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3:54:52

존 웨슬리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존 웨슬리
Priest | Fr. John Wesley
'''
출생 1703년 6월 28일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엡워스
별세 1791년 3월 2일 (향년 87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런던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칼리지)
종교 성공회
가족 아내 메리 바젤
남동생 찰스 웨슬리
서명 파일:존 웨슬리 서명.svg
수품내역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0><colcolor=#ffffff> 부제서품 1725년 9월 25일
○○성당[A]
○○○ 신명 주교 주례
사제서품 1728년 9월 22일
○○성당
○○○ 신명 주교 주례[A]
}}}}}}}}}

1. 개요2. 웨슬리의 신학사상
2.1. 아르미니우스주의자?2.2. 하느님의 형상과 원죄2.3. 웨슬리의 신학사상과 펠라기우스 사상과의 관계2.4. 선행하시는 은혜2.5. 칭의시키는 은혜(justifying grace)2.6. 거듭남(신생新生 또는 중생, New Birth)2.7. 성화시키는 은혜(sanctifying grace)2.8. 그리스도인의 완전(the Christian Perfection)2.9. 영화(榮化, Glorification)2.10. 타락의 가능성2.11. 오해와 해설
3. 은총의 수단 (성사론)4. 어록5. 관련 교단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I look upon all the world as my parish.

나는 온 세상을 나의 교회라고 생각한다.[3]
1739년 6월 23일 남동생 찰스 웨슬리에게 보내는 편지 中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4]
존 웨슬리의 유언

존 웨슬리, 기독교대한감리회 내에서는 때로 요한 웨슬레라고 부르기도 한다.[5] 성공회에서는 사제이자 복음 전도자로서 매년 5월 24일( 잉글랜드 성공회/ 대한성공회) 혹은 3월 3일( 미국성공회)을 축일[6]로 지킨다.

루터회에서도 3월 2일을 존 웨슬리 축일로 지정했다.

감리회의 실질적 창시자이자 웨슬리안 교파[7]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신학자이며 사회운동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1725년 부제품을 받았으며 1726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컬리지의 연구교수(Fellow)가 되었다. 1728년에는 사제품을 받았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의 교구 사목을 돕다가 옥스퍼드 연구 교수로 되돌아간 1729년부터 남동생 찰스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 등과 함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성회(Holy Club)를 조직하여 신학 공부와 경건 운동을 시작하였다. 미국에서의 선교가 실패한 후,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존 웨슬리는 모라비안교도(Moravians)[8]들을 만나 이들의 신앙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영국에 도착한 뒤로도 모라비안 목회자들과 교류하였다. 1738년 5월 24일에는 회심의 경험을 하고, 영국 전역을 다니며 경건 운동 및 사회 운동을 펼쳤다. 신성회 때부터 경건 생활의 방법으로 확고한 규칙(Method)을 세우고 따르는 것을 택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규칙쟁이(Methodist)'[9]라는 멸칭으로 불렸는데 후에 감리교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감리회 운동은 단순한 신앙 운동에서 감옥 개선과 노예제 폐지 등과 같은 사회 운동까지 포괄하는 큰 흐름이었다.

존 웨슬리의 신학사상은 칼뱅주의와는 극명하게 대립했다. 존 웨슬리는 특히 칼뱅주의의 이중예정론, 특히 하나님이 임의로 절대다수의 인간들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불에 타도록 내버린다는 선택유기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존 웨슬리가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한 것도 칼뱅주의와 크게 달랐다.[10] 존 웨슬리는 성찬을 지속적으로 베풀고 행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내면뿐만 아니라 외적인 영역에까지 드러나야 한다고 보았다. 또 존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개인이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존 웨슬리는 평생 성공회 사제로 남았고, 감리회 운동은 단지 성공회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고 타락하고 경직된 성공회를 개혁하는 경건 운동으로만 생각하였다. 하지만 성공회 주교들과의 마찰과 대다수 성공회 성직자들의 비협조로 사제 직무자격이 정지되어 결국 독립 교단으로 분리되어 감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통한다. 존 웨슬리는 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각종 사회 문제가 산적했던 영국을 변화시킨 위인으로 평가받는다.

2. 웨슬리의 신학사상

다음의 내용은 아래의 문헌을 통하여 쓴 것임을 밝힌다.
존 웨슬리의 신학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그가 기초를 쌓아둔 개념들을 차곡차곡 봐야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의 신학사상은 칼뱅주의자들의 말대로 단순히 세미-펠라기우스나 다름이 없다. 그의 신학사상의 기초-특별히 구원론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에 대해서 써보기로 한다.

그의 구원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선행하시는 은혜(perventing grace)
2. 회개시키는 은혜(convingcing grace)
3. 칭의시키는 은혜(justifying grace)
4. 성화시키는 은혜(sancifying grace)
5. 영화(glorification)

2.1. 아르미니우스주의자?

