누, 그리고레 기카 등 여러 보야르가 반란에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어 자기들 영지에 있는 저택으로 추방되었다.
1818년, 그는 일명 '카라제아 법령'으로 알려진 새로운 법규르 반포했다. 이 법령은 6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처음 4개 부분은 민법 및 상법 조항을 포함했고, 다섯 번째 부분은 형법을 포함했으며, 여섯 번째 부분은 사법 절차 규범을 포함했다. 이때 제1부 '얼굴에 대하여'에서는 인간들을 성별, 출생, 능력에 따라 분류하고 이에 맞는 직책에 봉사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명시하면서, "여성은 모든 정당, 지배권 및 공직에서 제거된다"고 명시했다. 또한 제3부 '흥정에 대하여'는 계약을 체결하는 데 필요한 법적 조건을 제시했다.
이오안은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역임하는 동안 농민과 장인 길드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조계 광산과 세관에서 4,762개의 귀족 칭호를 판매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그의 수입은 약 150만 레이에서 370만 레이로 증가했다. 그러나 오스만 궁정은 그가 공물을 잘 납부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품었고, 러시아 외교관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한다고 의심했다. 여기에 알렉산드루 수추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하기 위해 그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벌였다. 얼마 후, 그는 오스만 궁정이 곧 자신을 소환하거나 처형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키시너우에 머물던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와 대신들에게 사절단을 보내 왈라키아를 침공해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의 기나긴 전쟁을 치르느라 지칠 대로 지쳤던 러시아 제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18년 9월 28일, 이오안은 디반을 소집한 뒤 자기가 부재한 동안 섭정 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요청했다. 다음날 저녁 올테니아의 반(Ban) 라두 골레스쿠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부쿠레슈티 외곽에서 가족을 데리고 여유로운 마차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연출했다가, 아르나우트 경비대 300명과 함께 트란실바니아 도시인 크론슈타트로 망명했다. 그 후 그리고레 브랑코비아누가 카이마캄(Caimacam: 임시 통치자)을 맡아 11월 17일까지 왈라키아를 임시로 다스리다가, 알렉산드루 수추가 새 보이보드로 부임했다. 알렉산드루 수추는 나중에 쫓겨나기 전에 부를 축적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짰다. 1820년, 오스만 제국은 속주의 군주를 선출하는 기준을 변경해, 도나우 공국의 보이보드로 선출될 수 있는 파나리오테스 가문의 수를 4개(수추 가문 포함)로 제한했다. 그 대신, 왈라키아 공국 예산의 17%를 군주 제공 대상에서 제외된 다른 50개 가문을 지원하기로 했다.
4.17.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봉기
1821년 1월 31일, 알렉산드루 수추가 부쿠레슈티에서 급사했다. 일설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그리스인의 독립을 꾀한 필리키 에테리아(Φιλική Εταιρεια: 친구 협회)가 왈라키아 공국에서도 반란을 꾀하면서, 이에 방해되는 그를 독살했다고 한다. 그 후 그리고레 브랑코비아누가 카이마캄을 다시 맡고 정부 위원회를 구성했다. 오스만 당국은 스카를라트 칼리마치를 새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했지만, 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고,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를 새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했다.당시 올테니아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타도하고 왈라키아의 독립을 꾀하던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는 판두르 군단 장교였던 드미트리오스 마케돈스키를 부관으로 삼았으며, 파데슈 선언문에 서명하고 왈라키아 전역에 배포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보야르와 수도원의 토지를 농민에게 분할하고, 보야르들의 특권을 폐지하며, 오스만 제국의 압제로부터 독립하여 정의와 자유를 실현하자고 호소했다.
