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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03 13:25:02

오쿠보 도시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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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久保 利通
분세이 13년 8월 10일( 1830년 9월 26일) - 메이지 11년( 1878년) 5월 14일

1. 개요2. 생애3. 평가 및 일화4. 대중매체에서
4.1. 바람의 검심4.2. 라스트 사무라이4.3. NHK 대하드라마4.4. 기타

1. 개요

일본의 근대 정치인. 일본 최초의 내무경(内務卿). 내무경은 오늘날 일본 정부 총무대신의 전신에 해당하지만, '내무경'이라는 명칭을 쓸 때에는 오늘날 일본 총리로서의 기능도 맡고 있었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 일본 최초의 총리로 봐도 무방하다.[1]

사쓰마 번 부시(武士)[2] 출신.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이끈 중심 인물로 이들을 묶어 '유신삼걸(維新三傑)'로 부른다.

2. 생애

번주 나리아키라 밑에서 사이고 등과 뜻을 같이하며 개혁파 도막(倒幕:에도막부를 쓰러뜨림) 운동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다. 두 살 위인 사이고 다카모리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죽마고우였다.

1866년 이와쿠라 도모미와 제휴, 무력으로 막부 정권을 쓰러뜨리고 새 유신정권을 수립, 그 참의가 되어 판적봉환· 폐번치현 등 과감한 제도개혁을 단행하였다.

메이지 6년( 1873년), 정한론 정쟁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정한론파와 대립, 정쟁에서 패한 정한론파가 하야한 뒤에는, 내무성의 초대 내무경이 되면서 메이지 정부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철저한 관료주의 정책으로 우수한 관료가 어리석은 백성들을 지도해야한다는 신념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지조제도 개혁·식산진흥책 등을 추진으로 일본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기틀을 쌓았다.

한편 반정부적이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던 자유민권 언론을 탄압하고, 농민 봉기도 무력으로 제압했으며, 류큐 합병, 조선과의 강화도 조약 체결, 폐도령 발령, 메이지 정부의 재정 적자 해결 방안으로 사족 계급에게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여 사족들의 불만을 사서 사족의 난과 서남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 이것이 '오쿠보 정권'으로 불린 일본 최초의 절대주의 독재 정권체제였다.

서남전쟁 진압 후인 1878년 5월 14일, 도쿄의 아카사카 궁에서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키요이자카에서 자신이 마차를 몰던 마부와 함께 시마다 이치로 일당에게 암살당했다.[3]( 키요이자카의 변). 그의 장례식은 일본 최초의 국장으로 치루어졌다고 한다.- 키요이자카의 변에 대해서는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기 전 대접받던 사족 계급들 중 몇몇 사람이 메이지 정부가 되면서 시대가 변하자 이에 적응하지 못하여 오쿠보의 탓으로 돌리며 분노하여 저지른 사건이라고 한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추가바람

아무튼 그 당시로서는 드물 정도로 지성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서양문물에 밝고 지성적이며 냉정하게 판단하는, 무사보다는 현대인에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고. 또한 언변에 능해 신분에 관계 없이 사람을 잘 끌어모았다고 한다.

내무경을 맡던 1877년에는 울릉도, 독도에 대한 지적 편입 문제를 두고 태정관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서신을 보냈고, 후대의 ' 독도 무주지 선점론'이 허구임을 알려주는 ' 태정관 지령'[4]을 전달받았다. 이후 시마네현에 울릉도와 독도 편입 중단 지시를 했다.

3. 평가 및 일화

매우 근엄한 사람이어서 함부로 말도 못 붙이는 구석이 있었다고 한다. 복도를 지나가기만 해도 주변을 긴장케 만드는 존재였다고. 다만, 가정에 들어가면 딸 요시코(吉子)에겐 그 누구보다 다정한 아버지로서 일본남아 특유의 내유외강을 대표하는 인물상이었다.