교리상으로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파였다.
" 옥스퍼드 영국사"의 443쪽.
"...루터는 실체공존설을 신봉했고, 존 웨슬리는 극단적인 아르미니우스주의자였습니다."
존 찰스 라일 리버풀 대주교. " J. C. 라일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복음주의 지도자"의 254쪽.
"존 웨슬리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에서는 사실상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매우 명백합니다. 그것은 민족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리적인 문제였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431쪽.

웨슬리의 아르미니우스주의 경력을 언급한 것은 한국의 장로교 신학자들만이 아니다. 바로 영국 본토의 역사가들과 성공회로 불리는 국교회, 주요 비국교회의 주요 신학적 지도자들의 견해다. 여기서 비국교회는 회중교회, 장로회, 침례회 등을 지칭한다. 또한 J.C. 라일 리버풀 대주교 등 성공회 저교회파[11]도 마찬가지. 오히려 감리교 내부에서도 아르미니우스의 영향을 인정한다.

무엇보다 웨슬리가 생전에 아르미니우스의 이름을 따서 “더 알미니안"이라는 신학 잡지를 출판하여 보편구속, 의지의 자유와 선행은총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아르미니우스주의자 혹은 아르미니우스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웨슬리가 출간한 더 알미니안 매거진 이 매거진은 칼빈주의 감리교도[12]와 스스로를 구별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따른다는 의미였다. 웨슬리가 더 알미니안이라고 이름 붙인 이 매거진은 후에 웨슬리 메소디언 매거진으로 이름을 바꾼다.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꺼리면서도 그 영향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감리교 내부의 신학자들도 동일하다. 신인협동설 역시 감리교 내에서도 웨슬리의 교리로 인정된다. 감리교출판사에서 번역하여 펴낸 " 존 웨슬리의 신학 거룩한 사랑과 은총"에도 '하나님 홀로의 사역과 신-인 협력론'이라는 주제로 기술된 부분에서도 학자들의 견해임을 인정하면서도 독특한 측면이 있음을 주장할 뿐이다. 이미 웨슬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On Working Out Our Salvation'이라는 설교에서 은총을 협력적인 것으로 보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저자인 케네스 콜린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감리교 내부의 신학자들도 신인협력설을 부정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나아가 강조하는 신학자들도 존재한다. 종교개혁가 멜랑히톤의 저서 " 신학총론"을 번역한 오하이오 감리교 신학교의 클라이드 L. 맨쉬렉도 멜랑히톤을 신인협력의 원조로 주장하는 서문을 작성했다. 영역의 원서가 된 현대어 판본을 제작한 한스 엥겔란트가 멜랑히톤이 신인협동설을 반박했음을 서문에 공언했고, 무엇보다 멜랑히톤 자신이 장을 할애하여 반박한 신인협동설에 멜랑히톤을 가두는 서술을 한 엽기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웨슬리가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아니며, 신인협동설과 무관함을 보이려면 웨슬리 본인의 저술로는 어렵다. 또한, 감리교 내부의 일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웨슬리가 전문적인 신학서적을 남기지 않았기에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는 감리교를 비롯한 웨슬리안 계통 교회들만큼은 아니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알미니안주의 역시 다양하다. 아르미니우스도 자신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논쟁 과정에서 사망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사망 이후 도르트회의에서 나섰던 항변파 역시 단합되지 않았고 이후도 마찬가지다. 스티븐 애슈비, 로저 올슨 등의 주장에 따르면, 고전적/개혁적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성도의 견인과 같은 구원관을 주장한다. 오히려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휴고 그로티위스의 주장을 수용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통치설주의자)들이 성도의 타락 등의 가능성을 제기한다.[13][14] 이러한 상황에서 웨슬리의 아르미니우스주의자 경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마니교 경력이나 마르틴 루터의 가톨릭 경력과 더불어 웨슬리 당시, 그리고 이후 주요 학계에서도 거론되는 바이다.

2.2. 하느님의 형상과 원죄

구원의 순서를 설명하기 전에 웨슬리의 기초적인 밑바탕이 필요하다. 그렇게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작업이 필요하다. 최초의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이 완전한 것처럼 완전했다. 이런 인간의 하느님의 완전한 형상은 ‘본질적 형상’, ‘정치적 형상’, ‘도덕적 형상’으로 구성되었다.-이것은 그의 설교 새로운 탄생 ‘본질적 형상’은 인간은 불멸하는 영혼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의지와 감성을 활용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 받은 영적존재. ‘정치적 형상’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인 하느님의 대변자로서의 인간을 형상화할 수 있고, ‘도덕적 형상’으로서는 인간은 ‘성聖과 義의’를 행할 수 있는 존재로서 하느님의 계명을 완벽하게 일치하며 행할 수 있고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깨끗하게 행할 수 있는 존재로서 죄도 없었고 악도 알지 못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인간은 완전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인간에 대하여 하느님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완전한 율법을 주었고 완전한 복종을 원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게 구별한 것은 인간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며 순종하며 섬길 수 있는 자유, 다시 말해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이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그냥 진흙으로 만든 인형으로만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인간이 의롭다든지 거룩하든지 또는 범죄하여 불의하든지 거룩하지 않다든지 하는 말씀이 무의미했을 것이다.

