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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5-20 15:21:29

도쿠가와 이에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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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토쿠가와 가문 문장.png 에도 막부 14대 정이대장군
とくがわ いえもち
徳川家茂

도쿠가와 이에모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50px-Toku14-2.jpg
파일:external/www.lib.city.minato.tokyo.jp/127iemochi.jpg
생몰년도 1846년 7월 1일 ~ 1866년 8월 29일(20세)
신체 156.6cm[1], A형
재임
기슈 번주
1849년 ~ 1858년(9년)
쇼군
1858년 ~ 1866년(8년)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에도 막부의 14대 쇼군. 각기병 쇼군, 45kg 쇼군[2]. 메이지 덴노의 고모부.

2. 생애

고산케 기슈 도쿠가와 가문의 도쿠가와 나리유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이 있었지만 1830년에 사망했다.

1849년에 기슈번의 영주를 맡던 숙부가 사망하면서 숙부의 양자로 들어가 기슈 번의 13대 번주가 되었다. 불과 3살의 나이에 기슈 번의 영주가 된 탓에 당초 은거했던 전 영주 도쿠가와 하루토미의 보좌를 받았지만 도쿠가와 하루토미가 사망한 뒤에는 가로 미즈노 타다나카가 실권을 잡아 번의 정치를 개혁하려던 다테 카즈히로( 무츠 무네미츠의 아버지) 등을 탄압했다.

1858년 13대 쇼군 이에사다의 후계자리를 놓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는 히토츠바시파와 후계자 다툼 끝에 승리해 14대 쇼군에 올랐다. 당시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더 유능하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혈통으로 따지면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먼 혈통이었던 반면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사촌에 해당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근친이라는 점에서 후계자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정이대장군이 되었기에 1862년까지 도쿠가와 요시요리가, 이후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 후견인이라는 명목으로 배후에 버텨서 사실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실권을 휘두르기는 힘들었다.

13살 때 쇼군이 되어 21살에 죽어서, 혼자서 뭘 결정하고 정치를 할 능력도 없었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막부 가신의 얼굴 마담 꼭두각시 쇼군이었다. 정책에 대해서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항목을 보는 것이 더 세세하다.

1862년, 16살 때 공무합체의 일환으로 닌코 덴노의 8녀이자 고메이 덴노의 이복 여동생인 카즈노미야 치카코(和宮親子) 황녀와 정략결혼을 했다. 본래 카즈노미야 치카코 공주는 아리스가와노미야의 9대 당주인 다루히토(熾仁) 친왕과 약혼했으나, 공무합체 운동으로 인해 파혼되었다. 졸지에 네토라레 당한 다루히토 친왕만 불쌍.[3] 그래도 나중에 막부 토벌군 대장을 맡아서 나름 복수는 했다.

사실 과거 7대 정이대장군인 도쿠가와 이에쓰구와 요시코 내친왕의 당시 상황과 고노에씨의 의사로 혼인이 추진된 적이 있지만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일찍 죽고 요시코 내친왕이 출가해서 비구니가 된 사건이 있기는 했다.

메이지 덴노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의 이복오빠인 고메이 덴노의 아들이기 때문에 메이지 덴노의 입장에서는 고모부가 된다. 정략결혼이기는 했지만 이에모치가 간간이 선물을 하기도 하는 등 부부 사이는 원만해서, 역대 에도 막부 정이대장군 중에서 가장 부부 사이가 좋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이 결혼을 추진한 이와쿠라 토모미 존황양이파의 암살 위협을 받고, 한 동안 정계를 떠나 숨어다녀야 했다.

1863년, 쇼군으로서는 무려 229년 만에 교토 니조성으로 상경해 고메이 덴노에게 양이를 맹세했는데, 쇼군이 상경하는 것은 에도 막부의 권위가 떨어지는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조정과는 상관없이 정책을 실행했던 쇼군 가문의 정치적 실권이 조정으로 넘어간 격이었다. 외국을 싫어하던 고메이 덴노의 조정으로부터 양이를 명 받고 어쩔 수 없이 양이를 전국의 번에게 명했더니, 존황양이파가 정권을 쥐고 있던 조슈 번이 일으킨 사건이 시모노세키 전쟁.

