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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 Charles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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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
찰스 1세 (Charles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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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00년 11월 19일 | ||
스코틀랜드 왕국 던퍼믈린 던퍼믈린 궁전 | |||
사망 | 1649년 1월 30일[1] (향년 48세) | ||
잉글랜드 왕국 런던 화이트홀 | |||
재위기간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 | ||
1625년 3월 27일 ~ 1649년 1월 30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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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신장 | 163cm | |
배우자 |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1625년 결혼) | ||
자녀 | 찰스 제임스[2], 찰스 2세, 메리, 제임스 2세 & 7세, 엘리자베스, 앤, 캐서린[3], 헨리, 헨리에타 | ||
아버지 | 제임스 6세 & 1세 | ||
어머니 | 덴마크의 아나 | ||
형제 | 헨리, 엘리자베스, 마거릿, 로버트, 메리, 소피아 | ||
장례식 | 1649년 2월 9일 | ||
잉글랜드 왕국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 |||
축일 | 1월 30일 | ||
종교 | 성공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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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 must tell you, A subject and a sovereign are clean different things. If I would have given way to an arbitrary way, for to have all laws changed according to the Power of the Sword, I needed not to have come here, and therefore I tell you that I am the martyr of the people."
" 짐이 분명히 밝히건대, 신민과 통치자란 완벽하게 다른 존재다. 만약 짐이 모든 법률을 좌지우지하는 검의 힘으로 독단적 정치를 했다면, 여기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짐이 분명히 밝히건대, 짐은 국민의 순교자다!"
ㅡ 찰스 1세가 죽기 직전 남긴 유언.
" 짐이 분명히 밝히건대, 신민과 통치자란 완벽하게 다른 존재다. 만약 짐이 모든 법률을 좌지우지하는 검의 힘으로 독단적 정치를 했다면, 여기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짐이 분명히 밝히건대, 짐은 국민의 순교자다!"
ㅡ 찰스 1세가 죽기 직전 남긴 유언.
제임스 1세와 덴마크의 아나의 차남[4]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군주였다. 성공회에서는 성인으로 추대되고 있다. 축일은 1월 30일.
찰스 1세는 키가 작았으며, 늘 수줍음을 탔고 말이 적으며 내성적이었다. 잘 알려진 반 다이크의 초상화[5]보다 실제의 위엄은 덜했다고 한다. 신앙심이 돈독하였기에 찰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궁정 내의 저속한 분위기가 즉시 사라졌다고 한다.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고, 이 시각에 입권해 교권 강화는 곧 왕권 강화, 또 왕권 강화는 곧 교권 강화라는 입장이 강했다. #
당시 왕족의 결혼이 그랬듯이 즉위 직후 정략결혼을 했는데 상대는 앙리 4세의 딸이자 루이 13세의 누이인 앙리에트 마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 데다가, 왕의 측근들은 프랑스에서 온 왕비를 홀대하도록 왕을 부추겼기에 초기에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6] 그러나 왕비의 반대파가 죽거나 실각한 후에는 부부 사이가 좋아졌으며 자식도 6명을 두었다.
찰스 1세의 치세는 국제 정세와 국내의 기독교 종파 간의 갈등, 의회와의 권력 분쟁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으며, 이후 내전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지도하는 의회군에게 패배하여 재판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2. 재위와 통치
2.1. 부실한 왕권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의 선대왕인 엘리자베스 1세의 능력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결코 무능한 군주도 아니어서 그럭저럭 무난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기 전부터 이미 스코틀랜드의 왕으로서 통치 경력도 있었는데다, 튜더 왕조에게 물려받은 강력한 왕권과 청교도와 성공회를 단합시키는 꽤 훌륭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1세가 사망한 후 차남[7]인 찰스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이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사실 막 즉위한 찰스가 당면한 문제는 그의 아버지 대부터 올라가고 오랜 시간 동안 곪아 있었다. 튜더 왕조 시절 초기에는 헨리 7세 시절 대부분의 귀족들이 장미전쟁으로 몰락하고 왕실에서 패배한 귀족들을 숙청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면서 귀족 가문은 30여 개 수준으로 쪼그라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튜더 왕조는 재정적으로나 권력으로나 절대우위를 누리며 절대왕정 시대를 누렸다.
그러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 대외 팽창과 전쟁으로 재정적 수요가 폭증하면서 소수 귀족을 제외한 젠트리[8]에 대한 의존이 강해졌고 이들 세력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했었다. 이미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절대 왕정의 바탕이던 왕실 토지들은 젠트리들에게 팔아 넘기면서 기반이 약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의회에 손 벌리거나 백성들에게 욕먹는 새로운 과세보단 왕실소유 토지를 팔아치우는 걸 선호했기 때문. 따라서 후대 왕이 될 스튜어트 왕조 시기에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위상이 강화되면서 그들은 점차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는 본질적으로는 '스코틀랜드에서 들어온' 왕조였던 스튜어트 왕조의 한계였다. 스튜어트 왕조는 스코틀랜드에서도 그리 강력한 왕조는 아니었는데,[9] 때문에 잉글랜드 왕위를 운 좋게 얻기는 했지만 세력은 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0]
더불어 헨리 8세는 수장령, 특히 토마스 크롬웰 처형 이후로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를 헐값에 처분하며 군사 활동이나 사치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매입한 상공업 계층은 젠트리, 요먼 계층으로 성장해 의회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고 더이상 헨리 시대의 거수기 노릇은커녕 국왕권을 견제하기에 이르렀다. 청교도의 세력도 강성해져 국교회( 성공회)를 지지하던 국왕과 대립하는 판국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긴축정책과 해외 투자, 드레이크 등의 해적질 수입 등으로 이를 메웠었지만 아버지가 만든 빚이 하도 많다 보니 미봉책에 불과하여 잉글랜드 국왕의 재정적 기반은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 1세 본인도 전쟁을 하도 많이 벌이는 바람에 재정은 나날이 나빠지기만 했다.
제임스 1세는 이러한 상황에 스페인과의 전쟁을 끝내 외교관계의 변화를 꾀하는 한편 관세개혁 등을 통해 재정문제 해결을 시도했으나, 워낙 오랫동안 곪아온 문제인지라 쉽지 않았다. 게다가 유럽 대륙에서 30년 전쟁이 발발, 영국이 개신교 측의 일원으로 참가해야 할 상황이 오자 더욱 난처해진다. 제임스 1세는 일단 직접적인 참전은 거부하되, 자신의 동맹이었던 팔츠 선제후국에 대해서는 외교적으로 우호적인 자세로 접근한다는 구상을 꾀했다. 즉 외교를 통해 해결하려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30년 전쟁은 외교를 통해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확전되기만 했다. 그러자 제임스 1세도 진지하게 전쟁을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상비군 육성을 시도한다. 이 상비군 육성의 목적에는 왕권 강화도 물론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 참가하지도 않을 거면서 상비군은 왜 육성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의회는 심하게 반발하였으며[11], 왕이 자신들을 탄압하기 위해 상비군을 육성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제임스 1세는 이 문제로 의회와 자주 충돌하였고 의회를 여러 번 해산시켜버릴 정도로 갈등했다. 게다가, 당시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던 장로회와 청교도들은 영국이 마땅히 개신교 세력의 일원으로서 반가톨릭 성전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던 상황인지라, 사실은 제임스 1세가 평화와 외교를 우선하는 정책을 취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질 못했다. 제임스 1세와 의회가 얼마나 사이가 좋지 못했던지 제임스 1세가 병으로 죽었을 때는 이것이 암살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12]
2.2. 개인통치 시대
찰스도 아버지처럼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고, 아버지의 노선을 계속 밟았다. 하지만 찰스가 추진한 무리한 해외 원정이 줄줄이 실패하고 종교정책도 역효과를 내는 바람에 영국에는 악재가 겹쳐 갔다. 먼저 제임스 1세 시대 이후 청교도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를 받아들여, 재정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30년 전쟁에 참가해 스페인과 일전을 뜨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의회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화답했지만, 정작 중요한 전비는 내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제임스 1세 말기에 이미 의회가 한번 스페인과의 전비를 지출한 적이 있다는 것이고[13], 두번째는 찰스 1세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왕실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두번째 문제는 정말 심각해서, 헨리 8세 이래로 종교에 의한 피바람을 몇 번이나 맞았던 잉글랜드였기 때문에, 가톨릭교도인 왕비의 존재는 곧 찰스가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화하고 청교도 세력을 쓸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자리잡았다. 게다가 찰스 1세는 아버지처럼 가톨릭에 대해 매우 온건한 정책을 시행했기에, 사실 찰스 1세가 무늬로만 개신교도고 실제로는 가톨릭교도인거 아니냐는 의심에 시달려야 했다. 이는 의회가 찰스 1세를 더더욱 불신하게 되는 계기였다.여기에 찰스 1세는 종교적으로 더욱 확고하게 반청교도 성향을 드러냈다. 제임스 1세가 고교회파와 청교도 내 온건파를 밀어주며 '교파 간의 화합을 지향'하는 수준에서 그쳤다면, 찰스 1세는 아예 이단으로 여겨지던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대놓고 밀어주었다. 특히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하게 긍정하는 등 칼뱅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청교도와는 완전히 상극이라, '자기들 말에 반대하면 다 가톨릭'이라는 식의 극단적인 사고가 몸에 배어있던 청교도 세력으로서는 왕의 행보가 완전히 이뭐병으로 느껴지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실책들로 인해, 청교도 세력은 '잉글랜드가 가톨릭 사탄들에게 잠식되고 있다'는 식의 강박관념과 불안감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한술 더떠, 어떻게던 스페인을 향해 출발한 원정군은 카디스에서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는 어찌보면 예견된 수순이었는데,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 시절 한번 패배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럽 내 최강국 중 하나였다. 반면 잉글랜드의 경우 그때 이후로 제대로된 정규전을 치르지 않았고, 더욱이 섬나라인지라 전통적으로 육군은 취약했었다. 거기다가 재정 상태도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전비도 제대로 모으지 못했는데 출전을 갔으니 당연히 패배할 수밖에.