문제는 최초의 인간이 이 선택의 자유를 오용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뜻을 위하여 선택하였고 그 순간 하느님의 형상 중 하나인 ‘도덕적 형상’을 완전하게 상실하여 ‘성聖과 義의’가 완전히 없어진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본질적 형상’도 왜곡하여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인간의 이해하는 능력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앙의 상태에 빠지게 되고 결국 그의 의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자기의 뜻을 추하는 교만의 상태가 되었고 그것은 ‘정치적 형상’도 왜곡되어 인간은 성스럽지 못함과 우둔한 행동을 하게 되고 결국 대변자로서의 행동에 나쁜 결과가 나타났다.

이런 상황 이후 모든 인간은 믿음에 의한 칭의와 중생이 있기 전에는 죄악의 세력으로 아래에 놓인 노예가 되었기에 자유의지를 나쁜 쪽으로만 쓸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인간의 상황을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이라 부른다.

웨슬리의 원죄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원죄하에 있어서 아담과 동일한 죄책과 처벌을 받는 상황이며, 인간의 영혼과 정신, 모든 내적 및 외적의 움직임의 원리가 부패되었고 그렇기에 모든 기질과 행동과 행동이 악하며 그의 본성 속에 있는 것은 선과 악이 섞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악한 상태에서 가끔 중단되어 선한 상태로 바뀌다가 다시 악해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악하고, 이런 인간은 이성으로 신존재 증명은 할 수 있어도 이성이나 그 이외의 어떠한 기능으로도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 수도 없고 사귈 수도 없고, 그렇기에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두려워할 수도 없으며 이런 무신론적 상태는 결국 우상숭배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하며 결국 원죄하의 인간은 자연적 상태에서는 우상숭배자로서 이것은 하느님에게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린다는 뜻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의지라는 사탄의 형상을 각인시켰고 그리하여 세상사랑으로 연결한다. 웨슬리는 이런 인간의 원죄하의 상태에서 치유받을 방법은 우리에게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들에 대하여,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나를 사랑했고, 나를 위하여 그 자신을 내어 주셨다고 하는 중요한 진리에 대하여 하느님이 주는 확실한 증거와 확신, 믿음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치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다. 웨슬리는 이 칭의를 어떠한 제한도 없이 모든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때서야 원죄로부터 구원 받는다고 말했다. 종교강령 7조인 원죄 항목에서도 이런 인간의 상태를 아담을 따라 죄를 범한 것이 아니요, 아담의 자손으로는 각 사람의 천연적 성품이 부패한 것을 가르침인데 대개 인류가 근본적으로 義의에서 멀리 떠나 그 성품이 늘 죄악으로 치우치는 것으로 나온다.

즉 근본적인 3가지 형상으로서의 기능이 부패됨이 따라서 모든 근본적 義의에서 떠나 성품이 늘 죄악으로 치우치는 것이 원죄하의 죄악된 인간의 상태다. 그렇기에 이런 인간은 악한 상태가 일시적으로 중단될 수 없고 본질 자체가 악한상태에서 선한 상태로 잠시라고 변화되거나 개선되는 일이란 없다고 웨슬리는 생각했고 이를 회복시키려면 오로지 칭의와 중생만이 인간의 원죄 하에 있는 부패된 하느님의 형상을 돌려놓을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웨슬리는 칭의를 통해서 인간은 원죄로부터 건짐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때 웨슬리는 하느님의 은혜가 때때로 그의 영혼 안에 행하시는 일로서 원죄 하에 있는 긴간이 선한 것을 한다면 그것은 오직 하느님이 주는 ‘선행하시는 은혜(perventing of pervenient grace)라는 인간의 부패한 본질과 구분되고 분리된 하느님의 자신의 활동을 의미한다고 봤다. 그래서 웨슬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연적 양심이라는 말은 인간이 하는 것, 즉 인간 자체에 있는 기능의 활동을 할 수가 없는 하느님 자신이 활동하는 현상이기에 양심이라는 말은 선행하시는 은혜라는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2.3. 웨슬리의 신학사상과 펠라기우스 사상과의 관계

여기서 우리는 웨슬리의 신학사상에서 볼 수 있는 펠라기우스와의 다른 점을 들 수 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이미 본성이 부패하여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하지 않은 본성과 선의 능력과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나나 제대로 배운 것이 없어서 죄를 범한다고 봤다. 즉 자유의지로서 선을 택하면 선을 행할 수 있고 악을 택하면 악을 택할 수 있기에 자연인 존재 전체가 그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는 전적무능의 상태에 있는 죄인이 아니란 주장이 펠라기우스의 핵심이지만, 웨슬리는 종교강령 제 7조에 의거하여 그에 대하여서는 단연코 부인했다.

그래서 종교강령 제 8조에서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인류의 정형이 그와 같이 되어 자기의 천연적 능력과 사업으로써 마음으로 돌이키며 준비하여 신앙에 이르러 하느님을 경모(傾慕)하지 못하며 하느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선한 의지를 얻게 하시는 은혜(부연하면 거듭남, 보혜사 성령의 임재)가 아니면 우리가 하느님의 기뻐하시고 받으실만한 선한 사업을 행할 능력도 권한도 없음을 밝힌다.

