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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초 조베르티(벽람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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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빈첸초 조베르티 Vincenzo Giober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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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1년 4월 5일 |
샤르데나 왕국 토리노 | |
사망 | 1852년 10월 26일 (향년 51세) |
프랑스 제2제국 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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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이탈리아 왕국의 정치인이자 성직자, 철학자로, 교황을 의장으로 하는 연방국가로서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2. 생애
빈첸초 조베르티는 1801년 4월 5일 이탈리아 반도 피에몬테 지방의 중심 도시 토리노에서 태어났다.본래 토리노를 수도로 삼았던 사보이아 가문의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인해 사르데냐 섬의 칼리아리로 몽진한 상태였기에, 조베르티는 프랑스 제1공화국 및 제1제국 치하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야 사르데냐 왕국의 백성이 되었다.
1825년에 사제 서품을 받아 성직의 길에 들어섰고, 이는 훗날 그가 정치인으로 전업한 후의 정치관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베르티는 당대 기준으로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급진적 사상이었던 공화주의에 부정적이었고, 혁명을 통한 급격한 사회 변동에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절대왕정까지 옹호할 정도로 반동적이고 구시대적인 인물은 결코 아니었고,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 개혁파였다.
그리고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대의에 공감하는 내셔널리스트이기도 했던 그는 교황 비오 9세를 의장으로 하는 연방국가로 이탈리아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비오 9세는 자유주의 성향을 드러내며 진보적 성직자 및 신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이탈리아인이 가톨릭 신자고, 이탈리아 내에 존재하던 국가들 역시 가톨릭을 국교로 삼았기에, 그의 구상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다.
1848년 혁명으로 인해 빈 체제가 붕괴되자 조베르티의 조국인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는데,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가 헌법 제정을 승인하여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이때 조베르티 역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내각에 입각하여 장관직을 역임했고, 1848년 12월 16일에는 총리직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내각은 출범 3개월 만인 1849년 2월 21일에 붕괴되었고, 총리직에서 물러난 그는 프랑스 대사로 부임하며 조국을 떠났다가, 그마저도 사임하고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이후 로마에서 교황령이 일시적으로 폐지되고 로마 공화국이 수립되었다가 망하고 교황령이 복고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교황 비오 9세가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에 극도로 부정적인 보수주의자로 변모했는데, 이로써 조베르티가 구상했던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연방국가로서의 통일 구상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실패한 사상가 조베르티는 다시는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에서 계속 여생을 보내다가 1852년 10월 26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3. 여담
이탈리아인에게는 나름대로 존경받는 위인이라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오리아니급 구축함 중 1척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다만 한국에선 본 인물이 딱히 유명하지 않아서 그런지, 나무위키에는 해당 구축함에서 모티브를 따온 게임 캐릭터 빈첸초 조베르티 문서가 본 문서보다 훨씬 일찍 만들어졌고, 다른 동음이의어 문서도 딱히 없어서 괄호도 없는 빈첸초 조베르티 문서가 해당 캐릭터의 문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