이 사건에 대놓고 의회는 실권을 가지고 있던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의 책임으로 돌렸다. 이는 곧 왕의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항해 찰스 1세는 의회가 전비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맞섰다. 그러나 의회의 분노가 워낙 큰지라, 결국 찰스 1세는 몇몇 관직에서 조지를 해임시키는 선에서 타협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결국 찰스는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일종의 전시 특별세금인 강제공채를 발행하기로 한다. 이 강제공채는 엄밀히 말하면 세금은 아니었지만, 전쟁을 위해 의무로 내야 했기에 사실상 세금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의회는 이에 반발해 '의회의 동의 없이는 과세도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찰스 1세는 '공익을 위해선 국왕은 대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고, 공개적으로 납세를 거부한 이들 중 주도자들을 잡아 투옥한다.
결론적으로 강제공채는 적어도 재정적인 측면에서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공채를 통해 전비를 끌어모은다 한들, 하루아침에 육군 최강국에게 이길 수는 없었던 노릇이었고, 결국 개신교 국가였던 덴마크가 전쟁에서 패배한 후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자, 스페인과의 전쟁 역시 흐지부지된다.
이후 찰스는, 자신의 신앙을 의심하는 급진 청교도 세력의 우려도 불식시킬 겸,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던 프랑스에 복수도 할 겸 프랑스의 개신교도 반란을 지원했다. 이때 프랑스의 라 로셸에서 농성 중인 개신교도를 지원했다가 대패한다.[14] 결국 이러한 실패들로 인해 세금 부담은 세금 부담대로 중해지는데 대외적 실패는 계속되는 악재가 쌓였고, 의회는 이를 핑계로 왕권을 약화시키려고 1628년에 권리청원[15]을 내놓는다. 결국 찰스 1세는 이를 수용한 후 전비 28만 파운드를 지원받았지만 이 역시 전쟁을 치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인데다가, 결정적으로 프랑스의 개신교도 반란군에 대한 2차 구원군을 준비하던 중 조지 빌리어스가 암살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원정은 이뤄지지도 못하고 반란군이 항복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된다. 이에 대해 의회가 찰스 1세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으며 '국왕의 관료 중 반역자가 있다'고 운운하기에 이르자, 결국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해 버린다.
의회를 열고 닫는 것은 왕의 권한이었기에 의회파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만큼의 분노와 불만을 쌓고 있었다. 그동안 찰스 1세는 의회의 승인을 피하기 위해 각종 명목으로 특별세를 거두며 재정을 충당했다.
2.2.1. 기독교 문제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칼뱅파 교육을 받았으나, 가톨릭에 우호적인 성향인지라 청교도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왕권 강화를 위해 39개 신조에 기반한 잉글랜드 국교회 일원화 정책을 지속하는 한편 가톨릭에 대해서도 온건책을 주로 사용했다. 이로 인해 급진 청교도 세력과 급진 가톨릭 세력의 불만을 불러왔으나, 제임스 1세 본인의 카리스마와 후술할 스코틀랜드 정책 덕분에 일단 그가 사망할 때까지는 종교 문제는 그다지 표면화되지 않았다. 다만, 제임스 1세가 청교도 내 온건파와 성공회 고교회파들을 대놓고 밀어주는 바람에, 급진 청교도 세력 입장에서는 제임스 1세의 정책에 더더욱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찰스 1세의 잘못이 있다면,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추겨 버렸다는 것이다.아버지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에서 의회와 대립했으나 통치는 원만하게 해냈으며 스코틀랜드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스코틀랜드에서 자란 만큼, 스코틀랜드를 잘 알기에 스코틀랜드인들을 다스리는 데는 능숙했고 애착심을 여러 차례 보이는 방법으로 스코틀랜드 귀족과 평민들의 신망을 받아 통치에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고서도 수시로 스코틀랜드를 방문했고 스코틀랜드의 유력 클랜 귀족들과 만남을 가지며 회유하면서 그들과 친분을 가지며 지지를 얻었기에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 자란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애착이 없었고, 스코틀랜드를 무시하는 바람에 그들의 불만을 불러왔다.
또한 찰스가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제임스 1세 시절 이래 큰 힘을 획득한 '고교회파(가톨릭의 전통을 일부 회복하려던 성공회 내부의 경향)'인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를 지명하자 분쟁은 커져만 갔다.
보통 윌리엄 로드가 성공회의 세력권에 침입한 청교도를 '박멸'하기 위해 그들의 코나 귀를 자르는 만행을 서슴치 않던 자였고, 장로회가 우세한 스코틀랜드 지역에 잉글랜드 성공회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두었으며, 이때문에 1639년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이는 상당부분 청교도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귀 자르기 사건은 단 한번 일어났으며, 이는 국왕에 대한 심각한 모독죄 때문이었지 단순히 청교도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최근 역사학자들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목이 아니라 귀가 잘린게 더 신기하다고 말할 정도다.