단 좋은 의미만은 아닌데, 부심이 강한 인물이라서 지나치게 무게를 잡은 것. 유신 운동에 매진하기 이전 사쓰마 번저에서 근무할 때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우월감이 강해서[5] 신분이 낮은 무사는 거의 사람 취급을 안 했다. 퇴근할 때 숙직무사가 인사를 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그가 이끈 메이지 정부는 신분제 철폐에 앞장섰지만 정작 본인은 신분의식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이후 유신에 가담하면서 동료를 끌어들일 때는 신분을 가리지 않았지만, 막상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하급 무가 출신은 가차 없이 내버리거나 심지어 막부 측에 희생양으로 넘겨 버리기도 했다. 나중에 신 정부 내각을 결성할 때도 차별의식은 여전해서 더 이상 눈치 살필 필요가 없어지자 본색을 드러냈는지 유신 지사 중 상인 출신이나 하급 무가 출신은 내각에서 배제시키려고 노력했다. 유신군 측에 자금을 지원한 미쓰비시(三菱)나 미쓰이(三井)에서 심어놓은 인사들도 이 배제대상에 포함되어서 유신운동 때보다 많은 불만과 원한을 샀다. 나중에 어이없이 암살당하게 된 계기도 이 당시 배제된 자들이 획책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교활한 술책으로 선배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정계에서 쫓아내고 서남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는 다를 가능성이 높다. 사이고와의 분열은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같은 히젠, 히고, 토사 번 출신들이 오쿠보와 이와쿠라 도모미가 해외로 순방을 떠나기 전에 맺은 12개소의 약정을 무시하고 관제개혁이나 징병령, 조선사절 파견 문제와 같은 중요 사항을 멋대로 처리해버렸으며, 참의의 숫자를 각 번에서 1명씩 뽑아놓은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토사, 히고 번 출신을 늘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이고는 이 와중에 조선 사절로 자신이 가고자 했으며, 이 주장에 대해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이와쿠라는 메이지 6년의 정변을 일으켜 정한론 반대 의사로 조선사절 파견문제를 엎어버렸다. 이때 문제가 생긴다. 처음 사이고의 뜻에 따라 조선사절파견문제가 통과되자 이에 항의하여 오쿠보 도시미치, 오키 다카토, 오쿠마 시게노부가 사표를 제출했고, 이와쿠라가 조선사절파견을 뒤엎자 이에 항의하여 사이고가 사표를 먼저 제출하고 가고시마로 귀향, 사이고 정한파의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고토 쇼지로, 소에지마 다네오미 일행이 사표를 제출해버렸다. 한 번에 7명의 참의가 동시에 사표를 제출하는 초유의 사태가 생긴 것이다. 이에 메이지 덴노는 오쿠보 등의 사표는 반려했으나, 사이고 등의 사표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수 차례의 사족 반란이 터진 이후 결과적으로 사이고와의 대립은 서남전쟁으로 이어져 사이고가 죽는 원인이 되었고, 고향인 사쓰마 일대에서는 아직도 역사적 아이돌이나 다름 없을 만큼 사랑받는 사이고를 죽게 만든 자로 받아들여져 극도로 증오를 받은 탓에 그 시신도 가고시마 쪽에 가져와 묻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미국 남부에서 컨트리 음악과 공화당, 기독교를 욕하지 못하는 것처럼 가고시마에서는 가고시마 특산물인 돼지와 사이고를 절대 욕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오쿠보는 지방에서 그 사이고를 죽게 만든 천하의 간신으로 취급당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르는 그룹한테는 비정(非情), 잔인(殘)하다고 '忍人'이라고 불렸다. 사가의 난을 일으킨 에토 신페이를 '사라시구비'( 효수형: 잘린 목을 길거리에 전시해서 사람들이 구경거리로 만드는 형벌)에 처한 것은, 근대 국가를 지향하는 메이지 정부의 전근대적 만행이었다. [6]

이외에 지독한 골초였다는 증언도. 담뱃대를 매일 부지런히 청소해야 할 만큼 담배를 많이 피웠다고 하며, 위엄을 갖추기 위해 기른 자신의 수염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사진을 보더라도 수염을 매우 풍성하게 기른 후에 그것을 서양식으로 가꾸려 한 흔적이 보인다.

취미는 바둑. 실력은 꽤 잘 두는 편인데,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바둑에서 지면 주변 사람들도 눈치챌 만큼 심기가 불편했다고 한다.

그래도 상당히 가정적인 성격으로 자식들에게는 다정한 아버지로, 오쿠보가 오랫만에 집에 오는 날에는 아이들이 서로 오쿠보의 신발을 벗겨주려고 다투다 뒤로 벌렁넘어진 적도 있고, 매주 금요일 밤마다 친척들을 불러 만찬을 가졌는데, 오쿠보는 이 만찬을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즐겼다고 한다.

키가 178cm로 당시 일본인 치고 치고는 상당한 장신이었다. (다른 유신 3걸 중 하나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도 180cm의 거구였다.)

금전관리에 있어서는 충분히 권력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고도 남을 위치에 있었어도, 오히려 공무를 위해서는 빚을 얻어서라도 자신의 사재를 쏟아붓었다. 그가 죽은 후에 밝혀진 재산은 막대한 빚만 있어서, 오쿠보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금 운동을 펼쳐 겨우 그 빚을 갚고 남은 가족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오쿠보의 차남은 마키노(牧野) 가문으로 양자로 가서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가 되었는데,[7] 훗날 총리가 된 요시다 시게루는 노부아키의 사위가 된다. 시게루의 딸, 그러니까 노부아키의 외손녀인 요시다 카즈코(吉田和子)는, 2.26 사건 당시 외할아버지 노부아키를 위험에서 구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2.26 사건 참조. 카즈코는 아소 다로 일본 총리와 아소 노부코(麻生信子)를 낳았는데, 노부코는 토모히토 친왕과 결혼하여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를 낳았다.

4. 대중매체에서

4.1. 바람의 검심

파일:external/cdn.myanimelist.net/124875.jpg
애니판의 오쿠보 도시미치.

만화 《 바람의 검심》에서는 막부 말 이후 첫 재회로 사생결단을 내고 있던 히무라 켄신 사이토 하지메의 싸움 중 등장. 현실의 오쿠보하고는 달리 엄청나게 미화되었다.