즉,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비기독교인들도 근본적으로 자유의지를 갖고 스스로 믿음에 이르며 선행을 행하여 하느님에게 그 대가로 구원의 은혜를 당연히 요구하여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함에 대하여 부정한 것이다. 또한 현행 보편교회의 세미-펠라기우스주의(半semi-Pelagianism)적인 일부의 자유의지관도 거부한다.[15][16] 세미 펠라기우스주의(半semi-Pelagianism)는 그 인간은 은혜의 도움 없이는 죄에서 해방되는 구원은 얻지 못하지만 자유의지로 응답과 선행은 할 수있으며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응답과 하느님의 은총이 동시에 병행되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인데, 웨슬리는 원죄 이후의 인간은 최소한 마음으로 믿고 회개하기 전까지는 선행과 악행을 골라 행하고 행치 않는, 스스로 신께 응답하는 의지라는 게 작동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보고있다. 다만 웨슬리는 정통 교리에 따라 인간 행위의지의 100% 완전한 타락과 철저한 부자유함을 주장하는 동시에, 분명히 실존하는 신의 선행은총인 사랑과 양심이 실제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마음의 영역에 대해서는 100% 타락해서 사악하기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웨슬리의 구원론은 특히 일부 편벽한 한국의 장로교 목사들 의해 펠라기우스의 행위구원론, 구교의 신인연합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신인협동설과 같은 것으로 매도되어 이단으로 공격받곤 하는데, 사실 신학생 시절 뭘 했는지 알 수 없는 굉장히 무식한 소리다. 웨슬리즘은 원죄 이래로 선행을 행하거나 악행을 안할 자유의지가 박탈된 인간의 상태, 즉 인간행의지의 전적 타락을 인정한다. 원죄 이후의 인간에겐 악행을 안하거나 선행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으며, 다만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를 인간이 마음으로 원한다"는 것이다. 원죄로 인해 손상되어 쇠약해진 인간의 자유의지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소망할 이유로서만 제시될 뿐이며, 웨슬리 신학에서 선행은 중생 이후 성화의 과정에서나 나타난다. 이로써 웨슬리는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하여 하느님의 전적인 은혜'를 결코 부정하지 않으며, 펠라기우스의 행위구원론과도 정교회 및 가톨릭의 신인연합설과도 분명하게 다른 노선을 걷는다.

2.4. 선행하시는 은혜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을 회개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처음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선행하시는 은혜(preventing of prevenient grace)로서 인간이 먼저 스스로 구원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원죄 하에서 자신이 죄인이 아닌 듯이 착각하며 하나님 없이 살고 있을 때, 이미 하느님이 먼저 그에게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와서 역사하심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자신 스스로가 죄인임을 희미하게나마 질문하고 느끼게 된다.

이때 사람이 지금까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오다가 어느 때에 뜻하지 않게 일시적으로나마 자기의 죄에 대하여 어느 정도라도 느낌이 있고 현재까지 자신의 삶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최초로 이런 것이 생긴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인 것이다. 즉 전혀 자신의 상태를 모르다가 하느님에 의하여 건짐을 받기 시작하는 아주 초기단계이다. 즉 사람이 하느님 없이 살아오다가 이런 마음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연도 아니고 어떤 환경의 영향도 아니고 인간적인 노력의 결과도 아니다. 전적으로 하느님 자신의 역사하시기 때문에 있게 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느님의 선행하시는 은혜를 받기에 교회라던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그 것에 응하지 않고 소위 ‘양심’의 빛.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거역했을 때에서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런 양심의 현상에 응답하는 것이 곧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양심적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오히려 하느님을 멀리하며 복음에 대해서 완악하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

이후 막연하게나마 하느님의 은혜를 그리고 그 뜻에 일치해 보고자 하는 마음을 인간이 가지기 시작하면 하느님은 인간을 인도하여 하느님의 뜻 가운데 계시된 뜻, 특히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시는 율법을 알게 한다.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임을 알게 하시고 이것을 지킬 때 복을 이루시되 이 율법을 어기면 정죄와 처벌이 임한다는 것을 알게 하며,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자신의 가장 선한 마음과 최선의 능력으로도 결코 하느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따를 수 없고 결코 하느님이 원하는 것에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결국 율법은 자신이 죄를 알 뿐이라는 하느님의 말씀( 로마서 3장 20절)을 알게 할 뿐이다. 그리하여 진노하는 하느님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게 되며, 죄인을 불사르시는 하느님의 영벌의 처벌을 알게 되며 거룩한 하느님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념으로 간절하게 되나 자신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앎으로 나를 죄에서 건져낼 유일한 존재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려는 마음을 갖게 한다. 이러한 하느님의 역사를 웨슬리는 죄를 깨닫게 하는 은혜, 즉 회개시키는 은혜라고 부른다.