2.2.2. 스코틀랜드 문제와 반란
17세기 당시 스코틀랜드의 종교 지도는 상당히 복잡했다. 외견상으로나마 국교회의 이름 아래 통일된 잉글랜드와 달리 스코틀랜드는 로우랜드의 청교도-하이랜드의 가톨릭이라는 형태로 완전히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스코틀랜드의 종교 문제에 대해 찰스 1세가 개신교를 믿는 스코틀랜드에 자신의 정책을 강요했다는 식의 피상적인 이해가 남발하지만, 수적으로 따지면 순수한 청교도는 오히려 소수였고, 당시 대부분의 스코틀랜드 교회는 가톨릭의 전통과 청교도의 이론을 반반씩 혼합한 형태로 운영되었다. 제네바의 청교도 교회 등을 보며 청교도적 이상향 건설을 꿈꾸던 급진 청교도 세력에게 이러한 현실은 '타파해야 할 악'이었고, 제임스 1세와 그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이런 과격한 청교도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의 이름 하에 교회를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그러나 제임스 1세 시대에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스코틀랜드 교회 문제는 찰스 1세 시대에 들어, 특히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 소원하게 대하고, '이단'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대놓고 밀어주면서 다시 격화된다. 스코틀랜드의 강경 청교도 세력은 잉글랜드가 이제 개혁을 포기하고 '교황 없는 가톨릭'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믿었고, 자신들은 이러한 반동에 맞서 청교도적 개혁을 완수하고 지상에 천년왕국을 건설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청교도들은 찰스 1세에 대해 극단적인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후술할 스코틀랜드 기도서 사건으로 촉발된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종교문제를 해결하고 교회를 통합하기 위해, 새로운 기도서의 발간을 추진했다. 이 기도서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기도서를 기반으로 스코틀랜드 교회 및 청교도 목사들과의 협의를 통해 수정을 거쳐 반포될 예정으로, 스코틀랜드 개신교의 입장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었다. 흔히 켄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가 국교회를 강요하자고 선동하고 찰스 1세가 여기에 휘둘렸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 기도서의 발간은 그 자체로 이미 역효과가 되었다. 찰스 1세가 가톨릭 이단이며 잉글랜드를 가톨릭으로 반동시키고 있다고 굳게 믿은 스코틀랜드의 청교도들은, 이 기도서의 도입을 스코틀랜드 역시 가톨릭으로 반동화시키려는 시도로 이해했다. 하지만 정작 이런 불만을 품은 이들 중 기도서를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결국 1637년,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목사와 장로들은 7월 23일 에딘버러의 성 자일스 대성당에서 새 기도서를 이용해 첫 예베를 하는 때에 맞추어 이 기도서가 가톨릭의 내용을 담은 이단이며, 국왕이 스코틀랜드를 가톨릭 적그리스도들의 손아귀로 넘기려 하고 있다고 선동했다. 여기에 군중은 광분해 설교 중인 목사를 향해 격렬히 항의하며 돌을 던져댔고, 결국 목사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탈출해야 했다. 이 사건에 대해 과거에는 '찰스 1세의 강압적인 종교 정책에 대해 스코틀랜드인이 자발적으로 반발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았지만, 실상 남은 기록을 통해 이루어진 현대 연구에서 이 사건은 강경 청교도 지도자들이 군중을 고의로, 악의적으로 선동해 일어난 사건으로 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스코틀랜드 당국의 대응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이 사건을 단순한 불량배들의 소요로 보고 찰스 1세에게 보고했고, 이에 찰스는 그에 맞는 대응을 지시했다. 이 상황에서 이러한 대처는 필연적으로 사건을 더욱 키웠다. 그러자 강경 청교도들은 더더욱 군중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촉구했고, 스코틀랜드 정부의 대처가 지지부진해 지는 사이 군중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에 찰스 1세는 또다시 군중들이 모일 경우 강경하게 대처하겠다고 선언했고, 이에 군중들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로 인해 찰스 1세에게 우호적이던 온건파 청교도들마저 반기를 들게 되었다.
한편으로 찰스 1세는 30년 전쟁에 참여한 군인이자 유력한 스코틀랜드 귀족인 해밀턴 후작을 불러 스코틀랜드인과의 타협을 주선해 사건을 진정시키라고 명령했다. 이에 해밀턴 후작은 스코틀랜드로 떠났지만, 이미 왕이 적그리스도라고 굳게 단정한지 오래였던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타협이 먹힐 리가 없었다. 결국 그는 왕에게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찰스 1세는 기도서 도입을 전면 백지화하고 스코틀랜드 장로교 고유의 신앙고백을 인정한다는 사실상의 패배 선언을 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고, 결국 반란이 촉발되었다.
이에 대항하는 찰스 1세는 당연히 청교도들이 다수인 잉글랜드 의회의 도움 따위는 기대할 수 없었다. 잉글랜드의 강경 청교도들은 스코틀랜드인들의 분노에 공감했고, 찰스 1세가 강압적으로 정책을 강요한다고 느꼈다. 반면 스코틀랜드인들이 과민반응한다고 생각하던 온건파도 존재했다. 찰스 1세는 이 온건파의 협조만을 얻어 군대를 꾸려야 했고, 어떻게든 반란군보다는 많은 군세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대로 군대를 밀고 나갔다면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을 테지만, 반란군을 이끄는 알렉산더 레슬리는 30년 전쟁에 여러번 참전한 베테랑이었다. 그는 일부러 반란군이 국왕군보다 우월하다는 식으로 거짓 선전을 보냈고, 실전경험도 훈련도 규율도 부족해 무기와 수만 우월하던 국왕군은 곧 전의를 잃고 말았다. 곧 협정이 맺어졌지만, 스코틀랜드군은 해산하지 않았으며 청교도가 장악한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는 가톨릭의 유산인 주교제를 폐지하는 등 강경 청교도 세력이 원하는 급진적인 개혁들을 억지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결국 찰스 1세는 다시 전쟁을 준비해야 했으나, 돈이 없었고, 결국 의회를 소집했다. 이것이 바로 바로 밑 문단의 단기의회이다.
2.3. 단기의회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위한 특별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1640년 4월 13일 의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동안 불만과 분노가 쌓여온 의회의 청교도 세력은[16] 찰스 1세가 요구한 전쟁 예산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가 징수해 오던 다른 특별세를 심의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의회 내 청교도 파벌의 주도자인 존 핌(John Pym)은 우리나라를 교황에게 넘기려는 음모라는 근거도 없는 유언비어를 국왕을 상대로 늘어놓으며 아르미니우스주의 우대 정책을 포함한 찰스 1세의 모든 종교정책을 몰아세웠다.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면 때문에 애초에 의회의 청교도들도 타협을 원했던 적조차 없다고 본다.어쨋든, 의회의 여론이 '국내정책 시정이 우선이다'는 쪽으로 흐르자, 찰스 1세는 상원에 전쟁 예산이 더 앞선다는 것을 납득시키고 하원에 보조세를 성립시켜 준다면 선박세를 징수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이에 의회 내 온건파가 찬동했으나, 이대로 가다간 타협이 성립될 위기에 처한 청교도 세력은 자꾸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며 타협에 어깃장을 놓았다. 결국 찰스 1세는 추밀원 회의를 열어 또다시 5월 5일에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2.4. 장기의회
결국 찰스 1세는 새로운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이에 군대를 다시 소집했으나, 이제는 청교도들은 대놓고 군대에 사보타주를 가하면서 모든 군 장교들은 가톨릭 교황주의자들이다라고 병사들을 선동했다[17]. 이 선동이 아주 잘 먹혀, 국왕의 군대는 벌써부터 하극상과 폭력이 난무하고 규율은 개판이 되는 등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 꼬라지를 본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에 침입하여 북부 2개 주를 점령하자, 찰스 1세는 이를 인정하고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패배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찰스 1세에게 하느님이 벌을 내렸다는 징표로 받아들여졌다. 콧대가 짓눌린 왕은 요크에서 열린 귀족들의 회의에서 의회를 열자는 청원서가 제출되자 이를 받아들여, 다시 11월 7일 웨스트민스터에 의회를 소집하였다.다시 소집된 의회는 마침내 왕의 정책을 어떻게던 시정해야 한다는 합의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왕의 측근으로서 종교정책을 도왔던 윌리엄 로드를 탄핵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의회는 하나로 단합되지 못했다. 흔히 휘그사관의 영향을 받은 대중적 인식에서는 이 시절 의회가 모두 강경 청교도 세력이라고 오해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들은 영국 국교회에서 가톨릭적인 부분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개혁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우리가 잘 아는 그런 강경 청교도들은 여전히 극소수였다. 게다가, 당시 서민원과 비등한 권력을 가졌던 귀족원의 경우 더더욱 왕에게 우호적이었다. 여기에, 잉글랜드에 여전히 진주한 상태였던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국교회를 당시 개혁되고 있던 스코틀랜드 장로교와 똑같은 상태로 만들어 놓으라고 대놓고 무력시위를 벌였다(...) 보통 휘그사관에 따르면 이당시 의회파,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내세웠다고 하는데, 이 당시 청교도들의 종교의 자유란 내 교리를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자유에 가까웠다. 이들은 자신들의 교리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자 진리이기에, 가톨릭과 개신교 내 온건파를 모두 박멸하고 우리의 교리대로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천국에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이들이 내세우는 종교의 자유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의회에서는 여전히 온건파들이 존재했다. 특히, 강경 청교도들의 핵심적인 요구였던 '주교제 폐지'에 대해서는 내심 불만을 갖는 세력이 꽤나 존재했고, 이들은 파국을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특히, 스코틀랜드군이 군대를 이끌고 개혁을 강요하는 것에 민족감정의 문제로 인해 불쾌감을 느낀 잉글랜드인이 점점 많아지자, 결국 온건한 개혁을 추진하기로 타협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왕이 다시는 폭정을 펼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며 왕의 측근으로서 아일랜드에서 권위적인 통치를 펼친 스트래퍼드 백작[18]을 처형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체포하여 처형해 버렸다. 다만, 이 스트래퍼드 백작의 죄목이란 것을 이들이 찾지 못한 나머지, 의회가 반역자로 규정한 이를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있다는 초유의 법률을 지정한 뒤 그를 반역자로 지정하고, 왕의 동의도 없이 막무가내로 처형한 것이었다. 심지어 의회는 이 도중 프랑스군이 스트래퍼드를 구하러 잉글랜드를 침공한다는 택도 없는 헛소리를 군중에 살포해 대중을 광분하게 만들어 왕을 압박하기까지 했다.