위에서 언급된 것과 달리, 신분이 낮은 켄신을 차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공적을 높이 사서 육군장관 직을 권유할 정도. 켄신이 예전보다 많이 수척해졌다고 말을 건네는 것을 보아 비록 사츠마 쪽 유신지사였지만 죠슈 번 유신지사로 활약한 켄신과도 안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교토편 직전 마차를 타고 가다가 세타 소지로에게 암살당하고, 역사상에서의 진범인 시마다 이치로 일파는 자신들이 했다고 우기기 위해 시체를 난도질한 것으로 나온다. 등장이 많진 않았어도 위에서 언급된 실제 역사상에서의 어두운 행적들과는 달리 작중에서는 국민이 스스로 자신들의 길을 선택하는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상을 가진 정치가로 묘사되었다. 죽기 직전에 후쿠시마 현령과 나눈 대화에서 그의 이상이 나온다.
"국가의 기초를 다지려면 30년이 필요해. 이제까지 바친 10년은 제1기 '창업'의 시기였던 거야. 앞으로 10년은 '발전'의 시기. 내정을 정비하고, 국내의 내실을 다지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시기일세. 미력하나마 난 그 제2기 10년을, 온갖 역경을 헤쳐서 이루고 싶네. 마지막 제3기, '수성'의 시기는 후발 현자에게 맡기고, 동시에 의회를 열어 정치를 민정으로 이행. 그렇게 일본은 '국민국가'로 거듭나 유신은 그 진정한 완성을 보게 될 걸세."

이를 현령에게 들은 사이토 하지메는 ' 에도나 종래의 메이지처럼 천황이 모든 걸 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자신들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국가? 너무 장대한 이상이로군"이라고 짤막하게 코멘트하기도 했다. 성우는 오오츠카 요시사다/ 온영삼(애니메이션), 오오츠카 아키오 (PS유신격투편). 작가인 와츠키 노부히로는 오쿠보 도시미치를 대단히 높이 평가했는지 그의 말에 의하면, 바람의 검심에서의 생김새는 링컨을 참고하기도 했다고. 또 여담 삼아 일본의 에이브러햄 링컨에 비유하며 칭찬하기도 했다.

4.2. 라스트 사무라이

영화 《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는 간신배타입의 뚱뚱보로 나온다. 게다가 영화 자체가 오쿠보를 사리사욕을 위해서 일본의 옛 전통을 팔아치우려는 개화파의 우두머리로, 사이고를 존왕양이파 사무라이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좀 문제가 많다.

4.3. NHK 대하드라마

NHK 대하드라마 《 나는 듯이》(주연)와 《 신센구미!》에서도 등장. 사이고와 함께 사쓰마 번의 대표로 나오는데, 실제 모습을 반영하듯 상당히 깐깐하고 불친절한 인상이다. 문제는 사실상 사이고의 쩌리 역할이라는 것. 삿초 동맹이 성사될 때는 사이고만 나오는 데다 후에 등장할 때도 회담이나 정국 등을 주도하는 건 죄다 사이고의 몫이다. 더군다나 오쿠보가 불친절하긴 하지만 평범한 인상인데 반해 사이고는 후덕하면서도 뇌리에 보다 쉽게 각인되는 외모인 데다 사이고가 능수능란한 언변을 자랑하는 능구렁이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존재감을 더욱 어필하는지라 마치 사이고의 부하처럼(...) 보이는 안습함을 보여준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다룬 2018년 방영 예정 드라마인 세고돈에서도 주역으로 등장할 예정. 배역은 에이타가 맡았다. 종전처럼 깐깐하고 권위적인 캐릭터이지만 절친 다카모리에게만은 누구보다 든든한 맹우로 그려지고 있다.

4.4. 기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저 위의 사진을 참고했는지 저 사진처럼 독특한 수염을 달고 나온다.


[1] 내무경은 1885년 12월에 폐지되었고, 초대 '총리대신'은 이토 히로부미다. [2] 무사 [3] 마차 안에서 서류를 읽던 오쿠보는 시마다 일당에게 끌려나왔고, 오쿠보는 '무례한 놈'이라고 일갈했지만 말 그대로 난자되어 살해당했다. 전신에 16개의 검상이 있었는데 이 중 8개가 머리에 있었으며, 이때 시마다 일당이 얼마나 칼을 세게 휘둘렀는지, 오쿠보의 시신이 발견된 당시 칼날이 목을 뚫고 땅바닥까지 박혀 있었다고 한다. [4]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이며 일본과는 무관하다는 내용이다. [5] 오쿠보 본인은 사쓰마 번주의 가신 출신. [6] 에토 신페이는 메이지 정부에서 참의, 사법경(법무부 장관직)을 맡았고, 자신이 관여한 메이지 정부 신법률에는 효수형같은 전근대적인 악법을 폐지했다. 형법에도 없는 형벌이었다. 더구나 사법 제도를 무시하고 항소도 못하게 한 암흑 재판이었다. [7] 정작 노부아키 본인은 양아버지가 일찍 죽으면서 친아버지인 오쿠보와 계속 같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