2.5. 칭의시키는 은혜(justifying grace)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에 의하여 칭의와 중생이 있기 전에 회개로 인도된 인간은 이제 요한 복음서 3장 16절의 말씀에 믿음을 받기를 사모하게 되며 이 믿음을 통하여 칭의와 중생을 받도록 역사하는 은혜를 받게 된다 이것이 칭의시키는 은혜라 부른다.

이런 칭의의 은혜와 믿음은 이 세상의 창조와 보존 그리고 섭리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없는 은혜라다. 그래서 만물 중 하나인 인간 자신도 이 은혜의 결과다. 이후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내가 하나님에게 화해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 하나님께 대하여 갖는 확신으로 그 결과 우리의 지혜요, 의요, 성화요, 구속이긴 한마디로 구원이신 하나님에게 연합되어 다시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믿음을 통하여 오는 구원은, 첫째 현재적 구원, 2번째로는 모든 죄로부터 해방-즉 자범죄로부터의 해방이며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이며 자범죄의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으로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두려움의 해방으로 이제는 하나님과의 화해된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이 구원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것이기 때문에 믿음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악행을 범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지금 그를 믿는 모든 죄인에게 이루어지는 죄책의 용서와 형벌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것, 이것을 칭의라고 부른다.

2.6. 거듭남(신생新生 또는 중생, New Birth)

거듭난 사람에게는 믿음, 소망, 사랑의 특징이 있다.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생겨서 생동적으로 운동하는 상태로서 믿음을 가지면 죄를 용서 받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대함을 얻게 되고( 로마서 5:2, 히브리서 3:6) 하느님의 약속 가운데 마지막에 일어날 심판을 기다리는 담대함을 갖게 되며(소망), 이 소망이 있으면 마지막 심판 때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 하신 대로( 요한계시록 22:14) 지금 이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고자 힘쓰게 된다.

이때 말씀은 크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이것은 하느님에게 더욱 가까이 가고자 하는 믿음을 더 크게 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재림 예수를 기쁨으로 만날 때 그가 칭찬해 주리라는 소망을 더 크게 하고, 이 소망은 사랑을 더욱 북돋우게 된다. 이렇게 하여 믿음, 소망, 사랑은 중생한 사람 속에서 생명력 있는 운동을 지속하게 된다.

2.7. 성화시키는 은혜(sanctifying grace)

중생한 사람들 가운데는 당분간 아무 시험도 느끼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느님은 한동안 죄의 세력들이 건들지 않도록 보호하지만 늘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고난을 받았고 그의 종들도 시험받은 것을 본다면 그의 종들도 시험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중생한 사람들은 믿음 안에 굳건히 거하며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한, 외적인 죄를 범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중생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서로 대적하는 두 가지 세력이 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다시 중생하기 전의 상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사람들에게도 그릇된 성질이나 소행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런 것들과 싸워 그들 안에 있는 믿음의 힘으로 정복해야 한다.

중생한 자들 안에서 이런 갈등은 왜 생길까? 첫 번째는 죄의 세력은 마지막 심판날 재림할 주 예수의 발아래 멸망하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을 유혹하여 죄 짓게 하는 활동을 계속하겠고 중생한 자들의 믿음이 약해지면 그때 이 죄의 세력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중생한 자들에게 죄의 세력은 절대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고 반드시 하느님만 의지할 때. 그 때는 믿음으로만 그리고 믿음으로 받는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죄의 세력의 정체를 드러낸다.

중생한 자 안에 작용하는 죄의 세력의 활동 방식은 믿음이 약해지는 것, 교만, 자기고집, 세상사랑, 안목의 정욕, 분노, 원망, 불평과 같은 내적죄로서 이런 죄를 정복하는 방법은 첫째 중생한 자의 믿음이 약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둘째 하나님께 속한 자라도 내적죄로 인한 책임을 느끼며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갈 것임이 마땅함에도 그 저주가 자신에게 임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마지막은 중생한 자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결코 선을 행할 수 도 없으며, 원할 수도 없으며, 행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내적인 죄에서 스스로 탈출 할 수 없음으로 깨닫는 것이다.

중생한 자가 회개할지라도 이런 회개가 곧 죄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이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다시 한번 곧 두 번째로 깨끗하여져라고 말슴하실 때 비로소 가능하다. 즉 두 번째 변화가 필요한대 칭의와 중생처럼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다. 이런 변화는 중생한 자가 회개하며 동시에 나를 온전케 하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그 약속이 지금 여기서 이뤄질 것을 기대하는 믿음을 갖는 순간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성화는 죄의 세력을 매일같이 약화시키는 점진적인 과정이 있으면서도 또한 하느님이 손수 말씀으로 깨끗하여져라 할 때 일어나는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두 번째 변화들로 이뤄진다.

2.8. 그리스도인의 완전(the Christian Perfection)

중생한 사람은 성화의 과정 가운데 온전한 성화에 도달하는 것이 감리회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일치한다. 이 완전의 열매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한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완전한 사랑으로서 하나님 말씀에 일치하는 사랑으로서 이런 완전은 칭의 뒤에 가능하며 우리가 죽기 이전에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에 이뤄진다.