찰스 1세는 이러한 의회의 초법적인 행위에 분노했고, 의회에서도 이런 급진 청교도들의 행위에 격분한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의 여론은 반으로 양극화되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에 의회 내 온건파의 주도자인 배드포드 백작까지 사망하자, 결국 타협은 물 건너가고 만다.
이후 의회는, 단기의회 시절과 같은 전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회는 최소한 3년에 한 번은 열려야 한다라는 규칙을 제정했다.
이렇게 이 의회는 1653년에야 폐회되는 장기의회가 되었고, 그 사이에 국가의 주권이 국왕이 아닌 의회에 있다는 이념이 등장하여 왕과 의회의 사이는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 그러나 이 이념은 아직까지는 강경 청교도들을 위주로 퍼져나간 이념이었고, 여전히 잉글랜드의 절대다수는 왕국의 주권은 국왕에게 있다고 믿었다.
한편, 찰스 1세는 이러한 극단적인 고립 상태를 타파하기 위해, 점점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한다. 이전에도 여러번 말한 것이지만, 당시 의회의 모두가 강경 청교도는 아니었다. 찰스 1세에게 대항한 이유도 제각각 달랐다. 강경 청교도들은 찰스 1세의 정책의 전면적인 폐지, 급진적이고 강경한 청교도 개혁 실시, 가톨릭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원들은 한두가지 정책상의 불만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만도 장기의회 초기의 '청소'를 통해 무효화되자, 이들은 더이상 왕과 대립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도를 모르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특히,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국왕을 대상으로 승리했으며 이제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이 열렸다고 믿었다. 이들은 대놓고 교회를 돌아다니며 성상 등 가톨릭적 표시가 되는 물건들에 대한 반달리즘을 저지르고, 국교회의 기도서를 욕보이며, 가톨릭식 전례복을 입은 목사들을 대놓고 모욕하며, 가톨릭교도에 대한 사적인 린치를 가했다. 심지어, 가톨릭교도에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특별한 표식을 하게 만들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는 후일 유대인에게 다윗의 별 문장을 차게 만든 차별정책의 시초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모든 성인 남성에게 영국 프로테스탄트 국교회를 수호하겠다는 맹세를 강요했다. 이는 사실상 전국민을 대상으로 사상검증을 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의회 내 온건파는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의회 내 온건파들 상당수가 청교도의 반대편으로 결집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청교도의 만행이 극에 달했다고 느꼈다. 이러한 기류를 느낀 찰스 1세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우대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온건파들이 원하는 대로 '기존 국교회의 질서를 유지할 적임자'로서 자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에 전국 22개 주의 온건파들이 기존 전례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청교도들의 만행을 멈추어 달라는 청원을 내며 화답하자, 국왕 역시 자신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형성되었음을 느꼈다. 마침내, 왕당파가 형성된 것이다. 이들은 휘그사관에 기반한 대중적 통념과 달리 의회주의에 반대하는 전제주의 귀족 세력이 아니었다. 물론 상원의 귀족들 대다수가 왕당파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역시 의회주의가 존중받길 원했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옛 전례와 기도서 유지, 즉, 기존 질서의 유지와 의회 권리 존중이었다. 반면 의회파, 즉 청교도가 원했던 것은 '교황주의자의 음모'로 불린 실체없는 무언가를 분쇄하고, 가톨릭을 잉글랜드에서 절멸시키며, 국교회에서 가톨릭의 유산을 모조리 파괴하는 것이었다. 학자들은 왕당파의 이념을 헌정적 군주주의, 의회파의 이념을 헌정적 의회주의라 부른다.
2.4.1. 아일랜드 반란
때맞춰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아일랜드는 예나 지금이나 가톨릭이 매우 강고한 지역이었고, 이는 1066년 이후 아일랜드로 건너간 노르만계 귀족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노르만계 귀족들은, 튜더 왕조의 기대를 배신하고 기존 토착 아일랜드인과 연합해 국교회를 강제하려는 잉글랜드 정부의 시도에 강경하게 저항했다. 이에 탄압이 뒤따랐고, 아일랜드인들의 반란도 뒤따랐다. 이러한 반발과 저항은 엘리자베스 1세 시절 가장 극단적으로 격화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아일랜드로 군대를 보내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말고 모든 가톨릭교도를 절멸하라고 명령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아일랜드인들이 게릴라전을 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민간인들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특히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도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가 굴복하지 않자, 아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교회 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을 조직적으로 아일랜드에 이주시킨 후, 토착 지주들의 땅을 강제로 강탈하고 이들에게 나눠준 뒤 다수의 아일랜드인을 여기에 농노에 가까운 처지로 예속시켜 플렌테이션 운영을 하게 만듦으로서, 사실상 아일랜드에 식민지 지주제를 이식해 버렸다. 이 식민지 지주제는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이식한 체제와 구조적으로 완전히 일치한다. 성군으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1세의 실체는 이런 것이었다.반면,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는 국교회 강요를 멈추고, 아일랜드에 훨씬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토착 귀족들의 불만에 귀를 귀울였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극단적인 칼뱅주의자였던 이주한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의 불만을 불렀다. 이들은 가톨릭을 믿는 다수의 아일랜드인을 언젠가는 국교회, 또는 개신교로 '정화'하고 그것이 안되면 모조리 절멸시켜야 한다는 극단적인 사상을 가진 이들이었다. 이러한 아일랜드의 양극화된 구조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반란을 불렀다.
과거 처형된 스트래퍼드 백작은 아일랜드 출신의 총독이었다. 그가 처형되자 아일랜드에서는 " 잉글랜드의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교도들을 학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찰스 1세가 의회에 굴복해 관용 정책을 취소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결국 반란이 일어났고, 아일랜드 의회의 설치, 종교의 자유, 토지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민중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든 불만의 근원지였던 프로테스탄트 농장들을 공격하고 파괴,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아일랜드 당국 역시 농민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러자, 기가 막힌 사태가 벌어졌다. 청교도들이 잉글랜드에서 "왕과 왕비가 프랑스와 짜고 개신교도들을 몰아내려 한다"는 소문을 유포한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1차대전 이후 독일 군국주의자들이 자국에 주둔한 연합국에 대해 그랬듯, 아일랜드에서 농민들의 반란에 의한 피해상을 온갖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언어로 포장해 선전했다. 이는 잉글랜드인들에게 민족감정을 불러 일으키기 참 쉬운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아일랜드 반란 지도자들이 '왕으로부터 받은 위임장'을 운운하자, 의회는 아예 대놓고 왕이 반역행위를 했다며 몰아붙였다. 물론, 위임장 따윈 없었다. 이에 한동안 잠잠했던 잉글랜드의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린치가 부활하고, 청교도들은 '교황주의자 악마 아일랜드인에 맞서서 조국을 수호하자'고 사람들을 선동했다.
찰스 1세는 사태 진정을 위해 자신이 직접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나섰으나, 의회는 역으로 국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의하고, 다시금 찰스 1세의 잘못을 200 개 조항에 걸쳐 시시콜콜히 나열하며 삼가 시정해 주십사는 대항의문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 항의문이란 것은 청교도들의 편집증적인 반가톨릭 음모론에 기반한 허무맹랑한 내용들이 대부분으로, 내용이란 곧 찰스 1세가 교황주의자들과 연합해 잉글랜드를 가톨릭화시키고, 개신교 신자를 박멸하며, 교황에게 나라를 넘긴다는 내용들이었다. 게다가 이 항의문이 의회에서 통과된 것도 휘그 사관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불과 10여표 차로 간신히 통과된 것이었다. 즉 이 시점까지도 의회에서는 의회파와 왕당파의 세력이 비등했던 것이다. 어쨋든, 이렇게 되자 격분한 찰스 1세는 결의문 통과를 주도한 다섯 의원을 체포하고자 몸소 근위대를 이끌고 의사당에 난입했으나, 의회는 의회 경비병들을 동원해 저지하며 국왕의 요구를 면전에서 묵살해 버렸다. 이는 왕권에 대한 의회의 본격적인 도전이라서 찰스 1세는 분노해 의회를 아작내기로 마음먹는다.
