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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Royaume de France Monarchie de Juill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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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국기 | 국장 | |
1830년 8월 9일 ~ 1848년 2월 24일 | ||
7월 혁명 이전 | 2월 혁명 이후 | |
부르봉 왕정복고 | 프랑스 제2공화국 | |
국가 | 파리의 노래 | |
위치 | 오늘날의 프랑스 | |
수도 | 파리 | |
정치체제 | 입헌군주제 | |
국가원수 | 프랑스인의 왕[1] ( 루이필리프 1세) | |
언어 | 프랑스어 | |
종교 | 가톨릭 | |
민족 | 프랑스인 | |
주요사건 |
1830년
7월 혁명으로 설립 1848년 2월 혁명으로 타도 |
|
통화 | 프랑 |
[clearfix]
1. 개요
Monarchie de Juillet.1830년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조를 타도하고 루이필리프 1세를 왕으로 세운 입헌군주제 왕정. 루이필리프가 오를레앙 공작이었기 때문에 부르봉오를레앙 왕조, 또는 오를레앙 왕조라고도 한다. 1848년에 2월 혁명으로 붕괴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신설된다.
2. 역사
2.1. 7월 혁명과 샤를 10세 복고왕정의 소멸
루이 18세 이후 왕위에 오른 샤를 10세는 열렬한 왕권신수론자였다. 그는 의회의 폐지 및 언론 통제 등을 시도하였고, 이에 프랑스 전역에서는 부르봉 왕가에 대한 반감이 커져만 갔다. 이러한 와중에 1830년 5월 하원의원의 선출을 위한 총선이 있었고, 자유주의자들이 대승을 거둔다. 샤를 10세는 의회를 해산시키려고 했지만, 이는 이미 부르봉 왕가에 대한 반감이 커져있던 상황에서 기름에 불을 끼얹는 꼴밖에 되지 않았고, 언론인과 지식인 등의 부르주아 계층과 함께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위는 곧 무장봉기로 확산됐고, 파리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진다. 결국 샤를 10세는 폐위되고 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가 시민들의 왕으로 오르면서 7월 왕정이 열리게 된다.2.2. 의회군주제
루이필리프 1세는 자신을 "프랑스의 왕"이 아닌 "프랑스인의 왕"으로 규정하였고, 국왕이 된 것도 의회의 선출을 통해 이뤄져서 프랑스의 의회를 존중할 것과 프랑스를 전제군주제가 아닌 확실한 입헌군주제 국가로 공고히 할 것을 약속하였다.7월 혁명 이후 루이필리프 1세와 혁명의 리더들이 가장 먼저 대헌장을 개정해 제도를 온전한 의회군주제로 전환한다. 사실 7월 혁명 이전에도 복고왕정의 첫 왕이었던 루이 18세가 헌법 구실하는 대헌장을 작성했었고, 양원제를 도입해 루이 14세 시절에 비할만한 전제왕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왕의 권력은 아직 막강했었고, 특히 상원의원같은 경우에는 왕이 임명하던 거라 독립적인 왕권의 견제세력이라 보기엔 어려웠다.
루이 18세가 국민에게 "양도" 내지 "하사"했던 대헌장은 이제 국민과 왕 사이의 계약으로 여겨졌고, 강력한 왕권을 보장했던 14조는 이내 삭제되었다. 왕의 특권 중 하나였던 법률안 발의권은 이제 의회에게도 주어졌고, 가톨릭교는 더 이상 국교가 아니게 되었다. 상원의원들은 여전히 왕이 임명하였으나 상원의원 타이틀은 더이상 세습되지 않았다. 7월 왕정의 문을 연 7월 혁명은 부르주아 계층이 주도한 부르주아 혁명이었고, 그에 따라 상위 부르주아(haute bourgeoisie)라고 불리는 금융자본업자들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때도 선거권은 납세액을 기준으로 일부 시민들에게만 주어졌으니, 유권자는 전체 인구의 0.7%에 불과했다.