왈라키아 국민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어떤 사촌이 되겠습니까? 인간이 악에 맞서 싸우는 것을 막는 규칙은 없습니다! 뱀이 눈앞에 나타나면 뱀에게 물려 생명이 위험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곤봉을 사용하여 때립니다. 그러나 우리를 산채로 삼키는 용, 즉 교회와 정치의 지도자들이 우리에게서 피를 빨아먹도록 허용하는 이때, 언제까지 그들의 종이 되겠습니까?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는 악한 자를 악으로 쳐서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의 전능하신 왕이신 하느님은 그분을 믿는 신자인 우리가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지도자들이 우리 머리에 악을 씌우는 짓을 허용하지 마십시오! (중략) 우리 지도자들이 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게 하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것이며 약속된 대로 우리와 함께 선을 이룰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게으르지 말고 힘써 서둘러 오십시오. 무기가 있는 사람은 무기가 있고, 무기가 없는 사람은 쇠 갈래와 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 나라의 이익과 이익을 위하여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서둘러 오십시오.
그리고 그 큰 의회들은 당신들에게 무엇을 따르도록 지시할 것이며, 그들은 당신들을 어디로 부르게 될 것입니까? 형제들이여, 우리 뺨의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었으니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고통받는 행운과 불운을 제외하고는 곡식, 물건, 상인, 마을 사람, 농민, 화가의 집조차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야르 폭군들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약속대로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유지의 이익을 위해 가져가야 할 사람들뿐입니다!"
<파데슈 선언문> 일부.
우리의 전능하신 왕이신 하느님은 그분을 믿는 신자인 우리가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지도자들이 우리 머리에 악을 씌우는 짓을 허용하지 마십시오! (중략) 우리 지도자들이 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게 하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것이며 약속된 대로 우리와 함께 선을 이룰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게으르지 말고 힘써 서둘러 오십시오. 무기가 있는 사람은 무기가 있고, 무기가 없는 사람은 쇠 갈래와 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 나라의 이익과 이익을 위하여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서둘러 오십시오.
그리고 그 큰 의회들은 당신들에게 무엇을 따르도록 지시할 것이며, 그들은 당신들을 어디로 부르게 될 것입니까? 형제들이여, 우리 뺨의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었으니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고통받는 행운과 불운을 제외하고는 곡식, 물건, 상인, 마을 사람, 농민, 화가의 집조차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야르 폭군들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약속대로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유지의 이익을 위해 가져가야 할 사람들뿐입니다!"
<파데슈 선언문> 일부.
그러면서도 오스만 파디샤 마흐무트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목표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파나리오테스 체제를 거부하고 전통 제도를 보존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이후 올테니아의 티스마나와 스트레하야 수도원을 요새화했으며, 능력주의 도입, 특정 세금 및 세금 기준 폐지, 주요 세금 인하, 왈라키아 군대 설립 및 내부 관세 폐지, 매관매직을 통해 얻은 관료 경질을 발표했다. 여기에 더해 일부 파나리오테스 가문을 추방했고, 미래의 보이보드가 공직을 놓고 지역 보야르와 경쟁하는 것을 금지했다.
1821년 3월 21일 각지의 호응 덕분에 병력을 크게 증강한 투도르는 부쿠레슈티에 입성한 뒤 오스만 제국과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반포했다. 한편, 필리키 에테리아는 몰다비아에서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를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군은 이를 불허하고 그들을 축출했고, 입실란티스의 군대는 부쿠레슈티로 이동하여 투도르와 합류했다. 그러나 투도르는 오스만 제국과의 정면 출돌은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입실란티와 필리키 에테리아 회원들이 오스만 제국과 대결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데 협조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했으며, 다뉴브 강 남쪽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오스만 제국군과 수차례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에 그가 배신했다고 여긴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 및 필리키 에테리아는 투도르를 축출할 음모를 꾸몄다. 여기에 투도르의 급진적인 정책에 위협을 느낀 보야르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오스만 제국군에 호응했다. 1821년 5월, 오스만 제국군이 부쿠레슈티로 진군했을 때 보야르들이 대거 호응했고, 시민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성문을 개방했다. 투도르는 올테니아로 후퇴해 병력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던 중 일부 병사가 약탈을 벌이자, 그는 이들을 체포해 군사 재판을 연 뒤 교수형에 처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그를 따르던 병사들이 자기 동료를 해친 것에 분노해 그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1821년 5월 21일, 게오르가키스 올림피오스가 기병대와 보병대를 이끌고 골레슈티에 주둔하던 투도르의 숙영지에 도착한 뒤 장병들에게 투도르를 계속 따를 거냐고 물었다. 장병 대부분은 투도르를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고 답했고, 그들은 곧바로 투도르를 체포했다. 이후 필리키 에테리아 부대 진영으로 끌려간 투도르는 5월 27일에서 28일 사이의 밤에 오스만 제국과 협력했다는 비난을 받고 트르고비슈테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처형되었다. 그의 유해는 절단된 뒤 구덩이에 던져졌다. 그 후 투도르의 군대 일부는 입실란티스와 올림피오스에게 가담했고, 나머지는 귀가했다.