2.5. 잉글랜드 내전
이제 국왕과 의회 사이에 남은 것은 싸워서 이긴 쪽이 끝장을 보는 것뿐이었다.의회는 지방의 민병대 통솔권을 자신들에게 주는 법안을 결의했다. 이에 맞서 찰스 1세는 노팅엄에 가서 자신의 깃발을 내걸었다. 잉글랜드는 왕당파와 의회파 둘로 갈라졌다. 왕당파는 잉글랜드 북부와 웨일스에서 세력을 떨쳤고, 잉글랜드 남부는 대체로 의회파를 지지했다.
2.5.1. 1차 내전
내전은 처음에는 왕당파에게 유리했다. 의회파의 군대는 대부분 토호들이 각 지방에서 긁어모은 오합지졸들이었으며, 그나마 자기 고향 밖으로 출정하기를 꺼렸다. 더구나 여론도 마찬가지라, 청교도들이 지금까지 해온 만행과, 얼마 전 제출한 예의 '항의서'의 내용이 지나치게 억지스럽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왕당파 역시 그리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양측은 엣지힐 전투에서 졸전을 벌이는 등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644년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대활약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올리버 크롬웰이 이듬해 '신모범군'[19]을 조직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신모범군은 엄격한 규율[20]과 훈련, 그리고 높은 사기를 갖춘 군대였다. 특히 그들의 높은 사기는 종교적 열정의 힘으로써, 싸움터에서도 늘 성경을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찬송가를 불렀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적인 왕당파 군대가 곧 사탄의 군대이며, 자신들은 "곧 이루어질 것이 분명한" 재림 예수의 천년왕국을 이룩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이 연거푸 승리하자 크롬웰은 의회에서 점차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이끄는 급진파가 온건파를 누르고 의회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결국 네이즈비 전투에서 참패한 찰스 1세는 대세가 기울자 1646년 4월 스코틀랜드 군대에 항복하게 된다.
2.5.2. 2차 내전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군대에 항복하면서 내전이 잠시 종식되었지만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를 싫어한터라 마침 철기대가 쳐들어오자 크롬웰에게 40만 파운드의 돈을 받고 본국으로 송환시킨다. 추방당해서 의회측에게 모든 권력을 잃고 감금당한 찰스 1세는 이후 의회파의 손아귀 내에서 계속 외부와 연락하며 기회를 엿보았으며, 감금된 궁전에서 탈출한다. 의회의 급진 개혁을 추구하는 수평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크롬웰의 독립파가 충돌하게 되자 왕당파가 찰스 1세의 주도 하에 2차 내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왕당파는 1년여 만에 프레스턴 전투의 패배로 또다시 진압당했고, 찰스 1세는 다시 포로가 된다. 크롬웰은 더 이상 왕을 살려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의회에게 찰스 1세의 처형을 건의했으나 반역자로 몰리기 싫었던 의회는 크롬웰의 제안을 거부했다.그러자 크롬웰은 1648년 12월,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기습하여 찰스 1세의 처형에 반대하는 200여 명의 의원들을 가두어 버리고 자신의 확실한 지지자이거나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여긴 135명을 가려 의회를 편성했다. 그 중 70여 명이 출석한 이 의회를 "잔부 의회"[21]라 하며, 왕을 재판할 최고법원을 열었다.
3. 처형
물론 최고 법원의 재판은 뻔한 결말에 뻔한 줄거리로 흘러갔다. 왕은 반역자에게 재판받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버텼고, 크롬웰이 장악한 법원도 이미 정해진 각본대로 사형을 판결했다. 그나마 의회 인준이라는 형식적인 절차가 남아있었지만 왕의 사형에 반대한 의원들이 일찌감치 감금됐고 나머지 의원들은 크롬웰의 추종자들이었기 때문에 크롬웰 자신의 찬성표를 포함한 고작 59표의 찬성에 의해 찰스 1세한테 사형이 선고되었고 사형 집행이 날치기로 확정되었다. 그나마 왕이었다는 이유로 죄수처럼 끌려나가지 않고 스스로 사형장으로 걸어가는 것만은 허락되었다.1649년 1월 30일, 잉글랜드의 왕 찰스 1세는 신민들 앞에 사형수로 섰다. 사형대는 잉글랜드 왕실과 귀족들의 연회장인 화이트홀의 뱅퀴팅(Banqueting) 하우스 앞에 차려졌고 군인들이 그를 그 곳으로 인도했다.
거기서 그는 군중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자신 역시 그 누구보다도 인민들의 자유를 갈망했노라고 주장했다.[22] 그러면서도 그는 개인과 군주의 권리는 완전히 다르다면서 의회가 국왕의 통치권을 넘볼 수 없음을 말했다.
연설을 마친 찰스 1세는 집행자의 지시에 따라 사형대에 엎드렸으며 성직자가 사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 뒤 참수되었다. 찰스 1세의 목은 도끼질 한번에 깨끗이 잘렸고[23] 집행자는 잘린 머리를 대중들 앞에 높이 들어 처형사실을 알렸다.
이후 당분간 잉글랜드는 왕이 없는 국가, 즉 잉글랜드 연방이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연방은 무늬만 공화국이지 올리버 크롬웰이 의회를 해산해버리고 독재자가 되어 거의 왕이나 다름없는 권세를 휘둘렀고 압제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통치를 아들에게 세습하여 실제적으로 의회의 권한외엔 왕정과 차이는 없었다.
처형 당시 매우 인상깊은 유언을 남겼다고 하나 실제 찰스 1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알려진 내용[24]은 최후변론의 내용과 유사하다. 찰스 1세는 판결을 받기 전에 최후변론에서 "기억하시오. 짐은 당신들의 국왕, 합법적인 왕입니다. 당신들이 짐에게 어떤 죄를 덧씌웠는지 기억하시오... (후략)"란 말을 하였다. 처형되는 날 아침 자식들에게도 "이 아비는 죄를 지은 것이 없단다."라는 말을 남기고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한 연도는 1649년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의 다음해이다. 사실 이 때만해도 잉글랜드는 유럽 대륙에 비해 한수 아래인 변두리 취급을 받기도 했고, 30년 동안 이어져 온 전쟁(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의 영향도 있어서 유럽에선 찰스 1세의 목이 떨어진 것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25] 그리고 찰스 1세의 처형이 이뤄진 뒤 공화국이 세워진 게 아니라 사실상 크롬웰이 왕으로 등극했고, 또 귀족집단 내부에서 행해진 결정이라 귀족들의 특권에 손상을 주지 않은 점도 영향이 크지 않았던 원인이었다.[26]
이 찰스 1세의 처형에 관한 루머가 있는데 영국의 군대 중 해군이 Royal Navy, 공군이 Royal Air Force라고 쓰는 데 반해 육군은 그냥 British Army라고 하는데, 영국 육군은 왕정국가에서 왕의 목을 날린 전과가 있는 군대이기 때문에 Royal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실제로는 영국 육군은 전통적으로 왕의 권한 아래에 있던 다른 군과 달리 의회가 소집을 허가할 때 움직이는 의회 소속이므로 Royal이란 명칭을 쓰지 않는 것이다. 왕의 목을 친 것과 무관하다. 애초에 육군이 반란을 일으켜 국왕을 직접 시해했으면 모를까, 찰스 1세는 '재판'을 통해 사형 판결을 언도받은 것이므로 굳이 '왕의 목을 날린' 주체를 찾자면 친크롬웰파 의원 일부와 법원 쪽이라고 봐야 한다.[27]
한편 그의 왕비인 앙리에트 마리는 내전이 진행 중일 때 만약을 대비해 미리 자식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한 후,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자신의 친정인 프랑스로 돌아가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 때 어머니와 함께 수도원에 들어갔던 막내딸 헨리에타는 나중에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결혼했으나[28] 두 딸을 남기고[29] 요절했다.[30]
3.1. 사후
크롬웰파의 잔부의회(찌꺼기 의회)가 연 1649년의 고등법원과 날치기 재판은 찰스 2세의 왕정복고 이후 왕의 재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무효화 처리 되었다. 애초에 국왕이 합법적으로 처형된 것이 아니라, 내란에 패해 반역자들에게 살해된 것이며, 당초부터 잉글랜드 법원은 왕을 재판할 법적 권한이 없었다. 때문에 찰스 1세의 처형은 법률이 아니라 군대의 힘을 통해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왕에게는 재판기간 내내 제대로 된 대우와 정당한 변호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법원은 공정한 척조차 하지 않았으며 무죄추정도 거부당했고, 찰스 1세는 재판 내내 감시를 위해 군대에 고용된 경비원, 정보원, 포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찰스 1세의 처형 당시 국민들은 일반적인 환호 대신 숨을 죽였고 유럽의 국가들도 매우 부정적으로 반응했으며 이는 국왕의 순교자적인 모습을 부각시켜 동정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찰스 1세가 처형된 이후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가 끝나고 1660년 왕정복고가 되어 찰스의 장남 찰스 2세가 즉위하면서 화해를 위해 배상 및 망각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왕을 살해한 시해범들은 예외였다. 1649년 고등법원에서 찰스 1세의 처형을 주도한 이들은 곧바로 체포되어 1660년 특별 재판에서 대반역죄로 처형되었다. 런던의 채링 크로스(Charing Cross) 또는 타이번(Tyburn)에서 10명이 사형 선고를 받고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지고 끌려가 사지가 찢어졌다. 이후 찰스 1세의 재판에 찬동한 19명이 끌려가 종신형에 처해졌다. 왕정복고 이전에 사망한 자들 역시 대반역죄로 부관참시되었고, 재산 역시 몰수되었다. 국왕 시해자들 중 일부는 해외로 도피했지만 정부에서 끝까지 추적했고 세명을 추적해서 체포해 처형했다. 한편 이미 죽은 올리버 크롬웰, 헨리 아이어튼, 존 브래드쇼의 시신은 특별히 참수되어 웨스트민스터에 효수되었다. #