이 땅에서의 완전이다. 요한 1서 9절처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된 상태이다. 죄의 뿌리까지 소멸된 상태, 내적인 죄가 소멸된 상태이며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남아 있지도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물론 연약함과 실수, 유혹 등으로 무의식적 죄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정교회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동방정교회에서의 성화의 완전은 이 땅에서의 완전이며, 성령의 충만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며, 그리스도의 삶을 이 땅에서 재현해 내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완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도 오직 하느님의 것으로 완전한 신자라도 하느님과 동일한 궤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완전은 계속 향상되며 더 빨리 자랄 수도 있는 정지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완전은 잃어버릴 수도 있기에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완전의 전후에는 항상 점진적인 선행이 있고 그 과정 중에는 즉각적인 2번째 변화들이 있고 그것을 토하여 완전에 도달하게 된다.

2.9. 영화(榮化, Glorification)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죽은 자의 부활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고, 그때에는 이 세상에 황폐하게 될 것이고 땅의 몸이 하늘의 몸으로 육체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 될 것이다. 중생하여 성화의 길을 걷는 성도들은 약속된 영생을 받는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그리스도인의 완전과는 달리 절대적 완전이다.

2.10. 타락의 가능성

존 웨슬리의 구원론의 독특한 점은 구원의 단계라는 것이 그 자리에 정지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그리스도의 완전의 단계에 있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믿음의 현재성과 지속성을 강조한다. 이는 웨슬리가 예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받은 구원을 웨슬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난 자의 위대한 특권(Sermon,The Great Privilege of Those That Are Born of God)` 라는 설교에서 요한 1서 3장 9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로부터 난 자...... 이 사람은 그 상태를 보전하는 동안 단지 죄를 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씨가 그 사람 안에 있는 한 하느님께로 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자발적이고 고의적인 죄이다.)

그럼에도 웨슬리는 동시에 경험적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죄를 범할 수 있고 실제로 죄를 범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 예로 다윗의 밧세바의 간음과 그 과정의 살인, 바르나바가 자신의 조카 마르코로 인한 바울로와의 갈라짐,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의 등장으로 인하여 위선을 할 것 등등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범죄의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은혜로 자신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부여된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함으로 처음에는 소극적인 성향의 내적 죄악, 즉 자신의 속에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불일 듯 일으키지 않고 항상 깨어 기도하지 않으며, 하느님이 위를 향해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 죄를 범하다가 점차적으로 적극적인 성향의 내적의 죄, 곧 자기 마음이 사악함으로 기울어져 어떤 악한 욕구나 기질에 양보하는 죄에 빠져들다가 마침내 '믿음을 잃고' 결국 외적의 범죄를 짓게 된다.

이 믿음의 상실은 스스로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에 대한 태만, 곧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내적 죄들에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이다. 루터나 칼뱅의 칭의에서 그리스도인의 의지는 성령의 노예의지로 바뀌었다는 것과 달리 웨슬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느님이 허락했고, 은총에 응답하여 끊임 없이 성화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죄를 정복해나가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 즉 회개가 지속되어야 한다. 사람의 거룩한 삶은 자신의 의지나 공로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 회개도 하느님의 값없이 주는 전능하신 은혜가 먼저 역사하시고 매순간 우리와 동행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2.11. 오해와 해설

간혹 웨슬리의 신학사상에 대해서 그의 원죄론이 "파괴" 의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웨슬리의 원죄론에 있어서 인간은 영혼, 정신, 모든 내적 외적 움직임의 원리가 부패했고 거기서 모든 기질과 생각과 행동이 악하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원래 형상이 선택의 오용으로 부패한 것이지 이것이 파괴된 것은 아니다.

또한 웨슬리가 구원의 전체 단계에서 유독 중생만을 강조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해석이다. 웨슬리의 신학사상 중에서 하나만 강조하기에는 그 순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중 하나라도 빠질 수 없다. 당장 웨슬리의 신학적 검토를 해 보면 구원의 순서가 단계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본다면 하나만 강조하기에는 서투른 해석적 방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3. 은총의 수단 (성사론)

존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 사제로서, 성공회의 전례 회복 운동(옥스퍼드 운동)의 시초로 볼 정도로 성사( 세례성사, 성체성사)를 강조한 인물이다.

초기 메소디스트 운동의 시작이라 볼 수 있는 홀리 클럽(Holy Club) 때의 클럽 구성원을 조롱하는 별명 중 하나는 성사주의자(Sacramentarian)였다. 즉 웨슬리는 초기 종교개혁자들 중 츠빙글리를 제외한 루터 칼뱅처럼 성찬례를 중시한다(그렇다고 츠빙글리가 성찬례를 경시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메소디스트(Methodist) 25개 신조 (Article of Religion)의 제16조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식(badgees) 혹은 표징(tokens)이며 또한 은총의 확실한 표지(signs)이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선한 뜻이다. 이 성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며, 그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생동감 있게 되고, 강화되며 확증된다. 성사에는 두 가지 종류만 있을 뿐이다. 첫째는 세례이며 둘째는 성찬례다.