2.3. 7월 왕정의 타도
이에 시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노동자 계층들의 불만은 커져가면서 투표권 확대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해서 일어났고, 이러한 시위세력은 당시 새로운 사상인 아나키즘 및 공산주의와 결부되어 왕정 자체를 위협하는 움직임으로 번져나가게 된다. 이에 루이필리프는 결사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과 같은 강경대응을 하지만 점점 더 높아져가는 투표권 확대의 목소리를 억누르기에는 부족했다. 1848년 2월 22일 수도 파리에서는 투표권 확대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부가 이 시위를 원천봉쇄하려고 시도하자 7월 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프랑스 2월 혁명이 발발한 것. 그렇지만 7월 혁명과의 차이가 있다면 7월 혁명 당시에는 군주제 자체는 유지하되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이번 혁명에서는 아예 군주제를 철폐하고 공화정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목표였다는 점이다. 결국 루이필리프는 왕위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알퐁스 드 라마르틴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주의자[2]들이 프랑스 제2공화국을 수립한다.3. 사회
3.1. 경제
은행가·자본가 위주의 사회구조였던만큼, 전반적으로 농민·노동자들은 권력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었다. 국가의 주요정책들도 부르주아들에게 유리하게 수립되었다. 파리는 런던과 함께 유럽 금융 시장의 중심 무대가 되었고 전국적으로 철도 건설을 비롯한 각종 토목사업이 활발히 진행됐다. 반국유화된 철도 기업들은 파리-오를레앙 철도와 파리-루앙 철도를 건설했다. 한편 나폴레옹 시기 이전부터 이미 시작됐던 산업 혁명은 7월 왕정 시기에 본격적으로 가속도가 붙었지만 영국이나, 후일 독일 제국의 엄청난 발전도에 비하면 높지 않은 수준이었다.[3]물론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프랑스도 이런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적으로도 순위권에 들 정도로 경제적으로 능력있는 국가였고 전체적으로 압도적인 경제력을 가진 서유럽에서도 강력한 국가였다. 일부 자본은 영국의 투자에 의존하는 형태였지만 유럽에서만 보면 오히려 투자를 가장 많이 하는 국가였고 2차 산업 혁명이라고 불리는 각종 중공업 및 화학공업의 발전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서유럽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산업 혁명이 발발한 후에도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농업이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농업 중심 국가였다.[4] 종합적으로는 기본적으로 인구도 많았고 산업도 상대적으로 발전한 편이어서 순위권의 국력을 보였다.
산업 혁명 초기는 물론이고 나중에도 많은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국가자본주의적인 성향과 자유방임주의적인 성향이 나타나 노동자들의 작업조건은 문제가 많았고 이에 노동자들은 불만을 품고 대규모 시위[5]를 일으켰지만 정부에서는 무력까지 동원하면서 강경하게 이들을 찍어눌렀다. 이에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공산당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상을 대표하는 사상가가 바로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3.2. 문화와 사상
또한 인쇄술을 바탕으로 언론과 출판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프랑스 문학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오노레 드 발자크, 빅토르 위고와 같이 프랑스가 자랑하는 대문호들이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 이 시기이며 유럽 전역을 휩쓴 낭만주의 사조와 결합되어 시, 미술, 음악 등에서도 많은 예술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다.그 외에도 수많은 정치 사상가들에 의해 이상적인 정부 형태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진 때이기도 하다. 주로 왕권주의자들이 신봉하던 낭만주의는 극단적인 이성과 이상주의를 배척했고, 전통, 종교의 미덕, 국민간의 박애와 국가주의를 강조했다. 이들은 혁명의 이상이 끝없는 사회적 불안정을 초래한다고 믿었고, 개인의 권리를 강조함에 따라 전통적인 가치관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낭만주의자들은 계몽주의의 신랄한 비판자로써 인간을 추상적인 개체로 보는 대신, 개인이 속한 가족, 국가와 역사와 문화, 종교에 의해 빚어진다고 믿었다. 고로 국민들은 나라에 대한 애착을 보여야만 하며, 반대로 국가는 국민들의 애국심으로, 또 사회의 위계질서로 유지된다고 믿었다.