이후 찰스 1세는 순교자로 취급되어 잉글랜드 성공회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4. 가족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찰스 1세 (Charles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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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 (James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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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Henry Stuart, Lord Darnley) |
|
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 (Matthew Stewart, 4th Earl of Lennox) |
|||
마거릿 더글러스[31] (Margaret Dougl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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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Mary, Queen of Sco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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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5세 (James 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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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즈의 마리 (Marie of Gui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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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아나 (Anne of Denm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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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2세 (Frederick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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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3세 (Christian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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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라우엔부르크의 도로테아 (Dorothea of Saxe-Lauen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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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의 조피 (Sophie of Mecklenburg-Güstro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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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공작 울리히 3세 (Ulrich III, Duke of Mecklenburg-Güstrow) |
|||
덴마크의 엘리자베트[32] (Elizabeth of Denmark)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찰스 2세[33] (Charles II) |
1630년 5월 29일 | 1685년 2월 6일 | 브라간사의 카타리나 |
1녀 |
오라녀 공비 마리아 (Mary, Princess of Orange) |
1631년 11월 4일 | 1660년 12월 24일 |
오라녀 공 빌럼 2세 슬하 1남[34] |
2남 |
제임스 2세 (James II) |
1633년 10월 14일 | 1701년 9월 6일 |
앤 하이드 슬하 2남 2녀[35] |
모데나의 마리아 슬하 2남 2녀 |
||||
2녀 |
엘리자베스 공주 (Princess Elizabeth) |
1635년 12월 29일 | 1650년 9월 8일 | |
3녀 |
앤 공주 (Princess Anne) |
1637년 3월 17일 | 1640년 11월 5일 | |
3남 |
글로스터 공작 헨리 스튜어트 (Henry Stuart, Duke of Gloucester) |
1640년 7월 8일 | 1660년 9월 13일 | |
4녀 |
오를레앙 공작부인 앙리에트 (Henrietta, Duchess of Orléans) |
1644년 6월 16일 | 1670년 6월 30일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36] 슬하 1남 2녀 |
-
장남:
웨일스 공 찰스(1630년
5월 29일 ~ 1685년
2월 6일)
훗날의 찰스 2세. 같은 이름의 형(1629년생 찰스)이 있었지만 태어난 다음 날 죽었다. 멸망한 왕조를 복구한 이후 혁명으로 목이 날아간 아버지 찰스 1세와 달리 귀족층들의 지지를 끌어내며 안정적인 정치를 펼치기도 했으나, 굉장한 호색한이었고, 낭비벽이 심했다.
-
차남:
요크 공작 제임스(1633년
10월 14일 ~ 1701년
9월 6일)
훗날의 제임스 2세. 형 찰스 2세가 적자 없이 세상을 떠난 뒤 왕위를 이어받았다. 왕의 목을 자른 나라에서 용케도 전제정치를 펼쳤고, 결국 명예혁명으로 폐위되었다.
-
차녀: 엘리자베스(1635년
12월 29일 ~ 1650년
9월 8일)
찰스 1세가 처형당하기 전날인 1649년 1월 29일, 올리버 크롬웰의 허가로 남동생 헨리 왕자와 함께 찰스 1세를 면회할 수 있었다.[37] 그 자리에서 찰스 1세는 네 어머니(헨리에타 마리아)에게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전해달라고 한 뒤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었는지 1650년 9월 8일 1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여담으로 이 면회를 지켜본 올리버 크롬웰마저 찰스 1세 일가의 가족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
3남: 글로스터 공작 헨리(1640년
7월 8일 ~ 1660년
9월 13일)
누나 엘리자베스와 함께 처형 전날에 찰스 1세를 면회했던 인물. 찰스 1세는 자신이 처형당한 이후 의회파가 헨리를 옹립할 것이라고 여겼는지, 그에게 "이 아비(찰스 1세)는 죄가 없단다. 너희 형들이 죽지 않는 한 너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단다. 그러니 저놈들(크롬웰 파)이 널 옹립하려 해도 너는 거부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크롬웰은 왕정을 붕괴시키고 공화정을 연 다음 독재자가 되었기 때문에 헨리가 왕이 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를 처형한 사람임에도 헨리는 크롬웰에게 교육을 받아 크롬웰을 옹호하고 개신교도가 되었다. 이에 어머니의 종교인 가톨릭교를 매우 혐오하게 되어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냉랭했다고 한다. 1660년에 천연두로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
4녀:
헨리에타 앤(1644년
6월 16일 ~ 1670년
6월 30일)
이름은 어머니에게 따온 듯하다. 아버지 찰스 1세와 어머니 헨리에타 마리아가 1644년 4월 청교도 혁명의 여파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이때 헨리에타 마리아는 찰스 1세와 만난 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이후 헨리에타 마리아는 1644년 6월 헨리에타 앤을 출산하였으며 아버지 찰스 1세가 처형된 이후 외삼촌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결혼했다.[38]
5. 평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폭군의 이미지지만, 사실 제임스 2세가 그랬듯 특별히 찰스 1세가 폭군이었다든가, 무능했다는 것은 아니다. 찰스 1세는 한마디로 당시의 전형적인 절대군주였다.[39] 문제는 그게 어디까지나 본인의 사상에 불과했고, 영국의 절대왕정은 튜더 왕조와 함께 끝을 고했던지라 이미 아버지인 제임스 1세부터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살얼음판 위에서 살았는데, 찰스 1세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거다.개인으로서는 나름 매력이 있었고, 대내외적 사고도 크게 저지르지는 않았다. 쾌락주의적이었던 아버지에 비해서 품위 있고 청렴하였고 인품은 좋았기에 집권 초중반기에는 인기가 꽤나 좋았다. 반대로 의회는 국민을 대변하는 집단도 아니었고[40], 뒤이어 들어선 커먼웰스, 즉 크롬웰 정권도 그다지 민주적인 것은 아니었다.[41] 오히려 찰스 1세가 의회에 맞서서 내세운 가치들은 21세기의 관점에서 봤을때는 오히려 더 민주적이고 박애적인 것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문화유산 보호와 카톨릭 신자란 이유만으로의 처형, 정치범들에 대한 사형 중단 등등이 여기에 포함된다.[42] 한때 휘그 사관으로 무슨 민권 사상의 선구자인 것처럼 포장된 의회는 소수종파의 몰살과 우상숭배란 이유로 문화유산들에 대한 반달리즘이 시대정신이랍시고 내세우며 이에 반대하는 찰스 1세를 숨겨진 천주쟁이로 음해했다. 그래서 찰스 1세는 나름대로 후일에 괜찮은 평가도 받고 있고, 특히 찰스 2세 때 상당 부분 이미지가 복권되었다.
그렇기에 당대에는 (특히 찰스 1세가 처형된 뒤에는) 찰스 1세는 왕정복고의 상징이자 희생양으로서 여겨진 감도 있다.[43] 사망 직후에 출간된 『왕의 성상(Eikon Basilike)』이 대표적인 시각이다. 이를 위해 크롬웰은 존 밀턴 등을 동원하여 왕권신수설을 부정할 이데올로기를 마련하는데 고심했다. 즉, 어떤 확고한 이념이 있어서 왕을 죽인 게 아니라, 왕을 먼저 죽인 다음 그것 뒷수습하기 위해서 마련된 사상이 오늘날의 민권 사상이다. 144년 뒤의 루이 16세와 비슷하게 찰스 1세는 일종의 '시범타'로서 처형된 것이고, 왕권신수설의 패배의 상징으로서 그렇게 역사에 남았다.