4.18. 러시아 제국의 간섭과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의 성립
1821년 8월 왈라키아에서 발발한 에테리아 반란을 진압한 오스만 제국은 1822년 6월까지 군정을 실시하며 혁명 세력을 모조리 제거하려 했다. 그러던 1822년 봄, 그리고레 4세 기카, 이오안 스투르자, 이오르다케 라슈카누, 게오르게 쿠자 및 기타 9명의 몰다비아 및 왈라키아 보야르들이 콘스탄티니예로 찾아가서 오스만 제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공물을 납부하며, 오스만군의 주둔을 받아들일 테니 전통 영주의 통치를 복원해달라고 요청했다. 1822년 7월 1일, 오스만 파디샤 마흐무트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앞으로는 오스만 당국이 파나리오테스에 속한 인사를 임의로 왈라키아나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하지 않고 보야르들이 선출하고 오스만 당국이 승인하는 구조로 회귀하기로 했다. 그 후 그리고레는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고, 이오안 스투르자는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된 그리고레 4세 기카는 권좌를 탈취하려는 일부 보야르의 정치적 공세에 맞섰으며, 500만 탈러에 달하는 빚더미에 짓눌린 왈라키아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파나리오테스 통치 기간 동안 면제되었던 포도주세를 부과하려 했다. 그러나 보야르들의 비협조로 인해 세금 부과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1826년 10월 7일,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애커만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은 오스만 파디샤가 러시아의 동의 없이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등 다뉴브 공국의 통치자를 바꾸는 것을 금지했다.
이리하여 입지를 다진 그는 왈라키아의 피폐해진 농업을 되살리는 일련의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성 사바 수도원에 학교를 다시 열었으며,디니쿠 골레스쿠의 주도로 문학 협회가 신설되는 걸 도왔고, 그리스어 학교가 왈라키아의 여러 곳에서 건설되는 걸 용인했다. 여기에 거리 포장을 위한 규정을 반포하는 등 부쿠레슈티의 환경 개선과 관련된 조치를 내렸으며, 일전에 러시아군에 가담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왈라키아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판두리 군단을 조직해 왈라키아 방위를 맡겼다.
1828년 5월 7일, 러시아 제국군이 그리스 독립 전쟁을 치르는 그리스인을 돕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프루트 강을 건너 왈라키아 공국을 장악했다. 그 후 러시아군은 1834년까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포괄하는 다뉴브 공국의 총독을 선임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1834년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철수한 후, 알렉산드루 2세 기카가 그해 4월에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협의하에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왈라키아 보이보드 수여식은 1834년 5월 19일 코스탄티니예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그는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 미하이 스투르자와 함께 머리에 머리 장식을 하고 잘게 다듬은 턱수염을 기른 채 오스만 파디샤 마흐무트 2세에게 절하고 발에 키스했다. 이후 왈라키아로 이동한 그는 10월 14일에 부쿠레슈티의 성 스피리돈 교회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알렉산드루는 1834년 루마니아 문테니아 텔레오르만 카운티에 알렉산드리아 시를 건설했으며, 1835년 10월 5일에는 교육 과정을 우등으로 졸업한 사람만이 국가 직책에 선임될 수 있다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했다. 1838년 8월 부쿠레슈티의 두데스티 병원 건물에 군사 학교를 설립했고, 스피릿 힐에 부쿠레슈티의 첫번째 병영을 건설했다. 또한 1838년 21월 19일에 필하모닉 학교 학생들이 부쿠레슈티에서 최초의 루마니아 오페라를 공연할 때 참관한 뒤 그들에게 국가 메달을 수여했으며, 1842년 초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한 니콜라에 A. 크레줄레스쿠(Nicolae A. Kretzulescu, 1812 ~ 1900)가 부쿠레슈티로 돌아와서 콜차 병원 옆에 수술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는 걸 후원했다.