그는 세례는 개인적 성사이며 일생에 한 번 이루어지는 일회적 성사로 보았고 성찬례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은총의 수단으로 보았다. 웨슬리는 이 성찬례를 자주, 곧 주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시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동시에 개인에게 큰 은총을 가져다주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는 공동의 식사이며 서로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이 성만찬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알고 죄의 용서를 확신하게 되며, 그 죄로부터 자유롭게 한다고 권면한다. 그는 천주교의 실체변화(화체설) 교리에 동의하지 않고 당시 영국 성공회의 기본 입장[17]과 다르지 않는다. 그는 어머니 수산나의 성만찬에 대한 이해에 관한 편지를 받고 동의하며 이렇게 답변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 떡과 포도주 안에 포함된다는 주장(화체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믿음으로)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습니다. 비록 그 하나됨이 너무나 신비한 일이긴 해도 말입니다.

존 웨슬리는 영성체를 할 때에, 올더스게이트 복음적 회심 체험 전인 미국 조지아 선교 당시에, 성찬례 참여 조건은 영국 성공회 성직자에게 세례를 받을 것, 미리 성직자에게 통보할 것, 성찬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는 자는 일정한 훈련을 받을 것 등의 조항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나 복음적 회심 이후에 메소디스트 부흥운동(Methodist Mobement)이 본격화 될 즈음에는 세례를 더 이상 성찬례에 참여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삼지 않았다. 즉 열린 성찬례(Open Comunion)을 했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성찬례 세례의 유무와 상관 없이 사람의 죄성을 일깨우고 새로운 삶으로 변화할 수 있게 된다고 확신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든 어떤 수준이든 믿음을 갖고 성찬례에 임한다면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으며 그 분이 주시는 은총으로 영혼이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전도의 수단으로 삼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무의미하게 성찬례에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하고 할 수만 있다면 기도로 준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것을 권면했다.

이런 열린 성찬례에 초청하는 찬송시로 동생 찰스 웨슬리는 이렇게 썼다.
죄인들이여 복음의 잔치로 나아오라. 모든 영혼들은 예수의 손님들 하느님이 모든 이를 부르시니 숨지 말고 나아오라. 복음 잔치로 나아와 참예하라. 죄에서 구원을 받으라. 예수 안에서 주의 선하심을 맛보라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 너의 눈 앞에 서 있는 그 분을 보라. 피 흘리시는 어린양을 보라. 그분의 사랑은 너를 기다린다. 값없이 주시는 은총으로 구원을 받으라.[18]

4. 어록

이성적인 사람은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 감각을 통해 세상을 포괄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자연을 통해서 신을 인식할 수 있는가? 자연인은 자연을 보고 관찰하고 인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을 하느님의 피조물로 인식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가르침을 통해서 자연을 하느님의 창조물이라고 하는 새로운 실제를 지각하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초자연적인 확실한 증거, 곧 믿음으로 알 수 있다.
자기 신앙으로 똘똘 뭉친 것은 거짓 체험이다. 진짜 체험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서 내가 변화되는 체험,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변하는 것이며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되뇌이는 것은 거짓이다. 하느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하느님과의 교제이며, 하느님을 체험하면 그는 즉시 변화되고 하느님 안에 거하고 하느님도 그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 성령이 함께하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진 자가 그것을 감추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감추어질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웨슬리의 설교 중에서


5. 관련 교단

6. 관련 문서


* 추가

민창근 목사가 지은 노래들이 있다.