분명 찰스 1세는 문제점이 많은 군주였다. 그러나 그것은 찰스 1세가 유난히 폭압적이어서가 아니라[44], 불통의 군주였고 왕권의 역사를 잘 몰랐다는 점에서이다. 찰스 1세는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신실하고 우직했으며, 왕권을 신앙에 의해 보장된 권리라고 생각했기에, 의회를 대화의 상대가 아닌 복종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우직함은 나름대로 킹 제임스 성경과 같은 종교적 프로파간다나 협상과 회유에 능했던 부왕 제임스 1세만도 못했다. 재정사정에서도 제임스 1세에 비해 넉넉하지 못했다. 심지어 항목에 보면 나와있듯이 욕지거리도 잘 했고(...) 정책을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것과는 별개로 그 과정에서 소통과 의견 수렴도 적극적이었던 아버지와 반대로 기본적으로 우아하고[45], 무엇보다 폐쇄적인 성향이 강했다.
제임스 1세는 동군연합이란 제도의 장단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어릴 적부터 정치적 불안정으로 악명높았던 스코틀랜드 정치판에서 험하게 구르며 자랐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왕권은 그냥 그대로 주장하면 이루어 지는 걸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했다. 부왕이 주장한 왕권신수설은 사실 그 시대 유럽 보편적인 가치관에서는 새로운 이론이라 할 것도 없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제임스 1세가 굳이 그것을 이론화하며 주장했는데, 잉글랜드 왕이 되기 이전의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본인이 " 베네치아 도제만도 못한 권력이다"라고 말 했을 만큼 왕권이 유독 약했던 스코틀랜드에서 자라나 왕권이 말로만 떠들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정치적 밀당과 파벌간 이해 관계 조절을 통해서 확보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법 체계가 그 시대 기준으로도 굉장히 발달했고 튜더 왕조의 영향으로 중앙 왕실의 권력이 강했던 잉글랜드와 반대로 꿔다놓은 수준으로 중앙 권력이 불안정했던 스코틀랜드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의식적으로, 일부러 당연한 것을 이론화하면서 차분하게 왕권을 강화하는 장기적 프로젝트를 추구한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정치적 엘리트들은 나름 불평불만은 해도 제임스 1세, 그리고 그 아들 찰스 1세의 통치에 직접적인 반항은 못한 반면, 아버지 치세만 해도 계속 왕권에 반발하며 싸우려고 들었던 세력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매파 세력이었고, 본인의 시대에도 결국 모가지 날아간 잉글랜드 내전도 스코틀랜드의 언약파 혁명으로 한 곳에 권력 누수가 생기면서 나머지 잉글랜드, 아일랜드에서도 권력이 아예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로서 동군연합의 불안함을 알고 있었으며[46] 스튜어트 가문이 탄생한 뿌리를 잊지 않고, 몸은 잉글랜드로 내려갔어도 지속적으로 스코틀랜드에 대하여 애정어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어린 아이 시절에 스코틀랜드를 떠난 이후 스코틀랜드에 대해 관심도, 흥미도 없었으며 자신의 선조들이 얼마나 스코틀랜드에서 고생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메리 스튜어트의 몰락부터 제임스 6세의 성년까지 스코틀랜드의 국정을 주도했던 장로회는 종교 문제로 제임스 6세에 대해 대단히 불만이 많았지만,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로 내려가 제임스 1세가 된 후에도 그나마 같은 나라 출신이며, 개인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고향을 잊지 않았고, 도시민과 귀족들과의 유대감을 유지했기 때문에 장로교회는 고립되어 잠잠히 있을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예 지 뿌리도 잊어 먹고 머나먼 외국에서 폭군처럼 행세하는 찰스 1세 치세에 들어서는 스코틀랜드 현지 정치적 전통 그대로 대귀족, 성직자[47], 도시민들이 연맹을 맺어 반란을 일으키니 한 곳에서 터진 권력 누수가 잉글랜드를 비롯한 다른 곳까지 모조리 해일처럼 집어삼킨 것이다.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찰스는 목이 날아갈 만큼 유독 무능하거나 폭압적이었다 할 수는 없지만, 찰스는 잉글랜드 뿐만의 왕이 아니라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왕이기도 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정치적 반골기질이 막강했고, 국왕의 권력이 약했던 스코틀랜드를 잘 이해하지 못한 탓에 벌어진 실패의 영향이 동군연합이란 체제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를 타고 다스리던 삼왕국 전체로 파급돼 찰스의 왕좌가 와르르 무너져내린 것이다. 찰스가 근세의 다른 군주들에 비해 독보적으로 폭압적이고 무능했던 건 아니지만, 영민하기 그지 없었던 자기 아버지에 비해서 정치력이 부족했고, 이에 따라 자기가 직면한 문제의 규모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가 스코틀랜드에서부터 쏟아져내린 산사태에 휩쓸렸다고 할 수 있다.
6. 미디어
노년의 오비완 케노비를 연기한 알렉 기네스가 찰스 1세를 연기하고 알버스 덤블도어를 연기했던 리처드 해리스가 올리버 크롬웰을 연기한 영화 '풍운아 크롬웰'(Cromwell, 1970)에서는 크롬웰 못지않게 비중도 많고 꽤 좋게 나온다. 영국과 미국 합작에 감독인 켄 휴즈, 주연 배우인 리처드 해리스, 알렉 기네스, 티모시 달튼 등 배우진들도 싸그리 영국인들이다. 크롬웰도 나쁘게 나오지 않고 둘이 같은 시대를 잘못 만났다 이렇게 나오며 처형당할때 왕자인 찰스 2세(티모시 달튼)나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그냥 무난한 군주 정도로 나온다.
[1]
참고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는 1661년 이 날짜에 크롬웰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해서 자기 아버지의 복수를 했다.
[2]
1629년 3월 13일 출생한 날 요절
[3]
1639년 1월 29일 출생한 날 요절
[4]
원래는 제임스 1세의
장남인 헨리가 이을 예정이었지만, 1612년 장티푸스로 18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다.
[5]
일설에 의하면 찰스 1세는 반 다이크가 초상화를 그려다 줬는데
내라는 돈은 안 내고 차일피일 미뤘다고 한다.
[6]
이걸 부추긴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최측근인 버킹엄 공작이다.
[7]
차남이긴 하나 형이 사망하는 바람에 사실상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했다.
[8]
사실 영국의 귀족제도 특성상 극소수의 귀족 가문을 제외하면 사회 지도층은 모두 젠트리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귀족 가문의 차남 이하의 후손이나 지주계층이었다. 해당항목 참조
[9]
애당초 스코틀랜드의 정치가 잉글랜드보다 개판인 데다가 스튜어트 왕조 자체가 동군연합 전 제명에 죽은 왕도 얼마 안 된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인 클랜들이 왕권 강화를 틈만나면 방해했다.
[10]
게다가 스코틀랜드는 이때까지도 잉글랜드에겐 외국이었고 스코틀랜드도 마찬가지로 잉글랜드가 외국인터라 잉글랜드와 합치기를 거부했기에 통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11]
섬나라인 영국에서 육군을 만들 필요 자체가 별로 없다. 특히 영국은 전국시대로 전쟁이 수도없이 벌어져 육군의 비중이 커진 일본과 달리 이 정도로 전쟁이 많이 벌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육군을 대규모로 양성할 필요성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육군을 만들면 대체 그 창끝이 누구한테 가장 먼저 향할 지는 뻔할 뻔자다. 사실 이는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갈등했는데 상비군의 양성은 바로 귀족들을 억누르는것이라서 귀족들이 좋아할리가 없어서 기를 쓰고 상비군 양성을 방해했다.