이렇듯 알렉산드루는 왈라키아를 잘 다스리려 노력했지만, 러시아 당국은 그를 통제하기 위해 그리스와 러시아 요원들을 왈라키아 정부에 대거 배속시켰고, 러시아 영사인 표트르 뤼크만 남작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고 왈라키아의 모든 내정에 간섭하도록 했다. 러시아 영사의 간섭은 왈라키아 의회에서 거센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여기에 알렉산드루의 두 형제 미하이와 콘스탄체는 각각 육군과 민병대 수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무능한 데다 장병들의 급료를 갈취하는 짓을 저질렀기에 거센 비난을 받았다.
1838년, 표트르 뤼크만은 <유기적 규제(Органический регломент)>[16]에 왈라키아의 내부 독립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는 새로운 조항을 추가하라고 요구했다. 국가의회가 받아들이지 않자, 러시아 당국은 오스만 제국에 압력을 행사했고, 왈라키아 의회는 해당 조항의 도입을 수락하라는 오스만 제국의 권고를 받아들여야 했다.
한편, 자유주의 성향의 보야르들의 대표자인 이온 캄피네아누는 차르와 파디샤가 직접 통치자를 임명하는 규정을 용인할 수 없다고 여기고, 알렉산드루를 타도하고 본인이 보이보드가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왈라키아 헌법 채택, 다뉴브 공국 통일 및 독립 선언을 요구했다. 그가 제시한 '왈라키아 헌법'은 헌법적이고 대의적인 정부 형태의 도입, 법 앞의 평등, 매우 광범위한 개인의 자유 등을 강조했다. 캄피네아누는 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이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를 여행했다. 그러나 1840년 3월 부쿠레슈티로 귀환했다가 체포되어 마르기네니 수도원에 투옥되었다가 1841년 3월 중병에 걸린 후 풀려났다.
1840년, 자유주의 보야르들은 드미트리에 필리페스쿠가 이끄는 새로운 음모를 조직했다. 이 음모엔 왈라키아 역사가이자 작가 니콜라에 발체스쿠(Nicolae Bălcescu, 1819 ~ 1852), 언론인이자 고고학자 세자르 볼리악(Cezar Bolliac, 1813 ~ 1881), 법학자이자 철학 교수 에프티미 무르구(Eftimie Murgu, 1805 ~ 1870)도 참여했다. 필리페스쿠는 캄피네아누와는 달리 점진적이고 평화로운 개혁을 추종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강령은 계급을 폐지하고 자영농을 양성해 농업 침체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음모 역시 발각되었고, 필리페스쿠는 스나고프 수도원에 투옥되었으며, 참가자들은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1841년, 알렉산드루는 다뉴브 공국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파괴하기 위해 러시아군의 군사 개입을 촉구하려던 브라일라의 필리키 에테리아 조직원들을 대거 체포했다. 여기에 루마니아 필하모닉 협외에 제공되던 보조금을 철회하고 독일 밴드에 수여해, 루마니아 지식인들의 강한 분노를 샀다.