3.3. 정치 이념 구도
정치판은 극우파에 속했던 법통주의자(Légitimisme), 중도파였던 오를레앙주의자(Orléanisme), 극좌파 공화주의자(Républicanisme), 사회주의자(Socialisme)와 공산주의자들로 나뉘었다. "왕보다 더 왕권주의자"였던 법통주의자들은 샤를 10세의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 믿었고, 가톨릭 교회와 사회적 위계에 기반한 안정을 추구했다. 실제로 이들은 프랑스 혁명을 경멸했으며 "프랑스 건국 이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 칭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샤토브리앙, 조제프 드메트르, 빌렐을 들수 있다.오를레앙주의는 온건 오를레앙주의와 진보 오를레앙주의, 이렇게 두 분파로 나뉘었다. 프랑수아 기조, 카시미르 페리에로 대표되는 온건 오를레앙주의자들은 대헌장의 개정안에 만족했고, 루이필리프 1세의 총애를 받아 내각에 오래 군림할 수 있었다. 진보 오를레앙주의자들은 1830년의 개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했고, 왕을 유지하되 왕권은 줄이고 선거인단을 늘려야 한다고 믿었다. 오를레앙주의는 왕권주의와 프랑스 혁명을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본 것으로, 실력본위사회를 주장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이었으나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이었다.
복고왕정 이후로 공화주의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으며, 프랑스 국민 대부분에게 공화주의는 전대 공화국의 공포 정치를 연상케 했다. 공화주의자들은 위계질서에 반대했고, 철저한 평등사회를 갈망했다. 오를레앙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실력제일주의를 지지했으나, 그들과는 달리 사회적 불평등, 노동자의 권리, 대중 교육의 중요성 등 사회적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7월 혁명 때 처음 창설된 국민들의 친구 사회 ("Société des amis du peuple"), 인권 사회 등 기구에서 불법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대부분 중소 부르주아 계층과 소상공인들로, 기존 진보 오를레앙주의자였던 라마르틴, 뒤마같은 문호들과, 미슐레같은 역사가들을 위주로 구성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오늘날 사회주의하면 생각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아니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들은 사회의 문제들을 해소할만한 해결책을 찾는 것보다 사회적 이상을 꿈꾸었고, 폭력없는 혁명을 갈망했다.[6] 평화적인 성향의 일환으로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 혁명에 관해서 중립적이거나 심지어 비판적일 때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생 시몽, 오귀스트 콩트 등이 있다.
[1]
'
프랑스의 왕(roi de France/King of France)'이 아닌 '
프랑스인의 왕(roi des Français/King of the French)'이다. 프랑스의 왕은
왕권이 신에게서 부여받아 왕국 자체가 국왕의 소유라는 뜻이 있으나, 프랑스인의 왕은
왕권은
인민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뜻이 내재되어 있다.
[2]
일단 온건 공화주의자이긴 했지만 루이필리프 치세에도 협력했었고 나폴레옹 3세의 치세에도 협력하는 등 입헌군주제도 인정했다.
[3]
여담이지만 그래서 영국이나 독일에서 부르주아라고 하면 보통 산업 자본가 계층을 일컫는 데 반해서 프랑스의 부르주아는 금융 자본 계층이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그렇다고 영국이나 독일이 금융 자본이 부족했다는 건 아니고 그만큼 모든 것에서 뛰어났다는 말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4]
1,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프랑스가 독일에 비하면 전력상으로 밀렸던 원인 중의 하나가 이렇게 뒤쳐진 산업구조였다. 물론 시대에 뒤쳐진 전술 탓이 더 크긴 했지만
[5]
1831년 임금인상과 작업환경 개선을 요구하면서
리옹에서 방직업 노동자들이 일으킨 시위는 세계 역사상 최초의
파업으로 기록됐다.
[6]
이러한 이유로
카를 마르크스는 후일 자신의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조해 이들을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경멸조로 칭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