존웨슬리의 신앙따라
https://m.cafe.daum.net/cjcmc/5Im8/1876

감리교정신
https://m.cafe.daum.net/cjcmc/5Im8/1899



[A] 어디서, 누구에게 부제, 사제서품을 받은 지는 불명이다. [A] [3] 짧게 "세계는 나의 교회다(The world is my parish)."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는 명언이다. 보통 'parish'를 '교구'로 번역하여, 이 말을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말로 옮기지만 지역 교회의 단위인 교구를 가리키는 영단어는 diocese이지 parish가 아니다. parish는 diocese보다 좁은 의미로, 천주교에서는 본당을, 성공회에서는 전도구를 뜻한다. 이 말은 존 웨슬리가 영국 국교회의 개별 교회에 구애받지 않고 복음을 전하겠다는 의미를 넘어 주교가 아닌 신부로서 신자들을 세심히 살피겠다는 뜻으로 한 것이다. [4] is와 God 사이에 접속사 that이 생략되었다. [5] 일제 강점기 외래어 한글 표기 관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장 칼뱅을 '요한 칼빈'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웨슬리는 영국인이기 때문에 '존 웨슬리'라고 읽어주는 것이 정확하다. [6] 성공회에서는 종교개혁 이전인물들의 날은 축일로, 이후 인물들은 정확히는 기념일로 지킨다. 단 종교개혁 이후 인물도 신명(세례명)으로 선택할 수 있다. [7] 사실 웨슬리안 교파라는 용어는 없다. 존 웨슬리에 의해 세워진 교단은 감리회이지만 감리회로부터 성결 운동이 발생했고 오순절 운동, 구세군 등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침으로써 웨슬리의 신학과 사상이 영향을 미친 개신교 교파는 감리회, 성결교회(성결교회는 미국에서 나사렛 성결교가 처음 생겼고, 일본 동양선교회가 한국으로 선교하면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성결교는 웨슬리의 사상을 따르고 있지만 나사렛 성결교와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다.), 순복음(한국에서 가장 큰 오순절 교단), 구세군 등 그 수가 많다. [8] 루터교회의 경건주의 그룹 [9] 사실 Methodist는 웨슬리주의자 전용 멸칭이 아니라, 당시 영국 국교회 청교도 교회의 침체를 비판하며 등장한 원칙주의에 입각한 개혁가들을 싸잡아 비꼬는 말이었다. 청교도 중 개혁을 주장한 그룹과 성공회 내부의 칼뱅주의자들이 중심이었다. 웨슬리 파도 그런 부류라고 묶인 것. 초기에는 칼뱅주의자들과 함께했으나 웨슬리가 독자적인 신학관을 표방하여 갈라선 것이다. 웨슬리파의 후신인 감리회는 잉글랜드 북동부 일부지역, 이외의 나머지는 칼뱅주의 Methodist들이 활동했다. 이 내용은 『옥스퍼드 영국사』에서 대략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국내에서 영국사학회가 번역했는데, '칼빈주의 감리교'라는 괴이한 번역어를 썼다. 그 원인은 당연히 감리회가 교단명으로 쓴 Methodist가 감리회란 의미로 굳어진 것. 칼뱅주의 Methodist들의 활동은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을 통해 간략히 살펴볼 수 있다. [10] 성화는 종교개혁 시기 칼뱅이 강조한 것이었다. 『기독교 강요』에서는 초판부터 성화에 대한 내용이 고작 한두 줄로 언급된 이중예정에 비하여 더 많은 분량으로 서술되어 있다. 성화의 개념은 전통적인 가르침에 가까운 것인데 당시 가톨릭 미사 성사에 참여하여 성화된다고 가르쳤다. 칼뱅은 성화를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의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개념으로 본 것이다. 즉, 성사의 의미에 흡수되어 가던 개념을 종교개혁 시기 칼뱅이 순종 훈련의 과정으로 강조한 것이다. 정교회에서는 "신화"라는 개념으로 가르친다(『정교회 교리서』에서 볼 수 있으며, 개신교의 순종 훈련과 가톨릭의 성사 참여의 중간 느낌이다. 읽어보면 재미있다. 시간의 개념이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가 없으며, 모든 시간(과거에서 미래까지)이 하나님 앞에서는 현재와 같이 펼쳐져 있고 교회의 신자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서술도 있다.). 다만 '완전'이란 개념은 웨슬리의 독자적인 것이다. 어디까지 성화되어야 완전한지는 웨슬리조차도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지만. 이외에도 칼뱅이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성찬을 할 것을 주장한 내용도 초판부터 수록했다. [11] 칼뱅주의자가 주류였으며 웨슬리를 지지했던 성직자들은 스스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라 자처하기도 했다. 이미 찰스 1세의 왕권신수설을 옹호하며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공적으로 지지했던 윌리엄 로드 캔터베리 대주교 이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자리잡았다. 또한 왕정 복고 이후로는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더는 이단으로 처벌되지 않았다. 존 웨슬리의 출신 지역이 윌리엄 로드 대주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지역이기도 했고. [12] 대표적인 칼빈주의 감리교도로 조지 휫필드를 들 수 있다. 휫필드는 본래 웨슬리와 절친한 사이로 함께 감리교 운동을 일으킨 인물이었으나, 웨슬리와 달리 휫필드는 구원론에 있어서 철저히 칼빈주의를 따랐기에 신학적 노선 및 여러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웨슬리와 결별하게 된다. 그럼에도 휫필드는 일평생 웨슬리를 존경한 걸로 알려져있다. 현대의 대표적인 칼빈주의 감리교도는 마틴 로이드 존스가 있다. 아예 칼빈주의 감리교라고 불리는 교단도 존재한다. [13] " 현대 미국 개혁주의 부활" 58-60쪽 [14] " 한 번 받은 구원 영원한가" 217-219쪽. [15] 원죄 후 인간의 잔존 자유의지는 이미 서기 529년에 보편교회 자신에 의해 공식적으로 완전히 부정되었으며, 누가 하든 현재 잔존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이 즉 세미펠라기우스주의이다. [16] 다만 서기 529년 오렌지 공의회에서 잔존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 자체가 세미펠라기안으로 규정되었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현재 보편교회의 의화론에서 논하는 자유의지는 펠라기우스주의와는 애초에 그 결이 다르다. [17] 성공회의 신앙고백문 39중 28조는 빵과 포도주가 성찬례를 집전하는 성직자의 축성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실체변화 교리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표하고, 빵과 포도주에, 그것을 받는 자의 믿음 가운데 그리스도가 성령의 능력으로 임재한다고 가르친다. [18] The United Methodist Hymnal (The United Methodist Publishung House, 1989) No.616 // 김동환.(목사 웨슬리에게 목회를 묻다.).KCM.2014.P307-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