1842년, 국가의회는 그의 통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게오르게 비베스쿠는 그를 "알바니아계 외국인"이라고 단정하며, 그의 통치를 더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연설했다. 의원들은 기카 가문과 더이상 협력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고, 그들의 불만 사항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에 전달되었다. 양국은 알렉산드루는 더 이상 왈라키아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폐위하기로 합의했다. 결국 1842년 10월 7일, 오스만 제국은 그를 폐위한다는 칙령을 선포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렉산드루는 브라쇼브로 피신했다.
1843년 1월 1일, 왈라키아에서 <유기적 규제>에 의거한 첫번째 보이보드 선거가 개최되었다. 그 결과 게오르게 비베스쿠가 보수적인 보야르들과 젊은 자유주의자들 모두의 지지를 받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그는 취임한 직후 그동안 알렉산드루 2세 기카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던 이들 전원을 사면했고, 정부 구성원을 기카 가문의 정치적 반대자들로 구성했다. 그러나 여러 입법 계획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국가의회와의 관계가 서서히 악화되었다.
1844년 봄, 왈라키아 당국은 러시아 기술자 알렉산드르 트라다필로프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가 국가의 광산을 관리하도록 했다. 또한 광산 소유자가 18개월 이내에 광산 채굴을 시작하지 않으면 러시아 회사가 12년 동안 광산 관리를 인수하고 수입의 10%를 소유자에게 지불하며, 10%를 왈라키아 정부에 지불하도록 했다. 게오르게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국가의회는 강하게 반대했다. 의원들은 러시아가 지역 정치에 개입하려는 수작으로 간주했다. 계약은 결국 취소되었지만, 러시아 당국은 국가의회를 껄끄러운 존재로 여기고 게오르게에게 해산을 종용했다. 1844년 3월 4일, 게오르게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승인을 받고 의회를 해산했다.
1846년 11월 의회 선거가 소집되었을 때, 게오르게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정적들이 의회에 들어가는 걸 저지하고 자기 지지자들을 의회에 대거 배속시켰다. 이에 그가 독재자가 되려 한다는 비난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기에 더해 루마니아어가 현대화와 양립할 수 없다면서, 성 사바 대학을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학교로 개편하라고 명령해, 루마니아어를 민족 언어로 여기던 민족주의자들의 강한 반감을 샀다.
1847년 3월 23일, 부쿠레슈티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그 후 게오르게는 세로운 도시 계획 규정을 반포했다. 1847년 이웃한 몰다비아 공국과 관세 동맹을 맺었고, 1848년 1월 1일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국경지대인 포크사니 검문소를 폐지했다. 또한 보이보드가 교회의 예산을 승인하는 등 정교회 성직자에 관한 새로운 법률을 재정했으며, 교회 및 공공 당국에 속한 모든 집시 노예를 해방하는 등 몇 가지 중요한 법률을 통과했다.
1848년 여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 유럽 전역을 뒤흔들던 1848년 혁명에 호응한 지식인들이 혁명을 일으키기로 했다. 6월 9일, 서부 왈라키아의 이슬라즈 마을에서 엘리아데-라둘레스쿠(Eliade-Radulescu) 회원들이 농민들을 소집한 뒤 <이슬라즈 선언문(Proclamaşia de la Islaz)>을 반포했다. 그들은 이 선언문에서 왈라키아의 완전한 독립, 언론의 자유, 법 앞의 모든 사람의 평등, 새로운 조세 제도 도입, 방위군 창설, 무료 교육, 제헌의회 직접 선거, 통치자 지위 단순화 및 대통령 직위 도입, 농민에게 보야르 토지 분배 등을 역설했다. 그후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시민들이 부쿠레슈티 광장에 집결한 뒤 고스포다르 궁전으로 향했고, 군대와 경찰은 이들을 저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후 소규모 혁명가들이 궁전에 들어가 게오르게에게 이슬라즈 선언문을 넘겼고, 게오르게는 1848년 6월 11일 이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슬라즈 선언문은 왈라키아 헌법으로 선포되었으며, <유기적 규제>는 폐지되었다. 게오르게는 6월 13일 보이보드에서 물러났고, 혁명 정부가 몇 달간 왈라키아를 지배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압뒬메지트 1세가 파견한 오스만 제국군 20,000명이 이들을 진압했고, 콘스탄틴 칸타쿠지노가 오스만 사령관 푸아드 파샤의 권유를 받아들여 9월 22일 카이마캄(caimacam, 임시 통치자)에 발탁되었다.