2년 뒤인 1865년에 효고항을 개항하게 되자 조정에서 가신인 아베 마사토 등에 대한 처벌여론이 일어나, "쇼군직을 사임하겠다" 고메이 덴노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이에 놀란 덴노는, 다시는 쇼군의 인사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866년, 오사카 전투 이래 250년 만에 쇼군이 직접 '제2차 조슈정벌'을 위해 출진했다가 오사카 성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덴노가 궁정의를 보내면서 각별하게 신경을 썼지만 결국 7월 20일 오사카 성에서 사망했다. 카츠 카이슈 같은 인물은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에모치 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도쿠가와 막부는 망했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본래는 육촌동생인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차기 쇼군으로 지명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을 계승했다.

3. 기타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치세는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로, 조슈 사츠마가 막부에 반기를 들었고 에도에서는 좌막파와 토막파의 갈등으로 치안이 불안해지는 등 혼돈이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비록 어리긴 했어도 이전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와는 달리 뭔가 해보려고 노력하긴 했다. 카츠 카이슈에게 명해 서양식 군함을 건조하게 하고, 토막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덴노의 여동생 카즈노미야 치카코 황녀와 결혼하는 등, 나름대로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가츠 가이슈는 "오래 사셨다면 영명한 군주가 되셨을 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4]

인상이 상당히 오만해 보이고 강직한 성격이었지만,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가신들이나 여성들 심지어는 동물에게도 상냥하고 자상한 면모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쇼군이 되면서 동물을 지나치게 귀여워하는 것은 체면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았다고.

어릴 적 일화로는, 유명한 서예가한테서 서예를 배웠는데, 그 선생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요실금을 하고 말았다. 이에모치는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실수인 척 선생의 옷에 물잔을 엎질러서 체면을 세워줬다고 한다. 이 일화는 학교에서 학생이 쉬야를 해서 선생이 물컵을 쏟아 가려줬다는 식으로 자주 변형되어 나돈다.

고메이 덴노에게 양이를 맹세한 것과는 달리, 의외로 서양과 교류를 하기도 했다.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치세 기간은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의 치세에 해당되는데,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미생물에 의한 누에 전염병이 돌아서 누에가 거의 전멸해 양잠산업이 파멸할 직전에 몰렸다. 그러자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이 소식을 듣고 프랑스에 일본 누에를 기증했고, 루이 파스퇴르의 조언에 따라 나폴레옹 3세는 일본 누에의 연구를 지시해 누에 전염병의 원인을 연구하고 누에의 품종개량을 진행했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867년 나폴레옹 3세의 명으로 뛰어난 명마로 알려진 아라비아산 26필을 막부에 선물로 보내고 사육법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아라비아산 명마들은 보신전쟁 때 행방불명되어 종적이 묘연해졌다고. 안습.

1950년대 묘를 이장하면서 이에모치의 묘도 부인의 묘와 함께 개장되었는데, 정실 부인이었던 카즈노미야 치카코 공주의 묘 안에서 이에모치의 사진으로 추정되는 유리원판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검사를 하려고 봤을 때는 이미 유리판만 남고 사진은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일본측 위키에서는 카즈노미야와 혼담이 오갔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이 사진의 주인일 가능성도 있다고 적어놨다. 위의 서구풍 초상화는 가와무라 기요오(川村清雄)라는 화가가 이에모치의 사후인 1884년에 그린 것이다. 가츠 가이슈와 생전 이에모치를 배알한 사람들도 이 초상화를 보고 '생전의 모습 같다'며 호평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stat.ameba.jp/o0400028012116941236.jpg
이에모치의 치아[5]
이에모치는 단 것을 매우 좋아해, 발굴 시 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거의 모든 치아가 충치였다고 한다. 충치가 악화하면서 각기병도 악화되었을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단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31개의 치아에서 30개가 충치였다는 것은 이상한 것으로, 수은계의 독으로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암살 음모론이 있다.

은혼에 등장하는 쇼군 도쿠가와 시게시게는 이에모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1] 151.6cm는 위패의 키이고 156.6cm하고 혈액형 A형은 유골 조사의 키하고 혈액형인데 유골 조사인 156.6cm가 신빙성이 높다. [2] 워낙 병약한 체질이라서 일본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나온 말이다. [3] 근데 당시 타루히토는 26, 카즈노미야 치카코는 15였다. [4] 이에모치 본인이 “군함을 움직일 수 있는 인재 육성이 필요하다”는 가츠 가이슈의 호소에 그 자리에서 해군 훈련소 설치를 명해 고베해군조련소(神戸海軍操練所)가 지어졌고, “해상에서의 일은 군칸부교(軍艦奉行, 가츠 가이슈)에게 맡기라”고 엄명할 정도로 가츠 가이슈를 전폭 신임했다. [5] 31개 중 30개가 충치를 먹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