[12]
그렇긴 해도 가능성이 높은 말은 아니다. 애시당초 당시 국왕인 제임스 1세도 왕위에 올릴 왕족의 수가 적어서 스코틀랜드에서 데려와야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제임스 1세와 의회가 많이 싸우고 해산시키고 해서 사이가 나쁘긴 했지만 적어도 제임스 1세는 국민들에게 평판좋은 왕이었고 정치력도 나쁘지 않았으며 파국이 생길 정도의 일도 없었다.(반면 후술하겠지만 찰스 1세는 적국에 붙는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임스 1세가 암살당했다면 그 아들인 찰스 1세를 왕위에 올려놓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13]
제임스 1세는 결국 말년에 의회의 성화를 못이겨 스페인과의 전쟁을 벌일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적극적인 일전은 피하고 소극적으로 나가기를 원했다
[14]
버킹엄 공작과 라 로셀의 패배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저 유명한 소설 <
삼총사>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15]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는 불가하다는 원칙을 비롯해서 왕권도 건드릴 수 없는 일련의 ‘자유권’을 승인해 달라는 요구.
[16]
모든 의회 세력이 찰스 1세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귀족원은 찰스 1세를 지지했으며, 하원 내에서도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온건파가 존재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힘이 워낙 막강했다.
[17]
볼셰비키 역시 1차대전 도중 러시아군 병사들에게 장교에 대항해 하극상을 펼치도록 선동을 해댔다
[18]
이 사람의 외현손(딸의 증손자)이
조지 3세 때의
휘그당(...) 수상 로킹엄 후작(1730~1782)이다.
[19]
New Model Army. 간혹 '신형군'이라고도 부르며, 흔히
철기병으로 알려졌다.
[20]
이들은 당시 다른 군대의 병사들이 흔히 하던
음주나
도박조차 결코 하지 않을 만큼 규율이 엄격했다.
[21]
Rump parliament. 문자 뜻 그대로, 크롬웰 파의 찌꺼기의회.
[22]
절대군주가 인민의 자유를 갈망했다는 것이 조금 의아스러울 수 있는 게 찰스 1세가 말한 자유는 지배자의 호의에 의한 자유를 말한 것이다. 때문에 당시 의회파들은 이에 대해 진정한 자유란 자신들을 지배할 법을 스스로 정하는 것이라 반론했다.
[23]
아직
단두대가 발명되기 전이라 목을 집행자가 도끼로 직접 잘랐는데, 당시 집행자의 도끼질이 능숙하지 못했거나 도끼날이 날카롭지 못했을 경우 수번을 내려쳐 사형수가 끔찍한 고통을 겪고 저 세상에 가는 일이 빈번했다는 사실을 볼 때 찰스 1세는 운이 좋았다. 실제로 찰스 1세의 할머니인
메리 스튜어트는 4번의 도끼질 만에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았다.(처음 도끼질은 목이 아닌 뒤통수를 찍었다고...)상당히 끔찍하다....
[24]
"짐이 법을 어겼다고 치자. 그러나 신하가 왕을 처벌해도 된다는 내용이 법에 없으니, 이는 신하도 법을 어긴 것이 아닌가? 만일 왕과 신하가 모두 법을 어겼을 때, 왕이 신하를 처벌하는 것과 신하가 왕을 처벌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의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가? 짐은 후세에도 왕으로 남을 것이지만 그대들은 역사에 영원히 반역자로 기록될 것이다!''
[25]
일설로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 놈들은 자기들 왕 목을 자른다면서 비웃었지만, 본인들도
144년 후 왕은 물론
왕비까지 목을 잘랐다.
[26]
어차피 이 시대에는 공화정이나 입헌군주제라 해도 현대의 기존으로보면 소수계층만이 참정권을 가지는 과두정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노브고로드 공화국,
폴란드-리투아니아도 마찬가지였고, 영국에서 보통선거가 확립된것은 명예혁명으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나고 나서였다.
[27]
의회도 찰스 1세의 권력을 박탈하는 것에 동의했을 뿐 사형에는 반대하는 쪽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제대로 판결을 내렸다면 사형은 가지 않았을 것이다. 후일 찰스 2세가 복수를 쉽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처형 자체가 다수 의원들의 공정한 토론에 의한 찬성이 아닌 몇몇 크롬웰파의 각본재판으로 이뤄져 이들만 처형하고 나머지와는 타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8]
어머니 앙리에트 마리의 오빠가 루이 13세니 둘은 사촌이다.
[29]
카를로스 2세의 첫번째 왕비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왕비 안 마리 도를레앙. 장남 필리프 샤를도 있었지만 2살 때 죽었다.
[30]
사생아 계열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찰스 1세의 후손들은 모두 헨리에타의 차녀 안 마리 도를레앙의 후손이다.
[31]
헨리 7세의 장녀
마거릿 튜더가 두번째 남편인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32]
프레데리크 1세의 딸.
[33]
정실 소생의 자녀만 없었지, 사생아들은 차고 넘쳤다. 대표적으로 서장자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이 있었고 서자들의 후손 중
다이애나 스펜서가 있었다.
[34]
윌리엄 3세
[35]
메리 2세,
앤 여왕 등
[36]
루이 13세의 차남.
[37]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가 면회하지 않고 해외에 꽁꽁 숨었던 이유는 크롬웰 일당에게 잡히면 무조건 처형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엘리자베스와 헨리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살해당하진 않을거라 여겼고, 설령 살해당해도 왕당파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38]
참고로 (찰스 2세의 사생아의 후손들을 제외한) 현존하는 찰스 1세의 후손은 모두 헨리에타 앤의 딸 안 마리의 후손들이다. 안 마리가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왕비가 되었고, 그 외손자인
루이 15세와 루이 15세의 사위인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를 통해 여러 유럽 왕가에 찰스 1세의 혈통이 퍼지게 되었다.
펠리페 6세,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 불가리아의 마지막 차르
시메온 2세 등의 인물이 모두 헨리에타 앤과 안 마리의 후손들이다.
[39]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에 나오는 창작대사로, 찰스 1세가 의회의 의원들에게 "그대들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짐인데,
어찌하여 짐의 목을 칠 궁리는 하지 않는지 참으로 신기하도다....."라고 하는 부분이 있다. 이에 의원들은 "폐하! 임금 없이 어찌 나라가 있겠습니까?", "폐하를 배반하자는게 아닙니다!", "폐하가 펴신 독재정치나 실수는 폐하를 모신 신하들이 나쁜 탓이니 그 역적 간신들을 처치하자는 것입니다!"라고 하는데 옳고 그름을 떠나서, 왕권신수설 신봉자인 찰스 1세와 의회와의 관계, 그리고 그의 눈에 의회가 어떻게 보였는지를 한 컷에 담아내는 명장면이라 할 만하다.
[40]
귀족들의 모임인 상원은 물론이고 하원조차도 최소 지역유지 급은 되어야 투표에 참여할수 있었던 상류층들의 집합소였다.
영국 하원이 국민들을 대변하는 기구가 된 것은 19세기 중후반이나 되어서로 생각보다 오래 된 일은 아니다.
[41]
이런 점은
프랑스 혁명 직후의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집권기나
나폴레옹의 제1제국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42]
찰스 1세는 즉위 후 16년간 단 한 사람도 사형에 처하지 않았으며 이를 자신의 자랑으로 여겼다. 찰스 1세 시대의 첫 정치적 사형은 의회파가 찰스 1세의 충신이었던 스트래퍼드 백작을 증거도 없이 반역자로 몰아서 폭동까지 선동해서 처형해버린 사건이다.
[43]
실제로 찰스 1세가 만든 배는 그 뒤로 반세기 가까이 요긴하게 써먹었으며, 만들어낸 임시세도 세금 뽑아먹는데 요긴하게 써먹었다.(...)
[44]
오히려 집권 초에는 정치적, 종교적 사안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찰스 1세 시절 로드 대주교가 사람들 코와 귀를 자르는 폭정을 벌인다고 청교도들의 불만이 대단했지만 사실 찰스 1세 전에는 그냥 죽였다.
[45]
왕이 우아한 건 기본적으로 문제는 아니지만, 당시는 종교개혁 이후 엄숙주의와 회화, 조각 같은 시각적 미술을 우상숭배라고 배격하던 청교도적 분위기가 왕성했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였다.
[46]
장점은 한순간에 영토가 늘어난다는 것, 단점은 외국인 군주로서 서로 다른 문화와 정치 등으로 혼선이 빚어질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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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하자면 여긴 개혁교회이므로 성직자라 하더라도 당연히 가톨릭, 정교회식의 주교단으로 대표되는 사도 전승에 따른 직위 체계가 아니라, 워리스턴의 아치볼드 존스턴, 에든버러 대학 신학교수 알렉산더 헨더슨, 로버트 베일 등 영향력 있었던 개신교 목사, 신학자들을 일컷는다.