이후 콘스탄틴 칸타쿠지노는 압뒬메지트 1세의 지시를 받은 푸아드 파샤의 권고에 따라 혁명 지도자들을 대거 체포해 코트로체니 수도원에 감금했다. 또한 이전 정권의 핵심인물인 코스타체 아리스티아, 세자르 볼리악, 이온 브라티아누, 디미트리 브라티아누, 슈테판 골레스쿠, 콘스탄틴 알렉산드루 로세티, 이오아사프 즈나고베아누, 보이네스쿠 2세 등을 추방했다. 한편, 그는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농민들이 보야르들의 영지를 약탈하고 방화한 사건을 조사하는 위원회를 설립해, 이와 관련된 농민들을 대거 처형하거나 유배했다. 그리고 급진적인 교사들의 숙청을 시작했으며, 11월 1일 혁명의 진원지 역할을 했던 학교들을 모조리 폐쇄했으며, 왈라키아 정교회 주교구에서 혁명을 동조하는 수도자들을 추방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1848년 11월, 콘스탄틴의 장남 이온 칸타쿠지노가 아버지의 정권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러시아군에 소속된 카자크에게 체포되어 코트로체니로 끌려갔다가 나중에 석방되었다. 1849년 3월, 또다른 아들 그리고레는 부쿠레슈티의 모물로에서 연극을 조직해 헝가리로 망명한 혁명가들에게 동정을 표했다. 이 행사는 오스만 제국의 검열 칙령에 어긋났지만, 콘스탄틴은 눈감아줬다. 1848년 9월 28일, 칸타쿠지노는 푸아드와 함께 임시정부의 노예 제도 폐지를 취소하고 해방되었던 로마인들에게 주인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1849년 2월에는 임시 정부가 140만 탈러를 불법적으로 지출한 사실이 밝혀졌다며, 이 적자를 왈라키아에 있는 혁명가들의 사유 재산을 몰수하여 메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혁명 동안 거의 완전히 파괴된 부쿠레슈티의 러시아 군인 기념비를 복원하기 위한 기금을 따로 마련했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통치는 명목상으로만 이뤄졌으며, 실제 권력은 오스만 사령관 푸아드 파샤와 러시아 위원 알렉산데르 니콜라예비치 뤼더스 백작이 행사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왈라키아인들은 러시아군의 유지비를 지불해야 했으며, 오스만제국에 바쳐야 하는 공물이 20% 증가했다. 왈라키아 정부는 300,000 루블의 대출을 받았는데, 대부분은 러시아군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자연히 왈라키아인들은 강한 반감을 품고, 그를 타도하려는 음모가 곳곳에서 횡행했다.
1849년 6월, 콘스탄틴 칸타쿠지노의 카이마캄 임기가 만료되었고, 바르부 슈티르베이가 오스만 파디샤 압튈메지트 1세의 후원에 힘입어 새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바르부 슈티르베이는 러시아 당국에 뇌물을 건내 그들의 용인을 얻어낸 뒤 보이보드에 취임했다. 바르부는 통치자로서 행정, 재정, 공교육 분야에서 다소의 개혁을 실시했다. 저축과 공공 지출 의 엄격한 통제를 통해 국가 부채의 3분의 2를 줄였고, 부쿠레슈티 에 극장을 세웠고, 1848년 혁명 동안 폐쇄된 학교를 다시 열었으며, 사법부의 행정 소송이 좀더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했다. 또한 농민들이 보야르들의 토지를 분할 받는 토지 개혁을 추진했지만, 콘스탄틴 칸티쿠지노 등 보수파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지지부진했다. 한편, 로마인 노예 제도에 있어서 노예의 내부 거래를 제한하고, 내부 거래로 인한 가족의 분리를 금지했다.
1853년 10월 크림 전쟁이 발발한 후, 러시아군이 10월 29일 왈라키아에 진주했다. 바르부 슈티르베이는 빈으로 피신했다가, 러시아군이 철수한 후인 1854년 10월 5일 부쿠레슈티로 돌아와서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했지만, 더 이상 행동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왈라키아에 진주한 오스트리아군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 1856년 크림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파리 협약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통합을 제안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865년 6월 25일 바르부의 보이보드로서의 7년 임기가 끝난 뒤, 알렉산드루 2세 기카가 카이마캄에 발탁되었다. 그는 카이마캄으로서 1856년 7월 4일부터 1858년 10월 18일까지 통치했는데, 이 기간 동안 민간 및 군사 구급대 학교를 설립했고, 이 학교 책임자인 게오르게 코스타포루 교수에게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 각지를 6개월간 연구 여행하도록 했다.
1858년 10월 18일 왈라키아의 세 귀족 이오안 마누, 에마누일 발라누, 이오안 알렉산드루 필리페스쿠가 알렉산드루 2세 기카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뒤 몰다비아 임시 의회와 함께 양국의 통합을 논의했다. 많은 인사들은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오스만 제국의 간섭에 대응하기 위해 외국인 군주를 모셔와서 두 공국을 통합한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1859년 1월 17일에 열린 선거에서, 루마니아인이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는 다수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몰다비아 출신의 알렉산드루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출되었다.
한편 왈라키아에서는 몰다비아와의 통합을 꺼리는 보수주의자들이 정계를 장악했지만, 각자 후보를 내세우며 분열했기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에 양국의 통합을 강력히 원하는 국민당이 알렉산드루를 적극 지원하면서, 알렉산드루는 1859년 2월 5일 선거에서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출되었다. 1862년 2월 5일, 알렉산드루는 연합주의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두 나라의 의회와 정부를 통합하여 정치적 연합을 달성하고, 스스로 돔니토르(Domnitor, 군주 또는 통치자)를 칭했으며, 국호를 '루마니아 연합공국'으로 정했다. 이리하여 왈라키아 공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5. 역대 군주( 보이보드)
[1]
포사다 전투를 기준으로
[2]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헝가리인의 자치 공국이었고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반란이 진압된 1711년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 직할령으로 격하되었다.
[3]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Wallachia
[4]
독일어에서 W는 V의 발음이 나기 때문에 영어로 발음하면 왈라키아가 된다.
[5]
Severin. 현재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 세베린
[6]
일부 연대기에서는 1395년 5월 17일이라고 전해진다.
[7]
1486년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 의해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로 직함을 맡아서 10년간 헝가리군이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우는 걸 돕다가 1496년
수도사가 되었다.
[8]
현재의 루터파 대성당(Catedrala Evanghelică Sfânta Maria).
[9]
블라디슬라프 2세의 손자로 전해진다.
[10]
19세기 루마니아의 역사가인 알렉산드루 디미트리 제노플(Alexandru Dimitrie Xenopol, 1847 ~ 1920)은 보야르들이 페트루 1세의 복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을 거라고 추정했다.
[11]
Padina(지붕)는 일반적으로 언덕 꼭대기에서 땅이 침하되면서 형성된 원형 또는 길쭉한 함몰 모양의 구호이다.
[12]
1637년 고모라 수도원에서 발행한 교회 규칙. 왈라키아의 교회법과 평신도법의 가장 오랜된 법전이다.
[13]
1652년 트르고비슈테 에서 인쇄된,
동로마 제국 법률을 루마니어로 번역한 법률집
[14]
Seimen, 창으로 무장하여 궁정을 지킨 용병 보병대
[15]
kapucu, 오스만 제국이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국에 파견한 공식 사절
[16]
1831년 러시아 제국이 공포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최초의 준헌법적 유기법. 두 공국에 주둔한 러시아군이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도입한 러시아식 법 체계로,
크림 전쟁 이후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